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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기도회 봉사

♡2207회 자신을 믿지 맙시다. 이것이 뱀의 지혜입니다. 하느님을 믿읍시다. 이것이 - 비둘기의 단순함입니다. ♡

♡2207회 자신을 믿지 맙시다. 이것이 뱀의 지혜입니다. 하느님을 믿읍시다. 이것이 - 비둘기의 단순함입니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9월 2일(예레미야서 1장~ )

  알랭은 ''인간은 의욕하는 것, 그리고 창조하는 것에 의해서만이 행복하다.''

 《하느님의 복과 좋은 일을 고대하고 기대하기》 하느님의 복에 마음을 두고 좋은 일을 기대하며 그분이 예비하신 놀라운 일을 떠올려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이렇게 기도하라. “아버지,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날지 무척 기대됩니다. 오늘은 아버지께서 만드신 날입니다. 이 날을 기뻐하고 제대로 누리겠습니다. 하느님, 당신을 찾는 자에게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오늘 제 삶을 통해 주실 복과 은혜와 승리에 미리 감사드립니다.” 기도하고 나서 자신 있게 삶 속으로 뛰어들어 기대와 믿음으로 살라. -믿는 대로 된다, <긍정의 힘>- 

세상의 아버지들이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더 좋은 것으로 복과 은혜와 성공을 주시지 않겠는가? 인생은 긍정적인 생각으로 채워야 한다고 합니다. 심리학자에 의하면, 삶은 지금 이 순간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생각을 따라간다고 합니다. “기쁨과 평화, 승리, 은혜의 충만함, 하느님의 복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으면 그런 긍정적인 요소들과 우리 삶은 자석처럼 서로 끌어당긴다고 합니다.” 미술가는 자기 생각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미술 도구를 사용하여 보이는 실체로 구현합니다. 소설가도 그렇다. 생각 안에 있는 관념들을 글로 표현하면 소설이 됩니다. 신앙생활도 우리의 생각에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떠올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면 은혜롭게 되고, 하느님의 은총과 권능이 서로 감싸 안아 평안과 기쁨과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은 양이고,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은 이리입니다. 이리들이 대다수인 세상에서 양들이 살아남으려면 지혜로울 필요가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여기서 뱀은 죄를 짓게 만드는 본성이나 사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슬기와 지혜를 갖추어 위험한 이리들의 덫에 빠지지 말라는 것. 그래서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뱀처럼 슬기로울 수 있을까요? 하느님 앞에서 비둘기처럼 순박할 수 있으면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 비둘기일 수 있어야 사람들 앞에서 뱀이 될 수 있다. 사람들 앞에서 비둘기이면 하느님 앞에서 뱀이 됩니다. 순서가 바뀌면 안 됩니다. 하느님께 순수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사람들 앞에서 지혜롭다. 

로마의 건국신화를 소재로 한 영화 ‘퍼스트 킹’(2020)의 내용은 이렇다. 로마는 늑대로부터 키워진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에 의해 건국되었다. 형 로물루스는 신을 공경하는 인물이었고 동생 레무스는 자신의 힘을 믿는 사람이었다. 형은 육체적으로는 약했고 동생은 강했다. 그러나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형제는 매우 우애가 깊었다. 서로를 위해 주저 없이 목숨을 내던질 정도였다. 기원전 753년, 두 형제는 그 지역의 가장 강력한 민족 알바롱가 인들에게 사로잡힙니다. 알바롱가 인들은 자신들이 사로잡은 이들을 서로 싸우게 해서 지는 사람을 신에게 제물로 바쳤다. 동생이 누군가와 싸움을 해야 했을 때 형은 자진해서 동생의 상대가 됩니다. 일부러 맞아주다가 죽은 척을 합니다. 죽은 척을 하다 일어난 로물루스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여사제인 신녀가 자신에게 다가왔을 때 그녀를 인질로 잡고 나머지 포로들과 탈출에 성공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형 로물루스는 심한 상처를 입어 죽음 직전까지 다다릅니다. 신녀를 건드려서 자신들이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커지자 동생 레무스는 목숨을 걸고 형을 지킵니다. 그 와중에 신처럼 강한 힘이 자신 안에 있음을 느끼게 된 레무스는 그 무리의 왕이 됩니다. 레무스는 자신의 힘을 믿고 사람들을 제압하며 세력을 키워갑니다. 그러는 중에 신녀가 예언을 합니다. 두 형제가 한 형제를 죽이고 그 피의 힘으로 영원한 도시 로마가 세워지게 될 것이라고. 당연히 동생 덕에 간신히 생명만 부지하는 형이 동생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말합니다. 동생은 차마 그러지 못하고 그런 예언을 한 신녀를 처형합니다. 자신이 신이고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개척해나가겠다는 것. 그러면서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도 처형합니다.

 반면 신녀를 처형했다는 말을 들은 형은 매우 마음 아파하며 신녀가 들고 다니는 불씨를 찾아 다시 살려냅니다. 백성은 몸은 약하지만 자비로운 로물루스의 편에 서고 오직 힘에 굴복한 이들만 레무스의 편에 섭니다. 형은 동생이 알바롱가 인들에게 생명이 위태롭게 되자 마을 사람들과 함께 동생을 구합니다. 그러나 동생은 자신의 백성들을 마음대로 한다며 형에게 자신을 왕으로 섬기라며 덤비고 형은 쓰러진 척하다가 마지막에 동생을 찌릅니다. 이렇게 로마는 강력한 공포정치를 하려던 레무스가 아니라 신을 공경하던 형 로물루스에 의해 시작됩니다. 하느님 앞에서 뱀처럼 슬기로우면 사람들에게 비둘기처럼 당합니다. 반면 하느님 앞에서 비둘기가 되면 뱀과 같은 지혜를 주님께서 주십니다. 사람은 비둘기와 같은 마음과 뱀과 같은 마음을 동시에 지닙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 앞에서 어떠한 성격이 드러나게 할 것인가에 달려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루카 10,21)라고 기도하십니다. 하느님 앞에서 철부지가 되어야 합니다그것이 참 지혜입니다. 이를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나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를 부수어 버리고 슬기롭다는 자들의 슬기를 치워 버리리라.’”(1코린 1,19) 또 말합니다. “아무도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기가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지혜가 하느님께는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을 그들의 꾀로 붙잡으신다.’”(1코린 3,18-19) 예수님의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라는 말에 집중합시다. 주님께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될 때라야 이 세상에서 진짜 뱀처럼 슬기롭게 됩니다. 자신이 슬기롭다고 믿는 사람은 그 꾀에 자신이 넘어갑니다. 자신을 믿지 맙시다. 이것이 뱀의 지혜입니다. 하느님을 믿읍시다. 이것이 비둘기의 단순함입니다.

  우리 안에 생명의 말씀이 살아있음으로 믿고, “24시간...365일...” 어디에서든지 영이며 생명이신 주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행복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빈둥대는 것과 공허하게 있는 것보다 더 유해한 것은 없다.'' - 마르쉘 휼 -


♡2208회 자기가 있는 곳에서 주님을 만날 생각은 하지 않고, 기본적인 신앙생활을 - 충실하게 하지도 않고, 무엇인가 특별한 기적만 찾아다니는 것은, ‘신앙심’ 이 아니라 그냥 ‘호기심’ 일 뿐입니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9월 3일(예레미야 21장~ )

 프랭클린은 ''지식에 투자하는 것이 가장 이윤이 높다.''
《프랑수아 드 살레의 묵상》
1단계 : 준비 상상의 날개를 펼치라거룩한 현존 한복판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라. 하느님은 어디에나 존재하시므로 ‘지금 여기’ 에도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라. 그리스도가 바로 곁에 서서 모든 일을 함께 행하신다고 생각하라. 먼저 죄를 고백하고 나머지 묵상 시간 동안 인도해 주시길 요청하라
2단계 : 고찰 주제를 정하라. 방금 읽은 성경 본문에서 찾는 것도 괜찮다. 그리고 거기에 마음을 쏟으라. ‘집으로 가져갈 꿀을 딸 때까지 꽃을 떠나지 않는 벌처럼’ 매달리라.
 3단계 : 결심. 감정과 의지가 모두 필요하다. 고찰한 결과에 따르면 삶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겠는가? 그렇게 변하는 데 필요한 일들을 행하기로 결심하라. 하느님의 도움을 받으라
4단계 : 결론. 정원을 거닐다가 꽃 몇 송이를 꺾어들고 집으로 들어가듯, 오늘 남은 시간 속으로 가져가야 할 가르침들을 골라 내라. 주님이 알려주신 것들에 대해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라. 변화되기로 결심한 일들에 대해 헌신하는 기도를 드리라. 뜻을 이룰 수 있도록 은혜와 능력을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라.

 “그때에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마태 12,38-41) 여기서 ‘표징’ 을 보고 싶다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말은,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어떤 놀라운 기적을 일으켜 보라는 뜻입니다. “표징을 일으켜서 당신이 진짜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해 보시오.” 그들의 말은, 표현만 보면 ‘정중한 요청’ 으로 보이지만, 뜻으로는 ‘위협적인 요구’ 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안 믿는 자들이고, 예수님을 가짜 메시아로 생각했던 자들입니다. 또 그들은 “예수는 가짜 메시아니까 표징을 일으킬 수 없다.” 고 생각했던 자들입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라는 말씀은, “믿음도 없고, 회개하지도 않고,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지도 않는 자들이 감히 하느님의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라는 뜻입니다. 표징을 요구할 자격도 없는 자들이 감히 그것을 요구한다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표징을 요구하는 자들을 꾸짖으신 말씀은, “나에게 표징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나를 믿어라.”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표징이란 원래, 안 믿는 사람들을 믿게 만들기 위한 일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의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서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표징을 보기를 원한다면 먼저 믿어야 합니다. 

