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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은혜/대림성탄

(2021년 대림 제3주일) 늘 기뻐하십시오 Rejoice all the time

2021년 대림 제3주일

                                                                 
                                              늘 기뻐하십시오

                                             Rejoice all the time
 
                                             - 칸탈라메사 추기경 -

1독서: 스바 3:14-18
2독서: 필리 4:4-7
복음: 루카 3:10-18

대림 제3주일에는 기쁨이라는 주제로 가득합니다. 이 날은 전통적으로 '라이타리 주일(Laetare Sunday)', '환희(기쁨) 주일(Rejoice Sunday)'이라고 불리며, 오늘의 제2독서의 바오로의 말씀인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에서 유래된 이름입니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리 4:4).’

하느님께서는 녹색 실로 처음부터 끝까지 엮으신 것과 같이 눈물과 고통으로 가득 찬 인류 역사를 행복한 소식들과 함께 엮어내셨습니다. 이 역사 안에 가장 중요한 구성 요소는 민족으로서, 모든 민족들 중에 빛과 기쁨의 약속을 받은 민족이 입니다.

예수님 이전 시대에는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첫 번째 독서에서 우리는 선택된 민족들에게 그들의 사명을 상기시키고 희망과 용기를 다시 일깨우려고 노력하는 스바니야 예언자의 말을 듣습니다.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기뻐하며 외치고 환호하고 즐거워하십시오. 화답송의 시편을 통하여 이 기쁨은 다양한 말로 더욱 풍성해졌습니다.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시온 주민들아, 소리 높여 환호하여라(이사 12:3, 6).’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에는 만민 중에 이 기쁨의 표징이 된 민족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천사가 새로운 '시온의 딸'이 된 마리아에게 첫 번째로 건넨 말은 '기뻐하여라, 은총이 가득한 이여'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 제2독서에서) 들은 대로 바오로 사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내려진 그 (기쁨의) 초대를 전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오늘은 이 말씀을 묵상해 봅시다(이는 지난 주일 세례자 요한이 전한 말씀과 연결됩니다). 이탈리아 시인 자코모 레오파르디(Giacomo Leopardi)마을의 토요일 밤(Saturday Night in the Village)’에서도 같은 생각을 전하였습니다. 우리의 지금의 삶은 희망으로 기다리기에 가능하고 온전한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마치 토요일의 기쁨과 같습니다. 이것만이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한 최고의 날들입니다. 희망으로 가득하기에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축제를 기다리는 것이 축제 그 자체보다도 낫습니다. 유한한 재화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닳아버리기에 이를 소유하는 것은 환멸과 지루함을 줄 뿐입니다. 희망하는 것만이 살아있는 기쁨을 줍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기쁨과 같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끝이 없는 일요일에 대한 서곡으로서의 토요일의 기쁨, 전례적 의미로는 바로 대림의 기쁨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이 희망 속에 기뻐(로마 12:12)’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기쁨의 희망(죽음 이후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만이 아니고 (현세의 삶에서) 희망 속에 기뻐해야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희망이 정말로 기쁨을 경험하기에 충분한 조건입니까? 아닙니다. 다른 신학적 미덕이 필요합니다. 사랑,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틴 성인이 말했듯이 모든 존재는 중력과도 같이 작용하는 사랑으로 자신의 안식과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곳이 어디라는 것을 알고 그 자리로 가려고 합니다. 기쁨은 하느님의 피조물이며 이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그 자리로 가고자 하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 안에 안식을 얻을 때까지는 평화를 얻지 못합니다. 당신께서는 우리를 당신 안에 만드셨고, 그렇기에 우리는 당신 안에 머물지 않으면 안식을 얻지 못합니다(성 아우구스틴, 고백록).”

그러므로 사랑은 모든 표현의 중심이며, 진정한 기쁨의 전달자입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사람만이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지 압니다. 그래서 성경은 기쁨은 성령의 열매이며(갈라 5:22)’, ‘하느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누리는 기쁨(로마 14:17)’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은 의인화된 사랑이며 성령이 머무는 곳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에서도 만민은 형제가 되노라, 주님의 부드러운 날개가 머무르는 곳에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권능을 부여받은 날개는 성령이신 비둘기의 날개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쯤에서 저는 기쁨이라는 단어를 모르고, 이에서 너무 멀어져있고, 이에 대해 논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 보고자 합니다. 저는 우리 사회에 그 어느 때보다 우울증, 신경 쇠약 그리고 그 유사한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의 첫 번째 독서에서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록된 말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낙담하지 마라)!’

