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회 함께 해주신분 감사드립니다. 주님안에서 설명절기간 은총과 축복 받으세요.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2월 9일( 코린트1서 1장~ ) 이성계는 ''화살이 과녁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활 쏘는 이가 과녁으로 화살을 보내는 것이다.'' 《오늘》오늘은 내 일생 중에 가장 중요한 날이며 다른 모든 날을 결정해 주는 날이다. - 몽테뉴 - 내 일생의 모든 것은 오늘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 오늘의 작은 생각이 어제의 큰 생각보다 중요합니다. 미래는 지나간 경험이 아니라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이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내 삶의 모든 날은 '오늘' 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다. 오늘 내가 무너지면 단단해 보이던 삶도 무너지고 오늘 내가 일어서면 희미했던 삶 전체가 뚜렷해집니다. 세상의 모든 희망은 언제나 오늘부터 시작됩니다. 뉴욕에서 플로리다 해변으로 가는 버스에 활달한 세 쌍의 젊은 남녀가 탓다. 승객이 모두 타자 버스는 곧 출발했다. 세 쌍의 남녀들은 여행의 기분에 취해 한참을 떠들고 웃어대다가 시간이 지나자 점점 조용해졌다. 그들 앞자리에 한 사내가 돌부처처럼 앉아 있었다. 무거운 침묵, 수염이 덥수룩한 표정없는 얼굴... 젊은이들은 그사내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누구일까? 배를 타던 선장? 아니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퇴역군인? 일행 중 한 여자가 용기를 내어 그에게 말을 붙였다. 그에게는 깊은 우수의 그림자 같은 것이 느껴졌다. “포도주 좀 드시겠어요?” “고맙소” 그는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곤 다시 무거운 침묵... 그리고 시간이 흘러, 아침이 되었다. 버스는 휴계소에 섰고, 어젯밤 말을 붙였던 여자가 그 사내에게 함께 식사를 하자고 말했다. 그는 수줍은 표정을 보이면서 자리를 함께 했다. 식사를 끝내고 다시 버스에 올라탔고 젊은 여자는 그의 옆자리에 가 앉았다. 얼마 후 사내는 여자의 집요한 관심에 항복했다는 듯,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고 자신의 이야기를 천천히 꺼내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 빙고 " 였으며, 지난 4년 동안 뉴욕의 교도소에서 징역살이를 하고 이제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아내에게 편지를 보냈소. 나는 부끄러운 죄를 짓고 오랜 시간 집에 돌아갈 수 없으니, 만약 나를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되거나 혼자 사는 것이 고생이 된다고 생각되거든 나를 잊어 달라고 했소. 재혼해도 좋다고 했소. 편지를 안해도 좋다고 했소. 그 뒤로 아내는 편지를 하지 않았소. 3년 반 동안이나 석방을 앞두고 아내에게 다시 편지를 썼소. 우리가 살던 마을 어귀에 커다란 참나무 한 그루가 있소. 나는 편지에서, 만일 나를 용서하고 다시 받아들일 생각이라면 그 참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달아달라고 말했소. 만일 아내가 재혼을 했거나 나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면, 그래서 손수건을 달아놓지 않았으면 나는 그냥 버스를 타고 어디로든 가버릴 거요." 그의 얼굴이 그렇게 굳어져 있었던 것은 거의 4년간이나 소식이 끊긴 아내가 자기를 받아줄 것인가 하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여자는 물론이고 그녀의 일행들도 이제 잠시 뒤에 전개될 광경에 대해 궁금해 하며 가슴을 조이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다른 승객들에게도 전해져 버스 안은 설렘과 긴장감으로 가득찼다. 빙고는 흥분한 표정을 보이거나 창밖을 내다보거나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굳어진 얼굴에서 깊은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그는 이제 곧 눈앞에 나타날 실망의 순간을 대비하며 마음 속으로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을과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20마일... 15마일... 10마일... 물을 끼얹은 듯 버스 안은 정적이 감돌았다. 자동차의 엔진소리만이 꿈 결에서처럼 아스라하게 일정한 리듬으로 고막을 두드리고 있었다. 승객들은 모두들 창가로 몰려가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드디어 버스가 마을을 향해 산모퉁이를 돌았다. 바로 그때. “와~!!” 젊은이들의 함성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 버스 승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쳤고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얼싸 안았다. 참나무는 온통 노란손수건으로 뒤덮여 있었다. 20개... 30개... 아니 수백 개의 노란 손수건이 물결치고 있었다. 혹시라도 남편이 손수건을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칠까 봐...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참나무를 온통 노란 손수건 으로 장식해 놓은 것 이었다. 여전히 침묵을 지키는 것은 오로지 빙고 한 사람뿐 그는 넋 잃은 사람처럼 자리에 멍하니 앉아 차창 밖의 참나무를 뚫어지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윽고 빙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늙은 전과자는 승객들의 뜨거운 환호와 박수를 받으며 버스 앞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갔다. 이 이야기는 미국 소설가이자 칼럼니스트인 피트 하밀이 뉴욕포스트에 게재한 ‘고잉 홈(Going home)’ 이란 제목의 글입니다. 이 감동적인 이야기는 1973년 Tony Olando & Dawn 이 만든 노래 ‘오래된 참나무에 노란 리본을 달아주세요'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d oak tree 가 전세계적으로 크게 히트를 기록하면서 모두가 기억하는 감동 스토리로 남아있게 되었다. 노란 손수건은 용서와 포용과 사랑의 표현입니다. 부끄러운 과거를 용서해주고, 고달픈 세월을 마다 하지 않고 남편을 기다려준 아내의지극한 사랑입니다. I'm coming home, I've done my time... 나 형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If you still want me... 당신이 아직도 나를 원한다면 Tie a yellow ribbon around the old oak tree... 그 오래된 참나무에 노란 리본 한 개를 달아주세요. 1979년 이란의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린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면서 이란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일하던 미국인 50여명이 인질로 억류 되었는데, 당시 인질로 붙잡힌 한 외교관의 아내가 남편이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오길 바란다는 염원을 담아 노란 리본을 집 앞 나무에 매달았고, 이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미국 전역에 인질들을 조기석방하여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노란리본 캠페인이 확산되기도 했다. 그 뒤에도 노란 리본은 걸프전과 이라크전 등 전쟁터로 떠난 군인들이 무사히 돌아오길 바란다는 상징으로 사용됐다. 무조건 정치적인 대립으로 뜻없이 생각 없이 이슈화 하기보다 실제적인 노란 리본의 숭고한 뜻을 되새겨 보는 작금의 대한민국 현실이 되었으면 합니다. 🎶 오래된 참나무에 노란 리본을 달아주세요. 인생에서 가장소중한 것은ᆢ 미국의 심장부를 강타한 9.11 사건의 피해자들이 마지막 순간에 남긴 메시지는 사업이나 회사의 프로젝트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런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그들이 남긴 메시지는 하나같이 가족에게 남긴 사랑의 고백이었다. “여보, 난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을 다시 봤으면 좋겠어. 부디 애들하고 행복하게 살아.” 많은 사람들이 일에 치여 가족도 잊은 듯 바쁘게 살아가지만, 목숨이 1분도 채 남아 있지 않았을 때는 결국 가족을 찾는다는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 여보, 나의 아이들아.." 우리들은 ‘오늘 주님과 함께라면 뭐든 할 수 있다.’ 라는 말씀과 함께 주님을 향한 절대 믿음으로 걱정하거나 근심하지 않는 은총과 축복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끊임없이 노력하라. 체력이나 지능이 아니라 노력이야말로 잠재력의 자물쇠를 푸는 열쇠다.'' - 윈스턴 처칠 - 💖성령봉사자 박재만 세례자요한 010 - 3878 - 6634 (수필가ㆍ전국성령쇄신봉사자협의회 말씀추천강사) 💖성령봉사자 류태숙 M.막달레나 010 - 6560 - 7354 (시인ㆍ수필가ㆍ꽃예술설화중앙회장) ■묵상글 나눔 추천■ [성명, 본명, 본당, 휴대폰번호] 카톡이나 문자로 보내주시면 복음과 묵상말씀을 카톡으로 함께 나누겠습니다. ※ 추천 해주신 모든분 감사드립니다. |
