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노이아 (metanoia)
영성적 성장은 인생살이와 같이 하나의 통일체이어서 그 구성요소들을 사실상 따로 떼어서 생각하거나 한정시킬 수 없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사랑 안에서 일구어내는 하나의 여정인데 사랑이란 분석할 주제가 아닌 것이다. 사랑의 행위는 결합력이 있어 서로 끌어당기고 일치한다. 인간의 영혼 안에서 늘 성장하는 신적사랑(아가페)과 영혼의 점점 더 선명해지는 신적반영은 필연적으로 하느님과 인간을 함께 끌어들이고, 완전해진 영혼은 하느님과 같아져서 하나로 융합한다. 상사적 합일로....
예수의 성녀 데레사(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로 더 잘 알려져 있다)와 십자가의 성 요한이라는 두 신비신학 교회학자들은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영혼의 영성적 성장 문제를 최대한 묘사하셨다. 두분은 영성적 성장에 있어서 비우는 과정과 채우는 과정, 또 그 과정을 겪어가는 영혼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비유들을 이용하여 책을 썼다. 이것은 비슷한 체험을 하게 될 많은 영혼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영혼들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두 분 모두 다 믿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들이 길을 잃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게 되거나 미지(未知)의 것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면 영성적 고통이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내게 하신 것처럼 두려움의 길로 인도하실 때에 영혼이 자기를 이해해 수 있는 지도자를 갖지 못한다면 크나큰 고통을 느낍니다. 이와는 달리, 자신의 상태가 묘사된 것을 어디서 알아차릴 수 있을 때는 여간 큰 기쁨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 영혼은 제 갈 길을 뚜렷이 알게 됩니다. 그리고 목상기도의 갖가지 상태에서 진전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안다는 것은 영혼에게 더할 나위 없는 유익입니다. 나의 경우를 말씀드리자면, 나는 여간 고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해야 옳은지를 몰라서 숱한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그래서 고요의 기도 상태에 이르면서 홀로 있게 되는 영혼에 대해 동정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자서전 14,7)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렇게 썼다. “그러한 경우, 깨우쳐 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들은 뒷걸음질을 쳐서 길을 버리거나 혹은 고삐를 늦추거나 함으로써 적어도 전진하는 데에 지장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결국 지나친 부지런함 때문이다.) .... 그들은 (묵상과 추리의 길로만 가려고 한 나머지) 본성의 힘을 너무 피로하게 만들면서 자기들은 게으름과 죄 탓으로 이 꼴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생각이야말로 쓸데없는 생각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들을 첫 번째 길과는 아주 다른 길, 즉 관상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인데 말하자면 하나는 묵상과 추리요, 다른 하나는 상상과 추리에 들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걱정할 것 없이 끝까지 인내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이 좋고, 순박한 마음으로 당신을 찾는 사람들을 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신뢰할 일이니, 당신은 그들을 그저 맑고 밝은 사랑의 빛으로 인도하시기까지 갈 길에 필요한 것을 꼭 주실 것이다.” (어둔 밤 제I편 10,2-3)
"If there is no one to understand these persons, they either turn back and abandon the road or lost courage..... They fatigue and overwork themselves, thinking that they are failing because of their negligence or sins. [Discursive] Meditation is now useless for them, because God is conducting them along another road, which is contemplation and which is very different from the first..... Those who are in this situation should feel comforted. Let them trust in God Who does fail those who seek Him with a simple and righteous heart; nor does He fail to impart what is needful for the way until getting them to the clear and pure light of love."(The Dark Night, St. John of the Cross, Bk. I ch. 10,2-3
(역자 역 : “이런 사람들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 영혼들은 뒤돌아 길을 버리거나 용기를 잃고 만다..... 그 영혼들은 자신들의 게으름과 죄 때문에 잘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지쳐버리고 마는 것이다. [추리]묵상은 이젠 그 영혼들에게 필요가 없다. 하느님께서 그 영혼들을 처음 것과는 아주 다른 관상이라는 또 하나의 길로 이끌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안심하고 하느님을 신뢰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순박하고 올곧은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을 결코 잘못되게 하시지 않을 것이며, 그 영혼들이 밝고 맑은 사랑의 빛에 이르게 될 때까지 그 길을 가는 데 필요한 것을 틀림없이 나누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어둔 밤, 제I편 10, 2-3)
‘영혼의 성’에서 데레사 성녀는 하느님과 합일을 향한 이 여정을, 성(城) - 영혼을 말함 - 의 바깥쪽 궁방(宮房)에서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맨 안쪽 궁방 즉 가장 깊은 중심으로 서서히 옮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영혼의 노래’에서 근본적으로 똑같은 여정을 제시한다. 그러나 성인의 묘사는 구약의 아가(雅歌)서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신부(新婦)/영혼은 신랑/하느님을 갈망하고 이 자꾸만 커져 가는 갈망은 정화(淨化)하는 불길처럼 신부로 하여금 점점 커져 가는 사랑에 대한 준비를 시킨다.
