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회 “나를 따라라.”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2월 19일(사무엘상 17장~ ) 현대 정주영 회장은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세계사에 있어서의 '배반' 을 꼽으라고 한다면 많은 분들이 "부르투스, 너 마저도…" 하며 죽어갔던 시저를 떠올리실 것. 우리나라의 경우는 매국노 누구누구를 생각할 수 있고,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대표적인 배반으로는 은돈 서른 닢에 예수님을 팔아먹은 이스카리옷 사람 유다의 배반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요. 사람에게 제일 힘든 것이 이 측근의 배반일 것. 누구보다 믿고 사랑했던 사람이 가장 큰 아픔으로 다가오는 것, 이것은 견디기 힘든 상처이지요. 이러한 배반은 사람을 절망에 빠지게 하고 일어서기 힘든 치명적인 아픔으로 일생을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우리 교회사에는 위에서 말한 배반자 못지 않은 배반자가 한 사람 있지요. 예수님께서 누구보다도 믿었고 또 당신이 없을 때를 대비해서 수제자로서 끊임없이 가르치고 지도했던 사람, 바로 베드로 사도입니다. 주님인 예수님께서 어려움이 닥치게 될 것이라고 누차 말씀하셨을 때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했으나 말 그대로 입에 침도 마르기 전에 천벌을 받아도 그 분을 모른다고 잡아뗐던 사람이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베드로의 배반은 역사에 별로 기록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를 배반자로 기억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 베드로의 삶이 과거의 배반을 기워 갚고도 남을 만큼 성실하고 깊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세 번이나 배반했던 베드로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도 베드로의 배반에 대해서는 한 말씀도 하지 않으신 것.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21,15) 그 날 아침상이 베드로에게는 얼마나 힘든 자리였겠습니까? 차마 얼굴을 들고 주님을 뵈올 수 없었던 베드로는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을 것.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요한21,15)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요한21,15) 예수님께서는 다시 수제자로서의 직위를 베드로에게 회복시켜 주시지요. 두 번째로 예수님이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6) 베드로가 고백하지요.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요한21,16)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21,16) 세 번째로 주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21,17) 하고 물으시자 마음이 슬퍼진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21,17) 주눅들고 자신 없던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요.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21,17) 교회를 맡기시며 수제자의 길을 회복시켜주십니다. 주님은 그 외에 다른 것은 한 마디도 묻지 않으셨지요. 다시는 안 볼 사람같이 야단치시고 큰 벌이라도 내리셔야 옳을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세 번의 배반을 세 번의 사랑으로 씻어주실 뿐이었다. 모든 것을 잃고 좌절에 빠져서 감히 주님을 쳐다보지 못하는 베드로에게 수제자의 자리를 회복시켜주시고 용서하시며 “나를 따라라.”(요한 21,19)고 말씀하시지요. "나를 따라라."(요한21,19) 예수님께서는 벌써 두 번째로 이 말씀을 하고 계시지요. 예수님께서 처음 이 말씀을 하신 곳은 갈릴래아 호숫가였다. 고기잡이하고 있는 베드로를 보시고 부르셨지요.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4,19) 그후 3년을 함께 지내시고 지금 감히 스승을 쳐다보지도 못하는 베드로의 깊은 상처를 사랑으로 싸안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요한21,19) 두 번째 부르심이지요. 그런데 이 두 번째 부르심으로 목숨을 바쳐가며 자기도 생각하지 못했던 거룩한 제자로서의 삶을 완성할 수 있었던 베드로가 왜 첫 번째 부르심에서는 낙오자가 되고 배반자가 되었을까요? 우리의 신앙의 여정에 믿음을 더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주님께서 “나를 따라 오너라.”(마태4,19)고 청하셨을 때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 정말 놀라운 결단이었지요. “따르라” 는 그 한 마디에 베드로는 평생 호구지책이었던 배도 그물도 모두 버렸다. 장모가 있는 것으로 봐서 결혼한 것으로 보이는 그는 가정도 가족도 버리고 스승을 쫓아가 3년 간을 동고동락하며 지냅니다. 그러한 결단도 완전한 투신은 아니었던 것 같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섰다가 실패한 사람들이 나오지요.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마태19,20) 부자 청년은 하느님을 따르겠다고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재물이 아까워서 그 길을 따를 수가 없었다. 이스카리옷 사람도 돈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고, 베드로는 목숨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지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릴 준비가 되어있던 이들은 왜 이렇게 좌절해야 했을까요? 베드로의 삶의 과정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가 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후 제자들은 배를 타고 카파르나움으로 가고 있었지요. 그때 거센 바람이 불고 바다 물결은 사나와졌는데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셨다. 유령인줄 알고 겁에 질린 제자들을 예수님은 안심시키십니다. 그때 베드로가 말하지요.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마태14,28) "오너라."(마태14,29)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곧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갑니다. 그런데 거센 바람이 불어오자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지고 말지요. 주님을 보지 않고 풍랑을 봤던 것. 모든 것이 주님께로 맞추어져 있어야 되는데 인간적인 걱정에 관심이 흩어지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그로부터 3년 후에도 베드로는 물에 빠지는 것과 같은 상황을 맞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믿고 따르겠다고 장담을 하고 가다가 곁눈질을 하게 되지요. 예수님의 수난을 앞두고 죽음 앞에서 무기력해지고 말았던 것. 목숨 때문에 산산이 흩어진 것이지요. 유다와 부자 청년도 예수님을 따른다고 가다가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한 순간 무너지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베드로는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만은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 고 하면서 주님을 따랐는데 주님을 바짝 따라간 것이 아니라 멀찍이 서서 따라갑니다. 거리를 두었다는 것은 언제든지 줄행랑 칠 준비를 하고 따랐다는 것을 말해주지요.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서 예수님을 뒤따라 대사제의 저택 안뜰까지 들어가, 시종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고 있었다.'(마르14,54) 거리를 두면 유혹이 끼어들 수밖에 없다. 그러면 실패하는 것이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 생활에서 실패하는 경우는 예수님과 적당히 거리를 두었기 때문입니다. 부부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날 남편이 못 믿을 사람 같은 생각이 들어서 적당히 거리를 두기 시작하면 사이는 점점 멀어지기만 할 뿐입니다. 그럴 때일수록 바짝 다가들어서 서로의 믿음을 확인해야지요. 더군다나 신앙 생활에서 적당한 거리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 순교자들도, 제자들도 하느님과 거리를 두면 둘수록 유혹을 맞아야 했다. 