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2회 죄는 지금 이 순간 단호하게 거절해야 합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4월 20일(탈출기 29장~) 남아프리카 최초의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는 ''인생에서 가장 큰 영광은,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매번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넬슨 만델라는 인간 정신의 승리와 진정한 성공은, 실패를 극복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점을 가르쳐 줍니다. 《자연은 서두르는 법이 없다.》숨을 천천히 들이쉬고 내쉬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 자신을 관하는 가운데 생각하고 행동하십시오. 천지가 이렇게 오랫동안 존재하는 이유는 태양과 달이 자신의 궤도를 지키며 때가 되면 정확하게 뜨고 지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서두르는 법이 없다. 오직 사람들만 허겁지겁 움직입니다. 누구나 자신만의 삶의 궤도가 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스스로 선택한 삶의 궤도를 성실하게 지키는 가운데 깨달음이 있다. 남에게 커 보이는 가짜가 되려 하지 말고, 작더라도 진짜가 되려고 노력하십시오. 작은 진짜가 되어서 점차 그것을 키워나가면 됩니다. 우리의 본질은 포장할 필요가 없는 순수입니다. 아무리 멋지고 화려해 보일지라도 언젠가는 들어날 가짜가 되려 하지 말고, 당신의 귀한 생명과 시간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여자는 결혼할 때까지만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남자는 전혀 걱정 없이 살다가 결혼하고 나서 걱정이 생긴다.’ 는 우스갯소리를 합니다. 자기가 베푼 만큼 상대가 해주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이 생깁니다. 상대를 통해서 덕을 보기 위해서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닐진대 살다보면 그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결국 사랑한다고 혼인을 하고서도 서로 성격이 맞지 않는다며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사랑으로 엮어진 혼인계약을 일생 동안 지키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입니다. 부부가 일심동체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동상이몽이 더 많게 느껴집니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마음의 관심을 서로 다른 곳에 두면서 화목하고 행복하기란 불가능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혼하지 말라’ 고 강력히 말씀하십니다. 더욱이 마음으로 간음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런 잘못에서 벗어나기를 강조하시며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네 오른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버려라” 하고 단호한 결단을 촉구하셨다. 더 사랑해야 할 것은 덜 사랑하고, 덜 사랑해도 될 것을 더 사랑한다면 사랑의 질서가 무너지는 것. 결혼한 사람이 배우자에게 마음을 두어야지 다른 사람에게서 매력을 느끼고 기대한다면 분명히 잘못된 것. 마음속이 지옥이면 멀쩡하게 잘 살아도 소용이 없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죄는 지금 이 순간 단호하게 거절해야 합니다. 이혼은 갑자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고 또 참다가 더 이상 안 되겠다고 결단을 내리는 것. 그러니 빌미를 줄 수 있는 마음단속을 미리 잘해야 합니다. 원인제공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동상이몽’ 이라는 말은 두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두 마음을 품는 것이 이혼의 전조입니다. 한결같은 사랑의 마음이 지켜지길 희망합니다. 이혼을 금지하는 것은 결국 가정을 지키라는 것. 가정을 지켜 자녀의 출산과 교육을 통해 후손을 이어가야 합니다. 사실 후손의 번성은 하느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이들이 이기적인 마음으로 쉽게 이혼을 생각함으로써 자신은 물론 가정이 불행해지고 자녀 또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제발, 이혼하자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헤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서로의 신뢰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신뢰가 깊어지기 위해서는 마음을 주고받는 대화를 자주 해야 합니다. ‘구지 말을 해야 알아듣느냐?’ 하는 분도 있지만 ‘사랑한다, 고맙다, 미안하다, 힘내라, 수고했다’ 는 등 상대방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말을 자주 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읽힙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고와 땀 없이 좋은 열매를 얻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화목한 가정을 이룬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목한 가정을 원하는 만큼 서로의 노력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이 만남을 통해 부족함을 채워주고 좋은 점을 키워가며 닮아가고 만들어 가는 것이지 모두가 완벽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은 기대 때문에 실망하고 좌절하며 불행을 자초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결혼은 서두르지 말 것이며 충분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또한 부모도 삶의 경륜 안에서 얻어진 가르침을 자녀에게 잘 전해주어야 하겠다. 그리고 일생을 함께 살아가야 할 배우자를 선택하면서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좋겠다. 성격이나, 경제적인 능력도 중요하지만 하느님 안에서 사는 사람인가? 허물과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채워줄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가를 봤으면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준비가 소홀하면 그만큼 힘겨워합니다. 그러므로 준비된 희생을 감당하는 사랑으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서로에게 덕을 보려고 하지 말고 서로에게 복이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 부활하신 주 예수님께서 항상 저희와 함께 계십니다.” 이 말씀을 우리들의 몸과 마음에 담고,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서 성령 충만하게 기쁘고 행복한 은총과 축복으로 살아가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려면 가장 낮은 곳부터 시작하라.'' - 푸블릴리우스 시루스 - “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 부활하신 주 예수님께서 항상 저희와 함께 계십니다.” 빈마음 어둔밤 좌절~~인 저희들에게 먼저 찾아오셔서, 끝까지 찾아오셔서 친근하게 힘을내고 믿으라고 하신 평화의 왕 예수님!!! 참으로 부활하신 주 예수님께서 항상 함께 계십니다 아멘 !!! 감사합니다 |
♡2073회 지금 이 순간의 이웃은 나의 거울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4월 21일(레위기 1장~) 2차 세계대전의 영웅, 영국의 정치가 윈스턴 처칠은 ''성공은 끝이 아니며, 실패는 치명적이지 않다 중요한 것은 계속하려는 용기다.'' 윈스턴 처칠은, 인내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역경에도 불구하고 계속하려는 의지에 진정한 용기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이제야 알았습니다.》주님! 당신은 반항만 일삼던 저희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고 한결같은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랑은 받아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 사랑은 받아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 고귀한 하느님의 선물임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전에는 이기심에 억눌려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사랑에 대해 말하고 사랑한다고 감히 말해왔습니다. 사랑은 자기를 마지막까지 버리는 작업을 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임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당신이 종이 되어 우리의 발을 씻어 주실 때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 보았습니다. 사랑에 대해 아는 체하는 이가 많아도 사랑을 진정으로 아는 이는 드뭅니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저는 당신의 친구들을 벗이라 부르며 종으로 만들었는데 당신은 저희를 친구라 부르며 저희의 종이 되셨습니다.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이는 사랑만이 참된 것임을 이제 이 눈으로 보았습니다. 주님! 저희가 보고 배운 것을 이제는 그대로 실천할 수 있게 지혜와 용기와 의지를 주십시오.『제가 마음에 드신다면 중에서..』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며 어떻게 이웃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돼지의 수준의 사람에겐 성체를 줘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마태 7,6 참조) 그런데 사람이 남을 심판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그럴 처지가 아님을 알고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면 됩니다. 그런데 가장 어려운 것은 자신이 남을 판단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님을 아는 것. 이를 위해서는 각자의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어느 신부님께서는 사제들이 너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모습이 싫었다. 