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르나르도 아빠스의 강론에서 | (Sermo 5 de diversis, 4-5: Opera omnia, Edit. Cisterc. 6,1[1970] 103-104) |
관상의 단계에 대하여 |
예언자 하바꾹서에 의한 독서 | 2,5-20 |
제1독서 |
예언자 하바꾹서에 의한 독서---- |
5 재물은 조금도 믿을 것이 못된다. 돈이 있다고 우쭐대다가는 나둥그러지리라. 목구멍은 죽음의 구렁처럼 삼켜도 삼켜도 성차지 않아 뭇 민족을 끌어들이고 만백성을 모아들였건만, 6 그들이 모두 풍자시로 비웃으며 조롱하는 시로 욕설을 퍼부으리라. “화를 입으리라! 남의 것을 먼지까지 긁어 모으고 남의 것을 전당 잡아 치부하는 것들아, 7 빚쟁이들이 갑자기 달려들 날이 오리라. 너에게 시달리던 자들이 머리를 쳐들고 너를 털 날이 오고야 말리라. 8 그토록 수많은 백성을 털었으니, 그 남은 백성에게 이제는 너희가 털리리라.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마을을 짓밟고 성읍마다 쳐들어가 주민들을 무찌른 탓이다. 9 화를 입으리라. 저만 잘 살겠다고 남을 등쳐 먹는 것들아, 재앙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려고 높은 곳에 둥지를 틀었지만 10 너희가 꾸민 것은 패가 망신할 일뿐, 뭇 백성을 망치다가 죄를 받게 되었다. 11 담벼락 돌이 원수갚아 달라고 울부짖으면, 집 안에선 들보가 맞장구치리라. 12 화를 입으리라. 죄없는 사람의 피를 빨아 성읍을 세우는 것들아, 남의 진액을 짜서 성을 쌓는 것들아, 13 뭇 민족이 일껏 쌓은 것이 불타 버리고 뭇 종족이 애써 세운 것이 허사가 되리니 이것이 바로 만군의 주께서 하시는 일 아니냐? 14 바다에 물이 넘실거리듯, 땅 위에는 주님의 영광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리라. 15 화를 입으리라. 홧김에 이웃에게 술을 퍼먹여 곯아 떨어지게 하고는 그 알몸을 헤쳐 보는 것들아, 16 그러고도 네가 영광을 누릴 듯싶으냐? 실컷 능욕이나 당하리라. 이제는 네가 잔을 받을 차례다. 마시고 벌거숭이가 될 차례다. 주님의 오른손에 들린 잔이 너에게 이르렀다. 영광을 누린 그만큼 창피를 당하리라. 17 레바논을 내리친 그 힘이 너를 휩쓸겠고 짐승들을 살육하던 그 무서움이 너를 덮치리라.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마을을 짓밟고 성읍마다 쳐들어가 주민들을 무찌른 탓이다. 19 화를 입으리라! 나뭇조각을 보고 ‘일어나십시오.’ 하며 말 못하는 돌멩이를 보고 ‘그만 주무십시오.’ 하는 자들아, 그런 것에게서 무엇을 배우겠다는 말이냐? 금과 은으로 싸고 꾸렸지만, 가슴에는 숨기도 없는 것, 18 그런 우상을 새겨 무슨 덕이라도 볼 성싶으냐? 말 못하는 허수아비를 만들어 놓고 무슨 이익이라도 볼 성싶으냐?” 20 주께서 당신의 거룩한 전에 계신다. 온 세상은 그의 앞에서 잠잠하여라. |
2022.9.7 |
제2독서 |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의 강론에서)관상의 단계에 대하여 |
흔들림이 결코 없는 든든한 바위이신 그리스도 위에다 세운 보루에 들어가 그 안에서 자리잡도록 합시다. 시편에 바로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은 바위 위에 든든히 내 발을 세우시며, 내 걸음 힘차게 해주셨나이다.” 이렇게 든든한 바위 위에 견고히 세워져 관상 안으로 들어가,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이고 우리가 그 말씀에 무슨 말로 응답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관상의 첫 번째 단계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이고 그분이 좋아하시는 바가 무엇이며 그분의 마음에 드는 바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실수하는 일이 많고” 또 우리 의지의 담대성이 그분의 올바른 의지를 거슬러 반항할 때 이 두 의지가 합치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존하신 하느님의 힘센 손 아래에다 우리 자신을 끌어내리고 그분 자비의 눈앞에서 우리의 불쌍한 처지를 보여 드리도록 노력하며 다음과 같은 기도를 바칩시다. “주여, 나를 고쳐 주소서. 그러면 나는 회복되리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러면 나는 구원되오리이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영혼을 고쳐 주소서. 당신께 죄를 얻었나이다.” 이렇게 마음의 눈이 기도의 빛으로 일단 밝아지게 되면 우리 자신의 영혼 안에 쓰라림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게 되고 하느님의 영 안에서 큰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의지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를 생각하기보다 그분의 의지 자체를 생각하게 됩니다. “참 생명이란 주님의 의지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의지와 잘 맞는 것은 우리에게 더욱 유익하고 우리의 갈망에 더욱 훌륭히 응답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영혼의 생명을 보전하는 데에 쏟는 관심과 똑같은 정도의 관심을 주님의 의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데에 쏟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심중 깊숙이까지 파고 들어가시는 성령의 지도하에 우리가 영신 수련에서 어느 정도의 진보를 이루었을 때, 하느님께서 얼마나 감미로우시고 또 얼마나 선하신 분인지를 생각하고, 예언자와 함께 하느님의 의지를 깨닫게 해주시기를 기도하고, 또 이제부터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이 아닌 그분의 성전을 방문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 안의 영혼이 시름을 못 잊삽기에 돌이켜 당신을 생각하나이다.” 영성 생활의 전부는 다음 두 가지 위에서 회전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볼 때에는 괴로움을 느끼는 데, 그 슬픔은 구원을 가져다 줍니다. 한편 하느님을 바라볼 때에는 우리 자신은 회복되고 성령의 기쁨에서 위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 관한 관상에서 두려움과 겸손을 얻고 하느님에 대한 관상에서 희망과 사랑을 얻는 것입니다. |
마침기도 |
기도합시다 우리를 구원하시어 당신의 자녀 되는 자격을 주신 천주여, 사랑하시는 당신의 자녀들을 인자로이 굽어보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에게 참된 자유와 영원한 유산을 베풀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