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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움 과 비움 /독서

사에 슈이치의 《조약돌 할아버지》청년은 '허리'다

청년은 '허리'다


청년이 요구한다면
먼 데건 마다치 않고 가겠습니다.
나라의 앞날에 대해 의논합시다. 청년이
아니면 신교육은 무의미하고, 신교육이 없으면
신사상이 생겨나지 않고, 신사상이 없으면 오늘날
새로운 세계에서 일을 못 합니다. 그렇지만
청년에게 새로운 사상이 있다 해도
실제로 일을 하면서 연구하지 않으면
빛을 발하지 못합니다.


- 사에 슈이치의 《조약돌 할아버지》 중에서 -


* 청년 속에 과거의 소년이,
그리고 미래의 노년이 들어 있습니다.
청년은 과거이며, 현재이며, 동시에 미래입니다.
청년은 '허리'와 같습니다. 허리가 무너지면 몸이
무너져 내립니다. 그러므로 미숙하면 끌어주고,
겉넘으면 다독이며 미래의 주역으로 길러내야
합니다. 설익은 채로 머물지 않게, 그러나
현실에 푹 절이지도 않게 지혜를 나누고
기백을 살려줘야 합니다. 그것이
어른들이 할 일입니다.

오늘도 많이 웃으세요.
 
 
일본 최초의 대규모 오염수 방류, 그에 맞선 의인 다나카 쇼조의 삶
''헌법 9조의 선각자", "일본 시민운동의 아버지", "동아시아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가이자 의인" 이러한 별칭은 모두 한 사람, 다나카 쇼조를 이르는 말입니다.

다나카 쇼조는 제1회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뒤 내리 6선을 하며 ‘선거의 신’으로 불린 정치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약한 것들 속으로 들어가 약한 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약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약한 것들을 어울러 그 힘으로 가장 강한 것과 맞서고자 했지요.
일흔셋의 나이로 쓰러진 쇼조가 지니고 다니던 허름한 주머니 속에는 일기장 세 권과 두터운 〈와타라세강 조사 보고서〉 초고, 〈신약성서〉 한 권, ‘일본제국헌법’과 ‘마태복음’을 하얀 실로 묶은 책, 다나카 집안에 대대로 내려온 휴대용 필기구 하나, 갓 딴 강 김과 휴지 몇 장, 그리고 조약돌 세 개가 들어 있었습니다.

다나카 쇼조라는 이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요? 조약돌 할아버지 쇼조의 삶을 우리 함께 들여다보지 않을래요?

저자(글) 사에 슈이치

佐江衆一 1934~2020
1934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2020년 가나가와현에서 세상을 떠났다.
1945년 도쿄대공습 때 집이 소실되면서 도치기현에 있는 외가에서 지내며 패전 소식을 들었다. 이후 고등학교 시절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중앙노동학원과 문화학원에서 공부했다. 카피라이터로 지내다, 1960년 단편소설 '등'으로 신초샤 동인잡지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이듬해인 1961년부터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오르지만 아쉽게도 수상에 이르지는 못했다. 이 무렵 그는 사회파 작가로서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가나가와현 유엔협회 대표단으로 1982년 뉴욕 유엔 반핵 회의에 참석하는 따위로 사회 참여 또한 게을리하지 않는다.
1990년 《북쪽의 새벽》이라는 작품으로 닛타 지로 문학상을 받았다. 1995년에는 늙은 부부가 여든일곱, 아흔둘에 이른 부모를 병구완하며 겪게 되는 일들을 실감나게 그린 자전적 소설 《아내에게(낙엽)》로 분카무라 뒤마고 문학상을 받는다. 이듬해인 1996년에는 《에도 장인》으로 나카야마 기슈 문학상을 수상했다.
사회 소설과 가족 소설, 시대 소설 뿐 아니라, 검도와 고무도 실력도 상당했던 터라 이를 살려 검호 소설을 쓰기도 했다. 영어를 배우겠다며 65세에 미국과 캐나다, 뉴질랜드로 단기 유학을 떠나는가 하면, 70세에는 증기여객선 토파즈호를 타고 세계일주에 나서, 《세계일주, 98일간의 배 여행》을 남겼다. 한편 태평양전쟁에 대한 소설도 여러 편 발표하며 만년까지 활발하게 활동했다.

