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특집- 다시 말하면 탄수화물은 지방보다 훨씬 지저분한 연료이다. 저탄수화물 고지방으로 식단을 바꾸어서 포도당대신 케톤과 지방을 연료로 태우는 스위치를 만들면 주 연료가 당인 전형적인 미국식 식단을 먹을 때 보다 미토콘드리아가 30-40% 정도 적게 산화스트레스에 노출된다. 이 말은 지방은 지방에 적응하면 즉 여러분의 몸이 지방을 연료로 태우도록 바뀌면 미토콘드리아 DNA, 단백질은 더 강해지고 건강해지며 회복력이 높아진다. 몸이 케톤을 주연료로 사용하는 능력을 회복하면 건강한 지방을 더 많이 섭취하고 탄수화물섭취량을 줄여서 혈당을 낮게 유지해야 한다. 미토콘드리아대사요법으로 이렇게 몸을 바꿀수 있다. 탄수화물을 지방으로 대체했을때 유일한 문제점은 항상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섭취하는 지방은 반드시 고품질이어야 하며 유기농제품이면 더욱 좋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산업적으로 가공한 오메가-6 식물성기름을 섭취하면 안된다는 것인데 이유는 잠시뒤에 설명한다. 고지방식단을 옹호하는 것은 지난 반세기동안 선전하던 전통적인 영양지침이나 공공보건정책과는 완전히 반대라는 점이다. 다행히도 느리긴 하지만 상황은 서서히 변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분들에게 전통적인 식단이론에 맞설 지식과 용기를 전하려면 우리는 영양지침이 어떻게 주류가 되었는지 보아야 한다. 지금부터는 저 지방식단을 권장한 직접적인 결과로 지난 70여년동안 미국에서 일어난 건강위기를 간단하게 소개하려 한다. |
-일요특집- 1800년대 말 미국인은 대부분 농부이거나 농부가 생산한 식품들을 직접 얻을수 있는 시골에서 살았다. 상업적으로 가공한 식품들은 구하기가 힘들었다. 켈로그는 1898년에 콘 플레이크가 만들었고, 하인즈나 리비스, 켐벨 같은 회사는 이미 수십년 전부터 통조림식품을 팔았다. 악취를 없앤 면실유인 웨슨 오일은 1899년 시장에 나왔다. 그러나 미국인의 식단에 오르는 식품은 대부분 전곡물이고 가공하지 않았으며 그 지역에서 재배한 것이었다. 흥미롭게도 이때는 합성비료나 살충제가 개발되기 전이라 모두 유기농 식품이기도 했다. 웨슨사병에 담겨 미국인의 식탁에 오르기 전까지 면실유는 면공업에서 생기는 폐기물이었으며 주로 비누를 만들거나 램프 연료로 사용되었다. 20세기의 첫 10년 동안 전기가 널리 공급되고 사용하기가 편리해지자 제조업자는 넘쳐나는 면실유를 끌어안고 수요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면실유는 원래 탁하고 고시풀이 들어 있어서 붉은 빛을 띄는 기름인데 고시풀은 자연에 존재하는 파이토 케미칼로 동물에 독성을 나타내므로 제조업자는 면실유를 식품으로 적합하게 만들기 위해 탈취공정을 개발했다. 세기가 바뀔 무렴 파퓰러 사이언스에 실린 한 논문은 면실유를 쓰레기통에서 식탁으로 올려 놓는 과정을 완벽하게 요약했다. 1860년에는 쓰레기였다가 1870년에는 비료로, 1880년에는 가축사료로, 다시 1890년에는 식탁에 오르는 식품으로 바뀌었다. 면실유 -- 목화씨에서 짜낸 기름을 말한다. |
-일요특집- 우리 몸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완벽하다 는 말로 나타낼수 있다. 어느 기준으로 보아 완벽하냐 라고 묻는다면 말뜻 그대로 자연과 합일 한다는 의미에서 완벽한 것을 말한다. 자연과 하나도 어긋남이 없이 일치한다는 것은 곧 자연계의 순환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과 공존하지 못하는 쓰레기나 공해물질의 생성이 없으며 지나침이나 모자람이 없고, 순환이 자기제어의 방식이어서 자동적으로 모자라는 곳은 알아서 채우고 지나친 곳은 알아서 들어내는 것을 뜻한다. 모든 개체가 독립적인 존재로서의 위엄을 갖추고 존재의 의미를 한껏 누리며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표현할수 있다. 1. 개개가 독립된 주체적 존재로써 2, 서로 공존하며 큰 하나를 이룬다. 3, 개개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끈은 에너지적특성을 지니고 있다. 우주는 일기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일기라는 우주관으로 부터 4, 우주공간이 에너지로 가득차 있고 나아가 시간과 공간, 몸도 마음도 모두 에너지이며 5, 생명체를 포함한 모든 물체가 에너지체이기 때문에 에너지장을 통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따라서 외따른 분리된 객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 6. 스스로 자기조직하고 자기제어하며 주변환경에 완벽하게 적응한다. 7. 마음과 몸이 서로 분리된 개별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
