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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은혜/연중시기

<연중 제25주일>(2022.9.18)사랑은 소금처럼 자기를 녹이는 아픔이 있네. 그러나 사랑은 촛불처럼 자기를 태우는 슬픔이 있네."


<연중 제25주일>(9.18)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루카16,8)
'영리한 대처!'
오늘 복음(루카16,1-13)은 '약은 집사의 비유'입니다. 어떤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전해들은 주인이 집사를 불러 말합니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루카16,2)
그러자 집사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 자기 마음대로 탕진해 줍니다. 집사가 그렇게 한 것은 주인으로부터 쫓겨난 후에 살기 위한 처사였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주인으로부터 호되게 야단을 맞아도 부족할텐데, 주인은 오히려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합니다. 이유는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인 약은 집사의 비유가 우리에게 전하는 핵심 메시지는 '영리한 대처'입니다.
오늘 복음은 불의한 집사가 살아남기 위해 행한 '약은 행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도 이제와 영원히 천국에 들어가려면 약은 집사처럼 영리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지금 그렇게 영리하게 대처하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나는 얼마나 이제와 영원히 하느님의 나라 안에서 살기 위해 영리하게 대처하고 있는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모두의 구원을 위해 영리하게 대처하고 있는가?
당신 자신을 모든 사람의 몸값으로 내어 주신 그리스도 예수님처럼, 모두의 구원을 위해 나 자신을 내어 놓고 있는가?
"그러나 사랑은 소금처럼 자기를 녹이는 아픔이 있네. 그러나 사랑은 촛불처럼 자기를 태우는 슬픔이 있네."('봉헌' 노랫말 中에서)
율법의 완성인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
지금 여기에서 함께 기뻐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
소금이 되는 사랑, 촛불이 되는 사랑을 하는 것!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 아멘 !!!!!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영리한 대처'가 아닐까요?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25주간 월요일>(9.19)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루카8,16)
'등불의 비유!'
오늘 복음(루카8,16-18)은 '등불의 비유'입니다.
등불이신 예수님께서 어두운 세상을 밝히러 오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예수님처럼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요 빛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나서, 따르는 제자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는 '함구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관한 소문은 널리널리 퍼져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이신 당신의 신분을 감추셨지만,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요 빛이셨기 때문에 세상에 드러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나의 착한 행실과 선하고 따뜻한 마음, 사람들로부터 들려오는 좋은 평판, 겸손과 온유로 무장된 밝고 평화로운 모습. 이런 '천사와 같은 모습'이 바로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요, 빛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의 흘러넘침'이 바로 '세상 복음화의 핵심이요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시대는 말로 외치는 복음화가 통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말에 앞서 위에서 언급한 천사와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삶으로 기쁘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너에게 "성당에 나가자."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믿고 따라가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등불이시고 빛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나의 거룩한 행실로 세상의 등불이 되고 빛이 됩시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이병우 루카 신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9.20)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9,24)
목숨을 구한 사람들!
오늘은 한국천주교회의 큰 날인 '103위 순교 성인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뜻깊은 영명축일을 맞이한 모든 분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103위 순교 성인들은 '예수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른 사람들'입니다. '자기 목숨을 잃으면서 자기 목숨을 구한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목숨을 잃었는데 목숨을 구했다고 말합니다. 죽었는데 죽지 않고 살았다고, 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역설의 신비인 신앙의 신비'입니다. 이 신비는 일찍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드러난 신비'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로마8,31-32.35.37)

103위 순교 성인들은 '모든 것을 이겨낸 의인들'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손 안에 있는 큰 은혜를 입어 지금은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으면서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고 있는 분들'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9,23)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끝까지 잘 따라간 장한 순교자들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큰 '영적 유산'입니다. 깊은 감사를 드리면서, 우리도 예수님의 뒤를 잘 따라갑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9.21)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마태9,9)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당시 세리는 죄인 취급을 받았던 인물이니,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신 것입니다. 죄인인 마태오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마태9,9-23)이 전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부르러 이 세상에 오셨고, 지금도 그런 죄인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본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태9,11)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2-13)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죄인들을 부르시고,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시는 예수님!

저는 이런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예수님이 참 좋습니다.
그래서 저는 매일, 아니 매순간 이런 임마누엘이신 예수님 앞에서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은혜를 받기 위해서.

