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3회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1월 17일(호세아서 1장~ )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하느님께서는 단 한 번도 용서하시는 일에 소홀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도 용서를 구하는 일에 결코 소홀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은 결코 용서하시는 일에 지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용서하실 때 기억을 잃어버리시고, 우리의 죄를 잊어버리십니다.... 하느님께는 어떤 죄도 마지막이 아닙니다.” 《아내는 여자보다 아름답다.》눈이 오는 한 겨울에, 야근을 하고 돌아오는 당신의 퇴근 무렵에 따뜻한 붕어빵 한 봉지 사 들고 당신이 내리는 지하철역에서 서 있겠다. 아무 말 하지 않고도 당신의 피로한 어깨를 느끼겠다. 당신이 들어오는 당신의 집에 향내 나는 그런 집으로 만들겠다. 때로는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로, 때로는 보리차 끓이는 냄새로, 때로는 만개한 소국들의 향내로, 때로는 진한 Chanel의 향기로...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아도 당신이 늦게까지 불 켜놓은 당신의 방에서 담배연기 자욱해 하며 책을 볼 때, 나는 슬며시 레몬 넣은 홍차를 준비하겠다. 미모와 외모로서 당신 곁에 잠시 머무르는 여자로서가 아니라, 나는 당신의 가장 가까운 벗으로서... 있어도 없는 듯, 없으면 서운한 그런 맘 편한 얘기 털어 놓을 수 있는 그런 아내가 되겠다. 잠을 청하기 위해 불꺼놓은 보금자리, 대화하다가 동이 트는 것을 보아도 서로의 대화로 인해 풍성해진 우리 맘을 발견하겠다. 당신으로 인해 나를 빌어 태어난 아이가 장성해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당신으로 꼽는다면 나는 영광스럽게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하여도 행복하겠다. 너를... 사랑해서 미칠 거 같은 꼭 내꺼 로만 여겨지는 그런 아내가 아니라 아주 필요한 사람으로, 없어서는 안 되는 그런 공기 같은 아내가 되겠다. 그래서 행여, 내가 세상에 당신을 남겨두고 먼저 떠나는 일이 있어도 가슴 한 구석에 많이 자리 잡을 수 있는 그런 현명한 아내가 되겠다. 지혜 로와, 슬기 로와 당신의 앞길에 아주 밝은 헤드라이트 같은 불빛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호롱불처럼, 아니라면 반딧불처럼, 당신 가는 길에 빛을 비출 수 있는 그런 아내가 되겠다. 그래서 당신과 내가 흰서리 내린 인생의 마지막 길에서 '당신은 내게 정말 필요한 사람이었소. 당신을 만나 작지만 행복했었소.' 라는 말을 듣는, 그런 아내... 되겠다. 형제들과 함께 모여 ‘원장 직무 수행’ 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다. ‘살레시오 원장 매뉴얼’ 이란 책을 통독하다보니, 원장에게 요구되는 덕목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과중하던지, 합당한 원장 후보를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200여년전 돈보스코가 청소년 구원 사업에 헌신하기 위해 살레시오회를 막 창립하던 초창기 무렵의 일입니다. 1863년 돈보스코가 48세 되던 해, 첫번째 사업체였던 토리노 발도코 오라토리오가 넘쳐나는 아이들로 인해 과부하가 걸렸다. 돈보스코는 미라벨로라는 지역에 두번째 오라토리오를 만들었고, 그 오라토리오의 원장으로 애제자였던 미카엘 루아 신부를 임명했다. 당시 원장으로 임명된 그의 나이는 불과 26세였다. 돈보스코 입장에서 걱정이 많이 되었겠지요. 아직 젊고, 병약하며, 경험도 일천한 루아 신부의 어깨에 너무나 과중한 직무를 얹어준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지, 돈보스코는 그를 파견하면서, 친필 편지를 하나를 써서 건넸다. 원장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세하게 적었는데, 몇 구절을 소개하면 이렇다. ☞ 그 어떤 일 앞에서도 분노하지 마십시오. ☞ 원장의 고행은 부지런히 자신의 의무를 행하고, 타인이 주는 괴로움을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 경건하고 열성적이며, 주의를 집중하여 미사를 드리고 성무일도를 바치십시오. ☞ 매일 아침 묵상과 성체조배를 빠뜨리지 마십시오. ☞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보다 사랑받는 사람이 되도록 힘쓰십시오. 명령을 내리거나 훈계를 할 때는 늘 사랑과 인내로써 하십시오. ☞ 중대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는 언제나 잠깐이라도 하느님과 상의하십시오. 보고를 받을 때는, 끝까지 주의 깊게 들어보고, 판단을 내리기 전에는 잘 경청하고, 진위관계를 반드시 파악하십시오. 결국 원장은 명령하고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라 봉사하고 희생하는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원장은 첫째가 아니라 꼴찌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오 복음 20장 16절) 지금 이 세상에서 첫째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중요한 과제가 하나 있다. 눈만 뜨면 거듭 성찰하는 노력입니다. 말 한 마디를 할때, 행동 하나를 할 때도,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조심스럽게 행할 일입니다. 지금 첫째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유심히 돌아볼 일입니다. 지금 자신이 행하는 권위가 혹시라고 크게 변질되서 권력을 행사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이 권위중독증에 걸려있지는 않은지? 요즘 제일 조심해야 할 갑질을 행사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오늘 아무 것도 아닌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쥐꼬리만한 권위를 부여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기 위한 것. 따라서 지금 첫째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할 것. 성령의 음성을 실시간으로 듣기 위해, 더 자주 자신을 개방하고 깨어있어야 할 것. 지금 첫째로 살아가고 계시는 분들, 거듭 성찰하지 않고, 부단히 기도하지 않는다면, 머지 않아 이 세상에서 가장 초라하고 비참한 꼴찌로 전락하게 될 것. 하느님 앞에 가장 부끄러운 꼴찌로 추락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최선을 다하여 벌어 보물을 하늘에 쌓았고, 어려운 이들을 위해 넉넉히 베풀고 나누고자 했던 주님의 은총으로 불러 주심에 감사드리면서, 매 순간 우리들 삶의 마지막 날에 하느님 자비의 계산법으로 ‘모든 것이 은총이었다.’라고 고백하는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분심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집중하려고 노력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번거로워도 우리 안에 계십니다.” - 토마스 머튼 - |
♡2284회 “너희는 구원(해방)되었다. 내가 너희를 구원(해방)하였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1월 18일(요엘서 1장~ )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하느님 품 안에 들어가기까지는 늘 불안합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성인은 “비틀거리고 절면서 바른 길을 가는 것이, 편안히 서서 그릇된 길로 가는 것보다 낫다.” 《기다림》우리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삽니다. 기다림은 희망입니다. 기다림은 사랑입니다. 기다림은 곧 삶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메시아를 기다려왔고, 우리도 구세주를 기다렸다. 애타게 기다려 온 메시아, 그 구원의 메시아께서 고요한 이 밤에 소박하고 거룩하게 오셨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이 아름다운 순간을 기다려온 세상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최고의 표현으로 우리와 똑 같은 모습으로 이 땅을 찾아오셨다. 세상 모든 만물을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로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사람만은 손수 빚어 만드시고 숨을 불어 넣으시어 생명을 주신 그 하느님께서 우리처럼 세상에 오신 겁니다. 당신의 성향을 닮기를 한 없이 바라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다려 주십니다. 인간에 대한 희망으로, 인간에 대한 극진한 사랑으로 기다려 주십니다. 당신께 마음을 돌리고 당신을 바라보아 주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려 주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숨이 다하는 날까지, 그 순간까지 기다리며 살 겁니다. 무엇인가 희망하며, 누군가를 사랑하며, 그렇게 기다리며 살 겁니다. 마침내 이 세상의 끝자락에 죽음을 기다리며 희망을 놓지 않고 사랑을 잃지 않고 그렇게 마지막까지 삶의아름다운 마무리를 희망하며 그 마지막에 곁에 있는 이들을 사랑하며, 사랑하며 영혼이 육신을 벗고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그 순간까지 기다리는 것이 삶입니다. 기다려 주시는 그 분께로 돌아가는 순간까지 기다림의 끈을 놓지 않고 사는 것이 삶이기에 기다림은 곧 희망이며, 또 하나의 사랑이며, 살아 숨 쉬는 이유이며, 삶의 시작이며 마지막입니다. 예수님은 한 마디 말씀만으로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이들을 살리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시고, 바람과 파도를 고요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나는 너의 죄를 용서한다.)라고 말씀하시면(루카 5,20), 그 사람은 곧바로 용서를 받은 상태가 되고, 또 어떤 사람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면(루카 23,43), 그 사람은 그날 중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은 먼 훗날에나 이루어질 일에 관한 소식도 아니고, 어디 먼 곳에서 이루어지는 일에 관한 소식도 아니고, ‘지금, 이곳에서 시작된’ 일에 관한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와 구원에 관한 복음을 선포하신 순간, 하느님 나라와 구원이 시작되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예수님께서 이사야서의 예언을 읽으신 것은 복음을 선포하신 일이고, 메시아로서 온 세상에 해방을 선포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당신이 말씀을 선포하는 순간 그 말씀이 그대로 실현되기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당신의 선포는 말로만 그치는 선포가 아니라, 선포하는 순간 인간 세상에서 그대로 실현되는,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는 말씀을 전하는 일’ 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심으로써 우리의 구원이 시작되었고, 또 예수님께서 해방을 선포하심으로써 우리의 해방이 시작되었다. 그때 시작되었고, 종말의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예수님의 선포를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너희는 구원(해방)되었다. 내가 너희를 구원(해방)하였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신 분이고, 온갖 억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구원과 해방은 이미 시작되었는데, 그 구원과 해방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 일은 바로 우리 자신이 해야 할 일입니다. 자동적으로 우리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께서 주신 구원과 해방을 받아서 우리 것으로 만드는 노력입니다. 그런데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라는 것만 생각하고서 예수님을 안 믿었고, 예수님의 복음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자렛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이유로 예수님을 안 믿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구원과 해방의 열쇠를 주셨는데도, 받아야 할 열쇠는 보지 않고, 그 열쇠를 주신 분의 옷차림과 외모만 보고 의심하면서 안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구원과 해방을 거부한 것. 만일에 예수님이 로마제국 황제의 아들로 오셨다면, 또는 예루살렘 대사제의 아들로 오셨다면,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아주 많았을 것. 그러나 그것은 로마제국 황제라는, 또는 예루살렘 대사제라는 배경을 믿은 것일 뿐이고, 진정한 믿음은 아닙니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루카 4,23) 아마도 나자렛 사람들 가운데에는 예수님께 기적을 일으켜 보라고 요구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예수님을 믿으려는 마음 없이, 기적을 통해서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해 보라고 요구한 것. 그들은 기적을 일으키면 믿겠다고 말했을 텐데,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셔도 트집을 잡으면서 다른 요구를 또 했을 것. 