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0 “그밖에 조금 더.” - ♡ 로버트 앨런은 ''가장 중요한 사실은 당신이 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지혜(智慧)와 유머(Humor)》어떤 사람이 생선 가게에서, 조기를 고르고 있었다. 조기 한마리를 들고 냄새를 맡자, 이를 본 생선(生鮮)가게 주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왜 멀쩡한 조기를 들고 냄새를 맡고 야단이오?" 그러자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조기 냄새를 맡은 것이 아니라, 궛속 말로 내가 조기한테 살짝 바다 소식을 좀 물어봤을 뿐이오!" 그러자 주인도 호기심이 생겼는지 "그래 조기가 뭐라고 말합디까?" 그 때 이 사람의 대답, "조기가 바다를 떠난지 벌써 일주일이 넘어서, 최근 바다 소식은 통 알 수 없다고 하네요." 이것이야 말로 멋진 지혜와 유머가 아닐수 없다. "조기가 바다를 떠난지 이미 오래되어 싱싱하지 않소!" 라고 면전에서 쏘아 붙이지 않고, 삶 가운데 우회(迂回)하며 정곡(正鵠)을 찌르는, 이런 재치(才致)와 유머(humor)가 필요할것 같다. 이런 유머와 재치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평상시 많은 언어(言語)의 훈련(訓鍊)도 함께 필요하다고 했다. 방송국에 출연한 92세된 할머니에게 아나운서가 묻는 말에 익살과 재치있는 할머니의 멋진 대답입니다 ''할머니 금년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응, 제조(製造)일자가 좀 오래 됐지'' ''할머니,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아이구, 이제 유통기한이 거의 다 돼어간다 싶네'' ''할머니 혹시 주민증 가지고 계시면 한번 보여줄실 수 있으세요?'' ''에구,주민증을 어디다 뒀나? 통 기억이 안나. 대신 골다공증(骨多孔症)은 있는디 보여줘?'' ''할머니,할아버지는 계셔요?'' ''에휴, 재 작년에 말이야 뒷산에 자러 간다고 가더니만 아직도 안 일어나는구먼 그려.'' ''할머니, 그럼 할아버지 어서 깨우셔야지요!'' ''아녀, 나도 인자 빨리 같이 자러 가야제. 그 영감, 내가 70년 넘게 데리고 살아 봤는디 너무 오래 혼자 두면 틀림없이 바람나.'' 그렇다 우리는, 산 같이, 물 같이, 바람같이 살아오신 할머니의 멋진 삶을 읽을수 있다. 용감(勇敢)한 사람이 되고 싶으면 용서(容恕) 할 줄아는 사람이 되라고 했고 위대(偉大)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 미움을 사랑으로 되돌려 보낼 줄 아는 도량(度量)이 넉넉해야 한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 부패(腐敗)되는 음식이 있는가 하면 시간이 지나면 발효(醱酵)되는 음식이 있다.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 입니다. 세월이 지나면 부패되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세월이 지나면 발효되는 인간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부패된 상태를 썩었다고 말하고 발효된 상태를 익었다고 말합니다. 자기를 썩게 만드는 일도 본인의 선택과 의지(意志)에 달렸고 자기를 잘 익게 만드는 일도 본인의 선택(選擇)과 의지에 달려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임을 유념(留念)해야 할것. 항상 좋은 선택으로 행복한 인생을 설계하면 좋겠다. 대인 관계 속에서 서로 긴장하고 날카로워 질 때 이런 지혜(智慧)와 재치(才致), 유머(Humor)와 여유(餘裕)로, 날마다 순간순간(瞬間瞬間) 기쁨과 감격이 충만한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어느분께서 비 온 다음 날 새벽에 아침 운동을 위해 자전거를 끌고 도로를 나갔다. 밤새 비가 많이 왔는지 이곳저곳에 빗물이 고여있었다. 그래서 페달을 힘차게 밟으며 앞으로 가다가도 빗물이 고여있는 곳을 피해서 가거나 아니면 물이 튀지 않도록 속도를 줄여서 고여있는 곳을 조심히 건넜다. 물이 튀어서 옷과 자전거가 지저분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조심스럽게 자전거를 타고 있었는데, 한 대의 승용차가 속도를 줄이지 않고 지나가면서 고인 물이 물벼락처럼 날아드는 것. 잠시 뒤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다. 옷도 엉망이 되었고, 자전거도 개흙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지저분함 그 자체입니다. 여기에 제 얼굴도 엉망진창이 되었지요. 짜증과 함께 화가 나는 것. 그런데 잠시 뒤 신나게 자전거를 탈 수가 있었다. 어차피 버린 몸이라고 생각하니 빗물이 고여있어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고, 오히려 물을 튀기면서 지나는 재미를 즐기면서 자전거를 탔다. 워낙 엉망진창 몸이 된 상태이기 때문에, 더 나빠지지는 않더군요. 사실 우리는 피하려고만 하면서 오히려 더 힘든 순간을 간직하게 됩니다. 그냥 즐기면 그만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눈치를 보면서 조심에 조심을 더할 뿐입니다. 이 과정 안에서 스스로의 힘듦만 가중됩니다. 지금 이 순간 즐긴다는 것은 어쩌면 내 몸을 완전히 내어주었을 때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렇다. 주님께 우리를 완전히 맡기면 편안함과 함께 큰 기쁨도 얻을 수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과의 관계보다는 이 세상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먼저 생각하지요.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우는데 더 큰 관심이 있기에 주님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주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한 과부의 외아들을 다시 살려주십니다. 과부의 힘으로 이 세상을 살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 놀라운 광경을 보고는 하느님을 찬양하지요. 하지만 이렇게 찬양하고 감사를 드렸던 사람들이 나중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지금 이 순간 주님께 푹 안길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함께 이 순간을 즐길 수가 있으며 큰 기쁨의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이 아닌 세상에 집중하는 순간, 우리는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못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 한 학생이 졸업 논문을 쓰기 위해 성공한 사업가와 인터뷰를 했다. 이 학생은 사업가에게 성공의 비밀이 과연 뭐냐고 물었지요. 사업가는 한동안 그 질문을 곰곰이 생각한 뒤, 이렇게 대답했다. “그밖에 조금 더.” “나는 어린 시절에 보통 사람과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의 차이가 그 한마디에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최고인 사람들은 자기 몫을 다하고 ‘그 밖에 조금 더’ 했다는 사실을.” 지치고 힘들었을 때, 그래서 포기하고 싶을 때 ‘그밖에 조금 더’ 하면 어떨까요? 또 다른 사람들을 배려할 때 ‘그밖에 조금 더’ 한다면 어떨까요? 그리고 누군가 위급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뒤에도 ‘그 밖에 조금 더’ 하면 어떨까요? ‘그밖에 조금 더’ 는 세상을 바꾸는 힘입니다. 매 순간 우리들을 향한 하느님의 돌보심에 감사한 마음으로 기쁘게 기도하고, 특히 우리들이 오늘 충실히 살아 성령의 충만한 복을 누리며 살아가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저희부부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이미 끝나버린 일을 후회하기보다는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라.'' - 탈무드 - |
♡1631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나 자신입니다. - ♡ 데모스테네스는 ''작은 기회로부터 종종 위대한 업적이 시작된다.'' 《나 부터 사랑하세요.》살아가는 동안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지금 이 순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떠한 모양과 색깔을 지니며 나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지를 느릿하게 한 걸음씩 걸어가던 세상이 빠르게 뛰어가는 것처럼 절실히 느껴지는흘러만 가는 세월 안에서 내가 간직하고 품어야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모아지는 의미는 하나입니다.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나 자신입니다. 내가 간직해야 되는 것들 중 가장 먼저 품어야 되는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 세상이 있음으로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 나를 위해 돌고 있는 세상이 있음을 기억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을 바로 볼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을 때 세상을 바로 볼 수 있고 주어진 모든 것들의 소중함을 간직할 수 있으며 또한 나의 삶이 아름다울 수 있겠지요. 나를 사랑하며 아침을 맞이합니다. 때로는 숨막히는 아픔 속에 빠져 나를 잃어 버리고 하루의 시간을 멍하니 흘려 보낼 때도 있었고 내게 스며든 깊은 슬픔으로 내내 흘러 내리는 눈물이 마를 사이가 없는 하루도 있었고 얽매어 오는 시간 안에서 간절히 무언가를 찾는 하루도 있었지만 나에게 다가오는 힘에 겨운 시간들을 감당할 때마다 오늘 하루에 특별한 의미를 두며 다시 일어섭니다. 지금 이 순간 주어진 나의 하루를 스스로 소중하게 만들어 갑니다. 