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회 “아이고 저놈이 자라서 뭐가 될까?”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2월 28일(잠언 1장~ ) 이택광은 ''오늘날 문제는 오늘날 (자기계발과 교양으로서의) 철학이 '세계' 를 내던져버리도록 한다는 데 있다. 우리의 사고지평에서 세계를 지워버린다는 데 있다. 즉 오늘날 문제는 세계다. 세계(남들)와의 관련 속에서 나를, 나의 역할과 위치를, 존재의의를 생각하고 고민해야 한다.''《맹인의 등불》맹인 한 사람이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손에 등불을 든 채 걸어오고 있다. 마주 오던 한 사람이 물어 보았다. 앞을 볼 수 없는데 등불을 왜 들고 다닙니까? 맹인이 대답했다. 당신이 제게 부딪히지 않기 위해서요. 이 등불은 내가 아닌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일본의 부모들은 자녀에게 어느 장소에서든 남에게 폐를 끼치는 행동을 하지 말라며 훈계한답니다. 미국의 부모들은 자녀에게 남에게 양보 하라고 가르친답니다. 그에 반해 한국의 부모들은 자녀에게 절대 남에게 지지 말라고 가르친답니다. 우리에게 왜 배려와 겸손이 쉽게 자리를 잡지 못하는가를 알려주는 이야기 같다.「욕심」은 부릴수록 더 부풀고,「미움」은 가질수록 더 거슬리며,「원망」은 보탤수록 더 분하고,「아픔」은 되씹을수록 더 아리며,「괴로움」은 느낄수록 더 깊어지고,「집착」은 할수록 더 질겨지는 것이니 부정적인 일들은 지금 이 순간 모두 지우는 게 좋다. 지워버리고 나면 번거롭던 마음이 편안해지고 마음이 편안해지면 사는 일이 언제나 즐겁습니다.「칭찬」은 해줄수록 더 잘하게 되고,「정」은 나눌수록 더 가까워지며,「사랑」은 베풀수록 더 애틋해지고,「몸」은 낮출수록 더 겸손해지며,「마음」은 비울수록 더 편안해지고,「행복」은 감사할수록 더 커지는 것이니, 평범한 일상 생활에서도 언제나 감사한 마음으로 즐겁고 밝게 사는 것보다 더 좋은 게 또 있을까요? 오늘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멋진 하루 되세요. 공군 대위로 전역하고, 현대자동차에 입사하여 차장으로 고속 승진했다. 당시 대졸 초임이 2만원일 때 자신은 15만원을 받았다. 좋은 직장을 퇴사하고 아들 둘, 딸 셋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왔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인 큰아들이 교도소에 가게 되었다. 자식을 잘 키우겠다고 이민 왔는데, 아들은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고, 미국 아이들에게 놀림감이 되었다. 그 때마다 아들은 반격을 가했고, 이 때문에 교장에게 여러 차례 불려가 벌을 받았다. 불만이 쌓인 아들은 어느 휴무일, 이틀 동안 다른 미국인 친구와 함께 학교에 들어가 건물 이곳저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 사건은 지역신문 1면에 났고, 온 가족은 좁은 응접실 구석에 모여 앉아 통곡했다. “한국인의 얼굴에 먹칠했다.” 는 비난은 기본이었고, 등하교 때 “그 집을 피해 가라.” 는 한인들도 있었고, “같은 교육구 학교에 내 아이를 보낼 수 없다.” 며 전학을 시키는 부모도 있었다. 나이 젊은 어떤 한인은 면전에서 “당신 자식 교도소에 갔다며?” 하고 빈정거리며 말했다. 겨우겨우 섬기던 교회에서 조차도 성도들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아 출석을 끊었다. 교장은 “세상에 이렇게 학교 건물을 때려 부순 사건은 처음입니다. 카운티(County: 자치주) 내의 어떤 학교에도 전학이 불가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라고 했다. 그는 '아들 죄가 바로 내 죄' 라 생각하고 속죄를 위해 매주 주말에 온 가족을 동원하여 학교 청소를 하겠다고 했고, 교장은 '별난 아버지' 라는 표정으로 허락했다. 이 별난 행동은 나중에 다시 한 번 플로리다 주 주류 사회를, 아니 전 미국을 흔들었다. 교도소에 간 중2 아들의 속죄를 위해 부부가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니는 네 아이와 함께 주말마다 학교에 나와 청소하는 장면을, 운동장을 청소하는 광경을 AP통신 기자가 “가족의 명예와 아들을 위해 부모는 모른 채 하지 않았다.” 는 제하의 기사를 보도했다. 기사에는 “내 아들이 죄를 지었으면, 내가 죄를 지은 것이다. 내 아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 변상은 물론 어떤 일이든 하겠다.” 라는 그의 말이 들어 있었다. 美 전역의 신문들이 AP통신 기사를 받아쓰면서, 아들이 다니는 학교에는 며칠 만에 수백 통의 편지가 왔다. 변호사비로 쓰라며 5 불, 10 불 짜리 수표와 현찰을 동봉하기도 했다. 미국의 신문들은 아버지의 '아들 죄가 바로 내 죄' 라는 고백을 들어 “미국인 부모들도 본받아야 한다.” 라거나 “미국 교육계도 유교적 가족관계에서 이뤄지는 독특한 교육 철학을 배워야 한다.” 라는 논지의 기사와 논평을 내보냈다. 며칠 후에 반가운 소식이 가족에게 전달됐다. 법정에서 아들을 ‘방면한다’ 는 소식이었다. 교육청에서는 다니던 학교로는 되돌아 갈 수 없지만, 멀리 떨어진 다른 학교에는 갈 수 있다는 서한도 보내왔다. 그 후 말썽꾼 아들은 변하여 센트럴 플로리다 대학교(UCF) 학사와 플로리다 텍(FIT) 석사 학위를 받은 후 미 우주항공국(NASA) 산하 방산업체에 근무하며, 고위 우주선 탑재 전문가가 되었다. 우주선을 쏘아 올릴 때 수십 명이 달라붙어 점검하는데, 그 가운데 최고참으로 일하고 있다.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오는 'VVIP(Very Very Important Person)' 들에게 직접 브리핑하는 유일한 한국계라고 합니다. '기름때 묻은 원숭이의 미국 이민 이야기' 라는 책을 쓴 송석춘 씨 이야기입니다. 큰아들 송시영 씨가 사고를 쳤을 때만 해도 “아이고 저놈이 자라서 뭐가 될까?” 하고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지금은 가장 가까운 곳에 살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낚시를 시도 때도 없이 함께 가 준다고 합니다. 선트러스트 은행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는 큰딸도 명절 때마다 제법 큰 용돈을 보내주고 있답니다. 한 아버지의 대속(代贖)으로 사고뭉치 아들이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고, 자녀들 모두 스스로 제자리를 찾아 우뚝 일어선 아름다운 가정사 입니다. 세상은 누군가를 위해 대속(代贖)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대속(代贖)할 수 있다. 내 몸처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님은 우리 삶에 문제도 주시지만, 해답도 주십니다. 이제 더 가까이 주 예수님께 나아가 기도로 잘 살펴보시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가면서 은총의 해답을 찾아내는 축복된 우리들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당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진실은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에 있다!'' - 가우스 - |
♡2020회 신앙인들이 자기들과 다르게 사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2월 29일(지혜서 8장~ ) 존 C. 맥스웰은 "도전은 성장의 시작이다." 《행복은....》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가진 사람은 행복의 주인공이 되고 고난에 굴복하고 희망을 품지 못하는 사람은 비극의 주인공이 됩니다. 하루를 좋은 날로 만들려는 사람은 행복의 주인공이 되고 나중에 라고 미루며 시간을 놓치는 사람은 불행의 하수인이 됩니다. 힘들 때 손 잡아주는 친구가 있다면 당신은 이미 행복의 당선자이고 그런 친구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행복 낙선자입니다. 사랑에는 기쁨도 슬픔도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행복하고 슬픔의 순간만을 기억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작은 집에 살아도 잠잘 수 있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작아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남의 마음까지 헤아려 주는 사람은 이미 행복하고 상대가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는 것만 섭섭한 사람은 이미 불행합니다. 미운 사람이 많을수록 행복은 반비례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행복은 정비례 합니다. 너는 너, 나는 나라고 하는 사람은 불행의 독불장군이지만 우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연합군입니다.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하지만 미움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누구는 저렇게 사는데 "나는"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저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요한 17,14-17)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는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는 자들이 있다. (요한 3,19) 그들은 복음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을(신앙인들을) 미워하고 박해합니다. 신앙인들이 자기들과 다르게 사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일에 대해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요한 15,18-19) 또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에는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 예수님의 말씀들을 겉으로만 보면 ‘편 가르기’ 를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편 가르기’ 를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입니다. 신앙인들을 자기들과 다른 편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마치 이리 떼가 양들을 대하는 것처럼 그렇게 신앙인들을 대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 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을 이리 떼로 대하시지 않았다. 