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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기도회 봉사

♡2123회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 ♡ ''독수리는 마지막 성공을 거둘 때까지 온 생명을 바쳐 노력한다.'' - 여안교 -

♡2123회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6월 10일(토빗기 1장~)

  칼 메닝거는 ''사랑은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를 치료한다.''

《가장 소중한 약속》가장 소중한 약속이 있다. 친구와의 약속을 어기면 우정이 금이 갑니다. 자식과의 약속을 어기면 존경이 사라집니다. 기업과의 약속을 어기면 거래가 끊어집니다. 지구와의 약속을 어기면 환경이 파괴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메모를 해 가며 약속을 지킵니다. 하지만, 꼭 지키지 않아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약속도 있다. 올해부터 기필코 담배를 끊어야지. 이번 달부터는 정말 열심히 영어 학원엘 다녀야지. 일주일에 한 권은 꼭 책을 읽어야지. 오늘은 퇴근하자마자 바로 집에 들어가야지 그렇다. 바로 나 자신과의 약속입니다. 약속을 어겼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기에 그리고 그 때 그 때 쉽게 스스로를 용서해 주기에 우리는 나 자신과의 약속엔 별로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나를 못 믿는다면 세상엔 나를 믿어줄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금 이 순간 맨 먼저 지키십시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약속인지도 모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마태 7,1-2)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 18,15)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루카 17,3ㄴ) 남을 심판하는 일과 죄를 지은 형제를 꾸짖고 타이르는 일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죄를 지은 형제를 꾸짖고 타이르는 일은 형제로서, 또 같은 죄인으로서 그 형제를 치유하고 회복시켜 주기 위한 사랑 실천이지만, 남을 심판하는 일은 마치 자기가 하느님이라도 된 것처럼 다른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죄인 취급하는 일이고, 사랑을 거스르는 일이고,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죄를 지은 형제를 꾸짖고 타이르면서도 그를 심판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형제를(남을) 대하는 기본 원칙은 ‘형제애 실천’ 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형제를 꾸짖고 타이르는 일도 모두 형제애를 실천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함부로 남을 심판하는 모습이 요한복음에 나옵니다. “성전 경비병들이 돌아오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 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고 성전 경비병들이 대답하자, 바리사이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최고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요한 7,45-49) 이 이야기에 나오는 성전 경비병들이 예수님을 체포하지 않은 것은 잘못한 일이 아니라 잘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의 지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성전 경비병들에게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라고 말합니다. ‘저주받은 자들이다.’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죄인들이다.” 바로 이 말이 함부로 남을 심판하는 말입니다.

 사제들과 바리사이들 자신들은 구원이 보장되어 있다는 오만한 생각이 들어 있는 말입니다. 이처럼 남을 심판하는 말을 하는 죄는 교만죄와 합해져 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 7,3-5)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루카 17,3ㄴ)라는 말씀과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 ‘티’ 와 ‘들보’ 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죄 지은 형제를 꾸짖고 타이르는 일도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형제를 꾸짖고 타이르기 전에 먼저 회개부터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형제를 도와주는 일도 소홀히 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죄 지은 형제를 꾸짖고 타이르는 일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실천해야 할 ‘형제애’ 입니다. 그 일은 아픈 형제를 치료해서 건강을 회복시켜 주는 일과 같다. 공동체는 한 몸이기 때문에, 형제가 아프면 나도 아프게 됩니다. 형제가 건강해지는 것은 나의 건강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먼저 건강한 상태로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형제를 도와줄 수 있다. 예수님 말씀의 표현과는 반대로 형제의 눈 속에 들보가 있고 나의 눈 속에 티가 있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 우선 먼저 나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야 형제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내 줄 수 있다. 만일에 나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고, 형제는 가벼운 병에 걸린 상태라면, 형제를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것은 위험한 일이 됩니다. 우선 먼저 나부터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하고, 형제를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먼저 나의 건강 상태부터 확인해야 하는 것. 자녀가 고해성사를 보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기를 바란다면, 부모가 먼저 고해성사를 보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만일에 부모 자신은 고해성사도 안 보고, 기도생활도 안 하면서, 자녀에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라고 강요한다면, 그것은 ‘위선’ 입니다.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 사이에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케파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나는 그를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그가 단죄 받을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기 전에는 다른 민족들과 함께 음식을 먹더니, 그들이 오자 할례 받은 자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몸을 사리며 다른 민족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던 것. 나머지 유다인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저지르고, 바르나바까지도 그들과 함께 위선에 빠졌다.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올바른 길을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케파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유다인이면서도 유다인으로 살지 않고 이민족처럼 살면서, 어떻게 이민족들에게는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갈라 2,11-14)” 여기서 ‘케파’ 는 베드로 사도입니다.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바오로 사도는 베드로 사도의 실수를 비판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반성했을 것. 여기서 중요한 점은 비판을 받은 베드로 사도의 반응입니다. 아마도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바오로 사도의 비판을 겸손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만일에 베드로 사도가 “너나 잘해라.” 같은 반응을 보였다면, 위대한 사도로 존경받지는 못했을 것. 교회 공동체는 분열되거나 큰 상처를 입었을 것. 비판하는 사람 쪽에서 자신의 들보를 먼저 반성하는 일도 중요하고, 그 비판을 받는 쪽에서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일도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평화의 마음을 담아... 누군가와 화해를 하고 배려하며 이해하고 받아들여 날마다 하느님의 자비가 넘치는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의심스러운 친구는 확실한 적보다 더 나쁘다.'' - 이솝 -

♡2124회 . 하늘이 땅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땅이 하늘에 종속되어 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6월 11일(유딧기 1장~)

  헨리 제임즈는 ''남과 교제할 때, 먼저 잊어서는 안될 일은 상대방에게는 상대방 나름대로의 생활방식이 있으므로
혼란스럽게 하지 않도록 남의 인생에 함부로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알게 된 참된 겸손》책을 읽다가 '겸손은 땅이다.' 라는 대목에 눈길이 멈췄다. 겸손은 땅처럼 낮고 밟히고 쓰레기까지 받아들이면서도 그곳에서 생명을 일으키고 풍성하게 자라 열매맺게 한다는 것. 더 놀란 것은 그동안 내가 생각한 겸손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나는 겸손을 내 몸 높이로 보았다. 몸 위쪽이 아닌 내 발만큼만 낮아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겸손은 그게 아니었다. 내 발이 아니라 그 아래로 더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밟히고 눌리고 다져지고 아픈 것이 겸손이었다. 그 밟힘과 아픔과 애태움 속에서 나는 쓰러진 채 침묵하지만 남이 탄생하고 자라 열매맺는 것이었다. 겸손은 나무도 물도 바람도 아닌 땅이었다.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5-19)”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희는 나를 ‘무엇으로’(어떤 존재로) 생각하고 있느냐?”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저희는,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며,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세주라고 믿고 있습니다.” 표현만 보면 베드로 사도의 말에는 믿는다는 말이 없지만, 뜻을 생각하면, 그의 말에는 믿는다는 뜻이 들어 있다. 베드로 사도의 말은 ‘신앙고백’ 입니다. “너는 행복하다!”  “너는 복되다.”, 즉 “너는 하느님의 복을 충만히 받았다.” 라는 뜻입니다.

