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3회 사랑의 빛이 허무와 무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5월 1일(에스테르기 1장~) 미국의 사상가 겸 시인 랄프 왈도 에머슨은 ''인생은 살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일련의 교훈들이다.'' 랄프 왈도 에머슨은 인생을 일련의 교훈으로 지켜보며, 삶과 배움이 분리될 수 없으며, 각 경험이 우레에게 귀중한 것을 가르쳐 준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 《"헨리 나우웬"의 모금의 영성 中에서》삶은 고통입니다. 가장 큰 고통은 사람 사이의 '관계' 에서 옵니다. 그때 최선의 선택이 '사랑' 입니다. 사랑을 선택하면 풀리기 시작합니다. 서로 하나가 되고, 쓰라린 상처가 치유되고, 원한과 미움이 용서로 바뀝니다. 오늘도 많이 웃으세요. “내 영혼은 밤에도 당신을 사모하오며, 아침에도 내 마음 당신을 그리나이다.”(이사26,9) 저녁 서편의 저녁 노을은 참 곱고 아름다웠다. 세상을 위무慰撫하는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듯 곱고 아름다운 저녁 노을로 표현됨을 봅니다. 요즘 은은하고 그윽한 아카시아 향기가 한창입니다. 흡사 존재의 향기, 사랑의 향기같다. 그리스도의 향기, 사랑의 향기를 발하는 이들을 만나면 마음이 참 평온해 집니다. 어느 신부님께 고백성사차 오신 분이 고목에 새 순이 돋은 분재를 선물했다. 말그대로 사랑의 선물이다. 시를 사랑하고 쓰시는 분이라 선물도 시처럼 품격이 있다. 사랑은 생명입니다. 날마다 끊임없이 사랑을 숨쉬며 먹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영원히 빛나는 한마디 말은 ‘사랑’ 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사람의 궁극 목표는 하느님을 닮아 성인이 되는 것이요, 답은 사랑뿐이 없다. 사랑하라 선물로 주어진 각자 고유의 유일회적 인생입니다. 결국 영적 성장과 성숙도 사랑의 성장과 성숙을 뜻합니다. 몸은 노쇠해가도 내적 사랑의 마음의 성장과 성숙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어야 할 것. 사랑할 때 닮습니다. 사랑할 때 예뻐집니다. 사랑할 때 아름답다. 인생 허무와 무지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사랑의 빛이 허무와 무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텅 빈 허무를 텅 빈 충만으로 바꾸는 사랑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 표지 안쪽의 글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대로 옮깁니다. “사랑은 구체적이다. 사랑은 추상명사가 아닌 실행해야 하는 동사다. 우리 몸은 사랑하라고 있는 ‘사랑의 도구’ 다. 멀리 밖에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함께 있는 가족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서로 사랑하라고 주신 선물이다. 작은 행동으로의 사랑이다. 작은 사랑의 실천이 감동을 주어 마음을 치유하고, 정화하고, 충만하게 한다. 사랑은 우리의 모든 것. 사랑이 있을 때 빛나는 인생이지만 사랑이 사라지면 어두운 인생이다. 사랑하며 살아갈 때 비로소 사람이다.” 지금 읽어도 구구절절 공감이 갑니다. 사랑뿐이 답이 없다. 사랑뿐이 길이 없다. 복음말씀 ‘1.성내지 마라, 2.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3.아내를 소박하지 마라, 4.맹세하지 마라, 5.보복하지 마라는 다섯가지 대당명제에 이은 마지막 6.원수를 사랑하여라’ 입니다. 여섯 대당명제의 최종 결론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평생과제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참으로 사랑이 익어 성숙해 갈수록 둥글게 익어가는 가을 열매들처럼 원숙한 사람, 완전한 사람, 온전한 사람이 됩니다. 과연 사랑으로 둥글게 익어가고 있는 원숙하고 아름다운 삶인지요. 사랑의 절정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요,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 나에게 원수요 박해하는 자들이지 나름대로 까닭이 있을 것이며, 하느님 눈엔 사랑스런 자녀들일 수도 있다. 자기 무지로 인한 원수짓이요 박해일 수도 있다. 자기도 모르게 무지의 죄, 무지의 악, 무지의 병에 휘말려 사는 어리석은 눈먼 중생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미워할 것은 무지의 죄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원수를 사랑할 수 뿐이 없고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뿐이 없다. 원수를 미워하다보면 원수를 닮아 괴물이 되고 내가 먼저 파괴됩니다. 내 본연의 존엄한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도 이 길뿐이 없다. 참으로 무지의 악, 무지의 죄의 전형적 인간이 탐욕에 눈먼 열왕기 상권의 아합입니다. 무죄한 나봇을 살해한 아합의 죄의 결과는 얼마나 끔찍하고 처절한지요. 엘리야 예언자들 통한 하느님의 준엄한 선고입니다. “주님이 말한다. 살인을 하고 땅마저 차지하려느냐? 주님이 말한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던 바로 그 자리에서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 “나 이제 너에게 재앙을 내리겠다” 에 이어 계속 전개되는 구체적 벌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무지의 죄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 우리에게 주는 충격적 가르침이 이 말씀을 듣는 우리들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죄는 순간의 쾌락을 줄지 몰라도 괴롭고 아픈 후유증은 평생입니다. 아합의 구체적 죄의 나열입니다. 순전히 하느님을 잊고 나를 잊은 무지로 인한 죄입니다. ‘아합처럼 아내 이제벨의 충동질에 넘어가 자신을 팔면서까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른 자는 일찍이 없었다. 아합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라인들이 한 그대로 우상들을 따르며 참으로 역겨운 짓을 저질렀다.’ 역시 지금 이 순간도 많은 무지의 죄인들을 통해 반복되는 악행들입니다. 주님 대신 우상을 따르며 역겨운 짓을 하지는 않는지 늘 ‘주님의 눈’ 을 의식해야 하겠다. 그러니 이런 무지의 원수들이나 박해자들을 사랑하고 기도하며 이들을 하느님의 처분에 맡기는 것. 무지를 무력화하고 원수나 박해자들을 살리는, 또 내 존엄한 품위를 지키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래야 비로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아버지의 자녀답게’ 사는 삶, 얼마나 품위 있고 아름다운 삶인지요. 그러니 하늘 우리 아버지를 부단히 닮는 것.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무차별의 대자대비, 공평무사하신 우리 하늘 아버지를 닮으라는 것. 인종, 국적, 종교, 문화, 언어 모두를 초월하여 모두가 아버지 품안에 있는 자녀들임을 깨달으라는 것. 우리가 유유상종,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끼리끼리 패거리 사랑이라면 무슨 상을 받을 수 있겠는지요? 이는 누구나 할 수 있다. 우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우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는지요? 이 또한 누구나 할 수 있다. 참으로 하늘 아버지를 닮아 누구에게나 자비롭고 너그럽고 따뜻하고 부드럽고 겸손, 겸허하라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의 숭고한 평생과제입니다. 참으로 한 번 참사람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라고 주어진 참 고귀한 선물인생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사랑의 하느님을 닮아갈 때 비로소 무지와 허무로부터 해방되어 참 자비롭고 지혜로운 삶, 참 자유롭고 행복한 삶, 온전하고 완전한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날로 당신을 닮아 사랑으로 익어가는 원숙하고 온전한 삶으로 이끌어 주시며 우리 모두에게 당신의 유일한 소원을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 아멘. 믿음 안에서 믿음을 통해 지금 우리들 안에 우리와 함께 살아계시는 주 예수님의 지혜와 기적의 힘이 넘쳐나고, 우리들이 바라는 소망이 이루어지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햇빛은 하나의 초점에 모아질 때만 불꽃을 피우는 법이다.'' - 벨 - |
♡2084회 그대들이 준 고난에 감사하노라.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5월 2일(에스테르기 1장~) 영국의 전설적인 밴드 비틀즈의 멤버 존 레논은 ''삶이란 우리가 다른 계획을 세우는 동안에 일어나는 일이다.'' 인생은 계획과 상관없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전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존 레논은 자기 자신이 삶의 중심이라는 사실로 존재하고 적응할 수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탕자의 귀향』'되찾은 아들의 비유' 는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다. 신앙을 갖지 않은 이들 가운데에도 이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 '명불허전' 이라고, 이 비유의 말씀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의 모습을 참으로 두드러지게 보여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 라기보다는 오히려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 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학자들의 견해가 꽤 설득력이 있다. 헨리 나우웬 신부의 『탕자의 귀향』이라는 책은 너무나 유명하다. 우리 시대의 손꼽히는 영성 고전이라 할 만하다. 저자는 러시아의 한 박물관에 있는, 화가 렘브란트가 그린 성경의 이 장면에 대한 그림을 오랜 시간 감상하면서 이 비유의 참뜻을 차분하면서도 감동적으로 묵상해 나간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작은아들과 큰아들의 처지에서 묵상하고 또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충분히 묵상한 뒤 우리의 소명에 대하여 말해 주는 부분이다. 그것은 우리가 더 이상 작은아들과 큰아들로 머무를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아버지처럼 되어서 자비와 인내와 포용을 보여야 한다는 호소였다. 우리 인생의 과제는 바로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간다. 교회에 용서가 없다면, 교회는 성장하고 발전하지 못한채 부패하고 쇄락할 것. 교회를 박해한 바오로를, 사생아를 낳았던 아오스딩을 교회가 용서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신학과 영성이 이렇게 발전할 수 없었을 것. 공동체 안에 용서가 없으면 교만과 독선으로 더 부폐하게 된다. 