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사순 제4주일>(3.3 <사순 제4주일>(3.30)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루카15,32ㄱ) '회개의 기쁨!' 오늘 복음(루카15,11-32)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세리와 죄인들을 받아들이시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투덜거리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들려주십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 탕자의 비유를 통해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 죄인을 사랑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회개의 기쁨을 만납니다. "죄를 짓지 않고 선만을 행하는 의로운 인간이란 이 세상에 없다."(코헬7,20) 코헬렛이 전하는 이 말처럼,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죄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 때문에 언제나 죄인입니다. 하지만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복된 죄인'입니다. 우리 죄가 아무리 크더라도 하느님의 자비가 훨씬 더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로 돌아가면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자비로우신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작은아들인가? 아니면 자비를 베푸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불만을 드러내는 큰아들인가? 지구촌 여기저기에서 큰 재해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큰 산불도 그렇고, 엇그제 금요일 오후에 일어난 미얀마의 강진도 그렇고. 왠지 회개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에 대한 하느님의 분노가 아닌지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기쁨은 '회개의 기쁨'입니다. 다시 살아나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이 내 안에서, 그리고 내가 머무는 공동체와 지구촌 안에서 넘쳐났으면 좋겠습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카15,22-23) 얼른 하느님과 화해하고, 너와 화해합시다! (~아가5,16) 이병우 루카 신부 |
제목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사순 제4주간 월요일>(3.31)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4,50ㄴ) '말씀에 대한 믿음!' 오늘 복음(요한4,43-54)은 예수님께서 카나에서 일으키신 두 번째 표징인 '왕실 관리의 아들을 살리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적이 있는 갈릴래아 카나로 가셨을 때, 왕실 관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가시어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합니다. 거듭 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4,50ㄴ)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갑니다. 그리고 그가 가는 도중에 자기 아들이 나아졌다는 소식을 전해듣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시간에 아들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 표징을 보고 왕실 관리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됩니다. 오늘 복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복음이 백인대장이 자기의 병든 종을 고쳐달라고 청하는 복음(마태8,5-13)입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8,8) '말씀에 대한 믿음!' 두 복음 모두 '예수님 말씀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믿음), 곧 말씀에 바탕을 둔 믿음'이 큰 기적을 만들어낸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왕실 관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따랐습니다. 이 믿음이 기적을 만들어냈고,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는 또 하나의 기적을 만들어냈습니다. 나는 얼마나 하느님의 말씀을 믿으면서 그대로 따르고 있는가? 나는 얼마나 미사 때 말씀 선포나 사제의 강론이나 너를 통해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으려고 그 순간에 깨어있는가? 우리도 이방인인 왕실 관리와 백인대장처럼, 그리고 성모님처럼 말씀에 깨어있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녀들이 됩시다! 그래서 우리도 기적을 만들어냅시다! (~지혜1,16)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4,50ㄴ) '말씀에 대한 믿음!' 하느님의 말씀을 믿으면서 그대로 따르고 있는가? 미사 때 말씀 선포나 사제의 강론이나 너를 통해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으려고 그 순간에 깨어있는가? 생명과 생명력을 얻습니다 이방인인 왕실 관리와 백인대장처럼, 그리고 성모님처럼 말씀에 깨어있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녀들이 됩시다! 그래서 우리도 기적을 만들어냅시다! |
제목 <사순 제4주간 화요일> <사순 제4주간 화요일>(4.1) "건강해지고 싶으냐?"(요한5,6ㄴ) '생명수이신 예수님!' 오늘 복음(요한5,1-16)은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복음에서 언급되고 있는 벳자타 못은 생명수입니다. 물이 출렁거릴 때 벳자타 못 속으로 병자들이 들어가면 병이 낫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곳 주변에는 많은 병자들이 있었고,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앓는 병자도 있었습니다. 이 병자가 예수님을 만나 구원됩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5,6ㄴ.8)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요한5,9) 지난 사순 제4주일은 '장미주일'이라고 불리는 주일이었습니다. 장미주일은 기쁨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주일입니다. 회개와 보속의 사순시기 중간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부활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조금만 더 참고 힘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사순과 부활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사순은 부활을 향해 있고, 부활은 사순을 대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부활신앙입니다. 사순이라는 고통과 죽음을 건너 부활로 나아가는 신앙입니다. 부활이 신앙의 본질이며, 목적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지금 여기에서 언제나 기뻐하는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하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는 기도를 하지 않았거나 미사에 참례하지 않은 것도 죄이지만, 죄의 본질은 지금 여기에서 기뻐하지 않은 것, 부활하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이 기쁨과는 너무 먼 상황에 놓여있지만, 주님께서는 이 고통을 곧 기쁨으로 바꾸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수이십니다. 우리를 다시 살려주시는 생명수이십니다. 생명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갑시다! "너도 건강해지고 싶으냐?" 선물로 주어진 4월입니다. 4월을 기쁘게 다시 시작합시다! (~지혜6,25) |