♡2001 ''20년의 봉급과 맞바꾼 세가지 삶의 지혜''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2월 10일( 갈라티아서 1장~ )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기 6,24-26) 설날 잘 보내시고 가족과 함께 만나는 소중한 이들과 즐겁고 행복한 시간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가족 모두 건강하시기를, 웃음만 가득한 삶이 되시기를 하느님께 기도드립니다. 박재만 세례자요한 류태숙 마리아막달레나 《아내를 황금(黃金)같이 보면 삶이 달라진다!》어느 커피숍에 ㅣ‘Happy wife, happy life’ 라는 글이 담겨져 있는 액자(額子)가 걸려 있었다. 얼핏 보기에 커피숍에 무슨 wife라는 글이 적혀 있는 게 쌩뚱 맞다 의아(疑訝)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주 멋진 뜻이었다. 해석(解釋)해 본 즉, “아내가 행복(幸福)해야 인생(人生)이 행복하다.” 는 것. 그러면 우리말로 인명재처(人命在妻)이네! 맞다. 아내가 행복해야 삶이 행복하고 남편(男便)이 편(便)하다. 남편의 운명(運命)은 아내의 손에 달려 있다. 특히 나이 들어가면서 이러한 진리(眞理)는 두드러진다. ‘칸트’ 는 “남편 된 사람은 아내의 행복이 자신(自身)의 전부(全部)라는 것을 행동(行動)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고 말했다. 중국고사(中國古史)에서도 아내의 역할(役割)은 출중(出衆)했다. 위(魏)나라 문후는 “가난한 사람은 좋은 아내를 얻고 싶어 하고, 나라가 혼란(混亂) 스러우면 좋은 재상(宰相)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법이다.” 고 했다. 북송(北宋)의 ‘구양수歐陽脩)’ 는 “내가 재력(財力)이나 지위(地位) 때문에 마음 고생하지 않고 지낸 것은 내 아내의 덕(德)이다.” 고 말했다. 아내를 칭송(稱頌)하는 아름다운 말들이 많다. 1. 아내는 남편의 영원(永遠)한 누님이다.(팔만대장경) 2. 좋은 아내를 갖는 것은 제 2의 어머니를 갖는 것과 같다. 3. 좋은 아내는 남편이 탄 배의 돛이 되어 그 남편을 항해(航海)시킨다.(영국속담) 4. 아내는 행복의 제조자(製造者) 겸 인도자(引導者)인 것.(피천득) 5. 아내를 괴롭히지 마라. 하느님은 아내의 눈물방울을 세고 계신다.(탈무드) 6. 아내는 젊은이에게는 연인(戀人)이고, 중년(中年) 남자에게는 반려자(伴侶者)이고, 늙은이에게는 간호사(看護士)다.(베이컨) 7. 아들은 아내를 맞을 때까지는 자식(子息)이다. 그러나 딸은 어머니에게 있어 평생(平生)의 딸이다.(토마스 플러) 8. 오늘부터 아내의 존재(存在)를 황금같이 보면 삶이 달라진다. 9. 빈천지교 불가망(貧賤之交不可忘), 조강지처 불하당(糟糠之妻不下堂) : 가난하고 천할 때 사귄 벗은 잊을 수가 없고, 조강지처는 집에서 내보내지 않는다. 10. 빈궁(貧窮)할 때 사귄 벗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고, 가난(家難)할 때 의지(依支)하며 살아온 아내는 버리지 않는다. 옛 벗이나 고락(苦樂)을 함께 했던 아내는 잊거나 버려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11. 이 세상(世上)에 아내라는 말처럼 정답고 마음이 놓이고 아늑하고 편안(便安)한 이름이 또 있을까! 천 년 전 영국(英國)에서는 아내를 ‘peace weaver(평화를 짜는 사람)’ 이라고 불렀다. 모든 남성 여러분! 지금 이 순간 부디 유념(留念)하셔서 노후(老後)를 보장받도록 합시다! 오늘은 청주교구성령봉사회 수요치유기도회에서 강의한 내용 일부를 묵상하고자 합니다. 삶의 나침판으로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20년의 봉급과 맞바꾼 세가지 삶의 지혜♡ 어느산속에 가난한 농부와 아내가 살고 있었다. 아내와 살고 있던 가난한 농부가 집을 떠나 다른 마을에 가서 돈을 벌어오기로 했다. 예전 우리네 머슴살이와 같은 것. 아내곁을 떠나기 전 농부와 아내는 서로를 향한 믿음을 지키자고 굳게 약속 했다. 집을 떠난 농부는 이십일을 걸려 어느 마을에 도착했다. 그리고 어느 부잣집에서 20년을 일하기로 했다. 농부는 주인에게 20년 동안 자신의 월급을 저축해 두기를 부탁했다. 드디어 20년이 차서 농부는 주인에게 자신의 돈을 달라고 했다. 그러자 주인이 둘 중에 한가지를 선택 하라는 제안을 내놓았다. 20년간 번 돈을 가져갈 것인가 아니면 세가지 삶의 지혜를 들을 것인가? 선택 하라는 것. 이틀동안 고민한 농부는 20년간 번 돈대신 세가지 삶의 지혜를 듣기로 했다. 주인은 미소를 지으며 조목조목 세가지 삶의 지혜를 말해 주었다. “첫째로, 인생에서 지름길을 택하지 말게-, 그러면 대가를 크게 치르고 큰 손해를 볼수도 있네.“ “둘째로, 과하게 호기심을 가지지 말게-, 과한 호기심은 다칠수도 있다네.” “셋째로, 화가 났을 때 절대로 무언가를 결정하지 말게-, 그렇지 않으면 끝없는 후회를 하게 된다네.“ 주인은 그에게 빵 세 덩어리를 주며 말했다. “첫번째와 두번째의 빵은 집에 돌아가는 길에 먹고, 세번째 빵은 꼭 집에서 먹게나 !” 농부는 주인에게 감사해 하며 길을 떠났다. 첫째 날에 그는 그가 어디로 가는지 물어보는 여행자를 만났다. 농부는 대답했다. “20년의 노동을 끝내고 집으로 가는 중입니다. 그런데 20일이나 걸린답니다. “여행자가 말했다. “제가 5일밖에 걸리지 않는 더 빠른 지름길로 안내해 주겠다.” 농부는 지름길을 택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는 주인이 해줬던 첫번째 조언이 떠올랐다. 농부는 지름길 대신 긴 여정을 선택 했다. 그래서 그는 노상강도의 공격을 피할수 있었다. 밤이 되어 농부는 마을로 들어갔다. 그리고 하룻밤을 머물기로 했다. 그가 잠을 자고 있을 때 큰 울음소리가 그를 깨웠다. 무슨 소리인지 궁금해져서 그는 일어나서 문을 조금 열었다. 하지만 주인이 해줬던 두번째 조언이 떠올랐다. 그래서 다시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집주인은 그에게 말했다. “호랑이가 밤에 마을로 내려왔다. 그래서 모두 문을 단단히 잠그고 있었지요.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농부는 20일이 걸려 집에 도착했다. 집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부푼 마음으로 그는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집 안을 들여다 보는 순간 기쁨이 충격과 분노로 변했다. 그의 아내가 다른 젊은 남자를 껴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증오가 그의 마음을 지배했고 그는 달려가서 둘을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주인이 말해준 세번째 조언을 기억했고 자신을 억제 했다. 그날 밤 그는 헛간에서 잠을 잤다. 해가 떠오르자 그는 마음을 진정하고 생각 했다. "주인에게 돌아가서 일을 다시 구하고 아내와 그의 애인을 죽이지 말자". 하지만 돌아가기 전에 아내에게 자신은 항상 믿음을 잃지 않았다고 말하기로 했다. 그가 문을 두드렸을 때 아내는 문을 열고 그의 품에 안겨 왔다. 그는 아내를 거칠게 밀어내며 슬프게 말했다. “나는 항상 믿음을 가졌는데 당신은 나를 배신했어-!” “아니에요-!” 아내가 강하게 머리를 저었다. “나는 어젯밤에 당신과 한 젊은 남자가 함께 있는것을 보았단 말이요-!” 농부가 말했다. 아내가 대답 했다. “그 남자는 우리 아들이에요-!” “당신이 떠날 때 저는 임신 중이었고 우리 아들은 스무살이 되었어요-!” 그 말을 들은 농부는 아내를 꼬-옥 껴안고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부부와 아들은 마지막 남은 빵을 먹기 위해 마주 앉았다. 농부가 빵을 자르니 그 속에는 그가 20년 동안 번 돈과 이자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감동을 주는 지혜의 글이다. 우리는 이런 지혜의 이야기를 읽으며 여기까지 왔다. 상황에 따라 감정을 조율하는 농부의 대응이 가슴을 조리게 했다. 누구나 감정을 다스리는게 쉽지 않다. 얼마나 각박한 세상인가, 우리들 앞에는 화(禍)낼 일만 늘어나고 있다. 여기 이 삶의 지혜가 모든이의 양식이 되었으면 좋겠다. 항상 주님안에서 건강 하시고 늘 행복 하세요. 하느님의 말씀이 믿어지는 그때가 되면, 고통과 곤경 속에 있는 우리들의 집 지붕(어떤 집이든 상관없음)을 뚫고, 그리고 걱정이나 염려 속에 있는 우리들의 골수를 뚫고 치유와 회복이라는 하느님의 놀라운 은혜가 임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빠른 명마는 하루에 천 리를 달릴 수 있다. 하지만 늙은 말도 쉬지 않고 열흘을 걸으면 역시 천 리를 갈 수 있다.'' - 순자 - |
♡2002회 누군가를 이해하려면 먼저 사랑해야 한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2월 11일(히브리서 1장~ ) 알랭은 ''다리를 움직이지 않고는 좁은 도랑을 건널 수 없다. 소원과 목적은 있되, 노력이 따르지 않는다면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소용이 없다. 비록 재주가 뛰어나지 못하더라도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은 기필코 성공을 거두게 된다.'' 《지금 이 순간 좀 부족한 듯 삽시다.》영국 의회에 어떤 초선 의원이 있었다. 의회에서 연설을 하는데, 청산유수로 너무나도 완벽한 연설을 했다. 연설을 마치고 난 다음에 '윈스턴 처칠' 에게 다가와 자기 연설의 평가를 부탁했다. 물론 '처칠' 로부터 "탁월한 연설이었다" 라는 평가와 칭찬을 기대했다. 윈스턴 처칠의 대답은 의외였다. "다음부터는 좀 말을 더듬거리게나... " 너무 완벽하면 정 떨어집니다. 한 방울의 물도 떨어뜨리지 않는 항아리는 황무지를 만듭니다. 옛말에 등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했다. 금이 갔기 때문에 훌륭한 인생을 살다간 사람이 무척이나 많습니다. 스스로 왕자병과 공주병의 자만심으로 주변 사람들을 무시하고 까탈을 부리다가 실패한 삶을 살다가는 사람들도 많이 볼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지난 삶을 돌아봅니다.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살지 못하듯 사람이 너무 완벽하면 피곤하지 않습니까? 좀 부족한듯 사는 인생이 인간답게 사는 인생이 아닐까 합니다만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 사는 행복한 삶 보내시길 기도합니다. 임금님에게 외아들이 있었는데 며느리를 고르게 되었다. 앞으로 이 나라의 왕후가 될 사람이므로 가장 슬기로운 처녀를 찾는 것이 문제였다. 임금님이 며느리를 뽑는다는 광고를 듣고 아름다운 처녀들 수백 명이 궁전으로 모여들었다. 임금님은 이 처녀들에게 시험문제를 냈다. “너희들에게 쌀 한 되씩을 주겠다. 이것으로 한 달 동안을 먹다가 다시 모여라.” 처녀들은 큰 걱정이었다. 쌀 한 되라면 사흘이면 다 먹어 버릴 만한 적은 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처녀는 멀겋게 쌀 물을 끓여서 마시기도 하고, 어떤 아가씨는 처음부터 굶기도 했다. 처녀 대부분은 아예 포기해버렸다. 그런데 그 처녀 중에 달래라는 어여쁜 소녀가 있었다. 달래는 임금님의 쌀을 앞에 놓고 밤새도록 연구를 했다. ‘훌륭한 임금님께서 이런 엉터리 시험문제를 내실 리가 없다. 임금님의 생각이 무엇일까?’ 아침이 되어서야 달래는 무엇을 깨달았는지 무릎을 ‘탁’ 치고 방실 웃었다. 달래는 곧 부엌에 가서 그 쌀 한 되를 가지고 몽땅 떡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예쁜 옷을 차려입고 시장에 나갔다. 임금의 며느릿감쯤 되는 이 아름다운 처녀가 떡을 파니까 잘 팔렸다. 동네 총각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떡을 사 먹게 되었다. 달래는 떡 판 돈을 가지고 다시 쌀을 사서 떡을 만들었다. 이제는 더 많은 떡을 만들 수가 있었다. 달래는 떡 장사에서 아주 재미를 붙였다. 그리고는 남들처럼 굶는 것이 아니라 장사해서 번 돈으로 먹고 싶은 것을 실컷 사 먹었다. 그러다 보니까 몸도 건강해지고 떡판을 이고 다니며 햇볕에서 일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얼굴도 알맞게 타서 더 아름다워졌다. 한 달이 지나고 마감날이 되었다. 임금은 높은 보좌에 앉아서 궁궐로 들어오는 처녀들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인력거에 탔거나 아버지 등에 업혀 오는 처녀들은 사람이 아니라, 뼈만 앙상하게 남은 송장들이었으니까요. 드디어 달래가 들어왔다. 달래는 힘차게 두 팔을 흔들며 들어왔다. 그 뒤에는 쌀가마니를 가득 실은 소달구지가 따라 들어왔다. “임금님께서 주신 쌀 한 되로 장사를 하여 그 동안 제가 잘 먹고 남은 것이 한 달구지나 되었사오니 받으시옵소서.” 임금님은 달래의 이야기를 듣고 정말 기뻐하였다. 그리고 한 말씀을 하셨다. “달래는 있는 것을 앉아서 먹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열심히 일해서 그것을 불릴 줄 아는 참으로 지혜로운 규수구나. 