번역 김송이

金松伊 1946~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도쿄 조선대학교를 졸업한 뒤, 모교인 오사카 조선고급학교에서 1996년까지 국어 교사로 일했고, 긴키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도 우리 말을 가르쳤다.
히로시마 피폭자인 나카자와 게이지의 만화 〈맨발의 겐〉시리즈를 우리말로 옮겨 펴내며 한국의 출판계와 인연을 맺기 시작해, 《낫짱이 간다》와 같은 어린이책을 썼고,《나의 유서 맨발의 겐》 《쇠나우 마을 발전소》와 같은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밥데기 죽데기》《문제아》같은 어린이책을 비롯해,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오월의 미소》《의자놀이》《대장금》처럼 도두뵈는 한국 출판물들을 번역해 일본에 소개하기도 했다.
2015년부터는 후쿠시마와 이웃한 이바라키 현으로 삶터를 옮겨, 후쿠시마의 실상을 자주 들여다보며 알리는 일에 힘쓰는 한편, 현립다카하기고등학교에서 한국어 강사로 일하며 조선인 강제 징용에 대한 취재와 집필 활동을 꾸준히 이어 가고 있다.

목차

  • 들어가며
    공해의 출발점에 서다
    1900년으로 거슬러 오르다

    1장 가로막힌 청원 행렬, 가와마타 사건
    1900년 2월 13일
    죽음을 각오하고 나서다
    피로 얼룩진 탄압
    이날의 쇼조
    쇼조의 고뇌

    2장 다나카 쇼조의 반생애
    나는 시모쓰케의 백성이다
    롯카쿠가 개혁 사건
    이와테의 감옥도 대학
    새로운 시대의 물결
    토지세 개정과 세이난 전쟁
    정치를 해야겠다고 마음먹다
    쇼조의 민권운동과 주세쓰샤
    언제나 민중의 처지에 서서
    미시마 현령과 맞서다

    3장 동아시아 고행의 시작, 광독을 만나다
    대일본제국헌법 발령
    제1회 총선거에서 국회의원이 되다
    아시오 구리 광산과 후루카와 이치베
    광독으로 오염된 와타라세강
    공공의 이익을 해치는 자
    첫 광독 질문
    농상무대신 무쓰의 답변

    4장 헌법을 지키는 투쟁
    제3회 의회에서 벌인 질문 연설
    헌법을 지키는 사람, 쇼조
    농민들이 화해 교섭에 응하다
    구리 중산을 부추긴 청일전쟁
    풍요롭던 벌판이 죽음의 땅으로
    운류지 광독 사무소와 정신적 계약
    에노모토 다케아키와 지식인들
    권력이라는 불가사의
    광독 예방공사 이전과 이후

    5장 망국 연설과 덴노 직소
    나라가 망해 가는 것을 알지 못하면
    기노시타 나오에를 만나다
    아내 가쓰에게 부친 편지
    의회정치에 환멸을 느끼다
    드높아 가는 여론에 기대어
    광독 문제 해결을 위한 중대한 결심
    직소를 결행하다
    하품 사건에 대한 진묘한 판결

    6장 러일전쟁과 야나카마을
    예순두 살에 기독교와 만나다
    광독 유수지안과 교묘한 선전
    러일전쟁, 바라는 바는 비전이다
    마을의 작은 악마들
    쇼조, 야나카마을로 들어가다
    러일전쟁 승리와 야나카마을
    쫓겨나는 사람들
    땅 한 평 갖기 운동