‘요나 예언자의 표징’ 이라는 말은, 40절에 설명되어 있는 것처럼,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다가 살아서 나온 일을 가리킵니다. 그 일이 ‘표징’ 인 것은, 그런 일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 하느님의 권능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일은 “요나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진짜 예언자” 라는 것을 증명하는 표징이 됩니다. “사람의 아들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요나처럼 나도 죽어서 묻혔다가 사흘째 되는 날에 부활할 것이다.”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지금은 믿음 없는 너희에게 어떤 표징도 보여 줄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죽었다가 부활하게 되면 그 일이 너희에게 표징이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면 예수님을 믿을 것이고, 그러면 구원받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면 예수님을 안 믿을 것이고, 그러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바로 그런 뜻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구원과 멸망을 가르는 표징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는 말씀을 하셨을 때, 예수님을 믿었던 사도들도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는데, 믿음 없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더욱더 알아듣지 못했을 것. 가짜 메시아라서 표징을 보여 주지 못한다고만 생각했을 것.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를 단죄할 것.” 라는 말씀은, “종말의 심판 때에, ‘이 세대가 예수님을 안 믿은 것은 죄’ 라고 니네베 사람들이 증언할 것.” 라는 뜻입니다.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라는 말씀은, 종말의 심판을 받기 위해서 ‘모든 사람’ 이 부활하게 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묵시 20,12-13)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기 때문에 이 세대의 유죄를 증언할 자격이 있다.” 라는 뜻입니다.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요나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요나는 니네베라는 도시의 멸망을 선포한 예언자일 뿐이지만, 예수님은 인류 전체를 구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요나보다 더 위대하신 분입니다. 이 말씀은, “니네베 사람들은 한 예언자의 설교만 듣고도 회개했는데, 너희는 인류 전체를 구원하는 메시아의 설교를 들으면서도 왜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느냐?”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니네베 사람들은 정말로 요나의 설교만 듣고서 회개했을까? 혹시 ‘요나의 표징’ 때문에 놀라서 회개한 것은 아닐까?”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요나서를 보면, 니네베 사람들은 니네베가 멸망한다는 요나의 선포만 듣고서 회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요나 3,4-5) 

사실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다가 살아서 나온 일은, 요나 자신만 알고 있는 그 혼자만의 체험이고, 그것을 본 사람도 없고, 다른 사람들이 그 일을 증명하거나 확인할 수도 없다. 요나를 바다에 내던진 뱃사람들도(요나 1,15) 바다에서 요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가 어떻게 살아났는지 모릅니다. 뱃사람들은 아마도 죽은 줄 알았던 요나가 죽지 않고 살아서 니네베에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무척 놀랐을 것이고, 소문을 널리 퍼뜨렸을 것이고, 그 소문이 니네베에도 퍼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니네베 사람들이 그 소문 때문에 회개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오늘날에도 믿으려고 노력하지는 않고 기적만 찾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가 있는 곳에서 주님을 만날 생각은 하지 않고, 기본적인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지도 않고, 무엇인가 특별한 기적만 찾아다니는 것은, ‘신앙심’ 이 아니라 그냥 ‘호기심’ 일 뿐입니다. ‘호기심’ 이라는 말에서 헤로데의 호기심이 연상됩니다. 세례자 요한을 죽인 다음에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서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어 했다(루카 9,9).그가 좋은 뜻으로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어 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루카 13,31)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할 때 예수님과 헤로데가 만나게 되는데(루카 23,7), 그때 헤로데는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어떤 표징이라도 보기를 기대했다가(루카 23,8), 예수님께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시자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했다.(루카 23,11) 그의 호기심은 신앙심과는 아무 상관없는 ‘불순한 호기심’ 이었다.

  부스러기 은총이라도 좋다. 주님과 함께 라면, 우리들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샘물을 흘러넘치도록 받아 누리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가정은 사람을 만드는 공장이다.'' - 버지니아 사티어 -

♡2209회 인간이 대단한 것 같지만 세월 앞에 장사 없다. 즉시 지나갑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9월 4일(예레미야 51장~ )

  크리슈나무르티는 ''진리를 보기 원하는 자, 조각조각 떨어뜨려 보지 말고 전체를 보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것,》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시련과 실망들을 될 수 있는 한 묵묵히 견디기를 바라십니다.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없다고 해서
쓸데없이 한탄하는 것을 삼가야 합니다. 사태를 더 좋게 만드는 길은 수심에 잠기는 것이 아니라 행복해하고 즐거워하는 것.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입니다..."(요한16,22) 우리의 삶은 있는 그대로일 뿐이며 그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께 봉사할 기회를 발견하게 되어 있다. 우리가 당하는 시련들은 사실 우리 자신의 잘못, 즉 정면에서 응시하는 우리 행동의 결과입니다.

비록 우리가 저지른 잘못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바로 잡을 수 없을때에는 잘못된 것에 대해 유감을 표하고 명랑하게 지내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다시 시작하십시오. 하느님께 대한 봉사는 매시간 매일 이어지는 것.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을 때 우리가 커다란 십자가와 시련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는 것은 가소로운 일입니다. 우리가 행복을 느껴 가는 것이 하느님을 위한 일을 하는 길입니다. 지금까지 어떤 마음도 주님의 마음만큼 부드럽지는 못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울고 있을 때 그 눈물이 그치기를 바라는 마음 없이는 그 사람을 바라보실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 삶이 비참함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하겠습니까?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전부입니까? 만일 잘못이 우리 자신에게 있다면 그 모든 것을 하느님의 탓으로 돌린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나쁜 기질이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오는 것이라고 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봉사에서 우유에 적신 빵처럼 부드러워 져야 하지 않을까요? -하느님께 신뢰 중에서- 별것 없으면서 큰 소리 뻥뻥 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 특징이 말은 뻔지르르 하지만 뒷감당이 안됩니다. ‘나야 나! 내가 해줄 수 있다구! 나만 믿고 따라와!’ 철석같이 굳게 믿고 따라가보면... 결과는 허당입니다. 쫄망입니다. 짙은 실망감과 허탈함만이 남습니다. 인간의 능력이라는 것, 엄청난 것이 사실입니다. 

불과 50년, 100년 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일들이 지금 우리 눈앞에 벌어지고 있다. 걸어다니면서 전화한다는 것, 만화 속에서나 가능한 것인줄 알았는데, 지금 스마트폰 없으면 사람 취급도 못받습니다. 한 식당에 갔더니 로봇 시스템이 작동되고 있더군요. 로봇이 주문을 받고, 로봇이 배달도 해줬습니다. 다방면에 걸쳐 최첨단을 달리다보니 은연 중에 인간의 머릿속에는 인간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팽배합니다. 다양한 분야에 슈퍼맨들이 등장합니다. 인간의 다양한 욕구를 초스피드로 충족시켜줍니다. 그러다보니 점점 하느님의 영역이 축소되는 듯 합니다. 자연스레 하느님 현존이나 영적인 삶, 신앙이나 희생, 봉사나 헌신 같은 개념들이 뒷자리로 물러납니다. 하느님 없이 인간의 힘만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난다 긴다 할지라도, 최첨단의 일선에서 세상만사를 좌지우지한다 할지라도, 무소불위의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해결한다 할지라도, 숨 한번 끊어지면 그만입니다. 사실 인간이 할 수 있는 부분은 무척이나 제한적이고 한시적입니다. 여기 저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서 떵떵거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인간만사 부질없습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부귀영화라든지 인생의 절정기가 영원할 것 같지요? 사실 순식간에 다 지나갑니다. 마치 새벽녘 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 한 방울 같다. 해가 뜨면 언제 그랬냐는듯이 사라질 아침 안개 같다. 인간이 대단한 것 같지만 세월 앞에 장사 없다. 즉시 지나갑니다. 인간이 지나가면 마침내 주님이 오십니다. 인간의 끝에서 주님께서 시작하십니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 손에 들려있는 진흙 한 덩이일 뿐입니다. “옹기장이는 진흙을 손으로 빚어 옹기그릇을 만드는데, 옹기그릇에 흠집이 생기면 자기 눈에 드는 그릇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그 일을 되풀이하였다.”(예레미야서 18장 4절)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여삐 여기셔서 우리를 물레 위에 고이 얹고 돌리면서 멋진 작품 하나 만드시면, 그걸로 감지덕지하면서 깊은 감사를 드려야겠지요. 그러나 반대로 만드신 작품이 당신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어쩔 수 없다. 애써 만드신 작품을 순식간에 뭉개버리십니다. 뚤뚤 뭉쳐 멀리 던져버리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느님께 왜 그러셨냐고 따지거나 대들수 없습니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진흙으로서 우리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분 손안에 든 한 줌 진흙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 한 가지! 우리를 이 세상에 내신 창조주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내신 주님이신데, 언젠가 그분께서 우리를 거두어가신다 할지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감사와 찬양까지는 힘들더라도 순순히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습니다. 한때 위풍당당하던 분들, 시대를 호령하던 분들, 하늘의 별까지 따올 것 같던 분들, 수직상승만 거듭하던 분들이 줄줄이 깊은 나락으로 추락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느끼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인간 존재라는 것, 아무리 대단해보인다 할지라도 사실 까놓고 보면 별 것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 존재라는 것, 이 지상에서 얼마간 권세와 영화를 누릴지 모르지만,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대상, 불멸의 대상은 오직 한 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분 뿐이십니다.

  좋은 일에는 손바닥을 마주쳐 함께 더 기뻐하고, 나쁜 일에는 말 없는 침묵으로 나의 손바닥을 아껴두면 될 일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주어진 일과 만나는 사람 안에서 하느님의 거룩함을 바라볼 수 있는 은혜롭고 축복된 삶이 되시고키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희망을 가져본 적이 없는 자는 절망할 자격도 없다.''  - 버나드 쇼 -


♡2210회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느냐보다 자신이 무엇을 싫어하느냐를 알아서 그것을 쳐내는  - 것이 더 중요합니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9월 5일(에제키엘 1장~ )

  모로코속담에 ''말이 만든 상처는 칼로 입은 상처보다 깊고 심하다.''
 《생명을 구하는 포옹》태어난 지 며칠 안 된 쌍둥이 중 한 아이가 심장에 큰 결함을 안고 태어났는데 의사들은 하나같이 그 아이가 곧 죽게 될 것이라 예상했다. 며칠 동안 그 아기는 병세가 계속 악화되어 죽기 직전에까지 이르렀다. 그때 한 간호사가 쌍둥이를 하나의 인큐베이터에 함께 넣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는 병원에 어긋나는 일이었기에 담당 의사는 잠시 고민했다. 결국 엄마 자궁에서처럼 두 아이를 한 인큐베이터 안에 나란히 눕히기로 했다. 그런데 건강한 아이가 팔을 뻗어 아픈 동생을 감싸 안았다.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동생의 심장이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고 혈압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동생은 조금씩 나아졌고, 현재 두 아이는 완전히 정상으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소문을 들은 한 신문사가 인큐베이터 안에서 서로를 포옹하고 있는 쌍둥이의 사진을 찍고는 ‘생명을 구하는 포옹’ 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믿는 대로 된다,<긍정의 힘> - 사람은 본성적으로 서로 사랑하고 포옹하도록 타고난 모양입니다. 전혀 아직 자의식이 없는 갓 태어난 아이가 인큐베이터에서 심장이 안 좋은 동생을 포옹하는 것은 본능에 의한 것이지 자의적으로 한 행동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목적은 누군가를 포옹해 주고 사랑하도록 하는 의무를 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누군가 우리의 포옹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우리의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 우리의 손과 목소리에는 치유의 능력이 숨겨져 있다고 합니다. 하느님이 당신의 모상으로 사람을 만드시어 당신 사랑의 도구로 택하시어 서로에게 희망과 치유, 사랑과 축복을 주도록 하는 능력을 부여하셨다는 것. 