이 나라의 왕후는 일하기를 즐거워하고 지혜가 있는 달래가 되어 마땅하다.” [출처: ‘지혜로운 며느리’] ‘말귀’ 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말이 뜻하는 내용”, 혹은 “남이 하는 말의 뜻을 알아듣는 총기” 라고 합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거나, 말귀가 통하지 않는다면 ‘소통’ 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려운 단어를 쓰는 것도 아닌데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면 이는 못 알아듣는다기보다는 알아듣지 않으려 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외국어를 배워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사람은 학교에서 10년 정도 영어를 학과목으로 배웁니다. 그런데 막상 외국인을 만나면 겁을 먹어 한 마디도 못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달래라는 처녀는 임금을 먼저 사랑했기 때문에 말귀를 알아들은 것. 사랑해야 말귀를 알아듣게 되는 것이지, 말귀를 알아듣고 사랑하려면 평생 말귀가 열리지 않습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를 이해하려면 먼저 사랑해야지, 이해하면 사랑하겠다는 식의 마음으로는 평생 그 사람을 이해하거나 용서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용서는 지금 이 순간 이해해주는 것. 상대에 대한 들을 귀가 있어야 이해도 할 수 있다. 그 힘을 성령께서 주시는 것. 성령은 사랑의 열매를 주시고 사랑하니까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게 해 주시는 것. 성령강림 때 제자들이 듣는 사람들 각자의 언어로 말을 했다고 말합니다. 그들 수준에 자신들을 맞출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바벨탑 사건 때 언어가 갈라져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성령은 소통할 수 있게 만들어서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갈라지는 이유는 그 안에 성령께서 함께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파도바의 안토니오 성인은 물고기에게 설교하셨다고 합니다. 그 동네 사람들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자 물고기에게 말하니 물고기들은 잘 알아들었다는 것. 그 동네 사람들보다 물고기들이 더 성령의 도우심을 받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사람이 말귀를 못 알아듣게 되는 이유는 자아가 커져서 자기 생각만으로 가득 찼기 때문입니다. 말귀는 자기를 버리고 어린이처럼 순결하게 된 이들에게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는 인간관계를 절대 우리 힘으로 맺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를 죽이고 성령으로 가득 찰 때만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게 보이고 그러면 모든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가 되면 모든 사람의 말을 이해할 들을 귀가 생기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들을 귀를 생기게 해 주시고 그로써 모든 피조물과 소통할 준비가 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소통을 위해 말귀를 가지려면 지금 이 순간 먼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나, 일이 뜻대로 안 되어 막막할 때도 우리들이 할 일은 ‘침묵 속에 기도하는 것’ 입니다. 주님 부활을 기다리고 준비하면서 ‘벙어리 침묵 기도’ 로 믿음이 사람이 되어 하느님의 뜻이 우리들의 소망대로 이루어지는 행복한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작은 일을 시작해야 위대한 일도 생긴다.'' - 마크 저커버그 - |
♡2003회 사람이 두 반대되는 길을 갈 수 없고, 두 의자에 동시에 앉을 수 없다. - 돈도 좋고 예수님도 좋을 수 없다. 세상도 좋고 하느님 나라도 좋을 수 없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4년 2월 12일(요한묵시록 1장~ ) 원재인은 "모든 어둠은 빛으로 밝힐 수 있다." 예수님께서 건네시는 말씀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꿀보다 더 단 말씀, 깊은 우물 속의 차가운 물처럼 시원한 말씀이 될수도 있다. 마치 번개처럼 예수님의 말씀이 정수리부터 발끝을 통과하며 우리를 전율케하고, 깨우치게 하며 새 삶에로 나아가게 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예수님 말씀은 ‘듣기 너무 거북한 말씀’, ‘걸림돌이 되는 말씀’ ‘강한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 말씀’ 으로 다가옵니다. 의혹하고 불신하며, 결국 꼬투리 잡고, 그 결과 예수님을 떠나가게 됩니다. 놀랍게도 한때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환영하고 지지하며, 목숨까지 바칠 기세로 예수님을 추종했던 제자들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다. 떠나간 이유는? 그들이 추구했던 지향점과 예수님께서 수행하시던 사명 사이의 큰 간극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 탓할 게 아닙니다. 떠나감은 오늘도 계속됩니다. 우리 안에서도 숱하게 반복됩니다. 그저 육의 이끌림에 따라 살때, 우리는 예수님을 떠나 살게 됩니다. 본능에만 따라 살때, 우리는 예수님을 떠나는 것.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때, 영으로 충만하지 않을 때, 예수님의 말씀은 별 의미 없는 말씀, 구름잡는 이야기로 남을 수 밖에 없다. 세상의 이치와 세상의 논리로만 예수님 말씀을 대할 때, 그 말씀은 나와는 전혀 무관한 알쏭달쏭한 문자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 혼신의 힘을 다해 예수님의 말씀 하나를 화두로 붙들고, 묵상하고 또 묵상할 때, 조금씩 우리의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고, 영혼이 열릴 것. 그때 예수님의 말씀은 꿀보다 더 단 말씀, 생명수보다 더 값진 말씀으로 다가올 것.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늘 위를 생각하시며 아래를 내려다보시는데, 떠나간 제자들은 한사코 아래만 내려다봤다. 눈에 보이는 아래의 세상만이 전부인양 뚫어지게 아래만 바라봤다. 가끔씩 눈을 들어 위를 올려다봐야겠다. 물론 아래, 이 세상, 때로 구차스럽게 보이는 일상 역시 중요합니다. 위와 아래, 영혼과 육신, 하늘과 땅은 함께 가야 할 것. 지금 이순간 죽기 살기로 아래만 바라보는 사람들, 자신의 삶 속에 영적인 측면은 초라할 정도로 위축되고, 그저 육에 따라,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의 최종적인 도착지는 비참이요, 죽음일 것. 한 명 한 명 떠나가는 제자들의 모습 앞에 마음이 몹시 슬퍼지셨던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복음 6장 67절) 시몬 베드로의 대답이 참으로 기특하고 갸륵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복음 6장 68~69절) 영적인 길과 육적인 길은 반대 방향이다. 우리는 14세기 교황이 약 70여 년 동안 프랑스 아비뇽에 죄수처럼 갇혀 살았던 ‘아비뇽 유배’ 를 기억합니다. 이 발단은 ‘돈’ 이었다. 영적인 종교에 육적인 욕구가 개입된 것. 프랑스 필립 4세는 교황청으로 돈이 빠져나가는 것을 싫어하였고 결국 힘을 이용해 교황을 로마가 아닌 아비뇽에 머물게 했다. 이는 교회가 십자군 전쟁을 하며 지나치게 돈을 많이 쓴 영향도 있었다. 십자군 전쟁을 끝내고 돌아온 군인들이 다시 돌아갈 가정이 없어져 그들이 약탈해온 재물로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것이 ‘성전 기사단’ 입니다. 필립 4세는 ‘성전 기사단’ 이 소유한 막대한 재산과 토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필립 4세는 교황을 잡아놓고 성전 기사단을 해체해 재산을 몰수하고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였다. 그가 교회를 믿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육적인 것을 찾았기에 영적인 소리를 하는 이의 입을 막은 것뿐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교회를 믿었는지는 주님만이 판단하실 수 있을 것. 그런데 이 덕분으로 교회는 이후 로마파와 프랑스파, 공의회 파가 정한 3명의 교황이 생기는 분열과 혼란까지 겪어내야 했다. 그런데 이런 일이 현대에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전에 한국 교회 주교단이 4대강 사업을 반대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그것에 대해 교회를 비판하였다. 그중에서 신자들도 많았다. 심지어는 주교들보고 옷을 벗어야 한다고도 말했다. 그런데 그들은 집회가 끝나고 나면 주일미사를 하고 경건하게 성체를 영하고 해산하였다. 이렇게 지금도 종교가 육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말하면 거북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성령께서 교회에 머무신다면 주교단이 결정한 것은 영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육적인 것을 추구하면서도 교회에 머무는 것은 어쩌면 가리옷 유다와 같을 수 있다. 유다는 머물기는 하되 언제나 그리스도의 말씀을 거북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요즘 교회에 스며든 세속적 사상 중에 가장 심각한 것이 영과 육을 하나로 보는 일원론입니다. 5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던 유다인들과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영 거북해서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예수님께서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말씀을 듣고는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며 떠나갑니다. 왜 거북할까요? 자신들이 원하는 말씀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갤럭시 스마트폰만 쓰는데, 아이폰이 좋다고 말한다면 그 말이 귀에 거슬리지 않을 수 없다. 어떠한 말이 듣기에 거북한 이유는 그것이 진리가 아니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듣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이 세상의 영화였다. 