 “살과 피가 아니라” “인간적인 지식이 아니라” 라는 뜻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은 인간적인 지식에서 나온 고백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특별히 너를 선택하셔서 너에게 계시를 내려 주셨기 때문이다.” 라는 뜻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특별히 선택된 사람이라는 점에서도 ‘복된 사람’ 이고, 계시를 받았다는 점에서도 ‘복된 사람’ 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사람을 선택하셔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 주신 일은, 베드로 사도가 처음은 아니고, 세례자 요한에게도 그렇게 하셨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증언했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3-34) 세례자 요한이 언제 어떻게 계시를 받았는지는 몰라도, 그 일은 그에게 임무를 맡기신 하느님께서 그의 임무 수행을 도와주신 일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에게 임무를 맡기고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라,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언제 어떻게 계시를 받았는지는 모릅니다. 어떤 특별한 체험을 했는지, 아니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령의 인도를 받았는지... 하느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특별히 선택하신 것은, 또 예수님께서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것은, 그가 그럴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계시를 내려 주신 것은, 예수님께서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을 도와주신 일로, 또는 그가 교회의 반석으로서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그를 도와주신 일로 해석할 수 있다.

 베드로 사도가 지도자로서 전체 교회를 다스린 일은, 교회라는 건물을 잘 지탱하는 반석과 같은 일을 한 것.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그것’ 은 교회입니다. 이 말씀은 교회를 지켜 주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저승의 세력’ ‘죽음의 세력’ ‘악의 세력’ 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죽음의 세력’ 으로 해석한다면, 예수님 말씀은 교회의 멸망을 막아주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이 되고, ‘악의 세력’ 으로 해석한다면, 예수님 말씀은 교회를 사탄의 공격에서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이 됩니다. 어떻게 해석하든지 간에 우리 교회는 예수님(성령)께서 지켜주시는 교회입니다. 그 보호는 자동적이고 무조건적인 보호가 아닙니다. 교회 자신도(우리도)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성령의 보호는 지금 이 순간 보호받을 자격을 갖춘 사람들만 받게 됩니다. 만일에 타락하고 부패한다면, 그것은 주시는 보호를 거부하는 것과 같다. ‘하늘나라의 열쇠’ 는 교회를 다스리는 권한과 임무입니다. 교회는 하늘나라로 가는 통로이고 문입니다. 따라서 교회를 다스리는 지도자의 권한과 임무는 열쇠로 그 문을 열거나 닫는 일과 같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표현만 보면, “땅이 결정하는 대로 하늘이 따라 하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으로 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하늘이 땅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땅이 하늘에 종속되어 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권한을 아주 넘겨받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대리인일 뿐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뜻에 합당하게만 권한을 사용해야 하고,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네가 무엇이든지 맬 때에는 하느님께서 매기를 바라시는 대로 매야 하고, 네가 무엇이든지 풀 때에는 하느님께서 풀기를 바라시는 대로 풀어야 한다.” 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행하면, 결과적으로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것처럼 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매기를 바라시는지 풀기를 바라시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잘 모를 때가 많기 때문에 교회 지도자와 봉사자들은 남들보다 더욱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지금 이 순간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열쇠’ 라는 말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루카 11,52)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교회 지도자들에게) ‘열쇠’ 를 주신 것은, ‘한 사람이라도 더’ 모든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라는 뜻입니다. 만일에 열쇠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임무 수행을 하지 않거나 잘못 수행한다면, 그래서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는커녕 그 길을 막아버린다면,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을 꾸짖으신 것처럼 교회 지도자와 봉사자들을 엄하게 꾸짖으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 내 자신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  모두가 편안해지는 은혜로운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나에게 혼자 파라다이스에서 살게 하는 것보다 더 큰 형벌은 없을 것이다.'' -괴테- 


♡2126회 음식은 자기가 뱉은 걸 먹을 수 있지만 말은 자기가 뱉은 걸 먹을 수 없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6월 13일(마카베오하 11장~)

  채근담에 ''사람과 더불어 허물은 같이할지언정 공은 같이하지 못할지니, 공을 같이하면 서로 시기하게 되느니라. 사람과 더불어 환란은 같이 할지언정 안락은 같이 못할지니 안락을 같이하면 서로 원수가 될 것이니라.''

《책속의 한줄》몸만 안으면 포옹이지만, 마음까지 안으면 포용이다. 운명이란 말을 쓰지 마라. 쓰는 순간 당신 삶의 주인은 운명이 된다. 행복은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는 것이다. 행복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기에 참사랑은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믿음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인연의 교차로엔 신호등이 없다. 스치던, 멈추던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젊음을 이기는 화장품도 없고, 세월을 이기는 약도 없다. 닫힌 마음을 열 수 있는 건 당신뿐이다. 마음의 비밀번호는 오직 당신만 알기에 음식은 자기가 뱉은 걸 먹을 수 있지만 말은 자기가 뱉은 걸 먹을 수 없다. 영국 대처 수상의 아버지도 대처에게 늘 이 말을 해줬다고 한다. “생각을 조심해라 말이 된다. 말을 조심해라 행동이 된다. 행동을 조심해라 습관이 된다. 습관을 조심해라 성격이 된다. 성격을 조심해라 운명이 된다. 우리는 생각하는 대로 된다.” 서로간 편하다고 함부로 대하지 말고, 잘해 준다고 무시하지 말고, 져 준다고 만만하게 보지 말고 곁에 있을 때 잘 해라. 늘 한결 같다고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사람 마음 한순간 이다. 실수가 계속되면 실망하게 되고, 실망이 계속되면 포기하게 되고, 포기가 계속되면 외면하게 된다. 사람이 사람에게 등 돌리는게 쉽다. 소중한 사람을 놓치지 않으려면 그러니까 계속 노력해야 한다. 나에게 소중한 사람은? 대단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 함께 밥을 먹고 전화를 걸고. 오늘의 이야기를 나눌수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오늘도 당신을 응원하고 비록 많이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이지만, 좋은 친구로 남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지옥이 없는 것처럼 살고 있다. 예수님은 있다고 하시는데 왜 어떤 분들은 없다고 가르치는 것일까요? 면담을 할 때 자주 인용합니다만 어떤 신부님은 자신과 화해하고 화가 날 때는 화를 내고 성욕이 올라올 때는 굳이 막으려 하지 말라고까지 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라고 하시고,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라고 가르치십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루카 11,42; 마태 23,23)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지금 십일조에 대해 말하면 마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아닌 것을 가르치는 듯 이상하게 바라봅니다. 마치 지옥도 없다고 말하고, 화를 내도 되고 성욕도 좋은 것이라고 말하며 십일조와 같은 것들은 개신교나 하는 것이라고 말하면 자비로운 봉사자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나 