-일요특집- 이러한 내용은 물질론적 이원론적 사고체계와는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 하는 것이다. 우주는 하나의 거대한 유기적 시스템으로서 스스로 자기조직하면서 변화하고 그 와중에서 창조와 진화 그리고 순환이 이루어 지며 우리 모드는 전일을 구성하는 하나의 독립된 개일로서 이 찬조와 변화의 과정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신은 인간이나 우주와 분리된 존재로써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총체적인 우주가 곧 신인 것이다. 우리는 신을 구성하고 있는 하나의 개체이며 신은 우리를 통해 학습하고 진화하며 순환하는 것이다. 우리 또한 그 속에서 배우고 있으니 신과 인간의 관계는 비유하자면 신체와 세포의 관계이다. 물질론적 이원론은 우주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허, 조, 허조동체 중에서 조에 해당하는 물질을 강조한 나머지 허에 해당하는 면을 보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 허와 조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교와 과학기술이 분리 되었고, 그 결과 과학기술은 윤리나 도덕적 책임을 무시하는 몰가치적방향으로 내달았다. 그 모습이 오늘날 우리의 과학기술이다. 그러나 앞으로의 과학기술은 물질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영성이 결합된 과학기술이 될것이다. |
-일요특집- 이제 위에서 정리한 내용들을 하나하나 짚어보자. 1. 하나로 연결된 개체들 2, 부품에서 온전한 노동자로 3, 자연과의 공존 4, 마음과 물질과의 결합 1, 하나로 연결된 개체들--새로운 시대에서는 산업혁명이 촉발한 인간의 기계부품화 혹은 생산수단화와 같은 생각이나 개념이 더 이상 발을 붙이지못한다. 개개의 존재의 존엄성이 인식되고 존중되기 때문에 더 이상 산업혁명에서 유래된 힌간의 기계부품화나 생산수단화와 같은 개념에 바탕을 둔 생산기술이 쓰이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전체로서의 조화가 유지되는 것이 새로운 과학기술시대의 특징이다. 개개인이 존중된다고 해서 모든것이 개인 일 주의적 방향으로 흘러 협력작업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전체로서의 조화가 유지 되기 때문에--- 자동차공장을 예로 들어보자. 지금은 자동차조립과정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거대한 기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부품 정도로간주되기 십상이고 노동자도 자신의 작업이 전체공정의 어디쯤 이다 하는 것 정도를 어렴풋이 아는 정도다. 그러나 새로운 과학의 시대에서는 노동자 한사람 한사람이 독립된 개체로서 일하는 즐거움과 . 생산품과의 합일성을 느끼는 방향으로 생산기술이 바뀌게 된다. 그러니 전체적으로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자신의 위치가 어디쯤 인지가 확실하게 파악되고 따라서 일에대한 만족감은 더욱 증가한다. 사실 지금까지의 분업이라는 개념이 사라지는 것이다. 개인의 존엄성이 존중되기 시작한 배경에는 정보통신혁명이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전에는 언론통제나 교묘한 여론조작에 의하여 사실상 조종되어져 왔으나 정보통신의 혁명에 의해 개인들은 점차 이러한 위치에서 벗어나고 있다. 이제는 개인이 정보의 창출과 여론조성에 직접참여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각 개인이 정보의 발생처 및 송신처로서의 역활을 수행하는 일이 늘어나고 있으며 이 결과 개인은 독립된 주체적 존재로서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과정에서 점점 홀로 설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되면서 스스로의개성을 유지함과 동시에 총체적인 조화를 이루는 데에도 어려움이 없게 될 것이다. 앞으로 정보통신 혁명이 더욱 진행되어 현재와 같은 한방향으로의 언론에서 벗어나 쌍방향의 언론으로까지 발전하게 되면 개(하나)와 전(전체)의 온전함이 모두 실현되는 사회가 될 것이다. ---요즈음 처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다면 지금 사회에서 횡횡하고 있는 가짜 뉴스로 밝혀진 뉴스들이 들이 모두 진짜로 둔갑해 있을 것이다 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아찔하다. |
-일요특집- 2024.1.14 부분과 전체의 관계에 있어서도 부분은 전체를 구성하는 하나의 부품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여기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요인은 생명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다. 즉 전체에는 부분에 대해서 그것을 따로 떨어진 별개의 유기체라는 관점에서 생명체라고 인식해 왔으나 이제는 전체도 하나의 생명체이며 이를 이루는 부분도 하나의 완벽한 생명체이고 이 둘은 같은 생명을 누리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 우주에서 외따로 떨어진 생명체는 없다. 만약 그런 생명체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생명의 단위를 무엇으로 삼아야 할 것인가 하는 곤란한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과연 생명을 무엇이라고 정의 할 것인가? 번식능력이 있는 것을 생명체라고 한다면 바이러스는 무엇이라고 해야 옳을까? 또한 번식능력은 없으나 하나의개체로써 활동하고 임무를 수행하는 일벌이나 일개미 등은 또 무엇이라고 해야 되는가? 생리대사작용을 생명의 증거로 삼는다면 지구는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지구의 대사작용은 그 규모가 클 뿐이지 생체내에서 일어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돌덩이에게 생각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는 한 사고능력도 생명의 기준이 될수 없다. 만일 모든 존재가 나름대로 생각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어느 수준을 기준으로 삼아서 사고능력의 유무를 정의할 것인가? 과연 무엇을 생명으로 해야 할 것인가? 결국 문제는 의식을 무엇이라고 정의할 것인가로 귀착된다. |
