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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은혜/부활

부활 제6주간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진리의 영이신 성령 안에서,참되게 믿고 희망하고 사랑합시다!

♣복음말씀의 향기♣ No3490
5월14일[부활 제6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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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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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ydaCsNRUl0E 
(한승주 스테파노 신부님 집전)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100009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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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현존 방식으로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우리 모두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하늘 아래 펼쳐지는 세상만사 모든 것은 유한하며 속절없습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는 내내 뭔가 특별한 것을 기대하지만 특별할 것도 없습니다. 어제와 똑같은 하루가 끝도 없이 지루하게 반복되며, 언젠가 맞이하게 될 끝은 너무나도 허망하고 부질없습니다.

한때 목숨바칠 정도로 중요하게 여겨지던 가치나 이데올로기도, 영원불변할 것 같았던 불같은 사랑도, 매력적이고 찬란하게만 비춰지던 선망의 대상들도, 지극히 한시적입니다. 다 지나갑니다. 다 떠나갑니다. 다 우리 눈앞에서 사라집니다. 인간적인 것들, 세상적인 가치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특징인가 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토록 추구하고 목말라하는 영원성, 불변성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요한 복음 14장 16~17절)

10년, 30년, 50년이 아닙니다. ‘영원히!’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곧 떠나 가시지만 당신과 하나이신 분, 당신과 일심동체이신 분, 보호자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실 터인데, 그분께서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임을 선포하십니다.

때로 우리네 인간 존재라는 것 ‘밤에 우는 갓난아기’와 같습니다. 어깨에 힘을 주고 내가 누군 줄 알아? 하고 외치지만 실상 우리는 말도 할 줄 모르고 그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우는 것뿐인 갓난아기와 같습니다.

어찌할 바 몰라 마냥 울고 있는 우리를 위해, 때로 어머니처럼 우리 곁에 앉아 계시며, 우리를 내려다보시며, 우리를 보살펴주시며, 우리를 양육해주시는 분이 바로 보호자 성령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대신해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지켜주시기 위해 파견되신 분, 곧 진리의 성령이십니다.

누차 강조하신 바지만 조만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현존 방식으로 제자들 안에 사실 것입니다. 당신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거룩한 성찬례 속에서 영원히 살아계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실 성령의 도움으로 인해 제자들은 곧 영적인 눈을 뜨게 될 것이고,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를 자신들 삶의 현장에서 생생하게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사이에 머무시는 동안에 제자들은 아무래도 스승님께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떠나신 후에는 또 다른 삶의 방식을 터득해야 마땅합니다.

제자들은 스스로 서기 위해서 각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고, 제자들끼리 더 사랑하고 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무엇에 앞서 예수님을 떠나보냄으로써 또 다른 예수님이자, 예수님의 분신과도 같은 성령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뿐만 아니라 또 다른 특별한 선물을 주실 것인데, 그것은 평화입니다. 그분이 주실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전적으로 다릅니다.

로마 제국은 군사력으로 평화를 가져왔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각자가 충만하게 살고, 서로 사랑함으로써 함께 성장하고, 서로 조화를 이루는 은혜로운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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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3J58UUcYgp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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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려 할 때 벌어지는 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다음 그 의미를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곧 당신이 우리 발을 씻어주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의 발을 씻어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라고 하시고, 그러면 아버지께서 “진리의 영”(요한 14,17)을 보내주신다고 하십니다. 이는 마치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사랑하여 방문하려고 하시니 성령으로 아드님을 잉태하게 하셨다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하느님은 성령님을 사랑하려는 사람에게 부어주십니다. 그렇게 되면 아버지께서 아드님 안에 계시고 아드님이 아버지 안에 계신 것처럼,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게 됩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을 방문할 때 당신의 인사말과 함께 성령께서 엘리사벳에게 가는 것을 보시고 하느님께 마니피캇을 부르며 찬미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는 방식입니다. 

하느님은 초월자이십니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인간이 자신을 초월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의 수준에 있으면서 천상의 분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성체를 영할 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제가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하기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분께서 그러한 도움을 주실 수 있으셨을까요?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에 계속 거름을 줄 이유는 없습니다. 성령님은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 가지에 오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잉태되시지 않아 하느님의 계시를 맛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원할 때, 초월자의 도움을 원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도움이 나오는 것을 볼 때 그분을 뵈옵는 것과 같이 됩니다. 이는 마치 공포영화에서 인형이 움직이는 신기한 장면을 목격했는데 인형 안에 배터리가 없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의 그런 느낌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만나고자 하는 초월자는 사랑이신 하느님입니다. 가장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려고 할 때 사랑이신 하느님이 우리를 통해 드러나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게 됩니다. 

노숙인들의 친구 김하종 신부가 『사랑이 밥 먹여 준다』라는 책에서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었던 순간’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1992년 맑고 화창한 계절의 어느 날 당시 30대 초반의 신부님은 성남 상대원동과 은행동에서 가난한 이웃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도움을 주는 빈민 사목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생활이 어려운 장애인 한 분이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어 종이에 적힌 주소를 보며 집에 찾아갔습니다. 도착한 곳은 아주 오래되고 낡은 집이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창문도 없는 어두운 방에 흐릿한 전등 하나만이 보였습니다. 너무 어둡고 덥고 냄새가 나서 몇 초 동안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방바닥에 누워 있는 오십 대 아저씨를 발견했습니다. 아저씨는 이십 대 시절, 사고로 크게 다쳐 하반신이 마비되어 그때부터 30여 년을 이 지하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식사는 이웃 사람들이 음식을 가져다주면 먹고 아니면 굶는다고 했습니다. 

신부님이 “아저씨,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고 했더니, 방을 정리해달라고 했습니다. 방에는 화장실이 따로 없었고 요강을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냄새가 너무 심해 우선 요강부터 닦았습니다. 방 청소와 설거지를 한 후 다시 바닥에 앉았습니다. 그때 갑자기 아저씨를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가 안아드려도 될까요?”라고 물었고 아저씨는 흔쾌히 “네 신부님, 좋습니다”라고 응답했습니다. 아저씨를 안는 순간 코를 찌르는 독한 냄새에 구역질이 났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동시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이 신부님 몸에 스며드는 것 같았습니다. 시간의 흐름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그 순간, 어떤 음성이 또렷하게 들렸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려고 노력해 봅시다. 사실 나의 힘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지만, 그 일을 하려고 할 때 용서의 하느님, 기쁨의 하느님, 행복의 하느님, 생명의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걷기를 청했습니다. 그럴 때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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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이어령 선생님의 글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00 矯導所(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죄수들에게 물었답니다. "세상에서 누가 가장 보고 싶냐?"고 그랬더니 두 개의 대답이 가장 많았답니다. "엄마"와 "어머니"라는 답이. 왜 누구는 '엄마'라고 했고, 왜 누구는 '어머니'라고 했을까요? 둘 다 똑같은 대상인데. 그래서 또 물었답니다. 엄마와 어머니의 차이가 무엇인지? 그랬더니, 나중에 한 죄수가 이렇게 편지를 보내왔답니다. "엄마는 내가 엄마보다 작았을 때 부르고, 어머니는 내가 어머니보다 컸을 때 부릅니다!" 즉, 엄마라고 부를 때는 자신이 철이 덜 들었을 때였고, 철이 들어서는 어머니라고 부른다는 겁니다. 그런데, 첫 면회 때 어머니가 오시자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를 부여안고  "엄마~!" 하고 불렀다고 합니다. 세상 어디에도 엄마와 어머니의 정의를 명확하게 한 곳은 없겠지만,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불가의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에 따르면, 엄마는 우리를 낳을 때 3말8되의 응혈(凝血)을 흘리시고, 낳아서는 8섬 4말의 혈유(血乳) 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엄마는 주민등록증 외에 또 하나의 증을 가지고 계십니다. '骨多孔症'” 오늘 Mother's Day를 지내면서 어머니의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등급에 익숙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비행기도 등급이 있고, 기차에도 등급이 있습니다. 등급의 기준은 금액에 따라서 정해집니다. 우리가 먹은 음식에도 등급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즐겨먹는 ‘한우’에도 등급이 있습니다. 등급의 기준은 금액에 따라 정해집니다. 등급은 아이들이 학교에 입학하면서 시작됩니다. 등급의 기준은 성적입니다. 사는 장소에 따라서도 등급이 정해집니다. 아파트는 평수에 따라서 등급이 정해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입는 옷도 등급이 있습니다. 등급의 기준은 상표에 있지만 역시 금액에 따라서 정해집니다. 우리는 ‘의식주’도 등급이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등급이 있다는 것은 장점이 있습니다. 경쟁을 통해서 문화와 문명이 발전하였기 때문입니다. 더 열심히 일 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되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가 숭고한 이상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할 수 없었던 것은 일당 독재에 의한 부정과 부패도 있었지만 경쟁이 없는 구조였기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저 역시도 높은 등급에 있는 사람이 부럽기도 했고, 그런 곳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세상의 등급은 그 기준이 ‘재물, 명예, 권력’에 있습니다.

신앙에도 등급이 있을까요? 저는 신앙에도 등급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열매를 맺는 등급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어왔지만 세상의 유혹에 빠져서 자라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길가에 떨어진 씨앗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어왔지만 고통과 갈등 때문에 자라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자갈밭에 떨어진 씨앗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어왔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자라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가시밭에 떨어진 씨앗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어와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경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기름진 땅에 떨어진 씨앗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처녀의 비유’에서도 등급을 말씀하셨습니다. 등잔에 기름을 잘 준비한 처녀들은 신랑의 혼인잔치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등잔에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처녀들은 혼인잔치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달란트의 비유‘에서도 등급을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이 맡겨준 달란트를 잘 관리했던 사람은 더 많은 달란트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주인이 맡겨준 달란트를 소홀히 했던 사람은 가진 달란트도 빼앗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준은 세상의 기준과는 달랐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한다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예수님 등급의 기준은 ‘회개’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되찾은 동전, 되찾은 양, 돌아온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회개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좋은 대접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선한 사람 아흔아홉도 좋지만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하늘나라에서는 더욱 기뻐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등급의 기준은 ‘회개와 실천’에 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회개는 하지만 실천은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꾸짖었습니다. 제자들에게도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회개는 받아들이지만 그들의 위선은 배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한 것을 실천으로 옮겼던 자캐오를 칭찬하셨습니다. 자캐오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주님!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제가 빚진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은 구원받았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등급의 기준은 ‘순명’에 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요셉 성인도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하였지만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최고의 등급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한다면, 회개한 것을 삶을 통해서 실천할 수 있다면 이제 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살 수 있다면 우리는 모두 참된 평화, 참된 행복, 참된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 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목마른 사람은 오너라. 원하는 사람은 생명수를 거저 받아라. 그렇다. 내가 곧 간다.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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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4,15-21: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에는 성령에 관한 주제와 성령강림을 예고하고 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친밀한 사랑에 참여함으로써 체험할 수 있는 기쁨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오늘 복음은 사랑의 주제로 시작하여 사랑의 주제로 끝나고 있다.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당신이 떠나시는 것에 대해 걱정할(14,1) 필요가 없다고 하시며, 위로를 주시고 계시다. 즉 그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당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겠다고 하셨다(21절 참조).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행동을 통하여 입증되는 참된 것이어야 한다. 즉 계명을 지킴으로써이다. 그분의 계명이 실현됨으로써 바로 그분이 현존하시며, 그분이 더욱 친밀하게 드러나고, 그분이 계신 곳에 ‘아버지’도 함께 계시기 때문에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21절). 그러므로 하느님과 그리스도께 가까이 있는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더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분들을 더 사랑하고, 그분들의 뜻을 즉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들이다. 이것을 우리가 너무 소홀히 해서, 그분과 신비로운 만남을 못 하고 있지 않은가? 
 
예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 외에 또한 성령의 선물을 약속하신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16절). 그러나 세상은 그 성령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다.”(17절). 요한복음에서 보다(theorèin)는 동사의 의미가 현상을 넘어 하느님의 현존 표지를 알아보는 의미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세상은 이러한 자세를 갖고 있지 못하다.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과 같다. 빛을 보려면 먼저 눈이 치유를 받아야 하듯이, 세상이 성령을 받아들이려면 세상이기를 그쳐야 한다. 빛과 어둠의 대결에 대한 사건이 요한복음 전체를 덮고 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5). 
 