안 믿는 사람들 자신들이 이리 떼처럼 행동한 것. 우리는 ‘편 가르기’ 를 하면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적’ 도 아니고, ‘원수’ 도 아닙니다. 이웃이고, 형제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신앙인들을 마치 이리 떼가 양들을 대하듯이 대하더라도 신앙인들은 그들도 ‘양들’ 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들 자신들은 모르고 있거나 부정하겠지만, 그들은 ‘잃은 양’ 들입니다. 우리는 ‘잃은 양’ 들도 우리와 함께 구원받기를 희망해야 하고, 이 희망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고, 신앙인들을 미워하고 박해한다고 해서 그들을 피하고 멀리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일도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세상살이가 너무 고달프고 힘들어서 하느님 나라가 빨리 오기를 희망하는 것은, 또는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희망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희망을 이루겠다고 자살을 하는 것은 ‘큰 죄’ 를 짓는 일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신앙인들을) 보호하려고 세상에서 빼내서 하느님 나라로 데려가신다면, 그것은 나머지 사람들을 모두 ‘버리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그것은 ‘모든 사람’ 을 구원하려고 오신 것과 모순이 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구제불능처럼 보이는 사람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구원하려고 애쓰시는 분입니다.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라는 말씀에서 ‘악’ 은, 세상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악’ 을 뜻합니다. 겉으로는 제자들을(신앙인들을) 악에서 지켜 달라는 기도이지만,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세상 사람들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악에서 지켜 달라는 기도로 생각할 수 있다. ‘악’ 이라는 것이 신앙인들만 공격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는 안 믿는 사람들을 더 심하게 공격하고 있는데, 신앙인들보다 안 믿는 사람들의 저항력이 더 약합니다. 하느님은, 또 예수님은 신앙인들만 보호하시고 안 믿는 사람들은 악에 의해서 멸망하든지 말든지 방치하시는 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주님의 기도’ 를 바칠 때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악을 물리치기 위한 싸움에서 ‘기도’ 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신앙인들의 세상살이 방법’ 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세상살이를 하는 방법은 바로 “거룩하게 사는 것” 입니다. 신앙인들은 ‘거룩하게 사는 사람들’ 이기 때문에 세상 속에서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거룩하게 사는 것은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말씀” 으로 거룩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말씀’ 안에서 살아야 하고, 지금 이 순간 ‘말씀’ 대로 살아야 하고, 지금 이 순간 ‘말씀’ 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끊임없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지금 이 순간 말씀을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거룩하게 사는 것’ 의 반대는 ‘속되게 사는 것’ 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 2,15) 별처럼 빛나라는 말은 세상을 구원의 빛으로 인도하는 등불이 되라는 뜻입니다.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라는 말을 간단하게 줄이면 ‘거룩한 사람’ 이 되라는 것. 신앙인이 거룩하게 사는 것은 그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고, 세상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해서도 중요한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유대인들을 꾸짖으면서 했던 말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이 됩니다. “남은 가르치면서 왜 자신은 가르치지 않습니까?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설교하면서 왜 그대는 도둑질을 합니까? 간음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왜 그대는 간음을 합니까? 우상을 혐오한다고 하면서 왜 그대는 신전 물건을 훔칩니까? 율법을 자랑하면서 왜 그대는 율법을 어겨 하느님을 모욕합니까?"(로마 2,21-23)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려면 신앙인들이 지금 이 순간 먼저 복음대로 살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을 회개시키려면 신앙인들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려면 신앙인들이 먼저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들이 무엇을 바라고, 어떤 지향으로 기도하든지, 그대로 예수님의 기도가 되어 “내가 하고자 하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소망의 응답, 기도의 응답을 받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개미 같은 벌레도 집을 짓기 위해서는 역시 기술을 배우고 있다. 항차 사람이 배우지 않아서야.'' - 예기 - |
2021회 희생이 없는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3월 1일(집회서 22장~ ) 알버트 아인슈타인 "미래는 자신이 만든다." 《매 순간이 당신의 것이다.》언젠가 대단한 일을 해 보아야지! 큰 소리 치면서도 순간순간을 헛되게 놓치고 마는 것은 왜일까? 많은 이들이 이미 주어진 삶을 붙들 생각은 하지 않고, 정말 잘 살 수 있을 ‘언젠가’ 를 위해 스스로를 다그치기만 한다. 그들에게는 오늘이 그날을 위한 준비 기간일 뿐이다. 삶이란 매 순간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간을 소중하게 여기며 사는 사람은 현재도 이미 잘 살고 있는 사람이다. 살아가는 매순간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자기 자신을 분노에 내 맡기면! 행복을 자기 손으로 파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중에 즐기면 된다고 생각하고, 무작정 미루는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자신에게 기회가 어느 정도 남아 있는지, 누가 알겠는가? 그런 기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항상 더디게 찾아온다. 게다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서두름은 기쁨의 적이다. 기쁨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사는 법을 배워야한다. 만일 당신이 지금을 산다면 이 순간은 당신이 기대하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풀어 준다. 현재 즐거운지 그렇지 않은지를 굳이 따지거나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당신이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숨쉬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니까! 사람은 자신이 얼마 동안 살지 알 수 없으며 어떤 삶이 허락되어 있는지 신의 뜻을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안젤름 그륀 신부 지음- 아일랜드 속담에 ''마음이 끌리는 것만으로 결혼하지 말라. 누가 보든지 이 여자(남자)라면 할 정도라야 한다. 바가지 긁는 소리를 듣고 싶으면 결혼하라, 칭찬을 듣고 싶으면 죽어라.'' 앙드레 모루아는 행복한 결혼에는 애정 위에 언젠가는 아름다운 우정이 접목되게 마련이다. 이 우정은 마음과 육체가 서로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한층 견고한 것. 끝까지 지금 이 순간 서로 사랑하라. ‘여자는 결혼할 때까지만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남자는 전혀 걱정 없이 살다가 결혼하고 나서 걱정이 생긴다.’ 는 우스갯소리를 합니다. 자기가 베푼 만큼 상대가 해주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이 생깁니다. 상대를 통해서 덕을 보기 위해서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닐진대 살다보면 그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결국 사랑한다고 혼인을 하고서도 서로 성격이 맞지 않는다며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사랑으로 엮어진 혼인계약을 일생 동안 지키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입니다. 부부가 지금 이 순간 일심동체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동상이몽이 더 많게 느껴집니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마음의 관심을 지금 이 순간 서로 다른 곳에 두면서 화목하고 행복하기란 불가능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혼하지 말라’ 고 강력히 말씀하십니다. 