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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은혜/부활

부활 제5주간-The Spirit of Love of the Risen One makes all things new-부활하신 분의 사랑의 성령은 만물을 새롭게 한다-

부활하신 분의 사랑의 성령은 만물을 새롭게 한다
- 칸탈라메사 추기경 -
The Spirit of Love of the Risen One makes all things new
 

1독서: 사도 14,20-26
2독서: 묵시 21,1-5
복음: 요한 13: 31-33

이번 주일 독서에서 여러 번 반복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만물을 새롭게하시는 하느님, 그리고 마지막으로 복음에서 새 계명에 대해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새로움”, “참신함은 항상 긍정적인 의미를 불러일으키는 마법 같은단어입니다. 새로운 것, 반짝이는 새로운 물건, 새 옷, 새 삶, 새 날, 새해. 새로운 것은 모두 뉴스거리가 됩니다. 이는 모두 같은 어원을 가집니다. “새로운()”은 형용사로서 새로운 것을 의미하고, 명사로서는 뉴스를 의미합니다. 복음을 굿뉴스(Good News, 좋은 소식)”라고 부르는데 이는 탁월한 새로움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새로운 것을 그렇게 좋아합니까? 새것이거나 사용되지 않은 것(: 자동차)이 일반적으로 더 잘 작동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것뿐이라면 우리가 왜 새해를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겠습니까? 심오한 이유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경험되지 않은 새로움이 기다림, 놀라움, 희망, 꿈을 위한 더 많은 여지를 남겨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행복은 바로 이러한 것들의 부산물입니다. 새해가 우리에게 예전과 똑같은 것을 제공할 것이라고 확신한다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더 이상 그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새로운 것은 고대의 반대가 아니라 오래된의 반대어입니다. "고대", "유물", "골동품"이라는 단어는 사실 긍정적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오래된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낡고 가치를 잃습니다. 고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치가 높아지고 증가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 우리는 오래된 성서(Old Testament)”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고대성서(Ancient Testament)”라는 용어를 선호합니다. (이는 원문이 이탈리어어로서, 이탈리아어로 말해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제, 이 정도로 도입부를 마치고, 오늘 복음 말씀을 자세히 봅시다. 바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미 구약을 통해 알고 있었던 말씀이 어떻게 새로움으로 정의될 수 있습니까(레위 19:18 참조)? 이 질문에 고대오래된의 용어를 구별하는 것이 유용합니다. 새로운 것은 고대의 반대가 아니라 오래된의 반대어입니다. 이를 이야기한 요한 사가는 다른 구절에서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이 아니라, 여러분이 처음부터 지녀 온 옛 계명입니다. ... 그러면서도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입니다(1 요한 2:7-8).” 이는 새 계명입니까, 아니며 오래된 계명입니까? 둘 다입니다. 요한 서간에 따르면 이는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다만 성령을 통해서만 새 것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이를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새로운 것은 제가 미리 언급한 것과 같이 고대의 반대가 아니고 오래된 것의 반대가 됩니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사랑하는 것은 오래된계명, 즉 사랑할 의무는 부여받았으나 실천할 수 있는 힘은 받지 못하여 연약하고 지치고 오명을 뒤짚어 쓴 계명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은총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사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사랑의 계명 자체가 새 계명이 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성령을 주셨을 때,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주실 수 있는 사랑을 불어넣어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능동적이고 역동적인 의미에서 새로운 계명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우리를 새롭게하고, 모든 것을 변모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를 새롭게 하여 우리를 새 사람, 신약의 상속자, 새 노래를 부르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성 아우구스틴).” 만약 사랑이 말할 수 있다면, 오늘 제 2독서의 다음 말씀으로 표현될 것입니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부활 제5주일>(5.15) -스승의 날-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참사랑!'
신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참으로 힘듭니다.
미사에 참석하는 것이 힘들고, 기도하기가 힘들고, 성경을 가까이 하는 것이 힘들지만,
더 힘든 것은 너를 사랑하기가 힘듭니다.
너를 예수님처럼 사랑하기가 힘듭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서 결정적으로 드러났는데, 그 사랑은 '아가페요 펠리칸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은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요한13,31)
이 영광은 역설적이게도,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인 십자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서로가 너를 위해 죽음으로써 나와 하느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해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그대로 실행하였더니, 평화가 찾아왔다고 내게 몇 번에 걸쳐 힘주어 말씀하시던 어머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예수님께서 본을 보여 준 사랑은 '내가 죽는 사랑',
그래서 '나도 살고 너도 사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하면, 오늘 제2독서에서 전하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인 천국'이 지금 여기에서 건설될 것입니다. 독서에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묵시21,3.4)
이 엄청난 선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내 방식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방식으로 서로 사랑합시다!

