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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은혜/연중시기

<연중 제2주일>(1.14)"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1,36)


<연중 제2주일>(1.14)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1,36)

'희생 제물!'

오늘 복음(요한1,35-42)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첫 제자들의 모습'을 전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합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1,36)

세례자 요한의 이 말을 들은 그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두 제자 가운데 하나가 안드레아였는데,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1,41)

'부르심이 또 다른 부르심을 낳는 복음화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호칭은 다양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메시아, 그리스도, 구세주, 주님, 사람의 아들, 하느님의 어린양, 등등'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라는 호칭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 우리의 속량, 우리의 자유와 해방을 위한 속죄 제물이시며, 희생 제물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오늘 제1독서(1사무3,3-10.19)는 주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주님께서 사무엘을 부릅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주님의 부르심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엘리 사제의 도움을 받아 세 번째 부르심 만에 주님께 응답합니다.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3,10) 

사무엘을 부르신 그 주님께서 이제 우리를 부르십니다.

'왜 부르실까요?'

우리를 구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의 선물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여러분을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1코린6,20)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시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갑시다!

생각과 말과 행위가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닮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 요한3,36)

마산교구 합천본당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2주간 월요일>(1.15)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르2,18) 

'단식의 참의미!'

오늘 복음(마르2,18-22)은,
'단식 논쟁과 새것과 헌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유다인들은 율법 규정에 따라 주기적으로 단식했습니다.
단식은 유다인들이 지켜야 할 의무였습니다.
그러니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는 것을 문제 삼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는 이유를 '혼인 잔치'에서 찾으십니다. 혼인 잔치와 단식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혼인 잔치는 먹고 마시는 일입니다.

'혼인 잔치'는 '구원 잔치의 비유적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이시니 예수님과 함께하는 이 시간은 구원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시간입니다. 때문에 이 시간에는 단식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예수님)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인데,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2,22)

'새 포도주'는 날마다 우리의 구원 잔치를 위해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새 부대'는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담아내야 하는 '나의 그릇, 우리의 그릇'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단식의 참의미는 무엇일까?'

유다인들이 하는 단식은 속죄와 간구의 의미를 담은 '육적인 단식'이었습니다. 그들의 단식은 단순히 음식을 먹지 않는 '생리적 의미의 단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단식'은,
'새 포도주이신 당신 자신 안에 머무는 단식'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데 장애가 되는 것들을 물리치는 단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온전한 마음과 정신과 힘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단식'이었습니다.

오늘도 구원 잔치에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예수님께 먼저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구원의 장애가 되는 모든 것들을 끊어버리는 그런 '영적 단식'에 충실했으면 좋겠습니다.

(~ 요한5,47)

마산교구 합천본당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2주간 화요일>(1.16)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2,27)

'안식일의 본질!'

오늘 복음(마르2,23-28)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다.'라는 말씀입니다. 

인간 구원 활동인 예수님 공생활에 대해, 기득권 세력을 누리고 있었던 유다교 종교 지도자들의 본격적인 견제와 방해가 시작됩니다. 그 중심에 서 있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율법 논쟁'입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내려주신 율법과 또 이 율법에 근거하여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세부 율법 규정(613개 규정)들을 삶의 규범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안식일 논쟁'입니다. '안식일(주일) 규정'은 십계명 중 제3계명인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라는 계명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때문에 '안식일의 본질'은 '거룩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이 의미는 또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일, 곧 거룩한 주님의 날인 주일의 본질'입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자,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2,24)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함께 먹은 일을 상기시키시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2,27-28)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낸다는 것'이 '단순히 주일 미사에 빠지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가족이 함께 미사에 참석하고, 함께 사랑을 나누면서 지내는 거룩한 주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요한 8,59)

마산교구 합천본당 이병우 루카 신부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1.17)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마르3,2)

'배척 행위!'

오늘 복음(마르3,1-6)은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어제 복음에 이어서 안식일 논쟁이 이어집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습니다.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시는지 지켜봅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마르3,3) 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3,4)

그러나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고 있었던 바리사이들은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노하시면서,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십니다. 그리고 "손을 뻗어라."고 하시면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배척합니다.

'배척 행위!'

