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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은혜/부활

주님 승천 대축일:You will be my witnesses 너희는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주님 승천 대주일
너희는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 칸탈라메사 추기경 -

1독서: 사도 1: 1-11
2독서: 에페 1, 17-23
복음: 루카 24: 46-53

루카는 그리스도의 승천을 진정으로 강조한 유일한 복음 사가입니다. 그는 승천으로 복음을 끝내고, 승천으로 사도행전을 시작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승천이 “예수님의 때”를 마감하고, “교회의 때”를 시작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이제 복음에 그 사건이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지 확인해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

승천일이 슬픈 이별이 아닌 진정한 ‘잔치’가 되기를 바란다면, ‘보이지 않음(사라짐)’과 ‘떠나버림’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차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군가 떠나면 그들은 더 이상 거기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몇 걸음만 더 가면 여전히 그곳에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단지 무언가가 우리가 서로 볼 수 없게 되었을 뿐입니다. 떠나버리면 존재하지 않게 되지만,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은 숨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합니다. 주님의 승천과 함께 예수님께서 떠나버려 부재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 가운데 영원히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주님의 승천에 대한 전통적인 표현들은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이끌 수 있습니다. 화가들이 어떻게 승천을 표현했습니까?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자, 성모님과 사도들은 그분이 떠나버리시는 것을 지켜보고 그곳에 남아 위를 올려다보고 계십니다. 진정한 승천은 지금껏 표현된 적도 없지만 표현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는 떠나버려 존재하지 않는 것을 표현하지만 보이지 않음을 표현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지만, 그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더 친밀한 또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성찬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밖에 있으실 때에는 우리는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을 경배하지만, 우리가 그분을 영했을 때에 우리는 더 이상 그분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그분께서는 이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 것입니다. 새롭고도 더 강한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승천은 그리스도의 현존을 강화하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우리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소극적 의미의 승천이 아닙니다. 성자로서 우리에게 오신 것이 성부를 떠난 것이 아닌 것과 같이, 성부께 돌아가신 것이 우리로부터 떠난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하늘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만드신 것이 아니고, 반대로 우리 사이를 더 가깝게 하셨습니다. 육으로부터 떠난 것이 아니라면 오히려 유다의 몇 명에게만 보이셨겠지만, 새롭고도 영적인 방법으로 그분께서는 모든 세대의 모든 이에게 현존하십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반문이 생깁니다. 그분께서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사람들이 그분을 믿을 수 있습니까? 그분의 현존을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시길 원하셨습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루카는 증언이라는 주제를 주님의 승천과 밀접한 연결이 시킵니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8).

여기에서 “너희”는 처음에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사도들을 가리킵니다. 실로 그들은 성령강림대축일 이후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성부께서 그분을 올리시고 우리는 증인이 되었습니다(사도 1:22)”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생명은 눈에 보이게 되었고, 우리는 이를 보았고 이에 증언하려 합니다.” 이렇게 요한의 첫째 서간은 시작됩니다. 사도들 이후에 직분과 연결된 “공식적인” 증거자의 역할은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와 사제들에게 전달되었으며, 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정의되어 있습니다(복음의 기쁨, Lumen gentium 21). 넓은 의미에서 “너희”라는 말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모든 평신도는 주님의 부활과 삶에 대한 세상의 증거자가 되어야 하고, 살아계신 하느님의 증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증인이 되어야 한다면 증인은 어떤 사람들이며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증인은 “증언”하고 무언가를 확언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을 증언하는 모든 사람이 증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을 보고하는 사람이 아니라 직접 보고 들은 사람만이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전달하는 자는 다른 이가 말한 것을 증명할 수 있을 뿐 그 말이 사실인지는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바오로 6세의 다음 말은 매우 유명해졌습니다. “세상은 교사보다 증인이 더 필요합니다.” 매우 그렇습니다! 교사가 되기는 비교적 쉽고 증인이 되기는 너무도 어렵습니다. 사실 세상은 참이든 거짓이든 교사로 가득 차 있지만 증인은 없습니다. 속담에 따르면 두 역할 사이에는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그 속담과 같이 말보다 행동이 중요한 것입니다.
 