 그러나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어쩌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왜 율법에서 아주 작은 계명이라도 소홀히 하면 안 될까요? 모든 율법을 하나로 모으면 ‘사랑’ 이란 한 자가 나옵니다. 율법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총합과 같다고 볼 수 있다. 하느님의 본성이 표현된 것이 율법입니다. 그러니 율법 자체는 하느님처럼 완전할 수밖에 없는 것. 만약 모자이크나 훌륭한 작품에서 어떤 한 조각이 빠지면 완전한 작품이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아주 작은 율법이라도 어기거나 또 그래도 된다고 말하면 하느님의 모습을 그만큼 훼손하는 것과 같다. 그런 자세로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 사람이 가져간 작품은 무언가 빠져있거나 불완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작은 율법 가운데 자신의 입맛에 맞는 것만 지키고 나머지는 바꿔버리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교만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이 하느님의 생각보다 나을 수 있다고 믿는 것. 그래서 율법까지도 자기 뜻대로 변형시키게 됩니다.

 5천 명의 시민이 사는 스페인 북부 작은 시골 마을 보르하의 한 성당에는 19세기 화가 엘리아스 가르시아의 벽화 ‘에체 호모(여기 사람이 있다)’ 가 그려져 있었다. 붉은 망토를 걸치고 가시관을 쓰고 깊고 그윽한 눈빛으로 하늘을 응시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린 매우 정밀한 걸작이었다. 그런데 히메네스라고 하는 할머니가 성당 청소를 하다가 습기 때문에 벗겨진 그 그림을 보고 안타까워했다. 그려진 예수님께 뭐라도 해 드리고 싶어서 벗겨진 부분을 물감으로 덧칠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결과는 예수님의 얼굴을 마치 원숭이처럼 만들어버린 것. 이에 화가의 손녀에게 소송을 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습니다. 물론 이 사건이 신문에 나자 오히려 그 그림을 보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몰려 시에 큰 화젯거리가 되었다. 우리도 살다 보면 하느님의 법을 우리가 수정할 수 있다고 교만해질 수 있다. 지옥이 있다면 있다고 믿고, 십일조를 내라고 하셨다면 내고,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셨다면 그러려는 노력을 시작합시다. 우리는 주님 앞에 우리가 그린 하느님의 법을 들고 올라가야 합니다. 저런 식으로 하느님의 법을 망쳐놓았고 그것을 가져간다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율법은 하느님 본성인 사랑을 그려낸 걸작입니다. 거기에 인간이 손을 댔다가는 훼손만 될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새겨봅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어제의 사람의 자리에서 겪었던 아픔, 힘듦, 어려움을 보듬어 주시는 주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고, 오늘의 삶의 자리를 아름답게 이끌어주시는 주 예수님의 따뜻한 손길을 느끼면서 우리들에게 주어진 일을 통해 예수님을 담아내는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사람의 가치는 타인과의 관계로서만 측정될 수 있다.''
  - 니체 - 

♡2127회 “도움을 받은 사람이 그 도움에 대해서 진심으로 고마워하는가? 아닌가?”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6월 14일(욥기 1장~)