예수님을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으로, 메시아로, 그리스도로 바라보지 않는 배척 행위는 지금 여기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향주삼덕(向主三德)인 신덕(믿음)과 망덕(희망)과 애덕(사랑)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미 와 있는 하느님의 나라 안에 들어가고, 마침내는 영원한 하느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입니다.
그것도 모두가 함께.

그런데도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보면, 예수님을 배척했던 바리사이들의 그 배척 행위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와 다르다고, 나와 생각과 뜻이 다르고, 가진 것이 다르고, 생긴 것이 다르고, 지역이 다르다고 너를 배척하는 행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 요한 11,16)

마산교구 합천본당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2주간 목요일>(1.18) -일치주간(1.18~25)-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3,11)

'함구령!'

오늘 복음(마르3,7-12)은 '군중이 호숫가로 모여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을 때, 여러 지방에서 큰 무리가 예수님께로 모여듭니다. 그들은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십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아보지 못하는데, 놀랍게도 악령들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정확하게 알아봅니다.

더러운 영이 고백한 예수님의 신원이 널리 알려져야만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원을 세상에 알리지 말라는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왜, 함구령을 내리셨을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희생 제물, 속죄 제물이 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구령을 내리신 이유'는 아직 이때,
곧 십자가 죽음의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고통과 기쁨이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일깨워 주시기 위함입니다.

'참부활'은 죽음 그 너머에 있고, '참기쁨'은 고통 그 너머에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믿는 이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입니다.

죽음 없는 부활만을 바라고 있지는 않은지?
고통 없는 기쁨만을 바라고 있지는 않은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8,34)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

(~ 요한 13,20)

마산교구 합천본당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2주간 금요일>(1.19) -일치주간(1.18~25)-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마르3,14) 

'참사도!'

오늘 복음(마르3,13-19)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제자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서 열두 명을 뽑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도(apostolos)'라 이름하십니다.
'사도'는 '파견된 이'라는 뜻으로,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하느님 나라를 전파하고 다니는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열두 사도들의 면면을 보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먼저 그들의 직업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로 이루어졌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아와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과 그리고 마태오처럼 '어부와 세리'라는 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고, 로마의 앞잡이인 세리 마태오와 반로마세력이었던 열혈당원 시몬과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도 있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만 보면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지만, 예수님의 인간 구원 활동의 정점(頂點)이 '십자가 죽음'이었기 때문에, 베드로의 배반도, 유다 이스카리옷 배반도 필요했습니다.

"그때에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마태26,56) 
유다 이스카리옷의 배반으로 예수님께서 잡히시자,
사도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갔습니다.

그러니 지금 여기에서 크고 작은 고통과 시련 앞에서 쉽게 무너지는 우리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당연한 모습처럼 다가옵니다.

떠나갔던 사도들이 예수님께서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성령을 받고 난 후부터는 '참사도의 모습'으로 대변신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참사도'가 됩니다.

"성령을 받아라."(요한20,23)
'성령이 답'이네요.
우리도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성령을 받고 참사도들이 되어봅시다!

(~ 요한 18,38)

마산교구 합천본당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2주간 토요일>(1.20) -일치주간(1.18~25)-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다."(마르3,21) 

''선입견과 틀!'

오늘 복음(마르3,20-21)은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온 모습을 전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붙잡으러 나섭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십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셔야 했기 때문에 육신의 태인 어머니 마리아가 필요했고, 그래서 예수님의 형제들도 친척들도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공생활의 모습, 곧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모습은 인성을 지니신 예수님의 신성이 드러난 모습입니다.

치유 기적 사화를 통해 예수님의 신성이 드러나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나갔고, 예수님을 따르는 큰 무리가 생겨났습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미친 사람을 잡으러 온 것입니다. 아마도 자기들 가문의 수치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사실 예수님의 형제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요한7,5)

예수님의 형제들과 친척들은 예수님의 인성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때문에 육신의 모습으로 자신들과 함께 한 예수님의 모습이 전부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그런 선입견과 선체험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모습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도 종종 어떤 틀 안에 갇혀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 틀은 나의 지식과 체험을 통해 만들어졌고, 우리는 그 틀에 맞게 믿고 희망하고 사랑합니다. 그리고 너와 관계를 맺습니다.

그러한 모습이 인간의 보편 모습이기는 하지만, 믿는 이들은 그 틀을 깨트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참으로 쉽지는 않지만, 그래야 지금 임마누엘이신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 요한21,25)

마산교구 합천본당 이병우 루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