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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기도회 봉사

쇼펜하우어는 ''공손과 인간성과의 관계는, 따스함과 밀초와의 관계와 같다.''

♡1620 잘못된 맹세는 지금 이 순간 깨버리는 일이 더 합당합니다. - ♡

쇼펜하우어는 ''공손과 인간성과의 관계는, 따스함과 밀초와의 관계와 같다.'' 
《마음이 맑아지는 글》
오늘 내가 헛되이 보낸 시간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입니다. 시간의 아침은 오늘을 밝히지만 마음의 아침은 내일을 밝힙니다. 열광하는 삶보다 한결같은 삶이 더 아름답습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서나 배웁니다. 부족한 사람에게서는 부족함을 넘치는 사람에게서는 넘침을 배웁니다. 스스로를 신뢰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 성실할 수 있습니다. 살다 보면 일이 잘 풀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래가지는 않습니다. 살다 보면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것도 오래가지 않습니다. 소금 3퍼센트가 바닷물을 썩지않게 하듯이 우리 마음 안에 있는 3퍼센트의 고운 마음씨가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몇년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밤에 자다가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무릎 쪽에 커다란 통증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너무 아파서 벌떡 일어나 방의 불을 켜니 이불 위에 지네 한 마리가 보입니다. 지네가 자고 있었던 저의 무릎을 물은 것. 이 상황에서 제일 먼저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또 물릴 수가 있으니 이 지네를 잡아서 처리하고 물린 부위에 벌레 물렸을 때 사용하는 약을 꺼내어 발랐다. 이 지네는 우연히 제 방에 들어오게 되었을 것. 집  뒷편 대나무가 많아 잠결에 화장실 가다가 지네를 밟아 저희부부 몇번 물린적이 있다. 그때 제가 두번째 물려 아파하는데 아내는 ''한번 더 물려 세번물려야 효과가 있다'' 고 말하니 화를 낼수도 없고 지금부터 조심하는수 밖에  없었다. 병원에 가도 약이 없었다. 그저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어디로 들어왔는지는 모르겠다. 자신보다 몇천 배나 큰 거대한 인간을 발견해서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저를 물었겠지요. 설마 이 거대한 인간을 처리해서 이곳을 자기 땅으로 만들겠다는 목적이 있었겠습니까? 아니면 저희부부에 대한 억하심정을 가지고 물었겠습니까? 또 그것도 아니면 좋은 먹이인 줄 알고 물었겠습니까? 단지 생존을 위해서 문 것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프기는 했지만, 지네에 대해 억울하지도 않고 복수를 하겠다는 마음도 들지 않습니다. 그보다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지네가 다시는 제 방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했다. 지네를 잡아 먹는 닭을 키우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받은 상처들도 이런 것이 아닐까요? 지금 이 순간 상처를 받으면 먼저 상처의 치유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상처를 치유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지금 이 순간 상대방을 향한 복수를 비롯한 부정적인 생각에만 머문다면 어떨까요? 가장 필요한 상처의 치유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을 것. 세례자 요한을 죽였던 헤로데 임금에 대한 생각을 해봅니다. 그는 헤로디아의 딸의 춤에 즐거워서 사람들 앞에서 맹세를 합니다. 이에 헤로디아와 그 딸은 자신의 결혼이 옳지 않다고 주장을 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달라고 청하지요. 맹세를 깨지 않기 위해서 소원을 들어주지만, 사실은 그 역시 세례자 요한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부정적인 마음이 작용했을 것. 잘못된 맹세는 지금 이 순간 깨버리는 일이 더 합당합니다. 잘못된 맹세를 지킴으로 인해서 더 큰 죄악으로 치닫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세례자 요한의 말이 잘못된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더 큰 죄악으로 치닫지 않도록 맹세를 깨고 올바른 일을 해야만 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잘못은 바라보지 못하고 맹세를 지켜야만 한다는 의무감만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혼했던 전처 아버지와의 전쟁에서 대패한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지금까지도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잘못된 왕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성인께서는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러면 어떠한 해도 입지 않을뿐더러 더 큰 상도 받게 될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이 순간 사랑으로 살아가는 삶,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삶을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성령기도회에서 강의를 마친 뒤, 입구에서 묵상말씀을 받는분들께 참석에 감사드리며 안수와 인사를 나눕니다. 그런데 어떤 자매님께서 “회장(또는 강사)님, 저는요. 회장님 글을 아주 예전부터 보았습니다. 그래서 직접 뵙고 면담을 청합니다. 대부분 돌아와서 몇일이고 저녁 8시30분이후 전화면담을 해드렸습니다. 특히 낮시간에는 어느 누구라고 전화면담을 하지않고, 농원방문 면담은 하지 않습니다. 또는 회장님 부부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어요.”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저희 부부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십니다. 하지만 맞는 것도 있고, 틀리는 것도 있다. 왜 그럴까요?  오늘 1,620회째 묵상말씀을 전달하다 보니 오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저희부부 역시 변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좋아한다고 말했던 음식을 지금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도 있고, 예전에는 싫었던 것들이 지금은 너무나 좋아하는 것이 되어있기도 합니다. 지금을 속세에 살면서 수도자같이 농원에서 ''일하면서 기도하는 삶'' 을 살다보니 사람은 변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주 잊습니다. 그래서 “너 변했어.” 라고 누가 말한다면, 그 상대가 사람임을 특히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임을 잊어버린 것이 아닐까요?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분은 주님밖에 없다. 지금 이 순간 주님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함은 나 자신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변할 수 있는 나를 바라보며 남 역시 변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변화 역시 모두 인정하며 받아주시는 주님입니다. 타인의 변화를 인정해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바로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아몐.

나약한 죄인들을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우리들 자신은 “둘째 단추를 끼우기 전에 나는 첫째 단추를 끼웠는가?” 라는 물음으로 지금 이 순간 용서받는 기쁨으로 살아가는 축복된 영적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저희부부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사람의 천성과 직업이 맞을때 행복하다.''  - 베이컨 -

