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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기도회 봉사

♡2162회 마귀들은 언제나 거짓말만 하는 존재입니다. -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스승입니다

♡2162회 마귀들은 언제나 거짓말만 하는 존재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7월 19일(창세기 21장~ )

  인디라 간디는 ''주먹을 꽉 쥔 손과는 악수를 할 수 없다.''

《강렬하게 아주 강렬하게 살아라!》어떤 행동이든 주의 깊게 한다면, 당신의 삶은 아주 부드러운 입김을 받게 된다. 당신은 완전히 현재를 살게 되며, 자신이 대하는 사물과 하나가 된다. 하지만 이는 간단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매일 연습을 해야만 얻을 수 있다. 주변에 있는 창조물들을 보며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눈에 들어오는 것을 관찰하고 그 진정한 깊이를 느끼면 된다. 그러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환희를 느낄 수 있다. 우리는 봄바람을 인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해 마음에서 환희를 느낄 수 있다. 이때 강렬한 삶의 기쁨이 우리를 찾아온다. 주의 깊게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집중하는 훈련만이 아니라 행복을 찾아나서는 일이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필요하다고 믿는가? 그것은 오해다. 누구나 주의력만 있다면 행복해질 수 있다. 생활 속에서 인지하는 모든 것에 감사하라! 그러면 건강한 눈은 행복의 원천이 된다. 우리의 눈은 날마다 놀라운 사물들을 관찰하고 있다. 하지만 매일 일어나는 기적들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주의 깊게 인지하는 연습이 반드시 필요하다. -안젤름 그륀 신부 지음- 

예수님께서 가다라인들의 지방에서 마귀들을 쫓아내신 이야기는(마태 8,28-34), 은총은 받기를 희망하고, 받으려고 노력하고,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받게 된다는 교훈입니다. 가다라인들은 마귀들의 억압에서 해방되는 은총을 받았지만, 그 해방이 은총이라는 것을 몰랐고, 자기들을 해방시켜 주신 예수님을 쫓아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다면 받게 되었을 더 큰 은총을, 즉 구원의 은총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건너편 가다라인들의 지방에 이르셨을 때, 마귀 들린 사람 둘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너무나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다닐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하고 외쳤다."(마태 8,28-29) ‘마귀 들린 사람들’ 이 하는 말은, 실제로는 ‘마귀들’ 이 하는 말입니다. 마귀들은 자기들이 쫓겨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방어를 하려고 애를 씁니다. 마귀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 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앙고백이 아니라 방어 전략으로서 하는 말입니다. 일종의 ‘아첨’ 입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영역과 자기들의 영역은 다르고, 자기들이 하는 일을 상관할 권한이 예수님에게 없다고 주장하는 말인데, 이 말은 거짓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상관하면 안 되는, 또는 상관할 필요가 없는 영역이란 없다. 세상 모든 영역은 다 하느님의 것이고, 하느님께서는 모든 권한을 예수님께 주셨다. 마귀들이 하는 일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마귀들과 마주치기만 하면 언제나 그것들을 쫓아내셨다.

 ‘때가 되기도 전에’ 라는 말도 거짓말입니다. 여기서 ‘때’ 는 마귀들이 쫓겨나는 때, 즉 종말을 가리킵니다. 종말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시작되었고, 지금 진행 중이고, 언젠가 그날이 되어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완성될 것. 마귀들이 쫓겨나야 하는 때는 이미 시작되었다.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왜곡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신 것은, 마귀들의 억압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이고, 마귀들이 본래 있어야 할 곳, 즉 지옥으로 그것들을 돌려보내기 위해서입니다. 단순히 마귀들을 괴롭히려고 그러신 것은 아닙니다. 마귀들은 언제나 거짓말만 하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들이 하는 말은 처음부터 들으면 안 됩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지옥’ 을 ‘마귀들이 다스리는 곳’ 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지옥은 그런 곳이 아니라, ‘마귀들이 벌을 받는 곳’ 입니다. “마침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놓아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마귀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쫓아내시려거든 저 돼지 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가라.’ 하고 말씀하시자, 마귀들이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 떼가 모두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물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마태 8,30-32)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을 보시자마자 바로 “사람에게서 나가라.” 라고 명령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마르 5,8) 마귀들은 예수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다. 나가라고 하시면 나갈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도 마귀들은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마귀들도 지옥에 가는 것은 무서워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인간 세상에 머물러 있으려고 합니다.

 그것들이 생각해낸 타협안은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는 것. 예수님께서 왜 마귀들의 간청을 들어주셨는지는 모릅니다. 어떻든 돼지들의 죽음의 책임은 예수님이 아니라 마귀들에게 있다. 돼지들이 집단 자살을 한 것에 대해서는 “말 못하는 짐승들도 마귀들이 들어오는 것을 거부한다.” 마귀는 사람에게만 해로운 존재가 아니라, 짐승들에게도, 또는 자연계에도 해로운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돼지들이 집단 자살을 함으로써 머물 곳을 잃어버린 마귀들은 지옥으로 떨어졌을 것.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로 가서는, 이 모든 일과 마귀 들렸던 이들의 일을 알렸다. 그러자 온 고을 주민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나왔다.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마태 8,33-34)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신 일은, 마귀 들린 사람들을 구출하신 일이기도 하고, 가다라 지방을 마귀의 억압에서 해방시키신 일이기도 합니다. ‘돼지를 치던 이들’ 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직접 보았고, 그래서 그 일을 증언하는 증인의 역할을 하고 있다

. “온 고을 주민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나왔다.” ‘돼지를 치던 이들’ 의 증언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경하려고’ 모여들었다는 뜻입니다. ‘돼지를 치던 이들’ 은 자신들이 목격한 ‘일’ 을 증언하긴 했지만,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 없이, 그저 ‘본 일’ 만 전하는 증언이었다. 신앙의 관점에서는 ‘믿음’ 을 증언할 때에만 비로소 ‘참 증언’ 이 됩니다.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 “떠나라고 요구하였다.” 주민들이 예수님을 쫓아내려고 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가다라인들은 왜 예수님을 쫓아내려고 했을까? 
1) 자기들을 억압했던 마귀들의 힘도 무서웠지만, 그 무서운 마귀들을 쫓아내신 예수님의 힘은 더 무서웠던 것일 수 있다. 믿으려고 하지 않는, 또는 믿음이 없는 사람의 눈에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권능은 무섭게만 보일 것.
 2) 가다라인들은 마귀들과 함께 사는 것이 처음에는 힘들고 불편했겠지만, 그런대로 적응해서 살면서 힘들고 불편한 것을 잊어버렸을 것. 그랬는데 예수님 때문에 생긴 새로운 변화가 더 낯설고 불편했을 것. ‘믿음’ 은 쇄신과 변화로 이어집니다. 반대로 말하면, 새롭게 변화되기를 거부하면 믿음의 길을 가지 못합니다. 
3) 돼지 주인들의 눈에는 마귀가 제거된 영적인 이익보다 돼지 떼를 잃어버린 물질적인 손해만 보였을 것이고, 그들은 물질적인 손해는 아주 큰 손해로, 영적인 이익은 아주 작은 것으로 생각했을 것. ‘믿음’ 은 우리에게 정말로 큰 이익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큰 손해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게 해 주는 힘입니다.

  내 삶의 주인이신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어떤 두려움도 깨뜨리는 용기가 있는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용서처럼 완전한 복수는 없다.'' - 조쉬 빌링스 -


♡2163회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스승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7월 20일(탈출기 1장~ )

  버나드 쇼는 ''희망을 가져본 적이 없는 자는 절망할 자격도 없다.''

