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2회 자신의 과오와 부족함에 대해 스스로 질책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비판할 - 자격도 권리도 없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6월 19일(지혜서 1장~) 앤드류 매튜스는 ''세상은 거울과 같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겪는 문제들 중 대부분은 스스로와의 관계에서 겪고 있는 문제를 거울처럼 보여주고 있다. 밖으로 나가서 남들을 바꿔 놓을 필요는 없다. 우리 자신의 생각들을 조금씩 바꿔 나가다 보면,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는 자동으로 개선된다. 《아름다운 삶을 위한 생각》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는 것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분주히 하루를 여는 사람들과 초록으로 무성한 나무의 싱그러움 속에 잠깨는 작은 새들의 문안 인사가 사랑스럽습니다. 희망을 그린 하루가 소박한 행복으로 채워질 것들을 예감하면서 하루를 축복합니다. 밤사이 아무도 모르게 대문에 붙여 놓은 광고지를 살짝 떼어내며 힘들었을 그 누군가의 손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만 힘들다고 생각하면 나만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그만큼 작아지고 가슴에 담을 수 있는 이야기와 행복 또한 초라한 누더기 입고선 추운 겨울벌판 같을 것입니다. 이제 시작하는 하루는 자신을 위하여 불평을 거두고 마음을 다스려 사랑과 희망의 시선으로 감사의 조건들을 바라 보셨으면 합니다. 긍정적인 사고를 갖고 환경에 굴함 없이 간직한 꿈을 향하여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향하는 길에서 지쳐 멈춰서기도 하겠지만 그 길이 올바른 길이라면 결코 물러서지 않는 의지로 또다시 걸음을 떼어 놓을 수 있는 용기를 내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따뜻한 사랑의 불씨를 끄지 않은 한 닥친 역경과 시련마저도 그 불꽃을 강하게 피우는 마른 장작에 불과 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개성과 인격을 지닌 단 하나 뿐인 소중한 사람임을 잊지 말고 희망을 그려가는 너그럽고 자랑스러운 하루였으면 합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오 복음 7장 3~5절) 참 인간이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지금 이 순간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며, 반성하고 진단하는 일입니다. 자신의 과오와 부족함에 대해 스스로 질책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비판할 자격도 권리도 없다. 이웃을 저울질 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의 현실과 상황을 세밀히 살펴보아야 마땅합니다. 회개와 성찰은 나 자신부터 먼저 시작되어야 합니다. 특히 날카로운 비판 전문가들은 이웃을 비판하기에 앞서 비판의 잣대를 자신에게 먼저 적용해보아야 할 것. 또한 이웃의 결핍을 바라보고 필요한 조언을 건넬 때에는 다른 무엇에 앞서 사랑의 마음으로 해야 할것. 또한 이웃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는 사람은 최소한 자기 자신에게도 동일한 것을 요구해야 마땅합니다. 사랑의 정신으로 이웃을 바라보는 사람은 적당한 순간과 장소를 가려 조언해 줄수 있을 것. 가장 좋은 순간은 단둘이 있을 때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더불어 우리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인정하지도 않는다. 어떻게 해서든 우리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키려고 기를 씁니다. 이런 사람을 두고 우리는 위선자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달라도 너무 다른 위선자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도 치명적인 병을 지니고 있기에, 자기 한 목숨 살리기도 힘든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진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진리에 대해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참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내 결점에 대해서 먼저 인식하는 것. 내 결점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했다면, 가르치기에 앞서 먼저 내 결점을 바로잡아야 할 것. 자질이 없는 지도자, 능력이 없는 지도자, 무엇보다도 교만한 지도자, 이기적인 지도자가 남을 가르치려든다면, 그것처럼 위험한 일이 다시 또 없다. 가르치는 사람이나, 가르침 받는 사람이나 둘 다 망하는 길입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누구나 세상 앞에서 지도자입니다.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쇄신, 쉼 없는 자기개발과 자기 연마는 지도자인 우리에게 필수적인 노력입니다.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사람의 심성을 3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첫째로는 거미 같은 사람입니다. 거미는 처마 밑과 으슥한 곳에 끈끈한 거미줄을 쳐 놓고서 그 덫에 걸리는 타 곤충들을 잡아먹으며 심지어 동료까지 해치는 무지막지한 해악(害惡)한 놈이다.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돼! 라는 심보의 소유자입니다. 두 번째로는 : 개미같은 사람입니다. 근면한 사람이라고 비유하기도 하는데 자기만 살겠다고 앞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열심히 일만하는 개인주의적인 사람입니다. 남을 도울 필요도 없고 손 벌일 일도 만들지 않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로는 : 꿀벌 같은 사람입니다. 벌은 이 꽃과 저 꽃을 날아다니면서 꿀을 따면서도 꽃가루 수정을 하여 씨가 잘 맺도록 도와줍니다. 꿀을 모아놓으면 사람이 먹어요. 이웃과 서로 돕고 사는 공생관계를 맺고 산다. 이타주의 적인 사람입니다. 고달프고 힘들지만 보람이 있어요. 지금 이 순간 나의 삶은 어느 삶인가요? 예수님을 닮은 삶은 어느 삶인가요? 꿀벌 같은 삶이죠. 그러기 위해서는 지향을 잘 두어야 하고 그만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철저히 따라야 한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이타주의적인 삶을 충직히 살아야 한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자기 가족과 맺는 관계보다 더 강한 관계여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 자기가 생각하는 어떤 소중한 것보다도 예수님을 우선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런 사랑이 없이는 기초가 없이 탑을 짓는 것과 같고 군대 없이 전투에 나가는 것과 같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습관을 지금 이 순간 버려야 합니다. 집착을 버리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기초입니다. 세상에서 “영적 투쟁”을 하고 있는 우리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로, 마침내 하늘의 온갖 은총을 얻어 누리는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오늘 죽을 것처럼 행동하고 영원히 살 것처럼 배워라.'' - 간디 - |
♡2133회 신앙인은 이 세상의 부패와 타락을 막는 소금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6월 20일(집회서 1장~) 유태격언에 ''사랑은 달콤하다. 그러나 빵이 수반할 경우에만 그렇다.'' 《가정 안에서 당신의 위치가 어떠한지》가정 안에서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위치가 어떠한지 알고 있습니까? 당신은 그들을 돌보고 그들을 행복하게 해 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우선 그것들을 하십시오. 그런 다음에 라야 당신은 다른 곳에 있는 불쌍한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을 것. 멀리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다. 그러나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가난한 사람에게 밥 한 끼 제공하기는 쉽지만 우리 가정 안에서 지금 이 순간 누군가 사랑받지 못한다고 외롭고 힘들어 할 때 그를 위로하는 건 참으로 어렵다. 나는 당신이 당신 가정 안의 가난한 사람을 지금 이 순간 찾아 나서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당신의 사랑은 거기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나는 당신이 주변에서 기쁜 소식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당신의 이웃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 주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요한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4-5)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사람들은 어둠 속에 있었다. 그 어둠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방황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생명의 빛이신 분’ 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멸망하게 될 것.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을 믿고 따를 수 있도록 인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어라.” 명령이고, “감추어질 수 없다.” “감추지 마라.” 명령입니다. “모든 사람을 비춘다.” “모든 사람을 비추어라.” 명령입니다. ‘착한 행실’ 은 선행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고, 선행을 포함해서 복음을 ‘삶으로’ 증언하는 것과 사랑 실천을 뜻하는 말입니다. “아버지를 찬양하다.”