성령을 협조자(Paraclito)라고 한다. 이는 요한복음 사가 고유의 용어이다(14,16.26; 15,26; 16,7 참조). 본래는 변호사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신앙인들을 도와주는 기능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기운을 돋우어 주다, 협조하다의 의미가 생기게 된다. 그러기에 성령은 우리가 어려움에 부딪히게 될 때, 위로해주고 보증해 주시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성령은 그리스도의 일을 계속하는 협조자이다. 지금까지는 예수께서 친히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맡기신 사람들을 지켜주셨고(17,12) 그분이 떠나가시면 성령께서 그 양 떼를 보호해주실 것이다. 이제 성령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 충실할 수 있도록 내면으로부터 그들을 도와주고 위로해주신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이 진리를 터득하도록 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진리를 더 잘 깨달을 수 있게 한다. 사도들 역시 성령이 임하신 다음에 완전히 깨닫게 되었다. 오늘의 교회도 성령의 빛을 충만히 받아들여야만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된다. 그 진리는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진리이다. 즉 성령은 그리스도를 더 잘 인식시키고 더욱 강하게 그리스도와 더욱 친밀해진 새로운 현존을 생활화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18절) 하신다. “내가 살아있고 너희도 살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19절).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신앙으로 느끼는 것은 실제적 접촉과 같이 강한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단순히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항상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20절). 이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개입이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이루어지고 있다. 믿는 이에게는 하루하루가 모두 그날일 수 있으며 또한 그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부활 시기를 지내는 우리는 이제 진정, 세상에 희망을 전할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써 가능하다. 그래서 매 순간 우리의 삶이 부활을 체험하는 삶이 됨으로써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 신앙인들에게 바라시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신자들에게 어떤 박해에도 굴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한다. 그 시련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진정 하느님께 바칠 수 있는 가장 참된 예배이며 진실한 찬미의 행위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1베드 3,18). 이 옛 신앙고백에서 파스카의 배경이 드러나고 있다. 그 성령은 우리의 부활도 이루어 주실 것이다(참조: 로마 8,11). 이 육적인 죽음과 영적인 삶 사이의 체험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매일매일 자신 안에서 되풀이하는 부활 체험이다. 이것이 그가 세상에 설명해 주어야 할 ‘희망’의 신비이다. 사랑은 적개심이나 중상모략보다 훨씬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에게 그의 삶을 통해 신앙인들이 지닌 “희망”(1베드 3,15)에 대해서 답을 해 주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생활 전체로써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죽여 죽음의 어둠 속에 영원히 매장하려 했지만, 그분은 그 죽음의 감옥을 막았던 바윗돌을 굴려내셨다.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서부터 희망의 선포자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셨듯이 하느님과 형제들에 대한 봉사를 위해 자신을 무상으로 내어 주는 사랑의 힘에 맡길 수 있다면 불의, 부정, 폭력, 고문 그리고 죽음까지 모든 것이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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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15-21)

여기서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부활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고아’ 라는 말은, 부모가 없는 자녀들, 스승이 없는 제자들, 목자가 없는 양들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모두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뒤부터 부활하셔서 제자들(신자들)에게 나타나시기  전까지 제자들(신자들)은 실제로 고아 같은 처지였습니다.

그들은 슬픔과 절망에 빠져 있었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또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간은 짧았고,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그런 막막한 처지에서 금방 벗어났습니다.

이 말씀은, 뒤의 16장에 있는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이 말씀들에서 ‘근심’이라는 말은 ‘슬픔’으로 바꿔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신앙인들의 ‘큰 슬픔’을 ‘큰 기쁨’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두려움을 행복으로 바꿔 주신 일입니다.

<박해자들의 경우에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때에 눈엣가시 같은 예수님을 제거했다고 좋아했겠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에는 두려워했을 것입니다.(사도 2,43)

예수님께서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20)라는 말씀을 하신 일이 있는데, 온 세상 사람들에게 ‘큰 기쁨’이 되는 은총이 주어졌는데도 그 은총을 받아들이지 않고 기뻐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기쁨을 거부하고 절망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고, 그 일 자체가 곧 이미 심판을 받은 것과 같은 일입니다. 반대로, 그 ‘큰 기쁨’에 동참해서 함께 기뻐하는 것은구원에 동참하는 일이 됩니다.>

누구나 살다보면 몹시 외로워질 때가 있습니다. 마치 우주 한가운데에서 혼자만 있는 것 같은 심정이 될 때, 그때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를 외면하더라도 주님께서는 변함없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지켜 주신다.”라는믿음이 있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옆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내미는 도움의 손길을 밀어내지 말아야 합니다. 그 손길이 사람들을 통해서 주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주님의 사랑’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외롭게 할 때가 많지만, 반대로 사람이 사람을 그 외로움에서 건져 줍니다.>

또 반대로, 누군가가 몹시 외로운 처지에 있음을 본다면, 그 사람을 외면하지 말고 기꺼이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어야 하고,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직접 그를 도와주실 때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에 주님께서는 나를 통해서 일하시기를 바라십니다.

내가 바치는 기도와 내가 실천하는 사랑이 곧 그 외로운 사람을 지켜 주는 주님의 보호와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고아 같은 처지를 혼자서는 극복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하는데, 함께 사는 방법이 바로 ‘사랑’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6-18)

여기서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는, “사랑한다고 말만 하지 말고”입니다.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라는 말은, “진짜 사랑은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랑이다.”라는 뜻입니다.

<‘보호자’라는 말의 그리스어 원문 단어가 무엇인지 아는 것도, 사랑과 계명의 관계가 무엇인지 아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신앙이든지 사랑이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이론이 아니라 삶이고 실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일인데, 우리는 그 사랑을 우리의 ‘삶의 실천’으로 증명하고 증언해야 합니다. 사랑 실천 없는 복음 선포는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1코린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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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보호자”로 옮긴 그리스 말 ‘파라클레토스’는 요한계 문헌의 고유한 낱말로, ‘곁에 있도록(보호나 변호를 위하여) 부름받은 이’라는 뜻입니다. ‘파라클레토스’는 요한의 서간에서는 우리 죄를 변호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1요한 2,1 참조), 요한 복음서에서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일컫습니다.(14,16.26; 15,26; 16,7 참조) 곧 예수님과 성령께서는 한 분이신 우리의 보호자 ‘파라클레토스’이십니다.

이제 아버지께 가시는 예수님께서 머지않아 제자들에게 보내시겠다고 하신 “다른 보호자”는 성령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다시 돌아오시어 영원히 함께 사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보거나 만질 수는 없지만 그분을 잃은 “고아”가 아닌 것은,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지금도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신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시고, 늘 희망을 품고 선하게 살라고 권고합니다.(제2독서 참조)

오늘 복음의 시작과 끝에서 ‘주님 사랑’과 ‘계명 준수’의 상호적 인과 관계가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면 계명을 지키게 되고, 계명을 지키면 당신을 더 사랑하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1독서는 신앙과 동떨어져 이방인처럼 살던 사마리아인들이 주님의 복음과 계명을 받아들였을 때 넘치는 기쁨을 누렸고, 사도들로 말미암아 성령을 충만히 받게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성령 안에서 사는 기쁨을 잊어버리면, 세상이 주는 안정과 평안에만 더 집착하게 됩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려고 행동하는 이라야 부활하신 주님을 성령 안에서 매 순간 만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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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우연히 읽게 된 진은영 시인의 시 <청혼>의 일부이자 시집의 제목입니다.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마음이 참 따뜻해졌어요. "오래된 거리"가 주는 의미가 온전히 느껴졌기 때문이지요.

저의 오래된 거리를 떠울려봅니다. 친구들과 함께 뛰놀던 어린 시절의 거리. 추운 새벽 복사를 서기 위해 어머니의 손을 꼬옥 잡고 걷던 거리. 유학 시절 공부에 지쳐 터벅터벅 걸어가던 거리. 언제 다시 찾아가도 저를 따뜻하게 반겨줄 것 같은 오래된 거리랍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저를 사랑해 주는 가장 오래된 거리는 예수님이에요. 저의 허물도 부족함도 알고 계시지만 단아한 불빛을 밝히며 실제로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이지요.

오늘 복음은 최후의 만찬 때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며 남기신 예수님의 마지막 약속들이에요. 그중 첫 번째는 '성령 파견에 관한 약속'이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 제자들이 필요한 모는 것을 알게 해 주실 것이고. 당신의 말씀도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두 번째는 '제자들에게 다시 돌아오리라는 약속이에요. 비록 세상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예수님을 계속해서 보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약속들은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지치지 않는 사랑을 의미한답니다.

그런데 좀 의아하지 않나요? 성경의 제자들은 게으르고 예수님을 의심하며, 심지어 십자가 수난 앞에서 거짓말까지 동원해 당신을 모르는 척까지 하는데도 이렇게 소중한 약속들을 해 주신다니요.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에요. 그러므로 그들이 회개할 것이라는 확신을 하고 계셨던 거지요. 결국 예수님께 중요한 것은 개인의 허물이나 한계가 아닌. 회개하고 돌아오는 모습이랍니다. 이렇게 주님은 마치 오래된 거리처림 제자들을 기다리시며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자신을 바라보면 실망스러울 때가 있지요. 때로 우리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누군가를 미워하기도 하며 개인의 욕심을 추구하곤 하니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원망스러울 때도 있고요.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보이셨던 예수님의 시선을 기억하면 우리는 다시금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됩니다. 다만 명심할 것은 이러한 은총과 사랑이 거저 주어지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오래된 거리를 찾아가 추억을 확인하고 싶다면 그곳으로 돌아가야 하듯, 우리는 다시 주님께로 돌아가 사랑을 고백해야 해요. 바로 그때 주님은 우리를 다시금 품에 안아주실 것입니다. 그곳에는 주님과 나의 추억이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오래된 거리처럼 나를 사랑해 주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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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주보》 말씀의 향기
[춘천교구 김병운 야고보 신부님]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오늘 복음은 한 최후의 부분입니다. 만찬 때에 예수님계서 제자들에게 이르신 말씀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이 식사를 마치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잡히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제 되니. 예수님께서 머지않아 홀로 남을 제자들이 얼마나 걱정되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에게 한 가지를 당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오놀 복음으로 들은 말씀을 하시기 조금 전에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바로 이 계명을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계명은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지 않게 합니다.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 (탈출 19.5ㄱ) 따라서 계명을 지키면 예수님을 볼 수 없게 되더라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과 가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명을 지키기가 정말 쉽지 않음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계명을 지키고 싶고. 계명을 지쳤을 때의 뿌듯함과 기쁨도 아는데, 세상의 시선과 기준에 영향을 너무 많이 받기 때문에 선뜻 계명을 선택하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과 우리에게 한 가지롤 약속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바로 성령을 보내주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진리의 영이신 그분을 세상은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머무르시는 우리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세상과 달리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세상이 돌아가셨다고 생각하는 예수님께서는 사실 죽음을 이기고 살아 계십니다. 이는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영원히 삶을 뜻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있고. 또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깨닫습니다.

성령을 모시면 그 전과 완전히 다른 차원을 살아가게 됩니다. 부활을 완전히 믿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때 세상의 무게에 짓눌려 계명을 지키기 어렵던 문제가 해결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삶의 지향점이 달라지기에 기쁘게 계명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우리 안에 있는 성령께 집중하고,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주도권을 내어 드립시다. 또 그런 마음으로 전례적으로도 성령을 기다립시다. 성령을 사랑하며 성령의 도움으로 계명을 지킴으로써 에수님께 사랑을 드러내는 우리를 예수님께서는 디육 사랑하시며 당신을 드러내 보여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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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주보》 주일의 말씀
[대구대교구 권병일 요한 신부님]

<신앙 공동체의 근원이신 성령>

개별적 인간은 공동의 목표를 완성하기 위해 공동체를 이룹니다. 예컨대 교육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서 학교가, 치료를 위해서 병원이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이 콩동체의 구성원들이 목표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거나 그 목표를 잃어버린다면 더 이상 그 공동체는 존속할 수 없게 됩니다. 학교가 교육의 장이 되지 않기나, 병원이 더 이상 환자를 낫게 할 수 없다면 그곳은 더 이상 학교도, 병원도 아니게 됩니다.

그렇다면 교회 공동체는 어떠한 목표로 만들어진 것일까요? 교회는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부활이라는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는 구원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을 따라 살아가면, 우리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드러내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인 우리는 각자 삶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실히 살아갑니다.

하지만 최근 방송 미디어에 비친 신앙인들의 보습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신이다'라는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드러난 여러 사이비 종교의 폐해들, 드라마에서 마치 악의 근원인 것처럼 그려지는 교회의 보습은 적어도 우리의 목표인 구원과는 멀어 보입니다. 이는 곧 우리가 보여주는 삶의 모범이 더 이상 세상 사람들에게 긍정과 희망의 메시지를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공동체가 목표를 잃어버리면 그 공동체는 존속할 수 없다는 진리는 신앙 공동체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약속하십니다. 우리를 지켜 주시는 보호자를,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진리의 영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 신앙 공동체가 여타의 공동체와 다른 것은 우리의 목표를 깨우쳐주고 이끌어 주는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성령을 따라서 우리 신앙인은 옳은 것을 판단할 수 있고, 선한 것을 선택할 수 있으며,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가게 됩니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우리 신앙의 근원이 되시고 우리가 부활이라는 목표를 잊지 않도록, 우리 삶에서 신앙의 가치를 용기 있게 실천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 신앙을 깎아내리는 사람들 속에서도 우리는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데 지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성령께서 함께하시고, 그분께서는 우리를 끊임없이 신앙의 삶으로 종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따라 신앙의 삶을 굳건히 살아가는 신앙인, 세상 사람들에게 보범이 되는 신앙인이 되도록 다 함께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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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부산》 강론
[부산교구 오창일 요아킴 신부님]

<성령은 사랑입니다>

주님 승천과 성령 강림율 앞두고 있는 주일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수난을 앞두고 세족레를 통해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긴 이별의 담화로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라는 새 계명과 성령 파견'이 주된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제자들에겐 당혹스러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부활 사건 이후 놀랍게도 제자들은 기억하게 하시는 성령의 도움(요한 14,26 참조)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하나 기억해 냈습니다. 성령에 의한 제자들의 기억의 전달이 복음을 기록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이해와 체험은 우리 신앙에 있어서 
필수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보호자, '진리의 성령'을 약속해 주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요한 14,16) 그분이 곧 '진리의 영'(요한 14.17)이라고 알려주십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그 사실 자체를 잘 모르는 이도 있습니다. 더 확실하게 성령 체험을 얻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우리의 무관심이 결국 성령을 멀리 계신 분으로 만들고 맙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불같이 뜨거운 체험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이 함께 매일 살아가듯이 성령께서도 그냥 그렇게 우리 안에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성령을 체험하는 방법에 대해 알려 줍니다. 제자들이 성령 안에서 기억해 낸 것은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 안에서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성령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성령은 사랑을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이 모든 이름-보호자, 협조자, 동반자, 함께 있는 자-은 '사랑'이라는 말로 대치될 수 있습니다. 결국 성령과 사랑은 같은 말입니다.

