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령기도회 봉사

♡2041회 ‘당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 ♡♡2042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 ♡

♡2041회 ‘당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3월 21일(사무엘상 14장~ )

  웨인 다이어는 "우리의 삶은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달려있다."
《건강한 마음》자신의 소중한 재산은 건강한 마음이라고 합니다. 육체적인 건강이 안 좋아 병원치료를 받고 치유가 될 수도 있지만 마음의 건강이 좋지 않으면 치유가 어렵다고 합니다. 마음은 우리 몸의 뿌리와 같아서 뿌리마저 병들면 치유가 어렵다는 것. 마음이 건강하면 미운 사람도 용서가 되어 주변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수호천사가 된다고 합니다. 자기중심적 사고가 아닌 상대에게 사랑을 주고 격려하며 다이아 몬드처럼 맑고 빛나는 건강한 마음으로 오늘 맞이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 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사회학과 교수가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숙제를 내주었다. 볼티모어의 유명한 빈민가로 가서 청소년 2백 명의 생활환경을 조사하라는 숙제였다. 학생들은 빈민촌으로 들어가서 청소년들을 조사하여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하여 조사서를 만들어 제출하였다. 평가서는 거의 동일하였다. ‘이 아이들에게는 전혀 미래가 없다. 너무 가난하여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25년이 지났다. 이 학교에 사회학과 교수가 우연히 이 연구 조사를 접하게 되었다. 그 교수는 학생들에게 2백 명의 청소년들이 25년이 지난 현재 모습을 조사하여 오라는 숙제를 냈다. 조사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그 동안 죽은 아이와 이사 간 아이가 20명이었다. 나머지 180명중에서 176명이 대단히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변호사, 의사와 사업가 등 상류층이 많았다. 교수는 놀라서 그 조사를 더 진행시켰다. 교수는 그들을 한 사람씩 만나 직접 물어 보았다. ‘당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답은 모두 한결같았다. ‘여 선생님 한 분이 계셨지요. 그분의 가르침 때문입니다.’ 그 여교사가 아직도 생존해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교수는 수소문 끝에 그 여교사를 찾아가서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아이들을 가르쳤기에 빈민가의 청소년들을 이처럼 성공적인 인생으로 이끌었습니까?’ 늙었지만 아직도 빛나는 눈으로 여교사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비결은 정말 간단합니다. 그 아이들을 사랑했답니다.’ 빈민가는 배가 고픈 아이들이 사는 곳입니다. 배가 고프면 사랑도 고픕니다. 음식을 주는 것이 곧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고프면 다른 것으로라도 채워 넣으려 합니다. 마음이 공허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물질로는 채워지지 않습니다. 음식이 고픈 것이 아니라 사랑이 고픈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만 차면 술과 게으름과 방탕으로 자신을 채우려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서도 성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 

그 사랑 안에 그 사랑을 주는 이의 뜻이 들어있는데 그 사랑을 주는 이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생명의 빵이라고 하시며 당신을 먹으면 결코 배고프지 않고 당신을 마시면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성체성혈을 영하면서도 배고프고 목마릅니다. 돈에 배고프고 애정에 목마릅니다. 인정받고 싶고 성공하고 싶어 합니다. 왜 생명의 빵을 먹으면서도 배고프고 목마른 것일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을 영혼의 양식이 아닌 육체의 양식으로 받아 모시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채워지면 육체의 욕구가 사라집니다. 배고픔과 목마름이 욕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모실 때 오히려 세상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위해 모십니다. 성체를 영하면서도 자녀가 잘 되게 해 달라고 청하고 가족이 건강하도록 기도합니다. 영혼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성체를 영해야하는데 오히려 성체를 영하면서도 육체의 배고픔과 갈증만을 해소하려고 예수님을 영혼이 아니라 육체에 밀어 넣는 것. 이런 식으로는 갈증이 가라앉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생명의 빵이란 말씀을 하신 직후, “나를 보내신 분의 뜻”, 혹은 “내 아버지의 뜻” 이란 말을 여러 번 반복하십니다. 그 이유는 양식과 뜻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양식은 아버지의 뜻이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양식이 들어있으니 다른 욕망이 들어올 틈이 없는 것. 하느님의 뜻이 곧 생명의 양식입니다. 내 뜻을 그분에게 청하기 위해 성체를 영하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을 죽이고 그분의 뜻을 먹는 것이 성체성사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내 뜻을 성취해 줄 것을 요구하며 성체를 영하니 성체가 나의 배고픔과 갈증을 해소해 줄 수 없는 것. 나의 뜻과 반대되는 뜻이 양식으로 오기에 내 뜻을 요구하면  하느님의 뜻이 내 배를 채워줄 수가 없다. 이는 마치 목마른데 밥만 먹는 격이고, 배고픈데 물만 마시는 격입니다. 같은 음식이라도 개에게 받아먹으면 아기는 자기가 개인 줄 알 것. 개가 주는 양식 안에는 자신처럼 살라는 개의 뜻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주는 양식은 부모의 뜻이고, 하느님이 주시는 양식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이 우리 양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배고픔과 갈증이 사라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기 직전 제자들을 향해 한가지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남기시는데, 다름 아닌 말씀 선포에 매진해달라는 강력한 요청입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때로 말씀 선포가 죽기보다 싫을 때가 있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마지못해 사람들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이뤄지는 말씀 선포가 제대로 먹혀 들어갈 리 만무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말씀 선포가 점점 부담스러워지는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준비가 소홀했다든지, 기술이 부족했다든지 등 원인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그러나 보다 궁극적 원인은 다른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한 가지 진리를 자주 망각합니다. '말씀하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시다' 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전도 사업은 내 일이 아니라 하느님 일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반드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부족할 때 말씀은 스트레스로 다가올 뿐입니다. 돌아보면 부끄럽게도 하느님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도구 삼아 나 자신을 전하려는 경향이 많았음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진정한 말씀 선포는 '나 자신' 이 사라져야만 가능합니다. 내가 무엇인가 하기보다는 그분께서 하시도록 그분 영역을 우리 안에 마련할 때 비로소 참된 말씀 선포가 가능하리라 믿습니다. 말씀을 통해 생활의 이정표를 세웁니다. 말씀나누기를 통해 희망을 나누고 미래를 설계합니다. 결국 말씀은 저희 같은 봉사자들에게 있어 밥보다 중요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늘 한 가지 아쉬움으로 남는 것이 있다. 매일 말씀에서 길어 올리는 삶의 진리들이 머리에서 가슴까지는 잘 내려옵니다. 그러나 가슴까지 내려온 말씀이 다리까지, 손끝까지 내려오기가 그렇게 힘듭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접하는 말씀이 머릿속에서만 머무는 말씀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말씀, 행동을 촉구하는 말씀, 매일 삶의 에너지가 되고 고단위 비타민이 되는 말씀이 되길 기원합니다. 