용서가 없이는 감사하는 삶, 기쁨과 은총의 삶을 살아갈 수 없고, 교만, 시기, 질투, 불평과 불만으로 분열이 일어날 뿐이다. 용서가 없는 삶은 한번의 실패와 실수에도 쉽게 좌절하고, 다시 일어설수 없는 절망의 삶, 폐인의 삶을 살게된다. 하느님은 지금 이 순간 죄인의 회개를 너무나 애타게 기다리시고, 너무나 기뻐하신다. 용서할 수 없고, 용서를 청할 수 없는 사람은 절대 하느님의 기쁨에 참여할 수 없다. 교만은 하느님의 생각과 의지에 반대하고, 그분의 섭리와 역사하심에 불평하는 것이므로 용서없는 삶은 이렇게 우리를 교만으로 부폐하게 만든다.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도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느님은 원하시면 다 이루실 수 있는 능력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지금 이 순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일치시킬 필요가 있다. 마치 운전자가 내비게이션과 운전을 일치시키는 것과 같다. 주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것을 청하면 거의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먼저 내가 원하는 것을 그분이 원하시는지 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원하실법한 것을 내가 원해도 잘 들어주시지 않는 경우가 있다. 어떠한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지금 이 순간 방향을 분명히 잡고 있었지만, 액셀을 충분히 밟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병 환자는 엑셀을 끝까지 밟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원하는 것을 그것 하나로 지금 이 순간 집중해야 합니다. 1895년 미국 남부 앨라배마주는 비통한 슬픔에 잠겼다. 목화재배로 유명한 이곳에 갑자기 목화 바구미가 들끓기 시작했던 것. 목화 수확은 절반으로 줄었고 설상가상으로 전염병까지 나돌았다. 도시는 삽시간에 실직자와 결식자의 탄식 소리에 휩싸였다. 어떤 이들은 절망하지 않았다. 그들은 밭에서 목화를 뽑아내고 그곳에 땅콩을 심었다. 20년 후, 이곳은 ‘땅콩의 수도’ 로 불릴 만큼 풍요로운 도시로 변모했다. 엔터프라이즈 마을 입구에 세워진 목화 바구미 기념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우리는 목화 바구미에 감사한다. 그날의 시련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오늘의 풍요를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목회 벌레여, 그대들이 준 고난에 감사하노라.”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목화마을을 만들려고 하는지, 풍족한 마을을 만들려고 하는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원하는 것이 지금 이 순간 확실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들어주실 가능성이 크지만, 본인도 지금 이 순간 무엇을 원하는지 명확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이끌어주셔도 따라가지 못할 수 있다.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은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먼저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25가지 적어보십시오. 그리고 그중에서 더 중요한 5가지만 정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에 모든 에너지를 쓰십시오. 그 5가지에 힘을 쏟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머지 20가지에 에너지를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워런 버핏이 투자의 귀재가 되었다면 주식만을 생각하며 그것에 모든 에너지를 쏟았음이 틀림없다. 김연아 선수에게 어떻게 그런 경지까지 올랐느냐, 선천적인 것 아니냐고 질문하면 “전 그 목표만을 위해 달렸습니다.” 어떤 미국인이 허리케인이 자신의 집을 다 날려버렸을 때 걱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중요한 가족과 함께 피신했기 때문입니다. 나머지는 다 날아가도 됩니다. 그러나 집에 두고 온 물건을 되찾으려다가는 가족까지 잃게 될 수도 있다. 이처럼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을 지금 이 순간 찾고 그것만을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을 필요가 있다. 어떤 할머니는 환갑이 넘은 늦은 나이에 정원을 가꾸기 시작하여 여든이 되어서는 전국 각지에서 그 정원을 보기 위해 찾아오게 만드는 훌륭한 정원을 꾸몄다.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하나에 집중하면 평생 뿌듯해할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 이것저것 원하지 말고 정말 나도 원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구체적인 것 한 가지를 찾읍시다. 마치 경주하는 말이 다른 곳을 보지 못하게 앞만 보도록 눈가리개를 한 것처럼, 그 방향으로만 나아갑시다. 스티브 잡스는 원하는 것을 이루려면 원하되 절실하게 원하라고 했다. 진정 내가 원하고 주님께서 원하는 것이라면, 3개월만 지나면 나의 희미한 믿음을 확신시켜 주는 일들이 하나둘씩 일어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나를 실망시키지 않기, 사랑하는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기, 그리고 주 예수님을 실망시키지 않기, 그래도 실망시키는 일이 생겨도 괜찮겠지요 보호자 성령님께서 함께하니까 좋네요. 주 예수님께서 보내신 성령님의 도움이 지금 이 순간 함께하는 축복되고 은혜로운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자비·검약·겸허를 몸가짐의 삼보(三寶)로 하라.'' -노자- |
♡2085회 죽음 가장 가까이에 있을 때 가장 살아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5월 3일(욥기 16장~) 생물진화론을 선택한 영국의 생물학자 찰스 다윈은 ''살아남는 종은 가장 강하지도 가장 똑똑하지도 않지만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다.'' 진화론의 원리에 뿌리를 둔 이 명언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새로운 생존 방법을 찾고, 도전에 대응하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마음이 맑아지는글》오늘 내가 헛되이 보낸 시간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입니다. 시간의 아침은 오늘을 밝히지만 마음의 아침은 내일을 밝힙니다. 열광하는 삶보다 한결같은 삶이 더 아름답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 사람은 누구에게서나 배웁니다. 부족한 사람에게서는 부족함을 넘치는 사람에게서는 넘침을 배웁니다. 스스로를 신뢰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 성실할 수 있다. 살다 보면 일이 잘 풀릴 때가 있다. 그것이 오래가지는 않습니다. 살다 보면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가 있다. 이것도 오래가지 않습니다. 소금 3퍼센트가 바닷물을 썩지않게 하듯이 우리 마음 안에 있는 3퍼센트의 고운 마음씨가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개신교에서는 매우 유명한 ‘김동호’ 목사가 있다. 폐암 판정을 받고 폐 일부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수술보다 더 힘든 것은 항암이었다고 합니다. 항암 중 졸도하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옥의 고통을 느끼던 지난 한 해가 평생에서 가장 행복했다고 말합니다. 하늘을 두고 거짓말이 아니라고 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항암의 고통 중에 침대에 쓰러져 밥도 먹을 수 없는 상황에서 하느님께서 이사야 40장 1절의 말씀을 주셨다고 합니다. “내 백성을 위하라!” 처음엔 ‘지금 내가 죽게 생겼는데 무슨 내 백성을 위하라고 하시나?’ 라고 의문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로 암의 고통을 통해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그 고통만큼 당신 백성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전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너도 아파 봤으니까 알잖아. 내 사랑을 전하라!” 침대에 실려 다녀야 하는 상황에서 바로 집회를 시작하였다. 아침 6시마다 “날마다 기막힌 새벽” 이란 이름으로 항암의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위해 설교를 시작하였다. 그렇게 벌써 300여회가 넘었고 1년에 벌써 구독자가 12만 명이 되었다. 그분은 고통스러운 가운데 복음을 전할 수 있어서 더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어떤 말기 암 환자분의 자녀가 이런 댓글을 달아주셨다고 합니다. “그 지옥같이 고통스러운 나날을 천국 같이 지내다 가셨습니다.” 번지점프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혹은 위험한 외줄 타기나 암벽등반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사람들은 왜 그런 위험한 스포츠를 즐길까요? 그 이유는 죽음 가장 가까이에 있을 때 가장 살아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안전한 곳에서는 살아있음도 느끼기 어렵다. 이는 삶과 죽음이 세트 상품이기에 그렇다. 삶과 죽음은 한 세트이기 때문에 하나가 커지면 다른 것도 커집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재미없는 관계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관계입니다. 그 안에서는 친밀함을 찾아볼 수 없다. 행복은 친밀한 관계에서 옵니다. 그런데 관계가 친밀하려면 그만큼 멀어지는 고통도 감수할 용기를 내야 합니다. 발에 줄 하나 매달고 뛰어내릴 용기를 내지 못하면 살아있다는 쾌감도 느낄 수 없게 됩니다. 관계도 하나의 모험입니다. 내 전부를 내어줄 용기가 없다면 친밀한 관계에서 오는 행복도 기대할 수 없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관계가 ‘믿음’ 에 바탕을 두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은 ‘선물’ 에 의해 생깁니다. 모르던 두 사람이 사귀면 상대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선물을 합니다. 선물 안에 그 사람의 사랑이 담깁니다. 누군가 사랑한다고 말하며 이쑤시개를 준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사람과 친밀한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선물 안에는 그 사람의 존재가 담깁니다. 선물 안에 그 사람의 생명이 담길 때, 상대가 그 선물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친밀한 관계가 만들어지고 그 친밀한 관계에서만 맛볼 수 있는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사람에게는 ‘자유’ 라는 것이 있다. 