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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기도회 봉사

♡2232회 숨 쉴 때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 ♡

♡2232회 숨 쉴 때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9월 27일(야고보서 1장~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성공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가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라.''

《마음의 다스림》복은 검소함에서 생기고(福生於淸儉)
덕은 자신을 낮추고 물러나는데서 생기며(德生於卑退)
지혜는 고요히 생각하는데서 생긴다.(道生於安靜)
근심은 욕심이 많은데서 생기고(患生於多慾)
재앙은 탐하는 마음이 많은데서 생기며(禍生於多貪)
허물은 잘난 체하고 남을 하찮게 여기는 데서 생기고(過生於輕慢)
죄악은 어질지 못하는데서 생긴다.(罪生於不仁)
을 조심하여 남의 잘못된 점을 보지 말고(戒眼莫看他非)
 조심하여 남의 단점을 말하지 말라.(戒口莫談他短)
마음을 조심하여 스스로를 탐내거나 성내지 말고(戒心莫自貪嗔)
을 조심하여 나쁜 사람을 따르지 말라.(戒身莫隨惡伴)
유익하지 않은 말을 함부로 하지 말고(無益之言莫妄說)
나와 관계 없는 일에부질없이 참견하지 말라.(不干己事莫妄爲)
순리대로 오는 것을 거절 말고(物順來而勿拒)
순리대로 가는 것을 잡지 말며(物旣去而勿追)
내 몸 대우 없음에 바라지 말고(身而遇而勿望)
지나간 일은 생각하지 말라.(事已過已勿思)
남을 해하면 마침내 자기에게 돌아오고(損人終自失)
세력에 의지하면 도리어 재앙이 따른다.(依勢禍相隨)
절약하지 않으면 집을 망치고(爲不節而亡家)
청렴하지 않으면 지위를 잃는다.(因不廉而失位)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입니다. 신부님께서는 이 기적을 매일 체험하고 있다. 물론 그 정도로 대단한 기적은 아니지만 그래도 매일 강론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신부님에게는 기적입니다. 여자 형제가 없고 동네에서도 여자와 대화할 기회가 없었던 신부님께서는 대학에 들어가서도 여자와 대화하려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와 만나려면 ‘오늘은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나?’ 로 심히 고민하고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5천 명이 넘는 분들이 감사하게도 신부님 복음 묵상을 매일같이 들어주고 계십니다.

 한 사람도 말로 만족시켜주지 못한 신부님께서 수천 명의 신자분에게 양식을 제공할 수 있는 기적을 체험하고 있기에 부끄럽지만, 그 기적의 힘이 어디서 오는지 말씀드릴 수 있게 되었다. 바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힘입니다. 

11살에서 12살 정도로 보이는 창백한 소년이 꽃집으로 들어왔다. 예쁜 꽃들을 한참 바라보던 소년은 가게 주인에게 자신의 이름이 ‘토비’ 라고 밝힌 후 “앞으로 60년간 매년 엄마 생일에 선물할 꽃다발을 미리 주문하고 싶어요. 엄마 생일이 9월 22일이에요. 매년 이날 배달을 해 주시면 좋겠어요.” 라고 말했다. 엄마를 생각하는 토비의 마음이 너무 예쁘고 귀여웠던 여주인은 알겠다며 흔쾌히 대답했고 “30달러면 충분해.” 라고 말한 뒤 토비를 돌려보냈다. 두 달 후 토비와의 약속을 기억한 여성은 토비 엄마의 생일인 9월 22일에 꽃다발을 안고 집 앞에 도착했다. 꽃을 든 여성에게 “누구세요?” 라고 묻는 소년의 엄마에게 “이 꽃은 토비가 당신을 위해 주문한 꽃이에요. 생일 축하해요.” 라며 꽃을 건넸다. 그 말을 듣자 화들짝 놀란 토비의 엄마는 “제 아들이 저를 위해 주문을 했다구요? 정말이에요?” 라고 되물었다. 꽃집 여성은 “토비가 엄마에게 주고 싶다며 60년간 매년 꽃다발을 배달해달라고 부탁했어요.” 라고 말했다. 그러자 토비의 엄마는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아들은 백혈병으로 투병 중 며칠 전 세상을 떠났어요. 전에 한 번 생일날 꽃을 선물 받고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엄마라고 했더니 앞으로 매년 꽃을 선물해주겠다는 약속했었어요.” [참조: ‘(감동 실화)60년 동안 매년 엄마 생일에’, 유튜브 채널 ‘공감픽’] 

토비가 가진 것은 ‘30달러와 감사와 사랑의 마음’ 이었다. 여기서 30달러는 빵 5개와 같다. 자신이 가진 전부를 의미합니다. 숫자 ‘5’ 는 인간이 가진 전부를 의미합니다.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전부입니다. 인간에게 ‘5가지 감각’ 이 있다는 것에서 ‘인간의 몸’ 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물고기 두 마리는 ‘말씀과 성령’, 혹은 ‘감사와 사랑’ 의 마음이라고 보면 될 것. 진리의 말씀이 우리에게 끌어내는 것은 ‘감사’ 이고, 성령의 은총이 우리에게 맺어주시는 열매는 ‘사랑’ 입니다. 토비가 어머니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꽃집 주인도 자비로운 분이라는 믿음이 생길 수 없었을 것.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에 감사할 줄 모른다면 그 작은 것이라고 느끼는 것을 주님께서 그 수천, 수만 배도 주실 수 있는 분임을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봉헌하지 못합니다. 그 작은 것을 지키느라 모든 에너지를 소비하게 됩니다. 그것을 바치며 더 많이 부풀려 달라는 청을 할 수 없게 됩니다. 토비가 60년간 어머니에게 꽃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은 30달러와 어머니께 대한 감사와 사랑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가톨릭신자로 유명 유튜버이며 작가인 ‘김새해 잔다르크’ 씨가 있다. 첫아기를 낳자마자 거의 회복될 수 없이 몸이 안 좋아져 병원에서 1년 이상 있었던 적이 있다. 소변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게 된 것. 신랑이 대소변을 받아내야 할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고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기를 생각해서도 살아야 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숨 쉴 때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를 속으로 계속 되뇐 것. 감사할 것도, 사랑하기도 힘들지만, 하루에도 수천, 수만 번씩 되뇌다 보니 몸이 회복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다. 지금은 네 아이를 키우며 왕성한 활동도 병행하고 있다. 그리고 더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 제자들은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다고 말했다. 자신들이 가진 것만으로는 5천 명이 넘는 사람을 먹일 수 없다고 말한 것. 여기에 예수님께서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더해주셨다. 기적을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가진 것만 가지고도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더하면 누구나 기적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 우리는 기적을 할 재료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것에 감사하고 그것으로 수많은 사람의 배를 불리겠다는 사랑의 마음만 첨가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할 수 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며 기적의 주인공이 되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감사와 사랑의 마음으로 가진 것을 봉헌해 드리면 됩니다.