우리 신자들은 이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 같다. "제 남편이 성당에 너무 빠지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적당히 다니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처구니없이 그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합니다. 신자가 비신자의 말을 듣고 믿음 생활을 하려드는 꼴이지요. 그러면 같이 넘어질 수밖에 없다. 신자 아닌 남편을 하느님께로 다가갈 수 있도록 계기를 만들어 주어야 되는데 오히려 비신자의 말을 듣고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세상과 가까워지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우리는 곁눈질할 새 없이 주님께 바짝 따라 붙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적당히 거리를 두기 시작한 순간부터 유혹에 빠져드는 경우는 숱하게 많다. 우리들이 기도하는 일뿐만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지 하심(下心)으로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 “수지맞는 은총과 축복” 을 받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인내는 어떠한 괴로움에도 듣는 명약이다.'' - 플라토우스 - |
♡2011회 인생에서 중요한것은 실패하지 않는것이 아니라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는데 있는 것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2월 20일(열왕기상 1장~ ) 안창호는 ''흔히 사람들은 기회를 기다리고 있지만 기회는 기다리는 사람에게 잡히지 않는 법이다. 우리는 기회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기 전에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춰야 한다. 일에 더 열중하는 사람이 되어야한다.'' 《좋은 나무는 쉽게 크지 않습니다.》바람이 강하면 나무도 강해지고 숲이 어두우면 나무는 하늘을 향해 높이 뻗어갑니다. 햇빛과 추위와 비와 눈은 모두 나무를 좋은 재목으로 만들어주는 최고급 영양소 입니다. 인생의 시계는 단 한번 멈추지만 언제 어느시간에 멈출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이 내 시간이라하고 살며 사랑하며 수고하고 미워하지만 내일은 믿지 마십시오. 그때는 시계가 멈출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중요한것은 실패하지 않는것이 아니라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는데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꿈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그것을 실현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어떤 꿈을 가지고 있다면 기회를 사용하도록 지금 이 순간 철저히 준비하십시오. 어떤 바보라도 사과속의 씨는 헤아려 볼수 있다. 그러나 씨속의 사과는 하늘만 압니다. 별을 좋아하는 사람은 꿈이 많고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슬픈 추억이 많고 눈을 좋아하는 사람은 순수하고 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름답고 이 모든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소통 강사 김창옥씨에게 쌍둥이 아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강의에서 아들이 자신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는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소통 전문가라 자처하지만 정작 아들과는 소통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는 이 문제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어머니에게는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 사랑이 딸에게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딸과는 매우 이상적 관계입니다. 집에 가면 딸이 먼저 달려오고 그러면 아버지는 반갑게 딸을 맞아줍니다. 그런데 쌍둥이 아들이 태어났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래서 군대 교관을 흉내낼 수밖에 없었다. 김창옥씨는 ‘아버지’ 란 단어가 무슨 뜻인지 인지를 못 한다고 합니다. 그에게 아버지는 술과 도박과 폭력과 가정에 대한 무관심한 분이었다. 본인이 아버지를 모르니 아들들에게 아버지를 알려줄 수 없었고 그래서 아들들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이들은 아버지로부터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 배우지 못하니 어린이집에 가서 다른 아이들을 때리는 아이들이 되었다. 상처가 대물림되는 것입니다. 딸이 아빠를 보고 달려오면 아빠는 딸을 ‘공주님’ 이라 부르고 안아줍니다. 그런데 쌍둥이 두 아들은 눈치를 보고 있다가 “은혜 아빠!” 라며 슬금슬금 멋쩍게 다가옵니다. 나의 아빠라 여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착한 목자가 되려면 먼저 착한 목자에게 배웠어야 합니다. 그래야 또 누군가를 착한 목자로 만들 수 있다. 사랑은 흐르는 것이지 나에게서 생겨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3달 동안 열심히 아빠 연기를 하며 따듯하게 대해 주었더니 비로소 “김창옥 아빠!” 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연기를 3개월 더 했더니 비로소 “아빠!” 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렇게 연기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려는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사랑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이를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먼저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를 알아야 아버지가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다. 강연을 들어보시면 아시겠지만 김창옥씨는 공항에서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자신을 위해 돌담을 쌓으며 함께 허물어진 아버지의 한 다리와 어깨까지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아들에게 “미안하다!” 란 말을 들었을 때 모든 상처가 치유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아버지와 소통이 될 때 아들과도 소통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은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착한 목자는 주인이 주는 사랑을 양들에게 내어주는 사람입니다. 요한은 분명히 ‘삼위일체 신비’ 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생명의 주인으로서의 아버지와 그 생명을 전해주는 착한 목자로서의 아드님과 그로 인해 태어나는 교회와의 관계입니다. 누구나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려면 하느님의 이 삼위일체 신비에 참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여기서 말하는 ‘목숨’ 은 성령님입니다. 성령은 생명의 물이자 생명의 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받은 생명을 또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흘려주지 않으면 그 사람은 다시 생명을 받을 자격을 잃게 됩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신비에의 참여의 기본입니다. 중동에서 남편들이 사막에서 피땀 흘려 벌어 아내에게 가져다줄 때 어떤 아내들은 그것을 자녀를 키우는 데 쓰지 않고 제비들에게 가져다 바쳤다. 이런 상황에서 남편들이 돌아올 때 많은 이혼과 자살이 있었다고 합니다. 관계는 그렇게 깨어집니다. 돈은 피와 같다. 그것을 흘려주지 않으면 다시 그것을 받을 자격을 잃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주는 이가 원하는 이에게 흘려주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려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고 양육하신 모범을 이웃들에게 해야 합니다. 그분은 당신 피를 우리에게 주시며 이웃들에게 흘려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또 받게 될 것입니다. 이 흐름에 참여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에도 참여할 수 없다. 이웃의 생명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 위해서 ‘선교’ 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성령의 힘으로 나의 피를 이웃에게 뿌려야 합니다. 그 피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들어있다. 그 피가 나를 통과하며 나를 영원한 생명으로 채웁니다. 착한 목자는 그렇게 영원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얼마만큼 나 보다 남을 배려하며 살았는지 돌아보면서, 저의 눈 잣대로 보고 듣고 판단하지 않으며, 그럴 수밖에 없는 마음들을 읽고 헤아리는 측은지심으로 살아가는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하찮은 위치에서도 최선을 다하라. 말단에 있는 사람만큼 깊이 배우는 사람은 없다.'' - S.D.오코너 - |
