<연중 제29주일>(10.16)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18,1) '믿음이 있어야 기도한다.' 오늘 복음(루카18,1-8)은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입니다. 고을의 한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에게 가서, '자신과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달라.'고 졸라댑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한동안 과부의 청을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계속해서 졸라대며 자신을 귀찮게하자, 과부의 청을 들어줍니다.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불의한 재판관도 귀찮게 졸라대는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데, 하물며 의로우신 하느님께서 당신이 선택하신 이들의 간청을 물리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밤낮으로 부르짖는"(18,7) 과부처럼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18,1)는 것입니다. 그것도 사람의 아들이 오실 때까지. 곧 세상 종말이 올 때까지. 예수님 시대 유다인들은 하루에 세 번 기도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의 보편적 기도형태도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형태입니다.(아침기도, 낮기도, 저녁기도) 이 세 번의 기도를 꾸준하게 잘 바치는 것도 힘든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긴 기도가 아니라 끊임없는 기도를 원하십니다. 기도는 나의 청을 들어주시는 분께 대한 믿음의 구체적 표현입니다. 기도는 먼저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면서 나의 청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간절하게 주님께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간절한 매달림을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유는 지금 나의 청을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이 포기는 나의 청을 들어주시는 분께 대한 신뢰, 곧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간청하라.'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18,8) 믿음이 있는 사람은 기도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기도합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 16일 ㅡㅡㅡㅡ 기도는 나의 청을 들어주시는 분께 대한 믿음의 구체적 표현입니다. 기도는 먼저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면서 나의 청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간절하게 주님께 매달리는 것입니다. |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10.17)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루카12,20) 군중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의 요청을 거절하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십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12,15) 그리고 이어서 탐욕으로 가득찬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루카12,16-21)를 들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람의 생명은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삶 속에서 체험하고 있습니다. 만약 사람의 생명이 재산에 달려있다면 재산이 많은 재벌들이 그렇게 빨리 세상을 떠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부자들이 빠질 수 있는 유혹은 돈과 재물을 하느님보다 높은 자리에 놓는 '우상숭배의 유혹'입니다. 그리고 '먹고 즐기는 유혹'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14,17) 라고 말한 바오로 사도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와 가진 것에 만족한 삶'을 살라고 권고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6,7-8.10) '가진 것에 만족한 삶'의 의미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즐기는 삶인 무위도식(無爲徒食)의 삶이 아니라, 가난에 구애받지 않는 삶인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의 의미로 다가옵니다. 돈과 재물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선(善) 중에 하나입니다. 그 좋은 것으로 '사랑의 나눔'도 하고, '하느님 나라 건설의 도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 17일 ㅡㅡㅡㅡㅡ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14,17) 라고 말한 바오로 사도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와 가진 것에 만족한 삶'을 살라고 권고합니다. ***하느님의말씀이 꿀맛보다도더달도다.자기삶에만족하며하느님안에서기뻐하며살라하신다. |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10.18)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루카10,2) 오늘 복음(루카10,1-9)은 예수님께서 일흔 두 제자를 당신께서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는 '파견사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10,2) 예수님께서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시는데, 어떤 일꾼이 적다는 것인가? 