  측은지심의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베풀어지는 삶이, 어려운 문제들이 풀리는 삶이, 자신이 바라는 소망이 이루어지는 삶이 어쩌면 오늘일지도 측은지심을 잃지 않는 간절함으로 살아가는 은총과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많은 돈을 벌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살만한 삶을 만들려고 노력하라." - 앨버트 아인슈타인 -

💖성령봉사자 박재만 세례자요한 010 - 3878 - 6634
  (수필가ㆍ전국성령쇄신봉사자협의회 말씀추천강사)
💖성령봉사자 류태숙 M.막달레나 010 - 6560 - 7354
  (시인ㆍ수필가ㆍ꽃예술설화중앙회장)

■묵상글 나눔 추천■
[성명, 본명, 본당, 휴대폰번호] 카톡이나 문자로 보내주시면 복음과 묵상말씀을 카톡으로 함께 나누겠습니다.
※ 추천 해주신 모든분 감사드립니다.
♡2042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3월 22일(사무엘하 1장~ )

  웨인 그레츠키 (아이스하키 선수)는 ''슈팅이 없다면 득점은 불가능하다.''
《자신의 한계를 알라, 누구에게나 한계는 있다.》어제의 일을 후회하고 오늘 또 다른 잘못을 거듭 할 수 있으며, 내일을 두려워하는데 이런 내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중심을 잡고 사는 사람은 자신의 한계에 부디 치더라도 상처받지 않는다. 내 기준은 다른 사람이 정해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한계를 명확하게 알아야 하며 그 한계 안에서 생활할 줄 알아야 한다. 한계를 수용하는 마음과 그것을 뛰어넘고자 하는 마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발생하는 것. 사랑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타인에게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하지만 오히려 그 정반대이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 건전한 인간관계가 만들어지는 것. 이것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자극이 될수있다. 목표를 향해 노력하고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어떤 능력이 주어졌는지, 왜 그런 능력이 주어졌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 -안젤름 그륀 신부 지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십자가 희생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일이 보잘것없는 죄수가 처형당한 일로만 보였겠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희생과 헌신이었다. 여기서 ‘밀알’ 은 예수님을, ‘많은 열매’ 는 구원받게 된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 말씀은 순교자들의 순교에도 자주 적용됩니다. 순교자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친 일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심어진 일이고, 박해와 순교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인이 더 많이 생기고, 교회가 더 발전한 일은 그 밀알에서 많은 열매가 나온 일입니다. 관점을 조금 바꿔서, 이 말씀을 개인의 신앙생활에도 적용할 수 있다. 밀알 하나를 땅에 심는 것은 육신적이고 현세적인 것을 포기하거나 희생하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은 풍성한 은총을 받으면서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것. 육신의 목숨을 바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원래 뜻인데, 목숨을 바친다는 말을 꼭 실제로 죽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고,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육신적이고 현세적인 것들을 모두 버리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많은 열매’ 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에 나오는 ‘좋은 땅’ 이 많은 열매를 맺는 경우에 해당됩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루카 8,14-15)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 가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 같은 것만 신경 쓰다가 숨이 막히는 것은, “밀알 하나를 땅에 심지 않고 한 알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 ‘좋은 땅에 떨어진 씨’ 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면서 실천하고 인내하는 것은 “밀알 하나를 땅에 심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열매를 얻고 싶으면 씨를 심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열매를 얻기 위해서 지금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즉 자신의 모든 것을 땅에 씨로 심는 생활입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25) “육신적이고 현세적인 것들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않으면, 그것들을 모두 잃게 될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도 얻지 못하고, 그 애착을 버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고 영원한 생명만을 추구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 16,25-26)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그것이 영원한 생명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쓸모없는 것’ 신앙생활은 가장 귀한 것 하나를 얻기 위해서 쓸모없는 것들을 모두 버리는 생활입니다. 버리지 않으면 얻지 못합니다. 순교자들은 버려야 할 것들을 버려서 얻어야 할 것을 얻은 분들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 12,26)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요한복음의 말씀은 예수님을 따라가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말씀이고, 공관복음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섬긴다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묵시 22,3-5) 그래서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나의 뒤를 따라와야 한다.”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에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씀도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린다는 뜻입니다. 아버지께서 존중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그 삶이 대단히 영예로운 삶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누리시는 영예와 영광을 함께 누리는 삶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려면 자신을 버려야 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말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을 모두 버린다는 뜻이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어려움들을 참고 견딘다는 뜻입니다. 자신을 버리지 않고, 십자가를 지는 일도 없이, 그냥 예수님의 뒤를 따라갈 수는 없는가? 그럴 수는 없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일”과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 은 따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일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 자체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 자체가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 만일에 자신을 버리지도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도 없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과 그분의 뒤를 따라가는 신앙인들을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구경꾼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실제로 구경꾼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런 식으로 살다가는 저쪽 세상에 가서도 하느님 나라를 밖에서 구경만 하고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성령의 불을 밝혀 주님의 말씀 속에 감사함으로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늘의 축복을 보는 눈과 하늘의 음성을 듣는 귀가 열린 신앙인들 되시어 천상 상급을 받는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훌륭한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일에 대한 열정이 필요하다." - 월트 디즈니 -
♡2043회 “죄 없는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3월 23일(열왕기상 1장~ )

