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3회 불평은 지금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하는 것. 불평하면 아무 발전이 없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8월 9일(역대기하 24장~ ) 몽테스키는 ''인간은 생각하는 것이 적으면 그만큼 더 떠든다.'' 《하느님의 복과 좋은 일을 고대하고 기대하기》하느님의 복에 마음을 두고 좋은 일을 기대하며 그분이 예비하신 놀라운 일을 떠올려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이렇게 기도하라. “아버지,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날지 무척 기대됩니다. 오늘은 아버지께서 만드신 날입니다. 이 날을 기뻐하고 제대로 누리겠다. 하느님, 당신을 찾는 자에게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당신이 오늘 제 삶을 통해 주실 복과 은혜와 승리에미리 감사드립니다.” 기도하고 나서 자신 있게 삶 속으로 뛰어들어 기대와 믿음으로 살라. -믿는 대로 된다, <긍정의 힘>- 세상의 아버지들이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더 좋은 것으로 복과 은혜와 성공을 주시지 않겠는가? 인생은 긍정적인 생각으로 채워야 한다고 합니다. 심리학자에 의하면, 삶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생각을 따라간다고 합니다. “기쁨과 평화, 승리, 은혜의 충만함, 하느님의 복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으면 그런 긍정적인 요소들과 우리 삶은 자석처럼 서로 끌어당긴다고 합니다.” 미술가는 자기 생각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미술 도구를 사용하여 보이는 실체로 구현합니다. 소설가도 그렇다. 생각 안에 있는 관념들을 글로 표현하면 소설이 됩니다. 신앙생활도 우리의 생각에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떠올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면 은혜롭게 되고, 하느님의 은총과 권능이 서로 감싸 안아 평안과 기쁨과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하루에도 알게 모르게 평균 30번 내외의 불평을 한다고 합니다. 불평은 얼핏 지금의 안 좋은 상황을 바꾸어보려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지금 상황에 안주하려는 의도가 깔려있다. 남 탓하며 자신이 책임지려 하지 않는 것. 지금 상황을 변화시키려면 불평이 아니라 반성을 해야 합니다. 불평은 지금 닥친 상황에 나의 탓이 없다고 말하는 책임회피입니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2001)는 ‘게임 이론’으로 199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실존 인물 ‘존 내시’ 의 삶을 그렸다. 게임 이론은 인간관계 안에서 어떠한 선택을 하며 살 것인지를 수학적으로 풀어내었다. 그가 수학자이면서 인간관계에 집중했던 이유는 아마도 인간관계가 원활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 그는 감수성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위대한 수학자였던 그는 어느 날 정부 요원에 의해 암호 해독을 하는 일을 비밀리에 수행합니다. 그런 중에 죽음의 위협도 감수해야 했다. 이런 와중에 힘이 되어주는 유일한 친구가 한 명 있었다. 아내도 이해해주지 못하는 이런 상황을 그 친구만 이해해주었고 그의 딸도 존 내시의 편이 되어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렇게 믿었던 친구가 배신하고 존 내시를 정신병원에 가두었다. 배신감을 느낀 내시는 크게 분노합니다. 자신이 나라를 구하는 일을 하는데 너무 방해가 많은 것. 정신병원에서는 그가 정신분열과 피해망상증을 겪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정부 요원이나 친구, 여자아이는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허상이었다. 남편의 전쟁놀이에 참다못해 집을 떠나려는 아내 앞에서 그는 차를 멈추어 세웁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아이가 자라지 않아!” 정신병원에서 나온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여자아이는 자라지 않고 있었다. 그는 그 세 명의 허상이 자신에게만 보이는 것을 인정합니다. 연구를 계속합니다. 그렇게 나중에 노벨상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허상임을 인정했을 때 그것들의 존재가 사라졌을까요? 아닙니다. 존 내시는 그것들을 보며 평생을 함께 살아야 했다. 그러나 불평하지 않았다. 받아들였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갔다. 자신이 할 일을 하지 않게 만드는 핑계거리에 자신을 던지는 것을 멈춘 것. 불평하지 말고 내가 할 일을 찾아야합니다. 현재의 처지를 주위의 사람들에게 불평하는 것은 “나는 나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겠다.” 라고 선언하는 것. 아담이 하와에 대해 불평하고 그런 하와를 만들어준 하느님께 불평했을 때 그는 죄에서 돌아설 마음이 있었을까요? 자신의 처지를 정당화하면서 변화할 마음이 없음을 보여준 것. 하느님은 그런 아담을 그 자리에 계속 두실 수 없으셨다. 바리사이들은 마귀를 쫓아내시는 예수님을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이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는 것이 정당화됩니다. 자신들은 마귀의 힘을 빌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자신을 책임질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런 불평을 하지 않았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나라도 저들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담이 불평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와의 탓도, 주님의 탓도 아님을 인정하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만 남게 됩니다. 이것이 반성입니다. 불평하며 동시에 반성할 수 없다. 그러니 불평은 변하지 않으려는 책임회피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처지에 이렇게 하라고 권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불평하지 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뜻입니다. 자신이 좋은 일꾼이 되지 못하면 일꾼을 보내 달라고 청이라도 하라는 것. 남편이 마음에 안 들면 불평하지 말고 남편이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라는 것. 본당 사제가 마음에 안 들면 불평하지 말고 더 좋은 목자가 될 수 있도록 청하라는 것. 불평하면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됩니다. 어느 신부님께서 신학생 때 거의 무전 여행하다시피 하며 우리나라를 조금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한번은 포항의 구룡포 성당 유아실에 몰래 들어가서 밤을 지낸 적이 있다. 늦은 밤이라 아무도 없어서 빨리 자고 빨리 나오면 될 것으로 생각했다. 문제는 모기였다. 불을 켜고 모기를 잡을 수도 없었다. 몰래 들어온 것이 들통나기 때문입니다. 얼굴이 비뚤어질 정도로 밤새 모기에 물렸다. 어떻게 참았을까요? “아이, 왜 이렇게 모기가 많아!” 밤새 불평하며 참았다. 불평은 지금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하는 것. 불평하면 아무 발전이 없다. 그냥 물리면서 버티기 위해 하는 것. 나의 탓은 하나도 없고 그래서 발전도 없다. 불평하지 않는 습관을 들입시다. 40일 동안 불평하지 않으면 습관이 된 것. 달력에 동그라미나 엑스 표를 하며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습관은 두 번째 천성입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자기의 인생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입니다.----OK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이 오기 전에,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그 마지막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웃니들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좋은 생각을 떠올릴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은 많은 생각을 하는 것이다.'' - 라이너스 폴링 - |
♡2184회 우리가 먼저 변해야 상황과 환경이 바뀝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8월 10일(에즈라기 1장~ ) 파스퇴르는 ''행운은 마음의 준비가 있는 사람에게만 미소를 짓는다.'' 《인생의 환난 때 비로소 본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시험의 목적은 우리의 자질과 인격과 믿음을 검증하는 것. 우리는 평생에 걸쳐 다양한 시험에 직면하며, 우리가 싫어하든 좋아하든 하느님은 그 시험을 사용하여 우리를 단련하시고 깨끗하게 청소하신다. 시험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우리를 빚는 것. 하느님과 협력하여 하느님이 밝혀 주신 부분을 재빨리 고칠 때, 우리는 시험을 통과하고 더 멋진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다. - 믿는 대로 된다, <긍정의 힘> 우리에게 어떤 시련이 닥치면 우리는 먼저 그 상황을 원망하고 그 상황을 바꾸려고 애를 씁니다. 우리가 먼저 변해야 상황과 환경이 바뀝니다. 주위 사람들을 원망하고 미워하면 그들이 미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미움의 독을 마시게 되어 미운 사람으로 변해 버립니다. 인생의 시련을 겪다 보면 우리는 하느님이 상황보다는 우리 자신을 바꾸는 데 관심을 두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느님이 상황을 바꿔 주시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분명 상황을 바꾸실 수 있고 또 자주 그렇게 하십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를 보면 하느님은 어려운 상황일 때 우리의 가장 약한 부분을 시험을 통해 강해지도록 하십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마태 12,1-2) 이 이야기를 바로 앞에 있는 ‘멍에와 짐에 관한 가르침’ 에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우리는 제자들의 배고픔이 얼마나 심했는지 모릅니다. 