****고모님. 훌륭해요
그림 ㅡ고갱의 그림 인것처럼 느꼈답니다.
세익스피어 명언 너무 좋고 아름답네요 눈이 부시게 푸르른 파도가 부서지는 시원한 느낌입니다 오늘도 ♡♡♡ 합니다 

<부활 제5주간 월요일>(5.16)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14,23)
'너, 나 사랑하니?'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주된 관심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 '복음을 그대로 실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형제인 '토마스 첼라노 형제'는 그의 전기에서 사부의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가장 높은 지향과 주된 바람과 최고의 결심은 복음을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통하여 실행하는 것이었고, 조금도 한눈을 팔지 않고 열의를 다하여 애타게 갈망하는 온전한 정신과 뜨겁게 타오르는 온전한 마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었다. 그는 끊임없는 묵상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을 되새겼고, 예리한 사고력으로 그리스도의 행적을 되새겼다."(1첼라84)
오늘 복음에 비추어서 보면, 그만큼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을 진실로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님과 온전하게 하나가 될 수 있었고, 그 결정체가 바로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인 오상'을 받은 일이고, 후대에 사람들로부터 '또 하나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 라고 불린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서로 닮습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예수님을 닮는 것이고, 닮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을 닮으려면 먼저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처럼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요한14,21-26)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호자이신 성령을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14,26)
프란치스코처럼 해야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을 수 있고, 그것이 예수님을 온전하게 사랑하는 길이고, 닮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결코 쉽지 않지만, 함께 노력해 봅시다!

바뇌 성모님 !!!! 가난한 이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포실포실 포근한 우리 하늘엄마  늘 감사드려요 !
티머테아 수녀님 ------5월17일부터25일까지피정을하기에강론말씀을보내지못합니다.
기도부탁해요.

고모님의 사랑 듬뿍받아 행복한 아네스----- 네 고모님!!! 하느님을 찾는 거룩하고 감미로운 피정 저도 동참하고 싶어요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움으로 모든 삶이 이끌어주심을 믿는답니다 복된피정 잘 다녀오셔요 싸랑해요!!!! 

<부활 제5주간 화요일>(5.17)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14,27)
'평화가 너희와 함께!'
오늘 복음(요한14,27-31)은 '평화'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14,27)

'평화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성경 안에서 보면 평화는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이며,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서 세 번째로 언급되는 열매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이 주는 평화, 세상이 주는 즐거움이나 기쁨과는 다릅니다.
무엇이 어떻게 다를까?
'세상이 주는 평화'는 먼저 감각적이고 감정적인 것에 의해 움직여지는 평화이고, 내 것이 채워지는 것으로부터 주어지는 즐거움이요 기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마음 저 깊은 곳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내적인 평화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큰 즐거움이요 기쁨이라고 생각합니다.
깊은 바다와 같아서, 어떤 풍랑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고, 채워지기보다는 내 것이 비워지는 것으로부터 오는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에서처럼,
위로를 구하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를 구하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을 구하기보다는 사랑하게 해 주는 힘이며,
모든 이들과 자연의 피조물들까지도 사랑하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사도14,22)
이방인의 사도인 바오로 사도의 이 설교 말씀처럼, 그리고 무엇보다도 평화이신 주님께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보여주신 것처럼, '참평화'는 역설적이게도 환난과 고통과 죽음 뒤에 찾아옵니다.
오늘도 세상이 주는 평화만 얻으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 환난과 죽음 뒤에 찾아오는 평화를 얻으려고도 애쓰는 그런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사마리아 이방인여자의 우물에서처럼 영원한 생명의 물을 주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