기적은 믿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은총이지,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믿게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4) “하느님을 안 믿던 이방인들도 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과 나를 믿기 시작했는데, 하느님을 믿는다는 너희는 왜 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가?”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환영’ 이라는 말은, 예언자가 전하는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신 것은 환영받기를 바라셔서가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사렙타의 과부’ 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 을 언급하신 것은(26-27절),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민족’이라는 특권의식과 선민의식에 사로잡혀서 자만심에 빠져 있는 유대인들을 꾸짖으신 것. 이스라엘이 특별히 선택된 민족이라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특권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선택된 민족이라면 선택된 민족답게 더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했어야 합니다. 이 말은, 오늘날의 신앙인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구원이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인이라면 신앙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화가 나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은(29절) 예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을 특별히 선택하신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부정하는 말씀도 아니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씀도 아닙니다. 회개하라고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충실한 신앙인들은 회개하라는 말씀을 들으면 더욱더 겸손하게 회개하려고 노력하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나에게는 죄가 없다.” 라고 주장하면서 화를 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어떤 손해를 보더라도 어떤 아픔을 겪더라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는 우리들이 되시기를, 또한 우리들 안에 영원한 생명이란 하느님의 은총이 충만하게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신앙이란 순종이 있을 때에만 참이다. 순종할 때에만 비로소 신앙은 신앙이 된다.” - 본 훼퍼 목사 - |
♡2285회 위기에서 자기 본성이 나옵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1월 19일(아모서 5장~ ) 십자가의 성 요한은 “사랑은 사랑하는 이들끼리 서로 닮아가서 상대방의 모습으로 바뀌기까지는 결코 완전한 것일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남을 기쁘게 해주는 삶》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오늘 한 사람이라도 기쁘게 해 주어야지 하는 생각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십시요. 햇빛은 누구에게나 친근감을 줍니다. 웃는 얼굴은 햇빛처럼 누구에게나 친근감을 주고 사랑을 받습니다. 인생을 즐겁게 살아가려면 먼저 찌푸린 얼굴을 거두고 웃는 얼굴을 만들어야 합니다. 명랑한 기분으로 생활하는 것이 육체와 정신을 위한 가장 좋은 건강법입니다. 값비싼 보약보다 명랑한 기분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 약효를 지니고 있다.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됩시다 중에서- 영적인 삶에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듯한 수직상승이 없다. 기도 생활 역시 힘 하나 안들이고 에스켈레이터 타고 올라가듯이 편안하게 올라갈 수가 없다. 오직 한 발 한발 오르막 계단을 이용해 밟고 올라가는 길밖에 없다. 오랫동안 지속된 깊은 영혼의 밤, 끔찍한 하느님 부재 체험, 지루한 자신과의 싸움이 데레사의 신앙 여정 안에 계속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데레사는 영혼의 무미건조함에 대해서도 거부하지 않았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아주 소중한 깨달음들을 얻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귀여워하시는 이들을 고생길로 이끄시고 많이 아끼실수록 많은 고생을 내리십니다.” “최고 단계의 완전성은 내적 위로나 고상한 황홀감이나 현시, 예언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뜻을 그분의 뜻에 합일시키고 그분의 뜻을 우리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뜻과 우리의 뜻을 동일시하는데서 출발합니다.” “여러분에게 청합니다. 여러분의 이성을 가지고 그분에 대해 생각하지 마십시오. 많은 개념들도 끄집어내지 마십시오. 대단하고 복잡한 명상도 하지 마십시오. 그분을 바라보는 것 외에 나는 아무것도 청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영혼의 성(城)깊은 곳에 있는 궁방으로 들어가는 거대한 은총의 문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알고 자신을 알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통과해야하는 문입니다. 좋은 벗과 함께 있기를 원하는 것, 하느님과 단둘이 우정을 나누기를 원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리고 데레사는 오늘도 영혼의 깊은 밤 속에 하느님 부재 체험을 겪으면서 지루한 영적 투쟁을 해나가는 우리에게 역사에 길이 남을 소중한 조언을 해주고 계십니다. “무엇으로도 마음을 흐트러트리지 말며 무엇에도 놀라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지나가나 하느님만은 변하지 않습니다. 인내는 모든 것을 성취합니다. 하느님만을 차지한 사람에게는 부족할 것이 없으니 하느님만으로 충분합니다.”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영혼의 어두운 밤, 하느님 부재 체험, 버림받은 느낌이 다가 올 때 마다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가 있다. 캄캄해도 희망하는 일입니다. 언젠가 이 어둠이 걷히고 밝은 대낮이 다가오는 것을 확신하는 일입니다. 지금 이 순간 그저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앞길이 막막해도 우선 내 발에 묻은 진흙을 털어내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로 내 등 뒤에서 나를 떠받히고 계심을 확신하는 일입니다. ‘삽질하다’ 라는 말이 있다. 삽으로 땅을 파거나 흙을 떠내는 것을 ‘삽질하다’ 라고 말하지만, 아마 다른 의미로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아실 것. 헛된 일을 한다는 의미로, 별 성과가 없이 삽으로 땅만 힘들게 팠다는 데서 유래하는 것. 두 번째 의미인 헛된 일을 의미하는 삽질을 참 많이 하는 우리가 아닐까요? 우리 역시 삽질을 참 많이 했다. 야구선수가 되겠다고 야구부에 들어갔던 적이 있고, 기타리스트가 되어 보겠다고 방학 내내 기타만 쳤던 기억이 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 바리스타 등등 새로운 것을 배우려고 노력했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새로운 것에 쏟아부은 돈과 노력을 생각하면 분명히 삽질했다. 그러나 정말로 삽질로 끝난 것일까요? 별 성과가 없는 것 같지만 분명히 재미있었다. 그리고 이 재미난 일을 하면서 재미난 인생을 만들기도 했다. 이 경험을 통해 이 분야에 대한 지식을 갖추게 된 것도 내 삶에 또 다른 의미가 되었다. 생각해 보면 어떤 것도 의미 없는 삽질은 없다. 실패에도 큰 의미가 있는 것처럼 의미를 찾아가는 삶 안에서 나의 소중한 삶을 만들어가는 것. 오늘 주님께서는 씨앗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땅에서 새 생명으로 싹이 터, 본디 그것을 낳은 식물의 본성을 드러낸다는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실제로 당신의 몸으로 그 모습을 보여주셨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교회가 무수한 밀알로 싹이 터서 성체라는 생명의 빵으로 구워졌으며, 그 빵을 받아 모시는 우리 안에서 몇 곱으로 늘어났다. 죽음 자체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음을 교회의 역사를 보면 알 수가 있다. 죽음으로 이제까지의 모든 일이 의미 없음으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이 생명을 잃고 얻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리스어에서 ‘생명’ 이라는 낱말은 영혼을 가리킵니다.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는 옳은 방법과 그른 방법이 있다. 우리가 죄 안에서 자기 영혼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그른 방법이고, 하느님의 모습 안에 있는 영혼을 사랑한다면 제대로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결국, 자신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삶, 지금 이 순간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섬김의 길은 우리를 영광의 길로 이끌어줍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 ‘삽질’ 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세상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 ‘삽질’ 이 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영광을 드러내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까요?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고스톱을 치다 보면 상대방의 성격을 알 수 있다고 말하더군요. 그런데 고스톱보다 더 정확하게 사람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함께 등산을 가보라고 하더군요. 등산을 통해 그 사람의 본질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등산의 어려움 속에서도 남들을 위해 얼마나 배려하는지를 보고, 또 중간에 포기하는지 끝까지 가는지를 보고, 어렵고 힘들수록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부정적인 말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도 봐야 한다고 합니다. 결국, 위기에서 자기 본성이 나옵니다. 그래서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하나 봅니다. 내 본성을 통해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 위기를 피하지 않고, 오히려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본성을 더욱더 성장시킬 수 있는 시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내 인생이 한 번인 것처럼, 미루어두고 실행에 옮기지 못한 일들 중에 쉬운 것부터 행동으로 옮기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우리들에게 도움이 되는 복된 은총을 살아가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오늘이 네 인생의 최초의 날이요 최후의 날이라고 생각하고 살라'' - 유대인의 지혜서 탈무드 - |
♡2286회 “쉬운 길을 놓아두고 왜 어려운 길을 가는가? 편한 길이 있는데도 왜 힘든 - 길로 가는가?”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1월 20일(요나서 1장~ ) 성 아우구스띠노는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 《용서를 흔들면 사랑이 보여요》남을 용서하지 못한 사람은 기도할 수 없다. 나를 용서하지 못한 사람은 웃을 수 없다. 남과 나를 용서하지 못한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 용서를 아는 사람만이 기도할 수 있고 웃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 용서 뒤에는 기쁨과 평화와 아름다움이 어깨동무를 하고 따라옵니다. -당신은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산마루 아침 노을을 타고 갈대밭 사잇길을 지나 당신은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지난 밤 내내 내린 비에 제대로 길도 나지 않은 궂은 산길을 따라 당신은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가녀린 목으로 당신을 기다리는 싱그러운 꽃들을 품에 안으시며 닿지 않는 키로 당신을 찾아 헤매던 나무들의 바람을 들판에 멈추게 하시고 당신은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임자 없는 산 하늘에 산새들을 불러 모으시고 자유를 한 아름씩 던져 주시며 온갖 시름으로 지친 천지에 한바탕 크게 웃음을 남기시는 당신은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신앙인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뒤따라 걸어가는 생활입니다. 다른 길은 없다. 그 길을 걸어가다 보면, 쉽고 편한 구간도 나오고, 어렵고 힘든 구간도 나옵니다. 어렵고 힘든 구간을 만나면, “정말 이 길이 맞나?” 라는 의심이 들기도 하고, “좀 더 쉽고 편한 길은 없나?” 