클러지 셔츠만 입겠다고 다짐했고 스마트폰도 사용하지 않고 자동차도 사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비판했던 사제들보다 더 부자로 살고 있다. 옷은 많아서 입지 않는 것이 더 많고, 스마트폰은 최신식이며, 차는 이천cc 중형차입니다. 그때 그렇게 비판했던 사제의 모습을 하고 있음을 까맣게 잊고, 또 내가 하고 있지 않은 것들을 하는 사제들을 비판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서로를 심판하던 모습과 같다. 남을 심판하는 일은 결국 자신 안의 죄를 감추기 위함입니다. 지금 이 순간은 죄를 짓지 않고 있을 수는 있지만 그 죄의 씨앗들이 들어있기 때문에 남을 심판하게 되는 것. 지금 이 순간 내가 가지지 않은 것으로 이웃을 심판할 수는 없다. 자신 안에 아름다움이 있으니 꽃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고, 더러움을 아니까 더러운 게 보이는 것. 따라서 남을 심판하는 이유는 백 퍼센트 내 죄를 합리화하기 위함입니다. 남을 교만하다 심판하면 반드시 그 사람도 교만하고 남을 이기적이라 심판하면 그 사람도 반드시 그렇다. 지금 이 순간은 안 그래도 언젠가 그 교만과 이기심의 씨앗이 열매를 맺을 날이 올 것. 이런 사람은 생명나무를 먹을 자격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우리가 이웃을 심판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생명나무인 성체를 영할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됩니다. 인간이 예수님이 되지 않는 이상 심판은 저절로 됩니다. 그러면 그것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합니다. 타산지석은 ‘다른 산의 나쁜 돌이라도 자신의 구슬을 가는데 유용할 수 있다.’ 는 뜻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이웃은 나의 거울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이웃에게서 보는 단점은 반드시 내 안에 있는 죄입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남에게 화가 난다면 그것으로 자신을 바꾸려 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얼굴에 묻은 것은 털어내려면 다른 사람들을 보아야 합니다. 그들에게서 보이는 단점들이 내 얼굴에 묻은 것들입니다. 그런데도 계속 다른 사람들의 단점만을 바꾸려 한다면, 이는 마치 자신의 얼굴에 묻은 것을 떼어내려고 계속 거울만 긁는 사람과 같다. 지금 이 순간 당장 중요한 것은 이웃이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거울을 보며 자신의 얼굴에 손을 대야 합니다. 예수님은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들보’ 라고 번역된 단어는 건축에 쓰이는 큰 나무를 말합니다. 그리고 ‘티’ 라고 번역된 단어는 그것들을 잘게 쪼개면 나오는 작은 나뭇가지들입니다. 다시 말해 이웃들의 눈에서 보이는 작은 나뭇가지들을 다 모으면 내 눈의 들보가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이웃에게 보이는 모든 것들의 총합은 결국 내 눈에 있는 들보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남에게서 보이는 단점들을 다 모으면 나의 자아의 크기를 알 수 있다. 들보는 나 자신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완전히 죽기 전까지 이웃을 심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죽기 전 호흡이 열 번 정도 남았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런데 그 호흡으로 남을 심판하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완전히 죽기 전까지는 이웃에게 단점이 보일 것. 그때 거울을 긁지 말고 그 손을 나의 얼굴로 향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더 행복하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슬퍼하지도 말고, 울지도 말고, 환하게 웃으며 기쁘게 살아가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프로에게서 자기 수련과 극기심을 배워라.'' - 카우틸랴 - |
♡2074회 부활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나는 죽으면 사라지는 허무한 존재일 뿐이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4월 22일(민수기 16장~) 춘추 시대 말기의 대사상가 공자는''멈추지 않는 한 아무리 천천히 가더라도 상관없다.'' 공자는 삶을 지나치게 복잡하게 만들지 않고 단순하게 살아가는 것의 아름다움과 평화를 강조합니다. 《용서를 흔들면 사랑이 보여요.》남을 용서하지 못한 사람은 기도할 수 없다. 나를 용서하지 못한 사람은 웃을 수 없다. 남과 나를 용서하지 못한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 용서를 아는 사람만이 기도할 수 있고 웃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 용서 뒤에는 기쁨과 평화와 아름다움이 어깨동무를 하고 따라옵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마르 12,24-27) “성경도 모르고” 부활에 관한 가르침이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도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아서, 또는 읽었더라도 믿지 않아서 부활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거나 부활을 안 믿는 것을 꾸짖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을, 특히 ‘죽음’ 을 지배하시는 권능과 권한을 안 믿는 것을 꾸짖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죽음’ 에 대해서도 권능을 가지고 계십니다. 사람을 안 죽게 할 수도 있고, 죽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다.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사람들은 모든 욕망과 욕정에서 해방되어 있고, 그래서 그곳에서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나 다툼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혼인제도가 없다고 해서 지상에서 맺은 가족의 인연이, 즉 부모와 자식의 인연이, 또 형제와 자매의 인연이 끊어지는 것은 아닐 것. 부모와 자식이 서로 못 알아보는 일도 없을 것이고, 지상에서의 인연을 부정하는 일도 없을 것. 부부의 인연도 마찬가지일 텐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혹시라도 지상에서 복잡한 사연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곳에서 그런 갈등이 반복되지는 않을 것. 그리고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다고 해서 ‘사랑’ 마저도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그곳에서는 이곳보다 훨씬 더 차원이 높은 사랑을, 즉 욕심이나 이기심이나 집착 같은 것은 하나도 없는 순수한 사랑을 나누게 될 것.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원래는 “나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계약을 맺었던 하느님이다.” 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나는 ‘지금’ 내 앞에서 살아 있는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이 ‘지금’ 섬기고 있는 하느님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이 죽었다가 되살아났음을 하느님께서 증언하신 말씀으로 해석하셨고, 인용하셨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죽으면 끝나버릴 허무한 인간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섬기는 신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인간들이 영원히 섬기는 분이다.” 또는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실 때 죽으면 끝나버릴 존재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 영원히 살아 있을 존재로 만드셨다.” 여기서 ‘죽은 이들’ 이라는 말은 죽으면 소멸되는 존재를 뜻하고, ‘죽은 이들의 하느님’ 은 죽은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힘을 쓸 수 없는 무능력한 신을, 즉 우상과 같은 것을 뜻합니다. 만일에 하느님이 당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죽음이라는 것’ 에게 빼앗기는 신이라면 전능한 신이 아닌 것이고, 전능한 신이 아니라면 하느님이 아닙니다. 또 ‘산 이들’ 이라는 말은 저쪽 세상에서도 계속 살아 있는 사람들을 뜻하고, ‘산 이들의 하느님’ 은 저쪽 세상에서도 변함없이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다스리시고 보살피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우리가 죽으면 끝나버리는 관계가 아니라, 살아 있을 때에나 죽은 다음에나 변함없이 영원한 관계라는 뜻도 들어 있다. 그러니 인간이 하느님을 피해서 숨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자살을 한다고 해도 하느님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벗어나기는커녕 오히려 하느님의 심판대에 서게 됩니다. 또 이 말씀에는 “하느님 앞에서 항상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는 가르침도 들어 있다. 미신을 믿고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죽은 신’ 을 섬기는 생활이고, 그것은 ‘죽어 있는 생활’ 입니다. 내세의 영원한 생명은 생각하지 않고 현세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대해서만 집착하는 것도 ‘죽어 있는 생활’ 입니다. ‘살아 계시는 하느님’ 을 섬기는 신앙인은 하느님과 함께 살아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언제나 항상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하느님 뜻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영적으로 살아 있는 생활입니다. 이쪽 세상에서부터 살아 있어야 저쪽 세상에서도 살아 있을 수 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증명할 수도 없고 확인할 수도 없다는 이유로 부활을 안 믿습니다. 물론, 아직 종말이 오지 않았고,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지 않았으니, 그 나라에서 이루어질 부활과 그곳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을 증명하거나 확인할 방법은 아직 없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도들의 증언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있고, 우리 자신의 부활도 믿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7-19) 부활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나는 죽으면 사라지는 허무한 존재일 뿐이다.” 라는 생각 속에서 허무한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에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부활 후의 삶’ 을 ‘현세의 삶’ 의 연장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런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활 후의 삶’ 은 ‘완전히 새로운 삶’ 이고, 모든 것이 완벽한 삶이고, 참 행복과 참 평화만 누리는 삶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희망입니다. 그곳에서는 그 어떤 ‘한(恨)’ 같은 것은 하나도 없는 삶을 살게 될 것. 모든 사람이 서로가 서로에게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는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이 땅에서 예수님의 뜻대로 ‘축복의 삶’ 을 살면서 천국에서 누릴 영생과 축복을 지금 이 순간 삶의 자리에서 도 똑같은 은총으로 누리며 살아가는 축복된 삶이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겉으로 보기에 무척 연약해 보이는 모든 것이 바로 힘이다.'' - 파스칼 - |
