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사의 은혜/부활

<부활 제5주일>(5.7) -생명주일-"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14,6)


<부활 제5주일>(5.7) -생명주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14,6) 

오늘 복음(요한14,1-12)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생명 주일'입니다.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들은 모든 삶의 중심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놓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죄(罪)는 '예수님의 부재(不在)'입니다.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 안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고, 예수님의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면서 종종 갈등과 혼란의 순간들을 마주합니다. 고통과 죽음의 순간들을 마주합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나 상식적으로 볼 때 있을 수 없는 일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 안에서 보면 '모든 일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일도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갈등과 혼란과 고통과 죽음의 상태를 마주하는 첫째 이유는 내 안에, 공동체 안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예수님의 부재'입니다. 그리고 '잘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등과 분열과 고통이라는 죽음의 상태를 마주하게 될 때, 먼저 나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너를 바라보며 심판하거나 판단하기보다는, 그 일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고, 내 안에 예수님의 부재는 없었는지를 바라보면서 성모님처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믿는 이들에게 가르쳐 주신 문제 해결 방법'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문제가 해결되어 죽음의 상태에서 벗어나 생명(부활)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더 큰 문제와 더 큰 죽음의 상태'를 마주하게 됩니다.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이십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는 선택된 값진 돌이십니다."(1베드2,5) 

'생명 주일'을 맞이하여 내 안에, 공동체 안에 예수님께서 계신지를 먼저 곰곰이 성찰해 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부활 제5주간 월요일>(5.8) -어버이날-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14,21) 

'예수님의 사랑법!'

오늘 복음(요한14,21-26)은 '사랑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간은 사랑을 먹고사는 존재들입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어느 노래의 노랫말처럼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받으려면 사랑을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의 사랑법은 좀 특이합니다. 
왜냐하면 내 방법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방법대로 사랑해야하기 때문입니다.

복음 안에 드러난 예수님의 사랑법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 바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라고 널리 알려진 '평화의 기도'입니다.

<평화의 기도>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사랑을,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의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좋을대로, 내 방법대로 사랑하면서 사랑이신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평화의 기도' 안에 드러난 것처럼 예수님의 사랑법은 참으로 쉽지가 않습니다. 결코 말로 다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부활 제5주간 화요일>(5.9)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14,27) 

'평화이신 예수님!'

오늘 복음(요한14,27-31)은 '평화에 대한 말씀'입니다.
요즘 우리가 듣고 있는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의 여정, 곧 육화(肉化.탄생)와 땀(공생활)과 죽음과 부활의 여정을 모두 마치시고 하늘로 오르시는 승천을 앞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14,27)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세상이 주는 평화가 같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어떤 평화인가?' 
'예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는 평화는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는 평화인가?'

예수님은 평화 자체이십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싸움이 없고 불편함이 없는 평화가 아닙니다. 우리의 나약함 때문에 찾아오는 환난 앞에서, 성모 엄마처럼 먼저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고 노력할 때, 그 결과로 주어지는 평화입니다. 

오늘 독서(사도14,19-28)는 이방인의 사도인 바오로 사도가 선교지에서 겪고 있는 환난의 상황입니다.
예수님께 돌을 던졌던 유다인들이 복음을 전하고 있는 바오로 사도에게 몰려와 그에게 돌을 던집니다. 하지만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사도14,22) 하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환난이 없는 평화가 아니라, 환난이 있는 평화이며, 환난 뒤에 찾아오는 평화입니다. 가장 큰 환난인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뒤에 찾아온 평화인 부활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충만하시길 빕니다. 

*우리의 나약함 때문에 찾아오는 환난 앞에서, 성모 엄마처럼 먼저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고 노력할 때, 그 결과로 주어지는 평화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환난이 없는 평화가 아니라, 환난이 있는 평화이며, 환난 뒤에 찾아오는 평화입니다. 가장 큰 환난인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뒤에 찾아온 평화인 부활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충만하시길 빕니다. 아멘 !!!
♣복음말씀의 향기♣ No3486
5월10일[부활 제5주간 수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제 어디서든 주님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으로 인해 충만한 생명력으로 넘쳐나고 있습니까?>

몇 년 전 이맘때 150여 그루의 매실나무를 심었습니다. 그저 작은 꼬챙이 같은 묘목을 땅에 꽂으면서, 제 마음속으로 긴가민가했습니다. 과연 이 연약한 친구들이 자리를 잡을 것인가? 혹독한 추위와 강풍을 잘 이겨내고 무럭무럭 성장할 것인가?

그런데 1년이 지나고 2년이 넘어가면서,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별로 해준 것도 없는 데, 키가 성큼 성큼 자라났습니다. 원줄기 굵기도 굵어지고, 이리저리 가지가 뻗어 나가더니, 드디어 올봄에는 그리도 기다렸던 매화꽃이 눈물겹게 피어났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대견스럽고 감사하던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십여 그루 남짓 되는 묘목들은 채 뿌리를 내리지 못했습니다.비실비실, 시들시들해지더니 말라 죽고 말았습니다. 미안한 마음 한 가득이었지만, 흉물이 된 친구들을 그냥 두기도 뭣해 뽑아 버렸습니다. 아직도 서 있는 묘목들은 잘 챙겨야지 하면서, 퇴비도 뿌려주고, 지지대도 세워주고, 잔가지도 쳐주고, 이런저런 케어를 시작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요한 복음 15장 1~2절)

우리는 모두 주님 포도밭에 서 있는 한 그루 작고 미약한 묘목들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지속적으로 주님 포도밭에 머물면서, 원줄기이신 그분께 딱 붙어 있어야겠습니다.

