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5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한숨 자고 나서 한 발짝 물러나 보면 쉽게 풀리기도 - 한다. ♡ 호라티우스는 ''어리석은 짓을 삼가는 것이 지혜의 입문이다.'' 《불행의 책임을 남에게 돌리지 말라.》 지금 이 순간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이나 불행에 대해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이 궁지에서 벗어나 마음 편해지기 위해 즉각 다른 사람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 지금 이 순간 스스로 책임을 진다는 것은 자기 잘못을 직면해야 하므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번 남의 탓으로 돌리고 나면 책임을 떠넘기는 건 좀처럼 떨쳐 버릴 수 없는 습관으로 굳어지게 된다. 지금 이 순간 진심만을 말하라. 상대의 환심을 사면서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칭찬하면 상대는 늘 기분 좋게 느끼고 당신에 대해서 좋은 감정으로 갖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칭찬은 아부와 다름없는 것이라고 또한 상대를 마음대로 하려는 얄팍한 술책이거나 무언가를 얻어 내려는 아첨이라고 말한다. 칭찬과 아부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칭찬은 진심이 뒷받침 된 것이다. 칭찬을 할 때 칭찬 그 자체 외에 다른 뜻이 없는 진실한 마음은 눈빛으로도 알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똑똑한 척하지 말라. 똑똑한 척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바람직하지도 운에 좋은 영향을 끼치지도 않는다. 우선 똑똑한 척 행동하면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로부터 고립된다. 혼자서도 충분히 잘 해낼 수 있는 것처럼 보이면 사람들은 그를 도와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다시 말해 지나치게 똑똑하면 이로울 게 없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갖고 있는 것에 대해 우선 감사하라. 당신 스스로 행운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면 먼저 지금껏 당신이 이룬 것들을 열심히 생각해 보고 그것에 감사해야 한다. 건강 가정 가족의 사랑 자신의 재능과 기술에 고마워한다면 불행에 괴로워하거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포기하거나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에게 찾아오는 행운의 분명한 유형을 알게 되고 더 많은 행운을 만드는데 주력하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단정하게 차려 입어라. 단정하고 화려하게 차려 입는 것은 당신이 얼마나 유행을 잘 따르는지 얼마나 돈이 많은지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다. 당신을 보는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드는 것이다. 색상이나 잘 어울리는 옷차림은 사람들에게 심리적으로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 효과가 있다. 당신이 단정하게 매력적으로 차려 입으면 보는 사람들의 감각이 적극적으로 자극을 받아 당신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된다 지금 이 순간 인내심을 가져라. 운 좋은 사람들은 항상 자신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마감시간을 중요하게 여긴다. 어느 순간에 페달을 밟지 앓고 미끄러져 내려가야 할 지도 잘 알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질투심을 반드시 버려라. 가장 자기 파괴적인 감정은 질투심이다. 질투를 하면 스스로 고통스러울 뿐 아니라 적극적인 에너지를 쓸데없이 소모해서 실수를 하게 되고 결국엔 자신의 운과 기회를 망치게 된다. 질투심이 많아 보이면 당신은 결코 운 좋은 사람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운 나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행운에 배 아파하고 인색하게 구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마음을 편히 가져라.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삶이 뜻한 대로 굴러가지 않을 때는 어쩌다 힘든 날일뿐이라 생각하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 너무 너무 힘들다면 내일은 더 밝은 날이 기다릴 것이다.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한숨 자고 나서 한 발짝 물러나 보면 쉽게 풀리기도 한다. “머리가 좋은 사람보다 마음이 좋은 사람이 낫고, 마음 좋은 사람보다 손이 좋은 사람이 낫고, 손이 좋은 사람보다는 발이 좋은 사람이 낫다.” 지금 이 순간 수확할 밭의 일꾼이고자 합니다. “성경 말씀을 많이 아는 신앙인보다는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신앙인이 낫습니다.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신앙인보다는 손으로 봉사하는 신앙인이 더 낫습니다. 봉사하는 손을 가진 신앙인보다는, 그에게로 달려가는 발을 가진 신앙인이 훨씬 더 낫습니다.” 우리 안에 거룩한 영이 있기를 청합니다. 왜냐하면, 은총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나누면 좋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이 은총위에 은총이 있게 됩니다. 함께 나눔으로 은총위에 은총이 있게 되는 축복된 삶이 되시기를...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에게 “먼저” 자비를 베푸시고 사랑하셨습니다. 또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희에게 ‘서로를 가엾고 불쌍하게 여기고 자비를 베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문제는 서로를 가엾게 여기거나 불쌍하게, 측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매일 말씀를 준비할 때, 먼저 10여일전 준비한 초안을 가지고 주제를 정합니다. 주제는 쓰고자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인생에 주제는 지금 이 순간 분명해야 합니다. 내 인생 마지막 남은 것은 지금 이 순간 예수님밖에 없음을... 예수님이 전부이심을... 이것이 우리들의 인생의 흔들림 없는 주제여야 한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지금 이 순간 어떤 주제를 가진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측은한 마음으로 가엾게 여기시어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들이 가엾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러기에 지금 이 순간 이렇게 고백하는 일꾼들을 청하시기를 바랍니다. “제 인생에 남은 것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그리고 제 인생의 예수님의 도우심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마태오 복음 18장 33절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이 말씀은 “너도 자비를 받았으니, 상대방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서로 불쌍한 마음으로 자비를 풀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자비를 베풀어주셨고, 사랑하셨고, 용서하셨고, 이해 하여주셨음은 저희에게 기쁜 소식이고 희망입니다. 아멘. 지금 이 순간 인생의 마지막 남은 것은 예수님 밖에 없음을...그리고 예수님이 전부이심을... 그리고 그 예수님이 우리들을 가엾고 불쌍하게 여기시어 사랑하고 용서하고 계심을 믿고 살아가는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저희부부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악은 선을 인식시키고 고통은 기쁨을 느끼게 한다.'' - 그리스도 - |
♡1606 . ‘주님, 오늘 내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내가 처음 만나는 사람인 - 것처럼 대하게 하소서.’ ♡ 유동범은 ''모든 인간은 본래 혼자다. 그래서 혼자일 때가 가장 편안하다. 따로 사는 것만이 함께 살기를 수월하게 한다. 일정한 거리가 없이는 사람이 관계를 가질 수가 없다.'' 공동생활을 오래했던 한 수사 신부님이 이탈리아의 한 공동체를 방문했다. 4백 명이 함께 공동 생활하는 곳인데 서로를 대하는 이들의 모습은 매일, 아침이나 저녁이나 따뜻하고 변함이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공동생활의 어려움을 너무도 잘 알고 있던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어떻게 이런 신선한 사랑을 매일 나눌 수 있습니까? 서로 지겹지 않습니까?”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희들은 매일 아침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 오늘 내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내가 처음 만나는 사람인 것처럼 대하게 하소서.’”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날 때 즐거울까요, 긴장이 될까요? 당연히 긴장이 됩니다.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많은 준비와 노력을 합니다. 이미 나의 사람이 되었다고 편하게 생각하면 막 대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함으로써 상대에게 부담을 줍니다. 그렇게 관계가 소원해지게 됩니다. 정채봉씨가 쓴 에세이집에 ‘만남’ 이란 글이 있다. 그곳에서 작가는 여러 가지 만남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는 가장 잘못된 만남이 ''생선 같은 만남'' 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한 만남은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으로 ''꽃송이 같은 만남'' 을 듭니다. 피어있을 때에는 환호하지만 시들게 되면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지우개 같은 만남'' 입니다. 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만남 중에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어떤 만남일까요? 그것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 입니다. 지금 이 순간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주기 때문입니다. 만남은 이렇게 여러 가지로 표현될 수 있지만 크게 보자면 오래 지속되는 만남과 빨리 끝나버리는 만남, 이렇게 딱 두 종류가 있는 것입니다. 오래 지속되는 만남엔 ‘눈물’ 이 있다. 이 눈물이 마냥 기분 좋은 눈물만은 아닐 것입니다. 상대의 아픔을 감싸주기 위한 눈물이요, 나를 사랑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눈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래 가는 만남은 내가 즐겁기 위한 만남이라기보다는 상대를 즐겁게 해 주는 만남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로 누군가를 만날 때 힘이 든다면 잘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만날 때 즐겁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힘들면서도 즐겁다면 잘 만나는 것입니다. 즐겁기만 하다면 내가 그 사람을 이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이익을 얻기 위해 만난다면 그 사람과의 만남이 즐겁다. 상대를 위한 만남은 많은 참아냄이 필요합니다. 매번 처음 만나는 것처럼 긴장해야합니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사람을 만날 때 즐겁다면 그 사람을 만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을 만날 때 힘이 들면 만나도 됩니다.” 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불만 때문에 하느님께 죽여 달라고 청한 인물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에게 좋은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런 만남이 좋은 만남입니다. 엘리야는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과 만났다. 심지어 삼년 반이나 그들을 피해 있었다. 그렇게 이스라엘에게서 바알 예언자들을 죽여 이스라엘을 정화하였다. 이런 만남이 좋은 만남입니다. 마냥 즐겁기만 하다면 나중에 남는 것이 없다. 부모가 자녀를 키울 때 힘이 듭니다. 좋은 만남인 것입니다. 자녀가 나이든 부모와 만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만남이 ''남는 만남'' 입니다. 힘이 든다면 계속 만나야합니다. 그래야 나도 발전이 있다. 그런데 이것이 기도에도 적용됩니다. 하느님은 나에게 영광을 주시기 위해 기다리지 않으십니다. 나를 죽이기 위해 기다립니다. 나의 피를 빼내시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신 예수님도 그런 하느님을 만나고 계신 것입니다. 하느님도 나를 만나시는 것이 힘이 드십니다. 당신의 피인 성령을 주셔야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서로 피를 흘리는 만남이기 때문에 오래 가는 만남인 것입니다. 제자들은 아직 이 만남을 이해하고 있지 못합니다. 영광 속에서만 머물려하고 피를 흘리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순교해야 함을 더욱 확고히 하셨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는 성경을 뜻합니다. 