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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기도회 봉사

♡2103회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는다”(마태 12,20) - ♡

♡2103회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는다”(마태 12,20)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5월 21일(마태복음 18장~)

  어니 이슬리는  ''길거리에서 듣는 모든 것을 믿지 마라.''

《꿈은 희망을 낳는다.》산다는 것은 꿈을 꾸는 것. 현명하다는 것은 아름답게 꿈을 꾸는 것. 산다는 것은 꿈이 있다는 것. 지금 이 순간 꿈이 있다는 것은 희망이 있다는 것. 지금 이 순간 희망이 있다는 것은 이상이 있다는 것이요, 비전을 지닌다는 것. 지금 이 순간 비전을 지닌다는 것은 인생의 목표가 있다는 것. 꿈을 상실한 사람은 새가 두 날개를 잃은 것과 같다. 비록 힘없는 하찮은 존재라 하더라도 꿈을 가질 때 얼굴은 밝아지고 생동감이 흐르며 눈에는 광채가 생기고 발걸음은 활기를 띠고 태도는 씩씩해 지는 것. 지금 이 순간 꿈이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고, 지금 이 순간 꿈꾸는 자가 인생을 멋있게 사는 사람이다. 꿈이 있는 사람이 참 인생을 아는 인생의 멋을 아는 사람이다. 꿈이 있는 사람이 인생을 사는 듯이 살고, 아름다운 발자취를 후세에 남기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실러의 <꿈은 희망을 낳는다> 중에서]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 10,28-31) 두려움에 관한 예수님 말씀을,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의 죽음을(멸망을) 두려워하여라.” 로 생각할 수 있다. 또는 “육신의 수명을 연장하는 일에 집착하지 말고, 영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여라.” 종말이 오기 전까지는, 언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든지 간에 누구에게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죽음은 일반적인 일이고 보편적인 일인데도, 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까? 그것은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큰 고통을 겪는 것을 볼 때가 많기 때문이고, 우리가 알 수 없는 부분이 많은 일이기 때문이고, 경험해 보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고, 저쪽 세상의 일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잠재의식 속에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1요한 4,18)

 어떻든 죽음이 무서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데, 이 무서움을 극복하고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려면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요한 14,1), 회개해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세세하게 다 알고 계신다는 뜻인데, 우리가 실천한 선행과 사랑을 아주 사소한 일까지 다 알고 계시고, 갚아 주신다는 뜻입니다.(마태 6,4)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가 지은 죄를 모두 다 알고 계신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너무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우리 자신은 잊어버리고 있어도 하느님께서는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라는 말씀에 연결되어 있는 말씀으로, 우리가 한 일들을 심판 때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서 억울한 심판을 받는 일은 결코 없을 것.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고, 반대로 생각하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은 사람들은 참새보다 못한 처지가 될 것이라는 경고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 10,26-27) 언제인지는 몰라도 때가 되면,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가 완전히 실현될 것. 그날이 되면, 누가 구원받을 선인인지, 누가 심판받을 악인인지 확실하게 드러날 것. 그날은 틀림없이 옵니다

. 그렇기 때문에 방심하지 말고, 꾸준히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고, 선교활동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 건설에 협력했든지 안 했든지 간에 때가 되면 모든 사람이 그 나라를 맞이하게 될 텐데, 신앙생활과 선교활동을 충실하게 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 나라의 밖으로 쫓겨나게 될 것.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예수님께서 활동하셨던 지역보다 더 먼 곳으로 가서, 예수님께서 만나셨던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뜻입니다.(마르 16,15) “복음 선포 활동을 하라는 지시는 사도들에게만 하신 지시가 아닌가? 모든 신앙인이 다 선교활동을 해야 하는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전문적인 선교사들이 하는 것과 같은 선교활동을 모든 신앙인이 하는 것은 물론 어려운 일입니다. 복음 선포는 말로만 하는 일이 아니라, 평소의 삶으로도 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삶이 곧 복음 선포가 되어야 하고, 신앙의 증언이 되어야 합니다. 산상 설교에 있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라.”(마태 5,13-16) 사도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복음 선포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 10,32-33) 여기서 ‘알다.’ ‘일치되어 있는 관계’ 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를 믿는 신앙인이라고 고백하면” 이 증언과 고백은 말로 하는 것을 포함해서 ‘온 삶’ 으로 하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는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 입니다. 박해 때에는 붙잡혀 가서 재판관들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증언했다. 박해가 없는 상황에서는 언제, 누가 보아도 신앙인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도록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신앙고백이고 증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종교와 신앙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느낄 때가 많지만, 그래도 우리의 신앙생활을 주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심판 때에,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신원보증을 서 주겠다.” 예수님께서 직접 보증을 서 주시니 심판의 결과는 정해져 있는 것과 같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 즉 예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고, 종교와 신앙을 버리는 것.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앙갚음 하시겠다는 말씀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아니고, 좀 더 깊이 생각하면 우리 자신이 멸망을 선택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는”(마태 12,20) 예수님께서는 어떻게든 우리를 구원하려고 애를 쓰시는데, 우리 쪽에서 먼저 예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면, 예수님께서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다.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버리셔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먼저 예수님을 버렸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의 참 주인이시고 이끄시는 주님의 손에 우리들의 삶을 드리면서, 우리들이 바라는 은총을 입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공감할 줄 아는 친구는 형제만큼 소중하다.'' - 호메로스 -


♡2104회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5월 22일(마르코복음 11장~)

  윌슨 미즈너는 ''경청하는 사람은 어디서든 인기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무언가를 알게 된다.''
《매일 아침 새로운 행복이!》나는 매일 아침 왜 눈을 뜨는 것일까?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새벽은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이 마법의 기운을 뿜어내는 시간이다. 어떤 사람들은 생동감 넘치는 새벽 기운을 흠뻑 마시며, 달콤한 새벽잠을 만끽하고, 아침 해가 떠오르면 가뿐하게 눈을 뜬다. 매일은 반가운 초대인 것이고 새 아침이 밝으면 삶이 당신을 기다린다.
오늘을 어떻게 맞이할지는 오직 당신에게 달려 있다. 하루를 가슴 짓누르는 부담으로 여길 수도 있고, 설레는 약속처럼 느낄 수도 있다. 당신을 위한 날이 밝았다면 기뻐할 수도 있는가 하면! 씻지도 않은 채 기력도 없이 무덤덤하게 일과를 시작할 수도 있다. 오늘의 삶을 스스로 선택해본다. 살아 있음에 대하여 神에게 감사하라! 오늘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하루라는 점을 늘 마음에 새겨라! 반드시 큰 기쁨을 약속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이 삶을 선택하는 순간! 자신의 힘과 더불어 살아 숨 쉬는 생동감을 어루만질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될 것. 깨어난 자들만이 하루를 만들어갈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꿈속에서 사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나는 숨을 쉬고 있다. 이렇듯 나는 매 순간 존재한다. 삶을 맛보고 있으며 날마다 새롭게 경험하고 있다. 어떤 날도 똑같은 날이 아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존재이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깨어난 자들만이 하루를 만들어갈 수 있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 의 현실에 다가가 계획했던 바를 이루어 낼 준비가 되어 있다. 살아 있는 것들에겐 달콤함이 있다. 충만한 아침에 깨어나는 사람은 신의 축복을 호흡한다. 행복은 아침의 신선함 속에, 순간의 마법 속에 그리고 솟아나는 해의 아름다움 속에 있다. 매일이 새롭다.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다. 삶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성적으로 설득할 수 있겠는가? - 안젤름 그륀 신부 지음 -

