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1회 “잘못한 게 없는데 잘못한 것 같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9월 16일(루카복음 1장~ ) 제리 길리아스는 ''실패는 성공으로 가는 길에서 잠깐 쉬어가는 일입니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눈물을 닦아 준 판사[광화문에서/유성열]》몇년 전 부산지법 동부지원 법정. 형사1단독 박주영 부장판사가 이른바 ‘무자본 갭투기’ 로 전세사기를 벌인 혐의를 받는 50대 여성 최모 씨에 대한 판결문을 읽기 시작했다. 최 씨는 오피스텔 등 건물 9채를 사들여 세입자 229명에게 보증금 180억 원을 받은 뒤 돌려주지 않은 혐의(사기 등)로 재판에 넘겨졌다. 박 판사는 먼저 “선고 내용이 길다” 며 공지한 뒤 피해자 40여 명이 제출한 탄원서를 하나하나 요약해 읽어갔다. 40대 중반에 전세금을 마련해 독립했다가 돌려받지 못한 피해자는 “잘못한 게 없는데 잘못한 것 같다” 고 자책했고, 결혼을 앞둔 피해자는 상견례 전날 파혼을 당했다. 부모님이 전세금에 보태라고 준 1600만 원을 고스란히 날린 딸도 있었다. 박 판사가 탄원서를 읽는 동안 피해자들은 하나둘씩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탄원서를 다 소개한 박 판사는 “이 사건의 주된 책임은 자기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임대사업을 벌인 피고인에게 있다” 고 최 씨를 꾸짖으며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검찰 구형보다 2년 더 많은 형이었다. 최 씨를 법정에서 내보낸 박 판사는 방청석에 앉아 있던 피해자들에게 “잠깐 할 말이 있으니 그대로 계셔 달라” 며 이렇게 당부했다. “절대로 여러분 자신을 원망하거나 자책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아가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마주치는 지극히 평범하고 아름다운 청년들입니다.” 박 판사의 당부는 한동안 계속됐다. 박 판사는 “한 개인의 욕망과 탐욕을 적절히 제어하지 못한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이 여러분과 같은 선량한 피해자를 만든 것” 이라며 “결코 여러분이 뭔가 부족해서 피해를 당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 달라” 고 했다. 이어 “하루하루 견디기 힘든 나날이겠지만, 빛과 어둠이 교차하듯 암흑 같은 시절도 다 지나갈 것” 이라며 “여러분의 마음가짐과 의지에 따라서는 이 시련이 여러분의 인생을 더욱더 빛나고 아름답게 만들어 줄 것이라 확신한다” 고 덧붙였다. 엄중한 모습으로만 생각했던 판사의 위로와 당부에 법정은 눈물바다가 됐다. 재판이 끝나고 법정을 나서던 한 피해자는 “형량보다도, 우리의 잘못이 아니란 걸 인정받았다는 점이 큰 힘이 된다” 고 했다. 박 판사의 진심 어린 위로와 당부가 피해자들이 눈물을 닦을 수 있는 힘이 돼 준 것. 박 판사는 지난해 12월 특수협박 혐의로 기소된 50대 노숙인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면서 “건강을 챙기고 어머니 산소에 꼭 가보라” 며 현금 10만 원과 중국 작가 위화의 대표작 ‘인생’ 을 선물하기도 했다. 보호관찰소가 재판부에 제출한 보고서에는 피고인이 평소 도서관에 들러 책을 읽는 게 취미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다. 법과 판결이 도덕적일 필요는 없다. 법을 해석하고 사법적 판단을 내리는 법관이 감정과 도덕에 휘둘린다면 법적 안정성이 훼손될 수 있다. 하지만 법관은 범죄 피해자들이 가장 마지막으로 기대고 의지하는 버팀목이다. 가해자를 엄단하면서 피해자의 눈물을 닦아 주는 박 판사 같은 법관이 많아진다면,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훨씬 단단해질 것. 어떤 부부가 주일미사 참석을 위해 성당에 함께 가다가 사소한 문제로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강도는 더욱더 강해졌다. 남편은 도저히 못 참겠는지 “이런 기분으로는 도저히 성당에 못 가겠어. 나는 골프장에나 갈 거야.” 라고 말하고서는 성당에 가지 않고 곧바로 골프장에 갔다. 기분이 나쁜 상태에서 골프를 쳐서 그랬을까요? 남편이 골프를 치다가 뒤땅을 쳐서 갈비뼈가 골절되었다. 이때 아내는 어떻게 말했을까요? “봐! 성당 안 가고 골프장에 가니 저렇게 다치지. 꼴 좋다!!” 이렇게 말했을 때 남편이 과연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뉘우치며 회개할까요? 아마 앞으로 성당에 안 갈 확률이 높아질 것. 만약 아내가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요? “여보, 미안해요. 당신을 화내게 해서 이렇게 된 것 같아요. 제가 잘못했어요.” 이때 남편이, “맞아! 당신 때문이야!” 라고 말할까요? 아닐 것. 이렇게 말하겠지요. “당신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성당 대신 골프장에 간 내가 잘못이지. 내가 미안해.” 이렇게 말하면서 진짜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회개의 시간을 갖게 될 것.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 대신에 원망과 분노를 상대방에 표현하면서 서로의 간격 차이를 더욱더 넓혀놓습니다. 진정으로 서로의 간격을 좁힐 방법은 상대방의 단점이나 잘못된 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 역시도 포용할 수 있는 사랑의 힘으로만 가능합니다. 저 역시 농원에서 폭염 특보 무더위 속에 예초작업을 하다보니 아침부터 예초작업을 하고, 낮시간은 쉬고, 저녁시간 예초작업하는데 마침 [월요일 새벽미사 참례는 쉬고 아침부터 예초작업을 한다]고 막달레나에게 이야기 하고 토요일 특전미사를 자녀들과 함께 미사참례후 주일 오전 그리고 오후 예초작업을 하다 예초작업중 예초기날에 칡줄기가 걸려 그대로 제거하다 예초기에 손가락을 다쳐 병원 입원중이라 일주일째 예초작업을 할수 없이 쉬고 있어 저의 강의 때 민수기 14장 28절 ''말의 조심'' 다시 묵상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평소 강조했던 [하느님 일 순위의 삶 : 주 4회 미사참례]을 실천했다면 추석연휴 병실에서 보내는 일 없이 열심히 예초작업을 하고 후회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다행히 왼손이라 묵상말씀을 보낼수 있어 더욱 감사드립니다. 어느 신부님께서 신학생 때 제일 좋았던 시간은 ‘먹는 시간’ 이었다. 공동체 생활을 하다 보니 늘 배고팠고 그래서 먹을 기회가 오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고기’ 를 먹는 날에는 특히 행복했다. ‘고기’ 에 대한 즐거움은 거의 모든 신학생이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동아리 모임, 신학생 모임을 산에서 많이 했다. 지금은 할 수 없지만, 당시에는 등산 후에 산 밑의 공터에서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사용했던 불판은 요즘의 프라이팬이나 전용 불판이 아닙니다. 등산하다가 불판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돌을 찾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슬레이트’ 입니다. 기름이 쫙쫙 빠져서 고기의 담백함을 더 느낄 수 있다면서 다들 이 ‘슬레이트’ 를 찾았다. 그런데 이 ‘슬레이트’ 가 지금은 1급 발암물질이라면서, 무조건 폐기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이 말을 듣고 걱정을 많이 했다. 너무 오랫동안 고기를 ‘스레트’ 에 구워 먹었었기 때문입니다. 다들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 암에 걸리는 것 아니야?” 요즘 읽고 있는 책에서, 확률과 운명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 나옵니다. 확률이 높은 것을 마치 운명처럼 생각하는 오류에 빠진다는 것이지요. 당시에 즐겁게 또 좋은 사람과 함께 한 것이기에 몸에 좋지 않은 석면도 좋은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요?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 확률과 운명은 분명히 다릅니다. 항상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에 감사함과 하느님 찬미로 순간순간 하루하루가 행복해지는 하느님 일순위의 삶을 살아가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실행 불가능한 일이 실행 가능한 일을 방해하도록 하지 말라.'' - 존 우든 - |
♡2222회 기적은 살고 싶다는 희망보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것’ - ♡주님의 사랑과 축복이 가득한 추석보내세요♡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9월 17일(요한복음 1장~ ) 로베르토 고이주에타는 ''움직이는 사람만이 넘어질 수 있다.'' 《말투는 내용을 담는 그릇이다.》같은 말도 듣기 싫게 하는 사람이 있다. 어투가 퉁명스럽거나 거친 용어를 사용하거나 목소리가 유난히 공격적일 때 그런 느낌을 준다. 그러나 말투가 좋지 않으면 말하는 사람의 의도와 전혀 다른 의미로 변질된다. 당신의 좋은 말도 퉁명스러운 말투로 하면 듣는 사람은 "나한테 화난 것일까?" 라고 오해할 수 있다. 당신의 거친 말투는 당신의 의도와 다르게 "나를 겁주려는 것일까?" 라는 메시지로 변하기 때문이다. 말이란 내용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방법도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당신이 속마음과 달리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한다면 당신은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오해를 받을 것. 남편인 당신이 결혼 전과 달리 결혼 후 퉁명스러운 말투를 사용한다면 아내는 당신의 애정이 식었다고 오해할 수 있다. 상사인 당신이 부하직원을 아끼면서도 욕을 섞어 거칠게 말하면 부하직원은 당신의 의도를 정확하게 해석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장성한 자녀인 당신이 연로하신 부모님의 건강을 걱정한다며 "담배 좀 그만 피우세요. 큰일나고 싶으세요?" 라고 화난 목소리로 말하면 부모님은 당신이 자신의 건강을 염려한다고 생각하는 대신 "내가 나이가 들어서 자식 간섭이나 받는다" 라는 슬픔에 빠질 것. 따라서 당신은 칭찬할 때와 꾸짖을 때 걱정할 때와 간섭할 때 등 경우에 따라 말투를 달리해야 한다. 말투란 말을 담는 그릇이다. 물을 어떤 모양의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 세숫물로 보이기도 하고 먹는 물로 보이기도 하듯 말투는 그 나름대로 독립된 의미를 지닌다. 나의 말투는 어떠한지 묵상해 보시고 고은 말, 다정한 말로 미소 천사가 되는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의미 있게 죽는 것이 나을까요, 의미 없이 사는 게 나을까요? 만약 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면 우리는 의미 있게 죽는 것을 선택해야 할 것.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사느냐입니다. 그리고 그 사는 이유가 있는 곳이 ‘집’ 이 됩니다. 저희 장모님, 부모님은 코르나19 때 요양병원에서 돌아가셨다. 그런데 가족을 볼 때마다 “집에 가자!” 라고 하셨다. 집에는 왜 가려고 하셨던 것일까요? 집에 가면 하루를 살아도 의미가 있고, 병원에서는 의미를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생존보다는 의미입니다. 워싱턴주 올림피아 인근 세인트헬렌스산에 살던 헨리 트루먼 할아버지는 1980년 화산이 금방이라도 터질듯한 상황임에도 집을 떠나지 않겠다고 버텼다. 화산 폭발이 임박하자 정부는 화산 근처 모든 사람에게 대피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트루먼 할아버지만 끝까지 버텼다. 