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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은혜/사순시기

사순 2주간 변모: 권능과 위로의 메시지-The Transfiguration: A Message of Power and Consolation

사순 제2주일
The Transfiguration: A Message of Power and Consolation
변모: 권능과 위로의 메시지
- 칸탈라메사 추기경 -

1독서: 창세 15:5-12.17-18
2독서: 필리 3:17- 4:1
복음: 마르 9:7

이번 주일 복음은 변모에 관한 말씀입니다. 루카 또한 그의 복음서에 이날에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 오르신이유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분은 기도하러그곳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분의 옷은 눈과 같이 희어지고, 그분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게 된 것은 그분의 기도였습니다. 지난 주 설명드렸던 계획의 맥락에서, 우리는 이 에피소드를 그리스도의 모든 삶에서 기도가 차지하는 위치와 기도가 그분의 더 깊은 인성의 정체성의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는 동일하지 않은 유대인입니다. 만약 자신이 하느님과 같다고 생각하였다면 하느님께 기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는지에 대한 문제는 잠시 제쳐두고, 이 말은 근본적인 진리를 담고 있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사람으로서, 한 명의 사람으로 기도를 하신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주리거나 목마르거나 고난을 당하실 수 없으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으로서 주리고 목마르고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역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로서 그분의 인성의 깊은 신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분이 기도하실 때, 하느님을 아빠(이는 나의 아버지,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 나의 아빠라고 해석될 수 있음)’라고 부르신 것은 역사적 사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을 이렇게 부르는 것은 그분 이전에는 없었던 일로서 그리스도의 전형으로 그분과 하늘 아버지 사이의 독특한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태오가 기록한 예수님의 기도 중 다른 하나를 살펴봅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5-27)’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보다시피 친밀한 가족 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상호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지주의 아들을 죽인 악한 농부의 비유에서도 이라고 불리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예수님과 하느님의 특별한 관계가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에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생전에 공개적으로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으시고, 항상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본인을 메시아라고 하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들이 그분을 메시아라고 부를 때에도 침묵을 지키시고, 심지어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못하게 한 것과 같습니다. 이는 이러한 호칭들이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그분의 사명과는 달리 사람들에게는 결정된 의미로 해석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은 왕, 예언자, 위인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 사용되는 호칭이었습니다.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적들과는 전쟁을 벌이고 그들을 다스리는 하느님의 사절을 의미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악마가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하려는 방향과도 같았습니다. 제자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영광과 권능의 마래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메시아를 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러 온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목숨을 앗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많은 이에게 주려고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먼저 죽으심은 그분께서 어떠한 메시아인지를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메시아라고 선포하신 유일한 때는 사형 선고를 받기 바로 전, 더이상 오해의 소지가 없는 대사제 앞에서 사슬에 묶인 채로 말씀하셨습니다. 대사제가 당신이 찬양받으실 분의 아들 메시아요?’라고 묻자, 그분은 그렇다라고 답하셨습니다. (마태 14:61)

예수님의 생애 동안 사람들, 친구나 적들이 불렀던 모든 호칭과 이름은 제한적이고 불충분하게 보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이름으로 가르치시는 다른 교사들과는 다른선생님이십니다. 그분은 다윗의 자손이지만 다윗의 주님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예언자보다, 요나보다도, 솔로몬보다도 크신 분이십니다. 사람들이 이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한 것은 그분을 둘러싼 감정, 인간의 언어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움을 잘 전달합니다.

특정 비평가들이 예수님을 특별한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은 당대의 평범한 유다인이라고 축소하여 명명하려는 시도는 우리가 그분에 관해 가지고 있는 가장 확실한 역사적 자료와도 완전히 충돌하며, 인류 역사에 신비로운 일이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거부하는 것으로만 설명 가능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평범한 존재가 어떻게 세상을 바꾼 사람이 되었는지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변모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 에피소드의 실용적인 가르침을 살펴봅시다. 변모는 우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우리를 위한신비입니다. 2독서에서 바오로 성인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타보르 산은 우리의 미래로 향하는 창문과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현재에 초점을 맞춘 스포트라이트(조명)이기도 합니다. 이는 비참한 모습 아래 성령이 머무시는 성전이 되는 우리의 몸을 비춥니다.

