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주일 The Advantages of Having Jesus As a ‘Family Friend’ 예수님을 ‘가족 친구’로 삼았을 때의 혜택들 - 칸탈라메사 추기경 - 1독서: 이사 62:1-5 2독서: 1 코린 12:4-11 복음: 요한 2:1-11 연중 제2주일 복음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선 결혼식 초대를 응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으셨을까요? 첫째, 그렇게 함으로써 그분께서는 남자와 여자의 결혼을 존중한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주셨으며, 그것은 창조주께서 원하시고 축복하신 사랑스러운 행위임을 암묵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다른 것을 가르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오심으로 세상은 예언자들을 통해 약속된 ‘새롭고 영원한 계약’이라 불리는 하느님과 인류의 신비한 결혼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는 상징과 현실이 만난 것입니다. 두 젊은이의 결혼식은 우리에게 또 다른 결혼식, 곧 십자가에서 ‘그분의 시간’에 이루어질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혼식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남녀의 결혼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고 싶다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에페소서 5:25-33에서 사도 바오로가 말씀하신 것과 같이 노력해야 합니다. 바오로의 말씀에 따르면 모든 결혼의 근간과 중심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남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오늘날 우리는 결혼에 사랑에 기인해야 한다는 말을 거의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이는 단지 한 세기 전만 하여도 보편적으로 인식되지 않았습니다. 수백 년 동안 결혼은 가족간의 거래이자 재산의 보장하고 밭에서 일할 수 있는 인력을 보장받는 수단이자 사회적 의무였습니다. 결혼식의 주인공은 부모나 가족이지 주로 결혼식 당일에 만나는 배우자가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에페소서에서 반복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 앞에 교회를 티나 주름 같은 것 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게 하시며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 했습니다. 이 맥락에서도 인간 남편이 그리스도 신랑을 본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는 아내의 주름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 네, 그는 할 수 있습니다. 부족한 사랑으로 만들어지는 주름이 있습니다. 배우자에게 여전히 중요한 인물로 여겨지는 사람에게는 주름이 없으며, 그들에게 있는 주름은 다른 종류의 주름으로 아름다움을 배가시켜줍니다. 그리고 아내에게로 돌아가서 그들이 본보기인 교회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교회는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랑을 위해서만 자신을 아름답게 합니다. 그녀는 신랑 그리스도를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하며 그분을 찬양하는 데 지치지 않습니다. 이것은 남편과 아내에게 그들의 존경과 찬사는 배우자에게 매우 중요한 것임을 상기시킵니다. 남편에게 존경과 찬사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그들의 일, 사회 기술, 용기, 가족에 대한 헌신에 대해 한 마디도 감사하지 않고, 그들이 정치인이라면 그들이 말하는 것을, 그들이 작사라면 그들이 쓰는 것을, 그들이 예술가라면 그들이 창작하는 것을 깎아내리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사랑은 감사에 의해 커지고 감사 없이는 죽습니다. 신성한 관계(예수님과 교회)가 인간 배우자에게 강조하는 것이 또 있습니다. 바로 충성입니다. 하느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신실하십니다. 오늘날 신실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누구도 감히 다루지 못하는 난해한 주제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많은 결혼 생활이 무너지는 주된 원인은 바로 이것, 즉 불성실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간음은 결혼 위기의 원인이 아니고 결과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미 부부 사이에 남은 것이 없기에 배신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악순환의 부분입니다. 결혼 생활이 이미 끝났기 때문에 배신한다고 하지만 처음엔 마음으로 배신하면서 결혼 생활이 끝이 나게 된 것입니다. 이 현실의 가장 혐오스러운 부분은 배신한 사람이 모든 잘못을 상대방 탓으로 돌리고 피해자 역할을 한다는 점입니다. 이제 복음 말씀으로 돌아가 봅시다. 여기에는 모든 부부, 최고의 부부를 위한 희망이 있습니다. 모든 결혼 생활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와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포도주로 상징되는 열정과 기쁨으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가나의 포도주와 같이 처음의 열정은 시간이 지나면 소모되어 고갈되기 시작합니다. 이후 모든 일은 사랑이 아닌 습관으로 이루어집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회색빛의 구름이 결혼 생활을 덮고 맙니다. 