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령기도회 봉사

♡2242회 ''돈을 많이 벌고 싶다면 기쁘게 쓰라'' - ♡ "세상의 참된 주인공" - ♡ 신앙 여정은 목적지가 분명한 여행입니다. - ♡

♡2242회 ''돈을 많이 벌고 싶다면 기쁘게 쓰라''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0월 7일(민수기 1장~ )

  아서 캐슬러는 ''중용(中庸)도 너무 지나쳐서는 안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그런데 그 와중에 미군 병사 한 사람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의 동료들은 시체를 전쟁터에 그냥 방치해 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식 장례를 치러 주기로 했는데, 전투가 벌어지는 일선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흰 울타리를 친 작은 공동묘지가 딸린 성당이 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친구의 시체를 공동묘지로 옮겨가기 위해 상사의 허락을 받은 병사들은 해가 지기 전 겨우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허리가 굽고 야윈 신부가 그들을 맞아 주었다. 깊은 주름이 팬 햇볕에 그을린 신부의 얼굴은 지혜와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번쩍이는 두 눈이 자리 잡고 있는 집처럼 보였다.

 한 병사가 정중하게 말을 꺼냈다. “친구가 전쟁터에서 숨졌습니다. 우리는 그를 교회 묘지에 묻어주고 싶습니다.” 신부는 병사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이해했지만 아주 서투른 영어로 이렇게 대답했다. “미안합니다. 우리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면 이곳에 묻어 줄 수가 없습니다.” 수개월에 걸친 전쟁에 지친 병사들은 서운한 기색조차 보이지 않은 채 말없이 그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그러자 노 신부가 그들을 불러 세웠다. “그렇지만 울타리 밖에 묻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 말에 화가 나긴 했지만 병사들은 하얀 울타리 밖에 땅을 파고 친구를 묻어 주었다. 그 일을 다 마쳤을 때는 이미 해가 떨어지고 난 다음이었다. 다음날 아침 전선을 옮기라는 명령을 받은 병사들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친구에게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그 작은 성당을 다시 찾아갔다. 그러나 친구를 묻은 자리를 찾을 수 가 없었다. 지치고 어리둥절해진 병사들은 성당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친구를 묻은 자리를 알고 있는지를 물었다. “어젯밤 지치기도 했고 어두워서 그랬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그 말에 노 신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어젯밤 댁들이 떠난 후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 내가 울타리를 옮겨 놓았습니다.” 

성체는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같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일까요? 아닙니다. 오직 성변화가 일어남을 믿는 가톨릭 신자들만이 밀떡의 모습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몸이라 말합니다. 이것이 성사의 특징입니다. 성사(聖事)는 거룩하게 된 것이지만 거룩하신 분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모든 성사도 거룩하지만 실제로는 각자의 믿음에 따라 다르게 보입니다. 성경도 성령으로 거룩하게 된 문자들로 된 책입니다. 성경도 성사이기 때문에 각 종교의 믿음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다. 각자가 다르게 보이는 기준 가지고 무슨 논쟁을 할 수 있겠습니까? 각자 자기 주장만 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성체를 가지고 논쟁을 해봐야 그 안의 본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결론이 날 수 없고 각자의 주장만 남을 뿐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처음 발생했던 논쟁은 바로 ‘할례’에 관한 규정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할례에 대해 논쟁하면서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성경을 먼저 펴고 연구했을까요? 아닙니다. 성경에는 교회가 소집되었다고 나옵니다. 위의 예화에서 병사들이 동료의 시신을 교회 안에 묻기 위해 성경을 펴들고 자신들의 주장을 펼 수 없다. 왜냐하면 성당은 그들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영역을 내어줄 것인지 말 것인지는 각자가 다르게 해석하는 성경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종교의 주체의 재량에 맡겨진 것. 따라서 모세의 율법인 할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을 때 성경을 펴 놓고 자신들끼리 논쟁하기보다는 교회에 건의를 하고 교회의 구성원들이 소집되어 그 결정을 내리게 된 것. 교회는 가차 없이 울타리를 넓혀서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할례규정을 폐지해 버렸다. 이는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권한도 성령을 충만히 받은 교회에 달려있기 때문이었다. 

성령강림을 통해 세워진 교회의 뿌리가 지금까지 이어지는 교회는 가톨릭교회 외에는 찾을 수 없다. 성령께서 쓰셨다면 성령께서 가장 완전한 해석을 해 주실 수 있는데, 그 성령께서 가톨릭교회 안에서 활동하게 계신 것. 따라서 성경은 성체처럼 그 믿음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의 판단 규범이 될 수 없음을 깨닫고 성경을 펴 놓고 자신들의 교리에 끼워 맞추는 설명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를 가져다놓고 코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 그러나 오직 그 용도를 알 수 있는 사람은 그것을 만든 사람뿐이고 그것을 만든 사람은 교회 안에 계십니다. 교회가 모여 정하면 그것이 곧 해석의 울타리가 되는 것. 교회를 먼저 믿으면 밀떡 모양이지만 성체로 보이는 것. 교회 안에서 성체성사가 이루어짐을 먼저 믿어야 성체를 통한 구원에 이릅니다. 물론 이것도 예수님은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성경에 쓰여 있는 데도 다른 그리스도교에서는 믿지 않습니다. 각자의 해석의 울타리가 있는 것이지 성경 자체를 연구해서 진리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먼저 울타리를 칠 수 있는 교회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그 울타리 안에서 성경이 오류 없이 완벽하게 이해될 것.

 올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 홍주연 작가의 『더 해빙』입니다. 홍주연 작가는 사업 실패로 돈에 대한 트라우마가 심했던 아버지 밑에서 컸다. 아버지는 자린고비였다. 그래서인지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굴비였다. 아버지가 췌장암에 걸렸다고 하여 홍주연 작가가 마지막에 굴비라도 실컷 드시고 가시라고 10마리 보내드렸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것도 아껴 드시다 5마리를 남기고 돌아가셨다. 병원도 굳이 6인실을 선택하여 죽을 때까지 돈을 아끼셨다. 그러나 홍주연 작가는 ‘그렇게 돈을 아끼면서도 왜 아버지는 평생 가난하셨을까?’를 궁금해하였다. 물론 자신도 돈을 쓰는 것에서 항상 불안하고 부족함을 느꼈다. 그러다가 어렸을 때부터 비범하였고, 지금은 전 세계 재벌들의 컨설팅을 해 주고 있는 이서윤 선생을 만납니다. 

그녀는 수십만 명의 부자들을 연구하여 ‘해빙’(Having)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낸 인물입니다. 그녀는 홍주연 작가에게 ''돈을 많이 벌고 싶다면 기쁘게 쓰라'' 고 말해줍니다. 돈을 낭비하라는 말이 아니라, 돈을 쓰면서 기쁜 마음이 들 때만 쓰라는 것. 꼭 필요했던 것, 혹은 누군가를 도와줄 때는 돈을 쓸 때 마음이 기쁩니다. 그렇게 무언가를 기쁘게 내어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그 원천으로 향하게 됩니다. 원천으로 향할수록 더 많이 받게 됩니다. 원천은 그것이 솟아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돈도 물처럼 흐름이 있는데 기쁘게 흐르는 그 흐름에 자신을 맡길 때 부족함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이렇듯 무언가를 기쁘게 내어줄 때, 그것이 무엇이든 그 기쁘게 내어주는 것의 원천으로 향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내가 용서를 기쁘게 하고 있다면 자비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향하고 있는 것이고, 내가 말씀을 전하고 있다면 진리이신 주님께 향하고 있는 것이고, 내가 사랑하고 있다면 사랑 자체이신 주님께 향하고 있는 것. 물론 내가 누군가를 쉽게 미워하거나 질투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미움의 원천으로 향하고 있다. 빨리 회개하지 않으면 되돌아올 수 없는 만큼 가버리고 맙니다. 구약에 하늘로 승천한 사람이 두 명 나옵니다. 에녹과 엘리야입니다. 에녹이 하늘로 승천한 이유는 ‘하느님과 함께 걸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걷는다는 말은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는 뜻입니다. 누군가의 존재가 나와 함께 있다면 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그 사람의 뜻이 계속 나를 괴롭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함께 있다면 하느님의 뜻이 나를 괴롭힐 것이고, 그 뜻을 받아들여 실행한다면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엘리야는 하늘로 오르며 자신의 제자 엘리사에게 자신의 망토를 떨어뜨렸다. 엘리사가 그 망토로 강을 치니 강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이는 마치 홍해를 가를 때 모세가 들었던 지팡이와 같은 힘을 지닌 것. 바로 ‘성령’이고 ‘은총’을 상징합니다. 누군가에게 은총을 주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은총의 원천으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그래도. 괜찮아!” 라는 말씀으로 주님의 권위와 능력을 입고, 우리들이 바라는 소망을 이루시는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돈은 거름과 같아서 뿌리지 않으면 썩기 쉽다.'' - 베이컨 -



