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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은혜/사순시기

<사순 제3주일>(3.3) '성전 정화!'


<사순 제3주일>(3.3)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2,19) 

'성전 정화!'

오늘 복음(요한2,13-25)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말씀'입니다. 성전이 장사하는 집으로 변해버린 것에 대해 대단한 분노를 드러내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2,16)

성전(성당)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다시 부활하는 곳입니다. 성전이 이런 의미를 지닌 곳이기 때문에 성전의 문은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권고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문이 열려 있는 아버지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개방성을 보여 주는 하나의 구체적인 표시가 바로 모든 성당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47항)

예수님께서 분노하시면서 성전을 정화하시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요한2,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2,19)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성전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합니다.

건물로서의 성전이 예수님의 몸인 성전으로 바뀝니다.
나아가 이 성전은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과 마음으로 확장됩니다.

'하느님의 성전'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3,16.17) 

사순시기는 하느님의 힘이신,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그 너머에 있는 파스카 축제인 주님부활을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사순시기는 은혜로운 회개의 때이며, 단식과 기도와 자선으로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시기입니다.

(~ 요한묵시록 1,8)

마산교구 합천본당 이병우 루카 신부 
3월3일 사순 제3주일


더 큰 사랑을 실천하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보편적인 교회 건설!

부끄럽고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예수님의 성전 정화 작업을 묵상합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남의 말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에둘러 표현하지 않으시고 단도직입적으로,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상거래는 하느님의 집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원래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 백성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 지도자들이 상인들과 결탁하여 뒷돈을 챙기면서, 성전에서의 상거래를 허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전은 급격히 훼손되고 속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대사제들과 사제 가문의 귀족들은 성전 경내에서 이루어지던 매매에서 큰 이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대사제는 유다 최고 의회인 산헤드린의 의장으로서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나름 확고한 위치와 권력을 지닌 존재였습니다.

최고 의회는 사제 가문의 가족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일반 귀족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니, 당대 나름 잘 나가던 사람들의 집합소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당시 물 좋은 장소, 막대한 목돈이 오고 가던 장소였던 성전에서의 상거래와 뒷돈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놓을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잔뜩 돈독이 올라있던 그들이 최상의 수입원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을 깡그리 무시하고 모독하는 예수님의 모습에 부들부들 온몸을 떨었으며, 바득바득 이를 갈았을 것입니다. 마침내 더이상 예수님을 그냥 둘 수 없다고 작정하고 없앨 방법을 찾기 시작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도 타락하고 부패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상거래가 아니라 새로운 영적 예배와 찬미가가 흘러넘치는 기도의 집으로 복원시키셨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서 성전 정화 작업을 계속되어야 합니다. 혹시라도 오늘 우리 성전이 상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시장바닥 같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은 홀대받고, 음흉한 사람들의 주머니만 가득 채워주는 훼손된 교회의 모습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 교회에 바라시는 바가 무엇일까 묵상해봅니다. 이 시대 우리는 어떻게 성전을 정화시켜야 할까 고민해봅니다.

우리끼리 만의 폐쇄적인 교회가 아니라 춥고 고달픈 세상 사람들을 향해 활짝 열린 교회가 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성전 정화 작업이 아닐까요? 

한 사람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고 좌지우지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구성원 모두의 자발적인 참여와 구성원 상호 간에 적극적인 소통이 이루어지는 교회를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 성전 정화 작업이 아닐까요?

상상을 초월하는 건립기금으로 건립되는 성전이 아니라 방황하는 양들을 극진히 사랑하는 겸손하고 예의바른 사목자의 희생과 헌신이 상시적으로 이루어지는 성전을 건설하는 것이 더 시급하지 않을까요?

우리 시대 사회적 약자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도 크게 환영받고 아무런 차별도 느끼지 않는 환대의 교회, 서로의 상처와 아픔을 따뜻이 보듬어줄 수 있는 치유의 공동체, 나만 혹은 우리 가족이나 우리 본당만 생각하지 않고 더 큰 사랑을 실천하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보편적인 교회 건설이 시급하지 않을까요?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사순 제3주간 월요일>(3.4)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루카4,28)

오늘 복음(루카4,24-30)은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과 '참예언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만 파견되신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은 '나자렛에서의 희년 선포'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예언자에 대한 말씀과 모두에게 열려져 있는 구원에 대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언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과 유다인들만의 구원자가 아니라 모두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예수님은 예언자이십니다. 그것도 모든 예언자들 중에 으뜸이신 참예언자이십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전하는 사람입니다.