하루를 살아가며 느끼고 담아야 되는 것들 그저 눈을 뜬 아침을 맞이 하는 것이 아닌 어제와는 다른 하루, 새로움을 주며 밝아오는 아침으로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하얀 도화지 위를 소망하는 꿈으로 스케치하고 샘 솟는 희망으로 하나 하나 채색해 채워갑니다. 지금 이 순간 기억해야 할 것은 지나온 삶이 아닌 나를 사랑하며 오늘을 사는 생각과 나의 태도입니다. 지금 이 순간 오늘의 시간도 내일이면 어제가 되어 버립니다. 내일이란 시간에 어제가 되어버린 오늘을 아쉬움과 후회로 보내게 되는 삶이 아닌 다가 온 하루를 아낌없이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바로 나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있음으로 세상의 모든 것들이 존재합니다. 나는 그렇게 나 자신을 사랑합니다. 나를 사랑하며 오늘도 나의 소중한 하루를 만들어 가려 합니다. 어떤 자매님께서 자녀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으십니다. 글쎄 게임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한다고 하는 것. 적당히만 하면 상관이 없겠지만, 심지어 학원도 빠지고 게임을 하면서 아예 공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경험이 하나 생각났다. 학창시절 이것에 푹 빠져서 공부는 뒷전이었을 때가 있었거든요. 바로 당구였다. 친구들과 함께 호기심에 한 번 쳤는데 너무나 재미있는 것.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겠더군요. 그런데 잘 때 천장을 보면 파란색의 네모난 당구대가 떠올려졌고,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머리를 당구공으로 생각하면서 ‘이렇게 치면 이렇게 공이 굴러가서 맞겠지?’ 라며 이상한 상상까지 하게 되었다. 당구에 빠지다 보니 다른 것은 생각나지 않습니다. 당연히 학생의 본분인 공부에도 충실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만 그러한 것도 아닙니다.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어른 역시 중요하지 않은 것에 빠져서 지금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비록 마약이나 도박처럼 범죄도 있지만, 드라마 중독, 게임 중독, 쇼핑 중독 등등 죄는 아니지만 지금의 삶에 충실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참 많다. 여기에 욕심과 이기심 등 세속적인 마음이 더해지면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지 못합니다. 지금 나 자신이 빠져들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살펴봐야 합니다.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중독이 되어 절제하기 힘든 것이라면 지금 이 순간 과감하게 끊을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지금 이 순간 헛된 것에 빠져서 지금 해야 할 것들을 하지 못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다. 누군가가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라고 알려 주지요. 가족이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다른 것을 다 제쳐두고 찾아가야 할 것 같지만, 예수님께서는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머니를 공경하지 않고, 당신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하찮게 여겨서가 아니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이 아닙니까? 그런 분께서 어머니와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소홀히 하실 리가 없다. 그렇다면 어머니와 형제들이 듣기에 서운할 수도 있는 말씀을 왜 하셨을까요? 지금 중요한 것을 행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중요한 것은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이었다. 가족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라는 것.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면서 하느님 안에 머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지금 내가 끊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수백 개의 거울 속에 갇힌 개는 어떻게 할까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다른 개라고 생각하면서 경계를 하고 공격적으로 짖으면서 쫓아내려고 합니다. 과연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이길 수 있을까요? 절대로 이길 수가 없다. 내가 공격적으로 나올수록 거울 속에 비친 모습도 공격적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와의 싸움은 질 싸움입니다. 그렇다면 웃어주고 예뻐해 준다면 어떨까요? 거울 속의 내 모습도 나를 향해 웃어주고 예뻐해 주려고 할 것. 저절로 이기는 싸움이 됩니다. 나 자신을 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을 꾸짖고 채찍질을 할수록 더욱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마십시오. 믿음으로 산을 옮기고자 한 걸음씩 내디디면서 하느님의 향기이고 하느님의 사람이신 우리들이 가진 아름다운 꿈과 바라는 희망을 담은 지향이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저희부부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문제는 목적지에 얼마나 빨리 가느냐가 아니라 그 목적지가 어디냐는 것이다.'' - 메이벨 뉴컴버 - |
♡1632 ‘잃은 양’ 은 ‘그들’ 이 아니라 ‘나’ 입니다. - ♡ 드래커는 ''계획이란 미래에 관한 현재의 결정이다.'' 《오늘이라는 흰 도화지》아무리 커다란 일도 어제로 밀려나고 말았네요. 아무리 힘들었던 일도 어제라는 바닷물에 묻히고 말았네요. 은근히 찔러대는 가시같은 아픔도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커다란 문제들도 흐르는 시냇물처럼 흘러 지나가고 오늘은 오늘일 뿐! 새하얀 도화지에 다시 그림을 그리듯 그렇게 새벽 도화지는 새롭고 깨끗할 뿐입니다. 어제 일을 다시 가져다 그리지 않으렵니다. 새로 지은 새집에 새로운 가구들을 들여놓듯 오늘이라는 새집에는 새로운 오늘을 들여놓으렵니다. 흘러 지내 버려야 할 낡은 문제들은 미련 없이 손에서부터 놓아 버리고 힘차게 웃으며 오늘이라는 도화지에 새롭고 신선한 그림을 그리겠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루카 15,1-2) ‘세리들과 죄인들’ 은, 그 당시에 사회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았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 그 당시의 소외계층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실제로 무슨 죄를 지었는지, 어떤 죄 속에서 살고 있었는지는, 여기서는 중요하지 않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모여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있고,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였고, 회개했거나 회개하려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모여든 사람들을 가리켜서 ‘죄인들’ 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 자신들은 죄인이 아니라 의인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예수님을 비난한 것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은 어떤지 반성해야 합니다. ‘나’ 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다른 사람을 내 마음대로 죄인 취급한 적은 없는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비판하는 일 자체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 ‘나도’ 예수님 흉내를 내면서 위선자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꾸짖지는 않는가? ‘내가 먼저’ 나의 위선을 회개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꾸짖는 말만 한다면, 나 자신도 한 사람의 바리사이가 될 뿐입니다. 실제로 많은 경우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그들’ 이 아니라 ‘나’ 입니다. 위선자들을 꾸짖으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나’ 를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 15,4-7)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그들’ 이 아니라 ‘나’ 로 생각해야 한다는 말은, ‘잃은 양’ 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예수님은 ‘나’ 를 찾아서 구원하려고 오신 분. ‘잃은 양’ 은 ‘그들’ 이 아니라 ‘나’ 입니다. 강론이나 강의를 하는 이들이 ‘잃은 양’ 을 ‘그들’ 이라고 표현하면서 자기 자신을 ‘잃은 양’ 과 거리를 두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강론이나 강의를 하는 사람 자신도 ‘잃은 양’ 입니다. 그 자신도 회개를 해야 할 존재이고, 목자이신 예수님의 구원을 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잃은 양’ 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우리’ 라는 표현을 사용하거나 ‘나’ 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합니다. 