1981년, 성 베드로 광장에서 손을 흔들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향해 총성이 울립니다. 터키인 알리 아으자 라는 사람이 교황님을 향해 총을 발사한 것. 4발의 총알 중 한 발은 교황의 복부를 관통했고 나머지 한 발은 가까스로 심장을 비켜갔다. 세계는 충격에 휩싸였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죽음의 기로에서 병자 성사를 받았다. 천만 다행히도 총알이 심장을 1mm의 차이로 비껴간 덕분에 교황은 4일 뒤 의식을 되찾을 수 있었다. 범인은 살인미수로 재판에 회부되어 법원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약 2년이 흐른 1983년, 요한 바오로 2세는 암살미수범이 수감되어 있는 로마의 교도소를 찾았다. 약 20분간의 만남이 있었고 교황은 그에게 사죄경을 베풀었다. 

그리고는 교도소에서 나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그와 나 사이에 나누었던 이야기는 둘만의 비밀로 남을 것입니다. 내게 총을 쏜 형제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저는 이미 진정으로 그를 용서했습니다.” 실제로 교황은 2000년에 그의 석방을 청원할 정도로 관용의 정신을 베풀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범인이 방아쇠를 당긴 지 약 30여년이 지난 2014년, 암살을 시도했던 범인이 이제는 세상을 떠난 교황의 무덤을 찾았다. 그는 흰 장미를 무덤에 바치며 “성자님, 정말 고맙습니다” 라고 중얼거렸고 이는 현지 TV를 통해 그대로 전해졌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죄를 용서 받았지만 이미 그 전에 저지른 다른 범죄로 인하여 복역을 계속하다가 최근 석방되었던 것. 이제는 머리가 하얗게 쇤 그의 마음을 생각해 봅니다.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어떠한 정치적 음모로 사주를 받아 교황에게 총을 겨누었던 그. 이제는 나이가 들어버린 그가 성인이 된 교황의 무덤 앞에서 무릎을 꿇어 감사함을 표하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사제가 되고 싶다는 생각까지 밝힙니다. 

이 이야기 중에 아직까지 그 배후가 밝혀지지 않았음에 주목하고 싶다. 피해자가 살아남았고 심지어 범인이 구속되었음에도 살인을 사주한 배후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교황님이 그것을 밝히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 피해자라면 누가 나를 죽이려했을지 궁금했을 것이고 나아가 응당한 비판을 하고 싶었을 것인데 특히나 그 단체가 당시의 소련과 같은 공산진영이라면 그들을 비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였을 테임에도 교황님은 끝까지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 모습은 현재까지 용서의 확실한 징표로 남아있는 것.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또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이런저런 미움을 안고 사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가르침은 다소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스스로의 나약함을 알기에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이라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스스로의 부족함을 알기에 우리는 오히려 힘을 얻을 수 있다. 

실제로 성경을 가만히 보면 하느님께서 뽑아서 쓰신 모든 이들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너무나 부족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너무 노쇠하였고 모세는 말을 잘 못했고, 삼손은 긴머리의 바람둥이였고 다윗은 간음과 살인을 했다. 엘리야는 심한 우울증 환자였고, 이사야는 벌거벗은 설교자였고 요나는 하느님을 피해 도망갔으며 마르타는 모든 일에 대해 근심하였다. 철없는 제자들은 기도하다 잠이 들었고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부인했다. 이러한 성경의 인물들을 묵상하며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우리 인간은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구나. 용서와 같이 불가능해 보이는 행동은 내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도움을 받을 때 가능하겠구나” 그리하여 미움과 분노에 휩싸이는 순간 하느님의 자비를 생각하며 온전히 그분께서 함께 해 주시기를 청할 것을 다짐하게 되는 것.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오랜 시간 분단의 아픔을 겪어 온 우리 한반도에는 이러한 주님의 손길이 더욱 필요합니다.

 이제 분단이 된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으므로 더 이상 우리에게 북한은 한 민족이 아닌 시비를 거는 적국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통일의 필요성마저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실제로 평소 미사에 참석하고 계시는 많은 분들께 통일이 가깝고 절실한 기도의 주제가 되지는 않을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아직 전쟁 중인 이 나라에 하느님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것. 저 멀리서 빈곤함에 몸서리치는 아이들이 있고 부당한 사회제도를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우리와 얼굴색만 같은 것이 아니라 같은 역사를 가지고 있고 심지어 같은 언어를 사용합니다. 이들을 위해서라도 서로에 대한 사랑과 용서가 싹트도록 적어도 오늘 만큼은 열과 성을 다해 주님께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너희가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말씀을 들으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데려오실 것이다.” 아멘.

  “고통은 잠깐이요, 은총은 영원하다.” 라는 말씀을 담고... 우리들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을 기쁘게 걸어갈 수 있는 축복된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오늘날 누군가 그늘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다른 이가 오래전에 나무를 심었기 때문이다.'' - 워렌 버핏 -


♡2105회 어떤 선물이 지금 이 순간 달콤해 보일지라도 그 안에 독이 들었을 수도 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5월 23일(루카복음 15장~)

  에이미 폴러는 ''여러분에게 도전하고 영감을 주는 무리의 사람들을 찾아, 그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라. 그러면 인생이 달라진다.''
《고통과 불행의 근원적 해답》온전 한 순종은 주님의 동역자가 되는 어마어마한 특권을 누리게 한다. -가이 M. 리처드-  아프리카의 거대 한 산양 때들이 한 번씩 집단으로 몰살 되는 경우가 있다. 그 이유를 연구 해 보니 이런 과정이 있었다. 산양 무리 가운데 한 놈이 갑자기 뛰면 다른 양들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따라갑니다. 밀려가며 뛰다 보니 멈추지 못합니다. 그러다 벼랑이 나타나면 속수무책으로 추락 하고 마는 것.

 헨리 나우웬의 말처럼, 사람들이 내비게이션은 갖고 있는데 목적지의 주소가 없다. 돌아갈 주소가 없는데 내비게이션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 삶의 목적지요 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고통과 불행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려고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그런데 미련한 인간은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해결 하고 합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만 빼고 다른 노력과 수단과 방법을 찾는 데 바쁩니다. 해결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길만 빼고 온갖 방법과 수단을 구하는 데 몸부림을 칩니다. 우리 삶의 고통, 위기, 불행의 근원적 인 해답은 목자 되신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것.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내가 주인 삼았던 다른 것들을 내려놓는 것. 행복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실 때 주어지는 것. 예수님께로 돌아갈 때 존재의 회복이 일어납니다. 우리 삶에 허락 하신 놀라운 계획과 축복이 더 풍성 해지는 은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면담 때 자주 사용하는 사례입니다. 나 자신이 지금 이 순간 면담을 한다는 마음으로 묵상 해보시기 바랍니다. EBS 다큐 프라임 ‘엄마가 달라졌어요’ 에 한 엄마가 아들만 그렇게 미워하는 사례가 나왔다. 딸은 그렇게 사랑스러운데 아들만 보면 머리를 쥐어박고 소리를 지르곤 합니다. 자신도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잘 안 되어 고통스러워했다.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보니 엄마는 자신의 부모님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 다음에 태어난 남동생만을 사랑한 그 엄마도 미웠고 남동생도 미워했던 것. 그러니 자기 아들이 남동생처럼 느껴지고 딸은 불쌍한 자신의 모습처럼 바라보게 된 것. 이렇게 사랑이 흐르지 못하는 그 엄마에게 부모를 용서하는 심리치료를 했다.