 《그대는 내 사랑하는 아들딸》온종일 ‘그대는 내 사랑하는 아들딸이다’ 하시는 말씀으로 살아라! 그대가 만나는 모든 것을 이 말씀에 따라 새로운 눈으로 관찰하라! 이 말씀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은 그대의 삶을 영광스럽게 변화시키실 것이고 그대 일상의 계곡 한 가운에서도 그대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딸임을 확신하는 믿음을 주실 것. 예수님께서 행하셨듯이 우리가 집중하여 기도하면 우리는 기도하는 동안에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새겨 주신 참된 형상을 분명히 감지하게 된다. 우리의 모든 가면과 거짓된 배역을 벗어 버리게 된다. 하느님의 참된 형상을 볼 수 있게 된다. 곧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이끌어지는 땅으로 인도된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기도하는 동안에 이렇게 우리를 내적으로 변화시키신다면 우리는 오직 하느님의 뜻에 따라 충만해질 것이며 온갖 종류의 불만에서 해방될 것. 이웃에게서 무시를 당할 수 있다거나 기쁨의 생활을 할 수 없다는 등의 불만에서 벗어날 것. 신앙은 신적 실제의 체험과 바라봄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신앙은 또한 들음에서 온다. 우리의 삶에는 이른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일로 만족해야 하는 일정한 시기가 있다. 피정에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 말씀의 씨앗이 우리 마음에 뿌려지게 하는 일, 말씀을 순수한 마음으로 새롭게 듣는 일이다. 말씀이 우리 자신과 맞닿으면 말씀은 우리 안에서도 깊은 평온을 창조할 수 있다. “이는 내가 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그의 말은 너희에게 충분한 양식이 될 것이다. 너희가 그 말들을 온전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면 나는 너희 안에 머무를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내가 택하고 축복한 아들딸들임을 체험할 것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너희가 정말로 사랑받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묵상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말씀의 씨가 마음속에 뿌려져 마음을 충만하게 하고 변화시키는 것을 뜻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영혼과 육신의 양식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저를 변화시켜 주시고 거룩하게 살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저는 제 삶에서 체험했던 모든 일들 불편한 마음을 드러내고, 오해로 빚어진 일들을 오히려 영광스러운 변화로 이끌어 주심에 대해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를 변화시켜 주셨던 모든 말씀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모든 것이 명확하게 보여 이 세상에 대해 긍정할 수 있었던 모든 순간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지금 이 순간 주님께서 저를 온전히 충만하게 하시고 저를 변화시켜 주소서! 주님의 영광이 저를 밝혀 주시어 그릇됨이 없는 제 본래 모습을 찬란하게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 안젤름 그륀 신부 - 

우리가 아무에게도 영향을 미치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스승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영향을 받는 이들은 나의 제자들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제자들은 우리 자녀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인리히 힘러’ 란 독일 사람은 딸에게 이러한 편지를 썼다. “언제나 품위 있고 용감하며 관대하게 살아야 한다.” 하인리히 힘러는 1941년 나치 친위대와 게슈타포를 지휘하고 유대인 대학살의 실무를 담당하는 주동자였다. 그가 1943년 나치 친위대에게 한 연설에서는 유럽에 사는 유대인들을 절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그 연설의 내용 일부입니다. “나치의 친위대들이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기본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직하고 품위 있고 충실하며 동지애를 가져야 합니다. 이는 우리와 같은 피를 가진 동지들에게만 해당합니다. 러시아인이나 체코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든 나는 아무 상관 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유익하다면 다른 민족의 아이들을 납치해 우리를 위한 노예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나는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 독일인들은 이 세상에서 인간 동물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압니다. 우리 고유한 혈통을 지키기 위해 그들에게 결코 희망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짐승들을 잘 다루어야 합니다.” 다른 민족들을 짐승 취급하는 아버지를 스승으로 둔 딸은 잘 성장할 수 있었을까요? 아버지와 같아질 수밖에 없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들을 동물처럼 이용하는 사람이 될 것.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스승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녀들에게 어떻게 좋은 스승이 될 수 있을까요? 자신이 배운 것을 가르친다는 것을 알면 됩니다. 우리는 또한 누군가의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훌륭할 제자일수록 또한 누군가의 훌륭한 스승이 될 수 있다. 내가 자녀들에게 어떤 스승이 되느냐는 내가 누구를 스승으로 삼느냐에 달려있다. 어느분께서 젊은 부부와 함께 식사한 적이 있다. 5살, 3살 정도 되어 보이는 두 아들을 함께 데리고 왔다. 큰아이는 남자답게 생겼고 둘째는 약간 여성스럽게 생겼다. 그런데 보는 순간부터 큰아이가 더 착해 보였다. 부모님들도 첫째가 더 착하다고 했다. 식사할 때도 둘째는 한시도 쉬지 않고 계속 움직였다. 아빠가 안고 있었는데 아빠가 밥을 먹을 시간을 주지 않았다. 사랑을 부족하게 받은 것. 밥 먹다, 돌아다니다, 울다, 웃기를 반복했다. 반면 큰아이는 장난감 하나 가지고 얌전하게 놀았다. 부모가 말해주었다. 첫째 아이를 가졌을 때 부모는 신앙심으로 똘똘 뭉쳐서 약혼자 주말 봉사까지 하였다. 아이가 생기기 전부터 54일 기도를 바쳤고 그 기도가 끝나는 날 아이가 들어섰으며 그 이후에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함께 기도를 바쳤다. 반면 둘째를 가질 때는 살림이 어려워져 아내까지도 일해야 했다. 그래서 함께 아기를 위해 기도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아기를 위해 무엇이 더 중요할까요? 사랑을 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 그런데도 육체적으로 먹이기 위해 영적인 돌봄을 하지 못할 때도 있다. 바로 무엇이 중요한지를 잊을 때 그렇다. 무엇이 중요한지 하나만 알고 그것만을 위해 힘을 쓸 때 진정으로 아는 것. 나에게 무엇이 중요한지를 잊지 않게 하는 분이 지금 나의 스승입니다. 그리고 나의 스승이 누구냐에 따라 나에게 배우는 이들도 영향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스승이 있다는 것은 높은 곳을 향해 오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어차피 누군가의 선장이 되어야 한다면 나의 나침반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유대인들 속담에 “길 가다가 넘어져 책과 옷이 더럽혀지면 옷보다 책부터 먼저 닦아라.” 란 말이 있다. 먹고 사는 것보다 나의 스승이 누구인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살라는 말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나에게 주어진 이들을 위해서라도 나의 스승을 명확히 세워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알맞게 주어진 주님의 말씀과 믿음으로 행복하고 은총과 축복을 받은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용기는 악운을 깨뜨린다.'' - 세르반테스 -


♡2164회 사랑은 두 사람이 마주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보는 것이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7월 21일(탈출기 21장~ )

  지노 시아베랄라는 ''우선순위를 세밀하게 정할수록 긴급한 일이 줄어든다.''

《사람들은 곧 나의 천사다.》주변 사람들이 내 삶의 일부가 되듯 나 역시 그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오늘 하루 마주치는 사람들과 어떤 말과 행동, 생각과 느낌을 주고 받아야 할까? 나에게 그들은, 그들에게 나는 어떤 존재일까? 마음을 다해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가 처한 어려움을 같이 느낀다면 그의 어려움은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발판이 될 것. 당신에게는 다른 사람의 근심을 축복으로 탈바꿈시키는 힘이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로 가라! 그리고 그들을 받아들여라! 도와줄 수 있다면 기꺼이 도와라! 관심과 애정을 선물하라! 잘 산다는 것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 한다. 자신에게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조차 선한 일을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사랑을 되돌려 받을 수 있다. 행복은 따뜻한 도움의 손길에서 비롯되며, 다시 빛과 함께 자신에게로 되돌아간다. 어딘지 모르게 영적인 빛이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바로 천사들이다. 축복이 될 수 있는 것들을 암시해주고, 길 잃은 우리를 안내해주는 천사, 그 천사와 눈이 마주칠 때 우리는 순수한 기쁨을 느낄 것. 천사를 볼 수 없다면 자신의 욕구에 눈이 멀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은 우리의 삶에 속한다. 교환하고 나눌 때만 우리의 삶은 풍요로워 진다. 나눌 준비가 되어 있으면 다른 사람들도 당신과 삶을 나누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애정을 그리워한다. 어머니의 사랑이 담뿍 담긴 시선과 미소는 아이들이 품고 있는 가장 순수하고도 기본적인 바람이다. “이 땅에 오게 된 것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늘 듣고 싶어 하는 말이다. - 안젤름 그륀 신부 지음 -

