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2회 지금은 "때가 차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0월 27일(마카베오상 1장~ ) 게리 주커브는 ''당신이 세상으로부터 받고 싶은 것을 세상에 주어라. 그것이 결국 당신이 받게 될 것이니까.'' 《진실이 비유를 만나다.》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는 어떤 모임이나 어떤 장소에 가든지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는 사람이 있다. 특별히 잘생긴 외모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키가 크거나 유머감각이 뛰어난 편도 아닙니다. 하지만 몇 번의 만남에서 나는 그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한 특별한 점을 한 가지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느낀 그 사람의 특징 중에 하나는 말에 꿀을 발라서 한다는 점입니다. 친절한 말투와 함께 그 말에 상세하고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고 또 비유를 적절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 사람 말은 딱딱하거나 누군가를 가르치는 식이 아니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유난히 많이 공감하는 것 같았다. 말은 인격을 나타내는 중요한 판단 근거가 됩니다. 당신이 참 근사하고 괜찮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딱딱하고 권위적인 말투를 가지고 있다면 사람들은 당신을 그와 반대되는 사람으로 판단할지도 모릅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말에 대한 이 명언을 가슴에 새기고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신경을 쓰는 당신이 되시길.. 부드러운 설득은 강한 위협보다 더 강하다. 전자는 사람을 녹이고 후자는 부수어 버릴 뿐이다. 모든 복음서가 다 전해져야 할 복음서이고 또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 있지만 특히 루카 복음서 전체는 복음 선포자의 복음서라고 할 수 있다. 즉 복음을 어떻게 전하는지, 무엇을 전하는 것인지, 누구에게 전하는 것인지 등 복음 선포자의 자세와 사명을 중점적으로 전해주는 복음서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이사야 두루마리를 펴시고 거기에 적혀있는 말씀을 읽고 자리에 앉으시자 사람들이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고 하였다. 나는 성서를 펴서 읽을 때마다 어떤 마음으로 읽는가? 나에게도 성서의 말씀이 "은총의 말씀" 으로 다가오는가? 나도 성서를 읽을 때마다 이 말씀은 "은총의 말씀" 이라고 하며 놀라워하는가? 그렇다. 성서의 말씀은 매번 읽을 때마다 은총의 말씀이요, 은혜를 주는 말씀이요, 하느님이 나에게 주시는 은혜로운 선물이다. 왜 은총의 말씀이라고 하는가? 성서를 읽거나 듣을 때마다 내 마음이 기뻐지고, 묶여 있던 것들에게서 해방되고,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는 눈이 뜨이고, 억압받고 있던 모든 스트레스를 날려보내어 자유로움을 맛보게 되기 때문이다. 성서를 읽거나 듣을 때마다 이런 은혜를 받는다는 것. 아니 우리가 성서를 읽거나 듣을 때마다 이런 은혜를 받아야 한다. 언제 이 은혜를 받는가? "오늘 이 성서의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라고 말씀하신 대로 이 은혜는 내일도 아니고 앞으로 받을 것도 아니고 바로 오늘 말씀을 듣는 이에게 주어지는 은총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기는 바로 이런 엄청난 기적이 일어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과거처럼 말씀이 이루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시대가 아니라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이 듣는 이 가운데에서 이루워지는 시기에 살고 있는 것. 왜냐하면 지금은 "때가 차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1, 15)라고 말씀하신 대로 하느님의 나라가 와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2000년전 나자렛에서 완성된 말씀은 그 때부터 완성된 말씀으로 선포되고 있는 것. 따라서 어느 곳에서 어디에서든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면, 듣고 받아들인 그 사람에게 말씀이 가져다 주는 은총을 받는 것. 따라서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선포되는 말씀에 순명하는 것. 즉 성모님처럼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워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받아들이고 생활하는 것. 보라, 성모님은 당신이 말씀하신대로 받아들이고 순명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잉태하게 되었고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셨으며 "여자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신 분." 이라고 부르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 은총의 어머니가 되시지 않았는가? 우리가 특별히 주목할 점은 "오늘 이 성서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는 말씀이다. 성서는 바로 오늘의 이야기이고 오늘 완성되는 말씀이다. 따라서 성서를 읽는 사람에게 있어서 말씀은 들은 말씀대로 오늘 완성되어야 한다. 말씀이 완성될 때가 바로 오늘이다. 그러나 말씀을 듣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서 말씀이 이루어지는 시간은 바로 오늘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미래에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들은 말씀 그 자체는 오늘 이루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말씀이다. 다만 그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만, 그것도 말씀을 듣는 자세에 따라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이다. 따라서 우리가 복음을 읽을 때 과거의 이야기로 아니면 앞으로 일어날 지도 모르는 이야기로 아니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읽는다면 한번도 말씀이 내 안에서 오늘 이루어지지 않을 것. 우리가 읽는 말씀은 바로 오늘 나에게 말씀대로 이루워지게 하는 은총의 말씀이라는 믿음으로 읽고 들어야 한다. 아무리 놀라운 은총의 말씀이라 하더라도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은총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은총의 말씀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성서를 펼칠 때마다 은총의 말씀, 은혜를 받게 하는 말씀이라는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아마도 말씀이 은총의 말씀으로 느껴지고 받아들이기까지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내가 읽고 들은 말씀이 그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 위해서 아직 내 안에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거나 아니면 오늘 이루어질 수 없는 많은 장애물이 놓여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읽거나 듣은 말씀이 어떻게 하면 은총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는가? "그분의 말씀을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시편 95,7)고 말씀하신 대로 나의 마음이 말씀 앞에서 활짝 열려져 있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닫혀져 있으면 안 된다. 귀, 눈, 지성 등 나의 존재 전부가 말씀 앞에서 열려 있어야 한다. 우리가 복음을 들을 때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라고 하였듯이 우리의 모든 인격이 열려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내가 말씀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나의 존재 자체가 모두 눈이 되어야 하고 온통 귀가 되어야 한다. 영성적이라 할 수 있는 나의 존재의 모든 모공이 열려 있어야 한다. 온 대양을 흡수하기 위해서 열려 있는 스펀지의 모공처럼 말이다. 우리의 영적 감각이 모두 열려 있을 때 오늘 내가 읽거나 듣은 말씀이 내 안에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 너무 어려운 주문인가? 말씀이 오늘 내 안에서 은총의 말씀으로 다가왔을 때 내 안에서 일어나는 첫 번째 반응은 무엇인가? 놀라움이다. 즉 누구보다도 내 자신이 놀란다. 그리고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은 바로 은총임을 깨닫게 된다. 그때부터 말씀은 진 꿀보다 더 달기 시작한다. 즉 비로소 말씀의 맛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 말씀을 은총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은혜를 전한다는 것. 은혜는 은혜를 받은 사람만이 전할 수 있다. 은혜 없이 전하는 모든 말씀은 공허할 뿐이다. 또 다른 사람을 놀라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들 모두가 십자가 예수님을 가슴에 품고 순간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저는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라는 은혜로운 고백으로 살아갈 수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사랑은 사랑으로만 갚을 수 있다” - 예수의 성녀 데레사 - |
