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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은혜/연중시기

6월16일 [연중 제11주일]한없는 풍요로움과 가능성, 확장성을 지닌 하느님 나라!---겨자씨와 같다

6월16일 [연중 제11주일]

복음: 마르 4,26-34

한없는 풍요로움과 가능성, 확장성을 지닌 하느님 나라!
 
 


그 누구도 다녀와 본 적이 없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너나 할 것 없이 이렇다 저렇다 떠들어댑니다.
저도 예외는 아니어서 떠들어 대다가도 가끔씩 걱정이 됩니다.
시각장애인이 코끼리 다리를 만져보며 코끼리의 생김새는 큰 기둥 같다고 표현하는 것처럼 전혀 아닌 이단을 선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저는 가끔 전례나 그레고리안 성가에 충실한 큰 수녀원 본원 미사, 그것도 부활 성야 미사 같은
큰 미사를 봉헌할 때 무릎을 탁! 치며, 아 그래 어쩌면 하느님 나라의 모습은 이렇지 않을까 상상해보곤 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모님을 비롯한 무수한 성인 성녀들, 천사들이 모두 좌정해 계시는 곳, 그리고 한쪽 일반석에는 먼저 떠난 사랑하는 사람들이 앉아있는 곳.

그럼 거기서는 뭘하는가? 마치 부활 성야 미사때처럼 제1독서, 화답성가, 제 2독서, 화답성가...알렐루야, 복음 낭독, 명강론, 성찬의 전례...등등 거룩한 예식이 끝도 없이 계속되는 곳.

그래서 지상에서 거룩한 전례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곳이지만, 돈이나 세상 좋은 것들에만 오르지 함몰되어 살아왔지 미사나 전례에는 완전 뒷전인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곳, 그 자체로 생지옥이요 연옥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아주 슬쩍 하느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설명해주십니다.
겨자씨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우세한 특징은 한없는 풍요로움과 확장성임을 강조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이 어떤 씨앗보다더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더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 4,31-32)

아마도 하느님 나라는 이런 곳일 것입니다.
쥐꼬리보다 작은 우리의 선행, 너무나 미흡해 보이는 우리의 기도, 우리가 베풀었던 손톱만한
이웃사랑이 깜짝 놀랄 만큼 풍성한 결실을 거두는 곳, 넉넉함과 풍요로움, 기쁨과 감사, 대견함과 환희로 가득 찬 곳이 하느님 나라일 것입니다.

세파에 닳고, 세월의 흐름에 퇴색되고, 갖가지 상처와 죄로 얼룩진 우리가 그 오랜 짐을 벗어버리고 새롭게 변화된 영혼으로 거듭나는 곳이 ‘하늘나라’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더이상 슬픔도, 눈물도, 상처도, 고통도 존재하지 않는 곳, 오로지 하느님의 풍요로운 자비와 은총만이 강물처럼 흘러넘치는 곳, 그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 앞에 우리의 모든 죄와 상처, 과오와 실수들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그곳이 하느님 나라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느님 나라, 언젠가, 먼 훗날에도 가능하겠지만, 지금 이 순간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땅 위에서도 실현되어야 하겠습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는 우리 인간이 하느님과 온전히 합일된 충만함 속에 사는 곳이라고 확신합니다.

서로의 가능성을 눈여겨보고 북돋와주는 우리 공동체, 서로의 부족함을 기꺼이 견뎌주는 우리 공동체, 서로의 성장을 위해 꾸준히 땀 흘리는 우리 각자의 현실이 또 다른 하느님 나라일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제목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6.17)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5,39)

믿음과 희망의 문제!

오늘 복음(마태5,38-42)은 '폭력을 포기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5,38-39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라는 이 율법은 '동태복수법', 곧 '피해를 입은 그만큼만 되돌려주는 법'을 의미합니다.
이는 피해를 입은 그 이상으로 되갚으려는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금하는 법입니다.

이것도 참으로 지키기가 어려운 말씀으로 다가오는데, 예수님께서는 이 율법을 능가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5,39ㄷ-52)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치열한 경쟁의 삶 속에서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려 하고, 무엇인가를 빼앗기기만 하면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데,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 세상 안에만 머물러 있고, 눈에 보이는 것들 안에만, 곧 죽음과 함께 사라질 것들 안에만 갇혀 있다면 실천 불가(不可)의 말씀으로 다가올 것이고, 더 나아가 예수님의 이 말씀 때문에 떠나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믿음이 있는 이들, 곧 우리를 살리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는 이들,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과 그것에 희망을 두고 있는 이들만이 실행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이 실행이 십자가 죽음을 의미하며,
예수님 십자가 죽음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신명 11,32)

마산교구 합천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