슬픔이나 낙담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반격하십시오! 이런 경우 가장 좋은 치료법은, 가장 효과적이고 안전한 항우울제는 바로 오늘 우리가 이야기한 희망입니다. 앞을 내다보십시오 그리고 이 어두운 터널에 끝이 있음을 믿으십시오.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울 때, 땅이나 앞바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멀리 봐야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느 날 밀라노 인근의 영국 전쟁 묘지 사이를 거닐며 읽었던 비문이 기억납니다. ‘전쟁 뒤에는 평화가 따를 것이고, 밤은 낮으로 끝날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그 상황에 있었던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공정한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도 밤은 낮이 찾아옴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죽음 후의 부활만이 온전한 기쁨의 순간이라고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 희망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실질적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도록 합시다. 사실 사도는 단순히 기뻐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구원받은 공동체가 어떻게 기쁨을 증거하고 믿음을 보여줄 수 있는지,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우리가 친절로 번역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자비롭고,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사랑스럽고, 관대하고, 그리고 환대하는 것까지 많은 가치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부드러움으로 번역할 수도 있겠습니다. 우선 이 덕의 인간적 가치를 재발견할 필요가 있습니다. 친절은 위기에 처한 미덕으로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멸종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영화와 텔레비전의 불필요한 폭력, 노골적으로 사용하는 저속한 언어, 한계를 넘어선 경쟁으로 인한 잔혹성은 우리를 추함과 천박함의 표현에 길들이고 있습니다.

인간 관계에서의 친절은 위로가 됩니다. 가정 생활은 훨씬 즐거웠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만약 몸짓과 말과 진심어린 마음이 조금만 더 친절했다면 말입니다. 거침은 함께 있음으로 인한 기쁨을 소멸시켜버립니다. 성경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부드러운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히고 불쾌한 말은 화를 돋운다. 온유한 혀는 생명의 나무이다(잠언 15:1.4).’ ‘부드러운 말씨는 친구들을 많게 하고 우아한 말은 정중한 인사를 많이 받게 한다.(집회 6:5).’ 친절한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좋아하고 존경합니다. ‘()는 얼마나 친절한가!’는 그들이 떠나고 가장 먼저 듣게 되는 말일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적 가치와 더불어 단순한 공손과 예의의 문제가 아닌 친절의 복음적 가치에 대해 재발견해야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온순하다온유하다정복하다’, ‘순종하다와 같은 수동적인 의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친절하고 다른 이들에게 자비로운 것과 같이 능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온유한 자에겐 복이 있으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온유에 대해 찬양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온유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는 나에게서 배우십시오라고 말씀하시면서 온유함을 언급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친절), 선의, 성실, 온유, 절제(갈라 5:22)이라고 말할 때에도 성령의 열매 가운데 친절을 언급하였습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도 친절은 사랑의 특성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친절)가 의로운 분노를 막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 또한 부드럽게 하여 당신이 침착하고 공정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그들의 감수성과 존엄성을 통하여 우리가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인식하고 우리가 우월하다고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하는 표징이 됩니다.

친절은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발견하도록 돕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훨씬 더 중요한 가치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라고 권고했지만, 또한 온유하고 공손하게 대답하십시오(1베드 3:16)’고 덧붙였습니다. 바로 친절을 말한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기쁨을 증거하는 데 가장 단순하고도 쉬운 방법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이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공동체의 것이라고 한다면 그 누구도 스스로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뻐하라'라는 명령은 기쁨을 퍼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군가에게 미소를 지을 때, 완전히 건강하고 좋은 기분이 될 때까지 기다리면 안 됩니다. 집중하여 긍정적인 것들과 기쁨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기쁨을 뒤로하고 다른 이들과 걱정과 슬픔만을 나눌 수는 없습니다. ‘잘 지내세요?’ ‘어떻게 지내세요?’라는 질문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항상 끔찍합니다라고 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활짝 웃는 얼굴이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대게 방어적인 표정을 짓곤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그 시대에 이웃 민족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도전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어 너희가 기뻐하는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게 해 보아라(이사 66:5).’ 믿지 않거나 아직 기쁨을 찾고 있는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에게 똑같은 말을 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어 너희가 기뻐하는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게 해 보아라.’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만 있다면, 세상에 우리의 기쁨을 보이도록 노력해 봅시다.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먼저 말입니다.
 