성경에 따르면 몸은 인간이 무시할 수 있는 부록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는 없어서는 안 되는 부분입니다. 인간에게는 몸이 없습니다, 아니 인간은 바로 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몸은 하느님께서 직접 창조하셨고, 말씀이 바로 성육신으로 잉태되어 나셨고, 성령은 세례를 통하여 육신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성경의 사람은 몸의 광채로 매료되었습니다. “정녕 당신께서는 제 속을 만드시고 제 어머니 배 속에서 저를 엮으셨습니다.” 몸은 하느님과 같은 영광을 나누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육신과 영혼은 하나로 합하여 영원한 경배를 받거나, 하나로 묶여 영원한 포로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육신의 구원을 말하지, 육신으로부터의 구원(마니교와 영지주의가 고대에 그랬고, 특정 동양 종교가 아직도 이를 주장하고 있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습니까? 자신이나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고통으로 인하여) 외모가 변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습니까? 변모가 아마도 그들에게 가장 위안이 되는 메시지일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병과 죽음으로 수치를 당하는 우리의 몸은 구원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또한 수난 중에 변하게 되겠지만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실 겁니다. 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그분은 영원히 살 것이며, 믿음이 우리도 죽음 후에 그분과 함께 할 것을 말해줍니다
 

<사순 제2주일>(3.13)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루카9,29)
'우리도 부활하자!'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사건'(루카9,28-36)으로써,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미리 보여주는 희망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에 관한 말씀이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첫 예고 다음에 곧바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참의미는 부활과 승천은 반드시 수난과 죽음을 통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수난과 죽음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모시면서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처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기를 간절히 희망하고 있습니다.
이 부활을 위해 우리는 고통과 아픔을 고통과 아픔으로만 여기지 않고, 조금 후에 찾아 올 더 큰 부활을 위해 꼭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이겨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짧게 아파하고 다시 일어납니다.
그래서 또 다른 부활, 더 큰 부활의 기쁨을 맞이합니다.

그러니 '부활에 앞선 수난과 죽음'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필리3,18-21;4,1)
오늘 제1.2독서가 우리에게 전하는 것처럼, 지금 여기에서의 부활과 장차 맞이하게 될 부활인 영원한 생명을 위해 잠시 지나가는 고통과 아픔을 잘 이겨내는 '참그리스도인들', 이를 위해 아브람처럼 제대로 믿고, 믿는 바를 삶으로 살아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참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부활합시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사순 제2주간 월요일>(3.14)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유일한 조건인 회개!'
오늘 복음(루카6,36-38)은 '하느님의 자비'와
'그 구체적인 모습에 관한 말씀'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루카6,37-38)
'남을 심판하지 않는 것!'
'남을 단죄하지 않는 것!'
*******'용서하는 것!'********
*******'주는 것!'******

이것이 하느님의 자비로 드러나고 있는데, 삶의 자리에서 실행하기가 너무나 힘든 일들로 다가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심판하지 않는 분이시고, 단죄하지 않는 분이시고, 용서하시는 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유일한 조건이 하나 있는데,
그 유일한 조건이 바로 '회개'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15,11-32)'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는 것', 그래서 '자비로우신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것',
이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조건'입니다.

오늘 독서(다니9,4-10)에서 다니엘 예언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 주님! 위대하시고 경외로우신 하느님,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했습니다. 당신의 계명과 법규에서 벗어났습니다. 저희는 모두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다니9,4.5.8)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루카15,21)

이 고백이 우리가 구원 받기에 필요한 '유일한 조건'입니다.
마치 하느님인양 마구 심판하거나 단죄하는 모습으로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우상숭배자들'이 되지 말고, 내가 살기 위해서 해야만 하는 '유일한 조건'에 보다 더 충실했으면 좋겠습니다.