 그녀는 자신이 그런 것처럼 어머니도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것을 깨닫고는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를 용서하였다. 아들을 보니 이전과는 다르게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 아들을 껴안고 미안하다고 울었다. 남동생은 미워하고 자신만 사랑해주는 엄마를 보면서 딸은 마음이 편했을까요? 그렇지 못했을 것. 이런 것처럼 사랑은 위로부터 흐르는 것이기에 자신을 사랑해줬던 사람에게 감사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지금 이 순간 부모를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고 프러포즈를 해 온다면 나는 그 사람의 말을 믿어야 할까요? 물론 자신은 진심이라 믿을 수 있겠지만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 사랑은 흐르는 것이기에 위로부터의 흐름이 막힌 상태로는 사랑을 흐르게 할 수 없다. 그런 사람의 사랑은 호르몬의 결과일 뿐, 참으로 사랑은 아니었음을 뼈저리게 깨닫게 될 날이 올 것. 지금 이 순간 하느님을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그 말을 믿어야 할까요? 이는 구약 없이 신약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구약은 하느님 사랑의 회복을 말하고 신약은 이웃사랑의 회복을 말합니다. 지금 이 순간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웃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첫째가는 계명이 하느님 사랑이고 그다음이 이웃사랑이라고 나오는 것. 지금 이 순간 자신을 존재하게 하고 생명과 모든 것을 주신 분께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 누군가가 나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사람의 사랑을 바로 믿지 말고 그 사람을 사랑해준 이들에게 어떻게 대하는지를 먼저 살펴보십시오.

 오리건주에 있는 한 중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 학교의 여학생들은 립스틱을 화장실 거울에다 묻히곤 했다. 키스 연습을 하는 것인지 청소하는 분만 곤혹스러웠다. 그 자국이 점점 많아져 골칫거리가 되자, 마침내 이 학교의 교장은 조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장은 모든 여학생을 화장실에 불렀다. 거울을 청소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청소 담당자는 거울 청소가 얼마나 어려운지 학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마대 자루를 먼저 화장실 변기에 넣어 빤 다음 그것으로 거울을 닦았다. 여러 학생이 갑자기 헛구역질했다. 그 이후로 거울에 키스하는 학생은 없었다. 자기들이 입 맞춘 거울이 무엇으로 닦이고 있는지 보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선물이 지금 이 순간 달콤해 보일지라도 그 안에 독이 들었을 수도 있다.

 쥐약을 먹지 않으려거든 나에게 누군가 주는 선물이 그 사람의 부모나 하느님에게 향해야 할 것이 아닌지 먼저 분별해보아야 합니다. 하와의 선악과를 덥석 받아먹으면 자신도 죽습니다. 어떤 분은 신자들의 돈을 사용하는 본당의 사제나 사목회가 마음에 안 든다고 성당엔 조금만 내고 나머지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면 안 되느냐고 묻습니다. 선악과를 이웃에게 주겠다는 말과 같다. 그것이 어떻게 사용하든 그것은 교회의 몫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은혜에 십 분의 일이나마 봉헌하며 감사를 표현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준비가 된 것. 성당에 나가지도 않으면서 지금 이 순간 가족들을 데리고 놀러 가려고 하는 아버지를 좋게 보아야 할까요? 사랑은 위로부터 흐르지 않으면 그 사랑이 하와가 내어주는 선악과와 같다. 어떤 사람의 사랑이 거짓임을 알아내는 법은 그 사람에게 사랑을 준 이를 지금 이 순간 어떻게 대하는가를 보면 됩니다. 지금 이 순간 부모를 먼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 자녀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들에게 애통하고 근심하는 한 일이 무엇입니까? “조금 있으면...” 기쁨으로 바뀌게 될 것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조금...’ 이라는 그 시간에 기도할 수 있는 은총과 축복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좋은 평판을 쌓기 위해서는 많은 선행이 필요하고, 그 평판을 잃는 데는 단 하나의 악행이면 충분하다.'' - 벤저민 프랭클린 -

♡2107회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5월 25일(사도행전 1장~)

  조셉 아디스는 ''남에게 호감을 얻으려면 상대방이 누구거나 함께 즐겁게 동참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 된다. 그럴 경우 상대방을 단지 즐기게 해주는 것보다는 상대방과 함께 어울려 즐기는 것이 더 좋다. 그리고 이런 기질을 가진 사람은 설혹 대단한 교양이나 지혜가 없다고 하더라도 상식이 있으며, 그 행동거지가 다른 사람을 매혹케 하는 데가 있으며 위대한 재능이 있으면서도 이런 기질이 결여된 사람보다도 남의 마음을 크게 움직인다.

《걱정을 버리는 6가지 방법》문제를 보는 시각을 지금 이 순간 바꾸라 문제를 두고 걱정부터 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이 아니라, 나쁜 습관에 불과하다. 걱정하는 습관을 버리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 먼저 문제를 보는 시각을 바꿔야 한다. 지금 이 순간 내게 생긴 문제들이 골칫거리가 아니라, 해결점을 찾기 위해 도전하는 힘을 주는 계기가 된다고 생각하자. 기분 좋은 잠, 상쾌한 아침을! 매일 잠 잠자리에 들면서 그 날의 걱정거리들을 되뇌이는 것은 내일까지 걱정하는 하루로 만들어 버린다. 잠자리에 들 때 마음을 편안히 하고,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하자. 아침에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나면 어제의 문제들을 냉철하고 객관적인 눈으로 볼 수 있게 될 것.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라 오늘 해결해야 할 산더미 같은 쌓인 일과 문제들을 헤아려 보느라 마음을 무겁게 하지 말라. 지금 이 순간 긍정적인 말을 하라 생각을 말로 하지만, 말에 따라서 생각이 바뀌기도 한다. "난 못해", "큰일이야!", "어떻게 하지?" 이런 식의 부정적인 말들을 모두 버리자 긍정적이고 확신에 찬 말들로 생활을 채우라. 말하는 습관을 바꾸는 것은 매순간 노력해야 한다는사실도 잊지 말자. 도움을 주는 글귀들을 외우자 부정적인 생각을 바꾸고, 힘을 내게 하는 좋은 말들을 외워 두자. 마음에 와 닿는 구절, 명언, 책에서 읽은 아름다운 말들이 나를 성장시켜 주는 한마디가 될 수 있다. 그런 말들이 무의식중에 창조적인 생각으로 바뀌고 적극적으로 행동하게 한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만남을 가지라 좋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좋은 대화를 나누는 것은 마음과 생각을 풍요롭고 새롭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다른 사람들을 통해 지금 이 순간 내 모습을 반성해 보고 서로를 격려함으로써 약한 의지를 다시 세울 수 있다.