리처드 브랜슨은 "삶은 실험이며, 실험은 성공과 실패의 여정이다." 
《새벽을 찬란하게 만드는 것은》기쁨이 웃음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웃음이 우리를 기쁘게 만듭니다. 슬픔이 눈물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눈물이 우리를 슬프게 만듭니다. 행복이 사랑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명예가 정의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정의가 우리를 명예롭게 만듭니다. 재물이 건강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이 우리를 부유하게 만듭니다. 지위가 덕망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덕망이 우리를 높아지게 만듭니다. 평화가 믿음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우리를 평화롭게 만듭니다. 새벽이 태양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태양이 새벽을 찬란하게 만듭니다. 교리를 가르칠 때, 또는 강의를 할 때, 하느님과 예수님의 ‘사랑’ 과 ‘자비’ 는 말하지 않고,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간다.” 는 식으로 심판과 처벌에만 초점을 맞추어서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렇게 하면 가르치는 일이 편하고 쉬워지긴 할 텐데, 하느님과 예수님의 ‘사랑’ 과 ‘자비’ 를 말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것은 교리를 잘못 가르치는 것이 되고, 잘못된 강의를 하는 것이 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잘못 말하는 것은, 신성모독죄를 짓는 일입니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요한 12,46-47)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하느님의 뜻’ 은 ‘심판과 처벌’이 아니라, ‘구원’ 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통해서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하시는 것은 사람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변함없는 사랑’, 즉 영원한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최후의 심판 전까지만 사람들을 사랑하시다가 심판 때에는 그 사랑을 중단하시는 분이 아니라, 심판 때에도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최후의 심판은 죄인들을 처벌하기 위한 심판이 아니라 죄인들을(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심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믿고, 지금 이 순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 이 말을 반대로 생각하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거부하고 구원받기를 포기하고, 자기 스스로 멸망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그 사람을 심판하시고 처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심판과 처벌을 선택하는 것. 예수님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분” 입니다.(마태 12,20) 즉 예수님은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그 죄인의 구원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고, 어떻게든 구원하려고 애쓰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그 사랑은 곧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도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것은 그 죄인 자신이 스스로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데, 내가 포기해버리면 예수님도 ‘나를’ 어찌할 수가 없다. 지금 말하는 ‘포기’ 라는 말은, 심판 때에 구원받기를 포기하는 것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지금의 ‘삶의 태도’ 도 가리키는 말입니다. 만일에 지금 죄 속에서 살면서도 회개하지 않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태평하게 살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구원받기를 포기하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어떤 불행한 일을 당해서 고통을 겪을 때,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을 중단하고,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을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 자기 힘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이 너무 커서 그런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이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 자신을 심판하는 것과 같은 태도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고통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고통에서 구원해 주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은 회개할 기회도 주지 않고 벌부터 내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심판과 벌은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만 내린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고통을 겪을 때, “죄 없는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라고 억울해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 경우도 역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이고, 하느님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는 것. 자기 자신을 ‘죄 없는 사람’ 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죄입니다. 다른 사람이 어떤 불행한 일을 당해서 고통을 겪는 것을 보면서, 죄를 지어서 하느님의 심판과 벌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함부로) 판단하는 죄를 짓는 일이고,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 을 보고서 제자들이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라고 대답하셨습니다.(요한 9,1-3) 사도행전 12장을 보면 헤로데가 천벌을 받아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사도 12,23) 그처럼 하느님께서 인간 세상의 일에 직접 개입하시는 때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아주 가끔 예외적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함부로 하느님의 심판과 벌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고, 그에게 사랑을 실천하라는 숙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계적인 재난의 경우에는 사람들은 흔히 “종말이 온 것은 아닐까? 혹시 이 재난이 ‘최후의 심판’ 인가?” 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 외에는 종말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닥치는지, 또 최후의 심판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재난들이 종말의 재난인지, 또는 최후의 심판인지는 아무도 모르는데, “이 재난이 혹시 종말의 재난인가?” 라는 생각이 든다면, 거의 백퍼센트 종말의 재난이 아닙니다. 종말과 최후의 심판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때에 닥쳐서 순식간에 끝나는 전우주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마르 13장) 종말과 심판을 의식한다면 ‘회개’ 부터 하는 것이 옳은데,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무서워하기만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제 다만 기쁜 일이든 고통스러운 일이든 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축복이라 생각하며,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서 주어진 매 순간이 생의 마지막인 것처럼 살 수 있는 기도의 은총과 축복이 지금 이 순간 바다의 물결처럼 춤을 추듯 놀라운 기적의 섭리가 이루어지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인간은 재주가 없어서라기보다는 목적이 없어서 실패한다.''  - 월리암 A 빌리 선데이 -
♡2045회 자기 그림자를 피하려면 더 큰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3월 25일(역대기하 1장~ )

  에스겔 홉킨스은 ''성경은 하느님 나라의 법전이다. 그곳에는 천국법의 일반적 체계, 거룩한 삶에 대한 완전한 규칙, 그리고 영광된 삶에 대한 확실한 약속 등이 망라되어 있다.''

《사랑의 또다른 이름》오늘 문득 가만히 가만히 뇌리속에 맴도는 말이 있다. "배려한다는 것" 입니다. 참 따뜻한 느낌이 드는 말입니다. 커다란 것을 행하지 않고도 생활 안에서 늘 실천할 수 있는 것. 주변 사람들을 흐믓하고 푸근하게 할 수 있는 것이 '배려' 하는 마음이라는 생각입니다. 자상하게 마음을 쓴다는 것, 염려해 주는 것, '나' 와 '너' 가 '우리' 가 될 수 있는 것. 서로 배려하는 삶입니다. 출입문 앞에서 저만치 뒤에서 오는 이를 생각하여 잠시 문을 잡고 있어 주는 것, 함께 사용하는 장소에서 조용히 하는 것, 때와 장소를 구분하여 행동하는 마음, 나보다는 힘이 없는이를 먼저 생각하는 것, 나보다 물질이 풍요롭지 못한 이들을 도와주면 더 아름답겠지만 적어도 상처가 되는 언행은 삼가는 마음. 고통 중에 있는 이웃에게 마음이 담겨있는 위로의 말을 하는 행위 등등,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누가 누구를 함부로 해도 될 사람은 없다. 다만 주어진 환경이 좀 더 풍요롭게 사는 이와 그렇지 않은 것 뿐입니다. 어떤 이가 하고 있는 일을 보기 전에 (외적인 요소들) 그 사람을 (내면의 상태) 볼 줄 아는 혜안을 갖기 위해서는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 와 함께 같은 시간을 살고 있는 '너' 혹은 '누군가' '우리' 모두 하느님께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같은 부모를 가진 형제 자매가 그 부모에게 똑같이 귀한 존재이듯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서로 배려하며 살아가야 할 이웃입니다. 함께 더불어 살도록 마련해 주신 이 삶터에서 이기적인 생활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이웃에게 마음 아픈 상처를 준다거나 과거의 잘못으로 어려움을 격고있는 이에게 해결할수 없는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않은채 자신의 요구만을 정당화 하며 상대방에게 치유하기 어려울 만큼 깊은 고통을 안겨 주는 것이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오늘 하루도나와 너가 '우리' 가 되어 따뜻한 마음씀으로 서로 그리고 함께 삶을 엮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아름다운 하루를 살아 갔으면 좋겠다. 우리는 수많은 거절당하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젊은 시절 조금만 용기를 낼 수 있었다면 지금 삶은 매우 다를 수도 있다. 심지어 배우자가 다를 수도 있을 것. 거절당할 두려움 때문에 연애도 못 하고, 취직도 못 하고, 사업에도 성공을 못 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삶이 어쩌면 우리 모두의 삶입니다. 