.
♡2243회 "세상의 참된 주인공"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0월 8일(민수기 23장~ )

  채근담에 ''풀과 나무는 시들어도 뿌리에선 어느새 새싹이 돋아난다. 만물의 죽음에는 다시 태어나게 하는 신의 뜻이 담겼다.''
《세상의 참된 주인공은 당신 입니다.》세상이 아무리 험악 할지라도 진정 사랑을 거부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든 정말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면 그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자신을 둘러싼 문제가 무엇이든 간에 이겨낼 힘을 얻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어려움을 만난 사람에게는 더욱 더 사랑이 필요하지요. 사람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유형이 있다. 키가 큰 사람, 말을 재미있게 하는 사람, 잘생긴 사람, 귀여운 사람, 터프한 사람, 돈 잘 쓰는 사람, 날씬한 사람, 통통한 사람 등 다양합니다. 그런데 이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취향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희망하는 유형이 있다. 마음이 넓은 사람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좁고 작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자신은 사랑받고 싶어합니다. 때문에 그런 자신을 이해할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넓히기 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이 넓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땅에는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적습니다. 처음 만났을 땐 마음이 넓은 것 같지만 조금 지나면 그도 역시 우리 만큼 밖에 안 되는 속 좁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또다시 마음 넓은 사람을 찾아갑니다. 세상에서 자신보다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번개를 맞는 것보다 넓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사랑할줄 아는 사람 그는 바보를 천재로 만들수 있는 사람이고 고장난 세상을 고치는 기술자입니다. 우리가 남들보다 조금 더 사랑할 줄 안다면 우리는 모든 곳에서 환영받는 주인공이 될수 있다. 주님께서 용서와 사랑을 우리에게 거저 주시듯 사랑받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주는 당신이 "세상의 참된 주인공" 입니다. 

요즘이야 반려견 관리에 더 철저해서 목줄을 반드시 채워 산책해야 합니다. 만약 목줄을 하지 않고 풀어 놨다가 사람이 다치기라도 하면 반려견의 주인이 책임을 져야 하지요. 그런데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거의 개를 풀어서 키웠습니다. 그래서 동네에 목줄 없이 돌아다니는 개들이 정말로 많았습니다. 한 번은 학교 갔다가 집으로 오는 길에 돌아다니는 개 한 마리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제게 앞에 있는 개는 너무 크게만 보였지요. 그래서 개를 향해 가까이 오지 말라면서 손을 흔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개에게 물리고 말았습니다. 마침 지나가시던 어떤 아저씨가 나서서 개를 쫓아내서 저를 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울고 있는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개 신경을 건드려서 물린 거야. 가만히 있었으면, 또 무시하고 지나갔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거다. 다행히 크게 물린 것 같지는 않은 것 같으니까 얼른 집에 가라. 괜찮아.” 유혹에 대해 묵상을 하다가 어렸을 때의 이 일이 생각났다. 유혹을 대하는 방법과 돌아다니는 개를 대하는 방법이 같지 않을까 싶다. 우리에게는 많은 유혹이 다가옵니다. 그런데 이 유혹이 무섭다고 또 두렵다고 유혹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유혹은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지나가는 것. 이를 위해 유혹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꾸짖습니다. 그 위선이 바로 불행선언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유혹 그 자체만을 바라본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끝이 없는 힘든 의무를 부과했다.  ‘이것도 하지 마라, 저것도 하지 마라.’ 고 하면서 죄인으로 살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 입니다. 하느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도 ‘사랑’ 때문이지요. 구원의 길로 들어설 수 있도록 지켜야 할 율법을 주신 것. 그런데 사랑이 완전히 빠져 있다 보니,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율법이 되고 말았다. 사랑이 전혀 없이 율법을 해석하면서 사람들이 진리를 바라볼 수 없도록, 그래서 하늘 나라의 문을 닫아 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단죄하는 교만함은 유혹만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과 이웃에 기준을 두는 사랑의 말과 행동은 함께 살아가는 기쁨의 삶을 우리에게 줍니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라틴어에서 겸손을 뜻하는 단어 Humilitas는 흙, 먼지를 뜻하는 Humus에서 유래합니다. 따라서 겸손이란 말은 흙에서 난 인간 존재임을 기억하면서 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임을 기억할 때, 교만과 허영심 등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그래서 성인들은 “겸손은 하느님과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에서 생겨난다.” 라고 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과 부족하고 나약한 나 자신을 확실히 깨닫게 된다면 언제 어디에서든 겸손의 삶을 살 수가 있다. 이를 깨닫지 못해서 하느님과 나의 위치가 뒤바뀌었을 때 우리 안에는 교만이 자리 잡게 됩니다. 따라서 자신이 불완전한 인간이며 죄인임을 인식하며 하느님의 자비에 희망을 두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는 나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교만은 내게 몇 가지 불능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1) 청각불능. 남의 말을 듣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 집착합니다.
2) 시각불능. 남의 결점과 잘못만 눈에 들어옵니다.
3) 언어불능. 언어폭력이 쉽게 이루어집니다.

  깨어있음과 기도로써  허약함과 부끄러움, 그리고 부족함이 많은 우리들 마음 안에 햇살 담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전되어, 마음 안에 있는 두려움을 능히 이겨내는 기쁨이 흐르기를... 그래서 우리들의 옷 위에 첫 단추는 햇살담은 하느님 사랑의 첫 단추이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인간에게 큰 죄가 두 가지 있는데 다른 죄들도 모두 여기에서 나옵니다. 조급함과 게으름이 그것입니다.” - 프란츠 카프카 -


♡2244회 신앙 여정은 목적지가 분명한 여행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0월 9일(신명기 1장~ )