♡2263회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오이를 심으면 오이를 거두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0월 28일(마카베오하 1장~ ) 힐라리우스는 ''예수님께서는 먼저 죄를 용서해주셨고, 이어서 건강을 회복시키는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가 평상을 가지고 가게 함으로써 육신이 병과 고통에서 벗어났음을 똑똑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하심으로써 믿는 이들이 모든 인간의 조상 아담이 죄의 얼룩 때문에 떨어져 나온 낙원으로 가는 길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사람을 움직이는 무기는 입이 아니라 귀다. 대화의 질은 서로 상대의 이야기를 얼마나 잘 들어 주는가에 달려있다. 같은 요구라 해도 자기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의 요구에 더 잘 따른다.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상대의 입장을 생각하고 공감할 수 있는 태도가 전제 되어야 한다. 학교에서 일 등을 했던 사람이 사회에서 가장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고 남의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 .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지적인 능력이 아니라 자신과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이를 조화롭게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다. 옳은 말 하는 사람보다 이해해 주는 사람이 좋다. 아이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은 부모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다. 부모가 많이 쓰는 말일수록 아이들에게는 필요하며 옳은 말인데도 말이다. 옳은 말인줄 알면서도 아이들이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부모가 아이의 입장이나 처지를 이해하고 감정을 인정해 주는 "공감"(empathy)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공감이 없으면 아이들에게는 간섭으로 들릴 뿐이다. 조리있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부러워 한다고 항상 좋아 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 주장을 똑 떨어지게 하지는 않지만 내 입장을 잘 이해해 주는 사람에게는 시기할 필요도 없으며 부담을 느끼지도 않는다. 존경받는 상사나 훌륭한 부모는 상대의 입장이나 처지를 배려할 수 있는 공감 능력이 남다르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상대의 입장을 공감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사람이 어떤 감정을 경험하고 있는지를 민감하게 파악하고 함께 느끼며 이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아마도 죽은 후에 신부님들은 입만 천당 가고, 수도자들은 귀만 가고, 일반 신자들은 발만 갈 것입니다’ 하고 우스갯소리를 하였다. 신분에 맞는 삶을 산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로 받아들였다. 아는 것이 많거나 좋은 말을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삶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아니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로라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삶이 표양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아셨기에 군중과 제자들에게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3) 하고 말씀 하셨다. 사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장애가 될 때가 많습니다. 스스로 실천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마더 데레사)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수도자와의 만남에서 “청빈서원을 하지만 부자로 살아가는 봉헌된 사람들의 위선이 신자들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교회를 해칩니다. 또한 순전히 실용적이고 세속적인 사고방식을 받아들이려는 유혹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고 말씀하셨다. 들은 것과 말한 것, 행하는 것 사이에는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로마2,13)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 1,22)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 6,6)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오이를 심으면 오이를 거두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거두는 것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이 꾸중을 듣는 것은 그들의 지향과 행동이 주님의 마음과 일치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말해야 하고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이 말씀하시도록 나를 도구로 내놓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하셨다. 길다란 예복을 걸치고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높은 자리를 찾으며 스승이라는 소리를 듣기를 원하고 속으로는 온갖 잡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는 사람은 어느 시대나 있어왔고 지금도 있다. 그게 바로 자신이 아닌지 살펴야 하겠다. 섬기는 사람이 되고(마태 23,11), 자기를 낮추는 사람(마태 23,12)이 되어야 한다고 강론을 하면서도 정작 대접 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면 큰일입니다. 사람의 주목을 받는 일에는 기를 쓰고 일을 하려고 들고 알아주지 않는 일, 하지만 충실히 채워야 하는 일에 대해서는 하기 싫어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백성이 떼지어 모여들듯 너에게 와서, 나의 백성으로 네 앞에 앉아 너의 말을 듣는다. 그러나 그 말을 실천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입에는 열정이 차서 그럴듯하게 행동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제 이익만 좇아간다.”(에제 33,31)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오시면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 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1고린 4,5) 그리스도인은 행실이 표양이 되어야 하고 버릇없는 이들과도 함께해서 좋은 것으로 이끌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시듯 말입니다. 말씀을 품고 드리는 기도 안에서 늘 하느님과 함께 계신 우리들은 이미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그 아름다운 사람의 기도로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자녀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이 충만히 머물러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진짜를 잘 알아야 해요.” “위폐는 진짜로 보이기 위해 꾸미다 보니 부자연스러워요. 하지만 진짜 지폐는 자연스럽습니다.” - 위폐 감별사 - |
♡2264회 평생 목표, 10년 목표, 1년 목표, 하루 목표를 정합시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0월 29일(욥기 1장~ ) 성 알폰스는 “지금까지 제게 일어난 모든 좋은 일들, 저의 회개와 성소 여정, 그리고 또 다른 수많은 은총들은 모두 당신이 하신 일입니다. 당신은 제가 모든 것 위에 어머니 당신을 사랑하기를 바라시고 또 원하십니다. 제가 항상 언제 어디서나 당신에 대해 가르치며 당신의 아름답고 은혜로운 신심을 모든 영혼 안에 심고자하는 것은 모두 이 때문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감사하는 마음은 깨끗한 마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따뜻한 마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겸손한 마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예민하게 깨어있는 마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평화로운 마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코로나 때문인지 우울증 비슷한 무기력감에 빠졌다는 분들의 이야기를 가끔 듣습니다. “이런 것, 저런 것을 좀 시작해보면 어떠실까요?” 라고 말하면, “옛날에 다 해 봤어요. 지금 제 환경에서는 불가능해요. 안 돼요!” 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얼마 뒤 “삶이 우울해요. 무기력해요. 나이만 먹고 있어요!” 라고 또 말합니다. 어쩌라는 말입니까? 삶의 에너지는 ‘지금 이 순간 행복을 좇는 마음’ 에서 나옵니다. 가젤을 잡기 위해 전력 질주하는 표범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표범에 잡히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해 도망치는 가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의 행복은 생존입니다. 그 행복에 다다르려고 고군분투하는 것이 삶의 활력입니다. 행복을 향한 목표 없는 삶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안 돼!” 라는 원죄의 목소리가 있다. 삶의 의욕을 되찾고 지금의 나의 한계를 뛰어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는 ‘하나의 법칙’ 이 있다. 베드로 사도가 물 위를 걸은 것은 그 법칙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톰 빌리유’ 는 연설가요 퀘스트란 다이어트 식품을 판매하는 회사의 대표입니다. 그는 병적으로 뚱뚱한 집안에서 자라 엄청난 뚱보였다. 집에 들어올 때마다 어머니는 패스트푸드를 들고 계셨고 누나는 살에 묻혀 몸조차 가누지 못한 채 침대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물론 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먹는 유일한 야채는 패스트푸드 안에 있는 양상추가 전부였다. 매일매일 나빠지는 건강상태를 보며 죽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이러다 정말 죽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비로소 매일 운동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권고하는 대로 무리가 되지 않을 만큼의 ‘최소한의 운동량’ 만을 지속했다. 결과적으로 몇 달을 꾸준히 운동했으나 체중이 더 늘었다. 운동하니 그 만족감에 식욕이 더 증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나는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 자신의 한계를 넘지 않으면 변화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 그 후 그는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다양한 도전으로 몸과 마음에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톰은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세상에 만연한 비만이라는 질병과 싸우기 위해 ‘퀘스트’ 라는 식품회사를 세웠다. 그러나 경험 부족으로 연속적인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하루하루가 고난이었고 ‘너무 큰 목표를 꿈꾼 것은 아닌가?’ 라는 회의감이 몰려왔다. 하지만 문득 엄마와 누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머니와 누나는 퀘스트 시제품으로 다이어트를 하고 있었는데 하루하루 달라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그래, 아직 더 버틸 수 있어!’ 라고 다짐했다. 지속적으로 버티고 노력하다 보니 누나는 회사가 시작한 시점에서 54kg을 감량했고, 회사도 성장하게 되었다. 자신의 한계를 넘으려 하지 않으면 아무런 발전도 없다. 더군다나 삶의 의욕도 생기지 않습니다.[참조: ‘자신의 임계점을 찾는 법’, 유튜브 채널 ‘체인지 그라운드’]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법칙을 발견해야 합니다. 우선 ‘더 나아지려고 하는 마음’ 이 있어야 한다는 것. 우리는 모두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지금의 현실에 안주하려 합니다. 그것은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 아닙니다. 배가 고파서 음식을 먹고 싶어야 행복을 바라는 것. 