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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기도회 봉사

♡2273회 『외모에는 반드시 그 사람의 심리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 - ♡

 

♡2273회 『외모에는 반드시 그 사람의 심리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1월 7일(이사야서 1장~ )

  베토벤은 ''나는 참고 견디면서 생각한다. 모든 불행은 뭔지 모르지만 좋은 것을 동반해 온다고.''
《초심을 잃지 않는 지혜》훌륭한 인물이 되고, 중요한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마음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첫째는 초심, 둘째는 열심, 셋째는 뒷심입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마음이 초심입니다. 그 이유는 초심 속에 열심과 뒷심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초심에서 열심히 나오고, 초심을 잃지 않을 때 뒷심도 나오기 때문입니다. 초심이란 무슨 일을 시작할 때 처음 품는 마음입니다. 처음에 다짐하는 마음입니다. 초심이란 첫 사랑의 마음입니다. 초심이란 겸손한 마음입니다. 초심이란 순수한 마음입니다. 초심이란 배우는 마음입니다. 초심이란 견습생이 품는 마음입니다. 초심이란 동심입니다. 피카소는 동심을 가꾸는 데 40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그래서 초심처럼 좋은 것이 없다. 가장 지혜로운 삶은 영원한 초심자로 살아가는 것. 우리가 무엇이 되고, 무엇을 이루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그때 우리가 점검해야 할 마음이 초심입니다. 우리 인생의 위기는 초심을 상실할 때 찾아옵니다. 초심을 상실했다는 것은 교만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 마음의 열정이 식기 시작했다는 것. 겸손히 배우려는 마음을 상실해 가고 있다는 것.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정기적으로 마음을 관찰해야 합니다. 초심과 얼마나 거리가 떨어져 있는지 초심을 상실하지는 않았는지 관찰해 보아야 합니다. 초심은 사랑과 같아서 날마다 가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랑은 전등이 아니라 촛불과 같다. 전등은 가꾸지 않아도 되지만 촛불은 가꾸지 않으면 쉽게 꺼지고 맙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면 될까요, 안 될까요? 꼭 외모로 판단해야 합니다. 잘 판단해야 합니다. 종교에서는 보통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 대표적인 예가 ‘스탠퍼드 대학’ 이 설립되게 된 계기입니다. 외아들 스탠퍼드가 일찍 죽자 그의 부모들은 아들이 다니던 하버드 대학에 그의 동상을 세워줄 것을 청하기 위해 갔다. 그 답례로 건물 하나를 지어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 부부의 행색이 초라했기에 총장은 만나주지 않고 몇 시간이나 기다리게 하였다. 기다림에 지친 부부는 “그냥 우리가 아이 이름으로 학교를 하나 세웁시다.” 라고 말하고 하버드를 나와 ‘스탠퍼드’ 라는 대학을 세웠다. 분명 우리는 외모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살다 보면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으려 해도 잘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절로 평가됩니다. 그 이유는 외모로 평가해야 하는 것은 ‘생존본능’ 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초식동물이 맹수를 보고도 도망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습니다. 그래서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게 되는 일도 우리가 육체를 지니고 살아있는 동안 저절로 일어납니다. 

‘시부야 쇼조’ 의『외모에는 반드시 그 사람의 심리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라는 책에 외모를 중시했던 한 유명한 인물이 나옵니다. “아저씨가 수염을 기르신다면 인상이 훨씬 부드러워 보여서 사람들이 모두 아저씨한테 투표할 거예요.” 미국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한 그동안의 깔끔한 외모를 버리고 수염을 기릅니다. 물론 압도적으로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그전에는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쑥 들어간 볼 때문에 매우 날카롭게 보였지만, 수염을 기르니 그런 특성이 어느 정도 가려질 수 있었다. 그의 일화가 또 있다. 남북전쟁 당시 급하게 내각을 구성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일일이 사람들을 검토할 시간이 없었다. 참모가 한 사진을 들고 와서 “이 사람 어떻습니까?” 라고 물었다. 링컨은 “음, 인상이 안 좋아. 안 되겠네!” 라고 단번에 거절하였다. 참모는 “외모만 가지고 사람의 능력을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라고 되물었다. 이때 링컨은 우리가 잘 아는 한 마디를 던집니다. “남자가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하는 걸세!” 외모에 이렇게 중요성을 두고 산 사람이 그런 성공적인 삶을 살아간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외모를 무조건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사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잘’ 판단해야 하고, 동시에 자신의 판단을 ‘100%’ 믿으면 안 된다는 것. 한 사람이 양복을 입고 머리를 단정히 하고 서류 가방을 들고 차가 지나지 않을 때 빨간 불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실험을 하였다. 같은 사람이 청바지 차림에 흩어진 외모로 건너보는 것. 뒤에 있던 사람들이 몇 명이나 그 사람을 따라서 건너는지 보는 것이었다. 과연 누구를 따라 사람들이 더 많이 무단횡단을 하였을까요? 당연히 정장 차림의 남성입니다. 이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을 따라 해야 자신도 안전할 수 있다는 생존본능에서 비롯된 판단입니다. 사람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 육체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세속적이고 육체적이며 권위 있는 사람을 판별하는 데 노력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편하고 안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영혼은 ‘빛’ 을 보려 합니다. 자신을 살리는 것은 빛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외모에서 빛을 찾으려 하는 사람은 영혼의 생존을 위해 사는 사람이고, 세속적인 면을 보려는 사람은 육체를 살리려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봅니다. 농구장에 고릴라 복장을 한 사람이 아무리 돌아다녀도 농구경기에 열중한 사람들은 그 고릴라를 눈치채지 못합니다. 육체적인 욕구가 강한 사람은 그래서 눈이 멀어 빛을 볼 수 없는 것. 예수님은 빛으로 세상에 오셨고 오늘 당신 자신이 빛이심을 드러내셨다. 외모로 판단해야 합니다. 사람들 안에서 어둠과 빛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빛을 보는 사람은 ‘높은 산’ 에 오른 세 사람뿐이었다. 그들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빛을 볼 수 있었을까요? 이는 시편에 아주 잘 나와 있다.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분의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옳지 않은 것에 정신을 쏟지 않는 이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는 이라네.”(시편 24,3-4) 육체도 살려면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야 하고, 이는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웬만하면 빛을 많이 품은 사람과 머물러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안에서 빛을 보기 위해서는 ‘산’ 위에 오른 사람이어야 하는 것. 행위가 올바르고 마음이 깨끗하여 육체적인 욕망에 마음이 쏠리지 않는 사람만이 빛을 볼 수 있는 눈을 잃지 않습니다. 국가기밀정보의 98%는 이미 공개된 정보들을 정리 종합하면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는 사람의 심리도 마찬가지입니다. 98%는 겉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 사람이 빛에 가까운지, 어둠에 가까운지 구별해야 합니다. 다만 나의 눈을 맑게 하여 빛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세가 하느님과 함께 40일을 머문 뒤 그의 얼굴에서 빛이 났다고 합니다. 빛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도 빛이 되는 것. 그러나 98%만 신뢰하고 2%는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이 최종 결정은 주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끝날까지 하느님의 선물을 받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으니, 우리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면서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자녀들의 회복을 위한 치유의 은총이 넘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어찌하리오, 어찌하리오, 하면서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나 또한 어쩔 수 없다.'' - 공자 -


♡2274회 '승부는 폭발력이 아니라 버티는 힘에서 갈린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1월 8일(이사야서 31장~ )

  달라이 라마는 ''삶은 인간만큼이나 말 없는 생명체들에게도 소중한 것이다. 사람이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두려워하며 죽음이 아닌 생명을 원하는 것처럼 그들 역시 그러하다.''