‘거절 당하기 연습’ 의 저자 지아 장도 이러한 경험을 겪었다. 앱 개발 회사를 설립하여 투자를 받기 위해 완벽한 제안서를 준비했다. 투자 안 하는 사람이 이상하다 여길 정도로 자기 딴에는 완벽했다. 투자가 거절당했고 그는 털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더는 거절당하는 아픔을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어렸을 때 삼촌에게 운동화에 바퀴를 달면 어떻겠냐고 했다가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핀잔받고 나서 영어단어 외우는 일에만 열중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만약 여기서 주저앉으면 그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았다. 거절당하는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100번 거절당하는 연습을 하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경비원 아저씨에게 100달러를 꿔 달라고 했다. 물론 거절당하였다. 얼굴이 붉어졌고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고 빨리 다른 곳으로 숨어버리고 싶었다. 회를 거듭할수록 거절당하는 두려움은 사람들의 반응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실망할 것 때문임을 깨닫게 되었다. 도너츠를 올림픽 모양으로 해 달라고 했을 때 어떤 매장에서는 그것을 해 주었고, 어떤 사람들은 다른 제안을 하며 그것을 해 주면 자신도 들어주겠다고 하였다. 이렇게 거절당하는 두려움을 극복하면 더 발전할 수 있음도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 이 책을 읽고 거절당하는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수많은 거절당함 속으로 뛰어들고 있다. 자기 그림자를 피하려면 더 큰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두려움은 누구도 빠져보지 못한 수렁과 같아서 좀처럼 용기를 낼 수 없게 만듭니다. 다만 누군가가 그 두려움으로 들어가 그 두려움이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면 우리도 용기를 낼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이 세상은 우리의 두려움을 먹고 우리를 노예로 삼습니다. 돈을 벌어야 하고, 자존심을 지켜야 하며, 성공해서 자신을 비웃는 이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줘야 합니다. 그런 굴레 속에 사로잡히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실망하게 만들기 싫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반대로 돈이 없어도 되고, 자존심이 상해도 되며, 바보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것을 누군가가 보여준다면 우리는 그 두려움을 극복하고 비로소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사시고 멸시받으시고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십자가에 벌거벗겨져 못 박히셨다. 죽음의 공포까지 이기게 해 주시기 위해 죽음까지 받아들이셨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두려워하는 모든 것들을 다 받으셨다. 그리고 부활하셨다

이제는 세상의 모든 두려움 속으로 자유롭게 뛰어드는 일만 남았다. 영화 ‘그것’(2017)은 마을에 숨어 사는 광대와 왕따 당하는 아이들의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은 각자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 어떤 아이는 아버지를 무서워하고, 어떤 아이는 엄마를, 어떠한 아이는 괴롭힘 당하는 것을, 어떤 아이는 화재 때 부모를 구하지 못한 죄책감을, 어떤 아이는 문둥병자를, 어떤 아이는 무서운 얼굴의 괴물을 무서워합니다. 광대 모습을 한 괴물은 아이들의 두려움을 먹으면 더욱 커지고 강력해집니다. 아이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자신들이 두려워하는 것과 당당히 맞섭니다. 결국 괴물을 물리치고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페니와이즈라는 이 괴물은 그들에게 죽어가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무서워!” 이 세상엔 우리 두려움을 먹고 사는 ‘그것’ 이 존재합니다. 그냥 세상 자체가 ‘그것’ 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일으켜 우리를 자신의 힘 안에 가두어놓으려 합니다. 이 세상을 이기려면 두려움과 맞서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려면 용기가 필요한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모든 두려움으로 들어가셨고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이제 우리는 용기만 내면 됩니다. 그러면 진리로 자유롭게 됩니다. 진리로 두려움을 두렵게 만듭시다.

  우리들에게 꼭 맞는 옷처럼 오늘, 이 영적 일기를 통해 ‘약속의 주님께서 주신 말씀’ 으로 감사하면서 외딴곳에서 (믿음의 기도로) 누군가를 기억하며 같은 길을 기쁘게 열심히 함께 걸어가는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평범한 인간이 아닌 위대한 인간이 되려면 위대한 꿈을 가져야 한다." - 로버트 H. 슈러 -
♡2046회 단죄는 무엇이고 구원은 무엇인가?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3월 26일(에즈라기 1장~)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하러 이 세상에 왔는가? 내가 원해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왜 왔는지 그 목적을 아는 것은 쉽지 않다.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그런 것들은 나의 힘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에 의해서 알게 되는 것. 우리 각자가 자기가 왜 이 세상에 왔는지 사명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분명히 우리의 삶은 달라질 것.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단죄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고 말씀하신 것에 깊이 감사드린다.

 예수님이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단죄하러 이 세상에 오셨다면 나 자신부터 살아 남아 있을 수가 없었을 것. 오늘까지 많은 죄를 지었으면서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아 남을 수 있는 것은 단죄가 아니라 구원의 은총이 나를 살리시기 때문이다. 그럼 단죄는 무엇이고 구원은 무엇인가? 단죄는 심판하는 것. 처형하는 것.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내리는 것. 심판을 받으면 더 이상 다른 방도가 없다. 단죄 받은 대로 처벌받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단죄는 더 이상 어떤 가능성이 주어지지 않는다. 오직 벌을 받을 뿐이다. 단죄는 당신은 죄인이다 라고 공포하는 것. 일단 죄인이라고 공표되면 다른 방도가 없다. 단죄는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요, 절망에 빠지게 하는 일이요, 마침내 죽게 하는 일이다. 

구원은 살리는 일이다. 아무리 죄인이라 하더라도 죽을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내가 희생하는 것.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필요한 일을 하는 것이요, 필요하다면 자기 목숨까지 내놓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어떤 일을 하는가? 단죄인가 구원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보다는 단죄하는 일을 행하는가? 이 세상에는 온통 단죄하는 일들로 가득차 있다. 아주 오랜 일들까지 들추어 내면서 단죄하는 일에 익숙해져있고 그런 것이 잘하는 것 인양 되어버렸다. 사람을 살리는 말보다는 단죄하는 말이 더 쉽게 나온다. 하지 마라. 그것은 안돼. 저 사람은 안돼.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 저 사람은 가능성이 없어. 너는 성격이 나뻐, 네가 하는 일은 늘 그래,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나 등 구원의 말보다는 단죄의 말들이 너무나 성행하고 있다. 단죄하는 언어란 사람에게 절망감을 주는 말이다.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다. 사람에게 불안과 두려움을 갖게 하는 말이다. 사람에게 슬픔을 안겨 주는 말이다. 입에서조차 너무 쉽게 나오는 단죄하는 식의 말은 사람을 살리는 구원의 말로 바뀌어져야 한다. 

구원의 언어란 사람을 용서하는 말이다.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말이다.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말이다. 사람에게 믿음을 주는 말이다. 응 그래 그럴 수도 있어 괜찮아, 내가 했으면 더 못 할 뻔 했는데 이 정도면 너 참 잘 했다. 야 그것 참 예쁜데, 아이구 참 멋있어요, 다시 해봐 너는 잘할 수 있을 꺼야 등 상대방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말들이 구원하는 일이요, 언어들이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에게 단죄의 언어를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살리는 언어를 사용할 것인가? 단죄하는 행위를 할 것인가? 구원하는 행위를 할 것인가? 단죄가 성행하고 있는 사회에서 구원의 언어를 구사할 때 구원의 행위를 행할 때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라는 지금 이 순간 우리 가운데 와 계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 단죄하던 사람이 구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될 때 비로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단죄하는 사람에게서 구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이다. 

