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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은혜/대림성탄

<대림 제2주일>(12.10) -인권주일. 사회교리주간-"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마르1,3)


<대림 제2주일>(12.10) -인권주일. 사회교리주간-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마르1,3)

회개의 세례!

오늘 복음(마르1,1-8)은 마르코 복음의 시작인 '세례자 요한의 설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에 앞서 파견된 '세례자 요한의 사명'은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오시는 길을 마련하는 것, 그분의 길을 곧게 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것'이었고, 세례자 요한은 이 사명에 충실했습니다.

대림 제2주일인 오늘은 '인권주일이자 사회교리주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에서 시작된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고 짓밟히고 있는 현실로부터의 돌아섬(회개)을 촉구하는 주일'이 바로 '인권주일'입니다.
그리고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져 있는 그늘지고 낮은 곳에 있는 이들에게로의 구체적인 행동을 촉구하는 주간'이 '사회교리주간'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의 세례'입니다. '말보다는 행동이 필요한 때'입니다. '행동하는 교회, 땀 흘리는 교회의 모습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 모습의 원조이시자 모범을 보여주신 분이 바로 지금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회개의 세례'는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하나의 그리스도'라고 불렸던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그랬던 것처럼 '단순하게 복음을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입으로만 외치는, 테이블 위에서만 외치는 탁상공론의 모습에서 벗어나, '몸이 움직이는 세례'가 필요한 때입니다. 요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화두가 되어 버린 '구체적인 행동의 세례인 생태적 회심'이 필요한 때입니다.

2베드3,9의 말씀을 곰곰이 되새겨 봅시다!

(~마태 8,34)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대림 제2주간 월요일>(12.11)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5,20) 

'그들의 믿음!'

오늘 복음(루카5,17-26)은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실 때,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사람을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그런데 군중 때문에 그를 예수님께 데려갈 수 없자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중풍 병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 보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른 말씀들'입니다.
'예수님의 한 말씀만으로도 병이 나을 것'이라는 '백인대장의 믿음'(마태8,8)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죽은 사람도 살리실 수 있는 분'이라는 '야이로의 한 회당장의 믿음'(마태9,18)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자기 병이 나을 것'이라는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고 있었던 한 여인의 믿음'(마태9,21)입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믿음입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마태17,20)

단순한 믿음, 작은 믿음이면 충분하다는 말씀이고, 이 믿음으로 나와 너를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땀을 흘리셨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셨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매일 성직자들의 손을 통해 제대 위로 내려오신다.'

이것이 바로 내가 믿어야 할 '믿음의 본질이며, 신앙의 핵심'입니다.

이 '본질과 핵심'이 나를 살리고, 또한 너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이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마태 9,38)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대림 제2주간 회요일>(12.12)
-과달루페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18,14)

'역지사지'

오늘 복음(마태18,12-14)은 '되찾은 양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되찾은 양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양 백 마리 가운데에서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어떤 사람이 잃은 양을 찾고 기뻐하는 비유를 제자들에게 들려주시면서,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경제논리와 합리주의라는 세상 가치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과연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이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

'잃어버린 양 한 마리 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지키려고 하지 않을까?'

'되찾은 양의 비유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이 메시지가, '길을 잃고 헤매는 양의 입장이 되어보라.'는 메시지로 들려옵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양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그 존재가 바로 '나'라고 생각해 보라.'는 메시지로 들려옵니다.

세월호 가족들!
10.29 이태원 참사 가족들!
12.12. 군사 구테타 세력들에 의해 희생된 이들의 가족들!
....

'역지사지'(易地思之), 곧 처지를 바꾸어 그들이 바로 '나'라고 생각하면, 나의 많은 것들이 바뀔 것 같습니다.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들이 바뀔 것 같습니다.
나의 입에서 헛소리가 나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는,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은 소중하지 않고,
잃은 양 한 마리만 소중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는 모두가 다 소중하지만, 지금 누군가의 간절한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 약한 이웃들이 지금 더 소중하고, 그들에게 나의 사랑이 전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10,42)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12.13)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11,29)

'예수님의 멍에!'

오늘 복음(마태11,28-30)은 '내 멍에를 메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8-30) 

'인간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일까?'

그 목적이 돈일 수도 있고 권력과 명예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바로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라고 묵상했습니다.