^^^피조물 보호를 위한기도를 바칩니다   *힘듬과 어려움 주님께 곧바로 맡기고 화살기도 하기 *주님안에서 쉬면서 호흡기도 바치기
하느님의 자비'와
'그 구체적인 모습에 관한 말씀'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루카6,37-38)
'남을 심판하지 않는 것!'
'남을 단죄하지 않는 것!'
*****'용서하는 것!'***** *****'주는 것!' ***** 그 유일한 조건이 바로*** '회개'****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기에
필요한 유일한 조건
"회개" 에 대해서도 이병우루카신부님은 오늘 강론에서 명쾌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않는것!"
"남을단죄하지 않는것!"
"용서하는 것!"
"주는 것!"우리가 용서 받기위해선
유일한 조건 "회개" 에
대하여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순 제2주간 화요일>(3.15)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마태23,3)
'나는 참 신자인가?'
오늘 복음(마태23,1-12)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강하게 꾸짖으십니다.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키되,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누구를 지지하며 따라가고 있는가?'
'예수님인가? 아니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인가?'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예수님의 모습인가?
아니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모습인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처럼, 겉모습은 믿는 사람처럼 그럴싸하게 보이지만, 속 모습은 그리스도의 적처럼 살아가는 신자는 아닌가?'
'껍데기만 신자이고, 속은 신자가 아닌 위선자는 아닌가?'
'우리의 참 모습'은 '고통 앞에서' 온전하게 드러나고, '돈이나 명예나 권력의 유혹 앞에서' 온전하게 드러납니다.
저는 치열했던 이번 대통령 선거를 통해서, 어느 정도는 '참 신자들과 거짓 신자들'이 드러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문재인(티모테오) 대통령께서 천주교 신자로서, 하느님의 평화와 공정을 위해 나름 수고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강하게 부정하는 천주교 신자들과 심한 욕설까지 마구 해대면서 무속 행위를 한다는 후보, 신천지 이단자들과 함께 한다는 후보를 적극 지지하는 천주교 신자들도 있었으니 말입니다.
'회개'는 '거짓 신자에서 벗어나 참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순 시기'는 '거짓의 탈을 벗고, 참의 탈을 쓰는 시기'입니다.
우리 안에 제대로 믿는 '참 신자'가 더 많아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이사1,16-17)

^^^고모님 오늘 저의 생일 입니다.
태어나게 해주신 하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더욱더 주님 품에 의탁하는 삶으로 살아가겠습니다.
고모님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

회개'는 '거짓 신자에서 벗어나 참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순 시기'는 '거짓의 탈을 벗고, 참의 탈을 쓰는 시기'입니다.
우리 안에 제대로 믿는 '참 신자'가 더 많아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이사1,16-17)


+++사랑하는아녜스!
생일을진심으로축하드려요.남편
프란치스코와
자녀들로부터 기쁜선물받으셨어요.가족이기억하고기쁜축제가되기를바래요.
기도합니다.기쁜날되셔요.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
부부의
노래입니다. -기타치며 -마이엔드리스 러브------ 우크라이나위해기도해주셔요. 네 고모님

<사순 제2주간 수요일>(3.16)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마태20,19-20)
'예수님의 눈물!'
우리는 지금 나와 우리 모두를 살리시기 위해 당신의 전부를 바치신 '예수님의 눈물'을 기억하는 '사순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해, 우리 모두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큰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고 묵상하면서, 그 사랑에 보다 더 깊이 동참하고자 하는 '사순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각자의 모습을 보면, 그것과는 별개로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 모습이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20,25-28)
예수님의 눈물!
예레미야 예언자의 눈물!
낙태아들과 죄 없는 아기들의 눈물!
수많은 순교자들의 눈물!
의인들인 참 그리스도인들의 눈물!