더욱이 마음으로 간음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런 잘못에서 벗어나기를 강조하시며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네 오른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버려라” 하고 단호한 결단을 촉구하셨다. 더 사랑해야 할 것은 덜 사랑하고, 덜 사랑해도 될 것을 더 사랑한다면 사랑의 질서가 무너지는 것. 결혼한 사람이 배우자에게 마음을 두어야지 지금 이 순간 다른 사람에게서 매력을 느끼고 기대한다면 분명히 잘못된 것. 마음속이 지옥이면 지금 이 순간 멀쩡하게 잘 살아도 소용이 없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죄는 지금 이 순간 단호하게 거절해야 합니다. 이혼은 갑자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고 또 참다가 더 이상 안 되겠다고 결단을 내리는 것. 그러니 빌미를 줄 수 있는 마음단속을 미리 잘해야 합니다. 원인제공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동상이몽’ 이라는 말은 두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두 마음을 품는 것이 이혼의 전조입니다. 한결같은 사랑의 마음이 지켜지길 희망합니다. 이혼을 금지하는 것은 결국 가정을 지키라는 것. 가정을 지켜 자녀의 출산과 교육을 통해 후손을 이어가야 합니다. 사실 후손의 번성은 하느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이기적인 마음으로 쉽게 이혼을 생각함으로써 자신은 물론 가정이 불행해지고 자녀 또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제발, 이혼하자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헤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 서로의 신뢰가 중요합니다. 신뢰가 깊어지기 위해서는 마음을 주고받는 대화를 자주 해야 합니다. ‘구지 말을 해야 알아듣느냐?’ 하는 분도 있지만 ‘사랑한다, 고맙다, 미안하다, 힘내라, 수고했다’ 는 등 상대방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말을 자주 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읽힙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고와 땀 없이 좋은 열매를 얻을 수는 없는 법. 화목한 가정을 이룬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목한 가정을 원하는 만큼 지금 이 순간 서로의 노력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이 만남을 통해 부족함을 채워주고 좋은 점을 키워가며 닮아가고 만들어 가는 것이지 모두가 완벽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은 기대 때문에 실망하고 좌절하며 불행을 자초하는 경우가 있다. 결혼은 서두르지 말 것이며 충분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부모도 삶의 경륜 안에서 얻어진 가르침을 자녀에게 잘 전해주어야 하겠다. 일생을 함께 살아가야 할 배우자를 선택하면서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좋겠다. 성격이나, 경제적인 능력도 중요하지만 특히 하느님 안에서 사는 사람인가? 허물과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채워줄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가를 봤으면 합니다. 준비가 소홀하면 그만큼 힘겨워합니다. 준비된 희생을 감당하는 사랑으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지금 이 순간 서로에게 덕을 보려고 하지 말고 서로에게 축복이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한 형제가 공동체에 소속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공동체와 그 사람이 계약을 맺는 것. 마치도 결혼 서약문에서 결혼하는 한 쌍의 부부가 서약하듯이 서약하는 것. 기쁠 때나 성할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괴로울 때나 절망의 나락에서 허덕일 때도 역시 형제이기를 서로에게 약속하는 것입니다. 성체 앞에 무릎을 꿇고 아닙니다. 아닙니다. 전 다만 주님의 자비와 사랑이 필요한 죄인임을 고백하고 기도하는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전쟁터에 나갈 때는 한 번 기도하고, 바다로 항해를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며, 결혼할 때는 세 번 기도한다” - 러시아 속담 - |
♡2022회 사랑이 없으니 기쁨도 없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3월 2일(이사야서 2장~ ) 프랭클린은 ''나무에 가위질을 하는 것은 나무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꾸지람을 듣지 않고 자란 아이는 똑똑한 사람이 될 수 없다. 겨울에 추위가 심할수록 오는 봄의 나뭇잎은 한층 푸르다. 사람도 역경에 단련되지 않고서는 큰 인물이 될 수 없다.''《길이 끝나는 곳에서》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길이 끝난 그곳에서 다시 새로운 길은 시작된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고 생각되거든 잠시 쉬고 주변을 둘러보라. 그 어디엔가 반드시 다시 시작되는 길이 있을 것이다. 인생의 길에 막다른 골목은 없다. 하나의 길이 닫히면 또 다른 길이 열리는 것이 인생이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길은 시작된다. 좋은 길은 어디에든 있는 법이다. - 『천직, 내 가슴이 시키는 일』중에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 예수님에 대한 ‘믿음’ 과 예수님을 ‘사랑’ 하는 일과 예수님의 ‘계명을 실천’ 하는 일은 모두 하나로 일치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머릿속으로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 이나 ‘믿는다고 말하는 것’ 만으로는 ‘믿음’ 이라고 말할 수 없다. 신앙인의 ‘믿음’ 은 곧 ‘삶’ 이 되어야 하고, 그 ‘삶’ 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 입니다 . 또 만일에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좋아하는 것만으로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인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다. 신앙인의 사랑 실천은 좋아하는 감정에 관한 일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뜻합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실천하면서도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주의’ 에 빠져 있는 것. 사랑 없는 실천은, 멍에와 족쇄에 묶여 있는 것과 같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 에 나오는 큰아들이 사랑 없는 실천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루카 15,29-30) 여기서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라는 말은, 큰아들이 작은아들과는 다르게 대단히 성실하게 일했음을 나타내지만, 동시에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없이 ‘일만’ 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아버지를 사랑해서 일한 것이 아니라, 맹목적으로 일한 것. 사랑이 없으니 기쁨도 없다. 그는 종이 아니라 아들인데도, 자기 자신을 종으로 전락시켰다. 그의 성실함의 가치는 인정되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라는 말은 그의 ‘순종’ 을 나타내는데, 사랑도 없고 기쁨도 없는 상태에서의 순종은 ‘자녀의 순종’ 이 아니라 ‘노예의 복종’ 일 뿐입니다. 그의 순종도 별로 가치가 없는 일입니다.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의 성실함은 겉으로만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고 마음속은 친구들과 놀고 싶어 하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혹시라도, “놀고 싶은 마음을 참고 성실하게 일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하지 않는가?”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기꺼이’ 참는 것과 ‘억지로’ 참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화가 나 있는 상태에서 억지로 참았을 뿐입니다. 그러니 마음속으로는 계속 죄를 짓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도 ‘되찾은 아들의 비유’ 에 나오는 큰아들 같은 태도로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할 때가 많다. 사랑도 없이 기쁨도 없이 겉으로만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실천하면서, 자기 스스로 “나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 라고 착각할 때가 많다는 것. 남들이 보기에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속마음을 보십니다. 겉으로만 잘하는 것은 위선이라는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또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가, 아닌가? 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 또는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정말로 잘하는 사람입니다. 계명을 지키긴 하지만 사랑 없이 지키는 사람과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판단은 자기 스스로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의 신앙생활도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판단은 하느님께서 하실 것.