두 저서는 내적 어두움(an inner darkness)에 대한 영혼의 최초의 깨달음,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사랑과 빛으로 가득 채워지기 위해 영혼에 있는 불완전한 것들을 비우는 사막의 고통스런 정화(淨化) 즉 어둔 밤과 주입(注入)이 이루어지는 동안에 일어나는 “접촉” 즉 “사랑의 상처”의 매력적인 희열(the delightful joy of the "touches" or "wounds of love")에 대한 영혼의 최초의 깨달음을 묘사한다. 이런 것들에게는 탈혼, 황홀경 또는 공중부양(空中浮揚)이 따른다. 말하자면 신적 사랑의 힘이 영혼을 열광시키기 때문이다. 사랑의 접촉의 희열(The enjoyment of the touches of love)은 순간적이고 휙 지나가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효과는 지속적이다. 접촉할 때마다 영혼은 하느님께 더욱 깊이 몰입한다. 영혼이 이승에 사는 동안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상태에 도달했을 때 정화 단계에서의 고통과 공포는 사라지고 황홀경과 탈혼도 끝난다. 완전해진 영혼이 이제는 하느님의 사랑과 힘과 더불어 활동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살게 되었으니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된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을 가지고 심판 날을 맞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두려움은 징벌을 생각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품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I요한 4,17-18) “자식의 사랑을 노예의 두려움과 겹쳐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It is impossible to combine the love of a son with the fear of a slave)(I요한 4,17).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가 겪은 흔치 않는 체험 덕분에 영혼의 영성적 여정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의 양상(樣相)을 보다 명료하게 정의(定義)할 수 있게 되었다. 명확한 범례(範例)가 나타났기에 그것을 기록했다. 그 영혼의 직접적 체험에 근거하여 영성적 성장에서의 여러 다른 수준과 그런 여러 단계에서의 영혼의 상태를 처음으로 묘사한 것이다.
하느님과의 합일을 향한 영혼의 여정에 관해 나온 가장 완벽한 두 서술적 묘사가 가르멜 회원들에 의해 씌어졌기 때문에 이 영성적 여정은 흔히 “가르멜의 길”이라고 불리지만, 사실은 보다 보편적인 것이다. 성경은 사도들도 영적 혼인의 상태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사도들이 자신의 영성적 여정을 묘사했었다면 우리는 데레사 성녀나 요한 성인의 것과 비슷한 기록을 분명 더 일찍 접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각 영혼을 독특한 방법으로 인도하신다. 그래서 각 영혼은 이 여정을 제 나름으로 알아차린다. 그러나 정화(淨化)와 조명(enlightenment)의 단계를 거치는 기본적 진행과정 그리고 영성적 행로(行路)에 있어서의 양지(陽地)와 음지(陰地)는 똑 같다. 바울로 사도의 “메타노이아(metanoia)” 즉 회개는 그에 앞서 “변모체험”을 한 후에 일어났다.