  주님께서 항상 함께하심에 감사드리며, 그분께서 항상 우리들과 동행함으로써 지금도, 먼 훗날 생애 마지막 날에는 크게 웃을 수 있는 행복한 인생이 되시는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독립할 마음이 없다면 아무 것도 시작하지 말라.''  - 쿠사카 키민도 -


♡2233회 오늘은 나에게 죄를 지은 형제를 용서해주고 화해하는 날이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9월 28일(요한묵시록 1장~ )

  존 러복은 ''인생은 위대한 선물이다.''
《주는 것은 아름답다.》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은 행복한 마음에서 싹트는 것. 받으려고만 하는 마음속엔 거짓스러움만 있을 뿐 평화가 없다. 주는 사람의 얼굴을 보면 넉넉함이 꽃송이처럼 벙글어 있다. 주는 것은 사랑이며 받으려고만 하는 것은 사랑을 잃는 것. 누군가에게 주는 마음이 되려면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만이 남에게 사랑을 나누어줄 수 있고 그 사랑으로 인해 행복할 수 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활하면서 많이 겪게 되는 경우이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나는 어떻게 하는가? 지금까지 나의 행동이 복음적이었는가 아닌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말씀이다. 우선 나의 행동이 복음적이었는가를 반성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뜻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겠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보통 나는 어떻게 하는가?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를 미워하고 다시는 보지 않으려고 할 것. "그럴 수가 있느냐?" 하면서 화를 내기도 하고, 억울해하기도 한다. 인간이면 누구나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행동이고 마음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일러주는 말씀은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는 것. 왜 그래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칙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이요, "여러분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닮으십시오. 그리스도를 본받아 여러분은 사랑의 생활을 하십시오."(에페 5, 1-2)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사랑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선 형제가 죄를 지은 상태에서 "그대로 놔둔다." 는 것은 그 형제가 상처를 입은 채로 그냥 놔둔다는 것. 만일 어떤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지으면 일반적으로 "나는 그 형제에게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에 형제가 먼저 나에게 와서 용서를 청해야지, 내가 먼저 그 형제를 용서해주거나 타일러 줄 필요가 없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 "나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으니까 상대방이 와서 용서를 청할 때까지 기다리면 되겠지." 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우리의 생각이다. 이것은 적어도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는 계명을 지켜야할 그리스도인이라면 형제에 대한 사랑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 왜냐하면 형제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형제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든지 상처를 받고 있는 상태인데 "나 몰라라." 하고 그냥 놔두는 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가실 줄 모릅니다."(코전 13,5. 6-8) 적어도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죄를 지은 형제를 용서해주고 또 죄를 지음으로 해서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를 다시 하느님께로 데려오기 위해서 그를 타일러 데려 오도록 노력해야 한다

.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 아흡 마리를 산에 둔 채 길 잃은 그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마태 18,12)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그를 타일러 데려 오도록 하는 것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행위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는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을"(18,14) 원치 않으신다. 형제가 "죄를 지었다." 는 것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오기 위해서 나는 가서 그를 타일러 데려와야 한다. 그것이 형제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어떤 형제가 아니면 이웃이 잘못했을 때 타이르는 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고 공동체가 더 나빠지지 않고 좋아지게 하기 위한 방법이다.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항상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보다 나은 공동체, 일치하는 공동체가 되려면 잘못한 형제를 용서해주고 또 내가 죄를 지었으면 내가 용서받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 만일 죄를 지은 형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타일러 데려오지 않으면 그를 더 큰 죄를 짓게 만드는 것. 그를 소외시킴으로서 공동체는 분열되고 미움이 싹트고 형제적 사랑은 메말라갈 것. 그것은 가장 중요한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는 것도 형제에 대한 사랑의 행위이다. 즉 가능하다면 나에게 죄를 지은 것을 남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그에 대한 배려이고 존경의 표현이다. 우리는 보통 남이 나에게 사적으로 지은 죄를 그에게 가서 화해하거나 조용히 이야기해서 서로의 오해를 또는 미움을 풀도록 하지 않고 전혀 모르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서 상대방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본인에게 가서 이야기하고 풀도록 하고 남들에게는 절대로 다른 사람의 죄를 말하지도 말고 듣지도 말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친구들과 만났다하면 다른 사람을 흉보고 판단하는 일에 익숙해져있고 또 무척 재미있어한다. 참 고약한 취미를 갖고 있다. "타 이르다." 라는 말은 상대방을 꾸짖으라는 말이 아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지 말라. 

이웃의 잘못을 서슴지 말고 타일러 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벗는다."(레위 19,17)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사랑으로 말해야 하고 겸손하게 그리고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지 않고 좋은 말로 말해야 한다. 우리는 가끔 타이르러 갔다가 화해는커녕 더 악화되어 가지고 올 때가 있다. 대화하는 법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말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마음 속에 미워하는 마음, 분노하는 마음, 멸시하는 마음을 가지고 가기 때문이다. 말을 하러가기 전에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아예 타이르러 가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낫다. 마음이 진정이 되고 정말 용서해 주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될 때 사랑의 언어와 행동으로 타이르도록 하자. 단 둘이 만나서 잘 안 될 때 왜 한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고 그래도 안 되면 교회에 알려야 하는가? 우리가 혼자 가서 안 될 때 상대방을 잘 아는 사람을 데리고 간다든지 아니면 중간에서 서로 오해를 풀게 해줄 사람과 함께 가게 되면 쉽게 용서해줄 수 있고 또 오해를 풀 때가 있다. 또 그렇게라도 안 되면 교회의 사제나 수도자 아니면 교회 법정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서든지 상대방의 죄를 풀어주기 위해 노력 하는가? 즉 최선을 다 하는가이다. 왜냐하면 사랑의 의무를 지고 있는 우리가 형제의 죄를 풀어주지 않으면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잃어버린 양은 결국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매고 푸는 열쇠는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갖고 있는 것. 따라서 매고 풀어야 할 사람은 형제가 아니라 나의 몫이다. 아직도 내가 풀어야 할 사람이 있는가?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이 진리를 떠나 그릇된 길을 갈 때에 누가 그를 바른 길로 돌아 서게 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아 서게 한 그 사람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것이고 또 많은 죄를 용서받게 해 줄 것. 이것을 알아두십시오."(야고 5,19-20) 오늘은 나에게 죄를 지은 형제를 용서해주고 화해하는 날이다. 

  살아있음의 가치로 전체를 보시는 주 예수님을 소망하고 따름으로써 우리들의 몸과 마음이 치유되는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소심한 사람은 성공할 확률이 적다.'' - 실러 -
♡2234회 근심과 걱정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9월 29일(요한묵시록 11장~ )

  회남자는 ''강물을 보고 고기를 탐내기보다는 집에 돌아가 그물을 엮어라.''
《십자가의 무게》한 학자가 불만에 찬 어조로 하느님께 항의를 했다. "어떤 사람은 행복하고 어떤 사람은 불행합니다. 몹시 불공평한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그의 말을 듣고 그를 요단강변으로 불렀다. 요단강은 사람들 세상살이를 마치고 건너오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지역 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크고 작은 십자가를 지고 강을 건너왔다. 하느님은 그 학자에게 말했다. "저들이 지고 온 십자가의 무게를 다 달아보아라." 학자는 하느님의 명에 따라 강을 건넌 사람들의 십자가를 모두 달아 보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큰 십자가도 아주 작은 십자가 도 그 무게가 똑 같았다. 학자는 아무말도 못하고 하느님만 쳐다보았다. 그러자, 하느님이 말씀하셨다. "나는 십자가를 줄 때 누구에게나 똑같은 십자가를 준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행복하게 웃으면서 가볍게 안고 살고, 어떤 사람은 고통스러워하면서 쇳덩어리처럼 무겁게 짊어지고 산다. 내가 늘 똑같이 공평하게 주지만, 이렇게 저마다 다 다르게 받는 것이 삶이라는 십자가다." 이는 누구의 고통이든 고통의 무게는 똑같다는 것을 의미하는 우화입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은 가벼워 보이는데 왜 나의 고통은 이렇게 무겁고 힘드냐고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고, 나에게 가장 알맞고 편안한 십자가는 지금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금 이 순간 근심과 걱정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기 마음과 머릿속에서 시작되는 생각의 차이에서 걱정과 근심을 낳습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생각을 기쁨의 일로,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생각을 감사의 일로,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생각을 은혜의 일로,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생각을 사랑의 일로 여겨 봄은 어떠하신지요? 지금 이 순간도 삶에 지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에도 무게가 있을까요?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으나 우리는 경험적으로 마음이 가벼우면 몸도 가볍고, 마음이 무거우면 몸도 무겁게 느낍니다. 마음에 질량이 있다면 마음의 질량은 왜 이렇게 수시로 변하는 걸까요? 마음의 무게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은 사랑, 미움, 슬픔, 기쁨, 걱정, 근심, 괴로움, 아픔, 그리움과 같은 사람의 감정입니다. 사랑과 기쁨 같은 좋은 감정들은 마음을 가볍게 하지요. 그러나 자신에게 안 좋은 감정들은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즉, 인연에 따라 느끼는 감정들이 마음의 무게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입니다. 마음의 무게는 인연의 결과에 의한 무게이지요. 