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솔직하게 반성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기준은 내가 내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준은 이미 예수님께서 정해 놓으셨고, 신앙인은 예수님의 마음에 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 말은 ‘사랑’ 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다. 사랑 실천에 대해서 내 마음대로 “이것으로 충분하다.” 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이웃 사랑’ 의 경우에, 사랑 실천을 얼마나, 어떻게 할 것인지는 내 쪽에서 마음대로 판단할 일이 아니라 그 이웃의 입장에서 판단할 일입니다. ‘하느님 사랑’ 의 경우에는 하느님(예수님)께 기쁨을 드리는 일을 하는 것이 사랑 실천인데,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은 무한하기 때문에 인간 쪽의 사랑 실천은 아무리 해도 부족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참 종교’ 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종교도 많고 종파도 많은데, 그 가운데에는 이단도 많고 사이비도 많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고,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을 지극정성으로 섬기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고, 자기들이 마음대로 정해 놓은 어떤 규정이나 전통만 잘 지키고 있다면, 그것은 이단이거나 사이비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종파는 예수님을 믿는 종파가 아닙니다. 사이비 종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일들을 하면서도 자기들은 예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공동선과 사랑을 거스르는 일들을 할 때 그런 태도를 자주 보입니다. 사랑이 없는 것은 사이비로 전락하는 지름길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주님의 은총을 잊지 않고 감사하시기를...특히 우리들이 하는 모든 일이 하느님께는 영광이 되고, 예수님께 기쁨이 되는 복된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인내는 영혼을 강하게 하고. 기분을 좋게 해주고, 화를 참게 해주고, 질투를 없애고, 교만함을 억제하고, 말을 제어한다.'' - 조지 혼 - |
♡2023회 재난은 인간의 시금석이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3월 3일(이사야서 46장~ ) 플래처는 ''꿈꿔왔던 일들이 이루어질 때만큼 기분 좋은 일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상상했던 꿈이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꿈을 나누며 그 꿈을 이루고자 함께 노력하고 나누면 조금은 더 빨리 더 쉽게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재난은 인간의 시금석이다.'' 《마음이 아름다워지는 화장품을》주름이 생긴 이마에는 ‘상냥함’ 이라고 하는 크림이 좋다. 이 크림은 주름을 없애 주고 기분까지 좋아지게 한다. 입술에는 ‘침묵’ 이라는 고운 빛의 립스틱을 발라보라. 이 립스틱은 무자비한 험담으로 뒤틀려진 입술을 예쁘게 바로 잡아 주는 효과도 있다고 맑고 예쁜 눈을 가지려면 ‘단정함’ 이라는 안약을 사용하자. 최선의 효과를 얻으려면 어디를 가든지 그 안약을 지참해야 하고 피부를 곱게 하고 싶으면, ‘미소’ 라는 로션을 바르면 피부가 촉촉하고 부드러워진다. 거울을 보고 미소를 짓고 하루를 시작하여 보자. 가장 이상적인 피부영양제 화장품은 ‘영성체’ 이다. 그리고 기가 막힌 피부 청결용 세안비누는 ‘고해성사’ 가 최고라고 한다. 그리고 가장 향기로운 향수로는 '기도' 가 제일 향기롭지 않을까요? 영화 ‘비투스’(2006)는 아이큐 180의 천재 소년 비투스의 이야기입니다. 부모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 아이의 천재성을 자랑하며 만족해합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천재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15세도 안 되었는데도 대학 수업이 재미없어 강제졸업을 해버려야 하는 처지이기에, 친구가 하나도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 비투스는 평범한 삶이 늘 그립기만 합니다. 아버지는 비투스가 이젠 공대에 재입학하기를 원합니다. 비투스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할아버지 한 분밖에 안 계십니다. 할아버지는 비투스에게 날개를 만들어줍니다. 만들어진 새의 날개를 어깨에 끼고 비투스는 2층에서 뛰어내립니다. 그 사고로 다친 곳은 전혀 없지만 비투스는 평범한 아이큐의 아이가 된 척합니다. 건강하고 평범한 아이로 되돌아온 비투스에 부모는 크게 실망합니다. 그러나 친구들과 같이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된 비투스는 매우 신이 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회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하여 가정이 어렵게 됩니다. 비투스는 평범해진 척 하며 부모를 속이는 것을 그만두고 천재적인 머리를 이용하여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주식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름 모를 투자의 귀재가 되어 아버지 전 회사를 인수하고 아버지를 사장으로 앉혀 줍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기대가 컸던 엄마를 위해 다시 피아노를 시작하여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부모를 영광스럽게 합니다. 그때 할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시고 이 모든 사실을 기록해 놓은 편지를 받습니다. 아이가 평범하지 않은 삶을 힘들어 했음에도 부모가 아이를 다시 본인이 싫어하는 천재의 삶으로 돌아오게 만들어야 했던 사실을 알고는 부모도 크게 뉘우칩니다. 사실, 인간관계에 있어서 더 성숙해지는 사람이 상대의 부모가 됩니다. 비투스는 어렸지만, 부모를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할 수 있었던 부모의 부모였던 것. 부모는 자녀 때문에 거룩해지게 됩니다. 자녀를 위해 자신을 포기할 수 있음이 곧 거룩함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먹힘으로써 자신의 거룩함을 자녀도 지니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이름’ 은 ‘본성’ 을 의미하고, 아버지께서 아드님께 주시는 본성은 곧 ‘신성’, 즉 성령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아버지께로부터 받으시는 성령으로 제자들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만들어서 서로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청하시는 것. 주님의 성령을 받은 이들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습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거룩해지면 반드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어 있다. 비투스가 부모를 위해 다시 특별해진다면 이제 보통 사람들로부터는 외면당하고 미움과 질투를 받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녀들을 이렇게 거룩하게 만드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거룩하게 하십니다.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를 보고 배웁니다. 부모를 먹고 자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 부모가 거룩하지 못하면 자녀들도 거룩해질 수 없다. 자녀를 사랑한다면 부모는 자녀에게 좋은 양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를 위해 거룩해질 수밖에 없는 것. 어느분께서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채변봉투를 가져오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런 날이면 온 교실에 화장실 냄새로 가득 찹니다. 개똥을 퍼간 아이들은 구충제를 한 움큼 받기도 합니다. 대부분이 그런 시절이었는데, 우리 집도 재래식 화장실이었기 때문에 채변 봉투에 변을 담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뭇가지로 변을 채취하다가 그만 비닐봉지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나뭇가지로 해 보려고 했으나 채변봉투가 더러워지기만 했다. 이때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아버지는 긴 손으로 그 냄새를 다 맡으며 봉투를 건져주셨다. 지금 생각해도 구토가 쏠리는 냄새가 나는 듯합니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자녀를 위해 그렇게 더러운 곳으로 내려가는 것이 거룩함입니다. 부모는 자녀 때문에 힘들지만, 그 자녀 때문에 또한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자녀를 많이 낳지 않으려는 이때, 우리는 또한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만들 수 있는 대상이 우리를 힘들게 만들 자녀들일 수 있음도 생각해보아야겠다. 어느 신부님께서 이번 코로나 이후에 만약 유튜브를 하지 않았다면 몸은 편했을지라도 훨씬 거룩하지 못한 삶을 살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부님 글을 읽고 동영상을 보시는 분들에게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신부님을 고생시키는 그 신자가 바로 신부님을 거룩하게 만든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나중에 주님 앞에서 봉헌할 수 있는 열매는 나를 먹고 거룩해진 자녀들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로서 주님의 영이 살아, 우리들이 바라고 소망하는 일들이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잃으면, 온 세상이 나의 적이 된다.'' - 랄프 왈도 에머슨 - |