♡2012회 ''1000억 짜리'' 강의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2월 21일(열왕기하 18장~ ) 헬렌켈러는 "태양을 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고, 태양을 볼 수 없는 사람이 불행한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마음속에 빛을 지니는 것입니다. 힘과 용기를 가지십시오." 《사람을 알아보는 지혜》사람의 마음은 험하기가 산천보다 심하고, 알기는 하늘보다 더 어렵다. 하늘에는 그래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과 아침, 저녁의 구별이 있지만, 사람은 꾸미는 얼굴과 깊은 감정 때문에 알기가 어렵다. 외모는 진실한 듯하면서도 마음은 교활한 사람이 있고, 겉은 어른다운 듯하면서도 속은 못된 사람이 있으며, 겉은 원만한 듯하면서도 속은 강직한 사람이 있고, 겉은 건실한 듯하면서도 속은 나태한 사람이 있으며, 겉은 너그러운 듯하면서도 속은 조급한 사람이 있다. 그러므로 군자는 사람을 쓸 때에 1. 먼 곳에 심부름을 시켜 그 충성스러움을 보고, 2. 가까이 두고 써서 그 공경을 본다. 3. 번거로운 일을 시켜 그 재능을 보고, 4. 뜻밖의 질문을 던져 그 지혜를 본다. 5. 급한 약속을 하여 그 신용을 보고, 6. 재물을 맡겨 그 사용하는 마음을 통해 그 어짐을 본다, 7. 위급한 일을 알려 그 절개를 보고, 8. 술에 취하게 하여 그 절도를 보며, 9. 남녀를 섞여 있게 하여 그 이성에 대한 자세를 살핀다. 이 아홉 가지 결과를 종합해서 놓고 보면 사람을 알아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공자 - 지난날 청주교구성령봉사회수요치유기도회 때 강의한 내용중 일부를 묵상코자 합니다. 힘든 시기 삶의 나침판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餘想 : 1000억 짜리 강의 - 명예, 지위, 돈,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고 대단한 성공을 거둔 사람이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었다. 대학생과 기자들은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몰려 들었지요. 그는 평소에 강의나 인터뷰를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그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강의를 듣기위해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그는 등장하자마자 칠판에 무언가를 적었다. '1000억' 그리고 말을 시작했다. 저의 재산이 아마 천억은 훨씬 넘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으므로 고개를 끄덕였지요. "여러분, 이런 제가 부럽습니까?" "네!" 여기저기서 대답들이 들려왔다. 이 대답을 들은 그는 웃으며 강의를 시작했다. "지금부터 이런 성공을 거두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1000억 중에 ■첫 번째 '0' 은... 바로 명예입니다. ■두 번째 '0' 은 ... 지위입니다. ■세번째 '0' 은... 돈입니다. 이것들은 인생에서 필요한 것들입니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앞에 있는 '1' 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1' 은 건강과 가족입니다. (저는 강의 때 믿음을 추가 했습니다) 여러분!! 만일 '1' 을 지우면 1000억이 어떻게 되나요? 바로 '0' 원이 되어버립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에서 명예, 지위, 돈도 중요하지만, 아무리 그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건강과 가족이 없다면(하느님을 믿지 않아 천국에 가지 못하면 연옥이나 지옥갑니다) 바로 실패한 인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진정한 성공의 의미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답니다. ⚛명의가 최후에 남긴 말 여러분, 이제 저보다 훨씬 훌륭한 세 명의 의사를 소개하겠습니다. 3명의 의사 이름은 ■1. 음식(Food)과 ■2. 수면(Sleeping)과 ■3. 운동(Exercise)입니다. 1. 음식은 위의 75%만 채우고 절대로 과식하지 마십시오! 2. 수면은 밤 23:00시 이전에 잠을 자고 아침 6:00시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십시오. 3. 운동은 열심히 걷다 보면 웬만한 병은 다 나을 수 있습니다. “음식”ㆍ“수면”ㆍ“운동” 은 다음 두 가지 약과 함께 복용할 때 효과가 있다. 육체와 더불어 마음과 영혼의 건강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웃음(Laughter)”과 ■“사랑(Love)” 입니다. 육체만 건강한 것은 반쪽 건강입니다. 영혼과 마음과 육체가 골고루 건강한 사람이 되십시오. ■"웃음" 은 평생 꾸준히 복용해야 합니다. 웃음의 약은 부작용이 없는 “만병통치” 약입니다.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더 많이 복용해도 됩니다. ■“사랑” 은 비상 상비약입니다. 이 약은 수시로 복용하십시오. 가장 중요한 약입니다. 이 의사는 자신이 살면서 깨달은 가장 중요한 것을 알려준 것입니다. 우리는 돈 안 드는 이 약을 얼마나 섭취하고 있을까요? 사시는 동안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기 위해 이 명의의 마지막 처방의 말도 지켜볼 가치가 있을 껍니다. 이 세상의 주인공은 바로 👉 '나' 입니다. 나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도 천국의 삶과 저 세상에서도 연옥이나 지옥이 아닌 천국으로 갑시다. 아멘. 세상은 할 수 없다고 해도... 예수님께서는 하실 수 있음을 믿고... 하느님께서 저희에게 주신 당신의 영에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축복된 우리들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나이가 60이다 70이다 하는 것으로 그 사람이 늙었다 젊었다 할 수 없다. 늙고 젊은 것은 그 사람의 신념이 늙었느냐 젊었느냐 하는데 있다. - 맥아더 - |
♡2013회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떤 고난과 고통을 겪게 되면 “도대체 왜?” 라고 물을 - 때가 많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2월 22일(역대기상 22장~ ) 존 케네디는 ''행동 계획에는 위험과 대가가 따른다. 하지만 이는 나태하게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는 데 따르는 장기간의 위험과 대가에 비하면 훨씬 작다.'' 《나는 내가 바꾼다.》꼭 죽었다 살아나야만 인생을 바꿔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생각만 바꾸어도 인생은 180도 바꿀 수 있다. 우리 인생이 한 방향으로만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것은 바꿔 살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씌여지지 않은 하얀 종이와 같은 새로운 삶이 매일매일 눈앞에 전개되는 데도 타성에 젖어 과거를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나를 바꾸면서 살아가야 한다. 새롭게 열린 오늘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과거의 삶이 옳은 것이었다면 더 향상시키기 위해서 노력하고 과거의 삶이 잘못된 것이었다면 깨끗이 지우고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송천호-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1-22) 이 말씀에서 강조되고 있는 말은, ‘잊어버린다.’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가 얻게 되는 기쁨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때에 겪었던 슬픔을 잊어버릴 정도로 ‘큰 기쁨’ 입니다.