참예언자이신 예수님께 맡겨진 하느님의 뜻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 친히 십자가에 달리시어 속죄 제물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느님의 큰사랑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세상에 파견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이 뜻에 끝까지 순종하셨고, 그로 인해 모두를 위한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어야 할 교리의 으뜸이며,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할 으뜸입니다.

'사순시기가 거룩하고 은혜로운 때이며, 구원의 날인 이유'는 이 으뜸 교리와 감사를 다시금 기억하고 묵상하면서 마음에 새기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처럼, '하느님과 너에 대해서 잘 안다는 것'이 나의 구원의 결정적 장애물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모두의 구원에 결정적 장애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구원의 장애물들을 치워내는 사순시기, 그래서 부활을 잘 준비하는 은혜로운 사순시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이정숙(사비나)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 요한묵시록 2,29)

마산교구 합천본당 이병우 루카 신부 

3월4일 [사순 제3주간 월요일]

복음: 루카 4,24-30

혹시 우리도 과도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지요?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백성, 즉 선민의식으로 어깨에 힘 좀 주던 유다인들을 향한 예수님 말씀이
눈엣가시처럼 날카롭습니다.
그분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즉시 유다인들에게 폭풍 분노를 유발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민사상에 젖어 으스대는 유다인들에게 삼십 육개월이나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예언자 시절, 이스라엘에도 과부가 많았지만, 엘리야는 시돈 지방 사렙타 과부에게만 파견되어 도움을 준 사건을 상기시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엘리사 예언자 시절, 이스라엘에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는데,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진 사건을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어깨에 힘을 빼라고 외치신 것입니다.

혹시라도 오늘 우리도 나는 선택받은 그리스도인, 나는 선별된 사제, 특별한 불림 받은 수도자라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가르침입니다.

나자렛 회당에서 예수님의 날선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화가 잔뜩 났습니다.
집단으로 들고 일어나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합니다. 
설교하시던 예수님을 밀치고 밀쳐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마침내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군중은 작정하고 예수님을 추락사시키려고 합세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배은망덕한 일이고, 천부당만부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들을 구원하고 새로운 생명을 선물로 주러온 메시아께 감사와 찬양을 드려도 부족할 터인데,
그분을 살상하려고 발버둥치는 나자렛 사람들의 악행은 정말이지 너무한 처사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처신을 보십시오.
저 같았으면, 즉시 분노로 이글거리면서 아버지께서 주신 능력과 힘을 발휘해서 그 고을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고려할 때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관되게 비폭력 노선을 고수하십니다.
하고 싶은 말씀은 속 시원하게 하신 다음, 지혜를 발휘하십니다.
벌써 떠나면 공생활과 인류 구원 사업에 큰 자질이 발생하니, 그들을 뒤로 하고 홀연히 길을 떠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어떤 분 보면 마음 속에 이는 분노를 차곡차곡 쌓아둡니다. 한달 두달, 일년 이년, 그리고는 어느 순간 화산 폭발하듯 대폭발시킵니다.
순식간에 관계는 끝장나고, 서로 건널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맙니다.

마음속에 이는 분노를 너무 오래 쌓아두지 말아야겠습니다.
적정한 순간 적절한 언어로, 편안한 음성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내공을 키워나가야겠습니다.

무조건 참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렇다고 틈만 나면 대폭발을 시키면 주변에 남아있는 사람들 하나도 없습니다.
적정한 순간에 균형 잡히고 성숙한 표현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한 가운데 해나갈 수 있는 능력을
키워나가야겠습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3주간 화요일>(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18,35)

'조건 없는 용서!'

오늘 복음(마태18,21-35)은 '조건 없는 용서에 대한 말씀'과 '매정한 종의 비유'입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18,21)라는 베드로의 물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18,22)

'조건 없는 용서!'

