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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은혜/성주간

<주님수난 성주간> We all, with our sins, bring Christ to the Cross우리의 죄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의 죄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 칸탈라메사 추기경 -

1독서: 이사 50: 4-7
2독서: 필리 2: 6-11
복음: 루카 22.14-23.56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복음에서 우리는 성 루카로부터 수난에 대한 완전한 설명을 듣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복음서가 기록된 이유인 중요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왜 그런 분이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되었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이며, 예수님의 죽음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유대인 대학살의 비극 이후 퍼지기 시작한 한 이론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죽음의 책임은 빌라도와 로마 제국에 있으며, 그분의 수난의 동기가 종교적이기보다는 정치적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복음서가 빌라도에게는 무죄를 선고하고 유대교 지도자들을 비난하여 로마 당국을 안심시키고 그들을 친구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오늘날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올바른 관심에서 출발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는 기독교인들에 의해 유대교인에게 많은 해를 끼친 반유대주의의 구실을 근본적으로 제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올바른 이유를 찾는데 가장 큰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그른 논쟁으로 반박하려는 것입니다. 반유대주의에 대한 투쟁은 수난 이야기에 대한 의심스러운 해석을 내놓는 것보다는 보다 정확하게 문제를 파악하고 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다인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에 책임이 없다는 사실은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이 공통적으로 적용되지만 불행하게도 수세기 동안 잊혀져 온 성경적 확실성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죗값을 짊어지지 않고, 아버지는 아들의 죗값을 짊어지지 않는다(에제 18:20).” 교회의 교리는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내려져 오는 죄는 단 하나, 오직 원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분명히 반유대주의를 반대하는 제가 왜 유다인들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관계가 없고, 그분의 죽음이 정치적이라는 생각을 인정할 수 없는지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50년경에 기록된 성 바오로의 서간에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복음서의 설명과도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유다인들은 주 예수님을 죽였다(1 테살 2:15)“고 말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우리 현대인들보다 더 잘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런 그는 나자렛 사람의 수난에 대해 열렬히변호하였습니다.

이에 앞서는 모든 논의를 무시하고 수난의 이야기를 읽을 수는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사복음서의 모든 페이지에서 안식일 준수, 죄인과 세리에 대한 태도, 종교 문제, 의로운 것과 아닌 것에 대한 예수님과 영향력이 있는 유다인 집단(바리사이, 율법학자, 서기관) 사이의 종교적 대조가 커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일단 이 갈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어떻게 이러한 갈등이 예수님 수난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유다인들이 로마인들의 무장 개입이 두려워서 마지못해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고발하기로 결정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빌라도는 알려지지 않은 한 유다인의 운명에 대해 정의감을 가질 만큼 민감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완고하고 잔인한 사람으로 반란의 싹을 잘라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사실입니다. 그는 희생자에 대한 동정심으로 예수님을 구하려고 하지 않았고, 그가 유다에 도착한 이후 계속하여 긴장을 고조시킨 고발자들을 반대하여 예수님을 구하려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런 방식은 예수님 수난에 대한 빌라도의 책임을 가볍게 하지 않으며, 그는 유다 지도자와 같은 책임을 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유다인보다 더 유다인이 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탈무드를 비롯한 여러 유다인들의 자료에는 예수님 죽음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고, 이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드러납니다. 유다인들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당시 유대 종교 당국이 가담하였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유죄 판결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유다인의 관점에서 그분의 유죄 판결이 부당한 선고가 아니었다고 함으로써 그들의 입장을 변호합니다.

예수님은 왜 사형 선고를 받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모든 연구와 제안된 가능성을 살펴본 후에 우리는 복음서가 제시한 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분은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이는 로마 총독을 더 잘 설득하기 위해 정치적인 용어로 교묘하게 공식화되었습니다. 최고 의회 판결의 근거가 된 메시아라는 칭호는 빌라도의 재판에서 유다인의 왕 나자렛 예수”가 되었고, 이것이 십자가에 달릴 죄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일생을 싸웠지만, 결국 그분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은 여전히 수난 이야기의 남아 사용되곤 합니다. 이는 과거 반유대주의적 풍토와 함께 부적절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수난 축일에 유다인 형제자매들을 화나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거한다는 맥락이 아니더라도 모두가 비난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에수님은 유다인들이 세상에 준 현존하는 가장 큰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가장 큰 값을 치르신 선물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고찰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결론은 종교 권력과 정치 권력, 최고 의회의 우두머리와 로마 총독이 서로 다른 이유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참여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죄와 함께 죽음으로 내몬 이는 바로 우리 모두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 역사적 질문은 제쳐두고, 그분을 묵상해 봅시다. 예수님은 그분의 수난에서 어떻게 행동하셨습니까? 초인간적 존엄성과 무한한 인내심을 보이셨습니다. 그분의 복음, 특별히 팔복 안에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단 한가지도 반증하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의 용서를 구하며 돌아가셨습니다.