-일요특집-2024.1.21 양자역학에서는 우주만물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보며, 모든 존재를 우주라고 하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를 이루는 작은 생명체로 인식한다. 따라서 사물을 대하는 자세가 물질론에 바탕을 둔 그것괴 다를수 밖에 없다. 현대과학에서는 모든 물체와 생명체로 하여금 그 수명을 다하게 하며. 그것이 세상에 나온 이유를 존중하며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함을 목적으로 한다. 2. 부품에서 온건한 노동자로 부분으로서의 인간이 독립성과 주체성을 회복하고 있는 실례를 살펴보자. 물질론적과학철학에서는 인간이 하나의 기계적 장치 또는 도구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제품을 설계하거나 제조하는데 있어서 인간이라는 요소는 별로 고려되지 않았다. 자동차만드는 일을 예로 든다면 초기에는 어덯게 하면 차를 값싸게 대량으로 만드는가 하는 문제에 초점을 두었다. 동시에 자동차를 만드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어떻게 하면 더 편안하게 작업할수 있는가 하는 인간적인 요소는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 작업자는 로봇처럼 작업시간동안 주어진 일만 하면 되었고. 그나마 인간적인 요소가 고려된 경우에는 작업자의 근로조건이나 환경때문에 불량율이 높아졌다고 판정되었을 경우뿐이었다. 최근까지도 작업환경의 고려 보다는 어떻게 하면 값싸게 좋은 물품을 만들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성능이 더 좋은 자동차를 만들수 있을까? 하는 것 뿐이었다. |
-일요특집- 그러나 최근 들어 공장노동자들의 생산성만을 따지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이 점차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작업라인에서 교대로 근무하며 일하는 노동자들은 자기가 일하는 공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제품들이 분명히 자기 손을 거쳐간 것 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대량생산과 교대근무로 인해 어느 것이 자기가 만든 것인지 알수 없을 뿐 더러 자기가 만든 제품에 대해서도 일관 생산과정의 일부분에 대해서만 작업을 했기 때문에 제작자로서 제품과의 일체감도 느끼지 못한다. 그야말로 돈을 받고 품을 팔은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인간중심의 작업환경을 제공하는 일이 중요하게 인식되기시작했다---노동자들이 작업을 하면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찾을 수 있는 방식으로 작업환경이나 제조방법이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는 자신이 만든 제품이 어느 것인지 알고 있으며 제품과 자신의 동질감도 느낀다. 대량생산체제로 인해 작업과정에서 하나의 생산도구의 위치로 전락했던 노동자들이 이제는 옛날의 장인과 같은 위치를 다시 회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는 물건을 만드는 노동자뿐만 아니라 물건을 사용하는 소비자들에게도 일어나고 있다. 예를들면 자동차를 타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안전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제공하는가 하는 것이 자동차의 성능을 개선하는 일 못지않게 중요하게 고려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대부분의 경우 제품의 기능이나 디자인에 중점이 두어졌지 생산된 제품을 사용할때 사용자의 편리성은 별로 고려되지 않았다. 제품의 개발과 평가는 주로 성능에 촛점이 맞추어졌고 사람들은 자신의 개성이나 취향과는 상관없이 그냥 주어진 몇가지 제품중에서 선택하거나 아니면 자신이 제품에 맞추어야 했다. 그러나 신과학기술에서는 제품을 사용자위주로 만들고 수요에 부응하여 제품을 공급한다. 이른바 주문형 과학기술인 것이다. 이로써 사람들은 ----수동적인 소비자의 위치에서 벗어나 당당한 주인의 위치를 찾아가고 있다.---- |