성경공부 모임이나 성령기도회, 자원봉사단체에 참여하는 것도 좋은 사람들과 좋은 만남을 가질 수 있는 기회다. 10여년 전쯤에 칠레에서 광산이 무너진 일이 있었다. 33명의 광부가 지하 700미터에 있는 약 15평의 대피소에 갇혔는데, 남은 식량은 열 명이 이틀 먹으면 없어질 분량이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69일 만에 33명의 광부가 모두 무사히 빠져나왔다. 살아난 광부들은 이 기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처음에는 저마다 자기 나름대로 살아 보려고 시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면서 마지막으로 기댄 것은 서로에 대한 믿음이었다. 자기만 배고픈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배고프고, 자기만 두려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두렵고, 자기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고통스럽다는 의식이 생긴 것. 그리하여 연장자는 연륜으로, 유머가 있는 사람들은 웃음으로 서로를 격려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33명 모두가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이 세상은 어쩌면 15평 남짓의 대피소와 같은지도 모릅니다. 저마다 어려움과 두려움과 걱정 속에서 살아갑니다. 또 모두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지녔다. 그러한 세상에서 지금 이 순간 ‘나’ 만 살아 보겠다며 자신에게만 시선을 둔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죽이는 행위가 되고 맙니다. 지금 이 순간 ‘내’ 가 어렵고, 두렵고, 걱정되는 만큼 다른 사람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 사람을 대하는 것, 그것이 모두를 살리는 길입니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이 좁고, 그 길이 비좁은 이유는 많은 사람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길은 타인을 향하여 마음을 건네는 길입니다. 그런 길이야말로 거룩하고 진주처럼 고귀합니다. 

  두려움 속에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마치 빛과 그림자처럼 분리할 수 없습니다. 두려움으로 오는 하느님의 은총을 믿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겠지요. “나다. 너는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 우리들에게 있는 두려움이 기쁨으로 바뀌는 축복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편도 아니고 내 적도 아니다. 또한 자신이 무슨 일을 하거나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다. 모두가 자신을 좋아하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기대이다. - 리즈 카펜터 - 
♡2108회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5월 26일(로마서 1장~)

  샹포르는 ''모든 날 중 가장 완전히 잃어버린 날은 웃지 않는 날이다.''

《고통 속에서도 행복을 예감할 수 있다.》일이 순조롭게 풀리지 않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진심을 오해하여, 삶을 지탱하는 힘을 잃어버릴 때 나는 지금 잘 못살고 있는 것일까? 빛과 어둠, 기쁨과 고통은 모두 우리 삶 속에 숨어 있다. 이러한 대립된 요소를 받아들이고 화해를 할 때 비로소 삶의 가치도 인정하게 된다. 성공과 실패, 빛과 어둠, 기쁨과 고통이 두루 있는 삶이야말로 정말 멋진 삶이다. 삶의 비밀을 찾기 위해 눈앞을 직시하고 때로는 경이로운 마음으로 뒷걸음질 치는것 이 모든 것이 우리 삶을 흥미롭게 만든다. 

이는 또한 행복으로 가는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행복이란 충만한 삶의 표현이다. 만일 당신이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삶을 받아들이면 생동감 속에서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 행복이란 꼭 붙들어 둘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는 삶도 마찬가지이다. 삶은 항상 흘러간다. 어둠침침한 계곡을 통과할 수도 있고, 가파른 폭포를 만날 수도 있다. 고통 속에도 삶이 있다. 언제 어디서나 모든 것에서 행복을 예감할 수 있다. 삶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행복을 예감할 수 있다.  -안젤름 그륀 신부 지음-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은 실제 가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비유적인 표현으로서 ‘신앙생활을 가로막는 세속적인 것들’ 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 ‘신앙생활을 가로막는 세속적인 것들’ 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것들만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일은 소홀히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내가 주는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다.” 라는 뜻입니다.

 표현이 아니라 뜻에 초점을 맞추면, 이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라는 가르침과 같은 가르침입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 가족을 예로 들어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가족에 대한 사랑을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 예수님 말씀은 가족을 버리라는 가르침도 아니고,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가르침도 아닙니다. 가족은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선물’ 이고, 신앙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또 가장 옆에 있는 영적 동반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가족을 사랑해야 합니다. 성가정을 이루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일입니다. 
2) 무조건 잘해 주고, 좋아하고, 아끼고, 보살피는 것, 그것이 ‘사랑’ 은 아닙니다. ‘사랑’ 은 선을 바탕으로 실천해야 하는 일이고, 선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일입니다. 선의 실현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이기적인 집착일 뿐입니다. 악을 물리치고 선만 지향하는 것, 그것이 ‘참 사랑’ 입니다. 만일에 가족이 어떤 죄를 짓고 있을 때, 그 죄 속에서 살면서 멸망을 향해서 갈 때, 가족을 따라가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가족이 ‘멸망의 길’ 로 가는 것을 막고, 선과 구원의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3) 구원은 일차적으로 ‘내가’ 받는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내가’ 누리는 것. ‘나 혼자서’ 받고, ‘나 혼자서’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에 가족이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고, 또 이웃이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관심 갖지 않고, 자기 혼자서만 구원받으려고 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려고 한다면, 그런 식으로 얻은 구원은 구원이 아니고, 그렇게 해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고 자기 혼자만 있는 나라가 하느님 나라일 수는 없다. 구원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받아야 하고, 영원한 생명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누려야 합니다.

특히 가족과 함께 받아서, 가족과 함께 누려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가족을 맺어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8)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 과 ‘예수님을 따르는 일’ 을 구분해서 생각하면,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또 자기 십자가를 지면서도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모두 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다. 실제로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없다. 물론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우리가 보기에 십자가처럼 보이는 고난을 감수하고 인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인내와 고행은 그리스도교 신앙과는 상관없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는 아닙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과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 만나는 모든 어려움은 다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들을 기꺼이 받아들여야만 예수님을 온전히 따를 수 있다. 만일에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들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기를 거부하는 것.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십자가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곧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좀 더 단순하게 표현하면, “날마다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 자체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다.” 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차이가 있지만,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십자가들을 만나게 되고, 그 십자가들이 무겁든지 가볍든지 간에, 또 크든지 작든지 간에, 그것들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비로소 신앙생활이 완성됩니다. 만일에 십자가들이 싫어서 피한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기를 포기하는 것. 그러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왜 꼭 십자가가 필요한가? 예수님의 십자가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인가? 십자가 없이 그냥 예수님을 따를 수는 없는가?” 라고 물을 수도 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1,7) “사람마다 각자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신앙을 정화하고 단련하기 위한 것이다.”

어떻든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고 갈 수 있을 만큼의 십자가만 주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현세의 목숨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 집착을 버리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 생명을 얻을 것이다.” 입니다.

