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1주일 Everyone is Invited To Pray And Listen to the Father’s Voice 모든 사람은 기도하고 아버지의 음성을 듣도록 초대 받았습니다 - 칸탈라메사 추기경 - 1독서: 집회 26:4-10 2독서: 로마 10:8-13 복음: 루카 4:1-13 올해 우리는 루카 복음을 읽고 있습니다. 루카 사도께서 서문에서 쓰신 대로, 이를 읽는 모든 신자가 ‘당신이 받은 가르침을 확실하게 깨닫게’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러한 목표는 오늘날에도 매우 적합합니다. 복음의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끝없는 공격과 그리스도에 대한 끝없는 조작을 고려할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정직한 독자들이 복음을 읽고, 그 안의 가르침에 대한 진실함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저는 사순 첫째 주일부터 부활 제 2주일까지 복음서의 주석을 활용하고자 합니다. 매 주일 복음을 읽는 것을 시작으로 그리스도의 인성과 그분의 가르침을 전체 맥락에서 읽음으로써, 이해의 지평을 넓히고 정말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그저 예언자 또는 위대한 분이셨는지 아니면 그 이상이셨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다시 말해 종교적 문화에 대해서도 이해하고자 합니다. 댄 브라운(Dan Brown)의 다빈치 코드(Da Vinci Code)와 같이 모방과 토론을 유발한 현상들은 사람들 사이에 만연한 종교적 무지를 보여주고, 파렴치한 상업적 활동에 근거가 됩니다. 이번 주 복음, 사순절 첫째 주일의 복음은, 광야에서의 예수님의 유혹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목표에 따라, 오늘 저는 예수님께서 악마의 세력과 마귀 들린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에 대한 일반적인 문제로 논의를 확장하고자 합니다. 부인할 수 없고 역사적으로 가장 확실한 사실 중 하나는 예수님께서 사탄의 파괴적인 권세로부터 많은 사람들을 해방하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건을 살펴볼 수는 없지만, 두 가지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첫째, 마귀를 다스리는 그분의 능력에 대해 예수님께서 하신 설명입니다. 둘째, 그분의 능력이 그분과 그분의 인격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입니다. 마귀 들린 사람이 기적적으로 해방된 예수님의 업적을 보고 그들은 그 사실을 부인하지는 못하고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루카11:15)’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설명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증명하셨습니다(사탄이 스스로 분열한 것이라면, 그분의 권세는 오래가지 못했겠지만, 오히려 그분의 권세는 번성하였습니다.) 또 다른 설명도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손을 빌려, 다시 말해 성령으로 마귀를 쫓아냈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사탄은 인류를 그의 권세 아래 두었던 ‘강한 자’였지만, 이제 ‘그보다도 더 강한 분’이 오셔서 그의 권세를 발아래 두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한 인격체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놀라운 비밀을 말해줍니다. 그분이 오심으로써 인류의 새로운 시대, 체제의 변화를 연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업적은 단순한 인간, 그 어떤 위대한 예언자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실 때 사용한 이름과 능력에 주목해 봅시다. 마귀를 쫓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공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너에게 ... 명한다’ 또는 ‘...의 이름으로 나는 너에게 이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날카롭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명령한다.’ 예수님께서는 더 높은 권위에 기댈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께서 가장 높은 귄력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패배는 예언자들이 선포한 최종(종말론적) 구원의 온전한 일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대자들이 그들의 눈으로 목격한 것의 결론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도록 하십니다. 이에 그분께서는 앞을 예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구원은 이미 그들 가운데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에 대한 논쟁은 그것을 근거(하느님의 나라와 구원이 이미 우리 가운데 존재한다는 것)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악의 영, 베엘제불, 또는 마술은 하느님의 영의 업적이 너무나 분명하다는 진리를 부정하고, 하느님께 대적하며, 용서의 기회를 포기하였습니다. 사순절 시기에 성경 주석을 활용하고자 하는 역사적, 교육적 접근 방식이 우리가 매일 읽는 복음서의 현실적인 제안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를 둘러싼 악은 강합니다. 가끔은 우리의 능력을 뛰어넘는 사악함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매일의 뉴스를 보면서 우리는 충격을 받기도 하고 말문이 막히기도 합니다. 위안이 되는 것은 우리 가운데에 이러한 악보다 강한 분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악과 고통으로부터 보호하지는 못하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는 우리와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악도 선으로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을 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삶과 가정에서 악마의 근간이 되는 사악한 존재를 직접적으로 경험합니다. 