어느 신부님께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많이 느낀 것은 국적과 문화와 언어가 달라도 인간의 고민은 모두 비슷하다는 것. 그중에서도 특히 가정생활에 대한 고민이 그랬다. 이태리에서 공부를 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방학을 이용해 본당 사목을 나갔는데 많은 어르신들이 가정생활에 대한 고충을 털어놓았다. 유럽 사람들은 가족관계에 있어서 한국 사회보다 독립적이고 자유로울 것 같았는데 놀랍게도 고민의 내용은 한국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 속을 썩이는 자녀, 남편 혹은 아내와의 관계, 시부모 혹은 며느리와의 관계가 문제였다. 그에 대한 답변을 할 때마다 신부님께서는, “나는 결혼생활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의 어려움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라고 운을 떼곤 했는데, 그때마다 신부님에게 돌아오는 답변은, “Che bella vita!” 즉 “얼마나 아름다운 삶일까!” 라는 말이었다. 이러한 경우는 한국에서도 자주 마주합니다. 특별히 중년의 어머니들로부터, “신부님,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건 정말 잘하신 거에요. 가정 안에서의 여러 관계들이 저를 힘들게 해요” 라는 말을 듣곤 합니다. 물론 이러한 말들이 모두 진심이라고 할 수 없고, 사소한 투정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한때는 두근거리고 설레였을 사랑이라는 감정이 왜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까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의문의 답을 프랑스 작가 생텍쥐베리의 말에서 찾습니다. 그는 “사랑은 두 사람이 마주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보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사랑은 단순한 마음이 아니라, ‘둘의 관점에서 새로운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것’ 이며 ‘시련을 받아들이고 장애물들을 지속적으로 극복해가는 과정’ 이라는 것. 그리하여 어느 철학자는 사랑의 고통과 위험을 회피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아름다움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까지 말한 바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의 모범을 예수님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인간과 사랑의 관계 안에 있고자 하셨고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며, 시련을 받아들이고 장애물들을 지속적으로 극복하고자 하셨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의식, 한계, 이기심이라는 장애를 극복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으로 함께 나아가고자 하셨던 것. 이러한 예수님께서 참으로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다면 누구나 가릴 것 없이 모두 예수님의 형제요 누이이며 어머니라는 것. 그야말로 우리를 사랑으로 초대하시는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태도가 다소 차가워 보인다는 것. 하느님께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십계명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음에도, 예수님은 당신의 어머니와 그의 친척 형제들을 외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인간적인 혈연관계의 정과 예의를 무시해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본분에 대한 완성의 말씀입니다. 어느 부모도 원하는 대로 자기의 자녀를 골라서 만들지 못합니다. 자녀들 역시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부모를 미리 알고 택하지도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가족, 혈연관계는 본인이 선택한 바가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서 주어진 관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이들이 하느님에 의해 당신의 참다운 가족으로 이미 부름 받았음을 강조하시는 것. 결국 우리가 오늘 감사드려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죄 많고 부족한 우리를 당신의 형제, 자매로 받아 주신다는 것. “형제, 자매! 심지어는 어머니!” 이것이 바로 우리를 맞이하시는 예수님의 놀라운 마음입니다. 살아가다보면 우리는 종종 스스로의 위치를 예수님의 보살핌을 받는 어린 아이로 설정 합니다. 그러다 보니 원하는 바만 계속해서 요청하게 되고 그것이 당장 들어지지 않으면 투정을 부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가 유지된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하느님께 막연한 무언가를 기대하게 됩니다. 이것은 사랑을 완성시키기 보다는 단절감만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랑은 두 사람이 마주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 볼 때에 비로소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예수님의 보살핌을 받는 어린 아이가 아닌, 그분의 어머니이며 형제요 자매, 즉 한 가족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다. 주님과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함을 명심해야 하겠다.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다.” 허물을 용서해주는 끊임없는 자애. 사랑에 지치지 않으시는 주님이 바로 나의 가족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삶입니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아멘.

  우리 모두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다 이제 끝이라고 해도 예수님께서 은총주시면 이제 시작이다.” 라는 믿음으로,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섭리가 이루어지는 은총과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준비에 실패하는 것은 실패를 준비하는 것이다.'' - 데일카네기 -


♡2165회 지금 이 순간 ''나는 예수님에 대해서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7월 22일(레위기 1장~ )

  레오 부스카글리아는 ''사는 게 지겹다면 그것은 당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행복은 선물이다. 신(神)이 주시는 선물이다.》아침에 시작한 일이 기대했던 대로 진행되고, 약속한 사람을 만나 편안한 대화를 나누고, 늘 가던 곳에 들러 익숙한 풍경만을 보는 평화로운 삶! 완전한 행복이라 하기엔 무언가 부족하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행복이란 항상 선물이며, 언제나 기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손으로 기적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기적은 단지 일어날 뿐이다. 기적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리고 기적은 항상 하늘에서 내려온다. 언제나 예기치 않은 순간에 우리에게 떨어지는 것. 우리는 기적이 우리를 비켜가지 않도록 손을 뻗어 잡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면 원할수록 행복은 우리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멀리 도망가 버린다. 행복은 의식적으로 추구할 수 없는 것. 내가 무엇을 얻게 되면, 새로운 것을 경험하게 되면, 나를 감동시키는 어떤 것이 있으면, 그 때서야 나는 행복해 진다. 내가 사랑할 때 나는 사랑을 선택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당연히 행복을 소유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들은 행복이란 늘 선물로만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잊고 있다. 행복을 선물로 받을 때만 진정으로 만끽할 수 있는 것. 그렇지 않으면 소중한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더라도 그들의 존재에 기뻐할 수 없는 것이다. -안젤름 그륀 신부 지음-

 몇년 전, 한 음료 회사에서 프로모션의 일환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연령대 별로 세 사람을 방으로 초대한 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백인 남성과 레게머리를 한 흑인 할머니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들의 첫인상을 물어보았다. 사람들은 수염을 기른 백인 남성의 사진을 보고 락그룹이나 펑크 음악을 할 것 같으며 폭력적인 성향이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고, 흑인 남성의 사진을 보고는 DJ를 하거나 춤을 추는 사람일 것 같으며 차를 훔치는 등 반사회적인 성향이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할머니의 사진을 보고는 연약하고 활동적이지 않으며 사고방식이 고리타분할 것 같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잠시 후, 사진으로 봤던 세 명의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이들의 편견은 산산이 깨지게 됩니다. 수염이 덥수룩한 백인 남성은 누구보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선생님이었고, 흑인 남성은 IT 분야의 유능한 프로그래머였으며 할머니는 젊은이들을 사랑하는, 누구보다 활동적인 클럽 DJ였던 것. 이처럼 우리는 스스로 갖고 있는 편견으로 인해 겉모습만으로 상대방을 판단하지만 진정으로 상대방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깊이 있는 소통이 필요합니다. 이 실험 영상은 편견을 가졌던 사람과 편견을 깨트린 두 사람이 악수를 하는 모습으로 마무리 됩니다. 

편견을 없애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 마음을 열 때 세상은 좀 더 행복해진다는 메시지를 전하며 광고는 끝이 납니다. 우리는 종종,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이다,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다” 라고 이야기하며 다른 사람을 판단하곤 합니다. 그러한 판단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마치 어떤 사람을 다 아는 것인양 생각하게끔 만들고 비판하게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누군가의 이름과 가족, 학력과 직업, 성격을 아는 것이 그 사람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긴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상대방을 정말 잘 안다고는 할 수 없다. 그 사람의 인생과 성향, 모두를 파악하기에 이러한 정보들은 아주 단편적인 것들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일종의 정보를 갖고 있다. 예수님의 아버지의 직업과 어머니의 이름, 그리고 친척 형제, 자매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이 진정으로 어떠한 분인지, 그분의 말씀이 어떠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의 조건만보고 그분의 능력을 부러워하며 심지어는 못마땅하게 여기기까지 하는 . 결국 이러한 그들에게 남게 되는 것은 열등감 뿐, 주님으로부터 오는 은총을 받을 기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이와 같은 모습을 종종 보이곤 합니다. 세상 안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바쁘게 살아가다 보니 자기 삶의 틀 안에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 안에서 사람을 판단하게 되고 사랑하거나 미워하게 됩니다. 하지만 정말 좋은 관계란 어떠한 군더더기와 판단도 제외한 채 나에게 보여지는 관계 그대로를 인정하는 가운데 맺어지는 법입니다. 상대방이 지닌 무언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을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계를 예수님과 나 자신의 관계로 옮겨 볼 필요가 있다. 과연 지금 이 순간 ''나는 예수님에 대해서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나는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나의 욕심과 편견으로 인해 종종 예수님을 느낄 수 없거나 그분이 원망스럽지는 않은지요. 이것은 나의 판단으로 예수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착각에서 기인하는 현상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의 감각만으로 예수님을 모두 알 수는 없다. 단 예수님에 대한 단 하나의 명확한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그 정도로 우리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 사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으며,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십자가를 함께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이것은 어떠한 편견에도 판단에도 변하지 않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이러한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귀를 기울이는 것. 편견으로 인해 은총이 가려지지 않도록 보다 굳건한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따르는 것. 지금 이 순간 다른 무엇이 아닌 그저 확실한 주님의 사랑만을 생각하십시오. 이를 기반으로, 힘들 때는 함께 근심하고 기쁠 때는 함께 미소를 지으시는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는 확실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광고의 마지막처럼, 편견을 없애고 주님께 마음을 열 때 우리의 삶은 좀 더 행복해집니다. 그분의 은총이 여과 없이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마음을 열지 않고 나의 편견대로 주님을 바라본다면 어떻게 될지요. 이러한 경우 일어날 일을 다음과 같이 제시함으로써 경각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아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복음 11,25-26)” 우리들은 이 말씀을 지금 이 순간 믿습니까? 저희가 매 순간 기적적으로 살아있음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며 감사하면서 영원한 생명을 꼭 얻게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성공의 비밀은 목표의 지속성에 있다.'' - 벤저민 디즈라엘리 -

