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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기도회 봉사

♡2172회 ‘사랑’ 은 이해해야 할 지식에 속한 것이 아니라, 믿고 받아들여서 살아야 - 하는 ‘삶’ 에 속한 것입니다. ♡

♡2172회 ‘사랑’ 은 이해해야 할 지식에 속한 것이 아니라, 믿고 받아들여서 살아야 - 하는 ‘삶’ 에 속한 것입니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7월 29일(여호수아기 19장~ )

  단테는 ''좋은 성과를 얻으려면 한 걸음 한 걸음이 힘차고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축복의우물》기도는 축복의 우물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이 우물로부터 계속해서 축복이라는 물을 퍼 올릴 수 있다. 이 물을 마시게 되면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고 하느님을 깊이 사랑하게 됩니다. 기도를 중단하면 축복의 우물에서 물을 퍼 올릴 수 없다. 그만큼 기도하는 사람은 축복을 많이 받는다는 것. 기도하면서 말없이 자선을 베푸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에게는 하느님께서 더 많은 축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기도하는 것을 중단해서는 안됩니다. 신이신 예수님께서도 조용한 곳으로 가셔서 하느님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셨다. 어떤 결정을 내릴때와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에도 깊게 기도하셨다. 신이신 예수님께서도 기도를 하셨는데 피조물인 우리들이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분을 따를 자격이 없는 것. 아멘!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13,10-12)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나의 가르침을 믿는(믿으려고 노력하는) 이들에게는 비유를 사용할 필요가 없어서 곧바로 하늘나라의 신비를 가르쳐 주지만” 이라는 뜻입니다. ‘하늘나라의 신비’ 는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 구원의 진리 등을 뜻합니다.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믿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진리를 깨우쳐 주기 위해서 비유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라는 뜻입니다.

 ‘구원의 진리’ 는 배워서 지식을 쌓는 학문에 속한 진리가 아니라, ‘깨닫고 믿고 실천해야 하는’ 신앙에 속한 진리입니다. 먼저 믿고 믿음을 통해서 나중에 깨달을 수도 있고, 깨닫고 나서 믿음을 갖게 될 수도 있다. 어떻든 우리 교회의 신앙생활에서 ‘깨달음’ 은 아주 중요한 과정입니다. 사실 신앙생활은 공부를 해서 지식을 쌓는 생활이 아니라, 믿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이 쌓여서 완성된 믿음에 도달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사용하신 것은 ‘깨달음’ 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허락되다.’ 라는 말은, ‘믿음’ 을 은총의 관점에서 표현한 것이고, 듣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구원의 진리를 믿거나 안 믿는 것은 각자 스스로 선택하고 결단하는 일입니다. 믿는 사람은 은총을 받아들임으로써 은총이 허락된 사람이고, 안 믿는 사람은 안 받겠다고 거부함으로써 은총이 허락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게 되고, 구원의 은총을 향해서 나아가지만,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더욱더 못 알아듣게 되고, 구원의 은총에서 멀어지게 된다.” 라는 뜻입니다. “믿으면 깨닫게 되지만, 안 믿으면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한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일과 깨닫는 일은 지능이나 지적 수준이나 학력 같은 것과는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자기 이름을 쓸 줄 모르는 사람이라도 믿음으로 깨닫고 구원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뛰어난 학자라도 안 믿으려고 하면 알아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합니다. 이 말씀은, ‘탈렌트의 비유’ 에도 나옵니다.(마태 25,29) ‘탈렌트의 비유’ 에서는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더 많은 은총을 받게 되지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은 받은 은총마저 잃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마태 13,13) 원래 비유는 알아듣기 쉽게 하려고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믿고, 회개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려고 비유들을 사용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주로 일상생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일들을 비유로 사용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비유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금방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비유 자체가 수수께끼가 되었고, 더욱 알아듣기 어려운 말이 되어버렸다. 예들 들면,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4)라는 말씀은, 누구든지 금방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비유 말씀입니다. 그런데 “부유하게 사는 것은 ‘하느님의 복’ 을 받은 것” 이라는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마태 19,25) 그 당시에는 제자들도 ‘낙타와 바늘구멍’ 에 관한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고,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말씀이 어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재물에 관한 사고방식 때문에 그런 것.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태 13,14-15)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신 것은, “너희는 왜 들어도 믿지 못하고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는가?” 라고 꾸짖기 위해서 입니다. 이 말씀은, 알아듣기 쉽도록 쉬운 비유를 사용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듣지 않기 때문이고,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보지 않기 때문이다.” 라는 뜻입니다. 선천적으로 어떤 장애가 있거나 능력이 부족해서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 구원, 하느님 나라 등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이고, 신앙생활보다는 세속 생활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더 신경 쓰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기서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나는 그들을 고쳐 주기를 바라는데(구원하기를 바라는데) 그들이 듣지 않고 보지 않고 믿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마치 내가 그들을 고쳐 주지 않게 하려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입니다. “그래도 성경이라는 책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라고 반박할 이들이 있을 것. 물론 몇 천 년의 시간 간격이 있고, 지리적, 문화적 간격이 있고, 낯선 언어를 번역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어서 성경이라는 책이 어렵긴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그 말씀들은 우리에 대한 ‘사랑’ 이기 때문입니다. ‘사랑’ 은 이해해야 할 지식에 속한 것이 아니라, 믿고 받아들여서 살아야 하는 ‘삶’ 에 속한 것입니다.

  밀 같은 신자는 익은 벼를 닮을 마음의 작업을 하고, 가라지 같은 신자는 다시 마음의 작업을 하면서, 우리들의 삶에 은총의 알곡이 영글어가게 되는 삶을 살아가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성공하기를 바라는 자는 자존심까지도 포기해야 할 것이다.'' - C.힐티 -


♡2173회 편견에 사로잡혀서 보아야 할것을 보지 않고, 들어야 할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7월 30일(판관기 1장~ )

  빌 게이츠는 ''쉽게 만족하지 말고 계속 전진하라.''
자신을 용서하는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과거의 실수와 실망스러운 일을 멀리 날려버려라. 하느님이 사랑과 용서의 하느님이시며 우리를 위해 놀라운 축복을 준비하고 계심을 항상 되새기라.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실수했을 때 올바른 태도는 자신을 낮추고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받아들이는 것. 자신을 용서하는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후회 속에서 살게 되며, 후회는 우리의 믿음을 갉아먹는다. 믿음은 먼 기억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현재형이다. 지금 이 순간 하느님은 실망을 희망으로 바꿔 주신다. 지금 이 순간 하느님은 쓰라린 상처를 영광의 상처로 바꿔 주신다. -믿는 대로 된다, <긍정의 힘>에서- 

과거의 실수와 잘못된 선택에 대해 자기가 자기를 용서하지 않는 사례가 너무 많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사람에게 자비와 용서를 하고 싶어도 못 하십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의지를 강제로 간섭하시지 않고 온전히 자유롭게 하느님께 내어놓고 자비를 구할 때 비로소 당신의 권능의 팔을 펴시어 그를 붙잡아 주시고 쓰라린 상처를 영광의 상처로 바꾸어 실망을 희망으로 축복과 은혜로 감싸 안아 주십니다. 아멘.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마태 13,54-58) 목수의 아들이며 목수인 예수님이 가르치는 일을 하는 것과 병자들을 고쳐 주는 등의 기적을 행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음을 나타냅니다.

