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1회 ''남은 가르치면서 왜 자신은 가르치지 않습니까?''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4월 9일(루카복음 3장~) 원스턴 처칠은 ''나는 돼지를 좋아한다. 개는 우리를 우러러 보고 고양이는 우리를 얕잡아보지만 돼지는 우리를 자기와 똑같이 취급한다.'' 《지혜는 감추어진 보물》주님께서는 지혜를 주시고 그분 입에서는 지식과 슬기가 나온다. 그분께서는 올곧은 이들에게 주실 도움을 간직하고 계시며 결백하게 걸어가는 이들에게 방패가 되어 주신다. 그분께서는 공정의 길을 지켜 주시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의 앞길을 보살피신다. 그때에 너는 정의와 공정과 정직을 모든 선한 길을 깨닫게 되리라. (잠언2장6~9) “저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요한 17,14-17)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는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는 자들이 있다.(요한 3,19) 그들은 복음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을(신앙인들을) 미워하고 박해합니다. 신앙인들이 자기들과 다르게 사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일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요한 15,18-19) 또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에는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 예수님의 말씀들을 겉으로만 보면 ‘편 가르기’ 를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편 가르기’ 를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입니다. 신앙인들을 자기들과 다른 편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마치 이리 떼가 양들을 대하는 것처럼 그렇게 신앙인들을 대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 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을 이리 떼로 대하시지 않았다. 안 믿는 사람들 자신들이 이리 떼처럼 행동한 것. 우리는 ‘편 가르기’ 를 하면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적’ 도 아니고, ‘원수’ 도 아닙니다. 이웃이고, 형제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신앙인들을 마치 이리 떼가 양들을 대하듯이 대하더라도 신앙인들은 그들도 ‘양들’ 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들 자신들은 모르고 있거나 부정하겠지만, 그들은 ‘잃은 양’ 들입니다. 우리는 ‘잃은 양’ 들도 우리와 함께 구원받기를 희망해야 하고, 이 희망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고, 신앙인들을 미워하고 박해한다고 해서 그들을 피하고 멀리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일도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세상살이가 너무 고달프고 힘들어서 하느님 나라가 빨리 오기를 희망하는 것은,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희망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희망을 이루겠다고 자살을 하는 것은 ‘큰 죄’ 를 짓는 일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신앙인들을) 보호하려고 세상에서 빼내서 하느님 나라로 데려가신다면, 그것은 나머지 사람들을 모두 ‘버리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그것은 ‘모든 사람’ 을 구원하려고 오신 것과 모순이 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구제불능처럼 보이는 사람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구원하려고 애쓰시는 분입니다.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악’ 은, 세상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악’ 을 뜻합니다. 겉으로는 제자들을(신앙인들을) 악에서 지켜 달라는 기도이지만,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세상 사람들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악에서 지켜 달라는 기도로 생각할 수 있다. ‘악’ 이라는 것이 신앙인들만 공격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는 안 믿는 사람들을 더 심하게 공격하고 있는데, 신앙인들보다 안 믿는 사람들의 저항력이 더 약합니다. 하느님은, 또 예수님은 신앙인들만 보호하시고 안 믿는 사람들은 악에 의해서 멸망하든지 말든지 방치하시는 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주님의 기도’ 를 바칠 때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악을 물리치기 위한 싸움에서 ‘기도’ 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신앙인들의 세상살이 방법’ 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세상살이를 하는 방법은 바로 “거룩하게 사는 것” 입니다. 신앙인들은 ‘거룩하게 사는 사람들’ 이기 때문에 세상 속에서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는 사람들입니다. 거룩하게 사는 것은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말씀” 으로 거룩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말씀’ 안에서 살아야 하고, ‘말씀’ 대로 살아야 하고, ‘말씀’ 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끊임없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말씀을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거룩하게 사는 것’ 의 반대는 ‘속되게 사는 것’ 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 2,15) 별처럼 빛나라는 말은 세상을 구원의 빛으로 인도하는 등불이 되라는 뜻입니다.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라는 말을 간단하게 줄이면 ‘거룩한 사람’ 이 되라는 것. 신앙인이 거룩하게 사는 것은 그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고, 세상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해서도 중요한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유대인들을 꾸짖으면서 했던 말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이 됩니다. “남은 가르치면서 왜 자신은 가르치지 않습니까?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설교하면서 왜 그대는 도둑질을 합니까? 간음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왜 그대는 간음을 합니까? 우상을 혐오한다고 하면서 왜 그대는 신전 물건을 훔칩니까? 율법을 자랑하면서 왜 그대는 율법을 어겨 하느님을 모욕합니까?"(로마 2,21-23)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려면 신앙인들이 먼저 복음대로 살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을 회개시키려면 신앙인들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려면 신앙인들이 먼저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살면서 시련이나 욕심이 생겨서 힘들어질 때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거나 낮추시고.. 아니면 눕혀지고 그리고 난후 “다시 일어나는...” 은총 가득한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신문에 나오면 곤란하다고 판단되는 일은 하지 말라.'' - GE의 윤리강령 - |