어떻게 하면 마음을 가볍게 하는 인연을 만들 수 있을까요? 인연이란 원인과 결과입니다. 만남에는 이유가 있고 책임이 따른다는 말입니다. 만남의 이유를 충족시키지 못할 때 마음이 무거워지는 감정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지금 마음이 무겁습니까? 그렇다면 어떤 만남에 소홀함이 있었는지 따져볼 일입니다. 어떤 마음은 천근 만근의 무게도 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3) '위선이란?' 본질을 바라보지 않고, 본질을 살지 않는 것. '위선이란?' 본질이신 예수님과 본질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나를 통해 드러나지 않는 것. '위선이란?' 가장 큰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분리되어 있는 것. '위선이란?' 미사와 삶이 분리되어 있고, 말씀과 삶이 분리되어 있고, 기도와 삶이 분리되어 있는 것. 복음 안에 계시된 예수님의 가장 큰 분노는 본질과 하나인 사랑이 삶을 통해 드러나지 않는 '위선에 대한 분노' 였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복음인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에 대한 분노였고, 예루살렘 성전이 성전으로써의 기능을 잃어버리고 장사하는 집으로 변해 버렸을 때 드러난 분노였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지 않았다고, 또는 죄를 지었다고 분노하지 않으시고, 위선에 대해 크게 분노하셨다. 우리는 본질이신 예수님을 믿고, 본질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살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입니다. 하나인 사랑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살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다. 그래서 서원과 서품을 통해 수도자와 사제로 다시 태어났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모후(여왕)이신 마리아는 본질이신 예수님과 끝까지 함께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만인의 형제인 성 프란치스코 역시 회개 이후 그러한 삶을 사신 분입니다. 하느님과의 약속을 잘 지키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성 프란치스코의 축복입니다. "우리는 큰 것을 약속했고 우리에게는 더 큰 것이 약속되어 있다. 약속한 것을 지키고 약속된 것을 갈망합시다. 쾌락은 일시적이고 형벌은 끝이 없다. 고통은 짧고 영광은 영원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힌 사람은 적다. 누구든지 자기의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아멘."

  기도와 묵상 중에 들려주셨던 “나도 너 없이 살 수 없다.” “‘나에게는 너무 어렵다... 너무  즐거운늦었다.'라는 말은 없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담고... 은총의 어좌인 십자가의 예수님 앞에 나아가 바라보고  드리는 기도의 은총이 우리들에게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산다는 것은 호흡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일이다.'' - 루소 -
♡2235회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사십시오. 언젠가 당신이 옳았음이 드러날 것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9월 30일(창세기 1장~ )

  니체은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끝내 나를 강하게 만들리라.''
《무괴아심 (無愧我心)》'내 마음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한다’ 는 뜻으로 남의 허물을 탓하기 전에 자기 스스로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무괴아심은 대학, 중용에 나오는 신독(愼獨)과도 맥이 닿는데 신독은 홀로 있을 때도 도리에 어그러지지 않게 스스로 삼가는 것을 뜻합니다. 내 마음을 들춰봐서 전혀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는 것. 

이렇게 사는 것이 멋진 삶입니다. 어스름한 저녁 무렵 물가에 비친 석양도 아름답고 아침에 뜨는 해 또한 아름답다. 청춘이 아름답다고 하지만 흰머리에 얼굴 주름 또한 아름답지 아니한가? 손에 쥔 것이 없다고 실패라 생각지 말라. 이 날까지 무탈하게 산 것도 성공한 것. 나누어 주었다고 보답을 바라지 말자. 나누어 준 것만으로도 공덕(功德)을 쌓았느니라. 남에게 받은 것은 잊지 말고 보답하자. 그래야 공덕을 쌓는 것이니 새겨 두세나. 거름을 너무 많이 해도 뿌리는 썩을 것이고, 지나치게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살지 않는다네. 상대가 실수하고 잘못을 하여도 눈감아 주고 포용(包容)해 주자. 내가 옳을지라도 너무 강하게 말하면 상대는 오히려 반감(反感)을 가지게 된다. 나눈 것은 잊고, 받은 것은 기억하며, 눈 감을 줄 알고 용서할 줄 안다면 세상 살아가는데 적은 없을 것이고, 인생 마무리는 멋지게 될 것. 창문을 열면 바람이 들어오지만, 마음을 열면 행복이 들어옵니다.

 육신(肉身)은 은퇴가 있어도, 감정과 사랑은 은퇴가 없다.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 을 보았다. 음악도 좋았고, 화면의 배경도 좋았다. 배우들의 연기도 마음에 들었다. 시대는 1900년대 초였다. 우리나라는 러시아, 미국, 영국, 일본과 같은 강대국에 갇혀있었다. 청나라는 이미 날개가 꺾여서 강대국이라고 할 형편이 못 되었다. 제국주의 시대였고 양육강식의 시대였다. 미국은 필리핀을 지배하고, 영국은 인도를 지배하고, 러시아와 싸워서 이긴 일본은 조선을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드라마는 약소국 조선이 조금씩 무너지는 모습을 슬프지만 아름답게 보여주었다. 왕도, 신하도, 백성도 나라를 빼앗길 것이라는 알고 있었다. 3부류의 사람이 있었다. 빼앗길 것을 알면서 바라만보는 사람, 빼앗길 것을 알기에 일본의 편에 서서 기득권을 얻으려는 사람, 빼앗길 것을 알지만 저항하는 사람입니다. 드라마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라를 그냥 내어주면 나중에 다시 찾을 수 없지만 저항하다가 빼앗기면 언젠가 다시 찾을 수 있다.’ 그러기에 드라마는 빼앗길 걸 알면서도 저항하는 사람들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하였다. 드라마를 보면서 예전에 읽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개구리들의 왕 뽑기’ 입니다. 평화로운 연못에서 개구리들이 재미있게 살고 있었다. 개구리들은 지도자를 원했다. 개구리들을 강하게 해 줄 지도자, 개구리들의 이익을 대변할 지도자를 원했다. 하늘을 나는 황새가 왔다. 개구리들은 환영했지만 황새는 배고프면 개구리들을 잡아먹을 뿐이었다. 이번에는 땅을 기어 다니는 뱀이 왔다. 개구리들은 환영했지만 뱀 역시 개구리들을 잡아먹었다. 황새도, 뱀도 개구리들의 지도자는 아니었다. 비록 하늘을 날 수 있고, 날카로운 이빨과 독이 있어도 그것들이 개구리들을 지켜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개구리들의 지도자는 개구리 중에서 나와야 합니다. 조선이 힘을 합하여, 조금 더 일찍 개화의 길을 걸었다면 스스로 일어설 수 있었을 것. 러시아도, 영국도, 미국도 결코 조선을 지켜줄 수 없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한반도의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은 여전히 강대국으로 우리 곁에 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변했다. 일본의 수출규제라는 전쟁에 맞서서 ‘독립운동은 못했지만 불매운동은 한다.’ 라고 하면서 당당하게 일어서고 있다. 한국의 경제, 문화, 정치, 철학은 스스로의 지도자를 선출하고 스스로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스라엘도 역사를 보면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변에는 늘 강대국이 있었다.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페르시아, 로마가 있었다. 이스라엘을 지켜주는 것은 주변의 강대국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은 작은 나라였지만 전략적으로 중요한 나라였다. 그러기에 주변의 강대국은 기회가 되면 이스라엘을 침략하였고,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끌고 갔다.