♡2075회 ‘자기 자신을 절대 믿으면 안 된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4월 23일(여호수아기 6장~) 마음을 치유하는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는 ''네 상처를 지혜로 바꿔라'' 오프라 윈프리는 우리의 고난을 성장을 위한 교훈으로 활용하여, 힘든 상황에서 배우는 경험들을 지혜로 바꿀 것을 강조합니다. 《푸른 열정》해야만 하는 일 습관 적으로 하는 일 피상적인 만남을 하고 싶은 일 의미 있는 일 소중한 인연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심코 해왔던 그 일들을 기회로 바라보면서 앞으로 그 기회를 몇 번이나 누릴 수 있는지 헤아려보는 것이다. -심리학 박사 이민규의 생각의 각도에서- 사람은 살아가면서 누구를 가장 믿고 신뢰해야 할까요? 어떤 이들은 결국, 믿을 것은 ‘자기 자신’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자기 자신을 절대 믿으면 안 된다’ 고 말하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봅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자기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이 결국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길임을 우리는 잘 알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자신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라고 하십니다. 맹세는 자기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을 때 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라고도 말씀하십니다. 네가 머리카락 하나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는데 어떻게 그런 능력으로 자기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말씀이십니다. 물론 하늘이나 땅, 그리고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 자리는 하느님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확신은 하느님만 할 수 있는 부분이지 인간이 할 것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 절대적으로 옳으신 분은 하느님밖에 없으니 하느님께 신뢰해야지 자기 자신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신뢰하면서 동시에 하느님을 믿을 수는 없을까요?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신뢰의 정도는 한정되어 있고 내가 그 신뢰를 나 자신에게 주는 만큼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제 생각을 지나치게 믿음으로써 결국 진리를 보지 못하여 되돌이킬 수 없는 삶을 살기도 합니다. 영화 ‘기억의 밤’ 은 자기 자신만을 굳게 믿는 두 형제의 이야기입니다. 재수생인 동생과 모든 것에 완벽한 형은 우애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새로 이사 온 집에서 형은 조금씩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형이 조금씩 형처럼 보이지 않는 것. 그러고 보니 부모도 조금 이상합니다. 친부모가 아닌 것 같다. 그는 가족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집을 빠져나와 경찰서로 도망칩니다. 가족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경찰서에서 신원조사를 해 보고 거울을 보니 자신은 20대 초반의 재수생이 아니라 이미 40이 넘은 아저씨가 되어 있었다. 이 모든 것은 형이 꾸민 일이었다. 형은 사실 20대 초반입니다.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범인을 찾다가 결국 찾아낸 것. 그런데 그 범인은 기억상실증에 걸려 자신의 범행을 기억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최면을 걸어 모든 것을 20년 전으로 돌려놓고 그 범인이 모든 것을 기억해 낼 수 있도록 꾸몄다. 이 과정에서 범인은 조금씩 기억을 찾게 되었던 것이고 결국 자신이 함께 살던 이들이 자신의 가족이 아님을 알게 된 것. 결과는 어떨까요? 자신은 착한 재수생이기에 범인이 아니라고 굳게 믿었던 동생은 모든 것을 깨닫고 자살합니다. 범인을 찾아 원수를 갚으면 속이 후련할 것이라 믿어 고생 끝에 범인의 기억을 되살려주기는 했지만 결국 남는 것이 없음을 깨닫고 형도 자살합니다. 이렇게 영화는 허무하게 끝납니다. 그들의 착각이 처음부터 이 결말로 오고 있었던 것. 물론 이런 예화를 일반화의 오류라고 말씀하실 분도 계실 것. 한 영화를 너무 모든 것에 적용한다는 것. 그러나 마지막 심판 때는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 당연히 잘 살았다고 굳게 믿으며 살아온 이들은 악한 삶을 살아왔음을 알게 될 것이고, 끊임없이 죄인이기에 주님의 자비만 청하며 살았던 이들은 선한 삶을 살았음을 알게 될 것.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성인이라고 굳게 믿었고, 김수환 추기경은 돌아가시기 직전 하느님의 자비를 청해 달라고 신자들에게 부탁했습니다. 믿음도 하나의 에너지입니다. 우리가 힘을 한쪽에 쓰면 다른 쪽에 쓸 힘은 그만큼 줄어듭니다. 자기 자신과 주님도 그렇게 대치됩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으면 당신을 따를 수 없다고 하셨다. 이 말은 자기 자신에 신뢰를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참 나’ 는 ‘내가 믿는 나’ 가 아니라 내가 믿는 나를 믿을 것인지, ‘나는 나다’ 라는 주님을 믿을 것인지 결정하는 ‘나’ 입니다. 이렇듯 ‘참 나’ 와 ‘자아’, 그리고 ‘주님’ 이 구별될 때 비로소 자아에만 신뢰를 주던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내가 나와 주님 사이에서 나의 신뢰를 어느 쪽에 줄 수 있는지 정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에는 주님을 믿어도 결국 자아가 만들어낸 우상을 믿는 것. 자신도 모르게 100%의 신뢰를 자아에게 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켈리 맥고니걸’ 의 「움직임의 힘」이란 책에 헤펠이란 운동을 아주 싫어했던 한 여인의 사례가 나옵니다. 그녀는 여자는 달리기하면 안 된다는 철저한 믿음을 지니고 살았다. 물론 이것은 50년 동안 뚱뚱하게 살아온 자신을 합리화하는 믿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라고 왜 하면 안 되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믿음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 결국엔 마라톤을 완주하게 됩니다. 건강해진 것은 이루 말할 것이 없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믿으며 크고 작은 이러한 착각 속에서 자기 합리화를 하며 삽니다. 여기에 빠지지 않으려면 나 자신을 믿는 나의 믿음에 의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한 번쯤은 믿고 지금 이 순간 실천해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나의 신뢰는 나 자신에게서 조금씩 주님께로 옮겨가게 되고 그만큼 하느님 자녀의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무슨 일이든지 포기하지도 말고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서 주님과 늘 함께 하시는 축복된 은총의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확실한 일을 실행할 힘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 괴테 - |