 “목수는 목수 일이나 할 것이지, 왜 어울리지 않게 가르치는 일과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을 하는가?” 나자렛 사람들의 반응에서 아모스 예언자의 경우가 연상됩니다. “아마츠야가 아모스에게 말하였다. ‘선견자야, 어서 유다 땅으로 달아나, 거기에서나 예언하며 밥을 벌어먹어라. 다시는 베텔에서 예언을 하지 마라. 이곳은 임금님의 성소이며 왕국의 성전이다.’ 그러자 아모스가 아마츠야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아모 7,12-15) ‘아마츠야’ 라는 이름의 사제는 ‘아모스’ 가 밥벌이를 하려고 예언자 흉내를 내는 것으로, 즉 아모스를 사이비 예언자로 생각했던 것 같다. 아모스는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나는 농사꾼일 뿐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은 아마츠야 같은 사람들이 “농사꾼 주제에 왜 예언자 행세를 하느냐?” 라고 비아냥거렸음을 나타냅니다.

 바오로 사도의 편지에 “여러분과 얼굴을 마주할 때에는 겸손하고 떨어져 있을 때에는 대담하다고들 하는 나 바오로가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직접 권고합니다."(2코린 10,1) 아마도 바오로 사도를 이중인격자라고, 또는 위선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차지만, 직접 대하면 그는 몸이 약하고 말도 보잘것없다.’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한 사람은, 우리가 떨어져 있으면서 편지로 써 보내는 말과 곁에 있으면서 하는 행동이 똑같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2코린 10,10-11) 바오로 사도는 글은 잘 썼지만 말재주는 부족했던 것 같다.(2코린 11,6) 외모가 볼품이 없었던 것 같다. 당시 사람들 가운데에는 바오로 사도의 외모만 보고, 또 말이 서툰 것만 보고 편견을 가지고서 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 편견 때문에 바오로 사도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편견에 사로잡혀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않고, 들어야 할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들은, 만일에 편견이 없었다면 받았을 은총을 편견 때문에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편견은 그들 자신들에게 큰 손해가 되는 일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목수의 아들이며 목수라는 점만 보느라고 들어야 할 말씀을 듣지 않고 보아야 할 ‘하느님의 일’ 을 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예수님의 말씀이 지혜로운 말씀이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기적이라는 것은 인정했다. 인정하는 것과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그들은 한낱 목수일 뿐인 예수님이 지혜로운 말씀을 하신다는 것과 기적을 행하신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편견 때문에 예수님에게서 멀어진 것.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런 식으로 편견에 사로잡혀서,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느님의 일을 하느님의 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출신, 학력, 학위, 외모 같은 것들에 대한 편견. 더 나쁜 것은, 그런 편견 때문에 사이비 예언자들이나 가짜 예언자들에게 속는 경우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럴듯한 학력과 학위와 경력에 속아서, 하느님의 말씀이 아닌데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속고,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 아닌데도 하느님의 일이라고 속고 그래서 사이비 종교에 빠져서 인생을 낭비하고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당신이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하는 것이 서운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을 안 믿고 있던 이방인들은 복음을 잘 받아들이는데, 하느님을 믿는다는 너희는 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가?” 라고 유대인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나자렛 사람들뿐만 아니라 전체 유대인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이 아무런 편견 없이 복음을 잘 받아들이고 있음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예언자가 전하는 하느님 말씀을 잘 받아들인 예가 요나서에 나오는 니네베입니다. “요나는 그 성읍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하룻길을 걸은 다음 이렇게 외쳤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요나 3,4-5) 하느님을 안 믿던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선포를 듣자마자 하느님을 믿었고, 회개했다.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예언자와 같은 민족인 유대인들은 예언자가 전하는 하느님 말씀을 존중하지 않는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예언자가 전하는 하느님 말씀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사람들이 편견을 갖고서 당신을 무시한 것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으신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일에 마음을 두시지는 않았고, 사람들이 구원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서 복음 선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하셨다. 당신이 세속적으로 존경을 받거나 무시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으셨고,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만 집중하셨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들에게 시련이 닥쳐와 흔들리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날을 대비하여 십자가 앞에서 믿음과 시련과 지혜의 은총을 주시는 야고보 서간을 읽고 기도하면서 감사하는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진정한 성공에 지름길은 없다.'' - 마이클 조던 -


♡2174회 우리는 마음으로 보는 곳을 향해 나아간다. 마음으로 보지 못하는 일이 실제로  -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7월 31일(롯기 1장~ )

  법륜스님은 ''꽃을 보고 좋아하면 꽃이 기분이 좋습니까? 내가 기분이 좋습니까? 내가 기분이 좋습니다. 상대를 좋아하면 내가 좋습니다. 행복도 내가 만들고 불행도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 으로 보라.》‘믿음의 눈’ 으로 행복하고 건강하고 온전한 자신의 모습을 보기 시작해야 한다. 미래가 암울해 보여도, 낙심하고 절망하고 싶은 유혹이 들어도, 소망의 하느님께 기도함으로써 힘을 얻으라는 말이다. 엘리사가 스승인 엘리야보다 두 배 큰 영감, 두 배 강하고, 두 배 복 받고, 두 배 많은 기적을 행하기를 원했다. 그 방자한 제자에게 “하느님이 보게 허락하셔야 네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다.” 엘리야의 의도를 짐작하면 “네가 보는 그대로 될 것이다. 네가 가슴과 머리로 미래를 바라보면, 그 미래는 네 삶 속에서 현실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느님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영적인 눈’ 으로 무엇을 보는지에 깊은 관심을갖고 계신다. 그래서 성경에서 일곱 번이나 “무엇이 보이느냐?” 고 물으신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저 높은 하늘이 아닌 땅만 바라보는 인생은 점점 구렁텅이로 빠져든다. 결국 하느님이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를 통해 행하시려는 놀라운 일이 방해를 받는다. 우리는 마음으로 보는 곳을 향해 나아간다. 마음으로 보지 못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믿는 대로 된다, <긍정의 힘>에서

 
쌩떽쥐베리의 ‘어린 왕자’ 에서는 아주 귀하고 중요한 것은 ‘마음의 눈’ 으로 보아야 보인다고 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눈’ 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계시의 말씀인 빛으로 보아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과 거기에 서린 하느님의 뜻으로 참되게 보고 창조적 에너지를 받을 수 있다. 하느님이 만물을 다스림을 믿고 지금 이 순간 그 ‘믿음의 눈’ 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불가능하게 보이는 도전이 눈앞에 있어도 오늘은 상황이 바뀌리라 믿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부정적인 말은 입에 담지 말라. 마음에 기대하는 대로 행동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승리와 풍요로움, 축복과 희망을 생각하라. 긍정적이고 순수하고 멋진 생각을 품으라. 행복으로 가득한 미래를 보아야 한다. 마음으로 바라본 복은 반드시 우리를 찾아오게 되어 있다.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중요하지만 과거의 허물이 또는 옛 생각이 지금 이 순간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되겠다. 더 나은 내일을 향하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에 충직해야 하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 한다는 것은 희망의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지향하는 만큼 최선에 최선을 다하고 지금 이 순간의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옛 것에 매여 있지 말라’ 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지금 이 순간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인지를 마음 써야 합니다.