-일요특집- 3, 자연과의 공존'-양자역학 사고체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자연과의 공존사상이다. 이것은 전체를 구성하는 개개들의 상호협력과 의존을 뜻하는 것이다. 물질론적 이원론에서는 자연을 원료와 자원의 공급처로만 보았기때문에 자연에 대한 배려라고는 전혀 없었다. 자연은 그야 말로 착취의 대상이었고 그 결과 오늘날 지구는 오염되지 않은 곳이 거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양자역학과학기술의 연구 개발에 참여하고 있는 과학기슐자들은 자연을 자원의 공급처로만 보는 단순한 시각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이 자연을 구성하는 일부이며 자연은 곧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고 인식하고 있다. 즉 자연이 없으면 우리도 없고, 동시에 우리가 없으면 자연도 소멸되는 것이다. 현실은 각각의 상호작용의 결과이기 때문에. 따라서 새로이 등장하고 있는 과학기술의 사고체계에서는 자원의 순환과 재활용이 대단히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으며 공해물질을 배출하지 않는다는 원칙은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의무이자 예의 인 것이다. 자연의 소멸은 그 만큼 상호작용의 결과물의 소멸로 인류의 소멸과 직결되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과학기술의 기본원리는 ---자연과 일치하지 않으면 안된다.---인간은 불과 300여년 동안에 지구의 환경을 거의 돌이킬수 없을 정도로 파괴했으나 자연은 그래도 지구를 거의 완벽하게 유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지구의 자연계나 생물체의 순환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과 같은 순환체계가 아니고서는 이 터전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전제로 ---자연으로 부터 배운다는 인식아래 기술의 연구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
-일요특집- 24.2.18 미국에서 플러너겐박사에 의해 수행된 연구결과를 보면 뇌에서 음성신호를 해독하는 방식이 녹음테이프를 듣는 것 처럼 입력되는 차례에 따라 순차적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뇌에 입력된 음성정보를 전환해서 그림처럼 만들어 해독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이 결과를 바탕으로 뇌가 소리를 디지탈 신호로 풀어서 피부를 진동시키면 피부신경은 이 진동을 단순한 진동으로 해석하지 않고 소리로 알아듣고서 뇌에 전달하기 때문에 피부신경이 귀의 청각신경과 똑같은 역활을 할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실제로 그러한 장치를 개발하여 뉴로폰이라는 이름으로 판매까지 하고 있다. 인체의 기능이 전천후라는 사실이 하나 둘 밝혀 지고 있다. 에너지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인체의 모든 장기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므로 어느 하나가 이상이 있으면 다른 부분에도 같은 정보가 실리게 되기 때문에 인체에서 방사되는 어떤 형태의 에너지를 취하여 분석하거나 간에 그 결과는 같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다만 현재 기술상의 차이때문에 분석결과가 달라보일 뿐이다. |
-일요특집-24.2.25 물질세계의 창조와 형성과정 중에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몇가지를 생각해 보면 1, 물질세계의 물질들은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나지는 않는다. 2, 시간의흐름에 따라 물질의 상태가변하는 것은 분명하다. 3, 물체가 갑자기 허공으로 사라지는일도 없다. 4. 신이 물질세계에 개입하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 5, 인간의 영혼이나 정신이 물질세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증거도 없다. --이러한 것들을 놓고 생각해 보면 무로 부터 나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되지 않을까? 내가 경험한 바로는 내 마음 영혼, 정신은 내 머리속이나 몸안에 단단히 붙들려 있고 이 틀을 벗어나 외부의 물질세계를 헤메고 다니지는 않는 것 같다. ---소외 기계론적 철학으로 방향이 잡히는 것 같다. 즉 우리 주위의 물질세계는 아무런 생각이 없고 단지 물리적 메카니즘에 의해서만 형성된 것이다. 정말 이럴까? 꽃도 나무도 내 앞에 있는 책상도 결코 무에서 만들어 진 것은 아니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 어떤 것도 결코 무로 돌아 갈수는 없다는 말일까? 들판의 잡초에도 그 씨앗이 있고, 흔날리는 먼지에도 질량이 있는 것이다. 물질을 더 작고 작은 조각으로 끝없이 영원히 쪼갤수는 없을까? 이렇게 계속해서 쪼개면 물질은 완전히 무로 돌아가 앞에서 내렸던 결론을 부정하는 결과가 나오진 않을까? --제논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우스와 거북이의 경주에 관한 유명한 역설이 생각난다. 아킬레우스와 거북이가 달리기 경주를 한다. 확실히 불공평한 일이다. 그래서 인지 명예와 공정한 경기에 자부심이 강한 아킬레우스는 거북이가 먼저 출발해도 좋다 했다. 거북이가 중간쯤에 도착해서 자기가 출발하겠다고 하는데 흔쾌히 동의 한다. 그는 자신이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킬레우스가 그 위치에 도달했을때 거북이는 그보다 조금 더 앞서 나가 있다. 아킬레우스가 거북이가 있던 위치에 가면 거북이는 또 그보다 조금 더 앞서 나가 있다. 이 런식의 추론은 영원히 계속 될 것 같다. 아킬레우스가 거북이가 있던 자리에 도착할 때 마다. 거북이는 그 보다 조금씩 더 앞서 있는 것이다. 이런식이라면 아킬레우스는 영원히 거북이를 앞지를수 없을 것이다. |