슬프게도 서로에게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 포도주가 남지 않았습니다.’ 복음 말씀은 배우자가 이런 상황에 빠지지 않는 방법이나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바로 예수님을 혼인 잔치에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함께 계신다면 우리는 가나에서의 기적을 반복적으로 요청할 수 있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바꾼 것과 같이, 습관, 일상, 냉기의 물을 사랑과 기쁨의 포도주로, 처음의 포도주보다도 더 좋은 포도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혼인 잔치에 초대하는 것’은 가정 안에서 함께 기도하고, 성사를 함께 지키고, 교회 생활에 함께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부가 종교적으로 항상 같은 상황에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한 사람은 신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신자가 아니거나 적어도 같은 정도로 교회 생활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경우,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 친절과 존경, 그리고 사랑과 삶의 항구함으로 다른 이를 초대하여, 예수님이 두 사람의 친구가 되게 하십시오. ‘가족 친구’로 말입니다. |
<연중 제2주일>(1,16)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2,5) '기적을 만들자!' 오늘 복음(요한2,1-11)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첫 번째 표징(기적)을 일으키신 말씀'입니다. 갈릴래아 카나에서 있었던 혼인잔치에서 중요한 포도주가 떨어집니다. 성모님께서 이 사실을 예수님께 알립니다. "포도주가 없구나."(요한2,3) 그러자 예수님께서 성모님께 말씀하십니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2,4)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개의치 않고 일꾼들에게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2,5)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이시고 일꾼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물독에 물을 채워라. ... 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요한2,7.8)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적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곧 당신 자신이 사람의 아들이자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은총(기적)의 전구자요 협조자이신 성모님, 우리 신앙의 결정적 모범이신 성모님의 신뢰와 믿음 안에 머물러 봅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는 성모님의 이 말씀 안에는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인 참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대한 성모님의 무조건적 신뢰와 말씀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드러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성모님께서 보여주신 이 신뢰와 믿음이 기적의 원천이라는 메시지를,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 보이는 너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지금 여기에서 기적을 만든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기적, 하느님의 은사가 실현되는 기적을 만들어 봅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
<성 안토니오 아빠스 학자 기념일>(1,17)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2,22c) '단식의 참의미!' 오늘 복음(마르2,18-22)은, '단식 논쟁과 새것과 헌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르2,1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느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함께 단식할 것이다."(마르2,19-20) '혼인 잔치와 신랑!' 이것은 '구원의 상황',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 상황',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상황'인 '부활의 기쁨'을 의미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는 단식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단식은 단순히 입으로 먹는 무엇인가를 멈추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단식의 본질적인 의미는 오늘 복음의 끝 말씀인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라는 말씀 안에 있습니다. 