♡2166회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을 믿게 만드는 것은 중풍을 고치는 것보다 훨씬 더 - 어려운 일입니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7월 23일(민수기 1장~ )

 달라이라마는 ''마음이 좁은 자는 생각이 극단에 흐른다.''

 《유머를 즐겨라!》유머란 삶의 지혜이다. 우리는 주어진 삶을 질서 정연하게 만들고 싶어 한다. 하지만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유머가 필요하다. 삶에는 항상 위험이 따른다. 내가 가는 곳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이 나의 평온한 삶을 위협할 수 있다. 그러니 용기를 내는 수밖에 없다. 무엇인가를 결정한다 해도 앞으로 그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예측할 수 없다. 약속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결정도 하지 않거나 어떤 일이든 사전에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움직이는 사람은 인생을 놓치게 될 것. 낯선 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결코 자신의 힘을 키우지 못한다. 규정이나 규칙에 얽매여 일을 하는 사람은 결코 행복해 질수 없다. 물론 편하게 살기는 할 것. 하지만 그는 지루하게 산다. 인생을 놓치거나 거부하는 자의 영혼은 불구이며 마비되어 있다. 넓은 지평선만이 우리에게 새로운 것을 보여준다. 오직 탁 트여 있는 것만이 우리의 정신을 자유롭게 해준다.  -안젤름 그륀 신부 지음- 

예수님께서 어떤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신 이야기는(마태 9,1-8), 당신이 가지고 계신 ‘눈에 보이는 권능’ 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권한’ 을 드러내신 이야기이고,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으로서, 하느님의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 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 권능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시는 권능이고, 또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 권한은,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사람을 죄에서 구원하는) 권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고 있다.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2) ‘그들의 믿음’ 이라는 말에서 ‘그들’ 은 중풍 병자와 그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을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도 중요하지만, 병자 자신의 믿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중풍을 고쳐 주실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고, 그 병자의 중풍을 고쳐 달라고 청했을 것. 그러나 그 병자 자신은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고, 또 ‘죄의 용서’ 를 먼저 청했던 것 같다. 예수님께서 중풍을 고쳐 주시기 전에 ‘죄의 용서’ 를 먼저 말씀하신 것은, 병자 자신이 그것을 먼저 청했기 때문일 것. 아니면,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죄를 용서하는 일이 더 급하고 더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여기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나는 너의 죄를 용서한다.” 입니다.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마태 9,3-4)” 만일에 예수님이 ‘사람’ 이기만 하다면, “나는 너의 죄를 용서한다.” 라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일이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율법 학자들의 생각이 아주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이시면서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악한 생각’ 입니다. 하느님이신 분께서 하시는 일을 부정하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한과 권능으로 기적을 일으키신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안 믿으려고 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권한이 없다. 

고해성사에서 사제는 자기 자신의 권한으로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위임해 주신 권한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용서를 집행하기 때문에, 사제가 죄인을 용서한다는 생각은 오해입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형제를 용서하라는 예수님 말씀은(마태 18,22), 사람에게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권한이 있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용서의 은총을 형제에게 나누어 주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런 다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마태 9,5-8) “어느 쪽이 더 쉬우냐?” “둘 다 어렵다.”, 즉 “둘 다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고, 당신이 하느님의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당시에는 ‘중풍’ 은 인간의 의술로는 고칠 수 없는 병이었다. 예수님 말씀을 다시 풀어서 표현하면, “죄를 용서하는 일과 중풍을 고치는 일은 모두 ‘하느님의 권한과 권능’ 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예수님 말씀에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라는 표현이 있어서,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느님의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율법 학자들에게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신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알게 해 주겠다.” “알게 될 것이다.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생생하게 부각시키기 위한 일종의 배경 같은 역할을 할 뿐이고, 특별히 중요한 요소는 아닙니다.

 마태오복음서 저자의 삼단논법은 이렇다. 1. 중풍은 하느님의 권능으로만 고칠 수 있는 병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중풍을 고쳐 주셨다는 것은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나타낸다. 2.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면, 하느님의 권한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 3. 하느님의 권한으로만 할 수 있는 죄의 용서도 하실 수 있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내가 너의 병을 고쳤다.” 라는 말씀이 생략되어 있다. 예수님 말씀은 원래는, “내가 너의 병을 고쳤으니,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였을 것. 예수님께서는 언제 중풍을 고치셨을까? 죄를 용서한다는 말씀을 하실 때 중풍을 고쳐 주는 일도 함께 하셨을 가능성도 있고, “일어나... ” 라는 말씀을 하실 때 고쳐 주셨을 가능성도 있다. 어떻든 중풍 병자는 예수님 덕분에 영혼과 육신의 건강을 되찾았고, 군중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 ‘인정’ 이 ‘믿음’ 으로 이어진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군중이 인정했음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 으로만 생각했음을 나타내고, 군중은 여전히 예수님을 안 믿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율법 학자들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도, 그들도 예수님을 안 믿었음을 나타냅니다.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을 믿게 만드는 것은 중풍을 고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입니다.

  말씀을  듣고 성체를 모시는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하느님의 돌보심을 느끼면서 우리들 몸과 마음 안에 상한 것들이 치유될 수 있는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모든 공포는 믿음의 결핍으로부터 나온다.'' - 간디 -


♡2167회 믿어야 보이는 것이지, 보인다고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7월 24일(민수기 11장~ )

 파스칼은 ''칭찬받기를 원하면 자화자찬을 하지 말라.''

《물이 갖는 7덕》 첫째 :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겸손"  둘째 : 막히면 돌아가는 "지혜"  셋째 : 구정물까지 받아주는 "포용력" 넷째 : 어떤 그릇에도 담기는 "융통성" 다섯째 : 바위도 뚫는 "인내와 끈기" 여섯째 : 장엄한 폭포처럼 투신하는 "용기" 일곱째 : 유유히 흘러 바다를 이루는 "대의"
  살다 보면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 사람들은 어떠한 것을 판단해놓고 그 판단이 옳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이런 경우를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은” 마음이 무딘 사람입니다. 이들 마음 안에 아무리 진리의 씨를 뿌려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우리도 이렇게 눈멀고 귀먹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한 가지를 깨달아야 하는데, 우리 안에 증거 자체 조작 기능이 내재하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든 자신의 주장을 확증해줄 근거를 찾는데 그 근거는 사실 그들 주장을 조작해 줄 도구밖에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증거가 믿음을 바꾸지 못하고, 오히려 믿음이 증거를 조작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믿어야 보이는 것이지, 보인다고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결정하면 머리는 따라줄 뿐입니다. 2004년 5월 미국 FBI 요원들이 들이닥쳐 변호사이자 미군 전직 장교였던 ‘브랜던 메이필드’ 를 마드리드 폭탄테러 용의자로 체포하였다. 그해 3월 11일 192명이 사망하고 2천 명이 다친 끔찍한 마드리드 공격에 연루되었다는 혐의였다.