♡2076회 이 세상의 규칙은 ‘사랑’ 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4월 24일(여호수아기 18장~) 20세기 위대한 물리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인생은 자전거 타는 것과 같다 균형을 유지하려면 계속 움직여야 한다.'' 아인슈타인은 인생을 자전거 타기에 비유하면서, 인생의 발전과 균형에는 지속적인 움직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소욕지족 (少欲知足)》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누리는 행복은 크고 많은 것에서보다 작은 것과 적은 것 속에 있다. 크고 많은 것만을 원하면 그 욕망을 채울 길이 없다. 작은 것과 적은 것 속에 삶의 향기인 아름다움과 고마움이 깃들여 있다. 시작이 있는 것은 반드시 그 끝이 있다. 오늘의 어려움을 재충전의 뜻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우리가 지닌 무한한 잠재력을 일깨울 수 있다. 오르막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이 있는 법이고, 낡은 문이 닫히면 새문이 열리게 마련이다. 얼어붙은 대지에 봄이 움트듯이 좌절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 희망의 씨를 뿌리자. 코로나가 언젠가는 끝날 것. 어느분께서 운영하는 어쩌면 소상공인으로서 얼마나 많으신 분들이 힘들어하실지 아주 조금은 공감이 됩니다. 그런데 더 걱정되는 것은 코로나 이후의 시대입니다. 주님께서 이런 질병으로 주시는 ‘시대적 징표’ 를 우리가 읽어내지 못하고 삶으로 실천하지 못한다면 코로나는 어쩌면 더 큰 재앙의 작은 징조일 뿐일 것. 어쨌거나 코로나바이러스의 원인은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지 못하고 자연을 사랑하지 못한 것 때문에 발생했다고 봅니다. 내가 누군가를 아프게 한다면 그 누군가도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상 누군가를 아프게 하며 산 이들이 끝까지 평안을 누린 예는 없다. 축구를 하다가 공을 손으로 들고 뛰면 퇴장을 당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경기나 ‘규칙’ 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규칙은 ‘사랑’ 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우리 교육은 이 사랑의 법과는 반대되는 ‘경쟁’ 을 가르쳤고 우리는 그런 교육을 받아왔다. 돈이면 남의 마음을 당연히 아프게 해도 된다는 의식이 우리들 안에 참으로 많이 들어있다. 어느분께서 유학 가서 공부할 때 맥줏집에서 쫓겨난 적이 있다. 워낙 우리가 서빙하는 분들을 예의 없게 대해서입니다. “어이, 아저씨. 맥주 한 잔 더!” 이런 식으로 몇 번 시켰더니 주인이 나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여러분들에게는 술을 팔지 않겠습니다. 저희 식구를 그런 식으로 대하는 여러분은 이 집에서 술을 마실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럽은 좀 다릅니다. 돈이 좀 있다고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해도 된다고 믿으면 살아갈 수 없다. 가끔 어떤 신자분들과 함께 식당에 가면 창피함을 느낍니다. 서빙하는 분들을 너무 막 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분들도 누구의 부모님이고 자녀일 수 있는데 반말로 소리 지르고 나무랍니다. 어떤 분들은 아이들이 가게에서 떠들고 사람들이 식사하는 데 방해가 되는데도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제지하는 사람들에게 큰소리를 칩니다. 냉면 배달을 시킨 적이 있었는데 남자들의 대부분은 “어이, 철가방!” 이라고 불렀다. 내 돈 내고 내가 냉면을 먹으면 다른 사람을 무시해도 된다는 생각이 강한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살기에 왜 이렇게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분위기가 되었는지 잘 압니다. 그 이유는 ‘교육’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교육은 ‘나라가 잘되고 내가 잘 되기 위해서는 경쟁해서 이겨야 한다.’ 라는 목표가 뚜렷합니다. 경쟁 속에는 타인을 이겨 아프게 해야 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녹아 있다. 이런 교육을 받은 이들은 자연이 자신 때문에 얼마나 아파하는지 느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평생을 남의 머리를 밟고 올라서는 것만을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도둑질은 처음 한 것은 초등학교 입학해서입니다. 다른 아이들의 지우개가 그렇게 부러웠다. 처음 훔친 것은 지우개 하나였다. 그때 심장이 터져나가는 줄 알았다. 그 이후로 서로 협동을 해서 과자도 훔치고 과일 서리도 많이 하였다. 점점 안 걸리면 된다는 의식이 자리 잡았고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얼마나 아파할지는 조금씩 무감각해져 갔다. 그렇게 사회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지금도 아직 그 물이 많이 빠지지는 않았다. 우리 민족의 이념은 고조선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 을 따르고 있다. 홍익인간은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이념입니다. 어떤 나라의 법과 종교도 이 이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황금률’ 도 그것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이것을 따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이 아닌 “좁은 문” 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전에는 경쟁주의 교육이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좋은 역할을 했다면, 이젠 함께 공존하는 교육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EBS 어떤 다큐에서 보니,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 유치원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나눠 타라고 놓아두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각자가 한 바퀴 돌면 다른 아이들에게 그것을 양보하였다. 우리나라 아이들은 먼저 차지한 아이가 지칠 때까지 타며 다른 아이들의 부러움을 즐겼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셨고, 그 세상에서 재밌게 살려면 그 세상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 법이란 타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내 마음도 아플 것이라는 ‘황금률’ 입니다. 지금 우리 교육도 경쟁이 조금씩은 줄어드는 추세이나, 아직은 경쟁주의가 지배적입니다. 전면적인 개혁이 일어나지 않으면 크게 나아질 수는 없어 보입니다. 이런 시대에서도 남을 사랑하는 마음을 실천하는 것을 배우는 교육으로의 전환이 안 이루어진다면, 그 이후의 세상을 보는 것이 지금보다 더 두렵게 될 것. 함께 사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황금률’ 을 체득하게 만드는 것이 교육의 최종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죄인에게 자비와 사랑을 한없이 부어주시는 주님이 함께 계시니 우리들은 힘을 얻어 외롭고도 두렵지 않은 마음으로 자비를 베풀게 하시고, 그리고 코로나 19로 인해 고생하는 한 분 한 분의 수고로움과 외로움도 하느님의 위로로 안아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힘으로서 사람을 복종시키지 말고 덕으로서 사람을 복종시켜라.'' - 맹자 - |
♡2077회 우리는 남 눈치를 얼마나 보고 있습니까?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4월 25일(판관기 15장~) 혁신의 아이콘, 애플 사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당신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스티브 잡스는 다른 사람의 기대나 욕구대로 사는 것을 경고하며, 자기 자신의 길을 찾아 따르라고 촉구합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중종조의 명신으로 성격이 온건 겸허했고 특별히 청백리로 유명했던 반석평(潘碩枰,?-1540)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원래 남의 집 종으로 태어난 사람이다. 인간이지만 인간 취급을 못받으며 살도록 운명지어진 사람이란 말이다. 그러나 그는 세상 만 사람이 자기를 멸시하고 짓밟는다할지라도 자기 자신은 기어이 스스로를 키워야한다고 결심하고 어려서부터 악착스럽게 자신의 인격적인 성장과 학문적인 성장을 위하여 남모르는 수고를 거듭했다. 하느님은 이런 사람에게 새 삶의 기회를 주시는 분이시다. 문자 그대로 주경야독으로 모든 것을 극복해 가면서 익힌 그의 실력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주인 이 참판은 아무 조건없이 그의 종 문서를 불태워 종의 신분에서 해방시켜 주면서 아들없고 재산 없는 어느 양반집 수양아들이 되도록 주선해 주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예전엔 감히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고 그 결과 그는 당당하게 급제하여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형조판서로까지 승진했다. 어느날이다. 그가 한양 거리를 지나다가 옛 주인 이 참판의 아들 이오성(李五成)이 거지 몰골을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즉시 그 사람에게 큰 절을 하며 "어르신 저를 몰라모시겠습니까? 저는 당신의 종 반석평이라는 놈이올시다" 라고 했다. 백주 대낮 한양 대로에서 형조판서 대감이 거지같은 사람앞에 넙죽엎드려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어찌 예사로운 일이겠는가? 그당시 관례에 의하면 자기의 옛 신분을 밝힌다는 것은 곧 지금까지의 피 눈물로 샇아올린 자기의 모든 특권을 박탈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뿐만아니라 그는 기군망상(欺君罔上)했다는 죄명을 뒤집어쓰고 온갖 고초를 겪어야 하고 아울러 즉각 옛날의 신분으로 환원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어찌 그만한 사리를 모를 사람인가? 그러나 그는 모든 것 이전에 은혜부터 갚아야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뒷날 이 엄청난 반 대감의 인격에 감동한 고관들의 주선과 임금의 특별한 배려로 그의 사표는 반려되었고 오히려 그가 추천한 이 오성이 사옹원 별좌라는 벼슬을 얻게 되었다는 미담이 우리 역사 속에 기록되어 있다. 어떻한 상황에 처해서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자기를 애써 키우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받은 바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는 그의 삶과 인격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느낄 수 있는 멋진 영적 향취를 맡을 수 있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우리가 사는 상황과 연관해서, 다양한 사람에게서 보이는 두 가지 태도를 인용합니다. 하나는 인간을 배척하는 태도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을 흡수하는 태도입니다. 이 둘 다 좋지 않은 것으로 우리의 삶을 파괴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첫 번째 태도는 인간 혐오와 배척을 의미합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죄보다도 사람을 더 미워할 때가 많다. 그래서 존재 자체를 혐오하고 배척합니다. 두 번째 태도는 인간을 식민지하며 획일화하려는 의지를 뜻합니다. 실제로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기와 다른 것을 틀렸다고 단정하면서 무조건 자신에게 맞추려고 합니다. 상대방의 아픔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옳음을 따르지 않아서는 안 된다며 강제합니다. 이러한 태도를 우리는 좀처럼 버리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태도로 인해 배척당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지 않았습니까?