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슬픔을 못견뎌하시는 하느님>
7월 7일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마태 9,32-38)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유학시절 때였습니다.
긴 여름방학을 맞아 교수 신부님들뿐만 아니라
학생 신부들도 다들 휴가다, 사목활동이다
한명 한명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다가 나 혼자 남겠다 싶어
이태리어도 전혀 안 되는 상태였지만 용기를 내서
나폴리 근교 한 시골본당 사목을 도와주러 갔습니다.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신자들도 우리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따뜻하게 대해주셨습니다.
많이 서툴렀지만
미사와 강론, 고해성사도 열심히 했습니다.
참으로 보람된 날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말이지 괴로운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저녁식사 초대받아가는 것이었습니다.
7시쯤 시작된 저녁식사 시간은
8시, 9시, 10시가 되도 끝날 줄을 몰랐습니다.
자주 보는 사람들끼리 뭐 그리 할 말들이 많은지
일어설 듯 일어설 듯 하다 가도 대화는 마무리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저도 자신들의 대화에 조금 끼워주었습니다.
어디서 왔냐?
가족들은 어떻게 되냐?
남한에서 왔냐?
북한에서 왔냐? 등등.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더 이상 깊이 있는 대화가 불가능한 저였기 때문입니다.
저에 대한 분위기를 파악한 그분들은
그때부터는 드러내놓고 표준말이 아닌 심한 나폴리 사투리로
신나게 떠들어대기 시작하는데,
저는 단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저 애매한 웃음만 지으면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그냥 앉아있었습니다.
입이 있어도 거의 무용지물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소통한다는 것,
즉 말이 통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대화에 끼지 못하는 소외감, 외로움, 고독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언어장애를 지닌 형제자매들의 고충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절실히 느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 언어라는 것,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대단한 것입니다.
언어는 그 사람의 인격, 성품, 사상, 철학 등등
한 인간을 드러내는 표현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체험하는
희로애락, 우정, 사랑의 표현은 많은 경우
언어를 통해 밖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마귀로 인해 심각한 언어장애를 지닌 사람을 치유하십니다.
그는 오랜 세월 언어장애로 인해
짙은 고독과 소외감에 젖어 살아온 사람,
길고 긴 어두운 터널 속에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부자유스러움을 견디지 못하시는 예수님,
우리 인간의 가련함에 애끓는 예수님,
한 인간의 깊은 슬픔 앞에 같이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이셨기에
마귀 들린 언어장애우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언어장애의 치유를 통해
한 인간에게 새 인생을 선물하셨습니다.
새 삶을 되찾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놀랍고도 은혜로운 치유활동 앞에
사람들은 경탄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 인간이 본래의 아름답고 사랑스런 모습을 되찾는 기적 앞에
감사하고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딜 가나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죠.
몇몇 바리사이들이 즉시 엉뚱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쫒아낸다.”
참으로 한심스런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들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마귀와 한통속으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배은망덕도 이런 배은망덕이 없습니다.
그들은 절대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말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쫒아낸다.”을 통해
자신들이야말로 악마의 편에 서있음을 명확하게 드러냈습니다.
기적도 선의의 마음,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 있어야 제대로 된 효과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한 바리사이들의 말로는 참으로 비참했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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