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5주일>(4.6)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8,7) '죄인이 죄인을 단죄할 수 없다!' 오늘 복음(요한8,1-11) '간음하다 잡힌 여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워 놓고, 예수님께 말합니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요한8,4-5)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시다가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8,7) 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갑니다. 모두가 다 떠나가자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8,11) 그리스도인은 이제와 영원한 구원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살기 위해서, 참평화를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제와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길'은 이렇습니다. '사랑과 자비이신 하느님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15,11-32)를 통해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겸손한 기도'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루카18,9-14)를 통해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인 '너를 단죄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죄인이 죄인을 단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 하시는 말씀에 왜, 나이 많은 자들부터 떠나갔고, 예수님은 땅에 무엇을 쓰셨을까? 그들의 죄가 많았기 때문이고, 그리고 그들의 죄를 쓰지 않으셨을까? 이제와 영원한 구원이라는 목표를 향해 우리도 사도 바오로처럼 열심히 달려갑시다! (~집회10,31) 이병우 루카 신부 |
제목 <사순 제5주간 월요일> <사순 제5주간 월요일>(4.7)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8,12) '다시 부활합시다!' 오늘 복음(요한8,12-20)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주님 만찬 성목요일(4.17)에 거행되는 주님 만찬 미사 전까지의 은혜로운 사순시기가 이제 11일 남았습니다. 이 기간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매우 긴 시간입니다. 3월 5일 재의 수요일 미사로 시작된 구원의 사순시기를 지금까지 잘 지내왔는지 먼저 성찰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지금까지의 삶이 부족하다면 오늘부터 다시 잘 준비하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과 자비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이자 뜻입니다. 사순 제5주간인 이번 한 주간은 '판공성사 주간'입니다. 아마도 많은 성당에서 판공성사를 줄 것입니다. 합천성당도 4월8일(화) 저녁에 판공성사가 있습니다. 잘 준비해서 판공성사 잘 보시고 기쁘게 부활했으면 좋겠습니다. 고해성사의 중요한 다섯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 단계는 '성찰'입니다. 그 다음 단계는 뉘우치는 '통회'이며, 그리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다짐인 '정개(결심)'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며, 마지막 단계는 '보석'입니다. 뭐니뭐니해도 고해성사의 가장 중요한 단계는 '성찰'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그 사랑 앞에서 지금의 나의 삶을 바라보는 것이 곧 성찰입니다. 이 성찰이 가장 중요한 고해성사의 준비이며, 이 성찰의 준비를 잘한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짧고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15,21) 라고. "나는 세상의 빛이다." '고해성사'는 지금 나를 다시 살리는, 다시 부활하게 하는 '기쁨의 성사'입니다. 이 성사의 힘으로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잘 따라갑시다! 그래서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읍시다! 오늘도 화이팅 합시다! (~집회14,27) 이병우 루카 신부 |
제목 <사순 제5주간 화요일> <사순 제5주간 화요일>(4.8)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다."(요한8,28ㄴ) '십자가를 바라보자!' 오늘 복음(요한8,21-30)은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에 대해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간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한8,21)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8,23)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요한8,28) ... ...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배척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죽음'입니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요한8,24ㄴ) 이집트 종살이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내시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느님과 모세에게 백성이 불평하자, 주님께서 불 뱀들을 보내시어 그들을 죽게 합니다. 그러자 그들이 잘못했다고 하면서 모세에게 주님께 기도해 달라고 애원합니다. 모세가 주님께 기도하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민수21,8)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습니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습니다. '구리 뱀'은 '십자가의 예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십자가'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해주는 생명의 표지'이자, '부활의 표지이며 상징'입니다. 죄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우리도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정성된 마음으로 바라봅시다! (~집회18,33) 이병우 루카 신부 |
<사순 제5주간 수요일>(4.9)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8,36)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이 되자!' 오늘 복음(요한8,31-42)은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1-32) 하느님에게서 나와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예수님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요한14,6 참조) 우리에게 '기쁨과 자유와 해방'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루카4,18 참조) 우리는 이런 예수님 안에서 참된 길을 찾고, 진리를 깨닫고,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기쁨과 자유와 해방인 부활을 얻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이 전하는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은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오."(요한8,39) 하면서도, 아브라함이 걸어간 길을 걷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처럼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했고, 그분의 말씀 안에 온전히 머물렀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오늘 독서(다니3,14-20.91-92.95)는 바빌론 유배 때 하느님을 거역하고 이방인의 신을 따르라는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의 명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 말씀에 순종한 유다의 세 젊은이들의 모습을 전합니다. 그들은 바빌론 유배 때 함께 끌려간 사드락(하난야), 메삭(미사엘), 아벳 느고(아자르야)입니다. 예수님은 육화된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의 말씀이십니다.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은 유다의 세 젊은이들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안에 머무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 날마다 우리에게 말씀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님 안에서 기쁨과 자유와 해방의 삶을 사는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들이 됩시다! (~집회21,28) 이병우 루카 신부 |
