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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기도회 봉사

♡2152회 남의 판단보다는 지금 이 순간 내 판단이 더 중요합니다. - ♡

♡2152회 남의 판단보다는 지금 이 순간 내 판단이 더 중요합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7월 9일(사도행전 1장~)

  조지 워싱턴 ''우정은 느린 성장을 하는 식물이며 역경의 충격을 겪어야만 그 명칭을 받을 자격이 있다.''
《침묵하며 들어라!》우리는 듣는 법을 익힘으로써 성경의 모든 말씀 안에서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모든 말씀 안에서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나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려는 바를 종종 귀먹은 사람처럼 듣지 못한다. 하느님께서 우리 이웃을 통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도 우리는 듣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인정하는 것만을 들을 수 있으며 의심하는 것은 듣지 못한다. 우리는 곤궁한 상황을 알리는 다른 사람들의 음성도 듣지 못한다. 물론 말소리는 들을 수 있지만, 도움을 요청하는 이의 마음에서 울리는 소리는 듣지 못한다.

 예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다섯 단계로 치유하신다. 
첫째로, 우리의 귀를 막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 하시는 내용을 진정으로 들어야 한다. 외부의 소리를 듣는 대신 우리는 먼저 내면의 소리를 듣는 법을 익혀야 한다. 그래서 우리 마음속에 들려오는 하느님의 나지막한 소리를 들어야 한다. 
둘째로, 예수께서 침을 뱉으셨고 환자의 혀에 발라주셨다. 이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면 깊은 침묵을 지켜야 한다. 침묵은 우리자신 하느님을 대면하게 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만나게 하고 우리를 치유한다. 그 말씀은 우리에게 깊은 평화를 불러일으키는 사랑의 말씀이다.
셋째로,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신다. 그분은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심으로써 우리 위에 있는 하늘을 여신다. 갑자기 우리에게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우리의 마음도 넓어질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선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모든 말씀은 결국 하느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
넷째로, 예수님께서는 구원하시고 해방하시는 말씀을 선포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나의 모든 감각을 하느님께 개방하게 한다.
다섯째로, 예수님께서는 악의 세력에서 우리를 해방하신다. 악의 세력은 우리에게 불안이나 우리를 지배하는 그 어떤 강요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불안에서 비롯되는 속박과 강요에서 우리를 해방하신다. 그리하여 우리가 바르게 말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말하도록 배울 수 있게 하신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시어 그로 하여금 생명으로 일깨우는 사랑의 언어를 말하게 하신다. 결국 다른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격려의 말을 자유로 이끄는 생명과 위로의 말을 하게 하신다.

-안젤름 그륀 신부 지음- 제가 당신 말씀을 마음으로 듣고 그 말씀으로 저를 변화되게 하소서! 주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시는 나지막한 소리에 예민하게 귀 기울이게 하소서! 그리고 제 입을 열어 주시어 주님을 찬미하고 주님께서 저에게 행하시는 선한 모든 것을 찬양하게 하소서! 주님의 성령을 통하여 제가 하는 말들이 사람들을 일으키고 치유하고 위로하며 화해하고 자유롭게 하는 관계를 맺는 사랑의 말씀이 되게 하소서! 아멘!

고대 그리스의 회의론자들이 쓰던 용어 중에 에포케(epoche)라는 말이 있다. ‘판단 중지’ 라는 뜻입니다. 언제나 일관되게 옳고 그른 것도,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으므로 매사에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신중하게 판단을 보류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 회의론자를 보통 인생무상의 태도나 허무주의를 내세우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어떤 진리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회의론자들의 ‘에포케’ 라는 단어가 참으로 마음에 듭니다. 사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요즘에는 너무나도 많은 성급한 판단이 난무하는 것 같다. 물론 빠른 진행을 위해서 빠른 판단이 요구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정확하지 않은 섣부른 판단으로 많은 아픔과 상처를 남에게 남긴다는 점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판단을 멈출 수 있는 ‘에포케’ 의 상태가 분명히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실 여부를 다시금 살펴보며, 이것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한 번 더 생각해야 합니다.

 복음에도 나오듯이, 그는 불신의 상징처럼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토마스 사도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단 한 번의 판단이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강직하고 타협을 모르는 그의 성격, 옳은 것은 옳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줄 아는 성향이었기에 의심하고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그였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향해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 이 고백은 지금까지도 예수를 설명하는 그리스도교에서는 가장 완벽한 신앙고백 중 하나로 봅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 한 문장만 가지고 밤새도록 기도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의 의심하고 비판적인 시각이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나 잠시 멈출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바로 그 순간이 주님을 만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나면서 그는 올바른 판단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으며, 용기 있게 멀리 인도까지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다가 순교의 월계관을 얻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의심하고 비판적인 시각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판단하고 결론을 내는 모습은 주님을 알아뵙지 못하고 또 함께 할 수 없기에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얼마 전에 읽었던 책을 통해, 한 화가의 귀농 생활을 볼 수 있었다. 이 화가가 난생처음 시골에 내려가 살면서 채소를 키우고 나무를 심고, 장작을 패서 화목난로를 사용하는 모습 등등…. 무척 낭만적이고 멋있는 그리고 행복한 삶을 비춰줍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주업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으니 얼마나 만족도가 높겠냐는 생각도 할 것 같다. 그런데 예전에 이런 생활을 한번 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이 화가의 말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화단을 꾸미고, 나무 심고 채소도 키워 먹으면서 책 읽고 글 쓰려는 마음은 딱 1주일 만에 사라졌다. 할 일이 왜 이렇게 많은지……. 집을 꾸미자니 글을 쓸 수가 없고, 글을 쓰자니 집이 엉망이 됩니다. 결론은 “나하고 시골 생활은 안 맞아.” 였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누구에게는 가장 행복한 곳이 또 다른 누구에게는 가장 괴로운 곳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남과의 비교보다 나의 행복을 찾는 데 집중할 필요가 있다. 남의 판단보다는 지금 이 순간 내 판단이 더 중요합니다.

  “지금 이 순간 너는 나를 보고서 믿는구나! 그래도 너는 장하다.”라는 칭찬으로 들립니다. 그래서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그냥 보고도 믿고, 그리고 보지 않고도 예수님을 믿는 행복한 우리들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최고의 관계는 서로에 대한 사랑이 서로에 대한 필요를 능가하는 관계이다.'' - 달라이 라마 -


♡2153회 삶의 의미를 잃는 것이 곧 죽음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7월 10일(로마서 1장~)

  무라카미 하루키는 ''인간관계는 상대방의 마음에 공감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살아갈 힘이 내 안에 있다.》오늘 그리고 내일을 살아가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삶은 계속되고 나는 살아간다. 나를 눈뜨게 하고 일어서게 하고 달리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오늘 날 많은 이들이 자신의 샘물이 흐려졌다고 믿는다. 이제 더 이상 샘물이 우리에게 힘을 주지 못한다고 느낀다. 이 샘물은 본래 깨끗했지만, 좋지 않은 의도로 인해 더렵혀졌거나, 외부에 의해 오염되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스스로 내면의 샘물을 길어 올리면서 생활의 활력과 힘을 얻어야 한다. 우리가 끝없이 물을 길어 마시는 샘물은 우리 삶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한다. 신성한 정신의 샘물을 길어서 마시는 사람은 경쾌함, 결실 그리고 생동감을 보여준다. 그처럼 순수한 샘물을 내면에서 발견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안의 흐린 물을 보고 그 흐린 물을 통과 해야만, 영혼의 바닥에 있는 맑은 물을 볼 수가 있다. 내 삶에 부여하는 가치와 구체적인 상황과 순간순간이 갖는 의미는 내가 힘을 얻는 샘물이자 원천이 된다. 이것이 바로 내 삶을 풍요롭게 하고 원기를 북돋아주는 샘물인 것이다. 만일 내가 삶에서 어떤 의미도 느끼지 못한다면, 이 샘물은 보이지 않게 되며 결국 말라 버리고 말 것이다. 목적 없이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살면서 위로를 느끼는 것은 우리가 내적인 힘으로 사는 것이다. 내면에서 투명한 샘물을 길어 마시는 사람은 훨씬 오랫동안 일을 잘할 수 있다.