라는 생각에 다른 길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신앙인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은, 예수님께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났을 때 그것을 참고 견디는 것은, 그 어렵고 힘든 일은 잠깐 동안 스쳐 지나가는 것일 뿐이고, 그것을 참고 견디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이고, 믿음은 그 생활을 끝까지 할 수 있는 힘이고, 사랑은 그 생활을 하는 방법입니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1-23) 예수님의 수난 당시에, 제자들과 신자들은 메시아이신 분께서 사람들 손에 붙잡혀서 고난을 받고 살해되었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한 말은, 당시의 제자들과 신자들의 심정을 잘 나타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다.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다.(루카 24,19-21)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힘’ 을 생각하면,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께 굴복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렇게 되기는 커녕 반대로 그들 손에 의해서 너무 허망하게 돌아가신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예수님께서 수난 예고 말씀을 하셨을 때 베드로 사도가 깜짝 놀라서 예수님을 말린 것도 같은 심정에서 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라는 말씀을 하셨다.(루카 24,26)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은 하나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먼저 믿으면 수난과 죽음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어떻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부활로 가는 한 과정일 뿐이고, 예수님의 지상 생애가 허망하게 끝나버린 일은 아닙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네 마음대로 판단하지 마라.”로 해석할 수 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목숨을 제물로 삼으신 것,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고, 그 일은 하느님의 계획에 의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셨는데, 베드로 사도는 자기가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가로막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의 존재 자체가 걸림돌이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 그의 행동이 걸림돌과 같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사탄아’ 라고 부르신 것은, 예수님을 가로막는 걸림돌은 모두 사탄과 같다는 뜻입니다. “내게서 물러가라.” 라는 말씀은 “나에게서 떠나라.” 가 아니라, “나의 뒤로 가라.”, 즉 “제자의 본분을 지켜라. 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십자가’ 가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은데, 이해되지 않는다는 그 생각부터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의 뒤를 제대로 따라갈 수 있다. 믿음이란 이해한 다음에 믿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되지 않아도 믿는 것.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일은 ‘믿음으로’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그 길 끝에서 영광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바로 그 믿음이 있다면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금 이 순간 지고 갈 수 있다. “자신을 버리고”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을 모두 버린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정말로 소중하게 여기고 아끼는 것이라도...... 처음에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겠다고 결심하는 일은, 내 의지로 내가 하는 일이지만, 일단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한 다음에는 나의 뜻과 의지를 버리고, 지금 이 순간 나의 판단도 버리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만으로 따라가야 합니다. 겟세마니에서 예수님께서 바치신 기도,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루카 22,42)는 ‘자신을 버리는 일’ 의 모범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십자가의 길을 말리는 베드로 사도를 단호하게 물리치신 일도 ‘자신을 버리는 일’ 의 모범이 됩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일은, 일부러 사서 고생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편하고 쉬운 길을 찾고 싶은 소망은 지금 이 순간 버려야 합니다. 그런 소망 자체는 악한 일이 아니지만, 사탄의 유혹이 들어오는 통로가 됩니다. 사탄은 지금 이 순간 늘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쉬운 길을 놓아두고 왜 어려운 길을 가는가? 편한 길이 있는데도 왜 힘든 길로 가는가?” 수난 예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말린 베드로 사도의 경우에, 그가 한 말에는 “꼭 그 길로만 가야 합니까? 좀 더 편하고 쉬운 길은 없습니까?” 라는 뜻이 들어 있다. 베드로 사도 자신은 사심 없이 예수님을 위해서 한 말이었지만, 사탄이 유혹하면서 하는 말과 같기 때문에 예수님에게도 베드로 사도 자신에게도 위험한 말이었다. ‘편안해지고 싶은 소망’ 을 지금 이 순간 과감하게 버리는 것도 ‘자신을 버리는 일’ 에 속합니다. 우리들은 “지금 이 순간 살아 있음에 감사하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일을 최선을 다하여 어렵고 힘든 순간들이 변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은총 가득한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더 많이 기도할수록 기도는 그만큼 쉬워집니다. 기도가 쉬워지면 기도를 더 많이 하게 됩니다.” - 성녀 마더 데레사 - |
♡2287회 내가 하느님이라 고백하면 과연 교만일까요, 겸손일까요.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1월 21일(즈카르야 1장~ ) 탈무드는 ''이미 끝나버린 일을 후회하기보다는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라.''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인간의 말 한 마디의 힘은 생각보다 강합니다. 인간의 말 한 마디가 축복이 되기도 하고 저주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은 인간의 말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큰 능력이 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셨고 우리는 생명을 얻게 되었다.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 모두가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가 되어야 하겠다. 걸리버 여행기와 겸손의 4단계 사람 아이지만 늑대에게 자라서 늑대를 자기 아버지라 믿으면 그 아이는 본성이 사람일까요, 늑대일까요? 사람처럼 살까요, 늑대처럼 살까요? 늑대처럼 살 수밖에 없다. 사람의 본성이 아니라 늑대의 본성이 나오게 되는 것. 본성은 자기가 그 본성임을 믿을 때 나옵니다. 그 본성은 자신이 아버지를 누구라고 믿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사람이라고 믿고 살라는 말씀일까요, 아니면 하느님이라고 믿고 살라는 말씀일까요? 자신을 늑대라 믿으면 늑대처럼 살고, 사람이라 믿으면 사람처럼 살며 하느님이라 믿으면 하느님처럼 삽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이 될 수 있도록 당신 친히 성체를 통해 우리 안에 들어와 사십니다. 교리서는 “‘말씀’ 은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1,4)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다.” 라고 하며,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460)라고 가르칩니다. 본성에의 참여가 자신이 아버지의 본성을 가졌음을 믿을 때 발휘된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느님이라 믿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둔 하느님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많은 분이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이 될 수 있느냐며 그것은 교만이라고 비판하십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하느님만을 아버지라 믿으라고 하신 겸손해지는 방법에 관한 말씀입니다. 내가 하느님이라 고백하면 과연 교만일까요, 겸손일까요. 『걸리버 여행기』는 걸리버라는 영국 의사가 4개의 서로 다른 세상을 여행한 이야기입니다. 동화 같지만 실제로는 사회를 풍자해 출판 즉시 금서로 지정된 풍자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4개의 섬을 여행하면서 바뀌는 주인공의 시각을 그렸다. 이것이 겸손의 단계와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간단하게 책의 순서대로 설명해 드릴 테니까 내가 걸리버라고 생각하고 언제가 가장 겸손한 때였는지 그 순서를 맞춰보시기 바랍니다. 걸리버는 처음에 ‘소인국’ 에 표류합니다. 사람들이 다 자기 손가락만 합니다. 걸리버는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을 위해 봉사합니다. 그들 식량의 1000배가 넘는 음식을 먹으니 밥값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적들의 배가 공격해오자 50척이 넘는 배를 줄로 엮어서 끌고 옵니다. 그렇게 소인국의 영웅이 됩니다. 사회를 위한 공헌자가 된 것. 두 번째 표류지는 ‘거인국’ 입니다. 그는 거인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커스를 하며 지냅니다. 주인의 배를 채워주어야 자신도 먹고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위해 한없이 작아집니다. 자기를 좋아하는 공주를 위해 자신이 살던 나라는 비리와 폭력이 난무했다고 자아비판을 하며 그들을 높여줍니다. 조금은 비굴하지만 그래도 이웃을 높이는 단계입니다 . 세 번째 표류지는 떠다니는 섬, ‘라퓨타’ 가 있는 곳입니다. 하늘을 떠다니는 섬에는 정치인과 학자들만 살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다스리는 백성은 굶어 죽고 있는데도 학문과 문화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걸리버는 그들에게 분개합니다. 정치만 비판하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단계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섬은 거짓말을 모르고 평화를 사랑하는 말들이 사는 곳입니다. 말들의 섬입니다. 그런데 또한 야후라는 괴수들도 있다. 야후들은 인간과 비슷하지만 짐승의 손과 발을 가졌다. 너무 자기만 알아서 5마리에게 50인분의 음식을 주어도 그들은 서로 먹겠다고 싸우며 죽입니다. 사랑 지극한 말들과 그 괴수들 앞에서 자신이 그 괴수 중 하나였음을 깨닫습니다. 말처럼 살려고 네 발로 걷고 말의 목소리도 흉내 냅니다. 모습은 괴수지만 말들처럼 될 수 있다고 믿은 것. 자, 결정하셨습니까? 우선 겸손과 가장 거리가 먼 섬은 어디일까요? 걸리버가 겸손의 길을 시작하지 않았을 단계입니다. 바로 세 번째 하늘을 나는 ‘라퓨타’ 섬입니다. 걸리버는 정치인들은 비판하면서 자신은 실제로 가난한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을 정치인들 비판하며 합리화하고 있었던 것. 이는 마치 이방인들처럼 겸손의 길로 들어서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것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요? ‘소인국’ 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고 믿는 단계입니다. 성경에서 바리사이들과 같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사람들을 돕지만, 그 가운데에서 사람들의 영광을 받아 자신만 커집니다. 겸손보다는 아직은 교만이 지배하는 단계입니다. 그다음 단계는 당연히 ‘거인국’ 에 갔을 때입니다. 이때는 이웃이 있으니 내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단계입니다. 따라서 이웃을 들어 높이기에 정신이 없다. 겸손하기 위해 자기 힘으로 자기는 작아지고 이웃은 크게 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단계입니다. 성경에서는 나자렛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이웃을 높여주려고는 하지만 예수님처럼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교만하다고 비판합니다. 사람이 겸손해져야지 어떻게 하느님이 될 수 있느냐고 따집니다. 아직 참 겸손의 길에 들어선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단계의 겸손은 ‘천국 백성이 사는 섬’ 입니다. 그들은 선택된 하느님 자녀라 여기고 그렇게 거짓 없이 평화롭게 살아갑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믿는 사람도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아드님인 예수님의 삶과 비교할 때 자신은 괴수와 다를 바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괴수 같은 사람들도 판단할 수 없다. 