♡2062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정원제’ 가 아니라 ‘자격제’ 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4월 10일(요한복음 13장~) 조셉 푸리치는 "성공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멋있는 사람이란》멋있는 사람이란?" "할 수 있다." 라고 하는 긍정적인 사람 "제가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능동적인 사람 "무엇이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는 적극적인 사람 "기꺼이 해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는 헌신적인 사람 "잘못된 것은 바로 고치겠습니다." 라고 하는 겸허한 사람 "참 좋은 말씀입니다." 라고 하는 수용적인 사람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라고 하는 협조적인 사람 "대단히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감사할 줄 아는 사람 "도울 일 없습니까?" 라고 하는 물을 수 있는 여유 있는 사람 "지금 이 순간 할 일이 무엇일까?" 라며 일을 찾아 할 줄 아는 사람 이런 사람, 참 멋있다. 누구나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으니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요한 14,2-4)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신앙생활의 최종 목표는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 아버지의 집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 그런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정원제’ 가 아니라 ‘자격제’ 입니다. 자격만 있다면 누구나 다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인류 전체가 모두 들어갈 수도 있다. 모두가 다 자격을 갖추기만 한다면...... 들어가는 사람 수에 제한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라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아버지의 집은(하느님 나라는) ‘모든 사람’ 을 다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공간이 넉넉합니다. 공간이 좁아서 사람들을 다 받지 못하고 정원 제한을 하는 일은 없다. 일부 이단 종교에서는 묵시록의 ‘십사만 사천 명’ 을 실제 숫자로 생각하고서, 하느님 나라는 십사만 사천 명만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묵시록의 ‘십사만 사천’ 은 실제 숫자가 아니라 ‘완전함’ 과 ‘아주 많음’ 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묵시록 7장 9절을 보면, 구원받은 사람들을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 라고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라는 말씀을 하셨다. ‘모든 사람’ 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 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려고 애쓰시는 것은 바로 그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이 말씀이 ‘좁은 문’ 에 관한 말씀과 모순된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아주 적은 수의 사람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아니고,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자격을 갖추려면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적당히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이라는 말씀과 “너희를 데려다가” 라는 말씀은, 6절의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내가 나의 힘만으로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고,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자리를 마련해 주시고, 또 나를 데리고 가셔야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나 혼자서 수행과 수련을 해서 어떤 경지에 도달한다고 해도, 그렇게 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은총 없이는 아무도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개인적으로 어떤 계시를 받았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단 종교의 경우에, 교주들이 어떤 계시를 받았다고, 또 어떤 깨달음에 도달했다고 주장하면서 예수님과 동급의 위치에 올라간 것처럼 행세하거나 예수님을 능가하는 위치에 있는 것처럼 행세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게 행세하는 것 자체가 그들이 이단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너희를 데려다가” 라는 말씀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예수님만’ 따라가야 한다.” 라는 뜻도 들어 있다. 예수님이 아닌 다른 누군가는, 또는 다른 무엇은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데리고 가지 못합니다. 만일에 우리가 다른 누군가를, 또는 다른 무엇을 따라가면, 우리는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목자이시고, 인도자이시고, 보호자이십니다. “너희는 그 길을 알고 있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그 길을 잘 알아야 한다.” 이기도 하고, “너희는 너희가 알고 있는 그 길을 끝까지 잘 걸어가야 한다.” 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은(신앙인들은) 자기가 왜 신앙생활을 하는지, 또 예수님을 왜 따라가는지, 신앙생활을 통해서 얻기를 희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이 무엇인지, 신앙여정의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지 등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이미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현세적인 복이나 빌고, 그것으로 만족하는 생활을 하는 것을 우리는 ‘기복신앙’ 이라고 부릅니다. ‘기복신앙’ 에 빠져 있는 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신을 믿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기복신앙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은(신앙인들은) 지금 이 순간 알고 있는 것을 ‘온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만일에 지금 이 순간 알고 있으면서도 지금 이 순간 실천하지 않으면 알고 있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지금 이 순간 걸어가야 할 길을 알고 있다면 그 길을 ‘끝까지’ 잘 걸어가야 합니다. 가다가 중단하면 처음부터 가지 않은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고,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유일한 ‘구원의 진리’ 이고,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선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가짜 메시아와 가짜 예언자에게 속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세속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에게 현혹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 계신다.'(1베드 1,24-25) 오늘 하루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뜻에 따라 우리들에게 주어진 밀물과 썰물을 받아들이고, 또한 의인의 길을 잘 따라갈 수 있는 거룩한 축복된 은총이 우리들에게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모자란다는 여백, 그 여백이 오히려 기쁨의 샘이 된다.'' - 파스칼 - |
♡2063회 성체 성혈은 생명의 양식이고 생명의 음료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4월 11일(로마서 10장~) J.드와이트는 ''성경은 희망의 창문이다. 그 창문을 통하여 우리는 영원한 세계를 바라본다.'' 《주인공이 되려면 조연을 자처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명언 4가지》요즘은 상대를 낮추면서 자신을 올리려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면 결국 그 상처는 나에게 돌아올 것이며, 누군가에게 희망을 준다면 그 희망은 결국 나의 희망이 될 것임을 명심하세요. 싫든 좋든 당신의 삶은 모두 이 법칙에 따라 움직입니다. 인생 연금술/제임스 알렌 한창때는 다시 오지 않으며 하루가 지나면 그 새벽은 다시 오지 않습니다. 하릴없이 흘러간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부터는 오늘 하루 그리고 찰나의 순간을 소중히 생각하여 시간을 보내는 것은 어떨까요? 첫째, 지금이야말로 일할 때다. 지금이야말로 싸울 때다. 지금이야말로 나를 더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 때다. 오늘 그것을 못하면 내일 그것을 할수 있는가. -토머스 아켐피스- 둘째, 희망과 근심, 공포와 불안 가운데 그대 앞에 빛나고 있는 하루하루를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라. 그러면 예측할 수 없는 시간은 그대에게 더 많은 시간을 줄 것이다. -호레스- 셋째,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 하루는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하루이다. 단 하루면 인간적인 모든 것을 멸망시킬 수 있고 다시 소생시킬 수도 있다. -소포클레스- 넷째, 오늘 하루를 헛되이 보냈다면 커다란 손실이다. 하루를 유익하게 보낸 사람은 하루의 보물을 파낸 것이다. 하루를 헛되이 보냄은 내 몸을 헛되이 소모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앙리 프레데리크 아미엘- 아프리카 우간다에서도 가장 빈민촌에 속하는 카트웨. 이곳은 사람들이 각종 오물과 배설물들을 버릴 정도로 더럽고 낙후된 지역이었고, 음식물을 구하기 매우 어려웠어서 끼니를 제대로 때우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곳에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 가족과 함께 집 없이 사는 무테시라는 소녀가 있었다. 소녀의 오빠는 우연히 길을 걷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을 발견합니다. 한 선교사가 체스를 가르치고 있었고 “자네가 이걸 배운다면, 먹을 것을 주지!” 