집착이라고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눈에 보이는 현세의 삶과 현세의 목숨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입니다. 신앙생활은 본성을 누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그렇게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인의 지혜’ 입니다.

  오늘 하루도 “너희를 위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하느님의 위로와 자비를 입고 살아가는 축복된 우리들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버들가지는 약하나 다른 재목을 묶는다.'' - 하버트 -


♡2109회 신앙생활의 최종 목적은 부활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5월 27일(코린토1서 1장~)

 마야 안젤루는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사람들은 당신이 한 말과 당신의 행동은 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당신 때문에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는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가진것》내가 가진 것과 당신이 가진 것을 더하면 그것은 "만남" 입니다. 내가 가진 것에 당신이 가진 것을 빼면 그것은 "그리움" 입니다. 내가 가진 것과 당신이 가진 것을 곱하면 그것은 "행복" 이며 내가 가진 것에 당신이 가진 것을 나누면 그것은 "배려" 입니다. 그리고 내가 가진 것과 당신이 가진 것을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어도 "하나" 라면 그것은 바로 ''사랑" 입니다. "사랑" 은 살아가면서 가장 따뜻한 인간관계이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아끼고 또한 그 관계를 지켜가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이신 분이고,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생명’ 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감각의 한계에 갇혀 있는 우리를 위해서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방법을 사용하셨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눈으로 볼 수 있는 빵’ 을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 을 우리에게 주시는 성사입니다. 여기서 “하늘에서 내려온” 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은 지상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면서 사는 것은 단순히 안 죽고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 그래서 완전히 새로운 생명이고, 참된 생명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은 ‘모든 사람’ 을 구원하려고 오셨음을 나타냅니다. “이 빵을 먹으면” “나를 믿고, 내가 주는 성체를 받아먹으면” 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일은 예수님을 먹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생명력을) 받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체성사를 포함해서 신앙생활 전반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나의 살이다.” 라는 말은, 뜻으로는 “나다.”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냥 “나다.” 라고 하시지 않고 “나의 살이다.” 라는 강한 표현을 사용하셨을까? 아마도 우리의 신앙생활이 ‘생각으로만’ 하는 관념적인 생활이 아니라 실생활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는 생활이 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사용하셨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성체성사는 생각으로만 이루어지는 성사가 아니라 실제로 빵을(예수님을) 받아먹는 성사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 예수님을 믿고(먹고),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은, 그 생명을 얻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방법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모든 권한을 예수님에게 주셨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요한 3,35-36)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또 미사 참례를 하면서도 성체성사가 이해되지 않고, 그래서 믿기도 어렵다면서 영성체를 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것만 믿는 것은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해가 되든지 안 되든지 간에 예수님의 말씀도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일도 믿어야 하고, 그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나를 이해시켜라.” 라는 오만한 태도로는 예수님의 뒤를 따를 수 없다. 예수님을 모르고, 또 예수님을 믿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 가운데에도 착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런 사람들도 구원받지 못하고 끝나버려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어떻게든 그런 사람들도 구원하실 텐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실지, 우리는 모릅니다

.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54)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라고 약속하셨다.(요한 11,25-26) 신앙생활의 최종 목적은 부활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이나 빌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종말이 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그러나 믿는 이들에게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관문이 될 뿐입니다. 살아서 종말과 재림을 맞이하는 사람은 죽음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게 될 것. 여기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 이라는 말은, “나를 먹는 사람”, 즉 예수님과 온전히 일치를 이루는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 6,55) 예수님과 온전히 일치를 이루어서 얻게 되는 생명은 참되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참된 양식’ 이고 ‘참된 음료’ 입니다. 예수님이 아닌 다른 무엇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에게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주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신앙생활은 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꾸준히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먹는 성체성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식적으로 영성체 한 번 했다고 해서 영원한 생명이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날마다 끊임없이 예수님 안에 머무르려고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려고 노력해야 하고,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성체성사의 정신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7-58) 믿음 없이 영성체를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그것은 썩어 없어질 양식을(요한 6,27) 먹는 것과 다르지 않고, 유대인들이 믿음 없이 몸의 배고픔만 해결하려고 ‘만나’ 를 먹은 것과 다르지 않은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믿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으로 살아가는 생활이고,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과 함께 감사를 하면서, 거룩함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기도는 우리의 무기입니다. 우리들의 인간적인 생각들을 기도로 무장하는 은총과 축복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당신이 배를 만들고 싶다면, 사람들에게 목재를 가져오게 하고 일을 분담하고 지시하지 말아라. 대신 그들에게 넓고 끝없는 바다를 동경하도록 가르쳐라.'' - 생텍쥐페리 -


♡2110회 시간은 손바닥에 있는 장난감이 아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5월 28일(히브리서 1장~)

  톨스토이는 ''남과 사이가 좋지 못하거나 그 사람이 당신과 있는 것을 싫어하거나 당신이 옳은데도 그 사람이 동조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책망받을 것이 아니라 정작 책망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당신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 사람에게 마음과 정성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목표를 가져라!》그것이 당신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오늘 아침 나는 어떤 길을 가게 될까? 오늘은 내 삶에 어떤 시간으로 기억될까? 세상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삶에 대한 선택권이 있다면 목표를 위해 사는 쪽을 택하라!

당신이 누구든 어디에 있든 한 순간도 목표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살면서 추구해야할 목표란, 단순히 일이나, 성취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이유이고 사명이다. 당신만의 길을 찾아라! 그 길이야 말로 당신을 진정한 삶으로 안내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임무가 무엇인지 깨닫고, 그것을 위해 살아간다면 삶은 의미를 찾게 되며 당신의 존재가 주변사람들에게도 축복이 된다. 당신은 당신의 삶을 살도록 창조되었다. 당신은 신에게만 책임을 다하면 된다. 당신에게 있는 모든 힘을 동원하라! 성과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과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잘하고 있다는 걸 증명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내 지쳐 버린다. 하지만 자신의 신성한 영혼을 발견한 사람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열정으로 일을 한다. 자기 자신에게 뭔가를 강요하고 지나치게 부담을 주는 사람은 스스로의 행복을 가로막는 사람이다. 내일에 대한 근심으로 마음이 무겁다면 의식적으로 오늘에만 집중하라! 