증인은 자신의 삶으로서 말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증인의 모델은 빌라도 앞에서 자신을 “진리의 증인”이라고 정의하고 성경이 “충성된 증인”이라고 부르는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실제로 그분께서는 자신이 가르치는 모든 것을 최선을 다해 살았고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슈퍼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순교자들은 그분을 가까이에서 따릅니다. 지난 세기는 박해의 시대보다도 더 많은 순교자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막시밀라아노 콜베, 에디트 슈타인, 오스카 로메로, 알제리 티비린느의 7명의 트라피스트 수도자들,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에서 전쟁과 게릴라로 희생된 수녀와 선교사들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멈출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공의회가 우리에게 일깨워 준, 즉 모든 세례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증인이어야 한다는 사실은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매일의 순교” 즉 매일매일의 증인이 되는 것은 때때로 피의 순교보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신앙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신앙의 첫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혼인 예식에 뒤따르는 축복에서 교회가 하느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일년 중 이맘때, 많은 아이들이 첫 영성체나 견진성사를 앞두고 있습니다. 신앙의 부모는 자녀가 교리문답을 검토하고, 단어의 의미를 설명하고, 답을 암기하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일이며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말하고 첫영성체 준비를 다 했는데도 주일 미사에 가는 것을 조직적으로 소홀히 하고, 십자 표시도 하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는다면 아이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들은 교사였지만 증인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부모의 증언이 첫영성체나 자녀에 국한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이를 바로잡고 용서하고, 서로 용서하는 방법, 없는 사람을 존중하는 방법, 도움이나 돈을 구하는 가난한 사람을 대하는 방법, 매일의 뉴스를 들으며 아이들 앞에서 하는 말, 부모들은 매일 그들의 믿음에 합당한 기회를 가집니다. 어린이의 영혼은 사진첩과 같습니다. 어린 시절에 보고 듣는 모든 것이 거기에 새겨져 있으며 언젠가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발전”하여 그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혼자서는 증거할 수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아십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수난 중에 말한 것, 즉 그리스도에 대해 말한 것을 말로는 아니더라도 행동으로 반복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를 알지 못합니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시선에서 사라지기 전에 사도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성령강림대축일 전 9일 기도를 열심히 하고, 다음 주일 성령강림대축일을 준비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주님승천대축일>(5.29) -홍보주일. 청소년주일-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루카24,50.51)
오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의 모든 일을 마치시고, 하늘에 오르신 것을 기념하는 '주님승천대축일'입니다. 그리고 '홍보주일'이자 '청소년주일'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 오셨던 바로 그곳으로 되돌아가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묵상해 봅니다. 그 마음은 한 생을 멋지게 사시고 죽음을 맞이하는 '부모의 마음',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떠나면서도, 남아 있는 자녀들을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이지 않았을까?
'예수님의 육화와 땀과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우리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완전한 모범'이십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떠나보내는 제자들의 마음 역시, 부모를 떠나보내는 자녀들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십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카24,47)
그리고 주님 승천의 모습을 바라보는 제자들에게 흰옷을 입은 주님의 두 천사가 나타나 이렇게 말합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1,11)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특별히 당부하신 말씀과 승천하신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곰곰이 되새겼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믿는 이들에게 필요하고, 지금 해야 할 일은 첫째도 '회개'요, 둘째도 '회개'이며, 셋째도 '회개'입니다. 항상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내지 못한 죄를 내려놓고, 오늘보다 더를 살아내려고 애쓰는 '회개'입니다.
주님의 승천을 함께 기뻐하면서,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기 위해서, 날마다 회개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활 제7주간 월요일>(5.30)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
예수님이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계시면서 아버지의 일을 완수하시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가셨습니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도 당신처럼 세상을 이기기를 바라십니다.
지금 우리 공동체와 공동체의 일원인 나의 모습은 어떠한 모습인가?
공동체의 모습이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는 '신앙공동체의 모습'인가?
아니면 믿지 않는 이들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는 '친목공동체의 모습'인가?
저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세상을 이긴 신앙공동체의 모습은 바로 이런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믿습니다.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예수님을 뒤따르는 모습!
그렇게 하려고 늘 깨어 예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마음 아파하면서 자비로우신 주님께 용서와 자비를 청하는 모습!
그래서 모두가 함께 기뻐하고 부활하는 모습!