배고프지 않으면 행복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성취에 목마르고 배고파야 합니다. 그다음은 내가 바라는 행복을 긍정해주는 이를 찾아야 합니다. 자신 안에는 무조건 “넌 안 돼!” 라고 말하는 자아가 살고 있다. 그리고 그 말에 무조건 순응하게 태어납니다. 이것이 원죄입니다. “넌 할 수 있어!” 라고 말해주는 이를 찾아야 합니다. ‘믿음’ 을 주는 이가 필요한 것.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렇게 청합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긍정해 달라는 것. 예수님은 이 일을 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그러면 이제 믿고 한계를 극복하려 노력하면 됩니다. 그러나 처음엔 잘 안 됩니다. 그 ‘방법’ 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살을 조금 뺐는데, 살이 빠지기 시작한 것은 생각을 바꾸었을 때부터입니다. 살을 빼는데 ‘음식 20%, 운동 80%’ 만큼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 생각과는 반대로 ‘음식 80%, 운동 20%’ 임을 알았을 때부터 살이 빠지기 시작하였다.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먼저 물 위를 걷는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으셨다면 감히 물 위로 뛰어내릴 생각을 할 수 없었을 것. 따라서 “넌 할 수 있어!” 와 “어떻게?” 가 함께 와야 합니다. 이것을 ‘은총과 진리’ 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긍정의 은총과 방법의 진리를 알려주러 오셨다. 그러면 이제 남는 것은 ‘꾸준함’ 입니다. 베드로는 물 위에서 비틀거립니다. 우리 믿음은 한순간에 크지 않습니다. ‘성장’ 합니다. 톰 빌리유가 어머니와 누나의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믿음을 지속시킬 수 있었듯 우리도 조금씩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실패에도 지속할 수 있다. 그러면 분명 목표에 다다를 날이 있다. 의욕을 가지고 살아야 진정한 삶입니다. 의욕을 가지려면 행복의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평생 목표, 10년 목표, 1년 목표, 하루 목표를 정합시다. 그리고 예수님께 “한번 해 보라고 명령하십시오.” 라고 기도합시다. 그분은 항상 “해 봐!” 라고 하실 것. 그러면 “어떻게요?”라고 물으십시오. 대답해 주실 것. 이젠 비틀거리며 믿음을 성장시키고 확인해가는 일만 남습니다. 이 메커니즘에 자신을 결속시킬 수 있어야 참으로 활력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당연히 “저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 라고 말씀하시며 돌아가신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처럼 기쁘게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이것은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이란, 하느님께서 가장 아끼는 사람이란, 결코 넘어지지 않는, 실수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베드로처럼 쓰러졌다가도 다시 일어나서 계속 주님께로 정진하려는 사람이다. 계속 새로이 시작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쓰러질 수 있지만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는 사람이며, 그런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우리들, 적당한 때를 기다리십시오. 감사한 마음으로 진실 되게 기도하면 때가 차면 우리의 소망을 이루어주실 것임을 믿고 주님 안에서 행복한 삶을 보내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자기를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 |
♡2265회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은 자비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0월 30일(시편 1편~ )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잘못한 형제를 고쳐주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은 영혼을 죽이는 살인행위와 같다. 왜냐하면, 잘못한 형제는 마치 독 있는 뱀에 물린 상태와 같은데, 그 독을 빼내어주지 않고 그대로 나두는 것은 잔인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 대부분은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을 하면 ‘용서’ 는 해야 하는 줄 압니다. 그렇더라도 용서가 잘 안 되는 이유는 내가 주님께로부터 어떤 죄를 용서받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로 용서하려고 하니 용서가 매우 혹독한 고난의 길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평소에 내가 주님께 받은 은혜를 깊이 묵상하고 있었다면 오히려 용서할 기회를 찾게 될 수도 있다. 그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내 죄를 용서하신 그 은혜를 묵상하면, 감히 ‘나도 용서할 기회가 좀 더 많았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을 것. 유튜브에 나오는 어느 결혼식 축사의 주요 내용을 약간 각색해 보았다. 동업자이며 한 살 어린 나이지만 삼 년 전 결혼한 선배의 결혼식 축사입니다. “진이 형. 십 년 전 우리는 결혼을 못 하든지, 아니면 축의금도 못 받고 몰래 결혼하든지, 둘 중 하나일 거라 했었지. 그때는 풀리는 일이 없었어. 그런데 결국 나도 삼 년 전에 결혼하게 되었고, 형도 지금 축의금 많이 받고 결혼하네. 앞으로 우리 열심히 일하며 갚아나가자. 형이야 당연히 잘하겠지만, 결혼 선배로서 하나만 얘기할게. 형수랑 싸우면 대체로 형이 잘못한 경우가 많으니까 일단 사과해. 혹시 형이 생각했을 때 형 잘못이 하나도 없는 것 같으면, 그래도 사과해. 그게 남자고 남편이고 가장이며 우리 같은 사람과 결혼해주는 아내에 대한 보답이야. 좋은 기회잖아. 그동안 한 번도 얘기 못 했었는데, 이 자리 빌어 이제야 얘기한다. 십 년 전에 나 오토바이 사고 나서 한 달 병원에 누워있을 때, 병원비 없어서 퇴원 못 하고 간호사들 눈치 보던 그때, 형이 친구니까 도울 수 있으니까 돕는 거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내밀었던 그 봉투, 내가 오늘 다시 가져왔다. 그때의 나는 어리고 철도 없고 자존심만 세서 고맙단 말 못 하고, 그렇다고 안 받겠다는 말도 못 했지. 나중에 열 배, 백 배도 갚겠다고 큰소리만 쳤었는데, 딱 열 배 넣었다. 백 배는 앞으로 같이 벌자. 내가 책임지고 벌게 할게. 진짜로 고마웠다. 그동안 한 번도 잊어버린 적 없다. 형, 형은 참으로 멋있는 사람이다. 주위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사람이고 그런 형이 선택한 형수라, 형수도 같은 사람인 거 같네. 여태 그래왔듯이, 세상 밝게 비추면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결혼 축하해. 잘 살아. 2020년 5월 30일, 형 덕분에 이 자리에 서게 된, 00으로부터.” [출처: ‘신랑을 울게 한 친구의 반전 축사’, 유튜브 채널 ‘삼남 2인조’]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은혜를 갚을 기회만을 노릴 것. 축사한 동생은 십 년 전의 자신들의 처지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누군가 자신에게 시집와 주는 것도 고맙고 그 결혼을 축하해주러 온 분들께도 감사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십 년 전 자존심 때문에 고맙단 말도 못 했던, 그러나 한순간도 잊지 못했던 그 은혜에 대해서 형의 결혼식은 정말 ‘원수 갚을’ 절호의 기회였을 것. 우리는 과연 하느님께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습니까? 당연히 지옥 불이 기다리고 있는 우리에게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의 피로 그 지옥 불을 꺼주셨다. 만약 이 죄의 용서의 은혜를 믿기만 한다면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제발 나에게 잘못하는 사람 좀 있어라!’ 하면서 기회를 노리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기회가 있으면 주님께 조금이나마 보답하기 위해 기쁘게 용서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일만 탈렌트를 탕감받았으면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은 감옥에 집어넣는 사람이 나옵니다. 백 데나리온이 약 천만 원이라고 하면 일만 탈렌트는 육조 원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당연히 이 은혜도 모르는 사람을 주님은 하늘 나라에 사시게 할 수 없으십니다. 공감 능력이 전혀 없는 자기만 아는 사람임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남의 잘못을 용서하고 있지 못한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은 자비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유튜브에 보면 하부리그 축구 경기에서 결승 골을 넣은 선수가 하나뿐인 관객 앞으로 달려가 구십 도로 인사하는 감동적인 모습이 나옵니다. 그리고 4시간 동안 응원하러 왔던 그 관객은 엉엉 웁니다. 바로 고양 시민축구단이 평창에 와서 경기할 때의 모습이었다. 일곱 경기 연속 패하기만 하던 고양 시민축구단을 응원하러 혼자 평창까지 오는 것은 누가 봐도 어리석은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라대관 씨는 먼 길을 혼자 달려와 목이 터지라고 북을 치며 응원했다. 선수들은 골을 넣자마자 하나뿐인 그 관중에게 달려갈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것. 억지로 노력해서 용서하는 것도 분명 큰일입니다. 그러나 평소 주님의 은혜에 대해 깊은 묵상을 했다면 용서를 할 기회를 찾는 것은 더 큰 일일 것. 어차피 용서할 것, 주님께 더 보답해드리기 위해 ‘용서를 은혜 갚을 절호의 기회’ 로 노리며 삽시다. 이제 기도로 빚을 갚은 우리들의 손에 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힘을 써서 화해하시고, 우리들의 인생 순례 길에 수많은 보람을 선물로 받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죄의식으로 말미암은 병은 죄의식을 없애서 고쳐야 하고, 잘못된 생활습성 때문에 생긴 병은 그것을 바로잡아서 고칠 일'' - 이현주 - |