우리가 비록 한없이 작고 나약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그분 가까이 머무르고, 그분과 굳게 결속되어 있을 때,
그분으로부터 넘치는 생명력과 활기를 무상의 선물로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주 우리 얼굴 상태를 확인해 볼 일입니다. 주님과의 결속이 해이해지면서 우리의 영혼이 시들시들,
메말라가는 것은 아닙니까? 언제 어디서든 주님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으로 인해 충만한 생명력으로 넘쳐나고 있습니까?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살면서 이유 없이 마음이 공허한 이유>

제가 신학교 1학년 때 충격을 받았던 것은 한 신앙심 깊은 자매님의 고백 때문이었습니다. 그분 자녀들은 물론이요, 남편과 자신까지 성당에 잘 다니고 봉사도 잘하고 가정도 부유했고 겉으로 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새벽마다 일어나 앉아 혼자 운다는 것입니다. 자신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마음이 그냥 공허하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은 알 것 같습니다. 그분은 영혼을 하느님 아닌 것에 팔았던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누군가를 위해서 삽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건, 부모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이념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내가 하는 노력의 보상을 해 줄 능력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마치 그런 능력이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나에게 관심도 없고 그런 보상을 해 줄 능력도 없습니다. 그런 것들을 위해서 살아가니 영혼이 채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영혼은 오로지 성령으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엔진이 연료가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마음은 하느님의 영으로만 만족할 수 있습니다. 

영화 ‘데블스 애드버킷’(Devil's Advocate)은 1997년 개봉한 미국의 슈퍼 내추럴 법정 스릴러 영화입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케빈 램시(Kevin Lomax)는 젊고 유망한 변호사로, 그의 재능과 치열한 진취 정신으로 승승장구하는 변호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어느 날, 그에게 유력한 뉴욕 로펌에서 일할 기회가 찾아옵니다. 케빈은 아내 메리 앤(Mary Ann)과 함께 뉴욕으로 이사하여 로펌에서 일하기 시작합니다. 로펌의 소유주이자 선임 변호사인 존 밀턴(John Milton)은 케빈의 능력과 열정을 인정하여 그에게 많은 지지와 도움을 주며, 케빈은 더욱 빠르게 성공의 길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메리 앤은 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점점 정신적인 문제를 겪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케빈은 존 밀턴이 악마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점점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존은 케빈에게 더 큰 권력과 부를 얻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하지만, 그 대가로 케빈의 영혼을 요구합니다. 케빈은 점점 더 유혹에 빠져듭니다. 그리고 아내와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은 점점 죽음의 그늘에 묻히게 됩니다. 

공갈 젖꼭지는 아무리 빨아도 영양분 있는 모유가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는 노력은 반드시 보상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보상을 줄 수 없는 대상을 위해 일하면 보상을 받을 수 없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사람은 육체적 인간과 영적 인간으로 나뉩니다. 육체적 인간은 육체적 보상을 바라며 일하는 사람이고 영적 인간은 영적 보상을 바라며 일하는 사람입니다. 육체적 인간은 육체적 보상을 바라기에 마음의 평화나 기쁨은 무시합니다. 영적 인간은 마음의 평화를 바라고 일하기에 육체적 노고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꽉 찬 마음으로 살고 싶다면 영적 인간이 되는 길을 택해야 합니다. 

육체적 인간에서 영적 인간으로 변화되는 순간이 세례입니다. 내가 누구냐에 따라 육체적 인간, 영적 인간이 바뀝니다. 내가 하늘의 존재라 믿으면 영적 인간이고 내가 단순한 인간으로 믿으면 육체적 인간입니다. 이 믿음이 어떤 보상을 바라며 일하느냐를 결정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늘의 사람이 될까요? 하늘의 뜻에 “Yes!” 하면 됩니다. 성모님께서 가장 먼저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보상을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는 일입니다. 일하는 사람은 일을 청하는 사람에게 예! 하는 게 맞습니다. 

영화 ‘예스맨’의 줄거리입니다. 칼 앨렌(Carl Allen)은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은행 직원입니다. 그는 일상생활에서 피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항상 '아니오'를 택해 별다른 사건이나 변화를 겪지 않고 있습니다. 어느 날, 칼은 예전 친구에게 초대를 받아 '예스 세미나'에 참석하게 됩니다. 세미나의 강사 테렌스 번덴(Terence Bundley)는 참가자들에게 인생에서 모든 기회를 포용하고 경험해야 한다고 말하며 '예'를 말해야 한다고 전한다. 칼은 이를 따르기로 결심하고, 일상생활에서 모든 것에 '예'라고 응답하기 시작합니다.

예스맨이 되기 전의 칼은 삶에서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멀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를 말하기 시작한 이후로 칼의 삶은 크게 변화합니다. 그는 새로운 경험을 할 기회가 찾아오며, 언어 수업, 무료 여행, 오케스트라 공연 등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 덕분에 칼은 긍정적인 생각과 자신감을 회복하게 되고, 인생에서 새로운 가능성과 기회를 찾게 됩니다.

특히 칼은 앨리슨(Allison), 사랑스러운 여성을 만나게 되고 그녀와 함께 뜻깊은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하지만 모든 것에 '예'라고 대답하는 것이 항상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습니다. 칼은 결국 어떤 상황에서는 거절해야 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며, 그를 둘러싼 인생의 균형을 되찾게 됩니다.

