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 대신 더 많은 사랑을..>
7월 4일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마태 9,14-17)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의롭고 거룩하다고 인정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하느님을 위해
자신을 철저하게도 관리할 줄 아는 사람들,
즉 금욕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즐겨 실천하던 자기 통제 방식은 단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도자였던 모세는 대단한 단식가였습니다.
그는 틈만 나면 단식하며 하느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위대한 대예언자 엘리야 역시 단식을 통해
깨어 기도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구약 시대의 마지막 대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은 또 어떻습니까?
그는 거의 음식과는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그의 주식은 메뚜기요 들 꿀이었습니다.
거의 먹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표시입니다.
바리사이들 역시 철저하게 단식을 했습니다.
놀랍게도 일주일에 두 번씩
꼬박꼬박 빼먹지 않고 단식을 실천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성덕과 단식은 늘 함께 가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단식은 영혼이 육체를 지배하는 수단이었고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을 준비하는 도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광야로 들어가셔서 40일간이나 단식을 하시며
스스로를 단련시키고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단식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해서
충분히 인식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십니다.
광야에서 단식하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가시는 곳 마다 잔치를 벌이십니다.
사람들의 초대를 거절하지 않으시고
기쁜 마음으로 잔치자리에 앉으십니다.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시며
포도주잔을 기울이시고 마음껏 축제를 만끽하십니다.
종래 대예언자들의 모습과는 너무도 상반된 예수님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묻습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그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판을 완전히 뒤집는 놀라운 대답,
바로 문제의 본질이자 핵심부로 우리를 인도하는
기가 막힌 대답을 펼쳐놓으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즉 당신이 이 지상에 머무시는 기간은
인류 전체가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대축제의 기간임을 선포하십니다.
혼인잔치 때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산해진미 앞에서
우울한 얼굴로 단식한다는 것은 혼주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입니다.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로서
혼주를 가장 기쁘게 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준비한 음식 맛있게 먹어주는 것입니다.
벌어진 축제 마당에서 흥겹게 놀아주는 것입니다.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부인 교회 공동체를 맞아들이시어 혼인잔치가 벌어졌는데
이 기간 동안 단식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색한 행위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자들을 포함한 우리 모두는
이 장엄하고 축복된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인 것입니다.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이 대축제 기간 동안
우리가 취할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평소보다 더 많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정말 참된 단식은 기쁘게 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쁘게 지낸다는 것이
그냥 희희낙락하며 기쁘게 지내는 것이 아닙니다.
꼭 기쁜 일이 있어서 기뻐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바오로 사도께서 그러셨듯이
고통 속에서도, 거듭되는 환난과 박해 속에서도 기뻐하는 것입니다.
비록 오늘 내 삶이 고통과 십자가의 연속이어도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니, 하느님께서 내 안에 현존하시니
기뻐하는 것이 참된 단식입니다.
참된 단식은 더 많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한다는 것이
사랑스러운 사람만 골라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들, 내 편에 선 사람들,
나를 챙겨주고 인정해주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를 헐뜯고 공격하고 깎아내리는 사람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수용하고
사랑하고자 노력하는 그 사랑이 참된 단식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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