라고 말했다. 오빠는 동생도 음식을 먹이고 싶어서 무테시를 데리고 왔다. 무테시는 단순히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체스를 시작했지만, 점점 그녀의 천재적인 체스 실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체스를 배운지 겨우 6개월 만에 체스 교실의 실력자들을 모조리 꺾습니다. 선교사는 그녀를 체스 선수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집도 없고 밤에 책을 볼 수도 없는 상황에서 실력을 더 성장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선교사는 축구 게임 등을 해서 돈을 땁니다. 그 돈으로 무테시를 위해 경기 출전자금을 마련합니다. 무테시의 엄마는 결혼 때 입은 가장 아끼는 옷을 팔아 밤에도 체스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등유를 삽니다. 그리고 나가게 된 수단에서 열린 ‘우간다 여성 주니어 선수권 대회’ 에서 14살 무테시는 우승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삶을 극복할 만한 상금은 주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동생이 교통사고를 당하여 마취도 못 하고 수술을 받게 되고, 홍수 때문에 거처의 모든 것이 떠내려갔다. 그래도 어머니와 선교사의 노력은 멈추지 않습니다. 수천 번 포기하고 싶었지만 그들의 노력을 보면서 무테시는 끝까지 버텨냈고 곧 국제 체스대회에 참가합니다. 러시아에서 열린 국체 체스대회에서 무테시는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하게 됩니다. 어머니와 코치 선생님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 것입니다. 피오나는 선교사 코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전 옥수수를 파는 애예요. 그건 할 줄 안다고요. 마스터는 못 될 거예요. 여기도 오면 안 됐어요. 차라리 체스를 안 가르쳐 주셨다면 좋았을 거예요!” 코치는 말합니다. “이 자리가 네가 있어야 할 자리야!” 그러나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했다. 동아프리카 수도 공사에서 코치에게 엔지니어링 감독관 자리를 제안한 것. 그러나 노숙자 무테시를 위해 그 제안을 거절합니다. 피오나는 다시 힘을 냅니다. 그리고 아프리카 체스 여왕에 등극하고 체스 마스터가 됩니다. 체스 마스터가 되면 연맹으로부터 계속 돈을 받게 됩니다. “상금으로 무엇을 하실 건가요?” 그녀는 말합니다. “우선 어머니에게 집을 사드릴 거예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도울 겁니다.” 그녀는 현재 고향에서 가난한 아이들에게 체스를 가르치고 있으며, 그녀의 이야기는 영화와 책으로 만들어져 수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전하고 있다. 우리도 힘들고 어려울 때면, “저는 보잘것없는 인간에 불과해요. 더는 버텨낼 수 없어요. 전 여기서 그냥 주저앉을 거예요.” 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그때마다 예수님은 당신 살과 피를 양식으로 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넌 보통 인간이 아니야. 네 안에 내가 머물잖아. 보통 인간은 포기하겠지만, 네 안엔 하느님이 계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어. 이걸 믿으라고 내 살과 피로 네 안에 머무는 거야.” 성체 성혈은 생명의 양식이고 생명의 음료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라고 하지 “일용할 음식을 주시고” 라고 하지 않습니다. 분명 양식과 음식이라는 단어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성체를 음식으로 먹고 어떤 이들은 양식으로 영합니다. 그렇다면 음식과 양식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부담스럽지 않으면 음식이고 부담스러우면 양식입니다. 음식을 돈 주고 사 먹으면 부담스럽지 않지만 누군가가 거저 주면 왠지 부담스럽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진리가 우리 양심 안에 새겨져 있기 때문일 것. 아기들은 부모가 주는 음식을 당연한 듯이 먹습니다. 이때까지는 음식입니다. 그러나 의식이란 것이 생기면서 부모가 주는 음식도 공짜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무언가로 보답을 하려 합니다. 이때부터는 양식이 됩니다. 우리에게 성체는 음식인가요, 양식인가요? 성체를 당연한 듯이 영하며 그것을 주시는 분께 부담스럽지 않다면 음식을 먹는 것. 영혼 구원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체를 영할 때마다 황송하고 부담스러우면 양식이 된 것. 양식을 먹으면 상대의 기대를 그 대가로 채워줘야 합니다. 성체가 양식이 되어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을 믿게 된다면 진정 성체성혈이 생명의 양식과 음료가 됩니다. 양식 안에는 주는 사람의 ‘기대’ 가 담겨 있기에 음식과 구별됩니다. 양식은 부담스럽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처럼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하루도 평범한 인간이 아닌 하느님의 가족으로서 살아갈 힘을 얻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양식 때문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기억합시다. 내가 영하는 성체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몸소 양식이 되셨음을. 그리고 믿읍시다. 내 안에 하느님께서 계시니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을.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어야 성체를 양식으로 영한 것입니다. 요즘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이 많고, 딱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이 살아나야 합니다. 저희를 살리시기 위해 아무 말 없이 짊어지고 가시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침묵하고 또 침묵하면서... 예수님과 함께 있어야 무슨 일을 할 수 있음을 믿고 살아가는 행복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실천이 말보다 낫다." - 벤자민 프랭클린 - |
♡2064회 지금 이 순간 회개 없이는 복음이 기쁜 소식이 될 수 없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4월 12일(갈라티아서 1장~) 토머스 J. 피터스는 "어떤 일이든 동기부여가 필요하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랑입니다.》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랑입니다. 부모 자식간의 사랑 부부의 사랑 연인들의 사랑 사랑이 없는 곳에는 웃음과 행복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 입니다. 이보다 더 듣기 좋은 말은 없을 테니까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 입니다. 언제나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려는 마음은 마음에 평안과 안식을 준답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진실입니다. 진실한 말 한마디로 믿음과 행복을 줄 수 있다면 마음의 문을 열어 진실한 목소리로 행복을 주고 싶습니다 페니는 미국의 백화점 왕으로 불리고 있다. 그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심한 재정난으로 자살까지 생각한 때가 있었다. 급기야 미시간 주 배틀 크릭에 있는 격리 병원에 수용되었다. 어느 날 창문 너머로 찬송가가 들려왔다. 그가 어렸을 때 자주 불렀던 “너 근심 걱정 말아라.” 는 찬송가였다. 그는 다시 신앙을 회복하고 “사랑하는 하느님,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저를 좀 도와주세요.” 라고 기도하였다. 그렇게 재기에 성공하여 미국의 백화점 왕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나는 무한한 어두운 공간에서 찬란한 태양빛으로 옮겨지는 느낌이었고 마음속의 무거운 짐이 옮겨져서 그 방을 나올 때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풀이 죽어서 그곳에 들어갔으나 해방되어 기쁜 마음으로 나왔습니다 .” 하느님은 항상 우리 곁에 계시지만 그분께 도움을 청하는 사람은 사실 많지 않습니다.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은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로 등장하고, 예수님과 식사를 함께 하는 세리와 죄인들은 회개한 사람들로 나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고 하시기 때문에 ‘회개’ 라는 것을 넘지 않으면 복음을 믿을 수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회개의 의미를 모른 채 복음을 믿으려하기 때문에 넘어지고 맙니다. 회개는 복음을 기쁜 소식으로 보이게 만드는 일생일대의 대전환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복음일까요? 바오로 사도가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19-20)라고 말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 참으로 기쁜 소식으로 보이면 회개 한 것이고 아니면 아직 회개를 하지 않은 것.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은 자기를 죽이려하지 않았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려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들에겐 예수님이 필요 없다. 