<대림 제3주일>(12.12) -자선 주일-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3,10)
오늘 복음(루카3,10-18)은 주님의 오심에 앞서 파견된 '세례자 요한의 설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군중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루카3,7-8)
세례자 요한의 이 말을 듣고 군중이 그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합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카3,11)
'대림 제3주일'인 오늘은 '자선 주일'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아니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너와 함께 나누는 주일입니다. 나눔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주일입니다.

'자선의 원조'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과 병자들과 죄인들에게 당신의 전부를 내어 놓으셨습니다.
대림시기에 우리는 판공성사를 봅니다.
판공성사는 주님의 큰 축일을 앞두고 나의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성사입니다.

판공성사 때 어떤 죄를 고백하셨습니까?
'주일미사 빠졌다고?'
아니면 '기도를 게을리 했다고?'
그것보다 더 큰 죄가 바로 믿음이 약한 죄이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죄 아닐까요?

사랑 실천의 구체적인 모습은 '자선'입니다.
오늘도 기쁘게 나의 것을 내어 놓읍시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필리4,4-5)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12.13)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마태21,23)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의 권한을 문제 삼습니다. 그리고 그 권한을 누가 주었는지를 묻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가 아닌데 어떻게 성전에서 가르칠 수 있느냐고 따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고 물으시면서, 이에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이해타산하다가 곤경에 빠지자, "모르겠소."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도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온 것인데, 백성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보지 않고 그들의 걸림돌로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지금 여기에서 그럴 수 있습니다. 자기가 만들어 놓았거나, 자기가 알고 있는 틀 안에 갇혀 있으면, 유다인들처럼 율법이라는 형식의 틀에만 갇혀 있으면, 다양한 형상이나 표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을 알아보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합니다.

우리의 눈, 보이는 것 그 너머의 것을 볼 수 있는 우리의 '영적인 눈'이 열려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성녀 루치아 축일'입니다.
영명축일을 맞이한 모든 자매님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루치아(Lucia)는 '빛' 또는 '광명'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영적인 눈이 열려, 삶의 자리에서 주님을 만나고, '그리스도의 빛(광명)'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울고모님 ------그리스도의
빛안에서살아
가요.^~^♡♡♡
저----네 루치아 성녀의 도움으로 영적인 눈이열려 삶의 자리에서 주님을 만나고 그리스도의 빛안에서 살아가는 은총의 삶이 되면 자암 좋겠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기념일>(12.14)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21,31)
'회개!'
오늘은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분들과 주보 축일을 맞이한 가르멜 수도회 가족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가르멜 수도회를 개혁하신 분인데, 개혁에 따른 큰 고통도 따랐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수도회 개혁에 반감을 품고 있었던 수도원 원장에 의해 9개월 동안 감옥에 갇혔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투옥이라는 고통을 통해 하느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 은혜를 노래한 것이 '어둔 밤'이라는 시인데, '하느님과의 완전한 합일'을 이루는데 있어 '영혼이 걸어가는 길'을 말하고 있습니다.

삶의 자리에서 짊어져야만 하는 나의 십자가!
너와의 관계 안에서 만나게 되는 고통과 시련!
이것이 바로 '어둔밤이며,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는 그가 쓴 '영적 찬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영혼이 고통에다 위로와 열망을 두지 않거나 또는 여러 겹으로 된 고통의 숲 속을 거치지 않고서는, 여러 겹으로 된 하느님 보화의 울창함과 지혜에 결코 이르지 못함을 우리가 단 한 번 결정적으로 깨달았으면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역설'입니다.
죽어야 살 수 있다는 역설,
십자가와 고통이 하느님을 만나게 해 주는 도구라는 역설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 너를 위해 죽는 것,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인 '두 아들의 비유'(마태21,28-32)에서 맏아들처럼 우리도 처음에는 "싫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나의 마음이 맏아들처럼 바뀌였으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
♥~ 모자를 쓰는 것은
보약이다~♥

'모자를 쓰는 것이
큰 보약( 補藥)이다.' 라는 속설과 목도리의 중요성!