 그는 미국인이지만 이슬람으로 전향했고 이집트 여성과 결혼한 상태였기 때문에 FBI에 계속 감시를 당하던 중이었다. FBI는 마드리드 현장에서 폭발물이 담긴 파란색 쇼핑백을 발견하였는데 거기서 메이필드의 지문이 나온 것. FBI는 그 지문이 100% 일치한다고 주장을 했고 그것이 틀릴 가능성은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의 지문이 미국과 대서양을 가로질러 8700㎞ 떨어진 곳에서 발견될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 바로 그날 아침, 스페인 경찰청이 폭탄 공격과 관련 있는 인물로 알제리 남성 ‘우나네 다우드’ 를 체포하였다. 메이필드보다 그의 지문이 FBI가 무시했던 애매한 영역을 포함한 검지 지문에 더 잘 맞을 뿐 아니라 그의 엄지 지문도 쇼핑백에서 발견된 지문과 일치했던 것. 메이필드는 다음 날 풀려났고 FBI는 굴욕적인 사과를 공개적으로 해야 했다. 물론 200만 달러의 피해보상금을 지급해야 했다. 당시 미국은 2001년 911테러로 공포에 휩싸여 있어 아랍인들에게 대한 편견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전문가들의 판단을 맹신하고 있는 상태였다. 미국 최고 지문 감식반의 판단이 틀릴 리가 없다고 믿고 있었다. [참조: ‘지능의 함정’, 데이브드 롭슨, 유튜브 채널 ‘책한민국’] 사람들은 증거가 믿음을 만든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믿음이 증거를 조작하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기적을 요구하는 세대를 비판하신 것. 눈과 귀를 막아놓고 보고 듣겠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똑똑한 전문가들도 자기 생각이 옳다고 믿어버리면 눈이 감기고 귀가 막혀 남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하고 뻔히 보이는 것도 보지 않으려 합니다. 이런 경우는 세상 사람들이 똑똑하다고 인정해주는 전문가들에게 더욱 자주 일어납니다. 1920년대에 미국 심리학회 회장이었던 ‘루이스 터먼’ 이라는 유명한 학자입니다. 그도 자신의 편견을 배열하며 과학이라 믿었다. 그는 IQ가 삶과 직결되고 IQ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고 믿었다. 각 학급에서 IQ가 140 이상인 아이들을 골라내어 그 아이들의 인생을 수십 년 동안 수집하였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차이가 없었다. IQ가 높은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아주 조금 좋은 성과를 내는 이들이 있었지만, 그 이유는 그 실험을 하며 터먼이 그들에게 특별한 지원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실험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머리가 좋은 아이들에게만 특별한 지원까지 했던 것. 그러나 결과는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도 자기 집 식구들의 IQ를 재서 지능이 높은 순서대로 식탁에 앉게 하였다. 그의 믿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으면 화를 내었다고 합니다. 데이브드 롭슨의 ‘지능의 함정’ 이란 책에서는 이런 사례가 아인슈타인, 에디슨, 스티브 잡스 등 모든 고집불통인 뛰어난 천재들에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고집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그 고집은 한마디로 하면 ‘교만’ 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을 믿는 마음이 교만입니다. 자신을 믿는다는 말은 자신의 힘으로 ‘진리’ 에 다다를 수 있다고 믿는 것.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리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리가 아니라는 것. 우리 안에는 오히려 진리와 반대되는 자아가 있다. 그 자아를 믿으면 진리에서 멀어집니다. 그 자아에 대한 믿음이 강할수록 주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약해집니다. 뱀이 하와를 그렇게 만들어 하느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하였다. 나의 눈을 가리고 나의 귀를 막는 것이 내 자신임을 알지 못하면 이 교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상태가 길바닥에 씨가 떨어지는 것과 같다. 그 씨를 먹는 까마귀가 창세기의 뱀이요, 탈출기의 파라오요, 우리가 버려야 하는 자아입니다. 그 자아에게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길이 되지 않으려면 겸손하면 되고, 돌밭이 되지 않으려면 절제하면 되며, 가시밭이 되지 않으려면 청빈하면 됩니다. 겸손과 절제와 청빈을 ‘복음삼덕’ 이라고 합니다. 복음삼덕은 세속-육신-마귀를 이기는 무기입니다. 나 자신 안에서 끓어오르는 교만과 육체적인 욕구와 재물에 대한 탐욕만 줄여가면 자아가 죽고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립니다. 그러면 진리의 말씀이 내 안에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농부가 뿌리는 말씀의 씨는 비유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비유로 우리 마음에 떨어집니다. 그렇지만 교만과 육욕과 탐욕은 그 비유를 이해할 수 없게 우리 감각을 마비시킵니다. 남을 판단하는 것을 멈춥시다. 그러면 교만이 줄어들 것. 육체의 욕망을 지금 이 순간 절제합시다. 그리고 십일조를 내봅시다. 그러면 눈이 열려 비유를 이해하게 될 것. 

인터넷의 어두운 소굴로 과감히 발을 들여놓으면 케리(Kery)라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세상의 질서를 바꿀 해안을 가졌다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그는 캘리포니아 나바로 강 근처에서 몸에서 빛이 나는 너구리같이 생긴 물체를 만나 외계인에 납치되었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점성술을 절대적으로 믿고 에이즈 바이러스나 오존층에 구멍이 뚫렸다는 믿음은 다 가짜라고 주장합니다. 케리가 정신이상자처럼 보입니까? 케리 멀리스는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입니다. 다만 자신 안에 자신을 바보로 만드는 자아가 있고 그 자아를 믿으면 바보가 된다는 사실을 몰랐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 비참합니다. 진리와 반대되는 자아의 주장이 자신 안에 있음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것을 모른 상태로 하는 과학적 연구는 모두 자체 증거 조작 기능에 당하는 것. 우리는 눈멀고 귀먹은 마음이 무딘 백성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이 순간 마음이 결정하면 머리는 따라줄 뿐입니다. 또 눈과 귀는 머리가 찾는 것만을 보고 듣게 됩니다. 그래서 이미 완고해진 마음은 외부의 것들로 바꿀 수 없게 됩니다. 완고한 마음을 버리려면 지금 이 순간 내가 아닌 주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 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나를 믿어서는 안 됩니다. 내 안에 뿌려지는 말씀이 진리이고 나는 그 진리를 열매 맺게 하는 좋은 밭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 때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릴 것입니다.

  매 순간,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을 의심 없이 믿고, 또한 하느님께 받을 상을 받게 되는 복된 천국의 백성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일은 쉬면서 인생은 여유 있게 보내라.'' - 장 파울 -


♡2168회 망치와 정으로 큰 돌의 쓸모없는 부분들을 쪼아내는 노력과 같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7월 25일(신명기 1장~ )

  아미엘은 ''생활은 습관이 짜낸 천에 불과하다.''
《금욕과 절제는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금욕과 절제를 즐겨라! 자신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금욕과 절제로 자신과 조화를 이루는 사람은 삶에서 이미 행복을 누리게 된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자신과 조화를 이루고 내적 평화를 누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당신은 이미 행복한 것. 정신이 육체와 함께 존재하고 정신이 육체의 감각으로 사물을 받아들일 때, 당신은 비로소 듣고, 냄새 맡고, 맛을 보고, 만지는 것으로, 행복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게 된다. “적은 것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은 어떠한 것에도 만족하지 않는다.” 충동에 이끌려 사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마음대로 제어하지 못한다. 그는 맑은 정신은 물론 마음의 평화까지도 잃어버린 사람이다. 그러나 금욕은 삶에 이로울 뿐 아니라 정신적인 풍요를 선사하는 선물이 된다. 적절한 금욕은 우리를 진정한 기쁨과 행복으로 안내해주는 길잡이가 된다. 돈도, 명예도, 지위도,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중독된 자는 결코 만족을 모른다. 어떤 욕구든 즉시 충족시켜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은 지속적인 만족을 모르기 때문이다. 적당한 수준에서 행하는 금욕과 절제는 삶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해준다. 절제를 아는 사람이 강하다. 이런 사람은 자기중심에 확고하게 머물러 있으며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순간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에 노예가 되지 않는다. 온전한 나 자신이 되면 될수록 영혼은 더욱 고요해 진다. 그럴수록 더욱 자유롭고 행복해진다.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이미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 행복이란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포기의 천사가 두 가지를 가르쳐준다. “주어진 선물을 향유하는 것과 포기하는 방법이다.” 포기함으로써 내적으로 자유로워지고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진정으로 즐길 수 있게 된다. -안젤름 그륀 신부 지음-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일곱 마귀가 들렸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난 여인입니다. 그 이후에는 극기의 삶으로 이전의 타락했던 삶에 대해 속죄하며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주간 첫날 새벽에 부활하신 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 그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 주신 여자였다.”(16,9) 예수님을 알아본 마리아는 예수님을 “스승님!” 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일곱 마귀’ 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만 있었던 것일까요? 복음서는 우리 모두를 위한 내용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우리 모두, 즉 교회를 상징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우리는 모두 일곱 마귀가 들린 생활을 했다고 보아야 할 것. 창세기 7일간의 창조가 이루어지기 7일 전의 인간의 동물적인 상태가 일곱 마귀가 들린 상태일 것. 교회는 그래서 창조로 새로 태어나기 이전에 인간 안에 이 일곱 마귀가 있다고 가르쳐왔는데, 이를 ‘칠죄종’ 이라 합니다