상대의 선물이 부담스러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생명과도 같은 선물이 쓸모없게 됩니다. 이때 선물을 주는 사람이 받는 상처는 그 선물을 위해 얼마나 투자했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만약 그 선물이 생명과도 같다면 그 사람은 거부당할 때 지옥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관계를 위해 조금만 투자합니다. 상처받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로라면 상처는 받지 않을지언정 삼위일체 관계가 이루어져 느끼는 천상의 행복은 맛볼 수 없다. 천국의 행복을 맛보려면 지옥의 고통도 감수해야 합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관계 안에 천국도 있고 지옥도 있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지옥까지도 내려가십니다. 구원 역사 안에서의 이런 관계는 삼위일체 관계의 계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차거나 뜨거우면 삼키겠지만 미지근하면 뱉어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신과의 관계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 딱 그 정도만 선물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적당히 신앙생활 하며 만약 하느님이 안 계시더라도 크게 손해 볼 것이 없는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그리스도와의 삼위일체 관계를 통해 느끼는 행복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당신 살과 피를 선물로 내어주셨다. 그 선물이 성부와 성자 사이에서는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성령 선물의 보답으로 당신 목숨을 바치셨다. 그 보답으로 부활과 승천,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누리십니다. 이렇게 되실 수 있으셨던 이유는 관계를 위해 목숨을 내던질 줄 아는 용기에서 비롯되었다. 삼위일체 행복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투자하지 않으면 얻는 것도 없다. 행복은 관계에서 옵니다. 아니 관계의 친밀도에서 옵니다. 관계의 친밀도는 내어줌의 정도에 의해 결정됩니다. 조금 내어주는 관계는 조금 깊은 관계이고 많이 내어주는 관계는 아주 깊은 관계입니다. 평생 친구 같은 친구 하나 없이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친밀한 관계를 맺어갈 것인지는 내가 관계를 위해 지옥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은 당신 십자가의 내어주심을 통해 우리도 삼위일체 관계에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관계를 통한 천국의 행복과 지옥의 고통은 세트 상품입니다. 사랑을 위해 지옥을 감수할 용기가 있다면 삼위일체 행복을 이 세상에서부터 체험할 수 있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고 소원을 간청하고, 그리고 반드시 나의 기도가 이제와 영원히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고 기쁘고 행복하게 웃고 사는 우리들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힘으로써 사람을 복종시키지 말고 덕으로써 사람을 복종시켜라.'' - 맹자 - |
♡2086회 인간은 세 가지 관계를 맺고 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5월 4일(시편 65편~) 이탈리아속담에 ''기다림만으로 사는 사람은 굶어서 죽는다.'' 《내게 이런 삶을 살게 하여 주소서》연약할 때 자기를 알고 힘을 기를 줄 아는 여유와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는 대담성과 정직한 패배에 부끄러워 하지 않고 태연하며 승리에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을 갖게하여 주소서. 사리를 판단할 때 고집으로 인하여 판단을 흐리지 않게 하고 생각하고 이해하여 사심이 없는 판단을 하며 또한 평탄하고 안이한 길만이 삶의 전부라 생각치 말게 하고 고난에 직면할 때 분투 노력할 줄 알며 패자를 관용할 줄 알도록 가르쳐 주소서. 마음을 항상 깨끗이 하고 목표는 높이 설정하되 남을 정복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다스릴 줄 알며 장래를 바라봄과 동시에 지난 날을 잊지 않게 하여 주소서. 이에 더하여 삶을 엄숙하게 살아감은 물론 유머를 알고 삶을 즐길 줄 알게 하소서. 자기 자신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게 하시고, 겸허한 마음을 갖게 하여 참된 위대성은 소박함에 있음도 알게 하시고, 참된 지혜는 열린 마음에 있으며 참된 힘은 온유함에 있음을 명심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먼 훗날 내인생 헛되이 살지 않았노라고 말할 수 있게 하여 주소서. "사람들에게 보이려고"(마태 6, 1-6)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게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나팔을 불지 마라/ ...해서는 안 된다/ ...빈 말을 되풀이 하지 마라/ ...표정을 짓지 마라." 는 부정적인 단어들이 많이 나오고 반면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 너는 금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는 긍정적인 단어들이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지금 이 순간 해야할 것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는 것. 지금 이 순간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왜 이런 구분을 지으면서 살아야 하는가? 나는 지금 이 순간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 부정적인 모습이 많은가? 아니면 긍정적인 모습이 많은가? 우리는 비교적 "... 하지 마라" 는 것은 하고, 반대로 "..하라" 는 것은 하지 않는 것 같다. 우리 각자 "..하지 마라." 는 것 중에 내가 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 하라" 고 한 것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생활을 돌아보는 것도 무척 흥미로운 일이라고 생각된다. 아무튼 지금 이 순간 나는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는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는가? 라는 것을 생각해보게 한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고, 다른 사람들한테 칭찬을 받고 싶어하고, 내가 하는 선행을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래서 예뻐 보이려고 화장도 하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차를 타고 다니고. 화려한 경력이나 학력을 내세우기를 좋아한다. 이런 모든 행동들은 다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들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행동들은 우리 사회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고 또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 잘 사는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나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은 늘 경쟁의 대상이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반드시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이기려고 하니까 늘 다른 사람들보다는 모든 면에서 앞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여기에서 질투가 생기고, 미움이 생기고, 급기야는 원수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하느님은 이와는 정반대의 삶을 요구하신다 .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잘 보이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칭찬을 받으려고 하지도 말고,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금식할 때에는 애처로운 표정을 짓지도 말고 오히려 남이 알아보지 못하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도대체 이런 사람은 어떤 인생관을 갖고 살아가는가? 이 사람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 않을 만큼 모든 것에서 초월한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우리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완덕을 추구하는 사람의 삶은 지금 이 순간 분명히 달라야 한다.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무렇게 살아서 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해야할 것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항상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느님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의 삶의 목표는 어떻게 하면 완전하신 아버지를 닮을 수 있는 가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삶의 원칙은 분명하다. 아버지를 닮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지금 이 순간 피할 것이고 아버지를 닮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지금 이 순간 취할 것이다. 반대로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삶의 목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사는 사람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을 위한 것은 취하고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취하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늘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갈 것이고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늘 자기 중심으로 살아갈 것.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섬기는 자세가 아니라 자신을 섬기는 자세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남들한테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 하고 모든 관심은 다른 사람들한테 칭찬 받고 존경받는 것에 있다. 