 《가슴이 뛰어야 한다.》내가 가야 할 길을 막고 내일을 방해하는 벽 때문에 포기 하는 것 이 아니라 그럴수록 사명감에 불타 가슴이 뛰어야 한다. 실패해서 꿈이 깨지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 은 도전 앞에서 스스로 꿈을 접는 나약함 이다. -권영설의[직장인의 경영연습]중에서- 인생은 도전의연속입니다. 단, 하루도 도전이 아닌 날이 없다. 곳곳에서 장애물이 있고 벽을 만납니다. 그럴수록 가슴은 뛰어야 합니다. 사명감으로 뛰는 가슴이면 더욱 좋다. 가슴이 뛴다 는 것은 피가 살아 있다는 뜻이고 피가 살아있으면 꿈도 살아 있다. <고도원의 아침편지> 

성경에서 사람을 세 부류로 나누는 것 같다. 땅에 붙어 기어 다니는 사람, 직립 보행을 하는 사람, 하늘로 오르는 사람입니다. 이 구분은 ‘믿음’ 으로 이루어집니다. 믿음이 없는 가리옷 유다는 뱀과 같이 되었고, 아직 승천할 가능성이 있는 인간들은 믿음이 있었다가 없었다가를 반복하며, 완전한 믿음에 도달한 사람은 성모님처럼 하늘에서 삽니다. 가나안 여인 안에 이 세 부류의 사람의 모습이 다 들어있다. 마귀 들린 딸과 함께 살 때가 땅에 붙어 기어 다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믿음이 생겨 그리스도께 치유를 청하기 위해 나섰을 때는 믿음이 조금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견뎌 기적을 얻어내었을 때는 하늘의 사람임을 증명하게 됩니다. 이 믿음은 비단 기적을 청하는 것에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소명을 발견하는 것에서도 나타납니다

.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다가 영혼을 구원하는 어부가 되어보겠다고 나선 것이 소명을 발견한 것. 물론 그냥 편하게 살면 되지 뭣 때문에 고생하느냐는 사람도 있을 것. 그러나 마지막 때에 주님 앞에 물고기만 들고 나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끔찍한 일일 것. 하느님은 당신 앞에 나올 때 빈손으로 와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원하시는 소명이 반드시 있다. 우리는 그 일을 찾아 소명을 완수하고 그 열매를 주님께 가져가야 합니다. 분명 그 소명을 위해 져야 하는 십자가를 버리고 주님 앞에 다다랐을 때 그 십자가가 없으면 건널 수 없는 낭떠러지가 있을 것. 

그리고 그냥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편한가요? 가나안 여인이 마귀 들린 딸과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고 편할까요? 어차피 우리 모두 이러나저러나 고생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소명을 찾아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고생하는 편이 더 낫다. 믿음으로 사람을 나눈다면, 사람은 일을 시작하지 않는 사람, 시작만 하는 사람, 시작했다면 끝까지 가는 사람으로 나뉩니다. 그러나 내가 시작한 일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좌절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끊임없이 좌절을 선물하십니다. 일단 소리 지르며 따라오는 데도 들은 체도 안 하십니다. 그다음은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라며 사람을 차별하십니다. 그다음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라고 하시며 거의 멸시까지 하시는 듯 보입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라고 하며 굽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에서 끝까지 갈 수 있는 이유는 그 과정이 좋게만 끝날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속담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란 말이 있다. 밥을 지으려다 실패하면 죽이 됩니다. 그러나 죽이 되는 것이 실패하는 것일까요? 누구는 죽을 일부러 끓이기도 합니다. 죽만 파는 죽집도 있다. 죽도 잘 끓이면 멋진 음식이 되는 것.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란 말 안에는 실패가 없다.

 미국의 어느 원예연구소에서 ‘희귀한 흰색 금잔화의 씨를 보내시는 분께는 큰 사례 하겠습니다.’ 라는 광고를 내었다. 그런데 그 액수가 너무 커서 순식간에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금잔화는 주황색이나 갈색뿐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흰색 금잔화를 찾으려고 애썼으나 누구도 찾지 못했고, 그렇게 이 이야기는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져갔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후 한 봉투에 흰색 금잔화 씨가 보내졌다. 70대 할머니가 보낸 것이었다. 그녀는 50대에 이 광고를 보고 흰색 금잔화 만들기를 시작한 것. 금잔화 씨를 뿌려 주황색과 갈색의 금잔화 중에 색이 가장 옅은 것들의 씨를 모았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뿌려 또 색이 옅은 것들의 씨만 모았다. 이런 과정을 20년 거치다 보니 흰색 금잔화가 탄생하게 됩니다. 전문 지식을 갖춘 어떤 누구도 해내지 못한 보통 시골 할머니가 금잔화의 새로운 종을 만든 것. 이 이야기는 ‘웨이슈잉’ 의『한 번이라도 끝까지 버텨본 적 있는가』라는 책에 소개된 일화입니다. 이 책의 앞표지에는 ‘승부는 폭발력이 아니라 버티는 힘에서 갈린다.’ 라고 쓰여 있다. 진짜 믿음은 끝까지 버티는 것에서 증명됩니다. 알리바바 창업자 마윈이 말합니다. “성공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달라도 실패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포기하기 때문이다.

” 한 청년은 난독증이 있다. 더군다나 기억력도 좋지 않습니다. 햄버거 가게에 알바로 취직하려고 해도 햄버거 종류를 다 외울 수 없어서 취직하지 못했다. 다행히 카페에 취직해서 일하고 있다. 메뉴를 외우는 것도 남들보다 몇 배의 노력을 해야 했다. 몇 번을 그만두고 싶어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끝까지 버텨서 지금은 원두 이름과 팥빙수 만드는 것만 배우면 커피숍을 단독으로 운영할 수 있는 모든 기술 배우기가 끝난다고 합니다. 수 없는 실패 속에서도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란 정신으로 가야 합니다. 물론 어떤 일을 시작할 때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을 시작했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라는 마음으로 가야 합니다. 미리 실패할 것을 생각하고, 미리 좌절할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어떤 일이든 끝까지 가면 실패는 없다. 밥 아니면, 어쩌면 밥보다 더 맛있는 죽이 됩니다. 끝까지 가면 밥 아니면 죽이지만, 시작하지 않거나 중도에 포기하면 먹을 수 없는 쓸모없는 것이 됩니다. 믿음이 겸손과 비례하는 이유는 겸손한 사람에게 그 믿음을 꺾을 두려움을 주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행을 멈추었을 때는 생각하고, 생각했다면 실행하십시오. 그리고 실행했다면 반드시 끝까지 가 보십시오. 그러면 다음 것을 시작할 때 큰 용기가 생길 것. 적어도 죽을 끓일 수 있는 기술은 남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삶일 것입니다.

  오늘 아버지 하느님의 뜻과 함께하는 우리들 자신이 드리는 부족하고 보잘것없는 침묵의 기도가 기억하고자 하는 영혼들에게 축복과 은총이 될 수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첫 순간이고 마지막 순간이며 유일한 순간이다” - 파우스티나 성녀 -


♡2275회 인간의 모든 계획과 의지를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강력한 요소가 있으니 그것이 - 바로 ‘죽음’ 입니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1월 9일(이사야서 51장~ )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에 “당신의 행동에 있어서는 활달하며 당신의 대화에 있어서는 조리를 지키며 당신의 사상에 있어서는 방황하지 말고 당신의 영혼에 있어서는 내적인 분란과 외적인 혼란을 없애고 실생활에 있어서는 여가가 없을 정도로 분주한 생활을 하지 말라. 사람들이 당신을 죽이고 당신을 갈기갈기 찢고 당신을 저주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렇다고 이러한 것들이 순결하고 현명하고 건전하고 올바르게 머물려고 하는 당신의 영혼을 방해할 수 있겠는가?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투명하고 맑은 샘물가에서 샘물을 저주한다 하더라도 샘물은 결코 식수를 제공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진흙이나 오물을 집어넣었다 하더라도 샘물은 이것들을 흘려보내고 씻어내어 전혀 더럽혀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당신은 평범한 우물이 아니라 영원한 마음의 샘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 그것은 만족과 단순과 겸손으로 결합된 자유를 스스로 끊임없이 누리면 된다.” 
《감사드립니다.》이해하기보다는 비판에 앞섰고, 덮어 주기보다 들추기를 즐겼으며, 싸매주기 보다는 아픈 데를 건드렸고, 별 것 아니면서 잘난 체 한 것들을 다 용서해 주십시오. 내 인생에 폭풍이 있었기에 주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며, 가끔 십자가를 지게 해 주셨기에 주님의 마음을 배울 수 있었음을 감사드립니다. 나를 사랑해 준 사람에게 감사하고 나를 공격해 준 사람에게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나를 더 너그러운 인간으로 만드셨다.