어떻든 그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 이라는 것을 모르고서 밀 이삭을 뜯어 먹은 것은 아닐 텐데,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너무 배가 고팠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제자들의 배고픔을 ‘멍에’ 라고 말할 것. 그러나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그것은 멍에가 아닙니다.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실 수 있는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마태 16,8-10) 이 이야기에서, 멍에를 메고 있는 사람들은 제자들이 아니라 바리사이들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자기들도 율법주의라는 멍에를 메고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멍에를 메라고 강요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거나 타이르면서 그들이 메고 있는 율법주의라는 멍에를 벗겨 주려고 애를 쓰셨다. 그들은 살던 대로 살겠다고 고집을 부리면서 그 멍에를 벗기를 거부했다. 만일에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살 정도로 먹고사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하루 굶는다고 죽지는 않는다.” 라고 말하면서, 그가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을 꾸짖을 수 있을까? 굶주림의 고통을 참고 억지로 주일을 지킨다면, 그것이 주일을 지키는 것일까? 주일에 일하지 않아도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도록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하지 않고 주일을 ‘기쁨으로’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공동체의 의무입니다. 안 지키는 것과 못 지키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정말로 몸이 아파서 주일을 못 지키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파서 하루 종일 누워 있는 사람에게 가서 주일을 지키라고 강요하는 것은, 또는 그렇게 아파서 주일을 못 지킨 것에 대해서 고해성사를 보라고 강요하는 것은, 사실상 ‘폭력’ 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 또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 본 적이 없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마태 12,3-6) 바리사이들은 다윗이 율법을 어긴 일을 비난하지 않았다. 배가 고팠다는 특별한 상황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이고, 또 다윗이 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적용하려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해야 합니다. 다윗이 배가 고파서 한 일을 비난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한 일도 비난하면 안 됩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려면, 다윗을 먼저 비난해야 합니다. 또 사제들은 제사 준비 등으로 안식일에도 일을 해야만 했는데, 아무도 그것을 안식일 율법을 어기는 일로 생각하지 않았다. 안식일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 하느님께 제사를 바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나는 하느님과 같은 권위와 권한을 가지고 있다.” “내 제자들이 율법을 어겼는지를 판단하는 일은 내가 한다.” 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을 꾸짖어야 한다면 당신이 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는 것을 보셨으면서도 내버려 두셨다. 그들의 배고픔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쓸데없이 나서지 말고 예수님의 판단을 따랐어야 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7-8).”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한 일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 이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으셨지만, 제자들을 ‘죄 없는 이들’ 이라고 표현하셨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죄를 지은 것은 아니다.” 이 이야기에서 진짜 죄인은, 제자들의 배고픔을 헤아리지 않고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고 비난하기만 한 바리사이들입니다. 그들의 죄는, 자비를 실천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죄입니다. 안식일 규정을 말하기 전에 먹을 것부터 주는 것이 순서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느님께서는 형식적인 율법 준수가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기를 바라신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을 실천하는 것이 하느님을 올바르게 섬기는 것. 내 마음대로 섬기면서 하느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어떤 사람이 율법을 지켰는지 어겼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나의 권한이다.” 어떤 사람이 죄인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나의 권한이다. 라는 선언입니다. 만일에 종교가 사랑도 자비도 없이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율법 준수만 강요한다면, 그 종교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폭군일 뿐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개인 사정을 내세워서 너무 무질서하게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 또한 옳지 않은 일입니다. 다른 사람을 함부로 죄인이라고 판단하면 안 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들의 방종을 내버려 두시는 무질서가 아니라, 정말로 딱한 사정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보살피시는 관심과 사랑입니다. 기도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느끼며 저희 마음 안에 상한 것들이 회복되는 영적인 치유로 마음과 생각, 그리고 몸의 치유도 이루어지는 은총과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 간다.'' - 앙드레 말로 - |
♡2185회 인생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 익으면 성공한 인생을 산 것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8월 11일(느헤미야기 1장~ ) 간디는 ''모든 공포는 믿음의 결핍으로부터 나온다.'' 《마음의 기도》우리가 우리의 지성을 가지고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가 거기서 하느님의 현존 안에 서게 되면, 그때 우리의 정신적 성향들은 모두 기도가 됩니다. 치유하시는 하느님의 현존 속으로 나아가 우리 존재의 중심에서 그분을 접하게 됩니다. 우리 존재의 중심인 마음이 하느님에 따라 그분 자신의 마음속으로, 곧 온 우주를 감싸 안을 만큼 충분히 큰 마음속으로 변형된다는 것은 진정 신비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모든 인간의 고통과 슬픔, 모든 갈등과 고뇌, 모든 고문과 전쟁, 모든 굶주림과 외로움과 비참함을 우리 마음속에 끌어안고 갑니다. 그것은 어떤 커다란 심리적이거나 정서적인 능력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멘! -헨리 나웬, <사막의 영성>- 마음의 기도는 짧은 기도들을 통하여 양육되고, 끊임이 없으며,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마음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존재 중심인 마음이 온 우주를 감싸 안을 만큼 충분히 큰 마음속으로 변형됩니다.” “마음의 기도는 진실로 우리에게 우리 존재의 현실을 바라볼 눈을 제공해 주는 마음의 순수성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순수성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의 궁핍하고 일그러지고 불안한 자기뿐만 아니라 우리 하느님이 돌보시는 얼굴까지도 좀 더 명확히 볼 수 있다. 아멘! 늙는 것이 아니라 익어간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인생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 익으면 성공한 인생을 산 것입니다. 익는다는 말은 내 안의 어떠한 가치를 향하여 꾸준히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그 가치란 하늘 나라의 행복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다. 그 행복에 조건을 붙이기 때문에 지금의 행복을 잃습니다. 익어간다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행복을 잃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향상한다는 뜻입니다. 4년전 코로나 시대에 죽음 앞에서도, 가장 큰 고통 속에서도 행복을 잃지 않는 이들이 있다. 바로 자신 안에 ‘사랑’ 을 성숙시킨 이들입니다. 멕시코에서는 한 손자가 코로나19에 걸려 쓰러진 할머니에게 필사적으로 인공호흡을 하는 사진이 화제가 됐다. 현지 매체에 따르면 이 손자는 코로나19에 걸린 할머니를 모시고 멕시코시티에 있는 병원에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할머니가 병원 주차장에서 갑자기 의식을 잃었고, 손자는 곧바로 할머니에게 인공호흡을 시도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호흡기로 전염되기 때문에 인공호흡은 감염 위험이 큰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는 망설임 없이 할머니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도 그의 할머니는 결국 코로나19로 인해 숨을 거둔 것으로 전해졌다. 1920년 4월 미국에서는 코로나19에 걸린 노부부가 병원으로 떠나기 전 찍은 사진 한 장이 화제가 됐다. 