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istoricity of the resurrection of Christ 역사적 관점에서의 예수님의 부활 - 칸탈라메사 추기경 - 1독서: 사도 10, 34ㄱ. 37-43 2독서: 코린 3, 1-4 복음: 요한 20, 1-9 가미카제 테러 현장에서 우리는 잘못되거나 불공정한 이유로 그리고 잘못된 믿음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바른 믿음으로 그것을 선이라고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조차도 그분의 대의의 진리를 증언하는 것은 아니고 그분이 대의에 대한 진리를 믿었다는 사실만을 증명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분의 사랑에 대한 최고의 증거이지만 그분의 진리에 대한 증거가 되지는 못합니다. 이것은 부활에 의해서만 증언됩니다. 성 아우구스틴은 그리스도 교인들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분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믿음일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껏 우리가 믿어온 모든 것을 고수하기 위해서라도 역사에 충실하면서 잠시 믿음을 내려놓아 봅시다. 다음 질문에 답해 보도록 합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식적인 맥락에서 즉 역사적 사건 “실제로 일어난 사건”으로 정의할 수 있겠습니까? 역사가의 시점에서 부활에 대해서 논의해 볼 수 있는 두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 제자들의 갑작스러우면서도 설명할 수 없는 믿음, 순교의 시험까지도 이겨낼 수 있는 깊은 믿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제자들이 우리에게 남긴 이 믿음에 대한 설명입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혀 처형되는 결정적인 순간에 제자들은 부활을 전혀 기대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일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도망쳤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그들을 완전히 새롭게 활동하고 교회의 근간으로 이끄는 일이 그 짧은 시간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 “무언가”는 부활절 믿음의 역사적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에 대한 가장 오래된 증언은 바오로의 증언입니다. 바오로는 다음과 말했습니다.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1 코린 15:3-8).” 이 말씀이 기록된 날짜는 서기 56년 또는 57년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핵심 내용은 성 바오로가 자신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전달 받았다고 말한 초기 신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바오로가 회심한 직후에 이 신경을 전달받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는 이 말씀이 서기 35년경, 즉 그리스도의 죽음 5~6년 후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는 희귀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증언입니다. 복음사가들의 기록은 수십 년 후에 기록되었으며 교회의 성찰의 단계를 반영합니다. 그러나 증언의 핵심 내용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주님은 살아나셨고 살아계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여기에 새로운 요소가 추가되는데, 이는 성찰의 맥락에서 정리되어 빈 무덤에 대한 사실을 역사적 가치는 상대적으로 약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복음서에서도 결정적인 사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발현은 부활하신 분의 새로운 차원, 즉 “성령에 따라” 존재하는 방식이 “육체를 따르는” 기존 방식과는 다른, 새로운 방식임을 증언합니다. 예를 들어, 그분은 그분을 보는 사람만이 아니라 그분이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사람에 의해서만 인식된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육체는 이전과는 다릅니다. 그분은 물리적 제한에서 자유롭습니다. 그분은 닫힌 문을 통해 들고나시며, 나타나셨다 사라지십니다.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을 비롯한 사람들은 부활에 대해 다르게 설명하는데, 부활은 그저 심리적인 환상, 즉 주관적 현상, 일종의 환각의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이 될 것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들이 다른 상황과 장소에서 모두 같은 인상이나 환각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이니까요. 제자들을 속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너무나도 물질적인 사람들, 어부였지 않습니까. 이상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들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 맞서 저항했어야만 했습니다. “오,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싶어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는 그들의 실질적인 이득과는 모두 반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께 속았다고 생각하는 첫 번째 사람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분의 고난과 죽음이 무슨 소용이었겠습니까? 그들은 이로부터 무슨 이득을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역사적 성격, 즉 주관적 성격과 객관적인 성격을 부인하는 부활이라면, 교회와 믿음의 시작은 부활 자체보다 훨씬 더 설명하기 어려운 신비가 됩니다. “기독교 역사가 사소한 사실 위에 떠 있는 거대한 피라미드와 같다는 생각은 전체 부활 사건을 접하는 데에는 중요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전체 부활 사건은) 신약성경에 의해 그 사실에 기인한 것과 비교할 만한 역사적 가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체) 부활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연구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아마도 우리는 엠마오의 제자들의 말을 통하여 역사적 가치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부활절 아침에 몇몇 제자들은 예수님의 무덤에 갔고, 그들보다 먼저 갔던 여자들의 증언에 따른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역사는 또한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고, 증인들과 같은 것을 확인합니다. 