강제로 연행하여 구출할 수도 있었지만, 여론과 할아버지의 연세를 생각하여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결국, 화산이 폭발하였고 할아버지는 16마리의 고양이와 함께 화산재에 묻혔다. 할아버지는 말했다고 합니다. “이 집이 사라지면 어차피 나도 일주일 내로 죽을 것입니다. 나는 이 집과 함께 운명을 같이하겠습니다.” [참조: ‘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툴 가완디, ‘책한 민국’, 유튜브] 할아버지의 선택이 어리석었다고만 할 수 있을까요? 할아버지는 하루를 살더라도 의미 있게 살고 싶으셨던 것. 그리고 할아버지의 모든 삶의 의미는 집에 있었던 것. 그러나 세상의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의미를 잃고 생존에만 집착하는지요? 삶의 진정한 의미를 잊고 생존에만 집착할 때 사실 건강도 잃고 죽음을 재촉하게 됩니다.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은 ‘의미’ 입니다. 이것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이 찾아낸 결론이었다. 사람은 생존 자체가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입니다. 의미를 찾는 사람들은 그 죽음의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았다. 기적은 살고 싶다는 희망보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것’ 에서 비롯됩니다. 완벽하기만 했던 26세의 홀리는 결혼 하였고 사랑을 받았고 케이시라는 예쁜 딸을 출산하였다. 그런데 3주 뒤부터 손가락부터 시작하여 몸이 서서히 마비되더니 결국, 마비가 전신으로 퍼져 호흡기 없이는 숨도 쉴 수 없게 되었다. 의사는 그녀에게 희귀 난치병인 GBS라는 진단을 내렸다. 온몸이 마비되기는 했지만, 통증은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말하는 능력을 잃어가며 “나 너무 아파!” 라는 말만 하였다. GBS는 그녀를 서서히 죽음으로 내몰았다. 하지만 끔찍한 고통이 찾아올 때마다 딸 케이시는 엄마의 곁을 지켰다. 홀리는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 딸을 바라보며 이렇게 회상합니다. “내가 바라던 엄마가 되어주지 못해 그게 가장 고통스러웠어요.” 사랑해주어야 할 아기에게 사랑을 줄 수 없는 고통이 죽음의 고통보다 컸던 것. 그래서 절대 포기하지 않기로 다짐하고 또 다짐합니다. 마비된 지 두 달 되던 날 홀리는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팔을 움직이고 혀를 움직여 딸에게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엄마는 움직일 수 있는 손으로는 딸에게 처음으로 우유를 먹였다. 70일 뒤 호흡기 없이 자가 호흡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여기서 만족할 수 없었다. 휠체어를 타고 재활 훈련을 시작했다. 양손으로 휠체어를 움직일 수 있게 된 것. 딸을 안아줄 강한 엄마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87일째 되는 날 그녀는 간호사들의 도움으로 두 발로 일어섰다. 홀리는 엄청난 투혼으로 하루가 다르게 강해졌고 4달째 되는 날 그녀는 스스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딸 케이시와 함께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 것. 집은 내가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1년 뒤 엄마, 홀리는 마라톤을 완주합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고통이 우리를 끝장낼 건지, 아니면 더 강하게 만들 건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출처: ‘딸아이 출산 후 전신 마비된 26세 엄마가 내린 결단’, 포크포크, 유튜브] 예수님은 두 여인을 치유해 주십니다. 한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 대더라도 12년 동안 앓던 병이 나을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이미 죽은 소녀의 아버지는 예수님께서 손을 얹으시면 나을 것이라 믿었다. 이런 믿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아직 할 일이 남았기 때문에 주님께서 당연히 살려주실 것이라는 믿음에서 오지 않을까요? 마치 어린이가 부모님께 ‘학교에서 선생님이 꼭 필요한 걸 사 오라고 했는데 설마 돈 안 주시겠어?’ 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무언가 청하려면 그 청하려는 것이 의미 있다고 믿을 때 강력하게 청할 수 있다. 내가 청하는 것이 건강이나 생명이라면 그 건강이나 생명이 의미 있을 때 강력하게 청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의미가 기적을 만드는 것. 의미는 청할 때 모든 망설임을 이기게 해 줄 힘을 지닙니다. 내일 또 살게 해 주시기를 청하고 싶다면 오늘 저녁에 내일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은지 적어놓으십시오. 그러면 내일도 주님께서 더 살 수 있게 해 주실 것. 확신을 두고 청하는 것은 다 들어주십니다. 그 확신은 내가 청하는 것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믿음에서 옵니다. 오늘을 의미 없게 산다면 내일도 살 수 있게 청하는 것은 자신 안에서 힘을 잃게 됩니다. 그리스도 주 예수님의 이름을 통하여 그렇게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임을 믿고 살아가는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생각을 바꿔라. 그러면 세상을 바꾼다.'' - 스튜어트 B. 존슨 - |
♡2223회 재물에 대한 소유욕과 집착을 버리지 못한 채로 겉으로만 실천하는 사랑은 위선임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9월 18일(사도행전 1장~ ) 피카소는 ''사랑은 삶의 최대 청량제이자, 강장제이다.'' 《인생은 운명이 아니라 선택이다.》옛말에 '작은 부자는 부지런하면 누구나 될 수 있지만, 큰 부자는 하늘이 내린다.' 라는 말이 있다. 곧 아무리 노력하고 때를 잘타고 태어나도 불가항력적인 섭리(攝理) 라는 법칙이 있다는 것. 이것을 인정하지 않을 때 인생은 고통스럽다. 인생은 운명이 아니라 선택(選擇)이다. 되돌리는 없는 순간들 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그 자체가 인생을 떳떳하게 하며 후회 없는 행복한 삶을 만드는 것. 그러므로 최선을 다했다면 등수 때문에 인생을 소진시키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인생은 실패할 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할때 끝나는 것. 그 고통을 인정하고 고난을 통한 그뜻을 알고 새 힘을 얻어 ‘아자!’ 를 외치며 성실하게 땀 흘리는 사람들은 박수를 받아야 마땅하다. 존재를 잃어버리면 가슴을 잃는 것. 가슴을 잃어버리면 자신을 잃는 것. 자신을 잃어버리면 세상을 잃는 것. 세상을 잃어버리면 인생을 잃는 것. 삶의 목표는 일등이 아니다. 편안함을 누리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어쩜 우리네 삶 자체가 고통 일지도 모르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들은 전부 다 사람들이 메고 있는 멍에와 지고 있는 짐을 없애서 사람들에게 참된 안식을 주신 일입니다. 마태오복음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 사람들이 마귀 들린 이들을 예수님께 많이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악령들을 쫓아내시고, 앓는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마태 8,16-17) 마귀들과 온갖 질병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억압하는 멍에들과 짐들 가운데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귀들과 마주칠 때마다 그것들을 모두 쫓아내셨고, 병자들이 당신께 오면 모두 고쳐 주셨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오늘날에도 같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심각한 병에 걸렸을 때, 병원에 가서 치료하는 일을 소홀히 하면 안 되지만, 기도하는 일은 더욱더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인간의 생살여탈권은 의사가 아니라 주님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멍에들 가운데에는 사람들이 멍에인 줄 모르거나, 멍에라는 생각을 못하는 멍에가 있고, 그래서 그 멍에를 벗지 않으려고 하는 일이 있다. 마태오복음 19장에 나오는 어떤 부자의 경우가 좋은 예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와서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라고 물었는데(마태 19,16), 그가 말한 ‘영원한 생명’ 은 단순히 안 죽고 영원히 사는 것을 뜻하는 ㅈ다.(마태 19,17-19) 하느님의 십계명은 인간들을 억압하는 족쇄나 멍에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참된 자유와 안식을 주는 열쇠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그 부자는 자기가 십계명을 다 지켜 왔다고 말하면서,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다고 말합니다.(마태 19,20) 부족한 것은 십계명 자체가 아니라, 그의 실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이 말씀은, 참된 안식을 얻기 위해서 멍에를 벗어버리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으로 생각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은 “영원하고 참된 안식을 얻기를 바란다면”으로,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는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고”로,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여라.”로,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는 “영원하고 참된 안식을 얻을 것이다.”로 해석할 수 있다. “나를 따라라.”라는 말씀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는 일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 나라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고 이웃 사랑을 실천해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예수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어렵다는 것. 예수님께서는 그 부자가 가지고 있는 ‘많은 재물’이 바로 그가 메고 있는 멍에라는 것을 꿰뚫어보셨다. 그 멍에를 벗어버리는 방법은 그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는 것. 혹시라도 “애착심을 버렸다면 재물은 그냥 가지고 있어도 되는가?”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재물을 버리지 못하면서도 애착심을 버렸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고, 위선입니다. 그 부자는 재물을 포기할 수가 없어서, 그리고 영원하고 참된 안식에 대한 희망도 버리지 못해서 ‘슬퍼하면서’ 떠났습니다.