♡2266회 나 자신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힘을 주는 말입니까? 힘을 - 빼는 말입니까?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0월 31일(시편 41편~ )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 톨스토이 - 《인생 십계명과 천국서 쓰는 7가지 말》 1. 힘차게 일어나십시오. 시작이 좋아야 끝도 좋다. 육상선수는 심판의 총소리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0.001초라도 빠르게 출발하기 위해서입니다. 1년에는 365번의 출발 기회가 있다. 빠르냐 늦느냐가 자신의 운명을 다르게 연출합니다. 시작은 빨라야 합니다. 아침에는 희망과 의욕으로 힘차게 일어나십시오. 2. 당당하게 걸으십시오. 인생이란 성공을 향한 끊임없는 행진입니다. 목표를 향하여 당당하게 걸으십시오. 당당하게 걷는 사람의 미래는 밝게 비쳐지지만, 비실거리며 걷는 사람의 앞날은 암담하기 마련입니다. 값진 삶을 살려면,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으십시오. 3. 오늘 일은 오늘로 끝내십시오. 성공해야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미루는 습관에서 벗어나십시오.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오늘 하루뿐입니다. 내일은 내일 해가 뜬다 해도 그것은 내일의 해입니다. 내일은 내일의 문제가 우리를 기다린다. 미루지 마십시오. 미루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4. 시간을 정해 놓고 책을 읽으십시오. 책 속에 길이 있다. 길이 없다고 헤매는 사람의 공통점은 책을 읽지 않는데 있다. 지혜가 가득한 책을 소화 시키십시오. 하루에 30분씩 독서 시간을 만들어 보십시오. 바쁜 사람이라 해도 30분 시간을 내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닙니다. 하루에 30분씩 독서 시간을 만들어 보십시오. 학교에서는 점수를 더 받기 위해 공부하지만, 사회에서는 살아 남기위해 책을 읽어야 합니다. 5. 웃는 훈련을 반복하십시오. 최후에 웃는 자가 승리자입니다. 그렇다면 웃는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지름길도 웃음입니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은 그냥 생긴 말이 아닙니다. 웃다 보면 즐거워지고 즐거워지면 일이 술술 풀립니다. 사람은 웃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긍정적으로 바뀝니다. 웃고 웃자. 그러면 웃을 일이 생겨납니다. 6. 말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말이란 의사소통을 위해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자기가 자신에게 말을 할 수 있고, 절대자인 신과도 대화할 수 있다. 해야 할 말과 해서는 안될 말을 분간하는 방법을 깨우치십시오. 나의 입에서 나오는 대로 뱉는 것은 공해입니다. 상대방을 즐겁고 기쁘게 해주는 말. 힘이 생기도록 하는 말을 연습해보자. 그것이 말 잘하는 법입니다. 7. 하루 한가지씩 좋은 일을 하십시오. 인생에는 연장전이 없다. 그러나 살아온 발자취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습니다. 하루에 크건 작건 좋은 일을 하십시오. 그것이 자신의 삶을 빛나게 할 뿐 아니라 사람답게 사는 일입니다. 좋은 일 하는 사람의 얼굴은 아름답게 빛납니다. 마음에 행복이 가득 차기 때문입니다. 8. 자신을 해방시키십시오. 어떤 어려움이라도 마음을 열고 밀고 나가면 해결됩니다. 어렵다, 안 된다, 힘 든다고 하지 마십시오. 굳게 닫혀진 자신의 마음을 활짝 열어보십시오. 마음을 열면 행복이 들어옵니다. 자신의 마음을 열어 놓으면 너와 내가 아니라. 모두가 하나가 되어 기쁨 가득한 세상을 만들게 됩니다. 마음을 밝혀라. 그리고 자신을 해방시키십시오. 9. 사랑을 업그레이드 시키십시오.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아무나 사랑을 합니다. 말이 사랑이지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처음에 뜨거웠던 사랑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츰 퇴색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사랑을 뜨거운 용광로처럼 업그레이드 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의 사랑을 불살라 버리십시오. 그리고 새로운 사랑으로 신장 개업하십시오. 10. 매일 매일 점검하십시오. 생각하는 사람만이 살아 남습니다. 생각 없이 사는 것은 삶이 아니라 생존일 뿐입니다. 이제 자신을 점검해 보십시오. 인생의 흑자와 적자를 보살피지 않으면 내일을 기약 수가 없다. 저녁에 그냥 잠자리에 들지 마십시오. 자신의 하루를 점검한 다음 눈을 감으십시오. 나날이 향상하고 발전하십시오. 천국에서 쓰는 7 가지 말 1. “미안해요” 2. “괜찮아요” 3. “좋아요” 4. “잘 했어요” 5. “훌륭해요” 6. “고마워요” 7. “사랑해요” 가정 형편이 그렇게 좋지 않은 아이가 있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가족을 버리고 떠났고, 낙심한 어머니 역시 아이를 이모에게 맡기고는 떠나버렸다. 이렇게 모두 떠나는 상황에서 아이의 자존감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무슨 일을 해도 실패할 것은 뻔해.’ 라는 생각이 늘 가득했다고 합니다. 이모 집에 살고 있을 때, 어느 날 어머니가 찾아와 기타를 선물해주었다. 이때부터 아이는 기타에 빠져 살았다. 그러나 이모는 너무 기타에만 빠져 있는 것 같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기타만 쳐서 절대로 큰돈 못 번다.” 그러나 아이는 이모의 말에 굴하지 않고 열심히 기타를 쳤고, 구성원을 구성해서 시대를 휩쓰는 그룹이 되었다. 그가 바로 비틀스의 존 레넌입니다. 주변에서 이런 말을 많이 듣지 않습니까? “그것은 너무 어려워. 그만 포기해.” 이런 사회적 통념에 기가 죽고 그래서 포기하는 사람이 많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떤 변화도 이루어질 수가 없다. 나 자신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힘을 주는 말입니까? 힘을 빼는 말입니까? 무엇보다 힘을 빼는 말에 굴복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불길한 새가 날아와 울음을 운다고 해서 그것에 마음이 흔들리지 말라. 인생은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그대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에 따라 그대는 그 생각대로 변해간다. 그대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그대 쪽에서 만든 과장된 의미와 판단을 내리지 말라. 그런 것들은 원래는 있지도 않을 것들이다. 성급한 마음은 항상 어떤 결론에 도달하지 못해 안달한다.무지한 마음은 있지도 않은 의미와 해석을 일들에 갖다 붙인다. 불길한 새가 날아와 울음 울면 이렇게 생각하라.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징조를 좋은 의미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것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 나는 그것으로부터 배우고 성장하리라." 자신을 행운에 가득 찬 사람으로 여긴다면 그대는 삶에서 많은 행운을 만날 것. 그대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그대를 위한 좋은 의미가 담겨 있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그대의 몫이다. 에픽테투스의 <삶의 기술> 중에서 축복을 빕니다. 모든 즐거움은 잠깐입니다. 모든 고통은 잠깐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하느님만이 영원하십니다. 이제 우리들도 영원하신 하느님의 은총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고백의 기도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은총과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나를 사랑해주었으면 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해주는 것입니다.” - 워런 버핏 - ♡2267회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1월 1일(시편 91편~ )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힘써 조심할 일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생각, 특히 남보다 ‘내가 낫다’ 는 생각입니다. ‘내가 더 고참이다.’, ‘내가 더 연장이다’, ‘일은 내가 더 했는데 나보다 더 저 사람을 알아주는군.’ 하는 따위의 말은 물론 그런 생각조차 마음에 두는 일이 절대로 없도록 하십시오.” 《사랑하는 것은》사랑하는 것은 창을 여는 것.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 오래오래 홀로 우는 것. 사랑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슬픈 것. 그러나 "사랑합니다." 풀꽃처럼 작은 이 한 마디에 녹슬고 사나운 철문도 삐걱 열리고 길고 긴 장벽도 눈 녹듯 스러지고 온 대지에 따스한 봄이 옵니다. 사랑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강한 것.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댔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4-27)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가 호수 한가운데에서 맞바람과 파도에 시달리는 모습은, 예수님과 떨어져 있는 제자들의 심리 상태를, 즉 불안감과 두려움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다. 아니면,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지 않고 자기들의 힘으로만 고난과 역경을 물리치려고 애를 쓰는 인간들의 헛된 노력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 그들 쪽으로 가셨다.”라는 말은, 제자들을 도와주려고 가셨다는 뜻입니다. ‘새벽’ 은 어둠이 물러나기 시작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부족하기만 했던 제자들의 믿음이 조금씩 발전하게 되는 것을 상징하는 시간일 수 있다.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가신 것은 타고 갈 배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에게 당신의 권능을 과시하려고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 우리에게는 그 일이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지만, 예수님께서 어떤 특별한 의도로 물 위를 걸으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자들이 호수 위를 걸어서 다가오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고, 또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정체불명의 무엇인가를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소리를 질러댄 것도 잘못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 상황에서는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물론 믿음이 부족해서 유령 따위를 무서워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무서워한 것이 아니라, ‘유령처럼 보이는 어떤 것’ 을 무서워했다. 그들은 왜 유령이라고 생각했을까? 어둠 속에서 자기들을 향해서 다가오는 그 ‘무엇’ 이 유령처럼 보였기 때문에 유령이라고 생각했을 것. 그렇다면 유령이라고 생각한 일 자체는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다.그들은 왜 그런 초자연적인 현상을 무서워했을까? 첫째, 그들은 ‘그 무엇’ 의 정체를 알 수 없어서 무서워했을 것. 정체를 확실하게 알면 무섭지 않거나 덜 무서웠을 텐데, ‘몰라서’ 무서워한 것. 둘째,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이 ‘그 무엇’ 에 비해서 보잘것없고 허약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의식했기 때문일 것. 물 위를 걷는 능력은, 인간은 가질 수 없는 능력입니다. 그 능력이 무서우니까 무서워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예수님 말씀은 제자들을 꾸짖는 말씀이 아니라, 그들을 위로하는 말씀이고, 그들에게 믿음과 용기를 주기 위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을 유령이라고 생각한 것도, 또 유령을 무서워한 것도 문제 삼지 않으셨다. ‘용기를 내어라.’ 라는 말씀은, 병자들을 고쳐 주실 때 병자에게 하신 말씀으로 자주 사용된 말씀으로서(마태 9,2.22),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다. “나다.” 