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유다인들은 주님을 흡수하려 했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배척했던 것. 이 두 가지 태도는 분명히 ‘사랑’ 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이기적인 마음과 욕심 가득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서와 예언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계명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어떻게든 선을 행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 사랑 없이 행한다면 제아무리 애써 본들 주님께서 원하는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 이 사랑을 실천하는데 ‘마음을 다하라’ 라고 하십니다. 이는 조금만큼의 갈라짐도 허용하지 않는 것. 즉, 완전한 사랑이 될 수 있도록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또 힘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의 행실은 우리가 얼마나 지적으로 뛰어난가가 아니라 얼마나 사랑하느냐를 토대로 심판받을 것이고, 좋은 사랑을 했느냐 나쁜 사랑을 했느냐에 따라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판가름 날 것. 이를 위해 마음을 다하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갈라지지 않습니다. 이웃을 떠나서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느님을 떠나서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선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지를 묵상했으면 합니다. 이제 많은 사람이 보이는 배척과 흡수의 모습을 반복하는 삶이 아니라,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또 힘을 다해서 사랑하는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홍세화 선생님의 책 《결》에 나오는 이야기를 요약해 적어봅니다. 옛날 서당 선생이 삼 형제를 가르쳤다. 어느 날 선생은 장래 희망을 물었다. 첫째가 “정승이 되겠습니다.” 라고 하자, “그렇지. 사내대장부는 포부가 커야지.” 하며 흡족해했다. 이어서 둘째가 “장군이 되겠습니다.” 라고 하자, “그래야지. 사내대장부라면 큰 뜻을 품어야지.” 라며 좋아하셨다. 형들의 이 모습을 본 막내는 “저는 장래 희망은 그만두고 지금 여기에 개똥 세 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한다. 그 이유를 선생이 물었다. “저보다 글 읽기를 싫어하는 맏형이 정승이 되겠다고 하니 그 입에 개똥 한 개를 넣어주고 싶고, 저보다 겁이 많은 둘째 형이 장군이 되겠다고 하니 그 입에도 개똥 한 개를 넣어주고 싶고…….” 일그러진 표징을 짓는 선생은 “그럼 마지막 한 개는?” 이라고 묻는다. 과연 누굴까요? 당연히 엉터리 같은 소리에 맞장구쳐 준 서당 선생으로 생각할 것. 그러나 홍세화 선생님은 외할아버지의 말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서당 선생이 먹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 말을 하지 못할 땐, 그땐 네가 세 번째 똥을 먹어야 한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말입니다. 우리는 남 눈치를 얼마나 보고 있습니까? 맞는 말인데도 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 너무 많습니다. 그때는 남이 먹어야 할 개똥을 내가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맞는 말인데도 하지 못하는 셋째가 되어서도 안 되고, 헛된 말을 해대는 첫째, 둘째 같은 사람도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소낙비처럼 내려주시는 천상의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을 누리십시오. 그분은 우리들이 숨 쉬는 동안 우리들의 삶에 전부이심을 천상의 은총으로 누리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힘으로 유지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무엇이나 불운이다.'' - 펄벅 - ♡2078회 “악을 굴복시켜라.(악을 제거하여라.)”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4월 26일(열왕기상 1장~) 세계적인 기업 월트 디즈니의 창업자 월트 디즈니는 ''지금 당장 시작하는 방법은 하던 말을 멈추고 행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월트 디즈니는 뭐든지 성취를 얻기 위해서는 행동을 취하는 것의 중요성과, 그런 행동의 힘을 강조합니다.《마음의 계절中에서》 ''낡은 것에서 새 것으로 낡은 신앙이 사라지면서 나의 신앙은 의문으로 좀먹어 가지만 그렇게 됨으로써 새롭고 더욱 깊은 신앙이 태어나는 것이다.'' "목자들은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를 찾아냈다. 여드레가 차서,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요한 1,1)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38-42)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켜라.” 라는 가르침입니다.(로마 12,21) 예수님 말씀에서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는 “악에 맞서지 마라.” 가 아니라, “악인에게 악으로(폭력으로) 맞서지 마라.” 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하느님의 선을 실현시켜야 합니다. 선은 선으로만 실현될 수 있다. 악을 통해서 선이 실현될 수는 없다. 우리는 흔히 구약성경에 복수를 허용하는 율법만 있는 것으로 생각할 때가 많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성경 잠언에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주어라. 그것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이다. 주님께서 너에게 그 일을 보상해 주시리라."(잠언 25,21-22)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이라는 말은, 선으로써 악인을 깨우쳐 주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그 일을 보상해 주신다는 말은, 우리가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는 것을 주님께서 바라신다는 뜻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원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라는 율법은, 탈출기와 레위기에는 죄와 벌은 상응해야 한다는 율법으로 기록되어 있고(탈출 21,24; 레위 24,20), 신명기에는 거짓 증인을 처벌하는 율법으로 기록되어 있다.(신명 19,21) 사적인 복수를 허용하는 율법이 아니었다는 것.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유대인들은 이 율법의 본래 뜻을 잊어버리고, 또는 외면하고, 사적으로 복수를 할 때의 근거 규정으로 악용했다. 복음서의 본문을 보면 예수님 말씀에 “폭력을 포기하여라.” 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데, 이 제목은 번역자가 붙인 것이지만 어떻든 이 제목 때문에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이야기를 보면 대단히 폭력적인 예수님의 모습이 나온다. 그것은 당신의 말씀과 모순되는 행동이 아닌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복음서의 표현만 보면(요한 2,14-16),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다. ‘채찍’ 은 사람들을 치기 위한 채찍이 아니라, 짐승들을 내보내기 위한 채찍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폭력을 사용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 그래도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신 것은 과격하게 보이긴 합니다. 짐승들이 몰려 나가는 과정에서 혼란과 소동이 벌어지고, 그래서 탁자들이 엎어지고 돈이 쏟아진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사람들을 향해서 폭력을 사용하신 일은 아닙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성전 정화 때의 예수님의 행동을 “아버지의 집에 대한 열정” 으로 설명했다.(요한 2,17) 악인에게 악한 폭력으로 맞선 일이 아니라는 것. 또 “예수님께서는 재판을 받으실 때 경비병이 뺨을 치자 다른 뺨을 돌려 대시지 않고 그 경비병을 꾸짖으셨다. 그것은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라는 당신의 말씀과 모순되는 행동이 아닌가?” 라고 묻는 사람이 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곁에 서 있던 성전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치며, ‘대사제께 그따위로 대답하느냐?’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잘못 이야기하였다면 그 잘못의 증거를 대 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요한 18,22-23) 표현만 보면 예수님께서 경비병을 꾸짖으신 것으로 보이지만, 예수님은 재판을 받고 있는 죄수일 뿐입니다. 그래서 경비병을 꾸짖을 수 있는 위치가 아닙니다. 성경 번역자는 예수님의 말투를 전부 ‘해라체’ 로 번역했는데, 이것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요한복음 18장을 보면, 한낱 죄수일 뿐인 예수님은 빌라도 총독에게 해라체로 말을 놓고, 식민지를 다스리는 로마제국 총독인 빌라도는 식민지의 죄수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다.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투를 존댓말로 바꾼다면, 경비병에게 하신 말씀의 느낌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그를 꾸짖으시는 말씀이 아니라, 부당한 재판에 대해서 항의하는 힘없는 피고의 말이라는 것. 그것은 다른 뺨을 돌려 대시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당시의 실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다른 뺨을 돌려 대시기 전에 경비병이 먼저 양쪽 뺨을 모두 칠 수도 있었다. 예수님은 저항 자체를 하실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뺨을 치는 사람보다 우위에 있거나 최소한 대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상대방의 폭력에 같은 폭력으로 맞받아 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거나, 더 센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힘이 없어서 당하기만 하는 사람, 억울한 일을 당해도 힘이 없어서 참을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속옷과 겉옷에 관한 말씀, 천 걸음과 이천 걸음에 관한 말씀,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켜라.” 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냥 참아라.” 가 아닙니다. 이 가르침의 핵심은 “악을 굴복시켜라.(악을 제거하여라.)” 입니다. 그 방법은 ‘선’ 이어야 한다는 것. 개인의 경우에는 정말로 힘이 없어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참을 수밖에 없을 때가 많은데, 바로 그럴 때에 공동체가 나서야 합니다. 정의와 선의 실현은 신앙인 공동체의 의무입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마태 5,13-16). 혼자 외로웠던 갈릴래아를 은혜와 축복이 바꾸어주신 주 예수님의 부활 신비가 우리 모두에게 삶에 충만한 은총이 되고, 특히 성전 안 신자만이 아니라 이 땅의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생각이야말로 진정한 힘이다. 생각은 에너지인 것이다.'' - 엔드류메터스 - |