용서에 조건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 곧 무조건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예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너와 내가 사는 결정적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마태18,35 참조)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통해 가르쳐 주신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너를 용서하지 않는 사람이 결코 바칠 수 없는 기도입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만 탈렌트'(6천 데나리온)는 현재 하루 노동자 임금(1데나리온) '십 만원'을 기준으로 한다면 6조원에 해당되는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이 엄청난 금액을 탕감받은 사람이 자기에서 '백 데나리온'(1천만원) 빚진 사람을 탕감해 주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는 '매정한 종의 비유'이며,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엄청난 용서를 받고 있으니, 너를 조건 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용서는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를 조건 없이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먼저 조건 없는 용서의 모범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루카23,34)

(~ 요한묵시록 5,14)

마산교구 합천본당 이병우 루카 신부 

<사순 제3주간 수요일>(3.6)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5,17)

'율법의 완성인 사랑!'

오늘 복음(마태5,17-19)은 '예수님께서 율법에 대해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이 율법은 세상 끝날까지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율법의 계명들을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으로 불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은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물로 주신, 더 나아가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 뜻이자, 계명들이고, 하느님 그 자체'입니다.

이 율법이 전하는 핵심이자 본질은 '구원'입니다.
그리고 구원으로 이끄는 '사랑'입니다.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 되는 하나의 사랑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율법의 핵심과 본질보다는 율법의 글자나 형식에 머물러 있었던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은 율법의 핵심과 본질에 머물러 계셨던 예수님을 '율법의 파괴자'로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대했던 그들에게, 그리고 보여지는 형식과 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5,17)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육화(성탄)와 땀(공생활)과 수난과 십자가 죽음으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지금 여기에서 당신처럼 율법을 완성할 것을 명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새 율법)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날마다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나아갑시다!

(~ 요한묵시록 10,11)

마산교구 합천본당 이병우 루카 신부 

<사순 제3주간 목요일>(3.7)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루카11,23)

'두 부류!'

오늘 복음(루카11,14-23)은 '예수님과 베엘제불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됩니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예수님께 요구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내 편에 서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시고 구세주이신 하느님이십니다. '베엘제불'은 사탄의 우두머리요 마귀의 우두머리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우리 안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 참조) 곧 '회개하는 이들과 회개하지 않는 이들의 두 부류'가 있다고 했습니다.

'회개하는 이들'은 예수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믿고 그대로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이들'은 예수님을 따라가지 않고, 예수님 편에 서 있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어느 편이고, 어느 부류에 속해 있는가?'

오늘 독서(예레7,23-28)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될 것이다."(예레7,23)

신약성경 필사가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지금 요한 묵시록을 필사하고 있는데, 내일까지 필사하면 끝날 것 같습니다. 장차 다가올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말씀인 요한 묵시록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는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자녀들, 예수님 편에 서 있는 자녀들, 그래서 언제나 주님의 축복 안에 머물러 있는 자녀들이 됩시다!

(~ 요한묵시록 15,8)

마산교구 합천본당 이병우 루카 신부
<사순 제3주간 금요일>(3.8)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12,31)

'참사랑!'

오늘 복음(마르12,28-34)은 '가장 큰 계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12,28)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12,29-31) 

율법 학자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 곧 가장 큰 계명 하나'가 무엇인지를 물었는데, 예수님께서는 '두 계명, 아니 세 계명', 곧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자신 사랑'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 계명을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계명으로 보십니다. 하느님 사랑은 나 자신을 포함한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야 하고, 이웃 사랑의 힘은 하느님 사랑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이며, 성령이 머무는 궁전인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주 큰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귀한 존재인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런 또 하나의 귀한 존재인 너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나 자신을 사랑해야 너를 사랑할 수 있고, 나와 너를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 사랑의 구체적 실천'입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4,20-21) 

참사랑을 합시다!

(~ 묵시록19,21)

마산교구 합천본당 이병우 루카 신부
 
제목 <사순 제3주간 토요일>
<사순 제3주간 토요일>(3.9)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18,14)

'겸덕!'

오늘 복음(루카18,9-14)은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루카18,11-12)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18,14)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18,14)

겸덕(겸손의 덕)

우리를 향해 있고,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 앞에서 우리는 결코 바리사이처럼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이 완전한 사랑 앞에서 늘 세리처럼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고, 그렇게 하려고 애쓰는 것이 구원으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메시지를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따라 겸손하게 완덕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호세6,6)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신의(믿음)와 하느님을 아는 예지(지혜)와 겸덕을 키워갑시다!

(~ 묵시록22,21)

마산교구 합천본당 이병우 루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