 이스라엘 백성도 3부류가 있었다. 강대국의 침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강대국의 문화와 종교를 받아들이고 이스라엘의 전통과 종교를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지금은 험난한 시간이지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는 사람입니다. 자신들의 종교와 전통을 간직하고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사람입니다. 2000년이 지났지만 지금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종교와 전통을 간직하며 자신들의 땅에서 살고 있다. 나라를 빼앗겼어도 교육을 통해서 자신의 전통과 종교를 지켜왔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빌로니아라는 강대국에 의지하고, 그들의 문화와 종교를 받아들이자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예레미야 예언자는 그것만으로는 이스라엘을 지킬 수 없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삶에도 많은 갈등과 어려움이 있다. 베드로 사도는 오늘 물위를 위태롭게 걸었다. 바람은 강하게 불었고, 파도는 높았고, 물은 깊었다. 베드로 사도는 물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바람 때문이 아니었다. 파도 때문도 아니었다. 물이 깊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사십시오. 언젠가 당신이 옳았음이 드러날 것입니다.’ 매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산다면 세상을 떠나는 날은 그 말이 맞을 거라고 합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우리들 안에 등불을 들고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을 열어주시면서 함께 해주시는 그리스도 주 예수님의 위로와 은총을 받고, 그 받은 은총을 도로 누군가에게 전해주는 축복된 날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좋은 것을 기꺼이 포기해야만 한다.'' - 케니 로저스 -


♡2236회 “용서”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0월 1일(창세기 21장~ )

 탈무드에 ''기억을 증진시키는 가장 좋은 약은 감탄하는 것이다.''
《군인을 보면 아빠 생각이 나요》 미국 오하이오주의 한 레스토랑에 8살 소년 마일스는 가족과 함께 방문했다.그런데 소년은 뜻밖에도 주차장에서 20달러를 주웠다.주인없는 20달러를 들고 고민한 끝에 평소 갖고 싶었던 비디오 게임을 사기로 했고 잔뜩 신이 난 상태였다. 하지만 소년은 금세 마음을 바꿉니다. 그리고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기다리던 군인 가족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쪽지를 쓰기 시작했다. "우리 아빠도 군인이셨어요. 지금은 비록 하늘나라에 계시지만요. 식당에 오다가 우연히 20달러 를 주웠는데 아저씨 식사하시는데 선물로 드리고 싶어요.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인가 봐요. 나라를 지켜줘서 감사해요." 사실 마일스의 아빠는 육군 상사였고 마일스가 태어난 지 5주 만에 이라크에서 전사했다. 아빠 생각이 난 마일스는 군인에 대한 존경심을 담아 처음 보는 군인 가족에게 쪽지와 함께 20달러를 선물했던 것. 이날 점심 식사를 마친 마일스는 엄마에게 혼자 아빠를 만나러 가고 싶다고 부탁했다. 그렇게 소년은 아빠가 묻힌 공동묘지에 찾아가 자기 키만큼이나 커다란 비석을 양팔로 꼭 끌어안았다. 사연이 알려지고 마일스는 미국을 울린 어린 영웅으로 유명 인사가 되었다. 한 토크쇼 에 출연하고 200만 달러 기부금을 모으기도 했다. 그리고 몇 년 뒤 마일스는 의젓한 모습으로 대통령이 직접 수여하는 군 최고 명예 훈장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이날 마일스는 군인이었던 아빠의 인식표를 걸고 시상식에 올라 아빠에게 찬사를 돌렸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가장 귀한 젊음을 나라를 위해 기꺼이 바치고 있는 국군장병 분들은 대한민국을 위해 희생하는 숭고한 분들입니다. 그런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는 평화와 자유 등 많은 소중한 것을 누리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더욱 그 많은 희생을 잊지 말고 고마워해야 ....... 오늘 비유에는 대조적인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편에는 ‘조금만 참아달라는’ 종의 간청에 대해, 단지 참아 주는 것을 넘어서서 청하지도 않은 빚을 아무런 조건 없이, ‘먼저’ 탕감해주는 ‘자비로운 왕’ 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동료의 간청을 들어주기는 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버리는”(마태 18,30) ‘무자비한 종’ 이 있다. 이 비유의 주제는 “용서” 입니다.

 “용서” 의 특성을 세 가지로 말하고 있다.
 <첫째>는 “용서하되 끝까지 용서하라” 는 것이요,
 <둘째>는 “용서하되 먼저 용서하라” 는 것이요, 
<셋째>는 “용서하되 진심으로 용서하라” 는 것.

 <첫째> “용서하되 끝까지 용서하라.” 는 말씀은 이렇게 표현되고 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이는 용서에는 한계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곧 용서하되 무한히, 계속해서, 끝없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한 번 혹은 몇 번 용서해보고 그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미처 받아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죽기까지 우리를 용서하셨듯이 말입니다. 

<둘째> “용서하되 먼저 용서하라.” 는 말씀은 이렇게 표현되고 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너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3) 이는 용서의 이유를 밝혀줍니다. 곧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잘못을 고백하기도 전에, 아니 잘못했노라고 인정하기도 전에, 용서를 청하기도 전에, 당신께서는 ‘먼저’ 우리를 용서하신 까닭임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사랑하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가 구원을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의 자비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역시, 내 형제가 용서를 청하기도 전에, 혹은 비록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고백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함으로써 하느님의 용서가 그들에게 베풀어지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 역시 하느님의 용서에 참여하게 되고, 그 용서를 통해 구원으로 인도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용서해야 할 궁극적인 이유는 ‘먼저’ 우리가 용서를 통해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용서를 통해 타인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용서하되 마음으로 용서하라.” 는 말씀은 이렇게 표현되고 있다. “너희가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 35) 이는 용서의 태도를 밝혀줍니다. 곧 진심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선심 쓰듯이 혹은 값싼 동정심에서가 아니라, 의무감이나 보상을 얻기 위한 방편에서가 아니라, 남의 시선이나 평가 또는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진심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용서하되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사랑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원망도 원한도 없는, 분노도 미움도 보복도 없는, 오직 사랑만이 있는 용서입니다. 결국, “용서” 란 왕이 빚진 종을 “가엾이 여겨 빚을 탕감해주고 놓아 보내는 것”(마태 18,26)으로 드러납니다. 바로 우리가 이러한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입었기에, 이제 우리 역시 이러한 용서와 자비를 이웃과 형제들에게 베풀어야 할 일 입니다. 아멘.