 때때로 가시를 주셔서 잠든 영혼을 깨워 주셨고, 한숨과 눈물도 주셨지만 그것 때문에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도 배웠다. 실수와 실패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겸손을 배웠다. 날마다 평범한 생활 속에서 감사를 발견하는 지혜를 주소서. 무엇이 생겨서가 아니라, 무엇이 나에게 발생하지 않음을 감사하게 하소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귀와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과, 편리한 세월에 태어난 것과, 세어도 세어도 끝이 없는 그 많은 감사를 알게 하소서. 남과 비교하며 살지 말게 하시고, 질투의 화산 속에 들어가지 말게 하시고, 돈을 목적 삼게 하지 마시고, 으뜸을 자랑으로 여기지 않게 하소서. 사랑의 속삭임을 입술에 주시고 감사의 노래를 내 심장에 주소서. 하느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는 야심 찬 목표를 자주 세웁니다. 특히 새해가 되면 거창한 목표들이 줄을 잇지 않습니까? 물론 작심삼일로 싱겁게 끝나는 때도 있고, 그 이상을 채워서 하나의 습관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목표를 채우지 못하고 그냥 포기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렇다고 목표를 세우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것일까요? 실패를 더 많이 경험하면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목표를 세웁니다. 이렇게 실패를 반복하면서 계획을 세우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내일도 모레도 내 삶이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일, 모레라는 미래의 삶이 없다면 그 어떤 사람도 계획을 세우지 않을 것.

 인간의 모든 계획과 의지를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강력한 요소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죽음’ 입니다. 죽음은 모든 계획을 수포로 만들면서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무력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이 죽음 앞에서 작아질 수밖에 없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부활을 통해 이 죽음을 이기셨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을 따라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나의 나약함과 무력함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힘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은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 목숨을 잃는 것, 세상을 잃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에 대해 훈계를 하신 다음, 제자들 가운데 더러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의 영광에 싸여 오는 것을 보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베드로의 반박 이후 곧바로 하신 말씀이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장차 고난을 겪으시리라는 말씀을 듣고는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반박하지요. 곧바로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라는 것이었다. 수난과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온전히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원칙만을 내세우면서 하느님의 뜻에 맞춰 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반대자, 사탄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온전히 하느님께 맡기는 삶을 원하시는 것이었다. 심지어 고난과 죽음까지도 하느님께 맡길 수 있는 삶,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삶을 가져야 한다는 것. 이러한 삶이 온전히 주님께 맡기는 삶이며, 주님과 함께 하늘나라의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한 가지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느 날 상점에서 외투 한 벌을 샀다. 집에 돌아와서 다시 입어보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주머니 안에 값비싼 보석이 들어 있는 것. 순간, 이 사람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내가 산 옷에 들어 있는 보석이니 가져도 되지.’ 라는 마음과 ‘내 물건이 아니니 빨리 주인을 찾아 주어야 한다.’ 는 마음이 서로 치열하게 싸우게 되었다. 이런 마음의 갈등을 안고서 현자를 찾아가 물었다. 그러자 현자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산 것은 외투이지, 보석이 아니지 않습니까?” 자신이 산 것은 외투일 뿐 보석이 아닌데도, 자기 손에 들어온 보석에 대한 유혹을 이기기란 쉽지 않았던 것.

 어쩌면 우리 모두의 마음이 이렇지 않은가요? 그래서 세상 것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이런 집중을 통해서 세상 안이 주님의 뜻으로 충만하게 될 것. 바로 하느님 나라가 완성됩니다.

  무지의 구름으로 들어가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주님만 믿습니다.”라고 기도로 하면서, 우리들이 이 순간에 충실하게 살아 주님께서 열어 놓으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 성 아우구스티누스 -


♡2276회 자신을 모르는 사람은 언제나 확신에 가득 차 있다. 회칠한 무덤이기 때문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1월 10일(예레미야서 1장~ )

  유대인 랍비는 "행복은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원하는 것이다."
생각에도 리듬이 있어야 한다.》숨은 한 번 들이키면 반드시 한 번은 내쉬어야 한다. 제아무리 욕심 많은 사람이라도, 숨을 두 번 들이쉬고 한 번 내쉬며 살 수는 없다. 어느 누구도 들이킨 만큼은 내쉬어야 한다. 숨은 재산처럼 모아서 쌓아둘 수가 없다. 들이킨 숨을 모으기 위해서 내쉬는 숨을 참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숨을 지키는 일은 단지 숨을 내쉬는 일이다. 한꺼번에 헐떡이며 숨을 들이키면 들이킨 만큼 내쉬지 않으면 안 된다. 살아가는 일도 숨쉬는 일처럼 리듬이 있어야 한다. 리듬이 들어왔다가 나가고, 나왔다가 들어가는 일이다. 오르고 내리는 일이며, 내리고 오르는 일이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들이기는 좋아하면서도 내보내는 일은 싫어한다. 어느 자리든 올라가는 일은 좋아하면서도 내려오는 일은 두려워한다. 그러나 잘사는 사람은 내보내기에 즐겨하는 사람이다. 진정으로 오를 줄 아는 사람은 내려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생각에도 리듬이 있어야 한다. 강과 약, 높고 낮음, 크고 작음이 함께 조화를 이루는 파도와 같은 리듬이 있어야 한다. 생각은 어느 순간 산더미처럼 솟구쳤다가는 호수처럼 잔잔해지는 파도의 얼굴이어야 한다. 아니, 때로는 태풍처럼 강하게 몰아치다 가끔은 아지랑이처럼 속삭일 줄 아는 파도의 모습이어야 한다.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바람의 모습이어야 한다. 사제에게까지 돈을 꾸는 신자들이 있다. 오죽하면 사제에게까지 돈을 꾸어야 할까요? 그래서 여력이 되면 다 꾸어주려고 합니다. 차를 사려고 모으던 돈, 책을 찍으려고 모아놓은 돈 등을 모두 꾸어주었다. 이런 돈밖에 없다고 할 때 그 꾸려는 사람은 반드시 그런 일이 있기 전까지 꼭 갚겠다는 약조를 합니다. 그리고는 사라져서 다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이런 분들의 특징이 있다면 자기 확신이 확실하다는 것. 돈을 빌릴 때는 눈에서 빛이 나고 언제까지 갚을 수 있다고 확신을 합니다. 그리고 확실하게 사라집니다. 이런 분들이 처음부터 사제를 상대로 사기를 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 그 돈으로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는데 여전히 상황이 힘들어 갚기가 어려운 걸겁니다. 그래서 돈을 꾸어줄 때는 받지 못할 수 있음을 충분히 인지하고 꾸어줍니다. 다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돈을 꾸어야 하는 목적이 있을 때는 자신 안에 갚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눌러놓기 위해 더욱 자신의 말을 확신으로 치장하게 된다는 것. 

예전에 어떤 영화에서 군인이었는데 지하실에서 못된 일을 하는 여자 주인공이 나왔다. 그런데 그의 옷장과 책상은 지나칠 정도로 잘 정돈되어 있다. 속이 썩었기 때문에 그 반작용으로 겉이 지나치게 깨끗한 모습을 보이려 했던 것. 무엇이든 좀 지나쳐 보이면 그것은 의도적으로 그러는 것이기에 그 사람은 믿으면 안 됩니다. 이런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상징적으로 “회칠한 무덤” 이라고 부르십니다. 속은 시체로 가득 차 있지만, 이것을 가리기 위해서 겉에는 더 희게 칠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이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행동하는 모든 것들은 회칠한 무덤의 법칙을 아는 이들 눈에는 속이 썩어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세상 살아가면서 믿지 말아야 할 사람을 믿어서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심지어 그것이 결혼과 같은 것일 때는 정말 큰 후회를 하게 됩니다. 결혼하기 전에 상대가 “자기, 나 믿지?” 라는 말을 지나치게 많이 하면 절대 믿으면 안 됩니다. 회칠한 무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잘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대부분 자기 자신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사람이 사람을 안 믿으면 누구를 믿습니까?” 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사기꾼일 가능성이 큽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믿어줘야 사기를 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돈을 빌리며, “언제까지는 기필코 갚겠습니다.” 라고 확언을 한 사람 중에 얼마나 그 기일 안에 갚았나요? 그렇게 모든 게 확실한 사람이 왜 돈을 꾸어야 하는 지경까지 오게 된 것일까요? 이런 사람들은 ‘기필코, 기어이, 꼭’ 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더욱 믿으면 안 됩니다. 어떻게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요? 결혼해서 사시는 분들은 지금의 결혼 삶이 이럴 것이라고 아셨나요? 만약 알았다면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것이란 분들도 적지 않을 것. 자신을 모르는 사람은 언제나 확신에 가득 차 있다. 회칠한 무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너나없이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장담하였다. 그렇게 확신한 사람들 순으로 예수님을 배신하였다. 예전에 친구가 “난 빨개 벗겨서 여자들이랑 한 방에 들여놔도 끝까지 정결을 지킬 자신이 있어.” 라고 말한 적이 있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느닷없이 그런 소리를 하는 것에 놀랐다. 그 사람 안에는 정결하지 못하다는 양심의 비난이 들어있다. 그래서 겉으로 회칠을 하는 것. 속이 검은 사람은 그 검은 것을 감추기 위해 겉은 더 밝은색으로 칠합니다. 이것이 사람들 앞에서 하는 자기 확신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그런 모습을 보입니다