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서 구원을 받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감추다.’ 라는 말에서 예수님 수난 때 사도들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일은(마태 26,69-74), 박해받는 것이 무서워서 자신의 빛을 감춘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요한 20,19)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뒤에 제자들은 박해받는 것이 무서워서 숨어 있었다.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는 것은 숨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에게서 받은 자신들의 빛을 감춘 것과 같다. 그랬던 사도들이었는데, 성령 강림 후에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용감한 선교사들이 되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빛’ 이 된 것.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초대 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예수님 말씀을 실제로 실천한,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6-47) “...... 백성은 그들을 존경하여,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났다."(사도 5,13-14) 당시에 사도들과 신자들은 ‘말’ 로 하는 선교활동도 열심히 했지만, 그들의 ‘삶’ 자체가 복음 선포였다. ‘삶’ 이 곧 사람들을 비추는 ‘빛’ 이 되었다는 것. 그 ‘삶’ 을 보고 입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도행전 저자는 안 좋은 모습도 조금 있었음을 기록했다. 5장에 있는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 이야기와 6장에 있는 그리스계 과부들이 홀대를 받은 이야기가 그것.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는 ‘쓸모없는 소금’ 의 한 예가 될 수 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라.” 라는 명령입니다. 신앙인은 이 세상의 부패와 타락을 막는 소금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또 복음 정신에 충실한 생활을 함으로써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변화’ 라는 말에서 누룩에 관한 말씀이 연상됩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태 16,6) ‘바리사이들의 누룩’ 은 물질적인 부를 누리는 것을 ‘하느님의 복’ 으로 착각한 바리사이들의 사고방식을 뜻하고, ‘사두가이들의 누룩’ 은 현세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한 사두가이들의 사고방식을 뜻합니다. 만일에 신앙인이 그런 사고방식에 물들어서 그렇게 살게 되면, 그 사람은 ‘제 맛을 잃은(아무 쓸모가 없는) 소금’ 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의 경우를 보면, 그들은 전 재산을 봉헌했다는 칭찬을 듣고 싶은 욕심과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해서, 재산의 일부만 바쳤으면서도 전부를 바쳤다고 거짓말을 했다.(사도 5,1-2) 베드로 사도는 하나니아스를 이렇게 꾸짖었다. “하나니아스, 왜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겨 성령을 속이고 땅값의 일부를 떼어 놓았소? 그 땅은 팔리기 전에도 그대 것이었고, 또 팔린 뒤에도 그 돈은 그대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 아니오? 그런데 어쩌자고 이런 일을 하려는 생각을 마음속에 품었소? 그대는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속인 것이오."(사도 5,3-4) 안 믿는 사람들도 대체로 “신앙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를 알고 있다. 그래서 신앙인이 신앙인답지 않게 사는 것을(행동하는 것을) 보면, “믿는 자들이 더한다.” 라고 비난을 합니다. 그 비난은 주님께서 안 믿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신앙인을 크게 꾸짖으시는 것과 같다. 반대로, 신앙인이 지금 이 순간 신앙인답게 살면(행동하면) 안 믿는 사람들은 “역시 믿는 이들은 다르다.” 라고 칭찬을 합니다. 그것은 참으로 영예로운 칭찬입니다. 지금 이 순간 그런 칭찬을 듣는 것은 삶으로(행동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의 마음 안에 복음의 기쁨으로 충만하여, 주님의 뜻이 우리들 안에 이루어지는 섭리가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지도자란 희망을 파는 상인이다.'' - 나폴레옹 - |
♡2134회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와 반대되는 뜻을 가진 분을 찾아야 합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6월 21일(이사야서 1장~) 채근담에 ''생각이 너그럽고 두터운 사람은 봄바람이 따뜻하게 만물을 기르는 듯하여 무엇이든지 이런 사람을 만나면 살아나고, 마음이 모질고 각박한 사람은 차가운 눈이 만물을 얼게 하는 듯하여 무엇이든지 이런 사람을 만나면 죽느니라.'' 《가족을 위한 기도》지금 이 순간 나보다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여유를 주시고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믿음으로 하나되게 하소서. 물질적인 풍요보다 마음의 풍요가 소중함을 느끼게 하시고 이기적인 마음 때문에 서로에게 고통을 주지 않도록 하소서. 없는 것에 대해 불평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 저희에게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할 줄 아는 여유와 은총을 주소서. 교만으로부터 오는 자존심과 허영심을 모두 버리고 지금 이 순간 겸손함과 정직함으로 살아가도록 하소서. 작은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도록 하시고 모든 사람을 존중할 수 있는 겸허함을 주소서. 저를 위하여 다른 사람들이 있기를 바라기보다 지금 이 순간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내가 존재하는 기쁨을 느끼도록 하소서. 서로를 믿고 사랑하며 사랑 안에서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도록 하소서. 지금 이 순간 삶이 힘들고 괴로울지라도 주어진 삶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주소서.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하였을 때 욕하고 비난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 용서하고 격려하며 포용할 수 있는 넓고 깊은 마음을 갖도록 하소서. 노력 없이 결과를 기대하지 않도록 하시고 지금 이 순간 성실과 정직으로 모든 일에 임하도록 하소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열 가지의 일을 하기보다 보이지 않는 진정한 하나의 일을 즐겁게 할 수 있게 하소서. 미미한 나의 능력과 지혜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너와 나 우리 모두를 위해 주신 것임을 잊지 않도록 하소서.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며 기쁨과 즐거움이 함께 하는 열린 가족이 되게 하소서. 아멘! 성모님께서는 원죄까지도 없으시기에 ‘죄에 물들지 않은 마음’ 을 가지셨다. 죄가 없는 마음이란 어떠한 마음을 말하는 것일까요? 어린이와 같은 마음일 것.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를 짓지 않게 만드는 분 곁에 있어야 합니다. 영화 ‘블랙 스완’에서 주인공은 어머니의 뜻을 따라주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진 여인입니다. 어머니가 자신을 낳기 위해서 발레를 포기하였기에 자신이 어머니의 꿈을 이루어 주고 싶었던 것. 그런데 자신도 누군가와 깨끗하지 못한 사랑에 빠집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원하지 않는 행동을 집에서 하게 됩니다. 아침이 되어 눈을 뜨니 어머니가 자신의 침대 옆에 있었다. 너무나 화들짝 놀랐다. 자신의 모든 행동을 다 본 줄 알았는데, 다행히 어머니는 눈을 감고 잠을 자고 있었다. 밤새 자신의 침대 옆에 있었던 것. 혹시 자신의 행위를 다 보았는지 몰라 주위를 살펴보니 아무도 없었다. 죄를 짓는 꿈을 꾼 것이었다. 죄를 짓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죄와 반대되는 뜻을 가진 사람을 멀리해야 합니다. 반대로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와 반대되는 뜻을 가진 분을 찾아야 합니다. 어느분께서 어렸을 때 부산 외가댁에 처음으로 간 날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일단 어머니와 외가 친척분들이 말씀하시는 것을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사투리를 처음 들어보았기 때문입니다. 잘은 알아들을 수 없지만 외삼촌들에게 맡기고 가신다는 말처럼 들렸다. 잘못 들었거니 했는데 다음 날 아침 일어났을 때 어머니가 사라지고 없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여기저기 어머니를 찾아 돌아다녔다. 그러다 외할머니가 말씀하시기를 어머니는 밑에 층에서 목욕하고 계신다고 하였다. 자신을 버리고 간 줄 알고 무척 불안했었다. 외가댁은 목욕탕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어머니를 찾던 자신이, 어느 순간부터는 어머니를 더는 찾지 않았다. 죄가 커지는 사춘기 때부터였다. 어머니가 계시면 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안 좋은 비디오를 보다가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면 화들짝 놀라 테이프를 빨리 빼곤 하였다. 부모의 법이 아니라 내 안의 법을 따를 때는 이렇게 부모를 찾지 않을뿐더러 그분이 함께 있는 것이 부담스럽다. 죄가 커질수록 부모를 찾는 마음이 식어갑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죄와 반대되는 법을 가지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잃으셨다. 