강론이나 강의를 할 때 “여러분, 회개하십시오.” 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 모두 함께 회개합시다.” 라고 말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들을 상대로 신앙교육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메시아 예수님은 ‘모든 사람’ 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 ‘모든 사람’ 은 다 ‘잃은 양’ 입니다. 아무도 제외되지 않습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 되찾은 은전의 비유, 되찾은 아들의 비유’ 는 모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하신 말씀. “너희도 모두 잃은 양이다. ‘잃은 양’ 이 어찌 ‘잃은 양’ 을 찾는 목자를 비난하는가? 다 같은 죄인의 처지인데, 어찌 감히 다른 사람을 죄인이라고 판단하는가?” 여기서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 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의인을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고, “나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이다.” 라고 자처하는 ‘자칭 의인들’ 을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다. 글자 그대로 의인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이 말은, “이미 회개했기 때문에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이라는 말이 되고, 그 의인들은 이미 하느님께 큰 기쁨을 드린 사람들. ‘자칭 의인들’ 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이 말은, 그들이 “나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이다.” 라고 자처하는 것은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기는커녕, 아픔과 슬픔만 드린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잃은 양’ 을 되찾았을 때의 큰 기쁨을 반대로 생각하면, 양을 하나라도 잃으면 예수님과 하느님께서 크게 슬퍼하신다는 뜻.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을 보면서 예수님과 하느님께서 슬퍼하고 계시기 때문에 슬퍼하시는 것이고, 회개하지 않고 있는 ‘나’ 때문에 슬퍼하시는 것. ‘잃은 양’ 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찾고 구원하는 것은 예수님의 의무가 아니고, ‘자비’ 라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나를’ 찾아오시라고 예수님께 요구할 권리가 없다. 겸손하게 자비를 간청할 뿐. 마찬가지로 ‘용서’ 는 하느님의 의무가 아니고 ‘자비’ 입니다. 용서받는 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나를’ 용서하라고 하느님께 요구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고, 우리는 하느님께 용서를 간청할 뿐입니다. 용서받는 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는 것은, 죄 짓는 것을 당연하게,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태도로 이어집니다. 고해성사는 우리가 요구하는 대로 용서를 공급해 주는 자동판매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형식적으로, 너무 기계적으로 고해성사를 보는 것은 아닌가? 회개는 절체절명의 심정으로 해야 하는 일. 사순 시기나 대림시기 때에 습관적으로 하는 회개는 사실상 회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나중에 고해성사 보면 되겠지.” 라고 미리 생각하고서 어떤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성사모독죄까지 함께 짓는 것입니다. 지금 함께 있는 다른 사람들을 내 눈 잣대로 판단하지 않는 것, 매일 거룩한 마음으로 살아 성령 충만한 축복된 삶을 만들어가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저희부부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나는 보기 위해 눈을 감는다.'' - 폴 고갱 - |
♡1633 내가 힘들면 아무 것도 내어주기 싫다. - ♡ 오비딩스는 ''원인은 숨겨지지만 결과는 잘 알려진다.'' 1940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더불어 유태인 학대를 피해 수많은 유태인들이 리투아니아로 몰려듭니다. 구소련은 리투아니아내의 각국 대사, 영사관의 폐쇄 명령을 내리지만 마지막 일본 영사관만은 문을 닫지 않고, 피란민들은 마지막 희망을 일본영사관에 걸게 됩니다. 주 리투아니아 일본 대사 스기하라 지우네는 일본외무성에 문서를 보내 유태인에 대한 비자발급을 허용해달라고 요청하지만 일본 외무성은 그의 3번이나 반복되는 요청을 묵살합니다. 일본 외무성은 대외적으로는 유태인 난민에 대하여 중립적인 입장이라 표명하고 있지만 사실 독일과 협력관계였던 탓에 비자 발급 자격 조건을 다른 난민들에 비해 까다롭게 함으로써 사실상 유대인들에 대한 비자 발급을 제한한 것. 영사관을 둘러싼 수많은 유태인들을 보며 스기하라는 결국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이 일이 불러올 파장과 다가올 파면, 불명예, 경제적 궁핍, 가족의 고통이 눈에 선하지만 수많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 더 중요한 일이라 판단합니다. 그는 자격조건을 크게 완화하여 무자격에 가까운 사람들마저도 비자를 발급합니다. 일본 외무성의 허락 없이 발행하는 것으로 당연히 문서위조이나 그런 것쯤 상관하지 않습니다. 겉으로 봐서는 위조라 할 만 한 것이 하나도 없다. 1940년 7월말부터 9월 초까지 매일 비자를 발급하였으며 막바지에는 거의 하루 300장 정도를 발급합니다. 거의 한 달에 발행하는 분량을 하루에 발급했다 합니다. 2000번대 이후로는 연번호도 적지 않습니다. 영사관이 폐쇄될 때 까지 연번호가 지정되지 않은 비자까지 포함하여 수천 장 이상 발행되었으리라 보고, 비자 한 장으로 한 가족 전체의 입국이 허가됐던 것으로 보면 대략 6천명 이상의 유태인이 비자를 얻었으리라 예상됩니다. 그는 영사관이 폐쇄된 날 리투아니아를 떠나기 위한 열차 안에서까지 비자를 발급합니다. 이후 독일과 소련과의 전쟁이 발발해 리투아니아는 독일군의 수중으로 들어가며 이 기간 동안 리투아니아에서 희생된 유태인들은 20만 명이상입니다. 리투아니아에서 탈출한 스기하라는 1941년 체코영사관서 근무하였으며 소련의 체코 점령 때 체포되어 수감생활 후 일본으로 송환됩니다. 이후 자국에서 1947년 외무성으로부터 면직됩니다. 전쟁 후 이스라엘 측에서 일본외무성에게 요청한 그의 행방에 대하여 “‘스기하라’라는 외교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답변한 사실로 미루어 괘씸죄가 적용되었으리라는 추측도 있다. 이후 그는 1986년 7월 31일 영면에 들기까지 일본에서 전구를 팔면서 소박하게 여생을 보냈다. 스기하라의 이야기가 알려졌을 때, 기자 한 사람이 그의 아들을 찾아가서 외교관으로서 출세의 길을 버린 아버지의 선택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했다. 그 아들은 “저는 아버지가 성공한 인생을 사셨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저의 아버지를 필요로 하셨을 때 아버지는 옳은 일을 택했으니까요.” 스기하라는 동방정교회 신자로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었다. 하느님 나라는 소유욕을 버린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마치 층층계단식 논과 같아서 내가 받은 것을 흘려보내주지 않으면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목이 마르게 되어있다. 세포가 각자가 가진 것을 옆의 세포에게 전달해주지 않으면 함께 죽게 되는 것과 같다. 내어줄 줄 모르면 암세포가 됩니다. 본인은 소유하며 살고 싶겠지만 결국 본인도 죽고 이웃도 죽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남에게 좋은 일을 해야 하는 줄은 누구나 다 압니다. 그런 일을 함으로써 나에게 닥쳐올 가난과 고독, 멸시 등의 어려움이 두렵기 때문에 내어주지 못하게 됩니다. 내어주는 만큼 생기는 결핍에 대한 불안함이 모아들이게만 하는 것. 내어주어 남을 살리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결핍을 인내할 능력부터 키워야합니다. 예수님처럼 내어주는 존재가 되기 위해 모든 상황에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친구가 없어도 행복하고 친구가 있어도 행복하며 부유해도 행복하고 부족해도 행복할 줄 아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필요할 때 힘들이지 않고 내어줄 수 있다. 내가 힘들면 아무 것도 내어주기 싫다.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미워하라는 말씀은 신경 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신경 쓰지 않아야 내어줄 수 있다. 신경 쓰지 않으려면 다른 아무 것도 필요한 것이 없이 지금 이 순간 행복할 수 있는 기술이 있어야합니다. 전북 전주의 한 교회에서 “하느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란 푯말을 붙인 상자를 만들고 신자들로 하여금 그 안에 그 같은 물품들을 넣게 했다. 엄청난 내용물이 수집됐다. 고급 양주에서부터 외설테이프, 추잡한 액세서리, 불량서적 등이 쌓였다. 교회에서는 이것들을 매월 정기적으로 불에 태워버리고 각자 새 생활을 다짐하도록 했다. 이것은 경건하고 건전한 가정생활의 전기를 마련했다. 이 운동 덕분으로 교회가 크게 부흥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각자의 “하느님께서 싫어하시는 통”을 만들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잊게 만드는 통”도 만들어야 합니다. 