성경 말씀은 바로 ‘탈출기’ 에 관한 내용입니다. 기도의 내용은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라고 하듯이 ‘나의 죽음’ 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니 자신의 영광만을 위한 기도가 얼마나 기도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부모를 만나 자신을 크게 만들려는 사람이 있고, 부모를 만나 자신을 작게 만들려는 사람이 있다. 부모를 만나 자신을 크게 만들려는 사람은 부모를 이용하는 사람이고, 부모를 통해 자신을 작게 만들려는 사람은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관계가 진정한 관계인지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기도를 하는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자신의 뜻에 따라 하느님을 이용하려는 사람이 있다. 어떤 기도는 하느님을 공경하는 기도이고 어떤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기도입니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나아가시는 것을 보시며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고 하시며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만약 자신의 세속적인 이익을 위해 기도한다면 주님께서는 그런 영광은 주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목적은 나를 죽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지 키우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고 나면 반드시 내가 조금 더 주님의 뜻에 죽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멘. 지금 이 순간 기쁜 일이든 고통스러운 일이든 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이라 생각하며,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서 주어진 매 순간이 생의 마지막인 것처럼 살 수 있는 기도의 은총이 바다의 물결처럼 춤을 추듯 놀라운 기적의 섭리가 이루어지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저희부부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난관은 낙담이 아닌 분발을 위한 것이다. 인간의 정신은 투쟁을 통해 강해진다." - 윌리엄 엘러리 채닝 - |
♡1607 사랑은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상대에게 내어주는 것입니다. - ♡ 헨리 포드는 ''세상이 당신에게 준 것보다 더 많이 세상에게 주라.'' 영화 ‘기생충’ 은 가난한 집 가족과 부잣집 가족 간의 관계를 통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가족 간의 관계가 아니라 두 인격체의 관계로 대입해 생각해도 괜찮은 영화 같다. 그러면 이제부터 가난한 우리가 어떻게 으리으리한 집을 차지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가장 간단하면서도 가장 좋은 방법은 돈을 벌어서 그 집을 구입하는 것입니다. 가난의 굴레에서 피자 박스나 접으면서 그 집을 살 돈을 모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또 이것은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이 그 집을 팔 의향이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하느님 나라도 우리가 최종적으로 살게 될 천국과 같은 집입니다. 그런데 그 하느님 나라의 집을 돈을 많이 모아서 살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다. 인간이 그만한 액수의 돈을 모을 수 없을뿐더러 그분은 그 나라를 우리에게 파실 의향도 없으십니다. 당신의 영원한 집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이 순간 인간이 노력해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인간이 자신의 노력으로 하늘나라에서 살 수 있다고 믿었던 적이 있다. 바로 첫 조상들이 그랬다. 그들은 무화과 잎으로 두렁이를 만들어 자신들을 가렸다. 그러면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다. 인간의 행위와 공로만으로는 결코 그 나라에 살 자격을 얻을 수 없다. 하늘 나라에서 이렇게 살아가는 이들이 ‘천사들’ 입니다. 천사들은 하느님의 종으로서 합당하게 하늘 나라를 누립니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잠은 다시 지하 단칸방에 가서 자야한다는 것입니다. 그 집의 주인이 되지 않는 이상은 그 집의 모든 것을 내 것처럼 누릴 수는 없다. 그렇더라도 지옥에 가는 것보다 주님의 종으로서 그 집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큰 기쁨일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종살이하는 것이 싫어 그 집을 다시 강탈하려 한다면 마귀가 됩니다. 아예 쫓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사실은 그렇게 주인의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것처럼 여겼기 때문에 쫓겨나게 되었다. 종은 주인의 것과 내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지내야합니다. 종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도 아주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영화 ‘기생충’ 에서 반지하에 사는 아이는 그 부잣집의 딸의 과외선생으로 들어갑니다. 둘은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만약에 둘이 결혼까지 하게 된다면 그 아이는 그 집을 자신의 집처럼 누릴 수 있다. 주인의 자녀와 혼인하면 한 가족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이 성립되려면 나도 그 집 자녀를 사랑하고 그 집 자녀도 나를 사랑해야만 합니다. 사랑은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상대에게 내어주는 것입니다. 상대를 위해 죽을 줄 알아야 둘이 한 몸이 될 수 있다. 내가 내 자신을 내어주어야 상대가 자신을 내어주어 나는 그 상대의 심장에 살고 그 상대는 나의 심장에 살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를 이렇게 차지한 첫 모델과 같은 분이 계십니다. 성모 마리아는 하늘나라의 아드님과 한 몸이 되어 하느님 나라를 당신의 것으로 삼으셨다.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하시게 된 것은 그분의 뜻을 당신의 뜻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사람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뜻이 욕구요 본성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50)라고 하십니다. 당신 뜻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당신 가족이라는 의미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주님의 뜻이 당신 안에서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시며 하느님의 아드님과 한 몸이 되셨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영광스럽게 하실 것인지 성모님을 통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모님은 그런데 하느님 나라를 그 이전부터 차지하고 계셨던 분입니다. 하느님의 뜻인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당신 뜻을 봉헌하는 순간부터 하느님의 나라는 성모 마리아의 것이었다. 성모 마리아는 이렇듯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는지 몸소 보여주신 구원의 모델이십니다. 그분이 하늘로 올라간 것만 경축할 것이 아니라 내가 그분의 모범으로 그분과 같은 결말을 맞게 될 것인지를 살펴야겠다. 지금 이 순간 나는 하느님의 아드님, 하느님의 뜻을 잉태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살려고 노력하였습니까? 그러면 당신을 땅으로 내려오게 해 준 우리를 위해 당신이 계신 곳으로 우리를 올려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이 땅에 살게 합시다. 내가 하늘로 올라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느님의 유일한 뜻은 나의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아멘. 지금 이 순간 성령의 불을 밝혀 주님의 말씀 속에 감사함으로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늘의 은총과 축복을 보는 눈과 하늘의 음성을 듣는 귀가 열린 신앙인 되시어 천상 상급을 받는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저희부부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작은 성공을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큰 성공을 얻지 못한다.'' - 제세 메서 게만 - |
♡1608 모든 죄는 교만으로 시작됩니다. 교만하면 거짓말하기 시작합니다. - ♡ 샹포르는 ''모든 날 중 가장 완전히 잃어버린 날은 웃지 않은 날이다.'' 인도의 제녀 부인은 임금이 사마 부인을 더 사랑하는 것에 질투가 났다. 어느 날 제녀 부인은 용기를 다해서 왕에게 이렇게 거짓말을 꾸며댔다. “상감마마, 사마 부인은 자주 절에 출입하는데 아마 중놈과 은정을 통하는가 하나이다.” 제녀 부인은 왕을 위하는 듯이 그럴듯하게 거짓을 꾸며댔다. 왕은 부들부들 떨면서 활을 들고 사마 부인 방으로 달려갔다. 방안에 들어선 왕은 한 마디 말도 없이 사마 부인을 향하여 활을 쏘았다. 이상하게도 첫 화살도 둘째 화살도 맞지 않았다. 셋째 화살도 맞지 않았다. 왕은 숨을 내쉬며 활을 내렸다. 사마 부인에게 비로소 말을 건넸다. “그대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로다. 어찌하여 화살이 맞지 않는가?” 사마 부인은 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상감마마 어찌 별다른 사람이겠나이까. 다만 상감마마를 생각하는 것이 첩의 마음의 전부인지라. 아마 그 화살 사랑에 못 이겨 피한 줄 믿나이다.” 왕의 두 눈에서 눈물이 비 오듯 하였다. 거짓말을 한 제녀 부인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거짓말은 교만에서 나옵니다. 자신을 더 높이고 더 인정받기 위해 하는 것. 겸손하면 어차피 떨어질 위상이 없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솔직함이 믿음과 직결되는지 보여줍니다. 요한복음은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눈이 곧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는 눈임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거짓이 없는 사람만이 성경을 해석하여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 앞에서 솔직하지 못해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솔직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잘못을 가리려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은 것.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이유는 하느님과 같아지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잘못이 있음을 하느님께서 안다면 꾸중을 듣고 작아져야 합니다. 이것을 견디지 못하고 그들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두렁이를 만들어 몸을 가립니다. 그러면 높아질 줄 알았던 것.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숨기려는 이 모습이 곧 하느님과 맞서려는 모습입니다. 잘못을 감춤으로써 자신이 높아진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인사 청문회 때 항상 말썽이 생기는 이유는 잘못을 감추어 두었다가 들통 났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잘 감추고 들키지 않으면 높은 위치에 앉게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감추려는 사람은 에덴동산에 살기에 합당하지 않다. 아마 나타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이런 묵상을 하고 있었을 것. 이때 필립보가 와서 율법에 기록된 메시아를 만났다고 증언합니다. 성경말씀에 철저한 나타나엘은 그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율법에 따르면 메시아는 유다지방 베들레헴에서 나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엘 쪽으로 다가오십니다. 그러며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나타나엘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 ‘뭐지? 하느님의 백성이 거짓이 없어야 한다는 내 생각을 어떻게 아셨지?’ 그래서 묻습니다.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아마도 나타나엘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을 것. 이스라엘에 태어났다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거짓이 없어야 이스라엘 백성임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무화과 잎으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던 그 나무 밑에서 그 생각을 더 굳게 다지고 있었던 것.