왜냐하면 이미 자기 자신이 자기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주인이 되기 위해 오셨다. 나로 사는 것이 참으로 고통임을 알아 나 대신 살아줄 예수님이 필요하면 그때 회개한 것. 세리와 죄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았다. 마치 잃어버린 양 한 마리가 자신의 힘으로는 다시 무리로 돌아올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아는 것과 같다. 그래서 예수님을 필요로 했다. 지금 이 순간 회개 없이는 복음이 기쁜 소식이 될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독일의 쾰른시에 열심한 신자인 프랑케 부인이 살고 있었다. 부인의 부엌방엔 6년간 세 들어 살고 있는 서른여덟 살의 케테도 있다. 그녀의 인생은 “당신은 왜 이 절망적 상황에서 기도하지 않나요? 기도만이 유일한 희망인 것을 당신도 알잖아요?” “주님은 내게서 너무 멀리 있어.” “아니에요, 지금 우리 곁에 있어요.” “ ... ” 이 내용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하인리히 벨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일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하느님이 눈앞에 계셔도 그것이 기쁜 소식이 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지나치게 자신의 힘에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끝끝내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지 않고 죽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우리에겐 도움을 청할 주님이 지금 이 순간 항상 함께 계시고 그것이 나에게 모든 고통을 이겨낼 참 기쁜 소식이 됩니까? 그러면 회개한 것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그리고 주님 덕분에 은혜롭게 잘 살아가면서, 부디 올바르고 거룩한 신앙을 회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축복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어떤 일이든 시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 플라톤 - |
♡2065회 보지 못하던 것을 조금 있으면 다시 보게되는 영성 생활을 해야 한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4월 13일(히브리서 7장~) 척 팔라닉는 ''나의 어느 부분도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다. 나는 모든 지인의 노력의 집합체다.'' 《누군가 나를 위하여》지금 기도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 기도가 나에게 스며들 수 있도록 나를 비워 둡니다. 누군가 나를 위하여 지금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 분의 눈물을 닦아 주기 위하여 사랑과 성실로 짠 손수건 한 장을 내 마음에 준비합니다. 누군가 나를 위하여 지금 내 이름을 부르고 있을 것입니다. 빨리 대답하기 위하여 나를 겸손하게 낮추고 마음의 귀를 활짝 열어 둡니다. 누군가 나를 위하여 지금 글을 쓰고 있을 것입니다. 그 분들의 글이 가슴에 와 닿도록 내 마음 밭을 부드럽게 갈아 둡니다. 누군가 나를 위하여 지금 가르침을 준비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분들의 정성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책상 앞의 의자를 바짝 당겨 앉습니다. 누군가 나를 위하여 지금 땀 흘리며 농사를 짓고 있을 것입니다. 그분들의 땀방울을 생각하며 나의 소박한 생활을 지켜 나갑니다. 누군가 나를 위하여 지금 꽃씨를 뿌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 꽃을 볼 때 내 마음에 아름다움이 피어나도록 마음의 눈을 밝혀 둡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을 말한다. 예수님이 죽으시면 더 이상 보지 못한다는 것.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의 부활을 말씀하시는 것. 예수님이 죽으시면 더 이상 육안으로 보지 못한다. 그러나 "조금 더 있으면 보게 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이전의 모습이 아니다. 조금 더 있으면 보게 될 예수님의 모습은 죽음을 극복하신 예수님, 이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이시다. 그러기 때문에 죽음 이전의 예수님과는 모든 면에서 완전히 다른 예수님이시다. 근심이 기쁨으로 변화되게 해 주시는 예수님이시다. 우리가 생활하면서 함께 살 때에는 모르지만 세월이 지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에게 참으로 감사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왜냐하면 함께 있었을 때에는 몰랐지만 나중에서야 그의 존재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를 늦게서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죽은 이에게 보내는 편지를 묶어서 책을 내었는데 "하늘 나라 우체국" 이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다. 그곳에 이런 글이 있다. "이젠 목메도록 그립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이젠 죽을 정도로 후회된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이젠 가슴속에 사무친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이젠 사랑한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이 글은 우리가 부모를 떠나 보내고 난 다음에, 또는 정말로 사랑하는 애인을 떠나 보내고 난 다음에서야 고백할 수 있는 참회록과도 같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 당시에는 몰랐는데 조금 지나고 보면 그 사람이 참으로 고마운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해주는 사람이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아마도 그런 사람이었나 보다. 아니 제자들은 그것을 몰랐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알고 계셨나 보다. 반드시 제자들이 지금은 당신의 죽음으로 슬퍼하겠지만 당신의 부활로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을 것.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지금 받아야할 은혜가 있다면 복음을 묵상하면서 받는 은혜가 있다면 예전에는 잘 몰랐는데 복음을 묵상하면서 조금씩 진리를 깨닫게 되기 때문에 근심이 기쁨으로 변화된다는 것일 것. 이러한 변화가 없다면 복음 묵상의 의미가 없다. 아니 복음을 묵상할 필요가 없다. 분명히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와야 한다. 죽음을 승리하신 예수님, 이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와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모든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 복음 묵상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부활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그 은혜를 통해서 우리들이 부활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이 부활하지 못하고 죽은 예수님의 모습으로 고정되어 있다면 우리는 결코 기쁠 수가 없다. 모든 일이 근심일 뿐이다. 복음을 통하여 죽음을 물리치신 승리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기쁨으로 바뀔 것. 내 삶의 의미가 달라지고 삶의 목표가 달라질 것. 근심이 기쁨으로 바뀐다는 것은 분명 기적이다. 은혜이다. 근심이란 무엇인가? 괴롭게 애를 쓰는 마음이다. 심리적으로 어떤 고통을 느끼는 것. 언제 우리는 근심하게 되는가? 근심은 어떤 일이나 사건을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을 때에 보통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이다. 아무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 때 근심하게 된다. 그러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면 기쁨으로 바뀐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근심하는 이유는 모든 것을 지금 당장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근심하는 많은 것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 세상에 국한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좀더 넓고 깊은 세계 즉 부활이라는 세계에서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무엇이 해결되지 않는다고 해서 또 지금 갖지 못한다고 해서 근심할 필요는 없다. 이 세상의 일들은 모두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활의 신앙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모든 것에 있어서 초연해질 수 있다. 그리고 주님의 섭리에 맡긴다. 