사랑은 있는 그대로 사람을 사람으로 불 수 있게 하는 마음의 눈이 됩니다. 그리고 이 눈율 통해서 우리는 더 넓은 마음을 갖게 됩니다. 주님께서 사랑하라는 이유는 남을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마음을 더욱더 크게 하는 은총을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다짐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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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서춘배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사랑은 세상에 대한 책무>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 

사제는 독신입니다. 그래서 힘든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이라도 둘이 하나 되어 사는 게 더 힘들 걸.” 어느 노사제의 말입니다.

독신생활이나 결혼생활이나 제대로 살려 하면 어렵긴 마찬가집니다. 사실 사람은 혼자 살지 못합니다. 무인도에 산다 해도 따지고 보면 혼자 사는 게 아닙니다. 먹고 쓰고 입고 마시는 것,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고 그럴듯한 좋은 생각이라도 누구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익명의 수많은 이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사는 겁니다. 청구서는 받지 않았지만 갚아야 할 책무입니다. 사회적 책임일 수도 있지만, 한 인간으로서 피조물로서 갚아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주님은 온 인류공동체를 하나로 보시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갚아야 할 책무를 상기시키십니다.

1. 성자와 성부의 온전한 관여(關與)
심리학자, 스텐버그(Sternberg)는 사랑에는 세 요소가 있다고 합니다. 열정과 친밀감 그리고 관여입니다. 처음 사랑하기 시작할 땐 열정이 치솟고, 시간이 지나면서 친밀감이 높아집니다. 생소하게 여겨지는 요소는 관여(關與)입니다. 헌신(獻身)이라고 번역하기도 하지만, 관여로 보는 것도 재밌습니다.

상대방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요구하고 참견하는 겁니다. 헌신을 전제로 한 관여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사랑하라. 그리고 네 맘대로 하라”고 했는데 사랑에는 관여가 뒤따른다는 말로 들립니다. 이 관여는 사랑 초기에는 낮지만, 점차 높아지고 결혼 등을 통해 높아집니다. 부부는 서로의 삶에 깊이 관여하면서 나중엔 닮게 되나 봅니다.

성자와 성부는 서로의 삶에 관여하여 닮다 못해 온전히 하나가 되십니다. 성자는 성부의 염원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성부 역시 당신의 모든 것을 성자에게 넘기십니다. 성자는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는 필립보에게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요한 14,11)라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첫마디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15절)입니다. 사랑한다면 내 말(계명)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상거래 식 요구가 아니라 역시 사랑에 따른 관여(關與)입니다.

2. 예수님 방식의 사랑의 새 계명 
사랑은 해도 좋고 안 해도 그만인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꼭 해야 하는, 그래서 계명입니다. 사실 사랑만큼 흔한 주제는 없습니다. 우리 삶은 온통 이런저런 사랑 얘기입니다. 주님은 이 사랑에 새 계명이라 이름 붙이십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보여준 사랑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다음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요한 13,14)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결론처럼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고 하십니다.

이렇게 들립니다. ‘내 사랑에 응답하려거든 내 쪽이 아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고 내 양들을 돌보는 것이다.(요한 21장 참조) 배신자, 원수까지 사랑해야 하고 끝 간 데 없이 사랑해야 한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보여라.’(요한 13,33 참조)

이것이 당신 방식에 따른 새로운 사랑의 계명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랑의 시작은 감미로울 수 있으나 마무리는 쉽지 않습니다. 사랑은 그 속성상 고통을 감내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언제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마무리라면 마무리입니다.

새 계명, 사랑을 위해 주님은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성령께선 우리를 성부와 성자의 사랑의 세계로 접속(access)시켜 줍니다.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고 주님의 그 사랑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삼위일체 사랑의 그 신비로 온 세상을 덮고자 하십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요 깨달음의 영입니다. 또 다른 보호자 하느님이십니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 14,20)

그날은 바로 성령이 임하는 그날입니다. “오소서 성령이시여! 주님의 그 사랑에 접속되어 끝 간데없는 사랑으로 나아가 사랑의 책무를 다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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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오남한 루카 신부님]

“사도들이 안수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사도행전 8,17)

피부가 트면 무엇을 바르죠? 로션. 허면 우리네 마음이, 영이 트면 무엇을 발라야 하겠습니까? 성령을 바르십시오. 성령을 청하란 얘기입니다. 성령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고, 만질 수 없는 것을 느끼게 하며,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합니다. 영원히 살도록 하늘을 꿈꾸게 하고, 당장 죽을 것 같은 것을 살게 하는 힘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이제 당신의 제자들을 세상에 남겨 두고 떠나려 하니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이제 스승이 떠나면 제자들은 오합지졸이 될 것이고, 교회는 풍비박산이 날 것입니다. 당신의 업적도 말씀도 이제 끝장이 날 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도 없고 확신도 없는 제자들에게 보호자이신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 다른 협조자를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라고.

성령은 그 자체로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의 능력이 시기에 약한 제자들을 강하게 해주셨으며 또 어리석은 그들을 지혜롭게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성령은 제자들이 어떻게 선교하며, 교회를 성장시킬 것인지를 직접 도와주셨습니다. 사실 성령과 함께라면 안 되는 것이 없고 또 못할 일도 없습니다.

믿는 이들은 그래서 성령의 은혜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늘상 성령을 청해야 하며 희망해야 합니다. 믿는 이들 안에 성령이 함께하지 않는다면 그는 실로 기름 없는 자동차요, 알맹이 없는 빈 깡통과도 같이 생기 없고 무기력한 사람이 됩니다.

성령을 받으면 제자들처럼 부족한 사람들도 위대한 인생으로 빛나게 됩니다. 아무리 무지하고 천한 사람도 하느님의 능력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 됩니다. 그것은 실로 하느님의 선물이면서 동시에 위대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그릇이 깨끗해야 은혜의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가 필요하고(사도 2,38), 또한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요한 20,23).

더러운 내 몸이 썩을 것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에서는 하느님께서 아무리 소나기 같은 은혜를 내려주신다 해도 담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네 마음의 문의 손잡이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기에, 내 손으로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젖혀야만 진리의 영께서 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시면 우리는 달라집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성령을 받고 새사람이 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믿음으로 가득 찬 사람, 확신에 힘이 넘치는 사람,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를 보호하고 협력하러 오실 분이기에 보호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어서 불러주기를 기다리십니다. 마치 119대원들처럼 주야 24시간 대기하며 그렇게 기다리십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성령께 얼마나 기도하고, 얼마나 매달리고 얼마나 청하고 있습니까? 이제 우리네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채로 성령을 청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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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아버지 하느님께로 왔고 그 사랑은 이유를 묻지 않으며 이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사랑이며 십자가에 목숨을 내놓기까지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이 시간 사랑의 의미를 새롭게 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사랑은 일방통행일까요? 쌍방 통행일까요? 예, 좋습니다. 사랑은 일방통행입니다. 어떤 분은 자기입장에서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베풀고 또 베풀었는데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것이 없으니까 서운함에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자녀에게, 배우자에게 이웃에게 온갖 정성을 다했는데 남는 것이 없어서 그런 생각을 하는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주고받는 것, 곧 쌍방통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사랑하면 상대방이 알기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든 다시 채워줄 것이고,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수고와 땀의 보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이 있어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까 너도 최소한 이 정도는 해야지’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일방통행’이지만,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보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죄가 있든 없든 개의치 않으시고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다 내주고도 너무 적게 준 것이 아닌지 걱정하는” 사랑입니다. 오히려 죄가 클수록 은총도 넘치는 사랑입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용서하시고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 하시며 죄인이 잃었던 권위를 회복시켜주는 사랑입니다. 고개를 숙여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쓰시며 그의 처지로 내려가 주시는 연민의 사랑입니다. 우리도 내어주는 사랑에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사랑을 받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의 계명은 구속적이거나 억압적인 규범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는 상대가 원하는 것, 바라는 것을 행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되고 그것을 실천합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을 바라고, 주님께서 주신 계명과 가르침을 지킴으로써 삶 안에서 그분을 영광스럽게 해 드려야 합니다. 진실한 사랑은 감정만으로 이루어지는 정서적 사랑이 아니라 아낌없이 내어주는 행위로 이루어지는 실질적 사랑입니다. 말로 충분한 사랑이 아니라 행동하는 사랑입니다. 주일미사참례, 기도를 의무로 생각하면 부담이 큽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만남을 돈독히 하는 사랑의 관계로 생각하면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입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히 함께하실 보호자를 보내주시는 것은,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 보호자는‘파라클레토스’ 곧 성령으로 의미는‘옆에 있도록 부름 받은 이’입니다. 연약한 우리들을 위해서 옆에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삶을 살도록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진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살 때 영을 알아보게 되고, 육적으로 사는 사람은 영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보호자를 만나고자 한다면 우리의 육적인 삶을 영적인 삶으로, 천상을 갈망하는 삶으로 바꿔야 합니다. 아니, 천상을 여기서부터 살아야 합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말합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36,26). 우리는 새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언제나 주님 앞에 서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야 하고, 성령께서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신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을 한다고 하면서도 많은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사랑의 결과입니다. 사랑을 하면서도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것은 많은 경우 내가 이만큼 베풀었으니 너도 최소한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느냐는 보상심리의 사랑 안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방식의 이기적인 사랑으로 상대방을 소유하고 지배하며 마음속에 묶어두면 사랑을 빌미로 상처를 줍니다. 그러나 사랑은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상대의 고유성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며 그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기적인 마음을 절제할 줄 합니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보상은 사랑입니다. 사랑함으로써 주어지는 기쁨과 평화, 보람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보상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지속시켜주는 힘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께, 제자들이 예수님께 무조건 순종하는 것으로 실현됩니다. 그것은 동시에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베푸신 무조건 사랑에 대한 응답이기도 합니다”(이현주).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사랑은 우리의 밥이 되어주신 사랑입니다. 모두를 내놓는 사랑입니다. 목숨까지도. 오늘도 미사성제를 통해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주십니다. 우리도 다른 이를 더 행복하게, 더 나은 길로 나아가길 바라는 열린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 옛말에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설사 자식에게 업신여김을 받아도 부모는 자식을 미워하지 못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사랑이란 내리사랑이므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자식의 부모에 대한 사랑을 능가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윗사람이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랑이 전수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지 내 방식의 사랑을 고집하여 상처를 키워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 일서 3장 18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우리 인생이 기계라면, 미움은 모래이고, 사랑은 기름입니다.” 기계에는 반드시 윤활유가 필요합니다. 우리 삶에는 사랑이 필수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하느님과 이웃의 관계를 지속시켜주는 힘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14,18).하셨습니다. 부활의 생명으로 다시 오셔서 우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현존을 영원히 지속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안에 오신 성령을 무시하고 고아처럼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결코 떠나 본 적이 없다.’ 네가 나를 원망하는 그 순간까지....부디 성령을 보내주시고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 안에 머물러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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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몇 년 전, 속도위반 범칙금 통지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사실 과속을 잘 하지 않는 저입니다. 내비게이션을 보면 안전 운전 점수가 나오는데, 그 점수가 95점이 넘습니다. 그만큼 과속을 잘 하지 않고, 또 급정거나 급가속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속도위반 법칙금 통지서는 너무 낯설었습니다. 그래서 어디서 속도위반했는지 살펴보니 너무 잘 아는 곳입니다. 자주 지나가는 곳이어서 그곳에 과속 카메라가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운전할 때, 늘 내비게이션을 켜놓으니 요란한 경고음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속도위반을 왜 했을까요? 
 
아마 익숙한 곳이었으니, 그 순간 다른 생각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카메라의 존재도 잊어버리고, 경고음 소리도 듣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또 조금만 신경을 썼다면 이런 실수를 하지 않았겠지요. 
 