내가 다른 행복에 빠져 하느님을 잊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들도 내어주기 힘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통들에 내 것을 넣으면 죄가 사라지고 광야라는 곳에 머물게 될 것. 예수님은 광야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시고 40일을 버티셨다. 이 능력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가난과 고독과 지루함, 겉보기는 고통스럽겠지만 친해지면 평화로워지고 있는 것들에 감사하게 됩니다. 적게 가질수록 가진 것에 더 감사하게 된다고 합니다. 하루에 1시간이라도 기도하기 위해 성체 앞에서 밀려오는 지루함과 싸워봅시다. 집에서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성경을 1시간만이라도 필사해 봅시다. 그러면 사람들과 왁자지껄 노는 것보다 평화로워진다는 것을 느낄 것. 그렇게 되어야 시간이든, 재물이든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딱 15가지의 물건만으로 사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도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수천 가지의 물건을 쌓아놓고 삽니다. 없으면 불편할 것 같아서입니다. 불편해도 괜찮을 수 있다면, 부족해도 괜찮을 수 있다면, 아무 오락거리가 없어도 괜찮을 수 있다면 참으로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일 것.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자기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다.” 라는 말씀을 담고 누군가에게 은혜를 베풀면서, ‘나도 할 수 있다.’ ‘나도 뭐든지 된다.’ 라는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입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저희부부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모든 죄의 기본은 조바심과 게으름이다.'' - 카프카 - |
♡1634 사랑이 깊어지면 말도 필요 없어진다. - ♡ 파울로 코엘료는 ''언제나 현재에 집중할수 있다면 행복할것이다.'' 《지우고 삭제할 줄 아는 지혜》세상을 살다보면 미운사람도 많다. 사랑하고픈, 좋아하고픈, 친해보고픈, 사람도 많다. 그래서 사랑하다 보면 아픔이 따릅니다. 때로는 사랑해선 안 되는 사람이어서 때로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어서 아픔도 따르고 괴로움도 따릅니다. 그렇다고 사랑이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다. 지금 이 순간 괴로움, 슬픔, 아픔이 따른다고 사랑을 하지 않는다면 삶이란 것 자체도 괴로움의 연속이니 살지 말라는 말과 같다. 지금 이 순간 아파도 괴로워도 우리는 살아야 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좋아하고 그래서 사랑하다 보면 때로는 실망하고 때로는 배신의 아픔으로 미움을 갖게 됩니다. 배신의 아픔은 우리가 그에게 반대급부를 바라고 있었음을 반증합니다. 지금 이 순간 조건없이 바람없이 주고 사랑했다면 돌아서 가는 사람은 그것으로 그만 입니다. 지금 이 순간 미움도 아픔도 가질 필요가 없다. 사랑은 기쁨이지만 괴로움이 동반되듯 누군가를 미워하면 그것은 더욱 자신을 아프게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미워하는 마음은 희망 없는 아픔이요 희망 없는 괴로움입니다.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으려니 사람이니까 변하고 배신할 수 있으려니 하고 그냥 내 마음에서 그들을 놓아줍니다. 지금 이 순간 마음에 간직해서 괴로운 미움을 마음에서 지우고 그 사람의 기억도 지워버리는 겁니다. 지금 이 순간 내 인생의 장부에서 지워서 보내고 놓아주는 겁니다. 지금 이 순간 살아가면서, 인생을 기록하면서, 그 기록이 쌓이는 것으로 짐을 만들기보다는 적절히 기억을 기록을 지우고, 삭제할 줄 아는 지혜로움을 가졌으면 좋겠다. 전에 읽은 글입니다. 한 남자와 여자가 물가에서 서로 싸우고 있었다. 여자가 실수로 남자가 사준 목걸이를 물가에 흘렸다. 목걸이를 찾는 여자에게 남자가 한 마디 했다. 여자는 미안한 마음에 목걸이를 찾는데 남자가 한 마디 하는 게 싫었다. 처음에는 조용하던 대화가 점점 소리가 커졌다. 분명 여자가 가까이 있는데도 남자는 여자가 멀리 있는 것처럼 크게 소리를 냈다. 여자도 남자가 가까이 있음에도 덩달아 목소리가 커졌다. 왜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을까요? 지금 이 순간 몸은 가까이 있지만, 가슴이 멀어지기 때문에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고 합니다. 돌아보면 가까이 있음에도 목소리가 커진 적이 있다. 가슴에서 멀어진다고 느껴서 목소리가 커졌던 거 같다. 사랑하는 사람은 목소리가 커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가슴이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깊어지면 말도 필요 없어진다고 합니다. 두 가슴이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헤로데의 가슴과 예수님의 가슴을 만납니다. 헤로데의 가슴은 예수님의 가슴을 알 수 없다. 헤로데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몰랐다. 가슴에서 멀리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 권력에 취한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기 어렵다. 지금 이 순간 욕망의 노예가 된 사람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지금 이 순간 부족함을 모르는 사람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기 어렵다. 2000년 교회의 역사를 보아도 많은 시련과 아픔이 있었다. 예수님과 가슴을 가까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세상의 뜻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욕망, 재물, 권력이라는 바벨탑을 쌓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욕심 때문에, 이기심 때문에, 원망 때문에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아픔을 주고, 상처를 주었다. ‘이념, 민족, 세대, 지역’이라는 갈등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자연재해로 인한 난민도 있지만, 우리의 폭력과 전쟁 때문에 생겨난 난민이 더 많았다. 오늘 우리는 세상의 뜻대로 사는 사람을 보았다. 물질적인 부와 권력은 지녔지만 ‘미덕’이 없었던 헤로데입니다. 그는 화려한 궁궐에 살았지만, 인생은 행복하지 못했다. 남을 위한 빵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대로 사시는 분을 만날 수 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서 빵을 많게 하셨다. 그분은 세상의 질서와 세상의 편견을 깨끗하게 부숴버렸고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였다. 그분은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도 골고타의 언덕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도 행복하셨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욕심과 우리의 이기심만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세상은 헛되고 헛될 뿐입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충실히 살아간다면 세상은 단 10분을 살았어도 의미 있고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은 그 삶의 길이로 측정할 수 있겠지만, 인생은 그 삶의 가치로도 측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갈망이 있는 사람과 가슴을 가까이하십니다. 예수님은 힘과 욕망과 재물로는 알 수 없다. 그런 걸 찾는 사람의 가슴은 예수님의 가슴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곁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지금 이 순간 가슴이 따뜻한 사람은 지금 굶주린 사람에게서도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지금 이 순간 헐벗은 사람에게서도 예수님의 향기를 느낍니다. 지금 이 순간 아픈 사람에게서 예수님의 아픔을 느낄 수 있다. 가슴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슴은 해야 할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 느낄 수 있다. 헤로데의 가슴은 하고 싶은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 느낄 것 같다. 지금 이 순간 밑으로 내려갑시다. 그리고 삶의 자리에서 견디어 냅시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들 안에 성령의 불꽃이 타오르는 영광스러운 믿음의 종이 되시어, 우리들이 바라는 큰 희망을 이루어가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저희부부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진정으로 웃으려면 고통을 참아야하며 , 나아가 고통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 찰리 채플린 - |