♡2079회 지금 이 순간 무엇이 중요한가?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4월 27일(열왕기하 1장~)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는 ''삶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경험해야 할 현실이다.'' 쇠렌 키르케고르는 삶은 직접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지, 경험을 하기도 전에 마치 문제인 것처럼 해결하려고 하면 안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순간을 충만하게 사는 것》인내란 힘든 훈련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어떤 일들, 즉 버스가 도착하거나 비온 후 날이 갤 때까지, 또는 친구의 귀환이나 분쟁의 해결 등과 같은 일들이 일어날 때까지 단순히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인내는 다른 사람이 해줄 때까지 피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순간 순간을 최대한 충만하게 살고,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존재하며, 지금 여기, 이 순간을 맛보며, 우리가 지금 있는 곳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진정 참는 것. 참을성이 없으면 우리는 현실에서 도피하려고만 하게 됩니다. 우리는 참된 일들이 내일,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일어날 것처럼 행동합니다. 지금 이 순간 참으십시오! 우리가 찾고 있는 보물은 우리가 서 있는 땅 바로 밑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어떤 사람이 모래언덕이 끝없이 이어지는 사하라 사막에서 길을 잃었다고 합니다. 극한의 고통을 견뎌내며 걸어가던 중 사막 한 가운데를 지나는 유목민을 만나게 되었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게 된 그 사람은 유목민으로부터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을 얻게 되자, 다시 걸어갈 용기와 희망이 생겨서, 다음 오아시스가 어디쯤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유목민의 답변이 걸작이었다. “곧장 가세요. 그러다가 다음 주 금요일 쯤에 오른쪽으로 꺾으세요.” “ ? ........ ! ” 하루 이틀 걷고 끝날 일이 아니라는 것. 비록 우스개 이야기지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누구나 살아가다 보면 사하라 사막을 건너는 것과 같은 시련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럴 때, 고통스럽고 피하고 싶은 마음에 무리수를 두게되면 길을 잃어버리기 쉽다. 오히려 이런 순간에는,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한 걸음씩 성실히 걸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목표가 뚜렷하고, 중간에 길을 잃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오아시스를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유목민의 답변이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될 것인지, 아니면 절망의 메시지가 될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 18,19)라고 약속하셨다. 기도의 힘은 위대합니다. 개인의 기도가 아니라 여럿이 드리는 교회의 기도는 하느님의 심중을 흔드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 더불어, 예수님께서 “일곱번이 아니라 일흔일곱번까지라도 용서”(마태 18,22) 하라고 하신 것처럼 ‘무한히 용서’ 해야 합니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작용하시는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용서하려고 노력할 때, 예화에 등장하는 유목민의 “다음 주 금요일쯤에 오른쪽으로 꺾으세요” 하는 답변마저 절망이 아닌 희망의 메시지로 변화시킬 것. 지금 이 순간 무엇이 중요한가? 옛날 어느 나라에 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격렬한 전투가 계속되어 조금도 쉴 수 없었던 장군은 소강상태에 이르자 그제야 정말 오랜만에 자신의 숙소에서 쉴 수 있었다. 마침 따뜻한 차 한 잔이 생각난 장군은 자신이 소중히 보관하고 있던 찻잔을 꺼내어 차를 따랐다. 그리고 한 모금 마시려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는데, 손에서 그만 찻잔이 미끄러져 놓칠 뻔했던 것. 다른 손으로 다급히 찻잔을 잡아서 깨지는 사고는 모면했지만, 아끼던 찻잔을 한순간에 깨뜨리는 줄 알았기에 장군의 가슴은 여전히 요동쳤다. 순간 장군은 조금 전 자신의 모습에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터에서 아끼는 부하들이 눈앞에 쓰러져 갔을 때도, 적군에 포위되어 자신과 병사들의 목숨이 풍전등화 같던 때에도, 그처럼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일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내가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장군은 조금 전 자신이 가졌던 행동과 마음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소중한 병사들의 목숨보다 작은 찻잔 하나에 집착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수많은 병사의 목숨을 책임져야 할 장군의 태도가 아니었던 것. 장군은 깊은 반성과 함께 그리도 소중히 여기던 찻잔을 그 자리에서 깨뜨려 버렸다. 여러분이 지금 이 순간 가장 아끼는 것이 무엇인가요? 머릿속에 지금 무언가가 떠올랐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것이 가져다줄 순간의 행복과 즐거움 때문에 더 소중한 것을 소홀히 여기지 않았는지 말이에요. 잠시 사용하고 사라져 버릴 ‘소유’ 때문에 ‘존재’ 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끝까지, 계속해서, 충만하게 그리고 영원토록 품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들 한 영혼, 한 영혼에게 충만한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타인에 대한 존경은 처세법의 제일 조건이다.'' - 아미엘 - |
♡2080회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무한한 능력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4월 28일(역대기상 1장~) 고대 로마제국의 스토아 철학자 루키우스 세네카는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잘 살았는지가 중요하다.'' 세네카는 단순히 장수하는 삶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의미 있게 잘 사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관계가 힘들 때 사랑을 선택하라》 이 말은 불안, 미움과 증오, 외로움 등으로 마음의 감옥에 갖혀 사는 현대인들을 위로하는 내적자유의 길 을 제시한 뉴에이지적 카톨릭 신부이며 작가였던 네덜란드 출신 사제 헨리나우웬이 한 말이다. 사람은 나이 들어가면서 생길 수 있는 오류 중 하나가 자꾸만 편협해 진다는 것이다. 내 마음의 상처가 크기에 상대방 단점만 찾게 되고, 생활이 팍팍해져 삶의 방향을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것도 아닌데, 함께라서 더 좋아야 하는데도 불구 하고, 쉽게 상대에게 짜증을 내고 사회적 민감성 때문에 작은 일에도 더 분노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혜는 지금 이 순간 저절로 생기는 능력이 아니다. 마음 속에 고뇌와 자아성찰로, 원망과 미움, 증오 등에서 사랑으로 전환 되어야만 가능하다는 것. 사람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존재다. 고뇌와 자아 성찰적 고독이 없으면 사랑은 그대 곁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래서 반드시 선함과 지혜가 함께 해야만 된다는 것. 노자와 함께 도가사상(道家思想)을 형성한 장자 는 속세를 초탈하고자 했던 송나라의 사상가 이다. 위시(비교)의 대명사 장자는 말했다. 울지마라. 인생이란 이 세상에 홀로왔다 혼자놀다 가는 것 뿐이라 했다, 공수래공수거라 했다. 타인을 존중하되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내려고 하지 마라. 스스로 내 자신과 먼지 친하게 지내라. 인생 이란 고난과 가시밭길의 연속이지만, 자신이 존재 함에 감사하며 늘 자신을 객관화하며 행복해지려 노력해라. 진정으로 현명한 사람은 타인에게 내가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식물인간이 되어 혼수상태로 있던 사람이 열흘 만에, 어떤 사람은 2년 만에, 어떤 사람은 20년(폴란드의 철도 기술원 그르제프스키 씨(65))만에, 무려 28년 만에 의식을 회복한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주변을 보면 하나같이 누군가가 지극한 정성으로 그를 돌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의식은 없지만 살아있는 사람으로 인정하고 사랑을 쏟았던 사람들은 결국 그 사랑의 헌신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무한한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12,30.31). 고 말씀하셨다. 사랑은 외적으로 강제되는 의무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하느님 사랑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 하느님을 자발적으로 섬기는 것. 