  주님께 손을 뻗어 보십시오. 매 순간 주님을 생각하며 그분과 함께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주님께 뻗는 우리들의 손을 그분께서 꼭 붙잡아 주시며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은총이 베풀어지는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성공의 비밀은 목표의 지속성에 있다.'' - 벤저민 디즈라엘리 -


♡ -2237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0월 2일(창세기 35장~ )

  마이크 머독은 ''추구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삶의 향기/금천 장 우익》 우리 만남은 소중한 인연이 되어 삶이란 강물을 따라 변함없는 모습으로 이어지길 원합니다. 사노라 지치고 힘이 들 때 배려하고 위하는 마음으로 사랑과 정이 넘치는 우리로 남겨지길 원합니다. 좋은 생각은 푸른 마음으로 이어지고 아픈 삶도 함께하면 치유되는 관계가 되길 원합니다. 오늘도 좋아서 짓는 미소가 햇살처럼 스며들어 삶의 향기로 지펴지길 소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하느님이시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아버지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세주(그리스도)” 라고 믿는 것. 베드로 사도의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신앙고백은 ‘예수님은 구세주’ 라는 믿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 신앙고백에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에 대한 믿음이 들어 있긴 하지만, 아직은 ‘예수님은 하느님 이라고 고백하는 단계에 도달하지는 않았다. ‘예수님은 하느님’ 이라는 신앙고백은 예수님 부활 후에 토마스 사도가 하게 됩니다(요한 20,28).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 에 관한 말씀을 하셨을 때,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라고 고백했다. 이 말은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세주’ 라는 신앙고백입니다.

 또 사도행전을 보면,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라는 베드로 사도의 증언이 나옵니다. 이 증언은 사실상 ‘예수님은 하느님’ 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이 이름밖에 없다.” 는 베드로 사도의 말은, 하느님의 이름 ‘야훼’ 를 버리고 ‘예수’ 라는 이름만 선택한다는 뜻이 아니라, ‘야훼’ 와 ‘예수’ 라는 이름을 동등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히브리서를 보면,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히브 1,3)라는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형상이신 분” 이라는 믿음을 고백한 말입니다. 사실 사도들과 신자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제대로 믿은 것은 아니었고,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차츰 깨닫게 되다가,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을 겪은 후에 마침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온전히 깨달았고 믿게 되었다. 요한복음서 머리글에 있는,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8)라는 선언은 ‘완성된 단계에 도달한 신앙고백’ 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마태 16,13-16)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말하더냐?”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해서 물으신 것은 아니고, 이 질문은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준비시키기 위한 것.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말한다는 제자들의 대답은 당시의 소문을 말한 것.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이 보통 사람과는 다른 특별한 분이라는 것은 느끼고 있었지만, 메시아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희는 나를 ‘무엇으로’ 믿고 있느냐?” 라는 뜻인데, 몰라서 하신 질문은 아니고, 제자들이 스스로 신앙고백을 하게 만들기 위한 질문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제자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메시아’ 로 믿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요한 1,41),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믿은 것은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난 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만으로 바람과 호수를 고요하게 만드셨을 때, 제자들은 놀라서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라고 말했습니다.(마태 8,27) 제자들은 예수님의 권능과 권한을 체험하면서 차츰 예수님의 신성을 믿게 되었고, 마침내 ‘하느님의 아드님’ 으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느님으로’ 믿게 되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저희는 스승님께서 야훼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하느님과 똑같은 신성과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이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세주라고 믿고 있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는 말씀을 우리에게 하시는 질문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 있다. 즉 “너는 왜 성당에 다니느냐?” 로 바꿔서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성당에 다니는 것은 예수님을 믿기 때문이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에는 어떤 소원을 빌기 위해서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멈추면 안 되고, 궁극적인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신앙생활로 발전해야 하고 성숙해져야 합니다. 만일에 그렇게 하지 않고,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이나 빌고,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복이나 비는 생활에서 멈추어 있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기복신앙’ 에 빠져 있는 것. 기복신앙은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신앙이 아닌, 미신을 믿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일입니다. “도대체 궁극적인 구원이란 무엇인가?” 라고 물을 수 있다. ‘궁극적인 구원’ 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 죄와 죽음의 억압에서 해방되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그 구원은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시작되어서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축복하시면서 아버지께서 그것을 알려 주셨다고 말씀하신 것은(마태 16,17), 그의 신앙이 올바른 것임을 인정하신 것이고, 그의 신앙고백은 하느님의 계획에 속한 일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 그리고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과 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신 일은(마태 16,18-19), 앞으로 전체 교회가(모든 신앙인이) 베드로 사도가 고백한 그 신앙을 바탕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신 일입니다. 물론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지도자로 임명하신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신 것은(마태 16,20), 당신의 부활 때까지 침묵을 지키라는 뜻인데(마태 17,9), 예수님은 그냥 구세주가 아니라 인류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는 구세주이고, 또 생명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고 믿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 후에 이루어질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제 입에 들어가는 것보다 남의 입에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게 하시어, 우리들 마음 안에 기쁨이 넘치도록 은총베풀어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마음의 문을 여는 손잡이는 안쪽에만 달려 있다.'' - 헤겔 -


♡2238회 “너희는 깨달아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0월 3일(탈출기 1장~ )

  알랭은 ''인간은 의욕하는 것, 그리고 창조하는 것에 의해서만이 행복하다.''

《세월이 가면서》<나이가 내게 준 선물> 소년 시절엔 어서 커서 어른이 되고 싶었지만 지금은 세월이 너무 빨리 가서 멀미가 납니다. 말이 좋아-- 익어가는 거지 날마다 늙어만 가는데 그 맑던 총기(聰氣)는 다 어디로 마실을 나갔는지... 눈앞에 뻔히 보이는 것도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꿀먹은 벙어리가 되고.. 책장 앞에서, 냉장고 앞에서, 발코니에서, 내가 왜 여길 왔지?" 약봉지를 들고서 약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않아 집나간 총기(聰氣)를 기다리며 우두커니 서 있다. 다음 날 까지 돌아오지 않아서 애태우는 때도 있지요. 이렇게 세월따라 늙어가면서 나 자신이 많이도 변해갑니다. 

젊은 날에 받은 선물은 그냥 고맙게 받았지만, 지금은 뜨거운 가슴으로 느껴지고... 젊은날에 친구의 푸념은 소화해 내기가 부담이 되었지만 지금은 가슴이 절절함을 함께 합니다... 젊은 날에 친구가 잘되는 것을 보면 부러웠지만, 지금은 친구가 행복해 하는 만큼 같이 행복하고... 젊은 날에 친구의 아픔은 그냥 지켜볼 수 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나의 아픔처럼 생각이 깊어집니다... 젊은 날에 친구는 지적(知的)인 친구를 좋아했지만, 지금의 친구는 내 마음을 읽어주는 편안한 친구가 더 좋습니다. 세월이 가면서 익어가는 나이가 준 선물이 아닐까 합니다. 성 요한 마리 비안네 신부님(1786~1859)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모릅니다. 그는 첫 주임사제로 발령받은 아르스를 단 한 번도 떠나지 않고 죽기 직전까지 사목한 특별한 사제였다.