많은 경우 내가 근심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부활의 관점에서 보면 근심거리라고 하는 모든 것들도 다 포용할 수 있는 것들이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단순히 당신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알려 주는 것만은 아니다. 조금 더 묵상해보면 이 말씀에는 더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영적으로 부활하지 못하면 보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으로 부활하면 새롭게 보이게 되는 것들이 많이 있다. 영적으로 보지 못하던 것들이 영적으로 눈이 뜨이니까 보이기 시작하는 그 단계에로 넘어가기까지가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라고 묵상할 수 있을 것.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냥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보지 못하던 것을 조금씩 볼 수 있는 단계로 넘어가는 시간이어야 한다. 1년 전이나 10년 전이나 30년의 신앙 생활을 했으면서도 조금도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다. 아니 영적으로 눈이 뜨지 못한 생활이다. 보지 못하던 것을 조금 있으면 다시 보게되는 영성 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면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부활한 삶을 사는 사람은 부활하지 못했을 때에는 근심이었던 생활이 이제는 모두 기쁨으로 다가올 것이다.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지 못하던 것을 "조금 있으면" 볼 수 있게 되는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그 "조금 있으면" 이라는 기간이 얼마나 될 것인가는 각자의 영성 생활에 달려 있을 것이다. 예수님을 진실 되게 믿음으로 적당한 때가 되면 우리들에게 필요한 자비와 용서를 베풀어주시는 주님의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우리의 삶은 우리의 생각에 달려있다." - 마커스 아우렐리우스 - |
♡2067회 '걸을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대화할 수 있고 카톡 볼 수 있는 우리가 행복'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4월 15일(야고보서 5장~) 허버트 캐서는 "행복은 습관이다." 《살면서 반드시 만나야 할 열 사람, 피해야 할 열 사람》살면서 반드시 만나야 할 열 사람, 피해야 할 열 사람 대부분 스트레스는 인간관계에서 온다. 나를 바꾸려면 지금 이 순간 내가 만나는 사람을 바꿔야 한다. 살면서 반드시 만나야 할 사람과 피해야 할 인간관계 유형의 사람들을 잘 파악해 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일이 적도록 해야 한다. ◇ 살면서 반드시 만나야 할 열 사람 1. “늘 조건 없이 ‘카톡’ 을 보내는 사람” 과 만나세요. 그 사람은 항상 당신을 생각하고 있어요. 2. “내일을 이야기 하는 사람과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는 사람” 과 만나세요. 그 사람은 반드시 성공합니다. 3. “내 이야기를 잘 들어 주는 사람” 과 만나세요. 그 사람은 나를 치유해 주는 사람이지요. 4. “확신에 찬 말을 하는 사람” 과 만나세요. 그 사람은 기준 잡힌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5. “살아 있음에 감사하는 사람” 과 만나세요. 그 사람은 작은 행복이 자주 일어나는 사람입니다. 6. “아무리 작은일도 소중히 여기는 사람” 과 만나세요. 그 사람은 작은 행복이 자주 일어나는 사람입니다. 7. “생각만 해도 대단하다고 느끼는 사람” 과 만나세요. 그 사람은 시대를 이끌어 갈 사람입니다. 8. “독서와 사색을 즐기는 사람” 과 만나세요. 그 사람에게는 항상 배울것이 많은 사람입니다.(특히 성경 읽는사람) 9. “언제나 밝게 웃는 사람” 과 만나세요. 그 사람은 멀리있는 복도 찾아오게 하는 사람입니다. 10.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 과 만나세요. 그 사람은 삶이 항상 풍요로운 사람입니다. ◇ 살면서 피해야 할 열 사람 1. 귀 막힌 사람 : 귀를 닫고 듣지 않는 사람은 상대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이미 자기 안에 답을 갖고 있다. 타협하거나 재고의 여지를 두지 않는다. 따라서 내 이야기를 업신여기거나 깔보는 경우도 생긴다. 내가 귀하게 대접받으려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2. 필요할 때만 구하는 사람 : 필요할 때만 사람을 구하려는 이들은 모든 인간관계를 거래로 보는 경향이 있다. 사람 자체를 자원으로 보기 때문에 언제나 자신이 필요할 때만 나타난다. 정작 내가 만나야 할 때 그 사람은 시선을 회피하거나 그 자리에 없는 경우가 많다. 필요할 때만 찾아오면 정작 그것을 얻을 수 없다. 3. 단점만 지적하느라 장점을 볼 시간이 없는 사람 : 자신만 아는 사람들은 자기 합리화를 추구할 때가 많다. 매사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 때문에’ 라는 말을 많이 한다. 반면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은 ‘~덕분에’ 라는 말을 주로 쓴다.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은 현재 결과를 만든 모든 것을 남 탓, 환경 탓으로 돌린다. 따라서 인간관계에서도 장점보다는 단점을 주로 본다. 나를 칭찬해주는 사람을 만나는 게 좋다. 4. 변칙적으로 공동체 질서를 파괴하는 사람 : 원칙은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다. 따라서 원칙이 흔들리면 사람 사이에 불신이 생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변칙적으로 공동체 질서를 흔들고 원리를 지키지 않는다. 이들은 변명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깨려고 하는 위험한 존재들이다. 5.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 : 과거로 돌아가려고 하거나 집착하는 사람은 꼰대일 가능성이 아주 크다. 반면 리더는 미래를 생각하고 향하려 한다. 과거를 중시하는 이들은 발전 가능성보다 성공했던 사실에 안주하며 도전하지 않는다. 6. 책(冊) 읽지 않고 책(責) 잡히는 사람 : 많은 사람이 바빠서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하지만 독서하지 않으면 생각의 깊이와 정보의 규합력이 떨어진다. ‘공부를 멈춘 사람’ 이 위험한 이유는 나와 다른 사람의 생각에 접속해본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삶을 통해서 배운다고 하지만 그가 가진 오만함으로 인해 과연 제대로 된 공부가 될지 의문이다. 또한 공부하지 않으면 남에게 쉽게 공격당한다. 7. 감탄을 잃은 사람 : 우리는 일상을 반복해 살아가다 보니 감탄보다 한탄하는 일이 많다. 익숙함에 덫에 걸려 다르게 생각하기를 포기한 사람들에게 배울 것이 적다. 타성에 젖으면 탄성을 잃어버리고 감탄할 일도 없다. 사람이 성숙하기 위해서는 익숙한 ‘여기’ 를 떠나 낯선 ‘저기’ 로 가야한다. 그리고 안락한 세계에 대해 물음표를 던질 수 있어야 한다. 8. 대접받고 은혜를 저버리는 사람 : 대접은 아무런 조건 없이 상대방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공손한 행동을 기초로 한 것이다. 대접받은 사람은 자신이 받은 대접에 담긴 상대방의 사랑과 존경, 정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은혜를 잊어버리면 다른 사람에게도 나중에 버림받기 쉽다. 또한 은인이 나타나지 않으며 있던 사람조차 사라질 것이다. 불순한 의도를 품고 ‘대접’ 이 아닌 ‘접대’ 를 하는 사람도 경계해야 한다. 9. 나뿐인 사람 :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다르고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와 달리 변하게 된다. 하지만 ‘나뿐인 사람’ 은 그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한 가지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유일한 가치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건 폭력이며 횡포다. 이들은 변화를 부정하려 한다. 10. 365일 과시형 : 스스로 자신감을 갖는 건 좋지만 그 정도가 심하면 자가당착에 빠지기 쉽다. 과시가 길어지면 도리어 가벼워 보이고 꼰대처럼 보일 수도 있다. 과시하는 이는 스스로 돌아보지 않는 편이며 과시는 무시를 불러오고 멸시를 낳는다. 인생 이란! 사람이 양껏 벌어도 먹는 건 세끼요. 기껏 살아 봐도 백년은 꿈인 것을. 못 산다고 슬퍼 말고 못 났다고 비관 마라. 재물이 늘어나면 근심도 늘어나고 지위가 높아지면 외로움도 더하는 법. 부자 중에 제일은 마음 편한 부자요. 자리 중에 제일은 마음 비운 자리다. 사람이 사람인 이상 비운다 한들 다 비울수 있을까? 마는 어느날 갑자기 분수에 넘치는 탐욕이 일거든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처럼 이치에 맞게 양심을 거스르지 말 것이며. 어느 순간 미움과 증오로 분노가 일거든 얼음이 녹아 물이 되듯 분노의 언 가슴. 용서로 흘려 보낼 일이다. 제 모습을 그릇에 맞추는 물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을 탓하지 아니 한답니다. 내가 행복 천하를 통일하고 한없이 살고 싶어 만리장성을 쌓았던 중국의 진시황제, 로마의 휴일 앤 공주역으로 데뷰하여 오스카 상을 탄 아름답고 청순한 이미지의 오드리 햅번, 권투 역사상 가장 성공하고 가장 유명한 흑인권투 선수 겸 인권운동가 무하마드 알리, 연봉을 단 $1로 정하고 애플을 창시하여 억만장자가된 스티븐 잡스 등등, "이들 중 누가 부럽습니까...?" 걸을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대화할 수 있고 또 카톡 볼 수 있는 우리가 행복합니다. 예수님 말씀...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믿음의 고백으로 하느님의 큰 은총을 누리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간결한 격언 속에 흔히 많은 지혜가 깃들어 있다.'' - 소포클레스 - |