(마태 19,22) 둘 다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이, 또는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슬펐던 것 같다. 예수님은 멍에를 벗어버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는 분이고, 멍에를 벗기 위한 열쇠를 주시는 분입니다. 직접 멍에를 벗는 것은 우리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감옥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주시는 분이고, 그 열쇠를 받아서 감옥 문을 열고 걸어 나가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그 부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많은 재물이 멍에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고, 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뒤에도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재산이 많으면 그것으로 선행을 많이 실천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니 많은 재산을 꼭 멍에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럴듯한 말이지만, 재물에 대한 소유욕과 집착을 버리지 못한 채로 겉으로만 실천하는 사랑은 위선일 뿐입니다. 선행 실천(사랑 실천)은 재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부자가 슬퍼하면서 떠나간 뒤에,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라는 말씀을 하셨다.(마태 19,23-24) 이 말씀은, “부자는 부자인 채로는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입니다. 멍에를 멘 채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란다면, 그리고 그 나라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서 스스로 멍에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라는 말씀과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라는 말씀에서 ‘내 멍에’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새로 주시는 어떤 멍에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온갖 멍에를 벗어버리기 위한 ‘자유의 열쇠’를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멘다는 말은, 그 ‘자유의 열쇠’를 받아들여서 자신을 억압하고 있는 멍에들을 벗어버린다는 뜻입니다. 그 ‘자유의 열쇠’가(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이) 경우에 따라서 조금 무겁게 느껴져도, 무겁다고 불평할 수 있을까? 무겁든지 가볍든지 간에 열쇠는 열쇠이지 멍에가 아닙니다. 주 예수님의 사랑... 지금 이 순간에도 놀라고 넘쳐 주 예수님의 이름만 불러도 감사와 감동의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는 행복한 삶을 기도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가시는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결심한 것은 반드시 실행하라.'' - 프랭클린 - |
♡2224회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습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9월 19일(사도행전 27장~ ) 아이작 아시모프는 ''폭력은 무능한 자의 마지막 위안이다.'' 《아름답고 예쁜 화장품 사세요》주름이 생긴 이마에는 ‘상냥함’ 이라는 크림을 사용해 보세요. 이 크림은 주름을 없애주고 기분까지 좋아지게 하니까요. 입술에는 ‘침묵’ 이라는 고운 빛의 립스틱을 발라 보세요. 이 립스틱은 험담하고 원망하는 입술을 예쁘게 바로 잡아주는 효과도 있답니다. 맑고 예쁜 눈을 가지려면 ‘정직과 진실’ 이라는 아이크림 을 사용해 보세요. 최선의 효과를 얻으려면 어디를 가든지 그 아이크림 을 소지해야 한답니다. 피부를 곱게 하고 싶으시면 ‘미소’ 라는 로션을 바르면 되구요. 피부가 촉촉하고 부드러워지며 거울을 보고 미소 짓는 하루로 인해 날마다 행복할 수 있다. 가장 이상적인 피부 영양제 화장품은 ‘성실’ 입니다. 아주 효능 좋은 피부 청결용 세안 비누는 ‘미안’ 이 최고라고 합니다. 아, 참~ 가장 향기로운 향수로는 ‘용서’ 가 제일이랍니다. 분명 마음에 드실 꺼에요. 한 셋트씩 꼭 구매해 주실거죠? 품질은 제가 보장합니다! 날마다 사용하셔서 예쁘고 멋지고 향기 좋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불충한 목자와 믿음 없는 양들(즈카르야서 13장, 에제키엘서 34장)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마태오 5장 37절) ‘현실에 무감각한’ 무지가 “악의 평범성” 을 초래한다는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교회, 사회에서 이웃에게 너무 쉽게 악을 범하면, 교회도 사회도 제대로 설 수 없고 쇄신할 수 없다. 신앙과 삶의 현장에서 좋은 진주를 발견하고도 욕심이나 교만 때문에 그것을 놓치고, 좋은 고기를 잡고도 잘못 골라내는 실수를 범한다. 선택과 결정에는 책임이 따르고, 그 결과도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악한 세월 속에 나이만 먹고” (다니엘서 13장 52절), “거짓말을 하며” (다니엘서 13장 59절) 독식의 욕심(열왕기 상권 21장, 다니엘서 13장, 마르코 14장 참조)을 갖는 이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해되면 그가 누구이든지 상관없이 뒷조사를 시켜 교구에 투서를 넣게 만드는 조작도 서슴지 않았다. 교회의 공동선이 아니라 사익을 추구하다 보니, 인재 양성과 노후대책을 소홀히 했다. 아직도 자리를 꿰차고 있다. 본인은 차르였지만 착한 목자라고 과대 포장했다. 부끄러운 일. 그것을 묵인한 우리는 비겁했다. 보물의 비유와 진주 상인의 비유는 하늘 나라를 발견한 기쁨이 너무 커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 사도 결코 아깝지 않다. 그만큼 하늘 나라는 그 어떤 것과도 비길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것이 신앙인의 자세이자 삶이다. 그물의 비유는 가라지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종말의 심판을 예고하기에, 하느님 백성인 그리스도인은 지금 바로 여기에서 하느님을 믿고 말씀과 가르침에 최선을 다해 사는 것.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거스르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 “비뚤어진 생각과 간악한 마음” (지혜 1장 3절-4절)을 내려놓고, 사목은 열정적으로, 일은 공정하고 정의롭게, 재정은 투명하게, 사랑이신 주님을 “삶의 중심” 으로 모시고 “복음화” 를 이루며, 하느님 나라를 향해 성령과 함께 힘차게 가자. 아멘 . 한 농부가 밭에서 일하다가 아주 큰 보물을 발견하게 되자 그는 너무 기뻐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그 밭을 샀다. 유다인들은 대체로 귀한 보물을 땅속에 깊게 묻어두었는데 전쟁이 많다 보니 전사하거나 포로 혹은 피난 생활 후에 영구 귀가하지 못하는 경우로 인해 이 보물들이 다른 농부에 의해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보물은 율법에 따라 현재의 땅 주인 소유물이기에 발견한 사람은 먼저 그 밭을 사야만 합법적으로 보물을 취득할 수 있었다. 공자는「논어」를 시작하면서, 인간에게는 ‘배우는 기쁨이 있다’ 고 말한다. ‘學而詩習之 不亦說乎(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즉, 배우고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하냐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배움으로 얻은 것보다 한 단계 더 올라간 기쁨을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발견하는 기쁨’ 이다. 발견하는 것이 배워서 알게 되는 것보다 훨씬 비약된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의 능력으로 배워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를 발견하게 되는 기쁨은 더욱 그렇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삶 전체를 뒤흔들 수 있는 참 진리와 보물인 이것을 발견하게 되면 지체없이 결단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신비를 알게 되는 발견의 기쁨은 우리 인생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궁극적 기쁨이라고 가르쳐 주신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진리와 생명이시며,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것들이 그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발견하는 것이 인생 최고의 보물이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그 보물을 얻기 위해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투자하고 헌신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일상 속에서 엄청난 가치의 보물을 발견하도록 허락하신다. 그러나 보물을 발견했다고 해서 즉시 자기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소유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동안 일궈온 기존의 소중한 것들을 포기하고 희생해야 한다. 그래서 농부는 밭에 묻힌 보물을 얻기 위해서 자기 소유를 다 팔 수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이라는 보물을 발견한 우리도 그 가치를 알고 있다면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어부로서 가장 소중한 배를 버렸고 사도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너무나 소중해서 그가 소유했던 모든 것을 포기함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얻으려고 모든 것을 쓰레기처럼 여기고 버렸다고 한다.(필리피서 3장 8절) 이 같은 헌신을 통해 비로소 그들이 발견한 하느님 나라를 완전히 얻을 수 있었던 것. 우리도 ‘주님의 밭’ 인 교회 안에서 아직 발견하지 못한 보물을 얻을 수 있도록 농부의 지혜로운 삶을 구해야 하겠다. 우선 교회에서 주님을 발견하여 온전히 자기를 헌신할 수 있는 지혜, 우리가 만난 주님을 소유할 수 있도록 자기 소유를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지혜 그리고 우리가 소유한 주님 안에 머무르는 기쁨을 깨닫는 지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복음이라'''는 보물을 발견하게 해 주셨으니 내 소유를 다 팔아 이 보물을 내 것으로 만들며 살겠다는 고백보다 더 좋은 지혜로운 삶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습니다.”(콜로새서 2장 3절) 우리들 마음 안에 하느님의 햇살이, 하느님의 생명의 기운이 가득한 성령 충만함으로 치유 받으시고, 또한 몸과 마음이 아픈 다른 이들을 돕는 치유의 은사도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우리는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될 수 있다.'' - 조지 러셀 - |