다만 그리스도처럼 될 수 있음을 믿고 그분이 사신 것처럼 살려고 노력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본성을 입은 하느님 자녀임을 알게 된다면 이 단계에 오릅니다. 자신이 하느님이라 믿으면 자신을 그리스도와 비교하게 되어 한없이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베드로가 인간이라고만 믿었다면 어떻게 물 위를 걸어볼 생각을 했겠습니까? 예수님이 하느님이라 물 위를 걷는데, 자신도 할 수 있다고 물 위로 뛰어내리는 것.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배반하며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물에 빠졌다가 걸었다가 하면서도 끊임없이 나도 하느님처럼 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을 때 가장 겸손해집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은 당신 신성에 우리를 참여시키시려고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으며, 인간을 신으로 만들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460) 이것이 구원의 핵심교리입니다. 인성에 참여한다는 것은 인간이 된다는 말이고, 신성에 참여한다는 말은 하느님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인간이라 믿어야 인성에 참여하는 것이고, 하느님이라 믿어야 신성에 참여하게 됩니다. 하느님 신성에 참여하여 신이 되었다고 믿는다면 이는 마치 인간인 것을 알았으면서도 두 발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처지를 인식하는 아기처럼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되는 것입니다. 우리들 안에 언제나 행복하고 감탄할 만한 일 들을 찾는 마음으로 작은 행복을 소복하게 담아내는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당신이 동의하지 않으면 누구도 당신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할 수 없다.” -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 |
♡2289회 ''하느님 앞에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1월 23일(마르코 1장~ ) 테르툴리아누스는 “주님의 기도는 참으로 복음 전체를 요약한 것이다.” 《꿈은 희망을 낳는다.》산다는 것은 꿈을 꾸는 것. 현명하다는 것은 아름답게 꿈을 꾸는 것. 산다는 것은 꿈이 있다는 것이요. 꿈이 있다는 것은 희망이 있다는 것. 희망이 있다는 것은 이상이 있다는 것이요, 비전을 지닌다는 것. 비전을 지닌다는 것은 인생의 목표가 있다는 것. 꿈을 상실한 사람은 새가 두 날개를 잃은 것과 같다. 비록 힘없는 하찮은 존재라 하더라도 꿈을 가질 때 얼굴은 밝아지고 생동감이 흐르며 눈에는 광채가 생기고 발걸음은 활기를 띠고 태도는 씩씩해 지는 것. 지금 이 순간 꿈이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고, 꿈꾸는 자가 인생을 멋있게 사는 사람이다. 지금 이 순간 꿈이 있는 사람이 참 인생을 아는 인생의 멋을 아는 사람이다. 꿈이 있는 사람이 인생을 사는 듯이 살고, 아름다운 발자취를 후세에 남기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실러의 <꿈은 희망을 낳는다> 중에서] 하느님의 지속적인 은총과 자비 안에서 행복하고 충만한 신앙생활을 꿈꾼다면 가장 밑바닥에 기본적으로 ‘쫙~’ 깔고 시작해야 되는 것이 바로 ‘용서’ 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용서가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지를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아주 강경한 어조로 용서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성경 안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 을 의미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일흔일곱은 ‘완전 중의 완전’ 을 뜻합니다. 그러니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 는 예수님의 말씀은 용서를 할 때 적당이 용서할 것이 아니라 완전히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한두 번, 열 번 스무 번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끝도 없이 용서하라, 틈만 나면 용서하라, 용서를 습관화, 생활화하라는 말씀입니다. 삶을 돌아보니 밥 먹듯이 습관적으로 죄를 짓고 상처를 주고받는 우리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중요한 과제 한 가지가 있군요. 삼시세끼 밥 먹듯이 습관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용서를 하는 것. 더 나아가서 용서하고 말고 고민할 것이 아니라 몸에 밴 오랜 습관처럼, 호흡처럼 용서하라는 것. 용서를 내 삶의 모토처럼 여기고 무조건 용서하라는 것. 정작 우리가 매일 매순간 직면하게 되는 현실은 어디 그런가요? 평생 씻지 못할 모욕, 깊은 상처를 안긴 그 사람을 어떻게 그리 쉽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내 소중한 인생에 맵디매운 고춧가루를 뿌린 사람, 내 사랑하는 가족에게 큰 해를 끼친 그, 그러나 절대로 용서를 구하지 않는 그를 어떻게 습관처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용서에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용서에 앞선 마음의 정리가 요구됩니다. 때로 합당한 처벌도 필요합니다. 더욱 중요한 측면이 있다. 진정한 용서, 습관적인 용서를 위해서는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지금 이 순간 성령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성모님의 위로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결국 참된 용서를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 열렬한 기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 인간은 너무나 부족하고 나약하기에 진정으로 누군가를 용서하기가 힘겹습니다. 하느님께서 지금 이 순간 함께 하실 때, 용서가 가능해집니다.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용서가 불가능하지만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그 어렵던 용서가 시작됩니다. 하느님 앞에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Jane Frences de Chantal)기념일' 강론입니다. 기구한 운명, 원치 않았던 고통의 순간은 다시 한 번 삶을 재구성하라는 초대입니다! 400여년 전인 1600년대 이미 제2차바티칸공의회의 열린 영성을 앞당겨 살아가셨던 두 탁월한 성인·성녀가 있었으니,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1567~1622)와 성녀 요안나 드 샹탈 수녀(1572~1641)입니다. 당시 사람들의 머릿 속에 성인(聖人)이 되는 길은 무척이나 어렵고 좁은 길로 인식되고 있었다. 성화 여정은 하루 온종일 깊은 관상 기도에 전념하는 수도자들의 전유물로 여겼다. 성덕의 길은 세상의 쾌락을 뒤로한 금욕주의자들, 탁월한 영성가나 고위 성직자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와 요안나는 “그게 무슨 얼토당토 않은 괘변입니까? 성인의 길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활짝 열려있습니다. 왕은 왕궁에서, 농부는 밭에서, 군인은 망루 위에서, 각자의 역할에 충실함을 통해 누구든 성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라고 외치며, 성덕의 보편성을 강조했다. 사실 요안나의 경우, 당시의 잣대라면 절대로 수도생활을 꿈꿀 수없었다. 성화의 길로도 나아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일찌감치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었다. 6명이나 되는 자녀까지 낳았다. 오랜 세월 한 가정의 어머니요 한 남자의 아내로 살았다. 그런데 기구하게도 남편 바롱 크리스토퍼 드 샹탈 남작이 불의의 사고로 큰 부상을 입었고, 며칠만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부부간의 금슬이 무척이나 좋았었기에, 요안나가 당시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식음을 전폐하고 그저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요안나는 한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요안나가 33세 되던 해 그녀는 친정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디종에 갔었는데, 거기서 당대 유명한 설교가이나 살아있는 성인이라 불리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의 강론을 듣게 된 것. 따뜻하고 매력적인 성품에, 수려한 외모, 깊은 감동과 위로를 주는 명강론 앞에 요안나는 완전히 매료되었다. 한 마디로 뿅 가버렸다. 이분이야말로 내 미래(특히 영적인)를 책임져 줄 분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요안나는 겸손하면서도 간절하게 영적 지도를 청했고,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는 기꺼이 응답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의 탁월한 영적 지도와 자상한 배려에 힘입어, 요안나는 남편을 죽게 만든 사람도 기꺼이 용서했다. 더 나아가서 그의 딸 세례식 때 대모를 서주었다. 그렇게 그녀는 성화의 길로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고, 나중에 그녀의 성덕은 하루가 다르게 일취월장했다. 마침내 요안나는 세상 사람들의 편견을 뒤로 하고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의 도움에 힘입어 거룩한 과부들로 이루어진 방문 수녀회(Congregation of the Visitation of Holy Mary)를 설립하였다. 그녀는 새로운 수도회의 초대 총장 수녀로서 큰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녀가 살아생전 기회 닿는대로 설립한 수녀회 분원수는 76개에 달했다. 요안나의 기구하면서도 독특한 성소 여정은 오늘 우리에게 큰 깨달음 하나를 선물로 전해주고 있다. 어찌보면 그녀의 인생을 참으로 기구했다. 한 남자의 아내요, 6명이나 되는 자녀들의 어머니로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가던 그녀에게 남편의 사고사라는 엄청난 충격이 다가왔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평생 울고불고, 탄식하고 원망하며 지냈을 것. 요안나는 즉시 잠시 일그러진 자신의 삶을 재구성하고, 새롭게 마음을 무장하고, 성화의 길이라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 과정에서 단순하고 겸손함 자세로 영적 지도자에게 모든 것을 의탁했다. 그 결과 지금 요안나는 교회 안에서 빛나는 큰 별이 되었다. 오늘 우리도 자주 기구한 운명과 마주합니다. 수시로 전혀 원치 않았던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 순간은 어쩌면 다시 한 번 자신의 삶을 재구성하라는 초대입니다. 다시 한 번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라는 요청입니다. 우리들 마음 안에 하느님의 말씀으로, 예수님의 몸과 피로 채우면서 기쁘고 행복하게 하느님 나라 잔치 초대에 잘 준비하는 은총의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박해와 모욕을 당할 때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없다” - 성 요한 비안네 - |