. 그들은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며 확언을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모습들 속에서 그들이 자신을 모르는 회칠한 무덤과 같음을 보십니다. 그들 마음속에는 조상들보다 더한 더러움이 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확신 속에서 그들의 교만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원효대사가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로 유학하러 가려다가 벌레가 기어 다니는 해골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이야기를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다.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다는 깨달음이었다. 이 깨달음으로 얻게 된 것은 사람은 착각하는 동물이기에 자기를 믿지 않게 되는 은총이었다. 그래서 그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만 외우면 된다고 가르쳤다. 쓸데없는 생각 때문에 자기에 대한 착각만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나를 신뢰할수록 주님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자기에 대한 신뢰를 포기한 이들의 것.  주님만을 믿으려면 나의 나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어떤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아직 오지 않은 하느님의 적당한 때에 가장 좋은 것을 주신 주님의 손길을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삶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다."  - '호세 무히카' 우루과이 대통령 -


♡2277회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1월 11일(예레미야서 31장~ )

  성 알폰스는 “우리의 하느님은 결코 두려운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찾아갈 때 마다 언제나 환대하시고 무조건 용서하시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두려워하기보다는 안심하십시오. 고해소에 들어가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안에 한없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대리자가 앉아계십니다.” 

《행복은....》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가진 사람은 행복의 주인공이 되고 고난에 굴복하고 희망을 품지 못하는 사람은 비극의 주인공이 됩니다. 하루를 좋은 날로 만들려는 사람은 행복의 주인공이 되고 나중에 라고 미루며 시간을 놓치는 사람은 불행의 하수인이 됩니다. 힘들 때 손 잡아주는 친구가 있다면 당신은 이미 행복의 당선자이고 그런 친구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행복 낙선자입니다. 사랑에는 기쁨도
슬픔도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행복하고 슬픔의 순간만을 기억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작은 집에 살아도 잠잘 수 있어 좋다고 생각하는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작아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남의 마음까지 헤아려 주는 사람은 이미 행복하고 상대가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는 것만 섭섭한 사람은 이미 불행합니다. 미운 사람이 많을수록 행복은 반비례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행복은 정비례 합니다. 너는 너, 나는 나라고 하는 사람은 불행의 독불장군이지만 우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연합군입니다.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하지만 미움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누구는 저렇게 사는데 "나는"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제목은 ‘있다, 없다.’입니다. 10대는 ‘철’이 없다, 20대는 ‘답’이 없다, 30대는 ‘집’이 없다, 40대는 ‘돈’이 없다, 50대는 ‘일’이 없다, 60대는 ‘낙’이 없다, 70대는 ‘이’가 없다, 80대는 ‘처’가 없다, 90대는 ‘시간’이 없다, 그렇다면 100대는 무엇이 없을까요? 답은 ‘다 필요 없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없는 것이 많아서 평생 힘들게 사는 우리가 아닐까요?

 그런데 세대별 있는 것도 있다고 말합니다. 10대는 ‘끼’가 있다, 20대는 ‘젊음’이 있다, 30대는 ‘짝’이 있다, 40대는 ‘폼’이 있다, 50대는 ‘멋’이 있다, 60대는 ‘가족’이 있다, 70대는 ‘쉼’이 있다, 80대는 ‘추억’이 있다, 90대는 ‘소망’이 있다, 이제 마지막 100대는 무엇이 있을까요? 답은 ‘천국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평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함께 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대별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이 계속해서 바뀌어 나간다는 것이지요. 지금 세대에 필요한 것이 다음 세대에서는 필요 없을 수도 있고, 또 지금 세대에 필요 없는 것이 과거나 미래의 세대에서는 꼭 필요한 덕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없다고 절망에 빠져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또 있다면서 안일한 마음으로 살아서도 안 됨을 깨닫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실천해야 할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서 하느님께서 기뻐하실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부자 젊은이가 주님을 찾아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율법에 나와 있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 선한 일임을 말씀하십니다. 이 젊은이는 이제까지 다 지켜왔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의 부족함을 이렇게 말해줍니다.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없어질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지 못했던 이 젊은이는 슬퍼하면서 주님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의지가 너무나도 나약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는 것은 그리 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것을 주님 때문에 버리는 것을 늘 주저하게 됩니다. 의지가 너무나도 나약하기 때문입니다. 

꽃길을 걸을 때는 라르고(largo) 꽃들과 눈 맞추고 얘기하며 ‘매우 느리게’ 걸어가요. 산행을 할 때는 안단테(andante)하늘을 보고 바람소리 새소리 들으며 ‘느리게’ 한발 한발 디뎌요. 일상의 삶은 모데라토(moderato) 게으름과 성급함은 버리고 ‘보통 빠르기’로 생활해요. 이웃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때는 알레그로(allegro) 재지 말고 멈칫하지 말고 ‘빠르게’ 내밀어요. 어쩌다 사랑의 기회가 찾아오면 비바체(vivace) 두려워 말고 ‘빠르고 경쾌하게’ 행동해요. 인생의 시간은 프레스토(presto) 바람같이 쏜살같이 매우 빠르게 흘러가니까요. 음악과 인생이 이렇게 연관 있네요. 그래서 사람들이 음악을 좋아하나 봅니다. 정연복 시인의 <음악과 인생>이라는 시를 읽으면서 그 이유를 찾게 됩니다.

  지난날 우리들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판단하고 험담하며 교만하게 살아왔음을 회개하고,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자비를 간구하면서 또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베풀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지혜로운 덕은 사람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할 바가 무엇이며, 마땅히 피할 바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 성 아우구스띠노 -


♡2278회 자아의 욕구는 수면제이고 주님의 뜻은 각성제와 같습니다. 깨어있는 사람만이 - 심판을 이깁니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1월 12일(애가 1장~ )

  사막의 은수자 까롤로 까레또도는 “이해하려 들지 마시오,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알려들지 마십시오.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사랑하기를 힘쓰십시오. 사랑 안에서, 사랑 안에서만 버림받은 예수님과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세상의 참된 주인공은 당신 입니다.》세상이 아무리 험악 할지라도 진정 사랑을 거부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든 정말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면 그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문제가 무엇이든 간에 이겨낼 힘을 얻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어려움을 만난 사람에게는 더욱 더 사랑이 필요하지요. 사람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유형이 있다. 키가 큰 사람, 말을 재미있게 하는 사람, 잘생긴 사람, 귀여운 사람, 터프한 사람, 돈 잘 쓰는 사람, 날씬한 사람, 통통한 사람 등 다양합니다. 그런데 이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취향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희망하는 유형이 있다. 마음이 넓은 사람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좁고 작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자신은 사랑받고 싶어합니다. 때문에 그런 자신을 이해할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넓히기 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이 넓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땅에는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적습니다. 처음 만났을 땐 마음이 넓은 것 같지만 조금 지나면 그도 역시 우리 만큼 밖에 안 되는 속 좁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또다시 마음 넓은 사람을 찾아갑니다. 세상에서 자신보다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번개를 맞는 것보다 넓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사랑할줄 아는 사람 그는 바보를 천재로 만들수 있는 사람이고 고장난 세상을 고치는 기술자입니다. 우리가 남들보다 조금 더 사랑할 줄 안다면 우리는 모든 곳에서 환영받는 주인공이 될수 있다. 주님께서 용서와 사랑을 우리에게 거저 주시듯 사랑받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주는 당신이 " 세상의 참된 주인공 "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 깨어있으라고 하십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에 대비해 항상 깨어있으라고 하십니다. 깨어있을 때와 잠자고 있을 때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깨어있을 때는 있고, 잠잘 때는 없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의식’ 입니다. 잠자면서도 깨어있을 수 있다. ‘자각몽’ 이라고 하는 게 있는데, 꿈을 꾸면서도 의식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자신이 하늘을 나는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 그래서 ‘이건 꿈이네. 그럼 이쪽으로 날아볼까?’ 라고 하면서 꿈도 조정할 수 있다. 나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면 잠자면서도 깨어있을 수 있다. 혹은 깨어있으면서도 잠자는 수가 있다. 자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할 때입니다. 하와가 뱀에게 속아서 선악과를 따먹을 때, 그리고 그 선악과를 아담이 받아먹을 때는 깨어있으면서도 잠을 자고 있었던 것. 나의 뜻대로 하는 것이 잠을 자는 상태입니다. 깨어있어도 내 자기 뜻에 묶여있으면 잠자는 것. 내가 의식해야 하는 것은 ‘뜻’ 입니다. 내가 내 뜻을 추구하고 있는지, 혹은 그 뜻에서 벗어나 있는지를 의식해야 합니다. 물건을 놓을 때 내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어디 놓았는지 기억할 수 없다. 잠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뜻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깨어있음입니다.