♡2225회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9월 20일(로마서 3장~ ) E.리스는 ''말도 아름다운 꽃처럼 그 색깔을 지니고 있다.'' 《지금 그 자리에 행복이 있다.》사람들이 불행한 이유는 단 한 가지 뿐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고마움을 그것을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느끼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잃고 난 후에 그 소중함을 깨닫지만 이미 때는 늦어 버린 뒤입니다. 눈 들어 세상을 보면 우리는 열 손가락으로는 다 헤아릴 수 없는 행복에 둘러 싸여 있다. 우리가 불행을 헤아리는 데만 손가락을 사용하기 때문에 그 많은 행복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것. 지금 이 순간 눈을 들어 주위를 다시 한번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찬찬히 내주위에 있는 행복을 손가락 하나 하나 꼽아 가며 헤아려 보십시오. 그러는 사이 당신은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변해 있을 것. - 행복 비타민 중에서 -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복음을 전하러 가는 일은 싸우러 가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평화를 전해 주러 가는 일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 주러 가는 일이고,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러 가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리 떼 가운데 놓여 있는 양들 같은 처지가 되더라도 이리 떼처럼 변하면 안 되고, 양의 본성과 모습을 잃지 않으면서 박해자 이리 떼를 양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 것.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지난 이천 여 년의 교회 역사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 예수님의 방식으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만일에 그 방식이 너무 힘들다고 해서 세속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일하면, 즉 세속의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면, 그 복음은 복음이 아닌 것이 되어버리고, 그 일은 실패로 끝나버립니다. 그러나 힘들어도 인내하면서 예수님의 방식으로 일하면, 그 일은 언젠가는 성공하게 됩니다. 결국에는 이리 떼가 양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성령의 지혜와 예수님의 온유로써 일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란 말인가?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17-20) 박해를 받을 때, 그 박해를 오히려 복음 선포의 기회로 삼는 것, 그것이 바로 뱀처럼 슬기롭게 되는 것. 그리고 박해자들을 미워하지 않고, 그들에게 앙갚음하지 않고, 인내하면서 그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 그것이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는 것. 예수님 말씀에서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사람들의 박해를 받더라도 신앙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박해가 신앙을 증언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박해뿐만 아니라 모든 고난과 시련은 신앙을 증언하는 기회가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기가 어려운 때일수록 진짜 신앙인이 누구인지 잘 드러납니다.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박해를 복음 선포의 기회로 삼는 것” 에 대해서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그 걱정에는 “내가 과연 흔들리지 않고 잘 견딜 수 있을까?” 라는, 자기 자신에 대한 걱정도 포함됩니다. 어쩌면 “나는 박해를 겪어도 끄떡없다.” 라고 큰소리치는 것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걱정하는 사람은 도와달라고 기도하겠지만, 큰소리치는 사람은 자만심에 빠져 있다가 쉽게 꺾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두 떨어져 나갈 것이라고 예고하시자.(마태 26,31) 제자들은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베드로가 다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다."(마태 26,35) 우리는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제자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알고 있다 .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라는 말씀은, 박해 때에 성령께서 도와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박해자들은 자기들이 신앙인들을 박해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입니다.(요한 15,18-23)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들이 박해를 받을 때, 하느님과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성령을 보내서 도와주십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성령의 도움을 받는 것은 아니고,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는 방법은 믿음과 기도입니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마태 10,21-23) 가족의 박해를 받는 상황과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상황은 박해가 최고로 심해졌을 때의 상황입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정말로 견디기 힘든 최악의 고통이 될 것. 바로 그런 상황에서도 신앙을 지키려는 노력을 ‘끝까지’ 해야 합니다. 여기서 ‘끝까지’ 는 ‘죽을 때까지’ 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죽을 때까지 신앙을 지키는 것은 결코 헛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 입니다. 신앙 여정은 ‘지상에서 영원으로’ 가는 여행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인생은 잠시 지나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무턱대고 목숨을 버리지 말고, 피할 수 있으면 피하라는 권고입니다. 순교는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라는 말씀은, “박해는 짧고, 신앙을 지킨 이들이 누리게 될 영광은 영원하다.”, 또는 “잠깐 동안은 박해자들이 이긴 것처럼 보이겠지만 궁극적인 승리는 예수님 쪽에 있다.”로 해석됩니다.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고, 내 생각이 아니라 주님의 생각이기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은총이 있으시기를 그래서 우리들도 주님께서 주시는 나만의 통장을 간직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 비트겐슈타인 - |
♡2226회 "말"이 입힌상처는 칼이 입힌 상처보다 깊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9월 21일(코린토1서 1장~ ) 베에토벤은 ''용기가, 그것이 만약 정당한 것이라면 모든 것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내 뱉은 말이 운명을 좌우합니다.》지금 이 순간 아무 생각없이 내 뱉은 말이 운명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우리 주변에 고운말 아름다운말들이 참 많이 있다. 모로코 속담에 "말"이 입힌상처는 칼이 입힌 상처보다 깊다" 는 말이 있다. 말은 깃털과 같이 가벼워서 내 뱉으면 주워담기 힘들다는 탈무드의 교훈도 생각이 납니다. 지금 이 순간 긍정적인 사고방식은 하루를 활기차게 보낼수있는 힘을 줍니다. 좋은말만 하고 살아도 짧은 인생인데, 늘 긍정적인 생각으로 상대에게 자신에게 힘이 될수있는 용기의 말 한마디, 그리고 난, 할수있다는 그런 자신감으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는 단순히 사람들의 신앙생활 모습을 설명하는 비유가 아니라, 많은 열매를 맺는 ‘좋은 땅’ 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예수님께서 간곡하게 당부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를 읽을 때, 자신의 상태가 지금 이 순간 어디에 해당되는지를 반성해 보고, 어떻게 하면 좋은 땅이 될 수 있는지를 묵상하고, 또 실천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좋은 땅’ 으로서 살고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래도 부족한 점이 있는지를 살펴야 하고, 교만과 자만심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마태 13,18-19) 악마의 공격, 또는 악마의 유혹 자체는 악마가 하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 쪽의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공격에 굴복하거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우리가 자신의 의지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죄가 됩니다. 악마가 공격을 하든지 유혹을 하든지 간에 그것을 물리치는 방법은 ‘기도’ 뿐입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 이 말을 반대로 생각하면, ‘기도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악마의 공격과 유혹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길’ 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악마를 물리치는 가장 강력하고 유일한 무기인 ‘기도’ 를 하지 않고 있으니, ‘길’ 은 악마의 공격과 유혹에 무방비 상태로 있는 사람입니다. 비유에서는 “하늘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마가 오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말에서 ‘깨닫지 못하면’ 은 ‘믿지 않고 실천하지 않으면’ 입니다. 실천 가운데 첫 번째는 기도입니다. 믿는다면 기도부터 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는 믿으니까 하는 것이고, 믿음으로 하는 것. 악마에게 말씀의 씨를 빼앗긴 상태를, 미신이나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만일에 지금 신앙생활을 중단하고 미신이나 우상숭배에 빠져 있더라도, 다시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한다면, 망설이지 말고 바로 돌아가면 됩니다.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하기 위한 절차 같은 것은 없다. 회개하고 고해성사를 보기만 하면 됩니다. 