-일요특집- 제논의 역설의 중심에는 뚜렷이 구분되는 무한개의 점을 하나의 직선으로 니늘수 있다는 순진한 생각이 놓여있다. 만일 출발점과 도착점사이에 무한개의 점이 있다면 출발점에서 도착점사이의 각 점들을 유한한 시간내에 통과할수 있는 동작 같은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문제를 조금 더 고민하고 토론하면서 우리 스스로의 감각을 통해 물질세계로 부터 알아낼수 있는 것들이 없다는 ---터무니 없는 비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즉 연속적인 선을 수학적으로 무한개의 점으로 나눌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제 세상의 거리나 면적, 부피 같은 것이 물리적으로 무한히 나눌수 있다는 뜻은 아니지 않는가. 물질세계가 연속적이며 무한히 나뉠수 있는 것이 아니라 쪼개지지 않는 또는 자를수 없는 낱알로 이루어져 있다면 어떨까? 그러면 현실적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가. 이 부분은 이 논쟁으로 물질은 무한히 나누어 무가 될수 없다. 물질을 계속 쪼개면 결국 물질을 구성하는 --원자가 --남게된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우리가 외부세계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이유는 물질이 시간에 따라 변화하고 한가지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에서는 모든 물질은 다 이상 쪼개지지 않는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만일 원자가 변화하지도 않는 영원불멸의 것이라면 우리가 느끼는 물질의 변화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일요특집- 앞에서 모든 물질은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만일 원자가 더 이상 쪼개지지 않고 변화하지도 않는 영원불변의 것이라면 물질의 변화는 원자가 꾸준히 움직이면서 서로 충돌하고 그러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얽히며 공간과 다양한 비율로 섞여 물질이 취할수 있는 여러가지 형태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좋다. 원자와 반공간이 다양한 비율로 섞이면 이 세상 모든 물질들을 온갖 형태로 다양하게 구성할수 있을 것이다. 그리이스사람들은 이들을 네가지 기본원소 즉 흙, 공기, 불. 물로 정리했다. 플라톤은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정교한 원자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는 위 4가지 원소를 각각 기하학적 도형으로 표현하고 각도형의 면은 삼각형으로 분해될수 있는데 이것이 원소를 구성하는 원자를 대표한다고 그의 저서 대화(timaeus)에서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삼각형의 패턴들을 재배열함으로써 즉 원자를 재배열하여 하나의 원소를 다른 원소로 변환할수 있고 , 원소들을 결합하여 새로운 형태의 물질을 만들수 있다고 했다. |
-일요특집- 3.17 플라톤은 삼각형으로 원소를 설명했지만 에피쿠로스를 포함한 초기 원자론자들은 원자가 다양한 모양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어떤 것은 부드러운 곡선을 가진 둥근것이고 어떤 것은 더 뾰족한 예각을 가지고 있으며 또 어떤 것은 가시와 갈고리처럼 뾰족뾰족할수도 있다. 이러한 원자들이 충돌하면서 서로 달라붙어 다양한 물질을 합성한다. 고 생각했다. 이러한 조합들의 다양한 질삼이 궁극적으로 만들어 지는 물질의 특징과 행동방식을 결정한다. 이런식이다. 우리가 느끼는 색깔은 눈에 들어온 원자가 회전하거나 위치를 바꾼 것이고, 맛은 원자의 질감이 맛의 감각을 유도한 것이다. 라는 식이다. ---원자론자들은 원자들이 어떤 힘에 의하여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원자의 형태가 얽혀서 결합한다고 생각했다. 예를들어 루크레티우스는 바닷물의 쓴 맛은 거친 원자가 섞여 있어 생긴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흙에 바닷물을 부어 통과시키면 거친원자들은 걸러지고 부드러운 원자들만 통과해 훨씬 더 맛좋은 물이 된다. -원자의 크기는 인간이 자각할수 있는 한계를 넘어설 정도로 작다. 만일 우리가 원자를 볼수 있다면 그것은 원자가 아닌 것이다. |