단죄하는 인생에서 구원하는 멋진 인생을 살기 위해서이다. 남에게 상처 주고 못된 일만 하던 삶에서 좀 더 보람있고 가치있고 남을 위해서 도움이 될 수 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나를 배척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단죄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세상 끝 날에 그를 단죄할 것이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은 왜 저런 나쁜 사람을 그냥 놔두시는가? 왜 저렇게 착한 사람이 억울하게 당하기만 하는가? 라고 질문하고 하느님을 원망할 때가 있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 그렇다. 하느님은 단죄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늘 사람을 살리려고 하신다. 사람을 살리려고 하시는 분 그분이 곧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이 악인을 단죄하지 않으시는 것은 끝까지 악인이라도 살리시고자 하시는 것이 구원하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하시는 모든 말씀은 단죄가 아니라 살리기 위한 말씀이다. 악인이 단죄받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이 그를 살리기 위해 하신 그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단죄받는 것. 담배를 피우지 마라. 담배는 암의 원인이다. 라고 사람을 암의 위험에서 구하기 위해 아무리 경고의 말을 하고 금연 운동을 해도 애연가들은 담배를 끊지 못하고 담배를 피운다. 그 결과 나중에 암의 진단을 받고 죽는다. 고 이주일 씨가 '담배는 독입니다' 라고 금연 광고에 나와서 아무리 이야기 했어도 사람들은 여전히 담배를 끊지 못한다. '담배를 피우지 마라' 고 한 그 말을 듣지 않고 담배를 피웠다가 결국 많은 사람들이 암에 걸려 죽는 것. 결국은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했던 그 말이 그 사람을 단죄한 것.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말을 듣고 담배를 피우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은 암이라는 병으로 단죄 받지 않았을 터인데 결국 듣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단죄 받은 것. 우리를 살리기 위해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단죄가 아니라 구원의 말씀이 되려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예수님 마음대로 말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어떻게 말하라고 친히 명령하신 대로 말씀하셨듯이 우리도 우리 말대로 하지 말고 예수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 말씀하신 대로만 말하고 행동한다면 우리는 단죄 받는 일이 없을 것.

 우리가 끝 날에 단죄 받게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살리기 위해 말씀해주신 대로 살지 않기 때문일 것. 하느님은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언제까지나 우리의 인격을 존중해주시는 분이시고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말씀하신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거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할 것. 내가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다고 해서 예수님이 나를 단죄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내가 묵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말씀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것은 나의 탓이다. 내가 기도하지 않는다고 해서 예수님이 나를 단죄하시는 것이 아니다. 기도하지 않은 내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은총을 받지 못하는 것.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나를 판단하는 것이지 예수님이 나를 단죄하신 것이 아니다. 오늘도 내가 단죄하는 말을 하고 단죄하는 행동을 한다고 해서 예수님은 나를 단죄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런 나를 살리시기 위해 인내하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신다. 다만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단죄하는 말을 하고, 단죄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나 스스로 구원을 거부하는 것이고 그로 인해 나 스스로 단죄 받게 될 것. 하루 이틀 사이에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나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단죄하는 일을 한다면 그것이 결국 나를 어둠 속으로 몰아갈 것이며 죽음에 이르게 될 것. 예수님이 구원하기 위해 하신 그 말씀이 나를 단죄하게 될 것. 오늘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고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할 것. 그런 가운데 우리는 단죄할 수도 있을 것이고 구원하는 일을 할 수도 있을 것. 그것은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다. "나는 이 세상을 단죄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 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은혜로운 하루가 되기를 바란다. 

예수님 안에 영원한 생명과 참된 삶이 있으니 죄인 된 우리들이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고 향주 삼덕(신, 망, 애)의 축복으로 사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행복은 우리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 브루스 리 -
♡2047회 ''옛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3월 27일(유딧기 1장~)

  피터 맥윌리엄스는 ''당연히 실수는 개선해야 될 점을 알려준다. 실수가 없다면 무엇을 개선해야 할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어려울 때 필요한 것은》살아가노라면 누구나 예상하지 않은 어려움과 고난으로 인해 실망과 좌절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발전을 합니다. 지금 감당하기 어려운 일에 부딪혀 있는 것은 그 어려움이 나에게 온 축복이라고 생각한다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질 것. 어려움 속에서 지혜를 얻지 못하고 불평불만만 하다 가면 이 세상에 와서 내가 남겨 놓고 가는 것이 그 무엇이겠읍니까? 사람을 제일 무력하게 만드는 것은 공포와 두려움과 절망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어렵더라도 두려움이나 절망감에 자신을 던지지 마세요. 그것은 바로 죽음 속에 자기 자신을 던지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어려울 때 필요한 것은 용기와 뜨거운 가슴입니다. 그리고, 사랑입니다. 예수께서는 파스카 사건을 통해 그분의 참된 모습을 ‘드러내실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 예수께서는 장차 제자들과 영원한 파스카를 지내기 위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성부께 올라가셨다가 그들을 데리러 다시 돌아오신다고 하신다.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이 성부께 이르는 유일한 ‘길’ 이라고 하신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 예수님의 말씀의 ‘길’ 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리라는 것을 생각지 못한다. 토마스가 이렇게 말한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5절). 그러자 예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6절)고 하신다. 이 말씀은 ‘아버지’ 께 이르는 길은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으로 생각했던 토마스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이르는 ‘십자가의 길’ 이라는 말씀이다. 그분이 바로 아버지와 같으신 분이라는 것이다(11절 참조).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진리요 생명’ 이라고도 하시지만, 거기에 강조점은 ‘길’ 이다. 여기서 ‘생명’ 과 ‘진리’ 는 예수께서 안내하시는 목적지라기보다 그분이 자신을 ‘길’ 이라고 선포할 수 있는 근거이다. 그분이 ‘진리요 생명’ 이시기 때문에 ‘길’ 이신 것. 아들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다.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이시다. 우리를 일으켜 세우고, 죄의 저주로 죽은 우리를 되찾아 하느님과의 관계를 돌려주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진리’ 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의해 드러난 계시의 선물이다