 껍데기에 치중한 삶이었다면 알맹이를 찾으라는 권고입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우리는 단식을 많이 하는데 왜 스승님의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는데 사실 단식은 그저 맹목적으로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단식을 하는 것은 밥을 굶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식할 합당할 이유가 있어서 단식을 하는 것. 그러니 단식을 한다고 자랑할 이유가 없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그분과 함께 기쁨을 나누면 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잔칫집에서는 함께 웃고 축하하는 것이요, 상가에서는 함께 울고 슬픔을 나누면 됩니다. 슬픈 일이 생기고, 새 삶의 시작을 위해서, 회개와 보속의 삶을 살기 위해서, 이웃과의 나눔을 위해서라면 단식을 할 필요가 있다. 단식을 통해 새 생활의 틀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에페4,22-23).고 권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단식은 흔히 말하는 다이어트와는 분명 다릅니다. 단식의 정신은 주님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새로워지는 것.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묵은 생각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으로 거듭나기를 기도합니다. 미래를 지향하는 풍요로운 마음으로 새 술을 새 부대에 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예고를 미처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분별없이 외적인 형식에 매여 단식을 논하였다. 형식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내용이 중요하고 지향하고 있는 바는 더 소중 합니다. 누구 마음에 들기 위해서 단식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좋겠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심판하신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세상의 악에 대해서 대답하신 말씀입니다. 많은 경우에 악에 대해서 하느님이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침묵 중에 계신 것 같다. 그러나 하느님은 말씀하시면서 응답하셨다. 그 응답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말씀은 사랑이요 자비이고 용서의 말씀입니다. 또한 그것은 심판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면서 심판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구원됩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그것을 거부한다면 저는 단죄 받게 되는데 이것은 그분에 의한 단죄가 아니라 나 자신이 내리는 단죄인 것.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랑하시며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2013년 3월 29일 콜로세오 십자가의 길에서 행한 연설)

  우리들에게 주어진 알맞은 십자가를 잘 안고 간다면,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평소에 원하던 선물을 주시겠지요. 믿습니다. 그 믿음으로 우리들이 원하는 것을 누리게 되는 주님의 평화가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할 수 있는 한 훌륭한 인생을 만들라. 인생은 짧고 곧 지나간다.'' - 오울디즈 -

♡2175회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8월 1일(사무엘하 1장~ )

  문용은은 ''많이 팔려면 먼저 많이 사 보라.''
《끊임없이 기도하라.》사막의 영성 지도자 루시우스는 다음과 같이 끊임없이 기도할 수 있다고 합니다. 밥을 먹고 잠을 잘 때도 기도할 수 있다. 내가 육체노동을 하면서도, 나는 하느님과 함께 앉아, 갈대를 물에 적셔 줄을 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느님의 선하심에 따라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따라, 저를 저의 죄에서 구원해 주십시오." "내가 온종일 일하고 기도하면서, 대체로 돈을 열세 푼 정도 버는데, 그 가운데 두 푼은 문밖에 두고 나머지 돈은 음식을 사는 데 지불합니다. 그 두 푼을 가져가는 사람은 내가 먹고 잘 때 나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은혜로, 나는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권면을 이루어 냅니다." -헨리 나웬, <사막의 영성>에

이 이야기는 ‘내가 다른 많은 일로 바쁜데 어떻게 끊임없이 기도할 수 있는가?’ 에 대한 실제적 대답을 제공합니다. 그 대답은 이웃을 포함합니다. 나의 자비를 통하여 내 이웃은 내 기도의 파트너가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참으로 기발한 그리스도적 발상입니다. 남에게 자비를 베풀어서 공덕을 쌓고, 이웃을 기도의 파트너로 삼으면 일거양득이 되고, 내가 밥 먹고 자는 동안이나 내가 업무상 겨를이 없을 때 내 대신 기도하는 동반자를 둔다는 것은 행복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성령이 내 안에 임재하시어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 26).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1,20-24)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 “예수님께 자비를 간청해서 원하는 대로 은총을 받은 사람들” 로 해석됩니다. 그 고을들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자비를 청하는 일이 많았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다른 고을들보다 더 많은 은총을 받게 된 고을들입니다. 그런데 그 고을 사람들은 은총을 받기만 하고 회개하지는 않았다. 예수님께서 어떤 특정 고을 사람들을 편애하신 것도 아니고, 다른 고을의 사람들보다 그 고을의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은총을 주신 다음에 그것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기를 바라신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회개하지 않았다는 말에는 예수님을 안 믿었다는 뜻도 들어 있고, 받은 은총에 응답하지 않았다는 뜻도 들어 있다. 그들은 청해서 받기만 하고, 받은 다음에는 고마워하지도 않고,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가버린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이름이 언급된 고을들은, 사실은 예수님을 안 믿고, 회개하지도 않은 유대인들을 상징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특정 고을 사람들만 꾸짖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을 안 믿고, 회개하지도 않은 유대인들을 꾸짖으셨다는 것.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은총을 받아도 받은 줄도 모르고 살면서 믿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오늘날의 사람들도 모두 꾸중의 대상에 포함된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예수님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심판과 처벌을 예고하시는 말씀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아니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지금이라도 회개해서’ 구원을 받으라는 호소입니다. 여기서 티로, 시돈, 소돔은, 하느님을 안 믿는, 또는 믿기를 거부한 이방인들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도시들을 언급하신 것은 그곳 사람들을 칭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다고 자랑하면서도 받은 은총에 응답하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것은 사실상 안 믿는 것과 같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심판 날에는... 견디기 쉬울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이 말씀은, 자기 탓이 아닌 이유로 하느님과 예수님을 모르고 살았던 사람들은 심판 때에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지만,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었고, 은총도 많이 받았던 사람들은 심판 때에 정상참작의 여지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안 믿는 사람들이 심판 때에 더 유리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심판 때에 더 유리한 쪽은 믿는 쪽입니다. 어떻게 해야 심판 때에 구원 선고를 받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알고 있다면 그대로 살면 되는데,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 마음대로 살면, 하느님과 예수님을 모르고 살았던 사람들보다 더 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유대인들의 오만함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오만함’은 카파르나움이 특히 더 심했지만, 카파르나움만의 문제는 아니었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의 문제였다. 자기들은 율법을 잘 알고 있고, 잘 지키고 있으니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유대인들의 오만이었다.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오만함’에 대한 벌로 지옥의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성경과 교리를 잘 알고 있다고 해서 하느님 나라에 더 쉽게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더 쉽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잘하는 사람이 더 쉽게 들어갑니다.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을 꾸짖으신 말씀과 다음 말씀이 비슷합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보라, 너희 집은 버려져 황폐해질 것.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때까지, 정녕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마태 23,37-39) 예수님은 심판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요한 3,17)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도 구원의 대상입니다.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을, 또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멸망을 향해서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을 잘 나타냅니다. 그 구원은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받게 됩니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때까지” “주님의 재림 때까지”이고, “정녕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버림받게 될 것이다.” 심판을 받고 완전히 버림받게 된다는 뜻은 아니고, 회개와 보속을 하라고 주어진 기회를 뜻합니다. 그래서 재림 전에 서둘러서 회개하라는 것이 이 말씀의 진짜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림하실 때에는 심판관으로서 오실 것. 그런데 재림의 날이 언제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회개는 ‘지금’ 해야 합니다. 재림 때에 심판관으로서 오신다고 해도,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뜻이 변하는 것은 아닐 것. 예수님께서는 어떻게든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려고 애쓰실 텐데, 사람들 쪽에서 회개하지도 않고, 구원받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경우가 있을 것. 그것은 구원하려는 예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기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제 내 믿음이 작다고 탓하지 말고, 기도의 씨앗으로, 말씀의 씨앗으로 성령의 능력을 입어 사랑하고 나누어주는 하늘나라의 신비로 살아가는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일을 쫓아라. 일에 쫓기지 말라.'' - 프랭클린 -


♡2176회 좋은 땅에 뿌려진 씨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당연한 것.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8월 2일(열왕기상 1장~ )

  라 브뤼에르는 ''좀 모자라는 사람은 말이 적은 바보일지 모르지만, 말 많은 바보보다는 낫다.''