♡1635 씨를 뿌릴 땅이 없는데도 마구 씨를 뿌리는 농부는 없다. - ♡ 리디아 차일드는 ''천재는 지구가 절대로 길들일 수 없는 전기 같은 힘을 가졌다.'' 《가슴으로 하는 사랑》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사랑하는 일 인줄 알았다. 아무것 가진 것 없어도 마음 하나만 있으면 충분한 것인 줄 사랑은 바다처럼 넓고도 넓어 채워도 채워도 목이 마르고 주고 또 주어도 모자라고 받고 또 받아도 모자랍니다. 사랑은 시작만 있고 끝은 없는 줄 알았다. 마음에 차곡차곡 쌓아놓고 가슴에 소복소복 모아놓고 간직만 하고 있으면 좋은 줄 알았다. 쌓아놓고 보니 모아놓고 보니 병이 듭디다 상처가 납니다. 달아 날까봐 없어 질까봐 꼭꼭 쌓아 놓았더니 시들고 힘이 없어 죽어 갔다. 때로는 문을 열어 바람도 주고 때로는 흘려보내 물기도 주고 때로는 자유롭게 놀려도 주고 그래야 한답니다. 가슴을 비우듯 보내주고 영혼을 앓듯 놓아주고 죽을 만큼 아파도 해봐야 한답니다. 모아둔 만큼 퍼내야 하고 쌓아둔 만큼 내주어야 하고 아플만큼 아파야 한다는걸 수 없이 이별연습 을 하고 난 후에야 알 수 있게 되었다. 사랑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인 줄 알았는데 사랑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가장 쉬운 일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하면 할수록 해같이 빛나며, 별처럼 반짝이며 달처럼 온유합니다. 금실이 아주 좋은 노부부가 있었다. 몹시 가난했던 젊은 시절 그들의 식사는 늘 한조각의 빵을 나누어 먹는 것이었다. 그 모든 어려움을 사랑과 이해로 극복한 뒤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자 그들은 결혼 50주년에 금혼식을 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부부는 무척 행복했다. 손님들이 돌아간 뒤 부부는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식탁에 마주 앉았다. 하루 종일 손님을 맞이하느라 지쳐있었으므로 그들은 간단하게 구운 빵 한 조각에 잼을 발라 나누어 먹기로 했다. “빵 한 조각을 앞에 두고 마주앉으니 가난했던 시절이 생각나는 구려.” 할아버지의 말에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리는 듯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할아버지는 지난 50년 동안 늘 그래왔듯이 할머니에게 노릇노릇하고 고소한 빵의 껍질을 잘라 내밀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할머니가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몹시 화를 내며 말했다. “역시 당신은 오늘 같은 날에도 부드러운 빵 속은 당신이 먹고 내게는 딱딱한 빵 껍질을 주는군요. 50년을 함께 살아오는 동안 난 날마다 당신이 내미는 빵 껍질을 먹어 왔어요. 그 동안 당신에게 늘 그것이 불만이었지만 섭섭한 마음을 애써 참아왔는데. 하지만 오늘같이 특별한 날에도 당신이 이럴 줄은 몰랐어요. 당신은 내 기분이 어떨지 조금도 헤아릴 줄 모르는군요.” 할머니는 마침내 서러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태도에 할아버지는 몹시 놀란 듯 한동안 머뭇거리며 어쩔 줄 몰라했다. 할머니가 울음을 그친 뒤에야 할아버지는 더듬더듬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휴우! 난, 부인을 위한 마음밖에는 없었는데. 당신이 진작 이야기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난 몰랐소. 하지만 여보, 바삭바삭한 빵 껍질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었소!” 할아버지는 50년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할머니에게 드렸고, 할머니도 가장 좋아하던 부분을 할아버지에게 드렸던 것입니다. 서로 기분을 참아가면서. 내가 옳고 원하는 것이고 상대가 당연히 좋아할 것 같은 말이라고 해서 그 말이 상대에게 심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농부가 씨를 뿌릴 때 땅을 고르듯이 자신의 말이 떨어져 열매가 맺힐 수 있는 땅이 있는지 잘 찾아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일을 참 잘 하시는 분이셨다. 예수님은 몰려드는 사람들과 조금 떨어지기 위해 방금 고기를 잡고 돌아온 배에 오르셨다. 그 배에 앉아 가르치실 때에 그 배의 주인들은 예수님의 친구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들은 조금 떨어지게 만들고 배의 주인들과는 하나가 되는 것을 택하신 것입니다. 아마 그물을 한 번 다시 쳐보라는 예수님의 말에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도 예수님께 받은 영광에 대한 보답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말이 떨어질 공간을 스스로 만드신 것입니다. 자아는 쉽게 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틈은 누군가로부터 영광을 받을 때 생깁니다. 예수님은 그 틈을 노린 것입니다. 그 작은 순종으로 많은 물고기가 잡히자 베드로는 깜짝 놀라고 두려운 마음까지 듭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완전히 낚아채신 것입니다. 발을 씻어주시며 또한 베드로의 마음을 넓히시고 결국 당신 말이라면 목숨까지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셨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점령하시는 방법은 처음엔 영광을 주고 그 다음엔 작은 순종을 통해 그 틈을 더 벌리는 것이었다. 갑자기 엄청난 것을 요구하지는 않으십니다. 우리 자아의 공간은 조금씩 점령당합니다. 사람의 변화를 지켜볼 때는 농사꾼과 같아야 합니다. 잘 자라지 않는다고 손으로 곡식을 당겨서는 안 됩니다. 자라는 것은 저절로 자라도록 내버려두어야 합니다. 다 자연의 순리가 있는 법입니다. 씨를 뿌릴 땅이 없는데도 마구 씨를 뿌리는 농부는 없다. 일단 뿌려져서 잘 자랄 땅을 찾습니다. 말을 할 때도 마찬가지여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맞는 말을 한다고 상대가 다 받아들일 수는 없다. 우선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을 상대가 지닐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합니다. 그 가장 좋은 방법은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상대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지금 이 순간 인정해주고, 받아주고, 높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가 뿌릴 말씀의 씨앗이 심길 공간이 마련됩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들이 말씀으로 기도하고, 성찬에 참례하는 그곳에서 하느님 사랑의 빛과 따뜻함이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과 모든 지역에 비추어지기를 기도하고, 기쁘게 나누면서 살아가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저희부부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이 시대는 창의력과 혁신, 상상력 그리고 결단력을 요구한다.'' - 존 f. 케네디 - |
♡1636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빛은 어둠이 짙을수록 더 큰 빛을 발하게 됩니다 - ♡ 스티븐 나흐마노비치는 ''스스로라는 명사가 동사가 된다 현실에서 이러한 창조의 순간은 일과 오락이 하나가 될 때 일어난다.'' 《인생 100세 시대다》과학의 진보가 가져다준 선물이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끔찍한 비극이 될 수 있다. 운 좋게 60세에 퇴직한다 해도 40년을 더 살아야 한다. 적당한 경제력과 건강이 받쳐주지 않으면 그 긴 세월이 신산(辛酸)의 고통이 될지도 모른다. 돈과 건강을 가졌다고 마냥 행복한 것도 아니다. 부와 지위가 정점에 있던 사람들조차 스스로 몰락하는 일을 우리는 최근 몇 년 사이에도 적지 않게 보아 왔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주위 사람들과 함께하는 인생이 없다면 누구든 고독의 만년을 보낼 각오를 해야 한다. '우(友)테크' 의 시대다. 財테크에 쏟는 시간과 노력의 몇 분의 일 만이라도세상 끝까지 함께할 친구들을 만들고 확장하고, 엮고, 관리하는 일에 정성을 쏟아야 할 때다. 우리는 지금껏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공부 잘하는 법, 돈 버는 법에는 귀를 쫑긋 세웠지만 친구 사귀는 법은 등한시했다. '友테크' 는 행복의 공동체를 만드는 기술이다. 행복하게 사는 전략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당신이 먼저 연락하라. 友테크는 財테크처럼 시간과 노력을 들인 만큼 성공 확률도 높아진다. 우연히 마주친 친구와 '언제 한번 만나자.' 는 말로 돌아설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점심 약속을 잡아라. 아니면 그 다음날 전화나 카톡으로 먼저 연락하자. 기꺼이 총무를 맡아라. 평생 '갑(甲)' 으로 살아온 사람들 일수록 퇴직하면 더 외롭게 지내는 것을 종종 본다. 항상 남들이 만나자고 하는 약속만 골라서 만났기 때문이다. 날짜와 시간을 조율하고 장소를 예약하고 회비를 걷는 일은 성가시다. 그러나 귀찮은 일을 묵묵히 해낼 때 친구는 늘어난다. 남녀노소를 따지지 마라. 아는 한 분은 요즘 젊은 친구들 만나는 재미에 푹 빠졌다. 영어회화를 함께 수강하는 20대의 친구들과 영화도 보고, 문자메시지도 교환한다. 비결은 다음과 같다. 자기 나이보다 스무살 이상 적은 사람도 언제나 존댓말로 대할 것. 혼자서만 말하지 말 것. 교훈적인 이야기로 감동시키려 들지 말것. 가끔 피자를 쏠 것. 매력을 유지하라. 항상 반짝반짝하게 잘 씻고 가능하면 깨끗하고 멋진 옷을 입어라. 동성 끼리라도 매력을 느껴야 오래 간다. 후줄근한 모습을 보면 내 인생도 함께 괴로워진다. 육체적 아름다움만 매력이 아니다 끊임없이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새로운 음악도 들어야 매력 있는 대화 상대가 될 수 있다. “등불 하나가 천년 어둠을 물리친다.” 는 옛 말이 있다. 지금 이 순간 빛을 가지고 있으면 어둠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빛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어둠에 대처할 수 없다. 