사랑은 하느님과 인간관계의 기반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마음과 목숨, 힘을 다한 존재 전체로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하느님 사랑은 하느님을 위해 손해 볼 작정을 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구체적인 이웃 사랑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을 똑바로 인식하고 바르게 사랑해야 합니다. 내 자신에게 너그럽고 시간을 내고 관심을 쏟고 변명을 하고 행복한 생활을 바라는 것같이 이웃에게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진정한 사랑은 결코 한가로울 수 없는 것, 한가로운 사랑은 벌써 잘못되었다는 표시인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그야말로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3,18)하는 그런 사랑을 해야 합니다. 사랑이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더 나은 이유는 번제물보다 더 큰 자기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막대한 경제적 손실로 생각할 수 있는 소나 양, 염소를 통째로 하느님께 바쳤던 것은 그렇게 해서라도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하는 마음을 심어주고 싶었던 것. 유다교에는 계명이 많았다. 무려 613개 조항의 계명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248개 조항은 명령, 365조항은 금령이었다. 그래서 이 계명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지에 대한 논의가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예수님께서는 이 잡다한 계명들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요약하고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은 불가분의 관계임을 선언하셨다. 주님의 기도의 핵심정신을 보아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도 그렇다.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헌신으로 요약할 수 있다. 예수님은 단지 좋은 가르침을 주고 좋은 말씀을 하는 존재 그 이상입니다. 모두를 내어주는 행동을 통해 사랑이 드러났다. 머리로 아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멀리 있지 않다” 는 것은 분명 아직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그 앎이 온몸에 배어서 행동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하느님나라에 온전히 들어가게 됩니다. 많이 아는 것과 천국은 별개입니다. 천국은 사랑을 사는 사람들의 것.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온 몸으로 사랑하십시오. 그리하면 더 큰 사랑의 능력을 만나게 될 것. 그리고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4,7-8) 사랑이 우리를 재촉하는 오늘입니다. 성전에 나가 십자가와 감실에 계신 자비로우신 예수님을 만나는 일... 어찌 보면 매일 매일 예수님을 만나는 그 일을 통하여 지금 우리들이 잘 살아가고, 모든 것이 회복되는 열쇠의 은총과 축복이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공포로 인해 타협하지 말 것이며, 남이 나에게 타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말라.'' - 케네디 - |
♡2081회 “나를 위해 꽃을 장식하지 말라. 그리고 1달러를 황금처럼 아껴라.”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4월 29일(에즈라기 3장~) 미국의 신학자이자, 최고의 설교자 찰스 R. 스윈돌은 ''삶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의 10%고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90%다.'' 찰스 R. 스윈돌 목사는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자기 자신의 통제 범위에 있으며 이는 우리 삶의 경험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마음의 기도문 나는 소망합니다》"모든 사람들이 언제나 소망을 품고 살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내가 모든 이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사람의 죽음을 볼 때 내가 더욱 작아질 수 있기를, 나 자신의 죽음이 두려워 삶의 기쁨이 작아지는 일이 없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줄어들지 않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다른이가 내게 주는 사랑이 내가 그에게 주는 사랑의 척도가 되지 않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내가 언제나 남들에게 용서를 구하며 살기를, 그들의 삶에는 내 용서를 구할만한 일이 없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언제나 나의 한계를 인식하며 살기를, 내 스스로 그런 한계를 만들지 않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언제나 소망을 품고 살기를 헨리 나우웬(1932-1996), 로마 가톨릭사제, 사목신학자, 심리학자 신앙생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물론 사랑의 실천이겠지만 그 이전에 가져야 하는 것이 ‘겸손’ 입니다. 겸손하지 않은 사랑은 위선일 가능성이 큽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영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 이라고 말했다. 세례자 요한도 “그분은 커지시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그런데 겸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방향’ 입니다. 내가 겸손해져 작아질 때 내 등 뒤로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이 빛보다 어둠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분께서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을 때 친구와 함께 집 앞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조폭 세 명이 들어와 옆에서 마시게 되었다. 처음 조폭이 술 마시는 것을 보았는데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제일 큰 보스가 중간 보스와 이야기하며 막내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그런데 막내의 술잔이 어디 있는지 보지도 않고 따르는 것. 막내는 보스가 술을 어디에 따르든 손을 뻗어서 술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는 포장마차 바깥으로 머리를 내밀고 술을 마시고는 다시 잔을 놓는 것이었다. 먼저 일어나 집으로 나오는데 그 막내가 쫓아 나왔다. 저희가 비웃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던 것 같다. 그런데 우리 인상도 조폭 같았는지 담배를 권하는 것이었다. 그 조폭들은 다른 지역에서 왔기 때문에 이쪽 조폭들과의 전쟁을 원치 않았다. 그저 담배 한 대 같이 피우자는 것. 우리는 담배를 배우지 않았지만, 우리도 조폭인 척 담배를 받아 물었다. 기침이 나왔지만, 눈물을 흘리면서 참았다. 그때 보스가 무슨 일이냐고 밖으로 나왔다. 키도 크고 몸집도 컸다. 위압감이 느껴졌다 . 그때 막내가 뭐라 변명을 하니 보스가 “찌그러져 있어!” 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정말 사람이 그렇게 찌그러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보스는 괜한 시비가 일어나지 않도록 당부하고는 우리를 보내주었다. 겉만 보면 조폭 두목의 부하는 매우 겸손해 보입니다. 그렇게 겸손하며 누군가를 더 크게 보이게 만듭니다. 문제는 조폭 두목을 크게 보이게 한다는 것. 세상에는 겉으로만 겸손한 척하는 사람이 있다. 무언가 얻어내기 위해 직장 상사에게 굽신거릴 수도 있고, 아니면 사람들에게 겸손하다는 말을 듣기 위해 억지로 그렇게 할 수도 있다. 세례자 요한의 겸손이 뛰어났던 이유는 그가 작아짐을 통해 그리스도를 보게 했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작아짐입니다. 내가 굽히고 작아짐으로써 내 등 뒤에 있는 누군가를 사람들이 보게 만드는 것이 겸손입니다. 어떤 사람의 겸손 뒤로는 사탄이 보일 수 있고, 어떤 사람의 겸손 뒤로는 그리스도가 보일 수 있다. 따라서 겸손은 꼭 필요하지만 내가 겸손함으로써 무엇을 드러내는지 살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겸손 뒤로 그리스도께서 보이게 하신 이유는 그가 ‘광야’ 라는 곳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두 방향을 향할 수 있다. 빛과 어두움, 혹은 광야나 도시입니다. 광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 즉 세속-육신-마귀와의 싸움을 의미합니다. 그것에게서 벗어나는 장소가 광야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가난하게 살며 재물의 욕심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낙타털옷은 옷을 지어 입기 위해 에너지를 쏟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메뚜기와 들꿀을 먹었다는 뜻은 육신을 절제했다는 뜻이며 마귀를 멀리했다는 뜻은 자신을 낮추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모든 영광이 그리스도께 흘러가는 통로가 되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나 육체의 욕구, 혹은 명예욕이 있는 상태로 겸손해 봐야 소용이 없다. 그것들은 도시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보름에 한 번씩 며느리의 가계부를 검사했다. 콩나물과 두부, 연필과 공책값도 철저히 점검했다. 결혼 예복을 50년 동안 입었다. 손자들의 속옷을 기워주는 것이 그녀의 취미였다. 그녀의 유언은 “나를 위해 꽃을 장식하지 말라. 그리고 1달러를 황금처럼 아껴라.” 였다. 세수한 물로 머리 감고, 머리 감은 물로 세탁하고, 세탁한 물로 걸레 빨고, 걸레 빤 물은 화단에 뿌렸다. ‘절제’ 와 ‘청빈’ 의 상징인 이 여성의 이름은 프란체스카이고, 한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의 영부인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평가가 어떻든, 프란체스카는 이승만 대통령을 더욱 크게 만들어주는 영부인의 멋진 삶을 사신 것 같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손길로 인도되던 사람이었고 그 결과 광야에서 살았다. 삼구와의 싸움을 통해 자신을 낮추는 것이 참된 겸손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삶의 방향은 광야입니까, 아니면 도시입니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광야로 향하고 있을 것. 광야는 내 안의 세속-육신-마귀와의 싸움의 장소입니다. 이 욕구와의 싸움이 없다면 겸손은 위선이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세상살이가 아무리 힘들고 답답하고 가슴이 칠 일이 있어도 주님을 뵙는 자리에 머물러 계시기를... 그래서 우리들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도 이름을 불러주시는 부활하신 주 예수님의 능력을 입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오늘 할 수 있는 일에 전력을 다하라. 그러면 내일에는 한걸음 더 진보한다.'' - 뉴턴 - |