♡1621 여러분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하라 - ♡

쇼펜하우어는 ''지성이란 그것을 갖고 있지 않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 고 너희는 말한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마태 23,16-17)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성전과 그 안에 사시는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며,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하느님의 옥좌와 그 위에 앉아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마태 23,21-22) 당시 사람들은 맹세를 할 때 하느님의 이름을 직접 부를 수가 없어서 성전을 두고 맹세를 했다. 그랬다가 맹세를 지켜야 할 때가 되면, 하느님을 두고 맹세한 것이 아니니까 안 지켜도 된다고 발뺌을 했다. 그러면서도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오늘날의 우리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인데, 그 당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일상적으로 그런 억지 주장을 했다. 산상 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또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3-37) 야고보서 저자도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그 밖의 무엇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십시오. 그래야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야고 5,12) 지금 이 순간 말하고 있는 ‘맹세’ 는, 자기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느님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일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예 맹세하지 마라.”, 또 “‘예.’ 와 ‘아니요.’ 라는 말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라고 가르치십니다. 맹세는 악한 일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언제나 항상 진실만을 말하는 사람은 맹세할 필요가 없다. 맹세를 하는 사람은 자기 말이 진실이라는 것에 자신이 없어서 맹세를 하거나, 또는 거짓을 말하면서도 진실인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서 맹세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거짓을 말하는 것도 죄이고, 지금 이 순간 자기 마음대로 하느님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것도 죄입니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죄. 헤로데의 이야기에서 함부로 맹세를 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마르 6,22-23) 여기서 “맹세까지 하였다.” 라는 말은, 자기 말이 거짓이면 천벌을 받아도 좋다고 말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헤로데는 정말로 자기 왕국의 절반을 딸에게 줄 수 있었을까? 그에게는 그럴 권한이 없었다. 로마황제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고서 헛된 맹세를 한 것. 하느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하느님의 예언자를 박해한 헤로데가 “천벌을(하느님의 벌을) 받아도 좋다.” 라고 맹세한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이것은 진심이 조금도 들어 있지 않은 습관적인 거짓말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경우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조금 뒤에 거기 서 있던 이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당신도 그들과 한패임이 틀림없소. 당신의 말씨를 들으니 분명하오.’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베드로는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하기 시작하며,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였다. 그러자 곧 닭이 울었다.(마태 26,73-74)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거짓말을 한 것도 큰 잘못인데, 자기 말이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한 것도 큰 잘못입니다. 그러면 베드로 사도는 자기가 맹세한 대로 천벌을 받았을까? 실제로 천벌을 받지는 않았지만, 천벌을 받은 것보다 더 큰 심적 고통을 겪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평생 그때의 일을 뉘우쳤고, 울면서 통회했다고 전해집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날이 밝자 유다인들은 모의를 하고, 바오로를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하느님을 두고 맹세하였다."(사도 23,12) 바오로 사도를 죽이려고 했던 그 유대인들의 모의는 실패했다.(사도 23장) 그러면 그들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는 맹세를 지켰을까? 하루 정도는 지켰을지도 모릅니다. 자기들의 모의가 실패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자기들의 맹세도 잊어버렸을 것. 그런데 바오로 사도의 코린토 2서를 보면, 하느님을 걸고 맹세하는 말들이 나옵니다. “하느님의 성실하심을 걸고 말하는데, 우리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은 ‘예!’ 하면서 ‘아니요!’ 하는 것이 아닙니다.(2코린 1,18) “나는 목숨을 걸고 하느님을 증인으로 불러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을 아끼기 때문에 아직도 코린토에 가지 않은 것입니다."(2코린 1,23) 우리는 이 말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바오로 사도를 위해서 변명한다면, 자기가 하는 말이 진실이라는 것에 자신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또 거짓말을 감추려고 그런 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믿을 수 있다. 아마도 코린토 신자들이 그런 어법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이어서 신자들에게 맞추려고 그런 것은 아닐까, 라고 짐작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가 하는 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여러분 앞에서 자기 변명을 하고 있다고 여러분은 줄곧 생각해 왔습니까?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또 그리스도 안에서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모든 것은 여러분의 성장을 위한 것입니다.(2코린 12,19) 그래도 어떻든 ‘하느님을 걸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표현입니다. 아멘.

지금, 이 순간에도 온갖 걱정에 사로잡힌 좋은 땅을 가지신 우리들이시여! “지금 이 순간 걱정하지 말라.” 라고 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붙들고 기도하면서 우리들의 좋은 땅에서 서른 배, 예순 배, 백배의 열매를 맺는 은총 충만한 삶을 살아가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저희부부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우리의 인내가 우리의 힘보다 더 많은 것을 성취할 것이다.''  - 버크 -

♡1622 “가르치면서 배웁니다.” - ♡

앤드류 매튜스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자신이 원하는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 보라.''《사랑의 길》나는 죄를 짓고, 나에게 상처를 주고, 나를 모욕하고 내 물건을 빼앗은 형제 앞에서 "내가 옳다." 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가 변명을 하려고 애쓸 때 눈을 감아 줄 수 없다. 그렇다. 그가 내게 잘못을 저지르고, 내 물건을 빼앗고, 나를 때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나는 그 사실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냉정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실은 사실이니까요. 나는 계속해서 냉정하게 생각하면서도, 즉 네가 잘못했고 내가 옳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면서도, 정당성을 주장하지도 정의를 내세우지도 않으며 오히려 힘든 사랑의 길로 매진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결코 궁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왜냐하면 그 형제 또한 내 정당성에 반해 자신의 정당성을 최대한 내세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사실이 기억납니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전쟁이 일어났고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학살 되었다. 왜냐하면 저마다 수호해야 할 자신의 진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결국 우리는 그분의 생각을 깨달아야 할 것. 예수님께서는 정의를 사랑으로 극복하시고 진리를 당신의 희생으로써 쟁취하셨다. 하지만 이제 우리가 차마 용서해 줄 수 없는 부도덕한 형제들에 대해 바로 그 방법, 그 척도를 사용해야할 차례입니다. 지금부터는 우리가 비겁한 행동이나 절도나 퇴폐적 생활을 용서해야 할 또 다른 베드로, 또 다른 강도, 또 다른 막달레나를 만날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알 수 있을 것. 유다인들이 간음한 여인 앞에서 예수님께 제시했던 대로 돌을 던지는 대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우리가 해야 할 차례입니다. "'너의 죄를 묻던 사람들은 아무도 없느냐?'.... '아무도 없습니다.'...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아라.'"(요한 8,10-11) 우리가 다른 사람의 행동과 삶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율법적이고' '틀에 박혀 있고' '죽어 있는' 그런 교회로 다시 돌아갈 뿐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이 세상의 모든 성전과 지성소의 바리사이들처럼 계속해서 미움에 사로 잡혀 있는 가련한 신세가 되고 말것. 죄를 짓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언제 이 죄를 짓게 될까요? 이에 대한 답으로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을 것. 세상 것에 대한 욕심이 커졌을 때, 이기심이 극대화되었을 때,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사라졌을 때……. 이에 대한 답을 명쾌하게 내려주신 성인이 한 분 계십니다. 아오스딩 성인이시지요. 성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랑하는 순서가 바뀌면 죄를 짓게 된다.” 이웃 사랑과 돈 사랑이 있다. 여기서 분명히 사랑의 순서는 이웃이 먼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웃이 아닌 돈 사랑이 먼저가 될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돈이 먼저이기 때문에 이웃을 속여서라도 돈을 벌려고 한다면 이것이 죄가 됩니다. 돈 사랑으로 인해서 어려워하는 이웃을 외면한다면 죄를 짓게 되는 것. 이러한 경우도 생각해보십시오. 친구가 내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이 고민에 대한 비밀을 지켜달라고 합니다. 어느 날 친구들 모임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자신의 인기를 올리기 위해서 그 비밀을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말했다. 이 역시 인기에 대한 사랑이 우정에 대한 사랑보다 더 위에 놓았기 때문에 ‘죄’ 를 짓게 됩니다. 내 사랑의 순서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사랑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지, 아니면 낮은 곳에 있는 사랑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이에 따라 죄 중에 있을 수도 있고, 반대로 은총 속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도 있다. 한 젊은이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라고 묻습니다. 우리의 최종 목표라고도 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의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모두 잘 알고 있다.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떠한 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십계명을 지켜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계명들을 충실히 다 지켜왔다는 젊은이는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라고 묻지요. 주님께서는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라고 하십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준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사랑의 우선순위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재산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의 우선순위가 바뀌었을 때,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할 수 없다는 것. 즉, 하느님의 뜻을 제일 윗자리에 두고서 주님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주님을 합당한 모습으로 따르고 있을까요? 사랑하는 순서를 잘 따져보면 주님을 제대로 따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종종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나 선생님들, 그리고 전문강사들로부터 이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 “가르치면서 배웁니다.” 막달레나 봉사자가 몇년동안 쉬고 있던 여성회관 등 강의를 지난해부터 다시 시작하여 올해도 시작하면서 회원들에게 가르치면서 본인이 현재의 감각을 배운다고 합니다. 저 역시 성령기도회에서 강의하고, 도청 공무원시절 공무원교육원에서 교수로서 강의를 하고 지금도 매일 묵상말씀을 준비하다 보니 이 말에 큰 공감을 하게 됩니다. 특히 면담시 주님을 통하여 회개 그리고 용서와 축복과 사랑실천으로 어두움으로 부터 해방되어 새삶을 살아가는것을 볼때 주님께 감사드릴뿐입니다. 분명히 제가 알고 가르쳐야 확실하게 내 것으로 만들 수가 있다. 솔직히 이해되지 않는 개념이 전혀 없지 않습니다. 그런데 강의나 면담 그리고 묵상말씀을 준비하다 보면 이해되지 않던 개념들이 주님께 기도하면 정리되고 쏙쏙 이해되는 것. 특히 매월 성경전체를 한번이상 듣거나 읽을때 성경에서 그해답을 찾을수 있었고 그러면서 나의 지식을 만들어가는 것이지요. 이는 사랑의 실천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종종 내가 먼저 사랑을 받아야 사랑을 줄 수 있다고 말하지요. 그런데 사랑을 먼저 줘야지 사랑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 수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사랑으로 서로가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아무런 이유 없이 베푸는 사랑, 진정으로 상대방을 위한 사랑을 베풀 때, 내 안에서 사랑의 정의가 분명하게 세워집니다. 지금 이 순간 이웃을 향한 나의 사랑이 먼저입니다. 