    7장 사라져 갈 마을에 천국을
    법에는 법으로 싸운다
    아시오 구리 광산 노동자들의 저항
    야나카마을을 강제로 부수다
    사람과 사람의 법
    천국에 이르는 지평
    잔류민이야말로 하나님

    8장 물은 곧 신과 같아서
    물은 정직하냐니
    마을을 부수는 것을 치수라고 떠들지 말라
    쇼조의 치수론과 문명론
    엣 야나카 주민들을 훗카이도로 이주시키다
    천국에 이르는 길을 닦는 일
    드넓은 헌법을 마련해야 한다
    쇼조의 죽음

    글을 마치며
    광독 피해 지역에 유골을 나눠 묻다
    야나카를 부수며 열린 새 물길
    국경을 넘어 환경 문제의 세계적 선구자로
    맺는 말

추천사

출판사 서평

“가장 약한 것들로 가장 강한 것과 맞선다”
: 다나카 쇼조의 감연하고 올곧은 생애를 말큰말큰하게 간추린 책

일본의 공영방송 NHK는 일본 역사를 41부작으로 정리하면서 그 가운데 한 부를 '일본 시민운동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의 이름에 할애했다. NHK는 또 다른 프로그램에서 다나카 쇼조가 아시오 광독 피해 주민들의 고통을 마주한 “그때 역사가 움직였다.”고도 평가했다.
다나카 쇼조는 19세기 후반 메이지 일본의 성장을 이끈 아시오 구리 광산에서 광독 오염수 유출이 계속되면서 광산 아래 와타라세강 기슭이 심각한 피해에 시달리자, 6선 국회의원 자리를 스스로 내려놓고, 광독으로 고통받는 이들 속으로 들어가, 1913년 돌아갈 때까지 와타라세강 기슭 야나카마을에서 이들과 함께 살며 싸워 나갔다. 이 책은 동아시아 근대사 속 한 거인의 장엄한 삶을, 청소년들 눈높이에 맞춰 친근하고 입체감 있게 그려 낸다.
일흔을 넘긴 나이로, 광독에 시달리던 와타라세강 줄기를 답사하느라 1800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오가면서도, 길가에 구르는 조그맣고 보잘것없는 돌멩이조차 함부로 대하지 않았던 이의 한 생애가 사에 슈이치의 다정한 문장에 실려 놀랍도록 생생하게 펼쳐진다.


지금 왜, 다나카 쇼조인가?

일흔하나가 되던 해인 1911년부터 다나카 쇼조는 '세계의 원주민'이라는 말로 자신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더 전에 드넓은 시야로 세계를 내다보며, 지구 시민의 한 사람으로 살고자 한, 지구 환경 문제의 진정한 선구자였다.
지구촌 전체가 가파른 성장을 위해 더욱 내달리고, 사사로운 눈앞의 조그만 이익을 위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슴없이 공익을 해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이때, 예민하고 풍부한 감수성으로 세상과 마주 서서, 마땅한 삶의 길을 더듬어 찾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한평생 올곧은 태도로 공공하는 삶을 일관한 한 사람의 일대기를 건넨다.
다나카 쇼조가 온 힘을 다해 싸웠던 아시오 광독 사건은 이후 동아시아에서 벌어진 수많은 국가 폭력과 공해 사건의 일종의 원본이다. 그 세부 내용에 소소한 변주가 존재할 뿐, 이윤에 눈이 먼 기업, 끈끈한 정경유착으로 인한 정부의 적극적 묵인과 방조, 양심을 저버린 전문가 집단, 과학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여론 조작과 호도, 위장된 해결로 인한 피해 확대, 진실 규명을 최대한 늦추고 책임을 조금이라도 축소시키기 위한 정부와 기업의 마지막 안간힘까지… 큰 얼거리는 마치 복사판처럼 대개 흡사했다. 다나카 쇼조가 돌아간 지 어느덧 1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쇼조의 분투와 외침이 그 아득한 시차를 훌쩍 넘어, 조금도 낡지 않은 채, 여전히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새롭게 또 다른 비극을 마주한 우리가 다른 길을 열 수 있으려면, 되풀이되는 참극을 막으려면, 우리는 풀뿌리 민중의 삶을, 자치의 뿌리인 마을을, 가없이 베풀어 주시는 자연의 은혜로움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곧 국익이고 문명이라고 여겼던 쇼조의 발자취에서 다시, 배워야 한다.
다나카 쇼조는 "조금이라도 사람 목숨에 해가 된다면/ 조금쯤은 괜찮다고 말하지 말라."고 말한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여전히 싸우고 있는 지금, 후쿠시마 핵발전소 오염수 태평양 방류로 분노와 시름이 더없이 깊어지는 지금, 가장 작고 약한 것들 속으로 들어가, 이들을 어울러 가장 크고 강한 것들과 싸워 나간 이가 남긴 꺼지지 않는 빛이 여기, 또렷이 우리 앞을 비추고 있다.