이런 사람의 마음 안에는 하느님이 안 계시기 때문에 마음이 허전하고 그래서 공허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한테 관심과 사랑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 그래서 늘 바쁘다. 여기 저기 쫓아다녀야 하고 좋은 것을 입어야 하고 항상 최고의 것을 지향한다. 그래야 남한테 칭찬받고 의롭다는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힘이 분산되고 산만하다. 안정되지 못하고 늘 쫓기며 불안해 한다. 반면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오직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살아가기 때문에 조용하면서도 모든 힘을 한 곳으로 모은다. 시간 낭비가 없고 힘이 분산되지 않으며 한 곳에 투신할 수 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과는 소원하게 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쳐 투신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하느님한테서 힘을 받고, 그 힘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으로 발산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한테 힘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힘을 얻기 때문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시는 아버지께 기도한다. 사람이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삶의 방식이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세 가지 관계를 맺고 있다. 하나는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이고 두 번째는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이고 세 번째는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이다. 이 세 가지 관계는 모두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관계는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이다.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가 잘 이루어 져야 다른 관계도 원만하게 이루어 지고 삶의 균형을 잡을 수 있다.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지금 이 순간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피하고 해야할 것은 최선을 다할 할 때 완덕을 향한 우리의 발걸음은 한발작 더 가까이 나아갈 것이다. 아멘. 언제나 항상 우리들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보시기를 또한 지금 주 예수님께서 우리들과 같이 살고 계심을 믿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오늘이라는 날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라.'' - 단테 - |
♡2087회 ‘비유’ 는 진리에 다다르는 사다리이고, 소통의 다리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5월 5일(시편 91편~) 마이크로소프트(MS) 설립자 빌 게이츠는 ''성공을 축하하는 것도 좋지만 실패의 교훈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 빌 게이츠는 실패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은 더 깊은 통찰력을 제공하고 미래의 성공을 위한 길을 제시한다며, 실패로부터 배우는 것의 가치를 강조합니다 《사랑의 길》나는 죄를 짓고, 나에게 상처를 주고, 나를 모욕하고 내 물건을 빼앗은 형제 앞에서 "내가 옳다." 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가 변명을 하려고 애쓸 때 눈을 감아 줄 수 없다. 그렇다. 그가 내게 잘못을 저지르고, 내 물건을 빼앗고, 나를 때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 사실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냉정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실은 사실은 사실이니까요.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냉정하게 생각하면서도, 즉 네가 잘못했고 내가 옳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면서도, 정당성을 주장하지도 정의를 내세우지도 않으며 오히려 힘든 사랑의 길로 매진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결코 궁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왜냐하면 그 형제 또한 내 정당성에 반해 자신의 정당성을 최대한 내세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사실이 기억납니다. 즉 정의라는 이름으로 전쟁이 일어났고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학살 되었다. 왜냐하면 저마다 수호해야 할 자신의 진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결국 우리는 지금 이 순간 그분의 생각을 깨달아야 할 것. 예수님께서는 정의를 사랑으로 극복하시고 진리를 당신의 희생으로써 쟁취하셨다. 하지만 이제 우리가 차마 용서해 줄 수 없는 부도덕한 형제들에 대해 바로 그 방법, 그 척도를 사용해야할 차례입니다. 지금부터는 우리가 비겁한 행동이나 절도나 퇴폐적 생활을 용서해야 할 또 다른 베드로, 또 다른 강도, 또 다른 막달레나를 만날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알 수 있을 것. 유다인들이 간음한 여인 앞에서 예수님께 제시했던 대로 돌을 던지는 대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우리가 해야 할 차례입니다. "'너의 죄를 묻던 사람들은 아무도 없느냐?'.... '아무도 없습니다.'...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아라.'" (요한 8,10-11) 우리가 다른 사람의 행동과 삶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율법적이고' '틀에 박혀 있고' '죽어 있는' 그런 교회로 다시 돌아갈 뿐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이 세상의 모든 성전과 지성소의 바리사이들처럼 계속해서 미움에 사로 잡혀 있는 가련한 신세가 되고 말것. 예수님도 비유를 통하지 않고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이 말은 세상 모든 것들 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진리가 들어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다는 뜻은 그렇게 비유가 당신 진리로 올라오는 사다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프란츠 카프카는 ‘변신’ 과 같은 작품을 쓴 위대한 소설가입니다. 그런데 그는 어릴 때부터 유약하고 예민하여 일을 끝까지 해내는 적이 없었다. 사업가인 부모는 대학을 졸업하고 2년이 지나도 취직을 하지 못하는 카프카를 실패자로 낙인찍었다. 도시에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믿은 카프카는 시골로 내려가 조부와 함께 농사를 짓기로 합니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조부는 카프카를 데리고 사과농장으로 향했다. 사과 이야기를 해 주었다. 첫 번째 사과나무 앞에 서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 “이 나무는 내가 6년 전에 심었는데 줄기가 부러지더니 가지도 부러져 쓸모없게 되어버렸단다.” 두 번째 사과나무 앞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이 나무는 심은 지 1년 뒤에 가지치기를 해 주었지. 그랬더니 3년 뒤에 맛있는 열매를 맺었는데, 가지치기를 너무 많이 해서인지 작년엔 싹도 트지 않고 말라 죽었어.” 세 번째 나무 앞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이 나무는 두 번째 나무와 같은 과정을 거쳤는데 끝까지 살아남았어. 자신이 가진 모든 에너지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데 쓴 거지. 이젠 잎도 무성하고 가지도 튼튼해져서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단다.” 조부는 이 세 나무를 보여주고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 “인간도 이 세 사과나무와 같단다. 어떤 사람은 아무 의욕도 없지. 처음부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남아. 그러면서 환경이나 남의 탓만 한단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는 살아. 그러나 목표가 없어. 그래서 적당히 열매 맺다가 죽고 말지. 그러나 네 안에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좋은 열매를 맺을 아주 좋은 것들이 많아. 그것들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좋은 열매를 맺어야지. 그것이 네가 끝까지 건강하고 왕성하게 살 수 있는 길이란다.” 할아버지의 비유를 통한 이 한 번의 교육은 부모가 이십 년 넘게 가르친 것보다 큰 교육이 되었고 카프카의 삶을 바꾸어놓는 계기가 되었다. 비유가 이렇게 강력한 힘을 갖는 이유는 세상을 하느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치 음식 안에 보이지 않는 소금의 짠맛이 다 배어있는 것처럼 세상 모든 것들 안에는 하느님의 진리가 녹아있다. 소금만 먹으면 짜서 감당할 수 없겠지만, 세상 것들과 곁들여 받아들이면 진리의 맛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실 때도 비유로만 설명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 종의 병을 고쳐달라고 청한 백인대장에게 예수님께서 이런 엄청난 칭찬을 해 주십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도대체 하느님도 알지 못하는 로마 사람이 어떻게 그런 큰 믿음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비유를 통해 진리에 다다르는 법을 알고 있었던 것.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다른 이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의 집으로 찾아와 고쳐달라고 청하였다. 이 세상 것을 묵상하다 보니 예수님께서 굳이 자신의 집에 오시지 않아도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 분임을 깨달은 것. 무작정 공부만 하는 것보다 비유를 통해 진리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결과를 낳게 되는 것. 자녀가 지치고 절망하여 더는 버틸 수 없는 큰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유태인들은 이렇게 교육한다고 합니다. 자녀를 조금 높은 울타리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가 아끼는 모자를 벗겨 그 울타리 너머로 던집니다. 그러면 자녀는 어떻게 해서든 그 모자를 찾아옵니다. 그리고 무언가 깨닫습니다. 우리도 자녀에게 많은 옳은 이야기를 직설적으로 하기보다는, 이런 비유와 체험을 통해 가르쳐보는 것은 어떨까요? ‘비유’ 는 진리에 다다르는 사다리이고, 소통의 다리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에 이미 숯불을 피워 놓으시고, 성령의 불을 준비하시고, 은혜로운 말씀을 준비해주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으로 위로해 주시고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시는 은총과 축복으로 충만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끝을 맺기를 처음과 같이 하면 실패가 없다.'' - 노자 - |