  공자는 ''주장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먼저 그것을 실천한 뒤에 주장하라.''
《사랑보다 정이 더 무섭다.》사랑은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들지만 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난다. 사랑은 좋은 걸 함께 할 때 더 쌓이지만 정은 어려움을 함께 할 때 더 쌓인다.사랑 때문에 서로를 미워할 수도 있지만 정 때문에 미웠던 마음도 되돌릴수 있다. 사랑은 꼿히면 뚫고 지나간 상처라 곧 아물지만 정이 꽂히면 빼낼 수 없어 계속 아프다. 사랑엔 유통기한이 있지만 정은 숙성기간이 있다. 사랑은 상큼하고 달콤하지만 정은 구수하고 은근하다. 사랑은 돌아서면 남이지만 정은 돌아서도 다시 우리란다. 사랑이 깊어지면 언제 끝이 보일지 몰라 불안하지만 정이 깊어지면 마음대로 뗄 수 없어 더 무섭다. - 사랑할 때 알아야 할 것들 中 -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은, 하느님이신 당신의 본 모습을 드러내시고,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의 영광을 직접 보게 해 주신 일인데, 제자들에게 믿음과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한 일종의 시청각 교육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중에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차지할 것이다.” 라는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나라와 그 나라의 영광을 직접 체험하게 해 주심으로써, 제자들의 믿음이 ‘머리’ 로만 믿는 믿음이 아니라, ‘온 삶’ 으로 믿는 믿음이 되게 해 주셨다. 그리고 그 일은 ‘신앙인들의 희망’ 은 백퍼센트 확실한 희망이라는 확신을 심어 주신 일이기도 합니다. 안 이루어질 가능성은 전혀 없는, 이미 이루어진 것과 같은 희망입니다. 그 희망과 믿음이 있기 때문에 신앙인들은 지상에서 겪는 고난들을 참고 견딜 수 있다. 지상의 고난은 금방 지나가는 잠깐 동안의 일이고, 하느님 나라의 영광은 영원합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그 ‘영원’ 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마태 17,1-3) 예수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이 빛처럼 하얘졌다는 말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예수님께서 눈부시게 빛났다는 뜻입니다. ‘해처럼 빛나고’ 라는 말과 ‘빛처럼 하얘졌다.’ 라는 말은 모두 ‘하느님의 영광’ 을 묘사하는 말인데, 인간의 언어로 하느님의 영광을 묘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나타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눈 일도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의 일부입니다. 이 일은, 율법의 대표자인 모세와 예언의 대표자인 엘리야가 예수님에게 종속되어 있음을, 즉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을 섬긴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나타냅니다. 즉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 이라는 증언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마태 17,4-6) 베드로 사도가 한 말은, “이대로 영원히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영광과 하느님 나라의 황홀경에 취해서,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마르 9,6), 자신의 인간적인 소망을 말한 것. 우리는 너무나도 행복할 때,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 라고 말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도 그런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목격하거나 체험한 사람들은 예외 없이 누구나 그곳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행복한 곳이라고, 인간의 언어로는 제대로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히 황홀한 곳이라고 증언합니다. ‘빛나는 구름’ 이 제자들을 덮었다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나타나셨다는 뜻입니다.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하느님께서 베드로 사도의 말을 중간에 끊으셨다는 뜻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아버지 하느님께서 아들 예수님의 신원을 직접 확인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은 ‘사랑으로’ 완전히 일치되어 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그의 말’ 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 말씀과 16장 24절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려면, 십자가의 길을 거쳐야 합니다. 아무도 십자가를 생략하고 영광으로 직행할 수는 없다. 하느님 나라에 빨리 가려고 자살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몹시 두려워했다는 말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에 대해서 피조물인 인간들이 느끼는 본능적인 경외심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무서워하는 감정과는 다른 것.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명령하셨다."(마태 17,7-9) 예수님께서 ‘본 것’을 부활 때까지 발설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것은, 비밀을 지키라는 뜻이 아니라, 부활 후에야 비로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세상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할 것이기 때문에 그때 말하라는 뜻입니다.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최종 목적지에 대해서만 집착하면서 십자가를 건너뛰려고 할 수도 있다. 아무에게나 하늘나라를 보여 주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지상에서의 삶’ 의 의미와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늘나라를 미리 보여 주면, 지상에서의 신앙 여정을 생략하고 자살이라도 해서 그곳으로 직행하려고 덤비는 사람들이 많이 생길 것. 예수님의 변모는 신앙 여정의 최종 목적지를 미리 보여 주신 일이고, 그곳까지 가는 데에 필요한 힘과 용기를 주기 위한 일이고, 인내의 이유를 가르쳐 주신 일입니다. 신앙 여정은 목적지가 분명한 여행입니다. 정처 없이 떠도는 유랑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곳까지 가는 과정이 어떤지도 분명히 드러나 있는 여행입니다. 신앙인의 ‘구원’ 에 대한 희망은 틀림없이 이루어질 확실한 희망이기 때문에 희망이 있는 한 신앙인은 이미 구원을 받은 것과 같다. 그렇지만 구원이 완전히 완성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완성되는 그날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나아가야 합니다.

  살아있음의 가치로 전체를 보시는 주 예수님을 소망하고 따름으로써 우리들의 몸과 마음이 치유되는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기회가 오지 않을 때에는 스스로 기회를 만들라.'' - 스마일즈 -


♡2245회 ‘말이 입힌 상처는 칼이 입힌 상처보다 깊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0월 9일(신명기 11장~ )

  존 워너메이커는 ''생각만으로는 일이 실현되지 않는다.''
 《뿌린 대로 거두리라》상처를 주면 상처로 돌아오고, 희망을 주면 희망으로 돌아온다.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만큼 먼저 대접할 줄 알아야 한다. ‘말이 입힌 상처는 칼이 입힌 상처보다 깊다.’ 는 모로코 속담이 있다. ‘말은 깃털처럼 가벼워 주워 담기 힘들다.’ 는 탈무드의 교훈도 있다. 상대를 낮추며 자신을 올리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상대를 무시하면 자신도 무시당하게끔 되어 있다. 배려와 존중의 말로 자신의 격을 높여가야 한다. 날개는 남이 달아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을 뚫고 스스로 나오는 것. 당신 속에 숨어있는 꿈의 날개를 활짝 펴고, 높이 날아오르는 하루를 만들어라. - 꿈꾸는 다락방中 , 이지성 - 어떤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께 와서 딸을 고쳐 달라고 간청한 이야기는, 단순한 병자 치유 이야기가 아니라 ‘이방인 구원’ 에 관한 이야기이고,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이방인 여자를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시켜 주신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여자의 딸이 나은 일은 부수적인 일이고, 진짜로 치유된 사람은 바로 그 여자입니다. 이 이야기를 해설할 때, 여자의 간절함, 겸손, 믿음 등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것들은 이야기의 핵심 주제가 아니고,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자격’ 이 핵심 주제입니다. 이방인이든지 유대인이든지 간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받으려면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이 이야기에 들어 있는 가르침입니다. 이야기에 나오는 여자의 변화는 예수님께서 인도해 주셨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자가 한 말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더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마태 15,21-23ㄱ)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는데도 예수님께서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신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지 않으신 것은, 여자의 간청이 대답할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침묵으로써 여자를 깨우쳐 주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1) 그 여자가 이방인이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여자를 ‘강아지’ 로 표현하신 것은(26절) 그 여자가 우상을 숭배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의 간청은, 자기가 섬기고 있는 우상들에게 소원을 비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임을, 또는 하느님을 그 우상들과 같은 급의 신으로 생각하고서 청하는 것임을 꿰뚫어 보셨고, 그래서 그 여자의 간청에 대답하지 않으셨다. 하느님을 우상들과 같은 급의 신으로 생각하고서 소원을 빌었다면, 그것은 신성모독죄가 됩니다. 2) 여자는 예수님의 침묵을 ‘거절’ 로 생각했을 것이고, 아마도 더 간절하게 청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침묵은, 여자의 간청보다는 신앙심이 잘못되었음을 깨우쳐 주기 위한 것. 여자는 하느님과 예수님은 자기가 섬기고 있는 우상들과는 완전히 다른, ‘살아계시는 분’ 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고, 하느님과 예수님을 제대로 믿어야 하고, 믿는 사람답게 생활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마태 15,23ㄴ-24) 여기서 예수님 말씀의 뜻은 “먼저 하느님을 믿어라.” 입니다. 그러나 유대교로 개종하라는 뜻도 아니고, 이스라엘로 귀화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것은 그 여자가 이방인이라는 점이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를 믿고 있다는 점,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여자가 예수님을 부를 때 사용한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22절)이라는 호칭은 믿음도 없이 그냥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는 호칭을 흉내 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이스라엘 집안’ 이라는 말은 유대 민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민족과는 상관없이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 또는 ‘하느님의 백성’ 을 뜻하는 말로 해석되고, ‘길 잃은 양들’ 은 하느님을 믿고 섬기면서 메시아의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들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 을 구원하려고 세상에 오셨다. 그러나 그 구원은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만이 받을 수 있다. 그 노력은 ‘믿음, 회개, 실천’ 입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마태 15,25-26)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라는 여자의 말에는 “하느님을 믿겠습니다.” 라는 뜻이 들어 있을 것. 아니면, 하느님을 믿겠다는 말을 한 다음에 도와달라는 말을 했을 것. 그러나 우상 숭배를 버리겠다는 말은 아직도 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우상 숭배를 완전히 버리게 하시려고 조금 강한 표현을 사용하셨다. 묵시록에 ‘개들’ 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이 나옵니다.(묵시 22,15) 필리피서에는 ‘개들’ 을 조심하라는 말이 나옵니다.(필리 3,2) 성경에서 ‘개들’ 은 우상숭배자들을 뜻하는 말인데, 예수님께서는 ‘강아지들’ 이라는 부드러운 표현으로 바꾸셨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라는 말씀은 “우상숭배를 버려라.” 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마태 15,27-28) 여자는 예수님 말씀을 알아들었고, 자기가 강아지라는 것을 깨달았고, 강아지 상태에서 벗어나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로 결심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라는 여자의 말은, “그동안 강아지로 살았던 것을 회개합니다. 지금부터는 자녀로서 살겠습니다.” 로 해석됩니다. ‘부스러기’ 에 관한 말은, “하느님은 강아지 같은 사람들도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믿습니다.” 로 해석됩니다. 여자의 믿음을 칭찬하신 예수님 말씀은, 당신이 인도하는 대로 여자가 잘 따라온 것을(강아지에서 자녀로 변화된 것을) 칭찬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예수님)에 대한 신앙은 우상 숭배와 양립할 수도 없고, 병행할 수도 없는 절대적인 것. 하느님(예수님)을 믿으려면 우상 숭배와 미신을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이미 신앙인이 된 사람들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신앙인이 미신을 믿는 행위를 하는 것은 자기 신앙을 부정하는 ‘큰 죄’ 입니다.

