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9회 ‘깨어 준비하고 있는 신앙인’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3월 9일(마태복음 25장~ ) 라 로슈푸코는 ''우리들은 왕왕 미덕의 허위임을 증명하는 격언에 대하여 그럴듯한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그러한 격언이 참으로 정말인 것처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믿어지기 때문이다.'' 《서두르지 마라! 영혼도 숨을 쉬게 하여야 한다.》때가 되면 편안한 마음으로, 내가 이루어 놓은 것을 누리고 기뻐할 수 있을까? 그때가 되었다는 것을 나는 어떻게 알게 될까? 행복은 우리 안에 있다. 달리고 서두르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멈추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달리면 달릴수록, 우리 마음은 더욱 공허해진다. 행복을 뒤 쫓을수록 오히려 행복과 멀어진다. 우리의 하루는 여유, 중지 그리고 휴식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여유는 당신의 영혼이 숨을 쉬게 해준다. 자신의 중심에서 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평온을 찾을수 있는 힘이 된다. -안젤름 그륀 신부 지음- 육상에서 허들 경주가 있다. 허들이라는 장애물을 놓고서 이를 뛰어넘어 순위를 다투어 결승선에 도달하는 경기입니다. 언젠가 육상 경기장에 갔다가 허들 선수들이 연습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 허들의 높이에 깜짝 놀랐다. 1m가 넘는 높이였고 그 무게도 상당했다. 총 10개의 허들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합니다. 당연히 장애물이 없는 일반 트랙경기보다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다. 이 경기를 보면서 우리 인생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의 길에 장애물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장애물을 당연하다고 여겨야 합니다. 원래가 장애물이 놓인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빨리할 수 없다고, 또 이 장애물을 뛰어넘기 힘들다고 그냥 포기하면 어떨까요? 허들 경주 선수가 이렇게 했을 때 실격을 당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 결승선에 도달할 수 없으며 승리의 기쁨도 얻지 못할 것. 허들 경주 선수는 달리는 연습뿐 아니라 허들이라는 장애물을 뛰어넘는 연습도 합니다. 우리 역시 인생의 길에서 장애물을 뛰어넘는 연습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포기, 좌절이 아니라, 결승선이라는 희망을 바라보며 지금 이 순간 앞으로 또 앞으로 달려야 합니다. 우리의 결승선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가장 큰 선물을 그냥 주겠습니까? 고통이나 시련에 무너지지 않고 그 희망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먼저 모범을 보여주시지요. 그 모범을 기억하며 오늘도 힘차게 나의 장애물들을 뛰어넘어야 하겠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께 굳은 믿음으로 다가오기를 원하십니다. 이 땅에 직접 오셨고, 가장 큰 사랑과 함께 많은 표징을 던져주셨다. 사람들은 믿지 못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스스로 장애물을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그 장애물을 말끔하게 치워 줄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불편함을 해결해 줄 ‘종’ 을 찾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당신 스스로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주님만이 길이고 진리이며 생명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로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길 앞에 많은 장애물이 놓여 있어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주님만 굳게 믿는다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 우리 앞의 장애물만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내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면서 희망의 웃음을 지을 수 있어야 하겠다. 영원하신 하느님께는 시작과 끝이 없다. 하지만 유한한 세상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하느님의 창조로 시작된 이 세상은 언젠가는 끝납니다. 많은 이들이 세상 종말이 언제 올지 궁금히 여기고 나름 추측하기도 했다. 기원전 2세기경부터 유다인들은 세상이 곧 끝나리라고 예상했다. 죄에 물들고 타락한 이 세상은 머지않아 한순간에 다 무너지고 새 세상이 오는데, 그때에 하느님의 심판도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하느님께서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죽은 이들 모두를 부활시켜 살아있는 이들과 함께 심판하시면, 의인들은 구원받고 악인들은 멸망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죽은 모든 이가 부활하게 되는 세상의 종말이 한 사람의 부활, 곧 예수님의 부활로써 이미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종말이 당대에 완결되리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종말의 완결이 예상과는 달리 계속 늦어지면서 신자들 사이에서 혼란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이 혼란을 예상하신 듯 가르침을 주십니다. 밖에 나갔던 주인이 언제 돌아오더라도 맞이할 수 있도록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 도둑이 예상치 않은 때에 오듯이 사람의 아들도 그렇게 올 것이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종말의 때에 연연하지 말고 착실히 준비하는 것, 매일 충실하게 하느님의뜻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 예수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시간표와 우리의 시간표는 다릅니다. 비록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바가 우리가 기대하는 시간에 이뤄지지 않는다고 해도 그분의 섭리를 믿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과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고 한 하느님 약속의 실현이 아득히 멀게 보여도 굳게 믿고 기다렸다. 또한,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은 하느님이 약속하신 “해방의 날 밤” 을 굳게 믿고 기다렸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과 시간은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고 하시면서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마르13,33) 하고 당부하십니다. 하느님 아버지만 아시는 종말의 때가 언제 오든 상관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 깨어 매 순간 충실하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비록 세상 종말을 체험할 수 없더라도 우리 각자의 마지막 시간에 종말에 오실 주님을 만나게 될 것. 지금의 이 시간을 충실히 살아간다면, 언제 죽음이 오더라도 두려움 없이 담담하게 맞이할 수 있을 것. 실제로 초대교회 신자들은 주님이 오시는 때를 구원의 날로 고대하면서 “주님 오소서.” 라는 뜻의 “마라나 타!”(1코린 16,22) 하고 기도하였다. 우리도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사랑 실천이란 띠를 허리에 매고, 믿음과 희망의 등불을 켜놓고 있는 신앙인, ‘깨어 준비하고 있는 신앙인’ 이 되도록 합시다. 하느님의 뜻대로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변함없으신 그리스도 주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면서 우리들이 바라는 소망을 이루어지고, 또한 몸과 마음이 낫게 되는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우리의 최대의 영광은 한 번도 실패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패할 때마다 일어서는 데 있다.'' - 공자 - |
♡2030회 사랑은 성령이십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3월 10일(루카복음 2장~ ) A. 링컨은 ''성경을 늘 펴고 있으라. 그대의 천국 가는 길도 늘 펼쳐져 있을 것이다.'' 《강렬하게 아주 강렬하게 살아라》어떤 행동이든 주의 깊게 한다면, 당신의 삶은 아주 부드러운 입김을 받게 된다. 당신은 완전히 현재를 살게 되며, 자신이 대하는 사물과 하나가 된다. 하지만 이는 간단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매일 연습을 해야만 얻을 수 있다. 주변에 있는 창조물들을 보며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눈에 들어오는 것을 관찰하고 그 진정한 깊이를 느끼면 된다. 그러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환희를 느낄 수 있다. 우리는 봄바람을 인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해 마음에서 환희를 느낄 수 있다. 이때 강렬한 삶의 기쁨이 우리를 찾아온다. 주의 깊게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집중하는 훈련만이 아니라 행복을 찾아나서는 일이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필요하다고 믿는가? 그것은 오해다. 누구나 주의력만 있다면 행복해질 수 있다. 생활 속에서 인지하는 모든 것에 감사하라! 그러면 건강한 눈은 행복의 원천이 된다. 우리의 눈은 날마다 놀라운 사물들을 관찰하고 있다. 하지만 매일 일어나는 기적들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주의 깊게 인지하는 연습이 반드시 필요하다. -안젤름 그륀 신부 -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2005)는 군대의 모습을 매우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말년 병장 유태정은 선임과 후임들에게 신망이 높은 군인입니다. 그런데 이승영이란 명문대 출신 신병이 들어옵니다. 그는 이등병임에도 군대의 부조리한 면을 뜯어고치겠다고 선배에게 대들고 사고를 칩니다. 태정은 자신이 욕을 먹어가면서까지 끝까지 친구를 감쌉니다. 그런데도 승영은 전혀 고마워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친구가 걱정되면서도 태정은 제대합니다. 승영이 어느 정도 선임이 되자 부조리하다고 여겼던 군 생활에 아주 잘 적응합니다. 선임에게는 아첨을 떨면서 후임도 최대한 잘 대해주려 노력합니다. 그런데 윤종빈이란 신병이 자신의 부사수로 들어옵니다. 그도 어리바리하고 사고뭉치입니다. 승영이 그를 잘 대해주려고 노력했지만, 그의 사고는 늘어만 갑니다. 종빈 때문에 선임들에게 계속 욕을 먹어가며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릅니다. 그런데 종빈이 여자친구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듣게 된 후로 병영에서 걸어가며 담배를 피웁니다. 군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승영은 자신이 후임 때문에 더는 피해를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마음먹고 그를 야단칩니다. 믿을 사람이 유일하게 사수뿐이었던 그는 자살을 선택합니다. 죄책감을 느낀 승영이 자신의 사수였던 친구 태정을 찾아갑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이 아님을 인정받기 위해서 입니다. 물론 태정은 그럴 수 있다고 말해줍니다. 계속 “내 탓이 아니다.”, “상관없다.” 라고 말하는 승영의 태도에 태정도 짜증을 냅니다. 태정이 미안해서 다시 돌아왔을 때는 승영도 자살하고 난 뒤였다. 오랜 시간 사귀었어도 여전히 남남 같은 사람이 있지만, 어떤 사람은 잠깐 만나고도 친근한 사람처럼 느껴지는 일도 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친교는 지금 이 순간 사랑이 흘러야 합니다. 