또한 그분에게는 고통에 대한 금욕주의자의 자랑스러운 경멸은 없었습니다. 고통과 잔인함에 대한 그분의 반응은 매우 인간적이었습니다. 그분은 겟세마니에서 떨고 피를 흘리며, 그분에게서 잔이 지나가기를 원하시고, 제자들에게 도움을 구하고, 십자가에서의 고독함에 외쳤습니다.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수난 중에 그리스도의 초인간적인 위대함 중 이는 저를 매료시킵니다. 바로 그분의 침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입을 다물고 계셨다(마태 26:63).” 그분은 대사제 앞에서도 침묵하고, 그분의 침묵에 짜증을 내는 빌라도 앞에서도 침묵하고, 그분이 기적을 행하기를 바라는 헤로데 앞에서도 침묵하십니다. 베드로의 첫 번째 서간에 그분에 대해 그분께서는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돌아가시지 바로 직전에 죽음을 맞이하며 그분은 십자가에서 크게 외치셨습니다. 이를 듣고 로마 백인부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주님수난 성지주일>(4.10)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루카19,38)
'파스카 신비의 완성!'
오늘은 교회 전례주년 가운데에서 가장 경건하고 거룩한 때인 성주간(주님수난성지주일~성토요일)의 첫 날인 '주님수난성지주일'입니다.
교회는 오늘 예수님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고, '수난복음'을 통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파스카 신비의 완성'은 '부활'입니다.
그리고 이 부활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심으로써 얻어진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이사50,5-6/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2,6-8)
이 거룩한 순종의 결과가 바로 파스카 신비의 완성인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여정의 종착지인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파스카 신비의 완성지'입니다.
우리도 파스카 신비의 완성인 부활에 적극 참여하기 위해, '지극한 겸손과 거룩한 순종' 안에 머물도록 합시다!
제13처 :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림을 묵상합시다.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릴 때, 성모님은 그 시신을 안으시고, '내 아들, 장하다!' 고 슬픔 속에서도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걷는 십자가의 길 마지막 도착지에서도 성모님은 그렇게 우리를 기다리시다가 '장하다!' 고 칭찬하시며 당신의 따뜻한 품 안에서 우리를 쉬게 해 주실 것입니다.


<성주간 월요일>(4.11)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요한12,7)
'나는???'
오늘 복음(요한12,1-11)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는 베타니아로 가셨을 때 일어난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가셨을 때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라자로의 동생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립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한 것처럼, 이 향유의 가치는 삼백 데나리온, 곧 노동자의 일 년 치 품삯에 해당되는 큰돈입니다.
돈에 관심이 많았던 유다 이스카리옷을 놀라게 할 만큼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린 마리아의 행위는 예수님께 대한 지극한 믿음과 헌신적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이 행위가 당신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고, 당신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한 행위라고 직접 그 의미(7절)를 밝히십니다.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셨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주기 위함이다."
(이사42,6-7/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

예수님께서는 이런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잘 순종하시고, 이 순종을 완성하시고자 죽으십니다.
나는 이런 예수님께 무엇을 드릴 것인가?"------------------------------------------------------------------------------------------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요한12,7) (이사42,6-7/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
예수님께서는 이런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잘 순종하시고, 이 순종을 완성하시고자 죽으십니다.
나는 이런 예수님께 무엇을 드릴 것인가? 향을 간직하며 사는것 거룩하고 행복한 삶으로 사는것 -------------------

제14처 :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심을 묵상합시다.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 묻히지만 그분은 사흘 만에 부활 하셨습니다. 우리의 목적지도 무덤이 아니라 부활입니다. 주님께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고 초대하실 때, 십자가를 짊어졌던 이는 기뻐서 달려가지만, 십자가를 외면했던 이들은 두려워서 가지 못합니다. 부끄러워서 못 갑니다.