. 그것은 하느님과 동일시되는 것이 아니라, 이 지상에서 또 역사 내에서 활동하며 계시를 전해주는 그리스도와 성령과 동일시되고 있다.” 이 ‘진리’ 는 우리의 사고나 덕을 닦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강생의 신비를 통해, 또 성령의 선물로 우리를 만나러 오신 그리스도라는 ‘살아있는 길’(히브 10,20 참조)에 자신을 맡기는 겸손한 믿음을 통해서만이 획득할 수 있는 것.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이 모든 말씀을 알아듣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내용이다. 그래서 필립보가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8절)라고 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을 당신과 ‘하나이신’(요한 10,30; 17,11.21-22)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임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답답하게 여기신다. 그분이 하느님과 같은 분이심을 입증해주는 ‘말씀’ 과 ‘일’ 들을 보고 체험했음에도 말이다. 그것을 보는 눈은 믿음의 눈이어야 한다. 베드로 사도는 ‘돌’ 이라는 상징적 개념을 통해 그리스도를 제시하고 있다. 이 돌은 버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서는 ‘모퉁이의 머릿돌’ 로 삼으셨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머릿돌에다가 매 순간 자신들을 쌓아 나감으로써 교회라는 ‘신령한 집’ 을 완성시켜 나아간다.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은 살아있는 돌’ 이신 그분과의 결합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세례를 받은 모든 신앙인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5절) 드리는 ‘사제직’ 을 부여받고 있다. 이 사제직을 잘 수행하는 것은 크나큰 정신력과 희생정신이 필요하다. 이것이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신령한 제사’ 이다. 매일 아침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우리의 하루를 받고 있다. 그 하루는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미리 준비하신 하루이다. 그것은 지나치게 길지도 부족하지도 않으며, 별로 쓸데없는 허망 된 것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하루를 ‘걸작’ 이 되게 살라고 요청하신다. 이것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것. 만일 우리가 이 하루가 오래전부터 만들어져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그것이 인간적 차원에서 지닌 중요성을 이해하고, 이 하루를 그래서 신앙인으로서 역시 열심히 살고자 할 것. 이렇게 주님께 ‘신령한 제사’ 를 드릴 수 있을 것.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길이신 주님이신데, 그분을 통해야만 하느님께 갈 수 있다는데, 가는 길은 나의 길입니다.

 내가 편해야 하고, 나한테 이익이 되어야 하고, 나한테 도움이 되는 길만 가려 합니다. 주님의 길이 편한 길이 아닌데, 이익은 찾아볼 수도 없는 길인데, 나는 내 길이 넓고 편한 길이 길 바라면서 살아왔다. 진리이신 주님이신데, 그 진리이신 주님을 따라야 하느님께 가는데, 나에게 진리는 나입니다. 다른 이들의 이야기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더 진리이고, 어느 순간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보다도 내가 생각하고 내가 말하는 것이 더 진리라고 믿고 그렇게 행동하는 나입니다. 

거기엔 예수님이 안 계실 때가 참 많다. 생명이신 주님이신데, 그 생명에 내가 동참해야 하느님께 갈 수 있다는데, 주님은 그 생명을 얻기 위해 죽음의 길을 걸으셨는데, 나는 좀 더 잘 살기 위한 길만을 찾으며 주님이 가르쳐주신 생명에서 멀어지는 나입니다. 언제쯤 나를 내려놓을 수 있을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기 전에 나를 먼저 돌아봅니다. 주님께서 걸으신 길을 먼저 생각해 보아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진리가 나를 덮어버리면 좋겠다. 생명이신 주님이 보여 주신 생명이 뭔지 잊어버리지 않는 삶이었으면 합니다. “주님, 이 거룩한 신비의 은총으로 저희를 가득 채워 주셨으니 자비로이 도와주시어 저희가 옛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주님은 우리 삶에 문제도 주시지만, 해답도 주십니다. 이제 우리들은 기도로 잘 살펴보시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가면서 은총의 해답을 찾아내는 축복된 날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 - 앨버트 아인슈타인 -
♡2048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신앙인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3월 28일(욥기 1장~)

  헤르만 헤세는 ''그대의 생활은 그대가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려 노력하는 만큼의 의미가 생긴다.''

《당신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나요?》인생은 왕복차표를 발행하지 않는다. 일단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 R. 롤랑) 오늘도 조금씩 떠나고 있는 우리들, 떠난 만큼..멀어져 가고 있는데.. 어디로 가는 걸까요. 희망을 향해...? 목적을 향해...? 죽음을 향해...? 또 다른 어디....? 날마다 오늘을 떠나고 있는 우리들의 삶, 오늘 하루도...이만큼 떠나왔다. 그냥 그저 무의미하게 떠날 순 없다. 단순히...살았다는 걸로, 존재했다는 걸로는 만족할 수 없다. 만족해서도 안 됩니다

. 살아온 만큼, 떠나온 만큼, 사랑한 만큼... 후회없는 단 한 번의 삶이 되기 위하여, 멀리 떠나더라도 이 순간 아름답게 머무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왕복차표가 없는 삶입니다. 날마다 꿈꾸는 희망을 향해... 날마다 사랑의 행로를 따라... 덜 아프고, 덜 슬프고, 덜 외롭게... 가기로 합니다. 빈 손으로 닿아야 하는 종점, 빈 마음으로 닿아야 하는 막다른 그 곳, 손에 쥔 욕심 조금씩 놓아버리고 마음으로 붙잡고 있는 욕망 조금씩 털어버리고 스스로 짐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 무겁지 않도록 가볍게 가기로 합니다. 떠나고 있는 그대여,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지금 이 순간 어디를 향해 가고 있나요? 무엇을 향해 가고 있나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신앙인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첫째, ‘감사’ 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감사할 줄 모릅니다.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자신의 능력, 자신의 재능, 자신의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 잘 사는 것도, 지금 건강한 것도, 지금 높은 직책에 있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런가하면 당연하게 여기던 것을 상실하면 이웃을 탓하거나, 원망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면서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정성어린 헌금을 칭찬하셨다.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칭찬하셨다. 성체성사는 ‘감사’ 의 마음이 가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이라고 말씀하셨다. 성체성사의 중심에는 ‘감사’ 가 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항상 감사하십시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둘째, ‘유혹’ 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 봉사자옷을 입었어도,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되었어도 유혹은 바람처럼 소리 없이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도 3가지 유혹을 받으셨다.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는 유혹입니다. 높은 데서 뛰어내려보라는 유혹입니다. 권력을 주겠다는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극복하셨다. 악의 세력은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다음에 하지’ 라는 유혹입니다. ‘남들도 다 그러는 데’ 라는 유혹입니다. ‘나는 안 돼’ 라는 유혹입니다. 게으름과 자기 합리화 그리고 열등감은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유혹은 공든 탑을 무너지게 하고, 다된 밥에 재를 뿌리게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고백하였다. “주님 안에 편히 쉬기까지 내 마음은 언제나 불안합니다.” 성덕이 깊어도, 오랜 수양을 했어도 유혹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그래서 신앙인은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셋째 ‘고단함’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므로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슬퍼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순수하게 만들기 위한 것. 결국 없어지고 말 황금도 불로 단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황금보다 훨씬 더 귀한 여러분의 믿음은 많은 단련을 받아 순수한 것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에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차지하게 될 것.”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하느님의 큰 영광을 위해서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가야 합니다. 넷째는 ‘찬미’ 입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을 만나서 이렇게 노래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이다.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로다. 이제로부터 과연 만세가 나를 복되다 일컬으리니 능하신 분이 큰일을 내게 하셨음이요.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 이시로다.” 초대교회 신자들도 날마다 모여서 찬미와 찬송을 하였다. 행복은 찬미의 문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불행은 불평의 문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았다고 하셨다. 하느님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았다고 하셨다. 부모님은 아이들이 기뻐 뛰어노는 것만 보아도 행복해 합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찬미와 찬송을 드리며, 서로 사랑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성령의 힘을 저희에게 주시어 주님의 뜻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거룩한 삶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바오로가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시어, 그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고 예언을 하였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우리들이 무엇을 바라고, 어떤 지향으로 기도하든지, 그대로 “내가 하고자 하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소망과 기도의 응답을 받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행복한 삶은 더 적게 소유하고 더 많이 경험하는 것이다." - 나탈리 골드윈 -
♡2048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신앙인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3월 28일(욥기 1장~)