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지 못하는 기쁨”, 즉 ‘영원한 기쁨’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의 기쁨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강조하시는 것은 제자들이 당신의 수난과 죽음 때문에 겪게 될 슬픔과 고통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이지 그 슬픔과 고통을 잊어버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무엇을 위해서 수난을 당하셨는지, 어떻게 그 일을 당하셨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셨다. 그 은총이 자동적으로 나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기를 바란다면, 누구든지 스스로 믿고 회개해야 합니다. 믿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사람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헛일로 만들어버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 126,5-6) 우리의 신앙 여정은 눈물로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 마지막에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환호하며 추수하는 것과 같다. 그날이 되면 씨를 뿌릴 때의 눈물은 잊어버리게 될 것. 사실 기억하고 있을 필요도 없다. 그것은 종말 후의 일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씨를 뿌리는 과정 중에 있다. 봄에 씨를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곡식이 없다. 지금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심판 때에 후회만 하게 될 것. 이처럼 우리의 신앙 여정은 목적지가 확실하게 정해져 있는 여행입니다. 신앙생활은 결과를 알고서 하는 생활입니다. 각 개인의 운명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든 어디를 향해서 가야 할지,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몰라서 방황하거나 헤매는 일은 없다. 각 개인에게 주어진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어서 말한다면, 십자가는 부활을 향해서 가는 길의 한 과정일 뿐이고, 십자가 자체는 목적이 아닙니다. 사람에 따라 십자가가 조금 더 무거울 수도 있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릴 수도 있지만,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참고 견딜 수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다. 죄인들의 그러한 적대 행위를 견디어 내신 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낙심하여 지쳐 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히브 12,2-3)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히브 12,7)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히브 12,11) 우리가 살면서 겪는 고난과 고통들을 하느님의 훈육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하느님의 훈육이 아닌, 악에서 온 고난과 고통들도 있다. 그 경우에도 참고 견디는 일이 필요합니다. 인내는 십자가 수난을 견디어 내신 예수님을 본받는 일입니다. 신앙 여정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뒤따라 걸어가는 일입니다. 사도들과 순교자들과 수많은 신앙인들이 이미 그 길을 걸어갔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신앙인들이 많이 있다. 결코 외로운 길은 아닙니다. 혼자라고 느껴지는 때에도 예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걸어가시는 분입니다. 만일에 너무 힘들어서 걷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업고 걸어가실 것. “그분께서는 분명 천사들을 보살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다."(히브 2,16-18) 신앙생활은 ‘내가’ 구원받으려고 하는 생활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나 혼자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이 먼저 나를 도와주십니다. 내가 구원받는 것을 어쩌면 나보다 예수님께서 더 바라실 것.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생활입니다.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요한 16,23ㄱ) ‘그날’ 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날입니다. ‘성령 강림의 날’ 로 생각할 수도 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는, 또 성령을 받은 뒤에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 하느님의 섭리 등을 모두 깨닫게 될 것이고, 예수님께 물을 필요가 없게 될 것.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떤 고난과 고통을 겪게 되면 “도대체 왜?” 라고 물을 때가 많다. 그 고난과 고통도 힘들지만, 이유를 알지 못해서 답답한 것도 힘든 일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고, 또 우리의 신앙생활이 부족할 때, 하느님의 계획과 섭리를 깨닫는 일도 더디게 됩니다. 알고 싶고 깨닫고 싶다면, 단순하게 믿고, 인내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이제 예수님 안에서 보물 같은 우리들을 축복해주시는 은총의 빛줄기를 향하여 길을 재촉하여 은혜로운 미사성제에 참례하는 충만한 은총과 축복을 누리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인간은 패배하였을 때 끝나는 것이 아니다. 포기했을 때 끝나는 것이다.'' - 닉슨 - |
♡2014회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2월 23일(느헤미야 1장~ ) 토마스 아 겜피스는 “주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무슨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면 문제될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과 함께하면서 가난할지언정 주님을 떠나 부요해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이 세상에서 순례자의 길을 걸을지언정 주님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곳이 천국이요, 주님을 떠난 그 자리가 죽음이며 지옥입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바라는 모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부르짖으며 마음으로부터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외에 저를 도와줄 이 아무도 없습니다. 믿고 의지할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평범한 생활》과거의 삶과는 상관없이 하느님을 만난 순간부터 우리는 변화됩니다. 평범한 생활 속에서 깨어 있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찾읍시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을 정화하여 투명해지도록 합시다.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받지 않아도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룹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리라."(요한 6,56)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19-23)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뒤에 제자들은 유대인들의 박해가 무서워서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숨어 있었다. 그랬다가 성령을 받은 뒤에는 두려움 같은 것은 하나도 없는 모습으로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용감한 선교사들이 되었다.(사도 2장) 그런데 제자들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도 성령 덕분에 자동적으로 그렇게 변화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그 믿음을 증언하기 위해서 숨어 있었던 방에서 나가 사람들 앞에 나선 것은 제자들이 스스로 한 일입니다. 용기를 내려고 노력한 것은 제자들 자신들이 한 일이고, 성령께서는 그 용기를 북돋아 주셨다는 것. 만일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안 믿었다면, 또는 믿었더라도 용기를 내지 않고 계속 무서워하면서 숨어 있었다면, 그들은 성령께서 주시는 도움을 받지 못했을 것. 