<성주간 화요일>(4.12)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요한13,21a)
'두 배신의 예고!'
오늘 복음(요한13,21-33.36-38)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마지막 만찬을 하실 때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다음 식탁에 앉으셔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배신'을 예고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요한13,21b)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13,38)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기는 '유다 이스카리옷의 배신'과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라고 장담하는 '베드로의 배신'을 예고하십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열두 제자 가운데에서 돈주머니(재정)를 담당할 정도로 예수님의 신임을 받는 제자였는데, 유다는 그 신임에 배신으로 응답합니다.
베드로는 열두 제자 가운데에서 으뜸 제자였고,
늘 다른 제자들에 앞서 말할 정도로 열정과 믿음이 컸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그것도 세 번이나 모른다고 예수님을 배신합니다.

예수님과 동고동락을 함께 했던 두 제자의 배신을 예고하시면서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그리고 또한,
우리를 위해,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믿겠다고 약속한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의 배신'을 보시고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해 수난하시고 죽으셨는데도,
나는 작은 불편함과 고통 앞에서 쉽게 넘어집니다.
쉽게 믿음을 포기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또한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구체적인 이슈(문제) 앞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지 않는 그런 '배신의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는 부족함이 많기 때문에 배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나의 회개와 하느님의 자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를 위해,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믿겠다고 약속한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의 배신'을 보시고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해 수난하시고 죽으셨는데도,
나는 작은 불편함과 고통 앞에서 쉽게 넘어집니다.
쉽게 믿음을 포기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또한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구체적인 이슈(문제) 앞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지 않는 그런 '배신의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는 부족함이 많기 때문에 배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나의 회개와 하느님의 자비가 필요합니다.


엄마와 함께해주신 예수님과 성모님 감사합니다.-성요셉 아버지와 같은 임종의 사랑 엄마께서 기쁘게 주님께 포옥 안겼을것입니다
옛날에 옛날에 중청도 당진에 훈장을 하시던 연안 김씨 집안에 늦동이로  천사같은 아기가 태어났는데 그아기 이름이 김종희; 아가다 였어요 하고 이야기 시작하면 엄마는 제법 즐거움에 넘쳐 큰소리오 웃으시면서 즐거워 하셨습니다 엄마 사랑해요  제어머니로 살아주셔서 행복합니다.

봄의 노래가 아름답게 꽃의 향기가 아찔하게 성모님께 안기고픈 꿈의 정원 안에 계신 울 고모님 보구싶고 웃음가득 품게하는 멋진예수님의 정배 싸랑합니다                                             요즘저는 자비의 성화에서 내리는 은총의 비를 흠뻑 맞는성스러운 주간입니다                   성가연습하고 바쁘지만 행복합니다,                                           부활에는 집에서 신부님과 사목위원들 모두 초대해 식사대접할 계획이랍니다                                            고모님 은혜로 감싸인 정원에서 큰 부활 새로운 부활 기대로 설레이며 보내실 모습에 설레설레 합니다 하트 퓨유ㅜ우웅 ㅎ

음식은혼자하지말고잘하는자매들과하셔요.손닝초대쉽지않아요.
아녜스도음식솜씨에빛이나야지요.맛있게잘하셔요.^~^♡♡♡------네 다 도와준답니다. 준비시간도 없어 미리미리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사랑했고 사랑하고 사랑할것입니다 고모님계서서 늘 축복받는 행복에 더 감사하고 기쁩니다.
 
--  아녜스가 .자랑스러워요(감동 부끄 기쁨 )-------------------[최장명] [오후 10:07] 고모님!!! 자랑스럽고
사랑하고 감격스러워요 매일 매일이요 수녀님 덕분에요


<성주간 수요일>(4.13)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마태26,15)
배반을 넘어 회개로!
유다 이스카리옷이 예수님을 놓고 수석 사제들과 흥정합니다. 그리고 흥정의 댓가로 은전 서른 닢을 받습니다. 그런 유다 이스카리옷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마태26,24)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순히 유다의 배반을 두고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배반 뒤에 유다가 행한 잘못(자살)을 두고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땀 흘리시다가 죽는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때문에 이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필요했는데, 그 도구가 바로 '마리아'이고, '유다 이스카리옷'입니다. 그러니 '유다의 배반 행위'도 하느님의 뜻 안에서 보면 '작은 도구일 뿐'입니다.
유다도 배반을 하고, 베드로도 배반을 했지만,
두 배반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유다의 가장 큰 잘못은 배반이 아니라, 배반 후 보여준 절망(죄책감)이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하고 이 절망에만 머물러 있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배반 후에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자신의 잘못에서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마음을 돌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부활했습니다.