현지 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이 사진의 주인공은 조셉 델리스(88)와 욜란다 델리스(83)입니다. 조셉과 욜란다는 40년 전 브루클린의 한 볼링장에서 만나 데이트를 시작했고, 10년의 연애 끝에 지난 1992년 결혼했다. 두 사람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욜란다는 관절이 나빠져 계단을 오르지 못할 정도로 몸이 약해졌고, 알츠하이머 진단까지 받으며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게 됐지만, 그들은 여전히 함께하며 서로를 아꼈다. 그러던 중 이들 부부가 두 사람 모두 코로나19에 걸리며 비극이 찾아왔다. 부부는 병원에 가기 전 서로의 마지막을 직감하며 작별의 키스를 나누고 사진을 찍었다. 이들은 며칠 후 함께 세상을 떠난 것으로 전해졌다 . 팔레스티나에서는 코로나19에 걸린 어머니를 보기 위해 매일 밤 병원 벽을 기어오른 아들 자하드 알스와이티(30)씨도 있다. 그의 어머니는 몇 주 전 기침 등의 증상으로 병원을 찾았다가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어머니는 이미 백혈병으로 몸이 쇠약해져 있는 상태였고, 병원 측은 생존 확률이 극히 낮다는 진단을 내렸다. 몸이 좋지 않았던 어머니는 입원하게 됐고, 감염 위험으로 면회는 금지됐다. 그러자 알스와이티는 매일 밤 병원 건물의 배수관을 타고 올라 창문 너머로 어머니를 지켜봤고, 어머니가 잠들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반복했다. 이 같은 사연은 병원 근처를 지나던 사람이 그의 모습을 찍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면서 알려졌다. 그러나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지난 16일 끝내 그에게서 어머니를 빼앗아 갔다. 어머니는 그날도 창 너머에 있는 아들의 얼굴을 본 뒤 숨을 거둔 것으로 전해졌다. 어머니는 죽음 앞에서도 아들의 사랑을 느끼며 불행하다 느끼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참조: ‘코로나로 생명은 잃었지만 ... ’, 박수현 기자, 머니투데이, 2020.7.25]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행복은 마치 작은 겨자씨처럼 우리 안에 뿌려져 큰 나무가 됩니다. 그 행복을 추구한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다른 이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사람이 됩니다. 그의 곁에 머무는 사람들이 그 사랑을 받기 때문입니다. 늙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야 하는 이유는 익은 것의 씨가 또 열매를 맺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행복하지 않다면 익은 사람이 아니기에 누구의 마음에도 행복을 줄 수 없다. 남을 행복하게 하고 싶다면 자신 먼저 행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행복의 나무 밑에 새들이 와서 쉴 수 있다. 일본 최고 납세자 ‘사이토 히토리’ 씨도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행복’ 이라 말했다. 행복해지고 싶어야 내 삶의 밭에서 행복해질 수 있는 보물을 발견합니다. 그래야 그 행복을 잡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다 쏟을 수 있다. 그는 무엇보다 마음 상태가 어떤지에 집중합니다. “나는 이따금 마음이 고통스러울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마음의 균형이 깨졌구나!’ 라고 생각하고, 그 균형을 깨뜨린 원인이 어떤 욕심인지 생각해봅니다. 그러면 ‘아, 나한테 이런 욕심이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되면서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행복해지는 비결을 이렇게 말합니다. “중졸 학력에 돈도 없었던 내가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신을 믿고 신이 기뻐하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신이 싫어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세상의 이치를 말하다」, 사이토 히토리) 신이 좋아하는 일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행복하게 합니다. 그것을 키워가는 것이 인성의 성숙입니다. 행복의 씨앗은 마치 누룩처럼 우리를 완전히 변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매 순간 고통스러우면서도 행복할 줄 압니다. 그런 사람이 하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의 씨앗을 받아 그 사랑 때문에 매 순간 행복할 줄 아는 능력을 키우는 것. 한 번에 익는 열매는 없다. 매일을 사랑으로 행복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가는 연습의 장으로 삼아야 합니다. 익은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행복할 수 있고 타인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 마지막 때 늙은 것이 아니라 익었다면 성공한 인생을 산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하느님의 은총을 의심 없이 믿고 살아가는 축복된 천국의 백성으로서, 하느님의 가슴인 고향을 얻은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가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지나간 일로 미래를 설계할 수는 없다.'' - 에드먼드 버크 - |
♡2186회 나의 진정한 비교 대상은 ‘어제의 나’ .여야 합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8월 12일(토빗기 1장~ ) 톨스토이는 ''돈이 없는 것은 슬픈 일이다. 하지만 남아도는 것은 그 두 배나 슬픈 일이다.'' 《기도는 지성과 함께》마음 속으로 내려가는 것 러시아의 신비가, 은둔자 테오판의 마음의 기도에 관한 가장 좋은 공식을 발견한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도하는 것, 지성과 함께 마음 속으로 내려가는 것. 거기서 주님의 얼굴 앞에 서는 것. 여러분 안에 항상 현존하시고, 만물을 바라보고 계시는 바로 그 주님 앞에.” 기도란 지성과 함께 마음으로 하느님 현존 안에 서는 것. 우리가 존재하는 바로 그 자리, 어떤 구분이나 구별도 없고 전적으로 하나 된 바로 그 자리에 거기서 하느님의 성령이 거하시고, 거기서 위대한 만남이 일어납니다. 거기서 마음이 마음에게 이야기를 하지요. 거기서 우리가 우리 안에서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주님의 얼굴 앞에 서기 때문입니다. -헨리 나웬, <사막의 영성>- 우리는 기도할 때 묵상이라는 이름으로 주님께 대한 생각과 우리가 이해하는 지성을 동원하려 합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생각과 지식이 뒤범벅이 되어 버려 생각에 생각의 꼬리를 물고 생각에 붙잡혀 있다가 기도가 끝나면 일상의 삶에 대한 근심 걱정에 휩싸입니다. 기도란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가 “마음 속 근원에서 하느님의 얼굴 앞에 진솔히 서는 것. 하느님의 성령이 거하시고 우리 안에 항상 현존하시는, 만물을 바라보고 계시는 주님의 얼굴 앞에 서는 것” 입니다. 남과 비교하며 살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느냐고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남과 비교하면 힘들어지기 때문일 것. 어떤 분이 ‘비교’ 로 이행 시를 지었는데 이렇게 지었다. 비: 비참해지거나, 교: 교만해지거나. 내가 남과 비교하는 이유는 우월해지기 위해서입니다. 남과 비교해서 열등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열등감 때문에 우월해지려고 남과 비교하게 되는 것. 우선은 사람은 어차피 비교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내가 누군가와 비교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살아서 어떠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불교나 뉴에이지와 같은 쪽에서는 남과 비교하는 것조차 내려놓아야 한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는 달리지 말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서라는 말과 같다. 사실 스님들도 자신이 부처처럼 되기 위해 달리는 것이고 누가 더 앞서가는지 뒤처지는지 같은 길을 가는 다른 이들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와 나 자신을 비교하고 있다는 것은 어디를 향해 달리고 있다는 것이니 좋은 징조입니다. 다만 방향은 좀 수정할 필요가 있다. 여러분들은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릴 이 두 사람 중 누가 더 부러운지 생각해보십시오. 둘 다 수천억의 자산가입니다. 이탈리아의 ‘잔루카 바키’ 라는 인물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입에 물고 있었다. 수천억의 재산과 초호화 보트, 개인 제트 비행기, 수영장 딸린 저택은 기본입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거의 할아버지인데도 미스 유니버스와 같은 젊은 최고의 미녀들을 바꾸어가며 삽니다. 그의 저택에는 잡지에나 나올법한 미녀들이 몇 명씩 함께 삽니다. 그는 SNS를 통하여 자신의 삶을 세계 많은 이들과 공유합니다. 부러움을 사기 위해 올리는 것. 행복하다면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구하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자신을 홍보할 필요는 없을 것. 자랑은 부족한 행복을 채우기 위한 수단입니다.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그의 추종자가 되어 그의 하루하루를 부러워하며 그의 부족한 행복을 채워주고 있다. 그 다음은 우리가 잘 아는 홍콩의 ‘주윤발’ 씨가 있다. 얼마 전에 자신의 재산 ‘8천억 원’ 을 전액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아내도 이에 동의하였다. 주로 지하철을 이용하고 저렴한 식사를 하고 싸구려 시계와 옷을 입습니다. 건전하고 겸손한 생활의 대명사입니다. 하느님께서 만약 두 사람의 인생 중 누구를 택하겠느냐고 물으시면 어떤 삶을 택하시겠습니까? 바키를 선택하시는 분들은 돈과 쾌락과 명예를 추구하시는 분이고, 주윤발 씨를 택하는 분은 그것보다는 하느님 뜻에 맞는 삶을 원하시는 분들입니다. 결국, 내가 부러워하는 것은 단순한 그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도달하고 싶은 방향으로 나보다 앞서가는 사람입니다. 