자녀를 잃은 어머니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찢어지듯 아플 것. 자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여길 것. 그래서 모든 에너지를 총동원해 자녀를 찾습니다. 이사야서의 이 말씀이 꼭 성모 마리아의 마음과 같을 것. “밤새도록 당신을 그리는 이 마음, 아침이 되어 당신을 찾는 이 간절한 심정! 당신의 법이 세상에 빛나는 때 세상 주민들은 비로소 정의를 배울 것입니다.”(이사 26,9)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몰라 밤새 찾고, 아침이 되어서도 찾으려는 마음. 이것이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성모 마리아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죄와 반대되는 법이고 그 법대로 사는 것이 정의입니다. 오즈의 마법사에 자신에게 없는 심장을 찾겠다는 양철 나무꾼이 있다. 왜 심장을 찾으려고 했을까요? 그것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목적지에 도착하니 이미 심장이 생긴 것을 알았다. 찾으려는 마음이 이미 거룩한 마음입니다. 눈이 보이지 않던 헬렌 켈러도 이 진리를 깨닫고 이렇게 말하였다. “햇살을 향해 얼굴을 들어라. 그러면 그림자가 안 보인다. 해바라기가 그렇게 한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은 죄의 어둠에 들지 않습니다. 죄로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기를 원하지 않아서 그분의 법만을 찾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하느님 나라에 이르게 하는 길이 됩니다. 예수님을 찾고 나니 결국 ‘아버지 집’ 이었던 것. 예수님은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라고 물으십니다. 지금 이 순간 죄에서 구원해 줄 예수님을 찾는 마음만 있다면 이미 죄에서 벗어나기를 원한 것이고 또 벗어나고 있는 것이고 어쩌면 이미 아버지의 집에 도달한 것이다. 우리들은 예수님 안에서 생기 있는 은총과 축복 가득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사랑은 신뢰의 행위다. 믿으니까 믿는 것이다.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것이다.'' - 로망롤랑 - |
♡2135회 화해하려면 낮아지는 것이 더 좋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6월 22일(이사야서 15장~) 고리끼는 ''일이 재미있으면 인생은 낙원이다. 일이 의무라면 인생은 지옥이다.''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친구》졸졸졸 흐르는 시냇물처럼 언제나 따뜻한 마음 한 줄기가 고요하게 가슴으로 흐르는 것이 친구입니다. 매일 만나도 매일 만나지 않아도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고요히 흐르는 강물처럼 늘 가슴 한켠에 말없이 잔잔한 그리움으로 밀려오는 친구가 진실한 마음의 진정한 친구입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늘 그 모습 그대로 오염되지 않는 맑디맑은 샘물처럼 우정의 마음도 솔솔 솟아나는 그런 친구가 맑은 영혼의 친구입니다. 친구간에는 어떤 언어가 필요 없다. 그 친구가 지금 어떤 상황이든 어떤 심정이든 굳이 말을 안해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친구 그런 친구가 진정한 마음의 친구입니다. 마음을 담아 걱정해 주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얼어붙은 가슴을 녹이고 바라보는 진실한 눈빛이 아픈 마음을 적시게 하는 그런 친구가 영원히 변치 않는 우정의 친구입니다. 친구지간 에는 아무런 댓가도 계산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멀리 있어도 마음으로 의지하고 그리워하는 것 만으로도 인생의 동반자 같은 진정한 친구입니다. 살아가는 동안 같이 아파하고 함께 웃을 수 있는 희로애락을 같이 할 수 있는 지란지교 같은 그런 친구가 진정한 친구입니다. ‘스탠리 밀그램’ 은 상황의 힘을 이해하기 위해 사람을 죽을 수도 있는 정도까지 전기충격을 가하게 하는 유명한 실험을 한 심리학자입니다. 한 번은 어머니가 지하철에서 자신에게 아무도 자리를 양보해주지 않는다는 푸념을 듣고는, 무조건 도움을 청하면 사람들은 어느 정도 도와줄 준비가 되어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대학원생들을 시켜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해달라고 무조건 청하게 했다. 그런데 결과는 예상보다 두 배 정도나 높았다. 이 요청을 받은 사람 중의 68%가 자리를 양보해 준 것. 그런데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 실험에 참여한 대학원생들이 다시는 그런 실험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밝힌 것. 왜 그런 상처들을 받았는지 궁금해서 밀그램이 직접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청해보았다. 물론 70% 정도가 자리를 양보해주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앉는 순간 기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이 실험에서 두 가지 배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 사람은 나의 청을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이 그 첫 번째고, 두 번째는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것은 자신에게는 매우 불편한 일이라는 것. 상대보다 낮아지는 기분이 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도움을 구하고 도움을 받는 사람보다는 도움을 주는 사람 쪽이 더 기분이 좋다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도 받는 것보다 주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고 말한 것에 기인합니다. 받는 것이 더 행복하다면 길거리에서 적선을 받는 분들이 세상에서 가장 기분이 좋아야 할 것. 어느분께서 얼마 전에 대학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대리를 해서 집으로 오는 길에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오는 길에 두 명의 친구들을 내려주어야 했는데 그것 때문에 대리기사에게 돈을 좀 더 주어야 했다. 그런데 친구들이 미안해서인지, 한 명은 가진 것이 만 원밖에 없다고 하며 만 원짜리 한 장을 주고, 다른 친구는 오만 원을 건네는 것이었다. 마치 자신이 거지가 된 것처럼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받았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취급당하면서라도 그들이 기쁘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관계는 이렇게 주고받음 속에서 형성되기에 상대가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더는 관계를 맺지 말자는 말과 같다. 그런데 무언가를 받는다는 것은 매우 자존심이 상하는 일입니다. 그렇더라도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둘 사이 관계의 흐름이 끊깁니다. 두 사람이 싸웠다면 어떻게 화해하는 것이 좋을까요? 물론 상대가 좋아하는 선물을 주는 것도 좋을 것. 그러나 그 선물을 받고 기뻐할 수도 있겠지만, “누가 이런 거 필요하다고 그랬어?” 라며 도리어 화를 낼 수도 있다. 무언가를 받는 것은 상대에게 무릎을 꿇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상대가 나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무언가 청하는 것이 더 좋다. 아내와 싸웠다면 아내에게 꽃을 사 들고 오는 것도 좋겠지만, 당신이 해 준 김치찌개가 먹고 싶다며 전화로 미리 부탁하는 것. 이것이 화해를 위해 더 좋은 방법으로 보입니다. 화해하려면 낮아지는 것이 더 좋다. 벤저민 프랭클린을 지독히도 미워하는 정적이 있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그 상대가 자신이 읽고 싶은 귀한 책을 한 권 소유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에게 그 책을 좀 빌려달라고 청했다. 그는 순순히 책을 빌려주었고 프랭클린은 잘 읽고는 너무 좋은 책이라는 감사와 함께 돌려주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사람은 죽을 때까지 벤저민 프랭클린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참조: ‘어떻게 마음을 움직일 것인가’, 하이디 그랜트 할버슨, 유튜브 책한민국] 어쩌면 우리는 무작정 도와주는 것을 상대가 좋아하리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구나 주는 사람이 되고 싶지 받고 싶은 사람이 되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받기는 하지만 반드시 그렇게 손상된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청하라!’ 고 하시고, 바로 이어 ‘용서하라.’ 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청해야만 하는 처지임을 알고 겸손할 수 있어야 용서도 가능한 것. 용서는 관계의 회복을 목적으로 합니다. 용서를 넘어서는 더 좋은 방법은 소통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도 우리에게 무언가 해 줄 것이 없는지 살펴야 합니다. 무작정 퍼주기만 한다고 관계가 좋아지지 않습니다. 상하 관계가 되기 때문입니다. 소통이 되어야 하고 교류가 되어야 합니다. 화해하려면 우리가 무작정 주는 쪽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 먼저 나를 위해 많은 도움을 줄 사람들이 주위에 많은데 청하지 않아 받지 못하는 것이 없는지 살펴야 합니다. 화해하려면 도움을 구하십시오. 친구가 되려면 도움을 청하십시오. 아니면 말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많은 친구를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기도할 때 항상 저희와 함께 계시면서 지켜 보호하시고 이끌어주시는 하느님을 믿고, 그 믿음으로 그분의 놀라운 사랑과 은총과 축복을 누리시는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추위에 떤 자일수록 태양의 따뜻함을 느낀다. 인생의 고뇌를 맛본 자일수록 생명의 존귀함을 느낀다.'' - 호이토 맨 - |