♡2088회 '악은 잘못을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보복하는 일’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5월 6일(시편 106편~) 페이스북의 공동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는 ''정말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가장 큰 위험은 어떤 위험도 감수하지 않는 것이다.'' 마크 저커버그는 끊임없이 진화하는 세상에서, 변화에 직면한 적응성과 대담성을 가지라고 설명합니다. 《집착을 벗어놓고...》처음 우리가 이 세상에 왔을 때 그리고 마지막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린 빈 손으로 왔으며 빈 손으로 가야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우린 대부분 태어남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본래로 비었던 손을 가득 채우는데에만 급급해 하며 세상을 살아갑니다. 우리네 인생의 목표가 어쩌면 그렇게 채우는 일처럼 여기며 한없이 내 것을 늘려 나가는 끊임없이 닥치는대로 잡아 소유하며 삽니다. 돈을 붙잡으려 발버둥치고, 명예를, 지위를, 권력을, 지식을, 이성을... 그렇듯 유형무형의 모든 것들을 무한히 붙잡으며 이 한 세상 아둥바둥 살아갑니다. 그것이 우리네 삶의 모습입니다. 무한히 붙잡는 삶... 붙잡음으로 인해 행복을 얻고자 하는 삶...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가 그렇게 추구하고 갈구하려고 하는 '잡음!' 그 속에서 우리가 그렇게 버리고자 갈망하는 고(苦), 괴로움이 시작됨을 알아야 할 것. 붙잡고자 하지만 잡히지 않을 때 괴로움은 우리 앞을 큰 힘으로 가로막게 될 것. 이미 잡고 있던 것을 잃어버릴 때, 우린 괴로움과 한바탕 전쟁이라도 버려야 할 듯 합니다. 그것이 돈이든, 명예이든, 지식이든... 그 무엇이든 우리의 욕망을 가득 채워 줄 만큼 무한히 잡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우린 너무도 모르고 있는 듯 합니다. '잡음' 으로 인해 행복하고저 한다면 그 행복은 절대 이룰 수 없음이 진리의 참모습입니다. 잠시 나에게 온 것 뿐이지 그 어디에도 내 것이란 것은 있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잠시 온 것을 '내 것' 이라하여 꽉 붙잡고 놓지 않으려 합니다. 바로 '내 것' 이라고 꽉 붙잡으려는 그 속에서, 그 아상(我相) 속에서, 괴로움은 시작됩니다. '내 것' 을 늘림으로 인해서는, '잡음' 으로 인해서는 결코 행복이며 자유, 진리를 구할 수 없다. 도리어 그동안 내가 얻고자 했던 붙잡고자 했던 그것을 놓음으로써 행복을 얻을 수 있다. 무소유가 전체를 소유하는 것이라 했다. 놓음이 전체를 붙잡는 것. 크게 놓아야 크게 잡을 수 있다. '나' '내것' 이라는 울타리를 놓아버려야 진정 내면의 밝은 '참 나'가 드러나게 될 것. 놓음... 잡은 것은 놓음으로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삶과 어쩌면 정면으로 배치되는 삶이기에 힘들고 어려운 듯 느껴집니다. 그렇게 선입견을 녹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온갖 것들에 걸려 집착하는 것을 놓으십시오. 특히 무아(無我)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나' '내것' 에만 집착하여 이를 붙잡으려하는 어리석은 아집(我執)을 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下)라는 것은 '아래'라는 의미이지만 그 아래는 모든 존재의 가장 깊은 곳, 그 아래에 있는 뿌리와도 같은 한마음, 본래면목, 주인공, 참 자아를 의미하는 것. 일체 모든 끄달림, 걸림, 집착을 용광로와 같은 한마음 내 안의 참 나의 자리에 돌려 놓으라는 것. 영화를 잘 보지 않아서 극장을 간 지도 꽤 된 것 같다. 중고등학생 시절 때만 해도 극장을 수시로 찾았다. 학생이라 돈이 없는 관계로 개봉관이 아닌, 영화 한 편 보는 가격에 두세 편을 볼 수 있는 극장에 가서 온종일 영화를 본 적도 많았지요. 또 지금처럼 좌석제가 아니었기에 똑같은 영화를 2~3번 본 적도 있었다. 당시 왜 그렇게 영화에 빠졌을까 생각해보면 재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극장에 붙은 영화 대형 그림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호기심이 왕성했던 시절, 이 그림판은 ‘꼭 보고 싶다’ 라는 마음을 갖게끔 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어디를 가도 이 대형 그림판을 볼 수 없다. 또 당시처럼 인기 있어 화제가 된 영화를 보기 위해 길게 줄을 설 필요 없이 예약만 하면 편하게 그 시간에 맞춰서 영화를 볼 수 있다. 그런데도 그 당시가 그리워지는 것은 왜일까요? 분명히 지금보다 불편했던 환경이었는데 말입니다. 불편했던 기억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리움의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는 고통과 시련 역시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진실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이런 기억 역시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지금 어렵고 힘든 상황이 행복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또 내가 원하는 대로 흐르지 않는다고 해서 이 역시 행복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행복이라는 것은 세상의 관점을 뛰어넘는 것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는 산 위에서 사람들에게 ‘행복선언’ 을 발표하십니다. 이 행복선언의 첫 마디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것이었다. 세상의 부를 경멸하고 하느님 안에서 부유하게 된 이가 하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이렇게 시작하는 행복선언은 우리 세상에서의 관점을 완전히 뒤바꿔 놓습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이 최고라고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대신 하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이를 믿는 사람은 영광스러운 보상을 생각하면서 세상의 어떤 고통이라도 견뎌낼 준비가 늘 되어 있다. 하늘에 있는 것을 누리기 바라는 이는 땅에서 받는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지금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 불행하다면서 불평불만을 던질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하늘 나라의 영광에 부합한 지를 먼저 떠올려야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순간의 행복이 아닌 영원한 행복, 순간의 만족이 아닌 영원한 만족을 이룰 수 있는 길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제시하십니다. 이 행복을 나의 것으로 만들어 영원한 만족을 이룰 수 있도록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야 합니다. 자식 중에 특별히 더 애착이 가는 아이가 있다는 어느 형제님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자신도 모르게 편애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는 것. 물론 똑같이 대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는 있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다고 하십니다. 이런 노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실제로 특별히 더 눈길이 머무는 아이가 있을 수밖에 없겠지요. 편애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아예 하지 않는다면 편애를 받는 아이는 제대로 성장할 수가 없다. 어렸을 때 가족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하게 되면 커서 보복을 꿈꾼다고 하지 않습니까? 심리 분석가 알베르트 괴레스는 ‘악은 잘못을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보복하는 일’ 이라고 말합니다. 편애라는 잘못된 행동이 나중에 가족에게 복수를 행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완전히 똑같은 사랑은 주기가 힘듭니다. 그러려고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분명히 큰 후회를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의 몸과 마음이 머물러 있는 삶의 자리... 그 삶의 자리 안에 사랑하는 주 예수님을 마음에 담고, 그 마음을 향하여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는 신앙으로 우리들의 아픈 곳이 회복되고, 우리들이 바라는 소망이 이루어지는 복된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한 사람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게 사랑이다.'' - 찰리 채플린 - |