그러나 역사는 부활하신 분을 보지는 못합니다. 역사적인 가치를 발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분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역사적 가치로는 충분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부활절 아침, 여인들에게 나타난 천사는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루카 24:5).” 이 대목에서 저는 이러한 성찰의 끝자락에서 저에게 행해지는 비난을 느낀다고 고백합니다. 마치 천사가 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왜 너는 역사의 죽은 인간의 논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교회와 세상에서 살아서 일하고 계시는 분을 살펴보는 것에 더디냐? 차라리 가서 형제들에게 그분은 살아나셨다고 말하라.” 만약 그분이 저에게만 달려있다면, 저는 이것만(그저 믿고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는 것)을 하고 싶습니다. 30년 전에 저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에 헌신하기 위하여 기독교 역사 가르침에서 떠났지만, 최근 저는 복음의 진리에 대한 근본적이고 근거 없는 부인을 직면하면서 다시 일요일 복음에 대한 이러한 논쟁을 사용하여 상업적 이익이 제안하는 주장에 맞서고, 우연히 이를 읽는 사람들에게 일반 대중의 인식에 덜 영향을 받는 예수님에 대한 의견을 형성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를 바랍니다. |
<주님부활대축일>(4.17) "누가 주님을 무덤에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20,2)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빈 무덤! 마리아 막달레나가 첫 목격한 예수님의 빈 무덤 사건이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빈 무덤 앞에서 당황하고 있는 여자들에게 천사는 말합니다. "어찌하여 살아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루카24,5-6)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도 부활하라고, 그렇게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니 조건을 내세우지 말고, 우리도 주님의 부활을 함께 기뻐하면서 부활합시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께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우리도 함께 부활합시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그리스도교의 바탕이며 본질이고 정점입니다. 믿어야 할 교리의 핵심이며, 우리 신앙의 전부입니다. 우리가 믿는 이유는 지금 여기에서 부활하기 위함이고,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믿는다는 것,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 너무 힘듭니다. 언제나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부활의 삶을 살기가 너무 힘듭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제자들조차도 여자들이 전하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헛소리로 여기며 믿지 않았으니... 왜, 그럴까?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하나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부활은 나의 죽음으로부터 온다는 진리를 온 마음으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기는 너무 싫고, 내가 조금도 지고 싶지 않고, 불편한 말 한마디 앞에서 발끈하여 내내 흥분하는 우리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나의 것을 조건 없이 내려놓지 않고서는 나의 부활은 오지 않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콜로3,1) +그리스도의평화 부활을 진심으로축하드립니다(하트) |
<주님 팔일 축제 월요일>(4.18)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28,10) '갈릴래아로 가자!' '주님부활대축일'은 그리스도교 전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최고의 등급인 전례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파스카 성야(4.16)부터 이번 주 토요일까지 '팔일 동안' 이 큰 축제를 지냅니다. 주님 부활의 첫 목격자는 예수님을 끝까지 믿고 따랐던 여자들이었습니다. 오늘 복음(마태28,8-15)은 이를 확인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고 갈릴래아로 가라고,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 활동의 주 무대인 '땀의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동고동락했던 '삶의 자리'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려면 그곳으로 가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께서 계시는 나의 땀과 삶의 자리인 갈릴래아! 예수님께서 그곳에 계셔 주셔서 넘 좋고, 감사드립니다. 삶의 자리에 계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은 누구인가? 어떤 모습으로 계시고, 나에게 어떻게 다가오시는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기뻐하고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회개하도록 합시다! "그리스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다시는 돌아가시지 않으리니, 이제는 죽음이 그분을 누르지 못하리라."(영성체송) |