  우리들 모두가 십자가 예수님을 가슴에 품고 매 순간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저는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라는 은혜로운 고백으로 살아갈 수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위대한 발상은 책장에서 오래 썩지 않는다.'' - 존 M. 섀너핸 -


♡2246회 위선은 ‘큰 죄’ 가 됩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0월 11일(신명기 16장~ )

  마저리 샤프는 ''즐거움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만큼 지루한 것도 없다.''
《성숙 (成熟)》높다고 해서 반드시 명산이 아니듯이 나이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어른은 아니지요. 가려서 볼 줄 알고 새겨서 들을 줄 아는 세월이 일깨워 준 연륜의 지혜로 판단이 그르지않은 사람이 어른이지요. 성숙이라 함은 높임이 아니라 낮춤이라는 것을 채움이 아니라 비움이라는 것을 스스로 넓어지고 깊어질 줄 아는 사람입니다. 새벽 강가에 홀로 나는 새처럼 고요하고 저녁 하늘 홍갈 색 노을빛처럼 아름다운 노년들이여! 한 해 또 한 해를 보내는 마음으로 인생이 무상함을 서글퍼하기보다 깨닫고 또 깨달아야 합니다. 삶의 교훈이 거름처럼 쌓여가니 내 나이 한 살 더하여도 행복해야 합니다. 젊음도 좋지만 건강이 최고지요! 마음은 비우고 속은 채워서 건강한 생각으로 365일 보내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감사 福된 날 되세요. -좋은글 중에서- 

‘위선’ 은 사람들을 속이고, 하느님도 속이려고 하는 죄인데,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아직 교리 지식이 부족한 초보 신앙인들을 죄짓게 만들기도 하고, 안 믿는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는커녕 반대 방향으로 가게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위선은 ‘큰 죄’ 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는 죄’ 를 대단히 엄하게 단죄하셨습니다(마태 18,6). 사람들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위선자인 경우, 교리 지식이 부족한 초보 신앙인들은 그 위선자의 행실을 보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신앙생활인 줄 알고 그대로 따라 할 수도 있다. 또 선교활동을 하는 사람이 위선자인 경우, 그의 위선 때문에 복음이 왜곡되고 변질되어서 세상 사람들에게 잘못된 복음을, 즉 거짓 복음을 전해 주게 됩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심각하게 방해하는 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빈손으로 가라.” 라고 지시하셨는데(마태 10,9-10), 그 지시에는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또는 복음이 물질에 대한 걱정이나 욕심 등으로 오염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도 들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진실한 선교사는(사도는) ‘기쁜 소식’ 만 가지고 가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 만 전해 주는데, 생활비나 활동비 명목으로 돈을 욕심내는 위선자들은 사람들에게 ‘기쁨은 하나도 없고 욕심만 가득 들어 있는 나쁜 소식’ 을 전합니다. 그런 자들이 바로 ‘회칠한 무덤’ 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 23,27-28) 

무덤에 접촉하면 7일간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율법입니다.(민수 19,16) 유대인들은 과월절이 가까워지면 무덤에 하얗게 회칠을 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무덤인 줄 모르고 접촉했다가 부정하게 되어서 과월절 축제에 참석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렇게 하얗게 회칠한 무덤들을 멀리서 보면 아름답게 보였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회칠한 무덤’ 같다고 꾸짖으신 것은, 그들이 겉만 아름답고 속은 시체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처럼 겉으로는 거룩한 사람들로(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해서 남을 죄짓게 만드는 위선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무덤에 회칠을 하는 것은, 그것이 무덤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것.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회칠한 무덤’ 이라는 말을, “무덤이라는 것을 감추려고 겉만 아름답게 꾸민 것” 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셨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오로 사도가 ‘회칠한 벽’ 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회칠한 벽 같은 자, 하느님께서 당신을 치실 것이오! 율법에 따라 나를 심판하려고 앉아 있으면서, 도리어 율법을 거슬러 나를 치라고 명령한단 말이오?"(사도 23,3)

 여기서 ‘회칠한 벽’ 은 ‘회칠한 무덤의 벽’ 이고,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회칠한 무덤’ 처럼 ‘위선자’ 라는 뜻으로 사용한 말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겉으로는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 그래서 율법 실천의 모범이 되는 사람들인데, 속으로는(실제로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위선자들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볼 때에는 율법을 잘 지키고 안 볼 때에는 안 지키는 자들, 또는 사람들 눈에 보이는 일에 관해서는 율법을 잘 지키는 척 하고, 안 보이는 일에 관해서는 안 지키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처럼 살면 죄를 짓게 된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그들은 ‘남을 죄짓게 하는 자들’ 이고, ‘회칠한 무덤’ 입니다.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이천 년 전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위선이 문제입니다. ‘세상의 복음화’ 는 신앙인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복음화하기는커녕 신앙인 자신이 세속화된다면, 그것은 스스로 ‘회칠한 무덤’ 으로 전락하는 일입니다. ‘신앙인의 삶’ 은 구원받기를 희망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삶의 표준’ 이고 ‘모범’ 이기 때문에, ‘신앙인의 삶’ 이 잘못되어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잘못된 길로 가게 됩니다. 자기 혼자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남을 죄짓게 하는 죄도 짓는 것. 여기서 ‘신앙인’ 이라는 말을 ‘교회’ 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마태 23,29-32) 

이 말씀은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너희 조상들과 다르지 않다.” 라고 유대인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사도들을 박해하고 살해할 것이라고 예언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는 것은, 그 예언자들과 의인들을 존경한다는 표시입니다. 그런데 옛날에 죽은 예언자들과 의인들에 대해서는 존경하는 척 하면서, 같은 시대에 함께 살고 있는 예언자들과 의인들은 박해하고 살해합니다. 따라서 무덤을 만들고 묘를 꾸미는 일은 모두 위선입니다.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너희는 혈통으로도 살인자들의 자손이지만, 하는 짓이나 정신이나 사고방식으로도 살인자들의 자손이다.” 입니다.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라는 말씀은, “조상들의 죄를 완성하여라.”,

 즉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박해하고 살해해서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살해한 죄를 완성하라는 뜻입니다. 죄가 완성되면(가득 차면) 하느님의 심판과 처벌이 내릴 것. 그래서 이 말씀의 본래 뜻은, “하느님의 심판과 처벌을 받고 싶다면 조상들과 같은 죄를 지어라.”, 즉 “하느님의 심판과 처벌을 받지 않기를 원한다면 조상들과 같은 죄는 짓지 마라.” 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또는 유대인들을 꾸짖으신 것은,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것이고, 그들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생각하지 않았는데 생각하는 힘으로 ‘새벽에 일어나 기도해 보시기를...’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과 성체를 통해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을 받아들이고 감사하는 은총으로 우리들이 바라고 원하는 일들을 이루이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무례함은 강한 체 하는 약한 자의 모습이다.'' - 에릭 호퍼 -  💛💛💛그러니 마음 상하면 안되고 빌어주기 💛💛💛