사도행전을 보면, 오순절 날 제자들은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복음을 선포했고(사도 2,4), 사람들은 그 복음을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들었다.(사도 2,6) 우리는 그날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제자들이 배운 적도 없는 외국어를 갑자기 잘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외국어로 설교를 하게 되었는지... 그런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제자들의 외국어 실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듣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령의 은사’ 는 제자들에게 내렸지만 그 은사의 혜택은 ‘듣는 사람들’ 이 누렸다. 오순절 날 ‘성령의 은사’ 가 내린 일은, 복음을 선포하는 제자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복음을 듣는 사람들을 위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은사였다는 것. 그런데 그 혜택을 누린 사람들이 모두 복음을 믿은 것은 아닙니다. 그날 제자들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삼천 명 가량’ 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사도 2,41), 믿지 않고 그냥 가버린 사람도 많았을 것. ‘성령의 은사’ 의 혜택은 그곳에 있었던 모든 사람에게 내렸지만, 모든 사람이 다 믿음을 갖게 되고, 은혜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는 것. 은혜는, 받으려고 하는 사람만 받고, 안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못 받습니다. 요한복음의 이야기에서, “너희를 보낸다.” 라는 말씀과 “성령을 받아라.” 라는 말씀과 ‘용서의 권한’ 에 관한 말씀은 모두 하나로 이어진 말씀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려고 그들에게 성령을 주셨고, 또 그들에게 성령을 주시면서 용서에 관한 일을 임무로 맡기셨다는 것. 이 이야기만 보면, ‘용서의 권한’ 에 관한 말씀이 뭔가 좀 안 어울리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이 말씀은 루카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7-48)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라는 말은,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을” 이라는 뜻입니다. “선포되어야 한다.” 는 “선포하여라.” 입니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이 일’ 은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과 예수님의 복음을 가리키고, ‘증인이다.’ 는 “증인이 되어라.”, 즉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사가 되라는 명령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오순절 설교를 보면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사도 2,38) 루카복음의 예수님 말씀과 사도행전의 베드로 사도의 말에 들어 있는 ‘용서’ 라는 말은 모두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을 믿고 회개해서 얻게 되는 ‘구원’ 을 뜻합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의 말씀에도 적용할 수 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는 “교회와 신앙인들이 복음 선포 활동을 충실하게 하면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고” 로,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는 “복음 선포 활동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 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권한’ 보다는 ‘임무’ 에 관한 말씀이고, 성령을 주신 것은 그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것. 제자들이(교회가) ‘구원의 복음’ 을(용서를) 선포하거나 선포하지 않는 것을, 자기들 마음대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권한이든지 임무든지 간에 항상 예수님 뜻에 합당하게 수행해야 합니다. 만일에 제자들이(교회가) 제대로 활동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한 상태로(용서받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다면 그 책임은 제자들에게(교회에)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성령을 주신 것과 오순절 날 그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고서 첫 번째로 한 일이 복음을 선포하는 설교였다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 가운데 첫 번째 일은 ‘복음 선포’ 를 도와주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코린토 1서 12장에 나오는 성령의 은사들도 단순히 어떤 개인의 능력을 키워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복음 선포 활동을, 즉 사람들을 구원하는 활동을 도와주기 위한 은사들입니다. 우리가 세례성사 때 성령을 받고, 견진성사 때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성령을 받은 사람의 첫 번째 임무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성령을 받고서도 복음 선포 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령의 도움을 받기를 스스로 거절하는 것과 같다. 지금 이 순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런 도움도 없다. 오늘 나에게 장애물로 생각된 한 영혼을 위해(장애물이 되는 어떤 일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끌어안으십시오. 그러면 또 다른 생명처럼 우리들의 몸과 마음이 치유되는 축복된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믿음을 가진 1명은 흥미만 있는 99명과 맞먹는다.'' - 존 스튜어트 밀 - |
♡2015회 “깨어 있다는 것은 곧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2월 24일(에스테르 1장~ ) 린위탕은 ''공식석상에서 마시는 술을 천천히 한가하게 마셔야 한다. 마음을 놓고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술은 점잖고 호탕하게 마셔야 한다. 병자는 적게 마셔야 하고, 마음에 슬픔이 있는 사람은 모름지기 정신없이 취하도록 마셔야 한다. 봄철에는 집 뜰에서 마시고, 여름철에는 교외에서, 가을철에는 배 위에서, 겨울철에는 집안에서 마실 것이며, 밤술은 달을 벗삼아 마셔야 한다.'' 《특별한 행복》기쁨은 기쁨을 끌어당기고, 슬픔은 슬픔을 끌어당긴다. 내가 기쁘면 기뻐할 일들이 많이 생기고, 내가 슬프면 매사에 슬퍼할 일들만 생기게 된다. 미움은 사각에서 오고, 이해는 자각에서 오고, 사랑은 생각에서 온다. 생각은 천사가 주는 마음이고, 사각은 악마가 주는 마음이고, 자각은 자기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은혜는 돌에 새기고, 원수는 물에 새기자. 상처는 남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는 것이다. 내 마음속에 박혀있는 수많은 상처들을 안고 살지 말자. 지금 이 순간 상처는 떠나 보내자. 고마운 것들은 돌에 새기고, 섭섭했던 것들은 물에 새겨서 흘려 보내자. 인생은 지나가고, 지나면 추억이 되고, 그 추억은 고통스러울수록 아름답다.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죽었던 라자로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걸어 나옵니다. 우리 신앙인의 삶은 한평생 믿음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순절을 지내는 우리에게, 지난 몇 주일의 복음 말씀은 그 믿음에 관하여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 가를 가르쳐 줍니다.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이 간청합니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요한 4, 15) 눈을 뜨게 된 태생 소경의 고백도 있다. “선생님, 그분이 누구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주님, 저는 믿습니다.”(요한 9, 36. 