그것은 새로운 기쁨과 신선한 에너지로 충만하기 때문이다. 샘물은 신체와 영혼 모두에게 원기를 북돋아 준다. 그리하여 이 샘물은 우리가 하는 일을 성공으로 이끌어 준다. 반드시 뭔가를 해내야하고 남들에게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을 갖지 마라! 중요한 것은 내면의 샘물과 만나는 것이다. -안젤름 그륀 신부-

자살이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나 무기력증에 빠진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은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입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겠다는 것. 어떤 분들은 삶에는 의미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삶의 의미가 무엇일까?” 라는 질문에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삶에는 본래 의미가 없고, 그냥 태어났으니까 ‘나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것’ 이라 말합니다. 어떤 분들은 지금 이 순간 남에게 피해 안 주고 살면 그만이라고 합니다

. 그러나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를 보면 삶의 의미가 생존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고 말합니다. 니체는 삶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과연 삶에는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있다면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것을 찾았다면 지금 이 순간 삶이 어떻게 변화될까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6)이란 영화에는 죽고 싶었던 두 남녀가 살아있어야 하는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잘 그려져 있다. 강동원 씨가 연기한 사람은 사형수입니다. 강동원은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맞아서 눈이 먼 동생과 고아원에서 살았다. 엄마를 찾아가도 아빠에게 맞으니 그냥 고아원에서 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고 동생은 길거리에서 얼어 죽게 됩니다. 그러다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는데 자궁외임신이라 돈이 급히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는 형과 도둑질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강동원은 애인이 자신을 배신했음을 알고, 더는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아 살인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삶의 의미를 잃는 것이 곧 죽음입니다. 이나영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14살 때 사촌 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자신은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그 오빠는 결혼해서 잘만 살아갑니다. 이 이야기를 엄마에게 털어놓았더니 엄마는 딸의 탓을 합니다. 사촌 오빠가 밉고 엄마도 미워 3번이나 자살 시도를 한 사람입니다. 수녀님인 이모의 소개로 사형수 강동원과의 만남을 이어가며 서로의 깊은 이야기까지 털어놓습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죽고 싶었는데 이제 살고 싶어집니다.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분명 두 사람은 삶의 의미를 찾은 것. 그 삶의 의미를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 입니다. 사랑하는 누군가가 생기면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사랑하는 사람이 없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면 살아야 할 의미를 잃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닮았다. 신은 존재 자체이시기 때문에 언제부터 존재했느냐고 묻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신의 존재 이유는 신의 존재와 함께합니다. 지금 이 순간 존재 이유가 없으면 존재의 의욕을 잃고 그러면 진짜 죽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아버지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아버지께서 맡기신 소명을 완수하는 것이 아니라면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으셨을 것. 생존과 사는 것은 다릅니다. 지금 이 순간 이유를 모르고 살면 생존이고, 지금 이 순간 이유를 알고 살면 비로소 사는 것. 하느님도 서로를 위한 존재이시기 때문에 하느님 자체가 ‘사랑’ 이십니다. 그 사랑이 존재 이유고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은 영원한 존재입니다. 아주 가끔은 아이들이 불쌍해서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겠다는 분을 만납니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어주는 것. 아이들이 죽고 싶다고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부모님을 사랑해서 부모님을 위해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유일한 목적은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 그래서 살아야 합니다. 자녀들이 사랑할 줄을 알아 사랑하는 사람을 많게 만들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아이들이 컸는데도 부모가 아이들이 자신들을 위해 살아주기를 바란다면 아이들은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부모가 계시지 않으면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할까요? 그래서 인간에 대한 사랑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주는 데 한계가 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이웃도 저절로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려주러 오셨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알려주러 오신 것.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하게 만들기 위해 오신 것. 아이가 부모를 위해 살면 자살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을 위해 살면 지치는 일이 없다.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면 자신을 덜 사랑하는 것이라고 믿는 가족들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라고 하시는 것.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느님을 위해 살게 됩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사랑하여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살게 됩니다. 삶의 의미는 있다. 사랑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에 영원한 존재이듯, 이 삶의 의미를 찾을 때 영원히 살게 됩니다. 우리 존재 이유는 하느님이 그러하신 것과 같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고 하십니다. 이제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내 몸과 마음의 치유가 일어나는 천국 같은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다움이다.'' - 앙드레 말로 -


♡2154회 . “고난이라는 포장을 열 수 있는 열쇠는 바로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감사하는 - 마음으로 아름답게 살아가면 고난이라는 포장을 열고 행복이라는 선물을 받으실 거예요.”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7월 11일(코린토1서 1장~)

  폴 베갈라는 ''당신의 적이 스스로 자신을 망칠 때는 절대 방해하지 말라.''

 《미소로 사람들을 대하라!》서로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미소를 통해 상당히 가까워질 수 있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는 금세 친밀함을 느끼게 해주고 조화를 만들어낸다. 명랑한 웃음은 넓은 마음에서 나온다. 그야말로 마음이 온화함으로 가득차있어야 하는 것. 이런 온화한 마음이 있어야 주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안겨 줄 수 있는 것. 명랑하다는 것은 내면이 맑은 상태이다. 맑은 마음은 함께하는 사람들의 기분도 환하게 만들어준다. 사람이 함께 어울려 살기 위해서는 용서를 해야 한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항상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 마련이다. 용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분위기를 정화시켜주며, 상처받고 또 상처 입히면서도 다시금 관계를 회복하고 이어갈 수 있도록 해준다. 다른 사람을 엄격하게 다루는 사람은, 자신에게도 상처를 입힌다.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고함을 지르면 당신 자신에게 고함을 지르며 상처를 주는 것과 같다. 당신이 다른 사람을 자비롭게 대한다면 자신에게도 그렇게 대하는 것.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용서의 천사가 필요하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대할 때 연민의 정을 가져라! 다른 사람이 자비로운 마음으로 당신을 대하면 그의 호의를 기분 좋게 경험할 수 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서로 자비를 주고받게 된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 하라! 다른 사람들이 성취한 것을 인정하라! 사람은 누구나 진심으로 인정받기를 원한다.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 -안젤름 그륀 신부 지음-