물론 빛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 순간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 악의 세력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권능으로 물리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 하느님의 능력을 지녔으면서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이고 그분의 모든 것은 우리 안에 숨어있다. 하느님의 능력이 숨 쉬고 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생명의 숨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다. 지금 이 순간 빛을 선택하면 어둠이 물러나고 어둠을 선택하면 빛이 물러납니다. 그러나 사실은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빛은 어둠이 짙을수록 더 큰 빛을 발하게 됩니다. 더러운 영은 예수님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며 대항을 시도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주신 권위를 가지고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4,34. 35) 하시며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 내셨다. 그리고 분명 그 능력을 사도들을 비롯한 우리에게도 주셨다. 루카10장 17이하에 보면 제자들이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하고 말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주님께서 주신 능력을 인정하고 잘 관리하고 성장시켜야 합니다. 이미 주어졌는데도 알지 못하는 것은 내가 깨어있지 못한 탓입니다. 참 신앙인은 예수님의 권위에 힘입어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권위를 전합니다. 오늘 날의 시대는 너무나 시끄럽고 번잡하고 자극적입니다. 마귀들이 더는 일할 데가 없을 정도로 모든 삶의 자리를 점령했다고도 합니다. 유혹이 많고 번잡한 시대에 하느님의 권능을 잘 사용하기 위해서 지금 이 순간 먼저 침묵과 고독으로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겠다. 세상이 시끄러울수록 침묵 속에서 절망과 혼란을 이겨내는 능력을 드러내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하느님께 복종하고 악마에게 대항 하십시오. 그러면 악마가 여러분에게서 달아날 것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야고4,7-8) 하고 말하였다. 지금 이 순간 알게 모르게 다가오는 어둠의 세력, 곧 하느님보다는 인간의 욕심을 부추기는 마음에서 자유롭기를 희망합니다. 세상에서 자유로운 힘이 바로 신앙에서 나옵니다. 20세기의 영성가 토마스 머튼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자신을 채울수록 텅 비어가니. 많은 것을 움켜쥐면서 나는 오히려 모든 것을 잃었다. 쾌락과 즐거움에 사로잡히면서 나는 오히려 실망과 분노와 두려움을 느꼈다” 고 고백하고 있다. 세상의 유혹은 달콤하지만 세상 것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결국 그 끝은 파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육의 관심사는 하느님을 적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6-8) 우리가 하느님의 숨을 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금 이 순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고 결코 인간적인 욕심이나 인정에 매달리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주 예수님을 만나는 찰나(아주 짧은 순간)에 우리들의 아픈 마음도, 병든 육신도, 흐릿해진 정신도 모두 회복되고 치유가 이루어지는 은총으로 구원의 길을 걸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저희부부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문제를 직시하는 것, 항상 정면으로 대하는 것, 그것이 상황을 밀고 나가는 방법이다. 용감하게 맞서라.'' - 조셉 콘라드 - |
♡1637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고 하듯, 세상에 어떠한 죄도 핑계 없이 짓는 죄는 없다. - ♡ 엘버트 허버드는 ''직업에서 행복을 찾아라. 아니면 행복이 무엇인지 절대 모를 것이다.'' 《어려울 때 필요한 것은 용기와 뜨거운 가슴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남을 위해 기도하고, 불행한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한다. 남의 이야기 열심히 들어주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한 소리 또하고 또하고 하는 사람은 정말 불행한 사람이다. 남의 칭찬을 자주하는 사람 행복한 사람이고, 자기 자랑을 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일을 보람으로 아는 사람은 행복하고, 의무로 아는 사람은 불행하다. 언제나 싱글벙글 웃으며 말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투덜대는 사람은 불행하다. 평생 고마웠던 일만 마음에 두는 사람은 행복하고, 섭섭했던 일만 마음에 담는 사람은 정말 불행하다. 남이 잘 되는 것을 축복하고 위로 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남이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실패하면 통쾌해 하는 사람은 정말 불행하다. 행동으로 보여 주는 사람은 행복하고, 말로 보여주는 사람은 불행하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부드러운 사람은 행복하고, 자기에게 후하고 남에게 가혹한 사람은 정말 불행하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는 사람은 행복하고, 불평으로 먹는 사람은 정말 불행하다. 마음까지 화장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얼굴만 화장하는 사람은 많이 불행하다. 자신의 잘못을 곧바로 인정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잘못했다는 말을 절대로 하지않는 사람은 불행하다.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걷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고개를 숙이고 걷는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누구에게나 배우려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자신이 만물박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잘 된 이유를 공과 사가 분명한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이고,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아는 것이 적어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행복하고, 아는 것이 많아도 실천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은 불행하다. 해야 할 일이 많음을 긍지로 여기는 사람은 행복하고, 그것을 불만으로 여기는 사람은 불행하다. 겸손과 양보가 몸에 밴 사람은 행복하고, 교만과 거만이 몸에 밴 사람은 불행하다. 목소리가 힘차고 생기있는 사람은 행복하고, 기어 들어가는 사람은 정말 불행하다. 남의 잘못을 잘 용납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자기의 잘못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미워하는 사람이 많은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자기의 잘못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죽음이 삶의 연장이라고 태연히 받아들이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죽음이 끝이라고 무서워하며 불안에 떠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차 탈 수 있는데 걷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걸을 수가 있는데 차타는 사람은 불행 한 사람이다. AP연합 통신은 40년간 죄책감으로 시달려온 어느 노인의 이야기를 보도했다고 합니다. 그 노인은 아무에게라도 자기 죄를 고백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아 이대로 지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 그는 워싱턴의 한 은행에서 수천 달러에 달하는 돈을 횡령한 지 40년이 지나서야 죄를 자백하고 자수하게 되었다. 그가 재판부에 회부되자 재판장 앞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제가 40년 동안 이 죄의 문제로 인해 압박을 받아왔으나 최근 들어 나를 너무나 무겁게 짓누르는 통에 도저히 견딜 수 없었습니다.” 모든 진술을 다 들은 재판장은 말했다. “이 경우에는 이미 공소시효가 많이 지났기 때문에 벌금이 부과되지 않습니다.” 죄책감은 그것을 죄로 고백하고 합당한 보속을 하여 공적인 용서를 받을 때 사라집니다 . 우리에게는 어두움이나 죄책감을 없앨 수 있는 '면담' 이나 ‘고해성사’ 란 큰 선물이 있다. 면담이나 고해성사를 보려면 자신의 죄를 인정하여 겸손하게 고백하고 상대를 용서하고 축복하고 사랑하거나 보속을 당연한 마음으로 받아서 행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두움이나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를 고통스럽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각자 다른 시선을 볼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와 같은 예언자라고도 말합니다. 