면담때 연애에 관한 주제로 이야기했다. 그러다 자신이 소개팅을 시켜주면 성사될 확률이 높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 비법을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확실히 다른 것이 있었다. 보통은 소개팅을 시켜줄 때, “어떤 스타일의 사람을 좋아하느냐?”, “연봉은 얼마나 되면 좋겠냐?” 등을 물어봅니다. 그러나 “이것만 아니면 된다.” 라는 것 하나만 말해달라고 한답니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정보만 달라고 하는 것. 만약 “나는 키 작은 것은 용납 못 해.” 라고 한다면, 대상 중에 키 작은 사람은 제외하는 것. 그러면 일단 만났을 때 비호감은 아니니까 말이 통하고 말을 하다 보면 정이 든다는 것. 반면 그 사람이 좋아하는 면을 갖춘 사람을 소개해주면 그 사람 안에서 싫은 면도 발견하게 되어 처음엔 좋았다가 금방 싫어져 헤어지게 된다고 했다. 정말 그런 것 같다.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의 어떤 면이 특별히 좋아서 만나기보다는 자신이 싫어하는 면이 특별히 없어서 만나는 경우가 많다. 특별히 젊은 남자들은 예쁜 여자면 다 좋아하는데, 그래서 결혼하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 성격은 영 자신과 맞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제야 자신이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아도 때는 늦다. 그러니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느냐보다 자신이 무엇을 싫어하느냐를 알아서 그것을 쳐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특히 예를 들어 ''워런 버핏''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하고 싶은 것 25개를 적어서 5개만 남기고 나머지는 신경 쓰지 않는 방법을 씁니다. 주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벌 수 있는 주식을 찾는 것이 아니라 손해를 끼칠 수 있는 주식들은 쳐내고 마지막 남는 것을 선택하여 투자합니다. 그의 투자방식은 돈을 많이 버는 데 있지 않고 손해를 보지 않는 데 있다. 좋은 것을 하는 것보다 싫은 것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는 것보다, 내가 싫은 사람을 선택하는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좋아하는 것을 아는 것보다 싫어하는 것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장점을 키우려고 노력하시기보다는 우리 단점을 제거하시려는 데 더 노력을 기울이십니다. 과일나무가 있다면 굵고 튼튼한 가지를 더 튼튼하게 자라도록 신경 쓰는 게 중요할까요, 아니면 쓸데없이 에너지만 축내며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들을 쳐내는 것이 더 중요할까요? 쓸데없는 것들을 쳐내다 보면 자동으로 좋은 가지는 더 좋아집니다. 좋은 것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나쁜 것을 쳐내는 노력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쳐내고 싶은 나쁜 가지들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바로 우상 숭배자가 되게 만드는 자아의 가지들입니다. 가다라인들의 가장 문제는 재물에 대한 욕심이었다. 예수님은 마귀 떼를 그들이 키우는 돼지 속으로 들어가게 만들어 그것들을 물속에 바쳐 죽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것 하나가 있다면 바로 재물에 대한 욕심입니다. 그것이 우상이 되어버려 당신을 그 우상을 섬기는 데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섬기며 하느님을 자신들 종으로 만들어버린 것과 같다. 주님은 우상숭배를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리고 가장 큰 우상은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세속, 육신, 마귀의 욕구가 우리를 우상 숭배자가 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내 안의 이 가지치기하러 오시는 예수님이 싫다면 가다라인들처럼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청하게 될 수밖에 없다. 하느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가지들을 제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십일조를 바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주님께 바쳐야 했던 선악과와 같다. 결국, 그것을 바치게 하지 못하는 장본인은 우리 안에 있는 뱀입니다. 자아입니다. 세속, 육신, 마귀의 욕구입니다. 예수님은 그것들을 하나하나 쳐내기 위해 오시는 것. 만약 그것들의 배를 채우기를 바란다면 그것들을 쳐내려 오시는 예수님을 거부하게 될 수밖에 없다. 세속, 육신, 마귀의 욕구 가지치기만 할 수 있어도 내 안의 성인의 본성은 저절로 더 완전해집니다. 내가 진정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면 하지 말아야 하는 것부터 가지 쳐 나가십시오.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알 수 없거든 하기 싫은 것부터 가지 쳐 나가십시오. 문제는 에너지입니다. 그 에너지가 좋은 곳에 집중되려면 그것을 허비시키게 만드는 것들부터 가지치기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당신이 옳습니다.” 그러니 무슨 일을 시켜도 짜증이 없고 불평도 없이, 먼저 우리들 안에 성령의 불로 말씀의 백혈구를 담고, 그리고 말씀의 적혈구가 되어 발걸음마다 회복되는 은총 가득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삶은 당신이 만드는 것이다.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그랜마 모세 -


♡2211회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2)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9월 6일(에제키엘 30장~ )

  나폴레옹 힐은 ''마음에 품을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잘못이 의미하는 것은》우리는 우리의 약점들과 어두운 부분들을 결코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 잘못 자체가 그렇게 크게 나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말실수를 했거나 자신에 대한 자랑을 늘어 놓았거나 어떤 것을 잊어버렸을 때, 이들 자체가 큰 비극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데에서 비극이 생긴다. ‘내가 만약 잘못을 범하면, 나는 가치 없는 존재가 될 것이고, 그러면 사람들이 나를 배척할 거야. 이러한 잘못된 선입관이 이들로 하여금 그 잘못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한다. - <행복한 선물>중에서- 우리는 자신이 나약한 죄인일 뿐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면 영영 구원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달아서 겸손하게 주님의 자비를 간구해야 하겠다. 인간이 원죄 이후 죄에 기울어지는 경향성이 있다. 우리가 잘못을 범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도 같은 죄에 늘 떨어집니다. 그래서 죄의식에 빠져서 자신에 좌절하여 나락에 떨어집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이러한 인간 조건을 겸허히 받아들여 하느님의 은총의 햇빛에 내어 놓으며 그분의 사랑의 손길과 은총을 믿고 인생 여정을 가는 것. 우리는 종종 믿음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은 누구의 믿음인가요? 나인가요? 아니면 가까운 내 친구인가요? 아마 대부분이 당연히 ‘나’ 라고 말씀하실 것.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고쳐 주셨는지 보십시오.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치유를 받아야 할 당사자가 아니었다. 바로 옆에 있는 친구의 믿음을 보시고 치유해주셨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몇 년 전에 아버지께서 편찮으셔서 응급실로 급하게 간 적이 있다. 이 응급실에서 의사 선생님은 보호자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지금 환자의 상태가 어떤지, 왜 이렇게 되셨는지, 식사는 무엇을 하셨는지, 평상시에 지병이 있었는지…. 솔직히 잘 몰라서 누님이 대답했지만, 의사는 환자인 아버지에게 물어보지 않고 보호자에게 물어봤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버지가 이 모든 것을 대답할 여력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평상에 누워 있는 중풍 병자의 믿음은 아주 부족해져 있는 상태였다. 자신의 병에만 집중하고 있으므로 주님께 대한 믿음을 두기가 힘든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옆에 있는 친구의 믿음을 보시고 치유해주신 것.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 수 있다. 즉, 치유할 이유를 만드시는 분이지, 치유하지 못할 이유를 만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 치유 과정에서 꼭 필요한 과정이 있다.
첫째는 용기를 내는 것. 스스로 갖는 용기가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맡길 수 있는 용기, 어떤 순간에서도 악에 굴복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둘째는 죄의 용서를 받는 것. 즉, 영적인 치유가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를 통해서만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한 뒤에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2) 그 뒤에 일어나 집으로 갈 수 있었다. 진정한 치유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첫 번째 행동이 분명해집니다. 먼저 용기를 내어야 합니다. 세상의 죄악을 두려워하고 겁낼 필요가 없다. 할 수 없는 이유를 만들어 뒤로 숨으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어떻게든 우리와 함께하면서 우리를 치유해주시려는 사랑 가득한 분이시기에, 우리의 용기로 충분히 세상의 악을 물리치고 참 행복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어느 사진작가가 중견 여배우의 사진을 찍게 되었다. 평소에 너무나 좋아하는 여배우의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혹시 자신이 찍은 사진이 여배우에게 누가 되지는 않겠냐는 걱정도 함께 했다. 그래서 더욱더 최선을 다해 촬영했다. 사진 촬영 후 여배우에게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진을 한 장씩 한참 동안 바라보던 여배우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제 얼굴에도 주름이 가득 보이네요.” 사진작가는 이 주름이 마음에 안 드는 것으로 생각해서,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주름을 깨끗이 수정하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여배우는 깜짝 놀라 말합니다. “아뇨, 수정하지 마세요. 저는 제가 가장 아끼는 지금의 얼굴을 얻는 데 평생 걸렸거든요.” 자신의 주름까지 사랑하는 사람이야말로 지금의 나를 온전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까요? 내 몸인데 부정해봐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인정해야 사랑할 수 있다.

  내 마음을 다하고, 내 목숨을 다하고, 내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 그래도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우리들에게는 몸과 마음에 치유의 은총이 베풀어지고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진실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고 진실만이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다.''  - N. 부알로 -


♡2212회 나뭇잎은 부는 바람을 막을 수는 없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9월 7일(다니엘서 1장~ )

  코르네이유는 ''거짓말을 한 그 순간부터 뛰어난 기억력이 필요하게 된다.''
《부활은 바로 내 안에서 일어난다.》(행복한 기도 - 라디오 피정) 부활이란 바로 내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내가 넘어진 다음에 계속 누어있지 않는다면 실패 후에 좌절하지 않는다면 쓰라린 좌초 후에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대신 그리스도께서 나를 일으켜 세우실 것이라는 굳은 신뢰를 가지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면 부활은 바로 내 안에서 일어난다. “나는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필리 3,10-11) 베드로 사도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 이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 안에 있음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생각과 느낌을 형성하고 계심을 느낀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육신과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으실 때라야 나는 비로소 제대로 산다. 그리스도 안에 존재함은 나에게 질적으로 새로운 삶을 가져다준다. 만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나를 의롭게 하실 것. 그분께서 나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인도하시고 자유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당신의 영으로 채워 주시고 당신의 자비와 사랑으로 감싸 주신다. 그분은 나를 당신 부활에 참여하게 하시며 불안의 무덤에서 나를 부활시키시고, 절망과 자학 등의 무덤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삶을 방해하는 모든 것에 저항 하도록 나를 이끄시고 생명을 위해 다시 일어서게 나를 인도하신다.
부활은 일상의 한가운데서 이미 일어난다. 부활이란 바로 내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부활은 내가 죽은 다음에 나를 기다린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며 사랑을 향한 나의 갈망이 온전히 채워지는 새로운 자유와 새로운 사랑의 시작이다. -안젤름 그륀 신부지음- (기도 생활의 안내) 

****피정 중에 예수 호칭 기도를 바치기를 권하고 있다. 편하게 앉아 호흡을 의식하면서 숨을 쉬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라. 그리고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라. 그런 다음에 호흡의 리듬에 따라 예수 호칭 기도를 드려라.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며, “주 예수 그리스도님” 하고 읊조리고, 숨을 천천히 내쉬며, “성자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고 기도한다. 만일 그대가 예수 호칭 기도를 20분 내지 30분 정도 바치면 그대는 안정을 찾을 것.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 그러면 분노, 불안, 시기, 슬픔과 공허 등이 더 이상 나를 좌지우지 못하게 된다. 예수님의 자비는 내 안에서 깊은 내적 평온을 불러일으킨다. 그대는 부정적 생각과 감정들을 일부러 몰아내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런 생각, 감정들과 함께 예수 호칭 기도를 바쳐야 한다. 바오로 사도와 더불어 이제는 제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제 안에 사신다는 해방과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세상일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 많습니다. 