미신이나 우상숭배에 빠진 것은 아니지만, 악마의 유혹과 같은 유혹에 넘어가서 어떤 죄 속에서 살고 있다면, 그러면서도 신앙생활을 다시 하기를 원한다면, 즉시 회개하고 고해성사를 보면 됩니다. 나중으로 미루는 것은 악마가 바라는 대로 하는 것.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마태 13,20-21) ‘뿌리가 없는’ 신앙생활은, 간절한 마음 없이, 마치 취미생활을 하는 것처럼 하는 신앙생활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환난과 박해가 없는 편안한 시기에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보이고, 실제로 잘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환난과 박해가 일어나면 금방 넘어집니다. 신앙에 대해서 간절함이 없으니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킬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그러면 그런 경우에 ‘간절함’ 은 어떻게 일으킬 수 있을까? 본인이 스스로 노력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 그 경우에도 ‘기도’가 정답입니다. 사실 환난과 박해로 넘어지는 것과 악마가 와서 말씀의 씨를 빼앗아 가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조금 다를 뿐이고, 실제로는 같은 것. 따라서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도 같다. 그런 점에서, 뿌리가 없는 신앙생활은 기도하지 않는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다. 환난과 박해가 일어나도 넘어지지 않기를 바란다면, 평소에 기도생활을 잘해야 합니다. 머리로만 믿지 말고 마음으로 믿어야 하고, 신앙이 곧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든 환난과 박해 때에 넘어졌더라도 신앙생활을 다시 하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앞의 ‘길’ 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회개하고 고해성사를 보면 됩니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마태 13,22) 악마가 와서 신앙인에게서 말씀의 씨를 빼앗아 가는 것이나 환난과 박해가 신앙인을 넘어뜨리는 것이나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신앙인 안에 있는 말씀의 숨을 막아 버리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다를 뿐이고, 실제로는 다 같은 것. 박해가 없는 요즘에는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박해로 작용합니다. 또 악마는 그런 걱정을 통해서 유혹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은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사는 것이 옳다는 것은 알지만” 이고,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는 “믿고 있고,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할 의지와 힘을 빼앗아 버려” 입니다. 가시덤불의 경우에도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기도’ 입니다. ‘기도’ 는 막혀 버린 ‘말씀의 숨’ 을 회복시켜 주는 ‘성령의 인공호흡’ 같은 것. 만일에 기도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한다면, 결국 숨이 막혀 죽을 것. 구원의 길과는 반대쪽으로 나 있는 멸망의 길로 갈 것. 그런데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 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걱정’ 과는 다릅니다. ‘일용할 양식’에 대한 걱정은 생존에 대한 걱정이고, 그것을 탓할 수는 없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남들보다 더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라는 욕심과 이기심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기도와 남들보다 더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라는 욕심으로 바치는 기도는 완전히 다른 것.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기도는, 걱정은 하지만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으로 바치는 기도이고, 욕심을 채우려고 바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빈말’ 입니다. 무관심을 벗어나 사랑의 맘으로, 감사의 맘으로 우리들 자신과 또 우리들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고맙고, 감사하다는 표현으로 하느님의 은혜로운 선물을 받는 축복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커다란 비결은 결코 낡지 않은 인간으로서? 인생을 끝까지 사는 것이다.'' - 시바이쩌 - |
♡2227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9월 22일(코린토2서 1장~ ) 엘리노어 루즈벨트는 ''미래는 자신들의 꿈이 아름답다고 믿는 사람들의 것이다.'' 《거룩하고 소중한 삶》각자의 삶과 역사는 거룩합니다. 각 사람은 저마다 고유하며 소중합니다. 영원히 이어질 유일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며, 그 사랑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살면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죄를 지었다고 당신께 오지 말라고 하신 적은 없다. 그분 앞에는 큰 죄도 없고 작은 죄도 없다. 그것은 우리의 구분일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허물을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진정 우리는 많이 용서받았다. 그러므로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겨자씨의 비유’ 와 ‘누룩의 비유’ 는, 큰일과 작은 일을 구분하거나 따지지 말고 ‘지금’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이고, 결과는 하느님께 맡겨드리고 사람이 할 일을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지금 자기가 하려는 일이 너무 큰일이라고 해서 자신감을 잃고 포기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지금 자기가 하려는 일이 너무 작은 일이라고 해서 실망하거나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이라면, 큰일이든지 작은 일이든지 간에 누구든지 해야 하는 일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크다고 더 중요한 일이 아니고, 작다고 덜 중요한 일도 아닙니다. 모두 다 똑같이 중요한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마태 13,31-32)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하늘나라의 성장 과정은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로 자라는 것과 같다.”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처음에는 아주 작은 일처럼 보이더라도, 마지막에 보면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결과가 이루어진다는 것. 이 말씀은, 하늘나라가 또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항상 처음에는 겨자씨처럼 작은 일로 시작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 작은 일도 있고, 큰일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결과’ 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다면, 지금 ‘하느님의 뜻’ 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작은 겨자씨처럼 보잘것없는 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래도 주눅 들면 안 되고, 무시해도 안 됩니다. 그 작은 일이 큰 결과를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당신을 믿고 일을 하라는 지시이기도 하고, 신앙인들이 하는 일을 도와주시겠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내가 하는 일’ 은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하신 일들, 즉 복음을 선포하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병자들을 고쳐 주고, 마귀들을 쫓아낸 일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또는 교회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이어받아서 계속해야 합니다. ‘그보다 더 큰 일’ 은 ‘더 위대한 일’ 이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신 지역보다 더 먼 곳까지 가서, 예수님께서 만나신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뜻합니다. 신앙인이(교회가) 그렇게 큰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는 일은 ‘예수님의 일’ 입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우리가 하는 일을 예수님께서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우리가 도와드리는 것. “하늘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마태 13,33) 이 말씀은 사람들의 내적 변화에 초점을 맞춘 말씀입니다. “하늘나라는 누룩과 같다.” “적은 양의 누룩으로도 많은 양의 밀가루 반죽을 부풀게 하는 것처럼, 신앙인의 수가 적더라도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입니다. 신앙인의 수가 적다는 것에 위축되지 말고, 겁먹지 말라는 것. 어떤 집단에 신앙인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한 명의 신앙인이 그 집단을 변화시켜서 신앙인 공동체로 바꿀 수 있다. 신앙인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다면... ‘겨자씨의 비유’ 와 ‘누룩의 비유’ 를 ‘탈렌트의 비유’ 에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탈렌트의 비유’ 에 나오는 첫 번째 종과 두 번째 종은, 밭에 겨자씨를 심는 사람이고, 밀가루 반죽에 누룩을 집어넣는 사람입니다. 그들이 다섯 탈렌트와 두 탈렌트를 더 벌었다는 것은(마태 25,16-17), 겨자씨가 큰 나무로 자란 것이고, 밀가루 반죽이 온통 부풀어 오른 것. 아무것도 하지 않은 세 번째 종은(마태 25,18), 겨자씨를 밭에 심지 않은 사람이고, 누룩을 밀가루 반죽에 넣지 않은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주인은 세 번째 종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25,29-30)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하느님의 뜻’ 을 실천하는 사람은 더 큰 은총을 받게 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이미 받은 은총도 잃게 될 것이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도 잃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상황에 대해서 “세 번째 종은 그래도 최소한 죄는 짓지 않았다.” 