라는 말씀은, “나는 유령이 아니라 너희의 스승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 라는 말씀에서 온 것으로 해석됩니다. “나는 있는 나다.” 는 “나는 존재 자체다.” 라는 뜻이고 ‘야훼’ 를 풀이한 말입니다. 그래서 “나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나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다.” 로 해석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주로 하느님의 권능이 나타날 때 사용되는 말씀입니다.(루카 1,13.30) 이 세 말씀을 합해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성과 권능을 암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믿음과 용기를 주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하셨다. 제자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두려움에서는 해방되었겠지만, 예수님에 대해서는 더욱 놀라게 되었을 것. 그런 점에서 이 이야기는 마태오복음 8장에 있는 다음 말에 연결됩니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 8,27) “도대체 이분은 어떤 분이시기에 물 위를 걸으실 수 있는가?” 이 의문의 답은 33절에 있다.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태 14,33) 제자들은 예수님의 권능을 직접 목격하고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며 자연도 지배하시는 주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믿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걷고 싶어 한 것은(마태 14,28), 예수님께 좀 더 가까이 가고 싶어 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호기심 때문일 수도 있고, 특별한 능력에 대한 욕심 때문일 수도 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라는 예수님 말씀은(마태 14,31), 베드로 사도가 믿음이 부족해서 물에 빠진 것을 꾸짖으신 말씀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걷고 싶어 한 것 자체를 꾸짖으신 말씀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사실 그 상황에서는 베드로 사도가 물 위를 걸어갈 이유도,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와 예수님 부활 후의 이야기를 비교해 볼 수 있다.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루카 24,36-37) 제자들은 갑자기 나타나신 예수님을 알아보긴 했는데, 부활하셨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고, 예수님께서 유령이 되어서 나타나셨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를 뜻에 따라 다시 정리하면, “그들은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해서 몹시 무서워했고 두려워했다.”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는 것을, 즉 부활하셨다는 것을 제자들이 믿을 수 있도록,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 주시면서 만져 보라고 하셨습니다."(루카 24,39-40) 아무리 존경하고 사랑하는 분이라도 유령으로 나타나면 무서운 것일까? 어떻든 이 이야기에서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무서워한 것이 아니라 유령을 무서워했는데, 그것은 그들의 믿음이 아직 부족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랬던 제자들이었는데, 성령 강림 후에는 유령 같은 것은 무서워하지 않는, 세상에서 제일 용감한 선교사들이 되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우리들이 주님 앞에 머물면서 ‘기쁘게 기도하고, 감사하면서 행복하게 지내십시오. 그리고 아프지 말고 살아가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흘러가버리는 지금이 시간을 만들고, 머물러 있는 지금이 영원을 만든다.” - 보에티우스 - |
♡2268회 끝까지 가려면 하늘의 뜻인지 구별해야 합니다. [면담자료 : 매일묵상]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1월 2일(시편 121편~ ) 헬렌겔러는 “나는 나의 역경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역경 때문에 나 자신과 나의 일과 그리고 나의 하느님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눈과 귀와 혀를 빼앗겼지만 내 영혼을 잃지 않았기에 그 모든 것을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알아보는 지혜》사람의 마음은 험하기가 산천보다 심하고, 알기는 하늘보다 더 어렵다. 하늘에는 그래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과 아침, 저녁의 구별이 있지만, 사람은 꾸미는 얼굴과 깊은 감정 때문에 알기가 어렵다. 외모는 진실한 듯하면서도 마음은 교활한 사람이 있고, 겉은 어른다운 듯하면서도 속은 못된 사람이 있으며, 겉은 원만한 듯하면서도 속은 강직한 사람이 있고, 겉은 건실한 듯하면서도 속은 나태한 사람이 있으며, 겉은 너그러운 듯하면서도 속은 조급한 사람이 있다. 그러므로 군자는 사람을 쓸 때에 1. 먼 곳에 심부름을 시켜 그 충성스러움을 보고, 2. 가까이 두고 써서 그 공경을 본다. 3. 번거로운 일을 시켜 그 재능을 보고, 4. 뜻밖의 질문을 던져 그 지혜를 본다. 5. 급한 약속을 하여 그 신용을 보고, 6. 재물을 맡겨 그 사용하는 마음을 통해 그 어짐을 본다, 7. 위급한 일을 알려 그 절개를 보고, 8. 술에 취하게 하여 그 절도를 보며, 9. 남녀를 섞여 있게 하여 그 이성에 대한 자세를 살핀다. 이 아홉 가지 결과를 종합해서 놓고 보면 사람을 알아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공자- 오늘 말씀의 주제는 ‘결혼’ 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율법을 들어 이유가 합당하다면 아내를 버려도 좋은 것 아니냐고 예수님께 따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는 하느님이 맺어주셔서 한 몸이기 때문에 감히 인간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은 그러면 어째서 모세는 아내를 버려도 좋다는 율법을 주었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때는 이스라엘이 어린아이와 같아서 그것에 맞는 음식을 준 것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은 절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도 왜 결국엔 끝까지 가야 할까요? 왜냐하면, 결혼은 끝까지 가는 것이 성공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은 행복이 목적이 아니라 결혼생활이 끝날 때 변한 나의 모습이 목적입니다. 내가 누군가와 끝까지 함께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은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한 것.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2014)란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며 많은 사람이 감동하였다. 분명 그 두 분 어르신들이 살아오면서 많이 다투기도 하고, 많은 실수도 서로 주고받았을 것. 그러나 끝까지 갔기에 많은 분으로부터 박수를 받게 된 것. ‘삼국지’ 에서 삼국을 통일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유비도 죽고, 조조도 죽고 손권도 죽었다. 세 나라의 건국 영웅들이 다 죽었지만, 중국은 통일되지 못했다. 그런데 유비의 ‘제갈량’ 과 조조의 ‘사마천’ 만이 마지막 두 영웅으로 살아남았다. 그런데 사마천은 항상 제갈량에게 패했다. 당대 제갈량을 이길 영웅은 없었다. 하지만 결국 중국을 통일한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제갈량과 겨루어 승리다운 승리를 해 본 적이 없는 사마천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래 살았기 때문입니다. 워런 버핏도 성공의 비결을 물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오래 살았기 때문입니다.” 왠지 우스갯소리처럼 들리면서도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한 가지 길로 끝까지 가면 반드시 어떠한 형태든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중도에 포기하면 죽도 밥도 안 됩니다. 여기서 끝까지 가는 사람들의 중요한 특징이 하나 나옵니다. 바로 끝까지 견디면 반드시 열매가 맺힌다는 믿음이 있다는 것. 이 사람들은 중도에 실패하는 것을 겁내지 않습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납니다. 일등이 목표가 아니라 끝까지 뛰어 결승점을 통과하면 그것이 이기는 것임을 압니다. 사마의와 제갈량의 전투에서 사마의는 제갈량의 덫에 걸리지 않기 위해 시간만 끌고 있었다. 그러자 제갈량이 사마의의 마음을 흔들어놓기 위해 선물을 보냅니다. 그 비단으로 싼 상자 안에는 여인의 장신구와 옷이 들어있었다. 여자처럼 그러고 있지 말고 당당하게 한 판 붙자는 말이었다. 사마의는 평정심을 잃지 않고 그 상자를 들고 온 군사에게 제갈량의 안부를 물었다. 군사는 제갈량을 자랑하였다. 음식도 반밖에 안 드시고 잠도 제대로 주무시지 않으며 업무에 집중하고 계신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마의가 생각했다. "얼마 못 가겠군!" 결국, 천하의 제갈량은 54세에 과로로 사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중국통일의 주인공은 사마의가 되었다. 일단 시작했으면 끝까지 가야 합니다. 승리하는 것보다 끝까지 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라는 말이 딱 들어맞다. 그러나 끝까지 가는 것만이 좋다는 것을 안다면 게으를 수 있다. 열매는 맺히겠지만 볼품없을 수 있다. 좋은 성과를 얻지 못합니다. 가정생활을 엉망으로 하면서 끝까지 가기만을 고집한다면 그 결혼생활에서는 끝까지 견뎌낸 상대만 상을 받게 될 것. 여기서 빠져서 안 되는 것은 ‘소명’ 입니다. 이것 역시 믿음입니다. 바리사이들은 결혼의 주체가 자신이라 여겼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결혼의 주체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서 일을 맡기신 것이니, 당연히 끝까지 가야 하면서도 ‘잘’ 가야 합니다. 어머니가 심부름을 시켰는데 갔다 오기만 하면 성공이라고 여기고 다른 곳을 헤매다가 다음 날 들어온다면 비록 일은 했으나 칭찬을 듣기는 어려울 것. 따라서 어떠한 일을 하거나, 누구와 결혼하기 전에 반드시 그것이 ‘하느님의 뜻’ 인지, 나에게 맡겨진 ‘소명’ 인지 살펴야 합니다. 결혼하기 전에 반드시 하느님 앞에서 그 상대가 주님께서 선택하신 상대인지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확신이 있으면 결혼하고, 일단 결혼했으면 끝까지 가야 합니다. 사마의가 관직에 올라도 될 나이가 차자 조조가 그에게 벼슬을 주었다. 그러나 조조가 두려운 나머지 그 벼슬을 거부했다. 이는 북한에서 김정은이 내리는 관직을 거부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사마의는 조조의 성격을 알기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 여긴 것. 그리고 중풍 병자 흉내를 냈다. 이를 믿지 않은 조조는 사마의를 염탐하게 시켰고 사마의는 몇 년 동안이나 중풍 병자 흉내를 내며 살았다. 그러나 조조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마의도 이 정도면 하늘의 뜻이라 여겨 결국 받아들입니다. 사마의는 이후 몇 대의 조조 후손을 임금으로 모시며 통일의 주인공이 된 것. 끝까지 가려면 하늘의 뜻인지 구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늘의 뜻임을 확신한다면 끝까지 갈 수 있다. 결과도 좋다. 중도에 포기하는 일도 없다. 시련을 잘 견뎌냅니다. ‘끝까지 가는 게 이기는 것이다.’, ‘이 일을 맡기신 분이 주님이시다.’ 이 두 믿음만 있다면 끝까지 가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나에게 이루어진 모든 일들이 하느님과 연관되어 있음을 깨달으시기를 내 안에 은총과 자비가 흐르는 하느님의 햇살이 비추고 있음을 느끼는 충만한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사랑은 두 사람이 마주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보는 것이다.” - 프랑스 작가 생텍쥐베리 - |