38) 마르타 역시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 27) 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이 순간 믿고 싶고 또 믿고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 가를 모를 수 있는 우리에게 주님은 라자로의 죽음과 소생을 통해 분명하게 다시 말씀해 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 25∼26) 한평생 믿음의 여정을 걷고 있는 우리 신앙인들은 이렇게 부활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죽더라도 다시 사는 삶, 영원히 죽지 않는 삶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입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에게도 지금 이 순간 현실은 늘 무덤같은 삶임을 또한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이웃에게 마음을 닫으면 사회도 무덤이 됩니다. 가족에게 마음을 닫으면, 가정 또한 무덤입니다. 그래서 이제 자신에게마저 마음을 닫는 것이 바로 죽음의 무덤이 되는 것입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 43) 죽음의 무덤에서 생명의 나라로 라자로를 끌어내 주신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도 나를 가두고 있는 모든 무덤에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을 열고, 내 집 문을 열고, 우리 공동체를 활짝 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에제키엘 예언자의 말씀을 실현하라고 하십니다.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 그리고 내 백성아,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에제 37, 12) 나를, 그리고 우리 공동체를 닫고 있는 무덤이 무엇입니까? 그 무덤에서 나와서 부활의 삶을, 생명의 삶을 지금 이 순간 살라고 하십니다. 아멘. 미국판 법정 스님 정도 되는 데이비드 소로는 이런 명언(名言)을 우리에게 남겼다. “깨어 있다는 것은 곧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라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여러 차례 그렇다고 말씀을 하셨다고 하시며,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은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 그들은 주님의 양이 될 수 없었을까요?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사실 그들은 알아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고 계속 말해달라고 하고 있었던 것.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의 양이 맞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있을까요? 하루에 한 번이라도 나에 대한 주님의 뜻을 여쭈어본다면 그 사람은 분명 그리스도의 양이 맞다. 그리스도의 목소리는 우리를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주십니다. 그러니 나의 삶의 방향에 대해 ‘어떻게 사는 게 주님의 뜻일까?’ 를 묻는다면 그 사람은 목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양이 맞다. 주님의 뜻이 옳을 수 있다는 마음을 가져야 귀가 열리고 믿음이 생깁니다. 성전 봉헌 축제는 기원전 164년 유다 마카베오가 시리아의 하스모네아 왕조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를 물리치고 성전을 다시 주님께 봉헌한 축제입니다. 겨울이고 예수님의 탄생 날짜와도 비슷합니다. 이때는 성전과 온 가정을 촛불로 밝히는데 이는 아마도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제물을 사른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은 우리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성전이 될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성전을 허물면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말씀하신 성전이 바로 예수님의 몸을 가리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요한 2,21) 이 불은 곧 성령을 가리키는데 성령께서는 우리 뜻을 사르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의 양이 될 수 없었던 이들은 자기 자신을 주님의 성전으로 봉헌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 우리 뜻보다 주님의 뜻을 우선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한 가난한 소년이 있었다. 그는 학교에 갈 만큼 넉넉하지도 못했고, 어느 공장에 들어가 일을 할 만한 기술도 없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사진술을 배워 사진기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술을 엮어 놓은 책을 주문했다. 그 편지를 받은 서점의 착오로 사진술에 관한 책은 오지 않고 발성법에 관한 책이 왔다. 소년은 너무 가난하여 그 책을 돌려보낼 만한 배송료도 없었거니와 반송하는 방법도 몰랐다. 소년의 실망은 너무 컸다. 이 소년은 기도했다. 할 수 없이 발성법에 관한 책을 보기 시작했다. 이 소년이 그 책을 통해 복화술 인형 쇼로 유명하게 된 찰리 매카시라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에 민감한 사람이 될 때 주님께 봉헌된 성전이 되고 주님의 양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기도의 은총과 주님의 섭리로 우리들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이길 수 있다. 승리에는 신념이 필요하다.'' - 윌리엄 해즐릿 - |
♡2016회 사랑이 부족하면 상대방을 감싸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2월 25일(에스테르 1장~ ) 침묵의 소중함 - 토마스 머튼 - 침묵은 양선함입니다. 마음이 상했지만 답변하지 않을 때 내 권리를 주장하지 않을 때 내 명예에 대한 방어를 온전히 하느님께 내맡길 때 바로 침묵은 양선함입니다. 침묵은 자비입니다. 형제들의 탓을 드러내지 않을 때 지난 과거를 들추지 않고 용서 할 때 판단하지 않고 마음 속 깊이 변호해 줄 때 바로 침묵은 자비입니다. 침묵은 인내입니다. 불평 없이 고통을 당할 때 인간의 위로를 찾지 않을 때 서두르지 않고 씨가 천천히 싹트는 것을 기다릴 때 바로 침묵은 인내입니다. 침묵은 겸손입니다. 형제들이 유명해지도록 입을 다물 때 하느님의 능력의 선물이 감추어졌을 때도 내 행동이 나쁘게 평가되든 어떻든 내버려둘 때 바로 침묵을 겸손입니다. 침묵은 신앙(믿음)입니다. 그분이 행하도록 침묵할 때 주님의 현존에 있기 위해 세상 소리와 소음을 피할 때 그분이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기에 인간의 이해를 찾지 않을 때 바로 침묵은 신앙입니다. 침묵은 흠숭입니다. "왜" 라고 묻지 않고 십자가를 포옹할 때 바로 침묵은 흠숭입니다. 침묵할 때와 침묵하지 말아야 할 때를 잘 식별할 수 있는 은총을 거듭 주님께 청해야겠습니다. 얼토당토않은 불의한 현실 앞에 침묵함은 미덕이 아니라 악덕입니다. 무죄한 이웃이 겪고 있는 극심한 고통 앞에 침묵함은 죄악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미성숙과 나약함, 위선과 이중성에 대한 신랄한 지적 앞에 침묵과 숙고, 성찰과 회개의 여정은 우리를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미덕이 될 것입니다. 《나이들면 人生은 비슷해 진다.》40대는 미모(美貌)의 평준화가 이루어지고, 50대는 지성(知性)의 평준화가 이루어지며, 60대는 물질(物質)의 평준화가 이루어지고, 70대는 정신(精神)의 평준화가 이루어지며, 80대는 목숨의 평준화가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모두가 조금씩 변해간다는 것입니다. 30대 까지는 世上의 모든 것이 不公平하고, 사람마다 높은 山과 계곡(溪谷)처럼 차이가 나지만, 나이가 들면서 山은 낮아지고, 계곡은 높아져 이런 일 저런 일 모두가 비슷해 진다는 것입니다. 많이 가진 자의 즐거움이, 적게 가진 자의 기쁨에 못 미치고, 많이 아는 자의 만족(滿足)이 못 배운 사람의 감사(感謝)에 못 미치기도 하여, 이렇게 저렇게 빼고, 더하다 보면 마지막 계산은 비슷 비슷하게 되는 것이지요. 모두가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만하거나 자랑하지 말아야 할 이유(理由)가 여기에 있다 . 우리가 친절(親切)하고, 겸손(謙遜)하고 서로 사랑해야 할 이유(理由)도 여기에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최후의 만찬 때에 당신이 뽑으신 사도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이 뽑으신 사도들은 모두가 성인들이 아니었다. 부족한 사람들도 있었고 좀 더 완전한 사람들도 있었고, 유다와 같은 배신자도 있었다. 예수님은 사도단을 성인들이 아닌 보통 사람들로 구성하셨다. 그 이유는 보통 사람들이 모여 당신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모범을 사람들에게 보이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포용하는 마음이 있어야합니다. 