모자와 목도리 중 하나만 고르라면,
목도리가 우선입니다.

겨울철엔 모자를
꼭 쓰느 것이 좋다고 합니다.
강추위엔 "모자보다 목도리가 우선!"
이고,
호흡기에 가까워서
특히 청결해야 합니다.
강추위가 몰아칠때
집 밖으로 나서려면
모자, 목도리, 장갑, 귀마개, 마스크를 고루
갖추는 것이 좋습니다.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건강 전문가들은
첫째 목도리,
둘째 장갑이라고 말합니다.

경희의료원
신경과 윤성상 교수는
"모자와 목도리 중 하나만 고르라면 목도리가 우선!”
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는 “아주 추울때 밖으로 나가면 ‘머리가 시리다’며,
외부 공기에 노출된 머리를 가장 먼저 보호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뇌 부위는 자율 조절 능력이 상대적으로 좋은 반면,
목은 체온조절 능력이 떨어지므로 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목이 보온에
특히 중요한 것은 이 부위가 추위에 민감할 뿐 아니라, 이곳에는 뇌로 올라가는 굵은 혈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혈관이 수축되면
뇌에 혈액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노약자의 경우
뇌중풍 같은 치명적
위험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외부의 강추위에
머리가 아픈 증세를 느낀다면 뇌중풍 (뇌졸중 : 뇌출혈이나 뇌경색)의 경고신호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럴때는 곧바로 실내로 들어와 방한 장비를 갖추거나 아예 실내에 머물러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합니다.

날씨가 많이 춥습니다
목도리, 모자, 장갑을 잘 챙기시고 외출하세요.
제목 <대림 제3주간 수요일>
<대림 제3주간 수요일>(12.15)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루카7,23)
'예수가 메시아인가?'
'이 물음'은 예수님께서 오셨을 당시 '메시아 사상'에 깊이 빠져 있었던 유다인들에게 던져진 '가장 큰 화두'였습니다.
유다인들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스라엘의 불행의 역사를 끊어내고 자신들을 구원해 줄 강한 '메시아(Messiah), 곧 구세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에 앞서 파견된 세례자 요한, 헤로데의 불의를 지적하다가 감옥에 갇혀 있었던 세례자 요한에게도 '이 물음'은 큰 화두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을 불러 예수님께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여쭙게 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루카7,1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십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루카7,22)
이어서 당신께서 행하신 많은 이적(기적)사화들을 언급하시면서,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자는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메시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의 히브리어로, '구세주.구원자.해방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실 때,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셨다."(루카4,18)라는 말씀으로, '예수님 당신 자신이 곧 메시아이신 구세주이심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은 나의 메시아이신가?
나의 힘듦과 고통에서 나를 해방시켜 줄 구세주이신가?

오늘 복음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심판자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러니 지금 여기에서 힘듦과 고통이 함께 할 때마다, 의심을 버리고 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갑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대림 제3주간 목요일>(12.16)

"보라,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루카7,24)
'판공성사!'
예수님께서 구약성경의 '말라기 3장 1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주님의 오심에 앞서 파견된 '선구자 세례자 요한'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다른 어떤 예언자보다도 더 중요한 인물이라고 소개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에게 주어진 소명이 주님이신 예수님의 길을 닦아놓는 소명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다른 예언자들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라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세례자 요한에게 주어진 소명은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소명에 충실했습니다.
그러자 백성과 세리와 창녀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단죄하고 심판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세례자 요한의 설교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주님의 성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한번 각자의 모습을 점검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오실 길은 잘 닦여 있는지?
주님께서 내 마음 안에서 탄생하실 수 있도록 마음의 청소는 잘 되었는지?
여전히 싸우고 있고, 용서하지 못하고 있고, 화해하지 못하고 있는 마음은 아닌지?