어느 마을에 같은 물건을 파는 두 상인이 있었다. 서로 경쟁을 하다 보니 서로를 미워하게 되었다. 하느님께서 둘을 화해시키시기 위해 천사를 보냈다. 천사가 먼저 한 사람에게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청하는 것의 두 배를 그의 경쟁자에게 해 주겠다고 말하였다. 상인은 깊이 생각하다가 그 천사에게 자신의 한쪽 눈을 멀게 해 달라고 청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은 양쪽을 다 잃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행복의 길을 알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지 모를 수도 있다. 그리고 나타나는 현상만 보더라도 특별히 우리나라는 행복의 방법을 모르는 것 같다. 우리나라와 미국이나 유럽의 나이별 행복도는 상반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나이에 따라 반대의 그래프를 그립니다. 외국은 어렸을 때 행복하고 중장년이 되면 힘들었다가 노년이 되면 다시 행복해지는 ‘∪’자 형태를 그립니다. 나이가 들수록 어린이 때의 행복을 되찾는 경향을 보이는 것.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와 반대로 ‘∩’자의 형태입니다. 어렸을 때 행복하지 못했다가 중장년 때 행복하고 노년이 될수록 행복하지 못한 것.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덜 행복해질까요? 그것은 어렸을 때 제대로 행복한 기억이 없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마치 보물 지도를 보고 보물섬을 찾아 나서는 것과 같다. 보물섬은 보물 지도 없이 도달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그 보물 지도는 대부분 어렸을 때 주어집니다. ‘어린이 때 어떻게 행복할 수 있었나?’ 를 생각하며 어렸을 때처럼 순결해지고 겸손해지려고 노력합니다. 그렇게 외국에서는 어린이와 같은 심성을 되찾으며 그때의 행복으로 돌아갑니다. 행복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이는 보물 지도를 갖지 못한 채 보물을 찾는 사람과 같다. 가져야 더 가질 수 있다. 보물 지도가 그런 힘을 가졌듯이, 이미 체험한 행복이 그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고난을 이겨낼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착한 사람이 죽은 후에 하늘나라에 갔더니 천사가 뭔가를 열심히 포장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궁금해서 “천사님!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포장하고 계십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천사가 “행복을 포장하고 있답니다. 사람들에게 전해 줄 행복이요!” 라고 대답합니다. “아니 그런데 포장을 왜 그렇게 단단하고 튼튼하게 하세요?” 천사는 “네, 사람들에게 전해주려면 멀기도 하고 시간이 오래 걸려서 튼튼하게 포장하고 있답니다.” 라고 대답했다. “아! 그러셨군요. 그런데 그 포장지는 무엇으로 만들어졌나요?” “네! 행복을 감싸고 있는 포장지는 고난이랍니다. 이것을 벗기지 않으면 행복이란 선물은 받을 수가 없답니다.” 그리고선 천사는 바쁜 듯이 어디론가 가려 했다. 그 사람은 천사에게 다시 물었다. “천사님! 그러면 그 고난이라는 단단하고 튼튼한 포장은 열 수가 없나요?” 천사가 대답했다. “고난이라는 포장을 열 수 있는 열쇠는 바로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름답게 살아가면 고난이라는 포장을 열고 행복이라는 선물을 받으실 거예요.” 그 말을 남긴 채 천사는 사라져 버렸다. 어린이들은 무조건 행복해야 합니다. 나중에 그 행복을 지도로 사용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는 무조건 부모와 형제,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행복한 기억을 갖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행복까지 이르기 위한 고난을 참아낼 수 있다. 그렇지만 어렸을 때 그런 기억이 없더라도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늦게나마 행복을 체험했다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하느님을 체험한 그 한 번의 체험이 삶의 지도가 되어줍니다. 딸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뒤처지는 것 같아 걱정이 많다던 한 엄마가 딸 아이의 일기를 보고 눈물이 나서 아이가 쓴 글을 보내준 적이 있다. 그 글을 보며 아이가 비록 공부는 안 하고 노는 것을 좋아할망정 인생을 행복하게 살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아이는 보물 지도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의 일기는 이렇습니다. “맑은 하늘 맑은 웃음. 제목: 하느님. 하느님은 우리를 지켜주고 세상을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늘에게. 좋은 공기를 줘서 감사합니다. 바람에게. 바람아 시원하게 해 줘서 고마워. 나무에게. 나무야 그늘이 되어 줘서 고마워. 구름. 하얀 구름 뭉게 구름에게. 구름아 비를 내려줘서 고마워.” 글자도 틀리고 어법도 틀리는 것을 조금 바로잡았다. 그렇더라도 엄마가 눈물 흘릴 만합니다. 자녀를 잘 교육하지 못한다는 자책감도 있었을 텐데, 자녀가 이런 행복을 느끼고 산다는 것에 큰 위로가 되었을 것. 예수님께서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라고 하셨다. 참 행복으로 이르는 보물 지도를 가져야 합니다. 이는 행복 체험입니다. 그 행복 체험은 또한 이웃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때 느끼는 그 행복의 체험을 가진 사람은 이미 가진 사람이고 앞으로 넉넉하게 더 가지는 일만 남았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 꼭 가져야 하는 행복 지도는 어린이와 같은 행복 체험입니다.

  혼자서는 결코 살아갈 수 없는 험난한 인생길에, 우리 주 예수님께서 오늘도 우리 곁에 계시는데...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기도로써 은혜 받고, 감사로써 즐겁고 만사형통하는 인생”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오늘날 성공적인 리더십의 핵심은 권위가 아니라 영향력입니다.'' - 켄 블랜차드 -


♡2155회 지금 이 순간 진짜의 삶을 사는 것일까요? 가짜의 삶을 살면서 진짜처럼 꾸미고 - 사는 것은 아닐까요?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7월 12일(코린토2서 1장

  하운드는 ''나는 죽음을 겁내지 않는다. 다만 의무를 다하지 않고 사는 것을 겁낸다.''
《포도나무의 비유와 우정의 관계》포도나무 비유는 순수한 신비다. 이 비유는 우리 영혼이 어떻게 변화하고, 하느님과의 하나 됨을 통해 어떻게 풍성한 열매를 맺는지를 보여준다. 우리 길의 목적은 하느님과 하나 됨에서 누리는 기쁨을 만끽하는 것. 그대들이 내 안에 머물러 있다면 그대는 열매를 맺을 것이며, 삶은 의미 있고 풍성해 질 것. 제자들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예수 안에 머물러 있는 일이다. 머물러 있음은 열매를 맺는 조건이다.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경우에만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예수께서 머물러 있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보면 우리가 예수의 정신과 사랑에 온통 사로잡혀 있는 상태를 뜻한다.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 안에 머물러 있는 일이다. 참된 열매는 외형적으로 위대한 일들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베푸는 사랑으로 맺어진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사랑에서 비롯되는 경우에만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직장에서 하는 여러 가지 활동은 사랑에 의한 것일 때에만 의미를 지닌다. 사랑의 절정은 예수께서 당신의 벗인 우리 인간을 위해 목숨을 바치시는 데서 이루어진다. “벗을 위해 목숨을 내 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을 지닌 사랑은 없습니다.” (요한15,13) 예수께서는 당신 제자를 벗이라 부르신다. 제자들은 예수께로부터 조건 없이 사랑받는 친구들이다. 우리는 예수의 친구들이다. 우정 어린 사랑은 순수한 선물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친구가 된다면 사랑은 그 자체로 우리 안에 넘치게 된다. 벗이라는 상징을 통해 예수께서는 우리가 어떤 품위를 지니고 있는지를 밝히신다. 그분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계시하셨다. 그분의 죽음에서 오히려 예수께서 벗으로서 우리에게 더 가까이 계시다. 예수의 죽음에서 우리와 그분의 우정을 더 보증 받는다. 그분의 죽음에서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칠 정도로 우리가 그분께 중요한 존재라는 것이다. -안젤름 그륀 신부 지음- 