'이기주의'와 '개인주의' 그리고 '물질만능주의' 등과 같은 '세상 가치' 속에 파묻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 안에서,
이런 신앙공동체의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점점 더 버거운 짐으로 다가옵니다. 또 그렇게 살아보자고 외치는 이의 목소리가 무의미하게 들려오기도 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세상을 이겨내신 예수님께서 "용기를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분명한 진리, 곧 '죽음과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결코 피할 수 없는 진리 앞에서 용기를 내어 세상을 이겨내는, 이겨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어 봅시다!
"주님, 성령의 힘을 저희에게 주시어, 주님의 뜻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거룩한 삶으로 실천하게 하소서."(본기도)

고모님 피정 잘 다 오셨나요 ?저는 예비자교리 8명중 4명을 맡아서 교리하고 있습니다 신부님 하시는 것을 미리보고 배워서 잘 전달하도록 기도하고 함께 배워나가는 기쁨에 무척 감사하고 설레인답니다 .
티모테아 고모수녀님 ----사랑하는아녜스! 잘하시리라믿어요.화이팅!♡♡♡
전국적으로 유명한 시카고어린이합창단원들이 시카고의 중심에서 한국의 아리랑을 합창으로 열창해 주목됩니다. 완죤 감동 
아리랑을  기타로 연주하는것이 제꿈이랍니다
*****고모님 많이많이 사랑합니다 이번 성령 강림 대축일에 성령께서 우리모두에게 내려오셔서 교황님과 마산교구 주교님의 건강과 기쁨을 또 우리 모두에게 큰사랑과 기적이내려와 새사람이되면 참 좋겠습니다 느므느 감사드립니다. 뜨거운 하트 보냅니다.*******아리랑을 기타로 연주하는*******것이 제꿈이랍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5.31)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루카1,39)
'은총을 입고 나누자!'
하느님의 은총을 가득히 입은 두 여인이 만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님의 어머니로 간택된 마리아'와 아이를 못 낳는 석녀라고 불리던 여자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이 서로 만납니다.

마리아가 나자렛을 떠나, 약150키로 정도 떨어져 유다 산악지방(아인카림)에 살고 있는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마리아의 방문을 받은 엘리사벳이 이렇게 마리아를 칭송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1,42-43.45)
여인들 가운데에서 마리아가 가장 복된 이유는 엘리사벳의 칭송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이시고, 천사가 전해준 '하느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친척 엘리사벳의 칭송을 받은 마리아가 하느님께 드리는 기쁨의 감사 찬미가(마니피캇)로 화답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1,46-49)
하느님의 은총을 가득히 입은 마리아가, 은총을 함께 나누면서 하느님께 기쁨의 감사 찬미가를 부릅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살아야 할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느님의 은총을 입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입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이 은총을 함께 나누면서, 하느님께 기쁨의 감사 찬미가를 불러 드려야 합니다.

오월 성모성월의 끝 날입니다.
성모님과 함께 유월 예수성심성월을 기쁘게 맞이합시다!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6.1)

"거룩하신 아버지,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17,11)
'예수님 감사!'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고별 담화'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여정인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신 '간절한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당신 자신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십자가 죽음으로' 아버지와 당신 자신을 영광스럽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십니다.
그 다음으로 당신께서 손수 뽑으시고 당신을 따랐던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끝으로 '믿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이는 내일 복음이 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하느님께서 온전한 일치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당신의 제자들도 삼위일체 하느님처럼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처럼 세상에 속하지 않아 미움을 받고 있는 제자들을 지켜달라고, 악에서 지켜주시고 진리로 거룩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이 기도는,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의 직무 대리자로서 예수님의 일을 하고 있는 사제들을 위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사제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저를 위한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뭉클해지고, 예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이 간절한 기도에 힘입어 더 기쁘고 충실하게 사제의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다짐도 다시금 해보게 됩니다.