-일요특집-3.24 그런데 원자들이 영원토록 움직이는데 무엇때문일까?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원자가 영원히 움직인다는 이것이 원자이론의 결정적인 핵심임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예 믿지 않았고, 초기의 원자론자들은 이러한 움직임이 무엇때문에 일어나는지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 유명한 에피쿠로스조차도 원자에 무게가 있어 이 무게 때문에 아랫방향으로의 움직임을 유발한다고 했다. 아무튼 원자가 영원히 움직인다 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눈에 보이는 거대한 물체가 정지해 있거나 아주 느린 속도로만 움직인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또 원자가 너무 작아서 우리가 원자를 볼수 도 없는데 우리가 왜 원자가 있다고 생각해야 할가? --지금까지를 정리해보면 고대원자론자들은 물질이 허공에서 무질서하게 움직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궁극의 구성요소인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고, 물질의 형태는 무질서하게 움직이는 원자의 다양한 조합 그리고 원자와 빈공간의 혼합에 의해 구성된다고 했다. 이러한 조합과 혼합의 변화로 인해 물질은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바뀌고. 원자가 무질서하게 움직이는 이유는 무게가 있어서 이다고 했다. 물질에서 흘러나오는 원자의 막이 감각적인지를 유발한다고 했다. 그리고 원자는 크기, 모양, 위치, 무게의 특징을 가지고, 물질의 색. 맛. 냄새등은 마음의 감각적 인지이지 원자의 특징은 아니라고 했다. 가끔은 아래로 떨어지고 발향을 비꾸지만 너무 작아서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시대에 이러한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
-일요특집- 3.31 데모크리토스가 경험한 인지와 외부 실체의 본성에 대한 얘기는 아주 기본적인 문제이고 물질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심오한 영향을 미치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등장하는 주제가 될 것이다. 고대 그리스원자론자들로 부터 17세기와 18세기의 위대한 철학자들의 등장 사이의 1600년동안 활약했던 철학자 들이 토론하고 논쟁하고 글로 남긴 내용들은 주로 고대 그리스 로마 철학을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교리를 결합시키는 내용들이었다. 사실 그리이스인들이 생각했던 영혼의 부활, 본질, 그리고 창조에 관한 내용은 세상만물에 현재하는 기독교의 전지전능한 신의 개념을 바탕으로 한 교리와는 맞지 않았다. 그러므로 물질세계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탐구가 논쟁에 휘말리게 된 것은 필연적이었다. 자연철학은 불가피하게 신학적문제와 얽히게 되었다. 그러나 서서히 학문을 강조하는 경향이 살아났다. 처음에는 수도원이나 성당이 세운 학교를 통해서 인데 그 중 일부는 12-13세기에 대학으로 성장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학문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공식적으로는 금지되어 있었지만 학문으로서의 철학과 신학의 등장은 고대 그리스에 관한 관심을 일깨우는데 일조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 문서 선집에 관한 관심이 급증하면서 새로운 번역이 확산되었다. 13세기 중엽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 텔레스를 재조명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 결과로 탄생한 토미즘철학은 아리스토 텔레스에 수많은고대 중세 지식들을 뒤섞어 놓은 것이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아리스토 텔레스의 물질의 본성이나 원운동을기반으로 하는 지구 중심의 우주학이 기독교의 정설이 되었다. 쉽게 하면 태양도 지구를 도는 지구가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할까? |
-일요특집-4.7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질의 본성에 대해 무어라고 말했을까? 한마디로 한다면 그는 데모크리토스의 다소 수동적이고 변화없는 원자개념을 생기있고 활발하게 변하는 물질적실체에 대한 관찰과 결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동시에 진공개념을 완전히 거부 했다. 상당히 오늘날의 개념과 비슷하다. 제논을 반박했던 원자론자들은 같은 논리에 따라--공간과 시간 역시 사실상 원자적존재로 간주되어야 하며 공간과 시간을 쪼개는 데도 한계가 있다고 했다. 오늘날 루프 양자중력이론과 너무나 흡사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와는 약간 달랐다. 공간과 시간이 연속적이라는 쪽이었고, 물체는 원칙적으로 무한히 쪼갤수 있다고 생긱했다. 따라서 원자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도 물질이 가장 작은 구성요소로 이루어질수 있다는 아이디어에는 공감했다. 다만 그는 원자론자들이 너무 멀리 갔다고 즉 지나치게 환원주의적 입장을 가졌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해결책은 ---미니아 나투랄리아---의 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이 말은 물질이 본질적인 성질을 잃지 않으면서 쪼개 질수 있는 가장 작은 부분을 말한다. 미니아 나투랄리아는 그리스원자론자들이 주장한 원자가 아니며 이는 원칙적으로 더 쪼개 질수 있다. 다만 미니아 나투랄리아가 어떤 한계를 넘어 쪼개 진다면 원래 물질이 지닌 성질이나 특징을 잃게된다. 나무를 톱으로 쓸면 톱밥이 나온다. 이 톱밥은 여전히 나무다. 그런데 이 톱밥을 쪼개고 쪼개다가 미니아 나투랄리아의 문턱을 넘어서게 되면 더 이상 나무라고 부를수가 없는 것이다. 이는 대단히 현대물리학의 이론과 비숫하다. 아니 똑 같다. |