내적 인간, 영적 인간, 예스 맨이 되는 길은 모든 것에 예스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에는 예스 하고 그것과 반대되는 뜻에는 노를 하는 삶입니다. 분별이 없다면 그것은 육적 인간도, 영적 인간도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뜻에 언제나 예스를 하여 내적 평화를 누리며 사는 우리가 됩시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지난 2021년 10월 10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주교 시노드) 16차 정기총회 개막미사를 거행했습니다. 시노드는 지역별, 대륙별 논의 과정을 거쳐서 2024년에 대단원의 막을 내릴 예정입니다. 시노드의 목적은 시대의 징표를 읽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식별하는 것입니다. 지금 속한 한국교회와 제가 머무는 미국의 이민자 교회는 장소는 다르지만 비슷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미사 참례율의 감소, 냉담자의 증가, 교회와 멀어지는 청소년들, 수도자와 성직자 성소의 감소, 교회의 급격한 고령화, 가난한 이들에게 높아진 교회의 문턱, 예비신자의 감소, 열정이 식어가는 신앙’과 같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지역은 다르지만, 세계 교회 역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세속주의와 물질 만능주의, 인간의 탐욕에 의한 기후변화와 지구온난화, 점점 심화하는 부익부 빈익빈의 문제, 전쟁과 독재로 인한 난민의 증가, 신자의 감소와 고령화로 인해서 문을 닫는 교회의 증가, 성직자들의 스캔들’과 같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교황님은 시노드 개막미사의 강론에서 교회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제시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만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가오는 사람을 조건 없이 만나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데리고 온 중풍병자를 만나셨습니다. 자비를 청하는 소경을 만나셨습니다. 마귀가 들린 사람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을 마귀 들렸다고 모함했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도 만나셨습니다. 두려워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도 만나셨습니다. 예리고로 가던 제자들도 만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고민하던 부자 청년도 만나셨습니다. 문제의 해결은 만남에서 시작됩니다. 두 번째는 ‘경청’입니다. 마음에 방음벽을 쌓아 놓는 만남에서는 문제가 해결 될 수 없습니다. 편견을 가지는 만남에서는 문제가 해결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는 편견 때문에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이 전문가라는 방음벽을 쌓아 놓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새로운 권위를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교회의 많은 문제 역시 방음벽과 편견에 가로막혀서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편견과 방음벽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적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경청은 공감과 측은지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굳건한 믿음을 보여 주었던 백인대장과 이방인의 여인을 칭찬하시면서 “이런 믿음은 어떤 이스라엘 백성에게서도 볼 수 없었다.”라고 하셨습니다.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빚진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다고 했던 자캐오를 칭찬하시면서 “오늘 이 집은 구원 받았다.”라고 하셨습니다. 나자로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며칠 동안 먹지 못했던 굶주린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시면서 먹을 것을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쳤던 군중들을 향해서도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식별’입니다. 
부정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려고 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여러분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시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인에게 “나도 너의 죄를 묻지 않겠다.”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고 물었던 율법학자에게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의 규정으로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죄인으로 취급했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초대교회는 시대의 징표에 직면했습니다. 음식 나눔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의 불평과 불만이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본 것처럼 이방인들의 할례에 대한 문제도 있었습니다. 오늘 교회는 첫 번째 ‘시노드’를 개최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모임을 갖기로 하였습니다. 교회는 만남, 경청, 식별의 과정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방법입니다. 저 역시도 만남, 경청, 식별을 통해서 저에게 주어지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아무리 좋은 가전제품도 전원이 들어오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문제들은 결국 하느님과 소통을 통해서 풀어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면서 풀어갈 수 있습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5,1-8: 내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는 참포도나무요.”(1절) 아들은 우리가 아들 안에서 열매를 맺도록 우리에게 참포도나무가 되셨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며 당신과 결합함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얻는지 보여주시고자 하신다. 당신을 포도나무라 하시며 그분과 결합한 이, 그분 안에 뿌리를 내린 이 그리고 성령 안에서 그분께 결합한 이들은 가지이다. 가지들은 포도나무와 연결됨으로써 포도를 맺는다. 아버지께서는 농부로서 말씀의 쟁기로 우리 마음을 갈아엎고, 계명의 씨앗을 뿌리고 열매가 맺히기를 기다리신다.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2절) 사랑에서 나오는 선행으로 우리가 단단히 결합하지 못하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죽은 가지가 될 것이고, 쓰레기처럼 태워 버릴 것이다. 열매를 맺는 가지는 아버지의 세심한 보살핌으로 더 큰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신다.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4절) 가지가 포도 줄기로부터 생명의 수액을 받지 못한다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우리도 우리를 기르시는 분과 결합하여 있다면, 생명을 주시는 물과 같은 성령으로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 안에 머물러야 한다. 가지는 자신의 생명 수단이 되는 것을 나무에서 취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 안에 머무시는 것은 제자들을 위한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5절) 우리는 나약하므로 우리가 선행하려 해도 선을 베푸시는 분 없이는 아무것도 완성할 수 없다.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다. 그때 그는 많은 열매도 적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무르면, 우리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신다(7절 참조). 우리는 언제나 그분의 말씀 안에 머물러야 한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8절)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때, 아버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때, 우리는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들이 될 것이다. 아드님께서 그렇게 사셨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하셨다. 선행이 인간의 힘만으로는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시는 것은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때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에페 2,10)라고 한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
 
[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요한 15,1-6)