《기도할 때 장식적인 말에 매달리지 마십시오.》사막의 영성 지도자들은 많은 말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존 클리마쿠스는 한층 더 명백합니다. 여러분은 기도할 때 장식적인 말로 여러분 자신을 표현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흔히 하늘에 계신 우리 성부께서 가장 물리치지 못하시는 것은 바로 한 어린아이의 단순하고 반복적인 문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지성이 말만 추구하다 경건과 혼동되지 않도록말, 말, 말에만 매달리지 마십시오. 세리의 말 한마디가 하느님의 자비를 얻기에 충분했다. 믿음에서 우러난 한 가지 겸허한 요청이 선한 도둑을 구원하기에 충분하였다. 기도 중에 말이 많다 보면, 종종 지성이 환상에 얽매여 분산되기 마련입니다. 외마디 말이라 할지라도 그 본성상 지성을 구체화하는 경향이 있다. 여러분이 기도하다가 어떤 말 속에서 만족이나 양심의 가책을 발견하면, 바로 그 지점에서 멈추십시오. -헨리 나웬, <사막의 영성>에서- 

사막의 수도자들처럼 우리가 어떻게 고독과 침묵의 자리에서 기도를 할 수 있을까요? 하루에 두 번, 이십 분 정도 시간을 내어 규칙적으로 침묵의 기도인 마음의 기도를 할 수 있다. 

마음의 기도에 관한 세 가지 특징이 있다. 그것들이 우리가 이런 수련을 공식화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마음의 기도는 짧고 간단한 기도들로 양육됩니다. 마음의 기도는 끊임없어야 합니다. 마음의 기도는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사막 영성지도자인 마카리우스가 말합니다. “긴 이야기를 할 필요가 전혀 없소. 자기의 손을 뻗쳐 ‘주님, 주님께서는 아시는 대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고 말하면 되지. 그리고 만일 갈등이 더 심하게 자라나면, ‘주님, 도와 주십시오.’ 라고 말하시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주 잘 알고 계시기에 우리에게 자비를 보여 주신다오.” 몇 개의 작은 화분을 한 바구니에 담았다. 보기는 좋은데 물을 좋아하는 화초가 있고 물을 싫어하는 화초가 있다. 햇빛을 좋아하는 화초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서로 다른 성질의 것을 한 바구니에 담았더니 관리가 쉽지 않습니다. 힘이 없어 보이는 화초가 있어 물을 주고 강한 햇빛을 가려 주면 옆에 있는 화초가 힘들어 합니다. 옆에 있는 화초를 위해 햇빛에 내 놓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조화를 이룬 겉모양은 아름답고 좋은데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너무도 다를 수 있다.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서로의 성격과 취향이 같지 않아서 힘들어 할 때가 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로 자기 기준에 맞춰주기를 바랍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편하게 내 방법을 선택하면 상대방이 그만큼 양보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내 입맛에 맞으면 최고요, 내 스타일에 맞지 않으면 모두가 잘못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겉모양은 모두가 멋진데 속을 보면 멀미나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이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정말 다양성 안에 일치를 이룬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성령께서는 다양성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합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당연한 것. 그런데 백배가 될 수도 있고 예순 배, 서른 배가 될 수도 있다. 좋은 땅에서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서 열매가 달라집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개별적으로 보면 우리 마음의 밭이 다 좋은 땅인데 열매를 맺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그것은 마음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다. 지금 이 순간 같은 말씀을 들어도 듣는 사람 마음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집니다. 말씀을 듣고 힘써 그대로 행하는 사람만이 진짜로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히브4,12) 하고 말했다. 속을 꿰뚫어 보시는 분 앞에서 거저 얻으려 하니 부끄럽다. 좋은 열매를 기대하면서도 그만한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결과는 너무도 뻔합니다. 수고와 땀을 남에게 미루지 말고 서로의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서 풍성한 열매를 맺길 기도합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커가고 그 사랑이 이웃으로 향할 때 비로소 열매가 생성되는 것.

 포도원지기가 “주인님, 이 나무를 금년 한 해만 더 그냥 두십시오.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루가13,8) 하였듯이 다른 이에게 거름을 주는 포도원지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말씀이 길에 떨어졌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해도 세상의 생활방식과 가치관에 사로잡혀 그 말씀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이 밥 먹여 주느냐?’ 하는 태도입니다.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처음에는 말씀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만 시련이 오면 말씀에 의지하기보다 세상 것들에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수능이 가까워 오면 점집을 간다든지, 혼사를 앞두고 용하다는 사람을 찾아가 사주팔자를 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경우는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여러 가지 욕심 때문에 말씀을 따르려는 생각을 뒤덮어 버립니다. 한편으로 가시덤불은 상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세상의 오만가지 근심걱정, 과거의 상처와 모욕으로 자신 안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열매를 맺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들은 말씀을 최우선으로 받아들이고 삶의 기반과 지침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살아가면서 말씀을 더욱더 깊이 깨닫게 되고 모든 것을 얻게 됩니다. 말씀을 새기고 행하는 만큼 주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야말로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르425)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으로 찬미 받으소서(욥기 1,21).”라고 고백한 욥의 말씀을 기억하시고 우리들에게 어떤 일이 닥쳐 흔들리더라도 하느님께서 우리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회복시켜주심을 믿는 은총의 사람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큰 부자에게는 아들은 없다. 다만 상속인만이 있을 따름이다.'' - 유태 격언 -


♡2178회 믿음 없는 지식은 구원받는 일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8월 4일(열왕기하 5장~ )

  찰스 케터링은 ''날마다 하던 방식대로 하고 있다면 그건 확실히 잘못된 것이다.''

  대나무가 반듯하기 위해 마디마디가 있듯이 마치 대나무가 반듯하게 자라기 위해서 줄기 중간중간을 끊어 맥을 잇듯이 활동 후에는 반드시 기도로 영적인 맥을 이어줄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기도는 우리가 어디로 가고, 어떤 일을 하고,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 준다. 나아가 기도는 하느님의 힘을 받는 자리이다. 세상에서 하는 우리의 봉사는 우리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 사도는 “봉사하는 이는 하느님께서 주신 힘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1베드 4, 11)라고 했다. 만일 우리가 기도에서 하느님의 힘을 받지 못하고 우리 힘만으로 활동하려 한다면 그 힘은 금방 소진될 것. 다음은 마더 데레사가 동료 수녀님들께 한 말이다. “만일 우리가 일을 멈추고 기도 시간을 갖지 않는다면 할 일은 언제나 여기에 남아 있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 한복판에서 그분과 함께>- 