  헤르만 헤세는 ''그대의 생활은 그대가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려 노력하는 만큼의 의미가 생긴다.''
《당신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나요?》인생은 왕복차표를 발행하지 않는다. 일단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 R. 롤랑) 오늘도 조금씩 떠나고 있는 우리들, 떠난 만큼..멀어져 가고 있는데.. 어디로 가는 걸까요. 희망을 향해...? 목적을 향해...? 죽음을 향해...? 또 다른 어디....? 날마다 오늘을 떠나고 있는 우리들의 삶, 오늘 하루도...이만큼 떠나왔다. 그냥 그저 무의미하게 떠날 순 없다. 단순히...살았다는 걸로, 존재했다는 걸로는 만족할 수 없다. 만족해서도 안 됩니다. 살아온 만큼, 떠나온 만큼, 사랑한 만큼... 후회없는 단 한 번의 삶이 되기 위하여, 멀리 떠나더라도 이 순간 아름답게 머무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왕복차표가 없는 삶입니다. 날마다 꿈꾸는 희망을 향해... 날마다 사랑의 행로를 따라... 덜 아프고, 덜 슬프고, 덜 외롭게... 가기로 합니다. 빈 손으로 닿아야 하는 종점, 빈 마음으로 닿아야 하는 막다른 그 곳, 손에 쥔 욕심 조금씩 놓아버리고 마음으로 붙잡고 있는 욕망 조금씩 털어버리고 스스로 짐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 무겁지 않도록 가볍게 가기로 합니다. 떠나고 있는 그대여,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지금 이 순간 어디를 향해 가고 있나요? 무엇을 향해 가고 있나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신앙인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첫째, ‘감사’ 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감사할 줄 모릅니다.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자신의 능력, 자신의 재능, 자신의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 잘 사는 것도, 지금 건강한 것도, 지금 높은 직책에 있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런가하면 당연하게 여기던 것을 상실하면 이웃을 탓하거나, 원망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면서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정성어린 헌금을 칭찬하셨다.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칭찬하셨다. 성체성사는 ‘감사’ 의 마음이 가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이라고 말씀하셨다. 성체성사의 중심에는 ‘감사’ 가 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항상 감사하십시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둘째, ‘유혹’ 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 봉사자옷을 입었어도,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되었어도 유혹은 바람처럼 소리 없이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도 3가지 유혹을 받으셨다.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는 유혹입니다. 높은 데서 뛰어내려보라는 유혹입니다. 권력을 주겠다는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극복하셨다. 악의 세력은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다음에 하지’ 라는 유혹입니다. ‘남들도 다 그러는 데’ 라는 유혹입니다. ‘나는 안 돼’ 라는 유혹입니다. 게으름과 자기 합리화 그리고 열등감은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유혹은 공든 탑을 무너지게 하고, 다된 밥에 재를 뿌리게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고백하였다. “주님 안에 편히 쉬기까지 내 마음은 언제나 불안합니다.” 성덕이 깊어도, 오랜 수양을 했어도 유혹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그래서 신앙인은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셋째 ‘고단함’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므로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슬퍼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순수하게 만들기 위한 것. 결국 없어지고 말 황금도 불로 단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황금보다 훨씬 더 귀한 여러분의 믿음은 많은 단련을 받아 순수한 것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에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차지하게 될 것.”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하느님의 큰 영광을 위해서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가야 합니다.
넷째는 ‘찬미’ 입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을 만나서 이렇게 노래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이다.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로다. 이제로부터 과연 만세가 나를 복되다 일컬으리니 능하신 분이 큰일을 내게 하셨음이요.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 이시로다.” 초대교회 신자들도 날마다 모여서 찬미와 찬송을 하였다. 행복은 찬미의 문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불행은 불평의 문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았다고 하셨다. 하느님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았다고 하셨다. 부모님은 아이들이 기뻐 뛰어노는 것만 보아도 행복해 합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찬미와 찬송을 드리며, 서로 사랑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성령의 힘을 저희에게 주시어 주님의 뜻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거룩한 삶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바오로가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시어, 그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고 예언을 하였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우리들이 무엇을 바라고, 어떤 지향으로 기도하든지, 그대로 “내가 하고자 하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소망과 기도의 응답을 받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행복한 삶은 더 적게 소유하고 더 많이 경험하는 것이다." - 나탈리 골드윈 -


♡2050회 . “‘바닷물로 침몰시킬 수 없었던 사랑’”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3월 30일(시편 1편~)

  빈스 롬바르디는 "작은 행동의 합이 큰 결과를 낳는다." 
《옆에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삶 자체도 의미가 없는건가요?》1912년 타이타닉호가 빙산에 부닥쳐 침몰하는 과정은 영화로 재연됐다. 하지만 영화만으로는 실제 상황을 다 알기는 어렵다. 당시 생존자인 부선장은 오랜 세월 침묵 끝에 드디어 사고 당시의 이야기를 공개했다. 1912년 4월 14일은 공포의 날이었다. 사고로 1,514명이 사망했고 710명이 구조되었다. 사고 당시 38세였던 타이타닉호의 이등 항해사 '찰스·래이틀러' 씨는 구조된 승객을 책임지기 위해 선원 중 유일하게 구조된 승무원이었다. 아래는 '찰스·래이틀러' 씨의 타이타닉호 참사의 자세한 사정을 담은 17페이지 분량의 회고록입니다.