♡2247회 우리 모두는 너 나 할 것 없이 다 자기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0월 12일(여호수아기 10장~ )

  성신제는 ''대충대충 하려면 아예 시작도 하지 말라.''
《쌓일 때와 버릴때》이사를 하고... 짐을 정리 할 때마다 한 가지 깨닫는 것이 있다. 많은 것들이 모르는 사이 서서히 쌓이지만 버릴 때는 한 번에, 그것도 결심을 하고 버려야 한다는 것. 우리 안에도 좋지 못한 것들이 많이 쌓입니다. 게으름, 불만, 교만, 욕심, 불안, 같은 것들이 날마다 서서히 쌓여갑니다. 이것들을 버리기 위해서는 단단히 결심을 하고 조금씩이 아니라 한꺼번에 버려야 합니다. 안 좋은 것은 그냥 두어도 쌓이지만 좋은 것은 날마다 결심하고 힘써 노력해야 얻을 수 있다. - 정용철님의 "희망편지"중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라고 새로운 제안을 하신다. 이것은 하나의 제안이지 강요가 아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는 사람에게는" 제안이 아니라 강요이고 반드시 실천해야할 의무이다.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한 필수적인 방법이고 길이다. 즉 "나를 따라야 한다." 는 의무이지 "나를 따라도 좋다. 또는 나를 따르면 좋겠다." 는 권고가 아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의무요,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내 뒤를 따르려는 사람" 이란 새로운 출애급을 하려는 사람이다. 즉 자기를 따르는 삶을 포기하고 예수님이 제시하신 새로운 길을 걸으려는 사람이다. 나 중심으로 하는 삶에서 "예수" 라는 분을 중심으로 하고 나는 다만 그분을 따라가는 삶으로 바꾸겠다는 사람이다. 나를 추종하는 삶에서 예수를 추종하는 삶으로, 나를 섬기는 삶에서 예수님을 섬기는 삶으로 살으려는 사람이다. 내 욕망을 채우는 삶에서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을 우선적으로 하는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겠다는 사람이다. 

이제부터 내 인생에서 예수님을 마치 "낮에는 어김없이 구름기둥으로 앞길을 인도하여 주셨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갈 길을 비추어 주시는 분"(느헤 9, 19)으로 섬기며 살겠다는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내 뒤를 따르는 사람" 의 삶이란 새로운 출애급이다. 무슨 출애급인가? "나" 에서 "예수님" 이라는 낮선 곳으로의 출애급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에서 사용했던 모든 생활 필수품들, 집, 일터를 버리고, 모세라는 새로운 지도자를 따라 하느님이 인도하시는 가나안 땅을 향해 갔듯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모든 신앙인들은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새로운 모세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출애급을 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 은 출애급을 성공적으로 하기 위한 조건이요, 예수님을 따르는 방법이다. 그럼 "자신을 버린다." 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을 버린다." 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버린다." 는 것. 우리는 그 동안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급급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찾아다녔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다른 이의 것을 앗아왔다. 그래서 다른 이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고, 다른 사람의 희생을 강요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언제나 어디에서나 자신을 내세워야 했고,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했다. 그렇게 하는 모든 행동들은 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 그래서 결국 우리 모두는 너 나 할 것 없이 다 자기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있다. 이런 모습은 본래의 나의 모습이 아니다. 지금 나의 모습은 나의 욕망이 만들어낸 거짓 자아의 모습이다. 우리는 그 동안 참 자아로 살지 않고 거짓 자아로 살아왔다. 그래서 점점 더 하느님으로부터 또 참된 자기 모습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이렇게 하느님과 참된 자아로부터 나를 멀어지게 하는 욕망 즉 거짓 자아를 버리라는 것.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따르는 것이요, 거짓 자아를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 동안 거짓자아인 자기 욕망을 좇아 살았기 때문에 그것을 버린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계속해서 거짓 자아를 만들어 가는 나의 욕망은 이미 자기 자신과 동일시 되어버렸다. 즉 자기 신체의 일부분 또는 자기 신체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즉 자기 욕망을 실현시켜나가는 것이 삶의 목적이요, 삶의 의미가 되어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와서 그것을 버린다는 것은 일종의 죽음이다. 그것도 십자가의 죽음과 같이 고통스러운 일이다. 아무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는 말은 매순간 자기의 거짓 욕망을 포기하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라는 것. 즉 예수님을 따르는데 방해가 되는 것들은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데 도움이 되는 것들을 취하라는 말이다. 이미 자기 자신이 노예가 되어 있는 거짓 욕망을 버린다는 것 자체는 이미 하나의 커다란 십자가이다. 십자가이지만 그 십자가는 반드시 지고 가야할 십자가이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나의 십자가를 대신 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각자 자기가 지고 가야할 십자가이지만 그 십자가를 자기 혼자 지고 가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를 탈출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까지 홀로 가야했다면 아마 그들은 거의 대부분 에집트로 돌아갔던지 아니면 광야에서 배고파 죽고 목말라 죽고 외롭고 고통스러워서 죽었을 것. 그러나 야훼 하느님은 그들의 십자가를 그들에게 모두 지우지 않으시고 그들의 인도자 모세를 앞 장 서서 그들을 인도하게 하시고 "낮에는 어김없이 구름기둥으로 앞 길을 인도하여 주셨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갈 길을 비추어 주셨다."(느헤 9,19) 이처럼 야훼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자가를 지게 하셨지만 그 십자가를 그들에게만 지게하지 않으시고 당신께서 동반해주셨고 거들어 주셨다. 이것이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다.

 나의 십자가이지만 나 혼자 그 십자가를 지고 가기에는 나 자신이 너무 약하다는 것을 예수님도 잘 아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라." 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고 말씀하셨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동반해주시고 그들을 인도하셨던 것처럼 내가 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때 주님이 앞장 서 서 나를 인도해주시고 격려해주시고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시겠다는 것.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그것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그것을 얻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항상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점 점 더 이기주의가 된다. 점점 더 이기주의가 된다는 것은 점점 더 욕망이 커지고 따라서 거짓자아가 더 크게 자리잡아 간다는 것. 그렇게 되면 결국 자기 자신 안에 갇혀버리고 자기 목숨을 잃어버릴 것.

 반면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거짓 자아를 버리고 반대로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다.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자기의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완전한 사랑의 행위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삶이요, 영원히 사는 길이다. 예수님의 뒤를 따른다는 것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계명이다."(요한 13, 35. 15, 17)라고 말씀하신 대로 사랑의 삶을 사는 것. 사랑의 삶을 사는 이는 이미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사는 것. 생명은 돈으로 살 수 없다. 생명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다. 따라서 선물을 선물로 남에게 베푸는 사람만이 또한 더 많은 선물을 받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을 수 있다.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기다리는 동안에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작은 일에도 지극 정성을 다하는 열정의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새로운 요리는 새로운 식욕을 낳는다.'' - 토마스 풀러 -


♡2248회 참으로 완전한 선행은 마치 폭포수처럼 나에게 많은 물이 흘러들어오게 하여, - 그것을 거침없이 당장 흘려보내 주는 주님 섭리에 맡기는 삶입니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0월 13일(판관기 1장~ )

  트레이시 L. 콘웨이는 ''해가 다시 떠오르는 한 밤은 언제나 낮으로 바뀐다. 불안에 물든 어두운 꿈 역시 점차 옅어질 것이다.''

 《지혜는 감추어진 보물》주님께서는 지혜를 주시고 그분 입에서는 지식과 슬기가 나온다. 그분께서는 올곧은 이들에게 주실 도움을 간직하고 계시며 결백하게 걸어가는 이들에게 방패가 되어 주신다. 그분께서는 공정의 길을 지켜 주시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의 앞길을 보살피신다. 그때에 너는 정의와 공정과 정직을 모든 선한 길을 깨닫게 되리라. (잠언2장6~9)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선한 일을 해야 할 것. 