그들의 뜻과 반대되는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거슬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열두 사도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했던 것일까요? 누구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 때나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시지만, 그것도 십자가의 신비를 체험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예수님께 머물렀다. 그분께 “영원한 생명의 말씀” 이 있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해도 예수님 말씀이 거북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육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거슬리고, 영이며 생명을 추구하는 이들은 이해가 되지 않아도 예수님께 머물 줄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라고 하십니다. 육을 추구하는 방향과 영을 추구하는 방향이 같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빛과 어둠은 반대지 함께 공존할 수 없다. 어떤 분들은 ‘극단적 이원론자’ 로 비평합니다. 천국과 지옥, 빛과 어둠, 영과 육을 나누기 때문입니다. 이는 요한복음의 핵심이요 가톨릭교회 교리의 핵심입니다. 일원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하느님은 태양과 비를 선인과 악인에게 골고루 내려주신다고 말하며 하느님은 이렇게 자비하시므로 결국 지옥도 없을 것이고 어둠도 빛에 속하게 될 것이며 육체도 영과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말은 그럴싸하지만, 영과 육에 섞이게 만들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지 못하게 만드는, 아주 많이 잘못된 신앙을 심어주고 있는 것. 영의 교회에 육이 섞이면 교회까지도 자신의 육에 속하게 만들어 이용하게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께 속하려면 영을 선택할 것인지 육을 선택할 것인지 정해야 합니다. 사람이 두 반대되는 길을 갈 수 없고, 두 의자에 동시에 앉을 수 없다. 돈도 좋고 예수님도 좋을 수 없다. 세상도 좋고 하느님 나라도 좋을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한 8,21) 우리들 마음 안에 어떤 고통과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하느님 사랑의 힘으로 하느님의 기쁨을 알게 되고, 하느님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되는 축복된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 - 장 자크 루소 - |
♡2004회 사랑한다면 지금 이 순간 보내야 합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4년 2월 13일(창세기 1장~ ) 쇼펜하우어는 ''불쾌한 일은 무시하고 과소평가하는 것은 행복을 위한 훌륭한 처세법이다. 행복을 위해서는 타인의 판단을 중시하는 명예욕과 일종의 허영심을 버릴 필요가 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하늘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고칠 때가 있으며 부술 때가 있고 지을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 뛸 때가 있다. [코헬 3.1-4]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수확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오랫동안 열심히 노력하고 구했 는데도 돌아오지 않으면 허탈하고 상실감을 느끼고 만다. 또는 아무리 베풀어도 되돌아오는 것이 없는 경우도 있다. 남을 잘 대접하고 도우려고 애를 썼지만 나를 돕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는 경우 이 역시 속이 속상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금 이 순간 보고 계신다.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돌아오는 것이 없다라도 우리는 끓임없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지금 이 순간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옿은 일을 하는데도 계속해서 나쁜 일이 일어날 때 당신은 지금 이 순간 어떻게 행동하겠는가? 당신은 이미 어떻게 행동해야 옳은 것인지 알고 있다. 지금 이 순간 그대로 행하라. 그것이 정답이다. [하느님의 쪽지 중에서] 어떤 랍비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외출한 사이에 두 아이가 사고로 죽고 말았다. 그의 아내는 남편에게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단 그는 두 아들의 시체를 방안으로 옮겼다. 한참 후 랍비가 돌아왔을 때 아내는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제게 귀중한 보석 두 개를 맡기고 갔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느닷없이 그가 찾아와서는 그것들을 돌려달라는데 이럴 때는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랍비는 별 생각 없이 쉽게 대답했다. “아니 주인이 달라고 하면 당연히 돌려주어야지. 자꾸 가지고 있다 보면 자기 것이 아닌데도 돌려주기 싫어진다니까, 쯧쯧...” 그제야 아내는 랍비를 데리고 두 아들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는 흐느끼면서 이렇게 말했다. “방금 생명의 주인께서 우리에게 맡겨놓으셨던 귀중한 보석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어느 신부님의 아버지는 세례 받으신 지가 몇 년 안 되었다. 신부님께서 어렸을 때 가끔은 어머니가 성당에서 오래 계시면 그것에 대해 짜증을 내실 때도 있으셨다. 또 신부님께서 성당에서 활동을 너무 오래하면 아예 성당에서 살라고 하실 때도 있으셨다. 아마도 집에 혼자 계실 때 외로움을 느끼셨던 것 같다. 모든 것이 주인께서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맡겨놓으신 것인데도 오래 가지고 있다 보면 나의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그래서 돌려주기 싫을 때가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너무 지나치다 싶을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어머니와 신부님이 성당 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를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신부님께서 첫 영성체도 할 수 있었고 복사도 설 수 있었고 사제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또 다른 위기가 찾아왔다. 기껏 성당 나가는 것을 허락했더니 대학 잘 다니고 있던 신부님께서 사제가 된다는 폭탄발언을 들으신 것입니다. 아버지는 매우 반대를 하셨고 그날 밤엔 잠을 주무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딱 하룻밤만에 사제가 되는 것을 허락하셨다. 어떤 신부님의 아버지는 아들이 신학교 들어갔을 때 몇 년 동안 아들을 보려고 하지 않으셨다고 하지만 그런 분에 비하면 매우 관대하신 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마 하느님이란 분에게 당신의 아내와 자녀들까지 모두 빼앗긴다는 생각을 하셨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당신도 세례를 받으시고 신앙에 열심하게 되실 수 있으셨던 첫 번째 이유가 바로 어머니와 신부님이 먼저 하느님께 가는 것을 막지 않은 것에 있지 않나 싶다. 결국 그분께 돌려드리면 다시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은 자신인 것입니다. 대장간에서 자신이 원하는 모양을 만들기 위해 시뻘겋게 달구어진 쇠를 내리치다가 그 열이 다 사라져버리면 아무리 쳐도 원하는 만큼 모양이 만들어지지 않게 됩니다. 그 때면 대장장이는 그 식어버린 쇠를 다시 풀무 불에 쇠를 넣어 달굽니다. 이렇듯 우리 또한 우리 곁에 있는 사람을 자신 옆에만 묶어놓을 수는 없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소유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을 사랑한다면 당신이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해야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시뻘겋게 달구어지지 않으면 대장장이에게 그 쇠는 필요가 없는 것처럼 하느님과의 사랑이 아니면 예수님도 우리에게 건네줄 것이 없어집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필요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아버지께서 당신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즉 같은 하느님이시지만 아버지가 크시다고 하시는 이유는 같아지기 위해서 아버지께 받을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받아서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받으셔서 우리에게 돌려주시는 것이 성령님인 것입니다. 사랑한다면 지금 이 순간 보내야 합니다. 자녀는 어머니를 아버지에게 보내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교회에 보내야 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않으면 어머니는 자녀에게 너무 집착하여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는 것이 사랑인 것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자녀 또한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그 사랑하는 사람은 더 큰 사랑이 있는 사람에게 보내어 사랑을 받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랑으로 나도 사랑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귀하다면 그 주인에게는 더 소중한 것입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기도해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때로는 나의 욕심으로 오염되지 않기를...다만, 하느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들을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우리들에게 성령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열매가 충만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군자는 말하고자 하는 바를 먼저 행하고 그 후에는 자신의 행함에 따라 말하느니라'' - 공자 - |