정말 확실히 그렇기도 합니다(특별히 젊은이들 사이에 사탄 의식이 얼마나 널리 퍼져 있는지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개별 사례로 들어가면 이것이 정말 사탄에 의한 건지 병적 장애인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다행히도 원인에 대한 확신이 필수적인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해야할 일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딱 붙어서 그분의 이름을 부르고 전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이번 주 복음은 사순절 동안 무엇보다도 강화해야하는, 싸움에서 사용할 무기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시험받기 위해 광야로 가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기도하고 아버지의 음성을 듣기 위해 광야로 물러나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광야로 물러난 예수님을 본받기로 선택한 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광야로 물러나라는 초대는 수도자와 은둔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형태로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십니다. 수도자와 은둔자는 사막이라는 공간을 선택하지만 우리는 사막이라는 시간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사막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우리 주변에 비움과 침묵을 만들고, 우리의 마음으로 가는 길을 재발견하고, 소음과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고, 우리 존재와 믿음의 가장 깊은 곳에 다다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
<사순 제1주일>(3.6)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루카4,1-2) '말씀의 힘!' 사도 바오로는 믿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압니다."(로마8,28) 이 말씀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기쁜 일이든, 아픈 일이든 할 것 없이 모든 움직임들은 선을 향해 있고,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움직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악마의 유혹을 받으십니다. 그것도 세 번에 걸쳐 사십 일 동안 유혹을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의 힘으로 이 악마와 싸워 이기십니다. '사십 일과 세 번'이라는 의미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수난과 죽음을 상징하는 '유혹'을 이겨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참모범'이십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도 세 번씩이나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는데, 우리는 더한 유혹을 받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루카4,1-3)은 우리가 이 악마의 유혹을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에 대한 '모범 답안'입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4,4) 말씀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말씀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 안에 머무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신명26,4-10)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은총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지금 여기에 서 있기까지 나에게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은총에 깊이 감사드리고, 함께 작용하여 선으로 이끄는 모든 움직임들을 '말씀의 힘으로' 기쁘게 받아들이면서 이겨냈으면 좋겠습니다.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10,9)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
? 어 머 니 ?? - 법정스님 글 - 우리 같은 출가 수행자는 세상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불효자다. 낳아 길러준 은혜를 등지고 뛰쳐 나와 출세간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해 싸락눈이 내리던 어느날 나는 집을 나와 북쪽으로 길을 떠났다. 골목 길을 빠져 나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뒤돌아 본 집에는 어머니가 홀로 계셨다. 중이 되러 절로 간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어 시골에 있는 친구집에 다녀온다고 했다. 나는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다.어머니의 품속에서 보다도 비쩍 마른 할머니의 품속에서 혈연의 정을 익혔을 것 같다. 그러기 때문에 내입산 출가의 소식을 전해 듣고 어머니 보다 할머니가 더욱 가슴 아파 했을 것이다. 내가 해인사에서 지낼 때 할머님이 돌아 가셨다는 소식을 뒤늦게 친구로부터 전해 들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외동 손자인 나를 한 번 보고 눈을 감으면 원이 없겠다고 하시더란다. 불전에 향을 살라 명복을 빌면서 나는 중이 된 후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내가 어린시절을 구김살 없이 자랄 수 있었던 것은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덕이다. 내게 문학적인 소양이 있다면 할머니의 팔베개 위에서 소금 장수를 비롯한 옛날이야기를 많이 들으면서 자란 덕일 것이다. 맨날 똑같은 이야기지만 실컷 듣고 나서도 하나 더 해달라고 조르면 밑천이 다 됐음인지 긴 이야기 해주랴, 짧은 이야기 해주랴고 물었다. 긴 이야기라고 하면 "긴긴 간지때"로 끝을 냈다.간지 때란 바지랑 대의 호남 사투리다. 그러면 짧은 이야기하고 더 졸라대면 "짧은 짧은 담뱃대"로 막을 내렸다. 독자인 나는 할머니를 너무 좋아해 어린시절 할머니가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 나섰다. 