예수님의 충만함으로 “이것은 너에게 속한 일이 아니라 내 아들에게 속한 일이다. 네가 믿는 대로 될 것이다.”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새해에는 우리들이 믿고 바라는 그 일들이 주님안에서 이루어지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저희부부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이 시대는 창의력과 혁신, 상상력 그리고 결단력을 요구한다.'' - 존 f. 케네디 -

♡1623 겸손은 이 마음속에 꽉 찬 세상 가치들을 비울 수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 - ♡


새뮤얼 스마일즈는 ''햇빛은 아주 작은 구멍을 통해서도 보이듯 사소한 일이 그 사람의 인격을 설명한다.''
《인간에게 있는 교만》윤리 신학자였던 라인홀드 니이버 (Reinhold Nlbuhr)는 인간에게 있는 교만을 네 가지로 나누었다. 
첫째, 권력적 교만(Authority Pride)이다. 낮을 때는 겸손 하지만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교만이 생길 수 있다. 
둘째, 지적 교만(Intelligent Pride)이다. 모를 때는 모르기 때문에 겸손할 수 있지만, 알게 되면 모르는 사람을 무시하게 되고, 자기만 똑똑한 줄로 생각한다. 
셋째, 도덕적 교만(Moral Pride)이다. 부도덕할 때야 별 수 없이 조용히 지내지만, 조금 이라도 도덕적으로 내세울 것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을 부도덕하게 보고, 자신을 높이 평가한다. 
넷째, 영적 교만(Spiritual Pride)이다. 자신의 신앙적 행위라든지 기도, 성경읽기 봉사등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조금이라도 나은 점이 있으면 그것을 자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만큼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형편없이 보는 경우이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해가면서 끊임없이 갖게 되는 것은 대인관계입니다. 대인관계를 통해 상대방이 나에게 인상 깊게 풍겨주는 장점을 말한다면 여러 가지가 있을 것. 그 장점 중에 장점은 겸손의 덕목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겸손한 성품을 가진 사람치고 누구에게나 호감과 환영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은 주위에 적이 없고 모든 사람의 벗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겸손과 신앙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요? 예수님은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어느 곳에서나 어린아이들의 마음은 가장 순수하고 깨끗합니다. 남을 속이지도 않고 앞뒤를 계산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순수함의 상태 그대로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가져야 할 하느님 앞에서 겸손을 이런 어린아이에게만 있는 순진무구함에다 비유를 하신 것. 성경에서 첫 인간 아담과 하와가 지은 최초의 죄를 원죄라고 합니다. 그 원죄의 내용은 다름 아닌 하느님에 대한 교만을 나타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알고 보면 사람이 짓는 여러 종류의 죄는 모두 교만에 뿌리를 두고 있다.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의 마음속으로부터 계속 일어날 수 있는 교만을 거두어내지 않으면 절대로 하느님을 만날 수 없는 것.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라고 마태오 11,25에 기도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역시 마음이 겸손하지 못한 사람은 하느님을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내용을 바꾸어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만을 기록한 복음서들을 보면 여러 곳에서 이런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부하군인 백 명을 거느린 로마군 장교 백인대장의 얘기가 그 한 예입니다. 백인대장은 자기 집안의 종이 중풍에 걸려 신음하고 있을 때 예수님을 직접 뵙고 자기 종의 치유를 간청했었다. 백인대장은 식민지 이스라엘을 통치하러 온 로마 군대의 지휘관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갖고 있는 신분상의 우월감이나 사회적인 특권의식도 없이, 또한 여러 사람 앞에서 위신이나 체면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기 종의 병치유를 위해, 예수님 앞에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 란 말로 겸손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백인대장의 이런 겸손의 마음은 주님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졌고 이와 같은 그의 신앙은 예수님을 가장 인격적으로 만나게 할 수 있었던 원동력입니다. 백인대장에게 있어서 그의 겸손은 예수님께로 가는 신앙의 열쇠와도 같은 것이었다. 백인대장과는 반대로 평소 돈독한 신앙인으로 자부했던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은 자칭 열심하다는 신앙심과는 다르게 예수님을 신앙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가장 큰 원인을 생각해보면 그들은 언제나 교만심과 쓸데없는 아집에 싸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가장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만 내리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이고, 선물입니다. 흔히 마음을 비우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는 과도한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된다는 뜻으로 통합니다. 현세에 대한 가치욕망으로 그 마음이 꽉 차있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이 들어오셔서 머물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이 없다. 하느님 앞에 겸손은 이 마음속에 꽉 찬 세상 가치들을 비울 수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 겸손은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비울 수 있는 것과 통하지요. 돈과 과학기술이 하느님 대신으로 우상화 되어 있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면서 어렵겠지만 누구라도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신앙의 첫 관문을 따주는 내 안의 열쇠와도 같은 겸손지덕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내게 이런 삶을 살게 하여 주소서. 연약할 때 자기를 알고 힘을 기를 줄 아는 여유와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는 대담성과 정직한 패배에 부끄러워 하지 않고 태연하며 승리에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을 갖게하여 주소서. 사리를 판단할 때 고집으로 인하여 판단을 흐리지 않게 하고 생각하고 이해하여 사심이 없는 판단을 하며 또한 평탄하고 안이한 길만이 삶의 전부라 생각치 말게 하고 고난에 직면할 때 분투 노력할 줄 알며 패자를 관용할 줄 알도록 가르쳐 주소서. 마음을 항상 깨끗이 하고 목표는 높이 설정하되 남을 정복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다스릴 줄 알며 장래를 바라봄과 동시에 지난 날을 잊지 않게 하여 주소서. 이에 더하여 삶을 엄숙하게 살아감은 물론 유머를 알고 삶을 즐길 줄 알게 하소서. 자기 자신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게 하시고, 겸허한 마음을 갖게 하여 참된 위대성은 소박함에 있음도 알게 하시고, 참된 지혜는 열린 마음에 있으며 참된 힘은 온유함에 있음을 명심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먼 훗날 내인생 헛되이 살지 않았노라고 말할 수 있게 하여 주소서.