무엇을 할 것인가?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 오늘 바로 지금 이 순간 결정하도록 하라! 오늘을 잘 보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핵심이며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시간은 손바닥에 있는 장난감이 아니다. 다만 神에게서 시간을 건네받으면 그것은 당신에게 좋은 기회이자 치유의 시간이며 다시는 경험하지 못할 값진 시간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존재가 아니다. 주어진 삶을 살아가면서 세상에 기여해야 하는 특별한 사명을 갖는다. 여기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아야만 내면의 샘물이 풍요롭게 넘쳐흐른다. 가진 것을 나누어주라! 능력을 밖으로 내 보여라! ‘있는 그대로’ 의 자신을 신뢰하고 숨은 가능성을 지금 이 순간 발견하고 당신의 삶에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라! 그러면 당신의 샘물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줄 것이다. -안젤름 그륀 신부 지음-

 히틀러 정권에 항거하다가 8년 동안 옥고를 치른 마틴 니뭴러(Martin Niemoller)라는 목사가 있다. 그가 옥고를 치른 후 위대한 「2차 대전 책임백서」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그 책 가운데 이런 체험이 나옵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어느 날, 니뭴러 목사가 일곱 번이나 똑같은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이 한 줄로 서서 하느님의 심판을 받는데 심판대 앞에 선 사람들은 한 사람도 뒤를 돌아보지 못하고 자신만 바라보고 자신의 죄를 하느님께 고백해야 했다. 그리고 자비를 구하는 것이었다. 니뭴러 목사도 그 대열에 서 있는데 어떤 한 사람이 이상하게 죄를 고백하지도 않고 회개도 하지 않고 뒤를 돌아보면서 자꾸 변명하더라는 것. 그래서 그가 누구인지 자세히 바라보니 그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히틀러였다. 히틀러는 이렇게 변명했다. “나를 반대하고 욕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내게 사랑으로 예수님을 전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신은 평생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다고 믿고 있었던 니뭴러 목사에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히틀러가 이렇게 된 것이 바로 네 책임이다.” 이 말을 들은 니뭴러 목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네가 8년 동안 히틀러 정권에 대해 항거만 했지 한 번이나 그에게 복음을 전했느냐?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킨 죗값이 너에게도 있는 것이다.” 이 똑같은 꿈을 일곱 번이나 꾸고 “이 전쟁의 책임이 바로 나에게 있었구나!” 라고 가슴을 치면서 회개의 눈물로 쓴 책이 「2차 대전 책임백서」라고 합니다. 

신앙인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율법 학자’ 와 ‘율법주의자’ 입니다. 예수님이 보기에는 율법주의자일뿐인 이들이 율법 학자라고 내세우며 다니는 것에 질책하십니다. 우리는 율법 학자가 되어야지, 율법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차이는 바로 ‘책임’ 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생각으로 결정됩니다. 저 먼 나라의 한 어린이가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다면 그것은 누구의 책임이겠습니까? 그 책임이 나에게 없다고 말하면 그 사람 안에는 ‘율법’ 이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모든 책임을 나에게 지웁니다. 그래서 율법 학자는 자연과 세상이 이렇게 되어 가는 것에 자신의 책임이 있다고 믿지만, 율법주의자는 남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예수님 당시의 율법 학자들은 겉모양으로는 모든 율법을 다 알고 지킨다고 사람들이 여기게끔 꾸미고 다니지만 실제로는 이웃의 가난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들 곁에는 천 원밖에 없는 가난한 과부가 있었다. 그 과부는 천원까지 헌금통에 집어넣었다. 주님께만 희망을 거는 행위입니다. 주님께서 보살펴주시지 않으면 더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율법은 그런 사람을 자신의 형제처럼 사랑하라는 책임감을 심어줍니다. 그러나 율법 학자들은 그런 책임을 무시하면서 완전한 율법주의자로 살고 있었던 것. 그들이 율법 학자가 아니라 실제적인 율법주의자가 되어버린 이유는 자기 영광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율법까지도 이용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낳은 아들이 카인입니다. 그는 동생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자신이 동생을 지키는 사람이냐고 그 책임을 회피합니다. 그 말 안에는 자신 안엔 율법이 없다는 뜻이 숨어있다. 율법은 책임입니다. 이웃에 대한 나의 책임을 깨우쳐주는 것이 율법인 것. 일본 소프트 뱅크의 손정희씨가 중병에 걸려 오래 못 산다는 판정을 받았을 때 그는 아프리카의 한 이름 모를 소녀를 생각했다. 그녀에게 꽃 한 송이, 사과 하나라도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딸처럼 미소짓게 하고 싶어졌다. 그러자 병이 나았다. 그때 율법이 비로소 그의 마음 안에 들어온 것. 그 율법은 생명이요 건강이신 하느님의 말씀이기에 건강이 회복된 것. 율법은 세상 가장 먼 나라의 한 아이까지도 나의 책임임을 일깨워줍니다. 그런 책임이 일지 않으면 나는 구원되는 율법 학자가 아니라 구원 못 받는 율법주의자로 머물게 됩니다.

  하루하루 하느님을 생각하시기를... 하느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맡기신 것을 겸손하게 사용하면서, 늘 감사와 은총이 충만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만약 당신이 우정을 유지하고 싶다면, 친구가 빌린 돈을 갚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라.''  - 브라이언트 H. 맥길 -
♡2111회 “원수를 사랑하여라.”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5월 29일(요한묵시록 1장~)

  라이아나 리버라토는 ''당신을 격려하고 사랑하는 좋은 사람들과 함께해라. 당신이 아무리 성공해도 항상 우여곡절이 있기 마련이다.''
《말은 마음의 그림》말하는 것을 들으면 그 사람의 마음이 보입니다. 마음이 말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잔잔하면 말도 잔잔하고, 마음이 거칠면 말도 거칩니다. 마음이 부드러우면 말도 부드럽고, 마음이 차가우면 말도 차갑다. 누군가에게 말을 할 때 그사람 앞에 내 마음이 그려지고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말이 부드러워질 것. 좋은 말을 하기 위하여 좋은 마음을 품게 될 것. 좋은 마음이 좋은 말을 하고 좋은 말이 좋은 그림을 그립니다. - '사랑의 인사' 중에서 -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 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3-48)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율법은 레위기 19장 18절에 있다.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 는 율법은 구약성경에 없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지적하신 말씀으로 생각됩니다.

 유대인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민족들을 ‘원수’ 로 생각했고, 또 구약성경의 전체 흐름이 우상 숭배를 미워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사고방식이 구약성경의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구약성경에도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과 비슷한 율법이 있다. “길을 잃고 헤매는 너희 원수의 소나 나귀와 마주칠 경우, 너희는 그것을 임자에게 데려다 주어야 한다. 너희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에 눌려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을 경우, 내버려 두지 말고 그와 함께 나귀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탈출 23,4-5) 유대인들은 원수라고 해도 동족이 곤경에 처해 있는 것을 보았을 때에는 이 율법대로 실천했을 것. 그런데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민족 사람이 그런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을 보았을 때에는 어떻게 했을까? 아마도 율법주의자들은 외면하고 그냥 지나쳤을 것이고, 