주님께 나아가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기도하면서도 때로는 분심으로 주님을 잊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 뜻에 맞게 살겠다고 다짐했지만, 주님께 제대로 집중하지 않고 다른 세상의 것에 집중해서 죄에 빠지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겠다면서도, 순간적으로 자기 안에 있는 욕심과 이기심으로 사랑의 반대편으로 향하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 안에 살고 있기에 세상 것에 집중할 때가 더 많습니다. 또 세상의 것이 보여주는 화려함과 안락함으로 인해 주님이 보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떠올린다면, 주님께 집중하기 위해 좀 더 노력해야 합니다. 이렇게 집중할수록 죄로부터 멀어지고 대신 주님과 더욱 가까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주님과의 친밀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친밀 관계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계명을 철저하게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표시가 되고, 참다운 삶으로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문제는 매 순간 주님께 집중하는 것이 힘들기에, 사랑의 계명을 잊어버릴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나약함과 부족함을 잘 아시는 주님이시기에 커다란 선물을 주십니다.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을 진리의 영으로 선포하십니다. 진리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큰 도움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랑이라는 주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 곧 진리를 위해 싸우는 것이고, 이런 마음을 계속 간직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 계명을 잘 지켜나갈 수 있도록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성령 안에서 주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 끝까지 전달하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함께 하느님 나라에 잘 들어갈 수 있도록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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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저 사랑해요>

요한 14,15-21 (성령을 약속하시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그저 사랑해요>

사랑이
함께 계시니
그저 사랑해요

사랑을
할 수 있으니
그저 사랑해요

사랑을
하고 싶다면
그저 사랑해요

사랑을
받고 싶다면
그저 사랑해요

사랑을
알고 싶다면
그저 사랑해요

사랑을
보고 싶다면
그저 사랑해요

사랑이
되고 싶다면
그저 사랑해요

사랑 안에
있고 싶다면
그저 사랑해요

사랑이
함께 계시니
그저 사랑해요

사랑을
할 수 있으니
그저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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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 믿음으로, 희망으로, 사랑으로 -

어제 참 오랜만에 종신봉헌자 10차 연례피정지도차 제 영혼의 고향집같은 왜관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2014년 요셉수도원이 자치수도원이 된 후, 아마 두 번째 방문일 것입니다. 동대구역까지 갔다가 무궁화호를 타고 왜관수도원에 도착했습니다. 무궁화호를 타고 보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예나 이제나 한결같은 믿음의 삶도 이런 것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궁화호처럼 살고 싶다”라는 생각이 불끈들어 즉시 그 느낌을 적었습니다.

“무궁화호가 좋다
ktx가 아닌 무궁화호 기차가 좋다 무궁화호처럼 살고 싶다
‘부산-서울’ 멀기도 하다
ktx와 비교할 일이 아니다
‘무궁화호’대로 살면 되지 않겠나 속도도 모양도 아랑곳 없이 넉넉한 공간에
느린 속도 자기 페이스대로 여유있게 예나 이제나
한결같이 끝까지 달리는 편안하고 넉넉한 무궁화호가 좋다
빨리가서 무엇할 건가
음미하며 바라보며 누리는 순간순간이 행복인 것을
무궁화호가 좋다, 무궁화호처럼 살고 싶다
이런 어른이 되고 싶다”-

그대로 믿음의 삶을 상징합니다, 하루하루 한결같이 내 페이스대로 하느님 불러 주신 늘 거기 정주의 제자리에서 사는 것입니다. 바로 왜관 수도원에서 저녁기도 성무일도 시간에 만난 선배, 동료, 후배 수사님들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정말 믿음으로 살아왔고, 살고 있고, 살아갈 우리 수사님들 모습이 한없이 든든해 보였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수도자의 삶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저절로 답이 나옵니다. 셋으로 나눠 묵상했습니다.
 
첫째,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필리포스와 예루살렘의 베드로와 요한이 그 모범입니다. 사마리아 고을로 내려가 그곳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믿음의 제자, 믿음의 전사 필리포스입니다. 그리스도의 선포, 바로 믿음의 선포입니다. 들어야 알아야 믿을 수 있습니다. 

믿음은 독점물이 아니라 나눠야 합니다. 믿음의 기적이요 이런 믿음도 보고 배웁니다. 사람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경청합니다. 말씀을 경청하며 믿음을 보고 듣고 배우는 사마리아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불구자가 나았다. 그리하여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

믿음의 기적, 믿음의 치유, 믿음의 신바람, 믿음의 기쁨입니다. 새삼 믿음이 답임을 깨닫습니다. 개인의 믿음은 약해도 교회공동체의 믿음은 강합니다. 공동체에 뿌리둔 믿음일 때, 성장하는 튼튼한 믿음입니다. 예루살렘 사도공동체는 믿음의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파견하여 필리포스를 지원합니다. 파견된 베드로와 요한은 이들이 성령을 받도록 기도하고 이들에게 안수하자 성령을 받습니다.

믿음도 나눠야 합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안수하자 이들은 성령을 받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강복의 안수를 참 좋아합니다. 고백성사후는 물론 참으로 뭔가 주고 싶은데 줄것이 없으면, 진짜 가장 좋은 강복을 드리곤 합니다. 말그대로 믿음으로 드리는 믿음의 강복입니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이 형제(자매)에게 축복을 내리시어 길이 머물게 하소서.”

둘째, 희망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에 이러 ‘희망으로’입니다. 어제 피정 두 번째 강의 주제도 희망의 여정, 희망의 순례자로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희망이, 꿈이, 비전이 있어야 비로소 살아 있다 할 수 있습니다. 희망의 힘이요 희망을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희망 역시 주님의 선물이자 우리의 선택입니다, 역시 희망의 선택, 희망의 훈련, 희망의 습관화입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희망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십시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 제 말이 아니라 제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의 간곡한 당부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께 생생한 희망을 두고 희망으로 살아갈 때 바른 양심, 온유하고 겸손한 삶, 선한 처신입니다. 

우리를 하느님께 이끌어 주시려고 의로우신 분, 그리스도께서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 바로 우리가 희망을 두는 분은 이런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 받는 참 좋은 희망의 선물이 영으로 다시 생명을 받아 생명 충만한 영적 삶을 살게 합니다.

셋째,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그의 규칙에서 강조하는 바,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여기에 바탕하여 어제 흥겹게 노래한 저녁성무일도 마리아 후렴이 생각납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니, 내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와함께 머무를 것이로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지킬 때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 보호자 성령입니다. 예수님의 자상한 설명이 고맙고 힘이 납니다. 바로 보호자 성령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모르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환히 밝히시는 보호자 성령, 사랑의 성령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성령뿐임을 깨닫습니다. 영혼의 영혼이 성령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이 우리에게는 결정적 도움이, 힘이 됩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주님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본질적이요 중요한지 새삼 깨닫습니다. 사랑의 계명을 지킬 때 하느님 아버지도, 그리스도 예수님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주님은 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을 통해 입증되는 주님 사랑이요 바로 이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 사랑 안에 머물게 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믿음으로 시작하여 희망으로 살다가 사랑으로 선종의 죽음을 맞이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삶은 믿음의 여정, 희망의 여정, 사랑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입니다. 살아갈수록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의 믿음, 주님과의 희망, 주님과의 사랑이면 소원이겠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우리의 주님께 대한 신망애(信望愛)의 관계를 깊이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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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14,15) 

<예수님을 사랑하는가?>

세례성사로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을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때문에 사람들의 의해 나의 믿음과 신앙이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사람 때문에 하느님과 공동체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습니다. 눈에 보이는 그 너머의 것을 바라봅니다. 때문에 눈에 보여지는 현상들 앞에서, 내 눈 앞에서 일어나는 문제들 앞에서 성모님처럼 곰곰이 생각합니다. 그 너머의 것을 보려고. 그 너머에 숨겨진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으려고.

어제 배둔공소 성전 봉헌식이 잘 끝났습니다. 많은 형제자매님들께서 기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날씨도 어느 신부님의 예언처럼 봉헌식 전에 비가 그쳤답니다.

"하느님 감사!"

많은 신부님들(30명)이 오셨고, 수사님들, 수녀님들과 가깝고 먼 곳에서 오신 많은 형제자매님들께서 함께 해 주셨습니다. 전체 참석하신 인원이 300여명이 넘었습니다. 참으로 고맙고 감사드립니다. 저와 배둔공동체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보내주신 사랑을 꼭 기억하면서 배둔공동체가 다시 부활할 수 있도록 신자들 모두가 노력할 것입니다.  

배둔공소는 하느님의 것이고,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배둔신자들과 이곳을 찾는 많은 형제자매님들이 힘을 얻고 다시 부활하는 곳입니다. 이곳에 있는 배둔신자들은 하느님의 집을 관리하는 관리인 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집이고,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하십니다. 

오늘 복음(요한14,15-21)은 '예수님께서 성령을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요한14,16) 

진리의 영이신 성령 안에서,
참되게 믿고 희망하고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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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BFIV8E_wbO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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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 15)

사랑으로
거하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온통 
초록빛의
오월입니다.

순간순간들이
모두 아까운
시간들입니다.

장미꽃들이
끓어오르며
피어납니다.

가장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사랑의 숭고함을
깨닫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삶의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해답은 언제나
하느님
사랑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성장의 
여정을 걸어갑니다.

사랑은 사랑을
따릅니다.

사랑은 사랑을
찾아가는 여정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 없는
여정이 
가장 아픈
여정입니다.

우리를 
움직이는 힘이
바로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이 있고
사랑이 있는 곳에
사랑의 관계가
있습니다.

사랑의 관계는
예수님과 맺는
관계로 더욱
깊어집니다.

늘 우리를
예수님 안에서
인격적인 관계로
머물게 하십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무너지지 않는
새로운 관계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참된 사랑은
무너지지 않고
끊어지지 않으며
새로워질 뿐입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
있음을 믿게 됩니다.

우리 마음을
열어 주시는
성령이십니다.

머무르시고
다가오시고
열어주시는
성령께 
이 사랑의 
시간들을
봉헌합니다.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는 사랑이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생명을 일깨우는
참된 사랑이
우리를 충만하게
하고 있음을
믿는 은총의
주일입니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의 계명과
말씀을 따릅니다.

사랑 가득한
기쁜
주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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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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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491
5월15일[부활 제6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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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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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Frw4rsVVMEs 
(김영주 니코메디아의 베드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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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우리는 언제나 올리브 새순처럼 푸르를 것입니다!>

워낙 외진 시골에서 살다 보니, 개체 수가 늘어난 산짐승, 들짐승들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때로 차량과의 야간 충돌로 죽임을 당한 동물들의 사체를 목격합니다. 참혹하게 널브러져 죽은 동물들의 모습은 보는 것만 해도 끔찍합니다.

살아있을 때의 모습과는 천지 차이입니다. 언젠가 밤길에 저와 단둘이 만난 새끼 고라니의 모습은 얼마나 예쁘던지, 감탄사가 터져 나올 정도였습니다. 잘 빠진 몸매, 잘 조화된 몸의 색깔, 천진난만한 얼굴, 쫑긋한 귀...한참을 바라봤습니다.

또 다른 길에서 어미 꿩을 따라 일렬종대로 부지런히 도로를 건너가던 애기 꿩들은 또 얼마나 귀엽던지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녀석들이 안전하게 건너가도록 비상등을 켜고 도로 한가운데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강을 따라 산책에 나섰다가 죽은 고기떼를 만난 적도 있습니다. 그저 물결에 둥둥 떠다니는 모습이 섬뜩했습니다. 냄새도 역하고 비릿했습니다. 반대로 물속에서 유유히 헤엄쳐가는 살아있는 녀석들의 모습은 얼마나 역동적이고 활기차던지요.

아직 생명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 아직 따뜻한 피와 숨결을 지니고 있다는 것, 아직 살아서 두 발로 세상을 활보할 수 있다는 것,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은 아름답습니다. 숨결이 붙어있어야 가치가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존재를 아름답게 하고 가치 있게 만들며 희망을 지니게 하는 분이 계십니다. 한 존재를 존재답게 만드는 분, 바로 성령이십니다.

우리 공동체 내부를 들여다봅니다. 때로 살아있지만 죽은 공동체를 봅니다. 그 안에 활력이 없습니다. 희망도 없습니다. 아름다움도 없습니다. 성령의 현존, 성령의 활동을 믿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때로 죽어가는 공동체를 봅니다. 어둡고 경직되고 폐쇄되어 있습니다. 어려운 이웃들과 나누지도 않습니다. 구성원 상호 간에 일치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을 향해 봉사하지도 않습니다. 성령께서 활동하실 자리를 내어드리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승천하실 예수님께서는 슬슬 제자들과의 작별을 준비하십니다. 그런데 이번 작별은 지난번 작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입니다. 슬픔과 두려움, 공포의 분위기가 아니라 희망과 기대의 분위기입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복음 15장 26절)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이어서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하실 협조자이자 보호자이신 성령의 강림을 약속하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 공동체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 넣어주실 분, 죽어가는 사람들에게는 위로와 새 생명을, 절망과 낙담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을, 불목과 다툼이 있는 곳에 친교를 불러일으키실 분, 곧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우리는 언제나 올리브 새순처럼 청춘과 젊음을 간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굳게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 보호자, 진리의 영께서 오늘 우리의 신앙 여정 그 한 가운데 굳게 현존하시고 동반하심에 깊이 감사드리면서, 고통과 시련 속에도 기쁘고 활기찬 얼굴로 우리의 길을 걸어가야겠습니다.

     /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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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c1yHmbdn0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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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지옥 탈출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단순한 나의 결심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의지를 가진 이에게 주시는 성령님 덕분입니다. 

그런데 진리를 말하는 이는 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들이 거짓임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새로운 진실을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하느님을 믿어도 진리를 증언하는 이를 박해할 때가 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이를 박해하며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이미 이런 말씀을 해 놓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박해받아도 움츠러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에 속하는 방법은 그리스도, 곧 진리를 증언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옥에 살게 되는 것은 감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자기가 증언하는 세상에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가 그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이란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그의 일생일대의 회개를 상징합니다. 그는 천재적 재능으로 많은 교회의 성화들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생활을 하여 결국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었고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탈옥에 성공하여 몰타섬으로 도주하여 거기서 숨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공포가 하도 커서 칼을 차고 신발을 신고 잠을 잘 정도였다고 합니다. 