우리들이 뱀처럼 간사한 사람을 만나고, 독처럼 위험한 일을 만날 때,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할 것이다.’ 라는 확실한 믿음으로 하느님께 의지하면서 견디어 승리하는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저희부부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겨울이 되어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전나무가 얼마나 푸른가를 알 수 있다.'' - 논어 -

♡1624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하면 그 믿음은 사탄의 믿음인 것입니다. - ♡

라데이러는 ''양심은 어떠한 과학의 힘보다도 강하고 현명하다.''
《걸림돌과 디딤돌》길을 가다가 돌이 나타나면 약자는 그것을 걸림돌이라 하고 강자는 그것을 디딤돌이라고 말한다. 토마스 카알라일의 말입니다. 걸림돌과 디딤돌은 저의 강의내용이나 말씀중에도 자주 등장을 하는 말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수 많은 삶의 돌을 만납니다. 그때마다 그 돌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집니다. 그 돌을 어떤 사람은 걸림돌이라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디딤돌이라고 말합니다. 삶에서 오는 모든 장애를 불평과 원망의 눈으로 보는 것과 또 그것을 발판으로 재기와 도약의 발판으로 삼는 것과는 분명 큰 차이가 있을 겁니다. 지금 이 순간도 장애의 요소와 같은 돌을 곳곳에서 만나게 되겠지요. 그런 돌들은 생활에 무수히 널려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깔려있는 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 마음의 자세가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나를 힘들게 하고 뒤쳐지게 하는 것들이라고 생각해온 모든 걸림돌을 오늘부터는 역으로 발판을 삼아서 디딤돌로 생각할 수 있다면 훨씬 편안하고 행복할 수 있겠지요. 하느님! 감사합니다. 오늘의 모든것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디딤돌"로 정합니다. 감사와 찬미 영광 영원히 받으소서! 아멘! 한 목사의 아내가 암이 걸려 온 몸에 퍼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병원에서는 그 여인에게 즉시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권했다. 그러면 치료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수술을 받는 대신 한 교회에서 열리는 치유 집회에 참석하였다. 믿음을 선택한 것. 그리고 자신의 차례가 되자 병의 치유를 받기 위해 앞으로 나갔다. 거기서 그녀는 치료의 약속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이 완전히 치유되었다고 믿고 외쳤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렸다. 집으로 돌아와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을 공공연히 떠벌였다. 다른 곳에서도 그렇게 하였다. 그러나 3개월이 못되어 그 여인은 죽고 말았다. 또 다른 목사는 자신의 치유의 능력에 대해 매우 확신을 하였고 그 힘을 믿지 않으면 신앙이 없다고 꾸짖었다. 목사의 아내가 병이 걸려 치유의 기도를 해 주었는데 아내는 그 일이 있은 후 10일 뒤에 죽었다. 로이드 존스의 ‘로마서 강해 5권’ 에 나오는 사례들이라고 합니다. 다음 생명나무 카페에서 인용하였다. 이렇듯 믿음인 것 같은데 아닌 경우가 있다. 우리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과 지옥에 떨어지는 믿음을 지금 이 순간 구분할 줄 알아야합니다. 교회는 믿는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기 이전에 믿음에 대해 시험하십니다. 교회의 반석이 누가 되어야하는지를 알아보시려 하신 것입니다. 그 방법으로 당신을 누가 제일 정확하게 알아보는지 시험하십니다. 어떤 이들은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 혹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 온전한 믿음을 지닌 사람들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던 중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믿음이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알려주시기 위해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듯 믿음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지 않고서도 믿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다. 다른 복음에서는 마귀들도 예수님을 알아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 루카 4,31) 이때 예수님은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고 꾸짖으십니다. 예수님을 알아본다고 해서 다 성령으로부터 비롯된 믿음을 지녔다고는 할 수 없다. 지옥에 있는 마귀들도 하느님이 계심을 알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던 아담과 하와도 하느님이 계심을 알았다. 그래도 쫓겨났다. 다행스럽게도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한 뒤 곧 이어 사탄이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분명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는 상태인데도 어떻게 바로 사탄이 되어버렸을까요? 그 이유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라는 말씀에 들어있다.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하면 그 믿음은 사탄의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을 통해 자신을 들어 높이고 있다면 그 믿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믿음을 가질수록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이 줄어들어야 합니다. 더 겸손해져야하고 더 낮아져야 하며 자신은 더 의미 없어져야 합니다. 내가 받은 은총으로 나를 영광스럽게 하고 있다면 그 믿음은 사탄의 믿음인 것입니다. 사탄의 무리들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하느님을 이용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그분의 뜻이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또한 바라야 합니다. 모세를 통해 하느님은 광야에서 목말라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물을 주시기로 하셨다. 하느님은 그냥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오도록 명령만 하라고 했지만 모세는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지팡이로 그 바위를 두 번 칩니다. 자기도 무슨 일을 해야 이스라엘 백성에게 면목이 슬 것 같아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만큼 믿음이 줄어든 것입니다. 비록 물이 흘러나오기는 했지만 모세와 아론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한 까닭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이렇듯 믿음은 ‘영광’ 과 직결됩니다. 나의 영광을 추구하기 위한 믿음은 사탄의 믿음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영광만을 위한 믿음은 천국의 영광을 받는 믿음입니다. 나의 영광을 위한 믿음은 하느님을 이용하기 위한 단순한 지식에 불과합니다. 내가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라고 하는 것처럼 주님의 영광만을 바라고 믿는지, 아니면 하느님을 통해 내가 무언가 부족한 것을 채워 세상에서 인정받고 싶어 하지는 않는지 살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손을 뻗어라.” 오늘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우리들 안에 몸과 마음이 지치지 않는 말씀의 능력이 있음을 믿고, 메마르고 오그라든 곳이 깨끗하고 성하게 회복되는 기쁨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저희부부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너의 의무를 다하라. 그리고 나머지는 하느님께 맡겨라.'' - 코네일 -