언젠가 책에서 화폐의 진짜 가짜를 구별하는 ‘위폐 감별사’ 의 인터뷰 내용을 볼 수 있었다. 기자는 감별을 잘하는 방법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고, 감별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답변했다. “진짜를 잘 알아야 해요.” 진짜와 완전히 똑같은 가짜도 있지 않으냐고 다시 기자가 묻자, “위폐는 진짜로 보이기 위해 꾸미다 보니 부자연스러워요. 하지만 진짜 지폐는 자연스럽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큰 공감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삶을 떠올려 봅니다. 지금 이 순간 진짜의 삶을 사는 것일까요? 가짜의 삶을 살면서 진짜처럼 꾸미고 사는 것은 아닐까요? 진짜의 삶을 살려면, 나를 만드시고 이 땅에 보내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사랑 자체이며 완벽한 선이신 주님을 잘 알고, 그 뜻을 따라야 진짜 삶을 살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을 알기보다는 다른 것을 더 알려고 노력합니다. 화려하지만 부자연스럽게 보이는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만 알려고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 결과 주님을 잘 모르게 되고, 주님의 뜻 역시 제대로 따를 수 없게 됩니다. 단식한다고 거창한 말로 떠들어 대거나 창백한 얼굴로 뽐내며 지나치게 소문내고, 거룩한 분의 눈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들기 위해 단식한다면, 그것은 장차 올 나라의 기쁨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결국,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올바른 덕행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 인간에게 보이기 위한 삶이 아닌 주님께 보이는 삶이야말로 진짜 삶이 됩니다. 새롭게 다가오신 주님과 그분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라고 명령하십니다. 헌 옷과 헌 가죽 부대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상징하고, 새 천 조각과 새 포도주는 복음을 상징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 체제 전부를 부정하지 않고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옛 율법이라는 천은 유대인의 열성으로 낡아 버렸고, 여러 사상 학파에 의해 찢어졌으며, 불순한 행위들 때문에 해졌습니다. 복음이라는 천은 찢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 짜이기 시작했다. 새 천 조각과 새 포도주로 상징하는 주님의 말씀인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을 더 알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하겠다. 진짜를 알아야 가짜를 구별할 수 있는 것처럼, 진짜이신 주님을 알아야 가짜인 세상의 헛된 것을 구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초등학교에도 들어가지 않은 6살짜리 아이가 엄마에게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놀겠다고 말합니다. 이 엄마는 허락해줄까요? 허락해주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 ‘안전’ 때문이라고 말할 것. 아이 때에는 감시받지 않는 자유 놀이를 즐기고 싶어 합니다. 아이들이 다락방을 좋아하는 것. 우리 몸 자체가 이렇게 원하고 있으며, 실제 이 자유 놀이를 통해서만 뇌 속의 뉴런 발달과 관계된 복잡한 회로 연결이 온전히 마무리된다고 합니다. ‘안전’ 이라는 이유로 자유 놀이를 하지 못하면 뉴런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신체적 능력 및 사회성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 역시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는 동네에서 실컷 놀았던 기억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지금 부모 없이 놀고 있다면 부모가 방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자유 놀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그냥 가둬두고 키워서는 절대로 안 되는데 말이지요.

  자비는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비를 마음으로 느껴보십시오. 그러면 자비를 베풀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들에게 하느님의 자비가 충만하여 몸과 마음의 치유가 일어나는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할 수 있는 한 훌륭한 인생을 만들라. 인생은 짧고 곧 지나간다.''  - 오울디즈 -


♡2156회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많다고 합니다. 그 은총이 죄를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 . 은총은 죄에서 벗어나라고 주시는 선물입니다.♡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7월 13일(테살1서 1장~ )

  대길상경은 ''어리석은 자와 가까이 말고, 슬기로운 이와 친하게 지내라. 그리하여 존경할 만한 사람을 섬겨라. 이것이 인간에게 최상의 행복이다.''
 《풍연심》“바람은 마음을 부러워한다” 는 뜻의 내용입니다. 옛날 전설의 동물 중에 발이 하나밖에 없는 기(夔)라는 동물이 있었다. 이 기(夔)라는 동물은 발이 하나밖에 없기에 발이 100여개나 되는 지네(蚿)를 몹시도 부러워하였다. 그 지네에게도 가장 부러워하는 동물이 있었는데, 바로 발이 없는 뱀(蛇)이었다. 발이 없어도 잘 가는 뱀이 부러웠던 것. 이런 뱀도 움직이지 않고도 멀리 갈 수 있는 바람(風)을 부러워하였다. 그냥 가고 싶은 대로 어디론지 싱싱 불어 가는 바람이기에 말입니다. 바람에게도 부러워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가만히 있어도 어디든 가는 눈(目)을 부러워했다. 눈에게도 부러워하는 것이 있었는데, 보지 않고도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고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마음(心)을 부러워했다. 그 마음에게 물었다. 당신은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습니까? 마음은 의외로 “제가 가장 부러워하는 것은 전설상 동물인 외발 달린 기(夔)” 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어쩌면 서로가 서로를 부러워 하는지 모릅니다. 자기가 갖지 못한 것에 상대적으로 가진 상대를 부러워 하지만 결국 자신이 가진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란 것을 모르는채 말입니다. 세상이 힘든 것은 부러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상대방의 지위와 부와 권력을 부러워하면서 늘 자신을 자책하기에 불행하다고 생각할 것. 가난한 사람은 부자를 부러워하고, 부자는 권력을 부러워하고, 권력자는 가난하지만 건강하고 화목한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결국 지금 이 순간 자기안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사람이 진정한 깨달음을 얻는 사람일 것.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인 것.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바로 "나" 입니다. 어떠한 판단을 내릴 때, 배가 부를 때 더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배고플 때 더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까요? 배가 부르면 교만해져서 어리석은 판단을 하게 되어 있다. 어떠한 판단을 할 때 될 수 있으면 배가 고플 때까지 기다렸다가 하는 것이 좋다. 지금 세상은 이전보다 많이 배가 부른 상태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이 하는 선택들 때문에 결국 자멸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 역사적으로 이런 일은 계속 일어나고 있다. ‘모아이 석상’ 으로 유명한 남태평양의 이스터섬이 있다. 비교적 높은 수준의 문명이 존재했던 이스터섬은 1,200년을 전후해 인구가 2만 명에 이를 만큼 번창했었다. 그러나 1722년 이들을 처음 본 네덜란드인들은 이스터섬이 황량한 모래로 가득 차 있었으며 3,000명 정도의 원주민들만 비참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왜 풍요롭기만 했던 이들이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던 것일까요? 바로 높이가 20미터에 이르고 무게가 90톤이 되는 정교하게 조각된 거대 석상인 모아이를 운반하기 위해 수많은 나무를 베어 숲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나무가 사라지자 섬이 황폐해졌고 겨울엔 땔감도 구할 수 없었다. 더 문제였던 것은 나무가 없으니 물고기를 잡을 카누도 만들 수 없었던 것. 가장 풍요로울 때 거대한 석상들을 만들어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려 했고 그것이 멸망의 원인이었던 것. 모든 나라나 모든 개인은 이런 식으로 망합니다. 인간은 배부를 때 어리석은 생각을 많이 합니다. 동식물이나 자연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교만 때문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보겠다. 마오쩌둥은 1949년 정권을 잡았을 때 가장 어리석은 결정을 내립니다. 당시 중국은 보건 문제가 심각하여 콜레라, 흑사병, 말라리아 등의 전염병이 창궐했다. 그래서 ‘제사해 운동’ 을 시작합니다. 모기와 쥐, 파리와 참새를 박멸하려는 노력입니다. 모기는 말라리아를 퍼뜨리고, 쥐는 흑사병을, 파리는 성가시니까 박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참새는 한 마리당 곡식을 4.5킬로그램이나 먹어치웠다. 전쟁은 승리로 끝났다. 쥐 15억 마리, 모기 1,100만 킬로그램, 파리 1억 킬로그램, 참새 10억 마리가 소탕된 것. 그런데 참새 10억 마리가 먹어야 할 해충들이 득실거리기 시작하였고 그렇게 메뚜기 떼가 구름처럼 중국의 곡식들을 싹쓸이하였다. 1959년에서 1962년까지 중국에 대기근의 큰 원인이 이것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로 인한 사망자 수는 적게는 1,500만 명, 많게는 3,00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나 인간이 교만해지면서 자연을 마구 훼손하게 되었고 그렇게 자신도 피해를 보게 됩니다. 인간의 능력이 향상돼서 자연을 좌지우지하게 될 때가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인간이 잘살게 된 것은 많은 은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은총 바로 뒤에는 멸망이 따라옴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에 따르면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많다고 합니다. 그 은총이 죄를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은총은 죄에서 벗어나라고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선물들을 받으면서도 더 큰 죄로 빠져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 코라진, 벳사이다를 꾸중하십니다. 당신께서 많은 은총을 부어주셨음에도 그들은 더욱 악한 길로 빠져들어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소돔’ 이야기를 하십니다. 소돔도 당시 있었던 도시 중에 은총을 가장 많이 받은 동네입니다. 먹고 살 걱정이 없었고 심지어 두 천사가 다른 동네엔 안 들어가도 그 동네엔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은총 충만의 바로 뒤에는 멸망이 기다리고 있었다. 인간은 은총이 충만할수록 어리석은 짓을 많이 합니다. 교만해지기 때문입니다. 배고플 때 나쁜 짓 하는 것보다 배부를 때 더 많이 하고 더 크게 합니다. 그러면서도 은총을 청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은총을 주시면서도 그 결말이 안 좋을 것을 아시고 지금도 경고하고 계십니다. 인간은 더 잘살게 될수록 더 악해질 것. 이렇게 은총이 많은 시대에 멸망이 아닌 회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돔 꼴을 당합니다. 은총을 부여잡고 롯처럼 이 어리석음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카파르나움, 코라진, 벳사이다도 풍족한 동네였지만 지금은 돌무더기만 남아있다. 은총이 많을 때가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우리는 은총이 충만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언제나 ‘은총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도 지금 이 순간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지 않도록 배부를 때를 항상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어제 죽은 한 영혼이 저희에게 남긴 메시지가 있다. “살아 보니 자비를 베풀고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동안 후회 없이 자비를 베풀며 사랑하십시오. 우리는 사랑의 빚 진자들입니다.” 이제부터라도 감사하며 자비를 베풀며 살아가는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중요한 건 당신이 어떻게 시작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끝내는가이다.'' - 앤드류 매튜스 -