오늘부터 며칠 동안 근처에 있는 성당에 판공성사를 주러 갑니다. 판공성사가 단순히 하나의 율법 행위가 아니라,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잘 닦는 구원 행위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면서 잘 준비해 성사를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지만, 크나큰 자비로 너를 다시 거두어들인다. 분노가 북받쳐, 내 얼굴을 잠시 너에게서 감추었지만, 영원한 자애로 너를 가엾이 여긴다."(이사54,7-8)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12월 17일>(금)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암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1,1)
'신앙의 뿌리!'
대림시기는 전례의 성격에 따라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첫째 부분인 대림 제1주일부터 12월 16일까지의 전례는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며 기다리는 분위기가 이어집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도 깨어 기다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12월 17일부터 성탄 전야인 12월 24일까지 둘째 부분의 전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니 '12월 17일'인 오늘부터 교회는 본격적으로 '주님의 성탄'을 기다립니다.
그 첫 날인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입니다. 이 족보를 통해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시는 주님께서 '다윗의 후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시라는 것이 분명하게 선포됩니다.
아브라함에서 시작되어 다윗에 이르기까지, 다윗에서 여호야킨, 여호야킨에서 예수님으로 이어지는 이 족보는, 우리에게 오시는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어떤 신화적인 존재가 아니라, '역사적인 존재'이시고,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모습을 지니신 분이라는 것에 대한 선포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는 타마르와 라합과 룻과 우리야의 아내 등 네 명의 '이방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유다인들을 뛰어넘어 모든 이방인들에게도 열려 있다는 것에 대한 선포입니다.
모두의 구원을 위해 오시는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고 아브라함의 후손이신 예수님의 뿌리를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나의 뿌리에 대해서도 함께 묵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각자가 '나의 신앙의 뿌리(족보)'에 대해 생각해보고, 예수님을 알게 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를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

<12월 18일>(토)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1,20)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오늘 복음(마태1,18-24)은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당시 풍속은 혼인하기에 앞서 보통 일 년 동안 약혼 기간을 두었는데, 이 기간에는 각자 자기 집에서 지내고, 육체적 관계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마리아가 잉태하여 아기를 가지게 됩니다.
요셉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커다란 배신과 분노의 마음이지 않았을까?

요셉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
이 때 주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주님께서 천사를 요셉에게 보냅니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이어서 '잉태된 아기는 육체적 관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그 아기의 이름은 예수이며,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를 맞아들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에게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게 되고, 요셉은 주님의 양아버지가 됩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좋은 일일 수도 있고, 나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처한 경우처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을 어떻게 바라보면 좋을까?
보여지는 것이 전부가 아닌, 보여지는 것 안에 주님께서도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
아녜스!대림특강
김혜원수녀님의강의가영성믜핵심을일깨워주셔요.평화방송에서유투브에도떠요.
그리고 대림환만드것도전통있는 유럽에서는꽃이나 아름답게장식하지않아요.촛불4개의상징은4천년고대했음을상징하며 푸른가지는교회의생명력의상징입니다.매해대림환을하시면좋아요.
Metanoia(회개)는인식의지평이확대되는것이라고~~
하느님을더많이알게되는것.
대림시기는은총의때이니 아녜스는잘하고계셔요.사랑합니다.

-----네 고모님!!!
용기내어 주님께 더 다가가는 크나큰 회개의 눈물로 엮어서 묵주알 꽃이 피는 아름다운. 성탄이 되면 참 좋겠습니다.
울 고모님. 싸랑합니다 .

----구원이란 무엇일까요?
구원 :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는 곳에서 건져내고 또 살려내어 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구원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진정으로 건져내고
살려내어 주시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구원해 주시려는 하느님께서는
왜 인간이 되려고 하셨으며
고통당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하여 그들은 모두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6)*****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 -진정성

선과 악은 늘 함께 공존 빛의완성인 성탄 ---악이끼여있음-악이완연할때 선과빛이 훨씬 더많이 강화하는것 싸우지말고 선을 훨씬 더 행하는 것              혼자이고 배신당하는 것 같은 상실과 힘듬- ****하느님만이 내편 **** 아무도 도움이 되지 않았을때  그때야 제정신이 드는것

삶에서 가장 중요한것 -신앙  하느님은 진정한 사랑의 모습 보여주는 것을 아는것   하느님 아빠께서 사랑을 주신것 을 알아드리는것 증거하고 모범을 보이는것 하느님께서 살아계신다는것 

영성 -모든것이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있고 하느님의 역사안에서 우리가 함께 걸어가고 있고 함께 더불어 실질적으로 사는것 이미 함께 하십니다 은총속에서 더할 나위없는 은총과 축복속에서 살아가는 삶