♡1625 위선을 통해서는 ‘불행선언’ 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다. - ♡

논어는 ''사람이 멀리 생각하는 혜안이 없으면 반드시 가까운 근심이 있다.''《구별과 차별은 다릅니다.》차별은 등급이 지게 가르는 것이고(discrimination), 구별은 성질 또는 종류에 따라 서로 따로 따로 구분하는 것(classification)을 의미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구별되어야 할 대상이지 차별되어야 할 대상은 아닙니다. 특히 구별이 있어야 질서가 유지됩니다. 구별이 잘 된 나라는 잘 살고, 구별이 잘 된 직장, 가정은 화목합니다. 자신의 할 일과 타인의 할 일을 잘 알아서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요행을 바라는 이들은 구별을 차별로 뒤집어 이해하여 오해하고 또한 그 오해로 인해 수많은 부작용을 만들며 살아갑니다. 집착과 몰두는 다릅니다. 집착은 한 가지에 빠져 주변을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이고, 몰두는 한 가지에 집중하되 앞뒤좌우 주변도 함께 살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집착은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루기 어렵지만, 몰두는 언제든 누구와든 멋진 하모니를 이룰 수 있다. 비난과 비평은 다릅니다. 비난은 미워하는 감정을 갖고 상대를 몰아 정죄하는 것이지만 비평은 관심을 갖고 상대를 바로 세워주려는 것입니다. 비난은 감정을 갖고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무너뜨리기 쉽지만 비평은 상대를 존중하고 대안을 제시하면서 잘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회는 비평을 하고도 불이익을 당하는 사회이니 아예 벙어리가 되어야 한다. 자신감과 교만은 다릅니다. "나는 똑바로 하고 있는데 너(당신)는 왜 그 모양이야?" 혹은 "나는 아는데, 너는 모른다" 는 식의 태도는 교만입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당신은 어떻습니까?" 하는 것이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며, 친절하고 성숙한 태도입니다. 애플의 창시자 스티브 잡스는 췌장암에 걸려서 생을 마감했지요. 사실 그가 2003년 10월 처음 암으로 진단을 받았을 때, 의사들은 아직 종양 크기가 작으니 당장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권했다. 그러나 스티스 잡스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물건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인지 자신의 병 역시 고칠 수 있다고 믿었나 봅니다. 수술을 거부하고 대체 의학을 선택했다. 수술과 항암치료에 대한 부작용을 겪기보다는 효과를 보았다는 사람들이 선택한 대체 의학을 통해서 치료하기로 한 것입니다. 하지만 암은 계속 성장하여 퍼져나가 간까지 전이되어 어쩔 수 없이 여덟 달 뒤 수술에 동의했지만, 그 누구도 그를 구할 수가 없었다. 스티브 잡스 본인도 그의 자서전에서 후회했던 결정으로 수술 거부한 것을 뽑고 있다.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세상이 깜짝 놀랄만한 아이폰을 만들었던 힘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 들어야 할 때는 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이 아닌 이상 자신의 판단이 절대적으로 옳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도 듣지 않으려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여기에 문제는 자기 자신만이 여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남들까지 설득을 시켜서 자신의 영역에 끼워 넣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같이 살자.’ 라는 마음이 아니라 ‘같이 죽자.’ 라는 마음은 아닐까요? 이는 단순히 사람들에게 자기처럼 하라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잘못된 것인지를 알면서도 ‘남들도 다 하니까.’ 라면서 똑같이 행동할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예를 들어 교통신호를 받아서 멈췄다. 그런데 옆 차선에 있던 차가 신호를 무시하고 지나갑니다. 또 그 뒤의 차도 신호를 무시하고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뒤의 차는 ‘왜 가지 않느냐?’ 면서 경적을 울립니다. 신호는 분명 정지 신호인데도 남들이 하니까 나도 따라 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지금 이 순간 바로 나 자신의 말과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직접 강요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지금 하는 말과 행동만으로 충분히 영향을 미칠 수가 있다. 특히 그 사람의 지위가 남다르다면 어떨까요? 더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을 향해 불행선언을 외치십니다.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처럼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들의 단식과 기도와 자선은 그 누구도 쫓아가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위선을 보셨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 남들보다 자신이 더 낫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삶, 그러한 삶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닌 것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도 영향을 받아 커다란 죄에 빠지게 한다는 것이었다. 몸과 마음으로 진정으로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세상에 좋은 모범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위선을 통해서는 ‘불행선언’ 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다. 면담때 자주 예를 들어 이야기 합니다. ''어느분께서는 물(고해성사 또는 면담)을 잘 안 마십니다. 그런데 물을 많이 마셔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됩니다. 많이 마셔야 몸의 노폐물(칠죄종)을 배출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말을 듣게 되면 마셔야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실천이 잘 안 됩니다. 야고보 사도는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밑음이다.' 합니다. 이런 고민을 어떤 의사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그분의 소변 색깔이 진한지 그리고 갈증을 느끼고 있는지를 물어보십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자 그러면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몸에 수분이 정말로 부족하면 신장에서 밖으로 배출하지 않고 수분을 꽉 잡아 둔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변 색깔이 진해지는 것이지요. 또한 수분이 부족하면 몸은 본능적으로 갈증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따라서 소변 색깔도 정상이고, 갈증도 없으니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애플의 창시자 스티브 잡스처럼 고집을 이야기 합니다. 그래도 '물을 많이 마시라고 하지 않습니까?' 라는 질문을 던졌더니, '우리 몸의 70% 이상이 이미 물입니다. 더 마신다고 그만큼 더 좋아지지 않아요.' 라고 대답합니다. 굳이 억지로 물을 마실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소변 색깔이 진해지거나 갈증이 생기면 얼른 물을 마셔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주님이 필요할 때가 있다. 내 마음(영ㆍ육ㆍ혼)에 이상이 있을 때, 심한 영적 갈증을 느끼게 될 때는 지금 이 순간 얼른 주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야훼이레 축복”에 믿음으로 감사하면서 올 한해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선하신 주님의 뜻대로 은총과  축복이 되고, 또한 작년에 아팠던 것들이 올해에는 치유와 회복되는 축복된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저희부부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떤 귀한 바람이불어도. 순풍이 아니다.'' - 몽테뉴 -