공포 속에서 사는 것이 너무나 지긋지긋한 나머지 그는 유일한 사면권을 가진 교황을 설득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어린 다윗이 골리앗의 칼을 들고 잘린 골리앗의 머리를 들어 올리는 그림을 완성해냅니다.

그림 속의 다윗은 어렸을 때의 순수했던 자기 모습이고 목이 잘린 흉측한 골리앗의 머리는 지금까지 거짓으로 살았던 자신을 상징했습니다. 사실 그의 진심을 담아 그린 그림은 이 그림이 처음일 수 있습니다. 이 그림에 진정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또 교회와 하느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진리가 들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 앞에서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분이 아버지를 증언하니 아버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계신 곳은 천국입니다. 그러니 천국에 사십니다. 천국은 행복입니다. 

반면 거짓을 말하는 자는 자신이 드러내는 악마를 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다”라고 하시며 거짓말 안에 악마가 활동하고 있음을 폭로하셨습니다.(2482 참조)

거짓말하는 자 안에 있는 악마는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비”(요한 8,44)입니다. 아무리 거룩한 성화를 그리더라도 삶이 거짓이고 거짓을 증언하면 그런 성화 안에서도 천국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거짓을 증언하는 사람은 거짓의 아버지를 보며 장차 자신이 가게 될 어둠 세계의 공포에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진리를 증언하는 이는 죽음 앞에서도 장차 만나게 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을 기대하며 기쁠 수 있습니다. 진정 이 세상에서부터 진리의 왕국의 향기를 맡으며 살려면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언제나 거리낌 없는 양심을 간직하려고 애를 써야”(사도 24,16) 합니다.

무하마드 알리가 조지 포먼과의 일전을 앞두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엄청난 펀치력을 가진 조지 퍼먼이 무하마드 알리를 이길 것이라 점쳤습니다.

시합 전날 무하마드 알리는 링 위에 올라 세도우 복싱을 하였습니다. 아무리 해도 조지 포먼을 이길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무대에 누워 넉다운 당한 자신을 상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진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진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랬더니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그리고 “rope-a-dope”로 알려진 전략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포먼이 펀치를 던지고 지칠 수 있도록 허용했고 로프에 기대어 팔과 몸으로 타격을 흡수했습니다. 약자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싸움이 계속됨에 따라 포먼의 체력이 약해졌고 드디어 알리는 공격 기회를 잡았습니다. 8라운드에서 알리는 포먼을 쓰러뜨리고 헤비급 타이틀을 획득합니다.

진실을 받아들이면 평화 속에 살게 됩니다. 그래야 하는 일도 다 잘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은 모든 어려움을 끌어들입니다. 솔직합시다. 그것이 진리를 드러내는 첫걸음입니다. 그 첫걸음은 우리를 지옥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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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님 존재에 대한 가장 깊은 확신은 '마음의 든든함'이다>
 
지난 월요일에 평화방송 녹화 중 사회자의 좋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에 대한 질문인데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면 왜 떠나신 것일까요, 그리고 보이지 않는 주님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입니다. 
 
그러나 만약 주님께서 계속 함께 계시며 당신만을 바라보라고 강요하시면 우리의 일상생활이 가능할까요? 
 
참사랑은 자신의 존재를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레나 마리아는 두 팔이 없고 한 다리는 30cm밖에 안 되는 중증 장애인입니다. 물론 장애인 올림픽에서 많은 금메달을 따고 음악과 그림 등에 소질이 있으며 인기 도서 작가이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레나 마리아의 어머니는 마리아를 장애인으로 여기지 않아 일반 학교에 다니게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이 침울하게 돌아오자 엄마는 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레나 마리아는 “엄마, 난 친구가 없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엄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친구가 없어. 예수님이 네 안에 계시잖아!” 
 
레나 마리아는 음악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오늘은 더는 수업을 할 수가 없겠다. 노래는 마음에서 나오는데, 너는 너무 슬퍼. 그러면서 어떻게 기쁜 노래를 부를 수 있겠니?”라고 말하고 가버렸습니다. 레나 마리아는 엎어져 엄청나게 울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전화가 왔습니다. 레나 마리아는 유일하게 전화기를 잡을 수 있는 다리로 전화를 받았습니다. 
 
“레나 마리아시죠?”
“네...”
“예, 저를 모르실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기도 중에 예수님께서 전화하라고 하셨어요. 레나 마리아를 많은 사람이 응원하고 있고 기도하고 있음을 알려주라고 하셨어요!” 
 
레나 마리아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심을 증명하라고 한다면, 나는 나약한 저의 육신과 날마다 주님을 찬양하는 제 입술을 당당히 보여주겠습니다.” 
 
TV에서 보았던 어떤 실험에서 아기가 엄마를 어떻게 인식하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방 안에 아기가 좋아할 장난감들을 넣어놓고 아기를 놀게 하였습니다. 조금 후 슬며시 엄마가 밖으로 나가봅니다.
 
한참을 놀다 엄마가 함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아기는 장난감에는 관심이 없고 울며 엄마만 찾았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다시 그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이젠 엄마에겐 관심이 없고 장난감으로 놀기에 정신이 없는 것입니다. 
 
엄마를 눈으로 보는 것이 엄마의 존재에 대한 더 큰 확신일까요, 아니면 엄마가 보이지는 않지만 즐겁게 놀 수 있는 것이 더 큰 확신일까요? 
 
사람은 세 단계로 어떤 존재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눈으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확신은 속을 확률이 높습니다. 마귀들도 예수님의 모습을 하고 나타날 수 있습니다. 눈으로 보이는 것만을 곧이곧대로 믿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다음은 머리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신학을 부지런히 공부하여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완전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사도들을 박해할 이들은 머리로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머리로 알고 믿어서는 아직 구원의 수준에 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당신을 증언할 영을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 안에서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박해받아 죽어가면서도 찬송가를 불렀던 순교자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러한 순간에도 찬송가를 부를 수 있는 마음이 솟아나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주님을 확신하지 못할 수가 있을까요? 
 
주님 존재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험난한 세상 속에서도 기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의 확신’입니다. 이 확신은 마음의 평화라고도 할 수 있겠고, 든든함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보다 마음으로 느끼는 성령의 위안이 비교도 안 될 만큼 큰 주님 존재에 대한 확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성령을 주시기 위해 아버지께 올라가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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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어릴 때입니다. 라디오에서 ‘전설 따라 삼천리’라는 프로를 들었습니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가르치는 이야기였습니다. 때로는 오싹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흥미진진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웃음이 나오기도 하였고, 때로는 마음이 숙연해지기도 하였습니다. 구성진 성우의 목소리가 지금도 생각납니다. 효녀와 효자의 이야기도 있었고, 충신의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대부분은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 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순례의 여정 중에 ‘전설 따라 삼천리’와 같이 성서의 이야기를 맛깔나게 해 주던 가이드가 있었습니다. 자칫 딱딱할 것 같은 구약성서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 주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 열왕기 하권 3장 5절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모압 임금 메사의 이야기입니다. 모압 임금 메사는 이스라엘 왕 아합 왕이 죽자 매년 바치던 조공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힘을 길러 이스라엘의 영토를 침범하였습니다. 그에 이스라엘은 에돔과 유다의 임금과 연합하여 모압을 공격하였습니다. 모압 왕은 겁을 먹고 성에 들어가 숨어 있었습니다. 모압 왕은 자신의 친아들을 불에 살라 제물로 바치며 이스라엘 연합군의 공격을 막으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연합군은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돌아갔습니다. 각자 나라에도 사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모압 왕 메사는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하였고,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는 비석을 만들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비석의 존재는 잊혔습니다. 모압 왕 메사가 유명한 왕도 아니었고, 이스라엘 역사에 중요한 존재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 비석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고고학이 발전하기 시작한 19세기 후반이었습니다. 한 독일의 군인이 요르단의 족장으로부터 오래된 비석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군인은 본국에서 돈을 가져올 테니 비석을 팔아달라고 하였습니다. 족장은 그러자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프랑스 영사관의 직원이 그 비석의 존재를 알았고 비석을 팔아달라고 하였습니다. 족장은 이미 독일 군인에게 팔기로 했다고 하였습니다. 프랑스 영사관의 직원은 그럼 탁본이라고 뜨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비석이 중요한 물건이라고 짐작했습니다. 독일 군인이 돈을 가져와서 비석을 팔라고 했더니 족장은 좀 더 생각해 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독일 군인은 당시 오스만 튀르크 군인들과 함께 와서 비석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족장은 이렇게 여러 사람이 비석을 팔라고 하자 비석에 금이 들어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비석에 뜨거운 물을 부은 다음 불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비석은 불 위에서 깨져 버렸습니다. 독일 군인은 깨져버린 비석을 사지 않았습니다. 족장은 비석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깨진 비석을 치워버렸습니다. 나중에 프랑스 영사관 직원은 깨진 비석을 가지고 프랑스로 돌아와 탁본과 비교하면서 다시 맞추었습니다. 그 비석은 현대 고고학과 성서학에 큰 영향을 주는 비석이었다고 합니다. 그 비석의 존재로 성서의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것임이 성서 이외의 곳에서 입증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함무라비 법전을 적은 비석 뒤에 전시되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족장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전에 읽었던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매일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보면서 가난한 농부는 기뻤습니다. 어느 날입니다. 농부는 거위의 배에는 많은 황금알이 있을 거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거위의 배를 갈라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황금알이 없었습니다. 농부의 욕심과 어리석음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저는 욕심과 어리석음은 요르단의 어느 이름 없는 족장과 이야기 속의 농부에게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과학과 기술이 발달한 21세기의 우리에게도 같은 모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과학과 기술의 이름으로 인류에게 깊은 영성과 깨달음을 주었던 신화와 종교의 배를 갈라버리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과 믿음으로 생기는 자녀를 단순히 생물학적인 행위로만 재단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신화와 종교의 권위가 무너지는 지난 20세기에 우리는 참혹한 전쟁을 경험하였습니다. 영성과 깨달음이 무시되는 21세기에 우리는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방황을 경험하였습니다. 예전에 드라마에서 듣던 대사가 생각납니다. “무엇이 중헌디!” 인공위성과 우주선이 지구를 떠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이라고 노래하던 우리들의 마음도 중요합니다. “티아티라 시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로 이미 하느님을 섬기는 이였던 리디아라는 여자도 듣고 있었는데, 바오로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도록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 그들의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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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5,26-16,4: 진리의 성령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보호자 성령에 대해 말씀하신다. 보호자 성령은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신다. 그리고 우리를 기쁨으로 채워주신다. 성령 안에 사는 사람들은 참 기쁨이 있다. 이 성령을 주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15,26)이라고 하시며, 아버지의 영이라고 하신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이 아들의 영이라고 말한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고 계십니다.”(갈라 4,6) 우리는 아들 안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로마 8,9) 한다. 사랑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친교는 바로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오시는 분으로, 아버지의 영이시며, 아들의 영이시다.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26절) 성령께서는 당신이 말씀하신 것들이 사실임을 확인해 주실 것이라고 하신다. 우리도 성령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더 깊이 알아듣게 된다.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령 안에 사는 것이다. 성령에 잠기는 삶이 우리를 그분과 더욱 가까운 사이로 만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예기치 않은 환난이나 박해가 닥쳤을 때, 제자들의 믿음이 무너지지 않고, 이 어려움을 통해 더욱 굳세게 주님께 포도나무 가지처럼 결합하여 있으라고 하신다.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4절). 이 말씀은 성령에 관한 약속과 그들이 고난받을 때, 주님께서 알려주실 증언에 관한 말씀이다. 그들의 때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떠나신 다음 제자들이 홀로 남아있게 되는 때이며, 그들이 박해를 받는 때를 말한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 앞에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하느님께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바로 그분의 뜻을 제대로 따르지 못할까, 자신에 대해 긴장하고, 노력하는 삶이다. 인간을 통해서 나오는 박해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이 박해는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닥칠 수 있다.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이것은 유혹으로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 안에, 성령 안에 살게 되면 이러한 삶 속에서도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길을 인도해주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지혜롭게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용기와 힘을 주실 것이다. 성령 안에 잠기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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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진리의 영>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그들의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26-16,4ㄱ)

그리스도 교회는 예수님께서 세우시고, 성령께서 지켜 주시는 교회입니다. 교회의 첫 번째 사명은 ‘복음 선포’입니다. 우리가 ‘성령 강림 대축일’을 교회 창립일로 생각하는 것은, 그날이 공식적으로 복음 선포 활동이 시작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기 전까지 사도들은 ‘집 안에’만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박해가 두려워서 문을 모두 잠가 놓고(요한 20,19) 숨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나에게서 들은 대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기다려라.”(사도 1,4)라는 예수님의 명령대로 성령 강림을 기다리면서 기도에 전념하고 있었습니다.(사도 1,14) 

그랬다가 성령을 받자마자 곧바로 ‘집 밖으로’ 나가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사도 2,4) 그런데 그 일은, 사도들이 자유의지 없이 한 일이 아닙니다. 일은 사도들이 했고, 성령께서는 일하는 사도들을 도와주셨습니다. ‘집 밖으로’ 나가는 일과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설교를 하는 일은 큰 믿음과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사도들은 억지로 떠밀려서 밖으로 나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나갔고, 스스로 사람들 앞에 섰습니다. 사도들이 용기를 낸 일도 능동적으로 한 일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런 그들을 도와주셨습니다. <만일에 사도들이 아무것도 안 했다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날 신자가 삼천 명가량 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사도 2,41), 그것은 성령께서 하신 일입니다. 성령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사도들이 선포하는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게 한 것입니다. 물론 그 일도 세례 받은 그 사람들 자신들의 능동적인 응답이 필요했던 일입니다.