오늘 독서는 사도 바오로의 옥중서간(에페소서.콜로새서.필리피서.펠레몬서) 중에 하나인 에페소서의 말씀인데,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하십시오."(4,1-3)
오늘도, 죄인인 나를 불러주신 자비이신 주님께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리면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려고 애쓰는 자녀들이 됩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25주간 목요일>(9.22)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9,9)
'되살아 나는 길!'
헤로데, 곧 헤로데 대왕의 아들인 헤로데 안티파스가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말씀과 치유기적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해 합니다. 헤로데에게 전해진 예수님에 관한 소문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요한'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엘리야', 셋째는 '옛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헤로데는 이 세 가지 소문 중에서도 자기가 죽인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라는 소문을 듣고 더 당황해 했을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마음이 불편하고 불안해 합니다. 그래서 큰 잘못이나 죄를 진 사람은 이 불편과 불안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 스스로 경찰서를 찾기도 합니다. 그리고 믿는 이들은 고해소를 찾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니 헤로데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하면서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니 말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으면서 그분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이들은 '죄에서 해방되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죄 짓고도 사는 길'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 길이 바로 '회개의 길'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주님은 우리가 돌아오기를, 회개하여 다시 되살아나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돌아오는 이들의 죄를 결코 묻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기뻐하시면서 잔치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카15,22-24)
다시 돌아갑시다!
그래서 함께 즐거운 잔치에 참여합시다!
그래서 불편과 불안으로부터 해방됩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1,2)
이병우 루카 신부


겸손, 아량 , 부드러운 혀----명심

집안 곳곳에 복을 주렁주렁 달아 주십니다 .
주님 감사합니다

다시 돌아갑시다!
그래서 함께 즐거운 잔치에 참여합시다!

기뻐하시면서 잔치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카15,22-24)

♡♡♡자비로우신 아버지 ♡♡♡
가나 혼인성사의 축복을 가득내려 주소서 아멘 !!!
모든게 주님의 축복입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9.23)

"예수님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9,20)
'나는 정말 믿는 사람인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루카9,19)

그러자 예수님께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다면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의 이 물음에 이제는 내가 대답해야 할 차례입니다.

나에게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나는 정말로 예수님을 믿고 있는가?
지금 여기에서 너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나는 성직자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고통과 불편함 앞에서 드러나는 나의 모습은?

이러한 단순한 물음을 통해서도 나의 믿음이 참 믿음인지를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21세기의 위대한 성인으로 공경 받고 있는 '오상의 비오 신부님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분들과 모든 프란치스칸 가족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상의 비오 신부님'은 성 프란치스코의 제자인 카푸친 작은형제회의 수도 사제로서, 무려 50년 동안(1918~1968)이나,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인 오상을 받으셨습니다.
말이 오상이지, 50년 동안 육체적 고통 속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상이 시작되면서 많은 신자들이 신부님을 따랐고, 수도회로부터 여러 제재들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비오 신부님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기쁘게 순종하셨습니다. 그렇게 50년 동안을 고통의 신비 속에서 사셨습니다. 많은 고난과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신 예수님처럼 모든 고통을 이겨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비오 성인의 위대함'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비오 성인의 이 위대함을 지금 여기에서 살도록 합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25주간 토요일>(9.24)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9,44)
'제자들의 무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죽으러 오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이 되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 번에 걸쳐 이를 확인시키고 또 확인시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이나 기적사화를 통해 예수님의 신성이 드러날 때, 이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리신 이유도, 예수님 부활의 절대적 전제인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맨 마지막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루카9,45) 라고 전합니다.

그렇습니다.
'고난과 배척과 죽음 뒤에 있는 부활'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삶 안에서 보면, '이 둘은 하나'입니다.
부활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죽어야만 부활한다는 진리를, '하나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십자가 없는 부활만을 바라보았던 것 같습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16,22) 라고 말한 수석 제자인 베드로의 말을 보니 말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나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예고 앞에서 드러난 제자들의 무지가 우리의(나의) 무지이지 않나요?
하나인 십자가와 부활을 자꾸 분리시키려고 하면서, 죽음 없는 부활만을, 고통 없는 기쁨만을 얻으려고 하지 않나요?
한번 성모님처럼 곰곰이 생각해 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십자가를 자꾸 바라보라고 끊임없이 말하는 이유는,
그 너머에 감추어져 있는 부활 때문입니다.
그 진리를 십자가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백성의 구원이다. 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부르짖으면 내가 들어 주고, 영원토록 그들의 주님이 되어 주리라."(입당송)
이병우 루카 신부
2022.9.24토요일---------- 아돌 결혼식 --싸랑하고 축하혀
저녁미사 --신부님 미사 --이장호요한 손효진 요안나  감사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