코로나19로 이동의 제약이 있으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예전에 읽지 못했던 책을 읽고 있다. 규칙적으로 걷고, 외식의 자리도 적으니 건강에도 도움이 됩니다. 서양의 철학자 세네카는 화려한 언변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술자리도 자주하게 되었고, 결국 건강을 잃어버릴 정도가 되었다. 세네카는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어서 섬으로 8년간 유배를 가게 되었다. 답답하고, 억울한 시간일 수 있었지만,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지내면서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명상과 독서를 통해서 화려한 언변을 자랑하는 정치가에서 사색과 철학으로 시대를 선도하는 철학자가 되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님도 18년 동안 유배지에서 지냈다. 자신을 탄핵한 사람을 원망할 수 있고, 유배를 보낸 왕이 서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산 정약용 선생님은 건강하게 지낼 수 있었고, 많은 저술로 존경받는 학자가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로니아로 유배를 가야 했다.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성전도 없었다. 정든 고향을 떠나니 외로웠다. 율법과 계명을 지킬 수 없으니 괴로웠다. 무능한 왕을 탓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신 하느님을 원망할 수 있었다. 유배지로 가는 길은 고난의 길이요, 죽음의 길이 되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꾼 사람들이 있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이방의 신을 섬겼던 지난날을 반성하였다. 유배지로 가는 길은 정화의 시간이 되었다. 율법과 계명을 지킬 수 없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길 수 있었다. 하느님의 손길은, 하느님의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바뀌는 것을 체험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새로운 기준을 말씀하십니다. 어머니와 형제의 기준입니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가족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은 모두 가족이라고 하십니다. 나뭇잎은 부는 바람을 막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부는 바람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더욱 지혜로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태어났다. 신앙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왔으며, 하느님께로 갈 것을 믿게 되었다.

 나뭇잎이 바람에 자신을 맡기듯이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에 모든 것을 맡기면 한결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다. 그 모든 것들도 결국은 다 지나가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분열과 대립이 있다. 소통과 대화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타협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합니다. ‘지역, 이념, 세대, 빈부’ 의 갈등이 커지고 있다.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이들을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고, 옳다 하여도 나의 편이 아니라면 무조건 반대하는 때도 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소통과 대화를 위한 원칙과 상식을 말해주고 있다. ‘학연, 지연, 혈연’ 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세대, 이념, 빈부’ 의 잣대로 판단해서도 안 된다고 하십니다. 오직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원칙과 상식이라고 말을 하십니다. 지금은 죽고 못 살 것 같지만 그것도 다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드러난다면 우리는 모두 한 형제요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당신 땅을 어여삐 여기시어, 야곱의 귀양을 풀어 주셨나이다. 당신 백성의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잘못을 덮어 주셨나이다. 당신의 격분을 말끔히 씻으시고, 분노의 열기를 거두셨나이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어떤 손해를 보더라도 어떤 아픔을 겪더라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는 삶이 되시기를, 또한 우리들 안에 영원한 생명이란 하느님의 은총이 충만하게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내 비장의 무기는 아직 손 안에 있다. 그것은 희망이다.'' - 나폴레옹 -



♡2213회 삶에서 무엇이 방향이냐면 ‘욕구’ 가 방향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9월 8일(다니엘서 11장~ )

 손자병법에 ''새벽녘의 계획이 하루 일을 결정한다.''
《거룩한 나의 영혼》나는 내 자신의 친구인가? 나는 나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는가? 이와 같은 질문들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내 자신과 친구가 되고 또 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한, 다른 사람과도 친구가 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내 자신과 내가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일까? 내 자신의 참 모습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누구나 한편으로 예쁘면서도 나름대로 한계가 있고, 부자이면서도 가난하며, 너그러우면서도 동시에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들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는 하느님의 빛을 담아 반짝이는 영혼을 지닌 존재이다. 나의 참 모습을 알아간다는 것은 비록 완전히 알아듣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내 영혼의 거룩함을 깨우쳐 간다는 것이다. 내 영혼이라 할때 이는 어줍잖은 내 감성적 정신적 느낌하고는 전혀 다른 무엇이다. 내 영혼이 사랑이신 하느님 품 안에 있음을 신뢰 할 수 있을 때 내 자신과 친구가 될 수 있고 나아가 다른 이들과도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다.
-헨리 나우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늘 나라는 밭에 묻힌 보물이고 밀과 가라지와 같고 밀가루 서 말 속에 누룩을 넣는 것과 같고 겨자씨가 나무로 자라나는 것과 같다. 하늘나라가 ‘물고기를 잡는 그물’ 과 같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물고기를 그 종류별로 가려서 어떤 것들은 하늘나라로 어떤 것들은 지옥으로 던져버린다는 뜻을 넘어서는 의미를 지닙니다. 자세히 보면 하늘나라가 그물로 잡은 좋은 물고기들이 가는 종착지가 아니라 하늘나라를 ‘그물 자체’ 라고 말합니다.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의 하늘나라에는 좋은 물고기도, 나쁜 물고기도 들어와 있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우리는 하늘나라에 들어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악한 이들은 밀과 가라지처럼 마지막 때에 쫓겨날 수는 있다.

 하늘나라에 악한 물고기까지 들어와 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늘나라가 그물로 잡은 물고기가 마지막으로 가는 행선지가 아니라 그물 자체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스프링 벅’(Spring Bog)은 아프리카 남서부 지역에 서식하는 영양 가젤의 일종입니다. 아프리카의 건조한 초원에서 풀을 뜯으며 집단으로 생활하는 스프링 벅은 한 번에 3m이상 높이 뛸 수 있고 시속 88km까지 달릴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민첩한 그들이 집단으로 절벽에서 떨어져 죽거나 강물에 휩쓸려 죽는 경우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어찌 된 일일까요? 학자들이 연구해보니 그들의 지나친 욕심 때문이라고 합니다. 건조한 풀을 무리가 함께 뜯어먹다 보니 뒤처져 뜯어먹는 스프링 벅들은 이미 앞서간 스프링 벅들이 먹은 잔풀만을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동할 때는 먼저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재빨리 달려야만 합니다. 만약 몇 마리가 뛰기 시작하면 뒤에 있는 것들은 이번엔 앞자리를 차지하려고 더 빨리 달립니다. 그러다 절벽이 나타나거나 강물이 나타나서 멈추려 해도 뒤에서 달려오는 것들 때문에 멈출 수가 없어 밀려버리는 것. 스프링 벅의 이야기와 ‘그물’ 로 비유되는 하늘나라의 비유를 비교해 봅시다. 만약 스프링 벅을 그물로 잡을 수 있다면 그것들이 잃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더 먹기 위해 달리고 싶은 욕구를 잃습니다. 여기저기로 가고 싶은 방향에 대한 선택의 자유를 잃는 것. 그들은 자신들의 욕구를 더는 펼칠 수 없게 됩니다. 하늘나라를 ‘그물’ 로 비유하신 이유는 하늘나라가 바로 힘이나 속력이 아닌 ‘방향’ 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삶에서 무엇이 방향이냐면 ‘욕구’ 가 방향입니다. 우리는 각자가 선택한 욕구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그물에 잡힌 물고기들은 더는 자신이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갈 수 없게 됩니다. 그래도 끊임없이 다른 방향으로 가려고 하면 하느님은 그런 물고기는 놓아주십니다. 그 좋은 예가 ‘가리옷 유다’ 입니다. 예수님은 좋은 물고기, 나쁜 물고기 가리지 않고 당신 안에 모으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돈과 명예를 좋아하는 욕구를 버리지 못하면 예수님은 놓아버리십니다. 사람이 두 방향으로 동시에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방향에 우리 몸을 맡기는 것. 이것이 하늘나라입니다. 하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고 그 방향에 나를 맡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속-육신-마귀의 이전 욕구를 끊어야 합니다. 두 상반된 욕구를 동시에 따를 수는 없다. 내 이전 욕구를 버리고 하느님 욕구를 따름으로써 내가 변화하게 됩니다.

한 중학교에서 도덕 선생님이 사춘기가 된 아이들에게 부모님을 30일 동안 칭찬하고 일기를 써 오라고 숙제를 냈다. 처음엔 아이들도 쑥스럽고 부모도 쑥스러워했다. 30일 동안의 부모를 칭찬하기 위해 아이들은 비로소 부모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이 한 달 동안의 감사를 위한 노력이 끝나고 아이들은 “그냥 밥만 먹고 잠만 자는 곳이었는데, 요즘 집이 좋아요.”, “칭찬을 마친 내가 참 대견스러워요. 나도 참 괜찮은 사람 같아요.”, “부모님을 칭찬하면서 나도 조금씩 변하는 것 같아요.” 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참조: ‘엄마가 울었다’, 지식채널 e, 유튜브]  나의 변화는 하느님 뜻인 그분의 방향성에 나를 맡김으로써 가능합니다. 이전에 내가 추구하던 삶의 방향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를 돌려세워야 합니다. 이 욕구의 변화가 곧 방향의 변화이고, 그 방향의 변화에 순응하는 것이 하늘나라에 머무는 길입니다. 천국과 지옥의 이분법적 이야기를 하면 극단적 이원론자라고 비판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느님은 선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 분이신데, 그 자비하심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사이비처럼 신자들에게 두려움을 조장한다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옥만이 아니라 불과 사람을 파먹는 벌레, 심지어 불소금에 절여진다고까지 하십니다. 이원론이 아니라면 우리 종교는 그저 마음의 평화를 주기 위한 상담이나 심리학을 말하는 집단이 되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를 ‘그물’ 로 표현하신 이유는 내가 튀어 나가려는 이전의 방향성을 제한하고 당신의 방향성에 우리를 묶어두기 위함입니다. 바다에서 자유롭게 살다가 지옥에서 끝날 것인가, 아니면 그 자유로움을 주님께 봉헌하여 하늘나라에서 끝날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교회는 내가 추구하는 방향에 대한 위로를 받기 위해 나오는 곳이 아니라 그 방향성을 꺾고 주님의 방향에 나를 맡길 힘을 얻으러 나오는 것. 우리는 이 욕구도 좋고, 저 욕구도 좋다는 식의 흐리멍덩한 가르침에 주의해야 합니다. 하늘나라가 ‘그물’ 이기에 우리는 오직 주님의 뜻이라는 한 방향에 나를 맡길 수 있는 사람만 머물 수 있다.