♡1626 “걸림돌이 되지 말고 반석으로서 살아라.” - ♡

타고르는 ''명성이 실상보다 덜 빛나는 사람은 복이 있다.''《쌓일 때와 버릴때》이사를 하고... 짐을 정리 할 때마다 한 가지깨닫는 것이 있다. 많은 것들이 모르는 사이 서서히 쌓이지만 버릴 때는 한 번에, 그것도 결심을 하고 버려야 한다는 것. 우리 안에도 좋지 못한 것들이 많이 쌓입니다. 게으름, 불만, 교만, 욕심, 불안, 같은 것들이 날마다 서서히 쌓여갑니다. 이것들을 버리기 위해서는 단단히 결심을 하고 조금씩이 아니라 한꺼번에 버려야 합니다. 안 좋은 것은 그냥 두어도 쌓이지만 좋은 것은 날마다 결심하고 힘써 노력해야 얻을 수 있다. - 정용철님의 "희망편지"중에서-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뒤에 금방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은, ‘변덕’ 도 아니고, 반석으로 삼으신 일을 취소하신 것도 아닙니다. 이 일을 베드로 사도 쪽에서 생각하면, 예수님의 수난 예고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람에 그만 교회의 반석에서 걸림돌의 위치로 떨어지고 만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반석’ 을 ‘걸림돌’ 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반석’ 이 스스로 ‘걸림돌’ 로 전락했다는 것. 예수님의 뒤를 충실하게 따르면 반석으로서 살게 되지만,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가로막으면 걸림돌이 됩니다. 이 일을 예수님 쪽에서 생각하면, 베드로 사도를 반석으로 삼으실 때 당신이 하셨던 약속을 지키신 일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악의 세력으로부터 너와 교회를 지켜 주겠다.” 라는 약속인데,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라고 베드로 사도를 꾸짖으신 것은, 약속하신 대로 사탄의 세력이(악의 세력이) 그를 건들지 못하도록 막아주신 일입니다. “내게서 물러가라.” 라는 말씀은 “내게서 떠나라.” 라는 뜻이 아닙니다. 원문대로 직역하면, “내 뒤로 가라.” 인데, “제자의 본분을 지켜라.”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라는 말씀은, “사탄의 유혹에 흔들리지 말고 제자의 본분을 지키면서 내 뒤를 따라라.” 라는 뜻이 됩니다. 베드로 사도를 유혹하는 사탄을 쫓아내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어떻든 이 말씀은 베드로 사도를 보호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내게서 물러가라.” 라는 말씀이 “제자의 본분을 지켜라.” 라는 뜻이기 때문에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라는 말씀도 “너는 내 앞에서 치워버려야 할 존재다.” 라는 뜻이 아니라, “걸림돌이 되지 말고 반석으로서 살아라.” 라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라는 말씀도, 단순히 베드로 사도의 잘못을 꾸짖으신 말씀이 아니라, “너는 반석이니, 사람의 일만 생각하지 말고 하느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여라.” 라는 훈계 말씀이 됩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가 걸림돌로 전락한 모습이 한 번 더 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어서 재판을 받으실 때,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일이 바로 그것. 그때 베드로 사도가 했던 말,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마태 26,72.74) 라는 말은, 자기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말이기도 하고, 자신을 예수님께서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을 부정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교회의 반석이라는 것을 부정한 것은 스스로 교회의 걸림돌이 된 일과 같다. 그러면 베드로 사도가 걸림돌로 전락한 일이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가로막았나? 인간은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막지 못합니다. 인간들 때문에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막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긴 하지만, 결과를 보면 언제나 항상 하느님과 예수님의 뜻과 계획대로 됩니다. 베드로 사도가 걸림돌로 전락한 일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가로막은 일이 아니고, 실제로는 그 자신이 구원받는 길을 스스로 가로막은 일입니다. 결국 베드로 사도 자신이 자신에게 걸림돌이 된 것. 물론 그는 곧바로 회개함으로써 걸림돌 상태에서 벗어났다. 그때에도 예수님의 보호가 있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체질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루카 22,31-32)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뒤에 그 혼자서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그가 충실하게 반석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그를 도와주셨고, 보호해 주셨다. 베드로 사도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이 다 그렇게 예수님의 도움과 보호를 받고 있다. 신앙생활은 ‘나 혼자서, 나 혼자만의 힘으로’ 하는 생활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하는 생활이고, 예수님의 도움과 보호를 받으면서 하는 생활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의 계명을 실천하기가 어렵고 힘들다고 생각된다면, 그 계명을 주신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곧바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다음에 그것을 지키라고 강요하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잘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이고, 그것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입니다. 또 신앙생활을 하다가 외롭고, 슬프고, 힘든 일을 만나는 때가 있다. 그런 때에도, 아니 그런 때일수록 예수님께서는 더욱더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세 번이나 베드로 사도에게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시고, 또 “내 양들을 돌보아라.” 라고 말씀하신 일은(요한 21,15-17),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에 변함이 없음을 확인해 주신 일입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베드로 사도의 ‘자격’ 에 대해서 시비를 거는 사람도 있고, 교회의 반석인 사도가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베드로 사도가 겪은 일에 대해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위대한 사도도 그런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니 우리는 오죽하겠는가?” 베드로 사도는 걸림돌로 끝나버릴 수도 있었던 위기들을 잘 극복하고, 훌륭한 반석으로서 생을 마쳤다. 그래서 더욱 위대한 사도입니다.

오늘 비록 힘들어도, 오늘 비록 가난해지더라도, 거룩한 축복으로 희망의 그물을 던지며 예수님과 함께 하늘나라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저희부부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서로의 차이를 긍정적으로 이용하라.'' - 달라이 라마 -