♡2089회 ‘틀리다’ 와 ‘다르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5월 7일(잠언 1장~) 파키스탄의 인권 운동가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한 명의 어린이, 한 명의 교사, 한 권의 책 그리고 한 개의 펜이 세상을 바꾼다.''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교육의 힘을 강조하면서, 작은 행동이라도 지식과 결단력으로 추진된다면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내 영혼을 울리게 하는 글》하늘에게 소중한 건 별입니다. 땅에게 소중한 건 꽃이며 나에게 소중한 건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입니다. 내가 힘들어 지칠때 빗방울 같은 눈물을 흘릴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되어주세요.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못해도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은 보여줄수 있다. 난 그대를 만날 때보다 그대를 생각할 때가 더 행복합니다. 힘들고 지칠 때 혼자 넓은 바다에 홀로 남은 기분이 들 때 나에게 힘이 되어줄수 있는 그런 나룻배가 되어주세요. 언제부터인가 내맘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사람이 있다. 아마도 그 사람이 이 글을 읽고있는 당신인 것 같다. 누군가가 자기를 좋아하면 자기가 살고있는 집의 하늘 위에 별이 뜬데요 오늘 밤에 하늘을 좀 봐줄래요 하늘 위에 떠 있는 나의 별을... 내가 살아있는 이유는 그대가 존재하기 때문이며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그대를 지켜주기 위함입니다. 나는 언제부턴가 하늘이 좋아졌어요 이유는 이 하늘 아래 당신이 살고 있기 때문이죠.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이며 그런 당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당신을 사랑해... 당신이 언제나 바라볼수 있는 곳 그 곳에서 항상 제가 당신을 바라보고 있을 것. 언제나 당신이 가는 곳은 어디든지 함께 갈 것. 다만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로 가지 않는다면 언제나 그대를 위한 나의 작고 소중한 마음이 있다. 세상에서 아주 소중한 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나의 사랑입니다. 나무는 그늘을 약속하고, 구름은 비를 약속하는데, 난 당신에게 영원한 사랑을 약속합니다. 난 오늘도 기도합니다. 오늘 역시 당신의 하루가 잊지못할 행복한 하루가 되기를... 바쁜 하루 중에 나의 목소리가 당신에게 잠시동안의 달콤한 휴식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 중에 당신과 내가 만나서 숱한 그리움 속에 당신을 다시 만난다면 그때 고백할께요 당신을 언제까지나 사랑한다고... 아침햇살이 아무리 눈부셔도 내눈에 비친 당신의 모습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듣고만 계셔도 됩니다. 당신과 함께 한다는 것 그것이 제겐 큰 행복입니다. 소리없이 내리는 새벽 가랑비처럼 내 사랑도 당신곁에 내리고 싶다. 사회 심리학자 매튜 리버먼과 나오미 아이젠버그의 사이버볼 실험이 있다. 사이버볼은 세 명의 플레이어가 서로 공을 주고받는 컴퓨터 게임인데, 일정 시간이 지나면 두 명의 플레이어가 실험 참가자에게는 공을 주지 않습니다. 소외를 시키는 것. 바로 이때 뇌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기능적 자공명영상(fMRI)’으로 확인합니다. 그 결과 놀라운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소외감을 느낀 사람의 뇌는 신체적 통증이 있을 때와 유사한 양상을 보이는 것. 즉, 집단에서 배제되었을 때의 고통이 몽둥이로 두들겨 맞았을 때의 고통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스스로 소외되고 있다는 느낌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를 아마 한두 번쯤은 모두 체험해 보았을 것. 내 말과 행동을 오해함으로 인해서 생긴 일도 있고, 나의 잘못한 실수로 인해 사람들의 배척을 받을 때도 있었다. 자기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소외시키는 때도 있다. 이 모두가 몽둥이로 두들겨 맞는 것처럼 큰 아픔을 느끼게 됩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은 이러한 폭력을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폭력을 행사해서는 주님과 함께 할 수 없으며,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다. 오로지 폭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사랑만이 주님의 뜻을 따르며, 주님의 나라에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게 할 것. 주님께서는 이 사랑의 마음을 우리가 가질 수 있기를 간절하게 원하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말씀하십니다. 기도의 정의는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입니다. 하느님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제대로 기도하고 있을까요? 기도는 하느님께 무엇을 드리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분이 모르실 것 같아서 가르쳐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며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드릴 분이 아니라, 마음을 얻어야 할 분이십니다. 어떠한 방해도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청하는 자세가 우선 필요합니다. 이로써 그분과 긴밀한 관계가 되어질 수 있다. 실제로 많은 대화를 나눈 사람과 가까운 관계를 맺을 수 있지 않습니까? 한 번도 만난 적도 없고 대화를 나눈 적이 없는데, 어떤 청을 드릴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과 가까운 관계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과 가까울수록 세상의 폭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사랑을 마음에 간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시지요. 이제까지 그 누구도 하느님을 ‘아버지’ 라고 표현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은 ‘아버지’ 라고 표현하면서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 가까이 계신 분으로 우리를 초대하셨다. 세상의 폭력을 무력화시키는 사랑을 간직하는 방법은 기도뿐입니다. 틀리다와 다르다. 종종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를 잘못할 때가 있다. 글을 쓰다 보면 예전의 습관을 그대로 따르는 것. 오랫동안 글을 쓰고 책을 읽다 보니, 종종 다른 사람의 글에 신경 쓰일 때가 있다. ‘며칠’ 을 ‘몇 일’ 로 쓰는 경우, ‘낫다’(감기가 낫다)로 써야 할 것을 ‘낳다’ 로 쓰는 경우, ‘계발’ 이라고 써야 하는데 ‘개발’ 로 쓰는 경우, ‘결제’(매매 당사자 사이의 거래 관계를 끝맺는 일을 뜻함)라고 써야 할 것을 상관이 부하가 제출한 안건을 검토하여 허가하거나 승인할 때 쓰는 ‘결재’ 로 사용하는 경우 등등…. 하지만 가장 많이 신경이 쓰이는 것은 ‘틀리다’ 와 ‘다르다’ 를 똑같이 ‘틀리다’ 라고 쓰는 경우입니다. ‘틀리다’ 는 ‘셈이나 사실 따위가 그르게 되거나 어긋나다.’ 라는 뜻입니다. ‘다르다’ 는 ‘비교가 되는 두 대상이 서로 같지 아니하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너는 나랑 틀려!” 다른 것을 틀린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 가운데 소외되는 사람이 생기게 되고, 절대로 함께 할 수 없게 됩니다. 다른 맞춤법이야 틀려도 괜찮지만, ‘다르다’ 와 ‘틀리다’ 는 정확하게 사용하면 어떨까요? 분명히 사람을 받아들이는 여유가 생기게 될 것. ‘틀린 그림 찾기’ 가 맞을까요? ‘다른 그림 찾기’ 가 맞을까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거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내가 먼저” 사랑과 축복의 기도를 하면서 살아가는 은총이 충만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사랑은 나이 들어 생기 없는 사람들을 젊게 만들며, 젊음을 찾는 사람들을 언제까지나 젊게 만든다.'' - W. 카트라이트 <클로우에게> - |
♡2090회 '네가 웃으면 세상도 웃는다. 네가 울면 너는 혼자다. 크게 한번 웃어보자.'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5월 8일(코헬렛 1장~) 피겨 스케이팅 챔피언, 스포츠 영웅 김연아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유일한 용기는 자신의 꿈을 좇는 용기라고 믿습니다.'' 김연아는 자신이 가진 열정과 꿈을 용기 있게 추구하도록 격려하며, 자신의 길을 걷는 데 필요한 용기를 강조합니다. 《내가 웃으면 세상도 웃는다》어느 병원 앞의 게시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전갈에 물렸던 분이 여기서 치료를 받았다. 그 분은 하루만에 나아서 퇴원 하였다. 또 다른 게시판이 있었다. 어떤 분이 뱀에 물렸다. 그 분은 치료를 받고 3일만에 건강한 몸으로 퇴원 했다. 셋째 게시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어떤 사람이 미친개에게 물려 현재 10일 동안 치료를 받고 있는데 곧 나아서 퇴원 할 것. 마지막으로 넷째 게시판도 있었다. 어떤 분이 인간에게 물렸다. 그 후 여러 주일이 지났지만 그 분은 무의식 상태에 있으며, 회복할 가망도 별로 없다. 과학자들이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내용인즉 부부싸움을 악에 받혀 하게 되면 입김이 나오는데 과학자들이 그 입김을 모아 독극물 실험을 했더니 놀랍게도 코브라 독 보다 강한 맹독성 물질이 나왔다. 또 한 사람을 데려다가 타액검사를 해본 결과 평소엔 이상이 없었는데, 칸막이 속에 가두어 둔 채 약을 올려 신경질을 부리게 한 뒤 타액검사를 했더니 황소 수 십 마리를 즉사 시킬만큼의 독극물이 검출 되었답니다 . 즐겁게 웃고 난 사람의 뇌를 조사 해 보니 놀랍게도 독성을 중화시키고 웬만한 암세포라도 죽일 수 있는 호르몬을 다량 분비 시켰다고 발표했다. 인간의 내부에는 얼마나 많은 양의 독이 들어 있을까? 모든 억제, 불안, 미움, 공포, 스트레스 등이 뭉쳐서 눌려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폭발하는 순간 그것은 엄청난 양의 독으로 뿜어져 나올 것. 그 독을 없애는 유일한 길은 웃음. 전체적인 웃음만이 그것을 없앨 수 있다. 그 웃음은 주변 사람의 기분마저 바꿔 놓습니다. 내가 웃으면 전 세계의 에너지가 나에게 흘러옵니다. 전 세계가 나에게 웃음을 보냅니다. 어느 나라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네가 웃으면 세상도 웃는다. 네가 울면 너는 혼자다. 크게 한번 웃어보자. 억지로라도 웃어보자." 세상 부러울 것 없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 거기 있음을 알게 될 것.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두 부류가 있다. 나를 진정 사랑해서 다가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나를 이용하려고 다가오는 사람도 있다. 나를 이용하려 다가오는 사람도 사실 자신이 그런 줄 모르는 때도 있다. 자신은 사랑한다고 다가오지만, 자신의 본성이 아직 저급한 상태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내가 에너지를 더 쏟아야 할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나의 몫입니다. 이 구분을 잘하지 못하면 모기에게 속아서 피를 빨리느라고 평생을 허비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 중에, 나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과 나를 이용하려는 사람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지금 이 순간 나에게 관심이 있는지 알려면 나의 말을 경청하는지 살펴보면 됩니다. 상대가 나를 좋아할 때는 나의 말을 잘 들으려 합니다. 그러나 건성으로 듣거나 듣지 않으려는 모습이 있으면서도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그것은 나를 이용하려는 사람입니다. 아주 단순한 것 같지만 몇 년 동안 제 말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저를 좋아하는 줄 착각하여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 적이 있다. 