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자신의 속생각까지 다 알아맞힌 예수님께 이젠 믿음이 생겨 이렇게 고백합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예수님을 죽인 많은 유다인들은 성경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들이 성경을 읽으면서도 참 믿음에 도달하지 못했던 이유는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교만이 눈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도 믿지 못하게 되는 것. 이 교만에서 벗어나는 길은 솔직해지는 것. 모든 죄는 교만으로 시작됩니다. 교만하면 거짓말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을 높여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죄의 용서는 겸손으로 시작될 것. 이를 위해서 고해소에서 무릎을 꿇을 필요가 있는 것. 거짓말하지 않고 죄를 있는 그대로 고백함으로써 죄를 짓기 이전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 이런 고해성사가 아니면, 야고보 사도가 “그러므로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야고 5,16)라고 하는 것처럼 면담자에게 깊은면담을 통하여 하느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도 좋다. 고해소에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듣고 있는 사제에게 솔직해지는 것이 더 좋을 것. 예수님은 성경말씀을 깨닫는 사람에게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성경을 더 많이 이해할수록 예수님을 더 깊기 믿게 됩니다. 그 이전에 겸손해져야 합니다. 그 가장 좋은 방법은 나의 죄를 드러낼 수 있는 솔직함입니다. 우리는 두렁이를 걸친 채 성경을 이해하겠다고 달려드는 사람이 아닌지 살펴야 합니다. 믿음의 기도로 누군가를 기억하며 주님과 같은 길을 기쁘게 열심히 함께 걸어가는 은총과 축복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저희부부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가시나무를 심는 자는 장미를 기대해서는 안된다.''-필페이- |
♡1609 ''여러분을 더욱 높이 올려줄 사람만 가까이 하세요'' - ♡ 루소는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내 몸이니까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자부를 하겠지만, 실제로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합니다. 어떤 학자가 연구를 했다. 자신을 보다 더 객관적으로 알아챌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가장 오랫동안 함께 시간을 보내는 다섯 사람의 평균값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발표를 합니다. 그 이유를 우리 뇌의 특징을 들어서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뇌는 가까이 지내는 사람을 자기 자신과 동일 인물로 취급하고 있다는 것. 행동이나 습관을 결정하는데 ‘진짜 자신’ 의 주관은 1/6밖에 작용하지 않습니다. 내 주변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 어떤 사람을 가까이 할 것인지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제가 청주교구 수요치유기도회 강의시 ''나의 가치'' 에서 ''나를 오랜지 다섯개에 팔수도 있고, 감자. 한 자루에 팔수도 있다. 최고의 보석으로 자신의 가치를 매길 수도 있다.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나의 정의가 자신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 진귀한 보석과 같은 존재입니다. 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의 말을 무시해도 상관이 없다. 세상의 기준대로 자신의 가치를 함부로 매겨서도 안됩니다. 나의 가치를 아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오프라 원프리는 ''여러분을 더욱 높이 올려줄 사람만 가까이 하세요'' 합니다. 이 점은 나 역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내 자신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가까이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주님을 가까이할수록 우리의 모습도 주님과 하나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면서 나의 행동이나 습관은 보다 더 좋은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며, 나와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쳐서 이 세상 전체가 변화될 수도 있다. 문제는 주님과 가까이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주님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면서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것만 이루어주시길 청할 뿐입니다. 20세 이하 월드컵에서 막내 이강인의 활약에 힘입어 우리나라 대표팀이 준우승을 차지했다. 남자 월드컵 사상 최고의 성적을 낸 대회였다. 이강인은 대회 골든볼을 수상했다. 이강인은 스페인 발렌시아 팀이 지금처럼 자신을 대우해주지 않으면 이적할 것이라는 뜻을 밝혔다. 이강인은 17살의 나이에 발렌시아 1군으로 데뷔했지만 발렌시아 감독은 이강인을 경기에 투입하지 않았다. 자신의 전술과 맞지 않고 너무 나이가 어리다는 것. 가끔 이강인이 투입되었을 때는 놀라운 활약을 했다. 그럼에도 감독은 이강인을 벤치에만 앉혀 놓았던 것. 선수는 경기를 뛰지 않으면 감각과 자신감을 잃습니다. 이강인 선수가 이번을 계기로 정 그러면 팀을 떠나게 해 달라고 청한 것. 이번 월드컵을 시청한 발렌시아 팬들은 이강인을 그렇게 대우하는 것에 뿔이 났다. 구단에 이강인을 놓치면 알아서 하라고 강력한 항의를 하고 있다. 다급해진 구단은 급박하게 이강인에게 접촉을 시도하고 있다. 지금 이강인을 원하는 팀이 많아졌기 때문에 이젠 거의 이강인이 갑의 입장에서 발렌시아 구단과 대화하고 있다. 어린 나이에 능력이 있음을 인정받아 뽑아는 놓았지만 정작 그를 뛰게 하지 않으면 이강인의 값어치는 계속 하락할 것. 어린 외국인 선수 기용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 몇 년을 경기에 뛰지 못한 이승우와 백승호는 다시 이전 기량을 회복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관심이 없는 팀에 머무는 것보다는 관심을 가져주는 팀으로 가는 것이 더 낫다. 레알에서 조금씩 관심을 받지 못하던 호나우두는 돈을 적게 받더라도 자신을 인정해주는 유벤투스로 이적했다. 또 다시 전성기를 맞고 있다. 가치를 알아주지 않으면 떠나는 것이 상책입니다. 자신을 보다 더 객관적으로 알아챌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이 점은 나 역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 내 자신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을 가까이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주님을 가까이할수록 우리의 모습도 주님과 하나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면서 나의 행동이나 습관은 보다 더 좋은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며, 나와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쳐서 이 세상 전체가 변화될 수도 있다. 문제는 주님과 가까이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주님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면서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것만 이루어주시길 청할 뿐. 신앙에서도 이렇게 가치를 몰라 잃게 되는 보석이 있다. 바로 ‘주님의 기도’ 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주님의 기도의 가치에는 집중하지 않고 마치 벤치에 앉혀놓고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 원인은 주님의 기도를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바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이 나의 주인이 되게 해 달라는 청원이고, 내가 이웃을 사랑하게 해 달라는 청원입니다. 사람들은 돈이나 명예 등을 위해 주님의 기도를 바쳐버립니다. 여행을 떠나면서 “이번 여행 아무 사고 없이 잘 다녀올 수 있도록 주모송을 바칩시다.” 라고 해놓고, 좋은 여행이 되기만을 생각하며 정작 주님의 기도 내용에는 집중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뛰어난 선수를 벤치에 앉혀놓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주님의 기도에만 집중하면 여행은 알아서 주님께서 잘 돌보아 주실 것. 예수님은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기도를 올바로 바치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 주님의 기도를 올바로 바치려면 섬길 주인을 명확히 정하라는 내용입니다. 돈을 주인으로 섬기면서 주님의 기도를 바치기 때문에 주님의 기도가 밀려나는 것. 그러면 내가 주님이 아닌 돈을 섬기고 있다는 증거는 무엇일까요? ‘걱정’ 입니다. 돈을 섬기면 당연히 걱정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하라고 하고 미래를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미래를 걱정하는 것 자체가 이미 재물에 지배받고 있다는 뜻. 그러면 동시에 지금 이 순간 당신 뜻만을 찾으라는 하느님을 만날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은 오늘 여기 계신데 나는 내일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향주 삼덕(신, 망, 애)의 축복으로 살아가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저희부부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여러분을 더욱 높이 올려줄 사람만 가까이 하세요'' - 오프라 원프리 - |
♡1610 성공하고 복 받는 비결은 지금 이 순간 절대 남 탓을 하지 않는 것. - ♡ 매신저는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인생 대역전하는 방법》성공하고 복 받는 비결은 지금 이 순간 절대 남 탓을 하지 않는 것. 책임이 나한테 있고, 내가 잘 해야 된다고 생각하면서 지금 이 순간 노력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성공합니다. 부모나 환경을 탓하지 않고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면서 환경을 받아들여 극복하고 노력하다 보면 그때 자기의 삶이 덧셈에서 곱셈으로 바뀌게 됩니다. 자기의 할 일을 다 하지 않고 남 탓을 하면 뺄셈을 하다가 마지막은 나눗셈을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서는 복이 달아납니다. 그것이 무서운 업입니다. 현실에 항상 감사한 마음을 품고 살면 덧셈을 하다가 어느 순간에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나오면서 곱셈으로 인생은 대역전이 됩니다. 그럴 때 그 인생은 성공하는 것입니다. 1968년 6월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심리학 교수팀은 매우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길거리에 지갑을 떨어뜨린 후 그 속의 신분증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를 확인했다. 그 결과 약 45%의 신분증이 주인에게 되돌아갔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발견됐다. 6월 4일은 단 하나의 신분증도 주인에게 되돌아오지 않았다. 그날은 미국의 차기 대통령 후보로 가장 유력했던 로버트 F. 케네디가 괴한에게 암살당한 날이었다. 심리학자들은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한 가지 기분 나쁜 소식이 사람들의 행동을 부정적으로 만든다는 것. 복음에서 오로지 예수님만이 빵 5개 물고기 2마리로 5천 명을 배불리 먹일 수 있다고 믿는 분이셨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직 그 믿음에 도달하지 못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적을 하시기 전에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라고 하십니다. 이는 제자들을 놀리시는 말이 아닙니다. 할 수 있으니까 해 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라고 되물으며 자신들에겐 그러한 기적을 할 믿음이 없음을 스스로 고백합니다. 지금 이 순간 믿음이 없으면 할 수 없고 믿음이 있으면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제자들에게 “시도라도 해 봤냐?” 라고 물으시는 듯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아라.” 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자신들이 가진 음식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보지도 않은 것.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대한 불만이 녹아있다. 그들이 가진 음식은 10명도 먹을 수 없는 양이었다. 예수님은 “할 수 있다고 믿고 열 명이라도 먹이려고 노력해보아라.” 라고 하시는 것 같다. 복권을 사야 복권에 당첨될 수 있다. 우리는 지레짐작으로 불가능하다고 믿어 아무 시도도 하지 않습니다. 5천 명을 먹이는 것도 한 사람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한 사람부터 먹이려는 마음은 기분이 좋아야 생깁니다. 사람들은 기분이 좋고 싶으면서도 자기 기분을 소홀이 대합니다. 옛날에 동양의 어떤 임금이 꿈을 하나 꾸었다. 그 꿈은 자기의 이빨이 하나하나 다 빠져버리는 꿈이었다. 왕은 나라에서 유명한 해몽자를 불러다 꿈을 해석하게 하였다. 해몽자는 꿈을 풀어 해석하기를 임금님의 친척들이 한 사람씩 죽어서 맨 나중에는 임금님만 남게 된다고 해몽을 했다. 기분이 언짢은 임금은 그 해몽자를 죽였다. 임금은 계속해서 다른 해몽자를 구해 오라고 했다. 새로운 해몽자가 임금에게 불려왔는데 그는 임금님의 꿈 얘기를 들은 후에 다음과 같이 해석을 내렸다. “임금께서는 집안의 모든 친척들보다도 가장 장수를 해서 오래 오래 사신다는 꿈입니다.” 왕은 대단히 기뻐하며 그 해몽자에게 많은 상금을 내렸다. 기분은 전염됩니다. 내가 기분이 좋으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겐 좋은 일만 생기게 됩니다. 같은 상황이라도 긍정적이고 기분이 좋은 사람은 기적을 볼 수 있지만 부정적이고 기분이 나쁜 사람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고 불가능하다고 여깁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라고 하셨다면 그들을 통해 기적을 행하시려던 것. 우리에게도 예수님은 수많은 기적의 기회를 주시지만 우리가 기분이 나빠서 평상시 부정적인 생각에 너무 물들어서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마더 데레사처럼 모든 가난한 사람들로 천국을 채우고 싶은 만큼 기분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항상 기분이 좋으려면 끊임없이 모든 상황에서 감사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하느님만 의지하여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의 축복을 받으시고, 그 능력으로 다른 사람에게도 감사와 축복을 빌어주는 은혜로운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저희부부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가치 있는 적이 될 수 있는 자는 화해하면 더 가치 있는 친구가 될 것이다.'' - 펠담 - |