이 말씀은, ‘약속’이면서 동시에 ‘경고’입니다. <신앙생활을 끝까지 충실하게 한 사람에게는 구원과 생명을 주겠다는 약속이고,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잘라내겠다는 경고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올리브 나무에서 몇몇 가지가 잘려 나가고, 야생 올리브 나무 가지인 그대가 그 가지들 자리에 접붙여져 그 올리브 나무 뿌리의 기름진 수액을 같이 받게 되었다면, 그대는 잘려 나간 그 가지들을 얕보며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그대가 뿌리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그대를 지탱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대는, ‘가지들이 잘려 나간 것은 내가 접붙여지기 위해서였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들은 믿지 않아서 잘려 나가고 그대는 믿어서 그렇게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만한 생각을 하지 말고 오히려 두려워하십시오. 하느님께서 본래의 가지들을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면, 아마 그대도 아까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로마 11,17-21)

이스라엘 민족이냐, 이방 민족이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자만심에 빠져서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잘릴 것이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 구원받을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는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도”입니다.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겉으로는 교회에 속해 있고, 교적에는 신자로 등록되어 있어도,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은 교회 밖에 있는(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라는 말씀은, “심판 때에 하느님께서 멸망을 선고하실 것이고”라는 뜻입니다. “열매를 맺는 가지”는 “끝까지 제대로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고, “깨끗이 손질하시어”라는 말씀은 “은총을 더욱 풍성하게 내려 주시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하느님께서 어떤 시련이나 시험을 주시는 말로만 생각하는 것은 너무 좁은 생각이고, 틀린 생각입니다.>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구원하신다.”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구원과 생명을 받는 사람들 사이에는 어떤 차이나 차별이 없기 때문에, ‘더 많은 열매’는 ‘구원의 은총의 풍성함’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해석됩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열매가 아니라.> ‘열매’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착각하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열매를 맺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점입니다. 마르코복음에 있는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가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마르 4,26-29)

우리가 할 일은, 하느님(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는 일을 하실 때, 구원받는 당사자로서 능동적으로 그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위한 일이니 내가 협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라는 말씀은,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는 신앙인들에게 하신 말씀인데, 신앙인들이 구원받을 준비가 되어 있음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일 뿐이고, 목적지에 도착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라는 말씀은, 신앙생활이란,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생활이고, 동시에 예수님을 자기 안에 모시는 생활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한 마디로 줄이면,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생활입니다.>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라는 말씀과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예수님 없이는 아무도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앞의 14장에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었으면서도, 자만심에 빠져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다른 곳을 바라보면서 한눈을 파는 사람도 있고, 다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안 듣는 사람도 있습니다.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라는 말씀은 심판과 처벌의 무서움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 심판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분께서는)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마태 3,12) 여기서 ‘쭉정이’는 겉으로는 신앙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즉 껍데기만 신자인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탈렌트의 비유’를 보면, 주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종에게 다음과 같이 준엄한 선고를 내립니다.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25,30) 울며 이를 갈 것이라는 말은, 후회와 절망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런 말씀들은 단순히 겁주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 알곡이 되라는, 또 쓸모 있는 신앙인이 되라는 ‘호소’입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광야의 포도송이”(호세 9,10)처럼 보잘것없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데려오시어 약속의 땅에 심어 주셨지만(시편 80[79],9-12 참조), 이들은 들포도만 맺을 뿐(이사 5,2 참조) 거룩함과 정의라는 열매를 맺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참포도나무”라고 하십니다. 참포도나무는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구원을 맺는 나무입니다. 농부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예수님께 접붙이셨고, 우리는 삶의 결실을 오직 그분과 함께 얻을 뿐입니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나 혼자서는 결국 볼품없는 들포도를 맺기가 일쑤입니다.

제1독서에서 유다계 신자들은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를 강요하며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도에게 맞섭니다. 그들은 할례를 계약의 표징으로 명시한 율법 때문에 심각한 갈등을 겪지만,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다 같이 충실히 머물렀기에, 구약의 그루터기에서 잘라 내어 ‘접붙이기’ 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잘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열매 맺는 가지일수록 더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는 농부이십니다. 잘못된 열망과 나만의 고집에 접붙은 나를 ‘가지치기’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이 때로 매섭게 느껴질지라도, 늘 새롭게 주님의 말씀과 뜻에 나를 접붙이는 용기를 냅시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소중한 참포도 열매가 되어, 쓰러진 이웃의 상처에 붓는 ‘치료 약’이요(루카 10,34 참조) 가족과 이웃의 기쁨과 사랑을 북돋는 잔치의 ‘음료’로(요한 2,10 참조)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
 
[원주교구 이형호 베드로 신부님]

<우리는 주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주님의 자녀들입니다.>

아이들은 부모님 곁에서 떨어지기를 싫어합니다. 부모님이 자신을 지켜주고 계심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변에 부모님이 안 보이면 이내 울음을 터뜨립니다.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곧 오실 거란 말로 달래보지만 울음을 그칠 줄 모릅니다. 부모님의 얼굴을 보고나서야 울음을 그칩니다. 그때야 안심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함께 계심을 느끼지 못할 때 불안을 느낍니다. 아이들과 다른 것은 주님은 항상 우리 곁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떠나는 것은 우리들 자신입니다. 주님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은총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미사 중에 신자들이 ‘하느님의 어린양’ 기도를 드릴 때 사제는 영성체 전 기도를 드립니다. 그 기도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계명을 지키며 주님을 결코 떠나지 말게 하소서.”

우리는 주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주님의 자녀들입니다. 주님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입니다.


=====================

[성바오로수도회 김태훈 리푸죠 신부님]

<예수님과 성모님과 우리는 하나>

예수님은 당신을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초점을 맞추어 당신과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나무와 가지를 분리해 말씀하시지만 사실 나무와 가지는 하나입니다. 아무도 가지와 나무를 별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은 나뭇 가지를 꺾을 때 나무가 아파하는 걸 느끼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불에 던져지는 잘린 가지를 말씀하실 때도 예수님의 마음은 그들에 대한 깊은 쓰라림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은 특히 죄인들을 부르러 오셨으며 당신의 목숨보다 우리를 더 소중히 여겨주십니다.