그런데 무엇이 선한 일일까요? 이것을 묻는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자신이 선하다고 정한다고 선해지는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선한 일이라고 여기고 하지만 사실 악한 일을 경우도 많다. 만약 자기 생각으로 선한 일이라고 여기는 일들을 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다면 굳이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을 것. 석가모니도 선한 일을 말하고, 공자 맹자도 선한 일을 말합니다. 선한 일로만 구원에 이른다면 예수님께서 구원자가 되실 수 없다.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어떠한 일을 할 때, 그것이 선해지려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어야 합니다. 개가 죽어가는 주인을 구했다면 이것은 사람 쪽에서 보면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개는 그것이 선한 일인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것 또한 주인에게 잘해야 생존할 수 있다는 생존본능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라고 하신 말씀은 인간으로서 아무리 선해지려고 노력해봐야 한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라고 하십니다. 계명은 선한 일입니다. 다시 말해 선한 일을 하되, 주님께서 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기 생각으로만 하는 선행은 선행이 아닙니다. 반드시 주님께서 그 일에 개입하셔야 합니다. 주님만이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냥 선한 일을 하는 사람과 계명에 있기에 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젊은 사람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라고 묻습니다. 주님 때문에 선한 일을 하며 살아온 것. 그렇다면 그는 이미 구원에 길에 다다랐다. 하지만 예수님은 한 단계 더 높은 선함을 요구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자기 능력이나 재산으로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닌 선함 자체이신 분의 통로가 되라는 뜻입니다.

 세계 1위 부자 ‘빌 게이츠’ 는 어머니의 권유로 2위 부자 ‘워런 버핏’ 을 처음 만납니다. 처음에 만나려 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별로 이익이 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단 만나고 보니 말이 잘 통했다. ‘어떻게 더 많은 돈을 벌 것인가?’ 만을 생각해오던 빌 게이츠에게 워런 버핏은 ‘어떻게 잘 쓸 것인가?’ 를 생각하게 하였다. 그리고 자선재단을 설립하면 자신도 동참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2010년 설립된 빌 게이츠 재단의 자선단체가 ‘더 기빙 플레지(The Giving Pledge)’ 입니다. 빌 게이츠는 자기 재산의 95%를 기부하기로 합니다. 워런 버핏도 재산의 99%를 기부하기로 하고 게이츠 재단에는 83%를 내놓기로 합니다. 이후 수많은 재벌의 기부 릴레이가 이어졌다. 빌 게이츠는 예수님을 만난 젊은 부자 청년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부자 청년은 재산이 너무 많아서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것과 비교하면 빌 게이츠는 그 부자 청년보다는 잘 대처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모든 재산을 기부하라고 하면 빌 게이츠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전에도 빌 게이츠는 빈곤국 코로나 백신 공급을 위해 1억 5000만 달러를 지원하였다. 참으로 훌륭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선의 영광은 빌 게이츠와 그 재단에 함께 도움을 주고 있는 워런 버핏에게 돌아갑니다. 물론 그 일도 훌륭하고 주님께서 갚아주시겠지만, 더 완전한 선행은 ‘선하신 분은 주님뿐’ 임을 입증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런 분들은 마치 ‘댐’ 과 같은 역할인 것 같다. 댐은 홍수 조절도 하지만 가뭄 때 품고 있던 물을 공급하여 그 물줄기가 메마르지 않게 합니다. 이 댐의 역할을 하는 이들도 참으로 잘하는 것.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더 완전해지려면 ‘폭포’ 와 같은 사람이 되라고 하시는 것 같다. 나를 통해 하느님의 선함이 드러나게 하는 것. 내가 모아두었다가 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흘려보내며 주님의 자비에 나 자신까지 온전히 맡기는 것. 우리나라의 이태석 신부님이 ‘폭포’ 와 같은 삶을 사셨다. 그분은 의사가 되어 돈을 많이 벌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직접 가난한 이들에게로 찾아가 하느님께서 당신을 통해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하려 노력하였다. 어쩌면 그분이 돈을 많이 벌어 도왔으면 더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었을 것. 하지만 그 열매는 그런 도움을 주는 것보다 더 많이 열렸다. 그분의 제자들 중 의사가 된 이들이 벌써 40여 명이 넘고 기자, 공무원, 약사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이웃을 돕겠다는 제자들이 많이 생겼다. 

사람들은 이태석 신부님을 보며 그분의 능력이나 재산보다는 그분 뒤에서 활동하신 선하신 하느님을 봅니다. 우리도 댐과 같은 사람이 될 것인지, 폭포와 같은 사람이 될 것인지에 혼돈이 생길 때가 많다. 돈을 모았다가 필요한 때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의 섭리보다는 나의 의지로 선행을 하려는 것이기에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 그래서 최대한 그때그때 흘려보내 주려 노력합니다. 선하신 분은 주님 한 분뿐이십니다. 마더 데레사가 참으로 큰 선행을 했지만, 그분이 남겨주신 더 큰 선행은 청빈을 보여준 것. 모든 것을 주님의 섭리에 맡김으로써 그분의 도움을 받으시는 분들이 주님을 찬미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우리가 무언가를 내어놓으며 주님의 영광을 가로채서는 안 됩니다. 내가 선해지려 할 때, 그분의 선하심이 가려집니다. 따라서 참으로 완전한 선행은 마치 폭포수처럼 나에게 많은 물이 흘러들어오게 하여, 그것을 거침없이 당장 흘려보내 주는 주님 섭리에 맡기는 삶입니다.

  우리들! 내 몸과 마음으로 기도에 힘쓰지 않는 내 삶을 반성하면서, 매순간 순간 마다 화살기도라도 바치는 은총의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자연의 평화를 삶에 적용하라. 비밀은 인내심이다.'' - 랠프 왈도 에머슨 -


♡2249회 댐(dam)은 수문(水門)을 열어야 물이 흐르고 ​사람은 마음을 열어야 - 정(情)이 흐릅니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0월 14일(롯기 1장~ )

  조셉 부루착은 ''해가 지는 서쪽은 성숙한 지혜의 방향이다. 일몰의 시간은 책임과 반성의 시간이며, 배우고 인정하고 감사하는 시간이다.''
  ''헬로요'' message ~ 해로동혈 ~ (偕老同穴) 살아서는 같이 늙고 죽어서는 한 무덤에 묻힌다는 뜻의 고사성어 입니다. 부부란 서로 믿고 의지할 때 진정한 가족과 가정의 안녕을 기할수 있는겁니다. 젊을때는 아내가 남편에 기대어 살고, 나이가 들면 남편이 아내의 도움을 받으며 ''생'' 을 살아 가게 됩니다. 그래서 서로를 향하여 여보•당신이라고 부릅니다. 여보(如寶)라는 말은 "보배와 같다" 는 말이고, 당신(堂身)은 "내몸과 같다" 라는 말이랍니다. 마누라는 "마주보고 누워라" 의 준말이고, 여편네는 "옆에있네" 에서 왔다고 합니다. 부부는 서로에게 가장 귀한 보배요 끝까지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마지막까지 내곁을 지켜줄 사람은 아내요, 남편이요, 자녀들입니다. ~ 샬롬 ~ 인생은 행동이다. 

《섭리와 지혜》태양(太陽)이 지면 그때가 저녁입니다. 결정(決定)은 태양 (太陽)이 하듯 인생 (人生)도 그때를 스스로 정(定) 하지 못합니다. 돈은 가치(價値)를 묻지 않고 오직 주인 (主人)의 뜻에 따를 뿐입니다. 몸이 지치면 짐이 무겁고, 마음이 지치면 삶이 무겁다. 각질(角質)은 벗길수록 쌓이고 욕심(欲心)은 채울수록 커집니다. 댐(dam)은 수문(水門)을 열어야 물이 흐르고 ​사람은 마음을 열어야 정(情)이 흐릅니다. 몸은 하나의 심장(心臟)으로 살지만 마음은 두 심장(心臟)인 양심(兩心)으로 삽니다. 친구(親舊)라서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게 아니라 ​친구(親舊)라서 이래선 안 되고 저래선 안 된다는 것을 명심(銘心) 해야 합니다.때론 침묵(沈默)이 말보다 값진 것이 되기도 합니다.