<주님 팔일 축제 화요일>(4.19)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20,15) '회개와 세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빈 무덤 앞에서 슬피 울고 있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분을 예수님으로 알아보지 못하고, 정원지기로 생각하면서 말합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가겠습니다."(요한20,15)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십니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스승님)하고 부르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가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우리도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오순절, 곧 성령강림일에 베드로가 유다인들에게 "하느님께서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다."고 선포하자, 그들은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면서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묻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합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사도2,38.40) 베드로의 이 말을 받아들인 이들은 세례를 받았고, 그리하여 '성령강림일'에 신자가 삼천 명가량 늘어나, '교회가 탄생'합니다. '회개와 세례'는 '돌아감'이요 '다시 태어남'입니다. '회개와 세례'는 '하나'입니다. '회개와 세례'는 '미사와 기도와 말씀을 통해' '날마다' 아니 '매순간'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길'입니다. '내가 부활하는 길'입니다. '이제와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오늘도 화이팅~~~ |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4.20)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루카24,31) '엠마오의 삶!' 오늘 복음(루카24,13-35)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말씀입니다. 자신들의 모든 것을 걸고 따랐던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큰 충격에 빠집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는데도, 그 부활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십자가 죽음이라는 충격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충격과 실망을 안고 자신들의 삶의 자리인 엠마오라는 마을로 돌아가고 있는 두 제자에게 나타십니다. 그들과 함께 걸어가시면서 대화하십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그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실 때,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시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그들은 서로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하고 말하면서, 서둘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열한 제자와 동료들과 함께 예수님 부활 소식을 나눕니다. 본당에서는 전통적으로 사순 시기와 파스카 성삼일 전례를 위해 수고한 봉사자들과 함께 '부활 엠마오'라는 것을 떠납니다. 주로 부활대축일 후 월요일에 떠나고, 오늘 떠나는 곳도 있습니다. 저는 주님부활대축일 이른 아침에 신자 한 분이 돌아가셔서, 어제 장례미사와 장지까지 특별한 부활 엠마오를 보냈습니다. ********오늘 신부님과 함께 마산 수정만으로 엠마오갔다 왔습니다. 매일 성체성사 때 마다 눈이 열려 점점 닮아가는 신앙생활로 이끌어 주심을 믿고 따라 가겠습니다. "빵을 떼어 주시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현존하시는 예수님!' 그러니 우리가 매일 드리는 미사는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는 '영적 엠마오'입니다. 우리도 매 미사 때마다 성체를 받아 모시고 영적인 눈이 열려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온전한 믿음과 정성된 마음으로 성체를 받아 모시고, '엠마오의 삶'을 삽시다! 네~~~~에 예수님 !!!! ******** ***** *****네 건강 강건하셔요 콩나물 (치매예방 장건강)자주 먹을께요ㅡ통채로 30분 이상 푹 끓여서 맛있게 먹을께요 ***** |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4.21)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24,48) '증인의 삶!' 오늘 복음(루카24,35-48)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는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의 인사도 하시고, 그들 앞에서 식사도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시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에 증인이다."(루카24,46-48) 오늘 독서(사도3,11-26)는 베드로가 솔로몬 주랑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설교입니다. 베드로는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유를 받은 불구자를 두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이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믿음 때문에, 바로 그분의 이름이 지금 보고 또 아는 이 사람을 튼튼하게 하였습니다. 그분에게서 오는 믿음이 여러분 모두 앞에서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해 주셨습니다."(사도3,15-16) '증인의 삶!' '증인의 삶'은 '부활의 삶'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죽음을 이기고, 죽음과 같은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고 '부활하는 것',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말처럼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나의 죄가 지워지게 하는 것, 그래서 다시 생기를 찾는 것'입니다.