하느님께 우리가 올곧은 이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삶의 현장에서 막간을 이용하여 마디마디 기도가 이어져야 한다는 것. 죽순의 빠른 성장으로 연약한 대나무가 올곧게 하늘로 뻗어 오르기 위해서는 마디마디가 받쳐주기에 굽지 않고 튼실하게 반듯이 설 수가 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7) 아버지께서 ‘모든 것’ 을 예수님께 넘겨주셨다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모든 권한’ 을 예수님께 넘겨주셨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 이 권한은, 일차적으로 사람들을 구원할 권한과 구원하지 않을 권한입니다. 지금 이 순간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모든 것’ 이라는 말을 ‘모든 사람’ 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래도 뜻은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과 완전히 일치되어 있다.” 이 말씀에는, 예수님의 권한 행사는 하느님의 권한 행사이기도 하다는 뜻도 들어 있다. 하느님께서 모든 권한을 예수님께 넘겨주신 다음에 예수님과 떨어져서 따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을 예수님과 함께 하신다는 것. 또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만이 예수님을 아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진정한 신원은 ‘하느님의 신비 영역’ 에 속한 것이라는 뜻이고, 이 말은 곧 ‘예수님은 하느님’ 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예수님을 온전히 알기를 바란다면, 우선 먼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어야 합니다. “아들 외에는, ......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완전히 일치되어 있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다르지 않다는 뜻도 들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일하십니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요한 5,19)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요한 8,29)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히브 1,3)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형상이신 분” 입니다.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예수님은 하느님께 도달하는 유일한 길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만이 구원받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고, 또 그것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책을 다 읽고 공부해도, 그래서 뛰어난 학자가 되어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믿음 없는 지식은 구원받는 일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성경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는데, 성경을 전부 다 외워서 자유자재로 인용할 수 있다고 해도, 예수님을 안 믿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한평생 명상을 하고, 수행을 해서 어떤 높은 경지에 도달한다고 해도 예수님을 안 믿으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5-26) 여기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 은 자기 자신이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자들, 즉 세속적으로 성공하고 출세한 자들로 해석할 수 있다. 또는 자신의 지식과 능력에 대해서 잘난 체 하는 오만한 자들로 해석할 수 있다. ‘철부지들’ 은 가진 것 없고 힘없는 사람들, 사회적으로 보잘것없는 사람들, 겸손하게 하느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루카복음 16장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에 나오는 부자를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자’ 로, 라자로를 ‘철부지’ 로 생각할 수 있다. 그 부자가 사는 모습을 보면, 그는 분명 세속적으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루카 16,19) 그는 자신의 출세와 성공에 만족하면서, 자신의 성공한 인생을 즐겼을 것. 그러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난 체 했을 것이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비웃었을 것. 그는 아쉬운 것 없이 살고 있었으니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청하는 기도는 하지 않았을 텐데, 그러면 자기가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해서 감사기도는 드렸을까? 어쩌면 감사기도는 드렸을지도 모르는데, 그 기도는 ‘진심으로’ 바치는 기도가 아니라 ‘잘난 체’ 였을 것. 아마도 그 부자는 자기 집 대문 앞에 누워 있는 라자로에게 ‘먹고 남은 음식 부스러기’ 를 가끔씩 던져 주었던 것 같습니다.(루카 16,21) 그렇게 하면서 그는 자기가 ‘이웃 사랑 실천’ 을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는 자기에게는 회개할 죄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고, 그래서 회개할 생각은 아예 없었던 것 같다. 예수님의 기도에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하느님께서 잘난 체 하는 자들을 구원하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자들이 회개하지도 않고, 구원받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인간의 세상에서는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이 하느님 앞에서는 소외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감사드린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 부자 같은 사람들도 회개하고, 재산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하고,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르게 살면 구원받을 수 있다. 라자로 같은 사람들도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면서 부자들에 대한 복수심에 가득 차 있고, 물질적인 탐욕에 사로잡혀 있다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기도에 대하여 많이 아는 것 보다,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함을 깨닫고 멋진 기도 인생을 시작하는 은총으로 주님 안에서 희망을 꿈꾸는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인생은 실수를 저지르고 실수를 고쳐나가는 과정이다.'' - 요나스 서크 -


♡2179회 “주 예수 그리스도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8월 5일(열왕기하 18장~ )

  ''위대함에는 신비성이 필요하다. 너무 알면 사람들은 존경하지 않는다.'' - 드골 -

《입술에서 마음으로(예수 기도)》<순례자의 길> 이라는 이야기에서 러시아 농부는 “끊임없이 기도하라.” (1테살 5, 17)는 말씀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를 두고 여러 영적 지도자들을 찾아다니던 중에 거룩한 지도자는 농부에게 다음과 같은 ‘예수 기도(Jesus Prayer)’ 를 가르쳐 주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순례자로서 러시아를 죽 여행하는 동안 농부는 이 기도를 자기 입술로 수천 번도 더 반복합니다. 그는 ‘예수 기도’ 를 자기의 참 동반자라고까지 여깁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그는 그 기도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입술에서 자신의 마음으로 옮겨지는 느낌을 갖습니다. 다음은 그가 한 말입니다. “....끊임없이 고동치고 있던 내 마음이 마치 맥박이 뛸 때마다 그 안에서 ‘예수 기도’ 에 관한 말들을 하기 시작하는 것 같았어요... 나는 내 입술로 ‘예수 기도’ 를 드리는 걸 포기해 버렸지요. 단지 내 마음이 뭐라고 말하는지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듣고만 있었습니다. -헨리 나웬, <사막의 영성>- 

‘예수 기도’ 는 내가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육체노동에 집중할 때조차도 내 안에서 계속해서 드려집니다기도는 내 인생 여정 동안 날 이끄시는 하느님이 성령께서 적극적으로 임재하시는 채널이 되었다. ‘예수 기도’ 를 수천만 번 바치면, 마치 자동차에 시동을 켜면 엔진이 혼자서 자동으로 계속 돌아가듯이 ‘주 예수 그리스도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고 일할 때나 잠자기 전에 ‘예수 기도’ 를 하여 시동을 걸면 잠자는 동안에도 숨결이 자동으로 기도함을 느끼게 될 것. 하늘 나라에도 좋은 자리 나쁜 자리가 있을까요? 하늘 나라 자리는 다 좋을 것. 그래도 더 좋은 자리가 있고 덜 좋은 자리는 있다.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도 있고 작은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는 주님의 계명을 얼마나 충실히 따랐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아주 작은 계명 하나라도 어기도록 가르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취급을 받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라고 청합니다. 이는 분명 하늘 나라에서 주님과 가까운 자리가 있고 먼 자리가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 비롯된 청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에 들어오면 똑같이 행복할 것이라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분명 차이는 있다. 당신의 잔을 얼마나 마시느냐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당신이 메어주시는 멍에를 얼마나 충실히 메고 순종했느냐에 따라 하느님 나라에서의 위치가 결정됩니다. 만약 다 마시지 못한 잔이 있다면 어쩌면 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영원히 헤매야 할 수도 있다. 