제목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사순 제4주간 수요일>(4.2)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요한5,21) '단순한 믿음이 되자!' 오늘 복음(요한5,17-30)은 '아드님의 권한'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10,30)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5,17)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요한5,19)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생명으로 넘어갔다."(요한5,24)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5,25) 유다인들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다(신성모독죄)'는 이유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49,15)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전하게 드러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역설적이게도 십자가를 사랑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십자가 사랑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이 이제와 영원히 사는 길이기 때문에. 단순한 믿음이 됩시다! 오늘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부활이신 예수님,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단순한 믿음이 됩시다! "하느님, 의로운 이에게 상을 주시고, 참회하는 죄인을 용서하시니, 죄를 고백하는 저희를 자비로이 용서하소서."(본기도) (~지혜11,25) |
제목 <사순 제4주간 목요일> <사순 제4주간 목요일>(4.3) "내가 하고 있는 일들과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요한5,36ㄷ.39ㄴ) '예수님을 증언하자!' 오늘 복음(요한5,31-47)은 '예수님을 믿게 하는 증언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증언이라는 단어가 열두 번 나옵니다. 증언(證言)의 사전적 정의는 '사실을 말로 증명함'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믿게 하는 두 증언에 대한 말씀인데, 이 증언은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드러남)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증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과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이 당신을 증언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얼마나 하느님의 완전한 드러남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가?' 그리고 '얼마나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통해서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삶의 자리인 세상에서 예수님을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통해서 하느님의 완전한 자기계시이신 예수님을 드러내려고 애를 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하느님을 증언(계시)하셨습니다. 예수님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증언(뜻은 그들만의 구원과 잔치가 아닌, 모두의 구원이요 모두가 함께 하느님의 나라라는 잔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공정이요 정의이며 우리가 지금 실현해야 할 공동선'입니다.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큰 문제는 바로 '공정과 정의와 공동선의 문제'입니다. 권력과 힘과 재물이 있는 곳으로 기울어져 있는 '불공정과 불의와 양극화의 문제'입니다. 법이라는 가치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공정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지금 직면해 있는 대통령 탄핵 문제는 대통령이 '헌법을 지켰는지 지키지 않았는지?'에 대한 단순한 문제입니다. 그것에 따라 판결하면 되는 문제입니다. 공정한 판결이 내려지기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간절히 기원합니다. (~지혜16,29) 이병우 루카 신부 |
![]() |
제목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사순 제4주간 금요일>(4.4)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이 아닙니까?"(요한7,25) '나에게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오늘 복음(요한7,1-2.10.25-30)은 '저분이 그리스도인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요즘 우리가 듣고 있는 요한복음의 말씀은 유다인들이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 하느님을 완전하게 드러내 보여주신 예수님, 그래서 하느님과 하나이신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말씀'입니다. '저분이 그리스도이신가?' 유다인들의 이 물음 안에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메시아로,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는 그들의 불신이 드러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4월 첫 목요일인 어제는 저녁미사 미사 후에 '성시간'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성체를 현시해놓고 성체조배하면서 묵상했습니다. 