지금 이 순간 그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면 그 사람에게 나가는 것은 무엇에도 관심이 없다. 지금 이 순간 말을 듣고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 말에 관심이 없으면 그 말하는 사람에게도 사실 관심이 없는 것. 사람에게 관심이 생겨야 그 사람이 말하는 것에도 관심을 두게 됩니다.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일화라고 합니다. 버나드 쇼는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좋아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조각가 로댕을 좋아하는 친구들은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귀한 로댕의 그림 스케치를 구했다고 하며 그 친구들을 불렀다. 로댕을 좋아하는 그 친구들은 그 그림만 보며 예술적인 기지를 발휘하여 온갖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때 버나드 쇼가 “아, 미안합니다. 이 그림은 로댕의 것이 아니라 미켈란젤로의 것이었네요.” 라고 말했을 때 장내는 정적만이 흘렀다고 합니다. [출처: ‘말의 품격’, 이기주, 유튜브 ‘책 읽는 다락방 J’] 사람이 싫으면 그 사람이 하는 말도 싫게 들립니다. 모든 것이 싫게 들립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말과 행동을 바꾸어 잘 보이려 해도 소용이 없다. 이미 지난 복권을 사려고 하는 사람과 같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 빨리 포기하고 나의 말에 관심을 기울이는 새로운 사람에게로 향하는 것이 삶을 허비하지 않는 방법입니다. 물론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면 참아낼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을 쫓아갈 필요까지는 없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지 않으면 당신에게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지, 가족이나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지금 이 순간 당신께서 하시는 말씀을 대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에게 관심이 없으면 아버지에게도 없는 것. 말씀은 누군가를 알리기 위해 파견되어 나오는 것. 입으로 하는 말이 될 수도 있지만,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교회도 예수님의 말씀이라 할 수 있다. 그 말씀을 지금 이 순간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내가 예수님을 더 좋아하는지, 아니면 이용하기 위해 다가가는지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파견된 사람을 대하는 것이 곧 파견한 사람을 대하는 것과 같다. 내가 교회에 관심이 없다면 예수님에게도 관심이 없는 것이고, 교회가 하는 말과 가르침에 관심이 없다면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을 주님께서 왕으로 뽑으셨다는 것 하나 때문에 끝까지 그를 공경하였다.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결코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손을 댈 수 없다며 자신의 원수지만 용서하였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에 대한 태도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태도는 그분이 파견하신 분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렸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그분께서 파견하신 이도 사랑합니다. 그 인품에 상관이 없다. 인품이 좋으면 더 좋겠지만, 그분이 파견하신 분이라는 것 하나 때문에라도 공경한다면 주님께 합당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매번 인사이동 때마다 주님께서 파견하시는 이들 앞에서 주님께 합당한 사람인지, 아닌지에 대한 시험을 받습니다. 하느님, 오늘도 우리들을 성령 충만하게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하루 길을 걷는 내내 두렵지 않게 인도해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좋은 희망을 품는 것은 바로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지름길이다.'' - 루터 - |
♡2091회 지금 이 순간 나의 판단을 점검해 보십시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5월 9일(집회서 1장~) 만능 엔터테인먼트 정지훈은 ''지금 자면 꿈을 꿀 수 있지만 지금 안자면 꿈을 이룰 수 있다.'' 정지훈은 끊임없는 꿈과 열망 그리고 노력을 격려하며, 우리의 꿈이 단순히 미래에 그치지 않고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조언을 해줍니다. 《마음이 어질고 인자한 사람》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은 그 행실로 쓴맛을 되씹게 되고 마음이 선하고 인자한 사람은 그 행동으로 진미를 한껏 즐기게 됩니다.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 무릇 시선을 얼굴에만 두게 되면 오만한 것 같이 보이고 허리띠에 두게 되면 근심하는 것같이 보이고 너무 기울이면 간사하게 보이게 된다. 사람은 온순하고 공손 하면서도 엄숙해야 하며 위험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아야 하고 공손 하면서도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또 너무 온순하면 엄숙을 잃기 쉽고 너무 위엄이 있으면 친근감이 적어지고 너무 공손하면 부자연스러워 사람은 모름지기 중용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합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평소에 가르치시기를 발은 무겁게 하고 손은 공손하게 가지고 입은 다물어야 하고 머리는 곧게 하고 눈은 단정하게 가지고 인상은 정숙하게 가져야 한다고 하셨다. 모든 행동의 그 기본은 몸가짐이요 무릎을 벌리고 서지 말 것이며 뒷짐을 지고 서지 말 것이며 서 있을 때 손가락을 벌리지 말 것이며 몸의 중심이 잡히지 않는 자세를 취하지 말라. 이상과 같은 자세는 곧 자신의 인격에 마이너스를 가져오는 자세이므로 삼가야 한다 했다. 무릇 행동은 공경스럽게 하고 용모가 엄숙하면 생각이 깊은 듯 보이며 말을 안정되게 하면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한다고 했다. 사사로운 욕심을 좇아서도 안 되며 뜻을 지나치게 넘쳐도 안 되며 즐거움을 지나치게 극에 이르러서도 안 된다. 어질고 현명한 사람을 가까이 하되 두려워 할 것이며 재물을 쌓아놓되 쓸 줄을 알아야하고 편안한 것을 편안하게 여기되 능히 그것을 옮길 줄도 알아야 한다. 재물을 대하되 굳이 얻으려고 하지 말고 어려운 일에 임하여서는 굳이 묘면 하려고 하지 말며 서로 다투되 이기려고 하지 말고 물건을 나누어 갖되 굳이 많이 가지려 하지 말라, 의심나는 일이 있더라도 굳이 따지려 들지 말며 성실한 행동은 자기보다 남을 이롭게 하며 인간은 행동에 의해서 스스로 만들어 나아가는 것이다. 라고 했다. 인간의 위대한 종말은 지식이 아니라 행동이라 합니다. 올바른 판단을 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하고 또 많이 듣습니다. 그렇다면 ‘판단’ 이란 무엇일까요? 국어사전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사물을 인식하여 논리나 기준 등에 따라 판정을 내림. 2. 어떤 대상에 대하여 무슨 일인가를 판정하는 인간의 사유 작용. 그렇다면 우리가 대체로 하는 판단은 잘못될 때가 많은 것이 아닌가 싶다.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 등, 단순한 이분법적 생각으로 나누어 평가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판단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바라보는 판단이 더 옳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이분법적 판단은 우리에게 피곤함을 많이 가져다줍니다. 누군가를 탓하고 상황을 비난하고 있을 때,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습니다. 불편함과 더불어 이를 듣고 따라야 하는 피곤함을 간직할 수밖에 없다. 있는 그대로를 보고 받아들이는 판단이 주님께서 보여 주셨던 모습이었다. 그래서 모든 이의 죄를 용서해주시며 받아주셨고, 지금 이 순간 우리의 그 많고 큰 죄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기회를 주면서 당신의 길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 주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이 바로 지금 이 순간 복음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소금과 빛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소금만을 즐겨 먹는 사람은 없다. 음식에 간을 맞추기 위해서 소금을 넣는 것이지, 소금 자체를 음식이라고 내놓지 않습니다. 소금은 이렇게 함께 할 때 그 소중한 가치를 드러냅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짠맛이 싫다고 소금이 자신의 짠맛을 포기한다면 아무 쓸모가 없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것. 빛 역시 빛 자체만으로는 그 의미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어둠으로 어떤 사물이 보이지 않을 때, 이 사물을 환하게 보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빛입니다. 이처럼 함께하면서 그 소중함이 더욱더 드러나는 것이 소금과 빛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는 지금 이 순간 함께하는 데 필요한 판단이 무엇이냐는 것. 자기의 뜻과 생각만이 옳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고 받아들이는 판단입니다. 때로는 정확한 판단이 필요할 때가 있다. 지금 이 순간 불편함과 피곤함을 가져다주는 판단이 된다면 절대로 안 됩니다. 모두를 받아들이고 포용할 수 있는 판단이 될 때, 사람들은 편안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 모습이 하느님을 따르는 이유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람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판단을 점검해 보십시오.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주님의 판단을 따르고 있습니까? 그래서 내 이웃과 함께하고 있나요? 면담때 부모의 유산 문제가 형제간의 싸움으로 이어지는 경우를 이제까지 꽤 많이 보았다. 장남이라는 이유로 모든 유산을 가져갔다는 것, 간병을 하면서 그동안 부모의 재산을 모두 빼돌렸다는 것, 돌아가시기 전에는 연락 한번 없다가 돌아가시자마자 찾아와서 유산 분배를 이야기한다는 것 등등…. 너무 많은 모습을 보았다. 저를 통해 면담때 법적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화해하고 싶은데 어렵다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형제자매는 그런 화해를 하려 하지 않고 대화와 만남을 모두 거절해서 괴롭다고 말합니다. 안셀름 그륀 신부님의 이런 방법을 제시합니다. 1. 기도하기: 화해를 거부하는 형제자매를 위해 기도하는 것. 2. 내적으로 화해하기: 나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것. 더는 미워하지 않으며, 단지 관계 깨진 것을 안타까워합니다. 그러면서 상대의 입장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야지만 참된 기도를 바칠 수 있다. 3. 작은 표지 만들기: 화해의 작은 표지를 만드는 일입니다. 카톡, 문자, 카드, 편지 등을 보내는 것이지요. 질책이 아닌 축복을 담아서 말입니다. 세 가지 방법이 성공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 자신이 분명히 변화된다는 것. 그리고 이런 노력을 통해 하느님께서도 함께해 주실 것이며, 하느님의 뜻도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면담 때 주 예수님 앞에 모든 죄들을 스스로 고백하고 뉘우치고 회개할 수 있는 은총과 축복을 청하면서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죄는 미워하고, 죄수는 사랑하라.'' – Mohandas k. Gandhi - |