-일요특집-4.14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사물이 형상을 지닌다고 믿었다. 즉 나무는 미니아 나투랄리아로 구성되어 있으면서 나무다움의 형상을 지닌다. 사물이 그 사물이게 하는 것은 바로 사물의 형상이며 그 형상이 사물의 특성과 행동양식을 지배한다. 아퀴나스는 익선을 실체적 형상으로 해석했고 구성성분은 변환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나무는 나무이고 구성성분인 줄기, 가지, 잎들로 변환될수 없다. 이런 구성성분들은 나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무를 자르고 목재를 이용해 낚싯배를 만들면 나무다움의 형상은 사라진다.---이러한 생각은 중세신학자들에게는 선물이었다. 인간은 배를 만들수 있지만 나무는 오직 신만이 만들수 있다. 같은 방법으로 성변화도 편리하게 설명할수 있었다. ---성체성사에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에는 예수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체적형상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 시기의 지적활동은 국교회의 마키아벨리 같은 인간들에 의해 억압되었다. 즉 철학자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자유였지만 글로 남기는 것은 자유롭지 않았다. 이단으로 비난을 받거나 고초를 겪을 각오를 해야 했다. 그러나 15.6세기의 교회지도자들 비오 2세, 식스토 4세, 레오 10세 등에 의해 느리면서도 조용히 지적개혁의 씨앗이 뿌려지고 있었다. 이들은 스투디아 후마니타디스 즉 오늘날 인문학으로 알려진 분야를 확립하는데 공헌함으로써 고대 그리스, 로마의 학식과 가치를 재발견한 르네쌍스 인문주의자들이었다. 이시기에 이르러 중세의 관습과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인문학을 연구할수 있게 되었다. 르네쌍스 인문학이란 인류사상사에 변화를 일으킨 가장중요한 힘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없다. * 아퀴나스 --혼은 몸의 형상이고, 몸은 혼의 질료임. 여기서 형상인 혼과 질료인 몸이 결합하여 하나의 인간 실체를 구성함. 그래서 신학대전을 보면 '몸이 없는 혼'은 인격(persona)조차 아니라고 명시적으로 나옴. |
-일요특집- 4.21 1417년 이태리의 학자이자 문헌수집가인 잔 프란체스코 포조 브라첼리는 독일의 수도원에서 삭아가던 루크레티우스의 "만물의 본질에 관하여 "의 사본을 발견했다. 그는 이 사본을 친구인 니콜로 데니콜리에게 보냈는데 이사람은 오늘날 이탤릭체를 발명한 사람이다. 데 니콜리는 이 책을 필사하는데 최소 12년 정도가 걸렸다고 추정한다. 마침내 사본제작이 끝나고 (15세기경 제작된 50부 이상의 사본이 오늘날 까지 전해지고 있다)이후 코텐베르크의 인쇄술발명의 덕분으로 유럽전역에 널리 퍼질수 있었다. 그 당시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던 것은 루크레티우스가 전한 에피쿠로스의 원자이론이 아니었다. 흥미로왔던 것은 --자연의 질서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려 했던가 였다. 루크레티우스는 자연의 질서에는 신의 개입은 없다. 동시에 자연의 질서는 철학의기본이며. 인간도 중요하게 취급되지는 않았다. 또 영혼의 소멸과 사후세계.그리고 기성종교의 잔혹함과 미신적인 망상에 대해서도 논했다. 당연히 루크레티우스의 책은 16세기초 이탈리아의 학교에서는 금서목록에 올랐다. ---나는 개인적으로 -만물의 본질에 관하여-책을 아끼고 좋아한다. 책의 내용이 너무 좋다. 몇년전 있었던 우리 모임의 세미나에서는 그의 원자에 관한 시를 낭송했을 정도이다. 한개인의 생각에 의존했던 책일지라도 오늘날의 자연질서과학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오히려 더 많은 영감을 나에게 아니 우리에게 주고 있다. |
-일요특집-4.28 아인슈타인은 우주가 에너지로 되어 있는 것을 알고 그 당시까지 알려져 있었던 우주를 움직이는 힘 즉 전자기력과 중력을 통합하여 우주를 아주 간결하게 깔끔하게 쉽게 설명하려했다. 소위 통일장이론이다. 그리고 그는 실패했다. 인체도 에너지로 되어 있고, 그 구성 하나하나가 우주의 흐름과 같다. 이를 하나의 깔끔한 단어나 문장으로 표현할 수 없을까? 있다. 그것은 상호작용이다. ---그러면 물질이 만들어 지는 것도 상호작용의 결과일까? 답은 그렇다 이다. 그러면 내가 웃는 것도 상호작용의 결과일까? 그렇다. 그러면 내가 사랑을 하는 것도 상호작용일까? 그렇다. 산이 만들어 지는 것도 바다가 만들어 지는 것도 상호작용일까? 그렇다. |