헤로데는 그 다양한 예수님을 향한 시각들 가운데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를 선택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인정하고 그분께서 우리를 하느님 자녀로 만들기 위해 당신 살과 피를 내어주러 오셨음까지 믿지 못하면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러니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의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한 번 죽였던 요한을 두 번 못 죽일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요? ‘핑계’ 를 대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고 하듯, 세상에 어떠한 죄도 핑계 없이 짓는 죄는 없다. 모든 사람 안에 “그것은 죄야!” 라고 말해주는 양심이 있기에 우리는 죄를 짓기 전에 항상 적당한 핑계를 먼저 찾습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랬어.”, “회사에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애들이 속을 썩여서.”, “상대가 먼저 잘못한 거야.”, “너라면 이런 상황에서 안 그랬겠어?” 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이건 죄가 아닐 거야!’ 라는 생각이 들면 이미 죄를 지은 것입니다. 죄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려고 핑계를 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그 자체로는 핑계를 대지 않습니다. 그 죄를 짓는 사람이 핑계를 댈 뿐입니다. 그 죄의 값은 반드시 치르게 되어있다. 핑계 대는 것을 좋아하다보면 헤로데처럼 결국 구원에서 멀어질 수도 있다 . 어느 신부님께서 요즘 고해성사 때도 부쩍 ‘상담’ 을 하러 들어오시는 분들이 많아진 것 같다. 사제로부터 위로받고 싶은 것은 이해하겠으나, 그러다가는 고해성사까지도 죄의 합리화의 도구가 되어버릴 수 있다. 그러면 헤로데와 같은 상황까지 이를 수 있다. 헤로데가 구원을 받으려면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의 자비에 의탁합니다.” 라고 말했어야 합니다. 죄는 핑계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죄는 죄라고 깨끗이 인정하고 고백합시다. 면담이나 고해성사로 주님의 자비에 의탁합시다. 그래야 진정으로 깨끗해지고 그 눈으로 예수님을 바로 알아볼 수 있어 구원과 해방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저는 지금 이 순간 하느님으로 만족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하느님 한 분으로 만족함으로 성령의 불이 일어나 은총 가득한 치유와 회복의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저희부부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신은 용기있는자를 결코 버리지 않는다.'' - 켄러 - |
♡1638 어차피 더러워질 것이라고 씻지 않는 사람은 없다. 늘 씻어야 한다. - ♡ 게리 스펜스는 ''나는 믿음 때문에 마음의 문을 닫기 보다 호기심으로 마음의 문을 열겠다.'' 《일생 동안 만나는 세가지 사랑》 사람이 살면서 일생 동안 느끼는 사랑은 세가지로 종합해 볼 수 있다. 우선, 멀리 여행을 떠나는 '당신을 배웅해주는 세 사람' 이 있다고 가정해 보라. 첫 번째 사람은 아침부터 당신에게 달려와 울며불며 가지 말라 하고, 손을 붙들고 보고 싶을 거라며 몹시 안타가워 한다. 그러나 막상 떠나려고 하자 문 앞가지만 배웅하고는 곧장 자신이 좋아하는 '프로그램' 을 보기 위해 TV를 켠다. 두 번째 사람은 당신을 위해 아침을 준비하고, 짐을 들어준다. 공항까지 배웅하며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건네고는 발걸음을 돌려 직장으로 간다. 세 번째 사람은 그저 묵묵히 먼 발치에서 당신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당신은 그가 그 자리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지만 그는 항상 당신을 그리워하고 걱정한다. 여행에서 돌아온 당신은 첫 번째 사람에게 멋진 선물을 사다 주고, 그와 함께 밥을 먹고, 놀이공원에 간다. 당신은 그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두 번째 사람을 만나면 포옹을 하고, 그의 손에 있는 짐을 나눠 들고 그가 회사에서 실적을 올린 일을 축하해주며, 그가 옆에 있어주는 사실을 크나큰 행운으로 생각한다. 세 번째 사람을 만나면 조용히 미소만 지을 뿐 마땅히 할말을 찾지 못한다. 이번에는 당신이 그들을 차례로 잃었을 때 상황이다. 첫 번째 사람을 잃으면 당신은 한동안 인생의 낙을 잃은 듯 침울해 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어디선가 비추는 한줄기 빛을 발견하고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다. 두 번째 사람을 잃으면 당신은 든든한 어깨를 잃은 듯 낙담하지만 이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극복한다. 세 번째 사람을 잃으면 처음에는 무감각하다가 어느 날 문득 그를 잃은 날부터 당신의 영혼이 방황하기 시작했으며, 가슴속에서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공백이 생겼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첫 번째 사람이 준 것은 '언어' 이고, 두 번째 사람이 준 것은 '시간' 이고 세 번째 사람이 준 것은 '생명' 이다. 첫 번째 사람은 자녀, 풋사랑이다. 두 번째 사람은 친구, 중년의 사랑이다. 세 번째 사람은 부모, 반려자, 영원의 사랑이다. 이 세가지 사랑 중에 무엇이 더 아름답고 소중한 것인지는 따질 수 없다. 세가지 모두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면서 너무나 쉽게 깨뜨릴 수 있는 약속은 누구와의 약속일까요? 바로 자기와의 약속입니다. 자신과 얼마나 많은 약속을 하셨습니까? 지금 이 순간부터 기도를 열심히 하겠다, 어학 공부를 하겠다, 봉사활동에 더욱 집중하겠다. 면담이 필요한 회원에게 면담 해드리겠다. 이레농원을 천국으로 만들겠다. 등등…. 그러나 ‘작심삼일’ 이라는 말이 괜히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자신과의 약속은 마치 깨도 상관없는 것처럼, 너무나 많은 약속을 자신과 깼었기 때문에 이제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저 역시 이제까지 많은 약속을 했었고 또 깨뜨렸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많은 약속 중에서 오늘 1,638번째 전달하는것을 지켜나가고 있는 것이 바로 ‘개인묵상 말씀’ 입니다. 주님에게서 멀어지는 저 자신을 반성하면서 매일 묵상말씀을 작성해서 명절이나 2박3일 피정중에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저의 굳은 의지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다른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 부족한 묵상 글을 읽어주는 많은 분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 무엇보다도 사람이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나’ 라는 존재를 있게끔 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사랑’ 을 제일 강조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우리는 내 욕심과 이기심을 채워주는 것만을 더욱더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사랑을 외면합니다. 주님에게서 멀어집니다. 깨끗한 영혼이 아닌, 더러운 영혼을 간직하게 됩니다.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장에는 정결하고 부정한 음식에 관한 규정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규정에 따라서 부정한 음식을 절대로 먹지 않았지요. 그래서 부정한 음식을 먹은 사람은 더럽혀졌다면서 단죄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가르침을 그들을 향해 전해줍니다. 즉,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 라는 것이었다. 아직도 율법의 문자에 얽매여 있으려는 자들이 부정하다고 선언한 것들을 먹는다고 해서 더러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신 정작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나쁜 생각을 비롯한 악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지금 이 순간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르는 삶이 그 사람을 진정으로 깨끗하게 만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해야지만 주님께서 원하는 깨끗한 몸과 마음을 만들 수 있다. 어떤 원리 원칙보다도 더 중요한 사랑의 실천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는 단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더러워질 것이라고 씻지 않는 사람은 없다. 늘 씻어야 하는 것처럼, 늘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늘 깨끗해집니다. 방이 완전히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져 있을 때 쓰는 말은 무엇일까요?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까? “개판 오 분 전이구먼.” 왜 이런 말을 쓰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찾아보았다. 6.25 피난 시절 때, 부산에서 피난민들을 위해 거대한 솥에다 밥을 지어 제공했다고 합니다. 밥이 거의 다 되었을 때, 솥뚜껑을 5분 후에 열겠다면서 이렇게 외쳤다. “개판 오 분 전!!”(開 열 개, 鈑 금박 판) 배가 고프니 서로들 먼저 배급을 받겠다고 나오니 질서가 지켜질 리가 없었겠지요. 완전히 난장판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개판 오 분 전’ 이라고 말하면 난장판이 된 상태를 말하게 된 것입니다. 자기만 먼저 먹겠다고 아우성치지 않았다면 그래서 질서를 잘 지키면서 남들에게 먼저 배려할 수 있었다면 ‘개판 오 분 전’ 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을 것 같다. 지금 이 순간 나의 잘못된 말과 행동이 세상 안에 부정적인 말을 생산하는 기원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지금 이 순간 누구를 만나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온종일 우리들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위하여’ 살아가는 거룩한 은총의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저희부부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당신이 진정으로 믿는 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 믿음이 그것을 실현시킨다.'' -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 |