♡1611 책 한 권의 지식으로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 - ♡ 톨스토이는 ''같은 사물이라도 보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내 안의 보물을 발견하는 법》명검(名劍)을 가진 자는 그것을 상자에 넣어둔 채 함부로 쓰지 않는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보물은 무엇일까? 내가 가진 재주일까? 내가 아끼는 물건일까? 아니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일까? 누가 뭐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자신을 함부로 굴리지 않는 것,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발견하고 개발하는 것, 그것이 모든 이들의 최우선 과제다. 인품이 갖추어지지 않은 사람이 온갖 명품으로 몸을 치장한다고 해서 돋보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비웃움의 대상이 된다. 내면의 명검을 가진자, 인생에서 불굴의 신념을 획득한 자는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가 명품을 입었을 때, 명품이 그를 돋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명품을 돋보이게 한다. 그러므로 먼저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라. 이것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스스로를 함부로 대한다. 이것은 남을 함부로 대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한 일이다. 자신의 가치를 알고 자기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 그가 바로 진정한 보물을 간직한 사람이다. - 장자 '성공을 말하다' 中에서 - 하느님 외에 절대적인 것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런 것이 있다고 믿는 착각이 우매함과 폭력을 낳는 것. 실제로 가장 대화가 안 되는 사람은 평생 책 한 권만 읽은 사람이라고 하지요. 책 한 권의 지식으로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 라고 확신하는 사람이 행하는 폭력이 이 세상에 만연되어 있다.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피해가 되면 절대로 상대하지 못할 적으로 돌리고 있으며, 자신의 이념과 다르다는 이유로 마치 원수 보듯이 여깁니다. 이 안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은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어렸을 때 한 친구와 싸웠던 기억이 하나 있다. 지금 떠올려 보면 별것도 아니었지만, 당시에는 그 친구가 틀린 것이고 그래서 당연히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싸우는 친구와 저를 선생님께서 발견했고, 저희는 선생님 앞에서 서로 손을 잡고 화해해야만 했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친구끼리 싸우면 어떻게? 서로 손 잡고 화해해.” 억울했다. 선생님께서 악수하고 화해하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친구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얘가 잘못했는데 왜 화해해야 해요?” 저는 친구가, 친구는 제가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지금도 그렇지 않습니까? 결국, 어린이의 미성숙한 마음으로 지금도 사는 것 같다. 그냥 똑같은 사람이니까 서로 손을 잡을 수 있으며, 그냥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안 될까요? 제자들은 밤새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고 있었다. 풍랑과 맞바람으로 정상적으로 노를 저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목적지인 건너편에 다다르지 못합니다. 사실 제자들의 예전 직업 중에서 어부가 제일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물을 어떻게 다루는지 알고 있었고 자신도 있었을 것.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가 없다. 이러한 당황스러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자신의 배에 받아들이는 것. 억울하고 힘든 상황, 그래서 당황스러운 상황에 자주 빠지는 우리입니다. 그때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이십시오.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 어느 형제님의 하소연을 들었다. 아내와의 관계가 너무 힘들다는 것이었지요. 자신만 사랑하고 있는 것 같고, 이 사랑에 의해 자신은 이용당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특히 “남자가 그것도 이해 못 해줘?” 라면서 화를 내면 할 말이 없어진답니다. 반박하면 “남자가~~” 라고 시작하는 폭탄을 받게 됩니다. 왜 나만 사랑하고, 왜 나만 이해해야 하느냐는 하소연이었다. 이런 관계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이는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 역시 많이 겪게 되는 일입니다. 나만 사랑하고 있고, 나만 이해해야 하는 현실이 싫다는 말인데, 이렇게 말하고 있는 배우자 역시 거의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이 놀랍다. 사랑은 동등하게 작용합니다. 처음에는 나만의 손해인 것 같지만, 두 사람이 함께하는 긴 시간을 놓고 생각해보십시오. 결국, 동등하게 작용하고 있다. 손해 보고 있다는 생각이, 나만 이해해야 한다는 현실이 사랑의 관계를 깨뜨립니다. 그러나 손해 보는 것은 나만이 아니고, 상대방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인정하게 되면 무엇인가가 보이게 됩니다. 사랑이 보입니다. 지금 이 순간 가까이, 더 가까이, 아주 가까이 예수님께로 가서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지금 이 순간 이미 주님께 보호받고 은총으로 행복한 자비를 입고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하는 은혜로운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저희부부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인생을 살면서 힘들 때 좌절하기보다는 오늘처럼 성공한 나를 상상하곤 했다.'' - 박해미(뮤지컬 배우) - |
♡1612 이해의 나무에는 사랑의 열매가 열리고, 오해의 잡초에는 증오의 가시가 돋는다. - ♡ 호란드는 ''빨리 성장하는 것은 쉬 시들고, 서서히 성장하는 것은 영혼히 존재한다.''《이해라는 나무와 오해라는 잡초》 이해의 나무에는 ''사랑의 열매'' 가 열리고, 오해의 잡초에는 ''증오의 가시'' 가 돋는다. 이해는, 내면적인 안목에 의존해서 대상을 바라볼때 숙성되고 오해는, 외면적인 안목에 의존해서 대상을 바라볼때 발아된다.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을 외형적 안목에 의존해서 바라보는 성향이 짙을수록 오해의 소지도 많아진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지나치게 외형적 안목을 중시하게 되면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의 내면적 가치를 소홀히하게 된다. 진정한 사랑은 마음속에 있는 것이지 마음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어떤 결함도 내면적 안목에 의존해서 바라보면 아름답게 해설될 수 있는 것이다. 걸레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외형적 안목에 의존해서 바라보면 비천하기 그지없지만 내면적 안목에 의존해서 바라보면 숭고하기 그지없다. 걸레는 다른 사물에 묻어 있는 더러움을 닦아내기 위해 자신의 살을 헐어야 한다. 이해란 그대 자신이 걸레가 되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미국의 가로수는 키가 크고, 둘레가 넓다. 그런데 간혹 비, 바람에 큰 나무가 쓰러지는 걸 봅니다. 이유는 크기보다 뿌리가 깊지 않아서라고 합니다. 여름이면 물을 자주 주기 때문에 굳이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아도 되기에 뿌리가 깊지 않다고 합니다. 대서양에서 잡은 청어도 그렇다고 합니다. 청어만 있을 때는 먼 항해에 지쳐서 대부분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청어가 무서워하는 상어를 한 마리 넣어두면 청어들은 상어를 피해서 움직이게 되고, 먼 항해에도 대부분 죽지 않았다고 합니다. 때로 갈망과 갈증이 필요한 건, 나무도, 청어도, 우리의 삶도, 우리의 교회도, 우리의 성령봉사회도 비슷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예전 아이들과 비교하면 체격이 크고, 키도 커졌다. 지구력과 체력은 예전의 아이들과 같지 않다고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시련과 고통의 바람이 불어오면 쉽게 넘어지곤 합니다. 신앙은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행위가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뜻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그 점을 볼 수 있다.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곧 하느님 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셨다고 이야기합니다. 피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실 때 흘리신 피입니다. 피는 가시관을 쓰시고, 채찍으로 맞으실 때 흘리신 피입니다. 피는 십자가 위에서 창으로 찔리신 옆구리에서 흘러나왔던 피입니다. 교회의 모습을 봅니다. 화려하고 쾌적한 성당이 있다. 영적인 갈증을 채워줄 프로그램이 있다. 지금 이 순간 마음만 먹으면 아주 쉽고 편하게 성당으로 갈 수 있다. 인터넷 검색만으로 좋은 말씀과 강론을 찾을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봉사할 시간과 장소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도 주일 미사 참례 수는 매년 줄고 있다.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 영적인 도전과 갈증을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크게 자란 나무지만 뿌리가 깊지 못해서 비와 바람에 쉽게 넘어지는 나무를 보는 것 같다. 성직자가 독신으로 사는 건 온전한 몸과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하느님의 자녀를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독신의 의미를 알지 못하면 그냥 혼자 사는 사람과 다르지 않다. 권위와 독선에 취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피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순교자들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일까요? 성서는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영원한 생명은 물리적인 법칙을 넘어서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공간 안에서 시간을 무한정 늘리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 사랑의 길, 자비의 길’을 함께 걷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약하기에 세상의 유혹 앞에 넘어지곤 합니다. 참된 가치와 진실한 행복을 선택하기보다는, 순간의 기쁨을 주는 것들을 택하게 됩니다. 잠시의 기쁨과 쾌락을 위해서 양심과 영혼을 속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 예수님의 권능과 표징은 하느님과 일치하는 기도에서 시작합니다. 광야에서의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는 영적인 갈망에서 시작합니다. 주님은 우리 삶에 문제도 주시지만, 해답도 주십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들은 기도로 잘 살펴보시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가면서 은총의 해답을 찾아내는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저희부부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괴로움이야말로 인생이다. 인생에 괴로움이 없다면 무엇으로 만족을 얻을 것인가?'' - 도스토옙스키 - |