제목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사순 제5주간 목요일>(4.10)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8,51) '위에서 오신 예수님!' 오늘 복음(요한8,51-59)은 '아브라함 전부터 계신 분'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유다인들 사이에서 계속된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 갈등의 근본 원인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믿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은 육에 갇혀 있었고, 이 세상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때가 되면 모두가 죽게 되는 생물학적 죽음에만 머물러 있었고 영적 죽음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요한8,23) 예수님께서는 위에서 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알고 또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던 분이십니다.유다인들은 이런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육의 모습으로 이 세상 오신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유다인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성 토마스의 성체 찬미가'를 떠올리며 우리의 믿음이 굳건해지기를 기도합니다. <성 토마스의 성체 찬미가> 엎드려 절하나이다. 눈으로 보아 알 수 없는 하느님, 두 가지 형상 안에 분명히 계시오나 우러러 뵈올수록 전혀 알 길 없기에 제 마음은 오직 믿을 뿐이옵니다. 보고 맛보고 만져 봐도 알길 없고 다만 들음으로써 믿음 든든해지오니 믿나이다, 천주 성자 말씀하신 모든 것을. 주님의 말씀보다 더 참된 진리 없나이다. 십자가 위에서는 신성을 감추시고 여기서는 인성마저 아니 보이시나 저는 신성, 인성을 둘 다 믿어 고백하며 뉘우치던 저 강도의 기도 올리나이다. 토마스처럼 그 상처를 보지는 못하여도 저의 하느님이심을 믿어 의심 않사오니 언제나 주님을 더욱더 믿고 바라고 사랑하게 하소서. (중략) 예수님, 지금은 가려져 계시오나 이렇듯 애타게 간구하오니 언젠가 드러내실 주님 얼굴 마주 뵙고 주님 영광 바라보며 기뻐하게 하소서. 아멘. (~집회25,26) 이병우 루카 신부 |
제목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4.11)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요한10,33ㄴ) '우리도 신이 되어보자!' 오늘 복음(요한10,31-42)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는 말씀'과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 건너편으로 가시는 말씀'입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10,30)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하느님 행세를 했다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성체성사를 통해 빵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어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시편82,6) 우리도 신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다시 부활하는 신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말씀이 내 안으로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몸(성체)이 내 몸 안으로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매일 그분(예수님)은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매일 사제의 손을 통하여 아버지의 품으로부터 제대 위에 내려오십니다. ... 지금 축성된 빵으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 주십니다. 육신의 눈으로 (축성된) 빵과 포도주를 볼 때, 그것이 참되고 살아 있는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라는 것을 보도록 또 굳게 믿도록 합시다. 이와 같이, '나는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라고 스스로 말씀하셨듯이 주님은 당신을 믿는 이들과 함께 이런 형상으로 항상 계십니다."(권고1 '그리스도의 몸', 17-18.19ㄴ.21-22절) '말씀과 성체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어,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참되게 믿고, 우리도 생각과 말과 행위로 신이 되어봅시다! (~집회29,28) 이병우 루카 신부 |
제목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4.12)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요한11,53) '간절함의 차이' 오늘 복음(요한11,45-56)은 '최고 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는 말씀'입니다. 베타니아에서 있었던 일, 곧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마르타의 죽은 오빠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런데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민심의 동요를 우려해, 최고 의회를 소집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합니다. 이 일에 대사제 가야파가 큰 기여를 했습니다. 이제 모두를 위해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일만 남았습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11,50)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수많은 일들(기적들)을 보고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유다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하느님과 메시아와 구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백성의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합니다. 보잘것 없는 이들이 예수님을 잘 따르고 믿고,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간절함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낫고자 하는 간절함, 얻고자 하는 간절함, 살고자 하는 간절함, 구원 받고자 하는 간절함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향해 이런 간절함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구원받았고, 이 간절함이 없었던 사람들, 교만한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했고, 구원으로부터 멀어진 삶을 살았습니다.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떠한 모습인가? 간절함의 모습인가? 아니면 간절함이 없는 교만의 모습인가? 곰곰이 성찰해 보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세상을 떠난 두봉 주교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아멘." (~집회32,24) 이병우 루카 신부 |
율법학자 바리사이와 – 우리, 간음한 여인과 – 우리 2,000년이 지난 지금 예수님이 똑같은 말을 하셨다면 죄가 가장 많은 사람이 죄 없는 듯이 가장 빨리 돌을 던졌을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자주 듣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마태 23,13).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말은 실행하고 지켜야 하지만 행실은 따라하지 마라”(마태 23.2-3).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이러한 예수님의 나무람과 비난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인들은 독한 마음을 품고(루카 11,53)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습니다(루카 11,54).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옭아매고,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요한 8,6)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와서 심판해 주기를 요구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모세법이 그같은 죄를 지었을 때 돌로 쳐죽이도록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할 때 예수님의 심판은 단죄의 심판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죄를 용서해 주는 경우 예수님은 모세법의 위반자가 되고 단죄하는 경우 예수님 자신이 가르침의 모순에 떨어지게 될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의 함정을 빠져나갈 틈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상황을 완전히 뒤엎어 버립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7절).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사람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떠나갔다(9절)고 복음은 전해줍니다. 오늘 복음에 대해 몇 년 전 작고하신 이어령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런 말씀을 합니다. “2,000년 전 이스라엘 사람들은 참 양심적이었다. 죄 없는 자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할 때 그들은 한 사람씩 떠나 갔다. 2,000년이 지난 지금 예수님이 똑같은 말을 하셨다면 죄가 가장 많은 사람이 죄없는 듯이 가장 빨리 돌을 던졌을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인들에게 2,000년 전 예수님이 하신 말씀, 간음한 여인을 끌고 온 율법학자들, 바리사이인들의 행위에 대한 이어령 교수의 말씀을 생각해 보면서 사순절을 지내는 형제 자매님들께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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