 당시 그곳은 신자들이라 해봐야 농사짓는 시골사람들 230여 명밖에 안 되는 공소 같은 본당이었다. 더구나 본당 신자들의 신앙심은 밑바닥이어서 동료 신부들이 다들 부임하기 꺼리는 곳이었다. 그러나 비안네 신부님은 아르스에 부임해가면서 230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다는 생각에 너무나 두렵고 감지덕지해서 몸까지 떨었다고 합니다. 비안네 신부님의 영성생활 안에서 우리 눈을 확 잡아끄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그것은 그의 선택과 집중, 그리고 본질에 대한 충실성입니다. 그는 사목자로서 비본질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가지치기를 단행했다. 그리고는 오직 영적인 것, 하느님, 신자들의 영성생활에만 초점을 맞추었고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따라서 비안네 신부님은 세상 것들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맛있는 음식이나 럭셔리한 가재도구, 메이커 옷, 취미활동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사제관은 거의 ‘유령의 집’ 과도 비슷했다. 그 대신 그는 하루 온종일 신자들 영성생활의 쇄신만을 위해 노력했다. 성심성의껏 고해성사에 전념하셨다. 매일 봉헌하는 미사는 마치도 생애 마지막 미사를 드리듯 정성을 다했다. 이 지상에 단 한 명의 죄인도 남겨두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영웅적 사도직을 수행했다. 만학도로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 기적적으로 사제로 서품됩니다. 그러나 서품 즉시 시작된 가난하고 착한 목자로서 삶은 이제 역사에 길이 남을 별이 되었다. 비안네 신부님의 청빈한 생활은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그는 언제나 단 한 벌밖에 없는 수단을 자랑스럽게 입고 다녔다. 워낙 전반적으로 너덜거렸기에 수선을 할 수가 없었다. 보다 못한 신자들이 사람들 보기에 민망하니 수단 하나 새로 해 입으라고 돈을 마련해드렸다. 꼭 새로 해 입겠노라고 몇 번이나 다짐했지만, 몇 달이 지나도 그 옷 그대로였다. 화가 난 신자들이 다그쳤더니, 그 돈은 이미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준 후였다. 구두는 한 번도 약칠을 하거나 솔을 댄 적이 없이 그냥 되는 대로 신었다. 비안네 신부님이 왜 그렇게 하고 다니셨을까? 묵상해 봅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어떤 날 하루 24시간 가운데 18시간을 고해소 안에서 보내셨다고 합니다. 사제로서 고해소에만 앉아있을 수 있겠습니까? 남은 6시간 가지고 미사도 봉헌해야 했다. 강론준비도 해야 했다. 잠도 자야했다. 외모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쓰지 않은 것이 아니었던 것. 사목에 전념하느라, 영혼구령에 시간을 바치느라 자신의 외모에 신경 쓸 시간이 도무지 나지 않았던 것. 비안네 신부님의 아침식사는 언제나 우유 한 잔이면 족했다고 합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식사할 시간이 없으셨던 그는 오랜 세월 동안 하루 한 끼로 때우셨답니다. 식사 시간은 길어봐야 5분 내외였답니다. 

비안네 신부님 성덕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특별한 것이 아닌 것 같다. 사제로서 당연히 해야 할 역할에 대한 충실, 그것이 그분 성화의 비결이었다. 본당 사제로서 가장 중요한 성체성사를 지극정성으로 준비하고 경건하게 봉헌하는 것, 그리고 성체성사에 앞서 꼭 필요한 또 다른 성사 고해성사를 통해 신자들의 영혼을 치유하고 위로하는 것, 그것을 충실히 행함으로 인해 성인이 되신 것. 예수님께서 하신 한 말씀 한 말씀 얼마나 보물 같은 말씀인지요? 또 얼마나 깊이 있고 살아있는 말씀인지, 그 울림이 두고두고 가슴속에 메아리칩니다. 때로 그 말씀이 얼마나 날카롭고 섬뜩한지 촌철살인의 대가가 따로 없다. “너희는 깨달아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참으로 지당하신 예수님 말씀입니다. 

곰곰이 돌아보니 제 입에서 나온 것들로 인해서 사람들을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모릅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노라고 그렇게 다짐해도 어느새 제 입에서는 제 자신을 비롯해서 이웃과 공동체에게 상처를 주고 더럽히는 말들이 술술 흘러나오곤 했다. 때로 한번 잘못 흘러나온 말들로 인해 수습하느라 힘들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다행인 것은 영성생활 측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우리 신앙의 선배들도 비슷한 체험을 했다는 것. 기도와 영성생활의 큰 스승인 베르나르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이 실없는 말이나 부주의한 일에서 한 시간, 다만 한 시간이라도 고결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벗어나서 살 수 있을까요? 사람의 혀처럼 위험한 것이 또 없다. 이웃을 향하는 공격적인 모욕과 욕설, 악의에 찬 비방은 본인은 물론이고 이웃에게까지 큰 상처를 줄뿐더러 하느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영성생활의 성장을 위해 혀를 단속하는데 엄청난 공을 들였던 베르나르도였다. 부단한 노력 끝에 어느 날 베르나르도는 다음의 세 가지 경우에만 혀를 사용하는데 성공했답니다. 하느님을 찬미할 때, 내 죄를 고백할 때, 이웃을 격려할 때. 그리고 오늘 혀 때문에, 입에서 나오는 것들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는 우리 신앙의 후배들을 향해 이렇게 권고하고 있다. “형제 여러분, 간곡히 당부합니다. 그 어떤 상처에도 부디 즉각적인 복수에 나서지 마십시오. 한 인간을 날카로운 인두로 지지는 듯한 공격적인 말을 삼가십시오. 툴툴거리며 분개하는 소음도 사라지게 하십시오. 비웃음의 코웃음도 치지 마십시오. 경멸에 찬 큰 웃음소리도 나지 않게 하십시오. 분노로 이마를 찌푸리지도 마십시오. 격정이 일어난 바로 그 자리, 여러분의 내부에서 그 격정을 죽게 하십시오.”

  믿음에는 감격이, 감동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지고, 그러한 죄인을 용서해주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시는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인간의 얼굴은 마음의 간판이고 생활의 기록이다.'' - 카렐루 -


♡2239회 남자는 산이요, 여자는 물이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0월 4일(탈출기 37장~ )