<성령에 관해서 말할 때, 모든 일을 다 성령께서 하시는 것으로 표현하는 이들이 있는데, 일은 우리가 해야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성령의 도움을 헛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고, 성령의 도움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속담 그대로입니다.>

또 한 가지, 자기 고집을 신념이라고 착각하고, 자기 욕심대로 일하면서도 성령께서 시키시는 대로 일하는 것이라고 우기는 경우가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하려고 하는 이 일이, 또는 하는 이 일이, 정말로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하는 일인가? <주님의 뜻에 합당한 일인가?> 우리는 그것을 늘 성찰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올바른 판단을 하고, 올바른 신념을 가지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기만 하면 크게 빗나갑니다.

26절의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라는 말씀과 27절의 “너희도 나를 증언할 것이다.”라는 말씀을 합하면, “너희가 나를 증언할 때, 성령께서 너희를 도와주실 것이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받게 될 박해를 예고하실 때 이미 ‘같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18-20)

증언을 하는 경우에도, 성령께서 나를 통하여 증언하실 수 있도록 하려면 ‘기도’부터 해야 합니다. 16장 2절의 말씀은, 종교박해는 ‘신념과 신념의 충돌’이 될 것이라고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하느님을 위해서’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는데, 신앙인들이 그 박해를 감내한 것은 ‘하느님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런 상황을 제3자의 눈으로 본다면, 누구의 신념이 옳은 것인지 판단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이교인들 가운데에 살면서 바르게 처신하십시오. 그래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여러분을 중상하는 그들도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지켜보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2,12)

나의 신앙과 신념이 옳다는 확신만으로 그치지 말고, 올바르고 착한 생활로 신앙과 신념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을 증언하는 일’과 ‘복음 선포’는 우선 먼저 ‘삶으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말만 잘하고 생활은 그렇지 않으면,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 되기는커녕 주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1절과 4절의 말씀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길은 ‘꽃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이지만, 그 길은 인간을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뜻과 섭리 안에 있는 길이고, 그 길 끝에서 구원과 생명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으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면 ‘꽃길’을 걷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라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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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보호자”로 옮긴 그리스 말 ‘파라클레토스’는 요한계 문헌의 고유한 낱말로, ‘곁에 있도록(보호나 변호를 위하여) 부름받은 이’라는 뜻입니다. ‘파라클레토스’는 요한의 서간에서는 우리 죄를 변호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1요한 2,1 참조), 요한 복음서에서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일컫습니다.(14,16.26; 15,26; 16,7 참조) 곧 예수님과 성령께서는 한 분이신 우리의 보호자 ‘파라클레토스’이십니다.

이제 아버지께 가시는 예수님께서 머지않아 제자들에게 보내시겠다고 하신 “다른 보호자”는 성령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다시 돌아오시어 영원히 함께 사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보거나 만질 수는 없지만 그분을 잃은 “고아”가 아닌 것은,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지금도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신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시고, 늘 희망을 품고 선하게 살라고 권고합니다.(제2독서 참조)

오늘 복음의 시작과 끝에서 ‘주님 사랑’과 ‘계명 준수’의 상호적 인과 관계가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면 계명을 지키게 되고, 계명을 지키면 당신을 더 사랑하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1독서는 신앙과 동떨어져 이방인처럼 살던 사마리아인들이 주님의 복음과 계명을 받아들였을 때 넘치는 기쁨을 누렸고, 사도들로 말미암아 성령을 충만히 받게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성령 안에서 사는 기쁨을 잊어버리면, 세상이 주는 안정과 평안에만 더 집착하게 됩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려고 행동하는 이라야 부활하신 주님을 성령 안에서 매 순간 만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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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렛선교수도회 김대열 프란치스코 신부님]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16,1)

어쩌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우리의 마음보다, 우리를 당신 나라에 들어오게 하시려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더 큰지도 모르겠다.

가끔 묵상 중 떠오르는 것 중의 하나는 ‘안타까워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이다. ‘안타깝다’라는 말의 의미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손이 반드시 닿아야만 하는데, 아무리 손을 뻗어보려 하지만 닿을 듯 말 듯 하다가 끝내 닿지 않을 때의 그 마음, 들으라고 고래고래 소리쳐보지만, 듣지 못하고 군중 속으로 사라져가는 이의 뒷모습을 쳐다보아야만 할 때의 그 마음, 바로 이와 비슷한 마음으로 하느님께서는 매일매일의 우리를 바라보시고 계시지 않을까?

언젠가 묵상 글에 우리가 하느님께 비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빌고 계실지도 모른다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

사랑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그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거부를 당하고 무시를 당하고 내동댕이쳐져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장 좋은 것을 주려고만 애를 쓰는 모습은 더욱 안타깝다.

하지만 사랑의 생김새가 그런 것이고, 그 사랑이 시작된 곳이 하느님이시니, 하느님께서는 그 길을 계속 가실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어떤 실존적 아픔들과 부딪혔을 때, 절대로 하느님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그분께서 우리보다 더욱 아파하며 안타까워하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나약함과 이기심 그리고 욕망을 먼저 바라보아야만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밀어내시는 것이 아니다. 밀어내는 것은 오히려 우리 쪽임을 기억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그분의 안타까워하심을 줄여드릴 수 있는 우리라면 얼마나 신나는 일일까? 아니 그분의 거룩한 마음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우리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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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진리의 영’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진리의 영’은 보호자, 변호자, 협력자, 인도자, 위로자라는 의미를 지닌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parakletos의 다른 표현입니다.

이 진리의 영은 어떠한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우리를 도와주시는 ‘보호자’이시며, 억울함을 대변해 주시는 ‘변호자’로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 낼 수 있도록 필요한 순간에 나를 도와주시는 ‘협력자’이시고, 인생의 길에서 방황할 때 나침반이 되어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시는 ‘인도자’이십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위로자’이십니다.

믿음을 통하여 진리를 품으신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과 함께하는 삶의 모범을 보여 주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시고 기꺼이 “예.”라고 대답하시면서 당신의 신앙을 보여주셨습니다.

성령을 통하여 기꺼이 인류의 구세주를 품으시고 하느님의 말씀을 곰곰이 되새기며 살아가신 성모님의 삶은 세례와 견진 성사를 통하여 성령을 받은 우리 신앙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려 줍니다.

우리는 날마다 성경을 통하여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열어 이웃에게 애덕을 실천하며,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기쁨의 삶이 되도록 날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도록 이끄시고, 진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시며, 성모님과 같은 참된 신앙인의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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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바오로수도회 김태훈 리퓨조 신부님]

<파라클리토 성령>

예수님께서는 박해 중에 있는 제자들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보호자 성령을 약속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호자’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파라클레토스’인데 이 단어는 우리에게 그리 낯선 단어가 아닙니다.

성령 청원 기도 때 자주 이 단어가 쓰였기 때문인데, 이 용어는 많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도움을 위해 ‘곁에 있도록’, ‘부름 받은 이’라는 기본적인 뜻에서 출발해 법률 용어로 변호자·옹호자·중재자·간청자라는 뜻을 지니며, 안전과 도움과 보호를 제공하는 이로서 도우미·위로자·격려자·의논 상대라는 뜻도 지닙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뜻을 지니고 있기에 중앙아프리카에서는 ‘우리 곁에 엎드린 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곧 어떤 사람이 가다가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만나면 그 곁에 같이 엎드려 그의 필요를 살펴 돌보고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참으로 성령의 역할을 잘 표현한 단어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이시지만 명령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 수준으로 내려와 우리의 필요를 살피며 나란히 걸어가는 분입니다.

박해와 시련으로 힘겨워 하는 제자들은 그분의 어머니 같은 자상한 도움에 힘입어 내적으로 새 힘을 얻습니다. 그분이 주시는 도움은 어려움을 외적으로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변화시켜 제자들의 짐을 편한 멍에가 되게 합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시키고 예수님과 일치해서 어려움을 기쁨으로 변화시키십니다.

하느님은 자신보다 예수님을 내세우시면서, 보조자처럼 겸손하게 우리 안에서 일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활동을 우리의 활동으로 오해할 만큼(마태오 복음 10장 20절 참조) 우리를 내세우십니다.

이렇게 그분은 ‘곁에 계시는’ 겸손하고 자상한 분이시고 또한 ‘부름 받은’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과 함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제자들처럼 우리도 그분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좋으신 그분을 늘 내 곁에 모시도록 그분을 간절히 찾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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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

저는 두 마음을 품을 때가 많습니다. 그야말로 양다리 걸치기를 합니다. 하느님을 갈망하면서도 마음과는 달리 세상의 것을 그리워하고 쫓아갑니다. 이웃사랑을 말하면서도 손발에 이르지 못합니다. 정의를 말하면서도 정의롭지 못한 궁리를 합니다.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면서 이미 심판을 내립니다. 그러면서 때때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7,15. 19)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약육강식 논리를 따르지 않고 진리를 추구합니다. 마음을 천상에 둡니다. 빛과 사랑을 추구합니다. 몸이 힘들고 고달프더라도 끊임없이 하느님의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결정적으로 선과 진리에 어긋나는 것은, 분명히 거부합니다. 당장은 손해를 보더라도 선을 선택합니다. 예를 들면, 생명을 함부로 하는 낙태법, 사형제도를 반대합니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그것을 싫어할 수 있고 우리는 세상의 미움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의 미움에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우리네 현실은 믿음의 수련기관이고, 그동안 단순히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아픔 또한 겪어 내야 합니다.(박병규) 미움받는 또 하나의 이유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증언하는 것은 예수님을 처형한 세상의 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권력자들은 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미움은 결국 폭력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홀로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떠나신 후의 일을 예견하시며 제자들에게 성령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먼저 시련과 박해의 시간에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시련과 고통이 생기면 마음이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을 아시기에 당신의 협조자 성령을 약속하셨고 성령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향한 신앙을 북돋아 주시어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용기 있게 그리스도를 증언할 힘을 주셨습니다. 바로 그 성령께서 오늘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해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 모든 사람이 성령의 손길을 통해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과 그리스도의 평화를 간직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 안에서 예수님을 향한 열망을 키워감으로써 시련과 역경 안에서도 흔들림 없는 참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거룩하게 사는 이들은 그분을 추구합니다. 그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당신 입김으로 그들에게 생기를 주시고 도움을 주십니다.”(성 바실리오)

사실 “성인들은 자기가 받은 은총에 늘 만족하며 살았고 하느님이 주시는 시련과 고통도 그분의 뜻으로 알고 살았습니다.”(아빌라의 성 요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시련이 벌이 아니고 오히려 은총의 기회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을 이겨 내십시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1,12) 이 시간 위로의 성령을 통해 우리의 삶이 변화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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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신학생 때, 저는 울렁증이 너무 심해서 남 앞에 서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신부로 살고 있는 지금, 이런 울렁증을 제게서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미사, 강의, 그 밖에 사람들 앞에서 말할 기회가 있어도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이런 제게 어떻게 울렁증을 극복했냐는 질문을 많이 하십니다. 그때 우스갯소리로 “사제 서품 후에 특별한 은총을 받았어요. 바로 뻔뻔함의 은총입니다.”라고 말하지만, 사실 제일 큰 이유는 제 마음의 변화였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서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은 없어.’라고 스스로 대뇌입니다. 즉, 지금 자리에서 “나는 최고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이런 생각만으로 울렁증이 없어졌을까요? 이를 위해 준비를 철저하게 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걱정만 하는 불안의 시간을 철저히 준비하는 노력의 시간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제 말을 들으러 온 사람은 저를 평가하러 온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실수를 지적하고 꼬투리 잡으러 이 자리에 귀한 시간을 내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서니 어느 순간 두려움이 사라지고, 지금은 오히려 이 안에서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현재 벌써 23년째 강사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자기 마음만 바꿔도 절반 이상은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주님께서 해결해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100% 전부를 주님께서 해결해주셔야 하는 것으로 청했던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 우리의 보호자 그리고 진리의 영인 성령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곧바로 박해를 연결하시지요. 박해받을 때 어떻겠습니까? 많은 고통과 함께 결국 순교의 죽음까지도 떠올리며 두렵지 않겠습니까? 도저히 연약하고 나약한 인간의 몸으로는 감당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보호자인 진리의 영인 성령께서 함께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용기를 갖고 힘차게 주님의 뜻을 세상에 선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만 있으면 주님께서 성령과 함께 알아서 해주실까요? 
 