 나는 항상 내 뜻을 만들어 나를 잠들게 만듭니다. '1408’(2007)은 사후세계에 관심이 많은 한 작가가 겪은 무서운 일을 담은 영화입니다. ‘1408’은 한 호텔의 방 호수입니다. 그 방에 들어가면 1시간 내로 모두 자살을 한다고 합니다. 주인공은 사후세계에 관한 책을 쓰기 위해 그 방에서 자보기로 합니다. 호텔 지배인은 말리지만 주인공의 고집이 너무 셉니다. 그래서 좋은 코냑 한 병을 선물로 주고는 허락합니다. 그 방에 들어간 주인공은 온갖 환상에 시달립니다. 그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딸을 잃은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버지와 화해해야만 한다는 죄책감과 딸을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그 방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아버지와 화해하게 하고 죽은 딸이 살아서 나왔다. 그러나 그런 기쁨도 잠시뿐이었다. 아버지는 무서운 시체로 변하고 오랜만에 가슴에 안은 딸은 재가 되어 산산조각이 납니다. 기쁨만큼이나 고통이 큽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해서 일어납니다. 과거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 방에서 자살을 선택한 것. 주인공은 자신의 힘으로는 그 방에서 결코 빠져나올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지배인이 준 코냑에 불을 붙여 방을 태워버립니다. 자신도 연기에 질식되어 갑니다. 감독판에서는 소방관에 의해 주인공은 가까스로 구조됩니다. 그리고 1408호에서도 자유로워지고 과거의 집착에서부터도 자유로워집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모두 각자의 1408호 안에 살고 있다. 이것이 우리 ‘자아’ 라고 할 수 있다. 자아는 깨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것. 과거의 실수와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우리를 깨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침착하게 자아를 성령의 불로 태워버려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자아를 태워버릴 무기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물론 나도 함께 죽는 것 같아 두려움도 있다. 하지만 자아가 죽어도 나는 죽지 않습니다. 다만 자아의 욕구에 더는 휘둘리지 않게 되는 것. 스스로의 힘으로 자아에게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무의미합니다. 절대 벗어날 수가 없다. 자아와 반대되는 새로운 뜻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보통 자아와 반대되는 의식적인 행동을 ‘오른쪽’ 으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항상 오른쪽에 그물을 던지는 것. 그럴 때 깨어나게 됩니다

미국 어느 지역에서 장애 아이들 체육대회가 열렸다. 50m 달리기 경주가 열렸고 한 소녀가 1등을 하고 소리를 질렀다. “엄마, 나 1등 했어!” 엄마와 아빠는 아이를 부둥켜안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울고 있었다. 기자가 너무 지나치게 감격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을 때, 엄마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이가 오늘 처음으로 말을 했어요.” 아이는 부모가 바라는 것을 해 주기 위해 노력하다가 비로소 자신의 방에서 탈출하여 깨어나게 된 것. 자기만의 힘으로는 깨어날 수 없다. 나를 달리게 만드는 누군가의 뜻을 의식하고 그 뜻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깨어있음은 ‘주님의 뜻을 의식하는 상태’ 입니다. 주님의 뜻을 의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나의 뜻입니다. 나의 뜻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현존을 믿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었다면 뱀의 뜻을 따라줄 수는 없었다. 주인이 종에게 자기 식솔들을 맡기고 제때 양식을 내주게 하고 떠났다면 주인이 없어도 마치 주인이 있는 것처럼 그 뜻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깨어있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더디 오려니 하고 먹고 마시며 식솔들을 괴롭히면 심판을 받게 됩니다. 매 순간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뜻을 의식하고 있다면 그것이 지옥 같은 자아가 만든 잠에서 깨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를 깨어있게 만드는 유일한 힘은 주님의 뜻입니다. 자아의 욕구는 수면제이고 주님의 뜻은 각성제와 같습니다. 깨어있는 사람만이 심판을 이깁니다.

  가끔은 돈 자랑하는 부자들이 부럽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우리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절실하게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가슴 벅찬 행복한 때를 맞이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그리고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 - 성 아우구스띠노 -


♡2279회 믿음은 열매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씨로 뿌려집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1월 13일(에제키엘서 1장~ )

  성 치뿌리아노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 존재 자체는 희망과 믿음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과 믿음이 그 열매를 맺으려면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좋은 것은 비밀입니다.》좋은 것은 비밀입니다. 안 좋은 것은 누구나 가질 수 있지만 좋은 것은 누구나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비밀의 문안에 두었다. 좋은 것을 갖기 위해서는 내 마음의 열쇠로, 내 생각의 힘으로, 내 말과 행동의 손으로 비밀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사랑은 비밀입니다. 사랑이 마음속에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문은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사람에게 열립니다. 희망은 비밀입니다. 희망이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희망의 문은 오늘을 성실히 사는 사람에게 열립니다. 평화는 비밀입니다. 마음이 평화롭다는 것은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문은 큰사랑으로 자유함을 얻은 사람에게 열립니다. 기쁨은 비밀입니다. 날마다 기쁨을 갖는 것은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쁨의 문은 감사가 있는 사람에게 열립니다. 용기는 비밀입니다. 참다운 용기는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기의 문은 뜻이 곧고 마음이 깨끗한 사람에게 열립니다. 산을 옮길 믿음이 있다면 삽부터 산다. 예수님께서 간질병 마귀에 걸린 아이를 치유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타볼산에서 변모된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고 내려오시는 중이셨다. 그는 예수님께서 안 계시니 먼저 제자들에게 이를 청한 상태였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 그 마귀를 쫓아낼 수준까지는 올라오지 못한 상태였던 것. 예수님께서 함께 계실 때 제자들도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있었던 것. 예수님은 제자들이 있는 가운데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아이를 이리 데려오너라.”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에 제자들이 못 쫓아내는 마귀가 없고 못 고치는 병이 없기를 바라셨다는 것. 그러나 지금 우리의 현실은 매우 암담합니다. 우선 우리 안에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조차 못하고 있다. 적어도 이때 제자들은 시도라도 해 보았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길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산을 옮기는 것은 기적입니다. 그런데 만약 복권에 당첨될 믿음이 있다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먼저 복권을 살 것입니다. 한 번에 안 되면 또 살 것. 그리고 작은 것들이 맞아가며 정말 믿음이 성취될 수 있음을 더 확고하게 믿어가게 될 것. 그리고 어느 날엔 반드시 당첨될 것. 우리는 믿음의 이 자라나는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꾸중을 받는 것은 “그동안 왜 믿음을 성장시키지 못했느냐?” 인 것이지, 믿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한자성어를 잘 압니다. 중국의 어느 마을에 ‘우공’ 이라는 사람이 죽기 전에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던 중 마을 앞에 있는 큰 산 때문에 외지와의 소통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 산을 옮길 계획을 짭니다. 사람들은 비웃었지만 어디서부터 옮길 것인가를 궁리하고 삽을 삽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내가 못하면 내 아들이 이을 것이요, 아들이 못하면 손자가 이을 것입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그렇게 한 노인이 산을 옮기기 위해 매일 산을 파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자, 이에 감복한 임금이 산을 옮겨 주었다. 그리고 실제로 인도에서 ‘다쉬라트 만지히’ 라는 농부가 바위산을 뚫은 일이 있다. 그가 살던 마을은 바위산으로 갇혀있어 다른 마을로 가려면 70km를 걸어야 했다. 그의 아내가 다쳤을 때 그 산 때문에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게 된 것이 그가 산을 파기 시작한 이유입니다. 그는 염소를 팔아 망치와 정을 사고 그것으로 22년간 돌을 깨서 110m의 길을 만듭니다. 이로 인해 70km가 5km로 단축되었다. 인도 정부에서 그에게 상을 주려고 했을 때 그는 그것을 거부하고 자신이 만든 길을 포장해 달라고 했다. 그렇게 그 길이 완성된 것. 현대에 이렇게 치유의 기적이 부족한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을 키울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믿음은 열매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씨로 뿌려집니다. 살이 빠질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식사량을 줄이기 시작하고 운동을 하기 시작할 것. 산을 옮길 수 있다고 믿으면 옮겨지기를 기다리지 말고 삽과 곡괭이를 사야 합니다. 재테크 크리에이터 주언규 씨가 tvN ‘유퀴즈 온 더 블록’ 에 나왔다. 그의 수익이 한 달에 1억8천이 넘을 때도 많다고 합니다. 180만원 월급쟁이에서 어떻게 100배의 성장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의 재테크 비법 때문입니다. 비법은 간단합니다. 우선 삽을 사는 것. 그리고 시작하는 것. 인터넷 쇼핑몰을 만드는 데는 그리 큰 비용이 안 든다고 합니다. 물론 잘 안 될 것을 압니다. 그러나 안 되는 카페도 한 명은 손님이 있게 마련이라는 생각으로, 매일 한 개씩, 수백 개의 쇼핑몰을 만드는 것. 잘 되는 쇼핑몰이 하루 10개를 판다면 그는 100개의 쇼핑몰을 만들어 하나씩만 판다고 합니다. 결국, 다 합치면 한 달에 엄청난 수입이 들어옵니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도 키워나가야 합니다. 어느 신부님께서 몸이 아프다고 안수해 달라고 하는 분들을 거절하지 않습니다. 물론 신부님에게 치유할 능력이 없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크게 에너지가 소비되는 것도 아닙니다. 미사가 끝나고 나면 항상 수십 분의 신자분들이 머리를 숙이고 계셨다. 100명 안수해 드리면 2~3분은 몸이 좋아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신부님께서 볼 때 감기가 낫는 정도인 것도 있고 조금 신기한 경우도 분명 있다. 평일 미사 중에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치유의 미사가 있어야 할 것. 많은 분께 병자성사를 드리면 한두 분은 분명히 치유되는 분이 나올 것. 병자성사는 돌아가실 분들만이 아니라 치유를 위한 성사입니다. 그 좋은 것을 돌아가시기 직전인 분들에게만 주기 위해 묵혀두면 안 될 것. 그렇게 믿음을 키울 때야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들으라고 하시는 이 꾸중을 듣지 않게 될 날이 올 것.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참 행복은 하느님과 일치하여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영원한 삶이기를 소망하면서, 신새벽부터 잠자리에 들기까지 챙겨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행복한 우리들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새로운 인생은 방향을 찾음으로써 시작된다.’' - 영국 켄 리먼 -