  에릭 호퍼는 ''행복을 찾는 일은 불행의 주된 원인 가운데 하나이다.''
《염력 [念力]》사람이 갖는 기운은 크게 생기(生氣)와 오기(敖氣) 그리고 살기(殺氣)가 있는데, 누군가에게 한이 깊이 맺히면 살기가 동하여 상대에게 전달됩니다. 특히 한국 여인들의 염력은 거의 선령(仙靈) 급이어서 나이든 여인에게 한을 사면 아무것도 될 일이 없다. 이것은 부부나 형제자매 끼리도 마찬가지이죠. 남자가 여자에게 이기려고 박박대며 싸우는 걸 보면 불쌍합니다. 지는것이 이기는 것이라는걸 모르면 남자가 아닙니다. 남자는 산이요, 여자는 물이다. 산은 바람과 흙, 나무와 짐승, 물을 안고 당당히 앉아있다. 물은 산에서부터 끊임없이 흘러내리며 뭇 생명을 살린다. 흐르는 물은 아무리 높은 산도 막지 못한다. 한국여인은 누구나 신기가 있는데, 나이 40이 되면 무당 수준의 염력을 갖고, 50이 되면 신녀, 60이 되면 귀신, 70이 넘으면 마고할미의 염력을 갖고 있어 직녀성과 직거래합니다. 남자의 속내를 꿰뚫어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여생을 의미있게 보내려면 여자를 울리거나 속이지 마시라, 항상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공경하시라. 모든 남자는 여자가 낳았고, 여자의 보살핌 속에서 평생을 살다 갑니다. 남자가 여자보다 10년 먼저 죽습니다. 이런 깨달음을 얻지 못한 남자라면 건강하세요. 행복하세요. 사랑합니다. 남성은 결혼을 통해 정신적 안정을, 여성은 경제적 안정을 얻으려 한다고 합니다. 한 결혼정보업체가 미혼 남녀 56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결혼을 통해 보완하고 싶은 것으로 남성의 54.6%가 ‘정신적 안정 및 풍요’ 를 꼽았고, 12.1%는 ‘가사에 도움’ 이라고 답했다. 반면에 여성들은 47.2%가 ‘경제적 안정’ 을 꼽았고, 정신적 안정 및 풍요가 25%, 사회적 지위가8.3%로 나타났다. 남성의 지향과 여성의 지향이 다르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고 살겠다며 결혼을 합니다. 그러나 초호화 결혼식을 올린 부부도, 잉꼬부부로 알려진 부부도 쉽게 헤어지는 모습을 봅니다. 많은 경우 ‘성격 차’ '경제적 이유' 때문에 도저히 같이 살 수 없다며 각자의 길을 갑니다. 성격이야 서로 다른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상대의 성장 과정이나 환경이 다를진대 어찌 성격이 똑같겠습니까? 쌍둥이로 태어난 사람도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서로를 인정하고 부족함을 채워주는 가운데 더 깊은 사랑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너무도 쉽게 너와 내가 다른 것을 ‘네가 틀렸어' 로 몰아 부치고 맙니다. 그래서 마침내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 고 등을 돌립니다. '너 아니면 안 된다.' 고 하던 마음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19,6) 혼인을 하느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헤어질 수 없지만 단순히 사람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혼을 쉽게 하게 되는 것. 생각해 보십시오.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사랑하고 존경할 것” 을 하느님과 일가친척 앞에서 서약을 하였다. 남녀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존재이지, 욕심을 채우는 수단이 아닙니다. 서로는 동반자이면서 서로 사랑 받고 존경 받아야 할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단순히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만 국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과 우리 자신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원에서부터 인간의 신랑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의 신부입니다(예레31,3).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하느님을 향한 믿음의 관계를 지켜야 하는 것. 철학자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지혜롭고 의롭고 착한 사람을 소크라테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불행하게도 결혼만은 잘하지 못한 것 같다. 그의 아내 크산디페는 세기의 악처로 이름이 나 있다. 물론 집안 살림에는 관심도 없는 남편을 좋아할 아내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남편에게 바가지는 예사이고 심지어는 때리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태산 같은 인내심으로 이겨 나갔다. 하루는 아내가 마구 욕을 해 대다가 아무 대꾸를 하지 않는 소크라테스로 인해 화가 풀리지 아니하자 걸레를 빤 물을 남편의 머리에 끼얹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태연하게 “뇌성벽력이 대단하더니 종래는 비가 오고야 마는군” 하였답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부부간에 크고 작은 고민거리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나 참고 견디면 성공하는 것이요, 인내하지 못하면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없는 것. “남편 된 사람은 자기 아내를 자기 몸 같이 사랑하고, 아내 된 사람은 자기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에페5,33) “결혼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인데 아내는 남편과 헤어져서는 안됩니다. 만일 헤어졌거든 결혼하지 말고 혼자 지내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 남편과 다시 화해해야 합니다. 또 남편은 자기 아내를 버리면 안됩니다.”(1고린7,10-11) 결국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지키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서로간의 관계 안에서도 신의를 지키고 부족함을 가슴에 담을 수 있는 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무던히 참아주고 변화를 기다려주는 넉넉함이 우리를 풍요케 할 것. 헤어지자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겠다. “전쟁터에 나갈 때는 한 번 기도하고, 바다로 항해를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며, 결혼할 때에는 세 번 기도한다.”(러시아 속담)고 했다. 결혼해서 일생을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나 풍랑이 몰아치는 험한 바다보다도 더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 순간 기도하며 애쓰지 않으면 서로의 다른 점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인생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삶으로 엮어야 하겠습니다. 

  “너희에게 이만한 믿음이 있는가?” 라는 물음에 우리들은 “한 말씀만 하시어 곧 낫게 됩니다.” 라는 온전한 믿음을 고백함으로써 하느님의 응답으로 몸과 마음이 치유되는 은총을 받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위대한 사람은 목적을, 소인들은 공상을 가지고 있다.'' - 와싱턴 어빙 -

♡2240회 아무리 좋은 말도 3일이요, 나쁜 말도 3일이려니. 3초만 생각해 봐도  -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사람은 다 안답니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0월 5일(레위기 1장~ )

  J. 브라서튼은 ''내가 부자인 것은 소유한 것이 많기 때문이 아니라, 원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혼자 살 수 없는 세상》함께 어울리며 살아요. 인연이란 이런 거래요. 씨앗은 흙을 만나야 싹이 트고, 고기는 물을 만나야 숨을 쉬고, 사람은 사람다운 사람을 만나야 행복하고,맹수들은 산이 깊어야 하고, 지렁이는 흙이 있어야 살고, 또한, 나무는 썩은 흙이 있어야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있고, 이렇듯 만남이 인연의 끈이 됩니다. 우리 서로서로 기대어 도움주며 살아요. 네 것 내 것 따지지 말고 받는 즐거움은 주는 이가 있어야 하니 먼저 줘 보래요. 받을 사람은 받고, 주는 사람은 주는 것이 인생이지요. 주고받을 이가 옆에 있음이 행복이고요. 아무리 좋은 말도 3일이요, 나쁜 말도 3일이려니.3초만 생각해 봐도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사람은 다 안답니다. 우리 서로 3초만 더 생각해 보면 사람이 그리워지고 사랑하게 되겠지요. 나이가 들어감에 사람이 더 그리워지고 사람이 최고 재산인들 싶다.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와 함께 계시겠답니다. 그분께서 몸소 우리들의 눈물을 닦아 주시겠답니다! 신구약을 통틀어 가장 난해하면서도 흥미로운 책인 동시에, 성경의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책이 요한 묵시록입니다. 요한 묵시록을 읽거나 해석하거나 묵상할 때 꼭 유념할 사항이 한 가지 있다. 요한 묵시록 안에는 유다 묵시 문학 특유의 상징적인 표현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를 문자 그대로 바라봐서는 안된다는 것. 가톨릭 교회 정통 교부들이나 신학자들, 성경학자들의 권위있는 가르침 안에서 읽고 묵상해야 할 것. 다른 무엇에 앞서 요한 묵시록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어마무시한 메시지를 접하더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아야겠다. 고통 받고 있는 당신 백성을 향해 그분께서 건네시는 희망과 격려 차원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야겠다