아닙니다.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세상에 선포하는 데 있어 최고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며, 최고가 될 수 있도록 하는 준비도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알아서 해주시겠지, 그냥 저를 도구로 써주세요.’라고 말만 하고 있습니다. 또한 만나는 모든 사람 역시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에게 해를 끼친다고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역시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떠올리면서 사랑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의 노력 후에 나머지를 성령께서 채워주셔서 100%의 하느님의 일을 만들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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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들의 때가 오면 우리는 오히려>

요한 15,26-16,4ㄱ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그들의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들의 때가 오면 우리는 오히려>

그들의 때가 오면
우리는 오히려 우리이어야 하네
그럼으로써 고난 받을지언정

우상의 때가 오면
우리는 오히려 하느님을 증언해야 하네
그럼으로써 쫓겨날지언정

자본의 때가 오면
우리는 오히려 사람이어야 하네
그럼으로써 뒤쳐질지언정

탐욕의 때가 오면
우리는 오히려 나누어야 하네
그럼으로써 조롱받을지언정

배척의 때가 오면
우리는 오히려 품어야 하네
그럼으로써 버림받을지언정

분열의 때가 오면
우리는 오히려 단결하여야 하네
그럼으로써 찢겨질지언정

침묵의 때가 오면
우리는 오히려 외쳐야 하네
그럼으로써 짓밟힐지언정

망각의 때가 오면
우리는 오히려 기억해야 하네
그럼으로써 잊힐지언정 

죽임의 때가 오면
우리는 오히려 살려야 하네
그럼으로써 죽을지언정

그들의 때가 오면
우리는 오히려 우리이어야 하네
마침내 우리의 때를 맞이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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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여지>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내가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다 미래형의 말씀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신이 돌아가시고 난 뒤를 예고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돌아가시고 나면 당신이 성령을 보내주실 것인데 성령께서는 한편으로는 진리의 영으로서 당신의 진실을 증언하실 겁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당신이 돌아가신 뒤 박해를 받게 될 제자들을 보호해주실 터인데 그것은 제자들이 당신에게서 떨어져 나가지 않고 제자들도 당신을 증언케 하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박해가 제자들을 떨어져 나가게 할 것이라는 말씀은 우리가 충분히 예상하고 수긍할 수 있는 말씀인데 그런데 그런 제자들이 당신을 증언하게 될 거라는 말씀이 일단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일단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런데 일단이라는 말이 많은 경우 일단一旦의 뜻으로 쓰이지만 이 경우엔 일단一段이라는 뜻으로 제가 쓴 것이며 다음에 이단二段이 있다는 것을 내포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당신의 말씀과 달리 제자들이 당신을 모른다고 하고 도망쳤으니 일단은 주님의 말씀과 어긋나는 결과이고 그래서 그런 제자들이 당신을 증언할 거라는 말씀이 일단은 이해가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일단은 인간의 단계段階입니다. 그리고 이단은 성령의 단계段階입니다.

일단은 연약한 인간이기에 도망치고 봤는데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자 새로운 단계 곧 이 단계인 성령의 단계에 돌입하게 됩니다.

그런데 일 단계에서 이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소위 중간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것이 제자들에게 요구됩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처럼 하느님도 손쓸 수 없게 자기가 완전히 끝장을 내지 말아야 하는데 그런데 열한 제자는 주님을 배반했지만 그리고 비록 두려움 때문에 다락방에 숨어있었을지라도 다행히 완전히 떨어져 나가지는 않았지요.

여기에 우리가 오늘 배울 것이 있습니다. 정말 끝이라고 생각될 때도 내가 끝장내지 않고 하느님께 여지를 드리는 것 말입니다.

우리에게 하느님을 위한 여지는 없습니까? 하느님께 여지를 드릴 여유가 나에게 없습니까? 나로 가득하여 우리에게 하느님을 위한 여지는 없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께 여지랄까 말미를 드리면 그 여지에 하느님께서 성령과 작당하여 모의하실 것이고 그래서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다락방을 박차고 나와
마침내 주님의 예언대로 주님을 증언하게 될 것이며.
오늘 리디아의 마음을 연 바오로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바꿔 주님을 믿게 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뭐든 우리가 끝장내려고 하지 말고,
하느님께 여지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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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선교의 본질적 두 요소
-환대와 보호자 진리의 영-

일기쓰듯 자유롭게 쓰는 강론입니다. 이미 예전에 모범적인 주옥같은 강론들은 너무 많이 써서 나눴기에 이젠 좀 자유롭고 싶습니다. 참 오랜만에 1박2일의 외출이었습니다. 왜관수도원에 5.14일 일찍 출발하여 왜관 수도원 피정집에 도착하여 종신허원 봉헌자 피정 강의하고 5.15일 늦게 귀원하여, 그러나 간발의 차이로 저녁식사는 못했지만 내일 영명축일을 맞이하는 원장수사에겐 축하인사를 전할 수 있었습니다. 아예 저녁은 생략했고 잠시후 끝기도에 참석했습니다.

왜관은 교통이 불편한 곳입니다. 하행시 ktx로 동대구역에 갔다가 무궁화호로 바꿔타 역방향으로 왜관역에서 내렸고 상행시 무궁화호로 동대구역에 갔다가 ktx로 바꿔타 상경했습니다. 착오로 인해 고생도 했습니다. 사정이 여의치 않고 어리석음을 자초하여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왜관 피정집에서 왜관역까지 걸어갔고, 또 착오로 ‘불암동’전 정류장 45번 종점에서 내려 그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수도원 집무실까지 오니 ‘참 서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난생 무거운 캐리어를 가장 많이 끌었던 결코 잊지 못할 날이었습니다. 소득은 안셀모 신부의 두 권의 책을 구입했다는 것과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되어라’ 책의 후기는 정말 감동 깊게 읽었다는 것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이미 제가 35년전 1988년 대학원 석사 논문(Thomas Merton에게 있어서의 그리스도교의 관상觀想-관상觀想에 대한 통전적統全的 이해-)에서 다루기도 했던 분으로 참 심취心醉했던 분이기도 합니다.

오늘 5월15일은 참 각별한 날입니다. 스승의 날이자 세종대왕의 탄생일이기도 합니다. 제가 전주 이씨 영해군 자손인데 영해군은 세종대왕의 17남으로 화목한 것을 좋아하여 다투는 일이 없었다 하니 제가 영해군을 닮았나 봅니다. 참으로 위대한 세종대왕이요 그 평전을 보면 감동 자체입니다. 

또 오늘은 우리 수도원의 원장인 파코미오 신부의 영명축일이기도 합니다. 어제 참 기막힌 일화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영명축일 축하에 늦어질 것 같아 왜관피정집 아름다운 장미꽃들 배경한 성모님 사진과 더불어 보낸 것이 오타로 ‘성모님’을 ‘장모님’으로 보낸 것입니다. 

“왜관 피정집 장모님께서도 기뻐 축하드립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참 난감했습니다. “성모님이 장모님으로 오타가 기막힙니다.” 메시지를 보냈고, “오늘의 화두입니다.” 재차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성모님의 사위’라면 이보다 더 큰 성모님의 사랑은 없을 것이라 속으로 생각하며 웃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본의 아니게 최고의 축일 선물을 보낸 것이니 이 또한 성령님의 은총입니다.

코아노니아(Koinonia)! 참 좋은 말마디입니다. 바로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승들은 오늘 이집트의 공주수도승의 아버지라 칭하는 성 파코미오 아빠스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바로 파코미오 수도 공동체의 뿌리가 되는 코이노니아, 형제들과의 일치를 뜻하는 말마디입니다. 바로 성 파코미오 아빠스의 수도공동체가 코이노니아 공동체였던 것입니다. 

성 파코미오 아빠스가 임종할 즈음에는 그의 수하에 약3000명의 수도자들이 있었고, 2개의 수녀원도 있었지만 사제로 서품되지는 않았습니다. 성인은 전염병이 창궐하던 지역에서 환자들을 돌보다가 전염되어 346년 또는 347년 9월5일에 세상을 떠나니 말그대로 사랑의 리더십을 지녔던 코이노니아의 사람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일년 단위로 나오는 왜관수도원 잡지 이름도 코이노니아이고 요셉수도원을 사랑하여 모인 자매들의 모임 명칭도 코이노니아 자매회입니다. 세종대왕의 17남인 영해군도 코이노니아의 왕자였음을 봅니다.

요셉 수도원 역시 형제애가 넘치는 코이노니아 수도공동체입니다. 어제 귀원해 보니 휴가를 떠났던 세 수도형제가 원장 축일에 앞서 모두 귀원하여 축하해주는 것을 보고 새삼 깨달은 코이노니아 친교의 형제애였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공동체의 특징이 코이노니아입니다. 메타노이아(회개)-코이노니아(친교)-디아코니아(봉사)에서 보다시피 신자생활의 핵심 요소가 되는 코이노니아입니다.

어제 왜관 수도원 수도형제들을 보니 세월의 흐름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많이들 늙었고 흰머리들이 못알아 볼 정도였습니다. 순간 ‘괴물(?)’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믿음의 눈으로 보니 ‘믿음 덩어리’로 보였습니다. 정말 믿음으로 코이노니아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주님 믿음의 전사에 손색이 없는 장한 분들입니다. 그래도 많이 웃으며 기쁘게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웃으면 꽃같은 사람의 얼굴인데 웃지 않으면 괴물같이 보이는 노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때는 순수로 빛났던 젊은이들이었습니다. 노욕老慾이 노추老醜가 되기 쉬운 이치를 깨닫습니다. 그래서 빛나는 젊은이들이 꼰대라 하여 노인들에게 거리를 두는지 모릅니다. 입을 닫고 지갑은 여는 노인이 되라는 말도 생각이 납니다. 나이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합니다.

나중에 남는 얼굴은 둘중 하나일 것입니다. 기도와 사랑으로 코이노니아의 삶을 통해 주님을 닮은 얼굴인가 그렇지 않은 얼굴인가, 참 한결같은 얼굴관리가 얼마나 중요하고 힘든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닮기 위해, 예닮의 여정을 위해 주님의 '영원한 현역'이 되어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형제애의 친교인 코이노니아가 선교에도 결정적 영향을 줍니다. 코이노니아의 사람이 바로 환대의 사람이요, 이런 환대의 사랑을 가능하게 해주는 보호자 진리의 영, 성령입니다. 선교활동에 있어 두 결정적 본질적 중요한 두 요소가 환대와 보호자 성령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바오로에게 세례를 받고 바오로 일행을 환대하는 티아티라시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인 리디아가 환대의 인물이자 코이노니아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리디아는 온 집안과 함께 세례를 받고 나서, “저를 주님의 신자로 여기시면 저의 집에 오셔서 지내십시오.”하고 청했을 때 분명 바오로 일행은 이에 응답했을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겸손한 보호자 성령이 결정적 역할을 했음을 또 깨닫게 됩니다.

이런 환대의 사랑과 영성은 교회 자매님들을 통해 오늘날도 면면히 계승되고 있습니다. 아마 이런 환대의 사랑을, 정신을 실천하는 자매들이 있기에 유지되는 교회요 수도원같습니다. 봉헌금이나 미사예물을 내는 분들은 거의가 자매들이요, 자발적 사랑으로 수도원 봉사하는 분들도 거의가 자매들입니다. 

수도원을 방문할 때도 형제들은 거의 빈손이지만 자매들은 무엇인가 들고 옵니다. 부성애와 모성애의 차이가 천지차이입니다. 코이노니아 자매들의 한가지 공통점은 나이에 상관없이 마음과 얼굴이 꽃같이 예쁘다는 것이니 환대의 영성 덕분일 것입니다. 사실 세상 곳곳에 이런 환대의 사람들이 있었기에 무소유의 선교사들의 선교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환대에 이어 보호자 성령입니다. 이 두 요소의 특징은 “겸손하여 표면에 나서지 않는다(self-effacement)”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진 환대의 영성이요 보호자 성령인지요! 환대의 영성과 보호자 성령이 교회와 선교에 얼마나 고마운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요! 겸손하여 표면에 나서지 않은 성령의 사람들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오늘 복음의 중심 말마디는 보호자 성령, 진리의 영입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살 것이다...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

진리의 영, 성령의 선물이 있어 비로소 참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도 예수님도 모르는 무지의 사람들! 바로 무지에 대한 결정적 답도 보호자 진리의 영, 성령뿐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진리의 영, 성령의 인도따라 살아갈 때 겸손한 사랑의 환대에 주님을 증언하는, 지칠줄 모르는 선교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환대의 사람, 성령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끝으로 “오소서 성령이여”(성가142,494)로 강론을 마칩니다. 성가494장을 수시로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오소서 성령이여, 믿는자의 위로여, 
 우리 마음 깊숙이 사랑의 불을 놓으소서.

 오소서 성령이여 세상을 비추사
 어두운 이 세계를 진리의 불로 밝히소서.

 영혼의 위로자여 괴로움없이하고
 병든자의 실의에 희망의 길을 비추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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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16,1) 

<성령의 이끄심에 나의 온 존재를 내어 맡기자!>

오늘 복음(요한15,26-16,4)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는 말의 의미'는 종종 내 앞에 놓여지는 고통과 시련의 상황을 의미합니다. 

날씨가 변화무쌍합니다. 늘 변합니다. 우리네 인생도 변화무쌍한 날씨와 같지 않을까...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신앙여정 역시 그렇지 않을까...

우리는 기쁨과 고통의 반복된 변화무쌍한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반복된 삶을 통해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선을 향해, 완전한 선을 향해 나아갑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16,1) 

고통 앞에서 우리의 민낯이 드러납니다. 우리의 믿음, 나의 믿음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그러니 고통과 시련은 나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어떤 사람은 찾아오는 고통을 더없는 친구로 여깁니다. 이런 사람은 고통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겪으셔야만 했던 수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고통이 찾아오더라도 떨어져 나가지 않고 참고 견디어 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참신앙인'입니다. 

이런 신자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예수님께서는 보호자,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성령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합니다. 삶으로 예수님을 증언하게 하고, 고통과 시련 앞에서도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합니다.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도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었고, 주님의 엄마, 우리의 엄마이신 성모님도 그랬습니다. 