  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믿음의 선물을 하느님께 받았으니, 은총과 축복 받은 우리들답게 그 예수님의 이름의 권능으로 두려움과 염려 없이 살아가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행복지수는 비교 지수와 반비례한다.''  - 금오 김홍경 -


♡2214회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합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9월 9일(호세아서 1장~ )

 그라시안은 ''사람들은 말하는 내용으로 당신을 판단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 좋다》그리우면 그립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좋고 불가능 속에서도 한줄기 빛을 보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좋고 다른 사람을 위해 호탕하게 웃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좋다. 옷차림이 아니더라도 편안함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좋고 자기 부모형제를 끔찍이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좋고 바쁜 가운데서도 여유를 누릴 줄 아는 사람이 좋다.  어떠한 형편에서든 자기 자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 좋고 노래를 썩 잘하지 못해도 즐겁게 부를 줄 아는 사람이 좋고 어린 아이와 노인들에게 좋은 말벗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좋다. 책을 가까이하여 이해의 폭이 넓은 사람이 좋고 음식을 먹음직스럽게 잘 먹는 사람이 좋고 철따라 자연을 벗 삼아 여행할 줄 아는 사람이 좋고 손수 따뜻한 커피 한 잔을 탈 줄 아는 사람이 좋다. 하루 일을 시작하기 앞서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이 좋고 다른 사람의 자존심을 지켜볼 줄 아는 사람이 좋고 때에 맞는 적절한 말 한마디로 마음을 녹일 줄 아는 사람이 좋다. 외모보다는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좋고 적극적인 삶을 살아갈 줄 아는 사람이 좋고 자신의 잘못을 시인할 줄 아는 사람이 좋고 용서를 구하고 용서할 줄 아는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좋다. 새벽 공기를 좋아해 일찍 눈을 뜨는 사람이 좋고 남을 칭찬하는 데 인색하지 않은 사람이 좋고 춥다고 솔직하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이 좋고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좋다.

 -헨리 나우웬 ‘나는 이런 사람이 좋다’- ‘나쁜 놈’ 은 ‘나뿐인 놈’ 의 줄임말이라고 합니다. 나쁜 사람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요? 나쁜 사람은 누구도 그 사람을 자신을 위해 살 수 있을 만큼 사랑해주지 않아서 생깁니다. 누군가를 위해 살 대상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자신만을 위해 살게 되는 것. 마약에 중독되어 3번 죽을 뻔한 아들이 있었다. 그래도 그의 어머니만은 그를 믿어주었다. 못된 친구들과 어울릴 때도 어머니는 믿어주었다. 술과 마약을 하고 새벽에 들어올 때도 어머니는 깨어 기다렸다. 그리고 대화 좀 하자고 할 때 마크는 짜증을 내고 방문을 꽝 닫고 방으로 들어갔다. 세상에서 자신을 유일하게 믿어준 어머니가 원하는 것은 자신과 대화 한 번 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어머니가 믿어준 대로 나쁜 친구들을 끊고 술과 마약을 끊었다. 그리고 미국 최고의 프로레슬러가 되었다. 이제 어머니를 편하게 모실 수 있게 된 것. 일본에서 경기를 마치고 새벽에 급한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 그는 비가 내리는 거리를 뛰어나가 울면서 소리 질렀다. “어머니, 죄송해요!” 돌아가신 어머니 모습은 너무 아름다웠다. 그는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엄마, 일어나요. 엄마가 저의 영웅이에요. 저의 모든 것, 제가 되길 원하는 모든 것은 다 엄마를 위해서였어요. 저를 믿어준 건 오직 엄마뿐이었어요.” 그리고 청년들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결국 진짜 세상에 혼자 남겨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지금은 청년들을 위해 전 세계 강연을 하러 다니는 전직 레슬러 ‘마크 메로’(marc mero)의 이야기입니다.

 어린이들을 생각해봅시다. 어린이들은 누구를 위해 살까요? 보통은 부모를 위해 삽니다. 부모를 실망하게 해 드리지 않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따라서 부모가 나쁜 사람이 아닌 이상 부모 덕택으로 아이들은 어느 정도 나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부모가 사랑을 제대로 주지 않을 때는 아이들은 부모에게 원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친구를 위해 살거나 그것도 안 되면 자신만을 위해 살게 됩니다.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나쁜 아이가 탄생하는 것. 그런데 부모가 아이들을 잡아줄 수 있는 나이는 밥을 차려줄 때까지만 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도움을 받아야 할 때 부모를 위해 살아야 할 이유가 줄어듭니다. 이때 자신을 잡아줄 새로운 부모님, 즉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면 자동으로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게 됩니다. 그러면 나쁜 놈이 되는 것. 이웃을 위해 살아도 대부분 그 이웃들에게 이용당하고 상처받습니다.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도 하느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영원한 아기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힘들 때 의지할 신을 찾습니다. 찾아서 그 신을 위해 살면 다행이지만 찾지 못하면 나쁜 사람이 됩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왜 당신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단식은 좋은 것. 자기를 절제하면 덜 나쁜 사람이 될 확률이 높다. 그러나 단식하면서도 그 단식이 자기 자신을 위할 때는 그 사람이 나쁜 놈일 수 있다. 예수님은 그래서 단식을 하더라도 당신을 위해 하라고 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같은 단식이라도 자신을 존재하게 해 준 하느님을 위해 한다면 그것이 좋은 것이나, 그 단식만의 가치 때문에 한다면 결국 그것도 자기 영광을 위해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새 포도주이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비록 구약에 있었던 가르침과 다르지 않으나 새로운 가르침인 이유는 그 모든 율법을 당신을 위해 지키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나쁜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고백하고 하느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절로 나쁜 놈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특정한 날을 중시하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중시하는 것이고,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도 하느님을 위하여 먹는 것입니다. 사실 그는 먹으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가려 먹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가려 먹으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로마 14,6-9)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합니다. 자크 라캉이란 학자가 한 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인간은 누군가를 ‘위해’ 살게 창조되었다.

 성자께서 성부를 위해 사신 것과 같다.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인간도 누군가를 위해 살아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위해 살라고 하시는 이유는 당신이 영광을 독차지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가 나쁜 놈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만을 위해 살 때 나쁜 놈이 됩니다. 이는 부모가 아이들이 비뚤어지지 않게 하려고 아이들이 자신에게 순종하게 만드는 것과 같다. 우리가 나쁜 놈이 되지 않는 유일한 길은 우리 하는 모든 일이 주님께 영광이 되려는 마음으로 하는 것. 주님을 위해 살아야 나쁜 놈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

  신앙생활에서도 다른 이들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있을 때 우리들의 몸과 마음이 병들지 않음이, 그리고 치유의 은총이 있음을 십자가 앞에서 뜨겁게 고민하는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사교의 명수는 모욕을 유머로 부정을 긍정으로 바꾼다.'' - 그라시안 -


♡2215회 내가 비교해야 할 것은 과거의 나와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뿐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9월 10일(요엘서 2장~ )

  D.W. 제럴드는 ''행복이란 우리 자신의 가정에서 자라며, 남의 집 정원에서 뽑아지는 것이 아니다.''
 의인은 향나무처럼 자기를 찍는 도끼에 향을 묻힌다. - Georges Rouault  사람이 사는 곳엔 상처가 있기 마련입니다. 나만 상처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상대방도 상처받았다. 우린 그렇게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마음 문을 점점 닫게 됩니다. 상처받기 싫어서 철저히 계산하게 됩니다. 상처받기 싫어서 언제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합니다. 상처받기 싫어서 마음을 주지 않습니다. 상처가 싫어서 기억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안으로 숨긴 상처는 곪기 마련이고 터지기 마련입니다. 언젠가 가장 가까운 사람,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다 쏟아냅니다. 자녀에게, 부모에게, 연인에게, 배우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줍니다. 터져나오지 않았다 할지라도 과거의 아픈 상처는 특히 어렸을 때 받은 상처는 인생을 어둡게 만듭니다. 너무 고통스러워 마음속에 꼭꼭 묻어버린 상처들이 있다. 술 취한 아버지의 폭력, 동생들 때문에 홀로 외가에 보내졌던 기억, 친구들에게 왕따 당한 기억, 어둔 밤 문밖에 홀로 있는데 멀리서 컹컹 짖어대는 사나운 개의 울부짖음… 슬프고 괴로운 기억이 인생을 불행하게 합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헨리 나우웬은 ‘상처 입은 치료자’ 를 썼다. 그는 뛰어난 영성가요 세계적인 강연가요 학자였다. 그는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 아픈 상처를 아낌없이 드러냈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에게 공격을 받고 비난을 받습니다. 과거의 상처와 허물들을 숨기고 마치 깨끗한 사람인척하는 사람들에게 지금도 상처를 받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고,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자기 상처를 보여주었다. 자기 상처를 만져보고 의심하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다. 과거의 상처와 허물과 잘못을 숨기고 사는 것은 불행을 안고 사는 것과 같다. 상처받는 것이 싫다고 마음 문을 닫고 사는 것은 더 큰 아픔을 선택하는 것. 사랑은 상처를 허락하는 것. 우리는 행복할 권리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과거의 상처와 아픔을 털어버려야 합니다. 마음속 이야기를 지금 이 순간 다 털어버릴 수 있는 면담자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이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할 터인데….. 사람이 없다면 주님 앞에 나와서 다 털어놓아야 합니다. 그 상처를 다 내놓고, 이제 다른 상처받은 사람을 보듬어 주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자기는 안 그런 척, 자기는 깨끗한 척 남을 비방하는 그리스도인이 없었으면 합니다.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늘 좋은 일만 생겼던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끔찍한 실패도 경험했고, 그 무엇으로도 치유될 수 없을 것 같은 아픔도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수렁에서 헤맸던 적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시간을 이겨냈기에 그들은 ‘성공’ 이라는 상을 받게 된 것. 이 ‘성공’ 은 단순히 세상 사람의 부러움을 받는 정도의 가치가 아닙니다. 고통과 시련을 이겨낸 가치의 결실이기에 그 어떤 것보다도 커다란 의미가 담겨 있다. 언젠가 어떤 분의 이런 고백을 들은 적이 있다. “기적이에요.” 도저히 풀리지 않을 것 같았는데, 풀리는 기적을 체험했다는 것이었다. 한계가 없는 일을 우리는 ‘기적’ 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믿는 만큼 자신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한계가 있을 수 없다. 그 어떤 힘든 시간이 찾아와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극복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기적을 사는 것이 됩니다. 지금 이 순간 기적을 살고 있습니까?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을 믿는다면, 나를 믿을 수 있다. 그 순간 기적이 내 곁에 다가올 것. 주님을 따르는 길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편안과 안락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때로는 세상의 것을 과감하게 잘라버려야 하기도 합니다. 이해가 안 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말해 보면 조금 이해가 되지 않을까 싶다. 어떤 사람이 다리에 커다란 종기가 났다. 병원에 갔더니 이 종기를 제거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종기를 가만히 두는 것이 평화일까요? 아니면 칼로 이 종기를 제거하는 것이 평화일까요? 내 몸을 불편하게 하는 종기를 제거하는 것이 평화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칼은 바로 이런 것. 주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과감하게 잘라버릴 수 있는 칼을 주십니다. 그래서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속된 이익을 위해 살다가 영원한 죽음을 당하는 것보다, 하느님을 위해 죽어서 영원히 사는 편이 훨씬 낫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선순위에 따라 사랑하며 그것을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는 이들을 님께서는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늘 가슴 깊이 담으며 살아야 하겠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이사 1,16)” ‘비교는 기쁨을 훔쳐 가는 도둑이다.’(테디 루즈벨트)라는 말이 있다. 누군가와 비교하려 할 때, 그래서 나의 자존감을 떨어뜨리려고 할 때 이 말을 떠올리려고 노력합니다. 학창 시절에는 남과 비교를 많이 했다. 공부 잘하는 아이, 운동 잘하는 아이,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아이 등등…. 저보다 더 나은 아이가 많았고 그러면서 남과 비교하는 횟수도 늘어만 갔다. 하지만 그럴수록 제 안의 기쁨도 사라지는 것. 사실 비교할 필요가 없다. 그냥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면 그만입니다. 내가 비교해야 할 것은 과거의 나와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뿐입니다. 그 외의 비교는 기쁨을 훔쳐 가고, 지금 이 순간을 힘들게 만들 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 앞에서 ‘떨림과 두려움’으로 사는 기쁨으로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이 하는 일마다 잘 되는 행복한 우리들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강한 인간이 되고 싶다면 물과 같아야 한다.'' - 노자 -