. 이천년 교회 역사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이비 목자들과 이단자들이 요한 묵시록을 악용하면서 선량한 백성들을 괴롭혔는지 모릅니다. 성경 근본주의자들은 요한 묵시록에 표현된 글자 그대로 종말이 곧 올것이라는 가르쳤다. 아직도 종말에 대한 그릇된 해석으로 사람들을 큰 혼란에 빠트리기도 합니다. 우리 주님은 마치 어린 아들을 극진히 사랑하는 아버지와 같다. 진정 사랑하는 아버지라면 잘했을 때 칭찬도 하지만, 그릇된 길, 죽음의 길을 걸어갈때는 강한 질타와 경고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요한 묵시록의 두려운 표현들은 그런 사랑의 틀 안에서 바라봐야 할 것. 요한 묵시록은 실제로 이 세상 종말과 심판에 관한 장면들을 많이 담고 있다. 그러나 그날과 그 시간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종말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강조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동시에, 세상의 갖은 시련 속에서도 용기를 내어 굳건히 살아가도록 위로와 용기를 북돋아주기 위한 책이 요한 묵시록입니다. 요한 묵시록은 절대 미래에 대한 예언이나 저주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보다 요한 묵시록은 악의 세력이 마지막 날에 반드시 필멸할 것이라는 것, 최종적인 승리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을 새롭게 재창조 하실 텐데, 새로운 창조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 그로부터 샘솟는 위로와 희망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2022년 2월 22일 오후 2시 종말이 온다는 식으로 날짜를 특정해서 가르친다면, 그는 백% 사이비가 틀림없다.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 다시 말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의 광경을 소개하고 있다.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광채는 매우 값진 보석 같았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 같았습니다.”(요한 묵시록 21장 11절)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은 하느님꼐서 세우시고 다스리시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옛 예루살렘 시대에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군주와 신하의 관계로 설정되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가 신랑과 신부 사이의 관계로 표현되고 있다. 요한은 새 하늘 새 땅,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감격에 젖어 내려다보는 중에 천상 어좌에서 들려오는 큰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쳐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 하느님 친히 그들이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요한 묵시록 21장 3~4절) 보십시오! 이 얼마나 큰 위로의 말씀입니까?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와 함께 계시겠답니다. 그분께서 몸소 우리들의 눈물을 닦아 주시겠답니다. 하루하루 힘겹고 고달프게 살아가는 우리를 향해 오늘 주님께서 주시는 따뜻한 위로의 메시지를 마음에 담고, 또 다시 힘을 내야겠다. 또 다시 일어서야겠습니다.

  늘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모든 어려움을 아시고 오늘도 내일도 당신의 응답에 귀 기울이게 하시어, 은총으로 충만하게 해 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기회가 오지 않을 때에는 스스로 기회를 만들라.'' - 스마일즈 -

♡2241회 마음을 씻는 방법은 ‘회개’ 와 ‘보속’ 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0월 6일(레위기 18장~ )

  랭은 ''집은 책으로 정원은 꽃으로 가득 채워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랑입니다.》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랑입니다. 부모 자식간의 사랑, 부부의 사랑, 연인들의 사랑, 사랑이 없는 곳에는 웃음과 행복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 입니다. 이보다 더 듣기 좋은 말은 없을 테니까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 입니다. 언제나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려는 마음은 마음에 평안과 안식을 준답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진실입니다. 진실한 말 한마디로 믿음과 행복을 줄 수 있다면 마음의 문을 열어 진실한 목소리로 행복을 주고 싶다.

 “그때에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어깁니까? 그들은 음식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습니다.’"(마태 15,1-2) “‘너희는 듣고 깨달아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바리사이들이 그 말씀을 듣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을 아십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초목은 모두 뽑힐 것. 그들을 내버려 두어라. 그들은 눈먼 이들의 눈먼 인도자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마태 15,10-14) 여기서 ‘조상들의 전통’ 은 '할라카' 라고 부르던 '생활 행동지침' 을 가리킵니다. 식사 전의 정결 예식은 그 지침 가운데 일부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조상들의 전통’ 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것을 어기는 것을 ‘종교적인 불경죄’ 로 여겼다. 그들은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든지 간에 정결 예식을 행해서 몸만 깨끗하면 깨끗한(거룩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형식만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율법주의’ 입니다. 속은 깨끗하게 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겉만 깨끗하게 하려고 하는 것은 ‘위선’ 이고, 또 속은 깨끗하지 않은데도 겉이 깨끗하다고 해서 “나는 깨끗한 사람이다.” 라고 잘난 체 하는 것은 ‘교만’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이렇게 꾸짖으셨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 23,25-28) 하느님은 우리의 ‘속’ 을 보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하느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진실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물질’ 이 죄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형식적인 정결 예식만으로 깨끗한(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라는 말씀은, 죄의 원인은 ‘마음’ 에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참으로 깨끗한(거룩한) 사람이 되려면 마음으로부터 깨끗해지려고(거룩해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에 대한 설명이 뒤의 17절-20절에 나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나 배 속으로 갔다가 뒷간으로 나간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느냐? 그런데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데 바로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이 나온다.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 그러나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마태 15,17-20) 하느님 앞에 참으로 깨끗한 사람으로 나서려면 마음을 먼저 씻어야 합니다. 마음을 씻는 방법은 ‘회개’ 와 ‘보속’ 입니다.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초목은 모두 뽑힐 것이다.” 라는 말씀은, 바리사이들의 ‘율법주의’ 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 라는 명목으로 조상들의 전통과 율법 준수를 강조했지만, 그들 자신들의 위선과 교만 때문에 그들의 율법 실천은 형식적인 율법주의가 되어버렸고, 그래서 결국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렸다. “그들을 내버려 두어라.” 라는 말씀은, “율법주의자들이 심판을 받는 것은 그들 자신들의 탓이다.” 라는 뜻입니다

.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회개와 구원을 포기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꾸짖으신 일이 많은데, 그 일은 모두 그들을 회개시켜서 구원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회개시키려고 타이르고 꾸짖어도, 고집이 너무 세서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다. “그들은 눈먼 이들의 눈먼 인도자다.” 라는 말씀은, “그들은 율법을 모르는 백성들에게 그것을 가르치지만 그들 자신들도 율법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는 눈먼 자들일 뿐이다.” 라는 뜻입니다. 제대로 실천하지 않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라는 말씀은, “율법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는 자가 율법을 모르는 자를 인도하면 둘 다 멸망하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위선자라면, 그는 자기 자신도 죄를 짓고, ‘남을 죄짓게 하는 죄’ 도 짓는 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의 속을 모르고, 그래서 그 사람이 위선자인지 아닌지도 모릅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보고서 다른 사람을 함부로 위선자라고 판단하는 것도 죄를 짓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나는 위선자인가? 아닌가? 나는 율법주의자인가 아닌가?” 를 반성하는 일입니다. “나는 지금 겉으로만 깨끗한가? 겉과 속이 똑같이 깨끗한가?” 사실 자기 자신이 위선자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더욱더 엄격해져야 합니다. 사람들이 ‘깨끗한 사람’ 이라고 나를 칭찬할 때, 또 ‘거룩한 사람’ 이라고 나를 존경할 때, 그때가 위험한 때입니다. 바로 그때 마귀의 유혹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깨끗한 사람이다.” 라고, 또 “나는 거룩한 사람이다.” 라고 나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이미 마귀의 유혹에 넘어갔음을 나타내는 것. 욕을 먹는 것보다는 칭찬을 듣는 것이, 그리고 비난을 받는 것보다는 존경을 받는 것이 더 좋지 않은가? ‘더 좋다.’ 는 그것이 함정입니다. 그 함정에 빠지기 전에 자기 자신을 더욱 엄격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그렇지만 항상 열등감과 자기 비하에 사로잡혀 있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객관적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들 마음 안에 하느님의 햇살이, 하느님 생명의 기운이 가득한 성령 충만함으로 치유 받으시고, 또한 몸과 마음이 아픈 다른 이들을 돕는 치유의 은총도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고난의 한복판에 기회가 있다.'' - 앨버트 아인슈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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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봉사자 박재만 세례자요한 010 - 3878 - 6634
  (수필가ㆍ전국성령쇄신봉사자협의회 말씀추천강사)
💖성령봉사자 류태숙 M.막달레나 010 - 6560 - 7354
  (시인ㆍ수필가ㆍ꽃예술설화중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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