2024회 “사람은 각자의 감정을 각자가 책임질 줄 알아야 합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3월 4일(예레미야 26장~ ) - 조앤 롤링(해리포터 작가)은 ''인생에서 실패는 피할 수 없는 겁니다. 대단히 신중하게만 살지 않는 한 실패하지 않는 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너무 신중한 나머지 삶에서 전혀 시도를 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 자체가 실패인 겁니다.'' 《자유란 무엇일까?》자유란 자기 의지대로 사는 것이다. 철학은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이고 삶이나 죽음을 스스로 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심리학은 그 자유가 매우 제한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에게는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를 어떻게 살지 결정할 자유가 있다. 그날에 만족할지, 아니면 해야 할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불평할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절대적 자유는 없지만 상대적 자유는 있다. 우리는 바로 이 상대적 자유로 우리 자신에 대한 결정을 내린다. 고대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의든 타의든 우리에게는 그 어떤 결정을 내리던 결정할 자유가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질병이나 나이를 선택할 수 없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그것을 자유롭게 생각할 수는 있다. 궁극적 자유란 우리의 운명을 마음으로 긍정하고 우리에게 생명을 준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다. “참고한 글 “인생을 이야기 하다.” - 안젤름 그륀 신부 지음 - 1938년 10월 30일 일요일 저녁 8시. CBS 라디오 방송에서는 ‘화성인의 습격’ 이라는 드라마가 한창이었다. 댄스음악 프로가 갑자기 중단되고, 화성에서 몇 차례에 걸친 연쇄 폭발이 관측되었으며 이후 몇 개의 유성이 프린스턴과 뉴저지 근방에 떨어져 수백 명이 죽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다시 댄스음악이 나오다가 아나운서에 의해 갑자기 끊기며 유성으로 보였던 물체는 사실 원형 통이었으며 그 속으로부터 기묘하게 생긴 물체들이 나왔는데 화성인들로 추측되며 그것들이 시민을 학살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이 드라마는 1시간가량 지속하였는데 분명 여러 번에 걸쳐 가상드라마라는 사실을 밝혔지만, 미국 각지에서는 일대 대 혼란이 벌어졌다. 청취자가 600만이었는데 그 중 무려 12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피란길에 올랐고 독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은 각자의 감정을 각자가 책임질 줄 알아야 합니다.” 라고 말하면 어떤 분들은 크게 반발합니다.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가 자신에게만 있을 수 없고 외부 상황에 따라 감정이 변할 수 있는데 왜 그렇게 생기는 감정까지 책임을 져야 하느냐는 것. 행동도 자신의 책임인 것처럼, 감정도 자신의 책임입니다. 물론 행복한 감정은 성령의 선물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 안에 기쁨과 평화와 사랑의 감정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러니 감정을 책임질 수 있어야 자신 안에 성령을 얼마나 받아들였느냐를 알 수 있다. 옛 순교자들은 사자의 밥이 되어가면서도 기쁨의 찬송을 불렀다. 자신의 감정을 자신이 책임지려 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알려주시는 올바른 길을 갈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라고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라고 하십니다. 믿음이 없으면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 아이가 부모와 함께 있다면 그냥 부모가 시키는 것만 하면 되니 마음이 편안합니다. 그래서 많이 웃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자신이 자신의 길을 결정하며 살아야 할 때는 걱정근심이 많아지면서 웃음을 잃습니다. 우리는 참 아버지 어머니를 둔 자녀들처럼 마음이 다시 편안해져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화를 빈다!” 라고 인사하셨다. 그분과 함께 있고 그분의 길을 가고 있다면 마음이 평화로울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고 있어야 아버지와 함께 머무는 것이기에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마음대로 하면 부모에게 혼이 날까 봐 마음이 불안해집니다. 부모의 말을 잘 따르는 자녀는 부모의 칭찬을 기대하기에 마음이 평화롭고 기쁩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나에게 바라는 것을 따라야만 마음이 평화로울 수 있는 것.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산에서 길을 잃으면 마음이 불안하지만, 다시 길을 찾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처럼, 자신의 감정에 집중할 때야만 그리스도의 길을 갈 수 있다. 마음의 평화를 추구합시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고 아버지께 도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길이 아닌 다른 모든 길은 걱정과 근심과 불안과 초조, 두려움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를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대로 일정을 짜보고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리스도가 되어 살아봅시다.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가리키는 길’ 을 찾읍시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보내신 아버지를 믿읍시다. 그러면 결코 마음의 평화를 잃는 일이 없을 것. 1991년 LA의 한 슈퍼마켓 주인이 10대 흑인 소녀가 오렌지 주스를 훔치려는 줄 알고 그를 잡아끌다가 소녀에게 얼굴을 맞고는 돈을 내려는 소녀를 총으로 살해하여 폭동이 일어난 적이 있다. 당시 여러 명이 목숨을 잃었고 재산 피해액이 7억 달러에 달하였다. 모든 행동 이전에는 반드시 감정이 있다. 그 감정에 집중하지 않으면 행동을 해버리고 결국 후회하게 됩니다. 내가 주님의 길을 찾았다면 분명 마음의 평화가 있을 것. 따라서 마음이 평화롭지 않은 상태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좋다. 분명 실수할 것. 기도를 통해 먼저 마음의 평화를 회복하고 그다음에 무언가 해야 합니다. 주님의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는 마음의 평화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들에게 새로운 날, 새로운 시간을 주셨으니, 거룩한 마음을 품고 분노하지 않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은총 가득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 앰비로즈 비어스 - |
♡2025회 “우리가 세상의 미움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인가?”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3월 5일(예레미야 42장~ ) 법정(法頂)은 ''가지를 떠난 잎들은 어디로 향할까? 바람에 여기저기 굴러다니다가 마침내는 어느 나무 밑이나 풀뿌리 곁에 누워서 삭아지겠지. 그러다가 새봄이 오면 뿌리에 흡수되어 수액을 타고 새로운 나뭇잎처럼, 떠나지 않고서는 변신이 불가능하다.'' 《산다는 것은 참 좋은일입니다.》어제가 있고 오늘이 있고 내일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어제는 지나갔기 때문에 좋고, 내일은 올것이기 때문에 좋고, 오늘은 무엇이든 할수 있기 때문에 좋다. 나는 어제를 아쉬워하거나 내일을 염려하기 보다는 주어진 오늘을 사랑하고 기뻐합니다. 오늘 안에 있는 좋은 것을 찾고 받아들이고 내일을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 모릅니다. 하루하루 새로운 아침이 주어지는 것은 새 기회의 기쁨을 날마다 누리라는 뜻입니다. 오늘 안에 있는 좋은 것이 어떤 것인지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 잘 알고 있다. 어떻게 하면 하루가 좋아지는지도 다 알고 있다. 어제는 오늘을 소중히 여기고 기뻐하리라는 마음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그들의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6,1-4ㄱ).”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이라는 말씀에서 ‘이 말’ 은, 앞의 15장 18절-25절에 있는 ‘세상의 미움’ 에 관한 말씀을 가리킵니다. 이 말씀은, “내가 너희에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고 박해할 것이다.’ 라고 말한 이유는” 입니다.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는 “믿음이 흔들려서 교회를 떠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입니다. 4절의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세상의 미움과 박해를 받거든 내가 모든 일을 미리 알고서 예고했음을 기억하여라. 내가 모든 일을 미리 알고 있다는 것은 그 모든 일이 다 하느님의 계획과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승리는 항상 하느님 쪽에 있다. 너희는 그것을 믿어라.”