사랑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이 흐르지 않는 친교는 친교가 아닙니다. 교회는 성령을 통해서만 참다운 친교와 인간관계가 맺어진다고 가르칩니다. 문제는 지금 이 순간 성령을 어떻게 흐르게 할 수 있느냐는 것.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군대 문화’ 에서는 사랑이 흐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선임 후임이 즐겁게 다시 만나는 경우는 흔하지 않습니다. 그때 함께 지내기는 했지만 결국 자신이 손해를 입는 상황이 되면 자신을 지키기 위해 화를 내고 심지어는 구타까지 하는 일도 있다. 자신에게 화를 내고 갈구며 때리기까지 한 사람과 이후에 어떻게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성령을 교회에 흘려보내 주시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우선 당신과 사도들 사이에 성령의 중개가 필요함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친교를 맺게 해 주시는 주체는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런데 성령의 본성은 ‘겸손’ 입니다. 같은 하느님 가운데서 가장 겸손하신 분을 찾으라면 성령님이라 해야 할 것. 물론 하느님은 세 분 다 완전하신 분이시지만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성자는 아버지께 순종하시지만 성령님은 아버지와 아드님께 순종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겸손하신 분이 교만한 사람을 통해 흐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당신 마음을 어떻게 만드셨을까요?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십니다. 군대 문화 안에서는 사람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기 매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성령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 을 통해 흐릅니다. 이탈리아 ‘폼페이’ 라고 하는 곳은 2,000년 전에 매우 번성하고 타락한 도시였다. 화산이 갑자기 폭발하여 화산재로 오랜 기간 덮여 있다가 최근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입니다. 그 오래 전에 이 도시엔 이미 수도관이 있었다. 그런데 수도관을 잇는 곳은 납으로 봉해져 있었다. 납중독을 모르던 때라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 그래서인지 이 도시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40살이 안 되었다고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성령께서 세상 끝까지 흐르십니다. 성령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따라 흐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며 그 모범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중간중간 가리옷 유다처럼 자신이 흘려보내야 하는 성령을 통해 이웃을 납중독으로 만드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우선 그런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또한, 전혀 변하려 하지 않는 그런 사람에게 모든 에너지를 쏟을 필요도 없다. 나의 마음이 이웃들 앞에서 온유함과 겸손함을 잃어갈 때 그런 납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만약 그렇게 끝나버린다면 그는 이 세상에서도 외로울 것이고 영원히 그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우리들이 뱀처럼 간사한 사람을 만나고, 독처럼 위험한 일을 만날 때,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할 것이다.’라는 확실한 믿음으로 하느님께 의지하면서 견디어 승리하는 은총과 축복이 함께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두 가지, 세 가지 일로 마음을 두 갈래 세 갈래 내는 일이 없어야 한다.'' - 퇴계 선생 - |
♡2031회 하느님 생각하지 않고 나혼자 힘으로 해보겠다고 기를 쓸때, 그 투쟁은 백전백패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3월 11일(요한복음 11장~ ) 리셀 왈도 에머슨은 "인생은 인내와 경각심의 조화이다." 《더 보고 더 생각하게 하소서》 똑똑한 사람 좋은생각하면 잘난척 한다고 활기찬 사람 열심히 일하면 설친다고 침착한 사람 신중히 처신하면 느림보라고 능력있는 사람 앞서감을 욕심쟁이라고 박력있는 사람 과감함은 무식하다고 자상한 사람 섬세함을 째째하다고 비난하지 않게 하소서 더 보고 더 생각하게 하소서 모두가 소중함을 깨닫게 하소서. 면담을 청하는 분들을 살펴보면 참으로 어렵게 살아가시는 분들이 넘쳐납니다. ‘빛좋은 개살구’ 라고, 바야흐로 국민 소득 삼만불 시대라지만, 내게는 조금도 해당되지 않는 남의 나라 일처럼 느껴집니다. 티브이만 켜면 금수저·다이아몬드 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분들의 럭셔리한 생활상이 지금 이 순간의 내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어, 더욱 큰 참담함을 느낍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조금 뒤쳐졌다는 이유로,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조금 특별하다는 이유로, 조금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주류사회로터 멀리 동떨어져 외롭게 살아가시는 분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냉정한 세상과 몰지각한 인간들로부터 씻을수 없는 상처를 받고, 그저 홀로 묵묵히 감내하는 분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요. 갑작스레 다가온 심각한 병고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갑작스런 사별 앞에서 힘겨워하는 분들의 고통과 상실감은 또 얼마나 큰 것인지요? 그 어떤 인간적 위로의 말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한번 헤어나보려고 아무리 발버둥쳐봐도 여의치가 않습니다. 다행히도 우리 주님(총고해, 면담)이 계십니다. 세상과 인간으로 부터 깊은 상처를 받고,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는 분들께서 언제든지 찾아가, 마음껏 털어놓고, 때로 부르짖고 외칠 수 있는 대상, 좋으신 우리 주님(총고해, 면담)이 계시고, 매달릴 수 있는 우리 어머니, 성모님께서 계신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르겠다. 하루 하루가 전쟁터요,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위를 걸어가고 있는 형제ㆍ자매께서, 그나마 주님 앞으로, 성체 앞으로 나아가셔서, 잠시나마 위로를 받고 마음을 추스르는 모습을 보고 참 기뻤다. 진심으로 칭찬해드렸다. “정말 훌륭하십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주님께서 형제ㆍ자매의 슬픔을 함께 느끼고 계시고, 형제ㆍ자매가 흘리는 눈물을 보시고 함께 눈물 흘리고 계실 것입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헤어날 수 없는 올가미 같은 상황 앞에서, 꼬이고 꼬인 복잡한 인생사 앞에서 우리는 너무 쉽게 답이 없다고 단정합니다. 이제 끝인가 보다 하고 포기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절대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되겠다. 정답은 있다. 그 정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우리 주님의 크신 사랑 안에 머무는 것. 보잘것 없고 비참한 내 인생사 안에 주님께서 현존하심을 굳게 믿는 것. 지금 이 순간 주님께 도움의 손길을 청하는 것. 지금 이 순간 인간의 시계를 꺼버리고 주님의 시계를 작동시키는 것. 지금 이 순간 주님의 시간을 기다리는 것.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요한 복음 15장 9~10절)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그 극심한 십자가 죽음을 몸소 겪으셔야 했지만, 아버지께 대한 굳건한 신앙과 사랑으로 그 모진 고통을 이겨내셨다. 그분 머릿 속에는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사랑이신 아버지께서는 절대로 나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이다.’ 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결국 사랑은 죽음조차 이겨내게 한 원동력이 된 것. 이 세상 살아가면서 우리가 겪게 되는 견딜 수 없는 수모와 상처가 다가올 때마다, 사방이 가로막힌 막다른 길 앞에 설 때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극진한 사랑을 기억해야겠다. 우리 교회는 상처입은 어린 새 같은 수많은 영혼들을 위로하고 지지하고 격려하기 위한 노력에 더 매진해야 겠다. 지금 이 순간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고, 지금 이 순간 한걸음만 더 앞으로 나아가 보라고, 지금 이 순간 힘내라고, 지금 이 순간 기도하겠노라고, 지금 이 순간 함께 길을 걷겠노라고 외쳐야겠다. 교회 공동체에 대한 멋진 정의를 보고 크게 공감한 적이 있다. ‘세상의 박해와 미움, 하느님의 위로와 격려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가는 양떼들의 모임.’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 여정에 하느님께서 분명히 우리 한 가운데 굳게 현존하심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동시에 세상과 적대자들로부터 받게 되는 멸시와 수모 역시 기정 사실입니다. 고통과 시련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 것이지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요한 복음 15장 18~20절) 결국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지상 여정을 나아가는 동안 겪게 될 다양한 고통과 시련 앞에서 너무 괴로워하지 말아야겠다. 박해와 미움 앞에서 너무 분노하거나 집착하지 말아야겠다. 그보다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봐야겠다. 발끝만 바라보지 말고 멀리 피안의 언덕을 바라보며 큰 호흡을 지녀야겠다. 우리보다 먼저 고통과 시련을 겪으신 예수님을 기억해야겠다. 구태와 오랜 악습에 도전하는 선구자들은 어쩔 수 없이 세상의 미움을 받게 됩니다. 본질이나 핵심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는 유다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얼마나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지? 낱낱이 고발하셨다. 그결과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것을 변혁시키는 사랑의 중심이 되신 반면 유다인들은 현실에 안주하기를 원했다. 예수님에 대한 미움과 박해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그분을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세상의 박해와 미움 역시 당연한 것. 물론 우리 교회가 지닌 결핍과 과오, 수치스런 오점으로 인해 세상의 미움과 박해를 받을 가능성도 많다. 우리 교회가 하느님께 충실하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게 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에 직접 참여하게 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주변 강대국의 위협으로 인해 큰 위기에 처한 유다왕 여호사팟은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은 후 열렬한 기도를 하느님께 올립니다. “하느님, 저희를 치러 온 저 큰 무리를 대적할 힘이 저희에게는 없습니다. 저희는 어찌할 바를 몰라 당신만 바라볼 뿐입니다.”(2역대기 20장 12절) 그러자 예언자 야하지엘이 일어나 이렇게 외쳤습니다. “저 큰 무리 앞에서 두려워하지도 당황하지도 마라. 이 전쟁은 너희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다. 이 전쟁에서 너희가 싸울 것이 없다. 제 자리를 지키고 서서, 주님이 너희에게 승리를 가져다주는 것을 보기만 하여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두려워하지도 당황하지도 마라. 내일 그들에게 맞서러 나가라. 주님이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2역대기 20장 15~17절) 지금 이 순간 교회에 주어지는 중요한 과제가 한 가지 있군요. 어떻게 하면 우리의 투쟁을 하느님의 투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것. 하느님 생각하지 않고 나혼자 힘으로 해보겠다고 기를 쓸때, 그 투쟁은 백전백패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하느님께 고정시킬때,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의식할 때, 교만이나 자만심에 빠지지 않고 겸손하게 하느님의 도움을 청할 때, 그 투쟁은 나의 투쟁이 아니라 하느님의 투쟁이며 백전백승입니다. 너무 화가 나고 억울하지만, 그런 생각들까지도 다 털어 버리고 “예수님의 용서로... ” 라는 마음으로 어느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는 주님 햇살 가득한 우리들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성공이란 열정을 잃지 않고 실패를 거듭할 수 있는 능력이다.'' - 윈스턴 처칠 - |