오늘도 성령을 청하고, 성령의 이끄심에 나의 온 존재를 내어 맡깁시다! 어떠한 고통이 찾아오더라도 성령으로 이겨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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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lb2Y0VJX6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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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요한 15, 26)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증언하시는
진리의 영이
우리 곁에
계십니다.

진리에 눈을
떠야 합니다.

진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실천을 배웁니다.

예수님 안에
영원한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의 
진리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진리의 영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모든 생명은
진리의 영으로
하느님을 
알게됩니다.

하느님을 
알게 해주신
예수님 안에서
진리를 만납니다.

진리의 원천이신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모든 것을
보고 듣고 깨닫게
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을 향한
올바른 시각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성령께서는
지배자의 
입장이 아닌
보호자의
모습으로
도움을 주고받길
원하십니다.

참된 보호는
참된 질서이며
참된 진리입니다.

참된 진리는
참된 관계로
우리를 이끕니다.

사랑도
진리의 영과
함께하지 않으면
길을 잃습니다.

참된 관계
참된 사랑으로
하느님을 드러내는
진리의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진리의 영은
예수님을 향하고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영을
우리에게
보내십니다.

사랑의 보호자
성령께 
신앙의 이 모든
여정을 의탁합니다.

우리에게는
가장 좋으신
보호자가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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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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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화) 부활 제06주간 화요일▢


○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 독서 : 사도행전 16, 22-34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해설) 바오로의 일행이 기도처로 가다가 점 귀신이 들린 여종을 만나 그의 악령을 쫓아 버립니다. 그 여종의 주인은 그녀의 신통력을 이용하여 지금까지 돈벌이를 한 것입니다. 점 귀신이 여종에게서 떠나가 버려 돈벌이의 희망이 사라지자, 여종의 주인은 바오로와 실라스를 붙잡아 광장 법정으로 끌고 가서 고소합니다.


그 무렵 필리피의 22 군중이 합세하여 바오로와 실라스를 공격하자, 행정관들은 그 두 사람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고 지시하였다. 23 그렇게 매질을 많이 하게 한 뒤 그들을 감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24 이러한 명령을 받은 간수는 그들을 가장 깊은 감방에 가두고 그들의 발에 차꼬를 채웠다. 25 자정 무렵에 바오로와 실라스는 하느님께 찬미가를 부르며 기도하고, 다른 수인들은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26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기초가 뒤흔들렸다. 그리고 즉시 문들이 모두 열리고 사슬이 다 풀렸다. 27 잠에서 깨어난 간수는 감옥 문들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고 하였다. 수인들이 달아났으려니 생각하였던 것이다. 28 그때에 바오로가 큰 소리로, “자신을 해치지 마시오. 우리가 다 여기에 있소.” 하고 말하였다. 29 그러자 간수가 횃불을 달라고 하여 안으로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면서 바오로와 실라스 앞에 엎드렸다.
30 그리고 그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두 분 선생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31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32 그리고 간수와 그 집의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말씀을 들려주었다. 33 간수는 그날 밤 그 시간에 그들을 데리고 가서 상처를 씻어 주고, 그 자리에서 그와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 34 이어서 그들을 자기 집 안으로 데려다가 음식을 대접하고, 하느님을 믿게 된 것을 온 집안과 더불어 기뻐하였다.


묵상) 바오로의 일행은 깊숙한 감방에 갇히고, 그들의 발에는 차꼬가 단단히 채워집니다. 바오로의 일행이 기도하면서 주님을 찬미하고 있을 때 갑자기 큰 지진과 함께 감옥의 문이 모두 열리고 쇠사슬이 모두 다 풀립니다. 한밤중에 바오로의 일행 안에 일어난 이 사건은 묶여 있는 자들을 풀어 주시는 주님의 놀라운 응답입니다.


* 화답송 시편 138(137), 1과 2ㄴ. 2ㄱㄷ과 3. 7ㄹ-8(◎ 7ㄹ 참조)
◎ 주님, 당신 오른손으로 저를 구하소서. 또는 ◎ 알렐루야.
○ 주님, 제 마음 다하여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제 입의 말씀을 들어 주시기에, 천사들 앞에서 찬미 노래 부르나이다. 거룩한 성전 앞에 엎드리나이다. ◎
○ 당신은 자애롭고 진실하시니, 당신 이름 찬송하나이다. 제가 부르짖던 날, 당신이 응답하시고, 저를 당당하게 세우시니, 제 영혼에 힘이 솟았나이다. ◎
○ 주님은 오른손으로 저를 구하시나이다.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리라! 주님, 당신 자애는 영원하시옵니다. 당신 손수 빚으신 것들 저버리지 마소서. ◎


* 복음 환호송 요한 16, 7. 13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의 영을 보내리니 그분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시리라. ◎ 알렐루야.


+ 복음 : 요한 16, 5-11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해설) 협조자 성령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계속 수행하시는 분으로서, 세상에 대한 심판과 제자들을 위한 계시 활동을 하십니다. 협조자 성령께서 오시면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서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들추어내어 올바르게 해 줌으로써 세상에 승리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바로 죄 중의 죄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5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6 오히려 내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 7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8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9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10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11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묵상)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이미 하느님의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그 자체가 죄입니다. 이제 곧 예수님이 아버지와 함께 머무심으로써,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 의롭게 되실 것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죄와 정의와 심판에 대해서 바르게 밝혀 주실 것입니다.


+ 영성체 후 묵상
주님께서 감옥에 갇힌 바오로를 구해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도 죄와 죽음에 갇혀있지 않고 참된 자유와 해방과 생명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고난과 환난 중에 주님을 믿고 주님을 부르는 사람을 주님께서는 위로하시고 구해주실 것입니다. 협조자 성령께서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며 구원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0517(수) 부활 제06주간 수요일▢


○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 독서 : 사도행전 17, 15. 22 - 18, 1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숭배하는 그 대상을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려고 합니다.>

해설) 아테네 사람들은 신들을 공경하고 있으면서도 그분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 하느님을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다른 우상들과 함께 공경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무지한 아테네 사람들에게 참 하느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립니다.


그 무렵 15 바오로를 안내하던 이들은 그를 아테네까지 인도하고 나서, 자기에게 되도록 빨리 오라고 실라스와 티모테오에게 전하라는 그의 지시를 받고 돌아왔다. 22 바오로는 아레오파고스 가운데에 서서 말하였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대단한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23 내가 돌아다니며 여러분의 예배소들을 살펴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도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숭배하는 그 대상을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려고 합니다. 24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는 살지 않으십니다. 25 또 무엇이 부족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모든 이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26 그분께서는 또 한 사람에게서 온 인류를 만드시어 온 땅 위에 살게 하시고, 일정한 절기와 거주지의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27 이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게 하려는 것입니다. 더듬거리다가 그분을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28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 몇 사람이 ‘우리도 그분의 자녀다.’ 하고 말하였듯이,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29 이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인간의 예술과 상상으로 빚어 만든 금상이나 은상이나 석상을 신과 같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30 하느님께서 무지의 시대에는 그냥 보아 넘겨 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에 있든 모두 회개해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명령하십니다. 31 그분께서 당신이 정하신 한 사람을 통하여 세상을 의롭게 심판하실 날을 지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리시어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증명해 주셨습니다.” 32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하여 듣고서, 어떤 이들은 비웃고 어떤 이들은 “그 점에 관해서는 다음에 다시 듣겠소.” 하고 말하였다. 33 이렇게 하여 바오로는 그들이 모인 곳에서 나왔다. 34 그때에 몇몇 사람이 바오로 편에 가담하여 믿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아레오파고스 의회 의원인 디오니시오가 있고, 다마리스라는 여자와 그 밖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18, 1 그 뒤에 바오로는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로 갔다.


묵상) 아테네 사람들이 모르고 섬겨온 신은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하늘과 땅의 주인이기 때문에 인간이 만든 신전에 살지 않으십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의 물질적인 봉헌이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주시는 분입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더 이상 알려지지 않은 신이기를 거부하십니다.


* 화답송 시편 148, 1ㄴㄷ-2. 11-13ㄱㄴ. 13ㄷ-14ㄱㄴㄷ
◎ 주님의 영광 하늘과 땅에 가득하네. 또는 ◎ 알렐루야.
○ 하늘 위에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높은 데에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모든 천사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모든 군대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
○ 세상 임금들과 모든 민족들, 고관들과 세상의 모든 판관들아, 총각들과 처녀들도, 노인들과 아이들도, 주님 이름을 찬
양하여라. 그 이름 홀로 높으시다. ◎
○ 주님의 위엄 하늘과 땅에 가득하시다. 그분이 당신 백성 위하여 뿔을 높이셨네. 그분께 충실한 모든 이, 그분께 가까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은 찬양하여라. ◎


* 복음 환호송 요한 14, 16 참조
◎ 알렐루야. ○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는 다른 보호자를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 ◎ 알렐루야.


+ 복음 : 요한 16, 12-15
<진리의 영께서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해설) 예수님의 계시 내용은 성령에 의해 더욱 밝혀질 것입니다. 진리의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진리 안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이런 일이 바로 협조자 성령께서 하시는 역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시하는 진리이며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고 약속한 계시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14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15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묵상) 주님의 성령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계시 내용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입니다. 협조자 성령께서는 계시된 내용을 새롭게 설명해 줌으로써 제자들이 처한 상황을 깨닫게 해 주어 진리를 따라 살게 해 줍니다. 진리의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전하여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 영성체 후 묵상
진리의 성령께서 우리를 깨우쳐 주셔야만 주 하느님을 올바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누구나 알아차리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 안에 전해집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의 은사와 그 열매만을 간절히 원할 것입니다. 

  
2023년 05월 17일 수요일
▢서울대교구 조창수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010-8889-5425
제목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5.18)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요한16,16) 

'하느님의 나라인 민주화!'

오늘 복음(요한16,12-15)은 '이별의 슬픔과 재회의 기쁨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강림'의 의미로 들려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강림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입니다. 부활의 절대적 전제가 죽음이며, 성령강림을 통한 회개의 절대적 전제가 예수님의 승천인 떠남의 사건입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16,7) 

예수님의 떠나심으로 오신 성령께서 제자들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다락방에 숨어 있었던 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모습으로 대변신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믿어야 할 교리의 핵심을 성령께서 온전히 깨닫게 해 주신 결과입니다. 

성령은 고통을 고통으로만 보지 않게 해 주고 그것을 뛰어넘게 해줍니다. 오늘 독서(사도18,1-8)를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듯이 박해는 또 다른 지역으로의 복음이 전해지게 하는 도구입니다. 

"여러분의 멸망은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나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다른 민족으로 갑니다."(사도18,6) 

박해로 인해 복음이 예루살렘 교회 밖으로 전해지게 되었고, 유럽으로, 우리나라로, 온 세상으로 전해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마흔세 번째 기억하는 5.18의 고통과 박해'는 모두가 함께 잘사는 하느님 나라의 모습인 민주화의 결정적 초석입니다. 

"주님, 불의에 맞서 항거하다가 불쌍하게 희생된 수많은 5.18 연령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 2열왕 15,16)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부활 제6주간 금요일>(5.19)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16,16)

'이겨내는 자 되자!'

오늘 복음(요한16,12-15)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말씀으로 '이별의 고통과 재회의 기쁨에 대한 말씀'입니다.
'요한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수난 예고와 부활에 관한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16,20)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늘 우리 안에 있는 고통과 기쁨을 이해시키시기 위해, 해산할 때에 산모가 겪는 고통과 해산 후에 겪는 기쁨을 비유로 들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었고, 이 뜻에 예수님께서 순종하셨기 때문에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아들 예수를 죽음에서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은 지금도 늘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미사를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고통에서 기쁨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통의 친구와 함께하기가 참으로 힘이 듭니다. 이 친구는 나를 통해서, 나 때문에 왔습니다. 그리고 너를 통해서도 오고, 어떤 때는 이해할 수도 없는 모습으로 찾아옵니다. 

고통 앞에서 드러나는 나의 모습은 어떠한 모습인가?

우리 안에는 '두 부류의 모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곧 '이겨내는 자와 이겨내지 못하는 자!' 

이겨내는 자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 라는 노랫말처럼 고통이 지나가기를 바라면서 참고 기다립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이겨냅니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굳게 믿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지금 여기에서 겪고 있는 고통을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이겨내는 자 됩시다!'

(~ 2열왕 15,3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16,20)  


이겨내는 자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 라는 노랫말처럼 고통이 지나가기를 바라면서 참고 기다립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이겨냅니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굳게 믿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지금 여기에서 겪고 있는 고통을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이겨내는 자 됩시다!'
<부활 제6주간 토요일>(5.20)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요한16,24) 

'무엇을 청했는가?'

오늘 복음(요한16,23ㄴ-28)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16,23-24) 

무엇을 청했는가?
무엇을 청하고 있는가? 

이상합니다. 우리는 매일, 아니 매순간 많은 것들을 청하고 있는데, 그것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고 있는데,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니 참으로 이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을 놓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하신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31-33) 

오늘 복음은 내 뜻 안에만 갇혀 있고, 내가 원하는 것에만 갇혀 있음에 대한 예수님의 강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먼저 사랑하고, 내려놓고, 낮아지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뜻(의로움)인데, 이것을 먼저 청하지 않은 것에 대한 예수님의 강한 일깨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대충 믿고 대충 살아서는 결코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영원한 생명에 이르지 못합니다. 우리가 우물 안 개구리처럼 내 뜻 안에만 갇혀 있으면 결코 완성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 2열왕 15,38)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