♡2092회 안식은 혼자서만 누릴 수 없다. 모두가 함께 누릴 때에만 참된 안식이 됩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5월 10일(이사야서 1장~) 소통과 겸손의 아이콘 국민 MC 유재석은 ''열 가지 중 한 가지는 안 좋을 수 있다. 그렇다면 아홉 가지 좋은 걸 생각하면서행복하게 살면 된다.'' 유재석은 인생을 살다 보면 겪게 되는 많은 일들 가운데, 행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삶의 모든 순간들을 진취적으로 살아가라는 조언을 해줍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하늘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고칠 때가 있으며 부술 때가 있고 지을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 뛸 때가 있다. [코헬3.1-4]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수확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오랫동안 열심히 노력하고 구했는데도 돌아오지 않으면 허탈하고 상실감을 느끼고 만다. 또는 아무리 베풀어도 되돌아오는 것이 없는 경우도있다. 남을 잘 대접하고 도우려고 애를 썼지만 나를 돕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는 경우 이 역시 속이 속상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고 계신다.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돌아오는 것이 없다라도 우리는 끓임없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이웃을 사랑해야한다. 옿은 일을 하는데도 계속해서 나쁜 일이 일어날 때 당신은 어떻게 행동하겠는가? 당신은 이미 어떻게 행동해야 옳은 것인지 알고 있다. 그대로 행하라. 그것이 정답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고생, 무거운 짐, 멍에’ 를 인생살이의 고통으로 생각할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된 해방과 자유와 안식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여기서 ‘모두’ 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 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차별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나를 믿고, 나의 계명을 실천하면서, 내 뒤를 따라라.” ‘내 멍에’ 는 예수님의 계명을 뜻하는데, 예수님의 계명이 실제로 멍에라는 뜻은 아니고, 비유적인 표현일 뿐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계명이 멍에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믿는 사람들에게는 ‘멍에를 벗겨주는 열쇠’ 입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는 “고통스러운 멍에를 벗기고 편한 멍에로 바꿔 주겠다. 무거운 짐을 가벼운 짐으로 바꿔 주겠다.” 라는 뜻이 아니라, “모든 멍에를 벗겨서 편안함을 주겠다. 모든 짐에서 완전히 해방시켜 주겠다.”라는 뜻입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는 “내가 주는 멍에는 편안함이고”, 즉 “내가 주는 것은 멍에가 아니라 해방이고” “내 짐은 가볍다.” 는 “내가 주는 짐은 가벼움이다.”, “내가 주는 것은 짐이 아니라 안식이다.” 라는 뜻입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말씀 때문에, “무거운 멍에를 벗으려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가벼운 멍에를 감수해야 한다.” 고 해석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참된 안식을 얻기 위해서이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 은 새로운 멍에를 메는 것이 아니라 ‘멍에를 벗기는 열쇠’ 를 얻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아무리 편안해도 멍에는 멍에일 뿐이고, 아무리 가벼워도 짐은 짐일 뿐입니다. ‘안식’ 은 멍에와 짐이 하나도 없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라는 새로운 멍에와 짐을 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멍에와 짐을 완전히 없애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안식’ 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누리는 참 평화와 참 행복과 참 기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 구원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계명을 실천하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은, 예수님만이 그 구원과 안식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고, 그것을 얻기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그 구원과 안식은 죽은 다음에나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기 시작할 때 시작되는 것.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될 것. 예수님은 우리가 이쪽 세상에 살아 있을 때나 죽은 다음에 저쪽 세상에 갔을 때나 우리를 고생시키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는 분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안식을 누리는 생활입니다. 언제인지 모르는 ‘나중’ 에 안식을 얻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만으로 고통스러운 인생살이를 참고 견디는 생활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시작되어서, 실제로 누리고 있는 구원과 안식 덕분에 고통을 참고 견딜 수 있는 생활입니다 . 예수님 말씀에서 예수님과 어떤 사마리아 여자의 만남이 연상됩니다. 그 사마리아 여자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닌”(요한 4,18) 여자였으니, 그의 인생은 지독한 갈증에 시달리는 인생이었고,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또 “무거운 멍에를 메고 있는” 인생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의 갈증과 고생과 짐과 멍에를 꿰뚫어 보셨고, 그 여자를 그것들에서 해방시켜 주려고 하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13-14) 그 여자는 예수님 덕분에 자기를 짓누르고 있던 갈증과 고생과 짐과 멍에에서 해방되어서, 참된 안식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을 것. 만일에 그 여자가 어떤 유혹을 받아서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는 일이 생긴다면? 그러면 더욱 지독한 갈증에 시달리게 될 것이고, 더 무거운 멍에를 메게 될 것. 예수님을 만났다면,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했다면,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만 나아가야 합니다.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벳자타 못 가의 병자’ 의 경우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병자는 서른여덟 해나 앓고 있었고, 벳자타 못 가에 오랫동안 누워 있었고, 자기 힘으로는 못 속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무거운 멍에와 짐을 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가엾게 여기셔서 그의 병을 고쳐 주셨고, 그에게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요한 5,14)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병을 고쳐 주심으로써 인생살이의 멍에와 짐을 벗겨 주셨고, 참된 안식을 향해서 나아가라고, 또 구원과 안식의 완성에 도달하라고 격려하는 말씀을 하신 것. 그런데 그는 예수님께 고마워하기는 커녕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밀고했다. 그는 몸의 건강은 얻었지만, 영혼의 안식은 얻지 못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여러 가지 멍에와 짐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우리를 가엾게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사랑’ 이고, 그 멍에들과 짐들을 벗겨주시는 것은 예수님의 자비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우리가 받은 그 사랑과 자비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은 나눌수록 커지지만, 나누지 않으면 기름 없는 등불이 꺼지는 것처럼 희미해지다가 결국 사라질 것. 안식은 혼자서만 누릴 수 없다. 모두가 함께 누릴 때에만 참된 안식이 됩니다. 주 예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더 굳세게 믿습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을 향하여 믿음을 향하여 굳세게 걸어가는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사랑하면서 바보가 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사랑하면서? 현명해 질 수 없다.'' - T. 라이크 <사랑과 육욕> - |
💖성령봉사자 박재만 세례자요한 010 - 3878 - 6634
(수필가ㆍ전국성령쇄신봉사자협의회 말씀추천강사)
💖성령봉사자 류태숙 M.막달레나 010 - 6560 -
(시인ㆍ수필가ㆍ꽃예술설화중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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