♡1627 '만약' 은 '절망' 이고 '다음' 은 '희망' 이다. - ♡

오명철(동아일보 기자)은 ''신은 결코 한 인간에게 모든 행복을 허락하지 않는다.''《만약 과 다음》혹시... 후회해 본 일이 있는가요? 지나간 일에 대해 후회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시간 낭비가 아니던가요? 뉴욕의 저명한 한 신경정신과 의사는 퇴임 연설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나는 그동안 환자들을 만나면서 나의 생활방식을 바꾸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준 스승은 환자들이 입에 담는 "만약" 이란 두 글자 였다. 나와 만난 환자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지난 일을 회고하고 그때 반드시 해야 했는데 하지 못했던 일을 후회 하면서 보내는걸 보았다. "만약,,, 내가 그때 몸 관리를 잘 했더라면..." "만약,,, 그때 그 의사 말을 잘 들었더라면..." 하지만 그렇게 후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엄청난 정신적인 소모를 가져올 뿐 이지요. "차라리 이렇게 해보는 것이 어떨까요? 지금 이 순간부터 당신이 습관처럼 쓰는 "만약" 이란 말을 "다음" 이라는 말로 바꾸어 보세요." "다음에 기회가 오면 반드시 그렇게 할 거야!"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미래를 향한 희망이 생겨 납니다. 그것은 또한 생의 힘이 되어 지병이 호전되어 가는 사실을 발견 할 수 있었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과거에 대한 후회 보다는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살아야 합니다. 절대로 이미 지난 일을 가슴에 담아두지 마세요. 문득, 지난 일을 후회하는 마음이 들면 이렇게 말하세요! "다음엔 그런 바보같은 행동을 하지 않을거야." 이렇게 한다면 과거의 후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며 동시에 당신의 소중한 시간과 정열을 현실과 미래에 쏟을 수 있을 것. '만약' 은 '절망' 이고 '다음' 은 '희망' 이기 때문입니다... 똑똑한 지식인들, 특별히 과학자나 최첨단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는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들 가운데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합니다. 합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믿는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실지 모르겠다. 그러나 합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기에 믿는다고 하십니다. 그들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논리로는 우리의 작은 뇌를 사용해서 밝힐 수 없는 진실이 많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훨씬 더 합리적이다.” 어떻습니까?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이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그 존재를 믿는 사람이 훨씬 더 합리적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자신을 스스로 합리적이라고 말하면서도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나아갑니다. 하느님은 당연히 내 존재를 뛰어넘는 분이신데, 자기 생각을 벗어나면 이해할 수 없다면서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분입니까? 지금 이 순간도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선포하시면서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지금 이 순간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마치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고 전합니다. 실제로 주시한 사람은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하느님의 사랑을 제대로 주시한 것. 우리 역시 이런 모습을 갖는다면 어떨까요? 반면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라면서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뛰어넘는 분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들이 거룩한 예언자나 아주 비범한 인물에게서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있었던 것. 이 믿음은 자신들만의 생각일 뿐입니다. 엘리야가 사렙타 과부에게만 갔고, 엘리사가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고쳐 주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의 생각을 언제나 뛰어넘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하느님의 사랑을 제대로 주시하고 있을까요? 그분 안에서 희망과 기쁨을 간직하고 있을까요? 혹시 좁기만 한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 ‘믿을 수 없다’ 라고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지금 이 순간 부모와 자녀 갈등으로 힘들어하는 분들이 참으로 많은 것 같다. 많은 교육 전문가들의 말을 들어보면 억압과 방임을 통해서 갈등이 더욱더 심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먼저 최초의 자기주장을 펼치는 시기인 사춘기 때 30%를 놓아주십시오. 성인이 되면 또 30%를 놓아주는 것. 그래야 시행착오를 통해 자기 삶을 온전히 책임지는 성인이 될 수 있다. 또 30%를 가정을 이루었을 때 놓아주어야 합니다. 이제 몇 %가 남았나요? 10%가 남았지요. 남아 있는 이 10%의 끈으로 장성한 자녀와 관계를 맺는 것.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었음에도 90% 이상을 통제하고 있다면 갈등이 더욱더 커질 수밖에 없다. 또한 아직 사춘기도 되지 않았는데도 자유를 주겠다고 90% 이상을 풀어놓았을 때도 나중에 성인이 되어 어렸을 때 사랑을 받지 못했다면서 갈등이 생긴다는 것. 특히 면담때 부모를 부터 나는 사랑받지 못했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사랑을 실천하세요. 부모와 자녀의 갈등. 이 갈등을 풀기가 정말로 어렵다. 그러나 이 방법을 기억하면서 실천해 보면 어떨까요? 분명히 효과가 있을 것. 여기에 지금 이 순간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사랑을 실천한다면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 우리들이 있는 그 자리에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여 저 하늘 펼치신 주님께서 주신 생명과 사랑의 귀한 은혜를 선물로 받으시고, 기도와 찬미하는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저희부부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서툰 의사는 한번에 한 사람을 해치지만, 서툰 교사는 130명을 해친다.'' - 보이어 -

♡1628 내면에 굳은 심지가 있는 사람은 결코 당황하지 않습니다. - ♡

이드리스 샤흐는 ''자신의 약점이나 모자라는 점을 숨기고 감추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에게는 결국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가끔 꿈 얘기를 듣습니다. 좋은 꿈을 꾸어서 복권을 샀다는 사람이 있다. 반면 무서운 악몽에 시달려 밤잠을 설치고 그 꿈 때문에 마음이 흔들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꿈은 꿈입니다. 아무리 좋아도 꿈이고 아무리 험해도 꿈입니다. 그러므로 꿈은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좋게 생각하고 기뻐하고 또 준비하면 되는 것. 꿈에 끌려 다녀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꿈대로 안 좋은 일이 생기게 됩니다. 좋지 않은 꿈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꿈을 다스리지 못하고 그 꿈에 매여 집착하기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것. 그러므로 꿈을 꿈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물론 때로는 죄를 짓고 그 죄책감 때문에 꿈을 꾸는 사람도 있다. 좋지 않은 일을 행하여서 악몽에 시달립니다. 안 좋은 일이 생기면 하느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보다 본인 스스로 불안한 마음과 죄책감으로 몸을 괴롭히기 때문에 상황이 나빠지는 것.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그 원인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저지른 과오나 잘못이 있다면 그 잘못에 대해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용서를 넘어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셨다. 지금 이 순간 우리의 허물에 대해서도 언제나 용서해 주시고 얽매인 것을 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죄의 고백을 통해 용서의 은총을 입어야 합니다. 자유를 회복해야 합니다. 죄의 종으로 익숙해져서 그냥 그대로 편안함을 즐겨서는 안 됩니다.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 대한 여러 소문을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났다” 고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하면서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였다. 헤로데가 불안해하고 당황한 것은 당연합니다. 사람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소유한 왕이라 할지라도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 죄 값을 스스로 치를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존재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죄 때문에 예수님이 무서워진 것. 사랑을 전하러 오신 분을 심판관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심판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잘못한 것이 부끄러워서 그렇습니다." 내면에 굳은 심지가 있는 사람은 결코 당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기뻐합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1요한 1,9) 우리의 하느님은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에제33,11) 혹시라도 마음의 불안이 있다면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고 주님의 품안에서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혹 지금 이 순간 두렵습니까? 지금 이 순간 거짓을 벗어 버리고 진리를 추구하십시오! 용서하시는 주님과의 깊은 만남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이득형씨는 '권위' 와 '권력' 을 설명합니다. 
♡ 권위는
1) 인간적인 매력과 인격에 매어지는 것
2)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따라옴
3) 자리에 관계없이 평가가 높아감
4) 죽은 뒤에도 없어지지 않음
5) 지도자 선택의 첫째가는 기준이 됨
♡ 권력은 
1) 직제상 지위(자리)에 주어지는 것
2) 사람들을 덮어놓고 복종시킴
3) 자리가 높아질수록 더 강해짐
4) 권위가 없는 사람일수록 더 휘두름
5) 그 자리를 떠나는 동시에 없어져버림 
권위와 권력은 분명히 다릅니다. 헤로데는 권력을 잡았지만 권위는 없었다. 헤로데는 권력을 가지고도 불안해하였다. 권력을 이용하여 많은 사람에게 폭력을 사용했고 특히 당시 유다인들이 최고의 예언자로 알고 따르던 세례자 요한을 죽였는데 그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소리도 들렸고 여러 소문이 있었기에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어도 ‘도둑이 제 발이 저린다.’ 고, “때린 놈은 발을 오그리고 자도 맞은 놈은 발을 펴고 잔다’ 고 합니다. 자기가 한 짓을 알기에 늘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것. 그러므로 우리는 세속적인 권력이 아니라 권위를 지니고 살아야 하겠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혹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지배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권력의 마음입니다. ‘돈이면 다 된다’ 는 식의 마음으로 이웃에게 재물이나 지위를 가지고 대접 받고자한다면 그에게서 권위는 찾을 수 없을 것. 권위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우리는 그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로마13,1-2). 주님께서 생명을 주관하는 권위(루가12,5)를 가지셨고, 말씀대로 이루시는 힘을 지니셨다(요한5,39). 또한 가르침대로 행하심으로써 권위를 지키셨다. 우리도 삶의 자리에서 각자의 권위를 키워야 하겠다(2고린10,8).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자녀는 자녀로서, 아내는 아내로 남편은 남편으로서의 위치기 있다. 각자의 위치에 걸 맞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권위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직장이든 가정에서든 각기 권위가 살아나기를 기원합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어떤 시련과 곤경에 처하더라도 주님께서 늘 우리들과 함께 해주셨음을 믿고, 우리들이 임마누엘 주님께 감사 찬미 드리는 참으로 은혜로운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저희부부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자기의 결점만을 걱정하고 있는 사람은, 인간이 갖는 결점을 깨닫지 못한다.''  - 탈무드 -