 함부로 내뱉은 말은 상대방(相對方)을 공격(攻擊)하게 되고 다시 나를 공격(攻擊)하게 만드는 원인(原因)이 됩니다. 나이가 들면 어느 순간(瞬間) 젊은 날이 그리워지고 시간(時間)을 되돌리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나이를 먹는 동안 소중(所重)한 경험(經驗)을 통해서 연륜(年輪)과 지혜 (智慧)가 생깁니다. 사람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 주변을 보면 재능이 있고, 능력이 있는 분들이 있다. 게다가 외모까지 멋진 분들입니다. 노래도 잘하고, 말도 잘하고, 계획도 훌륭한 분입니다. 마음먹은 것은 꼭 이루려는 분들입니다. 대학원에 다녀서 자격증을 얻기도 합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데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불평과 불만이 먼저 나오곤 합니다. 현실의 어려움을 남의 탓으로 돌리곤 합니다. 보좌 신부 때는 본당 신부님이 자신의 능력을 못 알아본다고 합니다. 처음 본당 신부로 간 곳은 너무 작다고 이야기합니다. 주교님께서 잘 못 보냈다고 이야기합니다. 큰 본당에서는 할 일이 너무 많다고 이야기 합니다. 보좌 신부님을 만나서는 자신의 계획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몸이 아픈 것은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렇다고 이야기합니다. 능력도, 재능도, 외모도 불평과 불만을 만나면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것 같다.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도 없다. 주변을 보면 또 다른 분들이 있다. 재능과 능력이 뛰어나지 않았다. 평범한 외모를 가진 분들입니다. 노래도 거의 자유롭게 부르고, 말도 평범하고, 주어진 대로 사는 분입니다. 욕심이 많지 않아서 굳이 다른 것을 새롭게 배우려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항상 웃고, 감사하면서 지내고 있다. 엄한 본당 신부님을 만나면 배울 것이 많다고 합니다. 온유한 본당 신부님을 만나면 사제생활이 기쁘다고 합니다. 작은 본당에서는 신자들과 함께 할 시간이 많다고 좋아합니다. 신설 본당에서는 성전 건축을 배울 수 있어서 좋다고 합니다. 보좌 신부님이 없을 때는 할 일이 많아서 좋다고 합니다. 보좌 신부님이 오시니 같이 식사를 해서 좋다고 합니다. 늘 감사의 씨를 뿌리니 감사의 꽃이 핍니다. 웃음의 씨를 뿌리니 웃음꽃이 핍니다. 성당을 3개나 신축했는데도 힘들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말보다는 발이 더 빠른 분입니다. 성실함이 감사를 만나면 진흙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것 같다. 바오로 사도는 어려움이 많았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했던 과거가 있었다. 사도들과 교회 공동체는 바오로 사도를 믿지 못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바오로 사도의 의견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케리그마(선포)는 도그마(신학)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의견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열심히 복음을 선포한 지역 교회는 갈등과 분열이 있었다. 시기와 질투가 있었다. 불평과 불만을 이야기하려면 많았을 것. 남을 탓할 수도 있었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 그럼에도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였다. 늘 기도하였다. 항상 기뻐하였다.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산다고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내 생의 전부라고 하였다. 시련도, 갈등도, 분열도, 박해도, 칼도, 죽음까지도 그리스도와 맺어진 사랑을 막을 수 없다고 하였다. 바오로 사도는 감사의 씨를 뿌렸다. 기도의 씨를 뿌렸다. 기쁨의 씨를 뿌렸다. 그러한 씨는 백배, 천배, 만배의 열매를 맺은 것. 지금 이 순간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방향을 말씀해 주십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 않을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깨어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마음의 눈으로, 신앙의 눈으로, 영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 그렇게 세상을 보면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다. 

  우리는, 살다가 여러 모양으로 야단맞을 때가 있었고, 앞으로도 있겠지요. 하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우리의 나쁜 마음을 이겨내고, 여러 모양의 야단을 통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은총이 시작되는 축복의 통로를 만들어 가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새는 자유롭다. 무엇 하나 소유하지 않고 날기 위해 뼛속까지 비우는 존재다.'' - 도연 -


♡2250회 믿음은 불가능한 것이 없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0월 15일(사무엘상 1장~ )

  정은조는 ''길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당신 자신이다.''
《행복》혼자 걷는 길에는 예쁜 그리움이 있고. 둘이 걷는 길에는 사랑이 있지만. 셋이 걷는 길에는 우정이 있고 우리가 걷는 길에는 나눔이 있다. 감사 하는 마음으로 걷다 보면. 어느 길이든 행복 하지 않는 길이 없다. 그대 가는 길은 꽃길 입니다. 오늘도 마음 가는 곳곳마다 꽃길이시기를 기도합니다. 강의에 설때 늘 조심스럽다. 배우자 막달레나가 말을 최소한 완화해야 된다고 지적을 받아 교안은 수정하고 또 수정을 해야한다. ‘무심코 사용하는 단어 하나가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반드시 교안을 준비하며, 시작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유심히 살펴보곤 합니다. 특히 장애인과 관련된 용어를 사용할 때는 더 주의해야 합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만, 오래 전부터 장애인 비하 법령 용어의 개선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있었고, 2014년 정부 차원에서 장애인들을 비하하는 어감을 띤 용어들에 대해 대대적으로 손질한 바 있다. 맹인은 시각장애인으로 농아자는 청각 및 언어장애인으로 등등, 많은 비하 용어들을 수정했다. 또한 이에 앞서 4년여 전인 지난 2010년 5월, 대한의사협회는 대한뇌전증학회와 한국뇌전증협회의 요청에 따라 용어심의위원회 검토를 거쳐 ‘간질’ 의 공식 명칭을 ‘뇌전증(腦電症)’ 으로 고쳤다. 말씀을 전달하다 보니 은근슬쩍 걱정이 앞섰다. 난감하기도 합니다. 뇌전증 환자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공식 병명을 뇌전증으로 변경한 지 이미 오래 전인데... 뇌에 전기파가 온다는 뜻을 담은 뇌전증은 뇌에서 비정상적으로 발생한 전기파가 뇌조직을 타고 퍼져 나가는 과정에서 경련성 발작을 일으키는 질환입니다. 적절한 약물치료를 받을 수 없었던 예전과는 달리 요즘은 약물치료만으로 정상인과 다름없는 생활을 할 수 있다. 약물치료를 통해 70% 이상의 뇌전증 환자들은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고, 일부는 완치되기도 합니다. 뇌전증 환자가 증상을 나타나는 시간은 지극히 한시적이며, 약을 복용하면 발작이 조절되어 정상인과 다름없이 생활할 수 있다. 

일생을 살면서 증상을 보이는 시간은 지극히 짧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으로 인해 우리 사회의 차가운 시선과 소외로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뇌전증 환자들은 요즘도 힘든 세월을 보내고 있는데, 예수님 시대 당시 그들이 겪고 있었던 고통은 얼마나 혹독했는지는 모릅니다. 발병의 원인도 몰라, 마땅한 예방약이나 치료제도 없어, 증상은 날로 심각해지고, 더 괴로운 것 하나는 세상 사람들의 편견어린 시선이었다. 그런 뇌전증 아들을 둔 아이 아버지의 마음은 그야말로 바짝바짝 타들어갔을 것. 아버지는 전지전능한 치유자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찾아왔지만, 마침 예수님께서는 출타중이셨다. 다급했던 아버지는 제자들에게 치유를 청했지만, 치유를 받지 못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자마자 아버지는 예수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습니다. 온 몸과 마음을 다해 간절히 아들의 치유를 청합니다. 사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치유의 은사를 받은 바 있다. 사목 실습까지 나가서 수많은 치유를 일으킨 바 있다. 충분한 능력의 소유자들인 것.