율법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었을 것.
 1) 탈출기에서 말하는 ‘원수’ 는 원한 관계에 있는 개인의 사적인 원수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원수’ 는 사적이든지 공적이든지 간에 “내가 원수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 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 은 이웃이고 형제입니다. 그래서 ‘원수’ 는 없다. 내가 내 마음대로 원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는 “너희는 이웃을 사랑하여라.” 입니다. “원수 같은 사람이라도 너의 이웃이고 형제이니 그를 사랑하여라.” 종교와 신앙이 달라도, 우리 교회를 박해해도, 적도 아니고 원수도 아닙니다. 사랑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2)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하여라.” 는 “좋아하여라.” 가 아니라, “하느님 뜻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 을 뜻하는 말입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박해자들의 회개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도 구원받기를 기도하고, 그들도 구원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그것이 그들을 사랑하는 것.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 의 회개와 구원을 바라시기 때문이고,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회개시키기 위해서 잘해 줄 수도 있고, 꾸짖거나 타이를 수도 있다. 어떻든 원수 같은 사람에 대한 사랑은 ‘좋아하는 감정’ 에 속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입니다.
 3) 우리는 흔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원수’ 는 악인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은 선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원수 같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을 선인이 악인에게 사랑을 베풀어주는 일로만 생각합니다. 누가 감히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선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악인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서 ‘한 사람’ 일 뿐입니다. 원수 같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선인이 악인에게 사랑을 베풀어주는 일이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누가 선인이고 누가 악인인지는 우리가 판단할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판단하실 일입니다.
 4)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계명은 “편 가르기를 하지 마라.” 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참 사랑’ 에는 울타리도 없고, 편 가르기도 없고, 차별도 없다. 루카복음 10장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 은 울타리가 없는 ‘참 사랑’ 을 실천한 사람으로서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원수 관계였고, 서로 접촉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착한 사마리아인’ 은 강도당한 사람이 어디에 속한 사람인가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만 보았고, 도와주었다. 이야기 속에서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전후 상황을 볼 때 강도당한 사람은 분명히 유대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준 사람을 사마리아인으로 설정하신 것도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의 갈등을 염두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같은 편’ 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미워하고 싫어하고, 배척하고 차별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인간 세상의 현실입니다. 
요즘에 ‘인종 차별’ 과 ‘민족 차별’ 이 언론에 자주 보도되고 있는데, 그런 일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는 ‘큰 죄’ 입니다. 같은 편끼리만 사랑하는 것은 죄인들이나 하는 짓, 즉 죄를 짓는 일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5)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사랑’ 과 같은 ‘완전한 사랑’ 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과 대등한 위치에 올라서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가 되라는 뜻입니다.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하고, 편 가르기를 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는 것이 ‘완전한 사랑’ 입니다. 만일에 원수 같은 사람은 사랑하지 않고, 자기편에 속한 사람만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불완전한 사랑’ 이고, 불완전한 사랑으로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없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신앙생활은 모두 헛일이 되어버립니다.

  이제 우리들이 받는 줄로 믿고 기도하면서 감사가 넘치고, 기쁨이 넘치고, 그리고 말씀과 성체의 은총과 축복이 넘치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내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당신의 과거는 쫓아버려라.'' - 오슬러 -

♡2106회 ‘별일 아닙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5월 24일(요한복음 10장~)

  몽테스키외는 ''진정한 위인이 되기 위해서는사람들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서 있어야 한다.''
《살아 있음을 기뻐하라!》

지금 이 순간을 숨 쉬듯 기쁨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 우리의 본성이 내면에서부터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 사람은 또한 기쁨을 위해서 태어난다. ‘재미’ 는 순간의 욕구를 해소 시켜 주지만, ‘기쁨’ 은 당신을 살아있게 해준다. 기쁨은 건강에 좋을 뿐 아니라, 수명을 연장해 준다. 재미에 중독 되어 끝없이 흥밋거리만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기쁨에 중독 되는 일은 없다. 재미는 사람을 병들게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만족할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기쁨은 온전한 만족감을 선사 한다. 병들게 하지 않고 마음을 건강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기쁨이다. 재미는 피상적인 것. 그것은 마음의 밑바닥까지 뚫고 들어가지 못한다. 기쁨은 마음의 바닥에 자리 잡고 있다. 기쁨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보물이다. 기쁨, 이것은 무엇일까? 아주 간단하다. 지금 이 순간 건강하고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는 것, 마음껏 숨 쉬는 것. 삶에서 놀라운 일을 발견하는 것도 바로 기쁨이다. 기쁨은 조용하게 다닌다. 어느 날 문득 마음속에 들어오더라도 우리는 무심코 지나쳐 버리곤 한다. 하지만 기쁨은 우리가 쫓아내지 않으면 그곳에 머문다. 기쁨은 꿈과 접촉하게 해 준다. 기쁨은 꿈을 현실로 만들어 준다. 기쁨은 우리를 생동감으로 채워준다. 궁극적으로 기쁨은 자신의 영혼이 지닌 품격이다. 나를 기쁘게 하는 모든 일은 내 안에 있는 기쁨과 나를 만나게 해 준다. 나에 대한 기쁨은 오로지 나에게만 속해 있다. 당신의 삶은 칭찬, 애정, 성공 혹은 실패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내적인 기쁨에 의해 결정된다.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 -안젤름 그륀 신부- 

세계적인 생태학자가 티베트에서 스님들과 회의를 했을 때입니다. 생태학자의 찻잔에 파리가 한 마리 빠졌다. 생태학자는 그런 경험이 전에도 있었기에 ‘별일 아닙니다.’ 라고 하였다. 스님이 생태학자의 얼굴을 보니 생태학자는 다시금 ‘별일 아닙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자 스님은 손가락을 넣어서 찻잔에 빠진 파리를 꺼내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돌아와 웃으면서 말했다. ‘파리도 별일 없습니다.’ 순간 생태학자는 깜짝 놀랐다. 자신은 생태학자로 자연과 환경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나’ 를 중심으로 생각했다는 걸 알았다. 스님은 생태학자는 아니지만 찻잔 속에 빠진 파리를 먼저 생각할 정도로 자연과 환경을 이해하고 있었다. 코로나19가 인간의 몸에 들어왔다. 대공황 때보다 더 큰 경제위기가 왔다고 합니다. 2차 세계대전 때 보다 더 힘들다고 합니다. 여행도 할 수 없고, 식당에도 갈 수 없고, 학교에도 갈 수 없고, 축구도, 야구도 구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치료약을 개발하고, 백신을 만들어 우리 몸에 들어온 바이러스를 내 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가 ‘별일 아닌 것’ 이 아니지만 경제위기가 더 큰 문제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는 지구가 인류에게 보낸 백신인지도 모릅니다. 인류가 더불어 살아가는 자연과 생물에게 ‘큰 문제’ 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탐욕과 개발은 생태계에게는 커다란 위기가 되고 있다.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동안 인류가 걸어온 삶의 태도를 돌아보는 것도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를 들었다. 나봇에게 포도원은 삶의 전부였다. 조상이 물려준 유산이었다. 그러기에 포도원은 매매의 대상이 아니었다. 아메리카 원주민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들에게 땅은 소유와 매매의 대상이 아니었다. 조상들이 물려준 유산이었고, 후손들이 살아가야할 삶의 터전이었다. 그래서 땅은 어머니와 같았고, 삶의 전부였다. 아합 왕에게 나봇의 포도원은 그저 가지고 싶은 또 다른 포도원이었다. 그에게는 포도원이 차고 넘쳤다. 그럼에도 아합 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그에게 포도원은 조상이 물려준 유산도 아니었다. 포도원은 열매를 맺도록 일하는 삶의 터전도 아니었다. 그저 또 하나 가지고 싶은 소유의 대상이었다.