나의 달리는 방향을 바꾼다면 이전에 부러워하던 사람들은 마치 만화영화에나 나오는 사람처럼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은 열두 사도를 뽑으십니다. 열두 사도를 뽑아 파견하신다는 말은 ‘소명’ 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소명은 삶의 방향이고 인생의 목적지입니다. 주님께서 목적지를 지정해주시는 것. 그 목적지가 삶의 이유이고 행복임을 믿는다면 이제 그들은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과 함께 달리는 동료들이 있을 뿐입니다. 소명은 그 사람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기에 소명대로 사는 사람의 경쟁자는 결국, 자기 자신입니다. 소명을 받은 이들은 주님께서 정하신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할 것만을 걱정하여 남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그렇기에 나의 비교 대상은 나 자신이고 나의 주위에서 달리고 있는 이들은 또한 내 협조자들이고 나의 위로자들이고 나를 발전시킬 수 있는 대상들입니다. 정리하자면, 우선 비교 대상이 없는 사람이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비교하지 않고 사는 것은 무기력에 빠지겠다는 말과 같다. 제자리 뛰기를 하는 사람보다 목적지를 향해 눈이라도 돌리는 사람이 더 활기차고 행복합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비교하며 비참해지거나 교만해지거나 합니다. 비참해져도, 교만해져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소명을 깨달은 사람은 누구도 부러워함 없이 함께 뛰는 사람들을 발전의 기회로 삼습니다. 그래서 나에 대한 주님의 소명을 찾아야만 하는 것. 나의 진정한 비교 대상은 ‘어제의 나’ .여야 합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도 마음은 말씀으로 축복받고, 그리고 사랑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이미 영원한 곳을 품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칭찬받기를 원하면 자화자찬을 하지 말라.'' - 파스칼 - |
♡2188회 오늘을 가라지로 살면 내일도 가라지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8월 14일(에스테르기 1장~ ) 질 그리핀은 ''진정한 영업은 ‘고객구매’후 시작된다.'' 은총은 우리 안에 하느님의 현존이자 활동 그 자체 우리가 선행을 하거나 하느님께 다다르기 위해 ‘사용하는 그어떤 것’ 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완전히 분리된 ‘물건’이나 ‘실체’ 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이자 활동 그 자체다. 그러므로 은총은 그분에게 가기 위해 그분으로부터 ‘받아야 하는’ 필수품이 아니다. 실제로 은총이란 우리 삶 속에서 역동적으로 활동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성화 에너지에 의해 우리 안에 생겨나는 존재의 질적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초대 그리스도교 문학에서, 특히 신약성서에서 하느님 자신이신 성령을 받는 것에 비해 은총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적게 나오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토마스 머튼, <삶과 거룩함>- 성령은 우리 영혼의 반가운 손님으로 우리 안에 현존하십니다. “하느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여러분은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로마 8, 9) 세례를 받으면 우리가 ‘성령의 궁전’ 이 되어 우리 안에 하느님이 현존하십니다. 하느님이 현존 안에 머무르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친교를 맺게 되는 것이기에 끊임없는 기쁨과 힘과 평화를 얻게 될 것. 우리는 생명과 평화 자체이신 성령의 은밀한 내적 인도와 더욱 더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를 더 잘 맛보고 즐길 수 있게 될 것. (갈라 5장 참조) 성령께서는 기도할 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하느님께 탄식하시며 기도하십니다. 나이가 70을 코앞에 두다 보니 많은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 그동안 자신 있었던 건강도 이제는 자신이 없어집니다. 더 나아지지 못하고 어차피 고장 날 것이기에 최대한 아껴 쓰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건강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내가 잘못된 방향으로 달려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달려온 길을 뒤 돌아보고 나아갈 길을 다시 확인해야 하는 때이기에 공자는 ‘지천명’(하늘의 뜻을 안다)이라고 정의했을 것. 지혜롭게 나이 드는 법에 관해 정리를 해 볼 필요가 있다. 어떻게 하면 지혜롭게 나이 들어갈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잘못된 방향으로 빠지지 않을까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혜롭게 나이 드는 방법은 ‘죽음을 생각하라!’ 라는 것. 라틴어로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고 합니다. 죽음을 생각하되 오늘을 마지막 날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이 격언은 “카프페 디엠”(carpe diem)입니다. 오늘을 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오늘을 마지막 날처럼 사는 것만큼 인생을 성공시키는 데 좋은 방법이 없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톨스토이가 한때 생각했던 죽음을 대처하는 방식이어서는 안 됩니다. ‘조던 피터슨’의 『12가지 인생의 법칙』에 톨스토이가 제안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4가지 방식이 실려 있다. 1. 어린이처럼 죽음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것, 2. 어차피 죽는 무의미한 인생을 그냥 생각 없이 사는 것, 3. 삶은 고통이기에 더 고통 받지 않고 그냥 죽음을 맞이 하는 것, 4. 어차피 무의미한 삶, 그냥 지금 무작정 쾌락을 추구하며 오늘을 사는 것. 죽음을 생각하는 삶, 오늘을 사는 삶이 맞지만 이런 자세는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 수 없다 . 초나라와 한나라의 대결의 두 주인공, ‘항우’ 와 ‘유방’ 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시왕은 폭정을 일삼다가 죽습니다. 이 틈을 타서 초나라가 들고 일어나 다시 중국의 통일을 이루려 합니다. 이때 두 위대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항우와 유방입니다. 항우는 특급귀족 출신이고 기골이 장대하고 잘생기기까지 하였다. 반면 유방은 문지기 천민 출신이었고 서른이 넘을 때까지 한량으로 세월을 보낸 인물입니다. 그의 군대는 오합지졸 그 자체였고 승리도 거의 거두지 못했다. 초나라 임금은 이 둘을 경쟁시켜서 중국을 통일하려 합니다. 이 과정에서 항우는 승리를 거듭하지만, 목적지에 유방보다 늦게 도달합니다. 항우는 항복한 군사 20만 명을 자신을 배신할 수 있다는 이유로 몰살시켜버립니다. 반면 유방은 길만 비켜주면 죽이지도 않고 강탈하지도 않겠다고 회유하며 싸우지도 않고 승리를 거둔 것. 항우는 화가 나서 유방을 죽이려 하지만 실패합니다. 그의 주위에는 언제나 그를 지켜주고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항우는 초나라로 돌아와 쿠테타를 일으켜 자신이 왕이 됩니다. 그리고 꼴 보기 싫은 유방을 지방으로 보내버립니다. 그러나 그의 안하무인 격의 성격 때문에 위대한 지략가들과 장수들이 지방에 있던 유방에게로 몰립니다. 유방은 끊임없이 책을 읽으며 공부하여 인덕을 닦아나갔다. 그의 부하들이 그의 스승이었다. 이에 민심은 유방에게로 향했고 군대의 질과 숫자의 열쇠에도 불구하고 결국 항우를 몰아내고 중국을 통일합니다. 한나라가 초나라를 이긴 것. 이 과정에서 항우는 스스로 자결을 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1세였다. 그때 그의 곁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유방도 천하통일을 이룩하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와 동네 사람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이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죽게 되었는데 당시 나이가 62세였다. 누군가 워런 버핏에게 인생의 성공은 무엇이라 정의하겠느냐는 질문을 하였다. 워런 버핏은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는 사업보다 인간관계를 중요시하여 그의 직원 대부분은 회사를 시작할 때부터 함께 한 사람들입니다. 그는 그들을 가족이라 부릅니다. 예수님은 밀과 가라지의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밀과 같이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어떤 사람은 쓸모없는 사람이 됩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연세가 들고 몸이 안 좋아질수록 더 많은 사람을 모았다. 2000년 그 더운 여름 로마로 청년들이 2백만 명이 넘게 모였다. 하루에 일사병으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간 청년만 8백 명이었다. 그러면서도 왜 청년들은 그분에게 그렇게 모였던 것일까요? 먹을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삶을 계속 밀로 만들어오셨다. 당신 자신이 젊은이들에게 양식이 될 수 있으셨던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님도 마찬가지일 것. 그러나 밀은 한순간에 익지 않습니다. 매일매일을 밀이 되는 삶을 살아야 마지막 때에 많은 사람을 먹일 밀이 됩니다. 오늘을 가라지로 살면 내일도 가라지입니다. 인생을 성공으로 끝맺으려면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것으로 오늘부터 나를 채워가야 합니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것으로 채워야 합니다. 마지막 때 양식이 되는 사람만이 하늘에 살 자격을 얻게 됩니다. 항우처럼 자신의 출세를 위해 타인을 이용하면 결국 쭉정이가 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고 끊임없이 도움이 되기 위해 공부하면 알곡이 됩니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이웃을 위한 양식이 되는 삶을 살기 시작하면 정말 마지막 때에 유방처럼 잔치를 벌이며 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 마음 안에 있는 “주 그리스도 예수님” 이라는 보물로 나이가 들어가면서 육신은 나약해지지만, 영혼에는 새로운 기쁨으로 충만한 은총의 삶을 살아갈 수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사랑은 일종의 전쟁이다.'' - 오비드 - |