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자체가 죄라고 가르치셨습니다(루카 6,6-11).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언자를 통하여 ‘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마태 13,34-35) 예수님께서 비유를 사용하신 것은 사람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 입니다.(마태 13,13) 즉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알아듣게 하려고, 또 사람들에게 ‘깨달음’ 을 주려고 비유를 사용하셨다.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 ‘하느님의 인류 구원 계획’ 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안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아듣기는커녕 비유가 너무 어려운 수수께끼 같다고 불평하기만 합니다.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고, 내 생각이 아니라 주님의 생각이기를 믿음으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은총과 축복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작게 시작하라! 그것이 가장 빨리 성공하는 길이다.'' - 마르코 폰 뮌히하우젠 - ♡2228회 나는 남들에게 어떤 인상을 심어 주었는가?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9월 23일(갈라티아서 1장~ ) N. 부알로는 ''진실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고 진실만이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다.''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자》사람들은 무수한 인연을 맺고 살아간다. 그 인연 속에 고운 사랑도 엮어 가지만 그 인연 속에 미움도 엮어 지는게 있다. 고운 사람이 있지만. 미운 사람도 있고 반기고 싶은 사람이 있지만. 지금 이 순간 외면하고 싶은 사람도 있다. 고운 인연도 있지만. 피하고 싶은 악연도 있다. 우린 사람을 만날 때 반가운 사람일 때는 행복함이 충족해온다. 그러나 어떤 사람을 만날 때는 그다지 반갑지 않아 무료함이 몰려온다. 나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에게 괴로움을 주는 사람도 있다. 과연 나는 지금 이 순간 타인에게 어떤 사람으로 있는가 과연 나는 남들에게 어떤 인상을 심어 주었는가? 한번 만나면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한번 만나고 난 후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지금 이 순간 진솔하고 정겨운 마음으로 사람을 대한다면 나는 분명 좋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것. 이런 사람이야말로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아닐까 이런 사람이야말로. 다시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아닐까 한번 만나고 나서 좋은 감정을 얻지 못하게 한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불행에 속할 것. 언제든 만나도 반가운 사람으로 고마운 사람으로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언제든 만나고 헤어져도 다시 만나고 싶은 그런 사람이 되자.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요? 인간은 지금 이 순간 무엇으로 살까요? 왜 어떤 사람들은 무기력증에 시달리거나 심지어 자살까지 하게 될까요? 그 비밀은 ‘행복’ 에 있다. 행복에 취해야 삶의 의욕도 생깁니다. 한 사향노루가 있었다. 그는 바람이 불 때마다 어디선가 오는 사향의 냄새를 좋아했다. 그리고 그 냄새가 나는 근원지를 찾아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 그 사향의 근원지를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찾아도 더는 그 근원지를 찾을 수 없다는 생각에 자살을 선택합니다. 절벽에서 뛰어내린 것. 그리고 죽어가면서 깨진 자신의 몸 안에서 사향의 향기가 솟구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이 쫓는 행복이 없다면 삶을 살아갈 힘을 잃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게 되어있습니다. 문제는 위 사향노루처럼 그 행복을 외부에서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히 배고플 수밖에 없고 결국 그 배고픔을 더는 채울 길이 없게 되면 죽음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행복은 삶의 목적이 아닙니다. 삶이 행복이라는 미끼로 자신을 연명시키는 것. 영화에 보면 마약을 팔 때 우선 몇 번은 거저 줍니다. 그리고 그 맛에 길들었을 때 비싼 값에 마약을 판매합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중독됩니다. 우리는 그런 중독된 상태로 태어납니다. 사실 모든 동물은 이 행복에 중독되어 있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다. 동물들은 먹이를 먹을 때 가장 행복해합니다. 그리고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 행복이 오래간다면 더는 먹지 않으려 할 것. 그러면 죽게 됩니다. 다시 배가 고파야 그 행복을 느끼고 싶어서 먹이를 찾게 되는 것. 그러나 인간이 이런 행복에 중독되면 동물처럼 살 수밖에 없다. 요즘 많이 나오는 영화의 ‘좀비’ 와 같이 됩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 타인을 해치는 사람이 되는 것. 이런 사람이 바로 헤로데입니다. 헤로데가 요한 세례자를 죽이는 내용입니다. 요한은 그나마 헤로데에게 충언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헤로데도 군중이 무서워 요한을 죽이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런데 헤로데가 요한을 죽일 용기를 낼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자신이 중독된 행복을 빼앗길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 세상 행복에 대한 집착이 자신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 목소리를 끊어버린 것. 우리도 이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면 누구나 우리 안에서 들려오는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 목을 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미국 법원은 최근 데보라 짐머만이라는 여성에게 ‘태아 살인미수죄’ 를 적용해 자녀 양육권을 박탈했다. 알코올중독자였던 짐머만은 임신 9개월인 상태에서 한 파티에 참석해 많은 양의 술을 마셨다. 그녀는 만취한 상태에서 산욕을 느껴 딸을 낳았다. 그런데 신생아의 혈중 알코올 농도가 무려 0.2%에 육박했다. 산모의 상습적인 음주로 인해 신생아는 심각한 알코올 중독 증세를 보였다. 법원은 함량 미달의 모정에 대해 ‘양육권 박탈’ 을 선언하고 ‘살인미수죄’ 를 적용했다. 그리고 술의 유혹을 극복하지 못한 어머니의 무책임이 한 어린이에게 ‘저능아’ 라는 비극적인 이름을 남겨주고 말았다. 우리가 세상 행복에 중독된 만큼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의 행복은 죽어갑니다. 사랑에서 오는 행복도 하나의 미끼입니다. 살게 하는 힘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행복은 영혼을 살게 합니다. 올해 백 세가 되시고 ‘백 년을 살아보니’ 라는 책을 쓴 김형석옹은 장수의 비결을 물었더니 ‘절제’ 라고 대답했다. 육체의 만족을 절제하는 삶이 장수의 비결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언제 가장 행복했느냐고 물으니 ‘사랑 때문에 힘들었던 때’ 가 가장 행복했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영혼의 행복과 육체의 행복,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다. 하나를 잡으려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행복에 무관심해도 안 됩니다. 삶의 의욕을 잃게 됩니다. 어차피 행복은 생존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사랑으로 육체가 죽는 행복을 선택할 것인지, 육체의 행복을 찾아 사랑으로 오는 행복의 목을 칠 것인지는 우리 선택에 달려있다. 살아가면서 점점 세상의 행복을 끊어가고 있다면 참 잘 살아가고 있는 것. 그렇게 끊어가는 세상의 행복이 이웃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라면 참으로 잘 사는 것. 어차피 행복에 취할 거면 영원히 살게 만드는 행복에 취합시다. 겸손은 사랑을 담는 그릇입니다. 겸손의 믿음으로 내 삶에 앞자리에 주님을 담고,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치유 받는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아무리 위대한 천재의 능력일지라도 기회가 없으면 소용이 없다.'' - 나폴레옹 - |
♡2229회 자신을 낮추면 지금 이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9월 24일(테살 1서 1장~ ) 피히테은 ''존경이 없으면 진정한 사랑은 성립되지 않는다.'' 《주님은 그대 사랑의 목표》그분은 그대 사랑의 목표입니다. 오직 그분만이 흠숭을 받으시기에 합당합니다. 그대가 주님께 봉헌한 희생의 결실들은 그대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큰 죄를 범하고 있는 세상에도 베풀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속죄입니다. 속죄하는 일은 관대한마음을 요구합니다. 하느님은 관용을 결코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만일 그대가 지금 이 순간 속죄의 지향을 두고 흠숭 기도를 바친다면, 그대는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랑은 다른 사람들을 찾게 되는데 우리 모두를 어두움 속에 있는 사람들은 빛으로 인도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광채 속으로 중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어린이처럼 되는 것. 그런데 어린이처럼 된다는 말은 자신을 낮춘다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어린이처럼 되라는 말씀은, ‘겸손’ 하여지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자신을 낮추면 지금 이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교만해지면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만 좋아하지만, 겸손하면 모든 이를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어린이처럼 되는 것. ‘응웬 차우 로안’ 은 ‘골형성부전증’ 이란 장애를 지니고 태어난 베트남 여성입니다. 이 병은 특별한 원인 없이도 뼈가 쉽게 부러지는 선천성 유전 질환입니다. 뼈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해 키가 매우 작고 허리가 굽습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의 조롱으로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런데 ‘응웬 반 부옹’ 이란 청년이 그녀를 사랑했다. 