92년 전 5월13일, 바로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사람들에게 다시 일깨워 주시려고 파티마에서 성모님이 우리를 방문하셨습니다. 발현을 본 세 아이는 가시로 둘러싸여 여러 군데 찔려 있는 심장, 곧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성모님의 마음을 보았고 세상에서 수없이 저질러지는 죄 때문에 이렇게 고통을 당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성모님은 지옥에 떨어지는 불쌍한 죄인을 구하려는 예수님의 원의를 알려주시고, 사람들이 죄를 지어 주님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초대하셨습니다. 그리고 죄인들을 위한 기도와 보속과 희생을 요청하면서, 스스로 바치는 희생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고통과 어려움도 기쁘게 참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어려움을 너무 인간적으로만 판단하는 데 익숙해 있지 않은지요? 하느님은 우리를 늘 돌보십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는 것은 그분의 허락하심이 있기 때문이고, 그것은 나와 내 이웃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 비유로 우리가 당신과 하나라는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이렇게 귀하게 여겨주시니 이제 우리 편에서도 그분과 하나 되기만을 바라야 합니다.

저도 희생과 고통으로 사도 바오로처럼 사람들을 구하려는 그분 수난의 남은 부분을 제 희생과 고통으로 채우겠다고 말할 수 있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유다 출신 어떤 사람들의 가르침은 안티오키아 교회에 혼란을 줍니다. 선민의식과 편견은 하느님의 구원을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습에 매어 놓고, 사람들을 분리하고 편을 가릅니다. 

오늘 복음은 마치 유다에서 내려온 이들처럼, 잘못 이해된 신앙을 맹신하여 나의 신념과 반대되면 가짜이며, 하느님의 구원조차도 내 생각과 다르면 얻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답을 줍니다.

우리는 ‘내가’ 주님 안에 머물러 그분께 청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좁은 사고 안에 ‘주님을’ 가두려는 유혹을 자주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기도만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내가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의 제자가 되어, 나를 따르며 내가 청하는 것만을 들어주는, 옛날 이야기속의 도깨비방망이 같은 존재로 착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 이는 하느님과 우리의 신비로운 만남과 관계를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은 우리를 주님과 떨어질 수 없게 하며, 그분 안에 머무르게 합니다. 선민사상이 아니라, 분리와 구분의 삶이 아니라, 용서와 호의를 통한 사랑의 삶이 우리를 주님의 집으로 초대합니다. 이러한 주님의 초대로 오늘 화답송의 시편 저자의 말은 곧 우리의 말이 됩니다.

“‘주님의 집에 가자!’ 할 때, 나는 몹시 기뻤노라. 예루살렘아, 네 성문에 우리 발이 이미 서 있노라.”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우리는 흔히 기도한다고 하면 무엇을 청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무엇을 달라고 합니다. 나의 바람을 정해 놓고 그것을 꼭 이루어 달라고 하소연할 때가 많습니다. 내 것이 관철되었을 때 비로소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알게 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나를 한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내가 만든 ‘신념’이나 ‘가치체계’에 머물지 않고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 안에 머물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실천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달라는 기도에 익숙해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입니다. 
 
레지오 마리애 선서문을 보면서 한 차원 더 높은 기도를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선서문은 “지극히 거룩하신 성령이시여, 당신의 위대한 목적을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제 영혼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시어 이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성모님의 사랑과 뜻에 일치하게 해 주소서…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제 안에서도 자라시게 해 주소서…. 이 세상과 영혼들에게 그리스도를 모셔다드리게 해 주시고…… 복되신 성 삼위의 영광 안에 살게 해 주소서…… 당신께서 저를 받아 주시고 저를 써 주시며 저의 나약함을 굳센 힘으로 만들어 주시리라 확실히 믿으며 다짐하나이다.” 하고, 이어서 충실한 봉사와 규율에 대한 엄격한 복종을 선서합니다. 
 
개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봉헌의 기도요, 예수님을 가슴에 모시고 성령께 각별한 사랑을 드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일깨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과의 일치를 통해서 효과적인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달라고 매달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먼저 그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신 그분과 하나가 되려면 사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느님께 빌면 무조건 이루어지리라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고 맹목적인 신앙 논리를 펼치지 않고 주님의 뜻을 찾으며 더 많이 사랑하려고 애써야 하겠습니다. 기도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습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나의 할 일은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충성심을 바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원의가 이루어지려면 먼저 타인 지향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바람이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과 일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와 사랑으로 철저히 하나가 되셨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당신 스스로 인간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께 열려있고 그분과 하나 되어 살아간다면 우리의 모든 바람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기 전에 그분과 일치의 상태를 살펴야 합니다. 때가 되면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입니다. 
 