♡2082회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4월 30일(토빗기 5장~) 탈무드에 ''물고기를 주어라. 한 끼를 먹을 것이다.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어라. 평생을 먹을 것이다.'' 《양식이 들어오면 목소리로 바뀐다》영화 ‘증인’(2018)은 세상에 물들어가는 한 변호사가 순수하기 짝이 없는 한 자폐아를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변호사 정우성은 한 살인사건을 맡게 되며 주인을 살해했다는 죄목으로 피고가 된 한 가정부를 변호해야 합니다. 변호를 잘 해 내면 아버지가 남겨놓은 빚보증은 물론 앞으로의 성공이 보장되어 있다. 정우성은 그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자폐 아이를 만나며 모든 진실을 알게 됩니다. 아이의 진술이 옳았다는 것을 안 것. 정우성은 갈등에 휩싸입니다. ‘누구의 목소리를 따를 것인가?’ 정우성은 아이에게 잘해주고 아이를 걱정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더 걱정합니다. 그래서 아이를 정신병자로 만들어 그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고 변론해야 했다. 아이는 정우성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이 말에 정우성은 쉽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누구라도 그럴 것. 왜냐하면 자기를 먼저 생각하면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음을 누구라도 알기 때문입니다. 정우성은 아이를 이용하려고 했다. 결국 정우성은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라는 한 자폐아의 물음에 올바로 대답하기 위해 지금까지 성공을 위해 쌓아온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순수한 한 아이에게서 칭찬 한 마디듣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바꾼 것. 예수님은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예수님도 우리 안에서 묻습니다.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지금 저에게 그렇게 물으면 절대 예수님 앞에서 그렇다고 대답드릴 수 없다. 이 물음에 대답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예수님 앞에서 그렇게 대답해야 합니다. 좋은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습니다. 그런데 좋은 사람이 부자일 수 없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은 그만큼 더 내어주지 못했기 때문에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어려운 것. 그래서 부자인 상태로 죽는 것을 경계해야합니다. 만약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라는 목소리가 우리 안에 없다면 우리는 마지막 때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피할 수도 있을 것. 우리는 항상 이 물음을 듣고 있었다. 양심에서부터 항상 이 목소리가 들려오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다른 목소리들로 이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살아온 것뿐입니다. 학생 때는 “당신은 일류대 생입니까?” 라는 목소리에 응답하기 위해, 더 성장해서는 “당신은 능력 있는 사람입니까?” 라는 목소리에 응답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양심에서 울려오는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생존을 위한 목소리, 즉 “먹고 싶다. 자고 싶다. 가지고 싶다. 죽이고 싶다.” 등이 아니라면 다른 모든 목소리는 누군가에 의해 우리에게 주입된 목소리입니다. 대부분은 부모에 의해 주입되었다. “넌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라고 엄마가 말해주었다면 아이는 그 목소리를 성취하기 위해 삽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셔도 그 목소리는 죽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해 준 양식을 먹으며 어머니의 목소리가 그 아이 안으로 들어가 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고 하신 의미가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양식을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서 ‘목소리’ 로 살아가십니다. 매순간 “나처럼 살고 있니?” 라고 물으십니다. 마지막 순간에는 “너는 나니?” 라고 물으실 것. 그리스도처럼 살지 않았다면 이 질문에 대답하기 매우 어려울 것. 내 안의 목소리는 양식으로 들어왔다. 양식은 그것을 주는 이의 목소리를 내 안에 옮겨놓습니다. 우리가 생명의 양식인 성체성혈을 먹고 마셨다면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듣지 않을 수 없다. 사람 안에서 양식은 항상 목소리를 변환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려야 그분의 양떼 가운데 하나입니다. 양식이 목소리가 되지 않았다면 양식이 아닌 음식으로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지 못합니다. 우리 안에 사시는 성체의 목소리를 들어봅시다. 그러면 “너는 나를 닮았다!” 라는 칭찬 한 마디 듣기 위해 나의 온 삶이 변화하게 됩니다. 이것이 새로 태어남입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창던지기 종목에서 영국 선수 스티브 베클리는 동메달을 땄다. 4년 뒤의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는 더 좋은 성적을 낼 것이라고 사람들은 기대했고, 그 역시 그 어떤 때보다도 열심히 훈련했다. 그런데 올림픽을 6개월 앞두고 발목 부상을 입었다. 6주 동안 목발을 짚어야 했고 훈련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뛰어난 성적으로 은메달을 획득했다. 그는 6주 동안 목발을 벽에 기대어놓고 의자에 앉아 창던지기 상상을 했다고 합니다. 창을 손에 쥐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고, 손가락으로 꽉 쥔 서늘한 금속 손잡이의 감촉을 느꼈다. 완벽한 창던지기 자세를 취했고, 던진 창이 높이 아치형을 그리며 날아가는 순간에는 그의 근육도 긴장했다. 창이 저 멀리 날아가서 땅에 꽂히는 장면을 계속해서 상상했다. 이미지 트레이닝이 중요하다고 말하지요. 실제로 많은 스포츠 선수들이 이 훈련으로 향상된 성적을 냈다. 이렇게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만약 스티브 베클리 선수가 ‘훈련을 할 수 없으니, 나는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없어.’ 라고 포기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어쩌면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하나의 방법만 있는 것처럼 착각하면서, 그 방법을 사용할 수 없을 때는 좌절하며 포기합니다. 그렇지 않음을 이 세상 안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이처럼 지금 이 순간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주님 앞에 빈손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의 말씀처럼 자비의 빈손, 믿음의 빈손, 정결의 빈손으로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렙톤 두 닢을 넣습니다. 사람들은 비웃었겠지만, 주님께서는 지향을 보시기 때문에 그녀를 칭찬하십니다. 자신의 생활비를 모두 다 넣을 정도로 하느님을 사랑하시는 그녀의 지향을 보신 것. 자캐오도 자기 재산의 절반으로 하늘 나라를 차지할 수 있었고, 과부도 동전 두 닢으로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었다. 부자가 베푼 많은 재산과 가난한 사람이 건넨 두 닢이 하늘 나라에서는 똑같은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놀라울 수밖에 없다. 이 세상의 재물에 온 힘을 기울이는 것보다 하느님께 온 힘을 기울이는 사랑의 지향이 중요한 것.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내게 사랑의 지향은 있는지 지금 이 순간 살펴보십시오. 주님께 봉헌할 재물이 없다고 슬퍼할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음을 더 슬퍼해야 합니다. 어느 석상이 야외에 서 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그리고 햇볕이 뜨거울 정도로 쨍쨍 내리쬘 때도 그 자리에 꼿꼿이 서 있다. 석상의 입장에서 볼 때는 불만스럽지 않을까요? 석상을 만든 작가가 이곳에 세웠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석상도 기쁠 때가 있을 것 같다. 바로 자신을 보고서 감상을 하며 기쁨을 간직하는 사람을 볼 때가 아닐까요? 이렇게 말없이 자리를 지키는 석상을 보면서,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모습도 이렇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불평불만으로 지금 자리를 떠나려고만 애쓰는 모습이 아니라, 주님께서 마련해주신 이 자리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특별한 것을 바라지 않고 자기의 자리에서 주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고 있음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기뻐할 수 있습니다. 주 예수님의 말씀으로 사랑하고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은총과 축복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얻는 행동이 최선이다.'' - 허치슨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