♡2189회 풀잎이 바람에 눕듯이 우리는 겸손하게 누워야 합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8월 15일(마카베오상 1장~ ) 순자는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이 말의 근본이다.'' 《하느님과 일치하는 지름길》자기 생활을 나의 생활과 일치시키려고 노력하는 영혼은 나를 현양하는 영혼이며, 영혼 사업을 가장 열심히 하는 영혼이다. 그 자체로 보아서는 별로 가치 없는 사소한 일일지라도, 내가 너희 영혼들을 위해 흘린 피를 생각하면서 나의 마음과 일치시켜 행동하여라. 다시말해서 사소한 모든 일도 나의 성혈 안에 담그어 정화시켜라. 공부를 할 때나, 글을 쓸 때나,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할 때도, 심지어는 휴식을 취하며 거닐을 때에도, 나의 마음과 일치시켜 행동하여라. 이렇게 하는 것이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는 것 못지않게 나와 일치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다만 이러한 일들을 자기 멋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지 말고, 순명과 책임의 궤도 안에서 실행에 옮겨야 하며 나의 성혈과 밀접히 결합해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만을 위한다는 순수한 지향을 가지고 해야 한다. 나는 너희 영혼들이 이 점을 명심하여 행동하여 줄것을 간곡히 당부한다. 너희들이 행동하는 그 행위 자체에 어떠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일을 하는 너희들의 지향이 나와 밀접하게 결합할 때 그 가치가 있는 것. 내가 나자렛 목공소에서 막 일을 할 때나 공생활 중에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진리를 가르칠 때도 한결같이 하느님께 영광을 위하는 지향을 가지고 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아무나 할 수 없는 버거운 일을 공공연히 드러나게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실제로 그들의 봉사가 나를 기쁘게 하고 위안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주 천한 일을 하면서, 내 포도밭의 유익한 일꾼 노릇을 하며, 숨어서 일하는 영혼들도 많이 있다. 이들은 오로지 사랑 때문에 그 일을 한다. 사소한 행실일지라도,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나의 성혈에 담그어 본성을 초월한 황금으로 도금시킬 줄 아는 영혼이다. 너희 영혼들이 하루 온종일을 자기 영혼에 유익한 일이 되기를 바라면서 나의 마음에 의탁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직무를 사랑으로 이행한다면 그 영혼들은 값진 보배를 거둬 들이는 일을 하는 것. 나는 이런 영혼들에게 나의 깊은 나의 사랑을 더욱더 보여주겠다. 나의 사랑은 무한정이다. 나의 사랑을 갈망하는 영혼들이 쉽게 차지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나의 사랑이다. ‘포정해우(庖丁解牛)’라는 말이 있다. 포정이라는 사람은 소를 다루는 백정이었다. 처음 시작하는 백정은 한 달에 한 번씩 칼을 바꾼다고 합니다. 뼈를 베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백정은 1년에 한 번씩 칼을 바꾼다고 합니다. 살을 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포정은 19년을 같은 칼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뼈와 살의 빈틈을 베기 때문입니다. 포정은 소를 다루면서도 도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서핑을 처음 하는 사람은 파도를 헤쳐 나가려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위험하기도 하고, 쉽게 지친다고 합니다. 서핑을 잘하는 사람은 파도를 탄다고 합니다. 좋은 파도가 오면 파도에 몸을 맡긴다고 합니다. 좋은 파도가 지나가면 기다린다고 합니다. 좋은 파도는 또 오기 때문입니다. 포정이 소의 빈틈을 알아 칼을 오래 사용하듯이, 파도를 타는 서퍼가 바다를 즐기듯이 우리는 삶이라는 파도에 몸을 맡길 필요가 있다. 때로 우리는 명분이라는 이름으로, 자존심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삶의 파도에 맞설 때가 있다. 물론 그래야 할 때도 있을 것.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려 깊은 식별입니다. 신앙인에게 식별의 기준은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의 의로움’ 입니다. 몇년전 태풍 곤파스로 어느성당 뒷산의 나무들이 뽑혔다. 성당 뒷산과 접한 아파트의 옹벽이 밀려났다. 시장도 왔었고, 구청장도 왔었다. 뒷산이 있어서 그러니 뒷산의 높이를 낮추자는 의견을 냈다. 시장도 의견에 동의했고, 구청에서 뒷산을 9미터 정도 깎았다. 성당에 작은 마당이 생겼다. 그 마당만으로도 만족했다. 그런데 몇몇 분들은 이왕에 마당이 생겼으니 조금 더 큰 마당으로 만들자는 의견을 냈다. 태풍으로 작은 마당이 생긴 것도 감사할 일인데 더 욕심을 내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지 고민이 되었다. 신부님께서는 사려 깊은 동창 신부에게 자문을 구했다. 동창 신부는 제게 ‘마당을 넓히는 과정에서 비난을 받을 수 있지만, 본당 신자들이 친교를 나눌 수 있는 넉넉한 마당이 생길 수 있다면 그렇게 하라.’ 고 하였다. 태풍과 뒷산에 빈틈이 있었고 우리는 약간의 비용을 들여서 넉넉한 마당을 마련할 수 있었다. 자존심에 머물렀다면 힘들었을 겁니다. 명분에 집착했다면 마당은 마련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넓어진 마당에서 윷놀이도 하고, 성모의 밤도 하고, 성탄절에는 따끈한 어묵을 먹었던 생각이 납니다. 강한 바람이 불면 가장 먼저 풀잎이 눕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멈추면 풀잎은 언제나 다시 일어섭니다. 아무리 바람이 세게 불어도 풀잎은 뽑히는 법이 없다. 커다란 나무는 강한 바람에도 당당하게 맞서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바람이 멈추면 뿌리가 뽑히고, 넘어진 나무들을 볼 수 있다. 코로나19라는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손을 자주 씻고, 마스크를 착용해야 합니다. 불필요한 모임은 자제하고, 사회적인 거리두기를 실천해야 합니다. 풀잎이 강한 바람에 먼저 눕듯이, 코로나19는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조심해서 극복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유혹의 바람이 불곤 합니다. 욕망의 바람이 불곤 합니다. 시기와 질투의 바람이 불곤 합니다. 원망과 분노의 바람이 불곤 합니다. 풀잎이 바람에 눕듯이 우리는 겸손하게 누워야 합니다. 기도하며 누워야 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며 누워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에는 평온의 바다가 펼쳐집니다. 우리의 마음은 큰 숲이 되어 많은 사람이 머물게 됩니다. 나무는 바람에 뽑힐 수 있지만 숲은 바람을 보듬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큰 숲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나라를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고,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라고 하십니다. 큰 숲은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입니다. 교회는 성사(聖事)로 하느님나라를 선포하고 있다. 누가 숲이 되고, 누가 교회가 되어야 할까요? 누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은총으로 드러내는 성사가 되어야 할까요? 바로 우리들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하느님께서 저희를 사랑해주셔서, 지금 우리들이 계시는 자리가 은총과 축복된 자리가 되어, 보아야 할 하느님의 능력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삶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사랑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주는 것이다.'' - 에리히 프롬 - |
♡2191회 가장 고통스러운 상황에서까지 감사할 수 없다면 아직은 잘 감사하며 사는 것은 - 아닙니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8월 17일(욥기 1장~ ) 바이런은 ''그대로 인하여 세계를 잃는 일이 있어도 세계를 위하여 그대를 잃고 싶지 않다.'' 성인은 하느님의 거룩함에 압도되어 승복한 사람 진정한 성인은 자신이 거룩하다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이 아니고, 하느님, 오직 하느님 한 분만이 거룩하다는 사실에 압도되어 승복하는 사람이다. 그는 신적인 거룩함의 실체에 압도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 안에서 거룩함을 보게 된다. 마침내 그 거룩함을 자신 안에서도 보게 될 것. 그러나 자신 안에 있는 거룩함을 가장 마지막에 보게 되는데, 그 이유는 자기 자신 안에서 무(無)와 자기 중심적인 성향과 죄라는 거짓된 실체를 끊임없이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거룩한 구세주의 현존과 자비의 빛은 우리 안에 있는 악의 어둠까지도 밝게 비춘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했듯이 성인은 사람들이 죄 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성인은 모든 사물과 사람들이 하느님 연민의 대상임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토마스 머튼, <삶과 거룩함>- 사람이 웅장한 자연 앞에서 경외심에 압도당할 때 하느님의 무한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럴 때 하느님의 무한 광대함에 압도되어 자신의 존재는 한 점도 아닌 무의 상태임을 자각합니다. 