♡2216회 성공의 99% 이상이 어떤 사람과 어울리는가에 좌우된다는 것이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9월 11일(아모서 2장~ )

  독일속담에 ''행복한 사람에게는 시간을 알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인생의 질》젊어서 죽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힘듭니다. 일흔 살, 여든 살, 또는 아흔 살 먹은 친구가 죽었을 때, 우리는 대단히 슬퍼하지만 한편 그들이 오래 산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십대의 아이, 젊은 청년, 또는 인생의 절정에 있는 사람이 죽었을 때는 "왜? 왜 그렇게 빨리? 그렇게 젊은데 왜? 공평하지 않아"하면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항의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살아온 기간보다는 그 질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예수님은 젊어서 돌아가셨다. 성 프란치스코도 젊어서 죽었다. 리지유의 테레사 수녀도 젊어서 죽었다. 마틴 루터 킹도 젊어서 죽었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오래 살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얼마나 오래 살지를 모른다는 사실 그 자체 때문에, 우리들은 우리 인생의 매일 매일을, 매주일 매주일을, 그리고 한 해 한 해를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충실하게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 - 헨리 나우웬 -  

어떤 분들은 굳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인간관계를 확장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합니다. 사실 사람을 만나는 일은 귀찮고 심지어는 두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코로나 사태를 기회로 직접 만나는 것보다는 전화로, 전화로 하기보다는 문자로 접촉을 피하기도 합니다. 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부가 멀리 떨어져 문자로만 대화하는 것과 한집에서 티격태격하면서라도 함께 사는 것은 천지 차이일 것. 어떻게 TV로 미사를 하는 것과 직접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 같을 수 있을까요? 아기를 TV 화면을 통해서만 사랑을 느끼게 하며 키울 수 있을까요? 사람은 귀찮더라도 사람과의 친밀한 관계를 확장해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 의 본성이고 ‘사랑’ 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관계를 통하지 않고서는 사랑을 알거나 배울 수가 없는 것. 인간관계를 통해 삶의 유일한 가치인 사랑을 배울 수 있다면 인간관계를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어느분께서는 중학교 때 사춘기 호기심이 발동하여 성적인 그림이나 책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성에 관해 칠판에 그래프를 그려가면서 친구들에게 설명할 정도였다. 그러나 실전에서는 숙맥이었다. 여자에게 말을 어떻게 붙여야 되는지도 몰랐다. 남녀관계가 그저 성적인 관계인 줄로만 알았다. 대학에 가서 여자를 만나고 나서야 남녀관계가 성적인 것을 훨씬 넘어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그런 것에 집중하면 관계가 쉽게 깨어질 수 있음도 알게 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분명 인간관계는 아픔을 주지만 인간관계가 아니면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것은 없음도 알게 되었다. 하느님을 아는 것, 사랑을 아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가치요 목표라면 그 사랑은 지식으로가 아니라 직접 사람을 만나고 접촉하며 배울 수 있는 것. 어렸을 때 도서관에 있는 모든 책을 다 읽었다는 워런 버핏은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것은 한 사람의 강연을 듣고 나서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과 식사를 하려면 수십억 원의 돈을 자선기금으로 내게 합니다. 워런 버핏은 한 번의 만남의 가치를 아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워런 버핏과의 점심 식사」라는 책을 쓴 ‘가이 스파이어’ 는 2008년 워런 버핏과 한 끼 식사하기 위해 무려 65만 달러, 한화로 약 8억 원을 지급하였다. 물론 이것도 추첨으로 된 것이기에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이 스파이어는 명문 옥스퍼드 대학과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졸업하여 부자 아버지를 둔 엄친아였다. 대학원 졸업 후 입사한 회사는 순진한 일반 투자자들에게 쓰레기 같은 주식을 팔아먹는 정말 쓰레기 같은 회사였다. 그렇게 돈을 버는 것이 과연 가치 있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 한 번 만나 식사를 하는데 8억을 써가며 워런 버핏을 만나 조언을 구한 것.

 그리고 그의 인생은 참 가치투자의 방향으로 변하였다. 한 사람과 만나 식사 한 끼 하기 위해 적게는 수억 원, 많게는 수십억 원을 내야 하는데도 수많은 사람이 몰려 추첨에 당첨되어야만 합니다. 그 사람이 책이나 화면을 통해 주는 정보와 직접 만나서 주는 정보는 그 질이 같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인생을 바꿔줄 주님을 만나기 위해 성체 앞에 얼마나 나옵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을 보며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라고 하셨다. 당신으로부터 배우기 위해 당신을 만나러 온 이들을 당신 가족으로 여기시는 것. 예수님은 가족을 하느님이나, 요셉과 마리아로 한정하지 않으셨다. 인간과의 관계 확장을 위해 세상에 오시고 사람을 만나셨다. 예수님께서도 부모와의 접촉을 통해 배우셨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루카 2,52)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배움과 대인관계를 위한 직접적 접촉은 하나입니다. 힘들지만 더 넓게 관계 맺고 더 깊이 사랑하기 위해 우리 관계를 넓혀가야 합니다. 사랑은 관계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관계 확장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은 하느님을 알기를 원치 않는다는 말과 같다. 인간의 삶에 대한 자세는 ‘배우고 싶은 욕망’ 입니다. 하버드 대학의 데이비드 맥클란 박사는 25년 동안 사람들이 어떻게 성공했는지 연구했다. 그가 알아낸 것은 성공의 99% 이상이 어떤 사람과 어울리는가에 좌우된다는 것이었다.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이 곧 여러분입니다. 진리는 찾는 많은 이들과 어울리십시오. 그러면 진리 안에서 살고 발전하게 됩니다. 하느님과 이웃으로 인간관계를 확장하려 하지 않는다는 말은 진리를 배우고 싶지 않다는 말이고 그러면 영원히 지속할 진실한 삶의 의욕이 생길 수 없다. 사랑은 사람과 사람의 접촉 안에서만 제대로 배울 수 있다.

  믿음에는 감격이, 감동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지고, 그러한 죄인을 용서해주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시는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준비하지 않은 자는 기회가 와도 소용없다.''  - 알렉시스 드 토크빌 -


♡2217회 육신(肉身)은 은퇴(隱退)가 있어도 감정(感情)과 사랑은 은퇴가 없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9월 12일(하박쿡서 1장~ )

  노사카 레이코는 ''미소 만들기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출발점이다.''
《멋진 삶》어스름한 저녁 무렵 물가에 비친 석양(夕陽)도 아름답고 뜨는 해 또한 아름답다. 청춘(靑春)이 아름답다고 하지만 흰머리에 얼굴 주름 또한 아름답지 아니한가? 손에 쥔 것이 없다고 실패(失敗)라 생각지 말라. 이날까지 무탈하게 산 것도 성공(成功) 한 것. 나누어 주었다고 보답(報答)을 바라지 말라. 나누어 준 것만으로도 공덕(功德)을 쌓았느니라. 남에게 받은 것은 잊지 말고 보답하라. 그래야 공덕을 쌓는 것이니 새겨 두세나. 거름을 너무 많이 해도 뿌리는 썩을 것이고, 지나치게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살지 않는다. 상대(相對)가 실수(手手)하고 잘못을 하여도 눈감아 주고 포용(包容) 해주자. 내가 옳을지라도 너무 강하게 말하면 상대는 오히려 반감(反感)을 가지게 된다. 나눈 것은 잊고, 받은 것은 기억 (記憶)하며, 눈 감을 줄 알고 용서(容恕) 할 줄 안다면 세상(世上) 살아가는데 적(敵)은 없을 것이고, 인생(人生) 마무리는 멋지게 될 것. 창문(窓門)을 열면 바람이 들어오지만, 마음을 열면 행복(幸福)이 들어온단다. 육신(肉身)은 은퇴(隱退)가 있어도 감정(感情)과 사랑은 은퇴가 없다.  - 좋은 글 중에서-

 미국의 개척사에 보면 18세기 초 두 명의 젊은이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배를 타고 와 신대륙인 미국에 내렸다. 그 두 사람은 ‘마르크 슐츠’ 와 ‘에드워즈 조나단’ 입니다. 그런데 마르크 슐츠라는 사람은 ‘내가 이곳에서 큰돈을 벌어 부자가 되어서 내 자손에게는 가난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도록 돈을 벌어야 하겠다.’ 라고 생각하고 뉴욕에다 술집을 차렸다. 그의 소원대로 엄청난 돈을 벌어서 당대에 큰 부자가 되었다. 반면에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왔으니 이곳에서 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다.’ 라고 생각하고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150년이 지나 5대 자손들이 태어난 후에 뉴욕시 교육위원회에서 이 두 사람의 자손들을 추적해 어떻게 되었는지 조사해 보았다고 합니다. 결과는 이랬다. 마르크 슐츠의 자손은 5대를 내려가면서 1062명의 자손을 두었다. 교도소에서 5년 이상인 형을 살은 자손이 96명, 창녀가 된 자손이 65명, 정신이상, 알코올 중독자만 58명, 자신의 이름도 쓸 줄 모르는 문맹자가 460명, 정부의 보조를 받아서 살아가는 극빈자가 286명이었답니다. 모두 965명이 비참한 삶을 살았다.