♡2269회 ‘만남’ 은 믿음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기도와 묵상은 예수님을 만나는 좋은 - 방법입니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1월 3일(잠언 1장~ ) 예기는 ''옥도 닦지 않으면 그릇이 될 수 없다.'' 《듣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어라》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말고 불리하다고 비굴하지 말라. 자기가 아는 대로 진실만을 말하여 주고받는 말마다 악(惡)을 막아 듣는 이에게 기쁨을 주어라. 무엇을 들었다고 쉽게 행동하지 말고 그것이 사실인지 깊이 생각하여이치(理致)가 명확할 때 과감히 행동하라. 지나치게 인색하지 말고 성내거나 미워하지 말라.이기심을 채우고자 정의를 등지지 말고 원망을 원망으로 갚지 말라. 위험에 직면하여 두려워 말고 이익을 위해 남을 모함하지 말라. 객기(客氣)부려 만용(蠻勇)하지 말고 허약하여 비겁하지 말라. 사나우면 남들이 꺼려하고 나약하면 남이 업신여기나니 사나움과 나약함을 버려 지혜롭게 중도(中道)를 지켜라. 태산(泰山)같은 자부심을 갖고 누운 풀처럼 자기를 낮추어라. 역경(逆境)을 참아 이겨내고 형편이 잘 풀릴 때를 조심하라. 재물(財物)을 오물(汚物)처럼 보고 터지는 분노를 잘 다스려라. 때(時)와 처지(處地)를 살필 줄 알고 부귀(富貴)와 쇠망(衰亡)이 교차(交叉)함을 알라. 우리 교회는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나타나엘’ 을 바르톨로메오 사도로 생각하고 있다. 나타나엘은 율법학자였고, 평소에 성경을 공부하면서 메시아를 갈망하고 있었다.(요한 1,48) 예수님께서는 ‘진실한 사람’ 이라고 나타나엘을 칭찬하셨다.(요한 1,47) 나타나엘은 필립보가 예수님에 관해서 증언하기 전까지는 예수님을 모르고 있었다. 필립보가 메시아 강생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는 나타나엘에게 가서 메시아를 만났다고(메시아께서 세상에 오셨다고) 증언한 일은, 동방 박사들에게 별이 나타난 일과 같고, 또 필립보가 그를 예수님께 데리고 간 일은, 그 별이 동방 박사들을 예수님께 인도한 일과 같다. 바오로 사도는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 2,15)라고 신자들에게 당부합니다. 별처럼 빛난다는 말은, 세상 사람들을 ‘구원의 길’ 로 인도하는 등불과 같은 일을(선교활동을) 한다는 뜻입니다. 별처럼 빛나는 일은 ‘온 삶’ 이 신앙의 빛으로 가득 차서 빛나는 것. 말만 잘해서는 선교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삶 전체가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빛이 나야 합니다.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요한 1,45-46)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 은 ‘메시아’ 입니다. 그래서 필립보의 말은,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입니다.(요한 1,41)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사람들은 그분을 나자렛 출신이며 요셉의 아들인 예수로만 알고 있지만, 그분은 틀림없이 메시아이신 분이오.” 라는 뜻입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라는 나타나엘의 말은, “성경에 나자렛에서 메시아가 나온다는 예언은 없소.” 만일에 예수님이 ‘나자렛 출신’이 아니라 ‘베들레헴 태생’으로 알려졌다면,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랐을 것.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예언이 있기 때문입니다.(미카 5,1) “와서 보시오.” 예수님을 만나라는 권고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본 다음에 판단하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믿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관한 지식을 쌓아서 예수님을 ‘아는 것’ 과 예수님을 ‘만나서 믿는 것’ 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만남’ 은 믿음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기도와 묵상은 예수님을 만나는 좋은 방법입니다. 물론 마태오복음 8장에 나오는 ‘백인대장’ 과 마르코복음 10장에 나오는 ‘바르티매오’ 처럼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는데 소문만 듣고서 믿은 경우도 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요한 7,27-28)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다. 알고 있다는 그 생각이 믿음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된 것. 예수님은 ‘믿음의 대상’ 인 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완전하게 아는 방법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모르는 것.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 1,47-49)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참된 신앙인’ 이고 ‘진실한 사람’ 이라고 나타나엘을 칭찬하시는 말씀입니다.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라는 나타나엘의 말은, 예수님과 나타나엘이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는 “메시아를 만났다고 필립보가 너에게 증언하기 전에” 입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당시의 율법학자들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 공부를 하던 관습에서 온 표현인데, 여기서는 “나는 메시아를 갈망하는 너의 심정을 전부터 알고 있었고, 네가 성경을 공부하면서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즉 “너의 심정과 생활을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언제부터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을 알고 계셨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가 어떤 신앙인인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계셨고, 그를 제자로 삼으시려고 작정하고 계셨다. 따라서 겉으로는 필립보가 그를 예수님께 인도한 상황이지만, 실제로는 예수님께서 그를 제자로 부르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타나엘은 예수님의 권능에 압도되어서 곧바로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 믿음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자기가 기다리던 메시아라는 것을 믿은 것. ‘하느님의 아드님, 이스라엘의 임금님’ 은 ‘메시아’ 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0-51)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는 “내가 너의 심정과 생활을 꿰뚫어 보았다고 해서” 입니다. “그보다 더 큰 일” 은 51절의 “천사들이 예수님 위에서 오르내리는 일” 입니다. 여기서 천사들이 예수님 위에서 오르내린다는 말은, 천사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섬긴다는 뜻이고, 이 말은, 당신의 신성(神性)을 암시하신 말씀, 즉 당신이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그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당신을 하느님으로 믿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들에게 이루어진 모든 일이 하느님과 연관되어 있기에,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가 우리들 안에 흐르고 있음을 감사하며 행복한 우리들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 성공은 결과이지 목적은 아니다.'' - 플로베르 - |
♡2270회 어떻게 믿음을 증가시킬 수 있을까요? 가장 좋은 방법이 감사일기를 쓰는 것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1월 4일(잠언 21장~ ) 오리게네스는 “나의 가르침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으로 인하여 현세의 삶을 경멸하여 진리를 위해 죽음과 맞서기까지 하는 사람은 그 신심으로 인하여 죽음 안에서 자기 생명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 때문에 자기 생명을 잃는 이런 사람은 오히려 생명을 구하고 지키게 될 것이다.”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보이지 않아도 볼수있는것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 아침 분주히 하루를 여는 사람들과 초록으로 무성한 나무의 싱그러움 속에 잠깨는 작은 새들의 문안 인사가 사랑스럽다. 희망을 그린 하루가 소박한 행복으로 채워질 것들을 예감하면서 그대들의 하루를 축복합니다. 밤사이 아무도 모르게 대문에 붙여 놓은 전단지를 살짝 떼어 내며 힘들었을 그 누군가의 손길을 생각해 보았다. 나만 힘들다고 생각하면 나만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그만큼 작아지고 가슴에 담을 수 있는 이야기와 행복 또한 초라한 누더기 입고 선 추운 겨울벌판 같을 것. 하루는 자신을 위하여 불평을 거두고 마음을 다스려 사랑과 희망의 시선으로 감사의 조건들을 바라 보셨으면 합니다. 긍정적인 사고를 갖고 환경에 굴함 없이 간직한 꿈을 향하여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향하는 길에서 지쳐 멈춰서기도 하겠지만 그 길이 올바른 길이라면 결코 물러서지 않는 의지로 또다시 걸음을 떼어 놓을 수 있는 용기를 내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따뜻한 사랑의 불씨를 끄지 않은 한 닥친 역경과 시련마저도 그 불꽃을 강하게 피우는 마른 장작에 불과 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이미 알고 있다. 우리는 저마다 개성과 인격을 지닌 단 하나 뿐인 소중한 사람임을 잊지 말고 희망을 그려 가시는 너그럽고 자랑스러운 하루였으면 합니다. ‘긍정의 힘’ 이라는 식의 책이나 강연을 한 번쯤은 읽어보거나 들어보았을 것. 정말 삶을 긍정하는 사람들은 하늘 일마다 잘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부정적인 사람은 항상 그 사람이 자신에 대해 예언하는 대로 좋지 못한 삶을 삽니다. 예를 들어 한국전 당시 중공군에게 포로가 된 미국 병사들과 터키 병사들의 차이입니다. 중공군은 포로가 탈출을 감행하는 것을 막기 위해 끊임없이 그들의 사기를 꺾는 교육을 했다. 탈출은 불가능하니 결국 순응하라는 것. 이 교육에 넘어간 미국 병사들은 대부분 수용소에서 죽고 본국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무기력하게 살다 죽었다. 