  독일 속담에 ''술이 만든 친구는 그 술처럼 하룻밤뿐이다.''
 《안되면 "되고법칙" 을 적용해라.》돈이 없으면 벌면 되고, 잘못이 있으면 잘못은 고치면 되고, 잘 안되는 것이 있으면 되게 하면 되고, 모르는게 있으면 배우면 되고, 부족하면 메우면 되고, 힘이 부족하면 힘을 기르면 되고, 길이 안 보이면 길을 찾을 때까지 찾으면 되고,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면 되고, 기술이 없으면 머리를 써서 연구하면 되고, 내가 믿고 사는 세상에 살고 싶으면 거짓말로 속이지 않으면 되고, 미워하지 않고 사는 세상을 원하면 사랑하고 용서하고 배려 하면 되고, 사랑 받으며 살고 싶으면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진실하면 되고, 그래도 사랑받지 못하면 받을때까지 꾸준히 노력하면 되고, 노력해도 안되면 상대방 탓 하지말고 부족한 나를 인정하고 보내면 되고, 세상을 여유롭게 살고 싶으면 물 흘러가는 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되고, 이와 같이 되고법칙에 대입해서 인생을 살아가면 안 되는 것이 없을 것이다. 해보라,,! 된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1-4).”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위선적인 자선을 하는 것보다는 자선을 베푸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낫다.” 라는 뜻은 들어 있지 않다. 신앙인이 자선을 베푸는 일을 전혀 하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자선을 베푸는 일을 해야 하는데,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는 지금 이 순간 욕망을 버리고, 하느님께 기쁨을 드린다는 생각만 해야 합니다. 여기서 아버지께서 상을 주실 것이고, 갚아 주실 것이라는 말씀은, 예수님 입장에서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하느님의 보상을 ‘기대’ 하고 ‘희망’ 하기는 해도 그것을 ‘요구’ 할 권한은 없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보상은 언제나 항상 무상으로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 은혜는 우리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큰 은혜입니다. 만일에 미리 맡겨 놓은 자기의 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은 태도로 하느님께 보상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을 자격을 스스로 잃어버리는 교만죄가 됩니다.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싶어서 자선을 베풀었다고 해도, 그래도 어떻든 그 자선 덕분에 도움을 받은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동기는 위선이라고 해도 결과만 보면 선행이 아닌가? 선행이라면 칭찬받아야 하지 않는가?” 라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서는 ‘동기’ 가 강조되고 있는데, 마태오복음 25장의 ‘최후의 심판’ 을 보면 '동기' 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결과’ 만 강조되어 있다. 자선을 베푸는 일을 한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했는지를 남들이 판단하기는 어렵고, 실제로 도움을 받은 사람이 있다는 그 결과만 보고서 선행이라고 판단하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자선을 베푸는 사람 자신도, 자기가 하는 일이 위선인지 아닌지를 구분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다. 그래도 한 가지 식별 기준이 있는데, 그것은 “도움을 받은 사람이 그 도움에 대해서 진심으로 고마워하는가? 아닌가?” 입니다. 도움을 받은 사람이 진심으로 고마워한다면, 도움을 준 사람을 위해서 기도를 하든지, 무엇인가를 하든지, 어떤 식으로든 은혜를 갚으려고 할 것. 그러나 도움을 받은 사람 쪽에서 고마움을 느끼기는커녕 자존심이 상하고, 상처만 입는 경우가 있는데, 위선자들이 위선적으로 자선을 베풀 때 그런 일이 실제로 생깁니다. 그 경우에 하느님께서 어떻게 판단하실까? 뭔가를 할수록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만 늘어난다면, 그것을 선행이라고 말할 수는 없고, 죄가 점점 더 커질 것.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5-6)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기도하는 척 하는 연기일 뿐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속이려고 하는 짓이고, 사람들을 속이는 짓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죄가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여라.” “세상일에(이웃의 사정에) 관심 갖지 말고 골방에서 기도만 하여라.” 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웃 사랑 없는 기도는 ‘실천 없는 믿음’ 이고, '실천 없는 믿음’ 은 ‘죽은 믿음’ 입니다.(야고 2,26) 이웃이 어떤 고통 속에 있는지 관심도 없이 골방에 숨어서 하는 기도는 기도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런 태도도 역시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16-18) 위선자들도 실제로 단식을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단식한다는 것을 드러내면서 자신의 신심과 고행을 사람들에게 과시합니다. 그런 위선자들의 단식과 신심은 하느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단식을 하면서도 안 하는 척 하면서 사람들을 속이라는 뜻은 아니고, 자신의 신심과 고행을 사람들에게 과시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 위선자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을 좋아할까? 아마도 하느님의 평가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지만, 사람들의 평가는 금방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기 때문일 것. 사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고 섬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위선자가 될 수 있다. 우리는 항상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신앙생활을 반성하고 성찰해야 합니다. 위선자가 되지 않도록 꾸준히 노력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위선자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려고 하지 말고 신앙생활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늘 의식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내 도움으로 살맛 나고, 가족과 이웃들이 희망이 있게 되는 믿음과 삶의 흔적으로 주님의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입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1퍼센트의 가능성, 그것이 나의 길이다.'' - 나폴레옹 -

♡2128회 우리는 ‘길의 끝’ 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만 생각해야 합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6월 15일(시편 1편~)

  마르크스아우렐리우스는 ''행동에 부주의하지 말며, 말에 혼동되지 말며, 생각에 방황하지 말라.''
 《내게 이런 삶을 살게 하여 주소서》연약할 때 자기를 알고 힘을 기를 줄 아는 여유와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는 대담성과 정직한 패배에 부끄러워 하지 않고 태연하며 승리에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을 갖게하여 주소서. 사리를 판단할 때 고집으로 인하여 판단을 흐리지 않게 하고 생각하고 이해하여 사심이 없는 판단을 하며 또한 평탄하고 안이한 길만이 삶의 전부라 생각치 말게 하고 고난에 직면할 때 분투 노력할 줄 알며 패자를 관용할 줄 알도록 가르쳐 주소서. 마음을 항상 깨끗이 하고 목표는 높이 설정하되 남을 정복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다스릴 줄 알며 장래를 바라봄과 동시에 지난 날을 잊지 않게 하여 주소서. 이에 더하여 삶을 엄숙하게 살아감은 물론 유머를 알고 삶을 즐길 줄 알게 하소서. 자기 자신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게 하시고, 겸허한 마음을 갖게 하여 참된 위대성은 소박함에 있음도 알게 하시고, 참된 지혜는 열린 마음에 있으며 참된 힘은 온유함에 있음을 명심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먼 훗날 내인생 헛되이 살지 않았노라고 말할 수 있게 하여 주소서.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거룩한 것’ 과 ‘진주’ 는 성사, 또는 성사를 통해 받게 되는 하느님의 은총을 뜻합니다. ‘개들’ 과 ‘돼지들’ 은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입니다.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 은총에 감사드리기는커녕 성사와 은총을 모독하고, 교회를 박해할 것.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의 권능을 돈으로 사려고 했던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몬은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이 주어지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돈을 가져다 바치면서, ‘저에게도 그런 권능을 주시어 제가 안수하는 사람마다 성령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사도 8,18-19) 그때 베드로 사도는 그에게 “그대가 하느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니, 그대는 그 돈과 함께 망할 것이오.” 라고 말했습니다.(사도 8,20) 만일에 성사에 관한 일을(은총을) 돈을 받고 파는 짓을 한다면, 그것은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는 것과 같은 일을 하는 것. ‘거룩한 것’ 을 “세례를 받은 신앙인” 으로, 개들에게 준다는 말을 세례받기 전의 생활로(미신을 믿는 생활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이 세상의 더러움에서 벗어난 그 사람들이 그것에 다시 말려들어 굴복을 당하게 되면, 그들의 끝은 처음보다 더 나빠집니다. 의로움의 길을 알고서도 자기들이 받은 거룩한 계명을 저버린다면, 차라리 그 길을 알지 못하였던 편이 나을 것입니다."(2베드 2,20-21) 신앙인은 예수님 덕분에 거룩해진 사람입니다.