단순히 양적인 의미의 숫자가 적다고 말씀하시는건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일꾼'은 좁게 생각하면 지금의 '사제'이고, 좀 더 넓게 생각하면 복음화에 필요한 '모든 신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숫자의 의미가 양적인 의미보다 질적인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단순히 양적으로 사제의 숫자를 늘려야 된다는 의미보다, 보다 더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처럼 사목하는 사제들의 숫자가 늘어나야 한다는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10월18일인 오늘은 성 루카 복음사가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분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성 루카는 이방인의 사도인 바오로와 함께 선교 활동도 했고, 루카 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분입니다. 루카는 가난한 이들과 죄인들을 특별히 더 사랑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복음에 담아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늘 낮은 곳, 더 낮은곳으로 향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으로 표현하자면, 예수님의 사목은 작은사목, 낮은사목, 특수사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 3천년기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교회 앞에 던져진 화두(話頭)입니다. 시노달리타스의 핵심은 '함께 하기', 그러기 위해서 '더 낮은 곳을 바라보고 그곳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그 중심에 사제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닮은 사제들, 그런 일꾼들이 많아지게 해달라고 자비로우신 주님께 청합시다! "성 루카 복음사가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이병우 루카 신부 |
<연중 제29주간 수요일>(10.19)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12,40) '믿음의 문제!' 오늘 복음(루카12,39-48)은 '깨어 있어라'는 말씀과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이 분명한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문제는 '나의 몫'이고, 이것은 또한 '지금 나의 믿음의 문제'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신 예수님과 그분의 다시오심(재림)과 영원한 생명과 죽음이라는 믿을 교리의 핵심을 누가 더 굳게 믿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믿음만 있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17,20) 이런 믿음을 간직하고 있을 때 어떠한 기적이 일어날까? 먼저 오늘 복음이 실행되는 '깨어 있음의 기적'과 '내 뜻이 아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나와 너 그리고 세상이 복음이 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깨어 있음과 충실한 종의 의미'는 지금 여기에서 '내가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와 세상이 함께 복음이 되는 것'이고, 이 복음으로 지금 여기가 함께 기뻐하면서 사는 '하느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루카12,47)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매일 말씀 특히 복음을 통해서 오늘 우리가 깨어 있고 실행해야 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주십니다.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지금 깨어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잘 실행하고 있는 충실한 종의 모습인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고 성찰해 보는 복된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 '깨어 있음의 기적'과 '내 뜻이 아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기적'. '나와 너 그리고 세상이 복음이 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깨어 있음과 충실한 종의 의미'는 지금 여기에서 '내가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와 세상이 함께 복음이 되는 것'이고, 이 복음으로 지금 여기가 함께 기뻐하면서 사는 '하느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루카12,47)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매일 말씀 특히 복음***을 통해서 오늘 우리가 깨어 있고 실행해야 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주십니다.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지금 깨어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잘 실행하고 있는 충실한 종의 모습인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고 성찰해 보는 복된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12,40) |