 선장이 침몰을 앞두고 여성과 아이를 먼저 구조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많은 여성승객들이 가족과의 이별 대신 남아있기를 선택했다. 저는 높은 소리로 ‘여성과 아이들은 이리 오세요!’ 라고 불렀지만, 가족을 버리고 혼자 구명보트에 오르려는 여성과 아이는 몇 명 없었다. '래이틀러' 씨는 평생 그 밤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겁니다!“ 라고 말합니다. 첫 구명보트가 바다로 내려가고, 저는 갑판 위에 있던 한 여성에게 말했다. “부인, 어서 구명보트에 오르세요!” 그녀는 뜻밖에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저는 배에 남겠어요.” 이 말을 들은 여성의 남편이 “그러지말고 어서 타세요! 여보!” 라고 말하자, 여성은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혼자 가지 않겠어요. 당신과 함께 이 배에 남을 거에요.” 그것이 제가 본 그 부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당시 세계 최고 부자였던 애스터 IV씨는 임신 5개월 된 아내를 구명보트에 태워 보내며 갑판 위에 앉아, 한 손에는 강아지를 안고 다른 한 손에는 시가 한 대를 피우면서 멀리 가는 보트를 향해 외쳤다. "아이러브 유!“ 승객들을 대피시키던 선원 한 명이 '애스터' 씨에게 보트에 타라고 하자, '애스터' 씨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사람이 최소한의 양심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남은 한 자리를 곁에 있던 한 아일랜드 여성에게 양보했다. 며칠 후, 배의 파편들에 의해 찢겨진 '애스터' 씨의 시신을 생존자 수색 중이던 승무원이 발견했다. 그는 타아타닉호 10대도 만들 수 있는 자산을 가진 부호였지만, 살아남을 수 있는 모든 기회를 거절했다. 자신의 목숨으로 양심을 지킨 위대한 사나이의 유일한 선택이었다.

 성공한 은행가였던 '구겐하임' 씨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순간에도 화려한 이브닝 드레스로 갈아 입으며 이처럼 말했다. “죽더라도 체통을 지키고 신사처럼 죽겠습니다.” '구겐하임' 씨가 아내에게 전해준 쪽지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이 배에는 나의 이기심으로 구조받지 못하고 죽어간 여성은 없을 것이오. 나는 금수만도 못한 삶을 살 바에야 신사답게 죽을 것이오.” 미국 메이시(Macy’s) 백화점 창업자 '슈트라우스' 씨는 세계 2번째 부자였다. 그가 어떤 말로 설득해도 아내 '로잘리' 씨를 구명보트에 태우지 못했다. 아내 '로잘리' 씨는 나는 “당신이 가는 곳에 항상 함께 갔어요. 세상 어디든지 당신과 함께 갈 거예요” 라며 남편을 두고 배에 오르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다. 8번 구명보트의 책임 선원이 67세의 '슈트라우스' 씨에게 “누구도 어르신이 보트를 타는 것을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며 구명정 탑승을 권했다. 이 말을 들은 ‘슈트라우스' 씨는 단호한 말투로 “다른 남성들보다 먼저 보트에 타라는 제의는 거절하겠습니다” 라며 생사의 순간에도 초연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63세의 아내 '로잘리' 씨의 팔을 잡고 의연하게 갑판 위의 의자에 앉아 최후의 순간을 기다렸다. 

현재 뉴욕 브롱크스에 '슈트라우스' 부부를 기리는 기념비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바닷물로 침몰시킬 수 없었던 사랑’” 프랑스 상인 '와트열' 씨는 두 아이를 보트에 탄 여인들에게 부탁하고 배 위에 남아 아이들과 작별했다. 두 아들은 이렇게 구조되었고 세계 각지의 신문사들이 어머니를 찾을 수 있도록 연달아 사진을 실어주어 어머니와는 재회할 수 있었지만, 배에 남겨진 아버지는 다시 볼 수 없었다. 남편과 미국으로 신혼여행을 떠난 '리더파스' 씨는 남편을 꼭 껴안고 혼자 살아남는 것을 거부했다. 남편은 주먹으로 그녀를 기절시킬 수밖에 없었다. 정신이 돌아왔을 때 그녀는 이미 바다 위에 떠 있는 구명보트 안이었다. 그녀는 평생 재가하지 않았으며 남편을 그리며 살았다. 그리스 로잔의 생존자모임에서 '스미스' 부인은 자신에게 자리를 양보한 여성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당시 제 두 아이가 구명보트에 오르자, 만석이 돼서 제 자리는 없었다. 이때 한 여성분이 일어나서 저를 구명보트로 끌어당기면서 말했다. "올라오세요. 아이들은 엄마가 필요합니다!” 그 대단한 여성은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녀를 위해 “이름 없는 어머니” 기념비를 세웠다.

 희생자 중에는 억만장자 '아스테드', 저명 신문가 '헴스테드', 육군 소령 '바트', 저명 엔지니어 '루오부어' 등 사회의 저명인사가 많았지만, 이들 모두 곁에 있던 가난한 농촌 부녀들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타이타닉호의 주요 승무원 50여 명 중 구조를 책임졌던 이등 항해사 '래이틀러' 외 전부 자리를 양보하고 배와 함께 생을 마감했다. 새벽 2시, 각자 도망가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1번 연산사 '존·필립스' 씨는 여전히 전산실에 앉아 마지막 순간까지 ‘SOS’ 를 입력하며 자신의 보직을 떠나지 않았다. 선미가 물에 가라앉기 시작했을 때, 삶과 죽음의 마지막 순간, 사람들이 서로에게 외쳤다.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을 사랑해요!“ 그날, 우리 모두 위대한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줬다. 제가 당신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다. 일본 철도원 차장인 '호소 노텍스트' 씨는 여장을 한 채 여성과 어린이들로 채워진 10번 구명보트에 올랐다. 그는 귀국 후 바로 퇴직을 당했다.

 모든 일본 신문사와 여론은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했으며 그는 십여 년 뒤 후회와 수치로 가득 찬 삶을 마감했다. 1912년 타이타닉호를 기리는 자리에서 타이타닉호를 건조한 선박회사 'White Star Line'는 희생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남성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해상 규칙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들의 행동은 약자들에 대한 배려이자, 그들의 개인적인 선택이었습니다.” ‘Unsinkable’ 의 저자 '다니엘 알란 버틀러' 는 약자를 살리기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기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태어나서부터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책임감이라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삶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놓치고 혼자 남겨져 돈과 유산으로 외롭게 살아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죽음 혹은 삶의 어떤 고난과 마주친다 해도,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죽음을 선택한 분들의 희생정신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매일 만사에 허덕이는 우리 삶,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살아갈까요, 지금 내 삶을 지탱하고 이끌어가는 것은 무엇일까요? 내가 이 세상 마지막 순간까지 가슴에서 놓아서는 아니될 가치는 무엇일까요? 이 물음에 답하며, 잊었던 내 삶의 가치를 찾아가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지금 이 순간 우리들이 이곳에서, 내일 저곳에서 “사람이 먼저” 라는 하느님의 사랑을 담고 말씀을 전하며  천국을 향한 은총 가득한 순례자들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길을 안다는 것과 그 길을 걷는다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 모피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