♡2136회 우리는 행운이라는 네 잎 클로버를 찾기 위하여 행복이라는 세 잎 클로버를 짓밟 - 고 다닐 수 있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6월 23일(예레미야서 1장~) 독일 속담에 ''거짓말에는 세금이 붙지 않는다. 그러므로 온 나라에 거짓말이 넘쳐나고 있다.'' 《먼길 돌아온 인생의 노을》인생은 먼길을 돌면서 중년 이후 외모는 변해갑니다. 삼단복부 이중턱 구부정해지는 허리등 그리고 흰머리 빛나는 대머리 또 늘어진 피부.... 자꾸 자꾸 처지는 눈꺼풀 등 그래도 말년을 앞에 둔 이들이 다른 사람에게 향기를 나눠 줄 수 있는 것은 德이 있기 때문입니다. 덕은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쌓이는 것입니다. 사랑이 인간을 구제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움과 절망이 인간을 구제할 수도 있습니다. 노년의 연륜은 미움과 절망까지도 품을 수 있습니다. 성실하게 살면 이해도 지식도 사리 분별력도 자신의 나이만큼 쌓입니다. 그런 것들이 쌓여 후덕한 인품이 완성됩니다. 이 세상에 신도 악마도 없는 단지 인간 그 자체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젊은 날의 만용조차 둥글 둥글해지고 인간을 보는 눈은 따스해 집니다. 이러한 덕목을 갖추려면 스스로에게 엄격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견고한 자갈을 물리고 삶의 속도를 조절해야 합니다. 시간은 인간에게 성실할 것을 요구합니다. 잉여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정신적, 육체적 노력 없이는 시간을 차지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 시간은 두렵고 잔혹한 것. 그리고 마음 비우고 미완성에 감사합시다. 노년 이후에는 '진격' 보다는 '철수' 를 준비해야 합니다. 물러설 때를 늘 염두에 두며 살아야 합니다. 오래 살게 되면 얻는 것도 있겠지만 잃어버리는 것이 더 많다. 따라서' 잃어버림' 을 준비합시다. 그것은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라는 말이 아니라 순수하게 잃어버림을 받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주변의 사람도 재물도 그리고 의욕도 자신을 떠나갑니다. 이것이 노년 이후의 숙명입니다. 추한 것 비참한 것에서도 가치 있는 인생을 발견해 내는 것이 중년입니다. 여자든 남자든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외양이 아닌 그 사람의 어딘가에서 빛나고 있는 정신 혹은 존재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일 수 있는 때가 좋다. 만일 내가 없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비참하게 생각될지 모르나 그 누가 없어도 잘 돌아가게 되므로 우리는 안도 할 수 있다. 인간은 조금씩 비우다 결국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때 세상을 뜨는게 하늘의 뜻입니다. 전에 어떤 청년과 대화하던 중 신부님께서 조금 당황한 일이 있었다. 신부님께서는 행복하려면 이래 저래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청년은 자신은 행복이 인생의 첫 번째 가치나 목표가 아니라는 것. 네다섯 번째라는 것. 신부님께서는 인생의 최고 가치가 행복이었고 그것이 바뀐 적이 없었기에 그런 반응은 신부님을 당황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행복이 인생의 첫 번째 가치가 아니라면 우리는 자아의 욕구에 속아서 살 수밖에 없다. 만약 자녀의 성공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면 나는 그 가치를 위해 지금의 행복을 포기해야 할 수밖에 없다.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아니라면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의 행복을 버리고 있는 것. 예수님께서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도 그런 사람에게는 의미가 없게 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가장 바라는 것이 행복일 것. 우리도 그런 목적으로 창조되었다. 그러니 나에게 행복을 허락해도 되고 어쩌면 나의 행복이 나를 만들어주신 분께 가장 효도하는 길일 것. 또 다른 문제는 행복해지고 싶어도 그 방법을 모른다는 것. 바로 “마음의 가난” 입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신부님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신부님을 찾으며 몇 시간을 돌아다니셨다. 한참을 돌아다니며 신부님을 발견하셨는데 신부님께서 트럭들이 다니는 길거리에서 흙장난하며 놀고 있더라는 것. 만약 신부님께서 엄마를 찾겠다고, 그러면 행복할 것이라고 찾아다녔다면 그 하루 동안의 행복은 날아갔을 것. 그리고 어머니가 신부님을 찾지 못하셨을 수도 있다. 신부님께서 멀리 안 가고 주위에서 놀고 있었기에 사람들이 신부님을 데려가지 않고 어머니가 신부님을 찾으실 수 있으셨다. 어머니가 신부님을 찾아오셨다면 주님은 항상 신부님 곁에 계시고 신부님 안에 계십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것이 마음의 가난입니다. 어렸을 때는 그랬는데 나이가 들면서 그런 가난한 행복은 잊고 대학에 들어가야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이 생겼다. 신부님의 책상 앞에는 “나는 공부하는 기계다!” 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지금은 기계로 지내고 나중에 대학 들어가면 행복하여지자는 말입니다. 그렇게 지옥 같은 학창시절을 보냈다. 대학에 갔더니 행복할 수 있었을까요? 취업 걱정해야 했다. 취업하면 행복할까요? 그 나름대로 또 필요한 것이 있다. 결혼도 해야 하고 직장에서 인정도 받아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행복해지려면 끝이 없다. 이런 삶의 형태가 마음이 부자인 사람의 모습입니다. 부자는 많이 가졌지만, 더 가지려 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마치 어린이처럼 부모만 있으면 됩니다. 우리는 주님만 있으면 됩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마구간을 생각하면 됩니다. 그 마구간은 겉보기에는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 보이지만 마구간 자체는 필요한 것이 없다. 더 행복해지는 데 필요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 안에 머무실 수 있다. 예수님은 행복이십니다. 예수님이 머무는 마음이 행복입니다. 이것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얻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의 여관들은 마음이 부자인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들은 겉보기에는 이미 가진 것이 풍족하지만 실제로는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가난해 보이는 부부는 맞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돈이 많을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의 행복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영영 참 행복이신 그리스도를 맞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을 찾는 헤로데에게 자녀들이 다 참혹하게 죽는 비극을 맞습니다. 마음이 부자인 사람들의 운명도 마찬가지일 것. 네 잎 클로버에 얽힌 이야기는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나폴레옹이 네 잎 클로버를 따려고 허리를 굽힌 순간 포탄이 지나가서 목숨을 건지게 되어 ‘행운’ 이라는 꽃말을 지니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흔한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입니다. 우리는 행운이라는 네 잎 클로버를 찾기 위하여 행복이라는 세 잎 클로버를 짓밟고 다닐 수 있다. 누군가 ‘지금, 이 순간’ 의 행복은 짓밟으며 ‘미래’ 의 행운을 발견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부자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없다. 그러나 내 발밑에 이미 행복할 조건이 깔려있음을 알고 행운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안다면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런 사람의 것. 결국, 네 잎 클로버도 행복해지자고 찾는 것. 지금 행복이 발밑에 있는데 뭐하러 네 잎 클로버를 찾으려고 할까요?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내 발밑에 그분이 항상 깔려있음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에게 행복을 허락합시다. 내가 행복하면 그분은 행복하게 머무는 나를 찾아오실 것입니다. “언제나 기도하는 습관으로, 나쁜 것을 지우려고 애쓰지 말고, 좋고 선한 것으로 채우려는 습관으로, 그럴 수도 있지.’' 라며 이해하는 습관으로... 이제 우리들이 그 습관이 다 태우는 사랑이 되어 하느님께 온전한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귀한 축복된 삶이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것은 생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 도스토예프스키 - |