 반면 에드워드 조나단은 당대에 프린스턴 대학을 설립하고 5대를 내려가면서 1394명의 자손을 낳았다. 자손 중에 선교사 목사만가 116명이 나왔고, 예일 대학교 총장을 비롯한 교수, 교사가 86명, 군인이 76명, 나라의 고급관리가 80명, 문학가가 75명, 사업가가 73명, 발명가가 21명, 부통령이 한사람, 상하원의원 주지사가 나왔고, 교회 장로 집사도 286명이 나왔다. 모두 816명이 사회의 명망있는 인물이 되었다. [출처: ‘믿음의 유산을 남기는 부모가 되라’, 다음 블로그, ‘풍성하고 행복하게’] 대통령까지 지냈던 케네디 가문도 사실 술장사를 해서 그런지 자손이 대부분 안 좋게 생을 마감하였다. 담배 농사로 부를 축적한 조지아주 레스터 가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개신교 측의 과장된 자료일 수 있겠다. 그러나 일면 수긍이 가는 면도 있다. 술, 담배 사업이나 무기 사업, 자연을 파괴하는 사업 등으로 유산을 물려주면 후손이 힘들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우리가 물려주어야 할 것이 믿음이면서도 재물만 물려주며 사는 경우가 많다.

 링컨의 어머니 낸시는 개척자의 아내로서 무수한 고난과 빈곤과 싸우면서도 링컨이 9살 때 생을 마감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얘야! 나는 너를 두고 하느님 앞으로 먼저 간다. 나는 네게 좋은 집도, 좋은 땅도, 많은 재산도 물려주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네게 이 성경책 한 권을 유일한 유산으로 주고 간다. 너는 한평생 이 가운데 있는 말씀을 보배로 삼고, 재산으로 삼고, 양식으로 삼아 이 교훈대로 살아나가거라. 그러면 네 길이 형통할 것이다.” 링컨은 새로운 엄마 사라를 맞이했다. 그런데 이 여성도 대단한 분입니다. 아버지 토마스는 링컨이 장작 패는 일이나 하며 평범한 농부의 길을 걷기를 원해서 성경과 책을 읽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그때마다 사라는 그의 남편을 설득합니다. “나는 링컨의 엄마예요. 링컨을 낳아준 엄마 낸시처럼 키우고 싶습니다. 낸시는 성경의 가르침과 책의 가르침을 통하여 아이를 양육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성장시키고 싶습니다. 협조해 주세요.” 링컨은 두 어머니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내가 잘한 것은 우리 어머니 덕입니다. 두 어머니께서는 나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유산은 성경의 가르침과 책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진정 후손에게 재물을 물려주어야 할까요? 믿음을 물려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학원 가는 것은 허락하며 성당 가지 않겠다고 하면 참아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믿음을 물려주지 않으면 그 자녀의 미래가 어떻게 되는지 지금 볼 수만 있다면 목숨을 걸고 믿음만을 물려주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의 결말을 이렇게 말해주십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내가 복음을 제 때에 전하지 못해 자녀가 나중에 유황불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영원히 고통을 당해야 한다면 그래도 성당이 아닌 학원에 보낼 수 있을까요? 복음을 전하는 이는 이런 절박한 심정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롯과 아내, 두 딸을 구하기 위해 들어간 두 천사의 절박한 심정을 헤아립시다. 그 천사들은 소돔 위로 막 떨어지기 직전의 유황불을 볼 수 있었다. 이는 과장된 위협이 아닙니다. 무섭게 만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내 사랑하는 이들 위에 쏟아지려는 유황불을 볼 수 있어야 참으로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사도가 됩니다.

  이제 하느님의 말씀으로 우리들의 눈과 귀, 마음이 열려서, 하느님의 축복이... 하느님의 생명이... 하느님의 치유가... 그리고 용서의 기쁨이 이루어지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인내는 성공의 반이다. 인내는 어떠한 괴로움에도 듣는 명약이다.''  - 플라토우스 -


♡2218회 '선택' 에는 반드시 '포기' 가 요청됩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9월 13일(말라키서 1장~ )

  김찬경은 ''장사를 하려면 가장 먼저 체면과 자존심부터 버려라.''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 곁에는》마음이 열려있는 사람 곁에는 사람들이 언제나 머무르기를 좋아합니다. 지나치게 주관이 강하고 마음이 굳어있고 닫혀 있는 사람 곁에는 사람이 떠나가는 것.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귀울이고 열린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대한다면 그사람 가까이 있고 싶어 할것. 다른이의 말을 잘 들어주고 마음을 받아 주는 것은 그 사람이 낮아지고 겸손한 사람일 것. 무엇인가를 애써 주려고 하지 않아도 열린 마음으로 남의 말을 경청 하려 든다면 그 사람 곁에는 늘 사람들이 머물것.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춰 저 평지와 같은 마음이 되면 거기엔 더 이상 울타리가 없으며 벽도 없을 것. 봄이 되면 넓디 넓은 들판엔 수많은 들꽃들이 각기 색깔이 다르지만 어울려서 잘들 살아가듯이 그렇게 열려 있는 마음은 편안하게 살아갈 수가 있다. 들판에 피어 있는 들꽃들은 여러 모양과 향기가 달라도 서로 시기하지 않으며 싸우려고 들지 않으며 아무런 갈등도 없이 살아갑니다. 그것 처럼 열린 마음은 자유로운 마음입니다. 열린 마음은 강합니다. 나를 낮추고 마음을 열어 두십시요. 진정 강해지려면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인이 되려면, 마음을 열고 끝없이 자신을 낮추십시요. 저 광활한 들판이 어떤 것과도 자리 다툼을 하지 않듯이 열린 마음에는 일체의 시비가 끼어들지 않습니다. 

벌써 몇달째 뵙지 못했던 '할머님' 께  반가운 마음에 인사했다. '자식들이 다들 효자이니 해외 효도관광이라도 다녀오셨겠지'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면 도로를 걸어가시던 중 한 운전자의 부주의로 대퇴부를 크게 다친 할머님께서는 장장 4개월 동안이나 병원 신세를 지셨다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그동안 꼼짝도 못하시고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냐? 지금은 좀 어떠시냐?' 고 여쭸는데, 할머님 대답은 더 깜짝 놀라게 했다. "70평생 처음으로 그렇게 넉달 동안 꼼짝없이 침대에만 누워 있었다. 처음 한두 달은 심신이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통증도 컸지만, 가해자가 그렇게 원망스러웠고 미운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석 달째 들어서면서 마음을 바꿔먹게 됐다. 하느님께서 내게 대피정 한번 하라고 이런 기회를 주신 것 같다." 아직도 운신이 온전치 못하신데도 할머님께서는 활짝 웃으시면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요즘은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 옆 침대에 누워 있던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머리도 다치지 않았고, 뼈도 제대로 붙었고, 정말 고마운 일이다. 병실에서 지낸 넉 달이 힘들었지만 내 평생 가장 좋았던 시간이었다. 정말 하느님을 만난 시간이었다." 만만찮은 고통 가운데서, 이해하지 못할 불운한 사건에서도 하느님 뜻을 찾고 하느님의 눈으로 만사를 바라보려는 할머님의 신앙이 참으로 훌륭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 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할머님의 신앙고백을 들으면서 진정 그분은 하늘나라의 한 귀퉁이를 목격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나라를 조금이라도 들여다본 사람은 할머님처럼 이 세상의 생활양식을 조금씩 탈피하고 초월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하늘나라의 문을 잠시라도 열어본 사람은 이제 더 이상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것, 잠시 스쳐지나가는 이 세상 것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이 세상 그 너머에 있는 더욱 가치 있고, 한층 의미 있고, 더욱 영원한 것, 다시 말해서 하늘나라를 추구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가치 중에 가장 큰 가치는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누가 보건 말건, 험악한 저잣거리에서건 거친 들판에서건 자신이 처해 있는 자리 어느 곳에서나 기쁘게 사는 사람, 열악한 상황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그 사람은 이미 천국을 맛본 사람, 천국을 사는 사람입니다.

 몇년전 월드컵 예선전을 바라보면서 느낀 것 중 하나가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너무도 비본질적인 것들, 엉뚱한 것들에 목숨을 건다는 것. 아직 가야 할 길이 창창한 어린 선수의 인대나 무릎을 걱정하기보다는 오직 득점만을 생각합니다. 선수 생명에 치명적 태클이나 위험한 파울도 좋은 작전이라며 거칠게 몰아붙일 것을 강요합니다. 진지하고 깊이 있는 것들, 지적이고 영적인 것들은 대체로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기고 기피합니다. 대신 즉각 효과가 나타나는 것들, 말초적이고 감각적인 것들에 목숨을 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생활양식은 조금은 달라야겠지요. 우리는 세상에 있는 많은 대상들 가운데서 좀더 고상한 것, 한층 가치 있는 것, 더 의미 있는 것, 좀더 덕스러운 것, 더 아름다운 것, 더 변치 않을 것들을 추구하고 거기에 목숨을 걸 필요가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최우선적 과제는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신 하느님, 보물 중에 보물이신 예수님을 더욱 적극 추종하는 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라는 보물 중 보물을 발견한 진정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있어 다른 모든 것들은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입니다. '선택' 에는 반드시 '포기' 가 요청됩니다. 하늘나라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예수님을 삶의 이정표로 삼은 우리에게 있어 이제 예수님 이외의 부차적 요소들에 대한 점진적 이탈과 포기가 요청됩니다. 