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유대교의 박해 상황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하느님을 위해서’ 라는 명목으로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를 박해할 때 죄의식을 느끼기는커녕 하느님을 위해서 옳은 일을 한다고 믿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오로 사도입니다. “우리 열두 지파는 밤낮으로 하느님을 열렬히 섬기며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하고 있다. 사실 나도 한때 나자렛 사람 예수님의 이름을 반대하여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 일을 예루살렘에서 하였습니다. 나는 수석 사제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성도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를 감옥에 가두고, 그들을 처형할 때에도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또 자주 회당마다 다니며 그들에게 형벌을 주어 예수님을 모독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너무나 격분하여 나라 밖 여러 고을까지 그들을 쫓아갔습니다."(사도 26,7-11) ‘옳은 일’ 을 하고 있다는 신념으로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박해는 더욱 철저했고 잔인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십니다. 여기서 ‘알지 못하다.’ 라는 말에는, ‘모른다.’ 라는 뜻도 들어 있고, ‘일치되어 있지 않다. 관계가 없다.’ 라는 뜻도 들어 있다. 이 말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그들의 신념은 잘못된 신념이고, 그들의 그리스도교 박해는 하느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자기들 마음대로 그것을 판단하고서 하는 잘못된 행동입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범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우리가 세상의 미움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인가?” 항상 당연히 세상의 미움을 받아야 하는가? ‘세상의 미움’ 에 관한 예수님 말씀을 보면, 언제나 항상 세상의 미움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 때도 있다고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초대 교회의 모습을 보면 처음에는 세상의 미움을 받은 것이 아니라 존경을 받았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6-47)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백성 가운데에서 많은 표징과 이적이 일어났다. 그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솔로몬 주랑에 모이곤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감히 그들 가운데에 끼어들지 못하였다. 백성은 그들을 존경하여,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났다."(사도 5,12-14) 호감과 존경은 선교활동의 발판이 되었고, 입교자의 증가로 이어졌다. 만일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미움만 받는다면 선교활동을 전혀 할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은 적이 아니라 이웃이고, 함께 구원받아야 할 형제들입니다. 그들 가운데에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요한 3,19) 자들은 교회와 신앙인들을 미워하고 박해하지만, 빛을 갈망하는 이들은 교회와 신앙인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교인들 가운데에 살면서 바르게 처신하십시오. 그래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여러분을 중상하는 그들도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지켜보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2,12) “......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남편들도 아내인 여러분의 말 없는 처신으로 감화를 받게 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이 경건하고 순결하게 처신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리될 것입니다."(1베드 3,1-2)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신앙인이 신앙인답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존경하고 호감을 갖게 되고 감화를 받게 됩니다. 반대로, 신앙인이면서도 신앙인답게 살지 않으면 비웃고, 싫어하고, 비난합니다. 신앙인답게 살지 않는 것은 미움 받을 짓을 하는 것과 같다. 미움 받을 짓을 해서 미움 받게 되었으면서도 그것을 신앙에 대한 박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신앙인답게 살지 않는 것에 대한 ‘주님의 질책’ 일 수도 있다. 사람들이 ‘아버지도 예수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를 미워하고 박해하는 것이라면, 그러면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하느님,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생활을 하고 있는가? 혹시 신앙을 핑계로 세상과 담을 쌓고 살면서, 미움과 박해를 자초하지는 않는가? 교회는(또는, 신앙인의 공동체는)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와 안식처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찾아와서 기도할 수 있어야 하고, 의지할 수 있어야 하고, 안식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사랑’ 이 ‘밖으로’(온 세상으로) 흘러넘치는 교회가(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는 않고 이기적인 집단의 모습만 보인다면, 세상 사람들이 미워하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꾸짖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말씀을 통하여 베풀어주신 “사람이 먼저...”라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우리들의 가슴 속에 담고 기억하며 살아가는 은총 충만한 날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봄이란 봄의 출생이며, 여름이란 봄의 성장이며, 가을이란 봄의 성숙이며, 겨울이란 봄의 수장이다.'' - 정도전 - |
♡2026회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3월 6일(에제키엘서 1장~ ) 셸리는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으리.'' 《살면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사랑을 다 주고도 더 주지 못해서 늘 안타까운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살면서 가장 축복받는 사람은 베품을 미덕으로 여기며 순간의 손해가 올지라도 감수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살면서 가장 마음이 넉넉한 사람은 욕심을 부릴 줄 모르고 비움이 곧 차오름을 아는 사람입니다. 살면서 가장 존경 받는 사람은 덕을 베풀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살면서 가장 보람을 느끼는 사람은 일에 대한 보상과 이득을 따지지 않는 사고를 가진 사람입니다. 살면서 가장 용기있는 사람은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남의 잘못을 용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살면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살면서 가장 가슴이 따뜻하고 예쁜 사람은 차 한잔을 마시면서도 감사의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살면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세상을 욕심없이 바라보는 마음의 눈과 맑은 샘물처럼 깨끗하고 아랫목처럼 따뜻한 가슴을 지닌 사람입니다.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정말 맞는 말인 것 같다. 신부님께서 본당에 있을 때 봉성체를 다니면 정말 예수님을 맞으시는 분들의 얼굴이 천차만별입니다. 대부분은 천사와 같은 얼굴로 사제를 맞이합니다. 참으로 기억에 남는 한 할머니가 계셨는데 얼굴이 말 그대로 천사였다. 봉성체가 끝나면 이불 밑에서 몇만원이 돈 봉투를 꺼내서 꼭 신부님에게 주시곤 하셨다. 그 연세에 어떻게 그렇게 얼굴이 고우신지 신부님도 그렇게 늙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그분을 그렇게 평했다. 그런데 한 요양병원에서 어떤 분에게 성체를 영해 주려고 한 적이 있는데 그분은 이렇게 말하면 안 되지만 얼굴이 마치 마귀와 같았다. 심지어 치아도 육식동물처럼 뾰족해져 있었고 눈은 흰자가 많이 보였으며 입에서는 끊임없이 욕이 나오고 있었다. 몸은 사람들에 의해 침대에 묶여 있었다. 신부님께서는 그분이 온전한 의식이 없다고 판단하여 성체를 영해 주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말하기를 의식도 있는 사람이고 봉성체를 기다렸다고 하기에 외모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예식을 진행하고 성체를 영해 주었다. 그러자 그분은 성체를 뱉어버렸고 침이 묻어 녹아내리는 성체를 신부님이 영해야 했다. 그런 신부님을 향해서 계속 끊임없이 욕설을 해 댔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과는 나이가 들수록 그렇게 외모까지도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필립보는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라고 되물으십니다. 