영화 ‘디스커버리’(2017)는 사후세계를 다루었다. 한 과학자가 사후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해 낸 것. 이 발견(디스커버리)은 전 세계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킵니다. 수백만 명이 자살을 시도한 것. 이런 혼란 속에서도 과학자는 연구를 계속합니다. 사후세계가 있다는 것은 증명해 냈지만, 사후세계가 어떠한 모습인지는 증명해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영안실에 있는 시체를 훔쳐서 그의 머릿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영상으로 출력하려 하였다. 그 시체의 머릿속에서는 차를 달려 어떤 병원에 도착한 자신의 모습이 영상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것이 과거의 기억인지 저승 세계에서 체험하는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 그 사람의 인적사항을 조사해 그의 어머니를 찾아갔다. 그의 어머니는 그 시체가 병원에서 보고 있었던 여인이었다. 과거의 기억을 회상하고 있었던 것. 그런데 그 여인은 시체의 머릿속에 있는 기억과 정반대의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놈은 어머니가 병들고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도 병원에 찾아오지 않았어요. 부모를 버리고 도망친 놈입니다. 만약 그 애가 병원에 찾아왔었다고 말했다면 그것은 거짓말이에요.” 시체는 사후세계에서 헛된 꿈을 꾸고 있었던 것. 박사가 이것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자신이 죽음 직전까지 가서 자신의 뇌를 영상으로 촬영하였다. 

그랬더니 역시 아내가 자살하던 날 자상한 남편이 되어 아내와 함께 있어 주는 장면이 찍혔다. 사후세계는 결국 이 세상에서 가장 후회스러웠던 일에 갇혀 그것을 되돌려 놓으려는 안타까움만 가득한 곳이었다. 지옥이란 바로 그 후회스럽고 용서받지 못한 기억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 예수님은 이 기억을 지워주시기 위해 우리가 내미는 쓰디쓴 잔을 마시셨다. 일반 대학교 다닐 때 술을 마시지 않는 자매에게 건배를 권하며 “사랑하는 만큼 마시기!” 라고 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자매는 잘 마시지 못하는 술을 벌컥벌컥 다 마셔버렸다. 그리고는 다 마셨다는 뜻으로 자신의 머리 위에 술잔을 뒤집었다. 그리고는 놀라서 아직 마시지 못하고 있는 저의 술잔을 응시하였다. 저도 기쁜 마음에 술잔을 단숨에 들이키고 머리에 부었다. 사랑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그 잔에 조금이라도 술이 남으면 그만큼 관계가 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이것과 같을 것. 우리 각자는 상대가 따라준 쓰디쓴 술잔을 쥐고 있다. 그 잔은 처음엔 쓰지만, 끝은 달콤합니다. 마시기 싫어도 상대가 주는 잔을 마실 수 있다면 관계가 좋아지는 것. 예수님은 우리가 드리는 잔을 다 마시셨다. 우리를 절대 죄책감의 굴레에 빠져있지 않게 하셨다. 그리고 당신이 우리 각자에게 잔을 내밀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만큼 마시면 됩니다. 마시고 남은 양만큼 하늘나라에서 그분과 멀리 떨어져 살게 될 것.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내미는 잔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잔은 평생 그 잔을 마시는 것에만 집중해도 남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최대한 후회스럽지 않게 죽음을 맞으려면, 하나도 남기지 않을 마음으로 최대한 많이 마시고 그분 앞에서 머리에 술잔을 부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로 강해지고, 하느님은 저희의 기도를 들으시고 마음이 약해지십니다.” 우리들 모두가 주님의 말씀을 담고 눈 맞춤으로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은총을 충만히 받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남의 생활과 비교하지 말고 네 자신의 생활을 즐겨라.'' - 콩도르세 -


♡2180회 유혹을 이겨내는 가장 좋은 길은 기도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8월 6일(열왕기하 23장~ )

  페르시아속담에 ''피는 피로써 씻을 수 없다.''
 《우리의 미래는 기도에 달려있다.》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덕을 쌓은 사람들도 가끔씩 자신이 대죄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의 은총을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상당 기간 동안 은총으로 견고해진 인간의 의지가 어느 순간 완전히 변해 대죄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죄를 짓는것은 윤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대죄는 무시무시한 괴물과 같아서 설사 그 괴물이 자신을 오랫동안 미워해 온 영혼 안으로 들어간다 해도 그 영혼은 금방 알아챕니다 . 그 누구도 모르는 채 죄를 범할 수는 없다. 다음 내용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합시다. 유혹을 이겨내는 가장 좋은 길은 기도입니다. 유혹이 찾아들 때 기도를 중단해서는 안 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첫 번째 기도가 아니라, 두 번째, 세 번째 또는, 네 번째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완덕과 항구함과 영원한 구원과 함께
우리의 미래는 기도에 달려 있다. -알퐁소 성인의 사랑의 기쁨 중에서- 

예수님께서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자를 고쳐 주시고, 또 어떤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리신 이야기는, “예수님은 생명을 주관하시는 ‘생명의 주님’ 이신 분” 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간절하게 기도하면 누구든지 불치병을 고칠 수 있다.” 같은 식으로 해석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믿음과 간절한 기도는 중요한 일이고 또 필요한 일이지만, 주님이신 분의 주권을 침해할 정도로 ‘결과를 강요하는’ 것과 같은 기도는 올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자비를 믿고 겸손하게 청하면서, 결과는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바라던 결과를 얻지 못해도 실망하지 말고, 주님의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마태 9,20-22) 이 이야기에서 가장 먼저 강조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옷자락 술’ 이 여자의 병을 고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여자의 병을 고쳐 주셨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그 당시에 예수님의 ‘옷자락 술’ 만 만져도 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던 것 같고(마르 6,56), 이야기 속의 여자도 그 소문을 들었을 텐데, 여자가 예수님 앞에 나서지 못하고 옷자락 술을 만지려고 한 것은 그 소문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앓고 있는 병의 성격 때문입니다. 자신의 병을 공개적으로 밝힐 수 없어서 예수님 앞에 나서지 못한 것인데, 어떻든 여자는 예수님의 ‘옷자락 술’ 을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었다. 만일에 예수님은 믿지 않고 예수님의 옷자락 술만 믿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믿음이고, 미신입니다. 이야기에 ‘구원’ 이라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여자가 생각한 ‘구원’ 은 ‘병의 치유’ 였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구원’ 은 병의 치유와 영혼의 구원을 모두 뜻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여자의 치유를 확인해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이제부터는 영혼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라고 격려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표현만 보고서 이 말씀을 “믿기만 하면 병이 낫는다.”, 또는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 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병을 고친 것은 여자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비입니다. 믿음’ 은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에 대한 응답입니다. 여자의 믿음과 예수님의 자비와 병의 치유 가운데에서 무엇이 가장 먼저 있었던 일이고, 무엇이 가장 나중에 있었던 일인가? 를 따지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셨다."(마태 9,18-19)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시어 피리를 부는 이들과 소란을 피우는 군중을 보시고,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군중이 쫓겨난 뒤에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마태 9,23-25) 