“소의 걸음은 발자국도 없이”
: 동아시아 근대사의 거인, 다나카 쇼조가 남긴 장엄한 궤적

큰비를 맞고 맞으며 커다란 짐을 끌고 가는
소의 걸음은 발자국도 없이
1913, 다나카 쇼조

일본 남성의 평균 수명이 마흔셋쯤이던 무렵 다나카 쇼조는 일흔셋까지 살았다. 그가 구의원을 시작으로 직업 정치가로 처음 나선 것은 서른여덟이 되던 해였다. 현의원을 거쳐, 쇼조는 나이 쉰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대개는 공적인 삶을 정리하고 차차 은거하기 시작하던 나이였다.
그런데 지역구가 있던 지역에서 동아시아 최초의 대규모 공해 사건인 '아시오 광독 사건'이 일어난다. 쇼조는 동료 의원들이 “지방의 자잘한 일”이라며 내팽개친 아시오 광독을 자신의 문제로 끌어안는다. 의회에서 그 매듭을 풀기 위해 온 힘을 다했고, 그것이 여의치 않자 6선 국회의원 자리를 던지고는 목숨을 건 채 메이지 덴노에게 직소를 함으로써 이 문제를 일본 전역에 공론화하기에 이른다. 덴노 직소는 20세기가 막 시작되던 1901년에 벌어진, 일본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고, 사건 당일 도쿄 전역에는 호외가 발행될 정도였다.
그러다 광독 피해 지역이 유수지 건설 계획으로 수몰 위기에 처하자 쇼조는 수몰 예정지인 야나카마을로 들어가 몇 남지 않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배우고 이들과 함께 싸우며 서슴없이 나아간다. 이때 그는 와타라세강의 물길을 강제로 틀어 광독 수해를 막겠다는 일본 정부의 결정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강 줄기 곳곳을 훑느라, 180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몸소 걷는다.
다나카 쇼조는 일흔셋의 나이로 와타라세강 답사를 나갔다가, 저항운동에 필요한 돈을 모으려 벗들의 집을 차례로 돌아 야나카 마을로 돌아오던 길에, 낯모르는 이의 집 툇마루에 쓰러져 와병하다 숨진다. 머리맡에 남겨진 유품은 늘 지니고 다니던 허름한 주머니에 든 일기장 세 권과 두터운 〈와타라세강 조사 보고서〉 초고, 〈신약성서〉 한 권, ‘일본제국헌법’과 ‘마태복음’을 하얀 실로 묶은 책, 다나카 집안에 대대로 내려온 휴대용 필기구 하나, 갓 딴 강 김과 휴지 몇 장, 그리고 조약돌 세 개 뿐이었다. “물질이 모자람을 애태우거나 마다하지 않”으며 “온몸으로 공공에 이바지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 끝내, 우물도 담도 남기지 않은 무소유의 삶이었다.
그의 생애는 불가능한 싸움과 끝없는 패배의 연속이었지만, 그가 지키고자 했던 가치, 그가 이루고자 했던 일들은 꺼지지 않는 등불로 우리 앞에 여전히 남아 있다.