유다는 그런 면에서는 다른 사도들의 스승이었다. 다른 사도들이 거짓말쟁이이며 도둑이고 배신자인 유다를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유다가 배신자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합니다. 모두가 유다를 형제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그렇게 참고 받아들이고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성장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종이 아닌 친구로 부르시는 것을 보면서 정말 완전하신 하느님께서 어떻게 이렇게 흠이 많은 인간을 친구로 여길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모범은 당신의 생명까지도 벗을 위해 바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주신다는 뜻은 자신을 온전히 비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이 많은 사람은 자신을 온전히 남에게 주어서 자신을 비웠기에 누구도 이해하고 안아줄 수 있는 무한한 포용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나로 가득 찰수록 사랑이 줄어들어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이 있으면 부딪혀서 감정이 상하느니 그냥 외면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누구 하나 놓치지 말고 품어줄 수 있는 어머니의 마음을 가지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 넓은 마음은 또한 모든 것을 내어놓는 사랑의 마음에서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부족하면 상대방을 감싸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온전히 비워버린 십자가의 예수님을 묵상해봅시다. 당신의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아끼지 않고 주실 수 있었던 사랑, 그렇게 자신을 비울 줄 아는 사랑을 가져야만 우리도 예수님의 진정한 친구가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주님의 은총으로 불러 주심에 감사드리고, 내 삶에 마지막 날에 “모든 것이 은총이었다.” 라고 고백하는 은총 충만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처음에 우리가 습관을 만들지만, 그다음에는 습관이 우리를 만든다.'' - 존 드라이든 - |
♡2017회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2월 26일(욥기 1장~ ) 로버트 레슬리는 ''성서 속에 되풀이하여 나오는 신에 응답하는 인간의 이미지는 양심이라는 것이 양친으로부터 부여된 규범 이상의 것임을 인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은 자신에게 부여된 모든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살리려는 인간을 보여준다. 양심은 초월의 목소리이다. 사람은 그 소리를 받아들이지만 그것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사랑의 힘》내면에서 솟아나는 사랑의 힘을 지금 이 순간 느껴보십시오. 그 사랑은 당신이 모두와 하나될 수 있는 천국으로 당신을 이끌어 줄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 (에제 18,31)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2-33).” 최후의 만찬 때에(체포되기 직전에) 하신 말씀인데, “내가 세상을 이겼다.” 당시 상황과는 너무 안 어울리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길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겼다.” 라고 말씀하셨다. “이기는 것으로 이미 정해져 있다.” 는 것. 예수님께서는 ‘수난 예고 말씀’ 을 하실 때마다 ‘부활 예고 말씀’ 도 하셨다. 그 말씀도 당신의 승리를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이렇게 “이미 이겼다.” 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일의 결과를 알고 계신다는 것을 나타내고, 또 아무도 그것을 바꾸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계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결과를 알고 계셨으니 십자가 수난의 고통이 덜했을까?” 아마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오히려 더 심하게 고통스러웠을 것 같다. 이것은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이 잘 만들어진 각본대로 진행된 일이라는 뜻이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하느님의 뜻(계획)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우리가 보기에는, 항상 그 과정은 대단히 복잡하고, 돌발 상황도 많이 생깁니다. 대부분 인간의 자유의지 때문에 그렇게 복잡해집니다. 특히 각 개인의 ‘끝’ 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개인의 구원과 멸망은 정해져 있지 않다.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모릅니다. 오늘의 ‘선택’ 이 내일의 ‘결과’ 로 이어집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지금 이 순간 “승리자 편에 설 것인가? 패배자 편에 설 것인가?” 라는, 선택과 결단에 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예수님 편에 서는 것은 승리자 편에 서는 것.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박해자 편에 서는 것은 패배자 편에 서는 것. 배반자 유다의 경우에, 그의 눈에는 박해자들이 승리자로, 예수님이 패배자로 보였고, 그래서 그는 박해자들 편에 섰고, 그것이 그의 배반입니다. 다른 사도들은 박해자들 편에 서지는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모두 달아났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 일이 예수님의 패배로 보였던 것. 인간적으로만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체포되고, 재판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당하는 모습을 승리로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패배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생각일 것.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 라는 말씀을 하셨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 라는 말씀의 이유(근거)가 되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 그러므로 세상은 나를 이기지 못한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 전능하신 하느님보다 강한 존재는 없기 때문에, 그 어떤 존재도 하느님을 이길 수 없고,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 분도 이길 수 없다. 예수님 말씀은,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 믿고 내 편에 서겠느냐? 그것을 안 믿고 박해자들 편에 서겠느냐?” 라는 질문이 되기도 합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도 예수님 곁에 남아 있을 수 있다. 그 믿음이 없다면 예수님을 버려두고 달아나게 될 것. 이 말은 우리 자신의 인생살이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주님께서 언제나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여러 가지 고난과 시련과 불행을 겪어도 굴하지 않고 그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없다면 금방 굴복할 것이고, 포기할 것. 예수님께서도 바로 그것을 예상하셨고,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 말씀은, “너희가 고난을 겪지 않도록 내가 막아주겠다.” 라는 약속이 아니라, “고난을 겪겠지만 굴복하지도 말고 포기하지도 마라.” 라는 격려입니다. 이 말씀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6-19)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신앙인들을 죽이지 못하도록 무조건 막아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목숨을 잃는 일이 생기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잃지 않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이 말씀에 대해서 “사는 동안에 사람들에게 미움만 받고, 죽도록 고생만 하고, 결국 목숨을 잃는다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믿는다 해도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신앙생활이 그렇게 힘들기만 하다면 누가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라고 물을 수 있다. 