어떤 성인은 하느님은 너무 크고 넓고 깊어 오히려 내 존재의 너무 가까이에 계시기 때문에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했다. “성인은 신적인 거룩함의 실체에 압도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 안에서 거룩함을 보게 된다. (토마스 머튼)는 것은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창조물 안에 하느님의 크신 권능과 섭리의 손길과 성령의 숨결을 느끼고 “거룩한 구세주의 현존과 자비의 빛은 우리 안에 있는 악의 어둠까지도 밝게 비춘다.” 는 것.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했듯이, 성인은 사람들이 죄 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성인은 모든 사물과 사람들이 하느님 연민의 대상임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감사해야 더 감사한 일이 많이 생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감사는 은총을 받기 위해 우리가 은총을 주시는 분께 내어놓는 손과 같다. 크게 벌리고 있어야 더 큰 은총을 주십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감사할 일이 없는데 어떻게 맨날 감사하느냐고 묻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당연히 감사해야 할 때는 감사하며 잘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가장 고통스러운 상황에서까지 감사할 수 없다면 아직은 잘 감사하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죽음 앞에서까지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완전한 믿음일 것. 마르타 성녀는 예수님 당시는 완전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물론 오빠가 죽은 상황에서 감사하기는 어려웠을 것. 마르타가 믿음이 완전했다면 주님께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라는 원망 섞인 말은 할 수 없었을 것.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면 그 은혜를 이 세상에서 더 받고 다른 이들에게도 믿음을 전하는 도구로 쓰이는 것에 감사해야 하지 않느냐는 뜻입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으려면 주님께서 생명이요 부활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틀 안에 하느님의 자비를 가두려 합니다. 배우 겸 방송인 문천식 씨가 한 TV 방송에 나와서 뜨거운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어린 아들 때문입니다. 그는 아들이 선천성 화염상모반이라는 희귀질환에 걸렸다. 해당 질환은 모세혈관으로 이뤄진 양성종양으로 붉은 반점이 피부에 나타나는 것. 이는 녹내장을 동반하는 병으로 알려져 있다. 아이는 태어난 지 6일 만에 수술해야 했고, 수면 마취 12번, 전체 레이저 시술은 17번을 받았다. 갓 태어난 작은 아기에게 주사바늘을 꽂아 가면서 전신 마취해 수술하는 모습을 보는 부모 마음은 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에도 소금이 있는 음식을 먹으면 붓거나 혈압이 올라가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안압이 올라가서 온 가족이 음식을 늘 싱겁게 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문천식 부부는 아기 첫 돌 때 이러한 편지를 읽어주었다고 합니다. “지난 일 년간 엄마아빠가 눈물로 기도하며 깨달은 것이 있단다. 우리가 널 키우고 걷게 하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네가 우리를 바로 서게 만들더라. 세상에 널 만드시고 가족으로 만들어주신 하느님께 영광을.” 어떠한 삶의 밭에서도 감사의 보물을 발견할 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삶의 밭에는 항상 보물이 있다.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밭을 적극적으로 일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돌밭에서 어떻게 농사를 짓느냐고 불평하기 때문입니다. 보물이 있을 것이란 믿음으로 밭을 열심히 갈다 보면 반드시 그 밭에서 보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보물이 항상 ‘감사할 수 있는 이유’ 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사할 거리가 있다. 그러나 그 보물은 믿음이 있어야만 발견이 됩니다. 반드시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눈에 보입니다. 그 믿음은 바로 하느님께서 역사를 초월해 계시고 그래서 그분께서 주시는 모든 것들은 다 은총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합니다. 이 믿음이 바탕이 되어야 모든 상황에서 감사를 찾아낼 수 있다. 독일의 한 중년 그리스도인이 대학병원의 수술실에서 설암 때문에 혀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게 되었다. 마취 주사를 손에 든 의사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마지막으로 남길 말씀은 없습니까?” 라고 물었다. 글로 쓸 수는 있겠지만 혀를 사용하는 언어는 이것이 최후이기 때문이었다. 간호원, 조수, 수습 의사들을 비롯하여 둘러선 모든 사람의 표정과 분위기는 심각했다. 잠시 침묵과 긴장의 시간이 흘렀다. 저마다 만일 나에게 한 마디 언어 밖에 남아 있지 않다면 누구의 이름을 부를 것인가 생각했다. 드디어 두 줄기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더니 환자의 입이 움직였다. 그는 같은 말을 세 번 되풀이함으로써 최후의 한 마디를 남겼다. “주 예수님, 감사합니다. 주 예수님, 감사합니다. 주 예수님, 감사합니다.” 라자로가 죽도록 버려두신 이유는 썩은 몸을 부활시켜서 이스라엘 백성이 믿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라자로와 그의 누이들은 이 일을 위해 희생제물로 봉헌된 것. 그분이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신 이유는 내가 죽더라도 은총임을 믿으라는 뜻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 우리 곁에 있으니 지금 죽어야 한다고 할 때도 그 안에서 감사를 찾아냅시다. 우리 앞에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신 분이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일이 전혀 없을 때조차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곁에 계신 분이 부활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그분보다 소중한 은혜는 없다. 그분이 항상 우리 곁에 계십니다. 매 순간 다른 사람을 내 눈 잣대로 판단하거나 심판하지 않으면서, 우리들에게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우리들에게는 도움이 되는 삶이 되시고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금전, 쾌락 혹은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은 남을 사랑하지 못한다.'' - 에픽테토스 - ♡2192회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8월 18일(욥기 28장~ ) 쿠사카 카민도는 ''의욕만 있다면 할일은 얼마든지 있다.'' 《함께 일하는 공동사목 협의회》함께 일하는 사람은 함께 나누어야 하는 사람이다. 서로 협조하고 어려움을 덜어주려는 정신이 있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는 손해보는 듯한 느낌이 들 수도 있으나 나중에 그 갚음이 있게 마련이다. 아랫사람을 거느리는 사람은 봉사하는 정신으로 항상 너그럽게 돌봐 주며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의 소질과 적성을 살펴 일을 맡기고 분배정의를 따라 아랫사람을 대해야 한다. 예수는 통치자가 된 적이 없었다. 공생활 삼 년 동안 영예나 인간적 칭송이나 동의를 구한 적이 결코 없었고, '착한 목자' 로서 언제나 오로지 하나의 갈망만을 지니고 있었다. 바로 아버지의 '뜻' 을 따르며 사탄의 끔찍한 멍에에서 영혼들을 해방시키는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사탄이 있다는 것마저 믿지 않는 것이다. (요한 13,14-15) “스승이며 주인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 준 것이다.” -「가톨릭출판사의」 "아들들아, 용기를 내어라!" 中에서 - 토마스 사도는 최초로 예수님께 “저의 하느님!” 이라고 신앙고백을 한 인물로서 우리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종교입니다. 우리와 같은 하느님을 믿고 있고, 같은 성경을 사용하면서도,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지 않고, 그냥 위대한 예언자로만 생각하는 종교가 있는데, 그들은 그리스도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존경만 하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그런데 토마스 사도는 어떻게 그렇게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느님께서 특별히 뽑으셔서 계시를 내려 주셨겠지만, 토마스 사도 자신의 응답과 노력도 있었을 것. 은총에 응답하는 사람이 은총을 받게 되고,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믿음에 도달하게 됩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 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요한 20,24-25) 여기서 토마스 사도의 말은, “당신들이 만났다는 예수님이 정말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 예수님인가?” 토마스 사도가 이런 말을 한 이유가 루카복음에 나옵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에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했습니다.(루카 24,37) 그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 주시면서,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는 것을, 즉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바로 그 예수님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루카 24,38-40) 토마스 사도가 예수님의 상처를 언급한 것 자체는, 당시 상황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토마스 사도의 “결코 믿지 못하겠소.” 