♡2290회 권위라는 것은 봉사를 위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1월 24일(루카 1장~ ) 돈보스코 성인은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제 우리 혀를 하느님께 봉헌했으니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닙니다. 형제를 다치게 하는 말, 형제 가슴에 비수를 던지는 말은 더 이상 하지 말도록 합시다. 우리 혀는 이제 봉헌된 혀이니 매일 주님께 찬미 노래를 드립시다. 앞으로는 우리 혀로 거룩한 말씀만을 선포합시다. 격려와 위로의 말만을 사용합시다." 《인생을 위한 기도》남자는 마음으로 늙고 여자는 얼굴로 늙는다. 꽃 같은 인품의 향기를 지니고 넉넉한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언제나 청춘의 봄 날로 의욕이 솟아 활기가 넘치는 인생을 젊게 살아가게 하소서. 우러난 욕심 모두 몰아내고 언제나 스스로 평온한 마음 지니며 자기 인생을 사랑하며 살게 하소서. 지나간 과거는 모두 아름답게 여기고 앞으로 오는 미래의 시간표마다 아름다운 행복의 꿈을 그려 놓고 인생의 즐거움이 넘치게 하소서. 여기 저기 퍼지는 웃음소리가 영원의 소리가 되게 하소서. 자신이 살아오면서 남긴 징표를 고이 접어 감사한 마음을 안고 나머지 삶도 더 아름다운 마음 지니며 큰 기쁨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무조건 마음으로 모두 나누어주어 아무 것도 마음에 지닌 것 없이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사는 마음의 부자로 여기며 살게 하소서.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에서 우러난 근심 없는 시간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그게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게 하소서. 아멘.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과 이에 따른 교회 전체에 대한 특별 ‘권한’ 이 주어지는 것으로 신약성서의 메시지를 총괄하는 듯한 장중한 모습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베드로가 고백한 그리스도는 ‘고통받는’ 메시아로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사명을 다할 것이며, 교회가 이제 존속하기 위해서는 봉사와 직무는 베드로 안에 언제나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권한의 이양에 대한 개념이 많이 들어있다. 그 중에도 ‘열쇠’ 라는 개념은 더 높은 사람에게서 받은 충만한 권한을 말한다. 이것이 예수께서 베드로를 ‘교회’ 라고 하는 당신의 ‘집’ 의 책임자로 세우신다는 의미로 베드로에게 그 의미를 적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마태16,13-20: 하늘나라의 열쇠를 너에게 주겠다. ‘그리스도론적' 관점 외에 '교회론적' 관점이 있다. '그리스도론적' 관점은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13절)에서 나타난다. 이 질문은 사람들의 생각을 알려는 것보다도 사도들이 당신의 '신비 에 깊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질문이다. '사람들' 의 말은 당신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5절)고 물으신다. 이때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라고 고백한다. 고백은 다른 두 공관복음의 고백과는 다르다. 다른 두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즉 메시아로만 고백하지만, 여기서는 '하느님의 아들' 로서도 고백하고 있다. 베드로를 통해서 더 완전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이 ‘믿는다는 것’ 은 순전히 이성의 힘으로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지성을 넘어서는 어떤 사실에 대해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다. 믿음이란 예수께서 말씀하시듯이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순수한 ‘선물’ 이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17절) 이 베드로의 고백은 단순히 개인적인 사실로서가 아니라, 교회에 항구히 바쳐져야 할 ‘봉사’ 의 상징적 표현이라는 것. 이 때문에 그리스도론적 내용이 교회론적 내용으로 이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가 비록 나약하지만 큰 책임을 맡기겠다고 선언하신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감히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8-19절)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 로 고백한 베드로를 당신 교회를 세울 주춧돌로 삼으신다. 주춧돌의 역할이 주춧돌만이 아니라, 결합하는 역할이라는 것이다. 베드로의 역할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 대한 유일한 믿음을 항상 새로이 제시하고 해석해줌으로써 하게 될 것. 예수께서는 “너는 베드로이다.”(18절) 라고 하시면서도 “세울 것이다.”(18절), “열쇠를 주겠다.”(19절) 라고 하신다. 이것은 베드로의 ‘봉사적 역할’이 영속적으로 계속되리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즉 계속해서 베드로와 같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고백함으로써 이 교회의 주춧돌의 역할을 할 사람이 항상 필요하다. 이러므로 인간의 구원 활동을 방해하는 모든 악의 세력들(죽음의 힘)도 교회를 ‘누르지’ 못할 것. 베드로의 믿음이 이 세상 끝날까지 교회를 지탱해 나갈 것이다. 이 믿음은 이제 여러 문화적 상황들과 접하면서 거기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마주 대해야 할 것. 여기에서 베드로는 주님께 대한 충만한 믿음으로 결정적인 가르침을 주어야 한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9절). ‘열쇠’ 라는 상징적 개념은 랍비적 형태의 표현으로 일정한 행동을 금하거나 허락하는 것을 권위 있게 선언하는 의미이다. 이것을 종교적 차원에서 본다면 이 표현은 공동체에서 제외하는 권한 내지 받아들여 주는 권한을 가리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받은 권한이 아니라,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전권대사’ 로서 행하는 모든 것을 ‘하늘에서’ 그대로 인정해준다는 사실이다. ‘베드로의 신비’ 는 여기서 유래하는 것.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들 안에는 그리스도의 현존 자체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이신 예수께 대한 유일하면서도 확고부동한 믿음을 우리 모두에게 선포하여 알려주시고 또한 해석해 주신다. 오직 믿음만이 이성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을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이게끔 해 준다. 이 때문에 사도 바오로는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계획에 찬미를 드리고 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그분께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로마 11,33-36). 베드로의 신앙 위에 예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고 권한을 주셨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과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권위라는 것은 봉사를 위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어느 위치에 있든지 우리는 베드로라는 주춧돌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우리도 그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또 진정으로 봉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으로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만드는 은총을 기도로써 청하며, 우리들이 바라는 주님의 은총과 축복의 길로 이끌어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행복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모든 불행을 살이살아 내는 것. 빛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온갖 어둠을 응시하는 것. - 니코스카잔차키스 - |
♡2291회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1월 25일(요한1장~ ) 교황 프란치스코, 삼종기도 (2015년 1월 25일)에서 "하느님은 인간이 되시면서 우리의 목마름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십니다. 그것은 물질적인 의미에서 목마름이 아니라 충만한 생명, 악과 죽음의 노예 상태에서 자유롭게 풀려나는 생명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또한 육화를 통해서 하느님은 한 인간, 나자렛의 예수 안에 당신의 목마름을 태우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을 목말라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의 마음과 우리 사랑에 목말라 하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목마름은 예수님 안에서 타오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마음 안에서 인간적 목마름과 신적 목마름이 만나게 됩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일치를 이루어야 하는 이 갈망은 이 목마름에 속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수난 전날 성자께서 성부께 드린 기도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 21)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모든 이들의 일치를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악마는 분열의 아비이고 항상 갈라놓고 항상 싸움을 일으키며 많은 악을 일으킵니다. 예수님의 이런 목마름이 또한 우리의 목마름이 되기를 바랍니다!" 《누군가 나를 위하여》누군가 나를 위하여 지금 기도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 기도가 나에게 스며들 수 있도록 나를 비워 둡니다. 누군가 나를 위하여 지금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 분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하여 사랑과 성실로 짠 손수건 한 장을 마음에 준비합니다. 누군가 나를 위하여 지금 내 이름을 부르고 있을 것입니다. 빨리 대답하기 위하여 나를 겸손하게 낮추고 마음의 귀를 활짝 열어 둡니다. 누군가 나를 위하여 지금 글을 쓰고 있을 것입니다. 그 분들의 글이 가슴에 와 닿도록 내 마음 밭을 부드럽게 갈아 둡니다. 누군가 나를 위하여 지금 가르침을 준비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분들의 정성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책상 앞의 의자를 바짝 당겨 앉습니다. 누군가 나를 위하여 지금 땀 흘리며 농사를 짓고 있을 것입니다. 그분들의 땀방울을 생각하며 나의 소박한 생활을 지켜 나갑니다. 누군가 나를 위하여 지금 꽃씨를 뿌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 꽃을 볼 때 내 마음에 아름다움이 피어나도록 마음의 눈을 밝혀 둡니다. 가끔씩 아주 어려운 부탁을 누군가에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청원은 죽기보다 싫지만 제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기에 몇 번이나 심호흡을 가다듬고 용기를 내어 어렵게 ,어렵게 부탁합니다. 어떤 경우, 단호하게, 그리고 일언지하에 거절당할 때도 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힘들겠네요.” 이런 말과 함께 거절당하면 그나마 괜찮습니다. “뭐라고요?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간땡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었네요!” “그게 어떤 부탁인지 알고나 하세요?” “지금 제 정신으로 그런 말씀하시는 겁니까?” 가나안 여인 역시 똑같은 체험을 하고 있다. 자신의 딸이 마귀에 걸려 끔찍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몹시 시달리고 있다’ 는 여인의 말을 통해, 그리고 처절하게도 간청하는 여인의 모습을 통해 딸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알 수 있다. 마귀에 시달리는 모습, 생각하기조차 싫은 모습입니다. 한 사람 안에 마귀가 활동하기 시작하면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집니다.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지고 사지가 뒤틀립니다. 몇 시간이고 발작이 계속됩니다. 입에서는 하느님을 모욕하고 인간을 저주하는 괴상한 말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두렵습니다. 그런 딸을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가나안 여인은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리고 간청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믿음을 테스트라도 하시려는 듯이 일부러 뜸을 들이십니다. 일부러 냉정한 모습으로 대하십니다. 묵묵부답으로 응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향해 이런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신다 해도 여인은 상관없다. 막무가내입니다. 여인은 길길이 뛰고 계속 소리를 지르면서 예수님을 따라옵니다. 있는 힘을 다해 딸의 치유를 간청합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하신 말씀은 꽤 모욕적인 언사였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가 그런 말씀을 들었다면 엄청 실망했을 것. 그런 말씀을 하신 예수님 앞에 크게 낙담하고 즉시 돌아서 집으로 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 심한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시 이방인들을 ‘개’ 라고 칭하는 습관이 있었고, 또 이 텍스트에서는 ‘개’ 라는 표현보다는 조금 부드럽게 ‘강아지’ 라고 부르고 계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친 표현이 분명했다. 그러나 가나안 여인은 오직 딸만 생각합니다. 그저 하루하루가 지옥인 딸만 치유된다면 자신은 개, 돼지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일념으로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주님, 그렇긴 합니다마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가나안 여인의 이 말은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예수님을 향한 투철한 믿음, 철저한 겸손이 기적을 불러옵니다.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믿음과 겸손의 사람이었던 가나안 여인은 백인대장과 함께 큰 칭송을 받습니다. 교부들은 가나안 여인에게서 성스런 교회의 상징을 보았다. 예로니모 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여인에게서 나는 교회의 겸손, 신앙, 인내를 봅니다. 자신의 딸의 치유를 확신하는 믿음, 되풀이되는 거절에도 단념하지 않고 계속 청하는 인내, 자신을 강아지와 똑같이 여기는 겸손...” “믿음이 깊은 영혼은 교활하고 힘센 원수인 악마를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다. 