‘공공의 이익을 해친다.’
: 공해라는 말의 시작, 아시오 광독 사건

아시오 광독 사건은 19세기 말, 동아시아 최대의 구리 광산이었던 아시오 광산에서 벌어졌다. 일본 최초로 벌어진 당대 최대의 공해 사건이었고, 이 때문에 '공해公害'라는 말을 일본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것도 바로 아시오 광독 피해자들이었다. '공공의 이익을 해친다.'는 뜻이었다.
1890년 12월 쇼조의 선거구인 아시카가군 아즈마마을에 사는 농민들이 임시 촌의회를 열어 도치기현 지사 앞으로 부친 결의문에서 "공익을 해치는" 구리 광산의 조업을 정지할 것을 요구했다. 이 말은 1873년 발포된 일본 최초의 광산법인 일본갱법에 나와 있는 말이기도 했다. 쇼조 또한 이해에 의회에서 이 조문을 들어 아시오 구리 광산 광업 정지를 일본 정부에 요구한다.
이후 일본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가 산업 사회로 빠르게 접어들었고, 산업 사회 폐해로 인한 피해도 닮아 갔다. "진일보한 기술 뒤에, 편리한 전자 기기 뒤에 가려진 슬픔의 다른 이름", '공해'를 이르며 한중일은 모두 같은 한자를 쓰고 있다. 이렇듯 동아시아 환경운동의 출발점에는 부인할 수 없이, 바로 이 아시오 광독 사건이 자리 잡고 있다.


누구나 쉽게, 일본 시민 불복종 운동과 환경운동의 출발점이 된
다나카 쇼조의 일대기를 단숨에 훑을 수 있는 한 권

작가 사에 슈이치는 도쿄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도쿄 공습 당시 본가가 파괴되면서 외가가 있는 도치기현으로 피난을 떠나 청소년기를 보냈다. 때때로 아버지와 와타라세 유수지에서 낚시를 하곤 했는데, 그러면서 다나카 쇼조에 대한 이야기며, 쇼조와 함께 싸웠던 일가붙이들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예순 즈음에 이와나미쇼텐으로부터 청소년들에게 다나카 쇼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책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는 매일같이 전차를 타고 와타라세 유수지를 지나 학교를 다니던 그 시절을 떠올린다. 그리고, 죽기까지 사람다움을 지키며 한 순간도 진보를 멈추지 않았던 사람. 그래서 동아시아 환경운동의 출발점으로 마침내 우뚝 선 사람. 다나카 쇼조의 공공하는 삶의 궤적을, 무한한 존경과 애정을 담아 이 한 권으로 압축해 써 내려간다.
청소년들을 깊이 배려한 듯, 사려 깊고 다정한 문장은 매우 쉽고 간결해서, 이웃 나라의 근대 초기 형편에 어두운 우리 독자들을 다나카 쇼조라는 낯선 거인의 삶 속으로 금세 잡아 이끈다. 길지 않은 책이지만, 한평생 자치와 인권, 생명과 평화의 가치를 위해 헌신한 다나카 쇼조의 올곧은 걸음을 어스름히 겉잡을 수 있다. 특히 쇼조의 다양한 면모 가운데, 시민 불복종 운동과 환경운동의 출발점으로서 걸출한 자취를 남긴 대목을 더욱 찬찬하고 깊이 있게 그렸다. 그 삶의 무게에 마냥 압도되지 않고, 균형과 현재성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쓴 대목도 눈길을 끈다.
굵직하게 뻗은 갈래만도 쉽사리 가늠하기 힘든 거인의 훌쩍한 삶을 단정한 글 속에 선연하게 펼쳐 놓은 노작가의 원숙함이, 또래 친구들과 이 이야기를 잇고자 애쓴 10대 화가의 사풋한 그림을 만나, '지금 여기'의 독자들을 다나카 쇼조의 세계로 단숨에 데려다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