돈과 권력과 명예는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고, 그것은 하나의 도구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 도구들을 통해서 기쁨과 평화와 행복이라는 안식을 얻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안식을 얻으려면,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멍에!'

멍에는 달구지(마차)나 쟁기의 채를 잡아매기 위해 소나 말의 목에 가로 얹는 둥그렇게 구부러진 막대를 말합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 자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소나 말 목에 얹은 멍에를 이용해 무거운 짐을 나르거나 힘든 일을 손쉽게 하게 됩니다.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기 위해서 짊어진 예수님의 멍에는 '예수님의 순종'입니다. 모두의 구원이라는 하느님 아버지 뜻을 십자가 죽음으로 따른 '예수님의 순종'입니다.

이제는 내가 짊어져야 할 멍에가 있습니다. 너와 공동체와 가정을 위해서, 그리고 더 넓은 세상을 위해서, '내가 짊어져야 할 나의 멍에'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순종'이요, '나의 순종'입니다.
오늘도 참기쁨과 참평화와 참행복이라는 안식을 얻기 위해서 '하느님과 너에게 순종하는' 자녀들이 됩시다!

(~마태12,8)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12.14)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11,11)

'세례자 요한!'

오늘 복음(마태11,11-15)은 '세례자 요한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예수님에 앞서 파견된 예언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미리 닦아놓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고, 이 사자(使者)의 역할에 충실했던 예언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세례자 요한을 두고, '그 어떠한 예언자보다 큰 인물'이라고 평가하시면서도, 하늘 나라에서는 그가 '가장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마태11,14) 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기다림의 시간'이요 '깨어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나의 구원과 너의 구원을 위해 애써야 할 시간'입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또 하나의 세례자 요한이 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회개의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지금 거의 모든 성당에서 '판공성사'를 보고 있습니다. 판공성사는 '지금까지의 나의 시간들을 잘 성찰하고, 영육의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또 하나의 구유'인 '마음의 구유를 만드는 것'입니다.

판공성사를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판공성사를 잘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과거의 시간을 묻지 않으시면서 조건 없이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주님께로 나아갑시다!
그리고 너도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인도합시다!
그래서 모두가 함께 마음의 구유를 잘 만들어 놓고,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합시다!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화답송 후렴)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두려워하지 마라,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이사41,13.14) 

(~ 마태13,17)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대림 제2주간 금요일>(12.15)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마태11,16) 

'회개하지 않는 이들!'

오늘 복음(마태11,16-19)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세례자 요한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예수님도 그리고 예수님에 앞서 파견된 세례자 요한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11,17)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마태11,18)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이사48,18)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끝까지 대립각을 세웠던 사람들, 마침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다교 지도자들과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왜 그랬을까?'

'율법이라는 틀' 안에만,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메시아의 틀' 안에만 갇혀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 마음 안에 참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대 안에도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그런 모습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틀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틀, 사제에 대한 틀, 너에 대한 틀, ...'
이 틀들이 구원의 장애물이 되고, 오늘 내게 오시는 주님을 가로막는 결정적 장벽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 안에서 성령의 힘으로 이러한 장애물과 장벽들을 부수어 내는 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껏 노력해 봅시다!
그래서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합시다!

"주님, 세상을 떠나 당신 품으로 돌아간 사제 김용민(레오나르도)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 마태14,36)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대림 제2주간 토요일>(12.16)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17,12) 

'엘리야!'

오늘 복음(마태17,10-13)은 '엘리야의 재림'에 대한 말씀입니다. 타볼산에서의 거룩한 변모 사건이 있은 후, 산에서 내려올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마태17,10)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17,11-12)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이 깨달은 것처럼,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엘리야'는 주님 앞에서 길을 닦는 사자(使者)로서 주님의 날이 오기에 앞서 오는 예언자로 여겨졌던 인물입니다.
구약성경의 끝 말씀이 이를 확인시켜 줍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말라3,23-24)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에 앞서 엘리야가 와야 한다고 믿고 있었고, 엘리야가 아직 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예수님이 메시아일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엘리야의 일'을 하는 사자(使者)로서 파견된, '또 하나의 엘리야인 세례자 요한'을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신 메시아도 그렇게 다루다가 십자나무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인내합시다!
그러니 우리도 세례자 요한과 주님께서 겪으셨던 수난에 동참합시다!
그러니 우리도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닦는 사자(使者)가 됩시다!

(~ 마태16,28)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