 만일에 세례받기 전의 생활로 되돌아간다면, 그것은 자신이 받은 ‘거룩함’ 을 개들에게 주는 것과 같고, 거룩해진 자신을 개로 만들어버리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황금률’ 은 계명들과 율법들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 말씀이고, 계명들과 율법들의 기본정신을 표현한 말씀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것은 ‘하느님의 선과 사랑’ 입니다. 무엇이든지 ‘아무거나’ 받기를 희망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하느님의 선과 사랑을 실천하여라.” 입니다. 아무거나 내가 주고 싶은 것을 주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을 ‘순서’ 에 초점을 맞추어서, “너희가 이미 받았으니, 너희도 그대로 실천하여라.” 로 생각할 수도 있고, “받기를 바란다면, 너희가 먼저 그대로 실천하여라.” 로 생각할 수도 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서, 그 은총을 누리면서, 그 은총 속에서 살아가는 생활이고, 자신이 이미 받은 그 은총을 남에게 다시 나누어 주는 생활이기도 합니다. 받아서 누리는 것으로 그치면 안 됩니다. 남에게 다시 전해 주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지금처럼 앞으로도 계속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를 바라는 생활이고, 그것을 바란다면 이웃에게 먼저 선과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용서를 받기를 바란다면 먼저 이웃을 용서해야 합니다.(마태 6,14)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14) “넓든지 좁든지 간에 멸망으로 이끄는 문과 길로는 가지 말고, 생명으로 이끄는 문과 길로만 가라.” 신앙생활은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이 많이 가는 길을 버리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만 걸어가는 생활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께 했던 말이 연상됩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이곳을 떠나 유다로 가서, 하시는 일들을 제자들도 보게 하십시오.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남몰래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일들을 할 바에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십시오.’ 사실 예수님의 형제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요한 7,3-5) 여기서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예수님의 형제들’ 은 예수님께서 세속적인 명성을 얻기를 바라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또 ‘이런 일들을 할 바에는’ 그들이 ‘예수님의 일’ 을 세속의 일로만 생각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세속의 일’ 은 세속의 방식으로 하면 됩니다. ‘하느님의 일’ 은 하느님의 방식으로만 해야 합니다. 만일에 ‘하느님의 일’ 을 세속의 방식으로 한다면, 그 일은 ‘세속의 일’ 로 변질되어 버립니다.

 ‘좁은 문’ 에 관한 말씀에서 베드로 사도가 혼난 일도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1-23) 베드로 사도가 어떤 사심이 있어서 예수님을 말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스승님께서 ‘죽음의 길’ 을 가신다고 하니까 놀라서 그것을 말렸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그의 행동이 사탄의 행동과 같다고 꾸짖으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막는 것은 사탄이나 하는 짓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일’ 은 인류를 구원하는 일을 뜻하고, ‘사람의 일’ 은 몸의 편안함만 찾는 태도를 뜻합니다. 우리는 ‘길의 끝’ 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만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걸어가고 있는 길의 끝에 죽음과 멸망이 있다면, 길이 아무리 넓고 편해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길의 끝에 구원과 생명이 있다면, 길이 아무리 좁고 험해도 끝까지 걸어가야 합니다. 신앙인이 걸어가는 길이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고난의 가시밭길인 것은 아니고, 가다 보면 편안한 구간도 만나고 힘든 구간도 만나는데, 힘든 구간은 피하고 편안한 구간만 찾으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삶이 하느님의 자비를 느끼고, 하느님의 숨결을 함께 호흡하면서 매 순간 감사로 채워지는 축복된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태만은 천천히 움직이므로 가난이 곧 따라잡는다.'' - 프랭클린 -

♡2129회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6월 16일(시편 51편~)

  이솝에 ''안심하면서 먹는 한 조각 빵이 근심하면서 먹는 잔치보다 낫다.''
《희망을 가져라!》어떤 상황에서도 나답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을 굳게 먹고 흔들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후회와 눈물 속에서도 나약해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희망이란 모든 현실이 비관적이라 할지라도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것. 희망은 신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며, 神이 모든 것을 바꾸어 줄 수 있다고 믿는 것. 우리 내면에 자리를 마련해주면 우리의 영혼을 기쁨으로 채워주는 것, 역시 희망이다. 내면을 투명하게 유지하라! 마음의 창공에 떠 있는 어두운 구름으로 인해 당신의 영혼을 흐리게 만들지 마라! 일상의 안개를 뚫고 빛을 보는 사람이 있다. 발을 헛디뎌 어두운 구멍으로 추락하더라도 빛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비록 지금 슬픔과 불만 속에 있다 해도, 끝내 자유로 가는 길을 찾게 될 것. 내적으로 분노하거나 상처받고 실망하고 절망에 빠져 있더라도, 행복으로 가는 길을 찾는 것은 살아가면서 터득해야할 삶의 기술이다. 우는 것은 마음을 치료하는 효과가 있다. 눈물은 내면에 있는 비애를 떨치게 해준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동정심 때문에 우는 것이라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당신은 울음에 갇히게 되고 얼굴만 축축해질 뿐이다. 희망을 신뢰하라! 그것은 당신의 영혼을 폭넓게 해준다당신의 영혼에 활력을 주어 아직 다가오지 않은 기쁨을 준비하게 해준다. 희망을 가질 때 당신보다 고상한 의미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당신 안에 이미 神이 머물고 있다. 우리는 마음속에 이미 하늘을 들고 다닌다. 비록 당신의 하늘에 먹구름이 끼고 비가 내릴 것을 예고하더라도 이런 생각을 하면 된다. “내 안에 있는 하늘은 흐려질 수 없다고.” 안젤름 그륀 신부 지음.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로마8,5-6)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로마8,24-26)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 나시어,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1코린15,3-20) “우리는 또 무엇 때문에 늘 위험을 무릅쓰고 있습니까? 나는 날마다 죽음을 마주하고 있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야 ‘내일이면 죽을 몸, 먹고 마십시다.’ 하겠지만, 착각하지 마십시오! ‘나쁜 교제는 좋은 관습을 망칩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이 더러 있기 때문에,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1코린30-34) 

예수님의 부활을 찬미하고 예수님처럼 우리도 이 세상을 산다면 우리에게도 부활의 영광을 안겨주실 것이다. <작은 사람의 큰 신앙> 여러분들께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대답해보세요. 우리나라에서는 기초 생활 수급자들에게 구청을 통해서 얼마씩의 생계비를 지원해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성당에서도 생활비나 기타 장학금 등의 명목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지요. 이렇게 여러 종교 단체나 사회복지 시설에서 끊임없이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도처에 가난한 사람들이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들 중에는 신자들도 많지요. 그런데 어려운 처지의 신자들 중에서 가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남한테 도움을 받는 처지에 제가 무슨 교무금을 내겠습니까?” 도움을 받고 있으니 안 내는 것이 남을 돕는 길이라는 것.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것이 오늘 질문입니다. 형편이 어려워 주위의 도움을 받는 사람들도 교무금을 내야 할까요? 안 내는 것이 타당할까요? 교무금은 당연히 내야 합니다. 교무금 납부는 모든 신자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신자에게는 신자로서의 6대 의무가 있다.
첫째, 모든 축일과 대축일 미사, 즉 천주의 성모마리아 대축일, 성모승천 대축일, 예수 성탄 대축일, 예수 부활 대축일에 참례할 의무가 있지요.
둘째, 정해진 날에 금육과 단식을 지켜야 합니다. 단식은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에 지켜야 하고, 금육은 사순절 동안의 재의 수요일과 매주 금요일에 지켜야 하지요.
셋째,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고해성사를 받아야 하고,
넷째, 적어도 일 년에 한 번 부활 때는 반드시 영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다섯째, 신자는 교회 유지와 사업을 위하여 가정 단위로 교무금을 내고 헌금을 각자 봉헌해야 합니다.
마지막 여섯째로 혼인성사에 관한 혼인법을 지켜야 하지요. 태어난 자녀에게 세례를 주고 교리를 가르칠 의무가 있다. 그렇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신자라면 당연히 교무금을 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지요.