♡2137회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것만 믿는 것은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6월 24일(예레미야서 1장~) 프랭클린은 ''게으름은 쇠붙이의 녹과 같다. 노동보다도 더 심신을 소모시킨다.'' 《감사함을 잊고 있을때》주님, 하찮은 저에게도 감격의 순간들을 허락해 주심에 감사하게 하소서. 하루를 다시 주시는 것에, 아름다운 자연을 펼쳐주시는 것에, 이웃을 호젓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하시는 것에 뜨거이 감사하게 하시고, 또한 사랑과 용서라는 어려운 세계를 가까이에서 손잡아보게 하시는 것에 영원한 생명이라는 추상적 세계가 매우 구체적인 모습으로 다가오게 하시는 것에 눈물겨이 감사하게 하소서. 주님, 감사하는 마음에서 생겨난 생생한 평화를 이웃에게 나누어주게 하소서. 하느님께서 주신 평화의 그윽한 미소를 통해 세상에는 은밀히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이웃이 알게하시고 평화의 간결한 말을 통해 인간의 삶에는 청결한 진실이 있음을 이웃이 알게 하시며 평화의 투명한 침묵을 통해 인간의 영혼에는 신비한 음향이 있음을 이웃이 알게 하소서. 주님, 이 뜨겁고도 싱그런 평화가 식지 않도록 저로하여금 늘 하느님을 생각하게 하소서. 하느님의 빛의 물결이 제 영혼에서 늘 출렁이면서 감사함의 바다가 되게 하소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이신 분이고,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생명’ 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감각의 한계에 갇혀 있는 우리를 위해서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방법을 사용하셨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눈으로 볼 수 있는 빵’ 을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 을 우리에게 주시는 성사입니다. 여기서 “하늘에서 내려온”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은 지상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면서 사는 것은 단순히 안 죽고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 그래서 완전히 새로운 생명이고, 참된 생명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은 ‘모든 사람’ 을 구원하려고 오셨음을 나타냅니다. “이 빵을 먹으면” “나를 믿고, 내가 주는 성체를 받아먹으면” 예수님을 믿는 일은 예수님을 먹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생명력을) 받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체성사를 포함해서 신앙생활 전반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나의 살이다.” 뜻으로는 “나다.”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냥 “나다.” 라고 하시지 않고 “나의 살이다.” 라는 강한 표현을 사용하셨을까? 아마도 우리의 신앙생활이 ‘생각으로만’ 하는 관념적인 생활이 아니라 실생활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는 생활이 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사용하셨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성체성사는 생각으로만 이루어지는 성사가 아니라 실제로 빵을(예수님을) 받아먹는 성사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 예수님을 믿고(먹고),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은, 그 생명을 얻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방법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모든 권한을 예수님에게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요한 3,35-36)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또 미사 참례를 하면서도 성체성사가 이해되지 않고, 그래서 믿기도 어렵다면서 영성체를 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것만 믿는 것은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해가 되든지 안 되든지 간에 예수님의 말씀도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일도 믿어야 하고, 그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나를 이해시켜라.” 라는 오만한 태도로는 예수님의 뒤를 따를 수 없다. 예수님을 모르고, 또 예수님을 믿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 가운데에도 착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런 사람들도 구원받지 못하고 끝나버려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어떻게든 그런 사람들도 구원하실 텐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실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54)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약속하셨다.(요한 11,25-26) 신앙생활의 최종 목적은 부활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이나 빌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종말이 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그러나 믿는 이들에게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관문이 될 뿐입니다. 살아서 종말과 재림을 맞이하는 사람은 죽음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게 될 것.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 “나를 먹는 사람”, 즉 예수님과 온전히 일치를 이루는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 6,55) 예수님과 온전히 일치를 이루어서 얻게 되는 생명은 참되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참된 양식’ 이고 ‘참된 음료’ 입니다. 예수님이 아닌 다른 무엇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에게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주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신앙생활은 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꾸준히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먹는 성체성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식적으로 영성체 한 번 했다고 해서 영원한 생명이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날마다 끊임없이 예수님 안에 머무르려고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려고 노력해야 하고,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성체성사의 정신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7-58) 믿음 없이 영성체를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그것은 썩어 없어질 양식을(요한 6,27) 먹는 것과 다르지 않고, 유대인들이 믿음 없이 몸의 배고픔만 해결하려고 ‘만나’ 0를 먹은 것과 다르지 않은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믿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으로 살아가는 생활이고,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매 순간, 우리들의 마음에 '참 고운 얼굴' 을 담고 맑은 눈으로 감사하고 지금 이 순간 기뻐할 줄 아는 하느님의 자비가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기회는 새와 같은 것, 날아가기 전에 꼭 잡아라.'' - 스마일즈 - |
♡2138회 “분별의 은총 없이는 완전한 덕이 없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6월 25일(예레미야서 31장~) 이디오피아 속담에 ''악은 바늘처럼 들어와 참나무처럼 퍼진다.''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사람을 움직이는 무기는 입이 아니라 귀다. 대화의 질은 서로 상대의 이야기를 얼마나 잘 들어 주는가에 달려있다. 같은 요구라 해도 자기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의 요구에 더 잘 따른다.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상대의 입장을 생각하고 공감할 수 있는 태도가 전제 되어야 한다. 학교에서 일 등을 했던 사람이 사회에서 가장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고 남의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지적인 능력이 아니라 자신과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이를 조화롭게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다. 옳은 말 하는 사람보다 이해해 주는 사람이 좋다. 아이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은 부모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다. 부모가 많이 쓰는 말일수록 아이들에게는 필요하며 옳은 말인데도 말이다. 옳은 말인줄 알면서도 아이들이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부모가 아이의 입장이나 처지를 이해하고 감정을 인정해 주는 "공감"(empathy)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공감이 없으면 아이들에게는 간섭으로 들릴 뿐이다. 조리있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부러워 한다고 항상 좋아 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 주장을 똑 떨어지게 하지는 않지만 내 입장을 잘 이해해 주는 사람에게는 시기할 필요도 없으며 부담을 느끼지도 않는다. 존경받는 상사나 훌륭한 부모는 상대의 입장이나 처지를 배려할 수 있는 공감 능력이 남다르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상대의 입장을 공감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사람이 어떤 감정을 경험하고 있는지를 민감하게 파악하고 함께 느끼며 이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산상설교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짧은 말씀이지만, 중요한 세 가지의 가르침을 줍니다 <첫째>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 는 가르침이요, <둘째>는 “너희가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는 가르침이요, <셋째>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는 가르침입니다. <첫째> 말씀은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두 가지 원리 중 하나입니다. 