포도나무와 그 가지는 붙어 있을 때 생명력을 지닙니다. 열매는 가지에 달리지만 가지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몸통이 튼튼하므로 가지의 열매도 튼실합니다. 포도나무는 전체고, 가지는 부분입니다. 부분과 전체는 나뉠 수 없는 사이입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제자의 관계를 이어주는 것은 ‘사랑’과 ‘순명’입니다. 우리의 관계도 그러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의 명을 좇지 않는다면 그는 참 제자가 아닙니다. 안 될 때 안 되더라도 최선을 다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좇아 살다 보면, 우리 인생에 알찬 열매가 맺을 것입니다. 주님 안에 머물러 원하는 바를 다 이루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제가 기도할 때 더 많은 것을 바라고 구하기보다 문간에 있는 것들, 곧 먹을 것과 마실 것, 부드러운 비, 드맑은 하늘, 가정과 친구, 평화와 기쁨, 무엇보다 사랑에 감사하도록 가르쳐 주십시오. 모든 것은 당신의 것, 오로지 당신의 뜻대로 그것들을 처리하소서.”하고 기도하며 오늘을 봉헌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신혼부부가 부부싸움을 했습니다. 이 싸움의 원인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 바로 치약 때문이었습니다. 치약을 위에서부터 쓰는 남편을 보고 아내는 왜 아래에서부터 짜지 않느냐며 화를 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치약을 아래에서부터 짜야 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면서 따진 것입니다. 둘은 이 문제를 가지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한 시간 넘게 싸웠습니다. 
 
그 뒤로 이 신혼부부는 치약 때문에 싸우는 일은 없어졌다고 합니다. 어떻게 했기에 한 시간 넘게 싸울 정도로 타협이 도저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치약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까요? 남편이나 아내 쪽에서 양보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둘은 전혀 양보하지 않았지만, 각자가 만족할 방법을 찾았기 때문에 싸울 일이 없어졌습니다. 답은 무엇일까요? 답은 치약 두 개를 사서 각자 쓰고 싶은 방식으로 쓰는 것이었습니다. 
 
한쪽이 양보해서 어느 한쪽의 방식으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이렇게 했다면 어느 순간 다시 ‘치약’ 싸움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양쪽 모두를 만족하는 방식을 통해 가정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평화는 다른 의견을 하나로 모았을 때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상대를 인정하고 함께 사는 법을 터득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은 “평화가 너희와 함께”였습니다. 주님께 큰 실망을 줬던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를 “틀렸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이 평화를 잃어버렸던 것은 “틀렸다”라는 생각 때문이 아닐까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이 “틀렸다”라고 생각했고, 예수님을 배신한 자신들이 “틀렸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평화를 간직할 수가 없어 다락방에 숨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요한 15,5)라고 말씀하시지요. 주님께서 포도나무면, 가지인 우리에게서 나오는 열매로 무엇이 나와야 할까요? 사과, 배, 귤, 바나나 같은 다른 열매가 나와야 할까요? 아닙니다. 주님께서 포도나무이니, 우리는 포도를 열매 맺어야 합니다. 즉, 주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모습을 철저하게 따라야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만들 수 있습니다. 따라서 ‘평화’를 먼저 전해주신 주님의 모습을 따라, 우리 역시 이웃들과 함께하며 ‘평화’를 전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틀린 마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인정하고 지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함께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평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하십니까? 평화롭습니까?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무르며 함께해야 하는 것처럼, 이웃들과 함께 사는 법을 먼저 생각하고 실천해야 진정한 평화를 간직할 수 있게 됩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나>

요한 15,1-8 (나는 참포도나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하나>

멀리서
가까이

가까이
곁으로

곁에서
안으로

깊숙이
스미어

드디어
하나다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또 쓰레기'?>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이상하다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다 열매 맺는 줄 알았는데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가 있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그런데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 한 다 열매를 맺을 것 같은데 붙어 있는데도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도 그럴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몸은 수도공동체 안에 있는데, 겉에서 보면 주님 안에서 사는 것 같은데 수도복만 입고 있고 그래서 껍데기만 사는 경우입니다.

매일 미사에 참례하여 하느님 말씀을 듣지만, 귀로만 들을 뿐 말씀을 자양분 삼지 않고 성체를 영하지만 입으로만 영할 뿐 거기서 힘을 받지 못하는 거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 말씀을 놓고 볼 때 우리가 열매를 맺는 살아있는 가지가 되기 위해서는 그저 붙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물고 주님도 우리 안에 머무시게 해야 합니다.

또 몸뚱이, 껍데기만 수도원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영혼, 얼과 넋이 참으로 주님 안에 머물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깊이 들어와 있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무엇을 허하고 있습니까? 우리 안에 무엇이 머물게 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십니까, 아니면 어떤 다른 잡놈입니까?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습니까, 아니면 누가 내게 한 말이나 밖의 잡다한 소리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까?

또 주님께서는 당신 안에 머물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어디에 머물고 있습니까? 주님의 성전 안을 거닐고 있습니까, 아니면 저잣거리나 인터넷 가상공간을 떠돌고 있습니까?

그리고 주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주님 없이 무엇을 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열심히 노를 저었는데도 제자리를 맴돌 뿐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닙니까?

사실 주님 안에 머물지 않는 나와 주님 말씀이 내 안에 머물지 않는 나와 그래서 주님 없이 무엇을 하는 나는 말라버린 샘과 같습니다.

그래서 저의 오늘 말씀 나눔도 주님 말씀의 샘에서
길어 올린 말씀이 아니라 저의 건조한 생각의 나열은 아닌지, 인터넷상의 많은 말들처럼 사람들이 읽지 않고 지나쳐버리고, 그래서 아무 열매 맺지 못하는 ‘또 쓰레기’인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깨달음의 여정, 자아초월의 여정-

"생명의 샘이 진정 당신께 있고,
우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나이다."(시편36,10)

 
어제는 참 아름답고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예전의 전형적인 5월 날씨같았습니다. 성모성월 5월에 계속되는 신록과 꽃들로 가득한 파스카의 계절입니다. 어제 코이노니아 자매회 월례 모임도 있었고 회원도 늘어 이젠 12명, 열두 사도 숫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가장 행복한 분들이고 축복 받은 분들입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일년중 가장 아름다운 날, 가장 아름다운 곳 수도원에, 가장 아름다운 분, 파스카의 예수님을 만나고자 수도원 피정을 선택한 가장 아름다운 자매님들입니다.”