 별일 아닌 것처럼 나봇의 포도원을 부당하고, 불의한 방법으로 빼앗았다. 아합 왕만 그랬을까요? 지난 세기 인류는 제국주의라는 부당한 힘으로 식민지를 만들었고, 약한 이들의 포도원을 강제로 수탈하였다. 경제논리에 몰입하는 이들에게 찻잔 속의 파리는 별 일 아닐 수 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이신 삼위일체 하느님께 문제가 있어서 사람이 되신 것은 아닙니다. 그분들은 친교와 나눔 그리고 사랑으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천상의 질서와 관계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어디에 문제가 있었을까요?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에, 하느님께서 특별한 관심과 사랑으로 창조하신 인간에 ‘큰 문제’ 가 생겼다. 스님이 파리를 사랑해서 찻잔 속의 파리를 꺼낸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 직접 세상이라는 찻잔 속으로 내려 오셨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인간의 언어와 인간의 생각으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느님의 의로움이 무엇인지 이야기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누가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십시오.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십시오.”

 지금 이 순간 희망을 가지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굳게 믿고 끝까지 그 희망이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과 축복의 때를 기다리며 기쁘게 살아가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말해주는 것은 곧 잊게 된다. 가르쳐주는 것은 기억하게 된다. 참여하게 해준다면, 진정으로 배우게 된다.'' - 벤저민 프랭클린 -

♡2112회 신앙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신앙인으로서’ 사는 것.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5월 29일(창세기 1장~)

  알랭 드 보통은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는 것이 인간관계의 시작이다.''
《가슴으로 하는 사랑》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사랑하는 일 인줄 알았다. 아무것 가진 것 없어도 마음 하나만 있으면 충분한 것인 줄 사랑은 바다처럼 넓고도 넓어 채워도 채워도 목이 마르고 주고 또 주어도 모자라고 받고 또 받아도 모자랍니다. 사랑은 시작만 있고 끝은 없는 줄 알았다. 마음에 차곡차곡 쌓아놓고 가슴에 소복소복 모아놓고 간직만 하고 있으면 좋은 줄 알았다. 쌓아놓고 보니 모아놓고 보니 병이 듭디다 상처가 납니다. 달아 날까봐 없어 질까봐 꼭꼭 쌓아 놓았더니 시들고 힘이 없어 죽어 갔다.

 때로는 문을 열어 바람도 주고 때로는 흘려보내 물기도 주고 때로는 자유롭게 놀려도 주고 그래야 한답니다. 가슴을 비우듯 보내주고 영혼을 앓듯 놓아주고 죽을 만큼 아파도 해봐야 한답니다. 모아둔 만큼 퍼내야 하고 쌓아둔 만큼 내주어야 하고 아플만큼 아파야 한다는걸 수 없이 이별연습을 하고 난 후에야 알 수 있게 되었다. 사랑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인 줄 알았는데 사랑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가장 쉬운 일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하면 할수록 해같이 빛나며, 별처럼 반짝이며 달처럼 온유합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ㄴ-20)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너희가 두 사람 이상 모여서”, 즉 “너희가 공동체를 이루어서” 라는 뜻입니다. ‘이 땅에서’ 라는 말은 ‘하늘에 계신’ 이라는 말과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우리는 ‘땅에’ 있는 존재, 즉 하느님께 기도를 해야 하는, 즉 하느님께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는 ‘작은 존재’ 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기도를 할 때에는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솔직하게 고백해야 하고, 겸손하게 하느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마음을 모아’ 모인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 있어야 그 모임이 공동체입니다. 만일에 한 자리에 모여 있긴 한데, 마음이 제각각 흩어져 있다면, 모두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고,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면, 그러면서도 입으로만 같은 기도를 바치고 있다면, 그것은 공동체의 기도가 아니고, 진심으로 바치는 기도도 아닙니다. 긴 세월 동안 민족 통일을 위해서 기도했고, 기도하고 있는데도 왜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가? 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우리는 정말로 마음을 모아서 기도하고 있는가? 부터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통일을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전쟁을 통한 흡수통일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마음을 모으려면 ‘남 탓’ 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왜 선악과 열매를 따먹었느냐고 물으셨을 때, 아담은 여자 탓을 했고, 또 그 여자를 만들어 주신 하느님 탓을 했습니다.(창세 3,12) 그여자는 뱀 탓을 했습니다.(창세 3,13) 처음부터 두 사람 모두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남 탓’ 을 한 것도 두 사람의 죄입니다. 아담이 여자 탓을 하면서 부부의 일치가 깨졌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서 기도를 하려면 우선 먼저 ‘남 탓’ 을 멈춰야 합니다.

 ‘무엇이든’ 기도의 내용에 제한이 없음을 나타내는데, 그렇다고 해서 아무거나 다 된다는 것은 아니고, 하느님의 뜻과 공동선 실현을 위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기도의 원칙입니다. 자기 혼자 바치는 기도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원하는 그것이 남에게 해로운 것이라면, 그것을 청하는 기도를 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는 내용을 기도로 바치면 안 되고, 남을 저주하는 기도를 하면 안 됩니다. 기도는 언제나 선과 사랑의 실현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면 안 됩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라는 말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전지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루카 1,37)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 를 가르쳐 주실 때에,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라는 말씀을 하셨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분이고, 또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면 기도는 왜 하는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잘 받기 위해서입니다. 지금까지도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어쩌면 우리 쪽에서 받을 준비가 안 되어 있기 때문일 것. 참으로 하나가 된 공동체를 만들지도 못했고, 마음을 모으지도 못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완전히 하나로 일치되어 있는 공동체는 예수님과 일치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일치되어 있는 공동체가 바치는 기도는 사실상 ‘예수님의 기도’ 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이기 때문에 그 기도는 틀림없이 이루어집니다.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 겉으로 보기에는 공동체처럼 보여도 마음이 제각각 흩어져 있으면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그 모임에서 입으로만 바치는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 가 될 수 없고, 그 기도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1-22) 마음이 하나가 되려면, 또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려면, 가장 먼저 실천해야 하는 일은 ‘용서’ 입니다. 

용서를 실천하려면 마음속에 있는 미움과 원한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 세상의 현실을 보면, 정치적인 신념이나 이념에 관한 문제에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 신념과 이념을 신앙보다 더 중요하게 지키려고 애쓰는 경우도 많다. 그런 경우에는 용서를 실천하기는커녕 더 잔인해지고, 더 악랄해집니다. 우리는 그 어떤 신념과 이념도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보다 위에 설 수는 없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신앙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신앙인으로서’ 사는 것.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하느님께서 너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신 것처럼 너도 형제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어야 한다.” 만일에 인간이 죄를 지을 때마다 천벌이 내린다면, 살아남을 사람이 없을 것.

 우리가 지금 이 순간 특별히 마음에 새기고 실천해야 할 말씀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 5,44-45).”입니다. 지금 이 순간 원수 같기만 한 사람들을 용서해야 하고 그들에게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것은, 그렇게 하기를 하느님께서 바라시기 때문이고, 그들도 나도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 안에 예수님의 생명을 품고 있는 행복한 우리들이십니다. 그 생명으로 살아가시기를... 그래서 그 생명이 우리의 모든 것을 행복한 것으로 회복시켜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상대방을 먼저 이해하고 그 다음에 이해받으라.''  - 스티븐 코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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