성 베드로는 악마에 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믿음으로 마음을 견고히 하고, 악마를 대적하라’고 하셨다. 결코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히브11,6)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세상을 이겨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간사한 마음을 다스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겠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겸손을 지닌 백인대장에게도 호의를 베풀어 주셨다. 그의 유명한 말이 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 백인대장은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지 않고 자기 마음에 모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 8,10)라고 하셨다. 이 여인의 겸손과 믿음을 우리도 청하여야 한다. 다 잊었노라. 그랬었구나. 그랬구나. 그럴 수도 있지. 지나간 일들의 회개 눈물은 사랑의 자양분입니다. 수많은 좌절 속에서 기도할 힘도 없을 때, 모두 날 버린 것 같고 일어설 힘이 없을 때, 주님은 당신의 자비와 사랑, 그리고 섭리로 우리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음을 믿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사랑은 이유를 묻지 않으며 이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존재에 있습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 성 베르나르도 - 복음: 마태 15,21-28 :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을 떠나 다른 민족들에게 가셨다. 그래서 소외된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다. 거기에서 한 여인이,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22절)라고 외친다.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을 떠나셨는데, 이 여인은 이방 민족들의 우상숭배와 하느님을 거스르는 삶의 방식을 버리고 예수님께 나왔다. 유대인들이 거부한 분을 이 여인은 믿음을 통해 고백한다. 이 여인은 이방 민족들의 어머니다. 이 여인은 신앙을 통해 예수님을 알았다. 이 여인은 이방 민족들인 딸을 위해 주님께 애원한다. 딸이 우상숭배와 죄로 길을 잃고 호되게 마귀가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못 들은 척하신다. 그것은 그 여자로 하여금 더욱 절실하게 소망하도록 만들고 그 겸손함을 칭찬하시기 위해서였다. 이 여인의 말을 잘 살펴보면, 그 여인은 이방민족이었지만, 유다교로 개종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 여인은 율법을 통해 주님을 알고 있었고, 주님을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고 부른다. 이 여인은 자기 자신을 위해 예수님께 청한 것이 아니라, 더러운 영들의 손아귀에 잡힌 이방민족들인 딸을 위해 도움을 청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신다. 그러자 제자들이 동정심이 생겨 예수님께 간청한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24절) 하고 답하신다. 예수님은 먼저 당신이 세상에 오심, 기적 그리고 당신 부활의 권능을 먼저 유대인들에게 드러내시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얻으시려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여인이 “저를 도와주십시오.”(25절)라고 청했을 때, 예수님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26절)고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 여인의 믿음은 대단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자녀”로 이방인들을 “강아지들”로 표현하셨지만, 여인은 곧바로 유대인을 “주인”이라고 한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27절)라고 말한다. 이 여인은 이렇게 자녀가 되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28절). 그리고 딸은 바로 그 시간에 나았다. 오늘 독서와 화답송 그리고 복음은 모두 도움을 청하는 우리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약속합니다. 먼저 예레미야 예언자가 전하는 주님의 신탁은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 가졌던 체험을 다시 하게 되리라 상상하면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떠오르게 합니다. 광야에서 누린 바 있던 하느님의 자애로 둘러싸인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제 안식처를 찾아 나섭니다.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 화답송도 독서에 이어지는 주님의 신탁으로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선포합니다.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주님은 우리를 지켜 주시리라.” 그런 다음 마태오 복음에서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지켜 주시는 착한 목자 예수님의 자애를 확인합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가나안 여인은 이민족이라는 출신의 약점을 넘어서 진정한 치유자이신 예수님께 간절히 청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처사에도 끈질긴 구애는 마귀 들린 그녀의 딸을 주님의 영원한 사랑으로 온전히 회복시킵니다. 하느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출신이나 병듦의 약점이나 약함이 아니라, 굳건한 믿음이라는 장점과 강함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화답송 그리고 복음을 묵상하며, 언제나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우리의 기도를 바오로 사도의 고백으로 대신하고 싶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2코린 12,9).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예수님께서 어떤 가나안 여자의 간청을 받아들여서 그 여자의 딸을 고쳐 주신 이야기를 해설하거나 강론할 때, 그 여자의 ‘믿음’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은데, 그 경우에 그 여자가 처음부터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잘못 해설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 여자의 간청이 아니라 예수님의 반응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이야기인데, 여자의 믿음이 단계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보여 주는 이야기, 또는 예수님께서 여자의 믿음을 단계적으로 끌어올리신 이야기입니다. 그 여자는 처음부터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도를 받아서 올바른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던 여자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여자의 ‘겸손’을 강조하는 해설도 많은데, 여자가 원래 겸손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지만, 이야기 속에서는 여자의 ‘겸손’은 ‘간절함’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질렀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마태 15,21-23) 예수님께서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거절’을 뜻합니다. 물론 그냥 거절은 아니고, 여자를 ‘믿음의 길’로 인도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로서, 거절처럼 보이는 반응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의 간청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신 것은, 여자가 믿음도 없이 마치 우상에게 비는 것처럼 청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티로와 시돈 지방’이라는 말과 ‘가나안 부인’이라는 말은 그 여자가 우상을 숭배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때로는 ‘침묵’이 예수님의 응답의 한 방식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기도에 아무 응답 없이 예수님께서 침묵을 지키시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때 우리는 자신의 기도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먼저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 때, 그 소문을 전해 준 사람으로부터 예수님을 그렇게 불러야 한다고 배웠을 것입니다. 여자의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다는 것은 실제로 마귀가 들렸다는 뜻일 수도 있고, 어떤 중병을 앓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라는 제자들의 말은, “시끄러우니까 저 여자를 쫓아버립시다.”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침묵을 단순하게 거절로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마태 15,24-25) 여기서 예수님 말씀은 두 번째 거절인데, “내가 주는 구원은, 구원받기를 바라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받을 수 있다.”로 해석됩니다. (‘이스라엘 집안’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 말은 유대교로 개종하라는 뜻도 아니고, 이스라엘로 귀화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은, 우선 먼저 ‘당신의 양’이 되라는 권고인데, 이 권고는 사실상 당신을 믿으라는 권고이고, 우상 숭배를 버리라는 권고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를 거부하면서,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그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여자는 예수님 말씀의 뜻을 알아들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여자의 말에는 “예수님을 믿겠습니다.”라는 뜻도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우상 숭배를 버리겠다고 다짐하는 결정적인 단계에 도달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마태 15,26-27) 여기서 예수님 말씀은 세 번째 거절인데, “하느님의 자녀들이 받는 은총을 받기를 바란다면 먼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라.”라는 뜻입니다. (우상 숭배를 완전히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라는 권고입니다.) ‘강아지들’은 우상 숭배자들을 뜻하는 ‘개들’이라는 말을 덜 심한 표현으로 바꾼 것입니다. 산상 설교에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마태 7,6)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교육과 준비 기간 없이 어떤 은총을 베풀어 준다면, 그들은 그 은총을 우상에게 소원을 빌어서 우연히 얻는 복과 구분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을 우상과 동일시하는 신성모독죄가 됩니다. 여기서 여자의 말은, 자신이 강아지라는 것을 인정하는 말이고, 그래서 앞으로는 자녀로서 살겠다고 다짐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제가 강아지로 살았음을 인정합니다. 앞으로는 자녀로서 살 테니까 우선 은총의 부스러기라도 주십시오. 하느님은 저처럼 아무것도 모르고서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던 사람도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여자는 예수님께서 인도하신 대로 잘 따라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간절함’이 계기가 되었지만, 어떻든 ‘믿음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마태 15,28) 여기서 예수님의 칭찬은, 당신이 인도하는 대로 여자가 잘 따라온 것에 대한 칭찬입니다. 그 여자가 원래부터 큰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예수님과 나눈 대화를 통해서 갑자기 큰 믿음을 갖게 된 것도 아닙니다. 여자는 이제 막 ‘믿음의 길’로 들어섰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칭찬은 ‘앞으로’ 흔들림 없이 신앙생활을 잘하라는 격려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여자의 딸이 나은 것은, 이 이야기에서는 부수적인 이야기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베풀어 주신 진짜 은총은 우상을 숭배했던 여자를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시켜 주신 일입니다.) 주님께서는“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를 도와주십시오”(마태 15,22.25) 하고 애원하는 여인의 간절한 바람과 원의에 대한 믿음을 보셨습니다. 우리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되고,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모든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뿌리를 내려야 하겠습니다. 뿌리가 깊어야 잎이 무성하듯 믿음의 뿌리가 깊은 만큼 풍성한 은총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