그는 “겉모습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녀는 누구보다 착하고 아름다운 여성이다.” 라고 말했다. 부옹은 로안과 결혼을 하고 함께 평생을 기약하고 싶었다. 하지만 로안은 부옹에게 평생 짐이 될까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2014년 4월 4일, 로안은 지인의 결혼식에 하객으로 초대받아 휠체어를 이끌고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결혼식장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있었다. 이때 로안의 앞에 예쁘게 차려입은 소녀들이 등장했고, 소녀들은 로안을 결혼식장 한가운데로 이끌었다. 수많은 사람이 박수갈채를 보내며 로안을 환영했다. 로안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신랑의 얼굴이 보였다. 바로 자신의 남자친구 부옹이었다. 이것은 부옹이 로안을 위한 깜짝 결혼식이었다. 상처가 많아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하는 로안을 위해 부옹이 준비했던 것. 모든 사실을 안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결혼식 7개월 만에 부옹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만 것. 갑작스럽게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로안도 병세가 악화하여 이듬해인 2015년에 남편을 따라 하늘나라로 향했다. 우리나라도 한쪽 얼굴에 붉은 모반을 가지고 태어났고 다른 쪽 얼굴은 암이 들어 뼈까지 깎아내는 수술을 해야 했던 김희아씨를 사랑해 결혼한 남편이 있다. 외모지상주의의 세상에서 이런 분들이 진정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이라고 여겨집니다. 받아들임이 곧 겸손입니다. 왜 어린이와 같은 이들은 세속적으로는 전혀 매력이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어린이들은 세속적인 ‘맛’ 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끔 예전에 청년이었다가 결혼하여 아기들을 데리고 나오는 분들을 만납니다. 아기들은 식당 밥을 먹지 못합니다. 엄마가 미리 이유식을 준비해 오는데 거저 줘도 안 먹을 전혀 간이 되지 않은 보기만 해도 맛이 없어 보이는 음식입니다. 그러면서 어른이란 세상의 맛에 길든 사람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미 아름다운 여인들의 모습에 길들었다면 그 사람은 어른이고 그러면 예쁘지 않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눈은 잃습니다. 자신은 예쁜 여자와 결혼해야 하는 사람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 그렇게 교만은 사람을 받아들일 그릇을 좁힙니다.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어린이처럼 될 수 있는지 알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 세상의 맛을 끊으면 됩니다. 좀비 영화입니다. 좀비는 사람을 만나지 않고 사람을 먹습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사람을 음식으로 보는 것. 그래서 좀비는 인간이 아닙니다. 어린이의 마음을 잃은 사람들은 좀비와 다를 바가 없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 맛볼 무언가를 만나는 것.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실 선물을 바라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결혼을 하니 그 찾는 맛을 더는 발견할 수 없게 되면 곧 이혼을 생각하게 되고 다른 누군가에게서 그 허기를 채우려 합니다. 그렇게 누구와도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요즘 초등학교 3학년부터 사춘기가 시작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 말은 부모님과 세상이 빨리 아이들을 성인으로 만들고 있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통해서 만들까요? 바로 스마트폰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세상의 맛을 빨리도 맛보게 만듭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말투와 표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유튜브에 나오는 캐릭터들의 말투를 따라 합니다. 유아용 방송이라고 해서 세상의 맛이 없을까요? 교묘하게 숨겨진 유혹이 더 많다. 아이들은 그런 방송과 게임 등을 통해 세속-육신-마귀의 맛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깊이 각인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스마트폰을 빼앗는 엄마까지도 미워하게 됩니다. 엄마도 이제 스마트폰이라는 맛을 주는 도구에 불과하게 되는 것. 절대 7살 이전에는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을 쥐여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을 쥐여준다는 것은 아기들을 빨리 어른으로 만들어 자신들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어렸을 때 맛 들인 것들을 끊는 것은 매우 힘이 듭니다. 10분에 맛 들인 맛을 끊는 데 10년이 걸릴 수도 있다. 면담때 만나는 분들은 시간이 나면 아직도 영화를 보는 게 낫지 따분한 활자들의 조합인 성경책을 읽으려 하지 못합니다. 억지로 노력하는데도 아직 잘 안 됩니다. ‘어렸을 때 TV를 보지 않고 성경책을 읽는 습관을 들였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TV없이 산지가 20여년이 지나고 매일 성경말씀을 읽거나 듣고 묵상합니다. 겸손함이란 많은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의 크기입니다. 그 크기는 세상의 맛을 알수록 줄어듭니다. 겸손은 세상의 맛을 끊는 것과 하나입니다. 그 맛 때문에 사람을 있는 그대로 공감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의 맛을 끊어가야 하는 이유이고, 하느님 일 순위의 삶으로 천국을 예약할수 있는 이유이고, 어린이처럼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들이 돌아가야 할 자리에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연민, 즉 하느님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은사가 있으시고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짖는 개를 두려워 말고 짖지 않는 개를 두려워하라.''- 터키속담 - |
♡2230회 ‘황금률’ 은 ‘하느님 사랑’ 과 ‘이웃 사랑’ 을 하나로 압축한 것과 같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9월 25일(히브리서 1장~ ) 알랭은 ''인간은 의욕하는 것 그리고 창조하는 것에 의해서만이 행복하다.'' 《사랑은 그림입니다.》사랑이 떠나간 빈자리에는 또 다른 사랑으로 채워진다. 사랑이 지나간 자리는 돌아보지 마라 사랑은 결코 보내지 못한다. 그 사랑은 바람이다. 나에게 또 다른 신선함으로 채워줄 바람이었으니깐 사랑에 연연 하지 마라 아쉬워 미련도 갖지 마라 그 사랑은 더 큰 사랑을 그려 낼 내 삶의 밑바탕일 뿐이다. 나를 정신 차리게 채찍질 해 줄 회초리 일뿐이다. 진정한 사랑은 떠나가지도 변질되지도 않는다. 미완성된 사랑으로 마치 완성된 사랑인양 자랑하지 마라. 사랑은 온유하게 흐르는 세상의 흐름이다. 아직도 부족한 눈으로 사랑을 노래하지 마라 나중에 부끄러움이 남는다. 사랑은 나의 선택이고 나의 그림이다. 지금 이 순간 잘 살펴야 한다. 잘 그려야 한다. 그래야 아픔이 생기지도 않고 그래야 슬픔도 없다. 사랑은 다만 웃어 줄 즐거움만이 남는다. 다 하지 못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고 다 즐기지 못한 웃음으로 행복이 계속된다. 꿈속이던 현실이던 내가 그릴 수 있는 만큼의 그림이 사랑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느낄 수 있을 만큼의 감정이 행복이다. 신앙생활의 근본정신은 ‘사랑’ 입니다. ‘사랑’ 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 사랑이 없으면 신앙생활은 아무것도 아닌 생활입니다. 지금 말하는 사랑에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모두 포함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또 하느님과의 사랑 안에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과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는 일이 완성될 날이 오기를 희망하는 사람이고, 그 일치를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심과 다릅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선(善)이고, 선을 지향하며, 선의 실현을 위한 노력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자신을 ‘선의 실현’ 을 위한 도구로 내놓는 일입니다.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마태 22,35-36) 여기서 ‘시험하려고’ ‘논쟁하려고’ 로 해석할 수 있다. 율법 교사가 말한 ‘가장 큰 계명’ 은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 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율법 학자들은 무엇이 더 중요한 계명인지에 대해서 자주 토론했는데, 계명들을 중요도에 따라서 분류하는 것은, 중요한 계명을 먼저 지키고, 덜 중요한 계명을 지키는 일은 뒤로 미루거나 무시하겠다는 속마음이 숨어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라고 말씀하셨다. 계명들은 전부 다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한 계명에 대해서 말씀하셨다면, 율법 교사는 그 말씀에 대해서 반박하면서 논쟁을 벌였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가장 중요한 계명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고, ‘계명의 근본정신’ 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는 것.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 이라는 말을 근거로 해서,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 은, ‘계명의 근본정신’ 으로(또는 ‘신앙생활의 근본정신’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는 ‘황금률’ 을 계명의 근본정신으로 제시하셨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황금률’ 은 ‘하느님 사랑’ 과 ‘이웃 사랑’ 을 하나로 압축한 것과 같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한다는 말은 모든 것을 다 바친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것을 하나도 남겨 놓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바칩니다. 이것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모두 해당됩니다. 