♡2032회 ‘섬기는 사랑’ 실천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3월 12일(사도행전 27장~ ) 한나 아렌트는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 《나 더하기 하나》내가 가진 것과 당신이 가진것을 더하면 그것은 만남 입니다. 내가 가진 것에 당신이 가진 것을 빼면 그것은 그리움인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과 당신이 가진 것을 곱하면 그것은 행복이며, 내가 가진 것에 당신이 가진 것을 나누면 그것은 배려 입니다. 그리고 내가 가진 것과 당신이 가진 것을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어도 하나라면 그것은 바로 사랑 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마태 13,54-55)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태 13,57) 마태오복음에서는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리켜서 ‘목수의 아들’ 이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마르코복음을 보면 ‘목수’ 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 (마르 6,3) 우리가 ‘하느님의 아드님’ 이라고 믿고 있는 예수님은 인간 세상에서는 목수의 아들이었고, 목수였다. 그런데 그 당시 그 지역에서는 목수는 가장 낮은 계층에 속한 사람이었다. ‘하느님의 아드님’ 이라는 가장 높은 위치와 ‘목수의 아들’ 이라는 가장 낮은 위치는, 인간의 시선에서는 글자 그대로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는 위치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족보를 보면, 요셉은 다윗 왕의 후손입니다.(마태 1,16) 말하자면 요셉은 혈통과 신분으로는 고귀한 ‘왕족’ 입니다. 현실적으로는 가장 낮은 계층 사람인 가난한 목수였을 뿐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요셉의 직업만 보았고, 그의 혈통은 무시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난한 목수 요셉의 아들로만 생각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직업이 목수였다는 점보다는,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다는 점이 더 중요합니다. 그 일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찬양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예수님께서 목수의 아들이며 목수로 사신 것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 께서 어떤 목적이 있어서 ‘가장 낮은 곳’ 으로 내려오신 일입니다.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이신 것은 ‘가장 낮은 삶’ 을 취하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셔서 가장 낮은 삶을 취하셨을까? 그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 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내려가 주는 사랑’ 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은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 주는 것’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올라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당신이 나에게로 내려오셨는데, 그냥 내려오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나를 섬기려고 나보다 더 낮은 위치로 내려오셨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을 본받아서 ‘섬기는 사랑’ 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 노동은 신성하다.” 같은 상투적인 말만 할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을 낮추고 이웃을 섬기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4-15) 우리는 예수님의 직업만 보고 예수님을 배척한 나자렛 사람들처럼 되지 말아야 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라는 나자렛 사람들의 말에는 목수에 대한 천대와 멸시가 들어 있다. 나자렛 사람들은 아마도 “목수는 목수 일만 해야 한다.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은 하지 마라. 목수 따위가 어찌 사람들을 가르치는가?” 라는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나쁜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은 오늘날에도 흔히 볼 수 있다.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교회의 부자 신자들을 엄하게 꾸짖은 일이 있다.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여러분은 먹고 마실 집이 없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1코린 11,20-22) 교회 안에서든지 밖에서든지 간에 부자들끼리만 어울리면서 가난한 이들을 소외시키는 것은, 하느님께 큰 죄를 짓는 일입니다. 야고보서에는 사람을 차별하는 죄를 짓는 자들을 꾸짖는 말이 나옵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가령 여러분의 모임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누추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온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하거나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 한다면,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야고 2,1-4) 야고보서 저자는 ‘가령’ 이라고 말하면서 예를 들어 말하는 것처럼 표현했지만, 사람을 차별하는 일은 하나의 예가 아니라, 인간 세상에서 늘 실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지위, 직업, 재산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일 외에도 남녀차별, 인종차별, 민족차별 등도 많다. 예수님께서는 인간 세상에서 차별 당하는 ‘작은 이’ 로서 오신 분입니다.(마태 25,40) 지금 이 순간 내가 차별하고,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그 ‘작은 이’ 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일 수도 있다.” 가 아니라, “예수님이다.” 입니다. 루카복음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에 나오는 ‘라자로’ 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불우이웃 돕기’ 는, 위에 있는 내가 나보다 아래에 있는 이들에게 무엇인가를 베풀어주는 일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려고 오신 주님께 감사드리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 생색내거나 자랑할 일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우리 자신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참 좋았다.’ 라는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뜻... 내가 있는 자리에서... 이미 내 안에 있는 그 하느님의 사랑으로 어느 누군가에게 ‘행복감’ 을 줄 수 있는 것이 천국임을 새삼 깨달을 수 있는 은총과 축복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음(陰)만으로서는 만물을 낳을 수가 없고 양(陽)만으로서도 될 수 없는 것이다. 음양이 함께 상응해야 되는 것이다.'' -잡편 - |
♡2033회 ''결혼할 때는 세 번 기도한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3월 13일(코린토1서 14장~ ) 빌 게이츠는 ''친절과 관용에 관한 낡은 생각들은 그저 우리 세계에서 반드시 제거해야 할 오류일 뿐이다. 그리고 이 차갑고 무정한 기계들이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줄 것이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자세》맺고 끊음이 분명한 사람은 바쁜 듯 보여도 늘 마음에 여유가 있다. 반면 매사에 우물쭈물하고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은 한가한 것처럼 보여도 속은 항상 바쁘고 피로가 쌓여 있다. 무슨 일이든 여유를 갖고 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자세다. 평소에 대책을 세워두지 않고 걱정만 하다가 정작 일에 직면해서야 갑자기 법석을 떤다면 공연히 괴로움만 더해질 뿐이다. 우리 민족의 결혼 풍습 중에 혼례를 앞두고 신랑측에서 신부측에 보내는 함 속에는 붉은 비단 한 감과 푸른 비단 한 감 그리고 청색과 홍색 명주 실타래로 묶은 채단(采緞)이 들어 있는데 거기에는 부부의 연을 맺는 신랑 신부에게 주는 소중한 교훈이 담겨 있다. 붉은 비단과 푸른 비단은 물론 청실과 홍실 역시도 신랑 신부를 상징하는데, 비단이라는 것이 명주실을 한 올 한 올 엮어서 만들어지는 만큼 신랑 신부도 이제는 부부로서 각자가 한 올 한 올씩 서로를 엮어가며 비단이라는 가정을 만들어 가라는 기원을 담고 있다. 또한 청홍색의 비단 천을 굳이 청홍색의 명주 실타래로 묶는 까닭은 명주실이 지닌 특성 때문인데, 여기에도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우선 명주실은 질겨서 잘 끊어지지 않는데, 마찬가지로 이제 신랑 신부가 부부라는 끈으로 연결되는 만큼 질긴 명주실처럼 죽는 날까지 한 몸을 이루며 살라는 것. 또한 명주실은 쉽게 잘 엉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엉킨 부분을 조금만 인내를 가지고 한 올씩 풀어나가면 쉽게 풀리는 것이 특성이다. 부부간에도 함께 살아가는 가운데 많은 일을 겪으면서 서로 엉키고 꼬일 때가 있기 마련이지만, 그럴 때도 부부가 함께 인내를 가지고 차분하게 하나씩 풀어나간다면 엉켰던 명주실이 풀리듯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것. 하지만 엉킨 명주실을 풀려고 하다가 잘 안 된다고 해서 조급한 마음에 가위나 칼로 잘라버린다면 결국 실타래를 망가뜨릴 뿐이다. 이와 같이 부부간에도 서로 엉키고 부딪치는 일이 있어도 그 인연의 끈을 끊어버리고 갈라서려 한다면,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상처와 아픔만 남길 뿐이다. 사실 요즘 많은 부부들이 쉽게 갈라서는 안타까운 현실을 보면서 함 속에 들어 있는 채단에 담긴 교훈이 새삼 귀중하게 여겨진다. 철학자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지혜롭고 의롭고 착한 사람을 소크라테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불행하게도 결혼만은 잘하지 못한 것 같다. 그의 아내 크산디페는 세기의 악처로 이름이 나 있다. 물론 집안 살림에는 관심도 없는 남편을 좋아할 아내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남편에게 바가지는 예사이고 심지어는 때리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태산 같은 인내심으로 이겨 나갔다. 