♡1613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과, 악의 세력을 따르는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 ♡ 톨스토이는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각 다르다.'' ‘암은 병이 아니다.’ 라는 책을 읽었다. 암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꿔주는 책이었다.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낮에는 잘 막히지 않는 길이 출, 퇴근길에는 막히게 됩니다. 이는 차량이 한꺼번에 몰리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차들은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폭설로 길이 막히면 대부분의 차량은 길에서 지내게 됩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은 차량을 불도저로 밀어버리지 않습니다. 원인은 폭설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에 암이 생기는 것은 우리의 혈액이 흘러가야 하는데 혈액이 탁해지고, 혈관에 벽이 생겨서 산소공급을 잘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암은 우리의 몸을 지키려는 우리 몸의 면역체계의 발동이라고 합니다. 암은 산소를 사용하지 않고 우리 몸의 노폐물을 처리하는 돌연변이 세포라고 합니다. 내 몸의 혈류에 산소가 충분히 공급되면 암은 사라지기도 하고,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다고 합니다. 내 몸에 총알이 박혔다면 총알이 죄를 지은 것이 아닙니다. 총알을 쏜 사람이 죄를 지은 것. 내 몸에 암이라는 총알을 무조건 없애고, 죽이는 것이 최선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 총알을 쏜 장본인은 ‘나’ 이기 때문입니다. 내 몸의 혈액이 맑고, 깨끗한 산소와 영양분을 전해 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물성 단백질의 섭취를 줄이고, 특히 지방의 섭취를 줄여야 한다고 합니다. 채소와 야채 그리고 과일 섭취를 늘려야 한다고 합니다. 나름대로 생각할 거리를 주는 책이었다. 바실리오 성인은 신앙의 본질을 이렇게 이야기 하였다. ‘신앙의 본질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믿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의 본질은 성경에 있으니 성서를 늘 가까이 해야 한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믿는 사람의 본질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데 있으며, 이웃을 사랑하는데 있는 것. 그러기에 참된 신앙인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식별’ 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과, 악의 세력을 따르는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알려 주신 길을 충실히 걸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을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안개가 자욱한 길을 운전하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우리들의 삶에도 식별을 하기 어려운 안개가 끼게 됩니다. 좋은 것과 가치 있는 것이 함께 할 때는 식별을 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좋아 하지는 않지만 가치 있는 것들 중에서 가치 있는 것을 식별하기가 어렵다. 그 이유는 좋아하지 않는 것이 우리를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좋아하지만 가치가 없는 것을 식별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때가 있다.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은 비록 가치가 없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경향이 많다. 좋지도 않고, 가치도 없는 것은 식별하기가 쉽다. 당연히 선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식별도 이와 비슷합니다. 위로를 주고, 하느님 보시기에도 좋은 것을 택하는 것은 그렇게 힘들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이 성당에 다니면, 별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함께 성당을 다니는 사람들이 많은 것과 비슷합니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함께 하자고 하면 많은 핑계를 댈 수 있다. 흔히 하는 말이 ‘당신이나 잘 하세요.’ 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인들은 말과 행동에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을 택하라고 하면 이것 또한 갈등이 생깁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에 ‘친구 따라 강남 간다.’ 라고 하기도 합니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을 따르라고 하면 이것은 식별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안하면 되니까요. 우리가 올바른 식별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는 기도 습관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활동을 해야 합니다. 기도 없는 활동은 공허하고, 활동 없는 기도는 관념에 빠지기 쉽다고 합니다. 2023년도에는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기꺼이 따라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걸림돌 뒤에 용서받고 용서해야 하는 우리들 자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기도하십시오. 지금 이 순간 도와주시기를 기도하면서 걸림돌을 끌어안으십시오. 그러면 그 걸림돌로 인해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축복된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저희부부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작은 일이라고 무시하지 마라. 그 일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 줄리아 모건 - |
♡1614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 ♡ 궈메이의 황광위 회장은 ''가장 낮은 위치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위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행복은 외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옵니다. 사랑이신 주님을 얼마나 마음에 모시고 살았느냐에 따라서 행복이 달라집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내 행복은 오직 하느님 곁에 있는 것, 내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 뿐입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도 하느님께 희망을 둠으로써 행복했으면 좋겠다. 한 주간 행복하셨던 분은 행복에 행복을 더하시고, 행복하지 못했다면 지금부터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삶을 네 가지로 구별해 볼 수도 있다. 첫째는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언제나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 둘째는 하느님께서 계심을 알고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도 알지만 그대로 살지 않는 사람, 살고자 애쓰지 않는 사람. 셋째는 하느님께서 계심을 알지만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 넷째는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아예 모르는 사람. 아니, 인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첫째 사람은 하늘을 차지해서 행복한 사람이고, 둘째는 매를 맞아도 많이 맞을 사람이며, 셋째와 넷째는 매를 맞아도 덜 맞을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자기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12,47-48) 하느님께서 계심을 믿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뜻을 행함으로써 천상을 차지하는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선택된 백성이라는 환상에 잠겨있었다. 천상을 차지하는 것은 ‘따논당상’이라고 생각하고 특권을 휘두를 뿐 신앙 안에서 ‘내면의 회개’는 하지 않았다. 그들은 부르심을 받았지만 뽑힌 사람은 되지 못했다. 그들은 어둠속에 던져지고 오히려 이교백성들이 빛을 보게 되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릇된 안전감에 빠져 진정한 회개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구원의 문에 들어가지 못할 것. 구원의 문은 언제나 열려있지만 아무나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나는 구교신자다. 오래도록 신앙생활에 충실했다고 자만한다면 공든 탑은 한 순간에 무너질 것.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방심하지 말라는 것. 땅에서 캐지 않는 유일한 보석은 ‘진주’라고 합니다. 진주는 ‘조개 속에 들어있는 이물질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분비물로 감싸서 생기는 아름다운 보석입니다. ‘저항과 고뇌’의 과정을 극복해서 탄생한 강함을 가진 보석입니다. ‘조개나 굴’ 속에 모래알이 들어오면 굴은 ‘나카’(Nacre)라고 불리는 물질을 만들어 모래알을 감싸기 시작합니다. 나카가 많이 덮일수록 진주는 커지고 값도 비싸집니다. 이 나카는 아주 적은 양이 천천히 생기기 때문에 작은 진주도 수개월이 걸리고 큰 진주는 몇 년에 걸려서 만들어 진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굴속에 들어온 모래알이 다 진주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래알이 들어오면 굴에게는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나카를 생산해서 코팅작업을 하든지 아니면 모래알을 무시해 버리는 것. 모래알을 무시해 버리면 나카를 생산하는 수개월, 혹은 수년에 걸친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 모래 때문에 상처가 나고 대부분의 굴은 아주 죽어버립니다. 이 굴의 선택의 문제가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인생여정 안에서 여러 종류의 모래알이 자주 들어옵니다. 이때 어떤 사람은 그것을 하나의 성장의 발판으로 삼습니다. 어떤 사람은 무시하고 회피하여 차차 곪아 스스로 파멸을 가져오고 맙니다. 바오로 사도는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 는 잠언의 말씀을 인용하며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바른 길을 달려가십시오. 그리하여 절름거리는 다리가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히브12,11-13) 하고 말씀하셨다. 한 마디로 나카를 생산하고 코팅작업을 하여 진주를 만들라는 권고입니다. 분명 시련은 더 없이 귀한 은총의 기회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오늘 여러분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예. 답은 여러분 마음에 있다. 정말 장차 구원 받을 사람의 수가 얼마나 될까? 궁금해 할 필요가 없다. 지금 최선을 다해 살면 걱정할 것이 없다. 지금 내가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을 살고 있느냐? 내가 알고 있잖아요! 개중에는 착각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자기는 잘산다고 하는데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전혀 아닌 사람도 있다. 이런 말하면 여러분 뭘 생각하십니까? 이건 베드로 얘기하는 거야, 마리아 얘기하는 거야! 하면서 “저는 아니겠지요?”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건 네 말이다.” 하실 것. 예수님께서는 그 궁금증에 대해서 대답하지 않으셨다. 다만,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13,24) 하셨다. 이 말씀은 구원받는 사람들 속에 들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투신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사실 구원의 문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아무나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있는 힘을 다 쏟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다. 지금 희생 봉사하고 사랑하며 헌신하는 사람이 들어갑니다. 지금 눈물로 씨를 뿌리는 이들은 환호하며 거두게 될 것.