♡2280회 오늘 하루는 당신에게 주어진 일에 묵묵히 정성을 다하라.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1월 14일(에제키엘서 26장~ )

  헨리나웬, 열린 손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손을 펴는 것, 손을 열어 드리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것처럼,》오늘은 슬피 울어도 내일은 기쁨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오늘은 분노로 가득 차나 내일은 소리내어 크게 웃을지도 모른다.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인 것처럼 허무해도 내일은 희망이 푸른 날개를 퍼덕이며 찾아올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오늘은 내 주머니가 비록 초라하지만 내일은 가득 찰지도 모른다. 오늘은 날 알아주는 이가 없어도 내일은 날 찾아주는 사람들로 차고 넘칠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당신이 하는 일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비방을 해도 자신의 일이 옳다면 결코 주눅 들거나 멈추지 마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당신에게 주어진 영광에 대해 시샘하거나 따돌릴지라도 당신의 노력으로 이룬 것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더욱 더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내 마음 같이 믿었던 사람이 어느 순간 등을 돌리고 떠나갈지도 모른다. 진실로 당신이 그를 이해한다면 그를 용서하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하면 야멸차게 물러서지 마라 내 일은 당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지도 모른다. 

있는 그대로를 믿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 들여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어제는 오늘을 몰랐던 것처럼 내일도 잘 알 수 없지만 삶은 늘 그렇게 지내왔고 그래서 미래는 언제나 신비롭고 영롱하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오늘 하늘은 맑고 푸르지만, 내일은 그 하늘을 영원히 못 볼지도 모른다. 그래도 오늘 하루는 당신에게 주어진 일에 묵묵히 정성을 다하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조금은 이런 불편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그러자 제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그 구원받는 방식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즉, 부자는 구원될 수 없지만, 하느님께서 부자도 구원해주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 에서 쉰들러는 자신의 재산으로 1,100명의 유태인 포로들을 구출해 줍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아끼려 했던 차와 금 배치를 보며 그것까지 팔지 못한 것에 마음 아파합니다. 정말 사랑이 있다면 가진 것을 나누어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쓸 것이기 때문에, 끝까지 부자로 남아있는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 남아있는 재산이 사랑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돈이 많은 사람은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주님은 그런 사람을 어떻게 구원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성경에서의 부자는 소유한 돈의 액수와 상관이 없다. ‘내 것’ 이라고 믿는 것이 많을수록 부자입니다. 행려자들 무료급식소에서 행려자들 사이에도 부자가 있고 가난한 이들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신문지를 하나도 가지지 못한 사람이 신문지를 많이 가진 사람에게서 하나를 훔쳐 갔을 때 서로 피 터지게 싸우는 것을 보았다. 이분들이 부자입니다. 이런 분들은 하늘 나라 들어가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주님은 재산의 양을 줄여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재산이 그들의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시어 구원하십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 란 책에 ‘회심기’ 란 부분이 있다. 마음을 바꾸어먹게 된 이야기입니다.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3년 전,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절의 경내지가 종단의 몇몇 사무승들의 농간에 의해 팔렸을 때, 나는 분한 생각 때문에 며칠 동안 잠조차 이룰 수 없었다. 전체 종단의 여론을 무시하고 몇몇이서 은밀히 강행한 처사며 수천 그루의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눈앞에서 넘어져 갈 때, 그리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불도저가 산을 헐어 뭉갤 때, 정말 분통이 터져 견딜 수가 없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원망스럽고 저주스러웠다. 함께 살던 주지 스님도 다른 절을 맡아서 가고, 그 그늘에서 붙어살던 나는 그야말로 개밥의 도토리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나는 다른 도량으로 옮겨 차라리 눈으로 보지나 말자고 내심 작정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법당에서 예불을 마치고 내려오던 길에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본래 한 물건도 없다는 이 말이 떠오른 순간 가슴에 맺혔던 멍울이 삽시간에 술술 풀리었다. 그렇지! 본래 한 물건도 없는 거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도 아니고, 이 세상을 하직할 때 가져가는 것도 아니다. 인연 따라 있었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고 마는 거다. 언젠가 이 몸뚱이도 버리고 갈 것인데. 이렇게 생각이 미치자 그전까지의 관념이 아주 달라졌다. 

내가 주지 노릇을 하지 않고 붙어살 바에야 어디로 옮겨 가나 마찬가지 아니냐. 중생들끼리 얽혀 사는 사바 세계라면 거기가 거기지. 그렇다면 내 마음 먹기 탓이다. 차라리 비리의 현장에서 나를 키우리라.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난다는 옛사람의 말도 있지 않더냐. 이때부터 팔려나간 땅에 대해서도 애착이 가지 않았다. 그것은 본래 사찰 소유의 땅이 아니었을 것이다. 신도들이 희사를 했거나 아니면 그때까지 주인이 없던 땅을 절에서 차지한 것일 게다. 그러다가 그 인연이 다해 내놓게 된 것이다. 그리고 경내지가 팔렸다고 해서 그 땅이 어디로 간 것이 아니고 다만 소유주가 바뀔 뿐이다. 이날부터 마음이 평온해지고 잠을 제대로 잘 수 있었다. 그토록 시끄럽던 불도저며 바위를 뚫는 컴프레서 소리가 아무렇지 않게 들렸다.” 이것이 부자에서 가난한 사람이 되는 과정입니다. 무엇이 있다고 부자가 아니고, 무엇이 없다고 가난한 자가 아닙니다. 내 것으로 생각하면 부자이고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가난한 것. 

주님께서 부자를 어떻게 구원해주실까요? 바로 당신이 ‘주(인)님이 되어주심으로써’ 입니다. 신문지 하나도 내 것이라고 믿으면 부자이고, 수억 원의 재산도 주님 것이라 믿으면 가난한 것. 주님께서는 당신이 우리 모든 것의 주님임을 일깨워주심으로써 우리를 가난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가난한 자 되게 하는 방식입니다. 제가 주님께 많은 것을 드린다고 착각했을 때 주님께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 라는 음성을 들었다. 

그때부터 ‘내 것’ 이란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라는 말이 이해되었다. 종은 아무리 가져도 그 가진 것이 다 주인의 것이기 때문에 가난할 수밖에 없다. 하느님을 주님으로 모신 이는 그분의 종이기 때문에 일절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다. 주님은 이 믿음을 주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우리가 받은 것 중 일부를 도로 봉헌함으로써 굳건해집니다. 내 소유가 아무것도 없음을 고백하는 방식이 새로운 계약을 위한 선악과인 ‘교무금과 봉헌금’ 입니다.