.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일곱 가지 죄의 뿌리에서 다른 모든 죄악이 나온다고 말했다. 이는 “① 교만, ② 탐욕, ③ 정욕, ④ 질투, ⑤ 과식 ⑥ 노여움, ⑦ 게으름” 입니다. 사실 이 일곱 가지 죄의 원인은 ‘삼구’ 에서 나온 것. 삼구 중 마귀가 ‘교만, 질투, 노여움’ 이고, 육신이 ‘정욕, 과식, 게으름’ 이며세속이 ‘탐욕’ 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스승입니다. 만약 부모가 자녀의 일곱 마귀를 신경 쓰지 않고 무언가를 가르친다면 어떻게 될까요? 진정한 스승이 아니라 자녀를 이용하는 무기가 됩니다. 무기의 최후는 끔찍할 수도 있다. 영국에서 이런 살인사건이 있었다. 남편을 사별하고 설움을 느끼며 살던 어떤 영국 어머니는 외아들 ‘티모스 베이커’ 를 무시 받지 않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 그래서 무엇이든 1등을 하라고 교육하였다. 고등학교를 수석 졸업하였고 영국 옥스퍼드는 물론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도 합격 통지서를 보내왔다. 그 합격 통지서를 받던 날 저녁 어머니는 아들과 그의 여자 친구 문제로 큰 싸움을 벌였다. 어머니는 공부를 마친 후 더 좋은 환경의 여자 친구를 사귈 수 있으니 당장 헤어지라고 했고, 화가 난 아들은 어머니를 야구방망이로 때려 숨지게 하였다. 기자회견 때 티모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난 어머니로부터 무조건 1등을 하도록 강요받고 살았다. 그리고 나의 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쟁취해야 한다고 배웠다. 나는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나의 꿈을 막는 자는 누구도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 그런데 어머니가 나의 꿈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 장애물이 어머니일지라도 내 앞에서 치워버려야 했다. 그래서 내 꿈을 막는 어머니를 죽여버릴 수밖에 없었다. 내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자녀에게 남을 이겨야 하고 당연히 1등을 해야 한다는 교만과 질투, 노여움의 감정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던 스승의 최후입니다.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이 세계 최하위인 것은 어쩌면 자녀들의 일곱 마귀를 방치하며 교육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서편제’ 로 유명한 소리꾼 오정해는 김소희 명창의 제자입니다. 김소희 명창이 칠순이 넘어 수업료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가난한 중학생 오정해를 제자로 받아주었다. 오정해는 김소희 명창과 함께 기거하며 소리보다 먼저 인간이 되는 것을 배웠다. 추운 겨울에 얼음물에 청바지를 빨아 직접 짜서 널어야 했다. 대충 짜서 널었더니 스승은 그것을 다시 물속에 집어 던졌다. 손이 시리더라도 끝에서부터 꼭꼭 짜서 널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스승은 음식이 쉬어도 버리는 일이 없었다.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쉰 음식을 먹으니 중학생 정해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혹독하게 교육한 이유는 나중에 소리를 하러 다닐 때 아무 음식을 먹더라도 탈이 나지 않는 몸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꼼꼼한 삶의 자세는 작은 것이라도 완벽하게 해내는 습관이 되었다. 그의 목소리는 그 나이에 누구도 담지 못하는 ‘한’ 의 감정을 담게 되었다. 대회에 나갈 때 예쁜 한복과 부채가 필요했지만 가난해 돈이 없던 정해에게 스승은 자신의 저고리를 줄여 입혀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실력으로는 당당히 1등을 하였다. 스승은 그의 등을 두드려주며 대학교수가 될 것을 권했고 비록 스승이 세상을 떠났지만, 오정해 씨는 대학 강단에서 자신이 배운 것을 제자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그녀는 스승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스승님은 모든 것을 저에게 주고 가셨습니다. 언제나 가슴에 묻고 ‘스승님이 웃고 계시겠지!’ 라는 마음으로 소리를 합니다.” 누군가의 일곱 마귀를 쫓아내기 위해서는 또 누군가의 피가 필요합니다. 마치 망치와 정으로 큰 돌의 쓸모없는 부분들을 쪼아내는 노력과 같다. 이 과정에서 스승은 제자의 원망과 따가운 눈초리를 받을 수도 있다. 예수님도 그런 피 흘림으로 일곱 마귀를 쫓아내고 그 안에 당신이 자리하십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래서 참 ‘스승’ 으로서 예수님을 자신 안에 모십니다. 우리의 삶은 일곱 마귀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로 향하는 제자들의 삶입니다. 부모가 참 스승이 되려면 자녀에게 이것부터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내 욕심보다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그리고 배려하는 그 마음들로 우리들이 원하는 것을 누리게 되는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행복은 습관이다. 그것을 몸에 지니라.'' - 허버트 -


♡2169회 물고기가 어항의 크기에 자기 몸의 크기를 정하는 코이라는 물고기와 같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7월 26일(신명기 21장~ )

  앙드레 모루아는 ''행복한 결혼이란 죽을 때까지 따분하지 않은 대화의 연속을 말하는 것이다.'' 
《친구는 바로 나의 모습이다.》친구를 깊이 이해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보다 명확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잣대에 비추어 보거나 평가하는 일을 그만둔다. 우정은 다른 사람들을 편견 없이,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진심으로 상대를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가 나누고자 하는 ‘우정’ 이다. 신성한 우정이 만들어지고 두 사람이 행복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적 자유가 반드시 필요하다. 어떠한 관계에서든 사람들은 자유를 필요로 한다. 관계를 맺는 것은 언제나 자유로워야 하며 그 관계 안에 항상 나만의 공간이 확보되어 있어야 한다. 어떠한 사랑이든 그 안에는 정직하고도 순수한 것이 깃들어 있는 법이다. 친구에게서 느끼는 우정을 순수하게 받아들여라! 우정이 있으면 마음에 상처를 받지 않는다. 우정이란 마음에서 동일한 음이 울려나오는 사람들을 서로 엮어주는 놀랍고도 고상한 힘이다. 오랜 친구라 해도 왜 자신들이 친구이며 어떻게 해서 우정이 생겨났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우정이 생겨나는 과정은 그렇듯 항상 비밀스럽다. 우정이란 어느 날 갑자기 내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문이 이 사람에게 활짝 열리는 것. -안젤름 그륀 신부 지음. -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그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내용입니다. 그 사람들은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예수님을 여전히 요셉의 아들로 여기는 것.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지금 시대에도 나자렛 사람들과 같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그들이 왜 이런 오류에 빠지는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의 하나인 ‘햄릿’ 의 이야기를 통해 생각해 보겠다. tvn의 ‘책 읽어드립니다’ 에서 참조하였다