구약성경에서 사렙타 마을의 한 과부는 심한 기근이 들어 마지막 먹을 것만을 남겨 둔 상태에서 하느님의 사람에게 음식을 먼저 대접했고, 그 이유로 하느님의 큰 축복을 받았다. 기근이 끝날 때까지 그 과부의 집에는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지요. ‘콩 반쪽이라도 나누어 먹는다.’ 라는 우리 속담이 있듯이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나눔은 면제될 수 없다.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헌금 궤 맞은편에 앉아서 사람들이 헌금 궤에 돈을 넣는 것을 바라보고 계셨다. 부자들이 와서 많은 돈을 넣었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가 넣은 렙톤 두 닢에 주목하셨다. 그리고 극찬을 아끼지 않으셨지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코 12,43-44) 가난한 과부가 헌금한 렙톤 두 닢은 한 노동자의 하루 임금의 1/72에 해당되는 아주 적은 돈이었다. 하루 노동자의 일당이 5만 원이라면 약 700원에 해당되는 액수이지요. 그러나 과부는 그 돈을 정성을 다해 봉헌하였고 하느님께서는 그 가난한 과부의 정성된 마음을 받아들이셨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는 아무리 작은 부분이라도 정성을 다해 봉헌하면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시고 축복해 주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하느님과 불우한 이웃에게 더욱 정성이 담긴 봉헌과 나눔이 이루어져야함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언제나 기도하는 습관으로, 나쁜 것을 지우려고 애쓰지 말고, 좋고 선한 것으로 채우려는 습관으로, 그럴 수도 있지.’' 라며 이해하는 습관으로... 이제 우리들이 그 습관이 다 태우는 사랑이 되어 하느님께 온전한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귀한 축복된 삶이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독수리는 마지막 성공을 거둘 때까지 온 생명을 바쳐 노력한다.'' - 여안교 -


♡2130회 성욕이 좋은 에너지이면 좋은 일을 많이 하기 위해 성욕을 계속 증가시켜야 할까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6월 17일(시편 101편~)

  덴마크속담에 ''행운은 자주 문을 두드리나, 미련한 자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생각에도 리듬이 있어야 한다》숨은 한 번 들이키면 반드시 한 번은 내쉬어야 한다. 제아무리 욕심 많은 사람이라도, 숨을 두 번 들이쉬고 한 번 내쉬며 살 수는 없다. 어느 누구도 들이킨 만큼은 내쉬어야 한다. 숨은 재산처럼 모아서 쌓아둘 수가 없다. 들이킨 숨을 모으기 위해서 내쉬는 숨을 참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숨을 지키는 일은 단지 숨을 내쉬는 일이다. 한꺼번에 헐떡이며 숨을 들이키면 들이킨 만큼 내쉬지 않으면 안 된다. 살아가는 일도 숨쉬는 일처럼 리듬이 있어야 한다. 리듬이 들어왔다가 나가고, 나왔다가 들어가는 일이다. 오르고 내리는 일이며, 내리고 오르는 일이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들이기는 좋아하면서도 내보내는 일은 싫어한다. 어느 자리든 올라가는 일은 좋아하면서도 내려오는 일은 두려워한다. 그러나 잘사는 사람은 내보내기에 즐겨하는 사람이다. 진정으로 오를 줄 아는 사람은 내려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생각에도 리듬이 있어야 한다. 강과 약, 높고 낮음, 크고 작음이 함께 조화를 이루는 파도와 같은 리듬이 있어야 한다. 생각은 어느 순간 산더미처럼 솟구쳤다가는 호수처럼 잔잔해지는 파도의 얼굴이어야 한다. 아니, 때로는 태풍처럼 강하게 몰아치다 가끔은 아지랑이처럼 속삭일 줄 아는 파도의 모습이어야 한다.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바람의 모습이어야 한다.

 
요즘 가톨릭 콘텐츠 등에서 성욕과 같은 인간의 욕망을 너무 누를 필요가 없고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하는 것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심지어 성욕도 하나의 좋은 에너지이기 때문에 그 에너지를 좋은 방향으로 사용하면 오히려 많은 성과를 내게 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만약 성욕이 좋은 에너지이면 좋은 일을 많이 하기 위해 성욕을 계속 증가시켜야 할까요? 이런 모든 것들은 잘못된 세속적 학문에서 비롯된 생각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해서는 안 된다.’ 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성적인 욕구 자체가 이미 죄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율법인데 왜 세속적인 기준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꿔가며 성욕을 좋은 것처럼 포장할까요? 이는 자신들 안에 있는 성욕을 합당한 것으로 여기기 위해 그런 것일 수밖에 없다. 