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126) 세상은 지금 당장 편하고 쉬운 것을 원합니다. 멀리 보면 그것은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다. 매사에 있는 힘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최선에 최선을 다하되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바 대로, 그분 마음에 들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천국의 문은 결코 요행이나 잔재주로 통과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성실과 인내로, 사랑으로 통과하는 문입니다. 사람들이 인간적인 친분을 내세워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루카13,26) 하였지만 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13,27) 하셨다. 아무리 하느님과 친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악을 일삼는 자들은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 지금 하느님을 잘 알고 믿음의 생활을 오래도록 충실히 했다고 자부하는 사람도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실행하지 않는다면 결국 꼴찌가 되고 만다는 것. 오늘 주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하신 말씀을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바로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요청으로 받아들이면 좋겠다. 구원의 문에 들어가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오늘 나의 삶의 터에서 상황이나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배려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행하느냐에 있다. 하느님께서 보시는 첫째와 세상이 인정하는 첫째가 같지 않다. 겉으로 보기에는 덜 성공한 사람이라도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첫째가 될 수 있다.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이 우리를 긴장하게 만들고 한편으로는 희망을 줍니다. 지금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은총의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지금 기회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구원의 때입니다. 그저 마지막 순간까지 있는 힘을 다하십시오. 천국문은 바르게 살려는 사람에게 언제나 열려 있다. 오늘을 꽉 잡으십시오. 기회가 옵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들은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될 수 있다. 더 나아진다. 더 새로워진다.” 희망으로 '내일이라는 오늘' 을 진정으로 기쁘게 맞이하는 은총 충만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저희부부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가득 차면 반드시 망하고 겸허하면 반드시 존경받는다.'' - 다산 정약용 - |
♡1615 혼자 힘만으로는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스트레스를 감당할 수 없다. - ♡ 삼성그룹 광고에 ''자신에 대한 믿음이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시골에서 홀로 사시는 어머니를 뵈러 밤늦게 아내와 두 아들을 트럭에 태우고 달리던 중 음주 차량에 큰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아내는 목이 뒤로 꺾이며 간신히 생명은 건졌지만 전신마비가 됩니다. 사고를 일으킨 운전자는 무보험자였다. 치료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처가가 나섰지만 처가도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아내를 트럭에 싣고 호떡 장사를 시작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환경미화원에 지원하여 젊은이들을 제치고 1등으로 취직합니다. 하지만 새벽부터 출근해야 하는 직업인지라 아내가 문제였다. 정부가 지원해주는 간병인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래도 힘들었다. 아내는 매우 깔끔한 성격이었다. 침대에 누워서 시시콜콜 잔소리를 해댔다. 설거지를 해놓으면 “좀더 깨끗하게 해라”, 바닥 청소를 해놓으면 “다시 해라”라는 식으로 간섭했다. “시집살이가 따로 없었지요. 너무 힘들고 지칠 땐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도 있잖아요.” 그는 20년 넘게 매일 꿋꿋하게 아내의 얼굴을 닦아주고, 양치질을 시켜주고, 목욕시켜주고, 밥을 먹여주고, 잔심부름을 해주며 아내를 잘 돌보고 있다. 강연 100°C에 나와 전신마비 아내를 돌보는 이야기를 한 김동덕 씨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의 그런 참을성은 어디서 나올까요? 그의 강연 제목은 “나와 아내와 당나귀” 입니다. 자신과 아내만이 아니라 당나귀를 제목에 넣었다. 그 이유는 아내에게 온유하게 대할 수 있었던 힘이 바로 ‘당나귀’ 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는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산골에서 살았고, 어머니는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온종일 일하러 나가셨기 때문에 친구가 없었다. 그가 대화하고 놀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동물들이었다. 커서도 힘들고 어려울 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무언가를 찾아야만 했다. 그렇게 선택한 동물이 당나귀였다. 가격도 싸고 키우기도 쉬워서 새끼 당나귀 두 마리를 분양받았다. 처음엔 말을 잘 안 들어 애를 먹었지만, 자주 쓰다듬어주고 사랑을 베풀자 사람처럼 따르기 시작했다. 아내 병수발에 몸과 마음이 지칠 때면 당나귀들을 찾아가 하소연하였다. “제가 ‘얘들아~’ 하고 부르면 당나귀들이 제게로 달려와요. 제 말에 귀를 기울여주죠. 제 말을 듣고 정말 이해한다는 듯이 눈물을 줄줄 흘리기도 해요. 하하하.” 그가 20년간 아내에게 그렇게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당나귀라는 돌파구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혼자 힘만으로는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스트레스를 감당할 수 없다. 어떤 가나안 부인이 예수님께 은총을 청합니다. 딸이 마귀가 들려 고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다른 경우와는 다르게 그 여인의 애를 먹입니다. 계속 청해도 들은 채 만 채 당신 갈 길을 가십니다. 여인은 참으로 무시당하는 기분을 받을 수 있었을 것. 제자들까지도 빨리 치유해 주어 돌려보내라고 할 정도였다. 예수님은 당신은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을 위해 파견되었다고 하시며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고 말씀하십니다. 안 들어주시면 되지 자신을 쫓아오는 여인을 개 취급까지 하실 필요는 없으셨을 텐데도 일부러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이는 그 여인의 인내심을 시험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하신 것. 자아가 비워진 만큼 그 안에 믿음으로 찹니다. 아니 오히려 믿음이 자아를 그만큼 밀어내고 죽인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은 당신께 대한 믿음이 없는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서 그 여인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 자랑하고 싶으셨던 것. 그 여인은 자신을 완전히 비웠다는 것을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라고 말하며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며 칭찬해 주십니다. 만약 다른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 때 발끈한다면 그 사람은 그만큼 믿음이 없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자아가 그만큼 크고 강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크기는 자아의 크기에 반비례합니다. 자아가 죽을수록 믿음이 완전해집니다. 온유한 사람일수록 더 큰 믿음을 가진 것.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자아를 죽일 수 없기 때문에 무언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합니다. 김동덕 씨가 끓어오르는 자아의 불만족을 당나귀를 통해 죽일 수 있었듯,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사랑에 대한 감동으로 자아를 죽여야 합니다. 그렇게 자아를 죽이는 만큼 믿음이 커지고 믿음이 커지는 만큼 주님은 나의 뜻을 따라주십니다. 나의 자아를 죽이는 힘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위로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성령이십니다. 이 성령이 나를 감동시켜 다른 것들은 거뜬히 참아낼 수 있게 합니다. 이 성령이 오게 하는 시간을 ‘기도’ 라고 합니다. 기도를 통해 주님 사랑에 더욱 감동할수록 더욱 주님을 알게 되고 더욱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매일 주님의 사랑에 감동받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유일하게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 일을 통해 자아를 죽이는 연습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존재의 이유를 찾은 사람이고 하느님 나라와 아주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들이 무엇을 바라고, 어떤 지향으로 기도하든지, 예수님의 말씀으로 소망과 기도의 응답을 받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저희부부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사랑만이 겨울을 이기고 봄을 기다릴 줄 안다.'' - 김남주 - |
♡1616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라!” - ♡ 에머슨은 ''의복에만 마음이 쏠리는 것은 마음과 인격이 잠든 탓이다.'' 청주교구수요치유기도회 강의내용 묵상합니다. 이태리 밀라노의 대성당에는 문이 셋이 있는데 첫째 문은 아치로 되어 있고 “모든 즐거움은 잠깐이다” 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둘째 문은 십자가형으로 되어있는데 “모든 고통도 잠깐이다.” 라는 글이 새겨져 있고, 셋째 문에는 “오직 중요한 것은 영원한 것이다.”라고 새겨져 있다. 즐거움도 잠깐이고 고통도 잠깐인데 중요한 것은 영원한 것.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고, 세례를 통하여 초자연적인 생명으로 새로 태어나 하느님의 은혜와 축복의 상속자가 되었다. 모든 죄의 용서를 받은 것이고, 영원한 생명, 하느님의 나라를 상속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는 것.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한 생명을 잘 가꾸고 지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루카12,35) 말씀하셨다. 허리에 띠를 맨다는 것은 어떤 것을 시작하기 전에 몸을 추스리라는 것. 중동 사람들의 옷을 보면 통으로 짠 긴 옷입니다. 평상시에는 띠를 매지 않습니다. 무슨 일을 제대로 하려고 한다면 띠를 매고 몸을 단정하게 합니다. 영적으로 띠를 맨다는 것은 우리 신앙 상태를 다시 추스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믿음은 한 순간에 일시적으로 성장하는 것도 아니고, 한 순간의 마음을 가지고 영생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열정적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 기도하며 우리의 일상생활 안에서 준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준비된 삶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한 무장을 갖추십시오. 그리하여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에페6,14-15) 말하였다.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라!” 우리가 신앙을 추스르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는 것’. 진리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7장17절에는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하고 말하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디모테오 후서 3장 16절에서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말하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성찰하는 삶이 준비된 삶입니다. 우리가 매일 거울을 보고 몸단장을 하듯이 하느님의 말씀에 나를 비추어 보고 그에 걸 맞는 삶을 다져가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영혼을 비추는 거울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에 비추어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쳐야 합니다. 