하루는 아내가 마구 욕을 해 대다가 아무 대꾸를 하지 않는 소크라테스로 인해 화가 풀리지 아니하자 걸레를 빤 물을 남편의 머리에 끼얹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태연하게 “뇌성벽력이 대단하더니 종래는 비가 오고야 마는군.” 하였답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부부간에 크고 작은 고민거리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나 참고 견디면 성공하는 것이요, 인내하지 못하면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없는 것. “남편 된 사람은 자기 아내를 자기 몸같이 사랑하고, 아내 된 사람은 자기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에페 5,33) “결혼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인데 아내는 남편과 헤어져서는 안 됩니다. 만일 헤어졌거든 결혼하지 말고 혼자 지내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 남편과 다시 화해해야 합니다. 또 남편은 자기 아내를 버리면 안 됩니다.”(1고린 7,10-11) 서로간의 관계 안에서도 신의를 지키고 부족함을 가슴에 담을 수 있는 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무던히 참아주고 변화를 기다려주는 넉넉함이 우리를 풍요케 할 것. 헤어지자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겠다. “전쟁터에 나갈 때는 한 번 기도하고, 바다로 항해를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며, 결혼할 때는 세 번 기도한다.”(러시아 속담)고 했다. 결혼해서 일생을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나 풍랑이 몰아치는 험한 바다보다도 더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 순간 기도하며 애쓰지 않으면 서로의 다른 점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인생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삶으로 엮어야 하겠다. 지금 이 순간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시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미술관에 가면 작품에 대한 설명을 볼 수 있다. 설명을 보면서 분명히 지식과 견문을 넓힐 수 있을 것. 그런데 때로는 이 설명의 틀에 갇히면서 작품의 깊은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하더군요. 왜냐하면 나만의 느낌과 감정도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찾아보는 작가의 의도 역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설명 안에 갇히게 되면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구나.” 라면서 생각의 지평을 닫아 버리고 맙니다. 독일 뒤셀도르프의 미술관 ‘인젤 홈브로이히’ 에는 어떤 설명도 붙어있지 않다고 합니다. 작품 자체를 경험하게 하려는 취지입니다. 그래서 설립자 칼 뮐러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모든 걸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랑, 인생, 당신의 아이들은 설명될 수 없다.” 설명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다. 특히 인간관계는 절대로 설명되기 힘든 부분입니다. 그러나 설명되어야 한다고 자기 틀에 그 설명을 맞추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설명되지 않아도 괜찮은, 그래서 더 성장할 수 있는 우리를 서로가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되는지에 관해 묻습니다. 사실 이혼에 관한 율법은 십계명 안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단지 신명기(24,1-4)에 이유만 닿기만 하면 여자를 내몰 수 있었고 그때 이혼장을 써주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유배 생활을 거치면서 결혼을 일종의 매매 계약으로 여기게 된 것.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이 되었고, 여자는 재산 소유권과 상속권이 없었다. 이혼할 수 있는 권리도 없었다. 제대로 된 혼인법이 아닙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만드신 남녀 결합의 근본이념에도 어긋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못된 혼인법을 없애고 하느님의 원래 뜻으로 되돌리려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우리가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하느님의 뜻에 맞는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를 늘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자신이 이해할 설명을 상대방이 해야 한다고만 생각합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으면 상대방이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적인 설명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부부관계를 비롯한 모든 인간관계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노력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매순간 우리들이 “살아있음에 감사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아멘. 알렐루야’ 하면서, 언제 어디서나 참고 견디면, 특히 어렵고 힘든 순간들이 변하여 축복이 되는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죽음이 아닌, 삶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큰 불행이다." - 아모스 레드클레프 - |
♡2034회 자기 연민에 빠지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더 힘들답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3월 14일(티토1서 1장~ ) 파스칼은 ''습관은 제二의 천성으로 제一의 천성을 파괴한다.'' 《고통 속에서도 행복을 예감할 수 있다.》일이 순조롭게 풀리지 않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진심을 오해하여, 삶을 지탱하는 힘을 잃어버릴 때 나는 지금 잘 못살고 있는 것일까? 빛과 어둠, 기쁨과 고통은 모두 우리 삶 속에 숨어 있다. 이러한 대립된 요소를 받아들이고 화해를 할 때 비로소 삶의 가치도 인정하게 된다. 성공과 실패, 빛과 어둠, 기쁨과 고통이 두루 있는 삶이야말로 정말 멋진 삶이다. 삶의 비밀을 찾기 위해 눈앞을 직시하고 때로는 경이로운 마음으로 뒷걸음질 치는것 이 모든 것이 우리 삶을 흥미롭게 만든다. 이는 또한 행복으로 가는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행복이란 충만한 삶의 표현이다. 만일 당신이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삶을 받아들이면 생동감 속에서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 행복이란 꼭 붙들어 둘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는 삶도 마찬가지이다. 삶은 항상 흘러간다. 어둠침침한 계곡을 통과할 수도 있고, 가파른 폭포를 만날 수도 있다. 고통 속에도 삶이 있다. 언제 어디서나 모든 것에서 행복을 예감할 수 있다. 삶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행복을 예감할 수 있다. -안젤름 그륀 신부- 어느 동네에 두 집이 가까이 살고 있었다. 한 집은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대가족이었고, 다른 한 집은 젊은 부부만 사는 가정이었다. 이상하게도 대가족이 사는 가정은 항상 화목하여 웃음꽃이 피는데, 부부만 사는 가정은 부부싸움이 잦았다. 젊은 부부는 이웃집의 화목한 모습을 보고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우리는 둘만 사는데도 매일 싸우고, 이웃집은 여럿이 함께 모여 사는데 저토록 화목한 것일까? 그래서 어느 날 젊은 부부는 과일 한 상자를 사 들고 이웃집을 찾았다. 다과를 나누며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댁의 가정은 대가족인데도 웃음이 떠날 줄 모르고, 우리는 둘만 사는데도 매일 싸우는데, 선생님 댁이 그렇게 화목하게 지내시는 비결이 무엇인지요?" 이웃집 주인이 대답했다. "아. 네! 그것은 당신네 두 분은 모두 훌륭하시고, 우리 가족은 모두 바보들이기 때문이죠!" 그 말을 들은 젊은 부부는 되물었습니다. "아니 그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그러자 그 집 주인은 말하기를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입니다. 내가 출근하다가 물을 엎질렀습니다. 그때 나는 내 아내에게 내 부주의로 물을 엎질러 미안하다고 하며 용서를 청했지요. 그랬더니 내 아내는 '아니예요' 하면서 생각이 모자라 물그릇을 그곳에 놓아두었으니 자신의 잘못이라고 하며 오히려 나에게 용서를 청했습니다. 그런데 옆에 계시던 저의 어머니께서는 '아니다, 나잇살이나 먹은 내가 그것을 보고도 그대로 두었으니 내 잘못이다' 하셨습니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위해 바보가 되려고 하니 싸움을 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말했다. 모든 조직이 똑똑한 사람들의 의해서 움직이고 성장하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은 바보처럼 우직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며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의 의해서 유지되고 성장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뉴톤, 아인슈타인, 백남준, 스티브 잡스 등 모두가 대단한 성과를 이룬 천재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바보라는 소리를 듣거나 또라이, 이단아로 불리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큼니다. 정용철의 '사랑의 인사' 에 나오는 말을 소개합니다. "다른 사람을 높이고 나를 낮추면 손해보는 것 같다. 남을 배려하고 남 뒤에 서면 뒤쳐지는 것 같다. 양보하고 희생하면 잃기만 하고 얻은게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바보라 부릅니다. 정말 그럴까요? 짧게 볼 때는 바보 같지만 길게 보면은 이런 사람이야 말로 삶의 고수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이러한 사람이 남에게 인정 받고 좋은 사람이라 불립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빛나는 멋진 바보가 되어 보십시요. 양보하고 희생하는 그들이 세상을 아름답게 합니다." 세계적인 성악가 테너 '앙드레 보첼리(Andrea Bocelli)' 人間勝利를 自述한 생애사입니다. 제 이름은, Andrea Bocelli 1958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죠. 부모님은 포도와 올리브 농사를 지으셨지만, 음악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저는 여섯 살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고 플루트와 색소폰도 배웠죠. 전 노래 부르기를 가장 좋아했구요, 축구도 아주 좋아했어요. 열두 살 때 일이예요. 친구들과 축구를 하다가, 그만 공에 눈을 강하게 맞고 말았어요. 좀 아프고 말 줄 알았는데, 며칠 뒤 눈이 완전히 안보이게 되고 만거죠. 가족들과 친구들 모두 슬퍼했어요. 그때 전 어렸지만...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딱 한 시간만 울자. 그리고 이 어두운 세계에 빨리 적응하자구요. 부모님은 말씀하셨어요. 눈이 보이지 않으니, 힘을 길러야 한다구요. 법학도가 되는 것이 어떻겠나고 하셨죠. 전 열심히 공부해서 피사 대학에 진학해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어요. 변호사로 일하게 됐을 때 부모님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기뻐해주셨어요. 모두들 저를 가르켜 ‘인간승리’ 라며 추켜 세워주더군요. 하지만 전 즐겁지만은 않았어요. 제 마음 깊은 곳에서 정말 하고 싶었던 게 있었거든요. 바로 성악이었다. 제가 다시 음악을 하겠다고 하자, 모두 저를 만류했다. 시력장애인으로 대중 음악가라면 모를까, 클래식 음악을, 그것도 오페라를 한다는 건 불가능할거라고 말이죠. 