유튜브에 지금 올리는 삼위일체 교리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삼위일체는 한 분 안으로 다른 분이 성령으로 들어오셔서 하나가 되는 친교의 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체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한 몸이 되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렇게 들어오신 분이 그 받아들인 이의 주인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받아들인 이는 자기 뜻대로 살지 못하고 자신 안의 보이지 않는 주인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말과 행동이 바뀝니다. 결국, 외모까지도 바뀔 수 있다. 그 안에 계신 분의 능력도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예수님께서는 세례 때 인간들에게 삼위일체를 계시하시기 위해 성령으로 아버지를 당신 안에 모시고 그 이후부터 아버지의 뜻을 전하고 기적을 행하셨다. 이제 당신 뜻대로 살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사셔서 아버지를 드러내셨다. 자동차 운전자의 성격을 알려면 그 차가 어떻게 달리는지 밖에서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을 보면 그분 안에 계신 아버지도 보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니 황당할 수밖에 없는 노릇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당신도 한 몸을 이루는 삼위일체이니 우리가 당신을 드러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주인으로 사시면 우리는 이전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표징입니다. 물론 표징이나 이적도 일으키게 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모신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무언가를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자신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처럼 물 위라도 걸을 수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래야 조금씩이라도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고 결국 나를 본 것이 곧 그리스도를 본 것이라 할 수 있게 됩니다. 너새니얼 호손의 소설 ‘큰 바위 얼굴’ 을 잘 아실 것. 어니스트는 그 마을의 매우 온화한 인간의 얼굴 모습을 닮은 큰 바위를 좋아하였다. 언젠가는 그 얼굴을 닮은 사람이 그 마을에 나타날 것이란 예언도 믿었다. 그는 끊임없이 그런 얼굴을 닮은 사람을 찾았다. 자신이 그 얼굴로 변해가고 있음을 잊은 채로. 한 시인이 늙고 주름졌지만 온화하고 겸손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을 한 죽음이 임박한 어니스트를 보며 마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보시오! 보시오! 어니스트 씨야말로 큰 바위 얼굴과 똑같습니다.” 사람들은 어니스트를 쳐다보았고 예언이 실현되었음을 알았다. 어니스트는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가면서 분명히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용모를 지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 말했다. 큰 바위 얼굴은 어니스트의 주인이 되었고 그렇게 그를 변화시켜 놓았던 것. 우리도 나 자신은 절대 그리스도를 닮지 못하였다고 믿을 때 누군가로부터 그분을 닮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 가면 안에 숨겨진 참 우리 자신이 되시기 위해 우리 안에 들어와 사십니다. 모든 신앙인은 “나를 본 것이 곧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희망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의 삼위일체 친교의 목적입니다. 우리들이 오늘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손을 뻗어라.” 고 외치면서, 메마르고 오그라든 곳이 깨끗하고 성하게 회복되는 기쁨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겨울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봄이 순서를 건너뛰는 법도 없다.'' - 할 볼란드 - |
2027회 성령의 인도를 잘 받으려면 ‘기도’ 와 ‘실천’ 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3월 7일(다니엘서 3장~ ) 『행복 비타민』 중에서 ''삶은 메아리 같은 것. 내가 삶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라보면 삶 또한 나에게 긍정적인 선물을 주고, 내가 삶을 부정적인 생각으로 바라보면 삶 또한 나에게 부정적인 선물을 줍니다.'' 《내 영광을 구하면서》너는 지나가는 모든 순간의 매우 작은 것들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나의 눈, 하느님의 눈에는 네가 하는 일보다 사랑만이 가치롭기 때문이다. 그러니 작은 것 하나하나에 마음을 쓰도록 하여라. 모든 것을 사랑으로 바치고, 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 나를 더욱 기쁘게 하며, 지난날의 잘못을 보상하여라. 그러한 순간 가운데 한 번만으로도 생애를 보상할 수 있음을 너는 아느냐? 네가 무엇을 하든 그것을 잘하여라, 나를 바라보고 내 영광을 구하면서. 그러면 하느님께서 너를 축복하시리라. -옮겨온 글입니다-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7)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모습은 ‘인간적인 눈’ 으로 볼 때에는 ‘떠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 으로 보면 멀리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상태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으로 ‘존재 방식’ 이 바뀌는 것. 따라서 “내가 떠나는 것이” 라는 말씀의 뜻은, “내가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 입니다. “너희에게 이롭다.” 라는 말씀은, “더 이롭다.”가 아니라, “이로움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지 않게 되고 성령께서 오시는 것이 신앙인들 곁에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보다 더 이롭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어떤 식으로 존재하시든지 간에 신앙인들이 받는 영적 은혜에는 아무런 변화나 차이가 없다는 것.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예수님과 성령께서 임무 교대를 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신앙인들 곁에 영원히 함께 계시기 위해서 존재 방식을 바꾸실 필요가 있다는 설명으로 해석됩니다. 우리 인간은 시각과 청각과 촉각 같은 자연적인 감각의 한계에 갇혀 있는데, 이제 그 한계를 초월해서 ‘믿음으로’ 예수님을 만나야 하고, 믿음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바로 그것을 도와주기 위해서 보이지 않으면서도 함께 계시는 것으로 예수님의 존재 방식이 바뀌고, 또 성령께서 내려 오셔서 신앙인들 안에 머무르시는 것.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너희의 눈에 내가 보이지 않더라도 성령을 통해서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라는 약속으로 해석됩니다.(마태 28,20)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요한 16,8-11) 성령께서 밝혀 주실 것이라는 말씀은, 우리 입장에서 생각하면, 교사가 학생들을 가르치듯이 가르치신다는 뜻은 아니고, 우리가 배워서 알고 있는 진리를 믿을 수 있도록, ‘앎’ 에서 ‘믿음’ 으로 인도해 주신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 일도 안 해도 성령께서 모든 일을 다 알아서 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잘 받으려면 우리 쪽에서도 노력해야 합니다. 구원의 진리를 믿으려고 노력해야 하고,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궁극적인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성령의 인도는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 작용할까? 또는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오순절 날 사도들에게 성령이 내린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고(사도 2,3), 바오로 사도가 경험한 것처럼 성령의 지시를 직접 받을 수도 있습니다.(사도 16,6) 베드로 사도가 경험한 것처럼 어떤 ‘깨달음’ 의 방식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도 있고(사도 12,11), 에티오피아 내시가 경험한 것처럼 낯선 나그네의 도움을 통해서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사도 8,26-40) 중요한 것은 방식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도달하는 일입니다. 성령은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좀 더 예수님을 잘 만나게 되고, 예수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면,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다고 믿을 수 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잘 받으려면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첫 번째는 ‘기도’ 입니다. 두 번째는 ‘실천’ 입니다. 신앙인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최선을 다해서 한다면, 언제나 어디서나 성령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그 도움 덕분에 넘어지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나를 믿지 않은 것이 그들의 죄다.” 