<연중 제29주간 목요일>(10.20)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49a.51d) '죽음의 세례!' 오늘 복음(루카12,49-53)을 '문자적 의미' 안에서만 바라보면, '이것이 과연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합니다. '사랑.기쁨.평화.인내.호의.선의.성실.온유.절제'가 예수님의 모습인데, 불을 지르러 오셨고,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말씀하시니.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셔서 하신 그분의 모습을 보면, 분명 예수님은 불을 지르러 오신 분이시고, 분열을 일으키러 오신 분이십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과 같은 예수님의 적대자들 위치에서만 보면, 예수님께서는 유다교의 모든 질서를 흐트러 놓으신 '일어탁수(一魚濁水)'이셨습니다. 성령의 불로 유다인들의 세상을 정화하셨고, 분열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문제가 크게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시니 '참과 거짓'이 드러났고, 예수님께서는 '일어탁수'의 존재이셨기 때문에, 적대자들의 손에 의해 십자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12,50) '예수님의 세례'는 예수님 부활의 절대적 전제인 '죽음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세례를 통해 부활의 세례로 나아가셨습니다. 그렇게 부활의 절대적 전제가 죽음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죽음의 세례를 통해 그 너머에 있는 부활의 세례로 나아갑시다! '죽음의 세례'가 상징하는 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불의 의미'이고, '분열의 의미'라고 묵상되었습니다. 가족보다 하느님을 먼저 그리고 더 사랑해야 하는 죽음의 세례, 내가 먼저 죽는 죽음의 세례,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악의 모습이 성령의 불로 정화되는 죽음의 세례가 내 안에서 일어나는 복된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 |
<연중 제29주간 금요일>(10.21)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루카12,56) '이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오늘 복음(루카12,54-59)은 '시대를 알아보라'는 말씀과 '늦기 전에 화해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의 모습을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우리는 이 시대의 모습을 '나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 그리고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와 지구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습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겠습니다. 보다 더 나은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성령의 불로 인한 혼란과 분열이 아니라, 육의 행실들의 결과인 혼란과 분열이 가정과 나라와 지구공동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과 정치판의 싸움과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먹을 것이 없어 기근에 허덕이는 이들과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자연재해가 바로 그런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임박한 종말의 모습인 '재난의 시작'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루카21,10-11) 이렇게 보여지고 있는 이 시대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바로 오늘 복음 후반부의 말씀인 '늦기 전에 얼른 화해하고 회개하라.'는 메시지가 아닐까요? 계속해서 미뤄지고 있는 나와 너의 회개와 공동체의 회개가 점점 더 혼란과 분열을 크게 하고, 그것이 세상 종말을 앞당기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에페4,1-3) 지금 이 시대는 '화해의 시대, 회개의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함께 애써봅시다! 네 예수님! 이병우 루카 신부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루카 12,47-48) ******교회의 교사들과 사도들에게 주신 가르침 그러자 주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매우 구체적인 예를 드시며, 이 명령이 교사의 직책을 받아 교회에서 남보다 영향력 있는 자리에 앉은 사림들이 각별히 더 새겨들어야 할 것임을 밝히셨지요.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이것이 이 구절의 단순하고 명백한 의미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 뜻을 마음에 새긴다면 그것이 사도의 직무, 곧 교사의 직무로 불린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유용한지 알게 될 것입니다. 구원자께서는 이해력 깊고 믿음이 착실한 사람들을 뽑아 거룩한 교의를 가르쳐 주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당신 영광을 알아보게 된 신자들 위에 종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동료 종들에게 정해진 양식을 내주라고 그들에게 명하셨습니다. 그는 생각 없이 아무 때나가 아니라 적절한 때에 그렇게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각 사람에게 적절한 영적 양식을 넉넉히 줄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50가지 예수 모습 / 안셀름 그륀] 16. 유령 예수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예수님은 어디든 우리와 함께 가신다. 물위든, 도달할 수 없는 곳이든 우리와 함께 가신다. 그분은 삶의 한밤 중에 우리와 함께 가신다. 나는 이런 예수님을 체험하며 용기를 얻는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우리는 모르고 살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요”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이 누군지 알려 주신다. "나요”라는 이 말씀에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 -"나다. 나는 곧 나다"- 과 같은 계시가 담겨 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 친히 계시다. 나는 고난을 당할 때마다 예수께서 구해 주시리라 믿는다.(91) 10월19일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우리는 모두 그저 이 세상의 나그네입니다! 