♡2005회 ‘사흘만 기다리자.’ 라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4년 2월 14일(탈출기 18장~ ) 헨리 워드 비처는 ''성경은 당신의 길을 알려 주는 하느님의 지도이다. 성경은 당신을 바다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주며 항구가 어디에 있는지 당신에게 알려 주며 암초에 걸리지 않고 어떻게 항구에까지 이를 수 있는지 가르쳐 준다.'' 《살아갈 힘이 내 안에 있다.》오늘 그리고 내일을 살아가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삶은 계속되고 나는 살아간다. 나를 눈뜨게 하고 일어서게 하고 달리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오늘 날 많은 이들이 자신의 샘물이 흐려졌다고 믿는다. 이제 더 이상 샘물이 우리에게 힘을 주지 못한다고 느낀다. 이 샘물은 본래 깨끗했지만, 좋지 않은 의도로 인해 더렵혀졌거나, 외부에 의해 오염되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스스로 내면의 샘물을 기러 올리면서 생활의 활력과 힘을 얻어야 한다. 우리가 끝없이 물을 길어 마시는 샘물은 우리 삶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한다. 신성한 정신의 샘물을 길어서 마시는 사람은 경쾌함, 결실 그리고 생동감을 보여준다. 그처럼 순수한 샘물을 내면에서 발견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안의 흐린 물을 보고 그 흐린 물을 통과 해야만 영혼의 바닥에 있는 맑은 물을 볼 수가 있다. 내 삶에 부여하는 가치와 구체적인 상황과 순간순간이 갖는 의미는 내가 힘을 얻는 샘물이자 원천이 된다. 이것이 바로 내 삶을 풍요롭게 하고 원기를 북돋아주는 샘물인 것이다. 만일 내가 삶에서 어떤 의미도 느끼지 못한다면, 이 샘물은 보이지 않게 되며 결국 말라 버리고 말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목적 없이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살면서 지금 이 순간 위로를 느끼는 것은 우리가 내적인 힘으로 사는 것이다. 내면에서 투명한 샘물을 길어 마시는 사람은 훨씬 오랫동안 일을 잘할 수 있다. 그것은 새로운 기쁨과 신선한 에너지로 충만하기 때문이다. 샘물은 신체와 영혼 모두에게 원기를 북돋아 준다. 그리하여 이 샘물은 우리가 하는 일을 성공으로 이끌어 준다. 반드시 뭔가를 해내야하고 남들에게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을 갖지 마라! 중요한 것은 내면의 샘물과 만나는 것이다. -안젤름 그륀 신부- 자녀에게 컴퓨터 게임을 하지 말라고 하다가 살해를 당한 어머니가 있다. 아이는 어머니에게 그런 짓을 하고 자신도 스스로 자살을 하였다. 어떤 어머니는 아이에게 공부를 강요하다가 성적이 떨어져 두려워하는 아이에게 오히려 살해를 당했다. 그런 어머니들과 아버지들의 관계를 찾아봤다. 그랬더니 어머니들은 한결같이 남편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대부분은 별거나 이혼한 사이였다. 부부관계를 잘 유지할 능력이 없다면 자녀도 사랑할 능력을 잃게 됩니다. 물론 어머니가 시간상으로 자녀와 있을 시간이 더 많아집니다. 그러면 자녀를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은 흐르는 본성이 있는데, 사랑은 마치 물처럼 위에서 흘러내려 옵니다. 아내가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다면 둘의 사이에서 발생해야 하는 사랑이 고갈되기 때문에 자녀도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자녀와 함께 있는 것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해 이용하는 것입니다. 어머니들은 자녀들을 사랑해서 그렇게 한다고 하지만 자녀들은 폭력을 당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참지 못하게 되면 결국 보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빠가 직장에 출근하는데 아이가 떼를 쓰고 붙든다고 해서 출근하지 않는 아버지는 없다. 자녀와 떨어져 밖에 나가 일해야 아이에게 더 유익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조금 성숙해진다면 아빠가 자신을 떠나는 것이 자신에게 더 유익한 것을 알 것입니다. 아빠는 규칙적으로 다시 자신을 만나러 올 것을 알고 아빠가 떠나는 것을 크게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이 약한 상태에서 어른이 되면 상대가 자신을 떠날 것 같은 두려움에 연애도 제대로 못 하게 됩니다. 모든 관계는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임을 깨달아야, 집착이 아닌 참다운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인간관계가 이렇게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 되는 이유는 ‘사랑의 본성’ 때문에 그렇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성부와 성자께서 사랑이 되시려면 그 중간을 오가는 성령께서 계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아버지나 아드님께만 머무시며 끊임없는 진동의 운동을 하지 않으시면 삼위일체는 깨지고 그러면 하느님께서 사랑이 아니시게 됩니다. 이는 어머니가 아버지와 자녀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야 자녀에게도 유익한 것과 같다. 만약 어머니가 자녀만을 생각하며 남편을 외면한다면 남편은 사랑받지 못하는 가정에 돈을 벌어 가져다주는 것이 이용당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점점 가정에 충실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가정이 깨지게 됩니다. 남편의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하느님으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을 시간을 내지 못하면 가정을 자기 행복을 위해 이용하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시는 것입니다. 또는 당신의 승천과 성령강림을 통한 함께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조금 있으면” 때문에 혼란스러워합니다. 아버지와 교회 사이에서 마치 어머니처럼 오가며 진동하는 역할을 해야 하심을 아직은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기가 엄마를 보지 못할 때와 다시 볼 때의 감정의 변화가 없을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바로 교회와 세상 사이에서 이런 진동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규칙적으로 성당에서 미사를 통해 힘을 얻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사랑을 줄 수 있는 분에게 가는 것은 분명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통해 얻은 성령을 자녀에게 다시 주는 것은 더 큰 기쁨이 됩니다. 한 마을에 꽃을 파는 노인이 있었다. 노인은 가난했다. 복장은 허름했고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다. 그러나 얼굴 전체에 항상 행복한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사람들은 그 노인을 ‘행복한 할머니’ 라고 불렀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노인에게 물었다. “무슨 좋은 일이 있나 보지요?” 노인은 특유의 밝은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내게 행복의 비결이 하나 있지요.” 노인의 말은 다음과 같았다. “이 나이에 어찌 좋은 일만 있겠습니까. 고통을 당할 때마다 저는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사흘 만에 부활의 새벽을 맞지 않았습니까? 저도 고난이 다가올 때마다 마음속으로 ‘사흘만 기다리자.’ 라고 다짐합니다. 그때부터 제 삶이 한결 행복해졌어요.” 이 할머니가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항상 행복한 기분이 들어서가 아니라, 지금 힘들어도 사흘 뒤에 또 행복해질 것을 아시기 때문에 지금의 십자가를 잘 질 수 있어서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조금만 참으십시오. 지금은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은 것처럼 느껴져도 곧 다시 오셔서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성령님께 도움을 청하면서, 몸과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기도로 예수님을 붙잡고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모든 문제가 해결 받고, 몸과 마음이 치유를 받고 살아가는 행복한 우리들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절망스러운 상황은 없다. 절망한 사람만 있을 따름이다.'' - 클레어 루스 - |