곧 '일일신우일신'(나날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오늘 나에게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기 위해서 '깨끗한 영혼이 되는 것', '그렇게 되려고 애쓰는 행위'가 바로 '단식의 참의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첫 번째 임금인 사울에게 말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1사무15,22) 주님 안에 머무는 것, 주님 말씀 안에 머무는 것, 이것이 '단식의 참의미'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 |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이근후(이화여대 명예교수) 살면서 중요한 말은 "Here & Now"이다. 나는 의대교수였다. 79세의 노인이다. 정신과 전문의로, 50년간 15만 명의 환자를 돌보고, 학생들을 가르쳐 왔다. 퇴직 후, 왼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의사였음에도 불구하고, 당뇨병, 고혈압, 통풍, 허리디스크, 관상동맥협착, 담석 등 일곱 가지 중병과 고달픈 스트레스를 벗삼아서, 어쩔 수 없이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남은 한쪽 눈으로, 아침이면 해를 볼 수 있고, 밤이 되면 별을 볼수 있다. 잠이 들면 다음날 아침에 햇살을 느낄 수 있고, 기쁨과 슬픔과 사랑을 품을 수 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남의 아픔을 아파해 줄 수 있는 가슴을 가지고 있다. 세상을 원망할 시간이 없다. 지팡이 짚고, 가끔 집 밖으로 산책을 했다. 한쪽 눈이지만, 보이는 것만 보아도, 아름다운 것이 많았다. 지금은 다리에 힘이 없어 산책이 어렵지만, 계절이 바뀔 때마다 보이는, 앞산 수풀 색깔이 아름답다. 감사하다. 인생이란 바로 '여기(here)'와 지금(now)'이다. 행복을 느낄 시간과 공간과 사람은 바로 지금이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함께 하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한번이라도 더 웃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내가 바로 즐거움이다. 살아보니까 그렇다. 뇌 속에서 행복을 만드는 물질은 엔돌핀이다. 엔돌핀은 과거의 행복한 추억 때문에, 생기는 게 아니다. 바로 지금 지금 내가 즐거워야, 엔돌핀이 형성된다. 사람이 어떻게 늘 행복하기만 하느냐고 묻는 이들도 있다. 그런 이분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제 죽은 사람들이 하루라도 더 살기를 원했던, 그 소중한 시간에, 나는 오늘에 살고 있다. 감사하다. 지금 비록, 괴롭고 슬퍼도 한가닥 희망을 만들어 보자. 지금 살아 있음에 즐겁고, 만날 수 있음에 감사하자. 지나간 세월은 많이 어렵게 살았더라도,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다 행복했던 거라고, 나이든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짜릿하게 행복한 시간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지나간 그 추억으로 사는 것 같다. 본인이 괴로움을 겪어 봐야, 행복이 뭔 줄 알고, 행복할 줄 안다. 인생살이 살면서 오늘, 지금, 여기가, 제일 중요하다라는 말이 맞는 말 같다. "내가 지금 아내 없이 살아 보니까, 아내가 있을 땐 정말 몰랐는데, 아내가 옆에 없으니, 젓가락 한 쪽이 없어진 거나 똑같은 거야...!! 그러니까 "있을 때 잘해"라는 말을 많이 들었었는데, 그럼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리 장인이 하신 말씀인데, "나에게 주어진 대로, 지금 현재에 감사하면서, 현실을 받아들이면 모든 것이 다 보여." 행복의 답은 "바로 지금(Now) 여기(Here) 내 가슴"에 담겨 있다. 고개 들어, 저 멀리 하늘을 한번 보자. 지금에 감사하자!! 지금에 행복하자!! 지금에 충실하자!! |
<연중 제2주간 화요일>(1,18) -일치 주간-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2,28) '율법의 본질이신 예수님!' 예수님 공생활 내내 논란의 한 중심에 있었던 것이 바로 '율법 논쟁'이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고 있었다고 자부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두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분, 아니 그 이상인 율법 파괴자로 여겼고, 십자가 죽음으로까지 내몰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율법의 정신과 본질에 대해 말씀하셨고, 그 정신과 본질로부터 멀어져 있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2,24)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 밀 이삭을 뜯는 모습을 두고 한 바리사이들의 지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지적에 대해 안식일의 정신은 사람을 살리는데 있고, 율법이 아닌 사람이 중심이고, 사람의 아들인 예수님 당신이 중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위에 계시는 분이시고, 율법의 본질이신 율법 그 자체이십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에서 이사이의 여덟 아들 중에서 '다윗'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겉을 보시는 분이 아니라, 본질인 속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잘 그리고 충실하게 따라가는 신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부터 사도 바오로의 회심 축일인 1.25까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일치 주간'입니다. 갈라져 있는 교회, 곧 가톨릭과 동방교회(1054년)와 프로테스탄트인 개신교(1517년)와 성공회(1534년)가 율법 자체이시며 율법의 본질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된 교회가 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 |