♡2157회 사랑을 연구하지 마십시오! 임을 만난 사람은 사랑에 대하여 설명하지 않는 법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7월 14일(테살1서 1장~ )

  소크라테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수치가 아니라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는 것이 수치다.''

《매 순간이 당신의 것이다.》언젠가 대단한 일을 해 보아야지! 큰 소리 치면서도 순간순간을 헛되게 놓치고 마는 것은 왜일까? 많은 이들이 이미 주어진 삶을 붙들 생각은 하지 않고, 정말 잘 살 수 있을 ‘언젠가’를 위해 스스로를 다그치기만 한다. 그들에게는 오늘이 그날을 위한 준비 기간일 뿐이다. 삶이란 매 순간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간을 소중하게 여기며 사는 사람은 현재도 이미 잘 살고있는 사람이다. 살아가는 매순간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자기 자신을 분노에 내 맡기면! 행복을 자기 손으로 파괴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중에 즐기면 된다고 생각하고, 무작정 미루는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자신에게 기회가 어느 정도 남아 있는지, 누가 알겠는가? 그런 기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항상 더디게 찾아온다. 게다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있다. 서두름은 기쁨의 적이다. 기쁨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순간을 충실하게 사는 법을 배워야한다. 만일 당신이 지금을 산다면 이 순간은 당신이 기대하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풀어준다. 현재 즐거운지 그렇지 않은지를 굳이 따지거나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당신이 지금 여기에서 숨쉬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니까! 사람은 자신이 얼마 동안 살지 알 수 없으며 어떤 삶이 허락되어 있는지 신의 뜻을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안젤름 그륀 신부 지음-

"가시덤불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억눌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웃사람이 땅바닥에서 뭔가를 찾고 있는 것을 보고 무엇을 찾고 있는지 물었다. 열쇠를 찾는다는 말에 함께 쭈그리고 앉아 찾아보았다. 도무지 찾을 수 없어 열쇠를 어디서 잃어버렸는지를 물으니 집에서 잃어버렸다고 대답합니다. 어이가 없어 왜 여기서 찾고 있느냐고 물으니 더 밝아서 그랬답니다.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많은 재화를 소유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싶다. 물론 최소한의 것도 못 가졌다면 행복해지기가 쉽지 않겠지만, 최소한의 것을 소유하고 있다면 행복은 그것으로부터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행복이란 외적인 상황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만족에서 비로소 얻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복을 위해서 많은 재화를 얻는 데에 온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은 마치 바깥이 더 밝으니 집에서 잃어버린 열쇠를 그곳에서 찾겠다는 생각과 다름없다. 우리는 자식들을 위하거나 노후대책을 장만한다는 등의 이유로, 심지어는 가난한 사람을 효과적으로 돕겠다는 이유로 쉽게 재물의 유혹에 빠져들게 됩니다. 이 역시 엉뚱한 곳에서 열쇠를 찾는 경우에 해당합니다. 내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은 부족한 것처럼 여겨지더라도 믿음에 부합하는 사랑을 실질적으로 행하면서 살아가는 것. 나는 행복을 어디서 찾고 있습니까? 어릴 적의 친구 이야기입니다. 그 친구는 괴물은 아니지만 두 개의 머리를 지니고 있다. “200 더하기 500”이 얼마인지는 잘 몰라도 “200원 더하기 500원” 하면 금방 “700원!”이라고 알아 맞추는 친구입니다. 숫자 뒤에 단지 “원” 이라고 하는 말 한 마디가 더 붙어있을 뿐인데, “원” 이라고 하는 그 말이 친구의 머리를 갑자기 영리하게 해 주는 것 같았다. 산수 문제를 푸는 머리만이 아니라 인생 문제를 푸는 데 있어서도 사람들은 두 개의 머리를 지니고 사는 것 같다. 사업을 운영해 나가는 데는 우등생 머리를 지닌 아버지가 가정을 돌보는 데는 형편없는 낙제생 아버지가 될 수도 있다. 자녀의 아이큐를 높이는 데는 관심과 능력이 탁월한 머리를 지닌 어머니가 자녀의 영성을 높이는 데는 너무 무관심하고 어리석은 머리를 지닐 수가 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잘 깨닫는 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신학의 대상으로 여기며 말씀을 구조적으로 분석하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이 설령 성서학 박사 학위를 얻는다 할지라도 말씀 안에 살아 계시는 주님을 만나는 데에도 박사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 말씀은 신학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고백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 말씀을 깨닫게 해주는 열쇠는 오직 사랑뿐입니다. 어릴 적 친구가 단지 “원” 이라는 말 한마디를 덧붙이기만 하면 풀기 어려운 산수 문제도 쉽게 풀 수 있었던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도 “사랑” 의 마음 하나 깊이 품고 묵상하노라면 마침내 그 비밀의 문이 서서히 열리고 말씀 안에 살아 계시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 “사랑하면 알리라!” 는 가르침이 바로 그러한 뜻입니다. 어떤 대학에 “사랑학 개론” 을 가르치는 교수가 있었다. 사랑이 무엇인지 그 교수만큼 학문적으로 깊이 있게 연구한 사람도 없었다. 그의 말을 들으면 그 누구나 “아하~, 사랑이 그런 것이구나!” 하고 무릎을 탁 치며 감탄할 정도로 사랑에 대하여 도통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교수가 가르치는 사랑학 개론을 결코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딱 한 사람 있었다. 바로 그 교수의 부인이었다. 그 부인이 자기 남편에게 충고하는 말이 오히려 사랑이 무엇인지 잘 가르쳐주는 것 같다. 그 부인은 늘 교수 남편에게 이렇게 충고하였습니다. “사랑을 연구하지 마십시오!” 사랑을 학문적으로 아무리 연구해본들 곁에 있는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연구는 어리석은 지식에 지나지 않는 것. 어떤 책에서 읽은 글입니다.