또는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행복과 평화를 여기에서 미리 누릴 수는 없는가?” 라고 물을 수도 있다. 사실 그렇다. 우리는 고생이나 하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죽은 다음에나 누리게 될 천국의 행복은 죽은 다음의 일이고, 우리는 살아서도 그 행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되는가? 그냥 무턱대고 참으면 되는가? 답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말씀에 있다. 이 말씀의 실제 예를 사도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다.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들여 매질한 다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고서는 놓아주었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의회 앞에서 물러나왔다.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또 이 집 저 집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선포하였다(사도 5,40-42).” 박해를 받아도 굴하지 않고, 또 기쁨과 평화를 잃지 않고, 흔들림 없이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들의 모습은 승리자의 모습이고,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이미 누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지금 이 순간 무턱대고 참기만 한다고 인내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주님께서 나를 지켜 주신다는 믿음 속에서 참고 견디는 것이 인내입니다. 그 믿음과 인내에서 힘과 용기가 생기고, 기쁨과 평화를 얻게 됩니다. 말로는 단순하지만, 실제로는 꾸준히 노력해서 도달해야 하는 일입니다. “도와줄 테니 따라만 와라.” 는 주님의 약속을 지금 이 순간 믿고 우리들은 이제 “걸어.. 걸어.. 걸어.. 뛰어.. 뛰어” 라는 마음 자세로 주님을 따르는 은총과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계절이 바뀌면 꽃은 새롭게 피어나지만, 시들어 버린 아름다움은 다음 봄날을 기약할 수 없다.'' - 필립스 - |
♡2018회 말에는 굉장한 힘이 있다. - ♡ 2024.2.27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2월 27일(시편 84편~ ) 발타자르 그라시안은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모험은 자신감을 가지고 역경과 맞서 싸워라 어떤 고난이라도 반드시 끝이 있기 마련이다.'' 《관계의 소중함》약점은 도와주고~ 부족은 채워주고~ 허물은 덮어주고~ 비밀은 지켜주고~ 실수는 감춰주고~ 장점은 말해주고~ 능력은 인정을 해주세요~ 사람을 얻는 것이 커다란 행복이며 사람을 잃는 것은 크나 큰 슬픔입니다. 그렇습니다. 기쁨도 슬픔도 성공도 실패도 사람으로 연결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좋은 사람 만나고 싶거든 내 자신이 먼저 어떤 사람인지 봐야 할 것 같다. 마치 사람은 자석 같아서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끌어 당기기 때문입니다. 성공도 같다. 우리들의 그릇이 키운 만큼 담을 수 있는 사람들의 크기가 달라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힘이 들고 조금은 버거운 세상 우리 서로 사랑하며 감싸면서 살아요. - 박래식 - 오래 전 이탈리아 나폴리의 한 공장에서 위대한 성악가를 꿈꾸는 한 소년이 있었다. 어려운 생활 중에 겨우 첫 레슨을 받았을 때, 교사는 그에게 “너는 성악가로서 자질이 없어. 네 목소리는 덧문에서 나는 바람 소리 같다.” 라고 혹평했다. 그 소년은 큰 좌절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소년의 어머니는 실망하는 아들을 꼭 껴안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들아! 너는 할 수 있어, 실망하지 말아라. 네가 훌륭한 성악가가 되도록 이 엄마는 어떤 희생도 아끼지 않고 너를 돕겠다.” 소년은 어머니의 격려를 받으면서 열심히 노래했다. 이 소년이 바로 세계적인 성악가 ‘엔리코 카루소’ 였다. 말에는 굉장한 힘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좋은 말과 나쁜 말을 구별할 수 있을까요? 수많은 방법이 있겠지만 그래도 가장 정확한 것은 좋은 말은 나를 성장시키게 만든다는 것. 자신을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싸움을 하게 만듭니다. 연습 없이 좋아질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나 나쁜 말은 그냥 주저앉게 만듭니다. 그런 말들은 다 자아에게서, 혹은 그 자아를 통해 나에게 말하는 마귀들의 소리입니다. 나를 주저앉히는 말에 휩쓸리지 말아야 합니다. 정말 훌륭한 바이올린 연주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런 연주자는 아무리 어려운 곡이라도 연주할 능력이 있다. 그런데 저절로 그렇게 되었을 리가 없다. 끊임없이 자신의 능력보다 조금 더 높은 수준의 악보를 연주하려 노력했을 것. 그 연주하는 악보는 분명 쉽게 연주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곡일 확률이 높다. 부모도 자녀를 위해 이런 식으로 말을 합니다. 두 발로 걸을 수 있으면 대소변을 가려보라 하고 그것을 하면 수저로 밥을 먹어보라 합니다. 사랑의 말인데 점점 나를 훈련하는 말이고 자신과 싸우게 만드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조언을 따른다면 그 사람은 더 높은 수준의 인간이 되어갑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께 파견되신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인 것. 그분을 받아들여 그분처럼 살기 위해 연습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거부한다면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치 않는 말에 더 믿음을 둔 것. 하느님의 말씀은 나를 훈련하게 만드는 말씀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더 나에게 유익한 말씀입니다. 나 자신과 싸우게 하는 말씀이 나를 살리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모든 인간이 다 자아의 말을 따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자아는 자신이 편한 것만 찾고 그렇게 말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자아를 선택한 인간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나를 힘들게 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거부함이 곧 구원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이유로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실험을 해 보았다. 밥을 지어 두 병에 넣고 한 병엔 욕을 하고 한 병엔 칭찬하는 것. 이것을 신자들이 지나다니는 곳에 놓고 신자들이 직접 체험하게 하였다. 정말 칭찬을 한 병은 누룩의 좋은 냄새가 났고 욕을 한 병은 검게 타버린 것처럼 썩은 냄새를 풍겼다. 하느님의 말씀 안에는 창조의 힘이 있다. 창조는 힘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나를 괴롭힙니다. 내가 썩지 않도록 노력하게 만드는 것. 나 자신은 주저앉으려고 하지만 하느님 말씀은 그런 나와 싸우게 만드십니다. 나를 이기게 만드는 말씀을 받아들입시다. 힘들기는 하겠지만 하느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오늘 주님을 섭섭하게 하는 일을 만들거나 하지 않기를 그리고 오늘도 이미 주님께 보호받고 은총 받아서 축복된 자비를 입고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하는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오늘 하느님은 은혜로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나 내일 그는 진노(震怒) 가운데 말씀하실 것이다.'' - 워렌 W. 위어스비 - |
💖성령봉사자 박재만 세례자요한 010 - 3878 - 6634
(수필가ㆍ전국성령쇄신봉사자협의회 말씀추천강사)
💖성령봉사자 류태숙 M.막달레나 010 - 6560 - 7354
(시인ㆍ수필가ㆍ꽃예술설화중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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