어떤 사람이 한창 건축 중인 공사장을 지나다가 열심히 일하고 있는 3명의 인부를 보았습니다. 그는 첫 번째 인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첫 번째 인부가 대답했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그저 하루하루 일당을 받으니 시키는 대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인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두 번째 인부가 대답했습니다. “보면 모르시오? 벽돌을 쌓는 중이요.” 세 번째 인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세 번째 인부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지금 아름다운 성당을 짓고 있는 중이랍니다.” 그런데 때로 주인의식이 지나치게 되면 주인행세를 하게 됩니다. 여기서 주인의식과 주인행세 간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겸손의 덕의 유무입니다. 주인의식은 주인으로서의 당당함과 함께 주인으로서의 겸손도 함께 지녀야 합니다. 주인행세에는 당당함과 요구만 있지 겸손이나 배려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슬기롭지 못한 불의한 집사가 지녔던 태도는 100% 주인행세였습니다. 그는 분명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한낱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에게 일정 부분 역할을 부여했습니다. 겸손과 배려의 덕이 전혀 없었던 불의한 집사는 갑자기 자신에게 부여된 쥐꼬리만한 권한, 별것도 아닌 작은 완장에 너무 과도한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갑자기 어깨가 우쭐해지면서 주인행세를 시작했습니다. 주인이 잠시 맡긴 재산을 마치 자신의 것 인양 흥청망청 썼습니다. 하인과 하녀들을 사정없이 때렸습니다. 매일 먹고 마시고 술에 취해 지냈습니다. 참으로 제대로 된 주인행세의 표본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던지는 경고의 말씀은 날카롭기만 합니다.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루카 복음 12장 46절) 사실 우리 인간 존재는 본질상 그 어떤 것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한 나라의 최고 통치권자가 되었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해서 그 나라가 그 사람의 것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불과 몇 년 만에 그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나라의 통치권을 물려주고 쓸쓸히 내려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모은 막대한 돈이 있다고 합시다. 우리가 그 돈의 영원한 주인이 될 수 있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면 우리 모두 나이를 먹습니다. 80, 90, 100... 그때가 되면 천만 원짜리 수표를 손에 쥐어 줘도 이게 돈인지 종이인지도 구별못하게 됩니다. 애써 모은 돈들은 모두 자동으로 누군가의 소유로 넘어가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모두 그저 이 세상의 나그네입니다. 영원한 주인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언제나 변치 않는 든든한 주인은 영원히 살아 계시고 다스리시는 하느님 한 분뿐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10월19일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참 행복의 비밀: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서울에서 클럽을 운영하며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겨온 영수(황정민). 운영하던 가게는 망하고 애인 수연(공효진)과도 헤어지고, 설상가상으로 심각한 간경변까지 앓게 됩니다. 영수는 도망치듯 시골 요양원 ‘희망의 집’으로 내려갑니다. 여기에서 8년째 요양원 ‘희망의 집’에서 살며 스텝으로 일하고 있는 은희(임수정)를 만납니다. 숨이 차면 죽을 수도 있는 중증 폐 질환 환자지만 은희는 밝고 낙천적입니다. 자신의 병에 개의치 않고 연애에도 적극적인 은희는, 첫날부터 자꾸만 신경 쓰이던 영수에게 먼저 다가갑니다. 죽음을 몹시도 두려워하는 영수는 아픈 것도 무서운 것도 없어 보이는 은희에게 의지하게 되고, 손을 잡고, 밤을 함께 보내면서 보통의 커플들처럼 그렇게 행복한 연애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요양원을 나와 함께 살기로 합니다. 1년 뒤. 은희의 도움으로 건강을 되찾은 영수는 마냥 행복한 은희와는 달리 둘만의 생활이 점점 지루해집니다. 궁상맞은 시골 생활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병약한 은희 옆에 있는 것도 부담스럽습니다. 이때 영수 앞에 때마침 서울에서 수연이 찾아오고 서울 생활로 돌아오라고 합니다. 영수는 은희를 떠나 서울로 갑니다. 은희는 힘들지만, 영수를 놓아줍니다. 영수는 서울에서 수연과 행복할 것 같았지만, 역시 행복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또 술과 담배를 합니다. 그리고 다시 간이 몹시 안 좋아져 입원합니다. 그리고 은희가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병원을 찾은 영수는 은희의 죽음을 봅니다. 은희는 영수를 보고 모든 것을 용서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렇게 영수는 진짜 행복은 은희와 있을 때였음을 깨닫고 한없는 눈물을 흘립니다. 왜 은희는 영수에게 수연보다 더 큰 행복을 줄 수 있었을까요? 죽음이 목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사랑에서 옵니다. 그런데 제대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내어줌입니다. 죽음이 없으면 갖는 사랑을 하고 죽음이 있으면 주는 사랑을 합니다. 죽음을 전제하면 모아들이는 삶이 아닌 내어주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한 것입니다. 