♡2006회 차거나 뜨거우면 삼키겠지만 미지근하면 뱉어버리겠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4년 2월 15일(레위기 17장~ ) 아이작 뉴턴 경은 ''우리는 하느님의 성경이야말로 가장 고상한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심오한 역사를 보아도 성경에 나오는 기록만큼 정확성을 가진 것은 없다.'' 《가장 약한 사람들》우리 몸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부분은 머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손도 아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부분은 내세울 수 없는 그런 부분일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신비이다. 억압에서 풀려나 해방된 우리는 이런 의미로 우리 중에 가장 약한 자들 나이 먹고 쇠약한 이들, 어린이들, 장애인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 굶주리고 병든 자들이 교회의 가장 최중심부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우리는 몸 가운데서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부분을 더욱 조심스럽게 감싸고 또 보기 흉한 부분을 더 보기 좋게 꾸민다. (고린 전 12,23)” 고 바울로 사도는 말씀하셨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보배로운 부분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때, 교회는 비로소 우리 가운데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드러낼 수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피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애덕이나 자선보다 더 중요하다.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피는 것이야말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가장 중요한 본질인 것이다. -헨리 나우웬- 개신교에서는 매우 유명한 ‘김동호’ 목사가 있다. 폐암 판정을 받고 폐 일부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수술보다 더 힘든 것은 항암이었다고 합니다. 항암 중 졸도하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옥의 고통을 느끼던 지난 한 해가 평생에서 가장 행복했다고 말합니다. 하늘을 두고 거짓말이 아니라고 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항암의 고통 중에 침대에 쓰러져 밥도 먹을 수 없는 상황에서 하느님께서 이사야 40장 1절의 말씀을 주셨다고 합니다. “내 백성을 위하라!” 처음엔 ‘지금 내가 죽게 생겼는데 무슨 내 백성을 위하라고 하시나?’ 라고 의문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로 암의 고통을 통해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그 고통만큼 당신 백성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전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너도 아파 봤으니까 알잖아. 내 사랑을 전하라!” 침대에 실려 다녀야 하는 상황에서 바로 집회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아침 6시마다 “날마다 기막힌 새벽” 이란 이름으로 항암의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위해 설교를 시작하였다. 그렇게 벌써 300여회가 넘었고 1년에 벌써 구독자가 12만 여명이 되었다. 그분은 고통스러운 가운데 복음을 전할 수 있어서 더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어떤 말기 암 환자분의 자녀가 이런 댓글을 달아주셨다고 합니다. “그 지옥같이 고통스러운 나날을 천국 같이 지내다 가셨습니다.” [출처: ‘김현정의 뉴스쇼’, 김동호 목사, ‘지옥 같은 항암, 천국처럼 행복했다’] 지금 이 순간 번지점프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혹은 위험한 외줄 타기나 암벽등반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사람들은 왜 그런 위험한 스포츠를 즐길까요? 그 이유는 지금 이 순간 죽음 가장 가까이에 있을 때 가장 살아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 안전한 곳에서는 살아있음도 느끼기 어렵다. 이는 삶과 죽음이 세트 상품이기에 그렇다. 삶과 죽음은 한 세트이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하나가 커지면 다른 것도 커집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재미없는 관계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관계입니다. 그 안에서는 친밀함을 찾아볼 수 없다. 행복은 친밀한 관계에서 옵니다. 그런데 관계가 친밀하려면 지금 이 순간 그만큼 멀어지는 고통도 감수할 용기를 내야 합니다. 발에 줄 하나 매달고 뛰어내릴 용기를 내지 못하면 살아있다는 쾌감도 느낄 수 없게 됩니다. 관계도 하나의 모험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내 전부를 내어줄 용기가 없다면 친밀한 관계에서 오는 행복도 기대할 수 없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관계가 ‘믿음’ 에 바탕을 두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은 ‘선물’ 에 의해 생깁니다. 모르던 두 사람이 사귀면 상대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선물을 합니다. 선물 안에 그 사람의 사랑이 담깁니다. 누군가 사랑한다고 말하며 이쑤시개를 준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사람과 친밀한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선물 안에는 그 사람의 존재가 담깁니다. 선물 안에 그 사람의 생명이 담길 때, 그리고 상대가 그 선물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친밀한 관계가 만들어지고 그 친밀한 관계에서만 맛볼 수 있는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자유’ 라는 것이 있다. 상대의 선물이 부담스러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생명과도 같은 선물이 쓸모없게 됩니다 이때 선물을 주는 사람이 받는 상처는 그 선물을 위해 얼마나 투자했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만약 그 선물이 생명과도 같다면 그 사람은 거부당할 때 지옥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관계를 위해 조금만 투자합니다. 상처받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로라면 상처는 받지 않을지언정 삼위일체 관계가 이루어져 느끼는 천상의 행복은 맛볼 수 없다. 지금 이 순간 천국의 행복을 맛보려면 지옥의 고통도 감수해야 합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관계 안에 천국도 있고 지옥도 있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지옥까지도 내려가십니다. 구원 역사 안에서의 이런 관계는 삼위일체 관계의 계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차거나 뜨거우면 삼키겠지만 미지근하면 뱉어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신과의 관계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 딱 그 정도만 선물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적당히 신앙생활 하며 만약 하느님이 안 계시더라도 크게 손해 볼 것이 없는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그리스도와의 삼위일체 관계를 통해 느끼는 행복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당신 살과 피를 선물로 내어주셨다. 그 선물이 성부와 성자 사이에서는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성령 선물의 보답으로 당신 목숨을 바치셨다. 그리고 그 보답으로 부활과 승천,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누리십니다. 이렇게 되실 수 있으셨던 이유는 관계를 위해 목숨을 내던질 줄 아는 용기에서 비롯되었다. 삼위일체 행복을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지금 이 순간 투자하지 않으면 얻는 것도 없다. 행복은 관계에서 옵니다. 아니 관계의 친밀도에서 옵니다. 관계의 친밀도는 내어줌의 정도에 의해 결정됩니다. 조금 내어주는 관계는 조금 깊은 관계이고 많이 내어주는 관계는 아주 깊은 관계입니다. 평생 친구 같은 친구 하나 없이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친밀한 관계를 맺어갈 것인지는 내가 관계를 위해 지옥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은 당신 십자가의 내어주심을 통해 우리도 삼위일체 관계에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관계를 통한 천국의 행복과 지옥의 고통은 세트 상품입니다. 사랑을 위해 지옥을 감수할 용기가 있다면 삼위일체 행복을 이 세상에서부터 체험할 수 있다. 제 자신은 부족하고 나약하지만, 저와 함께 하시고 능력주시는 예수님 안에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은총과 능력이 우리들에게도 이미 있음을 감사드리며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지금 적극적으로 실행되는 괜찮은 계획이 다음 주의 완벽학 계획보다 낫다.'' - 조지 S.패튼 - |
2007회 계속 이대로 산다면 어디로 갈 것 같은가?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4년 2월 16일(민수기 32장~ ) 로버트 H.슐러 ''삶을 두려워 말아라. 삶은 살아 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믿어라. 그 믿음이 가치 있는 삶을 창조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참된 생명과 생동감 넘치는 길》생명에 대한 갈망은 우리시대의 본질적인 갈망이기도 하다. 요한은 영적핵심을 상실하고 내적으로 죽어있는 사람에게, 참된 생명과 생동감이 넘치는 길을 제시하려고 한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진리이시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참된 실제를 만난다. 예수께서는 생명과 내적 생동감으로 영혼을 채워주심으로써 인간을 생명으로 인도하시기를 원하신다. 예수께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분께서 우리 내면에 생명력이 넘치도록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생명에 참여할 것이다. 생명은 자기 자신을 넘어서 신적생명을 가리킨다.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만이 신비가 아니라 참된 생동감과 참된 자기 자신에 이르는 여정도 신비다. 인간의 참된 구원이란 인간이 참된 자기 자신을 만나고 또한 실제와 만나는데 있으며 자신의 요구에 얽매여 있는 존재임을 깨닫는데 있다. 물의 상징은 어떤 일정한 화학적 결합으로 이루어진 물질만이 아니다. 물은 생명과 쇄신과 정화를 상징할 뿐만아니라 파괴와 홍수를 상징한다. 예수께서는 신앙을 통해 이제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일깨우신다. 그분은 우리의 눈을 열어 하느님에게서 실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하신다. 예수께서는 친히 당신 자신에 대하여 일곱 번 말씀하신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세상의 빛, 문, 착한 목자, 부활이며 생명, 길과 진리와 생명이다. 