이 눈물과 죽음 저 너머에서 맞이하게 될 영원한 생명을 기억하면서, 제대로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정치와 삶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일부 형제자매들이 신부님은 정치에 관여하지 말아달라고 말하지만, 정치가 곧 삶이고, 삶이 곧 정치입니다.

"정치는 흔히 폄하되기는 하지만,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매우 숭고한 소명이고 사랑의 가장 고결한 형태입니다."('복음의 기쁨', 205항)


<사순 제2주간 목요일>(3.17)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루카16,25)
'부자와 라자로!'
오늘 복음(루카16,19-31)은,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을 두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인,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비유'입니다.
오늘 복음은, 지금 여기에서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사는 '어떤 부자'와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라며 살아가던 '거지 라자로'가 죽음 저 너머에서 처지가 완전히 뒤바뀌는 '인생 역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공수래공수거'의 인생,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돌아가는 우리네 인생'입니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죽음 저 너머의 세상에서 영원히 살기를 희망합니다.
나는 정말로 영원한 생명을 믿고,
이를 간절히 희망하고 있는가?

이에 대한 나의 답에 따라서 지금의 나의 모습은 많이 바뀌어 있을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돈 돈 돈, 경제 경제 경제라고만 외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돈과 경제가 우리네 삶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것이 결정적 판단의 기준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예레17,5-10)에서 눈물의 예언자라고 불리던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예레17,5.7)
돈돈돈 하다가 결정적으로 비참한 처지에 놓인 어떤 부자가 되지 말고, 가진 것을 함께 나누는 고통을 통해 마침내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행복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화답송)
돈과 경제보다도, 주님을 더 잘 신뢰합시다!


<사순 제2주간 금요일>(3.18)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마태21,38)
'이 시대 예언자는?'
오늘 복음(마태21,33-43.45-46)은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신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소작인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고, '종들'은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예언자들'입니다.)
구약성경 안에 잘 드러나 있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많은 예언자들을 파견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런 예언자들을 거부했습니다.

"자, 예레미야를 없앨 음모를 꾸미자, 어서 혀로 그를 치고, 그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무시해 버리자."(예레18,18)
그러자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하느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셔서,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십니다.(요한3,16 참조)
그러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그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립니다. 하지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을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21,42)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 예언자는 누구일까?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뜻과 정의와 공정'을 세상에 외치고 있는 그 예언자들은 누구일까?
저는 그들이 바로 천주교 안에 있는 '정의구현사제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정치권력과 타협하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뜻과 멀어지고 있는 세상을 향해 하느님의 정의와 공정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런 사제단을 향해 일부 사람들이 매우 왜곡된 말을 하기도 하지만, 저는 그들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예언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예언자들을 배척하거나 죽이지 맙시다!------------십자가의 길, 단식


주님의 십자가 나의 보물이라
그의 십자가 부활은 나의 영광이라 ~~~♡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3.19)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마태1,24)
'의로운 요셉!'
오늘은 '성모님의 배필'이요 '예수님의 양아버지'로서, '임종하는 이의 수호자'이시고, '거룩한 교회의 보호자'이신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분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약혼한 요셉이 이 약혼을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 왜냐하면 같이 살기 전에, 곧 잠자리도 갖기 전에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이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죽음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던 엄청난 사건입니다.
이 사건에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꾼인 천사를 요셉에게 보내어 이렇게 말하게 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1,20-21)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의로운 사람 요셉,
믿음이 충만한 사람 요셉입니다.
요셉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큰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오늘 제2독서(로마4,13.16-18.22)가 전하고 있는 것처럼,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희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4,18)
재물과 권세와 명예와 같은 유혹(장애물)들이,
언제나 우리 앞에 놓여 져 있습니다.

성 요셉 대축일을 맞이하여, 그런 유혹들을 이겨낼 수 있는 아브라함과 요셉이 간직했던 굳건한 믿음을,
주님께 청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