♡1629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마라.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 - ♡

체스터필드는 ''장점과 훌륭한 예의는 어디서나 번영할 것이다.''
《오늘 이 순간은 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현재를 즐기려면 오늘이라는 ‘하루’ 는 한 번뿐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합니다. 우리는 ‘오늘’ 과 같은 날이 “내일” 다시 찾아온다고 생각하지만, 내일은 내일로서 오늘과 다르며, 그나마 단 한 번뿐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즐거움을 잡으려고 지나치게 서두르다 못해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 쇼펜하우어 - 지나친 서두름은 우리가 행복하게 살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서드르다 보면 우리는 순간에 멈추어서 우리가 지금 이 순간 경험할 수 있는 것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순간에 온전히 집중할 때,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느낄 수 있다. 그 순간 그들은 자신들의 삶이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다. "내 안의 기적을 만나라!" - 안젤름 그륀 신부 -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바로 "오늘" 살아있다는 것. 세상 것에 너무나 마음을 쓰며 마치 천년을 살아야 하듯이 살고 있다. 그러나 인생은 덧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4,14)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마라.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 (잠언27,1) 우리들은 바로 지금 "오늘" 에 만족하고 기쁨을 누리며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1티모6,6) ‘하루밖에 살 수 없다면(시퍼)….’이라는 시를 묵상했다. 하루는 한 생애의 축소판 아침에 눈을 뜨면 하나의 생애가 시작되고 피로한 몸을 뉘어 잠자리에 들면 또 하나의 생애가 마감됩니다. 우리가 단 하루밖에 살 수 없다고 가정해 봅시다. 눈을 뜰 때 태어나 잠들면 죽는다는 하루밖에 살 수 없다면 나는 당신에게 투정 부리지 않을 겁니다. 하루밖에 살 수 없다면 당신에게 좀 더 부드럽게 대할 겁니다. 아무리 힘겨운 일이 있더라도 불행하지 않을 것. 하루밖에 살 수 없다면 더 열심히 당신을 사랑할 겁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모두 사랑하기만 하겠다. 그러나 정말 하루밖에 살 수 없다면 나는 당신만을 사랑하지 않을 겁니다. 죽어서도 버리지 못할 그리움 그 엄청난 고통이 두려워 당신 등 뒤에서 그저 울고만 있을 겁니다. 바보처럼…. 단 ‘하루밖에 살 수 없다.’ 라면 우리들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미움과 원망으로 다른 사람들을 만나겠다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 다투거나 용서하지 못했던 사람이 있었다면, 그 하루 안에 용서하고 화해하기를 원할 것. 그리고는 생각할 것. ‘하루밖에 살 수 없는데….’ 할 수 있는 그 사랑을 왜 평소에는 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는 걸,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걸 왜 진작 못 했을까?” 앞으로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남은 시간 동안 더 많이 챙기려는 욕심이 용서를 더디게 하고  화해를 머뭇거리게 하고 사랑을 주춤하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의 보호하심과 자비가 베풀어짐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거라.” 그러자 마귀는 그 사람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나갑니다. 당시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죄”가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래도 괜찮아…!” 하시면서 죄가 있는 사람을 벌하지 않으시고 더러운 마귀만 쫓아내셨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누구인지 자명하게 밝혀졌다. 그것도 더러운 마귀의 영이 고백합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권위가 있는 하느님의 능력이신 분이십니다. 그 하느님의 능력을 조건 없이 베풀어주십니다. 그래서 저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고 하신 것. 세상 모든 풀의 잎사귀 하나하나마다 그 잎사귀를 보호하는 천사들이 있고, 그 잎사귀를 향해 천사들은 이렇게 속삭인답니다. “무럭무럭 자라렴! 내가 보호해 줄게.” 그래서 우리들의 머리카락 하나하나에 천사를 붙여주신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세상 끝날까지 보호해주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아멘. 우리는 성전에 들어가서 ‘성수를 찍을 때’ 주님의 보호하심과 자비의 능력을 입게 됩니다. “주님, 이 성수로 세례의 은총을 새롭게 하시고 모든 악에서 보호하시어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게 하소서.” 아멘. 우리가 성수를 찍고 기도하면서 생각이 열리고 마음이 열어지고, 예수님의 권위와 힘(능력)으로 우리들이 바라는 뜻을 이루어주심을 믿습니다. 아멘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 안에 ‘열정’ 이 있어야 합니다. 그 ‘열정’ 은 ‘하느님 안에 머문다.’ 라는 뜻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나만 힘든 것 같고, 나만 외로운 것 같고, 나만 지치고 무너질 때 조용히 우리들 마음 안에 있는 ‘그래도…. 괜찮아…!’ 라는 말씀으로 찾아오시어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손을 내미시며 말씀하실 것. “그래도 괜찮아! 너에게는 내가 있잖아!”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그래도. 괜찮아!”라는 말씀으로 주님의 권위와 능력을 입고, 우리들이 바라는 소망을 이루시는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저희부부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책망받고 고쳐야 될 것은 없습니까? 있으리라 받아들이고 자신이 직접 찾아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 톨스토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