그러나 전 제 꿈을 이루기 위해 뜻을 굽히지 않았어요. 정통 성악 수업을 받았고 전설의 테너라 불리던 프랑코 코렐리 선생에게 음악 지도를 받았다. 물론 클래식 음악가에게 있어 악보를 볼 수 없다는 거. 그게 치명적인 결점이었지만 악보를 머릿속에 모두 집어넣으려 애썼다. 얼마 뒤 제 평생 꿈이었던 오페라 무대에 서는 기회도 얻게 됐다. 오페라 라보엠이었어요. 어떤 비평가들은 오페라가 무슨 장난인줄 아냐며, 저를 비롯한, 무대를 준비한 모든 스탭들까지 싸잡아 비난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개의치 않았어요. 몇 번째 계단에서 어느 방향으로, 다시 몇 걸음을 더 걸어야 하는지, 언제 여자주인공을 쳐다보고 언제 손을 내밀어야 할지를 철저히 기억해서 움직였다. 공연이 끝나자 관객들은 기립박수를 쳤다. 제 바램대로 관객들은, 시각장애를 가진 성악가가 아닌 라보엠의 주인공 로돌포로 공연에 몰입할 수 있었던 거죠. 저를 비난하던 비평가들도 “완벽한 공연이었다.” 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제가 시력을 잃었을 때~ 두려움과 절망의 눈물을 흘리는데 필요한 시간은 꼭 한 시간이었어요. 그리고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덴 일주일이면 충분했지요. 자기 연민에 빠지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더 힘들답니다. 슬픔을 빨리 극복할수록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이는 힘이 강해진다는 거~ 잊지 마셨으면 좋겠어요. 하느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여... 자신의 봉헌과 기도가 누구에게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로 살아가시는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위대한 성취를 하려면 행동하는 것뿐만 아니라, 꿈꾸는 것도 반드시 필요하다.'' - 아나톨 프랑스 - |
♡2035회 ''실수로 길을 잃은 건지 고의로 뛰쳐나온 건지'' 다르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3월 15일(요한묵시록 1장~ ) 라 브뤼에르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오랜 인내를 하기보다는 노력을 하는 편이 쉽다. 성공에는 두 가지 길밖에 없다. 하나는 자신의 근면, 하나는 타인의 어리석음.'' 《인생을 위한 기도》남자는 마음으로 늙고 여자는 얼굴로 늙는다. 꽃 같은 인품의 향기를 지니고 넉넉한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언제나 청춘의 봄 날로 의욕이 솟아 활기가 넘치는 인생을 젊게 살아가게 하소서. 우러난 욕심 모두 몰아내고 언제나 스스로 평온한 마음 지니며 자기 인생을 사랑하며 살게 하소서. 지나간 과거는 모두 아름답게 여기고 앞으로 오는 미래의 시간표마다 아름다운 행복의 꿈을 그려 놓고 인생의 즐거움이 넘치게 하소서. 여기 저기 퍼지는 웃음소리가 영원의 소리가 되게 하소서. 자신이 살아오면서 남긴 징표를 고이 접어 감사한 마음을 안고 나머지 삶도 더 아름다운 마음 지니며 큰 기쁨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무조건 마음으로 모두 나누어주어 아무 것도 마음에 지닌 것 없이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사는 마음의 부자로 여기며 살게 하소서.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에서 우러난 근심 없는 시간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그게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게 하소서. 아멘. 예수님은 유다인들의 불신에 안타까운 심정으로 일침을 가하면서 당신을 소개하십니다. 예수님의 모든 언행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믿지 않으려는 유다인들에게 자신을 목자에 비유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유다인들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기다리던 메시아 그리스도께서 오셨는데도 불구하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거부하면서도 혹시나 진짜 메시아가 아닐까? 우리가 기다리던 그분이면 어떡하나? 하며 갈등과 두려움에 쌓여 있으면서도 결과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너희는 내 양이 아니기 때문에 나를 믿지 않는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내 양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라고 하십니다. 참된 목자는 자신에게 맡겨진 양을 한치의 소홀함 없이 사랑으로 돌보면서 마지막까지 아니 영원히 책임을 져 줍니다. 따라서 그 누구도 착한 목자와 함께 있는 양을 해치거나 빼앗아 갈 수가 없는 것. 착한 목자는 변함 없는 사랑으로 양들을 보살핍니다.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점은 변함없는 목자의 모습이 아니라 변화무쌍한 양의 태도입니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목자의 보살핌에 자신을 맡긴다면 너무나 안전하면서도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 좋은 양식을 충분히 먹고 즐겁게 뛰놀며 지낼 수 있다. 양은 목자의 목소리와 보살핌에 더더욱 귀를 기울이고 사랑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한다면 이 이상 더 부러울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양이 목자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보살핌을 참견이라 여겨 거부한다면 양은 머지않아 죽을 수밖에 없다. 죽기 전엔 생명의 위협을 무방비 상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두려움에 떨며 하루하루를 보낼 것. 그리고 양떼들 가운데서 가장 똑똑하고 건강하며 목자로부터 가장 사랑받고 있던 양이, 마음이 교만해져 우쭐되며 지내다가 ‘목장이 맘에 안 든다’ 며 투정부리거나 양이기를 거부하고 목자인 양 착각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생각하지 않아도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죽지 않는 한 다시 목자의 품에 돌아올 때까지 고통 속에서 지낼 수밖에 없지요. TV를 보며 부모와 자녀가 어쩔 수 없이 헤어져 20년 30년 이상 떨어져 살다가 어느 한편에서 찾으려고 노력한 끝에 상봉하게 되는 장면을 가끔 보게 됩니다. 헤어져 살 때 겪었던 서러움과 아픔들, 죄책감이 기쁨과 고마움으로 변해 부둥켜안고 웁니다. 정말 가슴 벅찬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이들에게는 나름대로의 어려움도 있겠지만 기쁨과 행복, 희망으로 살아가리라 여겨집니다. 이와는 달리 전혀 헤어진 적이 없는 가정 안에서 보면 부모는 자녀를 너무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자녀 마음에 들게끔 모든 것을 채워 줄 수는 없다. 형편이 어려워서이거나, 자녀 교육상 다 해 줄 수 없는 상황들이 있다. 이때 부모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부모처럼 좋은 부모가 되어 달라 요구하거나, 부모를 부모로 여기지 않고 집을 뛰쳐나간다면 부모의 심정은 찢어지게 아플 것이며, 자녀 역시 가정에 들어와 부모 품에 안길 때까지 고통 속에서 살수밖에 없는 것. 행복과 희망이 단절된 상태인 것. 실수와 고의는 분명히 다릅니다. 양이 실수로 길을 잃은 것과 지나친 의지로 거부하고 뛰쳐나가는 것은 차이가 큽니다. 실수로 인한 헤어짐은 목자가 끝까지 찾아 나설 것이며, 양은 목자의 음성과 비슷한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게 되며 결국 상봉의 기쁨을 나누게 될 확률이 아주 높다. 하지만 고의적인 헤어짐은 만날 확률이 아주 낮다. 서로의 고통만 가중될 뿐입니다. 기쁨과 행복을 찾고 누릴 수 있는 관건은 변함없는 착한 목자가 아니라 양이며 그 양은 바로 우리들인 것. 우리들은 하느님의 자녀로 불리움을 받았으며, 착한 목자이신 주님을 믿고 따르겠다고 약속하면서 세례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주님의 말씀을 잊거나 거부하며, 불평을 토로하면서 떠나가는 경우가 있다. 아직도 그러한 상태를 유지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유다인들과 흡사하다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유다인들에게 “너희는 내 양이 아니기 때문에 나를 믿지 않는다” 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을 아직 전해 듣지 못해서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이 문제가 아니라 세례를 통해서 약속한 우리들이 문제인 것. 우리는 흔히 ‘길 잃은 한 마리 양’ 의 비유를 놓고 잘못 판단하는 경우가 있다. 자기 스스로 고집을 부려 착한 목자의 곁을 떠나 놓고 “왜 목자는 나를 찾아 주지 않느냐?” 또는 “떠나지 않도록 말려주지” 라고 말도 안되는 이야기로 투정부리거나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한다면 아직 사랑 받을 자세가 안 된 것. 자신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인정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실수로 길을 잃은 건지 고의로 뛰쳐나온 건지를 말입니다. 우리를 사랑으로 창조하신 하느님과,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여과 없이 직접 우리에게 보여주신 예수님의 사랑은 같다. 우리가 불안과 불행을 극복하고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착한 목자이신 주님을 떠나서는 안될 것. 떠났다 하더라도 빨리 되돌아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착한 목자와 함께하는 충실하고 순한 양의 모습처럼 목자이신 주님을 굳게 믿으며 겸손과 순명으로 사랑하며 살아갑시다. 주님의 자비와 선하심이 크시기에 우리들은 주님의 날개 아래에서 고통 가운데 기쁨을, 어둠 가운데 빛을, 병 중에 치유의 은총과 축복을 받게 해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누군가를 원망하며 시간을 허비하기엔 인생은 너무나 짧다.'' - 일론 머스크 - |
♡2036회 ''싸워서 이기고 나면 손해 보는 싸움''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3월 16일(창세기 24 장~ ) 토마스 왓슨은 ''성경은 성령의 도서관이다. 그것은 하느님께 관한 지식의 총론서로 종교에 관한 세밀한 규범과 강령을 담고 있다. 또 그것은 그 안에 ‘우리가 믿어야 할 것들’과 ‘우리가 실천해야 할 일들’ 을 수록하고 있다.'' 《결심》우리가 살다보면 이웃과 다투는 경우도 있다만 다투고나서 또 그 다툼에서 이겼다고 생각되면서도 싸움은 필연코 손해(損害)보는 행동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 지난 날 마산교구성령봉사회 제대기도와 청주교구성령봉사회 수요치유기도회시 강의 한 내용을 이 시기에 다시 한번 묵상코자 하오니 하느님 일순위의 삶의 나침판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먼저 ''싸워서 이기고 나면 손해 보는 싸움 5가지'' 를 먼저 이야기 해야 하겠습니다.(강의때 셋째, 넷째 생략) 첫째; '아내' 하고 싸워서 이기면 확실하게 손해 봅니다. 남자의 기품(氣稟)도 떨어지고 아내가 가정(家庭)을 지옥(地獄)같은 분위기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둘째; '자식(子息)' 하고 싸워서 이기면 손해 봅니다. 자식을 이기면 자식이 곁길로 가던지 기(氣)가 죽는건은 필연(必然)입니다. 셋째; '언론(言論)' 하고 싸워서 이기면 손해 봅니다. 활자(活字)엔 마력(魔力)이 있기 때문입니다. 넷째; '국가(國家)권력(權力)' 하고 싸워서 이기면 손해 봅니다. 권력이란 백성(百姓)이 위임(委任)해 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하늘(의 뜻)' 하고 싸우면 손해 봅니다. 천국에 가지 못하고 지옥갑니다. 맹자(孟子) 글 중에도 ''순천자(順天者)는 흥(興)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亡)하느니라'' 했다. 이제, 꼭 이겨야 되는 싸움 5가지를 말씀드립니다. 첫째; '질병(疾病)' 하고 싸워 이겨야 하고, 둘째; '빈곤(貧困)과 가난' 하고 싸워 이겨야 하고, 셋째; '무지(無知)' 하시면 안됩니다. 넷째; ''시련(試鍊)' 과 싸워 꼭 이기십시오. 다섯째; '자기(自己)' 하고 싸워 이기는자는 인생 승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아무리 힘들어도 지금 이 순간 믿음을 가지고 행복(幸福)하다면 뭐든지 이겨낼 수 있을 것. 여기, ''행복(幸福) 구계명(九誡命)'' 이 있다. 아래의 내용을 실천 할 수 있으면 당연히 행복한 사람입니다. 