<연중 제2주간 수요일> -일치 주간- "손을 뻗어라."(마르3,5)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고 있었던 사람들, 곧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 구원의 행위를 보고, 곧바로 나가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합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내라.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주님이 엿새 동안 ...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탈출20,8-11)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이 안식일 규정에 근거하여 예수님과 끝까지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3,4) 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입을 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보시고 몹시 슬퍼하시면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안식일은 '주님의 날인 주일'입니다. 주일은 '구원의 날'입니다. 주일은 '다시 태어나는 날'이며, '죄를 용서 받고 부활하는 날'입니다. '주일은 쉽니다!' 안식일인 주일은 단순히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쉬는 날이 아니고, '구원과 다시 태어남과 부활이 함께하는 날'이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살고 싶어 합니다. 지금의 약함과 아픔을 이겨내고 다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합니다. 나와 너 그리고 모두가 죽지 않고 함께 살기 위해서, 주일을 거룩하게 지냅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 |
초 월 탓하지 마라 바람이 있기에 꽃이 피고 꽃이 져야 열매가 있거늘 떨어진 꽃잎 주워들고 울지 마라 저 숲, 저 푸른 숲에 고요히 앉은 한 마리 새야, 부디 울지 마라. 인생이란 희극도 비극도 아닌 것을 산다는 건 그 어떤 이유도 없음이야. 세상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는 부와 명예일지 몰라도 세월이 내게 물려준 유산은 정직과 감사였다네. 불지 않으면 바람이 아니고 늙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고 가지 않으면 세월이 아니지. 세상엔 그 어떤 것도 무한하지 않아 아득한 구름 속으로 아득히 흘러간 내 젊은 한때도 그저 통속하는 세월의 한 장면일 뿐이지. 그대, 초월이라는 말을 아시는가? 노년이라는 나이!!! 눈가에 자리잡은 주름이 제법 친숙하게 느껴지는 나이. 삶의 깊이와 희로애락에 조금은 의연해 질 수 있는 나이 잡아야 할 것과 놓아야 할 것을 깨닫는 나이. 눈으로 보는 것 뿐만이 아니라 가슴으로도 삶을 볼 줄 아는 나이. 자신의 미래에 대한 소망보다는 자식의 미래와 소망을 더 걱정하는 나이. 여자는 남자가 되고 남자는 여자가 되어가는 나이. 밖에 있던 남자는 안으로 들어오고 안에 있던 여자는 밖으로 나가려는 나이. 여자는 팔뚝이 굵어지고 남자는 다리에 힘이 빠지는 나이 나이를 보태기보다 나이를 빼기를 좋아하는 나이. 이제껏 마누라를 이기고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마누라에게 지고 살아야 하는 나이.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서도 가슴에는 한기를 느끼는 나이. 먼 들녘에서 불어오는 한 줌의 바람에도 괜시리 눈시울이 붉어지는 나이. 겉으로는 많은 것을 가진 것처럼 보이나 가슴속은 텅 비어가는 나이 |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1.21, 금) -일치 주간- "예수님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마르3,14) '제자와 사도!'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제자(mathetes)'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하느님의 나라와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apostolos)'로 뽑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뽑으신 열두 사도들의 직업이나 모습을 보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 어부와 세리와 열혈당원 등과 같이 평범한 직업을 가진 소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지막 때인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 예수님을 두고 도망갔던 사람들이었고, 예수님을 의심하고, 배반하고, 십자가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골고타로 향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조차도 지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런 사람들을 사도로 뽑으셨을까???' 첫째, 예수님께서 그들을 원하셨기 때문에. 둘째, 그런 사람들을 구원하러 오셨고, 약함을 통한 모두의 구원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에. 셋째, 예수님을 따른 이들, 예수님과 가까이 했던 이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의 약함은 약함이 아니었습니다. 끝내 회개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스카리옷 유다를 빼고는, 나머지 사도들은 예수님 부활과 성령체험의 힘으로 끝까지 사도로서의 삶을 살아냈습니다. 부족함이 많은 우리들,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고, 또한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부르심에 "예!" 라고 응답했습니다. 그러니 말과 행동으로, 예수님의 뒤를 잘 따라가는 제자, 하느님의 나라와 복음을 잘 전하는 사도가 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 성자와 성자께서는 이 시간 함께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