앞 장면에서 우리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마태 7, 1)는 이웃과의 화합의 원리를 들었다. 이제 이와는 대조되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태 7, 6)는 이웃과의 단절의 원리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는 결코 남에게 폐쇄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를 가지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분별 있고 신중하게 행동하라’ 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르기”(마태 7, 6) 때문입니다. 세속적이고 악한 생활로부터 영적인 분별력과 신중함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균형 있고 조화 있게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오로 역시 세속정신과 이방종교들과 함께 있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별 있는 행동을 이렇게 권고한 바 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 2) 이러한 분별의 귀중함에 대해서 요한 카시아누스는 그의 <담화집>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분별의 은총 없이는 완전한 덕이 없다”(담화 2, 3) 사부 성 베네딕도께서도 <수도규칙>에서 ‘분별을 모든 덕의 어머니’(64, 19)라고 강조하였다 . <둘째> 말씀은 흔히 황금률이라 불리는 사랑의 원리입니다. 이는 6장 33절의 말씀과 더불어 산상설교의 2대 강령이기도 합니다. 곧 6장 33절의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는 말씀이 수직적인 관계의 황금률이라면, 여기 7장 12절의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는 말씀은 수평적인 관계의 황금률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결코 ‘정직은 그 대가를 지불한다.’ 는 공리주의적 금언이 아닙니다. 또한 ‘주는 양만큼 똑같이 받을 것’ 을 기대하는 이해타산의 합리주의적 금언도 아닙니다. 오히려 철두철미한 ‘이타적인 사랑’ 으로 남에게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아니 더 나아가서는 겸손하게 ‘먼저’ 남에게 베풀라는 적극적인 사랑에 대한 요청입니다. 곧 사랑을 타인에게 기대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사랑을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마태 7, 12) 입니다. <셋째>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성을 규명하는 네 가지 비유 중 첫 번째로, 좁은 문과 넓은 문의 비유입니다. 곧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7, 13-14 참조)는 요청입니다. 이 문은 좁은 문이기에 통과하기 위해서는 포기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곧 버려야할 것들은 버리고 오라는 말씀입니다. 생명의 길이지만 자신을 비우고 들어가는 문이기에 많은 이들이 선뜻 들어서지 않는 문인 것. 그러기에 이는 생명의 문이신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그분의 이끄심에 의탁하는 자라야만이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우리가 들은 이 세 가지 말씀이 우리의 삶 안에서 실현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주님! 제 자신이 부서지고 가벼워지게 하소서. 제 뜻이 꺾이고 사라지게 하소서. 좁지만 열린 문이기에, 붙들어 주는 당신을 꼭 붙들고 들어가게 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승자는 문제 속에 뛰어든다. 패자는 문제의 변두리에서만 맴돈다.'' - 빅토르 위고 - |
♡2139회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 바탕이 된 재물은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6월 26일(애가 1장~) 니체은 ''위대한 것은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많은 노력들을 기울입니다. 우리 시대는 그 어떠한 시대보다도 여러 면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행복해지기를 원하고 있다. 좋은 것을 찾아 잘 먹고 잘 입으며 자녀 교육을 통해서 행복을 추구하고자 모든 것을 헌신하고 있지요. 그런데 힘들게 노력하는 것에 비해서 참으로 외롭고 힘든 시대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인 것 같다. 그렇게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늘 불안하고 허전하며 평화롭지 못하고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가 노력하는 만큼의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길은 과연 어디에 있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시대보다도 훨씬 전인 지금으로부터 이천 오백 년 전 그리스 로마시대는 특히 인간의 행복에 대해서 아주 깊이 연구하고 활발하게 토론했던 시기입니다. 그 당시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인간의 행복론에 관하여 깊게 연구했고 책 또한 많이 썼지요. 그 당시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행복론에 대한 대표적인 학파로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가 있다. 일반적으로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주의를 추구하는 학파로, 또 스토아학파는 금욕주의를 추구하는 학파로 알려져 있는데 중요한 것은 두 학파 모두가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또 그것이 어떻게 지속될 수 있는지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는 것. 좀더 파고들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흔히 쾌락주의의 선봉자로 알려진 에피쿠로스학파는 인간 행복의 출발을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에서 시작하였다. 좋은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추구해 보고 그것이 나쁘면 다시 더 좋은 것을 추구하는 식으로 인간의 욕구에 따라 움직였지요. 좋은 음식을 먹고 더 좋은 옷을 입으며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면 더 좋은 것을 추구하는 등 행복의 출발을 육체적인 쾌락을 만족시키는 오감에서부터 시작했지요. 그에 비해서 스토아학파는 인간의 참된 행복은 좋은 것을 먹고 입는 등 오감을 만족시키는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욕망을 자제하여 정신과 영혼을 풍요롭게 할 때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금욕주의가 발달했지요. 이렇게 각자 다른 관점으로 출발한 두 학파 중에 오래지 않아 에피쿠로스학파가 없어지고, 스토아학파는 그리스도교 신학과 철학의 바탕이 되어 천주교 신학의 밑바탕이 되었다. 많은 수도자들과 신학자들이 스토아학파에 영향을 받아서 오늘날의 신학을 형성하였지요. 궁극적으로 사람은 입고 먹는 등 인간의 본능을 충족시키는 데에서는 행복을 이룰 수가 없다. 이것이 인류 역사 속에서 많은 철학가나 신학자들에 의해 내려진 결론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에피쿠로스학파 사람들 같은 사람들로 온통 넘쳐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원하며 더 좋은 것, 또 더 좋은 것을 끝없이 찾아 헤매면서 행복해지기를 꿈꾸고 있다. 한쪽에서는 끊임없이 소비하고 또 한쪽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추구하고 있지요. 그렇게 먹고 입고 소비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더 많이 벌어야 하고 더 많은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밤낮없이 노력하면 행복할 줄 알았던 사람들에게 오히려 늘어난 것은 걱정거리요, 두려움이라는 사실입니다. 너무 먹고 마신 결과 많은 사람들이 고혈압과 비만, 당뇨병 등으로 생명이 위태롭게 되었지요. 이제는 먹는 것을 자제하느라고 전쟁을 겪고 있다. 마치 수도자들처럼 살아야 병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국민 건강을 위하여 정부 차원에서 비만과 싸우는 나라들이 늘어가고 있지요. 또 많은 재산과 사회적 성공이 행복을 가져다 주리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추구했지만 결과적으로 얻은 것은 끝없는 피곤과 불안감뿐입니다. 그 결과 '이래서 되겠는가? 정말 삶의 참된 행복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하는 심각한 성찰이 터져 나왔지요. 1960년대 미국의 히피족이나 요즈음 우리 시대의 웰빙 문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장사꾼들의 잇속이 개입되어 이 웰빙 문화가 좀 천박해졌지요. 실은 정신과 영혼의 안락함을 위해서 추구한 것이 웰빙 문화로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덜 먹고 덜 입으며 자연으로 돌아가려고 애쓰며 참된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자녀 교육을 통해서 행복을 보장받으려고 본능적으로 매달리고 있지요. 그 결과 또한 기대했던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헌신해서 자녀 교육에 바쳤는데 얻은 것은 외로움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투자하고 노력했지만 노후에 노력한 만큼의 뒷바라지를 받기는커녕 늙어서도 계속 자식 뒷바라지를 해야 하고, 물려줄 재산이 없으면 소외되어 길거리에 나가 앉는 경우가 그 어느 시대보다도 많은 불행한 시대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입니다. 