♡2068회 과거를 어떻게 할 것인가?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4월 16일(요한1서 1장~) 월리엄 해리슨은 ''성경은 우리가 귀히 사용하고 도움을 얻을 수 있도록 성령의 감동을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이다.'' 《행복하게 장수 할수있는 비결》첫째, 밝게 사세요. 마음이 밝으면 병이 발을 붙이지 못합니다. 둘째, 열 받지 마세요. 열을 자주 받으면 건강만 해칩니다. 셋째, 맨손체조와 걷기는 헬스 클럽보다 낫습니다. 넷째, 느긋하게 사세요. 성질이 급한 사람은 단명합니다. 다섯째, 고민을 하지 마세요. 고민은 병을 부릅니다. 여섯째, 남을 미워하지 마세요. 미움은 피를 탁하게 하는 주범입니다. 일곱째,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세요. 수면 부족이 노화를 앞당깁니다. 여덟째, 흙을 자주 밟으세요. 자연이 명의입니다. 아홉째, 과로를 삼가세요. 과로는 조용히 찾아오는 저승사자입니다. 열번째, 맑은 공기와 좋은 물과 소금을 섭취하세요. 이보다 확실한 장수 비결은 없습니다. 꽃은 다시 필 날이 있어도 인생은 다시 젊음으로 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 삶에서 거의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 사안 하나를 떠올려 보십시오. 지금 앉아 있다면 의자의 색깔을 생각해도 되고, 머리 위의 형광등, 자신의 발 사이즈 등도 괜찮습니다. 생각해 보면 내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들이 꽤 많습니다. 이렇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어떤 특별한 감정도 갖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의자의 색깔을 그냥 받아들이고, 머리 위의 형광등도 그냥 받아들이고, 내 발 사이즈도 그냥 받아들이기 때문에 어떤 감정의 변화를 가져오는 영향이 없는 것. 하지만 이 역시 받아들이지 못하면 계속 신경이 쓰이면서 영향을 받게 됩니다. 의자 색깔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생각하게 됩니다. 형광등의 깜빡거림이 신경 쓰입니다. ‘내 발은 왜 이렇게 작은 거야?’ 하면서 다른 사람의 발만을 바라봅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힘들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과의 관계도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주님과의 관계가 힘들다고 말합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도 생기지 않고, 불공평한 주님의 모습만 보인다고 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주님을 받아들이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만 바라보고 있으면 충분할 것을, 내게 주어지길 바라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그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 세상의 것만을 얻으려는 마음만으로는 주님의 은총 안에 머물 수가 없다. 매 미사 때, 우리는 주님의 몸을 모십니다. 사제가 나눠 주니까 당연히 받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주님의 사랑에 집중해 보도록 하십시오. 그 사랑으로 세상의 것은 별것 아니고, 이 사랑만으로도 충분히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될 것. 주님의 가장 큰 선물을 받은 우리, 그래서 우리는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랜 친구였는데 이제 만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지난번 만남에서 자신에게 모욕적인 말을 했다는 이유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몇 년 전에 있었던 일로 인해서 그 뒤로 전화를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것은 어렸을 때 겪었던 일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아마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두 번은 해보셨을 것. 자신이 그 주인공일 수도 있고, 다른 이의 말을 듣기도 했겠지요.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과거에 있었던 일 때문에, 앞으로 하지 못할 일들이 참 많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과거는 과거에 있을 뿐입니다. 다 끝난 일이고, 이 과거를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과거를 현재에도 끌고 와서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과거’ 가 적용되지 않는데, 억지로 과거를 현재에 적용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힘이 드는 것이 아닐까요? 과거를 건들지 않고 바라만 보면 안 될까요? 인간이라서 안 된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사는 사람도 꽤 많다. 그런 사람이 현재를 충실하고 만족스럽게 만들어갑니다. 단 하루만에도 엉뚱한 말, 허황된 말, 거짓말, 일생에 도움 안 되는 말, 돌아서면 후회할 말, 이웃들에게 상처 주는 말, 그래서 이웃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말들을 셀 수도 없이 내뱉는 우리들의 언어생활 앞에서 예수님의 언어는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할 사명이 있음을 알려 줍니다. 혹여, 미움으로 분심으로 다툼과 시기로 그 사명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께서 주신 시간과 삶을 한낱 감정에 묶여 소진하는 일이야말로 ‘원수를 묵상하는’ 일이 아니겠는지요. 인생을 갉아 먹는 삶의 독소는 다양합니다. 그 독은 스스로 확인하고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려는 원의만으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때문에 오늘 사랑하는 여러분께 한 가지를 강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삶을 주님으로만 채우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흘러갑니다. 모든 것이 새로워집니다.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집니다. “너는 혼자 아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너를 기다리고 있다.” 라고 말씀하시는 우리 주 예수님을 만나 뵙는 그 날이 오면... 그 순간 “잘했다. 애썼다.” 라는 예수님의 한 마디를 들을 수 있도록 기쁘게 기도하고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의견 차이는 대립이 아니라 대화의 첫걸음이다.'' - 법정 - |
♡2069회 사랑합시다. 그러면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4월 17일(창세기 1장~) 벤자민 프랭클린은 ''내가 여러분에게 주고자 하는 권고는 여러분이 성경에 익숙하여 확고한 믿음을 갖도록 개발하라는 것이다.'' 《나의 기도는 당신의 눈물입니다.》이 땅에 당신이 없으면 나도 없습니다. 인생 길에 목이 메어 눈가에 뿌옇게 이슬이 맺힐 때 아프면 아픈 대로 소리 나면 소리 나는 대로 울게 하소서. 나의 기도는 당신의 눈물입니다. 내가 흘리는 눈물이 단 한 방울이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내 영혼의 우물에 그대로 고여 인생길이 외롭고 힘들 때 그 눈물로 나를 씻어주고 닦아주소서. 알알이 꽉 차있는 석류 알처럼 눈물방울 하나하나가 그대로 굳어서 내 가슴에 영롱한 진주빛으로 빛나게 하소서. 나의 눈물샘에 기쁨의 눈물 사랑의 눈물 은혜의 눈물 감사의 눈물만이 흐르게 하소서. 눈물겹도록 힘겨운 인생 길이지만 당신이 내 곁에 있으니 살아갈 만한 세상입니다. ‘주는 것을 받는다.’ 라는 것은 하나의 흔들림 없는 세상의 법칙입니다. 내가 주는 대로 받는 것입니다. 내가 위로하면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내가 사랑을 베풀면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좋은 것을 주라고 파견받지만 박해와 모욕과 죽음을 받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이웃에게 좋은 것만을 주는데 내가 주지 않은 안 좋은 것을 받을 때도 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잘해 줘봐야 보람도 없다며 잘해주기를 멈춰야 할까요? 그러나 주는 것은 반드시 다시 받게 된다는 법칙을 믿어야만 합니다. 파도바의 안토니오는 많은 기적도 행했지만, 또한 위대한 설교가였다. 그런데 어느 바닷가 마을은 안토니오 성인의 말을 좀처럼 들으려 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성인의 설교를 들으려 모여들지 않았지만, 오히려 바다의 물고기들이 몰려와 그의 설교를 들었다. 안토니오 성인의 설교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했다. 그러나 주님은 동물들을 통해 그의 설교를 듣게 하심으로써 그를 위로해 주셨다. 하느님을 위로하기 위해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위로로 다시 갚아주지 않으실 리가 없다. 만약 100명이 들을법한 설교인데 1명만 듣는다면 99는 주님께서 갚아주십니다. 성 프란츠시코도 마찬가지였다. 성 프란치스코의 행복론은 더 특이합니다. 사람에게 위로를 받느니보다는 주님께 받는 것을 선택합니다. 그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큰 행복이 무엇인지 아느냐? 