주님께서 ‘용서하라!’ 하였으면 용서해야 합니다. ‘사랑하라’ 하였으면 사랑해야 합니다. ‘선한 일을 행하라’. ‘자선을 베풀어라.’ 하였으면 선을 행하고 자선을 베푸는 것. 왜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거울을 보고 얼굴에 흉한 것이 묻은 것을 알았는데 그냥 다니십니까? 아니잖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마음을 비추어 고칠 것은 고쳐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무장된 사람은 다른 어떤 이론이나 유혹에도 당당히 물리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다. 어떤 상황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분명하게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게 됩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우왕좌왕 흔들리고 맙니다. 말씀대로 행하기를 주저합니다. 그렇게 하면 불이익이 올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하였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얼굴 모습을 비춰보는 사람과 같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었는지 곧 잊어버립니다. 완전한 법, 자유의 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물면,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야고1,22-25) 여러분은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함으로써 행복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또한 등불을 켜 놓고 있으라고 하셨다. 등불을 지속적으로 켜 놓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죠? 예, 기름이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그 기름 역할을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름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신앙이 불타오르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느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워야 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4,12) 많은 분들이 영적인 체험을 하고 차원 높은 신앙생활을 하길 원하면서도 정작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듣는 데에는 소홀합니다. 말씀을 듣지 않고는 지속적인 열심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기름이 없으면 불이 꺼집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으로 함께하지 않으면 신앙이 쉽게 흔들리고 결국 무너집니다. 말씀과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자주 만들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들으십시오! 말씀 안에 모든 답이 있다. 여러분이 바라는 지혜와 명예와 성공, 부와 영원한 생명의 길이 거기에 있다. 영원에로 가는 길에서 겪는 아픔의 위로와 힘이 말씀 안에 있다. 말씀을 통하여 위로와 기쁨, 평화와 영생기쁨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큰 희망을 주는 말씀은 ‘깨어 있는 종들에게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것’이라고 하였다. 하느님께서 깨어 준비하는 사람에게 천국에서 그만한 환대를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마지막 날 주님 앞에 나갔을 때 세상의 삶에서 뿌린 대로 거두게 될 것. 아름답고 행복한 내일은 착실하게 준비한 사람에게만 찾아온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주인이 밖에 나가 아직 오지 않았다면 종은 마땅히 주인을 기다려야 합니다. 주인이 더디 오려니 생각하고 나태하게 지냈다면 그는 주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없는 법입니다. 종은 주인이 언제 오든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준비한다는 것은 깨어 있는 것이요, 깨어 있다는 것은 곧 준비한다는 것. 그는 더 많은 것을 받게 될 것. 주인의 눈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1테살 5,5-6) 세상에 한 가지 확실한 것과 한 가지 불확실 한 것이 있는데 확실한 것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이요, 불확실한 것은 그 죽는 날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것. 그러니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심판의 주님께서 오신다면 어떤 모습으로 서 있을까? 돌아봐야 하겠다. 사람의 아들이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오신다는 것이 긴장을 더해 주기도 하지만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은 준비할 기회를 얻은 것. “삶이란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한 얼마간의 자유시간입니다.”(피에르신부)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후회하지 말고 기회를 만들어 사랑을 실천하고, 용서와 화해를 미루지 않기 바랍니다. 이웃을 위한 희생을 감당하며 자선을 베푸는 일, 이 모든 것이 천상에 보화를 쌓는 일이니 만큼 생각으로 머물지 않고 행동으로 옮겨야 하겠다. 아무쪼록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는 가운데 행복한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여, 우리들의 봉헌과 기도가 열매를 맺는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저희부부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소비된 시간은 존재하고 이용된 시간은 생명이다.'' - 영 - |
♡1617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 ♡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오늘은 우리의 명절 ‘설’입니다. 설은 한 해의 시작입니다. 시작은 마침을 전제합니다.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깨어있으라는 내용입니다. 주인이 언제 오더라도 깨어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면 그 사람은 행복하다고 합니다. 주인이 그들을 시중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예수님께서 한 명의 종을 대상으로 시중들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루카 12,37)이라고 하십니다. 또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에게 시중들 것이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은 이미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공동체에 머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유튜브에 개신교 ‘다니엘라’라고 하는 여자 청년의 간증이 있다. 20대로 보이는 이 자매는 부모님을 지독히 미워하였고, 학교에서는 집단 따돌림을 받는 아이였다. 그 외로움 속에서 동방신기라는 아이돌을 쫓아다니는 팬클럽 일원이 됩니다. 그곳에서 알게 된 동성애자들 때문에 자신도 동성애자가 되었다. 가족이 그녀를 깨어날 힘을 주지 못했고, 그녀는 예뻐지고 유명해지려는 것, 육체의 쾌락에만 관심을 쏟았다. 두바이로 가서는 부잣집 아이들과 어울렸고 어느새 인스타 유명인이 됩니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은 텅 비어가고 있었다. 교회는 가끔 나가기는 했지만, 설교시간에 나가 화장을 다 고치고 돌아오면 목사님 설교는 이미 끝나있는, 뭐 그런 신앙인이었다. 외로워도 보았고 유명해져도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먼지를 먹고 사는 것 같았다. 살고 싶지 않았다. 다니엘라는 우연히 유튜브에서 찬양을 찾아보고 싶었다. 오래된 동영상이 그녀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1990년대의 교회 집회 영상이었다. 세련되지도 않고 그야말로 오래된 기도회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공동체는 뜨거웠다. 우리나라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진심으로 기도하며 찬양하는 그 뜨거움이 다니엘라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다니엘라는 지금 청년들이 회개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그런 뜨거운 교회 공동체가 사라진 것이라 말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목숨을 다해 하느님을 찾지 않고, 무엇보다 목숨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공동체가 없다는 것. “여러분, 미사를 드리는데 왜 요즘 친구들이 하느님을 못 만나냐면 정말 전심으로 하느님을 찾는 교회가 없어서 그래요. 제가 하느님 그렇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하느님께서는 저같이 악한 자를 하느님께로 돌이키시게 하려고 어떤 세련된 말, 사람을 통해서도 아니고, 누가 나에게 찾아와서도 아니고 그냥 우리나라 신자들이 모여서 나라와 가정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찬양하는데 거기서 미사가 진실하게 드려지니까 그걸 통해서 저에게 임재해 주시는 거예요.” 왜 공동체가 사람을 바꿔놓을까요? 양심을 작동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혼자 있을 때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그리스도 공동체에 속하면 엄청난 힘을 얻습니다. 변하고 싶은 사람은 변화된 공동체에 머물게 됩니다. 이것이 깨어있음입니다. 이 깨어있을 줄 아는 사람들을 보시고 주님은 함께 머무시는 은총을 주십니다. 깨어있음과 반대로 잠은 매우 ‘개인적’인 것. 사람은 혼자서는 자기 자신을 컨트롤할 수 없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면, ‘꿈을 제어할 수 없다는 사실’로 알 수 있다. 프로이트는 꿈은 바로 자신의 ‘무의식의 표현’이라 하였다. 무의식이란 세속-육신-마귀의 욕망을 나타냅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잠에 빠졌을 때 양심이 작동하지 않아 욕망이 활개를 쳐서 그런 꿈들이 제어되지 않는 것. 한 여인이 몸이 아프다고 하며 프로이트를 찾아왔다. 프로이트는 몸의 증상도 욕망이 충족되지 못한 것에서 기인한다고 보았다. 그녀가 몸이 아픈 이유를 꿈에서 찾으려 했다. 꿈은 무의식을 알아볼 수 있는 가장 완전한 통로로 보았다. 그녀가 자주 꾸는 꿈의 내용은 이렇다. 그녀의 조카가 죽어서 장례식에 있었는데 그녀는 전혀 눈물을 흘리지 않고 심지어 기분이 좋은 마음마저 들었다는 것. 자신이 사랑하는 조카가 죽었는데 기분이 좋다는 것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계속 비슷한 꿈을 꾼다는 것. 프로이트는 이야기를 나누며 그녀가 언니의 남편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의 그러한 관계를 언니도 알게 되었고, 그녀는 형부와의 관계를 청산하였다. 그러던 중 언니가 죽게 된 것. 언니가 죽으니 다시 형부와의 관계에 대한 가능성이 열려서 기분이 좋았던 것.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러면 안 되는 일입니다. 프로이트는 원초적 욕망을 ‘원초아’(Id)라 하였고, 이 욕망을 제어하는 양심과 같은 기재를 ‘초자아’(Super-ego)라 불렀다. 아기가 태어나면 처음엔 원초아밖에 없다. 원초적 본능만 살아있는 것. 자아는 초자아보다 더 먼저 형성되는데 젖을 먹고 싶은데 숟가락이 입에 들어올 때 생겨납니다. 자신의 욕망만으로 안 되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되면서 자아가 생기는 것. 초자아는 부모님과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형성된 것. 특히 배변 활동을 시작하는 시기에 세상엔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양심은 사회적인 상황에 놓였을 때 더 활달해질 수밖에 없다. 원초아 – 자아 – 초자아는 가정에서 사회성이 형성되면서 함께 발달한 것이기에 덜 사회적일수록 더 원초적인 욕망에 휘둘리게 된다는 것. 사람은 더 사회적일 때 더 윤리적 인간이 됩니다. 요즘 가정이 많이 분해되고 있다. 명절은 특별히 가족이 왜 한 데 모여서 친교를 나누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가족은 바로 우리가 생존 본능에서 양심에 통제받는 사람이 되는 성장을 처음으로 이룩한 공동체입니다. 가족이 함께 모이는 이때는 우리가 왜 교회 공동체에서 형제 공동체를 형성해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들이 이곳에서, 내일 저곳에서 “사람이 먼저”라는 하느님의 사랑을 담고 말씀을 전하며 천국을 향한 은총 가득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저희부부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훌륭한 말은 훌륭한 무기이다.'' - 풀러 - |