어느 신부님께서 이탈리아에서 유학하던 중 방학 때마다 한 본당에 실습을 나간 적이 있다. 그 본당은 5백 년의 역사를 가진 그 동네 성당이었다. 신자는 5천 명 정도가 되지만 주일미사는 3백여 명 나오는 것이 전부였다. 성당에 오래되어 보수할 것이 많았지만 본당 신부는 돈이 없다며 한탄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동네에는 수도회 성당도 하나가 있었다. 알고 보니 신자 대부분이 본당에 오지 않고 그 수도회 성당으로 가는 것이었다. 본당의 천정은 갈라지고 있었지만, 수도회 성당의 천장은 금칠이 되어있었다. 먼진 성가대와 전례가 가난한 본당의 전례와 비교되었다. 이탈리아는 명실상부 가톨릭국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주일미사 참례자는 10%도 안 됩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동네마다 본당과 수도회 성당들이 마치 경쟁을 하듯 산재하기 때문입니다. 본당 주임 신부는 성당에 나오지 않으면 신자들이 수도회 성당에 가겠거니 생각합니다. 그러나 수도회 성당에서는 신자들의 교적이 없어서 그들을 관리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양들이 목자 없이 붕 떠버리는 것. 그러니 우리나라처럼 판공표를 나누어주어 신앙생활을 관리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성욕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요? 성욕은 우리 안에서 좋은 역할을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삶의 에너지를 빼앗는 적입니다. 한 목자가 신자들의 책임을 맡는 것이 좋다. 수도자는 수도하는 목적으로 사는 것이 정상이지 본당의 에너지를 빼앗아가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마치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신자들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본당에서 수녀님들이 사제가 잘못한다고 신자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든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수녀님은 과연 잘하는 것일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신자들을 위하는 것 같지만 교회의 에너지를 분산시켜 결국, 본당공동체는 와해하고 맙니다. 성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서 마치 좋은 역할을 하는 것처럼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꼭 필요한데 사용되어야 할 에너지를 갉아먹어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성욕이 강한 부부가 좋은 부부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성모님과 요셉 성인처럼 동정으로 산 부부들은 안 좋은 부부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동정 부부로 산 이들이 더 서로를 위하며 살 수도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아직도 우리들에게서 성령을 거두어가시지 않았습니다. 성전으로 돌아가십시오.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우리들과 함께 하시어 성령을 쏟아 부어주시고, 메마른 우리들의 가슴에 은총의 샘물을 마시게 해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오늘 달걀을 한 개 갖는 것보다 내일 암탉을 한 마리 갖는 편이 낫다.'' - 토머스 플러 -


♡2131회 ‘나부터’ 회개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도 회개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어야 합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6월 18일(잠언 1장~)

공자는 ''사람은 서로의 입장과 처지를 바꿔 생각해야 한다.''
《한번더 생각하게 하는글》가장 현명한 사람은, 늘 배우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고, 가장 겸손한 사람은, 개구리가 되어서도 올챙이적 시절을 잊지 않는 사람이다. 가장 넉넉한 사람은, 자기한테 주어진 몫에 대하여 불평불만이 없는 사람이다. 가장 강한 사람은, 타오르는 욕망을 스스로 자제할 수 있는 사람이며, 가장 겸손한 사람은,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하여 감사하는 사람이고, 가장 존경받는 부자는, 적시적소에 돈을 쓸 줄 아는 사람이다. 가장 건강한 사람은, 늘 웃는 사람이며, 가장 인간성이 좋은 사람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가장 좋은 인격은, 자기 자신을 알고 겸손하게 처신하는 사람이고, 가장 부지런한 사람은, 늘 일하는 사람이며, 가장 훌륭한 삶을 산 사람은, 살아 있을 때보다 죽었을 때 이름이 빛나는 사람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마태 5,3-6) ‘행복하여라.’ 라는 말 때문에 예수님의 ‘참 행복 선언’ 을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가?” 에 관한 가르침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 말씀은 그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단순한 ‘행복론’ 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구원론’ 입니다. 여기서 ‘행복’ 이라는 말은 세상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그 행복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과 참 평화를 누리는 상태’ 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냥 행복이 아니라 ‘참 행복’ 이라고 표현하는 것.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하늘나라를 차지하려면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영적으로 가난해져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마음이(영으로) 가난해져야 한다는 말은, 몸은 부자로 살아도 마음이 가난하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재물을 섬기지 않고 하느님만 섬기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만 온전히 섬기려면 마음이 재물에서 온전히 떠나 있어야 합니다. ‘낙타와 바늘구멍’ 의 이야기에 나오는 부자가 연상됩니다. 어떤 부자가 예수님께 와서 ‘영원한 생명’ 을 얻는 방법을 물었을 때(마태 19,16),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라고 말씀하셨다.(마태 19,21) 그러나 그 부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많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못하고 슬퍼하면서 떠났다.(마태 19,22)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라고 말씀하셨다.(마태 19,2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들’ 은 어떤 슬픈 일을 겪고 있으면서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 하느님을 찾으면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만 믿고 의지하면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얻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마태 7,7)라는 약속의 말씀 그대로 하느님의 위로를 받게 될 것.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 하느님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에 의지하면서, 하느님의 위로가 아닌 다른 위로를 찾는 사람들은 참된 위로를 받지 못할 것이고,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살다보면 어떤 슬픈 일을 당하고, 너무 큰 슬픔에 빠질 때가 있다. 누구든지 그런 일을 겪을 수 있다. 그럴 때에 술이나 마약이나, 어떤 세속적인 수단에 의지해서 슬픔을 잊어버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경우에 잠깐 동안 잊어버릴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점점 더 인생이 망가지는 일이 될 것. 우리는 슬픔들을 잊어버리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믿음과 희망으로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는” 나라입니다.(묵시 21,4)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온유한 사람들’ 은,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들, 용서와 화해를 실천하는 사람들, 비폭력으로 폭력을 극복하는 사람들을 뜻하고, ‘땅’ 은 ‘하느님 나라’ 를 뜻합니다. 만일에 권력과 폭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억압했던 사람들이, 나중에 저쪽 세상에서 어떤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런 사람들이 들어가는 그 나라가 하느님 나라일 수는 없다. 이 문제에 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루카 22,25-26) 여기서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즉 “군림하고 권세를 부리면서 남을 억압하면 안 된다.” 라는 말씀은 대단히 단호한 말씀입니다. 거스르면 안 되는 엄한 명령이라는 것. “무력과 폭력은 반대하지만, 현실적으로 비폭력이 폭력을 이길 수 있을까? 온유함만으로 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까?” 라고 물을 수도 있다. ‘온유함’ 은 불의한 일을 당해도 그냥 참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로마 12,21)  어느 한 시기만 보면 폭력이 비폭력보다, 또 악이 선보다 더 강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길게 보면 비폭력이 폭력보다, 선이 악보다 더 강하고, 결국에는 선이 이깁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의로움’ 은 ‘하느님의 선’ 을 뜻합니다. 그래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은, ‘하느님의 선’ 이 온전히 실현되기를 갈망하고, 또 그것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갈망한다면 노력해야 합니다. 노력하지 않고, 즉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기만 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인간 세상의 현실을 보면, 악한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도 안 느끼고 마음 편하게 잘 살고 있고, 선한 사람들은 고생만 하는 경우가 실제로 많다. 그런 경우에 “하느님께서는 왜 심판을 미루시기만 하는가?” 라고 묻게 됩니다.(묵시 6,10)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9) 이 세상에 ‘하느님의 선’ 이 온전히 실현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필요한 일은 ‘회개’ 입니다. 우선 먼저 ‘나부터’ 회개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도 회개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없다. 다른 사람들을 회개시키려면 지금 이 순간 내가 먼저 회개해야 하는데, ‘나만’ 회개하고 남들은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 없는 회개는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우리들의 마음 안에 복음의 기쁨으로 충만하여, 하느님의 뜻이 하느님의 때에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섭리가 있으시고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오늘을 붙들어라! 되도록 내일에 의지하지 말라! 그날그날이 일 년 중에서 최선의 날이다.'' - 에머슨 -