그러나 한국에 올 때부터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교육을 받고 중공군의 교육에 저항하여 끊임없이 긍정 마인드를 키운 터키 군사들은 거의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정말 긍정 마인드가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도 긍정적인데 왜 삶은 이 모양이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다 잘 될 거야!’ 를 끊임없이 되뇌지만 잘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진짜 긍정적인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긍정에 무언가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제임스 본드 스톡데일’ 이라는 사람은 미 해군 장교로서 베트남 전쟁 당시 8년간의 포로 생활을 끝내고도 건강하게 돌아와 미국 부통령 후보에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당시 베트남 하노이 수용소는 그야말로 지옥과 같은 곳이었다. 그런 극도의 고통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참으로 긍정적인 사람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톡데일은 그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놓습니다. 수용소에서 죽어간 이들이 누구였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집으로 갈 수 있을 거야.’ 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다시 절망에 빠져 희망을 잃어갔다. 그리고 몇 년이 안 되어 결국 다 죽어갔다. 도대체 왜 어떤 이들은 긍정 마인드가 좋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죽는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우선 긍정 마인드가 좋다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다 잘 될 것이라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잘 안 될 때를 대비해야 합니다. 그러는 데 필요한 것이 ‘믿음’ 입니다. 이방 여인은 심하게 마귀에 든 딸아이를 살려달라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들은 체도 안 하십니다. 심지어 자녀에게 줄 빵을 개에게 줄 수 없다고 모질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인은 자녀가 먹고 남은 부스러기라도 달라고 청합니다. 어째서 이 여인은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믿음’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것을 넘어섭니다. 그 존재가 ‘좋으신 분’ 임을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알았지만 그분을 좋은 분으로 여기지 못한 천사는 사탄이 되었다. 아담과 하와도 그분이 자비로운 분임을 믿지 못했기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주님께서 좋은 분임을 믿을 때에야 지금의 고난이나 청한 것이 허락되지 않았을 때도 멈추지 않을 수 있다. 믿음은 모든 상황에 ‘의미’ 를 부여합니다. 내가 청한 것이 들어지지 않았을 때, 그것도 의미가 있다고 여기게 합니다. 그래서 버텨낼 수 있고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하느님을 모진 분으로 여기면 조금 청하다 맙니다. 그러면 어떻게 믿음을 증가시킬 수 있을까요? 가장 좋은 방법이 감사일기를 쓰는 것입니다. 감사일기의 대명사가 오프라 윈프리입니다. 사생아로 태어나 할머니 손에서 자랐고, 삼촌의 성폭행으로 14살의 나이에 미혼모가 되었다. 마약과 알코올에 빠져 청소년기를 보내다 감옥생활까지 해야 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중 한 명이 되고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었다. 그렇게 삶이 변한 이유를 오프라 윈프리는 감사일기 덕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감사하면 주님을 좋은 분으로 믿게 됩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긍정이 망상이 되지 않을 수 있다. 김춘수의 ‘꽃’ 에서 보듯, ‘의미’ 는 타인으로부터 주어지는 것. 삶에 벌어지는 모든 것들에 의미가 있으려면 그것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분을 만나야 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 없이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긍정하려 하면 지쳐 쓰러집니다. 이방 여인처럼 주님께 대한 긍정이 먼저 있다면 아무리 힘든 난관도 다 헤쳐나갑니다. 세상에서 긍정 마인드로 성공했다는 사람들은 이미 어느 수준의 믿음에 도달한 사람들입니다. 그 믿음의 대상이 어떤 신이건 간에 그 사람은 그 신을 좋은 분으로 믿고 있는 것. 그러니까 그 긍정의 힘이 모든 난관과 실패를 극복하게 하여 결국 성공에 이르게 하는 것.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키웁시다. 그리고 감사의 표현을 합시다. 그리고 모든 것에 긍정합시다. 그러면 나의 긍정이 기필코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이 가을 속에, 매 순간 우리들의 영혼과 육신이 지내는 너무 행복한 하루를 주님께 올리면서 우리들이 원하는 소망이 이루어지는 행운의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싶다면 결코 십자가 없는 그분을 찾지 마시오.” - 십자가의 성 요한 - |
♡2271회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말씀은 사랑이요 자비이고 용서의 말씀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1월 5일(집회서 1장~ ) 채드 서그는 ''잎이 다 질 때까지 나무를 사랑하세요. 그리고 내년에 다시 자라날 때까지 기운을 북돋아 주세요.'' 《먼길 돌아온 인생의 노을》인생은 먼길을 돌면서 중년 이후 외모는 변해갑니다. 삼단복부 이중턱 구부정해지는 허리등 그리고 흰머리 빛나는 대머리 또 늘어진 피부 자꾸 자꾸 처지는 눈꺼풀 등 그래도 말년을 앞에 둔 이들이 다른 사람에게 향기를 나눠 줄 수 있는 것은 德이 있기 때문입니다. 덕은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쌓이는 것. 사랑이 인간을 구제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움과 절망이 인간을 구제할 수도 있다. 노년의 연륜은 미움과 절망까지도 품을 수 있다. 성실하게 살면 이해도 지식도 사리 분별력도 자신의 나이만큼 쌓입니다. 그런 것들이 쌓여 후덕한 인품이 완성됩니다. 이 세상에 신도 악마도 없는 단지 인간 그 자체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젊은 날의 만용조차 둥글 둥글해지고 인간을 보는 눈은 따스해 집니다. 이러한 덕목을 갖추려면 스스로에게 엄격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견고한 자갈을 물리고 삶의 속도를 조절해야 합니다. 시간은 인간에게 성실할 것을 요구합니다. 잉여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정신적, 육체적 노력 없이는 시간을 차지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 시간은 두렵고 잔혹한 것. 그리고 마음 비우고 미완성에 감사합시다. 노년 이후에는 '진격' 보다는 '철수' 를 준비해야 합니다. 물러설 때를 늘 염두에 두며 살아야 합니다. 오래 살게 되면 얻는 것도 있겠지만 잃어버리는 것이 더 많다. 따라서 '잃어버림' 을 준비합시다. 그것은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라는 말이 아니라 순수하게 잃어버림을 받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주변의 사람도 재물도 그리고 의욕도 자신을 떠나갑니다. 이것이 노년 이후의 숙명입니다. 추한 것 비참한 것에서도 가치 있는 인생을 발견해 내는 것이 중년입니다. 여자든 남자든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외양이 아닌 그 사람의 어딘가에서 빛나고 있는 정신 혹은 존재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일 수 있는 때가 좋다. 만일 내가 없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비참하게 생각될지 모르나 그 누가 없어도 잘 돌아가게 되므로 우리는 안도 할 수 있다. 인간은 조금씩 비우다 결국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때 세상을 뜨는게 하늘의 뜻입니다. ‘로마의 휴일, 티파니에서 아침을’ 이라는 영화의 주인공인 오드리 헵번은 20세기 아이콘으로, 세기의 미녀로 그리고 유명인의 부와 명예 대신 굶주리는 난민 아이를 품에 안고 적극적인 사회 활동을 펼치던 소셜테이너의 선구자로서 우리의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다. 그녀가 아들에게 남긴 유언「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면」을 인용하렵니다.『아름다운 입술을 갖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보아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어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으면 하루에 한 번 어린이가 손가락으로 너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으면 결코 너 자신이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해서 걸어라. 사람들은 상처로부터 치유되어야 하며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워져야 하고 병으로부터 회복되어야 하고 무지함으로부터 교화되어야 하며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결코 누구도 버려서는 안 된다. 기억하라! 만약 내가 도움을 주는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세상의 악에 대해서 대답하신 말씀입니다. 많은 경우에 악에 대해서 하느님이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침묵 중에 계신 것 같다. 그러나 하느님은 말씀하시면서 응답하셨다. 그 응답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말씀은 사랑이요 자비이고 용서의 말씀입니다. 또한 그것은 심판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면서 심판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내가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구원됩니다. 만일 내가 그것을 거부한다면 저는 단죄 받게 되는데 이것은 그분에 의한 단죄가 아니라 나 자신이 내리는 단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랑하시며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2013년 3월 29일 콜로세오 십자가의 길에서 행한 연설) 우리의 삶은 때로 평등하지 않을 때가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보상이 주어지지 않을 때도 있다. 실패를 거듭할 수도 있다. 때로 모욕과 수치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종을 치지 말라고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은 결코 종을 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주어진 길을 갔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 사람들을 사랑하셨다. 