오늘 독서(사도20,28-38)도 고별 담화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3차에 걸친 선교 여행을 마치고, 죽음(순교)을 기다리면서 마지막으로 에페소 교회 원로들에게 "여러분 자신과 모든 양떼를 잘 보살피십시오." 라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이 땅에 많은 사제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예수님을 닮은 사제로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기쁘게 그리고 충실하게 걸어가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6.3)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21,15)
'보다 더(radical)을 원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당신을 사랑하는 지를 묻습니다.
세 번에 걸친 물음으로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양들을 잘 돌보라.'고 하시면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요한21,18)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를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세 번의 물음을 통한 예수님의 사랑 확인은 베드로의 순교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나 때문에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는 그 순교까지 나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을,
내가 사랑하고 있는 하느님을,
정말로 믿고 사랑하는지는 가끔씩 나를 찾아오는 고통이 이를 확인시켜 줍니다.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고통은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친구이고, 그러니 십자가 죽음까지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굳게 믿는 이들에게는 고통이 그렇게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항상 보다 더(radical)를 원하십니다.
당신을 보다 더 믿고, 보다 더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교회가 기억하는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은 아프리카 '우간다의 순교자들'입니다.
이들은 순교하는 그 순간까지 그렇게 '보다 더'를 사신 분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런 순교자들을 본받아 안주하거나 교만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항상 겸손하게 '보다 더'를 살려고 노력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6.3)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21,15)
'보다 더(radical)을 원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당신을 사랑하는 지를 묻습니다.
세 번에 걸친 물음으로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양들을 잘 돌보라.'고 하시면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요한21,18)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를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세 번의 물음을 통한 예수님의 사랑 확인은 베드로의 순교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나 때문에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는 그 순교까지 나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을,
내가 사랑하고 있는 하느님을,
정말로 믿고 사랑하는지는 가끔씩 나를 찾아오는 고통이 이를 확인시켜 줍니다.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고통은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친구이고, 그러니 십자가 죽음까지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굳게 믿는 이들에게는 고통이 그렇게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항상 보다 더(radical)를 원하십니다.
당신을 보다 더 믿고, 보다 더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교회가 기억하는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은 아프리카 '우간다의 순교자들'입니다.
이들은 순교하는 그 순간까지 그렇게 '보다 더'를 사신 분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런 순교자들을 본받아 안주하거나 교만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항상 겸손하게 '보다 더'를 살려고 노력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보라색이 고모님
너무 아름다운데요
베드로처럼 사랑 사랑 사랑합니다
 

<부활 제7주간 토요일>(6.4)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요한21,24)
'애제자가 되자!'
오늘 복음(요한21,20-25)은 '요한복음의 끝'을 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끝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와 베드로에 관한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이른바 애제자가 스승에 관한 일들을 증언하고 기록한 사람이라고 전하고 있는데, 요한복음의 저자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는 바로 '애제자', 곧 '제베대오의 아들인 사도 요한'입니다.
'애제자 사도 요한'은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은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난 이후 끝까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간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공생활과 가르침, 죽음과 부활을 직접 체험한 증인입니다. 그래서 그의 증언이 참된 것입니다.
오늘 독서(사도28,16-20.30-31)도 '사도행전의 끝부분'입니다. 사도들의 복음 선포의 행적을 기록한 사도행전은 28장 31절 말씀에 드러나 있듯이 끝맺음이 없습니다. 이는 또 하나의 사도들인 우리를 통해서 계속 씌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 선포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먼저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애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야 하고, 느껴야 하고, 체험해야 합니다.
이것이 먼저이고, 이것이 전부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은 너에게로 흘러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사랑의 속성'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려면 사랑이신 하느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 우리의 행위가 바로 '미사 참례'이고, '기도'이고,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는 '애제자'가 됩시다! 그래서 나도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고, 사랑이신 하느님을 세상에 증언함으로써 '사도행전을 계속 이어가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