나는 참된 포도나무다.” -안젤름 그륀 신부 지음-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은 손꼽히는 클래식 연주가로 그의 콘서트는 언제나 매진이고, 거의 시간당 6만 달러 이상을 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연주하는 바이올린은 1713년에 만들어진 50억 원이 넘는 스트라디바리우스입니다. 2007년, 그에게 워싱턴포스트지가 한 가지 실험 제안을 했다. 그가 자신의 바이올린을 들고 야구모자를 쓴 채 지하철역에서 공연한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것이었다. 결과는 처참했다. 45분 동안 연주했는데 7명의 사람만 하던 일을 멈추고 딱 1분 동안만 연주를 들을 뿐이었다. 그의 앞을 지나쳤던 1,070명에게 벨의 연주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만약 사람들이 조슈아 벨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어떠했을까요? 1분이 아닌 45분을 꽉 채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것이고, 앵콜도 요청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슈아 벨이라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에 그 모두는 무관심했다. 소중한 것을 자주 놓치는 우리입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또 부정적인 마음으로 중요한 것을 별것 아닌 것으로, 심지어 내게 해로운 것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바로 주님에 대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내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다면 지금처럼 살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든 그분의 말을 들으려 할 것이고, 어떻게든 그분의 뜻을 따르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파견된 사도들은 바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사도들은 주님 말씀을 따라서 하늘 나라를 선포하는 일에만 충실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지키기 힘든 말도 따를 수 있었고, 주님 말씀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평화를 빌어주면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할 수 있었다. 사도들의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 역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세상의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가장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거룩한 하늘 나라에 들어갈 때,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릴 수밖에 없다. 평생을 구두쇠 소리 들으면서 모은 돈을 하늘 나라에 갈 때 모두 가져갈 수 있을까요? 그곳에서 모은 돈을 펑펑 쓰면서 살게 될까요? 아무도 가져갈 수 없다. 지상의 모든 보물은 오히려 그 나라에 들어가는 데 오히려 해가 될 때가 많다. 주님께서 가장 강조하신 사랑을 실천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주님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주님을 하나의 짐 덩어리로 간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자신이 지금 하는 일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다음 두 가지 질문을 해봐야 합니다. 첫째, 이 일을 왜 하는가? 자신에게 늘 내놓는 뻔한 답 말고,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 계속 생각해야 합니다. 둘째, 계속 이대로 산다면 어디로 갈 것 같은가? 단순히 미래에 대한 엉성한 개념 말고, 땅에 발을 딛고 서서 지금 사는 대로 살면 당신은 어디에 이를지 생각해보십시오. 이렇게 파고들어야만 자기 방해의 덫에서 풀려날 수가 있다. 사실 내 삶을 방해하는 것은 늘 소소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 소소한 것들이 결혼생활을 파탄 내고, 가족을 찢어놓고, 각종 중독에 빠지게 했다. 내가 바라는 것을 말하면서 정반대의 행동 패턴을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지금 이 순간 계속 생각하면서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세상일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서...제일 먼저 예수님을 마주보며 우리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되는 큰 은총이 우리들에게 있으시기를...그리고 그 큰 은총은 “청하는 대로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으로 이루어지게 됨을 알게되는 기도의 사람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자신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은 사실은 그것을 하기 싫다고 다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것은 절대 실행되지 않는 것이다.'' - 스피노자 - |
♡2008회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4년 2월 14일(여호수아기 1장~ ) 괴테는 "당신이 할 수 있는 것, 당신이 할 수 있다고 꿈꿀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시작하라. 그러한 대담함에 천재성, 힘, 마법이 깃들인다. 지금 당장 시작하도록 하자.'' 《예수 새 시대를 여심》한 걸음 한 걸음 그분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은 길 상태가 어떻든 자기가 가고 있는 곳을 분명히 알기에 상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길 상태가 나빠지면 곧바로 불평을 한다. 물론 삶의 어려움 앞에서 얼마든지 주님을 원망하고 불평할 수 있다. 그만큼 그분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망과 불평을 계속하다 보면 어차피 걸어야 할 시련의 길을 걸어갈 힘조차 잃게 된다. 우리가 시련 중에도 주님이 주시는 힘을 얻고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질문을 던져야 한다. "주님! 이 길에서 제게 가르치고 싶으신 것이 무엇입니까? 이 시련을 통해 저를 어떻게 성장시키려 하시는지요?" -송봉모신부님-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요한 15,1-2) ‘열매’ 는 충실한 신앙생활을 뜻하고, ‘더 많은 열매’ 는 궁극적인 구원과 생명을 뜻합니다. ‘붙어 있으면서’ 는, 뜻으로는 ‘붙어 있으면서도’ 입니다. 그래서 “나에게(나무에)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 는 “신앙인이면서도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 으로 해석됩니다. 그 경우는 겉으로는 붙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붙어 있는 것이 아닌 가지입니다. 즉 겉으로는 신앙인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세례대장이나 교적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신앙인인 것은 아닙니다. 신앙인은 지금 이 순간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다 쳐내시고” 는 심판과 멸망을 뜻합니다. “열매를 맺는 가지” 는 지금 이 순간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는 신앙인입니다.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는, ‘은총 속에서 사는 것’ 을 뜻합니다.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뜻합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요한 15,3-6)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깨끗하게 손질이 된 상태’ 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은총 속에서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 단계일 뿐입니다. 은총이 완성되려면, 즉 구원과 생명이라는 열매를 맺으려면 지금 이 순간 예수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 안에 머물러라.” 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 안에 머무르다.’ 라는 말은, 지금 이 순간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고, 지금 이 순간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을 뜻합니다. 온 삶으로 믿음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을 뜻합니다. 줄기는 가지에 무제한으로 생명력을 공급해 주지만, 가지가 그 생명력을 받아서 열매를 맺으려면 능동적으로 줄기에 잘 붙어 있어야 하고, 열매를 맺으려고 스스로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은총은 무상으로, 또 무제한으로 우리에게 주어지지만, 그 은총이 자동적으로 ‘우리 것’ 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잘 받으려면 능동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님 안에 잘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라는 말씀은, 겉으로 보이는 표현만 보면, ‘지금은’ 제자들 안에 머물러 있지 않지만 ‘나중에는’ 머무르겠다는 약속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언제나 항상’ 제자들 안에 머물러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복음을 선포하실 때부터, 또는 제자들을 부르실 때부터 ‘늘’ 제자들 안에 머물러 계셨고, 세상 끝 날까지 머물러 계실 것입니다.(마태 28,20) 그렇지만 제자들이(신앙인들이)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거나 잊어버릴 때가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신앙인이) 되었지만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지 않아서 열매를 맺지 못한 사람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인물은 배반자 유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 안에도 머무르셨지만, 유다 자신이 예수님 안에 머무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열매를 맺을 수가 없었다. “안에 머무르다.” 