  우리 모두가 “지나간 일들은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지금 일들은 하느님의 사랑에 맡기고, 다가올 일들은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며...” 지금 이 순간 희망을 붙잡고 구원의 축제를 살아가는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교만은 천사를 악마로 만들었으나 겸손은 인간을 천사로 만들었다” - 성 아우구스띠노 -


♡2281회 한 가지 생각에 집착하여 모든 에너지를 다 소진해버리는 일은 없나요?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1월 15일(에제키엘서 41장~ )

  애플의 창업자 ‘아이폰’  ‘스티브 잡스’는 “엄청난 돈을 벌었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평생 먹고 사는데 부족하지 않을 만큼이면 충분했다. 나머지 인생은 다른 가치 있는 일을 하면서 살았어야 했다. 특히 부부 사랑과 이웃 사랑에 힘써라.” 

《아름다운 삶을 위한 생각》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는 것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분주히 하루를 여는 사람들과 초록으로 무성한 나무의 싱그러움 속에 잠깨는 작은 새들의 문안 인사가 사랑스럽다. 희망을 그린 하루가 소박한 행복으로 채워질 것들을 예감하면서 하루를 축복합니다. 밤사이 아무도 모르게 대문에 붙여 놓은 광고지를 살짝 떼어내며 힘들었을 그 누군가의 손길을 생각해 보았다. 나만 힘들다고 생각하면 나만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그만큼 작아지고 가슴에 담을 수 있는 이야기와 행복 또한 초라한 누더기 입고선 추운 겨울벌판 같을 것. 이제 시작하는 하루는 자신을 위하여 불평을 거두고 마음을 다스려 사랑과 희망의 시선으로 감사의 조건들을 바라 보셨으면 합니다. 긍정적인 사고를 갖고 환경에 굴함 없이 간직한 꿈을 향하여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향하는 길에서 지쳐 멈춰서기도 하겠지만 그 길이 올바른 길이라면 결코 물러서지 않는 의지로 또다시 걸음을 떼어 놓을 수 있는 용기를 내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따뜻한 사랑의 불씨를 끄지 않은 한 닥친 역경과 시련마저도 그 불꽃을 강하게 피우는 마른 장작에 불과 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이미 알고 있다. 우리는 저마다 개성과 인격을 지닌 단 하나 뿐인 소중한 사람임을 잊지 말고 희망을 그려가는 너그럽고 자랑스러운 하루였으면 합니다. 인류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는 지구입니다. 지구에서 생명의 양식과 에너지를 얻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욕심이 통제되지 않으면 인간이 지구에 가장 위험한 존재가 됩니다. 그러면 지구도 자신이 살려고 코로나바이러스와 같은 것들을 만들어냅니다. 인간이 지구를 통제하지 못하면 지구가 인간을 통제하게 되는 것. 우리 안에 지구와 같은 존재가 있다. 마음입니다. 혹은 마음에서 나오는 기분, 즉 감정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기분이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마치 지구처럼 감정이 인간을 통제하게 됩니다. 분노 조절 장애와 같은 것을 겪게 되는 것. 사냥꾼들이 곰을 잡는 방법 중에 이런 것이 있다고 합니다. 곰이 잘 다니는 길목에 커다란 돌덩이를 매달아 놓습니다. 그러면 그곳을 지나던 곰이 돌덩이에 머리를 부딪치게 됩니다. 머리를 부딪친 곰은 자기가 가는 길을 막은 돌에 화가 나서 그 돌덩이를 이마로 들이받습니다. 그러면 돌덩이는 저만큼 밀려갔다가 다시 곰을 향하여 밀려와 곰을 들이받습니다. 그러다 더 많이 화가 난 곰이 더 세게 돌덩이를 들이받습니다. 곰의 반복되는 무차별한 공격은 점점 그 도가 더 심해집니다. 결국, 곰은 그 어리석은 힘겨루기로 머리가 터지고 녹초가 되어 힘을 다 소모해버립니다. 그때 지켜보던 사냥꾼들이 와서 곰을 끌고 가면 그만이라고 합니다.

정말 그럴까 싶을 정도로 미련한 것 같다. 그러고보면 인간은 안 그런가요? 한 가지 생각에 집착하여 모든 에너지를 다 소진해버리는 일은 없나요? 자기를 모함하거나 돈을 떼먹은 사람을 굳이 떠올리며 스스로 감정의 에너지를 다 써버리지는 않습니까? 예전에 중국 북부 산시성 산젠 마을에서 한 남자가 자신을 버린 부인에 대한 복수로 결혼식장에서 폭탄을 터뜨려 36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부상을 당한 일이 발생했다. 전직 석탄 광산 폭발물 전문가인 이 남자는 마차에 50kg짜리 폭탄을 싣고 마을 대로에서 열리는 결혼식장에 도착해 폭탄을 터뜨렸으며 자신도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범인은 지난해부터 부인이 자신을 버리고 아들을 데려간 후 질투심과 분노에 가득 차 ‘최악의 사고’ 를 낼 것이라고 친구들에게 말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감정을 정리할 시간이 1년이나 있었던 것. 하지만 그는 그 감정의 노예가 되어버렸고, 결국 수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다. 정작 사건의 원인이 되었던 범인의 부인과 세 자녀(아들과 두 딸)는 결혼식장에 없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분 나쁜 것을 외적인 요인으로 돌립니다. 그러나 지구가 망가지는 것이 태양 때문일까요? 인간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지구를 통제할 수 있다. 기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자가 통제할 수 있다. 기분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행복의 기술입니다. 지구가 인간에게 생존할 수 있는 에너지를 주듯, 감정도 우리에게 그런 에너지를 줍니다. 감정이 무너지면 삶의 에너지도 잃게 되어 살고 싶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기분을 어떻게 좋게 유지할 수 있을까요? 기분은 지구와 같다. 지구를 보존하는 방법과 같은 것. 괴롭히지 말고 내버려 두면 됩니다. 쉬게 해 주면 자연은 자연적으로 회복됩니다. 주님은 이를 위해 낮엔 일하고 밤엔 쉬게 하셨다. 그리고 일주일에 하루, 칠 년에 일 년은 쉬도록 하셨다. 농사를 짓더라도 칠 년에 일 년은 휴면기로 두는 것. 그러면 자연은 스스로 회복합니다.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휴식을 시켜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휴식을 시켜주어야 하는지 모르는 게 문제입니다. 감정의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이 ‘생각’ 입니다. 생각은 지구의 인간들과 같다. 생각할 때는 감정의 에너지가 소진됩니다. 그렇다면 주기적으로 생각을 멈추어주면 좋다. 생각을 멈추면 기도가 시작됩니다. 그러면 감정이 회복됩니다. 💛💛💛성령께서 들어오셔서 사랑과 기쁨의 감정을 일으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미련한 처녀들은 기분이 나빠지고 나서야 이것을 회복하려 하는 사람들과 같다. 지구가 다 망가진 후에야 부랴부랴 회복시키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다. 규칙적인 기도를 하며 감정이 나빠지지 않게 주의해야 합니다. 전에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파리 기후협약을 탈퇴하였다. 금성이 지구와 가장 비슷하지만, 인간이 살 수 없는 이유는 표면 온도가 450도나 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이산화탄소가 더 많은 온실효과 때문입니다. 지구도 최근 몇 년간 이산화탄소 수치가 지나치게 상승하였다. 인간이 지구를 쉬게 하지 못하게 한 이유 때문입니다. 망가진 다음에 고치려고 하면 소용없다. 감정도 망가지기 전에 규칙적으로 쉬게 해 주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현명한 처녀와 같다. ‘규칙적인 기도’ 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기분을 잘 조절할 줄 아는 사람들이 어쩌면 지구를 살릴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자기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는 규칙적인 쉼의 시간을 꼭 가져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가졌다고 뽐내지도 말고... 없다고 기죽지도 말고... 언제나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그리고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행복한 우리들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마귀라 할지라도 우리의 나쁜 생각들에 힘을 보태어 부추길 수는 있지만, 그 생각들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 존자 베다 -


♡2282회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1월 16일(다니엘서 1장~ )