♡2292회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1월 26일(사도행전 1장~ ) 신학자인 헨리 나우웬 신부는 “당신 내면에 있는 어떤 것이 죽어가고 있으며 또 어떤 것이 새로 태어나고 있음은 명백하다. 당신은 주의를 집중하고 차분한 상태도 당신이 가진 최고의 직관에 복종해야 한다.” 《감사함을 잊고 있을때》주님, 하찮은 저에게도 감격의 순간들을 허락해 주심에 감사하게 하소서. 하루를 다시 주시는 것에, 아름다운 자연을 펼쳐주시는 것에, 이웃을 호젓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하시는 것에 뜨거이 감사하게 하시고, 또한 사랑과 용서라는 어려운 세계를 가까이에서 손잡아보게 하시는 것에 영원한 생명이라는 추상적 세계가 매우 구체적인 모습으로 다가오게 하시는 것에 눈물겨이 감사하게 하소서. 주님, 감사하는 마음에서 생겨난 생생한 평화를 이웃에게 나누어주게 하소서. 하느님께서 주신 평화의 그윽한 미소를 통해 세상에는 은밀히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이웃이 알게하시고, 평화의 간결한 말을 통해 인간의 삶에는 청결한 진실이 있음을 이웃이 알게 하시며, 평화의 투명한 침묵을 통해 인간의 영혼에는 신비한 음향이 있음을 이웃이 알게 하소서. 주님, 이 뜨겁고도 싱그런 평화가 식지 않도록 저로 하여금 늘 하느님을 생각하게 하소서. 하느님의 빛의 물결이 제 영혼에서 늘 출렁이면서 감사함의 바다가 되게 하소서. 아멘! ‘교회에 죄의 용서 권한이 있는가?’ 에 대해 말합니다. 죄인인 형제가 교회의 말까지 듣지 않으면 그를 이방인 취급하라고 합니다. 교회의 결정이 곧 하늘의 결정인 것. 이를 확증하시기 위해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죄의 용서의 권한인 ‘하늘 나라의 열쇠’ 가 교회에 있음을 천명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도 성령을 내어주시며 이 지상에서 사도들이 용서하면 용서받고 용서해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 죄의 용서의 권한의 근저에는 교회공동체의 결속력이 하느님의 ‘사랑’ 때문임을 말합니다. 모든 공동체가 사랑을 기반으로 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두려움으로 공동체를 모을 수도 있다. 사실 회사도 하나의 공동체라 한다면 그것은 돈이라는 힘 때문에 모인 공동체라 할 수 있다. 이는 공동체로 부르기보다는 ‘집단’ 으로 부르는 것이 나을 것. 오늘은 특별히 ‘삼국지’ 에서 두 공동체를 비교해보도록 하겠다. 어느 평화로운 한 마을에 느닷없이 군인들이 나타나 남자들을 끌어가서 목을 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죽은 남자들의 목을 수레에 달아 질질 끌고 다닙니다. 옆에 있던 대신이 장군에게 물어봅니다. “아니, 저 백성들을 왜 죽였습니까?” 장군은 말합니다. “심심해서!” 이 사람이 삼국지의 ‘동탁’ 입니다. 동탁은 이렇게 두려움을 기반으로 한나라를 장악한 인물입니다. 물론 그 나라가 평화로울 수는 없었다. 황건족과 같은 반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조조와 같이 그를 살해하려는 시도가 지속되었다. 이런 시도들이 번번이 실패한 이유는 동탁 옆에 있었던 호위무사 ‘여포’ 때문이었다. 동탁은 어떻게 죽게 될까요? 여포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당시 임금을 볼모로 잡은 동탁의 폭정을 보다 못한 왕윤이란 신하가 임금을 구해내기 위해 계략을 핍니다. 자신의 딸처럼 아끼는 ‘초선’ 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초선은 중국의 4대 미녀 중 한명입니다. 왕윤이 초선에게 말합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거라. 내 이제 너를 여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약속하고 동탁에게 바칠 생각이다. 네가 할 일은 저들 사이에서 이간질하여 여포가 동탁을 죽이도록 하는 것이다.” 초선은 잘 해냈고 여포는 자신의 여인을 빼앗은 동탁을 죽여버립니다. 두려움으로 뭉친 집단은 더 큰 두려움이 찾아오면 와해되기 십상입니다. 이와 상반되는 공동체를 만든 사람이 ‘유비’ 입니다. 유비는 귀족 출신이긴 했지만 가난하여 시골에서 돗자리를 짜며 하루하루 살아가던 사람이었다. 그는 장비와 관우와 힘을 합쳐 도적 떼로 변해버린 황건적을 토벌하는 의병이 됩니다. 그의 명성이 점점 커지자 동탁의 뒤를 이어 나라를 다스리게 된 조조가 그 싹을 잘라버리려 합니다. 도망만 다닐 수 없었던 유비는 전쟁의 신이라 불리게 될 ‘제갈공명’ 을 찾아갑니다. 제갈공명은 산 밑에서부터 걸어서 자신을 만나겠다고 세 번째 찾아오는 유비를 만나줍니다. 제갈공명을 얻게 된 유비는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제갈공명은 자신에게 그렇게 머리를 조아린 유비를 처음엔 잘 신뢰하지 못하다가 한 사건을 목격하게 됩니다. 유비가 자신의 아기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친 일이었다. 유비의 두 아내가 조조 군의 진영에 고립되어 있을 때 조자룡이 끝까지 찾아내어 아들을 구해온 것. 그러나 이 과정에서 조자룡은 상처를 입습니다. 유비는 아기를 집어 던지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까짓 어린 자식 하나 때문에 하마터면 내 큰 장수를 잃을뻔했구나!” 이에 조자룡은 깊은 절을 하며 이렇게 맹세합니다. “자룡은 이제 간과 뇌가 땅에 으깨어지기까지 주공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둘은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제갈공명도 이런 사람이라면 자신도 목숨을 바쳐도 될 것이라 믿게 됩니다. 시골 돗자리 장수였던 유비는 이렇게 사람을 모을 줄 알아, 조조의 위나라, 손권의 오나라와 함께 촉나라를 건국하게 됩니다. 유비는 관우를 살리기 위해서도 자기 목을 내어놓습니다. 처음부터 유비와 하나가 된 사람들은 유비의 사랑의 힘 때문에 모인 이들입니다. 그렇게 아들까지 집어던질 정도로 자신의 공동체를 사랑했다면 당연히 목숨도 아끼지 않을 것.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집어 던져 십자가에 매달으시며 교회라는 공동체를 모으셨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가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아드님의 목숨까지 내어주시며 모으신 이들을 위해 죄의 용서 권한을 주지 않으실 수 없다. 그래서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를 위해 아드님을 주셨다는 것은 ‘다’ 주셨다는 말입니다. 결속력이 사랑 기반인 공동체의 특징은 모든 것을 청할 수 있다는 것에 있다. 이것이 교회를 통한 죄 사함이 가능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사랑에 감동하여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조자룡의 이러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저의 간과 뇌가 땅에 으깨어질지라도 주님의 은혜에 보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눈빛에서, 입에서, 그리고 모든 것에서 오직 주님을 감동시켜, 우리들의 본당과 가정 그리고 우리들이 바라는 모든 일에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 함께 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모든 자동차에는 가격이 붙어 있지만, 삶에는 가격이 없다. - '호세 무히카' 우루과이 대통령 - |
♡2293회 다른 점을 찾고 비판하고 단죄하려고만 한다면, 우리의 구원은 그만큼 멀어질 - 수밖에 없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1월 27일(사도행전 18장~ ) 교부 실루스는 “모든 일이 당신의 생각에 가장 좋은 방향으로 되기를 바라지 말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되기를 바라라. 그러면 혼란에서 벗어나 기도중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살면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사랑을 다 주고도 더 주지 못해서 늘 안타까운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살면서 가장 축복받는 사람은 베품을 미덕으로 여기며 순간의 손해가 올지라도 감수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살면서 가장 마음이 넉넉한 사람은 욕심을 부릴 줄 모르고 비움이 곧 차오름을 아는 사람입니다. 살면서 가장 존경 받는 사람은 덕을 베풀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살면서 가장 보람을 느끼는 사람은 일에 대한 보상과 이득을 따지지 않는 사고를 가진 사람입니다. 살면서 가장 용기있는 사람은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남의 잘못을 용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살면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살면서 가장 가슴이 따뜻하고 예쁜 사람은 차 한잔을 마시면서도 감사의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살면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세상을 욕심없이 바라보는 마음의 눈과 맑은 샘물처럼 깨끗하고 아랫목처럼 따뜻한 가슴을 지닌 사람입니다. 많은 커플이 자신과 정반대의 타입에 반하고 끌려서 연애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바로 그 다름 때문에 괴로움을 맛볼 가능성이 거의 99%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혼 사유의 대부분은 성격 차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면담 때 불행한 결혼생활에 대해 말씀해주신 어떤 분이 생각납니다. 이 분은 지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있는 분이었다. 책이 싫었고 공부하는 것도 힘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지적이고 책을 좋아하는 배우자를 만난 것. 그 모습이 너무 멋져 보였고,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줄 영원한 반쪽이라 생각했다. 이런 운명적인 만남에 감사하며 결혼했지만, 함께 살아보니 지적이고 책 좋아하는 모습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자신을 무식하다고 무시하는 것만 같고, 따뜻하고 정 많은 사람이 아니라 자기주장이 너무 강한 고집 센 사람이었다. 자신과 다른 점 때문에 결혼했지만, 그 다른 점 때문에 이혼을 심각하게 고려하는 상황에 놓인 것. 사실 사랑은 다른 점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사랑은 같은 점에서 찾는 것이 아닐까요? 같은 점을 찾아가면서 다른 점 역시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예수님과 다른 점만 찾았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은 그 다른 점만 찾다 보니 정작 봐야 할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반대할 수밖에 없었지요. 주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고 계십니다. 특히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주님과 다른 점만을 바라보고 있는 그들이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물론 그들은 정말로 열심히 살았다. ‘열심히 함’ 으로는 그들을 따라갈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 남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기도했고, 툭하면 머리에 재를 뿌리고 오랫동안 단식을 했다. 남들보다도 더 많은 봉헌을 하는 것도 그들이었다. 무엇보다 율법의 세부조항까지 철저하게 지키는 열심함은 사람들의 감동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었지만, 정작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을 사랑으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입장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했고, 예수님의 사랑에서 공통점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이런 경고를 받고서도 전혀 자신의 행실을 고치지 않습니다. 우리도 이 점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하나를 이룰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점을 찾고 비판하고 단죄하려고만 한다면, 우리의 구원은 그만큼 멀어질 수밖에 없다. 마태오 5.8에서 “예수께서는 오직 마음이 깨끗한 자들만이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또 입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힐 수 없으며 참으로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과 말이라고 마태오15장에서 이야기 하고 계십니다. 정결예식에서는 중요한 것은 외적인 의식 즉 컵과 그릇은 닦는 것이 아니라 속마음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의 외적인 행위와 내적인 동기는 심히 동떨어져 있었다. 