라는 강한 표현의 말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려는 마음이, 또는 ‘안 믿으려고 하는 마음’ 이 컸던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그러나 전후 상황을 볼 때, 토마스 사도의 말은 ‘믿고 싶은 간절한 마음’ 을 표현한 말로 해석됩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를 열망하고 있었던 것 같고, 사도들의 증언이 사실이기를 바라면서, “나도 당신들처럼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 라는 희망을 그렇게 강한 표현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된다는 것. 강한 부정이 뜻으로는 강한 긍정일 때가 있다. 만일에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안 믿고, 또 희망하지도 않고 있었다면, 다른 사도들이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했을 때 그 말을 헛소리로 여기면서(루카 24,11) 비웃었을 것.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처럼 사도단을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갔을 것.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6-29)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신 것은 토마스 사도를 위해서인데, 안 믿으려고 하는 그를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믿고 싶어 하는 그의 간절한 소망에 대한 응답으로 나타나셨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상처를 직접 만져 보라고 말씀하신 것은, 실제로 그렇게 하라는 뜻이 아니라, 토마스 사도가 바라는 대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바로 그 예수님” 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신 일입니다. 여기서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라는 말의 원문은 “믿지 않는 사람이 되지 말고 믿는 사람이 되어라.” “증거가 없다고 믿지 않는 사람이 되지 말고, 증거가 없어도 믿는 사람이 되어라.” 토마스 사도는 증거를 보고서도 의심하고 안 믿은 사람이 아니라, 믿고 싶은데도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못 믿은 사람입니다. 이 장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왜 ‘증거’ 를 보여 주시면서도, ‘증거가 없어도 믿는 사람이 되어라.’ 라고 말씀하셨을까? 행동과 말씀이 모순되지 않는가?” 라고 물을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금까지는 증거를 보고 믿었더라도, 앞으로는 증거가 없어도 믿는 사람이 되어라.” 로 풀이한다면, 이 모순이 해결됩니다. 예수님은 “무조건 믿어라.” 라고 윽박지르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믿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방식으로 친절하게 인도해 주시는 분입니다. 토마스 사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한 번 만남으로써, 어떻게 그렇게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신앙으로 곧바로 도약할 수 있었는지, 놀라운 일입니다. 사도들과 신자들은 부활 전에도 예수님을 ‘주님’ 이라고 불렀지만,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으면서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그 믿음 없이 그냥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릅니다. 하느님으로 믿으면서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은 내 인생의 주권자로서 내 인생을 주관하시는 분” 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그 믿음 없이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냥 단순한 존칭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과 구분되면서도 아버지 하느님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분이라고 믿는 것. 이 믿음은 ‘하느님은 삼위일체이신 분’ 이라는 믿음으로 연결됩니다. 아마도 토마스 사도는 “하느님은 삼위일체” 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고, 그 깨달음에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이라고 신앙고백을 했을 것.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라는 말씀은, 토마스 사도만 꾸짖으시는 말씀이 아니라, 사도들 전체를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다른 사도들도 모두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서야 믿었기 때문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라는 말씀은, 앞으로 믿게 될 모든 신앙인들을 향해서 하신 축복의 말씀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않아도, 사도들의 증언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있다. 우리들에게 숨을 불어넣어 숨통을 틔워주신 하느님의 눈높이 사랑을 받았듯이, 우리들도 마음이 열리지 않는 어느 누군가를 배려하고 위해 주는 눈높이 사랑으로 겸손을 배우고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은총 가득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영원한 해결책은 없다.'' - 프라이스 프리쳇 - |
♡2193회 칼이라고 다 같은 칼이 아닙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8월 19일(시편 1편~ ) 크리슈나무르티는 ''진리를 보기 원하는 자 조각조각 떨어뜨려 보지 말고 전체를 보라.'' 《개인과 세상의 성화는 외양外樣, 정신, 영靈의 변형으로 이루어짐》사도 바오로가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빛을 받은 후 10년 동안 잠적한다. 하느님의 빛을 받았지만 바오로도 인간이었다. 바오로 사도는 이후 사우디아라비아, 다마스커스, 예루살렘, 카루소 등을 오가며 10년이란 세월을 보낸다. 거의 10년 동안 바오로 사도는 : -외형 형태(apparent form); 바오로는 우선 말하고 행동하는 외양 형태가 변했다. -정신 형태(current form)와 마음 형태(핵심형태, core form)를 바꾼다. 영성적 삶은 바로 행동, 정신, 마음(영혼)이 하나의 통합 구조 안에서 움직이는 것. 하느님은 우리를 부활의 삶으로 초대하신다. 이 부활에 대한 응답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10년 20년 거대한 계획을 세워서 추구해야 하는 그런 성격의 것이 아니다. 매일의 일상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실제적 상황 속에서 발생해야 한다. 부활에 대한 응답은 어느 길에서나(every way), 언제든지 항상(every time), 모든 점에서(every form), ‘날마다’(every day) 이뤄져야 한다. 하느님에 대한 응답은, 'every’ (모든, 모두의)라는 단어에 달려 있다. -정영식 신부,<‘언제든지’ 주님 초대에 응하라>- 영원한 생명은 어떤 허황된 거창한 목표라기보다 매일(every day)의 삶 안에서 말하고 듣고 행동하며 정신과 마음이 통합적 구조 속에서 외형 형태로 날마다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 신앙인들의 삶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간의 나약함을 도와 말하고 듣고 행동하는 외형 형태가 변해야 하고 정신 형태와 마음 형태가 모두 통합적으로 변형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신앙인에게 신비적인 형성으로 하느님이 신앙인 안에 토대로 마련해 주신 삼중 구조가 통합되어 있어야 합니다. 행동 따로, 정신 따로, 마음 따로가 아니라 통합과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오 10장 34절) 결혼을 앞둔 미혼남녀들 가운데 자녀를 낳아 양육하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부모자격증’ 취득을 위한 시험을 치르게 하자는 주장이 있다. 운전을 하기 위해서 운전면허증이 반드시 필요한데, 운전보다 훨씬 중요한 부모역할을 위해 ‘부모자격증’ 을 발행해야 한다는 주장에 크게 공감했다. 부모 자녀 사이의 관계, 가장 바람직한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세월의 흐름에 따라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맺음 방식 역시 함께 성장해야 좋다. 갓 난 아기 때는 어쩔 수 없다. 모든 것을 다 해줘야 합니다.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그러나 청소년기에 접어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키도 부모보다 커집니다. 사고의 폭도 넓어집니다. 더 이상 갓 난 아기 때처럼 일일이 다 따라다니며 이것저것 챙겨줘서도 안됩니다. 자발적으로 알아서 하게 둬야지요. 일일이 간섭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녀와의 지나친 애착관계도 슬슬 끊어가야 합니다. 다정한 친구처럼 지낸다면 더욱 좋겠지요. 군대를 다녀오고, 학교를 마치고. 취직을 한 자녀 정도 되면 이제 부모를 넘어설 때입니다. 아쉽지만 네 인생은 네 인생이고, 내 인생은 내 인생이란 큰 그림이 필요할 때입니다. 자녀를 향한 지나친 기대도 말고 지나친 집착도 이젠 떨쳐버릴 때입니다. 이제부터는 곤란한 일이 생기면 도움을 청해야 할 조언자로 여겨야 할 것. 가족관계, 참으로 많은 연구과 무한한 인내와 끝없는 노력의 장입니다. 한 전문가는 가족을 이렇게 표현했다. ‘갖은 기대와 집착, 희망과 절망, 사랑과 증오의 비빔밥.’ 때로 가족 구성원 상호간의 지나친 집착으로 인해 너무나 힘겹게 살아가는 가정이 많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칼 하나를 빼 드셨다. 예수님께서 주신 칼을 들고 오랜 세월 서로를 괴롭혀왔던 집착의 끈을 잘라버릴 때 참 평화가 찾아올 것. 참된 신앙인은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한 애착이나 집착이 아닌 하느님을 사랑에 최우선순위를 두는 사람입니다. 낮은 가치의 사사로운 것이 아니라 보다 이 세상 그 어떤 존재보다 더 큰 가치이신 하느님과의 관계에 우선권을 두는 사람입니다. 부차적인 것들, 유한한 대상들,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 존재들에 대한 지나친 집착의 끈을 하느님께서 주신 칼로 과감하게 잘라버리고 최고선이신 하느님께로 한 걸음 더 다가설 때 우리 내면에는 이 세상 그 어디서도 얻지 못할 참 평화로 가득 차게 될 것. 칼이라고 다 같은 칼이 아닙니다. 강도의 손에 쥐어진 칼은 사람을 살상하는데 쓰이는 흉기가 됩니다. 그러나 외과의사의 손에 들릴 칼(메스)은 암 부위를 도려내어 사람을 살리게 하는 생명의 도구입니다. 우리의 부모형제, 가족은 과연 누구입니까? 하느님께서 허락하셔서 이 세상사는 동안 연을 맺어주신 선물입니다. 물론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지극정성으로 서로를 보살펴줘야 합니다. 무한한 인내로 서로를 참아내야 합니다. 서로의 성장을 위해 끝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족이 아무리 소중하다 할지라도 창조주이자 절대자이신 하느님과는 비교가 안 되는 존재들입니다. 당연히 그 어떤 존재라 할지라도 최고선이신 하느님보다 우위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 예수님께서 주신 평화의 칼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는 갖은 형태의 집착을 끊어버리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님과 함께 하는 날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행복한 마음” “작은 일에 마음이 오그라들지 않는 행복한 마음”으로 살면서, 우리들의 일상의 모든 것을 행복의 나라로 이끌어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이긴다고 생각하면 이긴다. 승리는 자신감을 가진 사람의 편이다.'' - 가토 마사오 - |