새로운 권위를 지니셨고, 기존의 질서와 틀을 허물었던 예수님은 늘 당당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을 꼼짝 못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사람일까요? 그렇다. 믿음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성모님이십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믿으셨고, 예수님께 포도주를 청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때가 아니었지만 자신을 믿고 부탁한 성모님의 청을 들어주셨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행한 첫 번째 표징이었다. 두 번째 사람은 백인대장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하인을 고쳐주기 위해서 길을 떠나는데 백인대장이 이렇게 말을 하였다. 저도 부하들에게 명령을 하면 부하들이 저의 말을 듣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하인이 곧 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말을 듣고 감동하였다. 어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도 그런 믿음을 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 세 번째는 가나안 여인이었다. 여인은 예수님께 청합니다. ‘강아지도 주인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말을 듣고 또 감동하셨다. 그리고 그 여인의 딸을 고쳐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믿음’ 을 강조하셨다. 그 믿음은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시작이고 출발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보이지 않는 보화를 마련하셨으니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시어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을 오롯이 사랑하여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참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가 믿는 그 분은 불가능함이 없으신 하느님이시다.” 라는 믿음을 마음에 품고, 십자가의 주님께 나아가 바라보며 “반드시 할 수 있다. 반드시 된다.” 라는 열정으로 고운님들이 바라고 원하시는 소망을 꼭 이루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땅을 보살피는 일을 잊는 것은 우리 자신을 잊은 것이나 다름없다.'' - 마하트마 간디 - |
♡2272회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1월 6일(집회서 25장~ )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명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은 나약한 변명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가능한 것만을 권하시고 우리가 피나는 노력으로 더 높고 위대한 경지에 오르도록 도와주십니다.” 《지금 시작하고, 지금 사랑하자》할 일이 생각나거든 지금 하십시오. 오늘의 하늘은 맑지만 내일은 구름이 보일지 모릅니다. 어제는 이미 당신 것이 아니니 지금 하십시오. 친절한 말 한마디가 생각나거든 지금 하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곁에 있지 않습니다. 사랑의 말이 있었다면 지금 하십시오. 미소를 짓고 싶거든 지금 웃어 주십시오. 친구가 떠나기 전에 장미가 피고 가슴이 설렐 때 지금 당신의 미소를 주십시오. 불러야 할 노래가 있다면 지금 부르십시오. 당신의 해가 저물면 노래 부르기에 너무 늦습니다. 당신의 노래를 지금 부르십시오. 지금 결단하고, 지금 일어서십시오. 사랑은 오직 지금 시작하고 지금 바치고 지금 헌신하는 것입니다. ‘위선(僞善)’ 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1)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을 받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해서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는’ 일만 열심히 하는 위선이 있다.(마태 6,1.5.16) 2)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 위선도 있다.(마태 23,3) 사람들은 위선자들의 말에 현혹되어서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실행도 잘하는 줄로 알 때가 많다. 3) ‘더 중요한 것’ 은 무시하고, ‘덜 중요한 것’ 만 열심히 하는 위선도 있다.(마태 23,23) 눈에 보이는 일이지만 덜 중요한 일이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더 중요한 일인 경우에,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만 판단하면서 위선자들이 더 중요한 일은 무시한다는 것을 모를 때가 많다. 4) ‘큰일’ 은 억지로 하고, ‘작은 일’ 은 대충 하는 것도 위선입니다.(루카 16,9-12) 5) ‘겉’ 은 깨끗하게 보이는데, ‘속’ 은 전혀 그렇지 않은 위선도 있다.(마태 23,25-28) 사람들은 위선자들의 겉모습만 보고 속도 그런 줄로만 압니다. 위선은 하느님과 사람들을 속이려고 하는 ‘큰 죄’ 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기 자신마저도 속이려고 할 때가 있다. 그런데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지만 하느님을 속이지는 못합니다. 하느님은 ‘숨은 일도 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마태 6,4.6.18) 위선은 하느님을 속이려고 하는 신성모독죄일 뿐만 아니라, 종교와 신앙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진실하고 성실한 신앙인들’ 에게 큰 상처를 주는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들의 위선을 대단히 엄하게 꾸짖으셨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마태 23,23-24) 이 말씀은, 실제로는 ‘덜 중요한 일들’ 만 실행하고 ‘더 중요한 일들’ 은 안 하는 위선자들이 ‘더 중요한 일들’ 도 잘하고 있는 척 하면서 하느님과 사람들을 속이려고 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십일조를 내는 일은 눈에 보이는 일이고,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실행하는 일은 눈에 안 보일 때가 많은 일이기 때문에, 보이는 일만 잘하고 보이지 않는 일은 안 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일도 잘하고 있는 척 하면서 하느님과 사람들을 속이려고 하는 위선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이라는 말씀 때문에, “혹시 예수님께서 위선자들이 십일조를 잘 내는 것은 인정하신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십일조 자체를 긍정하신 말씀이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십일조를 내는 일을 인정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위선자들이 더 중요한 일들을 실행하지 않는 것은 하기 싫어서 안 하거나, 또는 생색이 나지 않아서 안 하는 것. 따라서 그들이 덜 중요한 일들을 실행하는 것은 자기의 죄를 감추기 위한 위선일 뿐이고,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더 중요한 일들’ 을 잘한다면, ‘덜 중요한 일’ 은 안 해도 되는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만일에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도 위선자입니다.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따지지 말고 전부 다 똑같이 잘 지키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마태 5,19) 진실하고 성실한 신앙인은 더 중요한 일을 할 때에도, 또 덜 중요한 일을 할 때에도, 언제나 항상 변함없이 정성을 다 쏟아서 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마태 23,25-26)이 말씀에서, ‘잔과 접시’ 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자신들을 가리킵니다. “겉은 깨끗이 하지만” 이라는 말씀은, 겉으로만 거룩한 척 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다는 말씀은, 위선자들의 실제 생활은(또는 마음속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다는(전혀 거룩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탐욕’ 이라는 말에는 탐욕 외에도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한다는 뜻도 들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재물을 착취하고 약탈해서 방종하게(무절제하게) 살고 있다고 꾸짖으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진짜로 거룩한 사람인지, 겉으로 보기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 잘 모릅니다. 위선자들 자신들도 자기가 거룩한 사람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을 것. 이 말은, 그대로 우리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지금 나는 혹시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다른 사람인가? 같은 사람인가? 나는 겉과 속이 똑같은, 진실한 사람인가? 혹시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착각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꾸짖으시는 말씀이지만, 사실 사도단 안에도 배반자 유다라는 위선자가 있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요한 12,6) 배반자 유다의 위선은, 또 그의 탐욕은, 그가 예수님을 실제로 배반하기 전부터 이미 예수님에게서 멀어져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위선과 탐욕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길입니다.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라는 말씀은, 겉으로만 거룩한 척 하지 말고, 속에서부터 진짜로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훈계입니다. 진짜로 거룩한 사람은, 그 거룩함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2코린 2,15) “나는 거룩한 사람이다.” 라고 자기 입으로 말하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 아닙니다. 진짜로 거룩한 사람은 자기가 거룩한 사람인 줄을 모르고, 더욱더 자기를 갈고 닦는 일에 전념합니다. 우리들 곁에는 넘어져 쓰러져도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는 선하신 주님이 계시니, 오늘도 주님의 향기를 입고 은총으로 충만한 날을 보내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오늘이 네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고 살라'' - 로마의 위대한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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