♡1639 지금 이 순간 부정적인 생각을 바꾸고, 힘을 내게 하는 좋은 말들을 외워 두자. - ♡ K.G.는 ''울지 않는 지혜, 웃지 않는 철학, 어린이들 앞에 고개 숙이지 않는 위대함을 멀리하게 해주소서.'' 《걱정을 버리는 6가지 방법》지금 이 순간 문제를 보는 시각을 바꾸라. 문제를 두고 걱정부터 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이 아니라, 나쁜 습관에 불과하다. 걱정하는 습관을 버리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 먼저 문제를 보는 시각을 바꿔야 한다. 내게 생긴 문제들이 골칫거리가 아니라, 해결점을 찾기 위해 도전하는 힘을 주는 계기가 된다고 생각하자. 기분 좋은 잠, 상쾌한 아침을! 매일 잠 잠자리에 들면서 그 날의 걱정거리들을 되뇌이는 것은 내일까지 걱정하는 하루로 만들어 버린다. 잠자리에 들 때 마음을 편안히 하고,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하자. 아침에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나면 어제의 문제들을 냉철하고 객관적인 눈으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라. 오늘 해결해야 할 산더미 같은 쌓인 일과 문제들을 헤아려 보느라 마음을 무겁게 하지 말라. 지금 이 순간 긍정적인 말을 하라. 생각을 말로 하지만, 말에 따라서 생각이 바뀌기도 한다. "난 못해", "큰일이야!", "어떻게 하지?" 이런 식의 부정적인 말들을 모두 버리자. 긍정적이고 확신에 찬 말들로 생활을 채우라. 말하는 습관을 바꾸는 것은 매순간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지 말자. 지금 이 순간 도움을 주는 글귀들을 외우자. 지금 이 순간 부정적인 생각을 바꾸고, 힘을 내게 하는 좋은 말들을 외워 두자. 마음에 와 닿는 구절, 명언, 책에서 읽은 아름다운 말들이 나를 성장시켜 주는 한마디가 될 수 있다. 그런 말들이 무의식중에 창조적인 생각으로 바뀌고 적극적으로 행동하게 한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만남을 가지라. 좋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좋은 대화를 나누는 것은 마음과 생각을 풍요롭고 새롭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다른 사람들을 통해 지금 이 순간 내 모습을 반성해 보고 서로를 격려함으로써 약한 의지를 다시 세울 수 있다. 성경공부 모임이나 성경묵상 말씀 읽기, 성령봉사회 봉사 또는 자원봉사단체에 참여하는 것도 좋은 사람들과 좋은 만남을 가질 수 있는 기회다. 저희부부도 23년간 빈첸시안으로 교구이사까지 활동한적 있다. 비록 타에 의해 중단되어지만 후회는 없다. 톨스토이는 부유한 귀족 출신에다가 작가로서도 크게 성공하여 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참 만족이 없었다. 무언지 모를 불안과 공포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적한 시골 길을 걸어가다가 너무나 평화로워 보이는 한 시골 농부를 만났다. 톨스토이는 농부에게 다가가 당신의 그 평화로움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농부가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항상 하느님만을 의지하고 살지요. 그래서 제 마음은 늘 기쁘답니다.” 그 말을 들은 톨스토이는 그때부터 진지하게 하느님을 찾기 시작했고 결국 하느님을 만나 과거의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주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주님의 또 다른 이름은 ‘평화’ 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당신을 깨워주기 전까지는 우리 안에서 잠을 자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배 위에서 주무시고 계셨을까요? 배는 몹시 흔들리고 물이 들이차는 상황이라 억지로 자는 척하지 않는 이상 그렇게 깊은 잠에 빠져계실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무언가 가르치려고 하신 것 같다. 제자들이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 하는 것을 멈추고 당신을 부르고 당신께 모든 것을 맡기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죽기 직전까지 필사적으로 노력합니다. 이것이 자신 안에 남아있는 자아의 욕심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힘만으로 무언가 이루어내려고 하는 것도 어떤 때는 명예욕의 발로일 수 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 힘을 다 빼고 당신께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때까지 예수님은 우리 각자 안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내가 힘이 빠졌다는 것은 어떻게 알까요? 지금 이 순간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어떤 남자는 한 여인을 좋아해 청원을 하였다. 거절당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그 남자는 그 여자가 주님께서 맺어주신 사람이 아니라 믿고 그 여자를 포기했다. 그런데 10년 뒤에 우연히 그 여자를 다시 만나게 되었고 이것도 인연인지라 다시 한 번 청원해 보았다. 그때 수락하여 둘은 결혼하였다. 만약 그 여자를 잃는 두려움 때문에 10년 동안 쫓아다녔다면 그만큼 감정의 고통을 겪었어야만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맡길 줄 알았기에 10년을 평화로이 살 수 있었다. 주님께 맡긴다면 지금 이 순간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예수님은 바다를 가라앉히신 다음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겁을 내는 게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잃으면 잃는 것이고 얻으면 얻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지금 이 순간 주님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사해는 염분이 많아서 몸이 절대 가라앉지 않습니다. 사해에 들어갈 때 꼭 지켜야 하는 수칙은 뜨기 위해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괜히 몸을 움직이면 얼굴이 물속으로 들어갈 수 있고 그러면 눈에 심한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수영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이 튀어 눈에 들어가면 엄청 아픕니다. 바오로 사도는 죽는 것이 오히려 더 낫지만 그래도 신자들을 위해 이 세상에 더 살아야겠다고 말합니다.(필립 1,21-24 참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거의 없다. 이것 자체가 자신의 모든 힘을 뺐다는 증거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 사람을 통해 모든 일을 하십니다. 이 경지까지 가기는 힘들지라도 나에게 어떤 두려움의 감정이 생길 때마다 지금 이 순간 주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주님께 더 의탁하도록 합시다. 내 안의 잠든 예수님을 깨웁시다. 하도 자주 깨워서 예수님만 깨어있고 나는 편안히 잠자는 사람처럼 됩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이 평화롭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은데, 네가 짊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나를 따를 수 있겠느냐?” 라고 예수님께서 물으실 때, 우리들은 무릎을 꿇고 “예수님, 당신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라는 거룩한 고백으로 바라는 소망을 이루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저희부부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배움은 우연히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집중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 애비게일 애덤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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