♡2142회 우리는 모든 것을 지금 이 순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되어져야 한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6월 29일(다니엘 1장~)

  엘마 윌러는 ''남의 앞에 나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좋은 것은 비밀입니다》♡좋은 것은 비밀입니다. 안 좋은 것은 누구나 가질 수 있지만 좋은 것은 누구나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비밀의 문안에 두었다. 좋은 것을 갖기 위해서는 내 마음의 열쇠로, 내 생각의 힘으로, 내 말과 행동의 손으로 비밀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사랑은 비밀입니다. 사랑이 마음속에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문은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사람에게 열립니다. ♡희망은 비밀입니다. 희망이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희망의 문은 오늘을 성실히 사는 사람에게 열립니다. ♡평화는 비밀입니다. 마음이 평화롭다는 것은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문은 큰사랑으로 자유함을 얻은 사람에게 열립니다. ♡기쁨은 비밀입니다. 날마다 기쁨을 갖는 것은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쁨의 문은 감사가 있는 사람에게 열립니다. ♡용기는 비밀입니다. 참다운 용기는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기의 문은 뜻이 곧고 마음이 깨끗한 사람에게 열립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고 말씀하신 대로 두 번째 율법을 완성하는 내용의 말씀이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는 말씀은 율법이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남의 아내를 바라보는 눈은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하였다." 라는 말씀은 율법을 완성하시는 말씀이다. 율법과 복음과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 율법은 '간음해서는 안 된다.' 라고 행동을 취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라면 '음욕을 품고 남의 아내를 바라보는 눈은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하였다.' 는 복음은 행동만이 아니라 행동을 취하기 이전이라도 마음으로 음욕을 품고 있으면 안 된다는 내면의 상태에까지 지적해서 말씀하신 것. 그러니까 이 말씀은 여인을 대하는 마음의 자세를 근본적으로 언급하는 것. 어떤 행동을 취했는가 안 취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인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떤 상태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여인을 바라보는 시각이 자기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어떤 상품처럼 생각하는가 아닌가의 문제이다. 간음하는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여인을 바라보는 시각이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대상으로 바라보았다면 그것은 간음한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 여인에 대한 시각이 단지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 그 당시 여인의 위치는 사회적으로 매우 낮은 취급을 받았다. 심하게 말하면 사람취급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얼마든지 남자들이 자기들의 성적인 욕망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 여인을 상품처럼 취급하였다. 이러한 사회적인 상황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여인의 위치를 남자와 동등한 위치로 높여주시는 것. 그 당시로서는 대단한 혁신적인 일이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논리이다. 그러니까 여인을 남자들이 자기들의 성적인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대상으로 행동하지도 말고 아예 그런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것.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잘못이라는 것. 여인의 위치를 남자와 동등한 위치로 높여주심으로써 여인을 멸시하던 율법을 한 차원 높게 완성시켜 주신 말씀이다. 여인은 남자의 성적인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대상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는 동동한 인간으로서 서로 한 몸을 이룰 때 비로서 하느님을 닮은 인간을 완성시켜주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주시는 것.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 내시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셨다."(창세 1, 26-28 참조) 하느님이 이렇게 인간을 만드신 후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었다. 그것은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창 1,28)는 것이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어진 사명이었다. 이러한 사명은 남자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함께 해야한다. 여자는 남자의 예속물이 아니라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며 그러한 목적으로 모든 것은 사용되어져야 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하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잘 다스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데 사용되어져야 한다. 정당한 행위가 아닌 간음하는 행위는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행위이다. 간음하는 행위는 하느님이 아닌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행위로서 창조의 목적에 위배되는 것. "네 오른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하는 말씀도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하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잘 다스려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게 하기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에 창조의 목적에 어긋나는 행위이다. 목적에 맞지 않게 잘못 사용된 것이라는 것을 지적하신 말씀이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일을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십시오."(1코린 10,31) 우리는 모든 것을 지금 이 순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되어져야 한다. 그것이 창조의 목적에 합당하게 사용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아닌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여자를 간음하고 자기 신체의 일부분을 그런 목적으로 사용된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섬기는 삶이 아니다. 그럼 좀 더 구체적으로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삶인가? 예수님은 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진복팔단을 가르쳐 주셨다. 인간이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며 하느님이 창조하신 목적에 합당하게 사는 것.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보다 더 의롭게 살아야 한다. 의롭게 산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 바로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 우리의 몸과 마음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용하지 말고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을 사용해야 한다. 이러한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살아가지 않을 때 그것은 소금이 짠 맛을 잃어버린 것이며, 등불을 켜서 등경 위가 아니라 함지 속에 놓는 것과 같은 것. 이런 사람은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에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라는 것. 아무 쓸모가 없고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삶이란 곧 살인을 하고 간음하는 행위이다. 오늘 우리 사회는 여인을 하느님이 짝지어 주신 내 인생의 동반자라는 생각보다는 성적인 대상으로 마치 성을 돈으로 주고 사는 상품처럼 흐르고 있는 풍조가 생각보다 훨씬 넓게 번지고 있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보다는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대상으로보기 때문에 자기와 맞지 않는다고 해서 쉽게 이혼이 이루워 지고 있다. 삶의 모든 가치를 지금 이 순간 하느님이 아닌 자기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느냐 아니냐에 큰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에 서로 합심해서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하려고 하기보다는 쉽게 갈라서는 불행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지금 이 순간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음성을 듣고 지금 이 순간 주님이 허락하신 일을 통해 축복을 누리는 가운데 우리들은 삶의 기쁨과 보람을 얻어 누리며 살아가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두려움은 언제나 무지에서 샘솟는다.'' - 에머슨 -

💖성령봉사자 박재만 세례자요한 010 - 3878 - 6634
  (수필가ㆍ전국성령쇄신봉사자협의회 말씀추천강사)
💖성령봉사자 류태숙 M.막달레나 010 - 6560 - 7354
  (시인ㆍ수필가ㆍ꽃예술설화중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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