‘생명의 주님’ 이신 예수님의 권능에 초점을 맞추면, 두 이야기는 모두 예수님 덕분에 죽음에서 생명을 얻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생명, 참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자는 실제로 죽은 것은 아니지만,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죽은 것과 다르지 않은 심정으로 살고 있었을 것. 그랬었는데 예수님 덕분에 병을 고친 일은 새 생명을 얻은 것과 같았을 것. 회당장의 경우도, 딸의 죽음 때문에 죽고 싶은 심정이 되었을 것. 그랬다가 딸이 살아난 뒤에는 회당장 자신도 다시 살아난 것과 같았을 것. 사람들의 ‘절망’ 에 초점을 맞추면, 두 이야기는 모두 예수님 덕분에 절망에서 해방되어서 ‘참 기쁨’ 을 얻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절망에서 해방시켜서, 우리에게 참 기쁨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 희망은 이미 이루어진 것과 같은, 틀림없이 이루어질 희망이기 때문에 우리는 미리 기뻐할 수 있다. 그 기쁨은 세속의 즐거움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참 기쁨’ 입니다. 여자는 죽음과 같은 절망 속에서 살다가 예수님 덕분에 해방되었다. 죽었다가 살아난 소녀의 심정은 알 수 없다. 소녀의 아버지인 회당장의 경우는 여자의 경우와 거의 같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깊은 절망에 빠졌다가 예수님의 은총으로 해방되었고, 참 기쁨을 얻었다. 소녀만 은총을 받은 것이 아니라 소녀의 아버지도 은총을 받았고, 사실은 그가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입니다.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죽음’ 은 ‘긴 잠’ 과 같은 것일 뿐이며 ‘끝’ 이 아니라는 가르침이기도 하고, 마치 잠든 사람을 깨우는 것처럼 이제 당신이 소녀를 살리겠다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당신이 생명과 죽음에 대한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드러내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원하시면 누구라도 죽음에서 살리실 수 있는 분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누구라도 영원히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절망에 빠져 있는 병자들과 병자의 가족들이 많이 있다. ‘병고’ 는 인간을 가장 괴롭히는 고통입니다. 인간의 의술이 많이 발전했다고 하지만, 아직도 의술로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 많이 있고, 살고 죽는 일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누구는 병에 걸리고 누구는 건강하게 사는 것을 보면서, 또 누구는 간절하게 기도해서 치유의 기적을 얻고 누구는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을 얻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불공평하다고 느끼거나,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없다고 불평할 때가 많다. 위대한 바오로 사도도 평생 병고에 시달렸는데, 그 병에서 해방시켜 달라고 간청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 청을 거절하셨습니다.(2코린 12,7-9) 그런 일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이 모든 고통들이 다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는 것, 우리의 목적지는 변함이 없다는 것, 남들보다 더 큰 고통을 겪고 있어도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희망을 버리지 말고, 인내해야 한다는 것, 십자가는 십자가로 끝나지 않고 영광과 생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 지금 건강하다면 자만심에 빠지지 말고 병자들에게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잠깐 멈추어 서서 주님의 이름으로 부르고, 주님의 자비의 손길을 느껴보시면서 우리들의 삶에 영적인 힘과 은총을 얻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용기가 없으면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 - 괴테 -


♡2181회 장벽은 바로 마음에 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8월 7일(역대기상 6장~ )

독일속담에 ''쓴맛을 모르는 자는 단맛도 모른다.''

《마음으로 믿지 않으면 꿈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기 마음에 있는 장벽은 누구도 깨뜨리지 못한다. 어떤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절대 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가장 무서운 적은 마음에 있는 셈이다. 마음속에서 패한 사람은 현실에서도 여지없이 패한다. ‘마음으로 믿지 않으면 꿈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스스로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새로운 지평을 여는 일은헛된 꿈이 되어 버린다. 장벽은 바로 마음에 있다. 성경은 이 장벽을 ‘견고한 진’ 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패배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은 그릇된 생각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희망과 믿음, 승리 같은 긍정적인 것들을 마음에 품는 일이 중요하다.  -믿는 대로 된다, <긍정의 힘>-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각자의 운영체계에 의해 움직입니다. 기러기는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먼 곳을 여행하고 꿀벌은 꿀을 찾으며 개미는 여왕을 위해 일합니다. 각자의 운영체계에서 벗어나면 모든 생물은 생존의 위험에 직면하게 됩니다. 인간도 처음에는 이 생존체계에 의해 움직입니다. 그 생존체계가 강하게 나를 지배할수록 인간관계가 힘들어집니다. 인간관계가 힘들어지면 행복이 깨집니다. 모든 행복은 관계에서 옵니다. 우선은 인간의 이전 자기운영 체계를 벗어던져야 함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식 폴더폰만을 고집한다면 스마트폰의 체계를 사용할 수 없다. 이유식만 먹으려 한다면 맛있는 음식은 맛볼 수 없다. 이전 체계의 불편함을 알아야 새로운 체계를 받아들일 수 있다

. 한 예를 들어보겠다.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사람이 더 행복할까요, 아니면 동메달을 딴 사람이 더 행복할까요? 미국 코넬 대학교 심리학과 연구팀은 1992년 하계 올림픽 중계권을 가졌던 NBC의 중계자료를 분석했다. 메달리스트들이 게임 종료 직전에 어떤 표정을 짓는지 감정을 분석하는 연구였다. 분석이 가능했던 23명의 은메달리스트와 18명의 동메달리스트 표정을 보고 결정적인 순간에 이들의 얼굴이 비통에 가까운지, 환희에 가까운지 10점 만점으로 평점하게 하였다. 또한, 시상식에서 선수들이 겪는 감정을 분석했다. 분석결과 동메달리스트의 행복점수는 10점 만점의 7.1로 나타났다. 은메달리스트의 행복점수는 4.8이었다. 연구팀은 한발 더 나아가 은메달리스트와 동메달리스트의 인터뷰 내용도 분석하였다. 분석결과를 보면 동메달리스트의 인터뷰에서는 만족감이 더 많이 표출되었고, 은메달리스트의 인터뷰에서는 ‘아쉽다’ 라는 표현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왜 은메달리스트가 동메달리스트보다 덜 만족하는 결과가 나오는 것일까요? 바로 나를 지배하는 시스템 때문입니다. 이 자아라는 시스템은 ‘비교’ 를 좋아합니다. 남과 비교하게 만들어야 인간을 더 자신의 노예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은메달리스트는 금메달리스트와 자신을 비교하고, 동메달리스트는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들과 자신을 비교합니다. 우리는 이런 어리석은 시스템에 지배받으면서도 그것이 행복인 것처럼 당연히 지배당하며 살아갑니다. ‘나’ 중심적 시스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온전한 인간관계를 할 수 없다. 인간관계가 잘 되려면 상대를 이해해주고 배려해주어야 하는데 ‘나’ 라는 시스템은 자기 우선으로 생각하게 만들기에 이기적 인간이 되게 합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심리학과에서는 이런 실험을 하였다. 대학생 두 명을 한 조로 짝지어서 한 명에게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려서 어떤 노래를 연주하게 하고 다른 학생은 그 연주가 끝나면 그 노래 제목을 맞추게 한 것. 노래를 손가락만을 두드려서 연주한 학생에게 연주가 끝난 후 상대가 자신이 연주한 노래의 제목을 알아맞힐 확률을 적게 했다. 그랬더니 평균 50% 이상은 알아맞힐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들은 사람이 제목을 알아맞힌 결과는 2.5%였다. 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참조: ‘프레임’, 최인철, 유튜브 채널 ‘책한민국’] 나를 지배하는 자기라는 시스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직 생존만을 위한 시스템이기 때문에 나를 모기로 만듭니다. 나를 살게 하도록 이웃의 피를 빠는 존재가 되게 하는 것. 예수님은 이 시스템에서 우리를 해방하기 위해 오셨다. 