1)'지금 이 순간 사랑' 하십시오 : 세상 모든 것을. 2)'지금 이 순간 건강(健康)' 하십시오 : 항상, 늘~ 언제든지. 3)'지금 이 순간 친절(親切)' 하십시요 : 누구에게나. 4)'지금 이 순간 용감(勇敢)' 하십시요 : 어떤 일에 있어서나. 5)'지금 이 순간 효도(孝道)' 하십시요 : 부모님께. 6)'지금 이 순간 노력(努力)' 하세요 : 살아 있는 날까지 7)'지금 이 순간 진실(眞實)' 하세요 : 언제 까지나 8)'지금 이 순간 겸손(謙遜)' 합시다 : 모든 일에 9)'지금 이 순간 밝게 웃으십시다' : 슬플 때도 사랑이 가득하고 행복이 풍성한 하느님 일순위의 천국의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성령은 성부께로부터 나오신 하느님의 영, 진리의 영이라고 불리웁니다. 그분의 합당하고 특유한 이름은 위로의 영, 근원이 되시는 영, 즉 성령이십니다. 성화를 추구하는 이들은 그분께로 향합니다. 거룩하게 사는 이들은 그분을 추구합니다. 그분은 당신 입김으로 그들에게 생기를 주시고, 그들이 생활의 목표를 이루는 데 도움을 주십니다. 그분은 거룩함의 근원이시고 우리 이해의 빛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이 진리를 발견하도록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비록 본성상 우리가 가까이 갈 수 없는 분이시지만 그 인자하심으로 인간은 그분을 자신 안에 모셔 들일 수 있습니다. 그분은 모든것을 당신의 힘으로 채우셔도 마음 준비된 이들에게만 당신을 나누어 주십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정도로 나누어 갖지 못하고 그분은 사람의 신앙에 비례하여 당신의 힘을 분배하십니다. 성령은 본질상 단순하시지만 베푸시는 은총의 선물은 다양합니다. 그분은 각자 안에 완전히 현존하시며 또 모든 것안에 완전히 현존하십니다. 모든 이에게 자신을 나누어 주시지만 나누임이 없으십니다. 이는 마치 그 한 피조물에게만 비추어 그 피조물에게만 혜택을 주듯이 땅과 바다를 비추어 주는 태양 광선과 같습니다. 이와같이 성령께서도 당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각 개인에게 마치 그 개인만이 있는 것처럼 현존하시지만, 모든 이에게 충분하고 완전한 은총을 나누어 주십니다. 사람들은 그분이 줄 수 있는 것을 다 받는것이 아니고 각 피조물들이 받을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은혜를 받아 누립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드높여지고 약한 자는 그분을 통하여 인도되며 거룩하게 사는 사람은 그분을 통하여 완덕에 이릅니다. 그분은 죄에서 벗어난 이들을 비추어주시고 당신과의 일치를 통해 그들을 영적인 사람들로 만들어 주십니다. 투명체가 태양의 빛을 받아 찬란하고 새로운 빛을 다른 것에게 전해주는 것처럼,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성령의 조명으로 영적이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은총을 발산합니다. 성령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미래를 예견할 수 있게되고 신비들을 파악하게 되어 감추인 것들을 이해하게 됩니다. 또한 영적 축복을 받아 천상 사물에다 우리의 생각을 고정시킬 수 있게 되며 천사와 더불어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쁨은 끝이 없고 신적 생명을 계속 누려 또한 하느님을 닮게 됩니다. 무엇보다 가장 고귀한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이 하느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언제 어디서나, 은총을 받을 때나 받지 않을 때도 그리스도의 증인답게 낮아지는 삶을 살면서 ‘내가 너를 내 아들과 딸처럼 사랑한다.” 라는 하늘의 소리를 듣게 되는 축복된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위대한 일들은 결코 단 한 번의 힘찬 발걸음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 윈스턴 처칠 - |
♡2037회 태풍에 뿌리가 뽑히는 것은 큰 나무이지 잡초가 아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3월 17일(탈출기 1장~ ) 호레이스 그릴레이는 ''정신적이건 사회적이건 간에,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감금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성경의 원칙은 사람에게 필요한 자유의 근본이다.'' 《가장 아름다운 약속》어느 교수가 강의 시간에 한 일화를 들려주면서 학생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한 쌍의 부부가 유람선을 타고 여행을 하다가 큰 폭풍으로 재난을 당했는데 그 배의 구조정에는 자리가 딱 하나만 남았다. 이때 남편은 부인을 유람선에 남겨두고 혼자 구조선에 올랐고, 부인은 침몰하는 배 위에서 남편을 향해 소리쳤다. 교수는 학생들에게 질문했다. “여러분, 그 상황에서 부인이 남편에게 뭐라고 외쳤을까요?” “당신을 저주해요!” “당신을 남편으로 선택한 내가 바보지!” “어디 얼마나 먹고 잘 사나 봐라.” 이때 한 학생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다른 학생들이 조용해질 때 그 학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교수님, 제가 생각했을 땐 아마 부인은 ‘우리 아이들을 잘 부탁해요’ 라고 했을 것 같아요.” 교수는 학생의 말에 깜짝 놀랐다. “너 이 얘기 어디서 들어봤니?” 학생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아니요. 저희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실 때 아버지한테 그렇게 말했어요.” 교수는 감격해서 말했다. “그래 정답이다.”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배가 침몰한 뒤 남편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와 자녀들을 잘 키웠고, 모두가 출가한 뒤 남편도 병으로 죽었다. 이후 자녀들이 부모님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아버지의 일기장을 발견했는데, 거기에는 부모님이 배를 타고 여행을 갔을 때의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그때 어머니는 중병에 걸려 있어서 그 여행은 부모님의 마지막 여행이었다. 그때 큰 폭우를 만나 사고가 발생했고 아버지는 자식들을 위해 살아야 할 수밖에 없었다는 내용이었다. 아버지의 일기장 마지막에 이렇게 쓰여있었다. “여보 미안합니다. 그때 당신이 등을 떠밀지만 않았다면 나도 당신과 함께 바닷속에 빠져 죽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던 나를 미워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남아있는 자식들 때문에 당신만 깊고 차가운 바닷속에 잠들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난 당신과의 약속으로 아이들을 잘 키워냈습니다. 그리고 이젠 당신을 만나러 갈 수 있어서 너무도 행복합니다.” 홀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속에 평생 살면서도 자녀들을 잘 키우겠다는 아내와의 약속을 꿋꿋이 지켜낸 남편의 사랑… 이처럼 사랑은 위대합니다. 사랑은 어떠한 절망도 고난도 슬픔도 넉넉히 이기게 합니다. 사랑한다는 그 자체 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 블레즈 파스칼 – 꼭 삶에서 기억 할 일-- 2,000 년전 화산재에 덮였던 봄페이는 원래 5만 여명이 살았었다. 비세비우스 산이 대 폭발이 있기전 화산 재가 조금씩 뿜어져 나오는 며칠 동안 노예와 가난한 시민들은 서둘러 피난을 떠났다. 결국 파묻힌 2,000 여 명은 귀족들과 돈 많은 상인들 이었다. 돈과 권력, 명예로 배 부른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자기의 저택을 지키려다가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태풍에 뿌리가 뽑히는 것은 큰 나무이지 잡초가 아니다. 자신이 일등이라고 생각한다면 먼저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지구 별에 놀러온 여행객들이라는 사실 말이다. 이곳에서 소풍을 끝내는 날 하늘로 돌아가야 한다. ♡여행이 즐거우려면 세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한다. 첫째, 짐이 가벼워야 한다. 둘째, 동행자가 좋아야 한다. 셋째, 돌아 갈 집이 있어야 한다. 유황불 비를 피해 도망가야 하는데 롯의 아내는 소돔 성에서. 누리던 물질 문명을 못잊어 뒤를 돌아다 보았고, 그 결과 소금 기둥으로 변해 지금도 그 자리에 서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여기 사는 동안 잠시 빌려 쓰는 것이다. 여행 간 호텔에서의 치약 같은 것. 우리가 죽을 줄 알아야 올바로 살 수 있다. ♡죽음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이 세 가지 있는데. 1. 사람은 분명히 죽는다. 2. 나 혼자서 죽는다. 3. 아무것도 갖고 갈 수 없다. ♡죽음에 대해 모르는 것이 세가지 있는데. 1. 언제 죽을지 모른다. 2. 어디서 죽을지 모른다. 3.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낳는 방법은 거의 비슷하지만 죽는 방법은 천차 만별하다. 인간의 평가는 태어나는 것보다 죽는 것으로 결정된다. 안 중근 의사는 30 세에, 윤 봉길 의사는 25 세에, 유 관순 열사는 18 세에 순국했다. 그렇지만 누가 그들의 젊은 죽음을 가벼이 볼 수 있을까 ? 그들의 죽음은 모두 거룩한 죽음이다. 절대로 말을 보면서 사슴이라고 거짓말 하지 말자. 까마귀가 밀가루를 덮어 쓰고서 까치 행세를 하듯이 하지 말자. 어차피 하느님 앞에 가면 생각으로 지은 죄까지 다 드러날텐데. 스스로 속고 속이는 허망한 연극은 그만 두자. 내가 나 자신에게 충고를 해보는 것. '조선 선조 때 유학자인 김집은 호가 신독재였다. 그의 묘비에는 ''혼자 갈 때 그림자에 부끄러울 것이 없고, 혼자 잘 때 이불에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는 내용이 들어 있다. 참으로 무서운 다짐이고 당당한 자기 확신이다. 성경의 갈라디아서(6장7절-8절)’ 에도 비슷한 내용이 들어 있다. 자신을 속이지 마라 하느님은 조롱을 받지 않으시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이다. 그렇지요. 오늘도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마음의 밭에 심은 대로 거두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순간 하느님 말씀을 듣고, 믿고, 살고, 전하고, 그리고 성모님처럼 말씀을 잊지 않고 마음에 되새기시며 오직,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닦고 빛을 내며 살아가는 은총 가득한 삶이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자유롭게 피어나기. 이것이 내가 내린 성공의 정의다.'' - 게리 스펜스 - |
♡2038회 “우리가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를 지탱한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3월 18일(레위기 1장~ ) 김연아는 ''99도까지 온도를 열심히 올려놓아도 마지막 1도를 올리지 못하면 물은 끓지 않는다. 포기하고 싶은 마지막 1도를 참아내는 것이다.'' 《듣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어라.》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말고 불리하다고 비굴하지 말라. 자기가 아는 대로 진실만을 말하여 주고 받는 말마다 악(惡)을 막아 듣는 이에게 기쁨을 주어라. 무엇을 들었다고 쉽게 행동하지 말고 그것이 사실인지 깊이 생각하여 이치(理致)가 명확할 때 과감히 행동하라. 지나치게 인색하지 말고 성내거나 미워하지 말라. 이기심을 채우고자 정의를 등지지 말고 원망을 원망으로 갚지 말라. 위험에 직면하여 두려워 말고 이익을 위해 남을 모함하지 말라. 객기(客氣)부려 만용(蠻勇)하지 말고 허약하여 비겁하지 말라. 사나우면 남들이 꺼려하고 나약하면 남이 업신여기나니 사나움과 나약함을 버려 지혜롭게 중도(中道)를 지켜라. 태산(泰山)같은 자부심을 갖고 누운 풀처럼 자기를 낮추어라. 역경(逆境)을 참아 이겨내고 형편이 잘 풀릴 때를 조심하라. 재물(財物)을 오물(汚物)처럼 보고 터지는 분노를 잘 다스려라. 때(時)와 처지(處地)를 살필 줄 알고 부귀(富貴)와 쇠망(衰亡)이 교차(交叉)함을 알라. 사람의 약점 중에 하나가 ‘따뜻하면 몰려들고 추우면 버리는 것’ 입니다. 안 그런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되는 것을 보면 인간은 분명 의지의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 소위 줄서기를 잘못하면 낭패를 봅니다. 