. 여기에서 나오는 인물 중 누가 나자렛 사람들과 비슷한지 맞추어보시는 것도 재미있을 것. 12세기 덴마크 왕국 엘시노어 성에 자정이면 나타나는 죽은 왕의 혼령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 유령을 본 햄릿의 친구 호레이쇼는 왕자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독일 유학중이었던 햄릿은 아버지의 그 소식을 듣고 곧바로 돌아옵니다. 자정까지 기다렸다가 아버지를 만납니다. 유령이 된 아버지는 자신이 뱀에 물려 사고사로 죽은 것이 아니라 독살당했다고 말해주었다. 죄 중에 죽어서 회개할 기회가 없었기에 천국에 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고 했다. 햄릿이 왕이 되어야 하지만 현재는 아버지의 동생인 삼촌 클로디어스가 자신 어머니와 결혼하여 왕이 되어 있었다. 범인은 삼촌일 것임이 틀림없었다. 햄릿은 일단 시간을 벌기 위해 미친 척을 하기 시작합니다. 햄릿은 나라의 광대들을 모으고 ‘쥐덫’ 이라는 연극을 기획합니다. 왕이 어떻게 살해되는가를 현재의 왕 앞에서 보여주며 현 왕의 표정을 살피려 한 것. 왕은 연극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밖으로 뛰어나갑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기도를 합니다. 햄릿은 그때 삼촌을 죽이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 있었으나, 아버지는 지옥에 갔는데 삼촌이 회개하여 천국 가면 안 된다고 여겨 잠시 복수를 미룹니다. 햄릿은 자신도 좋아하고 자신을 좋아하는 오필리아라는 여인에게 “우리는 모두 저주받은 사람들이오. 수녀원으로 들어가시오!” 라고 모질게 말합니다. 화가 난 오필리아의 아버지 폴로니어스는 이를 따지기 위해 왔다가 햄릿이 어머니와 하는 이야기를 커튼 속에 숨어 듣게 되었다. 햄릿은 어떻게 아버지를 죽인 숙부와 결혼할 수 있느냐고 따지고 있었다. 그런데 커튼에서 부스럭하는 소리를 듣고는 칼로 찔러버립니다. 오필리아의 아버지는 그렇게 죽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오필리아는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플로니어스의 아들이자 오필리아의 오빠인 레어티스는 왕 클로디어스와 짜고 햄릿을 죽여 복수하려 합니다. 검술 시합에서 칼에 독을 발라 죽이려 한 것. 그러나 검술 시합에서 햄릿이 레어티스를 압도합니다. 이에 불안은 느낀 왕은 포도주에 독을 타서 햄릿에게 마시라고 건넵니다. 그러나 햄릿의 땀을 닦아주는 왕비가 마시고 쓰러집니다. 술에 독을 탄 사실을 안 햄릿은 왕을 찔러 죽입니다. 레어티스도 상처가 심해 죽습니다. 햄릿도 독이 든 칼에 상처를 입은 터라 서서히 죽어갑니다. 처음에 선왕의 유령을 보았다고 알려준 햄릿의 친구 호레이쇼도 자책하며 죽으려 합니다. 햄릿은 죽어가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죽네, 호레이쇼. 아, 내가 진실을 말해줄 수 있으련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오. 이 모진 세상에서 고통의 숨결을 지속하며 내 이야기를 전해주게.” 자, 찾으셨나요? 나자렛 사람들은 이 등장인물 중 누구와 가장 가깝습니까? 바로 햄릿입니다. 햄릿은 성인이 되었음에도 아버지의 망령에 여전히 휘둘리는 인물입니다. 사람은 아버지만큼 자랍니다. 물고기가 어항의 크기에 자기 몸의 크기를 정하는 코이라는 물고기와 같다. 마산교구 문인회 수필등재와 청주교구수요치유기도회 강의시 코이의 법칙과 같다. 오이는 지주대의 높이에 따라 높이 가지를 뻗어 많이 열리고, 코이는 자라는 여건에 따라 어항, 수족관, 호수 크기에 따라 크기가 다른 물고기로 자라는것을 코이의 법칙이라 한다. 지금 이 시간 나의 신앙을 얼마나 높이 얼마나 넓게 신앙생활 하는것을 코이의 법칙이라 한다.

 나자렛 사람들은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여기고 계셨다. 그렇다고 육신의 아버지를 배척하지 않으셨다. 하느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하셨다. 나자렛 사람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여기지 못하는 현시대의 모든 이들을 대변합니다. 여전히 하느님을 아버지라 여겨야 하는 연령대에도 불구하고 육체의 아버지에게 지배당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인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아이가 성인이 되어서도 그의 삶에 간섭하고 영향을 주려고 한다면 자녀를 나자렛 사람들과 같이 만들어버립니다. 유다인들처럼 빨리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들에게 망령으로 남지 않을 수 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어쩌면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반으로 기분이 나쁠 수도 있을 것. 반 고흐는 엄격한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 참으로 엄청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느 나라 속담에서는 자녀에게 아버지가 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사라져 주는 것이라는 말도 있다. 다시 말하지만, 아이가 이제 하느님을 아버지로 여겨 그 그릇에서 자신을 성장시켜야 하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의 부모가 되기를 멈추지 않고 강요하게 된다면 그 부모는 자녀들에게 망령이 됩니다. 결과는 비극으로 끝납니다. 나자렛 사람들처럼 인간적인 아버지라는 틀에 머물며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끄시려는 하느님 아버지의 길을 막아서서는 안 될 것입니다.

  목자들처럼 말씀을 듣고, 믿고, 살고, 전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마음에 되새기며 오직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 마음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닦고 빛을 내며 기쁘게 살아가는 은총과 축복 가득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요구받기 전에 먼저 충고하지 말라.'' - 에라스무스 -


♡2170회 나는 지금 이 순간 자녀들을 어떠한 방향으로 이끄는 지도를 가졌나요?   -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7월 27일(신명기 34장~ )

 조나단 스위프트는 ''비전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기술이다.''

《착한목자》예수께서는 인간의 신비와 하느님의 신비를 암시하신다.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에 관하여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그리고 이어서 나는 문이다”(요한 10,7-9)라고 두 번씩이나 자신을 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만이 홀로 양들에게 합법적으로 다가 설 수 있는 통로다. “예수의 문을 통해 양들은 드나들며 목초를 찾아 생명을 넘치도록 얻는다.”(요한10,9-10) 문은, 곧 이 세상의 영역에서 천상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통로를 상징한다. 그분은 우리 자신에게 이르는 문이시다. 우리 마음에 이르는 통로이시다. 예수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른다. 예수를 묵상할 경우 자기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그들은 예수를 통해서 마치 문처럼 자신의 내적 집에 들어가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나는 예수를 이해함으로써 나 자신을 이해하고 내가 참으로 누구인지를 인식하고 마침내 참된 자아에 이르는 통로를 발견하게 된다. 예수께서는 충만한 생명, 충만히 넘치는 생명에 이르는 문이시다. 요한은 항상 죽음과 부활을 함께 바라본다. 이 둘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무한하시고 조건 없는 사랑의 표현이며, 당신 양들을 향한 예수의 사랑은 아버지에게서 체험한 사랑에 근거하고 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목숨을 다시 얻고자 목숨을 내 놓기 때문입니다.”(요한10,17) 참된 사랑은 자기 자신을 내줄 수 있고, 목숨을 내놓는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하지만 사랑은 먼저 내가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을 경우에만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다. -안젤름 그륀 신부 지음- 

인생은 속도보다 방향이란 말이 있다. 보물 지도를 찾기 위해 갖은 고생하다 결국 그 보물 지도로 찾는 것은 빈 상자뿐임을 깨닫게 되는 영화도 있다. 얼마나 허무할까요? 우리 인생에서도 보물 지도를 가진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평생 헛고생만 하다 인생을 마감하게 될 수도 있다. 우리 각자는 각자의 보물 지도를 지니고 있다. 그 목적지로 각자는 열심히 달리고 있다. 그 목적지로 누군가를 초대하기도 합니다. 어느 신부님의 어머니는 천주교 집안에서 자랐지만, 불교 집안에 시집을 왔다. 할머니는 신부님의 어머니가 성당 다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신부님의 어머니를 부르시더니 “꼭 성당 나가라!” 는 마지막 말을 남기셨다. 평생 불교가 참된 길인 줄 알았는데 당신을 데리러 온 사람들의 복장이 왠지 절에서 온 것 같지 않고 성당에서 온 사람들 같아 보인다는 것. 아마도 천사들을 보신 것 같다. 신부님의 어머니는 바로 우물에서 바가지에 물을 떠다 할머니에게 마리아란 세례명으로 임종 대세를 드렸다. 그 이후로 신부님 가정이 모두 성당에 다니게 되었고 신부님께서는 사제가 되었다. 누군가 보물 지도를 가진 사람이 되려면 그 보물을 찾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찾아야 하는 보물 지도는 천국으로 향하는 길을 제시하는 것. 그 지도를 가진 사람만이 참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빈 상자만 발견하게 될 지도들을 가지고 그것이 보물 지도라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성 토마스 사도는 사도 중 믿음이 가장 약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한 유일한 사도라는 평가가 많다. 성 토마스 사도는 참 보물 지도를 가진 사람이 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명확히 그 길을 알려준 분입니다. 그에게 유일한 보물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면 자신에게 더는 중요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타나시기까지 끝까지 나머지 사도들 가운데서 머물 줄 알았다. 예수님은 그의 소원을 들어주셨고 그는 보물 지도를 가진 사도가 되었다. 그렇게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하였다. 지금 인도의 많은 가톨릭 전례가 토마스 사도의 독특한 전통을 따르고 있다. 누군가에게 복이 되기 위해 자신이 먼저 참 행복을 만나려고 했던 토마스 사도는 우리 모든 신앙인의 모범입니다.