그 방법은 무엇일까요? 아주 단순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우선 이전의 시스템이 고생스럽고 무거운 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아를 나로 믿어버렸기 때문에 그 시스템에 지배를 받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다른 시스템에 지배를 받는 것. 소가 주인이 없다면 잡아먹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멍에를 매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임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면, 우리도 그렇다. 그분이 내 안에 들어와 사시고 곧 나의 나가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으면 베드로처럼 물 위를 걷는 시스템을 장착하게 됩니다. 마음을 온유하고 겸손하게 갖기 위해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가 나 자신이라고 믿었듯이 내가 그리스도라고 믿어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단순히 그리스도인이 된 것뿐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이 된 것을 기뻐하고 감사드립시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로 보내 주신 이 은혜를 이해하십니까- 놀라고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 사실 그분은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이기 때문에 그분과 우리는 온전히 한 인간입니다.” 어떤 나라들의 장기기증 비율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평균 60%나 높습니다. 그 이유는 그 나라의 시스템은 장기기증을 하는 시스템이고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지 않겠다고 신청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다른 나라들은 하지 않는 시스템이고 하고 싶다면 신청해야 합니다. 그래서 장기기증 신청을 받는 나라들은 20%가 장기기증을 한다면, 하기 싫은 사람이 신청하는 나라는 80%가 되는 것. 각 나라에 사는 사람은 그 나라의 시스템 때문에 특별한 노력도 없이 이웃에게 자신의 장기를 내어주는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내가 어느 나라 시민인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나라고 믿는 사람과 내가 그리스도라고 믿고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멍에로 메었다고 믿는 사람과는 천지 차이가 납니다. 그분은 이제부터 뱀인 자아가 나가 아니고 당신이 나임을 믿게 하시기 위해 살과 피로 우리 안에 들어오셨다. ‘나’ 라는 멍청한 자아의 운영체계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나는 나다’ 라며 오시는 그분이 진정한 나요, 나의 운영체계임을 믿는 것뿐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이미 바뀌었다. 믿고 사용하기만 하면 안식을 얻으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이제 끝이라고 해도 예수님께서 은총주시면 이제 시작이다.”라는 마음으로 치유 받고, 바라는 일들이 이루어지는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역경이 닥치기 전에는 자신의 능력을 모른다.'' - 벤 존슨 -

♡2182회 나는 누구인지를 아는 것. 유명해지기 보다는 위대한 사람이 되라는 것.  - 항상 옳은 일을 하라는 겁니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8월 8일(역대기하 16장~ )

  장 파울은 ''대문자만으로 인쇄된 책은 읽기 힘들다. 일요일밖에 없는 인생도 그것과 마찬가지이다.''
《하느님으로부터 간택받은 사람》나의 마음은 사랑의 깊은 못이며 자비의 깊은 못이다. 나는 알고 있다. 아무리 복을 많이 타고난 영혼일지라도 예외 없이 각자의 어려움과 고통이 있다는 것을 나는 이들의 보잘것없는 행실도 세상을 구원하려는 나의 사랑과 자비의 못에 적셔 주고 싶다. 너희 모두가 다 멀리 미지의 세계로 진출하여 나의 복음을 전파할 수는 없다. 그러나 너희 모두는 나의 마음을 사람들에게
알려 나를 사랑하게 만들수가 있다. 그리고 너희는 서로서로 도와 하느님으로부터 간택받은 사람들의 수를 배가시켜야 많은 영혼들을 멸망의 길에서 구출할 수가 있다. 나의 사랑과 자비의 효험으로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구할 수 있다. 내가 지시하는 대로 그대로 이행하여라. 나의 마음이 선택한 너희들은 사랑과 희생으로 내 은총을 세상에 부어 많은 영혼을 죄악으로 구출할 책무가 있다. 정말 이 세상에는 온갖 위험과 죄악이 득실거리고 있다. 죄악에 얽매어 너희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느냐? 다시 한번 당부하겠다. 선택받은 너희 영혼들이 하루 일상생활을 무익하게 보내면, 너희 자신이나 다른 영혼들에게 얼마나 큰 손실을 가져오게 되는지 아느냐? 매일 노력하고 매일 실천해야 비로소 너희들의 아름다운 생명이 은총으로 충만해질 수 있다. 그러니 아무리 너희 생활이 불완전하다 할지라도 모두 나에게 바쳐라. 내가 얼마나 간절하게 너희들을 부르고 있는지 아느냐? 나에게는 영광이 되고 너희에게는 유익이 되게 하려고, 너희들의 하루하루를 다 나에게 바치라는 것. 간절한 나의 말을 지금 이 순간 알아듣는 자도 많지만, 알아듣지 못하는 자도 많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오프라 윈프리는 인생에 있어서 필요한 3가지를 이야기하였다. 공감이 가기에 함께 나누고 싶다. 오프라 윈프리의 말은 이집트 신화에서 죽음의 강을 건너는 사람에게 저승의 사자가 하는 질문과 비슷합니다. 첫째, 나는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아는 것. 하느님의 자녀임을 알았다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ㅣ. 둘째, 유명해지기 보다는 위대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유명해지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집니다. 위대한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빛이 납니다. 누구나 위대해 질 수 있다. 자신의 재능으로 봉사하면 됩니다. 셋째, 항상 옳은 일을 하라는 겁니다. 단순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옳은 일을 하는 것은 때로 십자가를 지는 것. 옳은 일을 하는 것은 때로 고난의 길을 가는 것.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옳은 일을 충실하게 한 사람은 영광의 세계,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것이라고 하셨다. 가톨릭 교리는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하느님을 믿고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만들어주신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사용합니다. 하느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버릴 수 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장수보다 단명을 택할 수도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셨다. 이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면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가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과 말씀이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셨음을 믿는 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솔로몬은 하느님께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은총을 청하였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면 옳고 그름을 식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면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면 시련의 때가 와도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셨다. 지혜는 자동차를 운전하는 키와 같다. 지혜는 문을 열고 들어가는 열쇠와 같다. 지혜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같다. 지혜는 바다에서 건져 올린 진주와 같다. 세상의 부귀와 영화, 권력과 영화는 지혜를 따라오는 부산물과 같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는 항상 겸손과 함께 있다. 겸손을 잃어버린 지혜는 바벨탑이 되기도 합니다. 겸손을 잃어버린 지혜는 손잡이 없는 날카로운 칼과 같다. 겸손이 없는 지혜는 줄 떨어진 연과 같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다. 그리하여 그 아드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다.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다.” 우리는 병 때문에, 돈 때문에, 욕심 때문에, 나이가 많기 때문에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다. 그러나 진정 지혜로운 사람은 사랑을 하다가, 가진 것을 나누다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다가 이 세상을 떠나는 것.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떠밀려 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이라는 바다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 여름이 긴 것 같지만 가을이 멀지 않았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의 인생이 끝없이 긴 것 같지만 어느새 귀밑머리는 하얗게 변하고 해가 서산에 걸린다는 것을 우리는 또한 알고 있다. 더 늦기 전에 가장 소중한 것을 찾을 수 있는 지혜를 하느님께 청하면 좋겠다. 그토록 소중한 것을 찾았으면 잘 간직하고 지켜내야겠습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우리들은 예수님 편에선 필요한 열두 번째 제자이기 때문에 기도하십시오. 우리들이 성령의 은총을 청하면 주님께서 놀라운 권능으로 세상의 온갖 축복을 내려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행복은 지배하여야 하고 불행은 극복해야 한다.'' - 러시아 속담 -

💖성령봉사자 박재만 세례자요한 010 - 3878 - 6634
  (수필가ㆍ전국성령쇄신봉사자협의회 말씀추천강사)
💖성령봉사자 류태숙 M.막달레나 010 - 6560 - 7354
  (시인ㆍ수필가ㆍ꽃예술설화중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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