그러면 참된 행복은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추구하는 재산이나 건강, 자녀 교육에서는 인간의 참된 행복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요? 아니지요. 거기에 행복이 있다. 그것이 삶의 기본인데 그것을 떠나서 어디서 행복을 추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행복이 있는 그 곳에서 우리는 왜 불행만을 만나고 있는 것일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재물과 건강과 자녀 교육에 있어서 하느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어졌기 때문이지요. 하느님 사랑과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사랑이 없이 단지 현세적인 안락함만을 위하여 재물을 추구하고 건강을, 자녀 교육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인격과 도덕이 밑받침되지 않은 재물은 이웃에게 아픔을 주고 본인에게는 갈증만을 줄 뿐입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효가 바탕이 되지 않은 재물은 언제든지 그 관계를 해칠 수가 있지요. 건강도 마찬가지고 자녀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 교육에 있어서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 없이 이기적이고 출세 지향적인 아이로 키우는 것이 어떠한 결과가 가져오는지를 우리 시대는 너무나도 잘 알게 되었지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 바탕이 된 재물은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모두를 잘 살게 하지요. 또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자녀 교육은 인류를 평화롭게 하고 번성시키는데 기여합니다. 건강도 마찬가지이지요. 우리 시대에 참된 행복을 찾기 어려운 이유는 가장 중요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지요. 예수님께서 참된 행복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그 핵심은 궁극적으로 하느님께만 미래의 희망을 두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추구하는 재산과 건강, 자녀 교육과 출세는 참된 평화와 영원한 삶을 가져다 줄 것.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의 인간의 삶이 힘겨운 이유는 그 방향과 기본 출발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바탕이 되지 않았기에 열심히 노력할수록 오히려 어려움만 가중되고 있는 것이지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뒷받침되지 않은 재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뒷받침되지 않은 출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뒷받침되지 않은 권력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눈물을 자아내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은 하느님 안에 있음을 누누이 가르쳐 주셨다. 먹고 마시며 소비해 가는 행복 추구로는 결국 우리 모두가 다 죽을 수밖에 없다. 지금도 오염되고 파괴된 지구가 가리키고 있는 생명시계가 절망의 끝인 12시를 향해 달음질치고 있다고 하지요. 스토아학파의 자기 절제, 정신과 영혼을 키우는 노력들이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가져다주는 바탕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우리의 참된 행복은 하느님 안에서 질서를 잡을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재물과 건강, 모든 출세와 자녀 교육도 그 때 더 풍요로울 수 있음을 기억하고, 하느님께서 주신 참된 행복을 찾아 누리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누구를 만나든지 고맙다고 즐겁다고 말하면서 자꾸만 웃어주면서 이웃에게 기쁨을 주고, 주님께는 영광을 드리는 축복된 감사의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진리는 적이건 아군이건 모두 초월한다.'' - 쉴러 - |
♡2140회 발끈한다는 말은 공격받는 것에 대해 우리의 ‘자아’ 가 반응한다는 뜻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6월 27일(에제키엘 1장~) 라 로슈푸코는 ''세상 사람들이 다 없어져도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다. 하물며 자기가 없으면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은 더 큰 잘못이다.'' 《초심을 잃지 않는 지혜》훌륭한 인물이 되고, 중요한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마음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첫째는 초심, 둘째는 열심, 그리고 셋째는 뒷심입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마음이 초심입니다. 그 이유는 초심 속에 열심과 뒷심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초심에서 열심히 나오고, 초심을 잃지 않을 때 뒷심도 나오기 때문입니다. 초심이란 무슨 일을 시작할 때 처음 품는 마음입니다. 처음에 다짐하는 마음입니다. 초심이란 첫 사랑의 마음입니다. 초심이란 겸손한 마음입니다. 초심이란 순수한 마음입니다. 초심이란 배우는 마음입니다. 초심이란 견습생이 품는 마음입니다. 초심이란 동심입니다. 피카소는 동심을 가꾸는 데 40년이 걸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초심처럼 좋은 것이 없습니다. 가장 지혜로운 삶은 영원한 초심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 되고, 무엇을 이루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그때 우리가 점검해야 할 마음이 초심입니다. 우리 인생의 위기는 초심을 상실할 때 찾아옵니다. 초심을 상실했다는 것은 교만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열정이 식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겸손히 배우려는 마음을 상실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정기적으로 마음을 관찰해야 합니다. 초심과 얼마나 거리가 떨어져 있는지 초심을 상실하지는 않았는지 관찰해 보아야 합니다. 초심은 사랑과 같아서 날마다 가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랑은 전등이 아니라 촛불과 같습니다. 전등은 가꾸지 않아도 되지만 촛불은 가꾸지 않으면 쉽게 꺼지고 맙니다. 우리 ‘영성의 수준’ 은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가 발끈할 때를 돌아봅니다. 타인으로부터 받는, 혹은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반응하고 발끈한다면 딱 우리의 수준이 거기까지입니다. 발끈한다는 말은 공격받는 것에 대해 우리의 ‘자아’ 가 반응한다는 뜻입니다. 큰 개나 큰 물고기와 같은 동물들은 작은 물고기나 고양이가 괴롭혀도 별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수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싸우겠다고 으르렁거리면 비슷한 수준이란 뜻입니다. 만약 우리가 자전거를 배우고 있다면 뒤에서 아버지가 자전거를 잡아주고 계실 것. 그런데 거센 바람에 두려워하고 길이 울퉁불퉁해서 소리를 지른다면 뒤에서 잡아주시는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자신을 버리고 주님께 신뢰를 두는 사람은 세상 것에 두려워 반응하거나 발끈하지 않습니다. 유튜브로만 보았지만 존경하는 목사님 중의 한 분이 박보영 목사입니다. 그분은 의사를 하다가 모든 재산을 다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길거리 아이들을 키우며 목회를 시작했던 분입니다. 그분을 존경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 사건 때문입니다. 한 번은 자신이 키우는 여자아이가 길거리 생활을 다시 하기 위해 가출했습니다. 몇 주 뒤에 아이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학교에 통사정하고 다시 다니게 하였다. 그런데 학교에서 목사님을 부르더라는 것. 그 이유는 아이가 임신한 상태인데 그 아버지가 목사님이라고 아이가 말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집으로 데려올 때 등 뒤에서 선생님들의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들었다. 그러나 목사님은 반응하지 않았다. 아이에게도 뭐라 하지도 않았다. 아이는 죄책감을 견딜 수 없어 목사님의 아이가 아니라 가출했을 때 만난 오빠의 아이라고 실토하였다. 어떻게 자신을 흉악한 범죄자 취급을 하며 욕을 하는데 반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자신을 그렇게 만든 은혜를 원수로 갚는 아이에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자기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아는 반응하지 않습니다. 영성은 자아를 얼마나 죽이느냐에 달려있다. 저는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 발끈하면 나의 영성은 거기까지입니다. 비오 신부님은 사제 서품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몸에 오상을 받으셨다. 신자들은 성인 신부님으로 좋아했지만 몇몇 고의 성직자들은 그것을 마귀의 장난으로 여겼고 그렇게 보고하여 교회는 신부님이 신자들과 함께 하는 미사를 금지했다. 신부님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렇게 순종하여 혼자 몇 년 동안 미사를 드렸다. 이런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지만 신부님은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이미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를 받을 때 그분의 자아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분 영성의 수준입니다. 