순교자들은 하느님을 사랑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 분들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라는 말에서, “사랑이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사모하고 섬기는 일” 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소망을 품고 있다면 사랑에 빠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정의는 신앙인의 ‘아가페’ 뿐만 아니라 세속에서의 연인이나 부부 사이의 사랑에도 모두 적용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셨을 때,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루카 5,11) 모든 것을 버렸다는 말을 “모든 것을 바쳤다.” 로 바꿀 수도 있다. 사도들이 버린 것은 물질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인생 전부를 버렸고, 또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를 하고 예수님을 따랐는데, 그것은 사랑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 3,8-9) 바오로 사도는 ‘잃었다.’ 라고 표현했지만, 사실은 ‘바친’ 것. 쓰레기로 여긴다는 말은, “그것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즉 “주님만을 사랑한다.” 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주님과 사랑으로 일치하려는 것입니다.” 로 해석할 수 있다. 예수님 말씀에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기 싫어도 억지로라도 해야 한다.” 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실천하게 되는 계명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사용된 말이고, 뜻으로는, “신앙이란,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다.” 입니다. 신앙생활은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생활이고,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으로 하는 생활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기쁨 가득한 생활이고 행복한 생활입니다. 사랑은 원래 기쁨과 행복의 씨앗입니다. (눈물의 씨앗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과정에서 아픔이 따르기도 하지만, 그 아픔마저도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둘째도 이와 같다.” ‘하느님 사랑’ 과 ‘이웃 사랑’ 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신앙인은 당연히 이웃도 사랑합니다. 두 사랑은 사실상 하나의 사랑입니다. 이웃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나’ 와 똑같은 자녀이고, 내가 사랑하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존재이기 때문에,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웃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다. 실제로 자기 자신을 혐오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우리들에게 허락하신 믿음으로 어떤 일이든 “예,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하겠습니다.” 라는 응답으로 주 예수님의 은총 가득한 옷을 입으시고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지 않는 자는 때로는 자신을 멸망시킨다.'' - 토마스 칼라일 - |
♡2231회 사랑이 없는 인생은 풀 한포기 없는 사막과 같고 샘물이 말라 버린 샘터와 같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9월 26일(베드로1서 1장~ ) 독일속담에 ''둘이서 동시에 노래할 수는 있으나 동시에 지껄일 수는 없다.'' 《사랑은 인생의 흐뭇한 향기》사랑은 인생의 흐뭇한 향기이자 우리의 인생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인생의 따뜻한 햇볕입니다. 가정에서 사회에서 그리고 이웃 간에 흐뭇하고 아름다운 정을 나누고 삽니다. 그 고운정 속에는 아름다운 사랑이 있다. 이러한 사랑이 있기때문에 우리는 인생을 희망과 용기와 기대를 가지고 살아갈 수가 있다. 인간에게는 정의 아름다움과 흐뭇함이 있기 때문에 괴로운 인생도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하여 따뜻한 관심을 갖는 것. 내가 사랑의 주체가 되어 누구를 사랑하는 동시에 내가 사랑의 객체가 되어 누구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사랑할 사람도 없고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도 없을 때 나의 존재와 생활은 무의미와 무가치로 전락하고 맙니다. 사랑이 없는 인생은 풀 한 포기 없는 사막과 같고 샘물이 말라 버린 샘터와 같다. 생에 빛을 주고, 향기를 주고, 기쁨을 주고, 보람을 주고, 의미를 주고, 가치와 희망을 주는 것이 곧 사랑입니다. 사랑은 우리 생활의 등뼈요 기둥입니다. 인생을 행복하게 살려면 애정의 향기를 항상 발산해야 합니다. 나는 너를 믿고 너는 나를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서로 믿기 때문에 같이 잘살 수 있고 같이 일할 수 있고 같이 친해질 수 있는 것. 사랑, 협동, 화목, 대화, 희생, 봉사 등 인간의 아름다운 덕이 모두다 믿음과 신의의 토대 위에서 비로소 가능합니다. 신의와 믿음의 질서가 무너질 때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맙니다. 사랑과 믿음 그리고 행복은 하나의 가치임과 동시에 삶의 기초입니다. 사랑과 믿음과 창조의 토대 위에 행복의 탑을 쌓고 즐거운 생활의 요람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우리일 때 인생은 아름다워 집니다. 어떤 사람이 몸이 너무 아파서 용하다는 한의원을 찾아갔다. 이곳의 한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진찰을 받고 처방전을 받아 그대로 하면 어떤 병이든 낫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 사람 역시 이 의원을 찾아가 진찰을 받았고 처방전을 받았다. 이 처방전에는 몇 가지 열매와 허브, 그리고 플레인 요구르트가 적혀 있었다. 위장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진단해서 낸 처방이었다. 그런데 이 환자는 다른 사람들처럼 병이 낫지 않았다. 왜 그럴까요? 이 환자는 처방전에 적혀 있는 것을 따라 먹은 것이 아니라, 골방에 들어가서 계속 처방전만 꼼꼼하게 읽기만 한 것. 이 사람은 환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병이 더 심각해져서 용하다는 이 한의사도 손 쓸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 사람의 병이 낫는 방법은 그저 처방전만 읽는 것이 아니라, 처방전을 따라야 하는 것이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렇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성경만 읽는다고 주님과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을까요? 그저 성당에 나가서 미사에 참석하면서 미사를 주례하는 신부님 얼굴만 본다고 해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열릴까요? 이런 식으로 보기만 해서는 그 어떤 변화도 이루어질 수 없다. 주님의 말씀이 살아 있는 말씀이 되어서 우리 구원의 길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그 말씀을 따라야 하고, 주님과 영원히 함께하기 위해서는 그저 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 뜻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고향 나자렛에 가셔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다 함께 기뻐할 일이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순간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면서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오히려 주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고, 고향 사람들은 어떤 하느님의 은총도 체험할 수가 없었다. 고향 사람들은 그저 예수님을 보고만 있었던 것.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느끼고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예수님을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면서 어떤 변화도 가져오지 못하게 된 것. 오히려 예수님을 쫓아내면서 자기들에게 다가온 은총 자체를 걷어차고 맙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마음에 찾아오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혹시 보고만 있으면서 주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은총을 나의 것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주님의 은총 속에 사는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거짓말하는 양치기 소년 이야기를 잘 알 것. 양을 치다가 지루해서 “늑대가 나타났다” 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정작 늑대가 나타나서 “늑대가 나타났다” 라고 외쳤을 때 아무도 도와주러 오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이 아이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계속된 거짓말에 이제 진정성을 느낄 수 없었고 결국 아무도 듣지 않는 힘없는 말이 되고 말았다. 진실한 말을 사용하는 것은 내 말에 힘을 불러들이는 것.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때로는 거짓된 말로 진정성을 없애고 결국 힘없는 말을 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주님의 말에는 힘이 있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바로 진실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주님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주님께서는 강조하셨다. 이는 우리 역시 진실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 우리의 기도에 진정성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내 욕심을 채우는 기도를 통해서는 주님께 실망만 드릴 뿐입니다. 우리들 마음 안에 하느님의 햇살이, 하느님의 생명의 기운이 가득한 성령 충만함으로 치유 받으시고, 또한 몸과 마음이 아픈 다른 이들을 돕는 치유의 은사도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스스로 일해서 얻는 빵만큼 맛있는 것은 없다.'' - S. 스마일즈 - |
💖성령봉사자 박재만 세례자요한 010 - 3878 - 6634
(수필가ㆍ전국성령쇄신봉사자협의회 말씀추천강사)
💖성령봉사자 류태숙 M.막달레나 010 - 6560 - 7354
(시인ㆍ수필가ㆍ꽃예술설화중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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