라는 말의 반대말을 “밖에서 방황하다.” 로 생각할 수 있다. 배반자 유다는 몸만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마음은 ‘밖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흘려듣고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만 귀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보지 않고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한눈을 팔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 안에 머무르지 않고 밖에서 방황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그럴 때가 있다. 미사 참례는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일입니다. 그런데 몸만 성당에 앉아 있으면서 마음은 밖에 있는 경우가 있다. 그 경우에는 미사 참례를 한 것이 아닌 것이 됩니다. ‘말씀’ 은 듣지 않고 세속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께 집중하지는 않고 세속 일만 신경 쓰고... 그런데 “내 안에 머물러라.” 라는 명령은,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을(사랑을)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 내 안에 머물러서 살아라.” 라는 간곡한 호소입니다. “밖에서 방황하다가 죽지 말고, 내가 주는 생명력을 받아서 살아라.” 사실 신앙생활은 ‘내가’ 살기 위해서 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나를’ 살리려고 오셨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 내 안에 머물러라.” 라는 말씀도,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라는 말씀도, 당신을 위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나를’ 살리기 위한 ‘사랑의 호소’ 입니다. 철이 덜 든 아이들은 자녀가 잘되기만을 바라면서 하는 부모의 훈계를 듣기 싫은 ‘잔소리’ 로만 생각할 때가 많다. 그럴 때 부모들은 자녀에게 “이게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다.” 라고 말하지만, 철없는 자녀들은 그 말도 상투적인 말로 생각합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말씀들을 의무적으로 지켜야 하는 명령으로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살리려고 애쓰시는 예수님의 사랑은 외면하고, ‘생명의 말씀’ 을 귀찮은 잔소리로만 생각하는 철없는 태도입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살기 위해서 하는 생활이지만, ‘내가’ 잘 사는 것은, 나와 함께 한 몸을 이루는 공동체 전체가 잘 사는 일이기도 합니다.(에페 4,15-16) 지금 이 순간 내가 아프면, 즉 내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거나 죄를 지으면,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공동체 전체가 아프게 되고, 나를 살리려고 오신 예수님께 아픔과 슬픔을 드리는 일이 됩니다. 내 믿음의 내비게이션인 성모님과 요셉 성인의 도움을 받아 길을 잃으면 다시 묻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그 예수님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지혜로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두 배로 생각하라. 두 배로 노력하라. 그것이 가진 것 없는 보통 사람이 성공하는 비결이다.'' - 인드라 누이 - |
♡2009회 “먼저, 성령을 청하라. 그러면 빛을 받을 것이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2월 18일(판관기 1장~ ) 웰스는 ''성경은 서구 문명의 모든 내용을 통합한 책이다. 우리의 현대 문명은 성경이 없었더라면 존재할 수 없었고 또한 지탱될 수도 없다.'' 《내게 이런 삶을 살게 하여 주소서》연약할 때 자기를 알고 힘을 기를 줄 아는 여유와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는 대담성과 정직한 패배에 부끄러워 하지 않고 태연하며 승리에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을 갖게하여 주소서. 사리를 판단할 때 고집으로 인하여 판단을 흐리지 않게 하고 생각하고 이해하여 사심이 없는 판단을 하며 또한 평탄하고 안이한 길만이 삶의 전부라 생각치 말게 하고 고난에 직면할 때 분투 노력할 줄 알며 패자를 관용할 줄 알도록 가르쳐 주소서. 마음을 항상 깨끗이 하고 목표는 높이 설정하되 남을 정복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다스릴 줄 알며 장래를 바라봄과 동시에 지난 날을 잊지 않게 하여 주소서. 이에 더하여 삶을 엄숙하게 살아감은 물론 유머를 알고 삶을 즐길 줄 알게 하소서. 자기 자신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게 하시고, 겸허한 마음을 갖게 하여 참된 위대성은 소박함에 있음도 알게 하시고, 참된 지혜는 열린 마음에 있으며 참된 힘은 온유함에 있음을 명심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먼 훗날 내인생 헛되이 살지 않았노라고 말할 수 있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생애 중에 성령의 개입은 크게 보면, 세 시기에 걸쳐 일어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시기>는 강생 때인데,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20)라고 표현됩니다 <둘째 시기>는 세례 때인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마르 1,10) 또 “그 뒤에 바로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습니다.”(마르 10,12)고 표현되어 있다. <셋째 시기>는 부활과 승천하실 때인데,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겠다.”(루카 24,49)고 표현되고 있다. 예수님 고별사 중에서도 마지막 말씀입니다. 곧 마지막 말씀 중에서도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만큼 귀중하고 소중한 말씀입니다. 이 다음 구절부터는 이제까지의 말씀을 다시 요약하시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고별사에서만도 성령에 대한 약속을 다섯 번이나 거듭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보호자를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14,16-17) ‘보호자 성령께서 너희에게 가르치시고 ~기억나게 해 주실 것이다.’(14,26) ‘보호자,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할 것이다.’(15,26-27) “보호자가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16,7-11)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신다.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16,12-15)”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성령께서 우리를 진리로 이끄시는 안내자라는 말씀입니다. 곧 성령의 이끄심이 없이는 진리를 깨달을 수도, 진리를 행할 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신다.” 라고 하심은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 속에 깊이 결속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우리가 성령의 일치 안에 있어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분께서 기름 부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1요한 2,20-27) 그러기에, 우리가 <성경>을 읽고 들을 때는 우선적으로 성령께 의탁하고 성령의 이끄심에 따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귀고 아빠스는 성경을 읽기 전에 “먼저, 성령을 청하라. 그러면 빛을 받을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성령의 도유, 곧 성령으로 기름 부어진 독서가 되어야 함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러한 ‘성령으로 도유된 독서’(lectio untionis)에 대해서, 성 보나벤뚜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도유 없는 독서는 쓸데없다. ~성령의 도유야말로 구원을 촉진시키는 모든 것을 가르친다.” 이는 성령께서 진리의 해석자이시고 동반자이심을 말해줍니다. 말씀의 뜻이 진리의 영으로 하여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웁살라에서 열린 WCC 세계교회협의회 총회(1968)에서, 그리스정교회 이냐시오 대주교(1920-2012)가 한 말을 기억해 봅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하느님은 멀리만 계시며 그리스도는 과거에만 머무십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복음은 죽은 문자이며 교회란 한낱 조직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권위란 한낱 지배하는 것일 뿐이며, 선교란 한낱 선전광고일 뿐이며, 전례란 한낱 과거의 회상일 뿐입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다면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노예들의 윤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3) 주님! 진리의 옷을 입고 당신 정원에 심어진 한 그루의 나무가 되게 하소서. 행함으로 꽃을 피우고 의로움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당신의 모상에 따라 새로워지게 하소서. 진리의 영의 숨결 되어 흐르는 거룩한 성전이 되게 하소서. 아멘. 마음을 기억하면서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의 축복을 받으시고, 그 능력으로 다른 사람에게도 축복을 빌어주는 은혜로운 시간을 보내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 - 롤프 메르쿨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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