입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그들의 죄를 꾸짖으신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에게는 죄가 없다고 생각했고, 예수님을 죄인으로 취급했지만, 성령께서 오셔서 진짜 죄인은 유대인들이라고 밝히시고,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내가 아버지께 가고 그래서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 곧 나의 의로움(죄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죄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 계신다는 것 자체가 예수님의 의로움(죄 없으심)을 나타냅니다. 그것을 성령께서 깨우쳐 주신다는 것.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것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의로움(죄 없으심)을 증명하신 것. 만일에 예수님께서 의롭지 않다면 아버지께로 가실 수 없을 것.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은 유대인들이 심판에 대해서 잘못 생각했음을 드러낸다.” 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을 심판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유대인들 자신들이 심판 받아야 할 자들이라는 것을 성령께서 드러내십니다. 여기서 ‘세상의 우두머리’ 는 사탄입니다. 사탄이 심판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음으로써 사탄을 멸망시켰음을 뜻합니다. 성령께서는 사도들과 교회 안에서 활동하심으로써 사탄의 심판과 멸망을 증명하실 것.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사탄의 하수인이 되어서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죽였음을 깨닫게 될 것. 즉 자기들이 심판에 대해서 잘못 생각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이기에 내가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기에 우리 모두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과 함께 기뻐하는 은총과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당신이 할 수 있다고 믿든, 할 수 없다고 믿든, 믿는 대로 될 것이다." - 헨리 포드 - |
♡2028회 “너 나를 사랑하느냐?”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3월 8일(미카서 1장~ ) 곽복록은 ''겨울은 회상과 우울과 고독의 계절이다. 그것은 지나간 화려했던 계절을 돌이켜보고 해(年)가 지나가는 허탈감 속에서 차가운 밤바람 소리에 가슴 죄는 계절이며, 집 떠난 방랑자가 방랑의 고독을 다시 한번 사무치게 느껴 보는 계절이다.'' 《지금을 잘 살아라》얼마나 오래 사느냐, 얼마나 많은 것을 성취하느냐,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것은 마음을 활짝 열고 넓은 마음으로 매 순간을 살아가는 것. 삶의 목표는 가능한 한 많은 일을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를 사는데 있다. 따라서 삶이란 많이 체험하고 노동 후에 즐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삶이란 순간을 사는 것이며, 마음이 원하는 것을 따르는데 그 의미가 있다. 현존하는 것을 인지하고 삶의 비밀을 발견하는 것이 진정한 삶이다. 당신을 힘들게 하는 것을 내려놓고 일어나는 모든 일을 받아들여라! 순간을 자유롭게 살고 당신을 억누르는 일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져라!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며 마음이 원하는 일을 행하고, 현존하는 것을 모두 그대로 인정하고 나아가 삶의 비밀을 발견하는데 참 의미가 있다. 시간이란 최대한 이용해야 할 재산이다. 신과 하나가 되는 장소이다. 신에게 시간은 정지되어 있다. 그것은 흘러가는 것이지만 또한 영원과 같은 것. 순간을 살며 시간을 충만하게 보낼 줄 아는 사람은 충만한 자신을 감지 할 수 있으며 신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안젤름 그륀 신부 지음- “내 양들을 돌보아라” "나를 따라라" 목적이 이끄는 삶의 저자 릭 워렌의 글에서 우리는 지금 해야할 일을 자주 뒤로 미루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그런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단계를 밟게 된다고 합니다. 1단계는 희망적 상태에서 이렇게 생각한답니다. "이번에는 조금 일찍 시작할거야" 2단계는 약간의 긴장 상태에서 "빨리 시작해야만 하는데." 하고 생각하고 3단계는 잠재해 있는 죄책감 단계로서 "나는 조금 더 서둘러서 시작했어야만 했는데." 4단계는 그릇된 재확신의 단계로서 "아니야, 아직 그것을 할 만한 시간이 남아있어." 5단계는 절망적인 상태로서 "도대체 뭐가 잘못된거지?" 6단계는 강도 높은 고통의 단계로서 "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7단계는 그냥 밀고 나갈 수밖에 없는 단계로서 "그냥 해치워 버려야지!" 라는 생각을 한답니다. 8단계는 이러한 7단계를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결심하는 단계로 "다음번에는 꼭 일찌감치 시작할 거야." 생각하지만 이 생각 자체가 바로 이러한 싸이클을 반복하게끔 만든답니다. 지금 이 순간 해야할 일을 뒤로 미루는 것은 우리들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 불필요한 문제들을 야기시킵니다. 또한 기회, 시간, 그리고 돈을 낭비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렇게 미루는 것이 습관이 되면 중독증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미루는 습관에 인이 박히게 되면 변화하기는 더 어렵다는 것. 결국 이렇게 뒤로 미루는 습관은 삶의 방식이 되어 우리 삶의 고통의 원인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고통의 원인이 되는 미루는 습관을 바꾸기 위해서는 다음의 것을 실행해야 된다는 것. 무슨 일이든지 주어지면 그 일을 하는 것에 있어서는 1.변명하기를 그만둘 것이며 2. 그 일을 완벽하게 해야된다는 욕심을 버릴 것이며 3. 일에 대한 두려움을 직면하고 용기를 가져라! 4. 그리고 이 일로 인한 현재의 고통보다는 앞으로 얻어질 것에 초점을 맞추어 일을 해나갈 것이며 5.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하라! 이렇게 하면 미루는 습관으로 받는 고통이 사라지게 됨을 릭 워렌은 알려주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묻습니다. “너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자 베드로는 “예” 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물으심에, 마음 한켠에 섭섭함이 생겨버렸다. 그래도 베드로는 예수님께 모두 “예” 라고 응답합니다. 그렇게 응답한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세 번씩이나 당부하십니다.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베드로의 삶이 앞으로 어떠할지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그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을 삶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의 죽음이 결국 그가 원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으로서 바치게 될 것을 알려주십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마지막을 더욱 견고히 해주실려고 “너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세 번씩이나 물으셨나 봅니다. 베드로에게 마지막으로 다른 말씀하시지 않고 당부의 한 말씀을 하십니다. “나를 따라라” “나를 따라라” 이 말씀은 바로 전인적인 동의를 구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따른다는 것은 어느 한 부분만의 만족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따르기 위해서는 따를려고 하는 그의 마음과 정성과 의지가 동의해야만 가능하다는 것. 그러기에 베드로에게 당부하시는 이 말씀은 베드로의 온 존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나를 따라라” 지금의 우리들도 베드로와 같은 초대를 받고 있다. “너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한다면 이제는 세상을 따르지 말고 나를 따라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는데 지금 이 순간 멈추어져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살피고 그것을 없애 나가도록 해야되겠다. 차일피일 미루다가는 미루는 습관으로 인한 고통을 받게 될 것. 이제부터 이 미루는 습관부터 없애나가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잔을 들도록 합시다. 축복의 잔을 들기 위하여 우리에게 지금 이 순간 주어진 일들에 충실한 시간을 만들어 나가야 되겠다. 오늘 예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들을 돌보아라” “나를 따라라” 하느님의 보호는 완벽합니다. 이 보호를 어느 누구도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매 순간 우리들은 어떤 고통이나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주님의 옷자락을 놓지 않겠다는 하나의 마음으로 살아갈 때, 주님께서 우리들의 곁을 떠나지 않는 하느님의 완벽한 보호를 받게 되는 은총과 축복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당신이 원하는 미래를 예상하라. 그리고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라." - 피터 드러커 - |
💖성령봉사자 박재만 세례자요한 010 - 3878 - 6634
(수필가ㆍ전국성령쇄신봉사자협의회 말씀추천강사)
💖성령봉사자 류태숙 M.막달레나 010 - 6560 - 7354
(시인ㆍ수필가ㆍ꽃예술설화중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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