어제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예수님을 배반하는 행위는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를 통해서, 나를 통해서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은 '나의 진정한 참회'와 마음을 돌리는 이들(회개하는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 때문입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처럼 배반 그 자체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베드로처럼 배반을 넘어 회개로 넘어가는 사람, 그래서 다시 부활하는 사람이 됩시다.

절망(죄책감)-------가장 위험한 죄----극복 '나의 진정한 참회'와 마음을 돌리는 이들(회개하는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 때문입니다.

<주님 만찬 성 목요일>(4.14)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13,1)
'믿음의 본질!'
오늘은 교회 전례 중에서 가장 등급이 높은 '파스카 성삼일'이 시작되는 첫 날입니다. 교회는 오늘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인 '성목요일 저녁'에 일어난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제자들, 당신의 부르심을 받고 응답한 열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미사의 제정)을 하신 후,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어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그들의 발을 닦아 주십니다.
가장 높은 지위에 계시는 하느님께서 한없이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지체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이들은 누구이며, 끝까지 사랑하신 이들은 누구일까?
그들이 바로 다음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
예수님을 믿고 따라간 이들!
교만과 힘 있는 이들로부터 핍박 받은 이들!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
그리고 회개하는 죄인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13,14)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우리도 예수님처럼 끝까지 사랑합시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이들을 끝까지 사랑합시다!

'파스카'는 '건너감'이라는 뜻으로 '부활'을 의미합니다.
이집트 종살이에서의 해방인 '구약의 파스카'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신약의 파스카'를 미리 보여준 사건입니다.
그리고 '신약의 파스카'는 또한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야 하는 우리의 파스카(부활)를 위해서, 서로가 낮아져야 하고, 서로가 작아져야 하고, 마침내는 서로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믿음의 본질'입니다.

나와 모두의 부활을 위해 날마다 화이팅 합시다!----------넵  아멘


<주님 수난 성 금요일>(4.15)

"다 이루어졌다."(요한19,29)
오늘은 예수님의 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날인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후 3시경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늘 오후 3시에 함께 모여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고, 저녁에 '수난 예식'을 거행합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당신께 주어진 모든 일을 다 이루시고 돌아가셨습니다. 하느님이신 우리 주님께서 나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인간적으로 참으로 슬픈 날이고, 참으로 마음이 아픈 날입니다.
나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을 두고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에게는 우리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랄 만한 모습도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53,2-5/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는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었고, 예수님은 이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당신 자신도 사시고 우리도 살리기 위해 예수님께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죽읍시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 모두의 부활을 위해 참되게 믿읍시다!

"형제 여러분,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히브4,14)

'침묵의
<성 토요일>

'침묵의 시간!'
어제 우리 주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어제와 오늘은 주님의 죽음을 묵상하는 '침묵의 시간'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어제와 오늘은 일 년 중 미사가 없는 유일한 날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죽음을 묵상합니다.
어제 우리는 '주님수난예식'을 통해서 나를 향해 드러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을 묵상했습니다.

"다 이루어졌다!"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끝으로 숨을 거두셨습니다. 당신께서 해야 할 모든 일을 다 마치시고 죽으셨습니다. "다 이루어졌다." 라고 말씀하시고 숨을 거두셨지만, 당신에게 주어진 일을 완전하게 이루시고 죽음을 맞이하셨으니,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라는 말씀을 더하시고 돌아가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게 돌아가셨기 때문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을 죽음으로부터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들이 많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써 각자의 신분에 맞는 일들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도 이 모든 일들을 다 이루고 나서,
"다 이루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라는 마지막 말로 기쁘게 죽음을 맞이하고, 그렇게 영원한 생명이 문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늘 겸손하게 최선을 다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됩시다!

오늘 밤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는 예수님을 기억하는 '파스카 성야 미사'가 거행됩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마태17,22.23)
나의 부활을 위해 우리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십니다. 그러니 지금 나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의 부활도 내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부활할 때 비로소 예수님의 부활이 큰 의미가 있습니다. 부활 없는 삶이 가장 큰 죄입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