“그러자 의회에 앉았던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스테파노에게 쏠렸다. 그의 얼굴은 마치 천사와 같이 보였다..... 이때 스테파노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보니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편에 서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 사람들이 돌로 칠 때에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주십시오.“하고 부르짖었다..... 사울은 스테파노를 죽이는 일에 찬동하고 있었다.”(사도 6,15. 7,55.59. 8,1)
바울로 사도는 자신의 메타노이아, 즉 회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 사건을 직설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은총으로 가득한 체험이 그의 깊은 곳에서 자신을 감동시켰음에 틀림없다. 지성이 하느님의 활동을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상관하지 않고 하느님께서는 영혼 안에서 역사(役事)하신다. 함께 하는 마음 즉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는 아주 작은 신호를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기다리신다. 영혼에게 마음을 열고 계시다는 말이다. 그리고 성령은 물처럼 스며들 뿐 아니라 그 열어놓은 상태를 확대시킨다. 영혼의 방어벽(防禦壁)에 있는 이 틈새를 통해 하느님의 빛줄기가 영혼의 숨겨진 잠재력을 일깨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한편 사울은 여전히 살기를 띠고 주의 제자들을 위협했다.....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환히 비추었다. 그가 땅에 엎드러지자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사울이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일어나서 시내로 들어가거라. 그러면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는 대답이 들려왔다. 사울과 동행하던 사람들도 그 음성은 들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벙벙해서 서 있기만 하였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끌고 다마스쿠스로 데리고 갔다.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못 보고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사도 9, 1-9)
이렇게 영성적으로 준비가 되지 않은 영혼이 하느님의 강력한 현존과 마주침으로써 바울로 사도에게는 비록 잠간 동안의 일이라 해도 육체에 상처를 입혔고 순간적으로 바울로를 감각의 어둔 밤에 들게 하였다. 그것이 갑작스런 방향전환이었다는 것은 다른 제자들이 여전히 바울로를 두려워했다는 점으로 알 수 있다. “그들은 사울이 회개한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사도 9,26)
그러나 바르나바는 “사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주님을 뵙고 주님의 음성을 들은 일과 또 다마스쿠스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대담하게 전도한 일들을 낱낱이 설명해 주었다.”(사도 9,27) 바울로 사도는 나머지 인생을 사는 동안 자신의 사막과 오아시스를 거쳤을 것이고 영혼의 여정에서 고통과 사랑을 겪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견책하신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당신의 자녀로 여기고 하시는 것이니 잘 참아내십시오. 자기 아들을 견책하지 않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몰려도 빠져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낡아지지만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잠시 동안 가벼운 고난을 겪고 있지만 그것은 한량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II고린 4,8-9. 16-17)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19-20) 그리스도는 당신의 영광스러운 현존 안에서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한 현재”에 계신다.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은 성부께로 향한 완전한 봉헌이었고 수세기에 걸쳐 육체적으로 현존하시는, 즉 시간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만이 지금 안 계실 뿐이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영적으로 당신의 모습을 닮도록 준비하시고 변모시킨 많은 인간들 - 남성과 여성 - 에 의해 이루어진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 세상 종말까지 이 무수한 인간들을 통해 그리스도가 시대마다 “육화(肉化)”하여, 사랑하고 활동하며 고통 받고 죽었다가 부활하여 죄와 죽음을 이기고 개선(凱旋)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따라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남김없이 전하기 위해서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이 심오한 진리는 과거의 모든 세대, 모든 사람에게 감추어져 있던 것인데 이제는 하느님의 성도들에게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이 심오한 진리는 곧 이방인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사실과 또 영광을 차지하게 되리라는 희망입니다..... 나는 이를 위해서 내 안에서 강하게 활동하시는 그리스도께 힘입어 애써 노력하고 있습니다.”(골로 1,24-27. 29)
“오 타는 불꽃이여! 사랑의 성령이시여! 제게 내려오시어 예전에 하셨던 것처럼 제 안에서 말씀의 육화를 재생(再生)하소서. 저는 당신께서 당신의 신비를 새롭게 하실 또 하나의 인간이 되기를 바라나이다!” (삼위일체의 복녀 엘리자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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