알랭은 ''다리를 움직이지 않고는 작은 도랑도 건널 수 없다.''
어려움에 처한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삶의 여정은 크게 3가지로 구분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방황, 안주, 순례의 삶입니다. 목적도 없고 방향도 없이 줏대 없이 이리저리 헤매는 삶, 이 삶을 방황이라고 표현합니다. 안주는 천상을 바라보고 영원한 삶을 추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현실에 머물러서 그 안에서 기뻐하며 살아가려하는 모습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하느님 품 안에 들어가기까지는 늘 불안합니다.” 고 고백하였다. 성인은 “비틀거리고 절면서 바른 길을 가는 것이, 편안히 서서 그릇된 길로 가는 것보다 낫다.”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편안하고 안락한 길에 관심을 두지만 우리 믿는 이들의 관심은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에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과 베드로의 모습을 봅니다. 혼자 기도하시던 예수께서는 맞바람을 만나 파도에 시달리는 제자들에게 가셨다. 어둠 속에서 풍랑에 시달리며 두려움에 빠져 있자 거기에서 구해주시려 단숨에 달려가셨다. 위기에 빠진 자녀를 구하는 심정으로 서둘러 가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에게는 물 위를 걸어 ‘오너라.’ 하셨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밟고 예수께로 걸어갔다.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하고 청한 자기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 기쁨도 잠깐이었다. 거센 바람을 보자 그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져 들게 되었다.(마태14,30)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는 물 위를 걸었지만 거센 바람을 보았을 때는 물에 빠졌다. 결국은 주님을 가슴으로 받아들였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의지가 약했다. 아무리 험한 상황이라 해도 그 속에 주님이 계시거늘 그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놓치고 만 것. 이렇게 어려움이 생기면 믿음이 흔들리고 맙니다. 우리 삶의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둠과 거친 맞바람으로 여겨지는 위기가 참으로 많다. 가정의 불화, 경제적 어려움, 이웃과의 소원한 관계, 알콜, 흡연, 도박 등등 감당하기 힘든 일이 있을 때 두려워 집니다. 이때야 말로 내가 기댈 주님께서 다가오고 계시는 때입니다. 거센 바람을 뚫고 제자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께서 바로 나의 삶의 자리에도 오십니다. 아니 오셨다. 그런데 문제만을 보니까 옆에 게신 그분이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어떤 위기와 어려움에 처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두려움보다 먼저 와 계십니다. 그러니 평온할 때도, 시련과 역경 안에서도 우리는 늘 그분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겠다. 마음의 문을 열어 그분께 철저히 의지해야 합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신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

 한 스님께서 돌다리를 건너다가 발을 잘못 디뎌 넘어질 뻔하자 ‘아이구, 하느님!’ 하셨다. 누구든지 급할 때에는 ‘하느님 맙소사!, ‘아이구 하느님’ 을 찾게 되고 봉변을 당 할 때에는 ‘하늘이 노할 일이다’, 하늘 무서운 줄 알아라, ‘하늘만은 안다.’ 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보다 큰 힘을 가진 어떤 것에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 다시 말하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하느님을 찾는다는 것. 이것이 종교심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일지라도 그가 종교심 차원에 머물러 있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에 이르는 것을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종교심을 승화시켜 신앙심으로 끌어올릴 때 비로소 그 사람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정하권) 우리는 본능을 넘어 옛 생활을 버리고 새 생활을 해야 합니다. 신앙심은 인간을 찾으시며 은총과 계시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부르시는 인격적인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응답하는 자세를 일컫습니다. 하느님이 먼저 부르셨기에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바로 ‘신앙’(믿음)입니다.(차동엽)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다.”(2디모1,9) 믿음은 아무래도 ‘머리’ 로 믿는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성경의 말씀을 수긍하고 받아들여 믿는 것.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진리에 동의하는 지성적 행위’ 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분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히브11,6)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우리는 가슴으로 믿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현존, 사랑, 예수께서 주시는 용서와 평화 등을 마음으로 받아들여 느끼고 체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믿음의 모범으로 아브라함을 보면 되겠습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사악을 바쳤습니다.”(히브 11,17)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의탁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을 해냈다. 이러한 믿음을 갖도록 성경은 말합니다. “주님을 신뢰하며 선을 행하고 이 땅에 살며 신의를 지켜라.”(시편 37,3) “너희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 같습니다.(야고 1,6) 마침내 의지로 믿어야 합니다. 세상의 셈법을 따르지 않고 조건이 어떠하든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철석같이 믿는 것. 

기도에 대한 응답, 신앙 안에 키워온 어떠한 꿈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는 것. 그때는 내가 원하는 때와 방법이 아니지만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3-24) “그대도 보다시피, 믿음이 그의 실천과 함께 작용하였고 실천으로 그의 믿음이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야고 2,22)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마태 17,20) 결국 하느님의 약속을 확고히 믿고, 이미 받은 사람으로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 것. 우리의 믿음은 항구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는 불신으로 하느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믿음으로 더욱 굳세어져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수 있다고 확신 하였다.(로마 4,20-21) 우리도 이러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모든 일이 잘 풀린다면’, 내 사업이 잘 된다면, 내가 행복해진다면, 건강이 좋아진다면, 성공한다면’, 그 때 하느님을 믿고 감사드리고 헌금도 많이 하겠다고 합니다. 소위 ‘……한다면’ 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 반면에 ‘비록 악한 사람이 선한 이들보다 잘 사는 듯이 보여도, 착하게 산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해도, 사랑하는 이가 고통 안에 있어도 나는 그 순간에도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을 신뢰할 것입니다.’ 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한 마디로 전천후 신앙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는 십자가의 성 요한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해도 좋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리면” 했듯이 어떤 처지에서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입니다. 변화무쌍하고 덧없는 세월에도 상관없이 소신을 지켜 나가는 것. 바오로 사도는 “내가 궁핍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 나는 비천하게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다.”(필립4,11-12) 하고 말했다. 사실 믿음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천적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야고보서 2장26절에 보면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고 기록하고 있다. 마태복음7장 21절에서도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고 하며 믿음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예기치 않은 위기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급히 달려오는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고 굳건해 지시길 바랍니다. 어떤 불이익이나 비난이 거센 바람과 성난 물결로 밀려오더라도 아버지의 뜻을 행함에 있어서 주저하지 않으시길 빕니다. 

마음의 시험과 환경의 풍파가 다가와도 끄떡하지 않는 굳건한 믿음이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 믿음만큼 우리를 축복해 주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이 깊지 못한 사람에게 은총을 주시면 그가 은총을 간수하지 못하고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는 은총을 주시는 주님은 생각 않고 은총의 결과물에만 매달리게 되고 결국 타락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은총을 주실 때 시련을 통해서 주십니다. 시련의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5,3-4) 그러므로 더 많은 시련과 단련을 통해서 그만한 은총을 준비하시는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베드로도 실패를 통해서 더 큰 제자가 되었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25년동안 수많은 시련과 환난 속에 단련을 받았고, 야곱도 20여년간 머슴살이를 하면서 시련을 겪었다. 요셉도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깨끗하고 충실한 사람이었으나 하느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13년 동안 종으로 팔려가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그러나 한 번도 하느님을 거역하지 않고 인내를 통하여 그의 영적 믿음을 성장시켰고 마침내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되는 은총을 얻게 되었다. 이렇게 은총은 시련을 통해서 다가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베드로에게 닥친 세찬 바람이 은총이었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바람을 바라볼 때 어떻게 되는지를 그는 확실히 체험했다. 믿음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험한 상황이라도 그 속에 숨어계신 예수님을 보는 사람에게는 문제 될 것이 없다. 우리 인생항로에서도 역풍을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남편을 통해서, 아내를 통해서 오기도 하고, 자식을 통해서 오기도 합니다. 공동체를 통해서도 이웃을 통해서도 옵니다. 물론 직장을 통해서도 오고, 주변 환경과 생활을 통해서도 견딜 수 없는 큰 아픔이 옵니다. 그때야 말로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요, 더 큰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순간 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곤경의 맞바람을 보지 말고 그 한복판에 계신 구원자 예수님을 보아야 하겠다. “어둠 속에 있어도 믿음과 희망 안에 사십시오. 어둠 속에서도 하느님은 당신을 지켜 주시니 말입니다. 걱정일랑 하느님께 떠맡기십시오,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 인생 여정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사랑하며 살아온 삶이 영원히 남아 우리 모두 천국에서 만날 수 있는 은혜가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항상 갈구하라. 바보짓을 두려워마라.'' - 스티브 잡스 -


💖성령봉사자 박재만 세례자요한 010 - 3878 - 6634
  (수필가ㆍ전국성령쇄신봉사자협의회 말씀추천강사)
💖성령봉사자 류태숙 M.막달레나 010 - 6560 - 7354
  (시인ㆍ수필가ㆍ꽃예술설화중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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