그리고 할머니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선뜻 나서서 기꺼이 해드렸다. 일제 말엽 담배가 아주 귀할때 초등학생인 나는 혼자서 10리도 넘는 시골길을 걸어가 담배를 구해다 드린 일도 있다. 내가 여덟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할머니를 따라 옷가게에 옷을 사러 갔는데 그 가게에서는 덤으로 경품을 뽑도록 했다. 내 생애에서 처음으로 뽑은 경품은 원고지 한묶음이었다. 운이 좋으면 사발 시계도 탈 수 있었는데 한묶음의 종이를 들고 아쉬워 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원고지 칸을 메꾸는 일에 일찍이 인연이 있었던 모양이다. 할머니의 성은 김해 김씨이고 이름은 금옥 고향은 부산초량, 부산에 처음가서 초량을 지나갈 때 그곳이 아주 정답게 여겨졌다. 지금 내 기억의 창고에 들어 있는 어머니에 대한 소재는 할머니에 비하면 너무 빈약하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나를 낳아 길러주신 우리 어머니는 내가 그리는 어머니의 상 즉 모성이 수호천사처럼 늘 나를 받쳐 주고 있다. 한 사람의 어진 어머니는 백사람의 교사에 견줄만 하다는데 지당한 말씀이다. 한 인간이 형성되기 까지에는 그 그늘에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이 따라야 한다.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의 교육을 위해 집을 세 번이나 옮겨 다녔다는 고사도 어머니의 슬기로움을 말해 주고 있다. 나는 절에 들어와 살면서 두 번 어머니를 뵈러 갔다. 내가 집을 떠나 산으로 들어온 후 어머니는 사촌동생이 모시었다. 무슨 인연인지 이 동생은 어려서부터 자기 어머니보다 우리 어머니를 더 따랐다. 모교인 대학에 강연이 있어 내려간 김에 어머니를 찾았다. 대학에 재직중인 내 친구의 부인이 새로 이사간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었다. 불쑥 나타난 아들을 보고 어머니는 무척 반가워하셨다. 점심을 먹고 떠나 오는데 골목 밖까지 따라 나오며 내 손에 꼬깃꼬깃 접혀진 돈을 쥐어 주었다. 제멋대로 큰 아들이지만 용돈을 주고 싶은 모정에서 였으리라. 나는 그 돈을 함부로 쓸 수가 없어 오랫동안 간직하다가 절의 불사에 어머니의 이름으로 시주를 했다 두 번 째는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가는 길에 대전에 들러 만나 뵈었다. 동생의 직장이 대전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 때는 많이 쇠약해 있었다. 나를 보시더니 전에 없이 눈물을 지으셨다. 이 때가 이승에서 모자간의 마지막 상봉이었다. 어머니가 아무 예고도 없이 내 거처로 불쑥 찾아오신 것은 단 한 번 뿐이었다. 광주에서 사실 때인데 고모네 딸을 앞세우고 불일암까지 올라오신 것이다. 내 손으로 밥을 짓고 국을 끓여 점심상을 차려드렸다. 혼자 사는 아들의 음식 솜씨를 대견스럽게 여기셨다. 그 날로 산을 내려가셨는데, 마침 비가 내린 뒤라 개울물이 불어 노인이 징검다리를 건너기가 위태로웠다. 나는 바지 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어머니를 등에 업고 개울을 건넜다. 등에 업힌 어머니가 바짝마른 솔잎단처럼 너무나 가벼워 마음이 몹시 아팠었다. 그 가벼움이 어머니의 실체를 두고 두고 생각케 했다. 어느해 겨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아!, 이제는 내 생명의 뿌리가 꺾이었구나'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금이라면 지체없이 달려갔겠지만 그 시절은 혼자서도 결제(승가의안거제도)를 철저히 지키던 때라 서울에 있는 아는 스님에게 부탁하여 나 대신 장례에 참석하도록 했다. 49재는 결제가 끝난 후라 참석할 수 있었다. 단에 올려진 사진을 보니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 내렸다. 나는 어머니에게는 자식으로서 효행을 못했기 때문에 어머니들이 모이는 집회가 있을 때면 어머니를 대하는 심정으로 그 모임에 나간다. 길상회에 나로서는 파격적일 만큼 4년 남짓 꾸준히 나간 것도어머니에 대한 불효를 보상하기 위해서인지 모르겠다. 나는 이 나이 이 처지인데도 인자하고 슬기로운 모성 앞에서는 반쯤 기대고 싶은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머니는 우리 생명의 언덕이고 뿌리이기 때문에 기대고 싶은 것인가? 늙어가면서 문득 문득 생각나는 '어머니'라는 단어는 한없이 기대고 한없이 불러보고 싶은 단어입니다. 이제 어디서 불러 볼까요?^^~ 이제 어디서 불러 볼까요?^^~♡ 천상어머니 성모님을 매일 불러볼께요♡ |
<사순 제1주간 월요일>(3.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변방에 계시는 예수님!' 오늘 복음(마태25,31-46)은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이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예수님 당시, 기득권 카르텔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대단히 불쾌한 말씀으로 다가왔을 것이고, 변방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큰 기쁨과 희망의 말씀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근본 이유는 '그들의 이 불쾌함'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변방에서 태어났고, 변방의 삶을 조금은 체험했습니다. '이문영(베드로)' 증조부님께서 모진 박해를 피해 지금의 경기도 용인에 있는 '한덕골 성지'로 이주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변방에 계신 예수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임마누엘이신 예수님께서 변방에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이들의 마음'이 늘 변방으로 향해 있어야하고, 변방에 있는 내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선택'도 변방에서 태어나 변방의 삶을 살고, 변방에 있는 예수님이신 이웃들과 함께 한 사람을 향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앞에 '흙수저와 금수저'가 놓여 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마음과 정책이 향해 있는 후보가 우리나라의 이 큰 배를 이끌어 갈 선장으로 뽑혔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25,46)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신명30,19) 오늘도, 더 나은 나의 미래를 위해, 나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더 열심히 화이팅 합시다! |