 “임을 만난 사람은 사랑에 대하여 설명하지 않는 법이다. 말한다 하더라도 더듬거릴 뿐이다. 그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떨리고 가슴이 달아오른다. 그런 의미에서 신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의 궁색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정작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은 말이 없는데, 학자들은 장광설을 늘어놓는다.”(한상봉,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 여러분, 말씀을 듣고 깨닫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성서 옆에 주해서를 두거나, 성서를 분석하려 들지 마십시오. 먼저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 하나 가슴 깊이 품고 하느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성서는 학문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 고백서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바로 그 사랑으로 말씀을 깊이 품을 때 비로소 말씀이 우리 안에서 탐스러운 열매를 맺게 될 것. 말씀의 열매는 무릎을 탁 치는 지적인 만족이 아니라 자신의 가슴을 치며 뉘우치는 영적인 회개입니다. 말씀의 열매는 고개만 끄떡이는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말씀을 실천하는 봉헌의 삶입니다. 사랑을 연구하지 마십시오! 임을 만난 사람은 사랑에 대하여 설명하지 않는 법입니다. 다만 주님 말씀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그 말씀이 내 안에서 많은 열매를 맺을 것.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잘 깨닫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 사람은 백 배 혹은 육십 배 혹은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다.”(마태 13,23) 

  주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언제나 지금처럼 기적이 있음을 믿고, 우리의 모든 삶이 주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이 되는 은혜가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무거운 돈지갑을 무겁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이스라엘 속담 -


♡2158회 졸업생들에게 인생의 선배로서 축하를 하면서 또한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조언 - 을 하였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7월 15일(야고보서 1장~ )

  호이토 맨은 ''추위에 떤 자일수록 태양의 따뜻함을 느낀다. 인생의 고뇌를 맛본 자일수록 생명의 존귀함을 느낀다.''

 《잠시 쉬어 가라! 행복이란 소유하지 않는 것이다》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졌다 해도 삶의 환희는 돈으로 살 수 없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은 하나뿐, 神의 선물을 향유하는 것이다. 맛있게 먹고 마시고 지금 가진 기쁨을 만끽하라! 삶은 충분히 힘드니까! 현실을 직시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평정을 찾을 수 없다. 자유로운 시간에도 온갖 활동으로 분주한 사람은 많은 것을 경험하겠지만 이것은 결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면이 평온을 찾는 일이다. 흥분을 가라앉힐수록 평온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마음이 평온해지면 어떤 상황에서든 침착하게 행동하게 된다. 모든 행동이 내적인 평온함에서 흘러나오는 까닭에 神의 창조적인 휴식을 함께 누릴 수 있다. 자신을 풀어주라! 당신의 본질대로 살아도 된다. 충분히 쉬도록 하라! 그렇게 하면 계획했던 길을 힘차게 나아갈 수 있다. 자신의 영혼 안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소유와 성공을 통해 헛되이 행복을 뒤쫓으려 한다. 이런 사람은 결코 충분히 소유하지도 못하고 원하는 만큼 존경을 받지도 못하며 만족감을 느낄 정도로 성공하지도 못한다. 행복은 우리의 영혼,그 가장 깊은 곳에 살고 있으므로, 지금 이순간 숨 가쁘게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면 잠시 멈추어 서서 자문해보라! 나는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은 어디인가? 내가 진정으로 그리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안젤름 그륀 신부 지음- 

오프라 윈프리, 스티브 잡스, 조엔 롤링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우연히 이 세 사람이 대학 졸업식에서 축사하는 걸 들었다. 오프라 윈프리는 방송 진행자로 우뚝 선 사람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컴퓨터로 우뚝 선 사람입니다. 조엔 롤링은 ‘헤리포터’ 라는 소설로 우뚝 선 사람입니다. 모두가 엄청난 명성과 부를 얻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가 꽃길을 걷지 않았다. 사생아였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입양아였고, 대학을 중도에 그만두기도 했다. 성격차이로 이혼하였고, 아이를 혼자서 키워야 했다. 이들은 대학 졸업식에서 축사를 한 것은 그들의 성공도 있었겠지만 그들이 실패와 고난을 극복했기 때문입니다. 졸업생들에게 인생의 선배로서 축하를 하면서 또한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조언을 하였다. 미국의 졸업식은 한국의 졸업식과 다른 점이 있었다. 한국의 졸업식이 엄숙한 반면, 미국의 졸업식은 축제와 같았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육에 따라 살도록 육에 빚을 진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당시 로마는 세계 최강의 나라였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다. 로마는 강력한 군대로 제국을 건설했다. 로마의 문화와 로마의 제도는 로마가 지배하는 모든 지역의 기준이 되었다. 예수님께서 사셨던 이스라엘도 로마의 총독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 로마인에게 바오로 사도는 새로운 삶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육체의 욕망에 따라서 살기보다는 성령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런 새로운 기준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로마의 새로운 기준이 되었고, 성령의 뜻에 따라 사는 신앙이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 로마라는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로마가 받아들인 성령의 뜻, 교회는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절망 중에 있는 사람에게는 희망을 주고 있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빛이 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계명을 기준으로 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셨다. 율법과 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이정표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율법과 계명은 지키는 사람과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나누는 기준이 되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단죄하는 근거가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율법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율법은 사람을 위해서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율법은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셨다. 율법의 이름으로 부정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부정한 여인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하셨다. 율법의 이름으로 돌아온 탕자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온 탕자를 위해서 잔치를 베푸는 것이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시하신 새로운 기준은 ‘온유함과 겸손’ 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언제 어느 때나 하느님 말씀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힘든 역경에는 눈물이 흐른다 해도 주님의 따뜻한 손길이 우리의 상처로 흘러내린 눈물을 사랑으로 닦아주실 것입니다. 세상에는 아무리 눈 씻고 봐도 공짜는 없습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도 공짜는 없습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하느님의 보상과 은총으로 충만해지는 그날을 위하여 하느님께 대한 열정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것은 생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 도스토예프스키 -

♡2159회 우리는 똥파리가 아니라 꿀벌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7월 16일(요한묵시록 1장~ )

 알베르 까뮈는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면 삶이란 결코 불가능하다.''

《존재하라!》언제나 똑같은 나의 일상을 좀더 행복하게 누리고 싶다면! 어디서부터 달라져야 할까? 행복하다는 것은 어떤 경험일까? 내게도 자격이 있을까? 축복받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허락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늘 멀리서 대단한 행복을 찾으려고 하고 있다. 가까이에 있는 작은 기쁨을 또는 살아가면서 누릴 수 있는 소중한 기쁨을 놓친다. 행복은 낯선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찾을 수 없고 직업이나 성공 재물에도 없다. 단지 우리 안에 있을 따름이다우리는 마음을 활짝 열어두기만 하면 된다. 삶을 살면서 강렬하게 느끼는 것, 그것이야말로 산다는 것이 주는 기쁨이다. 존재하라! 단순히 ‘거기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강렬하게 존재하는 기술을 배워라! 삶의 기술이란 이렇듯 매우 일상적인 것일 뿐이다. 행복을 경험하려면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 있는 자만이 눈을 뜨고 있는 자만이 행복을 알 수 있다. 올바르게 본다는 것은 사물의 가려진 면을 보거나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기쁨을 발견하는 기술이다. 행복해지는 기술은 얼마든지 배울 수 있고 연습할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스스로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자신을 소중히 여기도록 하라! 당신이 신뢰하는 사물에도 관심을 가져라! 일상의 평범한 것들에 관여하라! 그 곳에 당신이 찾는 모든 것이 있다. 존재하라! 순수한 본질에 다가가라! -안젤름 그륀 신부 지음- 