 그런데 오늘은 어찌된 것일까요? 아마도 제자들은 잠시 자만심에 빠져있었을 것. 스승님께서 부여하신 치유의 은사에 늘 감사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봉사하기 위한 도구로 여겼어야 했다. 또한 스승님께서 주신 은총의 선물을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해 늘 기도해야 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마도 잠시 우쭐 했을 것. 신비스런 치유의 은사에 신기해하며 하늘에라도 오른 듯 했을 것. 내 힘으로가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치유한다는 강한 믿음과 겸손의 마음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을 것. 그런 상태에서 치유는 불가능한 것. 주님의 제자요 대리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능력과 권위는 오직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해야 할 것.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해야 할 것. 그렇게 무장한 제자라면 신앙으로 못할 일은 아무 것도 없을 것. 마태 17,14-20 : 믿음은 불가능한 것이 없다. 간질병이란 것은 우리가 알다시피, 꽤 큰 시차를 두고 사람을 공격하는 병이다. 증세가 나타나지 않으면 정상인과 똑같다. 증세가 나타나면 정신을 잃고 쓰러져 경련을 일으키다가 멀쩡하게 일어나는 병이다.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나 겉으로는 건강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증상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 간질병이 공격을 하면 그들은 사기와 이 세상의 갖가지 욕망에 사로잡힌 것처럼 되고 만다. 예수께서 산에 계시는 동안에 간질병으로 고생하는 아들을 둔 아버지가 그 아들을 고쳐달라고 제자들에게 갔으나, 마귀를 쫓아내는 권능을 받은 제자들이(마태 10,1) 그 아들을 치유하지 못했다. 그 아버지는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는 것을 보고 그 앞에 꿇어 애원하고 있다. “주님, 제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간질병에 걸려 몹시 고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에게 데려가 보았지만 그들은 고치지 못하였습니다.”(15-16절) 이를 보신 예수님은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아이를 이리 데려오너라.”(17절) 하시고 호통을 치셔서 마귀를 나가게 하시고 그 아들을 낳게 해주셨다. 제자들은 그 아이를 고쳐주지 못했다. 많은 신자들이 성직자들과 수도자 그리고 봉사자들에 대하여 실망하는 경우도 많을 것. 인간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들이기에 예수님께 확실한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19절) 제자들은 마귀를 몰아내는 권능부터 죽은 사람을 살리는 권능까지 받았는데(마태 10,8 참조) 자신들이 마귀를 쫓아내지 못한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마귀를 쫓아내지 못한 것은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20절)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신다. “그러한 것은 기도와 단식이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 다른 사람 안에 든 마귀를 쫓아내려 기도하는데, 자신의 욕심을 버리기 위해서는 얼마나 열심히 기도해야 하겠는가! 이 기도와 함께 겨자씨 한 알과 같은 완전한 믿음이 산을 옮길 수 있다는 것. 이 산은 간질병 환자의 경우 귀먹고 말 못하는 영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로 말미암아 인간들과의 관계가 더 가까워지고 친밀해진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기도하고 명상하는 시간에는 하느님과 가깝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여기에 그쳐서는 안 되고 지금 이 순간 다른 사람들의 문제, 아픔, 고통에 응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지금 이 순간 하느님과의 일치는 바로 나의 이웃들과의 일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들의 모든 삶이 가슴이 뛰는 만큼 주님을 생각하고, 숨을 쉬는 만큼 주님을 생각하고 그래서 주님 안에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는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어려운 상황은 씨앗을 뿌릴 좋은 기회다.'' - 조엘 오스틴 -


♡2251회 회개한다면 재물에 대한 탐욕, 집착, 소유욕 등을 버릴 것이고,  -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할 것이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모습으로 변화될 것.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0월 16일(사무엘상 15장~ )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이 너에게 바라시는 것은 말이 아니라 마음이다.”
《쌓일 때와 버릴때》이사를 하고... 짐을 정리 할 때마다
한 가지 깨닫는 것이 있다. 많은 것들이 모르는 사이 서서히 쌓이지만 버릴 때는 한 번에, 그것도 결심을 하고 버려야 한다는 것. 우리 안에도 좋지 못한 것들이 많이 쌓입니다. 게으름, 불만, 교만, 욕심, 불안, 같은 것들이 날마다 서서히 쌓여갑니다. 이것들을 버리기 위해서는 단단히 결심을 하고 조금씩이 아니라 한꺼번에 버려야 합니다. 안 좋은 것은 그냥 두어도 쌓이지만 좋은 것은 날마다 결심하고 힘써 노력해야 얻을 수 있다. - 정용철님의 "희망편지" 중에서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3-24)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 라는 말씀입니다. ‘어려울 것이다.’ 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뜻으로는 ‘못 들어간다.’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고,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분” 이기 때문에(마태 12,20),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 라는 말씀은 지나치게 강경하고, 또 자비로우신 예수님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씀으로 보일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신 것은 부자들의 회개를 바라시기 때문으로 해석됩니다. 여기서 ‘부자’ 는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재물을 섬기는 사람으로, 또는 재물을 하느님처럼 섬기는 사람으로 해석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을(하느님만) 섬기는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더욱 강하게 강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낙타’ 와 ‘바늘구멍’ 을 어떤 상징이나 비유로 해석하고, 그래서 뭔가 다른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낙타를 가장 큰 동물로 생각했고, 바늘구멍은 가장 작은 구멍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단순한 표현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부자들을 싫어하신다.” 고 오해할 수도 있는데, 예수님께서 부자들을 부자라는 이유만으로 싫어하시는 것도 아니고, 부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막으시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부유한 사람이든지 가난한 사람이든지 간에 제대로 회개하고, 하느님만을 올바르게 섬겨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루카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루카 16,14-15) 바리사이들은 부유하게 사는 것은 하느님의 복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고, 하느님의 복을 받았으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복을 못 받은 사람들이고, 하느님의 복을 못 받은 사람들이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생각이기도 했다. 만일에 그 생각이 옳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너무 억울하게 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는 나라라면 그 나라는 하느님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그런 사고방식을 '혐오스러운 생각’ 이라고 꾸짖으셨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5-26) 제자들이 몹시 놀란 것은, 그들도 그때까지는 바리사이들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느님의 복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누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눈여겨보셨다는 말은, 그들의 마음속을 꿰뚫어보셨다는 뜻인데, 그냥 보신 것이 아니라, 잘못된 사고방식을 버리라는 무언의 가르침입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은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 나라에 들어갈 자격은 하느님께서 정하신다.”, 즉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았던 사람만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부자는, 즉 재물을 섬기면서 살았던 사람은, 그 상태 그대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회개하면 들어갈 수 있다. 회개한다면 재물에 대한 탐욕, 집착, 소유욕 등을 버릴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할 것이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모습으로 변화될 것. 그래서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가지만 부자였더라도 회개한 사람은 들어갈 수 있다. “그때에 베드로가 그 말씀을 받아 예수님께 물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마태 19,27) 베드로 사도의 말을, 예수님께 어떤 대가나 보상을 요구하는 말로 오해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런 요구는 아니고, 하느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그 나라에서 누리게 되는 복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물어보는 말로 해석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그리고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태 19,28-30)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이들은 예수님의 왕정에 참여하게 될 것. 사도들뿐만 아니라, 그 나라에 들어간 이들은 모두 그렇게 될 것. ‘백 배로 받을 것’ 이라는 말씀은, 그 나라에서 누리게 될 복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무한하고 영원한 축복을 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된다는 말씀은, 지상에서의 처지와 내세에서의 처지가 역전된다는 뜻인데, 이 말씀은 ‘작은 이들’ 에게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 되고, 오만한 기득권층 사람들에게는 경고의 말씀이 됩니다. ‘많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백 퍼센트는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무조건 자동적으로 처지가 역전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햇살 가득한 행복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품고 하루를 시작하면서... 특히 우리들의 행복한 마음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이 충만한 날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인생은 풀어야 하는 숙제가 아니라, 살아야 할 신비이다” -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