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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은혜/연중시기

<연중 제18주일>(2022.7.31)'공수래공수거 인생'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면서, 내려놓음과 나눔을 통해 나의 인생이 좀 더 의미있는 인생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연중 제18주일>(7.31)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루카12,20)
오늘 복음(루카12,13-21)은 '탐욕을 조심하여라.'는 말씀과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입니다. 군중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주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이르십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12,15)

그리고 탐욕을 드러내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어서 탐욕을 드러내는 부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12,20)
오늘 제1독서에서 코헬렛의 저자는 말합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1,2)

우리네 인생이 허무이지 않을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인생의 덧없음(허무)을 크게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좀 더 의미 있는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더 깊이 만날 수 있었고, 주님 안에서 의미 있는 인생을 사셨던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더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지금은 교구사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4,14)

그러니 자만하지 맙시다!
그러니 탐욕을 드러내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맙시다!
그러니 현세의 삶을 살면서도, 저 위에 있는 것을 바라보고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합시다!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인간은 언젠가 반드시 떠나가야만 하는 인생들입니다.
'공수래공수거 인생'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면서, 내려놓음과 나눔을 통해 나의 인생이 좀 더 의미있는 인생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
[티모테아고모님] [오후 2:15] 긴급 릴레이 기도 요청이 푸른군대 마산교구 본부에서 들어와 전달드립니다. 
기도 부탁드려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위기의 우리나라를 구하기 위해 천번의
성모송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대는 한번의 성모송 하시고 다른 10명에게 보내주십시오.
끊이지 않게 해주세요.
아주 힘있는 기도이거든요.

릴레이 기도입니다~


꼭 10명이 아니라도 몇명만 이라도 보내주세요

성모송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중에 복되시며
태중에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8.1)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마태14,20)
'빵의 기적!'
8월의 첫 날인 오늘은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를 창설하신 '성 알폰소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분들과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에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 복음(마태14,13-21)은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사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마태14,19-20)
이 기적사화, 이 빵의 기적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먼저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권능'입니다. 그리고 배고픈 사람들과 어려운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이는 또한 우리를 통해 하느님의 권능이 드러나야 하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어려운 이웃에게 측은지심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빵을 들어 찬미하고 또 빵을 떼어 주셨다.'는 말씀을 통해 오늘날 교회가 미사 중에 거행하는 '성찬례의 모습'을 앞당겨 전하고 있습니다.
배고픈 이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분!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께로 향해 있어 예수님의 마음이 되면 '빵의 기적'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빵의 기적은 이기심을 벗어난 '나눔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영적 배고픔과 갈증의 상태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이 해방을 우리에게 주시는 해방자 그리스도 예수님을 찾고 갈망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먼저이고 첫째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진 결과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배불리 먹이는, '빵의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나를 통한 빵의 기적이 일어나기를 희망합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18주간 화요일>(8.2) -포르치운쿨라-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14,27)
오늘 복음(마태14,22-33)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말씀입니다. 어제 복음인 '빵의 기적'이나 오늘 복음인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은 예수님의 '하느님성(신성)'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는 제자들 쪽으로 가십니다. 제자들이 그 모습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소리를 질러 댑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14,27)
'맞바람이라는 고통' 속에서 힘들어 하고 있는 우리에게 구원자이신 주님께서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고통 속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과연 그것에(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태14,38)

오늘은 프란치스칸 전례력으로, '포르치운쿨라'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포르치운쿨라'는 '작은 몫'이라는 뜻인데, 이곳에서 프란치스코가 공동체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이곳을 다른 어느 곳보다도 사랑했고, 유언으로 이렇게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나의 아들들이여, 절대로 이 자리를 떠나지 않도록 하십시오. 이곳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그래서 지금까지 포르치운쿨라를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가 지키고 있습니다.

'작은 몫, 포르치운쿨라!'
예수님처럼, 그리고 예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려고 했던 성 프란치스코처럼, 작은 몫을 사랑하고, 작은 몫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작은 몫(작은 것)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작은 것에 관심을 두고 작은 것을 선택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용기와 힘'을 불어 넣어주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고 선택하여라."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여, 작은 몫을 선택한 이들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18주간 수요일>(8.3)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마태15,28)
'고통의 신학!'
오늘 복음(마태15,21-28)은 '가나안 여자의 믿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 지역인 티로와 시돈 지방에 가셨을 때,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예수님과 대화합니다. 그 대화는 이렇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감탄하신 것처럼, 가나안 여자의 믿음은 참으로 컸습니다. 먼저 이방인 여자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시다.'는 믿음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완전히 개무시 당하는 큰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께로 향한 이 믿음에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녀의 이 큰 믿음에 예수님께서 크게 탄복하십니다.

우리의 믿음, 나의 믿음은 어떤가?
작은 고통과 작은 무시에도 쉽게 흔들리는 우리의 믿음은 아닌지?

고통 앞에서 우리의 민낯이 드러납니다.
고통 앞에서 우리의 믿음이 드러납니다.
그러니 고통이 고통이 아니고, 고통은 지금 나의 민낯과 믿음을 보게 해 주는 도구이며, 구원으로 이끄는 스승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통의 신학'입니다.