굶주릴 때는 달라붙고 배부르면 떠나는 것이 인간의 연약함인데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고 신앙을 고백하자마자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믿음을 고백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이 흔들릴 것을 아셨기에 당신이 유다인들에게 체포될 때 제자들이 도망갈 것이라고 미리 예고하신 것.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받아들여 감동을 하더라도 손발에 머물러 증거하러 하기 까지는 갈 길이 멀기만 합니다. 믿음은 아직도 더 무르익어야만 합니다. 이제 곧 모두가 다 각자의 유익한 곳으로 떠나갈 것. 예수님께서는 결코 혼자가 아니십니다. 아버지께서 항상 그분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와 함께 살며 아버지와 하나입니다. 요한 복음 10장 38절에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이듯, 제자들과 예수님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우리도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그 길이 멀게만 느껴집니다. 언젠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하고 고백한 바오로 사도처럼 고백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열매는 손발에서 맺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고 하시며 시련에 굴하지 않기를 바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움을 당할 때 정신을 잃으면 안 됩니다. 오히려 세상을 이긴 예수님을 바라보며 지금 이 순간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힘들고 지칠 때 ‘용기를 내어라’ 고 하신 예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용기가 있는 곳에 희망이 있고, 희망이 있는 곳에 구원이 있고 하느님도 계십니다.”(성 도미니꼬) 춥다고 버리지도 말고 배부르다고 떠나지도 마십시오! 흔들림 없는 믿음과 소신이 넘쳐나길 기도합니다. 굳건한 믿음은 시련 속에서 빛납니다. “조금만 더 참고 이겨내면 하느님의 위로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위로를 얻기 전에 하느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찾아나서는 일부터 해야 할 때입니다.”(박병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이 약해질 때가 올 것을 미리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혼자 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요한 16,32)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질 것. 좌절하고 절망할 것. 의혹에 휩싸이고 혼동에 빠질 것. 각자 제 갈 길로 가고 말 것. 어쩌면, 우리의 믿음은 “약하고 더듬거리고 무지하다” 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 사실, 우리의 강함은 우리의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의 대상이신 주님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주님의 믿음이 우리를 지탱하는 것. <하늘은 땅에서 열린다.>의 저자인 루돌프 스테르텐브링크는 “우리가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를 지탱한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렇게 제자들의 믿음의 약함을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그들을 질책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위로와 굳셈을 주시기 위한 것. 아니, 선물을 주시기 위한 것. 평화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6,33)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남겨 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연약함을 먼저 말씀하신 것. 그러니, 여기에서 말하는 평화란, 그 어떤 곤란과 슬픔 속에서도 하느님께 신뢰하고 의탁하는 것을 말합니다. 평화란 단순히 갈등이나 시련이나 고통이 사라진 상태, 분열이나 전쟁이 없는 상태, 혹은 그 어떤 낙담이 전혀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의탁하는 것을 말합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요한 16,33)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당신이 주시는 평화를 말씀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만드는 평화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어떤 좋은 환경이나 자기만족에서 얻어지는 평화가 아니라, 오로지 ‘당신 안에서’ 얻게 되는 평화를 말하는 것. 사실, 우리는 아무데서나 평화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자신의 마음 안에서 찾는 마음의 평화가 아닙니다. 오로지, ‘그분 안에서’ 평화를 찾아야 하는 것. 그러면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주시고자 ‘당신 안에’ 마련한 평화를 주실 것. 그러니, 사실 당신이 주시는 이 평화는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주님의 믿음이 주는 평화인 것. 이것이 ‘그분 안에서’ 얻게 되는 평화인 것.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2) 이제 그분이 주신 평화로, 우리도 세상을 이길 것입니다. 아멘. 주님!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옳고도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죄마저 뒤집어쓰고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지는 무능이 이기는 전능임을 알게 하소서.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에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사랑이 이기는 길임을 알게 하소서. 자신을 이기는 길임을 알게 하소서. 세상을 이기는 길임을 알게 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상상력은 창조의 시발점이다. 당신은 원하는 것을 상상하고 상상하는 것을 행동에 옮길 것이며, 종국에는 행동에 옮길 것을 창조하게 된다.'' - 조지 버나드 쇼 - ♡2039회 “어둠을 탓하기보다는 한줄기 빛을 밝히는 것이 낫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3월 19일(민수기 26장~ ) 미셸 드 몽테뉴는 "삶은 짧고 예측 불허이다."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은 당신이 알지 못하는 상처를 가지고 있다. 서로에게 친절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누구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을 여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 류시화 -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주님이십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때로 본의 아니게 짙은 어둠 속에 머무르는 순간이 있다. 곰곰히 따져보니 그 순간은 견디기 힘겨운 고통과 슬픔의 순간이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손해본 순간, 억울한 순간만은 아니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왜 굳이 당신께서 애지중지하시는 인간에게 아픔과 상처를 경험하게 하시는가? 의아해할 때가 있다. 지나고 나서 하나 하나 따져보니, 그 혹독한 순간 역시 큰 틀 안에서 은총의 순간이요 보석같은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견디다 보니 아픈 것은 나았고, 상처는 아물었다. 눈물을 끝내고 바라본 세상은 분명 똑같은 세상인데도 훨씬 더 소중하고 더 아름다워보였다. 따지고 보니 아픔이라는 것이 오히려 살아있음에 대한 신호였다. 결국 상처라는 것 이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훈장이요 영예가 될수도 있다. 그러한 의식의 전환은 우리가 어둠 속에 머물러 있느냐? 아니면 환한 빛 가운데로 나오느냐에 달려있다. 부족하고 유한한 인간 존재로서 어쩔 수 없이 안고 가야할 갖은 고통과 상처 속에서도 낙천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거듭 건너가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육에서 영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인간에게서 주님께로 건너가는 노력 말입니다. 오늘도 어둠 속에 방황하는 어린 새 한 마리 같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너무도 은혜로운 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나는 빛으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곳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요한 복음 12장 46~47절) 깊고 어두운 동굴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빛처럼 고마운 존재가 다시 또 없을 것. 어둠에 사로잡혀 있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 한명 한명을 위해 예수님께서 친히 빛으로 다가오십니다. 빛으로 다가오신다는 것은 나와 함께 하신다, 내 어두운 인생길에 동행하신다, 내 공간 안에 함께 현존하신다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종종 체험하는 바입니다만, 우리가 극심한 육체적 영적 고통에 사로잡혀 있을 때, 큰 고민속에 앉아 있을 때, 혹은 영적 암흑기에 머물러 있을 때, 그 누군가 따뜻한 동반자가 그저 함께 있어줄 때, 아뭇소리 않고 동고동락할 때, 존재 자체로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런 순간 위안을 준 누군가는 종종 혈육보다 더 가까워지는 경우도 있다. 그 이유는 그가 우리 삶의 깊은 곳에 자리한 어둠의 공간 안으로 기꺼이 들어와주었기 때문에, 함께 머뭄으로서 결코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그가 나와 강한 결속 의지를 표명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결국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주님, 지극히 하찮은 나와 삶을 공유하시러 오신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측면에서 우리와 결속되고 공유함을 통해 기쁨의 슬픔, 희망과 절망을 함께 나누기 위해 오신 자비의 주님이십니다. 별안간 전기가 나가면서 세상이 어둠 속에 잠겨버렸다. 평소 손전등이 어디에 있는지를 기억해 어둠 속에서 손전등을 찾아 한줄기 빛에 의지하여 다른 것들을 찾아 할 일을 할 수 있다. 한줄기 빛이 이렇게 소중한 줄은 세상이 어둠에 묻힌 뒤에야 새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삶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시련과 모욕과 불안과 고독과 실망과 좌절은 어둠 속을 더듬는 것같이 힘겹게 하고 두려움에 휩싸이게 합니다. 누구나 항상 밝은 빛을 원하겠지만 우리의 마음과 이 세상에는 어둠 또한 깔려 있다. 어떤 철학자가 한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아 있다. “어둠을 탓하기보다는 한줄기 빛을 밝히는 것이 낫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죽음 앞에서 극단적인 공포와 혼란과 불안과 시련을 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아버지의 영광을 빛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기도는 어둠 속에서 빛을 밝히는 행동이었다.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아버지, 이 때를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하고 말할까요? 그러나 저는 바로 이 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요한 12,27- 28ㄱ) 예수께서는 인생이 결정적인 실패로 끝나는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의 순간이 곧 하느님의 영광이 빛나는 때임을 보여주셨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죽음과 같은 어둠 속에서 구원의 빛을 주셨다. 