내가 수많은 사람을 회개시키면 그것이 참 행복일까? 아니다. 더 큰 행복이 있다. 내가 어느 집에 문을 두드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먹을 것을 청할 때 심한 모욕을 당할 것이다. 이것이 행복이다. 그러면 나는 지치지 않고 다시 문을 두드려 주님의 이름으로 도움을 청할 것이다. 그 사람은 욕을 하며 오물을 뿌리고 나를 두들겨 팰 것이다. 이것이 행복이다.” 성인들은 주는 대로 받는다는 이 법칙을 아셨다. 당신들이 이 세상에서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면 주님께서 그 대신 더 큰 열매로 갚아주신다는 것을. 그러니 우리는 남을 위로하고, 복음을 전하고, 사랑하는 데 지쳐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가 하는 모든 것에 합당하게 채워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목숨을 바쳐 복음을 전했는데 사람들을 나의 목에 칼을 댔다면 하느님은 영원한 생명으로 채워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라는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내가 주는 사랑에 대해 이웃이 어떠한 반응을 하던 내가 주는 것은 반드시 돌려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을 받으면 받아서 좋고, 거부당해도 나는 사랑의 보상을 받게 됩니다. 사랑이 거부되는 데서 오는 고통이 크다면 그만큼 더 큰 위안으로 주님께서 갚아주시는 것. 독일의 한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1부터 100까지 차례대로 합한 값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하였다. 아이들은 ‘1+2+3+4+…+99+100’ 이렇게 하나하나 더해나갔다. 그런데 한 학생이 손을 들더니 다 더했다는 것. 선생님은 놀라며 값을 물었다. “5050입니다.” 10살 때 이 문제를 푼 소년의 이름은 19세기 최고의 수학자가 될 칼 프리드리히 가우스였다. 가우스는 무조건 1부터 100까지 더하려 하지 않고 하나의 ‘법칙’ 을 발견하려 노력했다. 그랬더니 이러한 법칙을 발견하게 되었다. “1+100=101, 2+99=101, … , 99+2=101, 100+1=101” 1부터 100까지 가장 작은 것과 가장 큰 것을 더하면 항상 101이 나오는 것. 그리고 101이 50개가 생기니 101×50=5050이 나옵니다. 우리가 내어주는 것에도 이러한 법칙이 숨어있다. 결코, 내가 하는 수고는 합당한 보상을 받지 않고 끝나지 않습니다. 1밖에 받지 못했다면 사람들이 주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황금으로 도금된 100을 보상으로 받게 될 것. 이것이 하느님께 만들어놓으신 법칙입니다. 사랑합시다. 그러면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결코, 내가 하는 사랑보다 덜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 사랑이 거부당한다면 더욱 기뻐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에 합당한 사랑을 주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웃에게 좋은 것을 주는데 결과만 보고 결코 지쳐서는 안 됩니다. “주님, 제가 죄인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는 고백이 있기를 그 고백으로 주님이 주신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섬길 수 있는 기회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를 그 기회가 내가 축복 받는 은총의 길임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시작은 곧 절반을 끝낸다." - 아리스토텔레스 - |
♡2070회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거절당하는 아픔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4월 18일( 장~) 공자: 명심보감에 ''착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복을 주시고, 악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재앙을 주느니라.'' 《가장 하기쉽고, 듣기좋은 말》"잘 지냈는가?" 물어오는 당신의 안부전화는 하루종일 분주했던 내 마음에 커다란 기쁨 주머니를 달아주는 말입니다. "고맙소" 가만히 어깨 감싸며 던진 말 한마디는 가슴 저 깊이 가라앉는 설움까지도 말갛게 씻어주는 샘물과 같은 말입니다.. "수고했어" 등을 도닥여 주면 격려해주는 당신의 위로 한마디는 그냥 좋아서 혼자 걸레질 하고난 뒤 신나는 말입니다.. "최고야" 눈 찔끔감고 내민 주먹으로 말하는 그말 한마디는 세상을 다 얻은듯한 가슴뿌듯한 말입니다. "사랑해" 내 귓가에 속삭여주는 달콤한 사랑의 말한마디는 고장난 내 수도꼭지에서 또 눈물을 새게 만드는 감미로운 음악과도 같은 말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여 다가가 고백하려 한다면 반드시 그 고백이 거절당하는 ‘두려움’ 과 싸워야 합니다. 만약 그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다면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평생 후회할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결혼을 일주일 남겨놓고 베트남전에 투입되게 된 군인이 있었다. 다녀와서 꼭 결혼하자고 약속을 하고 전투에 나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발목 지뢰를 밟아 두 다리를 잃게 되었다. 그는 휠체어를 타고 멀리서 그녀를 지켜볼 뿐 그녀에게 다가갈 용기를 낼 수 없었다. 그의 약혼녀는 자신의 약혼자가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약혼녀의 짐을 덜어주어야겠다고 생각하여 친구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내 약혼녀에게 가서 내가 죽었다고 전해주게. 그러나 끝까지 사랑했노라고 전해주게.” 친구는 약혼녀에게 그렇게 전해주었다. 약혼녀는 한없이 울었지만, 점차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 자신의 약혼녀가 다른 남자와 혼인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마음이 아팠지만, 또한 행복을 빌어주는 마음으로 휠체어를 타고 멀리서 혼인식을 지켜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와 혼인하는 사람은 발은 물론이요, 양손까지 절단된 퇴역군인이었던 것. 두 다리가 절단된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아서 다가가지 못한 이 군인은 얼마나 큰 후회를 하겠습니까? 우리는 자신도 모르고 남도 모릅니다. 나의 사랑을 받아줄지, 받아주지 않을지 분별을 할 수 없다. 사랑은 일단 표현하고 보는 것. 그런데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거절당하는 아픔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또한 ‘아님 말구!’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아니면 말고’ 를 그렇게 쓴 것. 무책임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이 정신이 없으면 사랑이 집착이 되거나, 혹은 그 두려움 때문에 혼자 고립된 삶을 살게 됩니다. 상대가 싫어하는데도 끊임없이 사랑을 요구하게 되거나, 아니면 아예 한 마디 말도 못 붙이고 끝나버리게 되는 것. 만약 어부가 고기를 잡는데 안 잡히는 물고기 때문에 물에 뛰어들어야 할까요? 아니면 자신의 그물에 들어오지 않는 물고기 때문에 상처받아야 할까요? 그러면 그물을 던질 수 없을 것. 그물을 던지는 이유는 그 그물에 잡히는 물고기들에 감사하기 위해서입니다. 잡히지 않는 물고기 때문에 상처받는다면 그물질은 포기해야 합니다. 복음 선포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 선포만큼 큰 사랑은 없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를 하는데 우선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어두운 데서 들은 것을 밝은 데서 말하고,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육신은 멸망시켜도 영혼은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오히려 영혼까지 지옥으로 보낼 수 있는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두려움 없이 증언한다면 당신도 하느님 앞에서 그 사람을 안다고 증언할 것이라고 합니다. 복음 선포는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두려움이 없어야 하고 그 두려움을 없앨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님 말구!’ 정신입니다. 선교왕들은 다 이런 정신을 지니고 있다. 어떤 분은 가게에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무조건 “찬미 예수!” 라고 인사합니다. 불교 손님도 있을 텐데 그렇게 하며 한 해에 서른 명 정도를 선교한다고 합니다. 또 어떤 분은 길거리에서 띠를 두르고 무작정 다가가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면 한 해에도 수백 명 선교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당에 나오고 싶어도 인도해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 주저하는 수많은 사람이 길거리에 널려있기 때문입니다. 개신교의 어떤 선교왕은 길에서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 사람들을 ‘고구마’ 로 여긴다고 합니다. 고구마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다. 그냥 찔러보는 것. 안 익었으면 다음에 또 찔러본다는 마음으로 선교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수많은 사람을 선교할 수 있게 되는 것. 