강론 시작전 드린 내용입니다. 미사시 입당성가는 244장을 부르도록 부탁했고 퇴장 성가 역시 244장 나머지를 부르니 너무 잘 어울렸습니다. 어제 따라, 나이에 무관하게 꽃처럼 아름다운 자매님들 모습이었습니다. 

“성모성월이요 제일 좋은 시절, 사랑하올 어머니 찬미하오리다. 가장 고운 꽃모아 성전 꾸미오며, 기쁜 노래 부르며 나를 드리오리.”

젊음은 나이에 있는 게 아니라 하느님을 찾는 열정의 사랑에 있습니다. 어제 '소띠' 동갑의 12세 연상의 열심한 수녀님께 드린 덕담의 메시지도 생각납니다.

“사랑하는 수녀님은 영원한 현역에, 영혼은 언제나 영원한 청춘이십니다. 축하드립니다.”

제가 요즘 가장 많이 용감하게 사용하는 “사랑하는”이란 말마디입니다. 메시지나 강복할 때 이름앞에 꼭 붙입니다. 이렇게 고백으로 던져 놓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백대로 됩니다. 우선 내 부정적이 어둔 마음이 청소되고 정말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니 주님의 은총입니다. 새삼 사랑 역시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알고 보면 모든 것이 사랑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무지도 허무도 욕망도 아닌 사랑이요 말씀입니다. 사랑이, 말씀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사랑을 추구하고 진리의 말씀을 공부합니다. “둥근 삶 둥근 마음”도 사랑이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에 대한 답도 사랑입니다. 이 둘은 제가 쓴 두권의 책명이기도 합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 세 번째의 책 제목 역시 기막힙니다. 

이제 마지막 책을 낸다면 “하루하루 살았습니다”가 될 것입니다. 하루하루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어제 쓴 “꽃처럼, 별처럼” 짧은 시에 만족했습니다. 

“꽃처럼
 살라고 땅에는
 꽃!

 별처럼
 살라고 하늘에는
 별!”

“꽃처럼, 별처럼”이 상징하는 바 사랑입니다. 하늘에는 별, 땅에는 꽃, 사람에는 사랑입니다. 요즘 한국은 어디나 파스카의 기쁨 가득한 신록에 꽃세상의 천국입니다. 여기 수도원도 온갖 꽃들이 만발합니다. 파스카의 봄철에는 유독 노란꽃들이 많습니다. 노란 색깔의 파스카의 꽃들입니다. 요즘 수도원 곳곳에는 샛노란 애기똥풀꽃들이 한창입니다. 예전 써놨던 시중 ‘민들레꽃’을 ‘애기똥풀꽃’으로 ‘뒤뜰’ 마당은 ‘앞뜰’로 고쳐 쓴 시입니다.

 “어!
  땅도 하늘이네
  구원은 바로 앞에 있네

  앞뜰 마당
  가득 떠오른
  샛노란 별무리 애기똥풀꽃
  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네”-2001.4.16.

꽃사랑으로 살라고 땅에는 꽃들이요, 별사랑으로 살라고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입니다. 잠깨어 밤에 ‘자비의 집’ 숙소 문을 나설 때 맨먼저 바라보는 하늘의 별들이요, 그 다음은 하늘 배경의 언제나 거기 그 자리, 35년 동안 수도원에 정주하면서 늘 함께 해온 사랑, 불암산佛巖山 평생 도반道伴입니다. 사랑밖에 답이, 길이 없습니다. 사랑은 분별의 잣대요, 율법의 완성입니다. 오늘 복음 첫마디로 참 멋집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이 농사農事입니다. 주방장이 좋아야 식사食事가 좋고, 사제가 좋아야 성사聖事도 좋습니다. 이 모두에게 우선적 조건이 사랑입니다. 좋은 농부는, 좋은 주방장은, 좋은 사제는 사랑이 많은 사람입니다. 직업중 가장 하느님의 사랑과 인내를 닮은 사람이 생명을 다루는 농부農夫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 유난히 눈에 띄는 “내 안에 머무르라”는 말마디입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더 구체적으로 “내 사랑 안에 머물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이 구구절절 너무 은혜로워 생략할 수가 없습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참으로 주님과 상호내주相互內住, 사랑의 일치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포도나무가 상징하는바 주님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공동체를 떠난 개인은 얼마나 무력한지요! 이래서 ‘1인 가구’를 보완할 수 있는 ‘생활동반자법’의 실현이 절실합니다. 주님 사랑의 공동체에 일치가 깊을수록 생명력 왕성한 삶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참 고무적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주님 사랑의 말씀대로 실천하며 살면 하느님의 뜻대로 청하는 것이 될 것이니 모두가 응답이요 만사형통萬事亨通의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사랑의 열매 풍성한 삶이 우리 인생의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사랑의 열매가 주님의 제자임을 확증하고, 아버지께 영광이 됨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사랑이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복된 본질이 사랑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예루살렘에서의 사도회의를 다루고 있습니다. 개종한 이방인 신자들이 유다인들처럼 할례와 율법을 지켜야 하느냐가 첨예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아직은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반영합니다. 역시 깨달음의 여정을 통해 점점 너그러워지고, 자비로워지고, 지혜로워지고, 겸손해지고,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판단의 잣대는 할례나 율법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도회의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 주는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참으로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를 때 일거에 해결되는 문제들입니다. 그러니 주님 사랑 안에 머물수록 순조로운 “깨달음의 여정”에 주님을 닮아 올바른 분별입니다.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깨달음의 여정은 “자기초월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주님 사랑 안에 날로 깊이 머물수록 마음도 넓고 깊어져, 너그럽고, 자비롭고, 지혜롭고, 겸손하고, 자유로운 삶이겠습니다. 날마다 주님과 사랑의 일치를 깊이하는 미사은총이 이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모든 피조물아, 주님을 섬겨 드려라. 너희는 주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노라."(유딧16,14ㄱ) 아멘.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I3ko8SqG9pc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요한 15, 5)

주님께
제 몸과 
제 마음을
맡깁니다.