가장 고통스럽고 비참한 십자가의 죽음과 같은 최악의 상황에서 영원한 사랑의 빛을 밝혀주셨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은 세상의 아무리 짙은 어둠이라도 모두 변화될 것이라는 믿음의 빛이 되셨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2,46). 믿음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희망과 용기를 주고, 실망의 어둠 속에 있는 사람에게 구원의 빛을 보게 합니다. 내 마음의 어둠이 깊을수록 주님의 말씀에서 빛을 밝혀야 하겠다. 세상의 어둠이 짙을수록 작은 사랑의 실천으로 한줄기 구원의 빛을 밝혀주었으면 좋겠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예수께서 내 삶의 빛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라는 말씀이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하느님을 증거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기다려 주시며,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님께로 갈 수 있는지를 말씀하셨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해 주셨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지키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행동으로 하느님을 증거하셨다. 가난하고, 병들고, 헐벗은 사람들과 늘 함께 하셨다. 병자들을 치유시켜 주셨고, 죄를 지은 사람들은 용서해 주셨다.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로 하느님을 증거하셨다. 늘 따로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를 하셨다. 마지막 때에 이르러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다. ‘아버지 제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라고 기도하셨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말씀, 행동, 기도를 자신들의 삶으로 증거하였다. 복음을 전하였고, 기도했으며, 서로 격려하였고, 용기를 주었다. 그런 사도들의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우리들의 말과 행동을 보고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기도하고, 늘 감사드리며,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오늘도 모든 일에 있어서 몸과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기도로 붙들고 하심(下心)으로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 “수지맞는 은총과 축복”을 받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꿈이 현실이 되려면 먼저 깨어나야 한다." - 마하트마 간디 - ♡2040회 신앙인의 삶 자체가 복음 선포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3월 20일(여호수아 1장~ ) 라오 티즈는 "자기 자신을 알고, 자기 자신을 이긴 사람은 천하무적이다." 《우리에게 아름다운 것은》세상의 모든 일은 만남과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 둘의 조화에 의해서 세상이 발전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합니다. 만남은 하늘에 속한 일이고 관계는 땅에 속한 일입니다. 세상에는 하늘과 땅이 조화를 이루며 제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자연이 있듯이, 만남과 관계가 잘 조화된 사람의 인생은 아름답다. 만남에 대한 책임은 하늘에 있고 관계에 대한 책임은 사람에게 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속한 관계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매일 만나는 사람들을 소중한 인격체로 인식해야 합니다. 따뜻한 관계 아름다운 관계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관계를 맺기 위해 수고하는 사람에게만 생겨납니다. 좋은관계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좋은관계는 대가를 치를 때 만들어지는 결과입니다. 하늘이 우리에게 보내준 사람들, 부모, 자녀, 형제, 이웃, 친구, 동료.. 이들과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것들이 투자되어야 합니다. 좋은것을 투자하면 반드시 좋은 관계가 맺어집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요한 14,12) 이 말씀은 제자들이 하게 될 일에 대해 예언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을 지시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 승천 후에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들’ 을 이어받아서 계속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당신이 하시던 일들을 이어받아서 계속하라고 지시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더 큰 일’ 이라는 말은 ‘더 위대한 일’ 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더 많은 일’ 을, 즉 더 먼 곳으로 가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하게 되는 일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셨던 곳보다 더 먼 곳까지(세상 끝까지) 가서, 예수님께서 만나셨던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온 세상 사람들을) 만나서 복음을 선포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기도 하고, 그렇게 하라는 지시이기도 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승천을 예고하신 말씀이고, 또 제자들이 ‘더 많은 일’ 을 하게 되는 이유, 또는 그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승천 전에는 예수님께서 모든 일을 직접 다 하셨고 제자들은 따라다니기만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당신이 하시던 일들을 모두 제자들에게 맡기셨다. 그것은 이제 제자들이 모든 일을 직접 해도 될 정도로 충분히 발전했고 성숙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제자들 자신들의 능력만으로 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바로 ‘믿음’ 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나를 믿는 사람은” 제자들이 일할 때 필요한 믿음은 예수님께서 언제나 함께 하신다는 믿음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제자들이 일하고 예수님께서 도와주시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예수님께서 일하시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도와드립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서 떠나신 일이 아니라,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제자들과 함께하기 위해서 존재 방식을 바꾸신 일입니다. 지금까지 한 말을 정리해서, 예수님 말씀을 다음과 같이 풀이할 수 있다. “나는 곧 아버지께 간다. 그러니 이제부터 너희는 내가 하던 일을 이어받아서 계속하여라. 세상 끝까지 가서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다는 것을 믿어라.”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신앙인들이 할 일 가운데 첫 번째 일은 ‘복음 선포’ 입니다. 우선 먼저 ‘내가’ 믿고, ‘내가’ 구원받는 것이 중요하지만, 남이야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나만’ 구원받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은 ‘사랑 없는’ 이기적인 생각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믿음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복음 선포는 이웃도 함께 구원받기를 바라고 노력하는 ‘사랑 실천’ 입니다. 믿음은 사랑과 하나이어야 합니다. 복음 선포는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지금 강조하고 있는 ‘복음 선포’ 는 전문적인 선교사들의 선교활동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포함하지만, ‘복음 선포’ 는 신앙인들이 삶 전체를 통해서 믿음을 증언하고 희망을 고백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 신앙인의 삶 자체가 복음 선포입니다. 삶 자체가 복음 선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함께 있겠다는 약속만 하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보이는 약속도 하셨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3-14)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19-20) 제자들은 표징들 덕분에 주님께서 언제나 함께 계신다는 것과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면 주님께서 다 이루어 주신다는 것을 ‘확신’ 할 수 있었다. 예수님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무엇을 청하든지 간에 아무거나 다 이루어 주겠다는 약속으로 오해할 수도 있는데,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 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음을 놓치면 안 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려면, 주님의 뜻에 합당하는 것만 청해야 합니다. 만일에 주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것을 청하면서도 주님의 이름으로 청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대죄가 됩니다. 여기서 ‘표징’ 이라는 말은 ‘놀라운 기적’ 들 외에도, 주님의 현존과 주님 말씀의 힘을 확신하게 해 주는 어떤 체험들도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에는 단 한 마디도 ‘빈말’ 이 없다. 언제나 항상 ‘살아 있는 말씀’ 입니다. 살아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주님의 약속은 늘 현실이 됩니다. 그것을 한 번이라도 체험하게 된다면, 신앙생활이 얼마나 위대한 생활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믿음’ 을 가장 크게 방해하는 걸림돌은 ‘의심’ 입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의심’ 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그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 어떠한 길을 걷든 안정을 찾지 못합니다."(야고 1,6-8) 혹시, 의심을 잘 물리치는 ‘비결’ 같은 것이 있을까? 믿으려고 더욱 노력하면서, 도와달라고 주님께 더욱더 열심히 기도하는 것 외에는 비결 같은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뜻이 무엇인지, 예수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려주시기를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고통이 은총임을…. 그래서 올 한해 어떠한 고통도 감사하며 깊이 새기며 견디어내도록 우리들에게 주님께 의탁하는 은혜로운 마음을 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내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좌우된다.'' - 헤밍웨이 - |
💖성령봉사자 박재만 세례자요한 010 - 3878 - 6634
(수필가ㆍ전국성령쇄신봉사자협의회 말씀추천강사)
💖성령봉사자 류태숙 M.막달레나 010 - 6560 - 7354
(시인ㆍ수필가ㆍ꽃예술설화중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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