 영화 ‘왓 어 걸 원츠’(2003)는 토마스처럼 참 행복의 지도를 가진 사람이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영국의 귀족 가문인 한 남자가 여행 중 팝 가수를 꿈꾸는 한 여인과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품격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남자의 가문은 여자를 조용히 떠나게 하였다. 그런데 그 약혼녀는 임신 중이었다. 그렇게 태어난 여자아이가 ‘다프네’ 입니다. 다프네는 17년간 아버지를 기다린 끝에 자신이 직접 아버지를 찾아 나서기로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저택으로 숨어들어 아빠를 만나고 자신이 딸임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아빠는 이미 자신의 상원의원 당선을 지지해주는 사람의 딸과 동거 중이었다. 다프네의 활달한 성격은 영국 사교계에 맞지 않았다. 그 환경에서 살아야만 하는 아빠와 더는 함께 있을 수 없었다. 다프네는 결국 아빠를 떠나 미국으로 돌아옵니다. 아빠는 자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임을 딸의 순수한 모습 때문에 볼 수 있게 되었다. 상원의원후보직을 사퇴한다고 하고 그렇게 아빠와 춤 한 번 춰보는 것이 소원인 딸을 찾아 미국으로 떠납니다. 딸과 약혼녀를 만나 정식으로 혼인에 골인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지금 이 순간 각자의 지도를 지니고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누군가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려는 것. 그러나 진정 참다운 보물을 발견한 이는 자신의 방향으로 오지 않는 사람들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참 행복을 원하는 방향으로 어떤 사람들을 이끌기도 합니다. 토마스 사도는 참 행복이 그리스도와의 만남임을 아는 사도입니다. 그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며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이라며 한 신앙고백이 우리가 모두 찾아야 하는 보물입니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자녀들을 어떠한 방향으로 이끄는 지도를 가졌나요?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올바른 보물 지도를 가진 사람은 자신도 그렇고 자신을 따르는 사람도 그렇게 따라오게 합니다. 나의 보물 지도의 끝이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이란 목적지가 아니라면 나도 나를 따르는 사람도 삶의 허무로 이끕니다. 우리의 방향을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으로 설정합시다. 그러면 나와 나를 따르는 많은 이들을 영원한 행복으로 이끌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나름대로 기도하면서 열심히 살다가 내리막길처럼 보일 때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들이 말씀에 순명하면 내리막길이 아니라 오르막길이 될 수 있는 ‘치유의 길’ 임을 믿고 ‘용기를 내십시오.’ 그리고 ‘안심하시기를’ 기도하면서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위험을 알면 위험이 사라진다.'' - 베르너 티키 퀴스텐마허 -


♡2171회 큰일이든지 작은 일이든지 간에 사랑과 선행은 모두 똑같이 고귀하고 위대한 일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7월 28일(신명기 34장~ )

  진종황제는 ''책 속에 고래등과 같은 기와집이 숨어 있다.''
《주님의 재물은 사랑》주님! 당신은 미사성제로 우리의 사랑을 드높이시며 자비를 베풀어주시고 당신 생명을 제물로 삼아 성부께 드리는 제사에 우리를 참여시키시어 그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끊임없이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주님!
우리 안에도 당신 사랑이 타오르게 해주소서! 당신과 같은 마음으로 형제를 위해 자신을 바칠 수 있도록 참된 섬김의 정신을 우리 안에 심어주소서! 미사성제 안에서 당신의 사랑을 배우게 해주소서! 미사성제를 바칠 때마다 용서하고 일치하려는 바람과 이웃의 선을 위해 몸 바치고 구원과 행복을 위해 일할 열정을 불러일으켜 주소서! 미사성제에 참여함으로 늘 마음을 새롭게 해주시어 사랑의 길을 걷게 해주시옵소서!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마태 10,34-36) ‘집안 식구’ 는 실제 식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현세적인 것들, 또는 박해자들을 상징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나를 믿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평화를 얻게 된다고 생각하지 마라.” 입니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참 평화’ 를 얻기를 바란다면 ‘거짓 평화’ 를 단호하게 물리쳐야 한다.” 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영혼의 평화’ 가 ‘참 평화’ 입니다. ‘거짓 평화’ 는, 영혼은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고 몸만 편안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웃의 사정에는 관심 없이 자기 혼자서만 편안하게 지내기를 바라는 것 등입니다. 가족이 서로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는 말씀은, “나는 ‘거짓 평화’ 를 물리치고 너희에게 ‘참 평화’ 를 주려고 왔다.” 라는 뜻입니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너희는 지금 ‘거짓 평화’ 를 평화라고 착각하고 있다. 그 ‘거짓 평화’ 가 바로 ‘참 평화’ 를 얻는 것을 방해하는 걸림돌이다.” 라는 뜻입니다. 어떤 율법학자가 와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했을 때(마태 8,19),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 “나를 따르려면 나처럼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생활을 하겠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런 각오를 하고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설 때,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이, 즉 식구들이나 친구들이 그것을 말리는 일이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말리는 사람들은 어떤 사심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걱정되어서 ‘아끼는 마음으로’ 말리는 것이지만, 예수님을 따르려면 그것을 단호하게 물리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 ‘편안한 생활’ 을 포기하는 것.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현세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애착)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여기서도 ‘가족’ 은 실제 가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가로막는 현세적인 것들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뜻으로는 산상설교에 있는, ‘재물에 관한 가르침’ 과 같은 말씀입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신앙생활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생활’ 이고, 하느님 사랑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해야 하는 일입니다.(마태 22,37) 마음이 갈라져도 안 되고, 한눈을 팔아도 안 되고, 세속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도 안 됩니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8)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힘들 때도 있고, 편안할 때도 있다. 어려운 일을 만날 때도 있고, 쉬운 일을 만날 때도 있다. 만일에 편안할 때에만 신앙생활을 한다면, 또 어려운 일은 피하고 쉬운 일만 한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 힘들 때나 편안할 때나, 또 어려운 일을 만나거나 쉬운 일을 만나거나, 어떤 경우나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현세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입니다.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는 “내가 주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기 때문에 현세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그 생명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것을 얻을 것이다.” 입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성인 성녀들 가운데에는 왕들도 있고 왕비들도 있다. 부자들도 있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었던 이들도 있다. 그분들의 생애를 보면, 세속에서 누리던 부귀영화를 끝까지 누리면서 살다가 성인품에 오른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누리던 것들과 가지고 있던 것들을 모두 버리고 신앙생활만 충실하게 하다가 성인품에 올랐다. 그래서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분들은 ‘왕들과 왕비들’ 이 아니라 ‘왕과 왕비였지만 권력과 재물을 모두 버리고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온 이들’ 이고, ‘부자들’ 이 아니라 ‘부자였지만 가난해진 이들’ 입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40-42) 사도들이 선포하는 복음은 곧 당신이 선포하신 복음과 같다고 보증해 주시는 말씀이고, 또 사도들이 당신의 대리인들이라는 것을 보증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께서 세우시고, 사도들을 거쳐서 오늘에 이르게 된 교회입니다. 사도들을 거치지 않고 다른 경로로 전해졌다면, 그 종파는 이단입니다.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이들을 접대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접대하는 것. 그 접대가 ‘물 한 잔’ 처럼 작은 일이라도 예수님께서는 그 일에 대해서 보상을 해 주실 것. 큰일이든지 작은 일이든지 간에 사랑과 선행은 모두 똑같이 고귀하고 위대한 일입니다.

  우리들도 각자에게 특별히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잊지 않고 열매를 맺어 보답하는 멋지고 행복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쉽게 만족하지 말고 계속 전진하라.'' - 빌게이츠 -


💖성령봉사자 박재만 세례자요한 010 - 3878 - 6634
  (수필가ㆍ전국성령쇄신봉사자협의회 말씀추천강사)
💖성령봉사자 류태숙 M.막달레나 010 - 6560 - 7354
  (시인ㆍ수필가ㆍ꽃예술설화중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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