가끔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떤 분들은 “나도 그 사람 알아요!” 라고 합니다. 그런데 또 많은 경우에 그 사람의 좋은 점보다는 자신이 아는 단점을 쏟아냅니다. 그 사람의 단점만 말하며 그 사람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것도 아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완전히 모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꽃밭에 어떤 짐승의 똥이 있다. 그러나 꽃들이 너무 아름다워 그 똥은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여기를 지나가던 한 똥파리가 좋은 똥을 발견하고는 동료들에게 가서 말합니다. “나 그 꽃밭 잘 알아. 좋은 똥을 발견했어!” 꽃밭에 있는 작은 똥 무더기가 그 꽃밭을 대표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 안에 있는 단점들을 몇 가지 안다고 해서 그 사람 전체를 안다고 할 수 없다. 이번엔 꿀벌이 날아가다가 그 꽃밭을 봅니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가서 말합니다. “나 그 꽃밭 잘 알아. 좋은 꿀을 발견했어!” 물론 그 꽃밭 안에 있는 작은 똥 무더기는 알지 못합니다.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곳의 본질이 ‘꽃밭’ 이기에 똥파리보다는 꿀벌이 그 꽃밭을 잘 안다고 볼 수 있다. 연꽃은 더러운 습지에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우리는 그 습지를 보지 않고 그 꽃의 아름다움에 빠집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가서 연꽃을 보았다고 말하지 시궁창을 보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둠을 보는 존재가 아니라 빛을 발견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보시지 않고 우리 선한 면을 보시며 키워주십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똥파리가 아니라 꿀벌입니다. 그러나 죄가 지금 이 순간 우리를 똥파리로 만듭니다. 아담은 하느님을 보면서도 하와를 왜 만들어줘서 죄를 짓게 만드느냐고 한탄합니다. 완전한 선이시고 아름다움이시고 진리 자체이신 분에게서 더러운 것을 찾아내는 것. 그리고는 하느님을 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떻게 빛 가운데서 어둠을 찾아내고 하느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자신을 가장 많이 사랑하시는 부모를 잘 아는 때는 언제일까요? 아이일 때일까요, 아니면 사춘기 반항의 시절일까요? 

제니스 캐플런의 <감사하면 달라지는 것들>에 이런 예가 나옵니다. 한 어머니는 15살 아들을 비싼 컴퓨터 교육 프로그램에 보내며 고마운 마음을 보여주는 의미에서 일주일에 몇 번 정도 전화를 걸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아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엄마, 뭘 고마워해야 하는데? 애들을 캠프에 보내는 것은 부모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 아니야?”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또 한 어머니는 딸을 학교에 차로 태워다주며 그 딸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딸이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애잖아. 운전을 못 하니까 당연히 엄마가 데려다줘야지!” 사춘기 아이들은 무엇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바로 엄마의 ‘사랑’ 을 보지 못하는 것. 사람이 너무 커져 버리면 눈이 멀어 사람 안에서 사랑을 찾아낼 수 없게 되고 그러면 안다고 믿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게 됩니다.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어 자신도 부모가 되면 그제야 겸손해져서 부모의 마음을 볼 줄 알게 됩니다. 가수 김진호 씨의 ‘가족사진’ 처럼 부모가 자신들을 위해 거름이 되어주었음을 볼 수 있게 되는 것. 그 사랑을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부모님을 제대로 알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부모가 했던 것과 같은 수준의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 안에 있는 것만 보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누군가를 제대로 알게 될 때 나오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바로 ‘감사’ 입니다. 아담이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할 때 불만이 있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온전히 아시는 분이시기에 항상 감사하십니다. 그것이 어린이의 마음입니다. 사춘기 때는 그 감사를 잊기 쉽지만, 어린이는 부모에게 감사합니다. 감사할 때 아는 것입니다. 사랑을 본 것입니다. 우리는 똥파리가 아니라 꿀벌입니다. 사랑을 보고 감사해야 그 사람을 아는 것.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아버지께서 주시는 선물로 알 수 있다. 그 선물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린이와 같은 사람은 이 사랑의 선물 안에서 사랑을 발견하고 그 주시는 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사랑을 볼 눈을 잃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보아도 잘못 보게 됩니다. 그 증거로 감사가 사라집니다. 아버지의 철부지이신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에 집중합시다. 아는 만큼 감사해합니다. 모든 사람 안에 어느 정도씩은 사랑이 있으므로 반드시 감사할 것이 있다. 그것을 발견해 감사해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을 안다고 해야겠다.

  우리들은 언제나 예수님 편에 선 가장 필요한 존재임을... 그래서 나에게 작은 일이라도 할지라도 기도하고 일을 하면서 하느님의 뜻이 축복되게 이루어지는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더한 위험이 찾아온다.'' - 에리카 종 -


♡2160회 인생의 시련을 좋아할 사람은 없지만, 시련은 성장과 발전의 기회이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7월 17일(요한묵시록 10장~ )

윤태익는 ''들이마신 숨은 언젠가는 뱉어야 한다. 돈, 명예, 권력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하느님은 옹기장이이시고 우리는 진흙이다.》우리는 완성품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작품이다.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하느님은 자신의 뜻을 밀고 나가신다. 부드럽고 잘 구부러지는 진흙이 좋은 진흙이다. 그래서 우리가 고집만 앞세우는, 딱딱하고 거친 진흙일 때 하느님은 우리를 주무르고 두드려서 좋은 진흙으로 만드신다. 인생의 시련을 좋아할 사람은 없지만, 시련은 성장과 발전의 기회이다. 우리가 그토록 격렬하게 싸우는 대상이 우리를 더 높은 단계로 인도해 줄 도약일 수 있다. 시련은 훈련시키고 우리의 강인함과 활기, 생동감을 유지시키며 우리를 성장시킨다. 그러니 포기하고 도망갈 이유가 전혀 없다. 징징대거나 불평할 필요도 없다. -믿는 대로 된다, <긍정의 힘>에서- 

인생은 과거 완료형이 아니고 현재 진행형이며 미래 완료형입니다. 하느님은 마치 진흙을 손에 쥐시고 그것이 부드러우면 손쉽게 당신의 뜻대로 좋은 작품을 빚을 수가 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고집만 앞세우고 자기 중심인 딱딱하고 거친 진흙일 때, 물을 섞어 짓밟고 두들기고 주물러서 당신의 구상에 맞는 훌륭한 작품을 빚어 만드십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주님의 손에 붙잡힌 진흙은 축복받았다는 것. 그것이 부드럽든 딱딱하든 간에 주님의 소유가 되어 당신께서 귀한 작품으로 계속 완성해 가시기에 주님의 사랑과 축복과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2코린 4,7) 우리는 질그릇에 불과합니다. 투박하고 잘 깨지는, 값싸고 흔한 그릇 말입니다. 살림살이 중에서는 귀중품처럼 가치로운 것보다는 덜 중한 것들이 담기지요. 겉보기에도 그다지 값어치가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2코린 4,7). 그런데 사람들과는 달리 하느님께서는 질그릇에 당신의 엄청난 힘을 담으십니다. 더 우아하고 유려한 고급 도자기를 고르지 않으시고 못나고 질박한 그릇에 당신 친히 기꺼이 담기시는 겁니다. 낡고 깨지고 흠도 많은 질그릇에 불과한 우리 존재를 지탱하는 힘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안에 그분이 있어 우리는 억눌리거나 절망하거나 버림받거나 멸망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지니고 살지만 죽지 않지요. 그러니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자랑할 수 없다. 그래서는 안 되지요. 우리에게 당신을 담아 주신 분께서 친히 공과 덕을 이루시고 당신 모상성이 깨어나 완성되도록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질그릇인 우리가 하는 협력이란 참 보잘것없고 미소할 뿐이지요. "섬기는 사람"(마태 20,26) "종"(마태 20,27)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스스로 섬기는 사람, 종이 되셨는데, 질그릇에 불과한 우리가 무엇이라고 형제와 이웃 위에 군림할 야망에 들뜨겠습니까!