언젠가 겪었던 큰 고통 앞에서 포기하지 않고 견뎌냈던 그 순간을 지금 여기에서 다시금 돌이켜 보면, 그 고통이 큰 감사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안에는 고통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고통 앞에서 쉽게 넘어지거나 포기하지 말고, 가나안 여인처럼 큰 믿음을 드러냅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8.4)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16,16)
오늘은 '본당 사제들의 수호성인'이신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1786년 프랑스 리옹에서 태어나신 비안네 신부님은 평생을 겸손하고 가난한 삶을 사셨고, 신부님을 찾아오는 많은 신자들에게 영적 가르침과 고해성사를 잘 베푸셨다고 합니다. 아마도 신부님의 이런 열정적인 모습이 본당 사목을 하고 있는 사제들이 갖추고 있어야 본질적인 모습이기에, 비안네 신부님을 '본당 사제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고 생각합니다.

본당 사제들은 신자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때로는 한없는 자비로, 때로는 엄한 채찍으로 신자들을 구원으로 인도합니다.
오늘 복음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말씀'(마태16,20)과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예고'(마태16,21-23)입니다.
베드로가 천당과 지옥을 오갑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예수님 물음에,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완벽한 신앙고백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반석이라는 칭호를 얻고,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시면서, 하늘 나라의 열쇠를 베드로에게 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받아들이지 않자, 예수님으로부터 아주 호되게 야단 맞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16,23)

지금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베드로의 신앙고백처럼, 예수님은 나의 스승님이시고, 지금 나와 함께 계신 살아계신 분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나를 살리시는 그리스도이신가?
그리고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으로 굳게 믿고 있는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이 물음에 멋진 답을 찾아보는 복된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18주간 금요일>(8.5)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16,24)
'예수님처럼!'
오늘 복음(마태16,24-28)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예고 뒤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죄에 죽고 영적으로 새롭게 다시 태어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나는 예수님을 따르고 싶지 않다.' 라는 의미와 같습니다.

거듭거듭 말씀드리지만, 신앙인들은 지금 여기에서,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나는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가서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마태16,21)
예수님께서는 세상 모든 이들의 구원을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지금 여기에서 너를 위해 죽어야 합니다. 내 뜻을 내려놓고 너를 품어 안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이 전하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16,24.26)
'신앙의 신비여!'
신앙은 신비입니다.
신앙은 내가 죽어야 살 수 있고 부활할 수 있다는 역설의 신비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위해, 나를 위해 사람이 되시고 땀 흘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핵심 가르침입니다.
또한 이것이 바로 매일 드리는 미사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이며, 성경 전체(73권)가 말하는 핵심 가르침입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9.15) -창조시기 15일째-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19,26)
'엄마의 십자가!'
아들의 고통은 '엄마의 고통'입니다.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는 '엄마 마리아의 십자가'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오늘은 마리아의 이 결정적인 순종의 응답을 시작으로 예수님의 여정에 끝까지 함께 하신 성모님의 고통, 특히 아들 예수님께서 매달리신 십자가 아래에서 겪으신 성모 마리아의 고통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어제는 아들의 고통, 아들의 십자가를 기억했고,
오늘은 엄마의 고통, 엄마의 십자가를 기억합니다.

시메온 예언자는 성모님의 고통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2,34-35)
한 생을 아들 예수님과 함께하신 성모 어머니!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아드님 곁에 서서 아들의 십자가의 고통을 함께 나누신 성모 어머니!
그리고 지금은 우리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계신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 어머니이신 성모 어머니께 감사드리며, 성모 어머니를 공경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님을 우리의 어머니가 되게 해 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래서 우리도 성모 어머니처럼 예수님 수난에 함께 동참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웁니다.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맘속에 주님상처 깊이새겨 주소서.
저를위해 상처입고 수난하신 주님고통 제게나눠 주소서.
사는동안 십자고통 성모님과 아파하며 같이울게 하소서.
십자곁에 저도서서 성모님과 한맘으로 슬피울게 하소서.
동정중의 동정이신 성모님의 크신슬픔 저도울게 하소서.
주님상처 깊이새겨 그리스도 수난죽음 지고가게 하소서."
(부속가 중에서)

이병우 루카 신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8.6)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루카9,29)
'나도 거룩하게 변모하자!'
오늘은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인,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만을 따로 데리고 기도하시러 타볼산에 오르십니다. 그곳에서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예수님의 모습이 변합니다.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옷은 빛처럼 하얘집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이 믿는 이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예수님 부활 사건의 예표'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결과요 하느님 아버지의 은총'인 '예수님의 부활을 미리 보여주는 거룩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 참으로 힘이 들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들겠지만, 그 뒤에 영광스러운 부활이 기다리고 있으니, '견디어 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도 나날이 거룩하게 변모하는 회개가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9,35)
'공소성전재건축'이라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지금 모든 것이 힘든 상황인데, 이런 상황 속에서 이 일을 '추진해야 되나? 말아야 하나?'를 놓고 참 많이 고민을 했습니다. 결론은 마중물이 되어 주시겠다는 어느 천사를 주님께서 보내주셔서. 그리고 이것이 하느님의 집이고 하느님의 일이니까. 그리고 또한 이것이 주님께서 제게 주신 십자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영적물적으로 많은 형제자매님들이 도와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참 잘 살아야겠구나!' 하는 마음 다짐을 새롭게 합니다.
어느 수녀님께서 제게 이런 문자를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저 열심히 살기만 하면 되겠지요!"

이번에 시작한 '성전재건축'을 제가 더 변모하는, 더 회개하는 좋은 기회로 삼겠습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