유튜브에도 가끔 ‘악성 댓글’ 을 달거나 ‘싫어요’ 를 누르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싫어요’ 를 누르는 사람을 찾아낼 수 없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왜 찾아내야 할까요? 모두가 다 ‘좋아요’ 를 누르는 것이 어쩌면 더 이상한 일일 것. 호수에 그물을 던졌는데 호수의 물고기들이 다 그 그물에 들어와 보십시오. 그것이 더 무서운 일입니다. 사실 ‘좋아요’, ‘싫어요’ 가 몇 개인지 제대로 본 적이 없다. 그것에 휘둘리면 에너지를 빼앗기고 그러면 다른 일을 하지 못합니다. 또한 악플을 다신 분이 있다면 읽어보고 챙길 것은 챙기고 그분을 더는 댓글을 달지 못하게 차단해버립니다. 다른 사람들까지 그것을 읽고 기분 나쁘게 할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표현하면 반드시 거절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 거절이 무서워서 복음을 전할 수 없다면 주님도 그 사람을 부끄럽게 여기실 것. 사랑은 반드시 지붕 위에서 선포되어야 하고 듣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아님 말구!’ 로 대처해야 합니다. 사랑이 있다면 고백해야 하는 것처럼, 복음을 들었다면 선포합시다. 그래야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그 사람을 아신다고 증언해 주실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 부활하신 예수님의 큰 능력으로 우리의 기도와 희망이 일어나고 또 일어나서 우리들과 가정에 충만한 은총과 축복으로 열매 맺게 되는 부활이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질병은 입을 좇아 들어가고 화근은 입을 좇아 나온다.'' - 태평어람 - |
♡2071회 하느님께 모든 희망을 두면 부족한 것이 없어집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4월 19일(탈출기 1장~) 프랭클린은 ''백 권의 책에 쓰인 말보다, 한 가지 성실한 마음이 더 크게 사람을 움직인다.'' 《행복을 열어 가는 길》한번 만난 적 없는 사람 일지라도 서로 밝은 미소로 인사하면 가슴속에 따뜻한 느낌 전해옵니다. 자주 만난적 없는 사람이 밝은 미소로 격려를 전해줄 때 가슴속에 따뜻한 마음이 전해집니다. 짧은 순간 짧은 한마디에서도 서로에게 전해지는 따뜻한 느낌으로 살아있음이 행복임을 가슴으로 느껴봅니다. 오늘 내가 만나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밝은 미소 따뜻한 한마디로 행복을 전해줄 수 있다면 나도 또한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내게 행복을 전해준 그 분들에게 감사하며 나도 행복을 전하는 그런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당신은 지금 행복을 열어 가는 길의 글을 읽으므로 모두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 에게도 행복의 원칙은 하나, 어떤 일을 할 것. 둘, 어떤 사람을 사랑할 것. 셋, 어떤 일에 희망을 가지는 것이다. 유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것으로 올가미를 씌우려고 시도합니다. 로마에게 세금을 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묻는 것.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올가미에 걸려들지 않습니다. 세상도 우리를 미혹하려 하고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이용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사기당하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사기를 당해 물건을 엄청나게 산 일이 있다. 어느분께서 추석 즈음에 한 백화점에서 영화를 보고 성당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한 냉동탑차가 도로에서 제 차 옆으로 오더니 잠깐만 세워달라는 것. 무슨 일인가 싶어 길가에 세웠더니 자신들도 그 백화점에 납품하는 사람들인데 물건이 남아서 싸게 팔고 싶다는 것. 그들이 내어놓은 물건은 제주 옥돔이었다. 얼음 위에 재워진 옥돔은 정말 그럴싸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원래 백화점에서는 35만 원에 판매되는 것인데 4만 원에 사라고 했다. 자신들도 고향에 내려가고 싶지만 바빠서 내려갈 수 없어서 그렇게 남은 것들을 팔아 소주라도 한잔하려고 한다고 했다. 어차피 고향에 내려가면 여러 가정에 선물을 해야 해서 10박스를 샀다. 수녀원에도 주었는데 수녀님들이 옥돔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집에 가져갔더니 온통 얼음으로만 채워져 있고 위에 3마리 정도만 있는 것이었다. 몇 마리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20마리 정도 있다고 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다 큰 어른이, 그것도 사기 치는 그런 사람들에게 당해버렸다는 것이 창피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때 돈이 넉넉하지 못한 때였기 때문에 사기를 더 당하기 쉬웠던 것 같다. 일단 그 사람들을 실망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애정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리고 돈에 대한 욕구가 더 크니까 그만큼 싸게 판다는 것에 대해 더 혹하게 된 것. 지금 같으면 그렇게 싸게 사기 위해 사기의 위험을 감수하지는 않을 것. 지금은 아무리 100원짜리라도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면 굳이 싸다고 돈을 쓰지 않습니다. 돈이 더 넉넉해졌는데도 사기당할 위험이 그만큼 줄어든 것. 무엇이 넉넉할 때 덜 미혹됩니다. 친구가 많을 때 애정에 덜 미혹되는 것과 같다. 사기꾼들은 그 사람의 욕구를 자극합니다. 만약 전화금융사기를 치는 사람이라면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자녀가 다쳤다고 해서 당황하게 만듭니다. 민감한 부분을 건드려야 당황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민감한 것이 많은 이들은 많은 사기를 당하며 살 수밖에 없다. 애정에 집착하는 사람이라면 앞뒤 안 가리고 사람을 믿고 보증을 서주거나 돈을 빌려줄 것입니다. 그 사람은 본인은 순수하고 착한 마음으로 그렇게 했다고 말하겠지만 실제로는 인간 애정에 대한 애착 때문에 사기를 쉽게 당하는 것뿐입니다. 재물이든 사람에 대한 애정이든 자신이 민감한 부분이 있다면 오히려 그것에 대해 무감각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기의 위험에 노출됩니다. 민감해지지 않는 방법은 넉넉하게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유다인들은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라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만약 세금을 내라고 하면 유다인들에게 매국노처럼 취급받을 것이고 그렇다고 내지 말라고 하면 반란세력으로 잡혀갈 것.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황제의 것이란 세상의 욕구입니다. 세상의 욕구는 세상에 돌려주라는 뜻입니다. 그 힘은 나의 모든 바람을 하느님께로 향하는 데서 나옵니다. 사람은 무언가를 욕망하거나 바라기 위한 에너지가 한정되어 있다. 세상 것을 욕망할수록 하느님 것을 덜 욕망하게 됩니다. 반대로 하느님 것을 욕망할수록 세상 것에는 무감각해질 수 있다. 예수님은 모든 에너지를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에 사용하기 때문에 세상 것에는 무관심할 수 있으셨던 것. 예수님은 어느 쪽 편을 들어주셔서가 아니라 하느님 편을 들으셔서 그들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으셨다. 하느님께 모든 희망을 두면 부족한 것이 없어집니다. 하느님은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부모와 있을 때 아이들이 세상 어떠한 유혹에도 미혹되지 않는 것과 같다. 엄마가 아이를 보는 것을 귀찮아해서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맡기면 아이는 어머니의 관심을 못 받는 대신 스마트폰을 더 좋아하게 됩니다. 그런 아이에게 어떤 사람이 길을 지나가다가 스마트폰을 보여주면 그 아이는 엄마를 버리고 그 스마트폰을 내미는 모르는 사람을 따라갑니다. 엄마의 사랑이 부족해지면 자녀들은 그렇게 세상 것을 좋아하고 세상 것에 미혹되어 사기당하고 이용당하며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엄마의 사랑만을 믿는 아이라면 자신을 엄마의 사랑으로부터 떨어뜨려 놓는 무엇에도 반응하지 않고 겁을 먹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세상의 것들로부터 미혹되는 일이 없는데 그것들이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자신을 떨어뜨리는 것임을 직감적으로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느님과 함께라면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기당하지도 않고 이용당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의 미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키우는 길뿐입니다. 우리들에게 소낙비처럼 내려주시는 천상의 하느님 축복과 은총을 누리십시오. 그분은 우리들이 숨 쉬는 동안 우리들의 삶에 전부이심을 천상의 은총으로 누리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탐욕은 일체를 얻고자 욕심내어서 도리어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 몽테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