우리 안의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탱하고 키우셨으니 우리가 자랑할 건 사실 아무것도 없다.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들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자리는 아버지께서 정하십니다. 현세에서 누리는 부와 권력, 신분의 순서와는 다른 구도가 될 수도 있다. 세상에서야 제도와 신분이 자리를 보장하지만, 예수님의 바로 곁자리, 가장 가깝고도 친밀한 자리는 그 제도와 신분마저도 뛰어넘을 수 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요? 아마도 인간인 우리는 겉을 보지만 하느님은 속을 보시니까 그럴 것 같다. 인간은 질그릇을 보니까 대수롭지 않게 뒤로 밀어낼 수 있고, 하느님은 잘 비워낸 질그릇 안에 담긴 당신을 보시니 서로를 끌어당길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요... 예수님의 곁자리는 하느님께서 정하신다는 말씀이 그날 그 어머니와 두 제자에게 희망이 되었을까요, 실망을 안겼을까요? 마찬가지로 이 말씀이 내게 희망을 줍니까, 아니면 근심이 됩니까? 지금 이 순간 끊이지 않고 다가오는 세상 고통과 시련 중에서도 늘 말씀에 머물러 주님을 담고 사는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곁자리를 차지한 이들입니다. 어쩌면 벌써 그분과 하나를 이루어 살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니 오늘도 힘내어 어둠을 떨쳐버리고 주님께 머무릅시다 보물을 담고 있는 한, 질그릇이어도 좋고 깨진 그릇이어도 괜찮답니다. 주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질그릇인 당신을 축복합니다.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 미움과 분노의 마음으로 힘들어 할 때에 한없는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십자가 앞에 나와 먼지처럼 털어버리시고 예수님의 자비와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너무 고르는 자가 가장 나쁜 것을 갖는다.'' - 영국속담 -

♡2161회 편견과 선입견이 있으면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7월 18일(창세기 1장~ )

  앙드레 모로아는 ''살아가는 기술이란 하나의 공격 목표를 골라 그곳에 힘을 집중시키는 일이다.''

 《사랑하라!》이웃이 잘되어 좋아할 때까지, 사랑의 참된 기쁨은 주는 것일까, 받는 것일까? 사랑의 목적은 무엇이며, 그 끝은 어디에 있을까? 상처받지 않는 사랑의 기술을 배울 수 있을까? 사랑은 강요할 수 없다. 당신 안에는 이미 사랑이 숨쉬고 있다. 다만, 사랑이 가는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사랑은 당신을 신에게 데려가고, 다시 사람들에게 향하는 문을 열어 준다. 당신의 삶을 살게 하고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것도, 역시 사랑이다.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새롭게 소생할 수 있다. 사랑의 온기는 경직되고 마비되어 있던 것을 자연스럽게 풀어준다. 매달리고 상대방을 답답하게 만드는 집착은 사랑을 질식하게 만든다. 사랑이 살아 숨 쉬도록 하기 위해서는 가까이에서 보살펴주면서 때로는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경계가 있어야 두 사람의 관계도 분명해지고 자유가 생겨난다. 사랑은 우리 삶에서 가장 결정적인 진실이다. 사랑의 천사는 당신의 삶이 새롭게 변하기를 원한다. 숭고한 사랑은 결코 마르지않는 샘물처럼 언제나 당신의 마음속에 흐른다. 굳이 사랑을 창조하려 애쓸 필요는 없다. 샘물은 당신 안에서 항상 넘쳐흐르고 있다. 언제든 퍼 올려 마시기만 하면 된다. 사랑은 우리 삶에서 결정적인 진실이다. 당신의 사랑을 신뢰하되 사랑의 바닥까지 내려가라! 당신은 사랑의 샘물이, 바로 신이라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안젤름 그륀 신부 지음- 

우연히 인간의 몸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인간은 약 50조개의 세포로 이루어져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50조의 생명이 함께 사는 공동체라고 합니다. 인간의 세포는 약 1.4 볼트의 전기를 가질 수 있는데 이를 합하면 700조 볼트의 전기라고 합니다. 700조 볼트의 에너지는 상상할 수 없는 힘입니다. 이 에너지를 동양에서는 기(氣)라고 합니다. 인간의 몸은 어마어마한 사회를 이루고 있다. 그 인간의 몸은 마음에 의해서 체계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50조의 생명이 나와 함께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니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합니다. 마음이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희망을 노래하면 50조개의 생명도 그렇게 움직인다고 합니다. 마음이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절망에 빠지면 50조개의 생명도 그렇게 움직인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인간의 이런 능력과 힘을 아셨던 것 같다. 믿으면 50조개의 생명이 못할 일이 없을 것 같다. 믿지 못하면 모래 위에 세워진 집과 같을 것. 중요한 것은 마음과 몸이 서로 소통하는 것. 친교를 나누면서 이웃들과 한 잔 할 때가 있다. 한 잔은 좋은데 기분이 좋으면 더 마실 때도 있다. 다음날 아침 식사할 때면 알 수 있다. 평상시에는 맛있다. 그러나 같은 음식인데도 과음한 다음 날의 식사는 불편할 때가 있다. 속에서 잘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몸이 아플 때도 그렇다. 평소에 맛있게 먹던 음식도 손이 가지 않습니다. 음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음식을 받아들이는 제 몸이 문제가 있었다. 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도 그렇다. 편견과 선입견이 있으면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코로나19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마스크를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정당소속이나 이념과는 상관없다. 건강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모 정당에서 마스크를 쓰면 지지하지 않는 것이고,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우리 편이라고 하였다. 마스크를 정치적인 신념의 문제로 받아들였고, 이는 코로나19의 확산에도 영향을 주었다. 친구들끼리 만나서 조심해야 할 대화의 주제가 몇 가지 있다고 합니다. 정치이야기, 종교이야기, 군대이야기입니다. 같은 사건을 놓고도 정 반대로 이야기할 때가 많다.

 임진왜란이 있기 전에 조선은 일본에 통신사를 보냈다. 한쪽은 일본은 절대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왜소한 체격이었고 약해 보였다고 보고하였다. 다른 한쪽은 일본은 곧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눈빛이 날카로웠고 강해 보였다고 보고하였다. 이는 500년 전의 이야기이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에도 비슷하게 벌어지는 일입니다. 종교는 절대자의 이름으로 남을 판단하고 단죄할 수 있었다. 특히 다른 종교와는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종교적인 신념은 개인의 이성적인 판단과 윤리적인 판단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한국은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사회이지만 아직도 종교의 이름으로 다른 종교를 탄압하는 나라도 있다.
 군대는 상명하복의 계급사회입니다. 전쟁은 국가의 이름으로 살인을 합법화 할 수 있다. 전쟁은 다른 문화와 전통을 없애는 것을 합리화하였다. 군대는 그것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님을 잘 안다는 선입견이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들은 40일간 단식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다.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시고, 기쁜 소식을 전하시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다. 많은 표징과 새로운 가르침으로 감동을 주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라는 말씀을 하셨다. 믿지 못하는 사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을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그랬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이 그랬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 에서 두 개의 깃발을 이야기하였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깃발이고, 다른 하나는 사탄의 깃발입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에 있으면 존재하는 모든 것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다. 사탄의 깃발에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옆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지금 이 순간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면 좋겠다. 우리들의 사랑이 지금 이 순간 풍성하게 열매 맺으면 좋겠습니다. 

  혼자서는 결코 살아갈 수 없는 험난한 인생길에, 우리 주 예수님께서 오늘도 우리 곁에 계시는데...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기도로써 은혜 받고, 감사로써 즐겁고 만사형통하는 인생”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한때의 분한 감정일랑 참으라. 그러면 백일의 근심을 모면할 것이다.''  - 경함록 -


💖성령봉사자 박재만 세례자요한 010 - 3878 - 6634
  (수필가ㆍ전국성령쇄신봉사자협의회 말씀추천강사)
💖성령봉사자 류태숙 M.막달레나 010 - 6560 - 7354
  (시인ㆍ수필가ㆍ꽃예술설화중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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