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 그래서 다시 시작하는 삶'입니다. '증인의 삶인 부활의 삶'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바로 '나를 위해서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죽으셨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 없이는 결코 '나의 참부활'은 없습니다. |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4.22)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요한21,6) '예수님을 따라가자!' 오늘 복음(요한21,1-14)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일곱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어부들인 제자들이 자신들의 삶의 자리인 호숫가로 나가 고기를 잡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삶의 자리에 나타나셔서 그들이 하는 일에 직접 개입하시면서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기도 하십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못 잡았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대로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을 정도의 많은 고기가 잡힙니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4,11-12) '예수님을 따라가자!'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갑시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그 안에 충만한 은총(대박)이 함께 한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가 믿게 되어,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가량이나 되었다."(사도4,4)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요한21,6b) 예수님 말씀에 늘 귀를 기울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늘 기억하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갑시다! 그래서 넘치는 은총, 충만한 은총을 받고, 이 은총을 너에게도 나누어 줍시다! |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4.23) "예수님께서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마르16,14)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 사가가 전하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사화'(마르16,9-15)입니다. 세 발현사화가 함께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일곱 마귀를 쫓아 주신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또 하나는 시골로 가고 있는 두 사람에게, 세 번째는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말을 제자들이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가깝게 지냈던 제자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많이 듣고 잘 기억하고 있었을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믿지 않는 그들의 불신과 완고함을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들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15) '믿는다.'는 것, 그 자체가 참으로 힘든 십자가로 다가옴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예수님과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직접 목격한 제자들도 예수님을 믿기가 어려웠는데, 이천 여년이 넘게 지난 지금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에 대해 묵상해 보면서, 믿는다는 것도 내 힘으로 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요즘 듣고 있는 독서는 사도들의 행적을 전하는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베드로 사도와 다른 사도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소식을 믿지 않았던 완고한 제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대변신 할 수 있었을까? "성령을 받아라!"(요한20,22)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순절에 약속하신 성령을 받고, 그렇게 대변신 했습니다. 답은 '성령'입니다. 이 성령께서 내 안에 임해야 제대로 믿을 수 있고, 희망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 성령을 받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 |
주님 부활 대축일 1년중 가장가장 기쁜 부활이 믿음으로몸으로 체험되어 변화되기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하나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부활은 나의 죽음으로부터 온다는 진리를 온 마음으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기는 너무 싫고, 내가 조금도 지고 싶지 않고, 불편한 말 한마디 앞에서 발끈하여 내내 흥분하는 우리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나의 것을 조건 없이 내려놓지 않고서는 나의 부활은 오지 않습니다.****** 중요하고도 요긴한 말씀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콜로3,1) 부활 축하축하드립니다 이마음에 새겨 늘감사하고 변화되도록 죽음 곧 부활 임을 가슴에 안고 살겠습니다. 아멘 !!!! 덕분에 최선을 다한 아름다운 부활 맞이했습니다 목도 쉬어가며 기쁘게 진교 저희 집에서의 엠마오 식사로 크은 기쁨과 바쁘게 움직이며 예수님 잊지않는 삶을 앞으로도 쭈------------------------욱 예수님만 바라보며 살께요 진심 부활 축하드립니다 아멘 알렐루야 십자가의 길 14처 처처마다 십자가 들고 깊은묵상 하게 해주신 행복한 경험도 차암 좋았답니다. 신랑은 세번이나 하는 은총도 성금요일 특히요 -- 가득합니다 고모님 참 기뻐요 예수님 계심이요 그리고 이렇게 기쁨이랑 사랑을 전할수있는 고모님도 계시니 더 기뻐요 예쁘신 고모님 부활 축하드려요 사랑합니다. 쭈---욱요 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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