  우리들께서 주 예수님께 감동을 드려보시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오직 주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해 보시기를... 적당한 때가 되면 덤으로 우리들이 생각하지 못한 선물까지도 받는 하느님의 은총의 때가 임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인간의 얼굴은 마음의 간판이고 생활의 기록이다.''  - 카렐루 -

♡2219회 ‘나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항상 참아주신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9월 14일(마태복음 10장~ )

  솔로몬은 ''사람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 그 자체가 바로 그 사람이다.''
《행복을 얻기 위한 기다림》살아가면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첫인상이 좋은 사람 목소리가 좋은 사람 얼굴이 예쁘고 잘생긴 사람.. 마음이 너무나 예쁜 사람 애교가 많은 사람 곰같은 사람 다 각기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렇게 다른 느낌의 사람들이 주는 행복도 모두 다르다. 만나면 웃음이 나오게 하는 사람 만나면 애처로와 보이는 사람 만나면 시간이 빨리가는 느낌의 사람 그리고 만나면 마냥 행복한 사람 시간이 가는게 너무나 안타깝게 만드는 사람 이렇게 각양 각색의 사람들이 주는 공통점은 기다림이 있다는 것. 언제 누굴 어떻게 만나든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 그 기다림이 절대 싫지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얼마나…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는 모르지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음에 그 기다림이 행복인 것. 하루가 될지 한달이 될지 일년이 될지 아니면 영영 만나지 못할지라도 기다림이 있기에 하루 하루가 행복인것. 기다림이 있는 동안은 그 누구보다 행복인것이다. 평생을 기다리는 행복으로 만족하며 살아야 할지도 나에게 기다림이 있어 행복한 하루다. 사랑이 있기에 기다림이 있고 그 기다림이 있기에 행복인것을.. 오늘도 나는 행복을 얻기위해 기다림을 시작한다. 참는데도 한계가 있다는 말을 합니다. 인간이기에 한계를 갖는 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사실 참다 보면 병이 생깁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쌓아두지 말고 풀어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군다나 주님의 이름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가족 간에도 마음이 갈라질 텐데 그 때에 참고 견디라고 하십니다. 서로의 뜻이 다르고 오해가 있을 때 참고 기다려 주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인내가 필요한 때이고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처신할 때입니다. 강한 것은 부러지고 그래서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깁니다. 그러니 어떠한 처지에서도 더욱이 주님을 증거 하는 자리에서는 예수님께서 취하셨던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 구애됨이 없이 예수님 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묻고 행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지금 당장은 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이깁니다. 감정이나 분위기에 휘둘리지 않고 신앙 안에서 굳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매사에 '예수님이시라면?' 이라는 자문이 필요합니다. 

열왕기 하권 20장에 보면 히즈키야 왕이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이때 히즈키야 왕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울며 기도를 드렸다. 히즈키야 왕이 마주한 벽은 인간이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죽음의 벽입니다. 그러나 히즈키야 왕 자신의 한계상황을 하느님께 내어 놓고 울며 기도했을 때 그 벽을 넘어설 수 있었다. 하느님께서 그의 눈물을 보시고 세상에서의 생명을 15년 더 연장해 주셨다. 15년을 연장해 준 것이 대단한 의미가 있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기간에 회개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였다면 모든 것을 얻은 것.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벽이 참으로 많다. 인간적인 한계상황의 벽이 산 너머 산입니다. 생로병사는 물론이고 고독, 미움과 분노, 죄가 한계상황으로 다가옵니다. 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견디는 것. 특별히 일상 안에서 히즈키야 왕처럼 벽 앞에서 기도하며 주님 이름으로 말미암아 참고 견디면 반드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공격을 공격으로, 모욕을 모욕으로, 미움을 미움으로 되갚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혹 참을 수 없다면 잠시 동안 하느님께서는 ‘나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항상 참아주신다.’ 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따지지 않고 참아 주시는 데 내가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서 되겠는가? 은혜를 입었으면 은혜를 베풀어야 함은 당연합니다. 그래도 참을 수 없다면 사랑으로 하느님께 앙갚음하십시오. 참고 견뎌서 모두가 구원을 얻기를 바랍니다. 모함이나 수근 거리는 소리에 속상해 하지 말고, 뒤에서 딴 소리하는 사람 때문에 억울해 하며 상처 받지도 말고 오직 주님의 이름 때문에 견디시길 바랍니다.

 잠잠하게 참고 견디면 의심 없이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 이 순간 다가오는 한계를 주님으로 말미암아 극복하시길 기도합니다. 힘들고 지칠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에 하느님의 모든 사랑이 존재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할 때 악, 고통, 죽음은 힘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과 희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미움과 실패, 그리고 죽음의 도구에서 사랑과 승리와 영광, 그리고 생명의 표징으로 변화되었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2013. 7. 26세계청소년대회)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호세 14,10) 사랑의 배신과 진노, 경고와 징벌, 회개와 회복, 그리고 다시 사랑. 신랑이신 하느님과 신부인 백성 사이에서 이 모든 현실들이 숨가쁘게 오가고 난 뒤, 주님께서 지혜와 분별을 말씀하십니다. 이렇듯, 파란만장한 사랑의 굴곡을 거친 뒤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지혜란, 우리의 구원이 사람의 힘이나 우상에게 있지 않고 오직 주님께 달렸음에 대한 깨달음이 아닐까요. 또 사랑의 대상을 정확히 분별해 그분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는 순박함이 아닐까요. 사랑하는 벗님! 지혜와 분별 안에서, 슬기롭고 순박하게 주님을 열렬히 사랑하고 섬기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분만이 우리 구원이시고 사랑이시며 전부이십니다. 아멘.

  예수님은 저와 우리들이 겪어야 하는 아픔과 고통을 미리 겪으신 분이십니다. 이제 예수님을 지금, 당장 자주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외롭고 답답하고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들에게 손을 얹어 “에파타...”라고 말씀하시며, 우리들의 막힌 것이 열리고 망가진 것이 회복되는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무언가 자꾸 반복하다 보면 우리 자신이 그것이 됩니다.'' - 아리스토텔레스 -

♡2220회 “저는 책을 빨리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청하고 싶습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9월 15일(마르코복음 1장~ )

  오비디우스는 ''사랑은 일에 굴복한다. 만일 사랑으로부터 빠져 나오기를 원한다면 바쁘게 되라. 그러면 안전할 것이다.''

《마음의 길》스쳐 가는 것이 바람만이 아닐 것. 그리움도 스쳐 갔고, 사랑도 스쳐 갔고, 때로는 슬픔도 스쳐서 갔겠지요. 그리움은 그리움대로 놓아두고, 사랑은 사랑대로 놓아두고 가야 할 길들 이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돌부리에 넘어지고, 그리움에 넘어지고, 슬픔에 넘어지고 말겠지요. 낙엽 진 산길을 걸어보면 압니다. 우리가 걸어온 길이 꽃길만이 아니라, 청산도 걸어서 왔고, 들길도, 강길도 걸어서 왔다는 것을…. 산길 들길 강길도 다 지나고, 봄 길과 가을 길도 다 지나서 지금은 마음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마음의 길은 끝이 없다. 부모님과의 길, 가족과의 길, 친구 와의 길, 모두 다른 것 같으면서도 전부가 다 다른 내 안에 인생입니다. 길은 영원한 것 같으면서도 영원하지 않고, 시간과 인생은 내가 살아 있을 때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건강할 때 자주 만나고, 걸을 수 있을 때 좋은 추억 만들며, 아름다운 관계 이어갑시다. 산다는 건 별거 아닙니다. 내가 건강해야 하고, 내가 즐거워야 하고, 내가 행복해야 하고, 내가 살아 있어야 세상도 존재하는 것. 떠나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지금 이 순간 무엇을 잃으면 삶의 의욕을 잃을까요? 지금 이 순간 무엇을 찾으면 삶의 의욕을 찾을까요? 알라딘의 요술램프 속에 사는 지니는 요술램프를 소유한 주인에게 모든 소원을 들어줍니다

. “지니가 당신에게 한 가지 소원만 들어준다면 무엇을 청하겠습니까?” 왜 이 질문으로 시작하느냐면 이 대답에 따라 삶을 대하는 자세가 측정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세계 제일 부자인 빌 게이츠에게 같은 질문했을 때 그는 무엇이라고 대답했을까요? 이 묵상글의 끝에 그 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2000회가 넘어 매일 개인 묵상말씀뿐만 아니라 때로는 성령기도회 강의, 면담, 그리고 신부님의 복음 묵상말씀까지 매일 전달하니 어떤 분이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까지 많이 알아야 하는 건가요? 시골 할머니의 단순한 믿음으로 사는 것이 더 낫지 않나요? 많이 알아도 잘 살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나요?” “예수님께서 3년 동안 가르치셨다면 배우는 게 좋아서 그러셨겠죠.”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많이 공부해도 잘 못 하는 이유는 같은 이슬이라도 뱀이 먹으면 독이 되고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된다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그런데 이 대답에 답이 다 있다. 삶의 이유는 더 배워서 뱀에서 소로, 모기에서 예수로 본성을 변화시키는 데 있다. 배움 없이 변화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배움과 삶의 의욕은 결국 비례합니다. 아기가 진정한 성장을 시작하는 때는 언제일까요? 부모에게 이것저것 귀찮게 물으며 배움을 시작하는 때입니다. 성장을 멈추는 때는 언제일까요? 더는 배울 것이 없어서 배움을 멈추는 때입니다. 부모의 이름을 알았으니 더는 부모에게 배우지 않겠다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요?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 하고 심지어 표정도 제대로 지을 수 없을 것. 아기는 부모에게서 배운 것을 따라 하면서 참 인간이 되어갑니다. 그리고 부모와 같이 자신도 부모가 되었을 때야 비로소 성장을 멈춥니다. 

그러나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부모가 가르쳐준 것 이상입니다. 배움에는 끝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더 배우려는 이에게 주이지는 시간도 끝이 없다. 하느님을 배운다면 말입니다. 워런 버핏은 어렸을 때부터 책벌레였다고 합니다. 도서관에 있는 책을 다 읽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도 책상에 앉아 배우는 것 외에는 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니가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줄 수 있다며 물을 때 빌 게이츠는 이것을 청하고 싶다고 말했다. “저는 책을 빨리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청하고 싶습니다.” 부자가 되어 더 많은 공부를 하기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부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끊임없이 공부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배움에 대한 자세가 곧 인생에 대한 자세와 같다

.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를 악하고 절개가 없다고 평하십니다. 왜냐하면, 알려는 마음이 없이 표징만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여주실 표징이 요나의 표징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표징은 무언가 알려주기 위해서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알려는 마음이 없이 표징만 요구한다면 그 표징은 그 사람에게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라고 하시는 것.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표징이 아닌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다. 배워서 회개한 것. 이어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라고 하십니다.

 배우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성장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이고 그런 사람은 부모로부터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아 동물적 본성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아기와 같다. 인생에 대한 자세가 배우려 하는 자세와 같다. 얼마나 더 배워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하느냐가 얼마나 인생을 적극적으로 살려고 하느냐와 비례합니다. 지니가 다시 한번 묻는다면 무엇이라 대답해야겠습니까?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나는 나 자신을 알고 하느님을 아는 것 외에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라고 말씀하셨다. 아는 것은 발전하는 것이고 발전하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 잠깐 하던 일을 놓고 이제 무릎을 양손을 펴고 기도해보시겠습니다. 그리고 주 예수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는 그 분의 손길을 느껴보시기를... 그리고 그 손길을 놓지 마십시오. 그리고 주 예수님의 손길을 잡고 따라 나서고 싶은 간절함으로 은총 충만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스스로 알을 깨면 한 마리 병아리가 되지만 남이 깨주면 계란 후라이가 된다.''  - 고인수 -


💖성령봉사자 박재만 세례자요한 010 - 3878 - 6634
  (수필가ㆍ전국성령쇄신봉사자협의회 말씀추천강사)
💖성령봉사자 류태숙 M.막달레나 010 - 6560 - 7354
  (시인ㆍ수필가ㆍ꽃예술설화중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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