먼저 하느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생각과 말과 행위로 굳게 믿지 못한 죄에 대해 하느님의 자비를 청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를 지켜달라고 간청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인 우리나라가 대혼란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간절히 청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불공정과 불의와 갈라치기를 부추기는 기득권 세력 앞에서 침묵하지 않으셨고, 그들과 맞서 싸우셨습니다. 그렇게 끝까지 그들과 싸우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이런 삶을 사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도 그런 삶을 살려고 노력합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직무대리자인 사제들은 더욱더 그렇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와 공동선의 실현을 위해 불공정과 불의에 맞서 싸웁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잘 믿고, 나와 너 그리고 모두의 구원을 위해 땀 흘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혜 19,22) 이병우 루카 신부 |
<복되신 동정 마리아 신심 미사>(4.5)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마태2,13ㄴ) '성모칠고(聖母七苦)!' 오늘 복음(마태2,13-15.19-23)은 '아기 예수님께서 이집트로 피신하셨다가 이집트에서 돌아오시는 말씀'입니다. 권력에 눈이 먼 헤로데라는 폭정꾼 때문에 아기 예수님께서 이집트로 피신해야만 하는 고통을 겪으십니다. 그리고 베들레헴 일대에서 태어난 두 살 이하의 죄 없는 아기들이 살해당합니다. 한 생을 아들 예수님과 함께하신 어머니 마리아의 일곱 가지 고통을 묵상해 봅니다. 이를 '성모칠고(聖母七苦)'라고 합니다. 1)아들 예수 때문에 어머니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이라는 시메온의 예언을 들었을 때의 고통! 2)아기 예수와 함께 이집트로 피난 갈 때의 고통! 3)예수님을 잃고 찾아 헤맬 때의 고통! 4)십자가를 진 예수님을 만났을 때의 고통! 5)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아들 예수님 앞에 섰을 때의 고통! 6)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려 품에 안으셨을 때의 고통! 7)아들 예수님을 무덤에 묻을 때의 고통! 성모님의 위대함은 예수님 탄생 예고를 시작으로 예수님을 무덤에 묻을 때까지 한 생을 아들 예수님과 함께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드러나지 않게 아들 예수와 함께 끝까지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힘의 바탕은 '믿음'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라는 '마리아의 결정적 순종으로 드러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또한 미지의 땅인 가나안 땅으로 떠나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고향 하란을 떠난 '아브람의 믿음'입니다.(오늘 제1독서) 나의 믿음은 어떠한가?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간 어머니 마리아의 믿음인가? 아니면 갈대처럼 흔들리는 믿음인가? 기분에 따라 움직여지는 믿음인가? 마리아와 요셉의 믿음(순종)을 본받아 우리도 잘 믿도록 합시다! (~집회6,37) 이병우 루카 신부 |
![]() 생명을 받았을때 우리에게 온마음을 주셨습니다 우리역시 온마음을 다해 겸손하게 회개하고 용서받고 사랑받는 목을 껴안기고 입을 맞추는 성사, 우도의 회개의 성사처럼 낙원의 기쁨으로 나아가기를 ~아멘 !!!~~ 신부님 기쁜 부활 준비하겠습니다 |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식을” 우연히 발견해 아버지는 달려 나가 마중했을까.아니다. 오히려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자식을 아버지는 목놓아 기다리고 계셨던 결과이다. 오늘 복음은, 신자라면 누구나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본 듯한 내용이다. 아버지에게 늘 순명하며 착하게 살아가는 첫째 아들과 망나니처럼 제멋대로 살아가는 둘째 아들의 비유 말씀이다. 우리가 아는 상식으로는 큰아들의 삶의 결과가 좋게 결말지어져야 한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반전이다. 우리의 상식과는 차이가 크게 난다. 아버지께 불순종하고, 제 뜻을 고집하며 살던 둘째 아들을 아버지는 따뜻하게 받아들인다. 그럼 이 복음 내용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아버지의 아들을 향한 무한한 사랑”을 드러낸다. 비록 그 자식이 아버지의 뜻을 거슬러, 출가해 흥청망청 가산을 탕진하고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아들이지만, 아버지는 사랑으로 품어 주신다. 여기까지라면, 너무 식상하다. 조금 더 깊이 성경 본문을 들여다보자. 아들이 집을 떠난 후 언제 돌아올지 아버지가 알고 있었던가. 아니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그 아버지의 모습을 이렇게 담담히 표현하고 있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라는 표현을 통해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준다.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식을” 우연히 발견해 아버지는 달려 나가 마중했을까. 아니다. 오히려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자식을 아버지는 목놓아 기다리고 계셨던 결과이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바로 이런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다. 내가 지은 잘못과 죄로 내 삶이 온통 망가져 있어도 둘째 아들을 기억하며, 사랑이신 아버지께 달려들기만 하면 된다. 사순시기이다. 뭘 망설이는가. 온통 사랑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품으로 달려들자!!! --------------------------------------------------------------이창섭 아우구스티노 신부 |
'미사의 은혜 > 사순시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순제 5주간--그리스도인은 이제와 영원한 구원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살기 위해서, 참평화를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0) | 2025.04.05 |
---|---|
<사순 제3주일>(3.23)'회개의 열매!' 외롭지 않은 무화과나무 (1) | 2025.03.24 |
<사순 제2주일> 25.3.16-씨 뿌리는 심정으로 사순절을 보내자 (0) | 2025.03.16 |
<사순 제1주일>(25.3.9)'믿음과 기도와 말씀 안에서' 깨어있도록 합시다! (0) | 2025.03.09 |
사순시기,<재의 수요일>(3.5)생명이신 예수님, 행복과 축복을 선물로 주시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뒤를 보다 더 충실하게 따라가려고 애쓰는 은혜로운 사순시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0) | 2025.03.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