-일요특집- 도미니크회 수사인 조르다노 브루노는 에피쿠로스철학과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가 1543년에 발표한 책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의 내용에 따라 지구가 아닌 태양을 우주의 중심으로 보는 우주론의 극렬한 옹호자였다. 유럽일대를 떠돌다가 경솔하게도 이태리로 돌아온 브루노는 1592년 체포되었고, 종교재판을 받고 수감되었다. 그리고 그의 사상을 철회하라는 명령을 거부해 1600년 화형을 당했다. 철학자들은 여전히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17세기에 들어서자 충분한 지적자유를 누리며 다시 한번 물질적 또는 기계적인 물리적세계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구조를 세울수 있었다. 그 메커니즘은 공공연한 신이 개입으로 부터 자유로워보였다. 그리고 철학자들은 비록 속도는 느리지만 철학을 신학으로 부터 분리하는 절차를 착수한 자유도 얻었다. 그러나 이를 종교적미신에 대한 과학이나 이성적사고의 승리로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이 새로운 이성의 시대를 이끈 17세기 철학자들은 대부분 세상을 신이 창조했다고 이해하고 자신들의 결론을 기독교교리와 일치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이들은 여전히 철학자였고 서로 겹치는 광범위한 두 집단을 이루었다. 이들은 오늘날 기계론과 근대철학으로 간주된다. |
-일요특집- 기계론자로는 프랜시스 베이컨, 갈릴레오 갈릴레이. 요하네스 케플러, 피에르 가상디, 로버트 보일.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아이작 뉴튼이 있고, 근대 철학자로는 르네 데카르트, 존 록, 바뤼흐 스피노자.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 조지 버클리, 데이비드 흄, 임마뉴엘 칸트가 있다. 오늘날에는 기계론자들은 과학자로, 근대철학자들은 철학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실 이 두 집단은 탐구의 본질과 방식에서만 약간의 차이를 보일뿐 거의 연속적인 스펙트럼을 형성한다. 과학자들중 대다수는 철학적사색에 관여했고, 철학자들 대다수도 실험에 참여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실험과학의 결론들을 알고 있었다. 데카르트는 기계론자이기도 했다. 보일은 유명한 살험주의자였고 의학 역학 수력학과 기체의 성질을 연구했다. 초기 기계론자가운데 원자의 개념을 다시 알린 가장 영향력있는 사람은 아마도 가상디와 보일일것이다. 가상디는 에피쿠로스 철헉과 기독교를 조화시키는 야심찬 작업에 착수 했고. 그의 원자는 누가 보아도 에피쿠로스의 원자였다. 그러나 보일의 원자는 다소 달랐다. 그는 17세기 독일의 외과의사이자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의학교수였던 세네트르의영향을 많이 받았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개념을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했고, 물질의 특징과 행동의 기원은 그것을 이루고 있는 미니아 나투랄리아로 거슬러 올라갈수 있다고 주장했다. 원자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가 추구하는 방향은 의심할 여지 없이 원자였다. |
-일요특집-2024.5.19 보일은 원자가 너무 작아서 인지할수 없다는 사실은 인정했지만 원자가 크기와 모양을 가지고 있으며 운동을 한다고 생각했다. 보일의 원자는 물리적으로 나뉠수 없고 화학적 물리적 변화에도 손상되지 않고 온전히 남는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데모크리토스나 에피쿠로스가 주장한 원자와 대단히 비슷하지만 보일은 스스로의 노력에 의하여 이러한 결론을 가지게 된 것이다. 기계론자들은 새로운 도구를 제작하는데 자신들의 재능을 활용했다. 즉 망원경, 현미경, 시계. 공기펌프등은 이들의 실험에 대단한 도움이 되었다. 공기펌프를 이용해서 보일은 기체의 압력과 부피사이의 관계를 추론했고. 이것은 보일의 법칙의 바탕이 되었다. 즉 기체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부피가 더 작아지면 기체의 압력은 그에 비례해서 증가한다. 기체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부피를 팽창시키면 기체의 압력은 그에 비례해서 낮아진다. 따라서 온도가 고정되어 있다면 압력과 부피의 곱이 일정하다는 유명한 보일의 법칙이 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실험들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직면했던 문제를 해결할만큼 우수하지는 못했다. 원자가 그 정의에 따르면 거대규모의 물질의 성질과 행동을 직접 관찰할수 없는데 그런 원자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낼수가 있을까? 어떠한 결론도 낼수가 없었다. 오늘날의 지식으로 생각해 보면 보일이 얻은 결과는 단지 물질에서 보편적으로 관찰되는 특징과 행동들은 논리적으로 원자가 원인임을 암시하는 정도 였다. 다시 말해서 ---거대규모에서 보는 경험적 거시세계가 물질을 구성하는 미시적실체에도 똑 같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들은 루크레티우스보다 별반 나은 것이 없다---미시적원자의 특징은 거시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고, 어떠한 실험에서도 미시세계의 원자의 특징이 거시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수 없었다. 루크레티우스가 말한 우리가 자연현상을 관찰할때는 기계적 감각을 사용한다는 생각이 오늘날 생각해 보면 더욱더 진리에 접근한 생각이 아닐까? 생각하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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