♡2194회 참 행복은 세속-육신-마귀 자아의 욕망에서 벗어나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8월 20일(시편 33편~ ) ''가시에 찔리지 않고서는 장미꽃을 모을 수가 없다.'' - 필페이 - 《분주함은 악 자체이다》분석심리학자 융(G. Kal Yung)은 분주함은 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악 자체라고 말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바쁘게 쫓기며 살아가는 삶은 영원을 잊고 앞만 보고 달려가기 때문이다. 일상에 매여 하느님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그들 삶의 중심에서 밀려나 언저리에서 서성거릴 수밖에 없다. 정신없이 일에 쫓기며 사는 사람들은 그들과 함께하시는 주님을 기억하지 못한다. 너무 바빠 시간과 운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망각한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그들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바쁨도 수고도 그 순간에 모두 끝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산다. -<세상 한복판에서 그분과 함께>- 일상의 삶에서 일(노동)이 내 주인이 되어 나를 지배하고 다스려 결국 자아를 상실하고 일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해 지쳐서 쓰러진 후에야 깨달아 봤자 때는 이미 늦은 것. 몸이 말을 안 들어 마음까지 병들어 절망 속에서 죽어 갑니다. 분주함에 얽매여 영혼을 질식시키고, 하느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서 언저리로 밀어내는 일은 그분을 슬프게 하는 일입니다. 여유를 가지고 성숙한 인격의 함양을 위해 목표를 설정하고, 통합적인 정신과 육체의 건강을 유지하여 생명에 활력을 불어 넣어야 합니다. 시간과 내 인생의 운명이시며 구원자이신 분을 망각하고 사는 자들은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세상에 났느냐?” 의 대답인 “하느님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라는 사람의 목적을 상실한 자들입니다 . ‘씨 뿌리는 농부’ 의 이야기입니다. 길과 돌밭과 가시밭에 뿌려진 씨들은 열매를 맺지 못했지만 좋은 밭에 뿌려진 씨는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었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그 열매는 ‘행복’ 이라고 해도 될 것. 부모님을 자녀의 행복을 위해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뿌려주시는 말씀도 또한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 문제는 우리가 그 씨앗 안에 행복의 열매가 있음을 믿지 못하고 허튼 데에 정신을 쓰는 데 있다. 벼가 익어갈 무렵 한 시골 중고등부 주일학교 수업 때의 일입니다. 중학교 3학년 학생은 3명이었다. 신부님은 아이들에게 고등학교에 가더라도 주일학교를 계속 나올 것인지 물어보았다. 아이들은 솔직하게 나오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면 공부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신부님은 “공부는 왜 하려고?” 라고 물었다. 그들은 “공부 열심히 해서 유명한 사람 되려고요.”, “어느 대학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애인 얼굴이 바뀌어요.”, “돈 많이 벌어 부모님 호강시켜드리려고요.” 라고 대답했다. 신부님은 “만약 그렇게 되면 행복할 것 같니?” 라고 물었다. 아이들은 자존심이 상한 듯, “성당은 따분해요. 어렸을 때부터 성당 다녀도 전해 행복하지 않아요. 아버지는 ‘성당 다닌다고 밥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 라고 말해요. 맞는 말 같아요.” 라고 대답했다. 신부님은 비장의 카드를 꺼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신부님은 “오늘은 용을 만드는 작업을 할 거예요!” 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창호지로 멋진 용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아이들은 철사로 틀을 만들고 창호지를 조심스럽게 붙이고 그림을 그려서 멋진 용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신부님이 메뚜기를 각자 한 마리씩 잡아 오라고 시켰다. 메뚜기를 잡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신부님은 용의 배 부분에 구멍을 뚫고 아이들의 메뚜기를 그 속에 넣었다. 그리고는 꼬리 부분에 메뚜기가 빠져나오기에 충분할 만큼의 구멍을 뚫었다. 신부님은 아이들에게 물었다. “메뚜기들이 이 종이 용을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니?” 아이들은 한결같이 그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메뚜기들은 그 강한 발과 턱으로 종이를 뚫기 위해 사정없이 뛰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자 그것들은 지쳐 쓰러져 죽어버렸다. 아이들은 메뚜기들을 무식하다고 놀렸다. 신부님은 미리 잡아두었던 청개구리 몇 마리를 가져왔다. 그리고 용의 배 밑으로 그 청개구리를 넣고 막았다. 청개구리들은 뛸 생각도 안 하고 엉금엉금 기어 입과 꼬리 부분으로 다 빠져나왔다. 신부님은 다시 물었다. “너희들은 유명해지면, 예쁜 여자와 결혼하면,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할 것이라 믿지? 이것이 메뚜기와 같은 생각이란다. 너희 힘을 너무 믿는 나머지 뚫을 수 없는 창호지를 머리로 계속 들이박는 거야. 그런 것이 행복이라는 믿음은 너희 안에 있는 탐욕이라는 것이 만들어낸 것이란다. 너희가 아는 명예를 얻어 유명해진 사람 중에도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있지? 결혼한 사람은 다 행복해 보이니? 또한, 부자라고 다 행복한 것도 아니란다. 너희들은 청개구리가 될 필요가 있어. 그런 잘못된 믿음에서 벗어나야 해. 우리나라에서는 청개구리는 시키는 것과 반대로 하는 사람을 뜻하기도 하지. 너희들이 메뚜기처럼 사는 대부분 친구와는 다른 청개구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성당 다닌다고 밥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야. 그러나 너희를 메뚜기로 만드는 세상의 어리석음으로부터 보호해 줄 수는 있지. 성당은 청개구리가 되는 지혜를 주는 곳이란다. 너희에게 행복의 열매가 열리는 결과는 너희가 메뚜기와 청개구리 중 어떤 삶을 선택하느냐에 달려있어.” 아이들은 모두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성당에 계속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각자는 자아라는 용에 둘러싸여 있다. 그 용이 헛된 꿈을 조장합니다. 그렇게 교만해진 우리는 결코 뚫을 수 없는 행복을 얻겠다고 머리가 깨지라 모든 에너지를 소비합니다.이 ‘길의 교만’ 과 ‘돌밭의 육욕’ 과 ‘가시밭의 물욕’ 에서 벗어나야만 참 행복에 이를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잠시 멈추어 서서 내가 어디에 머리를 들이박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가 키가 크지 못한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초등학교 때 밥 먹는 것보다 축구 하는 것을 더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점심시간에 남들 밥 먹을 때 저는 혼자 공을 들고 운동장에서 놀았다. 그때 끼니를 거르면 키가 안 큰다는 것도 몰랐다. 그저 그때 행복한 것에 집중했을 뿐이고 누구도 알려주지 않아 그렇게 키가 커야 할 시기는 그렇게 지나버렸다. 우리 삶은 한정되어 있다 . 그 에너지를 창호지를 뚫는 데 쓸 것인지 그것에게서 벗어나는 데 쓸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허튼 데에 에너지를 쓰면 열매를 맺을 에너지는 남지 않게 됩니다. 참 행복은 메뚜기와 같은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청개구리와 같은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에 있다. 겸손하게 진리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진리란 참 행복은 세속-육신-마귀 자아의 욕망에서 벗어나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 지금보다 30배, 60배, 100배의 행복을 누리려면 메뚜기의 삶을 버리고 청개구리의 삶을 택해야 합니다. 매 순간 우리들에게 주어진 일과 만나는 사람 안에서, 그리고 자녀들에게 주어진 일들 안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뜻을 바라볼 수 있는 은혜로운 축복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기쁨을 주는 사람만이 더 많은 기쁨을 즐길 수 있다.'' - 알렉산더 듀마 - |
💖성령봉사자 박재만 세례자요한 010 - 3878 - 6634
(수필가ㆍ전국성령쇄신봉사자협의회 말씀추천강사)
💖성령봉사자 류태숙 M.막달레나 010 - 6560 - 7354
(시인ㆍ수필가ㆍ꽃예술설화중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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