<사순 제1주간 화요일>(3.8)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마라."(마태6,7) '사랑의 기억과 실천인 기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빈말을 되풀이 하는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유일한 기도'이자,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가장 완전한 기도'인 '주님의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에는 '일곱 개의 청원기도'가 담겨 있는데, 그 본질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마태6,7-15)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은 당신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전하게 드러났고, 그 완전한 사랑이 바로 '예수님의 육화와 땀과 수난과 죽음'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지금 매우 은혜로운 때요 구원의 날인 '사순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바치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더 기억하고, 이 큰 사랑을 더 실천하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는 '거룩한 재계의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6,14-15)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기도'는 빈말의 되풀이가 아닙니다. '기도의 본질'은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지금 여기에서 기억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미사의 본질'이고, '말씀 묵상의 본질'입니다. 우리를 위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완전한 사랑을, 지금 여기에서 잘 기억하고, 잘 실천하도록 합시다! |
<사순 제1주간 목요일>(3.10)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7,7) '무엇을 청할까?'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7,8)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청을 들어주시는 주님께 많은 것들을 청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이렇게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바라는 것을 간절히 청해야 하고, 이것을 얻기 위해서는 나의 간절한 노력(찾고 두드리는 노력)도 함께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나의 회개를 청하고, 재물을 청하고, 건강을 청한다면, 입으로만 청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얻기 위한 '구체적인 나의 땀 흘림'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7,12) 사랑받고 싶으면 내가 먼저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용서받고 싶으면 내가 먼저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을 청할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는 주님의 이 물음 앞에서 부와 장수와 원수의 죽음을 청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을 잘 이끌어갈 수 있는 '지혜와 분별력'을 청했던, 그래서 부와 장수도 덤으로 받았던, 이스라엘의 세 번째 임금인 '솔로몬의 지혜'(1열왕3,4-15 참조)를 떠올리게 됩니다. 어제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끝났습니다. 국민의 더 많은 지지를 받아 새 대통령으로 뽑힌 이 나라의 지도자를 겸허히 인정하고, 새 대통령은 솔로몬의 지혜와 분별력으로 분열되어 있는 이 대한민국을 '하나 된 나라', '통합의 나라'로 만들어 줄 것을 간절히 소망합니다. "주님, 주님 없이는 저희가 있을 수 없사오니, 저희에게 성령의 힘을 주시어, 언제나 올바른 것을 생각하고 힘껏 실천하며,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하소서."(본기도) |
<사순 제1주간 금요일>(3.11)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5,20) '능가하는 의로움!' 오늘 복음(마태5,20-26)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이란 어떤 모습의 의로움일까? 지금의 모습으로 표현하자면, 매일 미사하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자주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필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능가하는 의로움이란 어떤 모습의 의로움일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은 머리와 입으로 그리고 율법 규정 안에 머물러 있었던 의로움이었습니다. '능가하는 의로움'은 이것과 함께 나의 몸으로 드러나는 구체적인 의로움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구체적인 '이웃 사랑'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5,23-24) 너를 용서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어제는 참으로 답답하고 우울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마음도 많이 아팠습니다. 그 두 사람이 해왔던 과거의 모습과 지금 현재의 모습 때문에 그랬습니다. 이렇게 큰 간절함이 함께 했던 선거는 처음입니다. 어제 경기도 이천에 있는 어머님 산소에 다녀오면서 마음이 많이 안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에게 주시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대한 묵상도 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에제18,23)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의 큰 화두입니다. 우리는 때가 되면 반드시 죽습니다. 그러니 얼른 회개 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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