지금 이 순간 어떤 일에 자주 발끈한다면 나의 수준이 거기까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어렸을 때 자주 꾸던 꿈이 슈퍼맨이 되어 하늘을 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높이 날아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계속 건물과 산에 부딪혀서 떨어졌다. 우리 영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위로 오르는 방법은 그리스도처럼 못 박히는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실 때 참지 못하시고 발끈하셨다면 이 지구상에 어떤 생명체도 생존할 수 없었을 것. 그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눈 한 번 깜빡이는 것으로 모든 인간을 재로 만들어버리실 수도 있으십니다. 만약 그러하시다면 그분은 하느님이 아니실 것.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되시기 위해 그분은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는 인간들의 공격을 그대로 받아들이셨다. 그 못들에 의지하여 하늘로 높이 들리우셨다. 그리고 당신처럼 지상의 어떠한 것에도 반응하는 수준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들을 귀 있는 우리들은 들으십시오. 우리들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이제 주 하느님이 지으신 모든 것들을 언제나 축복하며 살아가는 축복의 통로가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만약 제군이 돈의 가치를 알고 싶으면 나가서 얼마간의 돈을 빌려 보라.'' - 프랭클린 - |
♡2141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6월 28일(에제키엘 21장~) 에센바흐는 ''자신이 의식하고 있는 겸손은 죽어 있는 것이다.'' 《내가 알게 된 참된 겸손》책을 읽다가 '겸손은 땅이다.' 라는 대목에 눈길이 멈췄다. 겸손은 땅처럼 낮고 밟히고 쓰레기까지 받아들이면서도 그곳에서 생명을 일으키고 풍성하게 자라 열매맺게 한다는 것. 더 놀란 것은 그동안 내가 생각한 겸손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나는 겸손을 내 몸 높이로 보았다. 몸 위쪽이 아닌 내 발만큼만 낮아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겸손은 그게 아니었다. 내 발이 아니라 그 아래로 더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밟히고 눌리고 다져지고 아픈 것이 겸손이었다. 그 밟힘과 아픔과 애태움 속에서 나는 쓰러진 채 침묵하지만 남이 탄생하고 자라 열매맺는 것이었다. 겸손은 나무도 물도 바람도 아닌 땅이었다.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루카 1,57-58)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엘리사벳의 일을 기뻐하면서 축하하였다.” 이웃과 친척들은 태어난 아기가 어떤 아기인지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생각만 했고, 자기들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만일에 그들이 세례자 요한의 사명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또 요한의 탄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더라면, 그들은 자기들이 주님의 큰 자비를 받았음을 알았을 것이고, 크게 기뻐했을 것.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메시아 강생의 서막과 같은 일이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인류 모두에게 큰 자비를 베푸신 일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경축하는 대축일을 지내는 것은, 사실은 우리가 ‘주님의 큰 자비’ 를 받은 것을 경축하는 것입니다. “......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65-66) 세례자 요한의 탄생 전후에 일어난 일들을 직접 목격했거나 전해들은 사람들은 태어난 아기가 특별하다는 것을 느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사람들이 보기에 주님의 손길이 그 아기를 보살피고 계신 것으로 보였다.” 사람들은 ‘주님의 손길’ 이 자기들을 보살피고 계시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 을 보살피고 계시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을 인간 세상으로 보내셨다.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사람들이 아기의 미래에만 관심을 가졌고, 하느님께서 그 아기를 통해서 무엇을 하시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세례자 요한이라는 인물은 “하느님께서 그를 통해서 하신 일이 무엇인가?” 때문에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가 누구이며, 무슨 일을 했는가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사명과 그를 통해서 하신 일 안에서만 의미가 있다. 세례자 요한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은 모두 그렇다. 천사가 전해 준 기쁜 소식을 믿지 못해서 말을 못하게 되었던 즈카르야는 아기가 태어난 뒤에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으면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가 처음으로 한 말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이었다.(루카 1,64) 그때 즈카르야가 말한 ‘하느님 찬미’ 는 루카복음 1장 68절-79절의 ‘즈카르야의 노래’ 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즈카르야는 이 찬미가를 통해서 세례자 요한의 탄생의 의미와 요한의 사명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루카 1,76-79) ‘즈카르야의 노래’ 는 전체적으로 하느님과 메시아를 찬미하는 노래이고, 세례자 요한에 관한 내용은 조금밖에 없다. 이것은 그의 탄생의 진정한 의미는 ‘메시아 강생’ 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메시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들에게 ‘용서’ 와 ‘구원’ 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그 용서와 구원을 받으려면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보다 먼저 와서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일을 했다. 그것은 메시아께서 하실 일을 미리 준비한 일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메시아를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미리 준비시킨 일이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버리실 것이다."(루카 3,16-17)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메시아이신 분이고,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께서 하실 일을 미리 준비한 예언자이기 때문에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라는 요한의 말은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표현한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알곡’ 과 ‘쭉정이’ 에 관한 말 때문에, “혹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구세주가 아닌 심판관으로 오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라고 물을 수도 있다. 만일에 그렇게 오해하고 있었다면 그가 선포한 회개는 단순히 심판과 처벌을 피하기 위한 소극적인 회개로 그칠 것.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 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은 사실상 심판을 선택하는 것과 같다는 점을 생각하면, 예수님을 ‘구원하시는 분’ 으로 올바르게 알고 있었어도 심판을 언급할 수밖에 없었을 것. 세례자 요한은 심판과 처벌을 피하기 위한 소극적인 회개를 선포한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기 위한 적극적인 회개를 선포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루카 3,8).”라는 말이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이 말은, 형식적인 회개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회개, 또 삶으로 실천하는 회개를 하라는 뜻인데, 회개해서 새 사람이 되었을 때의 기쁨과 구원에 대한 희망 등을 바탕으로 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회개를 하라고 강조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떠났지만, 그의 회개 선포는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인 일입니다. 인류 구원 사업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모든 사람’ 은 회개해야 할 존재일 뿐입니다. 넓고 편한 길 보다 불편하고 좁은 길이지라도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끝까지 따를 수 있고, 또한 우리들이 주님의 말씀을 믿고 말씀에 순명하면 그대로 될 것임을 믿으면서 반드시 수지맞는 길, 축복된 은총의 길을 가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사랑이란 늙는다는 것을 모른다.'' - 스땅달 - |
💖성령봉사자 박재만 세례자요한 010 - 3878 - 6634
(수필가ㆍ전국성령쇄신봉사자협의회 말씀추천강사)
💖성령봉사자 류태숙 M.막달레나 010 - 6560 - 7354
(시인ㆍ수필가ㆍ꽃예술설화중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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