머무름은
사랑입니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맡길 수 없고
사랑하지 않고서는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머무름은 
생명입니다.

살아있기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머무름과 함께
우리는 자라고 
머무름 안에서
가장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머물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기쁨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주님 안에
머무르는
머무름의 
길입니다.

머무름이
평화입니다.

머무름의
또 다른 이름은
믿음입니다.

머무름을
잊고 살았습니다.

머무름을
알려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머무름을 통해
주님을 만납니다.

머무름의
주님께
오늘을
맡깁니다.

가장 좋은
열매를
맺어주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가지와 열매는
압니다.

포도나무이신
주님께서
이 모든 일을
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열매를 주시고
사랑을 주시고
가장 좋은 
생명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요한15,5) 

<철부지들이 되자!>

오늘 복음(요한15,1-8)은 '참포도나무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15,1.5) 

붙어 있는가? 머물러 있는가?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참포도나무에 붙어있고,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의 생각과 말과 행위 안에 머물러 있는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굳게 믿고, 죽음 저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생명'을 간절히 희망하고, 지금 여기가 '지옥이 아닌 천국인 하느님의 나라'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은 늘 이 질문들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고, 이 질문들에 답을 얻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세례가 구원의 절대적 전제가 되지 못합니다. 세례의 합당한 열매인 삶이 따라주어야 합니다. 나의 믿음이 자존심이나 잘남이나 사람에 의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분의 생각과 말과 행위 안에' 붙어 있어야 하고,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삶 속에서 깊이 체험하고 있듯이 이것이 참으로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그래서 구원의 이르는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우리는 가지입니다. 단순하게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철부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11,25) 



▢0511(목) 부활 제05주간 목요일▢
○너희의 기쁨이 충만하도록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 독서 : 사도행전 15, 7-21
<내 판단으로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해설) 하느님께서는 이방인들도 복음을 믿게 하시고 또 성령을 그들에게도 내리셔서 유다인들과 똑같이 인정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유다인과 이방인 사이에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으십니다. 예루살렘 사도회의의 결정은 유다인이나 이방인이나 똑같이 사랑하시고 당신 자녀로 받아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재확인한 것입니다.
 

그 무렵 7 오랜 논란 끝에,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에게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다른 민족들도 내 입을 통하여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하느님께서 일찍이 여러분 가운데에서 나를 뽑으신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8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시어 그들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9 그리고 그들의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화하시어,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으셨습니다. 10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11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12 그러자 온 회중이 잠잠해졌다. 그리고 바르나바와 바오로가,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통하여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표징과 이적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13 그들이 말을 마치자, 야고보가 이렇게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14 하느님께서 처음에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당신의 이름을 위한 백성을 모으시려고 어떻게 배려하셨는지, 시몬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15 이는 예언자들의 말과도 일치하는데,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6 ‘그 뒤에 나는 돌아와,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다시 지으리라. 그곳의 허물어진 것들을 다시 지어 그 초막을 바로 세우리라. 17 그리하여 나머지 다른 사람들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다른 모든 민족들도 주님을 찾게 되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하고 이 일들을 실행하니, 18 예로부터 알려진 일들이다.’ 19 그러므로 내 판단으로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말고, 20 다만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상에게 바쳐 더러워진 음식과 불륜과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멀리하라고 해야 합니다. 21 사실 예로부터 각 고을에는,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모세의 율법을 봉독하며 선포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묵상) 하느님께서는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방인에게도 똑같은 성령을 내리시고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마음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만민을 골고루 사랑하시는데, 편견을 가진 인간들이 서로를 무시할 따름입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해방하시는 반면에, 어리석은 인간들은 서로를 억압합니다.


* 화답송 시편 96(95), 1-2ㄱ. 2ㄴ-3. 10(◎ 3 참조)
◎ 모든 민족들에게 주님의 기적을 전하여라. 
○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세상아. 주님께 노래하여라, 그 이름 찬미하여라. ◎
○ 나날이 선포하여라, 그분의 구원을. 전하여라, 겨레들에게 그분의 영광을, 모든 민족들에게 그분의 기적을. ◎
○ 겨레들에게 말하여라. “주님은 임금이시다. 누리는 정녕 굳게 세워져 흔들리지 않고, 그분은 민족들을 올바르게 심판하신다.” ◎


* 복음 환호송 요한 10, 27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 알렐루야. 


+ 복음 : 요한 15, 9-11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해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당신 제자들을 사랑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계명에 충실하면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한 것처럼, 제자들도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묵상) 하느님은 사랑으로 온 세상을 창조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 주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참사랑을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사랑의 삶을 삽니다.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사랑을 실천합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할 때 우리의 이름은 '사랑'입니다.


+ 영성체 후 묵상  
사람들은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지극히 이기적인 사랑을 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그 사랑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조금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구체적으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지키며 살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을 것입니다.


2023년 05월 11일 목요일
▢서울대교구 조창수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010-8889-5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