♡1618 신앙인은 ‘지금’ 깨어 있어야 하고, ‘지금’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 ♡ 그라시안은 ''대화시의 신중은 웅변보다 더 중요하다.'' 우리가 새해를 맞이한 것은, 우리의 공로나 능력으로 한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조금 더 시간을 주신 것. 그 누구에게도 ‘나의 시간’ 은 없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잠시 맡겨주신 시간을 사용할 뿐입니다. 우리는 시간의 주인이신 하느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다는 것은 남아 있는 시간이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뜻이고, 그만큼 이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워졌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서로 빌어주는 ‘새해의 복’ 은, 지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일만 바라는 일이 아니라, 아무 두려움 없이 하느님 앞에 서게 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야 합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5-38)이 말씀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지금’ 입니다. 신앙인은 ‘지금’ 깨어 있어야 하고, ‘지금’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라는 말씀은, ‘지금’ 준비되어 있는 상태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이라는 말씀은,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이라는 뜻인데, ‘때’ 를 결정하는 것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그 ‘때’ 를 마음대로 예상하거나 예측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씀하셨다.(루카 17,21)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고, 우리는 종말의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종말의 날’ 이라는 말은 이미 시작된 종말이 ‘완성’ 되는 때를 뜻합니다. “문을 두드리면”이라는 말은, 언제인지 모르는 먼 훗날에 문을 두드린다는 말이 아니라, 주인이 이미 도착해서 ‘지금’ 문을 두드리고 있는 상황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예수님 말씀을 ‘종말’ 과 ‘재림’ 에 관한 말씀으로만 생각하면, 이 말씀이 실감나지도 않고, 긴박감도 생기지 않고, 막연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각 개인의 ‘임종’ 상황으로 바꿔서 생각하면, 뜻이 분명해지고, 느낌도 완전히 달라집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응급실에 실려 가고, 수술실과 중환자실에 입원하는 경험을 한 번이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깨어 있어라.” 라는 예수님 말씀이 더욱 실감날 것. 주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이 몇 시간 뒤에 끝나는지, 오늘 끝나는지, 내일 끝나는지, 그것을 모르니까, 하느님 앞으로 갈 준비도 ‘지금’ 해야 하고, 회개도 ‘지금’ 해야 합니다. 복음서에 “신앙생활은,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잘 맞이할 준비를 하는 생활” 로 표현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현실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느님 앞으로 갈 준비를 하는 생활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남의 일인 것처럼 생각하거나, 무의식중에 “지금은 아니고 나중에 언젠가” 생길 일이라고만 생각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지금의 일’ 이 될 수 있음을 의식하면서 자만하지 않고 방심하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곧바로’ 라는 말은,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회개할 시간 없이 곧바로 심판이 진행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면 곧바로 응답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으니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애원할 수도 없고, 왜 벌써 부르셨냐고 항의할 수도 없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모든 것’ 을 그대로 놓아두고 떠나야 합니다. 여기서 ‘행복하다.’ 는 ‘복되다.’ 복을 받을 것이다. 인데, ‘복’ 은 ‘구원’ 을 뜻합니다. 주인이 종들의 시중을 들 것이라는 말씀은, 충실한 신앙인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행복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요한 21,12ㄱ.13) 제자들은 그때 천국의 기쁨과 행복을 체험했을 것. 여기서는 ‘충실한 종들’ 에 대해서만 말씀하셨지만, 뒤의 45절-46절에는 ‘불충실한 종들’ 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만일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루카 12,45-46)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행복과 생명을 누리는 사람이 될 것인가,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처벌을 받는 사람이 될 것인가는 ‘지금’ 각자의 선택과 실천에 달려 있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39-40) 이 말씀은 그날은 틀림없이 온다는 것과 그날이 언제인지는 모른다는 것, ‘지금’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은 “도둑이 몇 시에 오는지는 몰라도 틀림없이 온다는 것을 집주인이 알면” 입니다. 여기서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일부러 사람들이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오신다는 뜻이 아니라, 생각하지도 않고 있다가, 즉 방심하고 있다가 갑자기 당하는 일이 없도록 평소에 잘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훈계입니다. 잘 준비한 사람에게는 그날은 갑자기 당하는 무서운 날이 아니라 주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행복을 누리는 ‘기쁜 날’ 이 될 것입니다.(1테살 5,2-10) “하느님, 저는 하느님만을 보고 삽니다.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십시오.”라는 고백으로 우리들이 하느님의 따뜻한 햇살을 받아 하느님의 자애와 사랑을 누리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저희부부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생명이 있는 한, 사람은 무었인가 바랄수 있다.'' -세네카- |
♡1619 매일 밤 맞는 잠을 죽음이라고 생각합시다. 그러면 진리 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 ♡ 몰리에르는 ''사랑없이 사는 것은 정말로 사는 것이 아니다.''우리나라에서도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던 ‘인생수업’ 의 저자 퀴블러 로스 박사는 시사주간 ‘타임’ 지가 선정한 20세기 100대 사상가 중 한 명입니다. 그녀는 정신과 의사입니다. 임종 직전의 환자들을 사랑했다.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로부터 얻은 지식을 전해주고 싶었다. 사랑하는 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더 이상 지켜볼 수가 없었다. 그녀가 어떻게 죽음에 대한 문제를 끝까지 연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한 체험이 ‘죽음 이후의 삶(사후생)’ 에 나옵니다. 죽어가는 환자들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게 되자, 박사는 그 날 병원과 시카고 대학을 떠나겠다는 통보서를 제출하겠다고 결심했다. 죽음에 대한 마지막 세미나를 마치고 승강기로 걸어갈 때였다. 한 여성이 박사를 향해 다가왔다. 박사의 모든 생각을 다 읽고 있다는 듯이 그녀는 함박 미소를 띠고 있었다. “박사님, 제가 딱 2분만 시간을 빼앗을게요. 사무실까지 함께 걸어가도 될까요?” 이 2분이 그녀에게는 가장 긴 시간이었다. 지금 자신의 옆에서 걷고 있는 여성은 1년 전쯤 세상을 떠난 슈와츠 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살짝 몸을 만져봤는데 실제 촉감이 있었다. 부인은 말했다. “두 가지 이유로 돌아왔어요. 첫째는 저를 위해 해주신 일에 대해 박사님과 스미스 신부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죠. 더 진짜 이유는, 죽어가는 환자를 돌보는 일을 아직은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과학자인 그녀는 자신이 죽은 사람을 보았다고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에 “그래요. 그런데 스미스 신부님한테 쪽지를 하나 써주시면 좋아하지 않으실까요?” 라고 물었다. 그녀는 박사가 그 쪽지를 신부님에게 건네주지 않을 것을 환히 알면서도 친필 싸인까지 다 하고는 “이젠 됐나요?” 하고 말했다. “죽음에 대한 연구를 포기하지 마세요. 아직은요. 지금은 때가 아니에요. 우리가 도와줄게요. 때가 되면 아실 거예요. 약속하실 거죠?” 박사는 “약속하지요.” 라고 말했다. 그녀는 문 밖으로 나갔고 박사는 재빨리 문을 열어보았지만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오늘 나에게 죽음이란 것이 찾아오고 함께 걷게 된다면 나의 삶은 어떻게 변할까?’ 지금 이 순간 제대로 살게 됩니다. 죽음은 모든 진실을 알게 하는 힘이 있다. 그래서 가난해집니다. 지금 이 순간 힘들지만 조금이라도 더 나누기 위해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접습니다. 그렇게 퀴블러 박사의 좋은 책들이 나오게 된 것. 퀴블러 로스 박사가 쓴 《인생수업》에서 그녀는 죽음을 앞둔 수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후회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것이 돈을 더 많이 벌지 못한 것일까요? 더 열심히 일하지 못한 것일까요? 더 많은 지식을 쌓지 못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하나같이 더 많이 춤추지 못하고 더 노래하지 못하고 더 사랑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합니다. 더 행복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는 것.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말하면 그것은 진리입니다. 죽음은 곧 나의 시야를 왜곡시키는 자아의 소멸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자아의 방해 없이 죽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을 제대로 보게 됩니다. 《인생수업》에 나오는 한 죽음을 앞둔 아이의 사례입니다. 소년은 아홉 살 인생 중 여섯 해 동안 암과 싸웠다. 어느 날 소년은 아버지에게 3년 동안 버려둔 채 차고에 세워져있던 자신의 자전거를 꺼내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가장 큰 소원은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는 것이었지만 그때까지는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 시간이 마치 영화처럼 느껴졌다. 모퉁이에서 아이가 간신히 균형을 잡으며 나타났다. 끔찍할 정도로 파리하고 창백해서 아무도 그가 자전거를 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는 밝게 미소 지으며 우리에게 달려왔다. 2주 뒤 소년의 1학년짜리 동생은 우리에게 형으로부터 자전거를 선물로 받았다고 이야기했다. 형은 1년 뒤 동생의 생일에 자신이 곁에 있지 못할 것임을 알았나봅니다. 삶의 시간도 기력도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이 용감한 소년은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동생에게 자전거를 물려줌으로써 자신의 마지막 꿈을 이룬 것. 지금 이 순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그런데도 부자가 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일’ 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는 날마다 죽는다.”(1코린 15,31)고 말합니다. 지금 이 순간 죽는다면 지금 이 순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주님께 나아갈 것. 잠은 죽음과 매우 흡사합니다. 저녁 잠자리가 항상 내 생의 마지막이라고 여기시면 좋다. 그러면 존재의 이유를 명확히 깨닫게 됩니다. 우리 존재의 이유는 ‘행복’ 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행복하라고 창조하셨다. 그런데 행복하려면 지금 이 순간 내어주어야 합니다. 소유하면 복음의 부자처럼 슬퍼집니다. 초콜릿 맛을 전혀 모르면 초콜릿이 없는 것이 슬프지 않습니다. 맛을 아는데 조금밖에 없다면 슬픈 것. 그 조금을 지금 이 순간 나누어 먹을 수 있다면 다시 기뻐질 것. 그렇게 부자가 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매일 밤 맞는 잠을 죽음이라고 생각합시다. 그러면 지금 이 순간 진리 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매 순간 우리 모두가 영적으로 지혜로운 눈(영안)이 열려, 다른 영혼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돌보면서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리는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저희부부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시련이란 진리로 통하는 으뜸가는 길이다.'' - 바이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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