이런 그들의 삶을 예수님께서는 “회칠한 무덤” 과 같다고 책망 하십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골에 있는 무덤들을 사람들이 즉시 알아오고 우발적으로라도 무덤을 만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회를 칠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무덤에 닿게 되면 의식상 부정하게 되어 기도나 예배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한 것은 무덤은 겉에서는 그럴싸하게 보이지만 그 속은 썩는 것으로 가득 차 있듯이 그들도 겉으로는 의로운 사람같이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사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무딘 마음을 책망하고 계십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언자들과 의인들의 묘소를 돌면서 “우리가 우리 조상들 시대에 살았다면 조상들이 예언자들의 피를 흘리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합니다. 이렇게 그들은 자기들이 조상들보다 더 훌륭하며 자기들이 무덤을 꾸며 놓은 의인들의 편에 서 있다고 뻔뻔스럽게 생각하십니다. 이러한 착각으로 인해 그들의 눈은 더 멀어졌고 마음이 더 무디어 진 것.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과는 다른 삶의 모습을 바오로 사도가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게으른 생활을 하지 않았고 아무에게서도 빵을 거져 얻어 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러분 중 어느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수고하며 애써 노동을 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우리가 여러분에게 요구할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여러분에게 우리를 본받게 하려고 스스로 모범을 보인 것 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마음을 깨끗이 하고 하느님과 스스로에게 정직할 수만 있다면 그들의 외적인 행동과 사람들에 대한 태도도 즉시 깨끗하고 진실한 것이 될 것. 어느 신부님께서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갑자기 쏟아지던날 공소 미사를 하러 가게 되었다. 신부님 차안에는 반주자와 그 딸이 함께 타고 있었는데 천둥소리를 듣고 무서워하던 그 아이가 곧바로 엄마품에 안겨 잠을 자고 있는 것 이었다. 금방 무섭다고 했는데 엄마를 믿고 엄마품에 안겨 금방 잠이든 것이었다. 그 아이를 보면서 왜 예수께서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하셨는지? 왜 그렇게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그렇게 책망하셨는지를 조금이나마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오늘 우리도 외적인 것에, 세상의 것에 매여 불안과 위선 속에 살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스스로에게 정직한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되겠다. 아울러 우리도 아이처럼 하느님품에 안겨 사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은 나누며 겸손하게 또 나누고 감사하며 살고 싶은 마음으로 오늘도 모든 것을 주님의 영광으로 돌리고, 그 보답으로 바라는 것과 감히 바라지 못한 것 까지도 받는 은혜로운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여러분을 더욱 높이 올려줄 사람만 가까이 하세요.” - 오프라 윈프리 - ♡2294회 세상은 빠르게 달리는 사람에 의해서 변화될 것 같지만 세상은 바르게 달리는 - 사람에 의해서 변화되는 것 같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1월 28일(로마서 1장~ ) 찰스 다윈은 ''자신감 있는 표정을 지으면 자신감이 생긴다'' 《삶이 곧 기도인 것을》평범하게 살아가는 삶이 기도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드릴 것인가? 하지만 우리가 평범하게 살아가는 현장은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는 활동의 현장입니다. 일상생활의 가정에서 일터에서 어떤 곳에서든지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고 실천하며 사랑을 나누고 그분을 믿고 참회하며 진정한 자유를 누리도록 살아간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이끄심에 의해서입니다. 기도 시간이 다른 시간과 구별되게 하는 것은 기도하는 시간만 하느님을 의식하는 것과 같다. 기도는 마음속으로 하는 내면의 행위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바쁘고 삶에 얽매인 가운데 온갖 근심과걱정으로 쌓여있다 할지라도 기도할 수 있는 행위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향하는 내적 마음가짐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무상의 은총입니다. 그러므로 순간순간 하느님이 떠오를 때 겸손 되이 그분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그분에 우리 삶을 맡겨드리도록 하십시오. 모든 것을 의탁하게 될 때 우리 안에서는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봉헌하게 되고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후한 마음을 가지게 되며 자신을 적대시하는 사람에게도 용서를 해주고 오히려 친절을 베푸는 관대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은총의 선물을 얻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일하는 것은 하느님의 영광과 인류의 구원이라는 초자연적 목적이 그 안에 숨어 있다.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며 이해하는 것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향주삼덕을 실천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향기"(2고린 2,15)를 전하는 것. 진정한 기도는 행동으로 옮겨집니다. 진정한 행동은 기도로 이루어집니다. 믿음이 강하다 할지라도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것은 허수아비 믿음에 불과할 뿐입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는 죽은 것입니다.(야고 2,14-17 참조) 삶의 경험은 우리를 성장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내 삶 안에서 여러 가지 사건들을 찾아보고 사소한 것이라도 그것을 찾아내어 기도하십시오. 내가 경험한 것을 통해서 주님께 드리는 기도는 내 삶 전부를 주님께 드리는 기도가 되기 때문에 최상의 기도가 되는 것이고 우리는 신앙의 눈으로 내가 겪은 경험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되며 그 안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훤히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하니 물이 굽어진 길을 따라 묵묵히 흘러가듯이 내 모든 것을 꾸미려 하지말고 자연의 이치와 같이 흐르는 물결 따라 흘러가게 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기도하는 것이며 내가 열심히 살아가는 것은 최고의 기도입니다. 기도는 내 안에 감추어진 하느님의 모습을 찾아내는 통로이고 삶을 통해 사랑을 나누는 것이며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길입니다. 《산디에고 가는 길》을 읽으면서 그 길이 사이클 경기의 길이라는 것도 알았다. ‘투르 드 프랑스’ 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 최고의 사이클 경기입니다. 20여 일 동안 4000km를 달리는 경기입니다. 저는 엄두를 못 내지만 이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들이 많다. 가장 유명한 선수는 1999년부터 일곱 번이나 우승했던 미국의 랜스 암스트롱입니다. 또 한명의 선수가 있는데 독일의 얀 울리히 선수가 있다. 언제나 2등에 머물렀던 선수입니다. 2003년 다섯 번째 대결을 할 때입니다. 역시 1등으로 달리던 암스트롱 선수가 응원하는 사람의 가방에 걸려 넘어졌다. 울리히가 그냥가면 이번에는 그토록 바라던 1등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울리히는 넘어진 암스트롱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암스트롱이 달리기 시작할 때 따라 달렸다. 울리히는 이번에도 2등에 머물렀다. 독일 국민은 울리히 선수의 모습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독일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지난날의 잘못을 사과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아직까지 지난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지 못하는 나라도 있다. 빠르게 달릴지는 모르지만 바르게 달리지는 못하는 사람과 같다. 암스트롱은 빠르게 달렸고, 울리히는 바르게 달렸다. 이 경기를 지켜보던 지구촌의 많은 사람들은 빠르게 달렸던 암스트롱보다 바르게 달렸던 울리히에게 더 큰 박수를 보냈다. 2012년 암스트롱은 지속적으로 금지된 약물을 복용한 사실이 밝혀졌고, 암스트롱의 모든 우승 실적은 취소되었다. 2003년 진정한 우승은 바르게 달렸던 울리히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세상은 빠르게 달리는 사람에 의해서 변화될 것 같지만 세상은 바르게 달리는 사람에 의해서 변화되는 것 같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있다. 친일하던 사람들의 숫자가 훨씬 많았다고 합니다. 독립운동은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위험하고, 죽음을 각오하는 일입니다. 친일은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고, 편안하고, 풍요로운 삶이 보장되는 일입니다.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친일하던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은 목숨을 바칠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친일했던 사람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목숨을 바치면서 치열하게 싸웠던 독립 운동가를 기억합니다. 그들은 빠른 길을 가지 않고 올바른 길을 갔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에 임금은 ‘암행어사’ 를 파견하였다. 지방의 관리가 부정과 부패를 일삼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경우가 있었다. 암행어사는 임금이 파견하였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평범하였다. 사람들은 암행어사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암행어사는 지방 관리의 잘못을 밝혀내고, 억울한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암행어사는 임금이 하사한 ‘마패’ 를 보여주었다. 마패는 임금으로부터 파견 받았다는 ‘표시’ 였다. 마패를 본 지방 관리는 암행어사 앞에 무릎을 꿇었다. 행색은 초라했지만 그가 바로 임금을 대신해서 왔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암행어사의 활동을 보았고, 임금을 칭송하였다. 임금이 암행어사를 통하여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암행어사 이야기를 읽으면 통쾌했다. 불의는 정의를 이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서에서 암행어사와 같은 사람은 ‘예언자’ 입니다. 예언자는 암행어사처럼 ‘마패’ 를 받지는 못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였다. 불의한 권력을 향하여 하느님의 심판을 이야기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예언자의 선포를 존중하였다. 예언자들이 하느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산으로 가셨다. 산 위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있었다. 모세는 하느님께로부터 10계명을 받았던 예언자였다.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했던 예언자였다. 엘리야는 바알의 거짓 예언자들을 물리친 예언자였다.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랐던 예언자였다. 모세와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바른길을 걸었던 예언자였다.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예언자였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예수님의 옷은 하얗게 빛났고, 예수님의 모습은 거룩하게 변모하였다.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천막 셋을 지어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지내고 싶다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외모의 변화가 아니었다. 십자가를 지고 넘어지지만 다시 일어서는 모습이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입니다. 넘어지고 넘어져 죽으셨지만 다시 부활하시는 모습이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입니다. 세상의 흐름을 따라서 빠르게 살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바르게 살면 좋겠다. 그 길이 주님께서 가신 길입니다. 언제나 흔들림 없는 굳건한 믿음을 갖고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 안에서 기쁨의 삶을 살아가는 귀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1퍼센트의 가능성, 그것이 나의 길이다.'' - 나폴레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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