모아들이는 늪이 되느냐, 내어놓는 옹달샘이 되느냐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사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달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항상 죽음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양식을 충실히 내어줄 수 있는 집사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이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찾아오실 수 있습니다. 곧 오늘 우리가 죽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죽음을 옆에 둔 사람만이 양식을 종들에게 내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옆에 두지 않는 사람은 먹고 마시고 종들을 때립니다. 그런 사람은 사랑받지 못하기에 행복하지도 못하고 나중엔 구원받지도 못합니다. 죽음이나 멸망에 관한 것은 두려움을 자아내기 때문에 우리가 좋아하는 주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무일도 끝기도에서 매번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만이 다음 날에도 이웃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는 옹달샘과 같은 삶을 살게 합니다. 사랑을 많이 받아야 행복합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우리가 태어날 때 우리만 울었고 다른 모든 사람은 웃었듯이, 우리가 죽을 때 우리는 웃고 다른 모든 사람이 울게 살라고 하셨습니다. 죽을 때 웃으려고, 곧 오늘 밤에 잠자면서 웃으려고 하는 삶이 종말을 사는 삶입니다. 죽음을 옆에 두지 않으면 참으로 내어줄 수 없고 그러면 사랑받을 수 없어서 행복할 수 없고 구원도 받지 못함을 잊지 맙시다. 항상 오늘이 마지막이라 여기고 살아갑시다. 그래야 행복하고 영원한 생명도 누리게 됩니다. 이렇게 하도록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죽어도 부활할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기쁨가득한day~♡~오늘도 평화~🙏 |
목---'죽음의 세례'가 상징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불의 의미'이고, '분열의 의미'라고 묵상되었습니다. 가족보다 하느님을 먼저 그리고 더 사랑해야 하는 죽음의 세례, 내가 먼저 죽는 죽음의 세례,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악의 모습이 성령의 불로 정화되는 죽음의 세례가 내 안에서 일어나는 복된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금---"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에페4,1-3) 지금 이 시대는 '화해의 시대, 회개의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함께 애써봅시다! 네 예수님 ! 묵상 ---언젠가 성경을 보고 참으로 매력적이신 주님을 만나뵈었다는 기쁨 크고 무한하게 위대하신 반면 세심하게 사랑하시는 모습에 달콤하게 취하게 하시는 분 인간은 어느한쪽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어 성당짓는 인부처럼 큰그림을 보고 '아름다움' 속에서 시작하고. 수련하여.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아름답게 변해가는 것 찰나의 순간 속에서도 우리의 삶에 주님의 힘을 불어넣는 일이 발생하는 거룩한 삶이되면 참 좋겠습니다. 아멘 참 감사합니다 울 티모테아 수녀님 !!! |
<연중 제29주간 토요일>(10.22)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13,5) '회개하지 않으면 죽는다!' 오늘 복음(루카13,1-9)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말씀과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사건, 곧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학살한 사건과 실로암 탑이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희생된 사건을 언급하시면서, 우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다인들의 생각은 각종 불행과 질병은 죄의 결과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불쌍하게 희생된 사람들의 처지는 그들의 죄의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불행은 죄의 결과가 아니고,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13,4-5) 회개가 참으로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려운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야 할 '회개'는 '내 생각이 바뀌는 것', '내 마음이 바뀌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참으로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입니다. '회개는 내가 살기 위해서 합니다.' 그리고 '내가 죽지 않고 사는 것이, 너와 세상을 살리는 일'이기에 합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매일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 모두가 죽지 않고 사는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믿겠다고 약속한 우리들입니다. 그 약속은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죽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늘 회개할 기회를 한번 더 주시는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오늘도 얼른 '회개의 길'로 나아갑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
하느님 아버지를 믿겠다고 약속한 우리들입니다. 그 약속은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죽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늘 회개할 기회를 한번 더 주시는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오늘도 얼른 '회개의 길'로 나아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