<연중 제2주간 토요일>(1.21) -일치 주간-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마르3,21) '가짜뉴스!'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온 이유는, 예수님께서 미쳤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미쳤다는 것은 나쁜 영에 이끌려 행동하는 것을 말하는데, 누가 그런 소문을 냈을까? 분명 예수님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 예수님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던 사람들, 예수님을 낙마시키고 싶었던 사람들, 곧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과 같은 사람들이 그런 소문을 내지 않았을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들어서 예수님과 그 일행들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는데도, 예수님에 대해 나쁜 소문을 내고 다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아가지도 않으면서 그런 소문을 퍼뜨리고 다닙니다. 요즘 우리 안에서 자주 회자되고 있는 것이 '가짜뉴스'입니다. 가짜뉴스들을 보면 어떻게 해서라도 너를 무너뜨리거나 특정의 이익을 위한 목적으로, 진실(팩트)은 숨겨놓은 채 부정적이거나 악의적인 것으로 조작된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에 관한 소문(가짜뉴스)을 듣고 예수님을 붙잡으러 온 것처럼, 우리도 종종 그런 가짜뉴스에 현혹되어 잘못된 생각과 말과 행위들을 쏟아내곤 합니다. 진실을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가짜뉴스(소문)에 휩쓸려 다니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라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진실과 정의를 찾고 그것을 쫓아다니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이 많아진 공동체와 세상을 바라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가짜뉴스에 현혹되거나 소문을 따라다니지 말고, 언제나 진실과 정의를 쫓아다니는 예수님을 닮은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 성자와 성자께서는 이 시간 함께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
↕ 화상입었을 때와, 목에 이물질이 걸렸을때 응급처치 요령 • 기적의 이 화상치료 방법을 기억하십시요. 소방관 초심자 자습서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잔디 농약을 살포하던 젊은 남성이 농약 통안에 남은 농약을 살펴보기 위해 뚜껑을 열고 라이터 불을 켜는 순간 농약 유증기에 불이 붙어 그를 집어 삼켰다, 그는 트럭에서 뛰어내리며 비명을 질렀다. 그때 이웃집 여자가 그의 집에 달려 와서 빨리 달걀 좀 갖다주세요! 라고 소리쳤다. 그녀는 달걀을 깨고 흰자의 단백질을 분리해서 화상을 입은 젊은이의 얼굴에 달걀 흰자를 발라줬다. 구급차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구호요원들은 젊은이의 상황을 보았고, 누가 이렇게 처치했는지 물었다. 모두들 말하건대, 이웃집의 숙녀라고 말했다. 구급차 구호요원들은 축하의 말을 전하며 당신이 그의 얼굴을 구했다고 말했다. 지난 여름이 끝날 무렵, 그 젊은이는 이웃 여자에게 장미꽃 한 송이를 전하면서 감사를 표하였다. 그의 얼굴은 아기의 피부처럼 잘 아물었다. ➡️끓는 물에 손을 데인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고통을 참으며 수도꼭지를 틀고 찬물로 계속 자신의 손을 헹군 뒤, 2개의 달걀 흰자를 분리해 자신의 손에 "흰자 단백질"을 발랐다. 흰자 단백질이 건조되면 보호층이 형성된다. 달걀 흰자는 천연 콜라겐으로 달걀 흰자 층은 피부 보호에 응용할 수 있다. 오후가 되자 그녀는 더 이상 아무런 통증을 느끼지 못 했고, 다음날에는 일말의 화상의 흔적도 거의 없었다. 10일 후 그녀의 피부는 정상의 색을 되찾았다. ➡️친구 한 명과 함께 식사를 했다. 친구가 실수로 생선가시가 걸려 목이 메었다. "그래서 손을 들어보라고 제안하자! 생선가시는 정말 쉽게 뱉어냈다. ➡️사물이 목에 걸리면 손을 들어 올려라! 젤리 한 조각이 목구멍에 걸렸고, 그녀는 복부를 자구책으로 쥐어짜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어 말을 잇지 못 했다. 양손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더니 젤리를 정말 뱉어냈다. ➡️왼발에 쥐가 나면 오른손을 들고, 오른발에 쥐가 날 때 왼손을 드는 등, 발에 난 쥐를 예방할 수 있는 응급처치가 가능하다면, 여러 번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손을 드는 것은 생명의 수단이다."' ➡️심근경색에 더 유용하다. 이 수는 가슴이 답답하고 협심증에도 효과적이다! ➡️한 친구가 도로를 걷다가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아팠을 때, 의도치 않게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늘을 우러러 "아, 나 죽을 것 같아~"했더니, 결국 쿵 하고 숨을 내쉬었다! 가까스로 구급차가 달려오니, 그는 이미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예외라고 생각 마시고, 간단한 상식이지만 기억해 두었다가 응급 시 적절하게 활용해 보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건강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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